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초기 군국주의의 붕괴
- 메이지 유신이후 2차 대전의 패망으로 홀라당 말아먹기 직전까지 일본에는 헌법을 초월한 초헌법적 지위를 누리고 독단적으로 국가를 좌지우지한 이들이 있었다.
- 즉, 몽키킹의 모가지를 쥐고 흔들며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실체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진정한 비선실세가 존재했다는 얘기다.
-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촌동네 양아치들이 수백년을 이어져오던 막부(幕府)를 홀라당 뒤집고 아무 생각없는 뒷방 여드름쟁이 중딩을 끌어내 국가의 최고 위치에 냅다 앉혔는데, 그노마들이 “국가적 위기를 타파하고 새 시대를 여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우리는 그만 조용히 찌그러지겠소.”라고 할 리가 만무했다(그럴 리가..어떻게 오른 자린데..인조반정 때 이괄은 원래 1등 공신에서 2등으로 떨어지자 열 받아서 쿠데타까지 일으켰다... 그리고 군으로 돌아가겠다던 박 장군...거짓말하는 것도 유전되는 모양..-_-;;)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언제든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로 복귀...뻥 치시네...
- 흔히 우리 역사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반정공신(反正功臣)이 그들에게도 그렇게 탄생했고, 우리 역사와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미약한 몽키킹을 쥐고 흔들며 국가를 지네 맘대로 움직였는데, 이런 반헌법적이고 극악무도한 자들을 그들은 원로(元老..켄로)라고 불렀다(원훈(元勲)과 동일시하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조금 다르다..)
- 메이지 유신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자 1875년,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등이 모여 소위 근대국가의 기틀을 꾸몄다는데, 이때 자신들의 권력을 투사하기위해 만든 것이 바로 원로원(元老院)이었으며, 이 기관은 훗날 몽키킹 핏줄들, 번주들과 합쳐 귀족원(貴族院)이 된다(촌 동네 하급부사 나부랭이들이 졸지에 귀족..하여튼 염치라곤 개뿔도 없다..)
메이지 유신 공로자들의 권력 투사 기관인 원로원...
- 하지만 단지 원로원에 속했다고 해서 전부 원로로 대접받는 것도 아니었고, 또한 근대적 헌법을 만든다고 모인 이것들은 골 때리게도 자신들은 초법적 존재로 변질시켰다.
- 게다가 실제 원로라는 직책은 공적인 직책도 아니었고 법조문이나 행정 체계 어디를 뒤져봐도 이들에 대한 대우나 자격 등을 명문화한 것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 이같이 이상하고 야릇하며 거기다 온갖 전횡은 다 부리고 법과 체계를 초월한 이들이 실재 존재했었기에 법적 근거가 없다는 지적이 이미 1900년경부터 일본 정치계에서는 튀어나왔고(이 쉑기들은 모냐? 뭐, 그런..) 그러자 스스로를 “나란 존재는 그런 존재야!”라고 여기던 이것들은 몽키킹을 찾아가 아예 자신들을 국가의 원로로 못 박아 달라고 요구했다.
- 결국 1889년 11월, 쫄보 메이지는 일단 이토 히로부미와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에 대해 원훈으로 우대하라는 조칙을 내렸고, 이를 근거로 아들내미 다이쇼는 앞의 둘을 포함하여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에게도 원로의 지위를 부여했는데, 섬나라 인간들의 특성상, 이것들은 워낙 말장난을 잘하는 관계로 이들에게 내린 조칙 내용이 저마다 아리까리하게 달라 이게 원로로 인정한다는 것인지 아닌지 지네끼리도 말들이 많은 실정이다.
그렇게 촌동네 양아치들은 귀족과 원로가 되었다..
- 어쨌든 이후, 메이지 유신 체계가 안정화의 길로 들어서자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후세대의 실권자들이 원훈, 혹은 원로라 불리면서 이 단어는 점차 실권자를 가리키는 말로 자리 잡게 되었다.
-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졌는데, 일단 원로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권한만 따져보자면 바로 내각 총사퇴 시, 후계 총리에 대한 추천권과 내정 협의권, 즉, 국가 정책에 대해 이러 저리 참견할 수 있는 권리였다.
- 총리 추천권 회의가 초기에는 회의 등의 형식으로 열리기도 하였으며 이 회의에 원로가 모두 참여하는 것은 아니었고 원로들의 요청에 따라 전 총리와 대신 등이 참여하기도 했다.
- 또한 내정에 대해 협의하고 의견을 말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메이지 초기에는 이노마들이 곧 국가였으므로 영일 동맹 체결, 러일 전쟁 개전 등 굵직한 사항들은 죄다 이들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일 동맹 체결, 러일 전쟁 개전 등 굵직한 사항들은 죄다 원로들이...
- 하지만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삔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분노의 총탄을 맞고 나자빠지자 이제 원로 중의 원로, 실제 중에 진정한 실세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되었고 당연히 그는 이런 원로의 권한을 마음껏 사용했다.
- 총리 추천권에 의한 그의 전횡은 이토가 죽고 난 이후 임명된 총리들 전부가 그의 뜻에 따라 추천된 것만 보아도 잘 드러나며, 야마가타가 그렇게 공을 들이던 육군 2개 사단 증설 문제 또한 그가 추천한 오쿠마 시게노부를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 하지만 그 직후, 그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영 다르게 국정 방향이 굴러가는 낌새가 서서히 보이다가 기어코 뚜껑이 홀라당 열리는 일이 발생하고야 만다.
이토가 뒈지자 신나게 끗발 날렸는데 이때부터 뭔가 이상해진다...
- 특히 야마가타는 오쿠마 내각의 외교 정책에 엄청나게 짜증이 났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고 지 맘대로 정책을 결정했다는 것이었다(아놔~~ -_-;;)
- 대표적인 것이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자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한 것이라던지, 중국에다 대고 그 악명 높은 “21개조 요구”를 들이민 것으로 이런 독단적인 판단이 결국 야마가타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우리말 잘 듣고, 돈 되는 건 다 내놓고, 걍 식민지로 살아라..대중 21개조 요구..
- 당시 오쿠마 내각의 외무대신은 일본의 유력 정당인 입헌 동지회(立憲同志会)의 당수, 가토 타카아키(加藤高明)였는데 이 인간이 내세운 주요 정책 중 하나가 원로 정치 타파와 선거권 확대였기에 카토는 당연히 야마가타 같은 원로들를 무시하고 강경한 외교를 주장, 오쿠마 총리를 통해 진행시켰다.
- 하지만 오쿠마가 국내외 정책에 막히면서 야마가타 같은 실세의 지지도 잃고 끝내는 사퇴 의사를 굳히게 되는 상황이 되자, 그는 당연히 자신의 뒤를 이를 총리로 오랜 정치적 동지에다 원내 제 1 당 대표인 카토를 추천했다.
- 그렇지만 오쿠마에겐 뒤통수를 맞고 카토는 예전부터 눈 밖에 난 인물이었기에 야마가타가 이를 호락호락 받아줄 리가 만무했다.
- 그는 후임총리를 추천하기 위해 소집된 원로 회의에서 “세계 대전이란 중요한 시기이기에 반드시 거국일치 내각이 필요하다. 따라서 원내 제 1 당의 당수를 총리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주장하였고 결국 그가 내세운 거국일치 내각의 총리는 바로 택도 아닌 단순무식의 화신, 데라우치였다(-_-;;;;;;)
두둥~~ 거국내각 구성하자고 들이민 인물..할말없음..-_-;;;
- 데라우치 내각은 야마가타를 중심으로한 조슈 파벌에게 있어서는 가쓰라 다로 내각 이후 3년 반 만에 순수 지역 기반의 파벌 중심 똘마니 내각의 탄생이라는 쾌거를 이루었지만 그가 과연 총리에 어울릴만한 그릇이었나? 하는 것이 문제로 남았다.
- 하지만 그릇 크기를 떠나 데라우치는 야마가타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고 그것만이 중요했으며, 그의 총리 취임은 개인의 능력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직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며, 야마가타만을 위한 충성심에서 발현된 것이었다.
- 오죽하면 데라우치의 육군 대신 재임 기간은 무려 10년 가까이에 이르렀는데 지금처럼 장관이 심심하면 바뀌는 시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도 이런 경우는 데라우치가 유일하였고, 그가 그토록 오랜 기간을 육군 대신 자리에 앉아있었기에 “조슈파의 동의 없이 육군은 출동하지 않는다.”라던지 “조슈의 육군”이라는 말이 당시 일본 내에서는 거의 기정사실화 되었다.
- 어쨌든 1910년 10월에는 야마가타의 힘찬 푸쉬로 육군 대신을 겸한 초대 조선 총독으로까지 부임한 데라우치는 헌병 중심의 무단 정치를 자행하며 스스로를 조선의 왕이라 부를 만큼 골 때리는 인간이었는데, 그는 식민지 조선 전체에 헌병대를 두고, 오지 같은 곳까지 헌병 주재소를 설치, 그야말로 개미 한 마리 기어 나올 수 없을 정도의 헌병 감시망을 깔았다.
- 오죽하면 당시 일본 내에 발행된 신문에서조차 “조선에서 혼자 잘난 것은 데라우치뿐, 불평을 말하지 않는 것은 산과 숲과 강뿐이다.”란 기사가 게재되기도 하였다.
이 무식한 양아치 쉑기는 식민지 조선에서 무단 헌병 정치를 단행했고 이를 자랑으로 삼았다..
- 어쨌든 이런 양아치 짓거리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야마가타의 추천으로 총리라는 어마어마한 자리에 오른 데라우치는 이후 택도 아닌 시베리아 침공에 따른 여파로 발생한, “쌀 폭동”의 혼란과 직면하게 된다.
- 약 50일간에 걸친 일련의 이 쌩 난리판은 전국적으로 총 369개 지역에서 벌어졌으며 참가자의 규모는 수백만 명에 달하였고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10만 명 이상의 군경 병력이 투입되었다.
- 이와 연관되어 검거된 인원만도 25,000명을 넘었으며 7,786명이 기소되어 무기 징역이 12명,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은 인원도 59명에 달했는데, 황당한 것은 먹고 살자며 벌어진 이 민중 소요는 전혀 조직적이지도 않았고 지도자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와카야마(和歌山) 현에서는 일부 민중을 선동했다는 죄로 2명이 지목되며 사형 판결을 받기도 하였다.
- 이제 언론과 여론의 뭇매를 두들겨 맞기 시작한 데라우치는 당연히 이를 수습할 만한 그릇이 못되었고 게다가 겉으로만 센 척 하는 인간들의 특징, 즉, 맷집은 무르기 그지없어서 결국 야마가타에게 기어가서는 총리자리 사임을 읍소했다.
- 왜 일국의 총리가 몽키킹을 놔두고 일개 개인에게 가서 사임을 미리 허락받고 자빠지는지는 모르겠지만(순시리??) 야마가타는 그런 그에게 근성론을 강조하며 억지로 총리자리를 계속해서 유지하도록 강요하긴 하였다.
야마가타가 왜 총리를?..순시리가 왜 대사를?..아주 지랄들을 한다..
- 하지만, 여론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고 사방에서 비난의 화살이 날아드는 가운데 이를 수습할 인재가 못 되었던 데라우치에게 결국 야마가타는 퇴임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얼마 뒤 화병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데라우치가 갑자기 급사해 버렸다.
- 일이 이따위가 되자 결국 야마가타의 입장에서는 점찍어 놓고 키워왔던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군부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막강 파벌을 관리해오던 대리인마저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
총리 자리에서 튕겨난지 1년만에 홀랑 뒈졌다...
- 물론 야마가타가 데라우치 한 명 잃었다고 해서 순식간에 몰락할 만큼 그렇게 말랑한 인간은 아니었고, 굳이 데라우치가 아니라도 육군의 대가리 계층은 전부 지 새끼들이었으므로 좀 귀찮긴 하지만 직접 관리하며 새로운 후계자감을 만들어 내세우면 그만인 일이었다.
- 하지만 문제는, 데라우치가 실각하던 1918년 8월에 이르면 야마가타는 나이가 무려 80세에 이른, 지 몸 하나 가누기도 버거운 영감탱자였으며 더욱이 세상은 밀려오는 자유주의와 모더니즘, 그리고 민주화의 물결로 가득하던 시기였다.
- 게다가 이미 조슈 파벌의 전횡에 몸부림치던 당시 정치권은 야마가타 측을 주시하며 뭐 하나 걸리기만을 바라고 있는 판국에 가뜩이나 권력 유지가 불안하던 야마가타는 쓸데없는 참견으로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만다.
워낙에 쫙 깔아놔서 별 문제 없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 그것은 바로 다이쇼의 아들내미이자 훗날 몽키킹 자리에 오를 히로히토의 마누라 정하는 문제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했다가 몰매를 맞게 되는 사건인데, 당시 히로히토 마누라 자리를 놓고 오른 두 후보의 외가가 한쪽은 사츠마, 다른 한쪽은 조슈였기 때문에 자칫하면 조슈와 사츠마의 파벌 싸움으로 보이는 상황이었다.
- 문제는 야마가타를 비롯한 조슈 파벌 입장에선 라이벌 관계에 있던 사츠마 출신 신부 후보자가 결국 히로히토의 마눌로 결정된 직후, 그쪽 가계에서 색약(色弱) 유전인자가 발견된 것에서 비롯된다.
- 이는 당시 유행하던 우생학의 관점에서 만세일계라고 지껄이던 몽키킹 일족에게 유전자 결함이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에 더해, 징병제 하에서 색맹이 있는 자는 입대가 불가능하였는데 비록 형식적이지만 육해군의 대원수가 될 몽키킹에게 색약증이 생기는 것은 군국주의자 야마가타의 입장에선 상당히 거슬리는 일이기도 하였다.
군 통수권자가 색맹이면 좀 그렇쟈나??
- 이에 야마가타는 “유전적 결함이 있는 몽키킹은 문제가 있다.”며 히로히토의 약혼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나서게 되는데 그러자 야마가타의 전횡에 치를 떨던 반대 세력이 잘 걸렸다라며 일제히 야마가타을 성토하며 나선 것이다.
- 그들은 이 문제를 단순히 파벌을 지키기 위해 야마가타가 몽키킹의 권위마저 엎으려 한다고 난리를 쳤고, 언론에 비쳐진 야마가타는 어린 황태자비를 구박하는 권력욕에 찌든 영감탱이로 보여 졌으며, 결국 야마가타는 최고 존엄을 건드린 덕분에 만신창이가 되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니가 뭔데 몽키킹 패밀리를 건드리냐!! (사견으로.. 생긴 거 보니 건드릴만 하다는...-_-;;)
- 1922년 2월 1일, 만약 데라우치가 있었으면 저것들을 전부 땡크로 갈아엎어 버렸을 것인데 라고 죽기 직전에 중얼거렸는지는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야마가타는 그렇게 저승길로 떠났다.
- 그가 아무런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채 사망하자 일본 군부 내에서는 더 이상 지역 파벌에 의한 권력 독점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후 불어 닥친 민주화의 바람으로 인해 정치권과 국민들로부터 군축의 칼날이 목전에 들이밀어지자 일본 군국주의 초창기의 광풍은 그렇게 차츰 사그러들게 된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출처>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kBb&articleno=3587&categoryId=63®dt=20141228114141
https://ja.wikipedia.org/wiki/%E5%85%83%E8%80%81%E9%99%A2_(%E6%97%A5%E6%9C%AC)
https://ja.wikipedia.org/wiki/寺内正毅
https://ko.wikipedia.org/wiki/%EB%8D%B0%EB%9D%BC%EC%9A%B0%EC%B9%98_%EB%A7%88%EC%82%AC%ED%83%80%EC%BC%80
http://tieba.baidu.com/p/1320068599?p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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