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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군벌지"의 연재를 끝내며 - 군벌과 중국 현대사에 대한 잡상/blog.naver.com/atena

빅토리아 시절 영국의 저명한 여류 작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중국 남부를 여행한 뒤 1899년에 쓴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을 보다(Yangtze valley and beyond : an account of journeys in China)>에서는 외국인이 본 청나라 말기의 모습을 서사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거대한 중국 대륙의 장엄한 모습, 크고 시끄러운 도시, 양쯔강을 메운 채 부지런히 오가는 정크선의 무리, 자국민에게는 사정없지만 외국인에게는 꼼짝도 못하는 지방관들, 이방인을 양귀(洋鬼)”라 부르며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현지 사람들. 그녀의 눈에 비친 그 시절 중국의 모습은 그저 미개하고 우매한 사람들이 혼돈 속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세계가 아니라 수많은 현실적 모순 속에서도 무한한 잠재성을 가지고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역동적으로 나아가는 세계였다.

19세기 말 중국 양쯔강의 모습. 비록 청은 쇠락했지만 그것이 중국의 쇠락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1842년 아편전쟁의 패배는 오랫동안 우리야말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여기던 중국의 엘리트 계층에게는 굴욕적인 것이었을지 몰라도 중국을 세계 질서에 처음으로 편입시킨 사건이기도 하다. 그동안 꼭꼭 닫혀 있던 중국의 문호는 개방되었고 구미 사회의 근대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흔히 교과서에서 나오듯 외국 상인들이 총포와 압도적인 자금력을 앞세워 중국 시장을 일방적으로 잠식해 나갔을 것이라는 관념적인 생각은 실제와는 다르다. 중국의 상인들은 빠르게 자본주의를 배웠으며 정부의 보호 아래 외국 상인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 와중에 수많은 거부들이 탄생하였다. 반면, 외국 상인들은 중국 상인들의 도움 없이는 중국의 배타적인 보호막을 뚫고 내륙으로 쉽사리 진출할 수 없었으며 무모한 투자는 막대한 손실로 이어지기 십상이었다.
 
톈진과 상하이, 한커우, 광저우 등 아편전쟁 이전에만 해도 조그만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해안가의 도시들은 개방 이후 빠르게 서구화되었으며 19세기 말에 오면 미국이나 유럽의 왠만한 도시 못지않을 정도로 발전하였다. 특히 동양의 파리라고 불리었던 상하이는 인구 수백만명에 달했으며 아시아에서는 도쿄 다음으로 큰 국제도시였다. 동남아로 진출한 화교들은 그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였고 수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미래를 찾아 배를 타고 세계 각지로 향하였다. 조정의 세수 또한 쇄국정책을 버린 뒤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1840년에 4천만냥에 불과했던 연간 세입은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1년에는 2억냥에 달했다. 이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실로 상업혁명이라 할 만하였다

1930년대 상하이의 모습. 중국의 대도시들은 어지간한 구미의 대도시에 못지 않을 만큼 발전하였다.

19세기와 20세기는 중국에게는 격동의 시대였다.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청일전쟁의 패배, 청조의 멸망과 입헌 공화국의 수립, 군벌들의 내전, 일본의 침략, 그리고 국공내전과 공산 정권의 수립. 그러나 그것은 중국의 쇠락이 아니라 새로운 번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록 글로벌 경기에 따라 종종 불황을 겪기도 했지만 중국 경제는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하였으며 동남 해안가에서 시작된 근대화의 물결은 점차 내륙 깊숙한 곳까지 전파되었다.
 
청의 멸망과 함께 군벌들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중국 내전은 온 국민을 둘로 나누어 잔혹한 상호 보복과 대량 학살이 벌어졌던 남북전쟁이나 스페인 내전, 소말리아 내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누가 중국을 통치할 것인가를 놓고 벌인 권력자들의 싸움일 뿐 이념이나 종족, 계급 투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은 그다지 파괴적이지 않았으며 피비린내 나는 유혈극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러시아 적백 내전은 훨씬 참혹하고 고통스러웠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화된 국가이지만 영토가 작고 강력한 중앙 정부가 지방을 엄격히 통제했던 조선과 달리, 지방 자치를 인정하고 권력을 일정부분 나누어주었다. 중앙의 권위에 비하여 워낙 영토가 크고 인구가 많아서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들과 지역의 존경받는 엘리트들이 혼합된 향촌 정부는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유가와 법가의 가치관에 따라 행정과 치안을 유지하였다. 따라서 중앙의 혼란이 곧 중국 전체의 혼란을 의미하지 않았다. 

국가는 세금을 거두는 것 이외에는 평소에 민중의 삶에 관여하거나 함부로 제약하는 일이 없었다. 비록 중국 농민들은 대부분 가난했지만 지배층의 사치와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온갖 명목으로 국민을 끝없이 수탈하였던 유럽이나 일본에 비하면 실제 부담은 훨씬 적은 편이었다. 중국의 가난함은 전란이나 착취 때문이 아니라 인구는 지나치게 많은데 쓸만한 땅이 적고 농업기술이 낙후되었기 때문이었다. 쓰촨성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 군벌들에 의하여 가혹한 예징(豫徵, 세금을 미리 거두는 것)이 저질러졌고 심지어 백년치에 달한 예도 있다지만 극단적인 사례일 뿐, 그 시절이라고 해서 보편적인 모습은 아니다.
    
군벌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중국사에서는 청말 민초 시대에 일어선 정치세력들을 싸잡아 군벌이라고 부르며 외세와 결탁하여 국가와 민족에 온갖 해악을 끼친 존재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관념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군벌은 다양한 계층에서 등장했으며 성격 또한 제각각이었기에 어느 한 가지로 말할 수 없다. 비록 그 중에는 무지하고 난폭한 자들도 있었지만 사대부와 관료, 상인, 해외 유학파 등 엘리트 지식인들도 많이 있었다. 이들은 민족주의 의식을 갖추고 있었고 나름대로 중국의 앞날을 고민하였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결코 사리사욕만 앞세워 외세의 주구 노릇을 하지 않았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외국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기도 하였다. 많은 군벌 지도자들이 쑨원의 중국동맹회 회원이었고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혁명에 앞장섰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그런 점에서 군벌에 대한 평가 또한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많은 군벌들은 자신의 영토 안에서 교육의 보급과 산업 진흥, 토비 척결, 빈민 구제에 나서는 등 중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이들은 민심을 잃으면 정권 또한 끝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순의 태평성대는 아니라도 중국인들의 삶은 전란이 일어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쟁은 다른 세상의 일이었으며 사람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선조 대대로의 터전에서 생업에 전념하였다. 그 중에서 야심만만하고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고향을 떠나서 더 큰 세계를 찾아 나서기도 하였다. 장제스와 마오쩌둥 역시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난 뒤,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정권을 잡자 중국은 문을 걸어 잠군 채 누구도 중국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누구도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은둔의 나라가 되었다. 국민들은 일거수일투족을 간섭받았고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구분되었다. 어떠한 자유도 없이 당에서 정해 준 스케쥴대로 그저 기계처럼 움직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따르지 않는다면 혹독한 처벌을 각오해야 했다. 또한 외세에 대한 적개심과 막연한 공포를 가지고 있던 마오쩌둥은 적으로부터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로 스탈린 식 공업화를 강행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외화가 없었기에 소련에서 최신 기계와 무기를 수입하는 비용은 농산물로 지급되었다. 통계 상으로는 중국이 빠르게 부강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국민들의 끝없는 희생과 수탈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였다. 일반 민중의 생활 수준과 식량 사정은 청나라 말기보다도 못하였다.

중국을 방문했던 서구의 언론인들은 중국인들을 푸른 개미떼라고 불렀다. 수천수만명이 천편일률적으로 푸른 옷을 입고 들판에서 똑같은 일을 똑같이 하는 모습은 마치 개미떼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길고 고통스러운 악몽은 마오쩌둥의 죽음으로 비로소 끝났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이제야 150년 전 수준으로 되돌아 간 셈이다. 마오 시절 체제의 모순과 민중의 억압적인 삶이 어떠했는지는 중국의 대작가인 위화(余華)의 <허삼관 매혈기>와 <인생活着>을 추천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광기어렸던 문혁. 마오는 봉건 잔재를 타파하고 중국을 압축 성장시킨다는 명목으로 무리한 정책을 강행하여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그가 죽은 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란 실상 그간의 실험이 실수였음을 솔직히 인정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중국인들은 굳이 겪지 않아도 될 고통만 경험한 셈이다.

1992824일 한중이 처음 수교한 이래 25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중국은 좋건 싫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너도나도 중국을 공부하자고 나서면서 시중에도 중국 관련 서적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다. 하지만 그 많은 책들 중에서도 막상 현대 중국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중국 근현대사와 관련해서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나마 신중국이 건국된 이후의 역사, 예를 들어서 해리슨 솔즈베리의 <새로운 황제들>이나 프랑크 디쾨터의 <중국 현대사 3부작>, 산케이 신문에서 나온 <마오쩌둥 비록> 등 마오쩌둥 치하에서 저질러졌던 수많은 실정들, 공산당 내부의 첨예한 권력 투쟁, 마오쩌둥이 죽은 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럼 그 앞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망한 뒤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할 때까지의 약 30년의 역사는 거의 공백에 가깝다. 신해혁명 이후의 혼란상과 공산혁명이 왜 일어났으며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게 된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할 뿐이다. 이것은 실상 마오쩌둥 한 사람의 일대기이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허구와 날조, 신화가 있다. “좁쌀과 소총만으로 장제스의 군대를 농락했다는 마오쩌둥의 영웅적인 투쟁사는 마치 동화에 나오는 의적 로빈후드의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장제스를 비롯한 군벌 정권은 모두 제국주의 열강과 결탁하여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기만 했던 매판군벌들로 치부되었다. 반면, 시안사변을 일으켜 국공합작을 결성케 한 장쉐량에 대해서는 항일 영웅이라며 높이 치켜세운다. 그가 동북역치를 한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의기였으며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싸우지 않고 물러난 것은 본의가 아니라 장제스의 부당한 지시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닐뿐더러 지극히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는 정치와 무관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근래에 와서 중국 학계 역시 마오쩌둥 정권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 나름대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도 점차 일어나고 있다. 공산당은 결코 폐허에서 중국을 재건한 것이 아니라 엄연히 구시대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평화적인 방법이 아니라 폭력으로 권력을 빼앗은 공산당으로서는 자신들이 타도한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만은 없다는 점 또한 복잡한 딜레마이다. 자칫 자기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자신들이 열강들의 침략으로 어려움에 빠진 중국을 부흥의 길로 이끈 구세주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중국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이며 공산당 정부는 자신들에게 불편한 부분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을 엄중히 처벌하여 입을 막는다. 작년 10월에는 중일전쟁 당시 영웅적으로 싸웠던 팔로군 병사들의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한 역사학자 훙전콰이(洪振快)와 그의 글을 실은 진보 성향의 잡지 염황춘추(炎黃春秋)에 유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20037월 중국을 방문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은 칭화 대학에서의 연설에서 존경하는 중국 지도자로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거론하여 논란이 일어난 바 있었다. 물론 대통령이 역사 전문가도 아닐뿐더러 국빈 방문 중에 상대에 대한 예우차원의 발언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중국 현대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지와 좁은 시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리가 아는 중국 현대사는 대부분 혁명사관이다. 이것은 한중 수교를 전후하여 중국에 대한 변변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고 이영희 교수를 비롯하여 많은 좌파 교수들이 그동안 베일에 갇혀있던 중공 정권에 환상을 가지고 마오쩌둥 투쟁사를 경쟁적으로 연구했던 결과이다. 그러나 충분한 검증과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각보다는 중국 관변학자들이 만들어내고 냉전 시기 서구 좌파 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것들을 답습한 면이 없지 않다. 조금만 생각해도 수많은 모순이 있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작년에 JTBC에서 방영했던 <차이나는 도올>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도올 김용옥 선생은 동북을 2대에 걸쳐서 통치하였던 장쭤린-장쉐량 정권을 설명하면서 소위 고구려 패러다임이라 하여 우리 역사와도 연결지으며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이라는 식으로 극찬하였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동북 정권은 일본과 결탁하여 독립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1910년대만 해도 만주를 배경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독립군이 대폭 위축되어 일부는 연해주로, 일부는 상하이로 옮겨야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그들을 굳이 실제 이상으로 호의적으로 바라볼 이유는 없을 것같다. 도올 선생은 국내 대표적인 중국통의 한 분답게 나름 신선한 관점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객관적이어야 할 역사를 개인의 감성적 시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한 시대의 역사를 혁명과 반혁명, 군벌과 반군벌이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접근은 지나친 단순화이자 정치적인 평가이다. 군벌 시대는 결코 다크 에이지가 아니었으며 공산당의 승리 또한 그저 당연한 역사적 귀결이 아니다. 그 과정에는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있었고 어쩌면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미래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청조는 꼭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까. 청조가 멸망했을 때 만주족들은 만주에서 자기들만의 민족국가를 세울 수는 없었을까. 군벌들은 왜 통일을 하지 못했을까. 반대로 분리 독립하여 주권국가를 세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중국은 어째서 오스만 제국처럼 여러개로 쪼개지지 않았나. 티벳과 신장 위구르는 독립에 실패한 반면 외몽골만 독립한 이유는. 국공합작을 강요했던 스탈린의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나. 국공합작의 결렬은 장제스의 책임인가. 공산당은 어째서 장제스를 같은 편으로 회유하지 않았나. 만약 장제스가 반공 대신 용공을 했다면 국공합작은 결렬되지 않았을까. 장제스도, 공산당도 아닌 제3의 민주 정권이 들어섰더라면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시중의 서적들은 이런 질문에 거의 대답해 주지 못한다. “혁명사관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민감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필자가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

장장 2년에 걸친 <군벌지>의 연재를 비로소 마무리 짓는다. 2015년에 <중일전쟁 : 용, 사무라이를 꺾다>를 출간한 후 거의 3년 만이다. 그저 사실을 기계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해 보고자 노력했는데 쓰고 보니 욕심을 지나치게 앞세운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부족한 점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워낙 방대한 내용이라 펼쳐놓은 이야기를 어떻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할까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번 작업이 완료되면 다음 연재는 3부작의 마지막이 될 장제스-마오쩌둥의 천하 쟁탈 하이라이트인 <국공내전>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