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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일본은 어떻게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나?<16>/http://blog.daum.net/mybrokenwing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의 체결


- 런던 해군 군축 조약(London Naval Treaty)은 같이 편을 먹기로 물밑 작업을 마친 영국과 미국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1930년 1월 21일부터 4월 22일까지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St. James's Palace)에서 세계 주요 해군국 즉, 영국, 미국, 일본, 이탈리아, 프랑스의 5개국이 참여하여 해군 전력 감축에 관해 논의한 국제 회의였다.
- 해군 군축 문제에 관해서는 앞서 열린 워싱턴 회의(1921년~1922년)에서 주력함(전함과 순양 전함)과 항공모함의 건조 및 보유에 대한 제한 협정이 타결되었지만, 이외의 보조 함정(순양함, 잠수함 등)에 대해서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었다.


                   제 1 차 런던 군축 회담이 열린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


- 당시 영국과 미국은 얼마 전까지 극동의 한 똘마니에 불과했던 일본이 단기간에 청나라와 러시아를 물리칠 정도로 성장하고, 세계 3 대 군사 대국의 자리까지 치고 올라온 것에 대해 심각한 위협은 물론 불쾌감마저 느끼고 있었다(지네가 팍팍 밀어줄 땐 언제고..원래 쌈마이를 키워 놓으면 보스를 노리게 되어있다..이런 걸 인과응보라고..)
- 이전까지 그들의 가장 심각한 위협이었던 독일은 1차 세계 대전을 통해 작살을 내놓을 수 있었고, 다음 위협인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내전 상태에 들어가며 자기들끼리 콩가루가 되고 있었으나, 일본은 아군으로 붙어버려 손을 쓸 수가 없었고, 오히려 이 양아치는 자기들이 대전 중 유럽 대륙에서 쌍코피가 터질 때 뒤에서 전략 물자나 공급하며 배를 불리고 중국 대륙을 간섭하며 차근차근 그 세력을 확대했다(이러니 짜증이 안 날래야..)



          딱가리나 하던 것을 좀 키워줬더니 너무 큰다..어이, 심하게 설치는 거 아냐?


- 이렇게 가만 두었다간 영국과 미국에게 매우 불편한 상황이 도래할 것이 빤해 보였으므로 위협을 해서라도 일본에 대해 군축을 재촉해야만 했고, 그 첫 번째 시도로 워싱턴 회의에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이 보유하고 있는 주력함의 60%까지만 보유할 수 있도록 억제되었다.
- 이렇게 마피아 보스들이 자기네 뒤를 노릴까봐 야구 방망이와 사시미 칼을 빼앗자 이 촌동네 쌈마이는 생각했다.
 “그래? 그렇다면 버터플라이 나이프(Butterfly knife)를 잔뜩 만드는 거이얍!”



                      이것들이 사시미 뺐었더니 다른 걸 왕창 만든다..크흑~~ ㅠ.ㅠ


- 이미 머리가 커질 대로 커져버린 쌈마이, 일본 해군은 자신들의 나와바리 확장 계획에 제동이 걸리자 덩치 큰 주력함을 건설하는 것에서 작은 보조함의 대량 건조로 제시까닥 방향을 바꾸었고, 물론 무리해서 작은 함체에 대형 주포를 설치하는 등, 갖가지 삽질로 사고가 빈번했지만, 그래도 물량만큼은 많이 뽑을 수 있었다.
- 이것들이 이딴 식으로 나오자 영국과 미국이 당연히 이 꼬라지를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햐~ 요것들 골 때리네..) 
“이번엔 보조함도 제한하자!!”



                          주력함 제한만 가지고는 안 되겠다! 보조함도 제한하자!


- 미국과 영국이 이렇게 새로운 군축 조약안을 쓰윽 내밀자 신 군국주의의 기치를 내걸었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이 장작림 폭사 사건으로 발랑 자빠지고 그 뒤를 이어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부활을 꿈꾸며 성립된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내각은 “옳다구나!”를 외치며 이를 덥석 받아들였다.
- 대공황의 폭풍이 몰아치며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진 당시 상황에 일본도 심각한 재정 압박과 텅텅 비어버린 국고의 빈곤이라는 경제난의 와중에 있었기에, 하마구치 내각은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 외무장관의 주장으로 대표되는 국제적 협조 외교를 관철시켜, 긴축 재정의 실현과 군축을 통해 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킬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국제적 협조 외교로 유명한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장관...


- 따라서 하마구치 내각은 협상 성립을 목표로 하고 와카츠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郎) 전 총리를 대표로 다카라베 타케시(財部彪) 해군 장관, 마츠다이라 츠네오(松平恆雄) 주영 대사 등을 대표단으로 영국에 파견하였다.
- 한편, 이 회의에 임하는데 있어서 일본 해군은 군령부를 중심으로 자기들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보유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세 가지 협상 원칙을 정부에 제시했다.


1) 보조함 전력은 1931년 말 현재 보유비율을 기준으로 미국 대비 70%
2) 대형 순양함은 대미 70%
3) 잠수함은 1931년 말 현재 보유량인 78,500톤



- 이미 일본 정부는 회의가 개최되기 전인 1929년 11월 30일에 미국의 후버 대통령에게 “보조함은 대미 70% 보유”라는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했지만, 미국은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 어쨌든 이 해군의 요구는 국무회의를 통해 일본 정부의 공식 제안으로 결정되었고, 이를 마지노선으로 삼은 일본 협상단은 1930년 1월, 런던으로 향했으며, 이후 1월 말부터 시작된 회의는 일본과 미국 간의 개별 회담만도 비공식적으로 몇 번씩이나 이루어지며 공방을 거듭했다.
- 이 비공식 회담에서 일본 측은 같은 원칙을 거듭 되풀이하였고 이에 대해 미국은 보조함 총 톤수와 8인치 주포 탑재 순양함은 모두 대미 60%, 잠수함은 대미 66% 보유를 주장, 보조함 합계 총톤수 대미 62%라는 미국의 요구는 일본의 입장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에 회담은 난항에 빠졌다.


            당시 런던에 파견된 일본 협상단..뒤에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보인다..


- 미일의 비공식 회담이 진행된 지 2개월 가까이 지난 3월 13일에 이르러서야 겨우 어느 정도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이 잠재적 합의에 따르면 8인치 주포 장착 대형 순양함은 미국이 18척(180,000톤)을, 일본은 12척(108,400톤)을 보유하며, 구축함은 미국 150,000톤에 대해 일본은 105,000톤, 잠수함은 미일 양측이 동일한 52,700톤을 보유한다는 것이었다.
- 이 합의는 미국 측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주장을 대폭 양보한 것이기도 했는데, 비율로 따지자면 일본은 미국에 대비, 대형 순양함은 60.3%, 경순양함 70%, 구축함 70%, 잠수함은 100%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고, 총 보유 배수량으로 따지자면 미국의 526,2000톤에 대비해 일본은 367,000톤을 보유, 자신들이 요구하던 70%와 거의 동등한 비율인 69.75%에 이르렀다.
 
            대형(重)순양함      경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합계 
 미국       180,000톤       143,500톤     150,000톤    52,700톤    526,200톤 
 일본       108,400톤       104,500톤     105,500톤    52,700톤    367,050톤
 비율         60.3%            70.0%         70.03%       100%       69.75%
 


              주력함은 짜부러졌지만 보조함은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미국이 많이 봐줬다..


- 단순히 산술적 수치로 보면 당연히 일본이 보유 비율에서 미국에 비해 낮기 때문에 일본에게 억울한 합의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아주 단순무식하고 단세포적인 해석으로,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양 대양에 걸친 국가이기 때문에 “함대가 분산될 수밖에 없다”라는 이 한 가지 조건만 간단히 놓고 보아도 결코 일본 측에 불리한 조건인 것만은 아니었다(일본이랑 전쟁한다고 대서양은 텅텅 비워두랴?)    
- 당시 미국 정부가 일본에 대해 이 정도 수준까지 양보한 것에 대해 미 해군은 펄쩍 뛰었고, 특히 잠수함 분야는 보유량 동등이라는 최대한의 양보에 더해 52,000톤의 보유 규모와 개함 최대 톤수 2,000톤이라는 제약까지 더해져 이는 미 해군의 입장에서 보면, 서태평양에서 행동할 수 있는 자신들의 잠수함 전력이 최소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함대를 둘로 갈라야 되쟈나! 사진은 1920년대 태평양 함대 소속 전함 메릴랜드..


- 이때까지만 해도 태평양에서 행동할 장거리 잠수함은 당연히 대형 함정이어야 된다는 사고가 팽배해 있었고, 그런 이유로 일본 해군은 장거리 정찰과 점감 작전에 투입할 대미 결전용 잠수함들을 그에 적합한 규모에 맞춰 건조하였는데(대표적인 것이 기준 배수량 2,200톤의 순잠 3형(巡潜3型)..) 미 해군은 그것을 2,000톤으로 규제하고 그 보유량조차 대등하게 해버렸으니 그들 입장에서 입이 안 튀어나오는 게 이상했다(게다가 잠수함의 작전과 그 용도에 맞는 규모는 대서양과 태평양이 완전히 달랐다..) 
- 하지만 미 대통령 후버는 런던 협약을 비준함에 있어, 이 합의에 따라 미국은 10억 달러의 재정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고, 그는 런던 회의 직전인 1929년에 발생한 주가 대폭락으로 국내 경제가 암울한 상황에 직면했으므로 해군 군비를 더욱 억제하는 정책을 진행, 1931년, 해군 예산의 대폭 삭감에 더 해, 1933년까지 신규 함정의 건조를 억제하는 정책을 세워 그는 미 해군에게 있어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당시 미 해군 내부에서는 이대로 가다간 해군이 멸종할 것이란 얘기까지 나돌았다..)



                태평양과 대서양의 잠수함 작전 환경은 완전히 다르다, 이기야!!


- 한편, 런던 회담장의 와카츠키 수석대표는 이 정도면 자신들의 주장이 충분히 수렴된 합의로 해석하였고, 이렇게 타협하기 위해 “정부 훈령의 취지는 거의 관철되었기에 이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하고 싶다.”는 전보를 본국에 타전했다.
- 협상 상황의 보고를 받은 하마구치 총리는 현재 긴축 재정을 추진 중이고 이를 계기로 해군도 군축하는 편이 좋다는 의견을 제시하며 이를 승인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시데하라 외무장관도 어쨌든 영국과 미국을 거슬려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며 이에 동조했다.
- 해군에게도 미국과의 절충안이 전달되었고 연합 함대 사령관, 해군장관을 거쳐 이후 총리까지 역임하게되는 일본 해군의 원로,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군사참의관(軍事参議官) 또한 “우리의 목표인 70%에 불과 0.25% 모자란 것 아닌가. 겨우 이걸로 해군이 반발할 수도 없는 일”이라며 이에 수긍했으며 해군성도 찬성의 뜻을 나타내었다.


                   총리도 역임하는 오카다 게이스케..훗날 2.26 사건으로 식겁한다...


- 하지만 문제는 일본 해군 내에서 소위 강경파로 분류되던 군령부(軍令部)였다.
- 저런 조건으로 타협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해군 군령부 총장 카토 간지(加藤寛治) 대장은 “개별적으로 보면 대형 순양함은 결국 60% 보유라는 소리이고, 잠수함은 실질적으로 대폭 줄어든 결과다. 해군이 제시한 3대 원칙은 절대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비율이자 해군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며 펄쩍 뛰었고 군령부 차장 스에쓰구 노부마사(末次信正)도 이에 적극 동조했다.



           이것들아, 니네가 작전을 알어?! 강경파의 수장, 군령부 총장 카토 간지..


- 실질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일본 해군 군령부는 이미 대미 결전 작전을 수립해 놓고 있었는데, 이노마들이 꾸며놓은 작전에 의하면 미 해군과의 결전에 보조함정으로 적어도 대형 순양함 14척, 잠수함 68척이 필요하고, 그 중 점감요격 임무에만 대형 순양함 12척, 잠수함 15척을 배분해 놓고 있었다.
- 따라서 군령부의 참모 장교들은 자신들이 요구한 소요 전력과 전력의 잠정적 배치를 비교 검토한 결과, 만약 저런 조건으로 미일 타협안을 인정하면 대형 순양함 2척, 잠수함 26척이 부족하게 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며 전력량 부족을 강력히 호소했다.


                            미국 놈들과 타협하면 전력이 부족하다!! 


- 그러나 이것들이 꾸민 작전 계획안을 조금만 뜯어보면 완전한 헛소리까지는 아니지만 반쯤은 헛소리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이래가지곤 전쟁 못해!”라며 핏대를 올리던 당시 일본 해군 군령부 스스로가 추산한 잠정 전력 배치 계획에 따르면, 점감 작전을 담당하는 제 2 함대에서 잠수함 1척, 결전 작전을 담당하는 제 1 함대에서 대형 순양함 2척, 잠수함 1척이 부족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다만, 원래 2 선급의 전력으로 구성하도록 예정하고 있던 제 3 함대(필리핀 공략 부대..이것들은 이미 이때부터 미국과 전쟁하면 바로 필리핀을 주워 먹으려 생각하고 있었다..)에 약간의 전력 감소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전력이 부족하다니까! 근데 뜯어보면 그게 아닌디??(위 조직표는 당시 상황과 다름)


- 하지만 애초부터 제 3 함대는 점감요격 작전에 근거한 함대 결전 시나리오의 범위 밖에 있는 부대였고, 따라서 미국과의 협상 성립이라는 현실과 타협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주구장창 빨아대며 상정한 함대 결전 계획이 와해되며 물거품이 되거나, 상정한 계획보다 부족한 전력으로 미 함대에 대들어 작살날 이유 따윈 전혀 없었다.


             니네가 주구장창 떠들어 대는 점감 요격이나 함대 결전과는 아무 상관 없쟈나??


- 어쨌든 이런 해군 강경파들의 반대로 인해 그 결정이 약간 지연되긴 하였지만 1930년 4월 1일, 하마구치 총리는 국무회의에서 이 협정안을 승인하기로 하고 즉시 히로히토에게 보고, 재가를 얻은 다음 그 취지를 런던에 발신했다. 
- 이 군축 타협안을 놓고 당시 일본의 신문과 여론은 거의 대부분 정부의 결정을 지지했지만,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우익 단체들은 일제히 "우리의 국방을 시궁창에 빠뜨리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고, 이런 양 진영의 치열한 대립 속에 1930년 4월 22일,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은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churchillarchives/12118172406
http://www.geocities.jp/k_saito_site/doc/tango/maizurukooshyo1.html
https://ja.wikipedia.org/wiki/%E6%9D%A1%E7%B4%84%E5%9E%8B%E6%88%A6%E8%89%A6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Japanese_cruiser_Izumo_in_Shanghai.jpg
http://blog.livedoor.jp/irootoko_jr/archives/333099.html
http://ameblo.jp/technobraker00/theme2-10073696579.html
http://daihonnei.wpblog.jp/fight-side-of-the-submar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