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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스크랩] 제1장 상고사의 쟁점 - (3) 사마천의 사기 - 자. 흉노열전

자. 흉노열전

1. 요임금, 순임금 이전에는 (우리민족을)산융(山戎), 험윤(獫允), 혼육(渾육)이라 했다.
후에 서쪽에는 서융(西戎), 융적(戎狄), 견이지(畎夷氏:犬戎)등이 있었고 (동북에는) 산융(山戎: 北狄, 白狄, 長族등 하북성 지역)이 있었다.


※장족(長族)은 밝조선의 예국(濊國), 백적(白狄)은 백이(白夷)로서 선우(鮮于)나라다. 이들은 BC.669년경 제나라를 공격하여 산동성 임치지역에서 싸웠고 44년 후에는 연나라를 공격했다. 그후 제나라 환공이 패자가 되었을 때는 공격을 당했다. 그후 20여년이  지나서 천자국인 낙양의 주나라 양왕을 기습해서 정나라로 도망가게 하고 4년간이나 자기들 편의 왕을 옹립해서 주나라를 통치했다. 4년후 패자가 된 진(晉)나라 문공(文公)에게 패하고 낙양에서 철수했다.( 흉노열전, 춘추좌씨전 참조)


2. 농(隴) 이서에는 면제(緜諸), 곤융(緄戎: 신라조상), 적환(翟환)이 있고, 기산(岐山), 양산(梁山), 경수, 칠수(漆水: 경수, 칠수 모두 섬서성) 이북에는 의거(義渠), 대려(大荔), 오지(烏氏), 구연(朐衍)의 융(戎)이 있었다. 그리고 진(晉: 산서성)나라 북쪽에는 임호(林胡), 누번(樓煩)의 융(戎)이 있었으며 연(燕)나라 북쪽에는 동호(東胡), 산융(山戎)이 있었다.

3. 진(秦)나라 혜왕 이후 진나라는 농서, 북지, 상군을 영유케 되고 장성을 구축하여 흉노를 방비했다. 그리고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 BC.326-299)도 습속을 고쳐 호복(胡服: 승마용 흉노복)을 입고 말 위에서 궁술을 익혀 북쪽으  로 임호, 누번을 격파하고 장성을 구축하여 대(代: 산서성 북부)에서 음산산맥의 기슭을 따라 고궐(高闕)에 이르기까지 요새로 만들어 운중군, 안문군, 대군을 두었다.(음산산맥 남쪽)
그후 연나라 현장 진개(秦開)가 흉노에 볼모가 되었는데 흉노에서는 그를 매우 신용하였다. 진개가 귀국하자 동호(東胡)를 격파하여 패주 시켰다. 이때 동호는 1천여리나 퇴각했다. 연나라는 장성을 구축하여 조양(造陽: 찰합이성 懷來縣서쪽)에서 양평(襄平: 하북성 북쪽 창평: 훗날 왕망(王莽)이 양평을 창평으로 개명했음)에 이르고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천진-산동성), 요동군(遼東郡: 영정하 북쪽지역)을 두어 흉노에 대비했다. 


※①여기서는 연나라 동북의 막조선(옛 맑한=마한땅: 지금  의 요하서부- 서요하 일대-하북성 북부지역)을 흉노나 동호로 써서 우리의 나라이름을 감추고 있다. 바로 함정이다.
②진개가 조선을 공격하여 요서군과 요동군을 두었으니 그 전에는 발해만쪽의 하북성지역이 모두 밝조선(奇首朝亙) 땅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③그 이전에 동호 즉 원고구려는 음산으로부터 조양까지 사실상 후퇴했는데 진개의 침략으로 내몽고지역으로 1천여리를 후퇴하였으나 수십년 후부터는 국경이 영정하, 백하, 난하 사이를 전진했다 후퇴했다 하는 복잡한 시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④진시황제는 이렇게 그때까지 쌓아진 장성들을 연결하여 음산산맥까지 만리장성을 구축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완벽한 만리장성이 아니다 이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때의 동북은 북경 북쪽 지금의 창평이 연나라 장성의 끝이었다. 연나라가 더 북쪽을 점령하고 성을 쌓았다고 하드라도 일시적인 토성이며 우리 쪽에서 곧 수복하였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나라 때에 와서야 위만조선이 멸망함에 따라 현재의 만리장성 지역이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형태만 이루어졌지 장성이 현재처럼 완성된 것은 아니고 지금의 만리장성은 원나라의 침략을 받은 뒤 몽골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명나라 때 비로소 완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니까 상고사의 마지막 시기인 BC.108년 위만조선의 멸망 때 한국과 중국의 경계는 현재의 요하이다. 그러나 한나라는 난하 이북지역이 너무 멀어서 그 당시의 국력으로는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현재의 난하 즉 후세에 패수로 부르게 된 강을 경계로 삼았다. 


4. 묵특선우 때는 동호가 세력이 강성하여 천리마를 달라고 해서 주니 또 연지(선우의 후비)까지 달라고 해서 또 주었다. 교만이 더욱 심해져서 마침내 불모의 땅(사막) 1천여리를 차지하려고 하여 동쪽의 동호(東胡: 하북성과 산서성 북쪽의 서요하 일대의 조선족: 후세의 선비족)를 격파하고 동호왕을 죽이고 사람과 가축을 생포하였다. 후에 연(燕)과 대(代)를 침입했다.

5. 좌(左)자가 붙는 왕족과 장군들은 동방에 위치하며 상곡군(上谷郡: 산서성 북부) 동쪽을 (산서성과 하북성 북부) 담당하여 동방의 예맥조선(穢貉朝鮮)과 접하고 있으며 우(右)자가 붙은 왕족과 장군들은 -----.    


※4, 5번에서 보면 동호의 위치와 조선의 위치가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북부로서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BC.205년 한태위(韓太尉) 신(信)을 한왕(韓王)으로 세웠다가 BC.199년 대군(代郡)으로 옮겨 마읍(馬邑: 산서성 북  쪽)에 도읍하게 했는데 흉노가 마읍을 포위하자 이를 기화로 모반하여 한왕 신과 흉노가 태원군(太原郡: 산서성 중부 태원)을 공격하여 진양성(대군의 도성)밑으로 쇄도했다. 

7. 한무제 5년 10월 태위 노관을 연왕(燕王)으로 세웠는데(BC.202년) 연왕 노관이 모반하여 (BC.195) 수천인을 이끌고 흉노에게 투항하여 왕래하면서 상곡군 동쪽지역을 괴롭혔다.

8. 흉노(노상계육선우)는 교만하게 굴며 해마다 변경지대에 침입하여 사람과 가축을 살해 약탈하여 운중군(雲中郡: 섬서성 북쪽), 요동군(遼東郡: 북경 동북쪽)이 가장 심했으며 대군(代郡: 산서성 북쪽)에서도 1만명 이상의 피해가 있었  다.

9. 흉노가 자주 침입하여 변경에서 노략질을 했는데 어양군(漁陽郡: 북경서쪽)의 피해가 가장 심했다. 이에 장군 한안국을 어양군에 주둔케 했다.
이듬해 흉노군 2만기가 한나라 요서군(遼西郡: 북경동쪽 천진-산동성) 태수를 죽이고 2천여명을 잡아갔다. 흉노가 재차 침입하여 어양군(북경서쪽)의 군사를 깨치고 장군 한안국을 포위했는데 한안국은 1천여기의 병력으로 전멸할 뻔했는데 연나라에서 구원병이 도착하여 흉노군이 철수했다.

10. 흉노군 1만기가 대군도위(代郡都尉) 주영(朱英)을 죽이고 1천여명을 잡아갔다. 그 이듬해 흉노의 기병 1만이 상곡군으로 침입하여 수백명을 죽였다.

11. ---그 이듬해 흉노군이 우북평군(右北平郡: 북경지역), 정양군에 각각 수만기가 침입하여 1천여명을 살해 납치하고 철수했다.

12. ---원봉3년(BC.108) 한나라는 예맥조선(穢貉朝鮮)을 함락시켜 군(郡)으로 삼고 서쪽으로 주천군(감숙성)을 설치하여 흉노와 강족(羌族)과의 통로를 차단했다.


※ ① 중국인들은 아주 옛날 5천년 전부터 우리의 조상이나 나라 이름을 감추고 밝히지 않았으며 나라이름 대신 민족이나 부족이름을 사용하여 야만민족이고 오랑캐로 취급했다.
사마천의 사기권38 세가8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하여 우리나라 국호를 처음으로 기록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에는 한번도 조선이란 국호를 기록하지 않고 부족의 이름만 기록했다.
묘족(苗族) , 여족(黎族), 장족(長族), 융(戎), 산융(山戎), 융적(戎狄), 북적(北狄), 백적(白狄), 이(夷), 이족(夷族), 동이(東夷), 호(胡), 동호(東胡), 예(穢, 濊), 맥(貉, 貊, 陌), 예맥(穢貉), 진번(眞番), 등으로만 기록했는데 진시황제가 천하통일을 하고 기수조선(奇首朝亙)을 이기게 되면서부터, 무왕으로부터 900여년이 지나서, 조선(朝鮮)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나오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예맥조선(穢貉朝鮮)이나 진번조선(眞番朝鮮)등의 우리 제후국 이름만 거론하게 되었다. 기자를 조선에 봉한 것이 주(周)나라 라면 전쟁이나 사신왕래가 있었을 것이므로 조선이란 이름이 여러번 등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빼버린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중국이 우리의 예속국 내지 2등국 이었다는 것을 감추고 자기들이 천하제일이었다고 내세우기 위한 술책인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수법에 속아서 한국의 학자들은 기자(箕子)조선과 위만조선이 우리의 정통국가인 것으로 교과서에 싣고 나라의 장래를 짊어져야 할 청년들에게 식민성을 가르쳐 왔다. 빨리 수정하기를 바란다.
②흉노전에 나오는 우북평군, 어양군, 상곡군은 북경 주변지역이고 대군(代郡)은 산서성 북부인데 당시의 밝조선(번조선: 하북성지역), 막조선(현재의 요하 서쪽일대)과 국경이 붙어 있는 지역이므로 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 그리고 조선과 흉노와의 공동작전이 있었을 것이므로 한단고기의 내용도 참고해서 잘 고찰해야 할 것이다. 중국사기에 나오는 동호, 흉노, 융적 등은 우리를 가리키는 부분이 많다. 그러므로 속으면 않된다.
중국인들은 우리와의 관계에서는 자기들이 이긴 것만 쓰고 진 것은 완전히 빼버리는 수법이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가장 알기 쉬운 예를 하나들면 진시황이나 서초패왕 항우의 짧은 역사를 자기들의 역사에 기록하면서도 819년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가 세운 55년간의 제(齊)나라는 없었던 것으로 빼버렸다. 이러한 수법이 대단히 많다.

출처 : 한밝회 : 한국상고사연구회
글쓴이 : 유완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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