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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일본은 어떻게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나?<11>(http://blog.daum.net/mybrokenwing)

일본은 어떻게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나?<11>



11) 일본 해군 분열의 서막 - 제네바 군축회담


- 1921년 11월 12일부터 시작된 워싱턴 군축회담은 3개월에 걸쳐 모든 제반 사항이 논의된 후 마침내 1922년 2월 6일, 조약이 체결되기에 이른다.
- 이 조약에 따라 일본은 전함, 순양 전함 등 주력함을 영미 각국 대비 60%, 여기에 만약 영국과 미국이 동맹을 맺는다고 가정하면 30%의 전력만을 보유하게 되었다.
- 워싱턴 회의의 초점은 해군 군축, 영일 동맹의 파기, 중국 문제의 해소라는 세 가지 항목이었고, 첫 번째 항목인 해군 군축에서는 주력함(전함) 보유량 비율을 영국 5, 미국 5, 일본 3, 프랑스, 이탈리아 1.75로 하는 협상이 타결되었는데, 그 규모는 총 톤수에 의해 억제되기에 사실상 영국, 미국은 전함 15척, 일본은 9척 보유가 될 터였다.




             워싱턴 조약으로 75% 완성 상태에서 뇌격에 의해 자침 처리되는 미국 전함 워싱턴..


- 그런데 이 “60% 해군”이라는 결론은 일본 해군 내부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의 대외 강경파와 국가 재정 상태를 모르던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불만으로 터져 나왔고, 특히 나름 생각이라는 게 있었던 워싱턴 회담의 일본 측 수석 전권 대사 가토 토모사부로(加藤友三郎)와는 달리, 차석 전권 대사였던 가토 간지(加藤寛治) 이하 해군의 수행원들에게는 엄청난 쇼크였다.
- 이는 당초 이 회담에 응하면서 일본 해군이 주장한 주력함 보유 비율의 마지노선은 영미대비 최소 70%였기 때문인데, 이것마저 무너지자 러일 전쟁에서 이겨 세계 일등국가가 되었다고 자부하던 일본의 애국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미국과 영국에게 무릎 꿀린 굴욕적인 조약”이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곳간 사정은 모르겠고 어쨌든 굴욕이쟈나! 가토 간지와 예산에서 해군비 비율(대정7년은 1918년)


- 실제 하라 다카시 총리로부터 이 회담의 전권을 부여받은 일본 측 책임자 가토 토모사부로도 70%는 최대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워싱턴 회의에 참가하자마자, 미 국무장관 찰스 휴즈(Charles Evans Hughes)로부터 “너흰 60%야~ 사인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고~”라는 소리를 듣고는 당장 멘붕이 왔다.
- 하지만 만약 이에 반대하고 건함 경쟁을 계속하면 일본의 재정이 파탄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로써는 결국 꼬랑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여기에는 이미 진주만 기습보다 훨씬 이전에 미국이 일본 측의 암호화 전문을 도청, 해독하고 있었기에 일본의 허용 한계가 60%라는 걸 미리 알고 협상에 임하여 양보를 강요한 것도 있었으니...이것들은 일찌감치 글러 먹었다..ㅠ.ㅠ)


                 60%라도 가질려면 사인하고, 말려면 말고..미 국무장관 찰스 휴즈..


- 또한 가토 토모사부로는 군비 확장이란 민간 산업을 발전시키고 무역을 장려, 국력을 충실하게하면 군비의 충실 역시 가능할 것이라 보았고 특히, 그는 돈이 없으면 전쟁도 할 수 없는데 당시 일본은 외채를 조달하지 않으면 전쟁을 할 수 없는데다가 1차 대전 직후인 이 시기, 돈 빌려줄 나라는 미국 외에는 없는데(영국도 거지 됐다..-_-;;) 그런 미국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나름 합리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 따라서 그는 당시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위치와 국익을 냉정하게 판단하였고, 결국 워싱턴 회의에서 제안된 60%를 받아들여 해군 군축을 단행했으며 이후 귀국해서 총리가 된 다음에는 자신이 만든 군함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청소해 버렸다.



                      가토 토모사부로와 페기 처리된 카가급 전함 토사..


- 워싱턴 회의의 결과, 일본은 대 영미 주력함 비율 60%의 보유와 영일 동맹의 폐기, 괌과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 등 남양 제도의 군사 기지화를 무기한 보류하는 조건으로 이를 인준했고 각국의 비준이 완료된 것은 1922년 8월 17일의 일이었다.
- 이에 따라 일본의 주력함 최대 보유량은 31만 5,000톤으로 정해졌고 미국과 영국은 각각 52만 5,000톤, 조약에 따라 폐기될 전함의 수는 일본 17척, 영국 23척, 미국 30척으로 정해졌다.
- 또한 향후 10년간 주력함의 건조가 중단되었으며 주력함 주포의 최대 구경은 16인치, 항공모함은 배수량 27,000톤 이하, 주포는 8인치, 8문 이하로 한정했고, 주력함과 항공모함 이외에는 배수량 1만 톤 이상 군함의 건조를 금지했다.


             1923년 해체 처리되는 미국 전함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12인치 주포..


- 이로 인해 지금까지 미 해군 대비 70%를 기준으로 한, 택도 아닌 일본 해군의 건함 계획은 엄청난 변화를 강요받게 되었지만, 이 결정에 따라 일본의 재정은 끝없는 건함 비용의 지출에서는 어쨌든 해방되게 되었다.
- 베르사유 회의의 결과 만들어진 국제 연맹과 대규모 해군 군축 조약인 워싱턴 조약은 1차 대전 이후 세계의 군사적 갈등 상황과 군비 증가를 고정시킴으로써, 이후 평화를 유지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영국과 미국의 발상이 실현된 것이었다.
- 특히 태평양에서의 현상 유지를 규정한 4개국 조약(Four-Power Treaty)은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중심의 친영미파들에게는 매우 환영받는 것이었으며, 그들은 향후 일본은 영미와 긴밀히 협력해 세계 정치판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우리만 줄이는게 아니쟈나? 똑같이 줄이는 것이니..


- 그러나 중국이라는 거대한 밥그릇을 결코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육군(게다가 대부분 해군의 주도하에 조약이 체결되었으므로..)과 정치권의 일부 대륙 진출논자들은 워싱턴 회의의 결과로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게 완전히 굴복 당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현실적, 객관적으로 볼 때, 워싱턴 체제는 당시 일본의 국력에 완전히 걸 맞는 결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자들과 팽창 주의자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불만의 씨앗으로 남는 결과가 되었다.
- 또한 이때까지만 해도 당시 일본 해군의 대가리였던 가토 토모사부로의 결정에 대해 아랫것들은 불만이 넘쳐났지만 대부분 수긍하고 넘어갔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때까지는 그래도 일본 해군은 육군에 비해 파벌 대립이 거의 없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었다. 
- 하지만 워싱턴 군축 회담으로 쌓이기 시작한 일본 해군 내의 불만은 이후 제네바 군축회담을 거치면서 응축되었고, 런던 군축회담 시기가 되면 조약 찬성파와 반대파라는 양대 파벌로 분열,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육군이랑 투닥거리느라 나름 똘똘 뭉쳤던 이것들에게도 슬슬 문제가 생긴다..


- 1차 대전 이후 선출된 최초의 공화당 출신 미국 대통령 워렌 하딩(Warren G. Harding)이 1923년 8월 2일,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대통령직을 승계한 부통령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는 하딩이 추진하던 군축 정책을 100% 그대로 계승하였다.
- 그는 워싱턴 조약이 주력함(전함과 순양전함, 항공모함)의 보유량 규제에 그친 것에 주목, 이후 건함 경쟁이 전함에서 순양함 이하 보조함의 건조 확대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하였고, 또한 자국 해군에 대한 억압 또한 강화했다(여기엔 1920년대 초반 공화당 정권의 국방비 감축 정책에 더해 빌리 미첼(William Mitchell)을 필두로 하는 육군 항공 주의자들의 비싸기만 한 물렁이 덩치, 전함은 향후 무용지물 더하기 쓰레기가 될 것이라는 주장도 크게 한몫했다..)
- 그는 1926년에 이미 의회에서 승인된 10,000톤 급 순양함인 포틀랜드급 순양함(Portland class cruiser) 3척의 건조도 연기, 1929년이 되어서야 주문된 이 3척은 설계 변경이 되며 뉴 올리언스급(New Orleans-class) 순양함이라는 아예 다른 형식이 되기도 하였다.



         강력한 건함 억제 정책을 추진한 캘빈 쿨리지 대통령과 중순양함 뉴 올리언스..


- 어쨌든 주력함 다음으로 이제 순양함 이하도 규제하자는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한 미국은 자신들의 정책이 런던 군축 회담에서의 보조 함정 제한이라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지만 당시 공화당 정권이 1922년부터 1932년까지의 기간에 의회에서 승인된 31척의 군함 건조 계획 중 실제로 건조 착수한 것은 달랑 10척에 지나지 않았다(의회에서 돈 줘도 안 해~~)
- 마침내 1927년 2월, 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워싱턴 조약의 맹점, 즉, 전함과 항공모함의 건조 규모는 제한했지만 순양함, 구축함 그리고 잠수함의 건조 규모는 제한선을 두지 않아 새롭게 대두된 보조함 건함 경쟁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스위스 제네바에 모여 논의할 것을 각국에게 요청했다(우리만 줄이면 아무 소용 없쟈나?)


       미국 내에서도 워싱턴 회담으로 멀쩡한 해군을 거러지 만들었다고 말이 많았다..그래서..


- 이 회담의 목적은 워싱턴 해군 조약에서 합의된 해군 함정 보유에 대한 기존의 한도를 확대하는 것에 있었고 영국과 일본은 이 요청을 수락했지만 골 때리게도 워싱턴 조약에 서명한 국가인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이를 쌩 깠다.
- 당시 프랑스는 국제 연맹의 주도로 군축 회의 준비 위원회 구성 작업이 진행 중임을 표면에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주장하던 톤수 제한 방식(총 보유 톤수의 한도 내에서 함정 종류의 구성은 각자가 알아서 하는 방식)에 대해 미국이 반대하자 짜증이 났고, 이탈리아도 얼씨구나 하며 이에 동조했기 때문이었다.



    우린 좀 빼주쇼..프랑스의 10,000급 중순양함 뚜르빌(위)과 이탈리아의 중순양함 함대..


- 아무튼 제네바에서 일본, 영국과 만난 미국은 워싱턴 조약에 따른 5 : 5 : 3 비율을 그대로 보조함에도 확장 적용하여 영국과 미국은 총 30만 톤의 순양함까지만 보유를 허용하고 일본은 18만 톤까지만 허용하자고 주장했다. 
- 하지만 이런 미국의 제안은 영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는 정반대였고, 당시 영국 해군의 입장에서는 전 세계에 퍼진 자국의 무역로를 보호하는 임무에는 크고 강력하며 긴 항속거리를 가진 대형 순양함을 소수 보유하는 것 보다는 작지만 식민지에서는 한 기침 할 수 있는 중형 순양함을 다수 보유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 따라서 영국은 기존 워싱턴 체제의 순양함 규모 제약인 배수량은 10,000톤 이하, 주포 구경은 8인치 이하라는 제한선을 더 낮게 설정하되 대신 보유량은 60만 톤으로 확대할 것을 주장, 미국과 대립했다.
- 하지만 전 세계에 걸쳐 해군 기지를 가진 영국은 다수의 소형함 보유로 자신들의 이익을 충족시킬 수 있었지만,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거대 해역을 국토 양쪽으로 접한 반면, 해군 기지는 제한되어 있던 미국은 행동 반경이 큰 대형 순양함의 보유가 반드시 필요했기에 영국의 주장에 찬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 세계에 걸쳐 해군 기지를 가진 영국은 미국과는 완전히 입장이 달랐다..


- 한편, 저 둘이 투닥거리든 말든, 일본의 주요 관심사는 오로지 워싱턴 체제의 5 : 5 : 3 비율의 반복을 피하는 것이었고, 일본 해군이 원하는 것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미국 대비 최소 70%의 함대 규모였기에 전함으로 달성되지 못한 목표를 순양함 등의 보조함 세력으로 유지하는 것이 특히 중요했다.
- 이는 워싱턴 조약 직후, 미국은 공화당 정부가 앞장서서 급격히 해군력 축소를 시작하고 영국은 해보려고 해도 살림이 쪼들려서 있는 것도 없애야 하는 판에 일본 해군은 회담 직후인 1923년, 일찌감치 함정 보충 계획(大正12年度 艦艇補充 計画)을 수립, 건함 계획의 대폭적인 재검토를 시작한 점에서도 바로 알 수있다.


                  1923년 함정 보충 계획에 따라 건조된 묘코급 중순양함 나치..


- 이 계획에 따라 묘코(妙高)급 중순양함, 후부키(吹雪)급 구축함 등의 건조가 시작되었고 특히 워싱턴 군축 조약의 순양함 하한선인 10,000톤을 채우고 8인치 주포를 10문이나 장착한 묘코급 중순양함 4척에 대한 일본 해군의 기대는 특히 컸다(물론 뻘짓이었지만..-_-;;)
- 따라서 이 회의에 일본 측 대사로 참석한 조선 총독 겸 해군 장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와 전 외무 장관 이시이 기쿠지로(石井菊次郎)는 계속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따불거렸지만, 지네들의 이익이 우선인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주장을 귓전으로도 듣지 않으며 자신들의 주장만 반복하였고, 이런 미국과 영국의 순양함을 둘러싼 갈등은 끝내 풀리지 않으며 결국 제네바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시이 기쿠지로 : 열라 떠들어봐야 저것들이 듣지도 않는다 ㅠ.ㅠ


- 하지만 쿨리지와 공화당 정권의 극단적인 건함 억제 정책은 미국 내에서도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그 결과, 쿨리지 정부의 의사에 반대한 민주당이 1927년, 하원을 통과시켜 버린 건함 계획에 따르면, 워싱턴 조약으로 인해 전함의 신규 건조는 불가능하였지만, 5척의 항공모함, 25척의 순양함, 32척의 잠수함을 포함한 71척의 신규 함정 건조가 포함되어 있었고 그 건조비는 유지비를 빼고 순수 건조 비용만 7억 4,000만 달러(오늘날 가치로 101억 5,5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의회의 건함 계획에 깜짝 놀란 쿨리지를 묘사한 당시 미국 신문의 만평..


- 이 계획안은 상원에서 보류되며 결국 연기되고 말았지만, 미국이 당시 건함 억제 정책으로 얼마나 재정적인 절약을 이루고 있었는지 알 수 있고, 반대로 말하면 1차 대전 후 미국은 널럴하게 건함 경쟁을 계속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했다는 얘기도 된다.

- 하지만, 함대 규모에 있어 미국의 70%에 도달하기 위해 88함대의 나라는 얼마나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는지 그 국가 규모의 차이를 여기에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당시 일본은 워싱턴 조약에 따른 주력함 건조 취소로 3억 5,600만 엔을 절약했지만 묘코급 중순양함을 포함한 보조함 신규 건조비로 다시 1억 9,000만 엔을 털어 넣었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출처>

https://kr.pinterest.com/rjyships/ijn-heavy-cruisers/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47a.htm
https://ja.wikipedia.org/wiki/%E5%8A%A0%E8%97%A4%E5%AF%9B%E6%B2%BB
https://en.wikipedia.org/wiki/Washington_Naval_Treaty
http://www.bianoti.com/calvin-coolidge.html
http://www.naval-history.net/xDKWW2-3908-01RNships.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