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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일본은 어떻게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나?<12>/http://blog.daum.net/mybrokenwing



워싱턴 체제 이후 영국과 미국의 사정


- 유럽에서는 베르사유 체제의 마무리로 1925년 10월에는 로카르노 조약(Pact of Locarno)이, 1928년 8월엔 켈로그-브리앙 조약(Kellogg-Briand Pact)이 체결되며 국제적인 공조에 의한 평화 유지의 안정화가 더욱 진행되었다.
- 또한 미국에서는 하딩 행정부와 쿨리지 행정부에서 상무장관직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가 1928년 대선에서 승리하며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 그가 대통령 자리에 오른 직후 발생한 대공황과 대응 조치 같은 얘기는 이 포스팅과 별 관련이 없으니 때려치우고, 국제 관계와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살펴보면, 당시 후버는 더욱 명확하게 미국의 세력권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었다.
- 그는 앞선 정부의 정책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았음은 물론, 이를 더욱 심화시켜 군사력 억제에 의한 평화 체제 유지 차원을 넘어 미국의 국제 분쟁 불간섭주의를 지향하였다.

- 오죽하면 후버는 1931년, 만주 사변이 발생했을 때, 당시 일본의 행동이 미국 국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경제적, 도덕적으로도 미국 국민이 이를 막기 위해 피를 흘릴 필요는 전혀 없다고 말하였을 정도였다(미국의 이런 기조가 바뀌는 것은 공화당의 후버를 꺾고 민주당의 루즈벨트가 집권한 이후였다..)


 
- 또한 앞선 정부의 상무 장관을 역임한 후버는 해군 군비 억제를 주도했던 인물답게 계속적인 억제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이를 좀 더 논리적으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 톤수와 주포 구경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군비 제한 기준을 각급 함정의 종합적인 성능으로 평가함으로써 보다 실효성 있는 제한을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한 후버는 군함의 전투 능력을 주포 구경, 장갑 방식, 속력, 함령 등 다양한 기준으로 수치화하여 제한하는 방식을 구상했다.
- 거함거포로 구성된 해군력에 의한 포함 외교를 억제하고 중남미 국가에 대해서도 유화책으로 일관한 후버가 단순한 평화주의자인 것만은 아니었음은 이런 정교한 군비 억제 방식에서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군비 억제 조건을 좀더 세세하게 나눌 필요가 있다..사진은 1930년, 미 해군의 대규모 해상 훈련..


- 이런 후버의 발상에 동조한 이가 당시 영국의 노동당 정권 수상 제임스 램지 맥도널드(James Ramsay MacDonald)로 그는 1929년 9월에 미국을 방문, 후버와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새로운 군축 방안을 제안했다.
- 그는 새롭게 건조할 전함 1척의 배수량 제한을 35,000톤에서 25,000톤으로 축소시키고 주포 구경도 최대 16인치에서 12인치로 억제하며, 신형 전함으로 교체할 수 있는 함령의 기준도 현행 20년에서 26년으로 연장하자고 제안했다.
- 이것은 사실상 전함이라는 함종의 단계적 영구 폐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에 후버도 전함의 전면적인 폐기와 매각을 논의 석상에 올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9년 9월, 워싱턴에서 만난 두 정상은 해군 군축을 강화하기로 의기 투합했다..


- 어쨌든 이 두 사람은 모두 전함이라는 무기가 가져올 군사적 효과에 대해서 전혀 매력을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들은 두 해군 강대국 간의 합의만 있으면 전함이라는 돈만 처먹고 비효율적인 무기 체계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 마침내 의기투합한 이 두 강대국의 지도자들은 전함뿐만 아니라, 전함을 보조하는 항공모함의 보유량도 135,000톤에서 120,000톤으로 감소시킬 것을 논의했고, 여기에 더해 워싱턴 조약 체제 아래서 전함 대신 보조함 건조 경쟁을 불러온 소위 조약형(条約型) 순양함에 대한 제한과 잠수함, 구축함에 이르기까지 런던 군축 회의에서 다룰 대부분의 항목들이 논의되었고 일부는 합의 단계까지에 이르렀다.



   워싱턴 체제의 항공모함도 손 보자! 미 항모 레인저(위)와 영국 항모 글로리어스와 퓨어리스..


- 그렇다면 워싱턴 군축 체제라는 주력함 제한에 있어서는 족쇄에 가까운 시스템을 구축해 놓고도 이들은 왜 또 다시 머리를 싸매고 새로운 해군 군축 회담을 모색했는지 잠깐 알아보고 넘어가겠다.
- 워싱턴 체제에 의해 국제 세계에서 나름 한 펀치 한다는 유력 선수들은 그들이 가진 주력함, 즉, 전함과 순양전함, 항공모함은 철저한 규제 안에 묶어놓을 수 있었으나, 이들 돈이 억수로 깨지는 주력함들을 묶어놓자 이번엔 별 다른 규제가 없었던 보조함을 놓고 지네끼리 경쟁이 벌어졌다.
- 워싱턴 조약에는 사실 현미경을 들고 좀 세밀히 들여다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허술한 구멍이 여러 군데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구멍이 바로 주력함의 다음 단계인 순양함 부분이었다.



             이제 구멍 파기가 시작된다..사진은 영국 해군의 1차 대전형 순양함 에메랄드..


- 물론 순양함에도 기준 배수량 10,000톤에 함포 구경 8인치라는 제한 사항이 존재했지만, 이 기준 안에만 들어가고 능력만 된다면 함정은 얼마든지 건조할 수 있었는데 그에 따라 제한 한계인 배수량 1만 톤에 8인치 주포를 갖춘 순양함이 각국의 건조 대상이 되었다.
- 워싱턴 조약에서는 가장 돈이 많이 깨지고 부담스러운 주력함의 규제를 주목적으로 하였기에 순양함과 그 이하의 보조함선에 대해서는 건조수량, 배수량 제한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이에 따라 각국은 이런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양함을 건조하기에 바빴는데 이때 이런 꼼수로 규제 한계선을 꽉 채워 건조한 순양함을 조약형 순양함이라고 불렀으며 그 대표적인 함정이 바로 일본 해군의 묘코(妙高)급 순양함이었다.


규제 한계선을 꽉 채워서 건조한다!! 사진은 영국 해군이 1927년 구상한 조약형 순양함 스케치...


- 일본 최초의 중(重)순양함은 원래 후루타카(古鷹)급 순양함이었지만 이놈은 워싱턴 군축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상황에서 당치도 않게 주적으로 삼은 미 해군의 배수량 7,000톤급에 6인치 주포 12문을 장착한 오마하(Omaha)급 순양함과 영국 해군의 7.5인치(19.1cm 45구경) 주포 7문을 가진 9,750톤짜리 호킨스(Hawkins)급 대형 순양함에 대항할 목적으로 설계되었기에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8인치급 주포를 탑재하도록 설계한 물건이었다.
- 후루타카 급은 7,100톤, 8인치 주포 6문의 순양함으로 1922년에 건조가 결정되었지만 적은 배수량에 대구경 주포를 때려 넣은 덕에 방어력은 개판이 되었고 배수량도 계획보다 10% 늘어난 8,700톤이 되었지만 덩치만 커졌을 뿐, 이래저래 문제가 많은 계륵(鷄肋)같은 존재가 되었다.



  영국 해군의 호킨스급 순양함(위)과 이에 대항하려다 계륵이 된 후루타카급..사진은 카고..


- 그러나 묘코급 순양함을 설계할 때는 상황이 달라졌는데 이는 일본 해군이 세운 88함대 계획안에서 묘코급 순양함은 원래부터 8인치(20cm) 주포 10문을 탑재하는 7,200톤급 순양함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워싱턴 조약으로 인해 일본 해군은 주력함 비율에서 영미 대비 60%라는 열세에 놓인 만큼 조약의 제재를 받지 않는 보조함 부분에서 가장 강력한 함종인 순양함 부분에서 이 열세 상황을 만회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기준배수량 제한인 10,000톤 안에서 가능한 한 최대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가지는 강력한 함선이 필요해진 것이다.
- 이런 이유로 일본 해군 군령부(軍令部)는 칸세이본부(艦政本部)에다 대고 기준배수량 제한선인 10,000톤의 덩치에 8인치 주포 8문과 61cm 어뢰발사관 8문을 탑재하고 35.5노트(knot)의 속도를 낼 수 있는 순양함이 필요하다는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 하지만 당시 일본 해군의 건함 분야에 있어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음은 물론, 똥고집에 있어 황소를 능가하던 조선관 히라가 유즈루(平賀譲)가 군축조약으로 더 이상 전함을 만들 수 없게 되었으니 순양함은 포격에 집중하는 작은 전함이 되어야한다며 군령부의 요구에서 어뢰를 삭제하고 그 대신 주포를 10문으로 늘리자고 주장했다.
- 그리하여 이 고집불통의 사나이에게 꺾인 군령부는 1923년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묘코급 순양함은 예산 중 보충함정제조비(補充艦艇製造費)에서 건조비용을 할당받아 1924년에서 1925년까지 총 4척의 건조가 결정된다(히라가는 날로 발전하고 변모하는 건함 세계에서 수구꼴통에 가까웠다는..오죽하면 별명이 이름인 유즈루(讓..양보하다)앞에 아닐 불(不)자를 넣어 “히라가 유즈라즈(平賀不讓..히라가는 양보하지 않는다)”였다고..담에 이 꼴통도 함 뒤벼 보겠음...)



일본에서 조선의 신으로 불리는 히라가 유즈루는 거함거포의 맹신론자에다가 희대의 꼴통이었다..


- 하지만 일본 해군 군령부는 이렇게 겉으로는 히라가 유즈루의 제안을 승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순양함의 어뢰발사능력을 절대로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 그들은 새로 건조되는 묘코급 순양함을 수뢰전대 기함으로도 사용할 예정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며 날마다 갈고 닦았던 적의 주력함을 한방에 고꾸라뜨리는 일발필살의 전법, 즉 수뢰전을 구사하기위해서 구축함과 함께 돌격해야 하는 기함 역할인 순양함은 반드시 어뢰발사능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사고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이런 이유로 인해 군령부는 겉으로는 히라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가 그 직후 선진국에 가서 새로운 건함 기술 습득하라는 이유로 유럽시찰을 나가게 한 후, 히라가가 일본에 없는 틈에 묘코급 순양함을 재설계하라는 꼼수를 부려 기어이 어뢰발사관을 추가, 결국 묘코급은 어뢰발사관을 탑재한 상태로 건조되었다.


        결국은 옆구리를 후벼파서 어뢰발사관을 집어 넣었다...사진은 타카오급 순양함..


- 하지만 8인치급 주포 10문의 탑재는 화력 강화라는 측면에서는 당연히 좋은 선택이라 말할 수 있겠으나, 이를 워싱턴 조약체제에서 순양함 배수량의 한계인 10,000톤 안에서 해결한다는 것은 당연히 엄청난 무리수를 수반했다.
- 무장의 과다탑재로 인해 흘수선이 올라가 과적상태가 발생하기 딱 좋고, 이는 전복의 위험성에 더해 방어력의 하락을 불러왔으며 함 측면 장갑을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두껍게 하였지만, 그에 따르는 배수량 증가량을 주포탑 장갑에서 희생시켰기에 포탑의 장갑은 그야말로 깡통 수준이었다.



        가뜩이나 깡통에다 3번 포탑은 후부 지향 방식이라 전방 사격은 아예 불가능 하다..


- 여기에 한정된 배수량 때문에 어뢰 무장을 희생시키고 주포를 10문이나 탑재한 설계였는데, 군령부의 꼼수로 설계변경을 감행, 예정에도 없던 어뢰발사관까지 끼워 넣는 바람에 거주성 면에서는 최악을 달렸다.
- 당장 순양함(巡洋艦 Cruiser)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장거리를 순양(cruise)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렇게 거주성을 악화시킬 경우에는 승조원의 피로도가 심하게 늘어나서 전투 효율 등 각종 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하긴..일본 해군의 전통인 모든 걸 정신력으로 극복하면 될 일..게다가 묘코급은 국산품 애용 정신을 최대한 활용, 엔진을 죄다 국산품을 채용하여 항속거리도 엄청나게 줄었다..-_-;;)



             가뜩이나 비좁은데...게다가 암만 측면 장갑을 강화해 봐야 저기 한방 맞으면..


- 하지만 그 속사정 까지는 몰랐던 미국과 영국 등에게 있어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순양함 스펙을 월등하게 추월하는(특히 화력 면에서..) 순양함이 일본에서 건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이상, 그들도 당연히 이에 대항하는 함정을 건조할 필요가 있었다.
- 이에 따라 미 해군은 8인치(20.3cm 55 구경) 주포를 3연장 포탑 2기와 연장 포탑 2기를 합해 10문 장착하고 3연장 어뢰 발사관 2기와 32.5노트의 최고 속도를 발휘하는 배수량 9,100톤짜리 펜사콜라(Pensacola)급 순양함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 이후 이의 확대 개량형 노스햄프턴(Northampton)급, 포틀랜드(Portland)급 순양함 등이 차례로 건조에 들어갔지만, 배수량 제한선도 맞추고 일본의 조약형 순양함에도 대항할 수 있는 무장을 갖추다보니 마찬가지로 거주성이 최악이 되었고, 이에 따른 불만들이 취역 초기부터 쏟아져 나왔다.

- 승조원들로부터 항의 서한이 미 해군성으로 빗발치듯 날아들었음은 물론(이건 군함이 아니라 노예선이라고..-_-;;) 오죽하면 장교 구획으로 인해 그나마 상대적으로 거주성이 나앗던 장교들마저도 난리였다고 한다(일본 해군.. 참 여러 가지로 민폐다.. 존경스럽다는..싸이코들..-_-;;)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 상황을 쉽게 설명하자면, 옆집 똘이 아빠하고 삼식이 아빠는 애들 학원을 5개씩 보내준다며 이래가지고 애들 대학이나 보내겠냐고 마누라한테 바가지를 긁히자 빡 돌아버린 개똥이 아빠가 똘이 아빠와 삼식이 아빠를 불러 맥주 한 잔하면서 앞으로 학원은 3개, 그 비용도 30만원 밑으로 하자고 합의를 보았는데 그러자 이제는 외식하는 것과 영화 보러가는 것으로 불똥이 튄 상황이었다(옆집 누구네는 한 달에 영화 5편에 외식 5번씩은 한다는데~~!! 꿱~~ 게다가 형편도 안 되는 야마모토 상은 쫄쫄 굶어가면서도 외제차를 굴린다..)


                   야마모토 상은 쫄쫄 굶어가면서도 외제차를 굴린다..크흑~~ ㅠ.ㅠ


- 이처럼 주력함을 묶어 놓으니 다른 곳에서 경쟁을 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워싱턴 체제를 더욱 보완하여 규제의 틀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제안된 런던 군축 회담의 배경을 이룬 것은 결국 해군 군비의 틀 자체를 변화시키려는 발상이었다.

- 당시 미 대통령 후버는 만약 새로 개선된 해군 군축 조약을 체결하면 미국은 약 10억 달러의 재정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배경을 보면 그는 1920년대 호황기의 말미에 취임한 대통령이었지만, 런던 회담 직전인 1929년에 주가 대폭락으로 인해 서서히 대공황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하는 국내 경제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 따라서 그는 해군의 군비를 더욱 억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1931년에는 해군 예산을 바닥 수준으로 대폭 삭감하고 여기에 더해 1933년도까지 아예 신규 함정의 건조 자체를 억제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계속 이 지랄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돈 내고 돈 못먹기..건함 경쟁..


- 여기에 1차 대전으로 인해 경제가 폭망, 팍스 브리타니카 따윈 이미 달나라로 보내버린 영국의 상황이야 새삼 말하기조차 쪽 팔리는 상황이었다(이들은 경쟁 체제에 들어간 조약형 순양함 경쟁에서도 처지고 있었다는..-_-;;;;) 
- 하지만, 당시의 3대 해군 국가 중 하나이던 일본은 이러한 사정을 거의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저 간단한 위기감으로 무조건 보조 함정 비율을 워싱턴 조약과는 다르게 10 : 10 : 7로 가져간다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고 런던 회담에 임했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http://www.controversia.com.br/blog/2017/01/08/a-crise-dos-estados-e-o-hoover-do-planalto/
http://www.seahistory.org/assets/2.xml
http://www.the-weatherings.co.uk/pccship0529.htm
http://pwencycl.kgbudge.com/M/y/Myoko_class.htm
http://goinkyomodel.blog.fc2.com/blog-entry-6.html
http://pwencycl.kgbudge.com/P/e/Pensacola_class.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