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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일본은 어떻게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나?<13>/http://blog.daum.net/mybrokenwing




런던 회담에 대비한 일본 해군의 자세(上)


- 1922년 2월, 이른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서 전함 등 주력함의 군축을 논의하였고 일본은 여기에서도 대미 주력함의 보유 비율 70%를 요구했지만, 결과는 이른바 “5 · 5 · 3”, 즉, 미국과 영국에 대비해 60%의 주력함 보유만이 인정되었다.
- 그러나 이때 순양함 등 보조함과 관련한 군축 협정은 프랑스 등의 맹렬한 반대로 인해 명확하게 결정되지 못했는데(워싱턴 조약에서 순양함은 배수량 1만 톤 이하, 주포 구경 8인치 이하라는 규제만 있었을 뿐 그 보유량에 대한 제한은 없었다..) 당시 프랑스는 일본보다도 낮은 영미 대비 1.75%였기 때문에 순양함까지 그런 비율을 적용시키면 아프리카 등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던 식민지의 방어는 완전 물 건너가게 된다고 쌩난리를 부렸다(뭐, 틀린 말은 아니다...-_-;;)


 
- 그래서 순양함은 규제에서 제외되어 각 국이 건조를 지네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므로 거의 방치 상태였지만, 이래가지고는 택도 아니게 순양함 분야는 건함 경쟁이 부활되는 등, 어렵사리 이루어 낸 군축의 성과가 무의미하게까지 되었다.
- 따라서 1927년 2월 미국과 영국, 일본은 워싱턴 해군 군축의 연장선에서 제네바 회의를 개최했지만, 이번에는 미국과 영국의 주장이 대립했고, 순양함을 포함한 보조함 분야에서 미국과 영국은 대등한 전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국에 대해 영국은 “우리는 순양함이 필요한 식민지를 잔뜩 가지고 있다. 미국은 하와이와 필리핀뿐”이라며 보조함 분야에서 영국 우위의 타당성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결국 제네바 회의는 그렇게 허무하게 쫑났다(당시 일본은 뒤에서 “우린 70%..” 소리나 버벅거리다 짐 쌌다는..)



니넨 하와이하고 필리핀 밖에 없지만 우린 전 세계에 있다! 사진은 당시의 마닐라 미 해군 기지..


- 그런데 1929년 가을, 영국에선 노동당의 맥도날드 내각, 미국은 공화당의 후버 대통령이 집권하며 군축을 공약으로 내건 정권이 잇따라 탄생하였고, 워싱턴 조약에서 빠진 보조함에 대한 새로운 규제 협정을 체결하자는 주장이 폭발적인 지지를 얻으며 대세가 되었다.
- 이에 가뜩이나 돈 없어 돌아버릴 지경에 이르렀던 영국의 맥도날드 수상은 바로 워싱턴으로 날아가 미 대통령 후버에게 제네바 조약에서 자신들이 떠들어대던 주장을 슬그머니 꼬리 내리며 보조함 전력에서 영국과 미국의 동등한 보유를 제안했고, 이에 후버가 양보하는 척 동의하면서 일본에게도 새로운 군축 회의에 참가할 것을 호소했다(..가 아니라 압력을 한껏 넣은..)



                       그럼 우린 우째 되는겨? 프랑스의 조약형 순양함 뒤켄급...


- 한편, 1923년 8월 17일 발효된 워싱턴 군축 회담으로 일본의 정책 노선은 끝없는 군비 강화에서 군축 노선으로 180도 전환되며 자신들이 추구해온 88함대로 대표되는 건함 계획에 브레이크가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때만 해도 이후 런던 군축 회담에 비해 일본 해군 내부는 평온 그 자체였다.
- 이는 첫째,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군축의 기운, 즉 안티 밀리터리즘(Anti-militarism)과 언제까지 국가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나 하는 국내의 저항이(이제 허리띠에 더 뚫을 구멍도 없다!! -_-;;) 내외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고, 둘째, 워싱턴 회담을 주도한 카토 토모사부로(加藤友三郎) 해군 장관이 해군 내부에 강력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가능했다.


    해군에 강력한 통제력을 가졌던 카토 토모사부로(왼쪽 두번째..그 옆이 도고 헤이하치로..)


- 물론 워싱턴 조약 시에도 일본 해군 내부에 조약에 반대하는 강경파들은 존재했고, 조약에 참석한 인물들 중에 카토 토모사부로의 수석 수행원이었던 카토 간지(加藤寛治) 중장은 70%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강경론을 주장하였으며, 마찬가지로 수행원으로 워싱턴 회의에 참가한(훗날 일본 해군의 막강 실력자이자 헬 게이트로 몰아넣는 주범이 되는,,) 스에쓰구 노부마사(末次信正) 대좌 또한 조약 체결에 결사반대한 인물이었다.
- 하지만 당시 일본 해군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카토 토모사부로가 태평양 근거지의 현상 유지를 조건으로 영미 대비 60%라는 결정을 내리자 이들은 찌그러지며 일단 이에 동의하였다.
- 쓰시마 해전 당시 연합 함대의 참모장이었던 가토 토모사부로의 권위와 통제력은 절대적이었고, 비록 해군 내에서 반대론이 터져 나왔지만, 결국 그의 결정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찌그러져! 워싱턴 회담 당시의 카토 토모사부로(위)와 찌그러진 카토 간지..


- 그런데 워싱턴 회담 이후 약 10년이 지나 개최된 런던 해군 군축 회담 무렵이 되면 일본 해군 내부의 사정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 1922년 6월, 막강 영향력의 카토 토모사부로를 총리로 카토 내각이 출범했고, 총리가 된 가토가 실시한 해군 군축은 조약에서 보유가 금지된 현존 주력함들을 침몰시키거나 스크랩하는 표면적인 것 외에도 해군 군인들의 대폭적인 정리(이때 해군 장성 70%의 모가지가 날아갔다..중장급은 90%..), 해군 공창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 등 어마무시한 것이었다(짤린 인원수를 보면 장교 이상 1,700명, 하사관 약 5,800명, 해군 관계 노동자 약 14,000명...하지만 워싱턴 조약에서 빠진 보조함 전력을 확대 강화한 면도 있었다...)
- 또한 해군뿐만 아니라 육군에 대해서도 시베리아에서의 완전 철수, 병력과 마필의 대폭적인 정리, 병역 기간의 단축 등을 도모했는데, 1922년 8월과 1923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실행에 옮겨진 이 육군 쪼아대기를 당시 육군 장관이었던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의 이름을 따 야마나시 군축(山梨軍縮)이라고 한다(요건 다음에 이어지는 포스팅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뤄보게씀돠..)


                        카토 내각은 광범위하고 대규모의 군축을 단행한다..


- 카토 내각은 외교 면에서도 일본 군부의 강경파들을 자극하는 행보를 이어갔는데, 1923년, 미국이 워싱턴 회담 당시 체결한 9개국 조약(Nine-Power Treaty.. 중국의 영토를 보전해주고 9개국이 공동 이익을 도모한다는..)의 엄격한 이행을 위해 미국은 일본에 대해 중국에서의 이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으로 1917년 11월에 체결한 이시이-랜싱 협정(Lansing-Ishii Agreement)의 폐기를 요구하였고 그 직후, 가토 내각은 이 협정의 폐기를 공식 인정했다. 
- 이것은 일본이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로부터 강탈한 중국 산동 반도 내의 독일 조차지(자오저우 만(膠州湾)과 칭타오(青島)..), 그리고 칭타오와 지난(済南)을 잇는 산동 철도와 그 지선의 포기를 의미하였기에 일본 군부 내에서는 이런 가토 내각의 외교 노선에 대한 불만이 점점 쌓여만 갔다(특히 육군..우리가 이러려고 칭타오에서 쌩X을 쌌나? 회의감이 든다..-_-;; 참조→ http://blog.daum.net/mybrokenwing/223)




           이럴려고 우리가 쌩X을 쌌나? 당시 일본이 내놓아야만 했던 산동 반도의 이권..


- 하지만 점점 쭈구리가 되어가던 일본 군부에 한 줄기 서광이 비치는 사건이 발생고야 마는데, 1923년 5월, 워싱턴 회담의 뒤처리가 일단락되자, 카토는 자신이 겸임하고 있던 해군 장관 자리에 새로 다카라베 타케시(財部彪)를 기용하며 새로운 정책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8월 24일 총리에 그대로 재임 중인 채 대장암이 악화되어 급사하고 만다.
- 즉, 이렇게 일본 군부를 짓눌러오던 카토 토모사부로가 갑자기 사망하자 그동안 찌그러져있던 군부 내의 강경파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카토 토모사부로의 사망으로 일본 군부엔 한 줄기 서광이 비친다..


- 한편, 워싱턴 조약에 의해 주적으로 상정하고 있던 미 해군 대비 주력함의 60% 보유가 확정되면서 일본 해군은 자신들이 향후 보유할 상대적으로 줄어든 전력으로 미 해군에 맞서기 위한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점감요격(漸減邀撃) 작전이었다.
- 이 쓰레기 작전은 이미 러일 전쟁 직후부터 구상되기 시작했지만, 일본 해군 내에서 이 작전의 구상이 명확하게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18년, 1차 세계대전 직후였다.
- 이때 이미 주력함 수에서 미 해군에 열세인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일본 해군은 1918년의 제국 국방 방침(帝国国防方針) 2차 개정 직후, 함대 결전의 방식을 일시에 모든 전력을 투입해 결전을 도모한다는 종래의 구상에서 색적(索敵 적 함대 접촉)→ 점감(漸減 적 함대 감소)→ 결전(決戦)이라는 3단계 작전으로 바꾸었고 이에 대한 연구에 들어갔다(미국과 친하게 지내는 방법을 모색하는게 맞는 거 아녀?)



              진출해 오는 미 함대를 맞아 단계별로 전력을 소모시킨 다음 한방에 조진다..


-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치열한 건함 경쟁의 와중에 결전에 투입 할 수 있는 주력함을 한 척이라도 더 건조하는 것이 선결 과제였고 점감, 즉 적 함대를 감소시킬 작전은 그저 막연하게 순양함에 의한 기습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당시까지도 구체적이지는 않았으며, 또한 작전 전체에서 점감 부분의 비중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결전이 젤로 중요하다! 이 말씀..어찌나 자신만만하신지..학을 띠겠다..) 
- 하지만 워싱턴 조약으로 인해 결전에 투입할 주력함 전력이 미 해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폭 감소하면서 이제 일본 해군은 색적, 점감, 결전이라는 3단계 전략 중 그 중점을 “어떻게 하면 미국 함대를 줄일 수 있을까?” 하는 점감 단계의 작전으로 옮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 어차피 주력함은 결전 병력으로 보존해 두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일본 해군은 적 함대 전력을 감쇄시킬 전력을 보조함만으로 상정하였고 특히, 그 전력의 핵심은 대형 순양함과 잠수함의 역할이 되었다.



- 하지만 이 점감요격 작전을 실현하려면 2개의 전술적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첫 번째는 색적과 경우에 따라서는 점감 작전도 담당하여야 하는 잠수함의 속력과 항속력의 문제였다.
- 점감 작전에 의하면 잠수함의 임무는 미 태평양 함대의 근거지인 하와이 진주만 인근 해역까지 진출해 대기하다가 미 함대가 발진하는 것을 발견하고 접촉을 계속 유지하는 것인데(그러다 기회 봐서 어뢰 쏘고 토깐다..) 이를 위해서는 도중에 연료가 앵꼬되는 것은 둘째 치고 미 함대를 쫓아가지도 못할 속력을 가져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I-1형 잠수함...


- 두 번째는 잠수함과 마찬가지로 점감 작전의 주역으로 상정된 대형 순양함의 공격력과 속력으로, 이 시기 순양함의 주포는 워싱턴 조약의 규정에 따라 8인치(20cm)를 초과할 수없는 데 비록 야간 기습 공격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화력으로 미국의 주력함인 전함과 순양전함을 격침시킨다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흐음...떡장갑과 대구경 주포의 전함이 밤중이라고 두부살이 되는 건 아니쟈나? -_-;;)

- 또한 30노트 이상의 속력과 대구경 주포를 갖춘 순양 전함이 미 함대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당시 미국이 건조 중이던 렉싱턴급 순양전함은 16인치 주포 8문에 최대 속력은 33.3노트에 달했다..), 기습 후 안전한 이탈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것도 골 때리는 문제였다(당시 조약 제한선을 한계까지 채워 계획한 일본 해군의 최신형 순양함 묘코급의 최대 속력이 35노트..여차하면 뒷덜미가 잡혀 탈탈 털린다..)



               애매한 성능으로 달려 들었다간 작살난다..미 해군의 렉싱턴급 순양전함..


- 따라서 일본 해군은 워싱턴 회의 직후부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신형 순양함과 잠수함의 개발에 주력하였고 특히, 점감요격 작전을 구상한 해군 군령부는 이 작전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대형 순양함을 미국 대비 70%는 반드시 보유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순양함에도 일발필살의 병기, 산소 어뢰용 어뢰 발사관을 꾸역꾸역 끼워넣는다는..)
- 이때 일본 해군 군령부는 자신들이 대미 전쟁에 반드시 필요한 소요 전력으로 적어도 대형 순양함 14척, 잠수함 68척이 필요하며 그 중 점감 임무에만 대형 순양함 12척, 잠수함 15척이 필요하다고 내다보았다.
- 워싱턴 회담 이후 보조함 건함 경쟁에서 양적으로는 호각세이며 질적으로는 미국을 능가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던 일본 해군에게 다가올 런던 회담은 군사력 배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농단으로 미국에게 억눌리게 되었다는 인식이 강했다.


                     왠지 양키들의 모략에 걸려 찌그러지는 듯한 이 느낌은 뭘까?


- 이들은 주력함의 열세를 보완하기 위한 점감 작전의 주역으로 보조함 건조에 온힘을 쏟고 있었는데 만약 런던 회담으로 어뢰 발사관까지 탑재한 대형 순양함도 주력함처럼 미국 대비 60%로 억제되고, 잠수함조차 마음대로 건조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는 곧 일본 해군은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점감요격 작전의 시나리오가 개판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엄청난 초조감을 안고 다가올 런던 회담에서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 자신들의 계획을 유지하기로 하였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http://blog.livedoor.jp/irootoko_jr/archives/1292295.html
http://naval-limits.weebly.com/part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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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zegray.org/navhist/battleships/us_bc.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