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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일본은 어떻게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나?<14>/http://blog.daum.net/mybrokenwing




런던 회담에 대비한 일본 해군의 자세(下)


- 워싱턴 군축 회의에서 일본 측의 수석 수행원이었던 카토 간지(加藤寛治) 중장과 해군의 강경파들은 미국이 일본의 주력함 보유량을 자신들의 60%로 억제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나, 최소 70% 이상이 아니면 해군의 작전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미국 측 제안을 거부하라고 카토 토모사부로 전권 대사에게 강하게 호소했다.
- 그러나 88 함대로 대표되는 일본 해군 증강 계획 추진의 실제 당사자였던 카토 토모사부로는 그런 대규모 함대 증강은 곧 일본 재정의 파탄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던 현실파였고, 따라서 개뿔도 모르고 삐약거리며 나불대는 해군 강경파들의 주장을 일축하고는 군축 조약의 수락 방침을 고수했다.
- 또한 카토는 워싱턴 조약이 태평양의 방비와 ​​군사 시설의 현상 유지도 포함되어 있어, 일본 측이 비록 주력함에서 대미 60%로 불리하지만, 서태평양에서의 미국 세력권, 즉, 필리핀과 괌의 군비도 마찬가지로 제한되어 미 함대의 일본 근해 침공도 힘들게 되었으므로 결국 마찬가지라며 70%주의자들을 억제했다.



    미국의 태평양 기지도 억제되었으니 쌤쌤 아니냐..사진은 30년대 마닐라의 미 해군 기지..


- 앞서도 얘기했지만 쓰시마 해전 당시 연합 함대 참모장이었던 카토 토모사부로의 권위와 통제력은 절대적이었고 비록 해군 내에서 반대론도 강했지만, 결국 그들은 카토의 결정에 복종했다.
- 그러나 워싱턴 회담 직후부터 일본 해군은 이 카토 토모사부로의 워싱턴 조약 60% 수락을 놓고 둘로 분열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원래 한번 눌려 찌그러진 것들은 뒤에서 삐죽거리기 마련..)
- 먼저 가토 토모사부로를 비롯한 해군성(海軍省..내각의 일부이므로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소속의 장교들은 평시 주력함의 70% 유지가 어차피 재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인식하였고 차라리 국가 경제력, 즉, 국력을 충실하게 하여 전시에 70%에 이를 만한 확장성을 가지며 그에 따르는 건함 능력을 꾸준히 보유하고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내각에 속해 군정(軍政)과 인사를 담당하던 나름 온건파 조직 해군성..


- 반면, 카토 간지 등 작전 입안을 담당하고 있던 군령부(軍令部..해군성이 내각에 속해 군정(軍政)과 인사를 담당한다면, 군령부는 해군의 작전과 지휘를 통괄...) 소속 장교들과 연합함대(聯合艦隊)로 대표되는 실전 부대 소속 장교들 대부분은 일본처럼 자원도 공업력도 못 가진 국가야말로 평시에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전시에 의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울컥거렸다.
- 이 “평시 70% 파”는 제 1 차 세계 대전과 같은 장기 소모전은 일본이 지향해야 할 미래전이 결코 아니라 판단했고, 만약 전쟁이 시작된다면 적극적으로 적을 끌여들인 다음, 함대 결전을 벌여서 한 번에 승패를 결정짓는, 소위 속전속결을 지향하는 그룹이었다(전쟁이 니네 맘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냐..벌써 세계 정복하고도 남았겠지..이런 거 보면 딱하다는..-_-;;)



                           하여간 따로 국밥에 콩가루 집안...답이 없다..


- 당시 일본 해군의 강경파 장교들이 분개한 것처럼 물론 워싱턴 회의에는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군사력 증강을 봉쇄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 하지만 이 미국과 영국의 전략에 실제 도움을 받은 것은 누구보다도 일본 자신이었다.
- 워싱턴 회담이 열린 1921년 당시, 미국의 GNP는 일본에 대비해 9.7배에 달했고, 그런 미국을 상대로 정면에서 건함 경쟁을 계속했다면 국가 재정(일반 회계)의 절반을 군사비로(그중 3분의 1은 건함 비용..) 쏟아 부어도 부족했으며, 그런 짓을 1차 대전 이후의 불황 속에서 계속한다는 것은 무모함을 넘어 아예 대 뻘짓에 가까웠다.
- 실제 워싱턴 군축 회담 이후 1924년에서 1930년까지 일본의 7년간 군사비는 국가 세출 대비 평균 27~29%로 이전에 비하면 상당히 안정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당시 일본의 재정 대비 군사비 비율과 군사비 대비 해군비 비율..


- 그렇다면 당시 일본 해군의 강경파들이 주장하던 대미 70% 이론은 어떻게 나온 걸까?
- 원래 이 주장은 러일 전쟁 당시 영일 동맹에 의한 영국의 비호 아래에서 탄생한 “대 미국, 대 독일 70% 이론”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일본 해군이 상정한 가상 적국인 미국과 독일 대비 70%의 주력함 보유가 필요하다는 주장에서 출발했다.
- 이 70%라는 비율의 근거는 공격자는 방어자에 대해 50% 이상의 전력을 필요하다고하는 사토 데츠타로(佐藤鉄太郎)와 아키야마 마사유키(秋山真之..언덕위의 구름으로 유명한..) 등의 가설에서 산출된 것으로, 간단히 말해, “1 : 1.5 = 0.67 : 1”, 즉, 방어자는 적어도 0.67%의 전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 여기엔 저 둘이 열렬히 추종하던 미국의 전쟁사상가 알프레드 세이어 머핸(Alfred Thayer Mahan)의 주장이 크게 뒷받침되었는데, 이 양반 이론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제해권과 해상 봉쇄 그리고 거함거포주의”였고, 세계 요소요소에 식민지를 획득하여 미국의 무역 이익을 수호하며, 외국에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곳곳에 해군 기지를 획득, 이를 증강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한마디로 미국판 제국주의자..요걸 고대로 일본 상황에 대입시켰다는..)



                     꼭 틀린 말은 아니지만 스승 말대로 했다가는 가랑이 찢어질듯...


- 하지만 이 대미+독일 주력함 대비 70%의 달성은 당시 일본의 경제 규모와 국력 꼬라지로 볼 때 불가능에 가까웠고 한 마디로 언덕위의 구름 잡기였다(사실 저게 말이 되나? 하나도 아니고 저 둘을 상대로..하여간 꼴통들..)
- 예를 들어, 1차 세계 대전 개전 시점에 드레드노트(Dreadnought)급 이상의 주력함(드레드노트가 튀어 나오며 그 이전의 구식 전함들은 한마디로 동네북으로 전락했으므로..) 보유량을 보면 일본은 미국과 독일이 보유한 총 톤수의 12.6%, 척수로 따지면 달랑 12.0%에 불과했다.
- 그랬는데 제 1 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인해 독일 해군이 완전히 몰락하게 되자 결과적으로 70% 이론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나름(혹은 지네 맘대로..) 희망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고, 동공이 팽창하며 간이 커진 일본 해군은 미국만 상대한다면 70% 확보도 충분히 가능하다며 완전 작위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1차 대전 당시 각국의 주력함 비교..일본은..흠...70% 좋아하네..ㅠ.ㅠ


- 어쨌든 이 일본 해군의 대미 70% 이론은 국력의 한계를 무시한, 매우 단순 심플한 도식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일 전쟁 직후 반미 감정의 고조를 배경으로(미국이 돈도 안 빌려주고 휴전을 강요해 별 이득도 없이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막가파식 주장..이것도 지네 대가리들이 상황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쌩지랄인데..) 해군 내부에 신속하고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고, 이후 대를 물려가며 공고히 되어갔던 것이다(효종의 북벌론 비스무리..만주 떼놈들을 한방에 조지자!.. 맘이야 굴뚝같지만..거기다 북쪽 새끼돼지도..미국에 핵미슬 쏴서 뭘 어쩔건데?)



                                 이 놈이나 저 놈이나.... -_-;;


- 한편, 미국과 영국의 합의로 인해 새로운 군축 회담 제의가 일본에 날아들자 당시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를 수반으로 하는 내각에 있어서도 긴축 재정과 산업 합리화와 함께 해군의 군축 또한 중요하게 생각하던 과제였으므로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또한 당시 일본 정부는 러일 전쟁 당시에 발행한 국채의 상환시기를 코앞에 두고 있었기에 - 어떡하든 다른 열강들과의 협조를 유지하면서 군축으로 군사비를 절감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으로 생각되었다(하지만..군바리들은 이딴 거 모른다..-_-;;)


 
- 따라서 하마구치 총리는 와카스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郎) 전 총리를 수석 전권 대사로 하고 다카라베 타케시(財部彪) 해군 장관, 마츠다이라 츠네오(松平恆雄) 주영 대사 등으로 협상단을 꾸려 런던에 파견하기로 하였다(야마모토 이소로쿠도 수행원으로 끼어있었다는..)
- 당시 일본 협상단은 회담에 임하기 전에 국무회의를 열어 대응책을 협의하였는데, 이들은 군축 협상에 임하며 반드시 고수하여야 할 마지노선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원칙으로 삼았다.

 
1. 보조 함정 총 톤수 대미 70%
2. 8인치 주포 탑재 순양함 대미 70%
3.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잠수함 배수량의 동결(78,000톤)


- 저 수치가 나온 배경을 생각해 보면, 점감요격 작전을 구상하고 이를 실현시킨다는 전술적 판단을 우선시한 일본 해군 군령부가 대형 순양함의 대미 70%와 잠수함 보유량의 동결은 결코 절충이나 타협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라고 주장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중순양함은 점감 요격의 중추다! 사진은 중순양함 아타고(愛宕)..


- 당시 일본 해군 군령부는 미 해군과 전쟁을 수행하려면 적어도 대형 순양함 14척, 잠수함 68척이 필요하며, 그 중 점감 요격 작전에 소요될 전력으로 대형 순양함 12척, 잠수함 15척을 상정하고 있었다.
- 그런데 일본 해군이 런던 회담 개최 시기인 1929년 말까지 건조를 완료한 수량은 대형 순양함 8척(69,250톤), 잠수함은 59척(원양(遠洋)용 대형 19척, 근해(近海)용 중소형 40척, 합계 64,000톤)에 불과했는데 그래도 이를 런던 회담에 임하는 협상의 전제로 삼은 이유는 모자란 수량은 건조중이라고 아득바득 우겼기 때문이었다(-_-;;;)
- 하지만 당시 일본 해군의 잠수함은 건조 중인 놈까지 몽땅 포함해도 78,000톤에 미치지 못했는데, 실제 1922년부터 1929년 말까지 완성해 취역한 점감 요격 작전용 신형 잠수함은 원양용(색적과 점감, 결전 지원) 19척(29,940톤)과 근해용(감시 및 결전 지원과 잔적(殘賊) 추적용) 26척(22,910톤)으로 총 45척(52,850톤)에 불과해 이는 런던 조약에서 허락된 52,700톤(협상국 모두에게 동일 적용..)에 가까웠다.
- 이 보유량은 거의 일본 해군의 신형 잠수함이 취역한 물량에 맞먹는 것이었으므로 런던 군축 조약은 결국, 일본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보조함 세력을 거의 승인한 것으로 보아야하고, 워싱턴 조약처럼 현재 보유하고 있는 전력의 대폭적인 폐기를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 어쨌든 당시 런던 회담에 임하며 일본 해군은 미래에 미국과 전쟁이 벌어지면 그 승패를 좌우하는 분수령은 러일 전쟁의 쓰시마 해전처럼 일본 근해에서의 함대 결전이 될 것이고(이는 미국도 그렇게 예상...) 따라서 워싱턴 조약으로 줄어든 주력 함대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태평양을 횡단해오는 미 함대를 도중에 잠수함과 보조함으로 공격, 결전 해역에 도달할 때까지 미 함대의 전력을 충분히 소모시키는 전략을 이들은 채택했기에 이에 따른 대책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 상태로 붙었다가는 탈탈 털릴 게 뻔하다! 그래서...(차라리 친하게 지내지?)


- 이때 나온 결론이 추후 벌어질 미 해군과의 함대 결전에서 일본 함대가 승리할 정도로 미 함대 전력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일본의 보조함 대미 비율이 최소 70%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이것은 일본과 미국의 공통된 견해였고 따라서 런던 회담에서 일본은 70%를 주장하고 미국은 60%를 주장한다...)
- 아무튼 이전의 워싱턴 회담은 일본의 진출을 미국과 영국이 의도적으로 억제하기 위해 기획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던 일본 해군내 강경파들은 이를 굴욕적인 조약이라 생각했고, 따라서 이번에도 영미와의 보조함 보유 비율이 쟁점이 되리라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으므로, 이런 과제를 안고 일본 협상단은 1930년 1월, 영국 런던으로 향했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출처>

http://blog.livedoor.jp/irootoko_jr/archives/1292295.html
http://blog.livedoor.jp/stake2id/archives/2015-04-08.html
http://www.public.navy.mil/subfor/underseawarfaremagazine/Issues/Archives/issue_17/chinapatrol.html
http://nozawa22.cocolog-nifty.com/nozawa22/2009/08/post-b338.html
http://www.weblio.jp/content/%E6%B5%9C%E5%8F%A3%E9%9B%84%E5%B9%B8
http://www.imabaya.com/kankore/neko/?p=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