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소진열전
1. 소진이 연나라 문후(文候: BC.361-333)에게 한 말;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 요동이 있고 북에는 임호(林胡), 누번(樓煩)의 두 호국(胡國)이 있고, 서쪽으로는 운중(雲中), 구원(九原)의 땅이 있고 남으로는 호타수(嘑沱水), 이수(易水)의 두 강물이 있습니다. 국토는 사방 2천리, 갑사 수십만, 전차 6백대, 군마 6천필, 곡식은 수년을 견딜수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갈석(碣石:옛날의 갈석은 지금의 위치가 아니라 연나라 남쪽이었다), 안문(鴈門)의 풍요한 물산 이 있고 북쪽으로는 대추와 밤이 나옵니다. ---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칠 경우에는 운중, 구원을 넘어 대(代), 상곡(上谷)을 통과하여 수천리의 노정을 거치지 않으면 않됩니다.”
“----우리나라는 소국이고 서쪽은 강대한 조나라와 접하고 남쪽은 제나라에 가깝다”(사기권69 열전2)
※이 글은 한나라와 조선의 싸움 이전시대인 BC.300년대에 연나라의 위치와 지리적 지식을 위해 옮긴 것이다. 확실한 것은;
①연나라 동쪽(국경 안과 밖)에 요동(영정하북쪽~ 백하 )이 있고 요동 다음에(백하북쪽에) 조선이 있다는 것이다. 이때 요동요서의 경계가 연나라 안에 있으니 훗날 위만조선의 위치는 현재의 요하 서쪽 하북성의 백하로부터 현재의 요하 중류까지이다.
② 그런데 남쪽에 갈석이 있다고 했으니 원래의 갈석(碣石)이라는 지명은 현재의 난하지역이 아니고 연나라 남쪽방향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글이다. 연나라의 도성이 북경에서 100여리 남쪽에 있었으니 갈석은 그 부근이어야 맞다. 이수나 호타하는 북경 훨씬 남쪽 하북성 중부에 있으며 여러 갈래의 강들이 천진시 남쪽에서 합쳐져 바다로 흐른다.
진나라 때는 천진에서 산동성에 이르는 발해변에 예국(濊國)이 있었는데 진나라에 항복하고 나라를 보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③연나라 문후가 서쪽은 강대한 조나라에 접해 있고 남쪽은 제나라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고 가깝다고 했으니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어떤나라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연나라 남쪽의 중산국은 산악지대이고 하북성 중남부 발해변 평야지대가 비어있는 땅인데 여기에 나라가 있었다면 조선(:밝조선: 기준조선)밖에 없다. 여기가 창해군이다.
④위만조선의 서울은 왕검성이 아니고 왕험성이다. 왕험성은 험독에 있는데 험독이란 말은 순임금 때 물이 너무나 험하여 홍수를 자주 일으키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중국의 4대강을 지칭하는 말이다. 중국의 4독은 황하, 장강, 회하, 제수를 일컫는 용어이다. 험독에 대한 중국의 해석대로라면 험독은 그 지역중에서 산세와 물이 험한 곳을 골라서 도읍 또는 치소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밝조선의 최초 험독은 BC.2333년경에 아사달시조 한검께서 치우씨에게 명하여 북경과 난하사이에 건설되었다.
이 험독은 영정하와 난하사이에 있었던 치우씨의 남국(훗날의 맥조선)에 설치되었는데 후세에는 여러 곳에 험독이 설치되었다.
⑤원래의 요동요서의 경계를 나타내는 요(遼)는 태행산 남쪽에 있는 마천령 서쪽인 산서성 탁장하(濁漳河) 상류에 있다. 맨처음, 5,500년 전에 박달나라 6세 다의발 한웅 동생인 태호 복희는 우사(雨師: 삼한: 三韓: 세 보좌왕중의 한사람)를 지내고 서쪽에 봉토를 받았는데 지혜와 능력이 탁월하여 전쟁없이 설득으로 관경을 넓혀 지금의 하남성 개봉 동남쪽의 진류에 도읍하고 중국의 임금이 되었다. 중국의 삼황(三皇)인 복희, 신농, 황제는 모두 동이족이며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은 모두 황제의 혈통으로 동이족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도 하북성 한단 태생이고 항우와 한고조도 강소성 태생이니 중국의 왕조는 모두 동이족의 혈통이다. 또 5,000년 전에 밝달나라 10세 갈고한웅이 중국과의 경계를 하남성 진류의 동쪽 즉 안휘성, 강소성, 산동성, 하북성을 우리 땅으로 확정하였는데 중국이 점차 강해져서 요임금 때는 치열한 전쟁으로 마지막 한웅인 거불단이 전쟁터에서 죽으매 시조 한검이 산동성에 있는 도성의 위치가 불안하여 만주 아사달로 옮기게 된다. 이것이 소위 속칭 단군조선이라고 부르는 아사달시대(朝國)이다. 그러나 순임금 때까지 요동요서는 큰 변동이 없었는데 후세에 동족인 은나라가 세워지면서 산동성쪽으로 흐르는 황하로 경계를 정했다가 은나라 후기에 산동성과 회대지방을 회복하고 엄국과 서국을 건설하고, 산서성 탁장하 상류에 여국(黎國)을 세우면서 탁장하가 경계의 요(遼)가 된 것이다. 주나라 문왕이 나라를 일으키면서 제일먼저 이 여국을 멸망시켰는데 그 이후 동서로는 태행산맥을 경계로 하고 남북으로는 은나라 때의 경계가 유지되다가 전국시대가 되면서 점차 줄어들어 하북성의 호타하까지 후퇴하였으며 진시황에게 밝조선이 굴복함에 따라 영정하로 후퇴하게 된 것이다.
오래된 중국지도에는 영정하 하구의 도시이름이 당고(塘沽)인데 하구이름은 당고신요(塘沽新遼)로서 새로운 요(遼)라는 이름이니 다른 곳에서 요가 이동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난하는 요(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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