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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일본은 어떻게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나?<5>(http://blog.daum.net/mybrokenwing)




5) 야마가타의 어두운 그림자


-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벌어지자 당시까진 사이좋은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미국의 요청으로 1차 세계 대전 종결 직전인 1918년 7월 12일, 당시 총리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러시아의 극동지역 시베리아에 대한 군사적 간섭, 즉, 시베리아 침공을 단행했다.
- 그러자 전시 상황에 따른 수요 확대를 예상한 미곡 상인들에 의해서 쌀의 매점매석이 발생, 일본 내 쌀 가격이 급등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그런 가운데, 도야마 현(富山県)에서 발생한 미곡 도매상과 주민 간의 충돌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 쌀 도매상들에 대한 습격이나 방화 등이 2개월간에 걸쳐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시베리아에 군대가 출동했으니 군량미 수요가 급등하겠지?? 

 
- 이런 골 때리는 상황이 벌어지자 데라우치가 대처한 방법은 바로 스승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에게 배우고 자신에게는 지극히 익숙하며, 식민지 조선에서 실제 실행해 보았던 방법, 즉, 무력에 의한 사태 해결이었다(우리는 이걸 공권력에 의한 소요 진압이라 쓰고 폭력적 탄압이라 읽으면 된다..)
- 데라우치는 경찰력의 강경한 투입을 결정, 당시까지 6천 명이었던 경시청 순경을 한꺼번에 1만 명으로 늘리고 6만의 군 병력까지 치안업무에 투입하였고 진압 과정에서 발포명령까지 내렸다(군바리들이 제일 좋아라하는 방법..땡크로 밀어버려라~~!!)



                      민중의 반발에 부딪혔을 때, 군바리들이 제일 좋아라하는 방법..


- 그러자 이런 무력 진압에 대항하는 군중의 소요는 당연히 더욱 격화되었고 탄광 지역에선 출동한 군 병력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광부들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 13명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해군 군항이던 쿠레시(呉市)에서는 해군 육전대가 출동, 군중과 대치하다 총검에 찔려 사망한 시민이 2명 이상 나온 것으로 보고되기도 하였다.
- 또한 데라우치는 소요를 조장하였다는 이유로 언론을 통제, 소위 보도지침(報道指針)을 하달하였고, 이것을 거부하는 신문과 잡지는 모조리 폐간시켜 버렸다(이것도 훗날 전 장군이 배워 와서는 그대로 실행..젊은 친구들은 생소하겠지만 “언론 통폐합”이라고 삐딱선 타던 동아 방송(TBC)이 강제로 문을 닫고 수많은 언론인이 실직자가...)



               쌀폭동 당시 일본 언론에 대한 검열(위)과 전 장군 시대의 한국 언론..


- 하지만 앞뒤 꽉 막힌 극단적 군국주의자 데라우치로서는 끝까지 자신의 행동이 무슨 잘못인가 싶었겠지만 그가 이런 막가파식 정책을 실행한 곳은 비록 우리 입장에선 짜증 만땅이지만 식민지 조선이 아니라 일본 본토였고, 그 시기도 메이지가 죽고 다이쇼(大正)가 몽키킹 자리에 오르며 새로운 시대가 도래, 소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기운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 여기서 잠깐 데라우치가 총리 자리에 오르기 직전의 상황을 살펴보면, 1916년 10월의 데라우치 내각 성립 직전의 내각인 오쿠마 내각(大隈内閣)이 1914년 4월에 탄생한 것도 “헌정 옹호와 파벌 타파” 즉, 입헌 내각제 시스템을 수호하고 초슈(長州) 출신 군벌들이 돌아가며 나라를 지네 맘대로 해 처먹는 파벌 정치를 해체하라는 당시 일본 민중의 요구를 대중들에게 인기 있던 민중 정치가를 내세워 무마시키기 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술책이었다.



- 당시 일본 육군의 대마왕이자 조슈 파벌의 총수 야마가타에게 있어 오쿠마 내각은 거세져만 가는 민중의 요구를 일단 무마시키고자 내세운, 2사 만루의 위기 상황에서 나온 막강 좌타자를 잠재우기 위한 좌완 구원투수, 즉 원 포인트 릴리프(One Point Relief)같은 존재였다.
- 이때 총리라며 끌려 나온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는 사가(佐賀) 출신으로 1898년 6월, 사츠마와 조슈 파벌을 제외한 다른 지역 출신으로는 최초의 총리를 맡은 바 있었던 관계로(이것이 일본 최초로 정당 내각..) 파벌 해체를 주장하던 당시 일본 국민들에게 먹히기 쉬운 존재였지만, 이때 이후 무려 16년 동안이나 와세다(早稲田) 대학 총장이나 하며 재야에 묻혀 지내던, 정무적 감각은 완전히 떨어진 구닥다리 영감이었다(얼마 전 박 여사에 의해 거국내각 총리라며 지명됐다가 낙동강 오리알을 거쳐 지금은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진 누구랑 비스무리..중립적이네 어쩌네 하더니..이젠 그런 일이 있었던가?? -_-ㅋ)


                    당시 오쿠마는 뒷방에서 장기나 두던 76살 먹은 영감탱자였다..


                                 그리고 이 양반...지못미...ㅠ.ㅠ


- 당시 오쿠마를 전면에 내세운 야마가타에게는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숙명적 과제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신이 애지중지하며 키워왔으며 계속해서 확장시켜야만 할 존재, 즉, 일본 육군의 끊임없는 팽창이었고 이 시기에 가장 공을 들이던 과제는 바로 일본 육군에 2개 사단을 더 증설하는 문제였다.
- 1904년, 러일 전쟁 개전 직전의 일본 육군은 13개 사단 체제였지만, 러일 전쟁 중 4개 사단, 전쟁 종결 직후인 1906년에는 2개 사단이 더 증강된 19개 사단 체제가 되었다.



- 러일 전쟁 직후, 일본 육군은 만주군 참모 본부를 중심으로 러시아가 패전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는 경우에 대비하고 동시에 기존의 방위 중심의 전략에서 공세 중심 전략으로 전환해야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이를 바탕으로 육군을 19개 사단에서 20개 사단 정도로 증강하기를 원했으며 결국 이 시기, 그들이 원하는 수준을 달성 했다.
- 하지만, 일본 육군의 아버지이자 군국주의 그 자체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 기회를 계기로 육군을 더욱 더 팽창시켜야 한다고 주장, 평시에는 25개 사단, 전시엔 50개 사단까지 확장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육군이 뛰면 당연히 따라 뛰어야만 했던 꼴뚜기, 일본 해군은 그런 꼬라지를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으므로 오만방자하게도 이젠 미국을 가상 적국으로 놓고 그들만의 대야망, 88함대 계획을 들이밀며 함대 확장을 주장했다.


                      육군 야마가타 아리토모 : 조선을 지키려면? 2개 사단 증설!!

                      해군 야마모토 곤노효에 : 함대 건설이 먼저닷!


- 이렇게 일본 군부는 간이 배 밖에 튀어나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며 육군은 러시아, 해군은 미국을 가상 적국으로 하는 망상 가득한 국방 계획을 작성(이것들은 육해군이 따로따로 전쟁하는 모양임....-_-;;), 제국 국방방침(帝国国防方針)이라는 제목으로 몽키킹 메이지에게 들이밀었다.
- 회의에서 졸다가 야마가타에게 쿠사리나 먹던 쫄보 메이지로써는 칼 차고 들이닥친 이노마들의 과대 망상적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1907년 4월 4일, 결국(당연히?) 이를 재가하였다.



          미국을 주적으로 삼고 함대를 왕창 확장한다는 것이 해군의 88함대 계획이었다..


- 웃기는 것은 앞서도 설명했지만 메이지 헌법 체계 상, 육군과 해군, 정부는 몽키킹 아래에서 동격인 존재였으므로 실제 재정을 담당했던 내각은 국방 정책과 소요될 병력, 투입될 재정과 관련한 자료의 열람만이 허용되었고 실제 운용에 관해서는 일체의 참여가 불가능하였다.
- 하지만 당시 총리이던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는 가뜩이나 돈도 없는데 이런 군부의 밑도 끝도 없는 덩치 부풀리기에 질겁했고 비록 몽키킹의 재가가 있었지만 이 계획에 “재정 상황이 허락한다면"이라는 전제를 달며 이의 실행을 사실상 허용하지 않았다(게다가 사이온지는 야마가타 일생의 라이벌이던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인물이었다..)



                전부 동급... 총리라지만 아무 간섭을 할 수 없었던 사이온지는 골 때렸다..


- 그러자 야마가타는 당연히 방해 요소의 제거를 명했고 이 작전에는 그가 이런 상황을 일찌감치 예측하고 마련해 놓은 방안인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軍部大臣現役武官制)”를 활용, 사이온지 내각의 육군 대신이던 우에하라 유사쿠(上原勇作)가 사퇴하자 내각은 발라당 붕괴되고 말았다(야마가타-메이지-사이온지의 관계는 오늘날 우리에게 벌어진 순시리-빡-문체부의 관계와 너무도 닮아있고 순시리의 명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 그려..모가지가 날아간다..)




             야마가타 말 듣는 장관 우에하라 유사쿠와 순시리 말 듣는 청와대..-_-;;

   
- 내각이 붕괴되자 사이온지는 최후의 발악으로 육군의 앙숙이자 야마가타의 라이벌인 해군의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権兵衛)를 추천, 그를 총리 자리에 앉히지만 이놈이나 저놈이나 죄다 도둑놈 심뽀인 것은 마찬가지여서 해군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출범한 야마모토 내각 또한 영국에 발주한 공고급 전함 수주 과정에서 발생한 금품수수 스캔들과 독일 지멘스에게서 해군 고위 장교들이 뇌물을 받은 지멘스 사건에 얽혀 홀라당 붕괴되고 만다.
- 일이 이 꼬라지가 되자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쾌재를 부르며 뒷방에서 뒹굴거리던 오쿠마 시게노부를 내세워 1914년 4월, 새로운 내각을 조성하였고, 이때 오쿠마가 총리 감투를 받고 야마가타에게 약속한 것이 바로 육군 2개 사단 확장 계획의 추진이었다(나라 지 맘대로 주물러 말아먹기는 어떤 식으로든 닮는다..순시리는 문체부 장관이 말 안 듣는다고 빡을 시켜 짜르고 거기다 은태기 아는 사람을 앉혔다지? 어디서 배워먹은 거냐?)



1914년, 일본 육군의 확장 계획은 100년 후인 2014년, 한국에서 창조 벨트니 지랄이니 하는 이름으로 완전히 똑같은 과정을 거쳐 부활했다..

 
- 오쿠마 영감이 총리가 되던 1914년, 제 1 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드디어 온 우주의 기운이 도래했다며 야마가타와 오쿠마 내각은 2개 사단 증설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추진, 예산안을 제출했지만 이때는 의회에서 사이온지 내각의 지지 기반이던 입헌 정우회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 이후 1915년 3월, 총선거가 실시되어 이 선거에서 오쿠마 내각을 지지하는 당파가 승리를 거두자 같은 해 6월, 마침내 2개 사단 증설과 관련한 예산안이 의회를 통과하였고, 이에 따라 6개월 후인 1915년 12월, 신설된 제 19 사단이 함경북도 나남(羅南)에, 제 20 사단이 서울의 용산에 각각 주둔하게 된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출처>

http://blog.livedoor.jp/otakarajoho/archives/6607375.html
https://ja.wikipedia.org/wiki/上原勇作
http://www.a-saida.jp/images/shuppei.htm
http://www.kumamoto-kmm.ed.jp/dotokukyozai/6hayasiitizou/ebamen/ebamen.html
http://murutukus.kr/?p=6963
http://www.thinker-japan.com/think_media.html
http://blog.goo.ne.jp/bdwy88ws/e/24b33849892b68b26ff948059eeaed23
http://www.weblio.jp/content/%E8%A5%BF%E5%9C%92%E5%AF%BA%E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