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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스크랩] 제1장 상고사의 쟁점 - (3) 사마천의 사기 - 사. 조선열전

사. 조선열전

1.연나라 태자 단(丹)의 군사가 진나라 군사에게 쫓겨 요하(遼河: 북경남쪽 영정하)근처에서 어지러이 흩어진 뒤 위만(衛滿)은 뿔뿔히 흩어져 망명한 백성을 거두어 해동(海東: 요해의 동쪽 즉 영정하 북동쪽) 즉 조선에 집결시켜 진번국(眞番國)을 병합하고 국경을 확보하면서 한나라의 외신국(外臣國)이 되었다.
조선왕 위만은 본시 연나라 사람이다. 연나라는 그 전성기에 진번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 이 땅에 관리를 두고 요새를 쌓았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킨 뒤로는 조선은 요동군(遼東郡)의 국경 밖에서 가까운 외지(外地)로 간주했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조선은 멀어서 지키기 어려워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축하고 패수(浿水: 북경 북쪽의 백하)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속하게 했다.
연나라 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하자 위
만도 연나라에서 망명하여 1천여명의 무리를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을 입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요새 밖으로 나가 패수(백하)를 건너서 진나라 때의 공지였던 땅(백하~계하: 백하와 沙河사이)을 근거로 하고 한나라의 요새부근을 왕래하면서 점차로 진번조선의 만이(蠻夷) 및 그 전에 연나라와 제나라에서 망명한 자들을 밑에 거느리고 조선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왕험성(王險城)에 도읍했다.

 

※①여기의 요동은 북경을 y자형으로 감아돌아 천진으로 흐르는 영정하에서 난하 사이를 말하고 그 가운데 지금의 계(薊)가 있다. 그러므로 이때의 패수는 바로 백하이다.
②요새 밖으로 나가 패수를 건너서: 패수 강언덕에 요새가 있으니 요새를 나가서 바로 강을 건너는 것을 말한다.
③여기서는 위만이 기준을 습격한 일을 숨기고 있다. 또 도성이 왕검성이 아니라 왕험성이다. 사마천은 호수, 사막, 대륙(안휘성, 강소성, 산동성 전체를 東海라고 썼다: 항우본기)바다 등을 모두 바다 해(海)자로 썼으므로 한국사람들이 한문해석상 바다라고만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 많다. 중국사람들의 한문사용은 한국사람들처럼 순수하고 순진하지 않았다. 요하를 요해라고도 한다. 여기의 해동은 중국대륙의 북동쪽 또는 요하의 동쪽을 말한다.
④진번조선; 난하에서 현재의 요하 중류까지이다.


2. 위만은 무력과 재력을 갖게되어 근방의 소읍(小邑)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 진번, 임둔(臨屯)도 자진해서 복속하여 위만의 영역은 사방 수천리에 미쳤다. 손자 우거때에 이르자 조선으로 망명해 오는 한나라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또 조선은 일찍이 입조하여 천자를 뵈온적이 없어서 진번  인근의 여러 나라에서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 싶다고 했지만 우거가 저지하여 한나라에는 통하지 않았다.

 

※한나라가 천하통일을 했지만 아직 조선은 한나라를 정식으로 받들지 않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본국조선의 제후국이니 물론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일시적인 화친정책으로 번국(변두리에 있는 작은 나라)역할을 할 수는 있다.


3. 한무제 원봉2년 한나라는 섭하를 파견하여 귀순할 것을 말했지만 듣지 않았다. 섭하가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가면서 패수(백하)가에서 조선의 비왕을 죽였다. 그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을 시켜 제나라에서(주로 제나라 군사) 발해로 배를 띄우게 했는데 병력은 5만이었다.
한편 좌장군 순체를 시켜 요동으로 출격하여(대나라, 연나라 지역의 군사) 우거를 공격했다.

 

※①조선이 한반도라면 왜 제나라에서 발해로 배를 띄웠다고 하여 진출 방향을 동해가 아니고 발해로 했을까?
②한나라 초기에 수 만명을 수송할 군선이 없었다. 어선을 동원해도 군사, 말, 무기, 군량미 등을 실을려면 일천여척  이상의 배가 동원되어야 하는데 당시로서는 해전(海戰)이 발달하지 못하여 불가능하다고 보여진다. 또 5만명이 머나먼 한반도에 1년내지 2년간 주둔할려면 군량조달이 대단히 어렵다.
③배를 출동시킨 것은 도성이 내륙에 있지 않고 바다와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고 퇴로나 탈출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조선은 한반도가 아니다. 


4. (우거가 두 장군 양복과 순체를 이간질 하였다.)--- 그  러나 좌장군 순체가 양복을 사로잡고 군사를 합병하여 조선을 급습하니 조선의 재상 노인, 한음, 이계의 재상 삼(參) 그리고 왕겹이 모의하여 투항했다.

5. 한무제 원봉3년(BC. 108년) 이계의 재상 삼이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했다. 그러나 왕험성은 아직도 함락되지 않았다. 본시 우거의 대신 성기(成己)가 (투항모의를)  배반하여 다시 한나라의 군리(軍吏)를 공격했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長)과 재상이었던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백성들에게 권고하여 성기를 주살케 했다. 이래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을 두었다.   
삼(參)을 봉하여 획청후(畫淸候)로 삼고 한음을 추저후(萩苴候)로 삼고 왕겹을 평주후(平州候)로 삼고 장(長)을 기후(幾候)로 삼고 최(最)는 아버지가 피살되고 꽤 공로가 컸으므로 온양후(溫陽候)로 삼았다.
좌장군은 공로를 다투고 질투하여 전략을 배반한 죄로 기시(棄市: 죽여서 저자거리에 버리는 형벌)에 처해졌다.  
누선장군도 또한 열구(列口: 뒤에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의 25현중의 하나)에 이르러 좌장군의 군사를 기다려야 했을 것을 마음대로 전진하다 많은 군사를 잃은 죄가 사형에 해당했으나 속죄하고 벌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①위만조선은 사마천이 관직에 있을 때 멸망되었고 사군을 두었다. 그런데 사마천이 쓴 고조본기, 조선열전, 흉노열전 모두 사군(四郡)이라고만 되어있고 공로훈작을 준 획청, 추저, 평주, 기, 온양 등의 봉지 이름만 나와있다.
②후한서 권85 제9에 보면 “예(濊)의 군주와 남녀(南閭)등  이 28만명을 데리고 요동에 이르러 내속(內屬: 한나라편이 됨)하니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은지 수년만에 파하고 원봉3년 조선을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낙랑, 임둔, 현토, 진번의 4군을 두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후한서는 사마천보다 약 500년 후인 송나라 때 범엽이 쓴 것을 당나라 때 주(注)를 달고 청나라 때 교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만주 땅까지 천하통일을 이룬 동북아시아의 주인이 되었으니 고구려 침략을 위해 또는 기득권 확대를 위해 역사를 수정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렇게 볼 때 후한서를 만들고 나서 후한서에 맞게 전한서 및 고조본기, 조선열전, 흉노열전에 간단히 사군을 두었다는 말을 가필했다고 본다. 이에 필자는 한사군(漢四郡) 기록은 가필 조작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지금까지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가르쳐온 한국의 역사학계는 즉시 수정하기를 바란다.
③한무제가 공로훈작을 준 획청, 추저, 평주, 기, 온양의 위치는 이름이 모두 갈려서 고증하기 어려우나 여기서 평주는 현재의 북경지역을 말한다. 현재의 북경지역은 과거에 고죽군, 북평군, 노룡군, 평주, 낙랑군 등으로 불렀다. 평주란 이름은 북연 때 쓰던 이름인데 한나라에서 그대로 쓴 것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이름들도 북경 주변 즉 현재의 요하 서쪽에 있을 것은 당연하다. 어째서 우리나라 학자들은 한사군을 한반도에 두고 식민사상을 내일의 주인이 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가? 그 저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출처 : 한밝회 : 한국상고사연구회
글쓴이 : 유완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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