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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스크랩] 제1장 상고사의 쟁점 - (5) 한단고기 - 나. 북부여기

나. 북부여기

1. 해모수가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 천왕랑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須臾候 箕丕)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상하 운장을 지키게 했다.(이상 단군세기)

2. 1세 해모수 왕검 11년(BC.229)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이 영주(寧州: 요하 서쪽)를 습격하여 순사(巡使) 목원등(穆遠登)을 죽이고 크게 약탈해 갔다.

3. 해모수 왕검 19년(BC.221)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을 번조선 왕으로 봉했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했다. 연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흉노열전의 내용이 여기에 나온다. 흉노열전의 동호가 바로 조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사마천은 우리나라의 정체를 숨기는데 대단히 집착한 것 같다. 또 모든 전쟁기록에서 그 성과가 부풀려 졌기 때문에 중국의 사서를 읽을 때는 대단히 주의 해야한다. 위략(魏略)에는 동호가 아니라 조선이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4. 해모수 왕검22년(BC.219) 창해역사 여홍성이 한나라 사람 장량과 함께 진나라 왕 정(政:진시황)을 박랑사 가운데서 저격했으나 빗나가 부차를 박살냈다.

※사기권 55 세가1 및 진시황본기에는 “박랑사에서 강도 때문에 놀랐다. 자객을 못잡아 10일간 전국을 수색하도록 명령했다”고 했다.

 

5. 해모수 왕검 31년(BC.209) 진승(陳勝: 진시황에게 반기를 들어 진나라를 망하게 했다)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가 크게 어지러워 졌다. 이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백성들이 도망해서 번조선(밝조선)에 귀순하는 자들이 수만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 운장에 갈라 살게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케 했다.  (후한서 권85 의 9도 같은 내용임)

6. 해모수 왕검38년(BC.202) 연나라의 노관이 다시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서 경계선을 삼으니 패수는 곧 오늘의 난하이다.

 

※ 난하가 패수로 확정된 것은 BC.108년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킨 이후의 일이다. 노관이 연나라의 왕이었을 때는 위만조선이 멸망하지 않은 때이므로 이 기록은 후세의 착오인 것 같다.

 

7. 해모수 왕검45년(BC.195) 연나라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다. 한검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한검께서 병으로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 운장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사마천의 사기보다 자세하다)
7. 2세 모수리 왕검 원년(BC.194) 번조선 왕은 오랫동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했다. 뒤에 떠돌이 도적 떼들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8. 정미년(BC.194) 한나라 혜제 때(BC.195-188) 연나라의 추장이었던 위만(衛滿)이 은근히 서쪽 변두리 땅의 한 구석에 스며들었는데 번한(番韓: 번조선 왕)의 준(準)이 이를 맞아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바다길을 택해서 멀리 망명했다. 이로부터 삼한(三韓)의 무리는 거의 한수(漢水)의 남쪽으로 옮겨갔으나 한때에는 여러 영웅들이 요해(遼海)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계유년(BC.108년) 한나라의 무제 때에는 한나라는 군대를 움직여 우거(右渠)를 멸망시켰다. 

9. 2세모수리 왕검 2년(BC.193) 한검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요동반도)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 떼와 위만의 무리를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는 침범하지 않았다.(북부여기와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이 주변의 소국들을 침탈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고 했는데 여기의 내용은 그것에 대비케 했다는 것이다.)  

10. 3세 고해사 왕검 원년(BC.169) 정월 낙랑왕(樂浪王) 최숭(崔崇)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해모수 왕검 병  오(BC.195)년의 겨울이었다. 

※낙랑군(북경지역)과 낙랑국(한반도 평양지역)이 있고 왕험성과 왕검성이 다르다.

 

11. 3세 고해사 왕검 42년(BC.128) 한검께서 몸소 기병 1만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 떼를 남녀성(南閭城)에서 쳐부  수고 관리를 두었다.

 

※조선열전 5 - ③에 나오는 남녀(南閭)이니 북경 동쪽지역이다.

 

12. 4세 고우루 왕검 원년(BC.120) 장수를 보내 우거(번조선의 왕. 위만의 손자)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이 없었다.
        고우루 왕검 3년(BC.118)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혜성 이북 50리 땅이 우거의 땅이 되었다.
        고우루 왕검 4년(BC.117) 한검께서 장군을 보내 성을 공격했으나 석달 걸려도 이기지 못했다.
        고우루 왕검 6년(BC.115) 한검께서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혜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난하)에 이르르니 구려하(현재의 요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해 왔다.
        고우루 왕검 7년(BC.114) 목책을 좌원(坐原)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녀(南閭)에 두어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케 했다.
        고우루 왕검 13년(BC.108)한나라 유철(劉澈: 한무제)이 평나(平那)를 노략질하여 우거를 멸망시키더니(전쟁이 아닌 술수로 멸망시킨 것) 4군을 두고자 사방으로 병력  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키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하므로서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했다.
         고우루 왕검 22년(BC.99) 장수를 보내어 배천(裵川)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잡고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고우루 왕검 23년(BC.98) 가을 8월 서압록하(西鴨綠河: 현재의 요하)의 상류(요하상류)에서 한나라 도적떼  와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한나라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고두막한이 5세왕검으로 이어지고 고구려가 일어남에 따라 한나라가 만주 땅을 석권하고 한반도 평양지역까지 점령할 여지가 없다. 요하에서부터 평양까지 있었다는 한나라 장성은;
첫째 빈틈없이 연결된 성인가?
둘째 여기저기 드문드문 토막으로 된 성인가?
셋째 적 방향이 바다 쪽인지 내륙 쪽인지?
넷째 2천여리의 성을 쌓을 때 적어도 방위와 보호를 위해 10만명 이상의 군대가 동원되고 또 10만명 정도의 인부가 동원되어야 하는데 한나라가 머나먼 외지에서 그럴 능력이 있었는가? 이에 따른 군량미 조달이 쉬웠겠는가?
다섯째 그러한 성을 쌓을 때 만주지역의 나라는 안마당에 성을 쌓는데 구경만 했겠는가?
여섯째 그러한 성을 쌓아서 바닷가 좀싸라기 땅을 확보해서 한나라가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 또 얼마동안이나 소유할 수 있겠는가?
일곱째 옛날에는 항복을 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나고 돌  아 간다. 그것이 관습이었다. 한나라가 만주 땅을 이미 석권하여 복종시켰다면 한반도까지 무엇 때문에 엄청난 역사를 일으켜 성을 쌓았겠는가?
이러한 여러 가지 조사를 거쳐서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와 역사부도를 작성해야 할 것이다. 역사학자가 아니라도 군대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요하에서 한반도 평양까지 그어진 성에 대해서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다.
성을 쌓는 일은 싸워서 항복을 받고 돌아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중국의 기록들을 그대로 믿다니 천만의 말씀이다.

 

※지금까지 중국과 한국의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결론은;
①상고역사 시대의 요하, 요동, 요서, 패수, 평양은 모두 현재의 요하 서쪽에 있었다.
②기수조선(奇首朝亙: 말기의 箕詡조선)과 위만조선은 제후국가이지 정통왕조가 아니다.
③나는 한단고기도 100%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상고역사에 관한 한 한단고기를 정사로 인정해도 된다는 주장이다.

출처 : 한밝회 : 한국상고사연구회
글쓴이 : 유완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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