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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싱가포르 함락(61)-항복권고문 투하/http://pacificwar.tistory.com/256?category=657089

61. 항복권고문 투하


1942년 2월 11일 새벽이 되었을 때 서부지구사령부는 밤새 제12여단에게 벌어진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몰랐다. 부킷판장이 뚫렸다는 소식을 들은 서부지구사령부는 11일 새벽 2시 15분, 톰포스 지휘관 토머스 중령에게 부킷티마와 부킷판장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토마스 중령은 우익에 제4노퍽대대, 중앙에 제18정찰대대, 좌익에 셔우드포레스터대대를 배치했다. 제4노퍽대대는 255고지와 275고지를 점령했으나 더 이상의 진출은 불가했다. 결국 11일 정오가 되자 노퍽대대는 보병제11연대의 공격을 받아 275고지에서, 보병제42연대의 공격을 받아 255고지에서 쫓겨났다. 제18정찰대대의 공격은 부킷티마 역 부근에서 보병제21연대의 강력한 사격에 막혔다. 제2/29호주대대의 지원을 받은 셔우드포레스터대대는 주롱도로의 8마일 이정표까지 진출하여 부킷티마에서 370m 까지 접근했으나 오전 10시 30분에 보병제114연대에게 밀려났다. 토머스 중령은 오후 1시에 공격이 실패했다고 보고했다. 사실 당연한 것이 톰포스가 상대한 일본군은 제5사단(보병제11, 제21 및 제42연대)과 제18사단(보병제114연대)의 4개 보병연대였다. 톰포스는 11일 오후에 경마장 지역으로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제2/29호주대대는 별다른 명령을 듣지 못한 채 부킷티마 남쪽에 머물러 있었다. 11일 저녁이 되어 일본군에게 포위될 위험에 빠지자 제2/29호주대대는 남쪽으로 철수했으나 도중에 지속적으로 일본군과 교전하면서 병력이 흩어졌다. 대대장 폰드 중령이 12일 아침에 서부지구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그가 이끌던 병력은 본부중대의 일부 뿐이었다.


퍼시발 중장은 11일 오전 6시에 약 1.6km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기관총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사임 도로에 있던 말레이 사령부를 나서 포트 캐닝과 부킷티마 도로를 시찰한 그는 오전 7시에 맥리치 저수지 서쪽에 위험한 간격이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증원병으로부터 7개 중대를 차출하여 골프장 지역으로 파견했다. 또한 창이 지역에 있던 제2고든대대를 서부지구에 배속하고 북부지구와 서부지구의 경계선을 조정하여 경마장 동쪽을 북부지구에 편입시켰다.

경계선이 조정되자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11일 오전 9시에 부하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부킷티마가 점령되고 제11사단의 좌익이 열렸기 때문에 적은 북쪽이나 서쪽으로부터 침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을 막기 위하여 제18사단으로부터 추가로 병력을 빼와야 했다. 히스 중장은 제18사단장 백위스-스미스 소장에게 톰포스에 이어 추가로 1개 여단 규모의 부대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백위스-스미스 소장은 다시 부대를 만들고 제55여단장 마시-베레스포드 준장에게 지휘를 맡겼다.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마시 포스로 불린 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캠브리지셔대대(제55여단), 제4서퍽대대(제54여단), 제5/11시크대대(남부지구), 제3기병연대 분견대, 제342야포대, 제100경전차중대


제100경전차중대는 12.7mm 기관총을 주무장으로 사용하는 5톤짜리 비커스 마크6 경전차 18대로 이루어졌으며 1942년1월 29일에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비커스 마크6 경전차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s://en.wikipedia.org/wiki/Light_Tank_Mk_VI)


제3군단의 직접 통제를 받는 마시 포스의 임무는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는 적을 톰슨 마을에서 막는 동시에 우들라이의 펌프장을 지키는 것이었다. 마시포스는 11일 오후에 맥리치 저수지 부근에서 편성되었다.


제11사단의 서쪽 측면을 지키던 제27호주여단장 맥스웰 준장은 11일 오전 7시 30분에 부킷판장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7호주여단사령부의 기록에 의하면 명령의 출처는 퍼시발 중장으로 되어 있다. 문제는 만일 퍼시발 중장이 명령했다면 제3군단장 히스 중장과 제11사단장 키 소장을 거치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이들은 전혀 몰랐다. 따라서 히스 중장과 키 소장은 이 명령을 서부지구사령부가 내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벤넷 소장은 부인했다. 아마도 혼란 중에 퍼시발 중장의 명령이 지휘계통을 뛰어넘어 직접 제27호주여단에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명령에 따라 제2/30호주대대는 남쪽의 제2/26호주대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11일 오전 9시에 남하를 시작했다. 제2/30호주대대는 이동을 시작하자마자 일본군과 접촉하여 계속 전투를 치르면서 힘겹게 남하했다. 맥스웰 준장은 제2/10호주야포연대에 화력지원을 명령했으나 전달되지 않았다.

한편 제2/26호주대대장 옥스 중령은 11일 새벽에 남쪽의 부킷티마가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공격 명령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옥스 중령은 경마장 지역으로 후퇴하여 제27여단본부와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제2/26호주대대가 송수관까지 왔을 때 부킷판장 탈환 명령을 받았으나 이미 돌아가기에는 늦었다. 목장 지역에 도달한 제2/26호주대대는 보병제11연대 소속의 일본군 약 2,000 명이 집결해 있는 것을 보았다. 전력에서 밀리는 제2/26호주대대는 적의 눈을 피하여 남하, 골프장 지역을 거쳐 탕글린으로 후퇴하여 제12인도여단의 잔존병과 만났다. 제2/26호주대대의 철수 도중 일본군과 교전이 벌어졌는데 이때 베른 대위가 지휘하는 A 중대는 낙오되었다.


한편 힘들게 합류 지점까지 남하한 제2/30호주대대장 램지 소령은 제2/26호주대대가 이미 철수했다는 걸 알았다. 단독으로 공격을 실시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 램지 소령은 저수지 지역으로 철수했다. 제2/30호주대대는 도중에 낙오한 제2/26호주대대 A 중대 약 70명을 만나 흡수했다. 저수지 지역에 도착한 램지 소령은 전화선을 깔고 있던 제27호주여단의 통신장교를 만나 며칠 만에 제27호주여단장 맥스웰 준장과 통화할 수 있었다. 맥스웰 준장은 적이 제11사단의 보급선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톰슨 도로의 9마일 이정표 지역을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제27호주여단이 받은 명령에 대해 모르고 있던 제11사단장 키 소장은 자신에게 배속되어 좌익을 지키던 제27호주여단이 보고도 없이 이동해 버리자 당황했다. 키 소장은 제8여단장 트롯 대령에게 130고지 공격을 취소시키고 공격을 준비하던 제2/10발루치대대(파커 중령)를 만다이 도로의 13마일 이정표 지역에 보내어 사단의 좌익을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제27호주여단이 제3군단의 좌익을 지켜주지 못하게 되자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해군기지 포기를 결심했다. 해군기지 포기는 11일 오후 6시에 이루어졌다. 제53여단은 니순 북쪽의 셈바왕 비행장으로 철수했다. 제8여단은 니순 교차로로 철수했고, 제28여단은 니순 남쪽에서 예비대 역할을 했다. 톰포스와 마시포스를 차출하여 껍데기만 남은 제18사단은 그 자리를 지켰다.


(1942년 2월 10일 현재 싱가포르 섬의 상황.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92)


11일 오후에 제18사단장 벡위드-스미스 소장이 톰포스와 마시 포스를 방문했다. 그는 양 부대가 자리잡은 지형이 방어에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후방으로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이 동의함으로써 톰포스와 마시 포스는 11일 저녁에 맥리치 저수지 - 경마장 - 경마장 마을을 잇는 선으로 철수했다. 우익은 마시포스, 좌익은 톰포스가 맡았으며 창이 지역에서 이동해 온 제2고든대대가 톰포스의 왼쪽에서 제22호주여단과 연결했다. 


제22호주여단은 제2/4기관총대대 병력들을 보병으로 지원받고 전장에서 탈출한 병사들을 끌어모아 재편성한 상태였다. 방어선은 철도-홀랜드 도로 교차점에서 200고지를 거쳐 소년원 도로-울루판단 도로 교차점까지 활 모양으로 휘어 있었다.

우익은 제2/20대대의 잔존병을 모아 만든 40명 규모의 혼성중대와 제2/29호주대대 D 중대가 지켰다. 중앙은 제2/4기관총 대대의 주력이 지켰다. 좌익은 로버트슨 중령이 제2/19대대의 잔존병에 기관총대대 병력을 더하여 지켰다. 방어선 바로 후방에는 영국대대와 몇몇 영국군 부대가 방어선을 지원했으며 제2/18호주대대는 예비대였다. 제22호주여단의 방어선은 11일 오후 내내 일본제18사단(보병제56 및 제114연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호주병사들은 저공비행하는 일본기로부터 지속적인 폭격과 기총소사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방어선을 지켰다.

제2/15호주야포연대와 제5야포연대는 간밤의 혼란을 극복하고 화력지원을 시작했다. 제22호주여단에 대한 공세를 좌절시키는데 포병이 큰 역할을 했다. 일단 일본군의 공격이 큰 인명피해를 남기면서 실패하자 제22호주여단의 방어선은 밤새 조용했다.


(1942년 2월 12일 - 15일에 걸친 싱가포르 섬의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415)


제22호주여단의 왼쪽에서는 제44여단이 소년원 도로-라자 도로 교차점까지 지역을 지켰다. 그 남쪽에서는 제1말레이 여단이 판장파시르의 해안까지 연결된 방어선을 지켰다. 제1말레이 여단에는 제18사단으로부터 제5베드퍼드셔대대와 허트퍼드셔대대의 2개 중대, 그리고 영국 및 인도 공병들로 이루어진 공병대대가 증원되어 있었다. 제44여단과 제1말레이여단은 12일 아침까지 공격을 받지 않았다.


11일 오후 8시에 퍼시발 중장은 담당 구역을 다시 재편했다. 12일 0시를 기하여 제3군단은 부킷티마 도로 서쪽을 담당했다. 제8호주사단(벤넷 소장)은 부킷티마 도로와 울루판단 도로 사이의 부대를 통제했다. 울루판단 도로에서 해안까지는 남부지구 소관이었다. 톰포스는 마시 포스와 합쳐져 제3군단의 지휘를 받았다.


11일에 일본기가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중장이 퍼시발 중장에게 보내는 항복권고문을 담은 45cm 크기의 나무통 29개를 영국군 지역에 투하했다. 제25군 참모 스기타 이치지 중좌가 초안을 잡고 야마시타 중장이 결재한 항복권고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항복권고문


대일본군사령관은 일본 무사도 정신에 의거하여 말레이 주재 영군사령관께 항복을 권고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귀군이 영국의 전통적 정신에 따라 고립된 싱가포르를 수비하면서 용전을 벌여 영군의 명예를 높인 점에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전국은 이미 결정되어 싱가포르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저항은 시에 거주하는 다수의 비전투원들에게 직접 위해를 주면서 전쟁의 참상에 끌어넣을 뿐 귀군의 명예를 높이지 못할 것입니다.

본직은 각하가 우리의 권고를 받아들여 무의미한 저항을 단념하셔서 속히 전 전선에 전투 정지를 명령하시고 동시에 아래 절차에 따라 속히 군사(軍使)를 파견하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만일 반대로 저항을 계속하실 경우에는 인도상 하기 어렵지만 아군에게 싱가포르에 대해 철저한 공격을 가하도록 명령하겠습니다.

본 권고를 마치면서 저는 각하께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아래


1. 군사는 부킷티마 도로를 전진한다.

2. 군사는 큰 백기와 유니언 잭을 게양하며 약간의 호위병과 동행할 수 있다.


소화 17년 2월 10일


대일본군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영군최고지휘관 퍼시발 중장 각하


퍼시발 중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항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문구는 정중했다. 야마시타 중장의 지적은 상당 부분 사실이었다. 부킷티마의 식량창고를 탈취당함으로써 퍼시발에게는 군대에게 14일 간 보급할 수 있는 식량만이 남았다. 싱가포르에 물을 공급하는 저수지와 펌프장은 일본군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공습과 포격으로 수도관이 깨져서 물이 헛되이 쏟아지고 있었다. 소방수 사용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본기가 인구 밀집 지역에 소이탄 공격을 가한다면 끔찍한 피해가 발생할 것이었다.


그러나 퍼시발 중장은 웨이벌 대장으로부터, 그리고 웨이벌 대장은 처칠 수상으로부터 강력한 명령을 받고 있었다. 처칠 수상은 민간인의 희생을 고려하지 말고 최후까지 항전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야마시타 중장은 회답을 받지 못했다. 퍼시발 중장은 웨이벌 대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야마시타 중장의 항복권고를 알린 다음 자신은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퍼시발 중장에게는 일본군 진지에 답신을 떨어뜨릴 비행기가 없었으므로 그는 거부하는 답신을 보낼 수 없었다. 그날밤 퍼시발 중장은 부하들에게 중요한 군수품이 일본군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