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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폭풍전야(9)-태평양의 미해군/http://pacificwar.tistory.com/82?category=648786

9. 태평양의 미해군

 

1922년부터 미해군은 주력을 태평양에 배치했다.

공개적으로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미해군의 고위 장교 대부분이 다음 전쟁은 일본과 싸울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931년 4월 1일 현재 미해군의 주력 전투함은 전함 15척, 항공모함 3척(랭글리, 새러토가, 렉싱턴), 순양함 18척, 구축함 78척, 잠수함 55척이었으며 이외에 포함, 구잠함, 예인선 및 각종 모함 115척이 있었다.

이들 함정들은 1923년 이래로 미국함대(United States Fleet)와 소규모의 아시아 함대(Asiatc Fleet)로 나뉘어져 있었다.

 

미국함대는 다시 4개 부대로 나뉘어 있었다.

 

1. 전투부대(Battle Force) : 전함 및 항공모함 세력과 순양함전단 1개, 구축함전대 3-4개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태평양에 전개했다.

1941년 2월 1일자로 태평양함대로 이름이 바뀐다.

 

2. 정찰부대(Scouting Force) : 전투부대에 포함되지 않은 순양함과 구축함으로 이루어져 대서양과 카리브 해에 전개했다.

구형전함 3척과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진 훈련전단(Traing Squadron)을 포함하고 있었다.

1941년 2월 1일자로 대서양함대로 이름이 바뀐다.

 

3. 잠수함 부대(Submarine Force) : 태평양과 대서양에 양분되어 있었다.

 

4. 기지부대와 지원부대(Base Force and Train) : 역시 태평양과 대서양에 양분되어 있었다.

 

아시아 함대는 규모가 훨씬 작았으며 산뚱 반도의 옌타이에 기지를 두고 구축함 19척으로 이루어진 남중국 순찰대(South China Patrol), 상하이에 기지를 두고 강상포함들로 이루어진 양쯔강 포함대(Yangtze River Gunboat Flotilla), 잠수함 12척 및 약간의 지원함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835년에 동인도전대(East India Squadron)로 시작한 아시아 함대는 100 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으며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민과 그들의 재산을 해적을 비롯한 위협으로부터 지켰다.

임시로 대장 계급을 가지는 아시아함대 총사령관(Commander in Chief Asiatic Fleet)는 상하이 조계에 주둔하는 제4해병연대와 베이징의 미국공관을 지키는 해병여단도 지휘했다.

아시아 함대의 함정들은 1년에 몇 달은 필리핀에 정박했으며 싱가포르, 하노이, 홍콩, 바타비아와 일본의 항구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항구들을 순방했다.

이러한 순방은 장교에게는 좋은 경력이 되었고, 수병에게는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동아시아의 미국인에게는 즐겁고 신나는 경험이었다.

 

미국함대는 매년 봄에 모두 모여 훈련을 했는데 이것을 함대훈련(Fleet Problem)이라고 불렀다.

함대 훈련은 주로 태평양에서 실시하여 정찰부대가 파나마 운하를 통하여 태평양으로 이동했는데 1939년에는 카리브 해에서 실시하여 전투부대가 운하를 통과했다.

 

함대훈련은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이 만주국을 만든 1932년의 함대훈련 때는 기간이 통상의 7주 보다 2주 더 길어져 5월 28일까지 정찰부대가 대서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태평양에 머물렀으며 이어서 항공모함 3척이 동시에 훈련을 시작하여 여름 내내 함재기를 띄워대면서 태평양을 돌아다녔다.

이런 방식으로 미국정부는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불편한 속내를 내비쳤다.

 

1932년의 경우를 제외하면 함대 훈련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실시했다.

웨이크, 괌, 그리고 필리핀이 서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날짜변경선을 넘는 경우는 없었으며 매년 일본해군의 참관을 허용했다. 

 

미해군과 일본해군은 1930년대 말까지 꾸준히 교류했다.

매년 미국함정이 요코하마나 나가사키를 방문했으며 일본함정도 일본인이 많이 사는 호놀룰루나 샌프란시스코를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미해군 장교는 일본해군 장교가 대체로 신사이며 무식한 육군 장교와는 완전히 다른 부류라고 생각했다.

일본해군 장교 중 많은 수가 영어를 할 줄 알았다는 사실도 이런 우호적인 평가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미해군은 일찌기 장교 일부를 일본어와 일본문화에 정통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일본에 파견하는 정책을 써 왔다.

이러한 정책의 효과는 좋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적의 암호를 해독하는데 큰 공을 세운 로슈포트 중령이나 태평양 함대 내의 대표적인 일본통인 정보참모 에드윈 레이튼 중령이 이러한 정책에 따라 일본에 파견된 경력이 있다.

그러나 배출된 인원은 20년 동안 겨우 36명으로 턱없이 모자랐다.

결국 1941년 10월에 해군언어학교(Navy Language School)를 설립하여 짧은 시간에 일본어를 훌륭하게 구사하는 인원들을 대량으로 길러내어 수요를 맞출 수 있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 미해군은 조약의 제한에다가 정부와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필수 인원을 확보하고, 함정과 무기를 정비할 예산을 따내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미해군에게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였다.

 

1933년 6월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불황 타개용 긴급 자금의 일부를 해군에 배정했다.

덕분에 기능을 멈추었던 미국의 조선산업이 전해의 패러것 급 구축함 8척에 더하여 요크타운 급 항공모함 2척, 순양함 4척, 구축함 20척, 그리고 잠수함 4척의 주문을 받으면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1934년 3월에 미의회는 제1차 트라멜-빈슨 법을 통과시켜 미해군을 런던 조약이 허용하는 한계까지 키울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의회는 인력 충원을 위한 예산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1935년 현재 미해군은 8,063명의 장교와 82,500명의 부사관 및 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일선 함정들의 승조원 충원율은 81% 에 지나지 않았다.

 

미해군은 1935년부터 군축조약 실효에 대비해 신형 함정들의 설계에 들어갔다.

노스캐롤라이나 급 전함의 설계가 1935년에 시작되어 1937년에 완성되었고, 이어서 38년에는 사우스다코타 급, 39년에는 아이오와 급의 설계가 완성되었다.

대공경순양함 애틀랜타 급의 설계도 1937년에 완성되었다. 

 

1938년 5월 17일에 미해군 세력을 20% 증강하는 내용의 제2차 빈슨법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신형전함들과 항공모함들이 추가로 건조되기 시작했다.

6월에는 미국과 영국 및 프랑스가 전함의 배수량을 35,000톤에서 45,000톤으로 늘리기로 합의함으로써 아이오와급 전함의 건조가 가능해졌다.

물론 일본은 이미 64,000톤짜리 야마토와 무사시를 건조하고 있었다.

 

1939년이 되자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엔터프라이즈가 취역했으며 와스프와 호넷은 건조 중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 급 전함 2척도 건조 중이었으며 사우스다코타 급 3척이 새로 건조에 들어갔다.

이외에 구축함 31척과 잠수함 6척도 건조 중이었다.

 

(CV-5 요크타운.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미해군은 이제 성장하기 시작했으나 해군 관계자들의 눈에는 성장이 너무 느렸다.

1933년 7월 1일부터 1939년 6월 30일까지 6년간 새로 취역한 전투함은 항공모함 2척, 순양함 16척, 구축함 53척, 잠수함 20척에 지나지 않았다.

참고로 1943년 한해 동안 취역한 함정 숫자는 항공모함 6척, 경항공모함 9척, 호위항공모함 24척, 전함 2척, 순양함 11척, 구축함 129척, 호위구축함 221척, 잠수함 66척이었다.

 

1939년 7월 1일 현재 미해군은 전투함 수는 증강되었으나 수송함들은 부족했다.

당시 미해군이 보유한 수송함은 병력수송함 2척, 화물수송함 3척, 급유함 3척, 탄약수송함 1척이 전부였다.

신형의 시마론 급 고속급유함 2척과 수상기모함, 잠수모함, 그리고 구축함모함을 합쳐 5척이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병력도 39년 9월 8일 현재 126,418명으로 여전히 모자랐으며 훈련상태 또한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미해군의 가장 큰 문제는 기지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미해군은 태평양에서 항상 기지가 모자랐으며 덕분에 함정들의 해상작전 지속능력이 긴 편이었으며 해상보급에도 일찌기 눈을 떴다.

하지만 어쨌든 기지가 부족하다는 것은 공격을 받았을 때 의지할 수 있는 근거지가 없어 후퇴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의회는 1938년 5월에 해군장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만들어 미본토와 해외 영토에 추가적인 해군기지와 잠수함 및 해군항공기지를 만들 필요성에 대하여 조사를 의뢰했다. 

위원장의 이름을 따서 헵번 위원회라고 불린 이 위원회는 12월 1일에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 보고서는 이후 미국이 해군기지를 정비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헵번 보고서의 내용 중 태평양과 관련된 주요 권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알래스카 : 코디액 섬과 더치 하버에 잠수함 기지와 비행장을 만들고, 시트카에 비행장을 만든다.

오아후 섬 : 진주만의 포드 섬 비행장을 확장하고, 카네오헤에 비행장을 만든다.

미드웨이와 웨이크 : 비행장과 잠수함 기지를 만들고 초호에 커다란 모함이나 급유함이 들어갈 수 있도록 준설한다.

괌 : 비행장과 잠수함 기지를 만들고 대공포와 해안포를 배치하며 전면적인 공격에 대항하여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강력한 수비대를 주둔시킨다.

 

이외에도 햅번 보고서는 존스턴 섬, 팔미라 섬, 칸톤 섬, 그리고 사모아의 끝자락에 있는 로즈 섬에 유사시 수상기 모함이 전개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설비를 갖추고 대서양 지역의 기지들도 개발하라고 권고했다.

 

의회는 가급적 헵번 보고서의 권고를 따랐으나 괌의 개발에는 반대했다.

 

해군 전략가들은 일본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오면 필리핀 전토를 방어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미군에게 있어 최선은 바탄 반도에 들어가 일본군이 마닐라 만의 항구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때 괌은 반격의 출발점이 될 것이었다.

괌이 강력한 비행장과 잠수함 기지를 갖추고 주변의 사이판을 제압하면서 버티고 있으면 일본군은 필리핀 동쪽의 항로는 사용하지 못할 것이며 미해군은 미드웨이와 웨이크를 징검다리 삼아 괌에 도착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필리핀을 구원하러 갈 수 있을 것이었다.

 

의회는 생각이 달랐다.

괌의 위치 때문에 일본도 전력을 다하여 괌을 점령하려 할 것이고 그럴 경우 지탱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아프라 항을 준설하기 위한 500만 달러의 예산이 1939년 2월 23일에 하원에서 205대 168로 부결되자 미해군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괌은 무방비로 내버려졌고 개전과 동시에 점령되었다.

 

해군 관계자들은 의회가 일본을 자극할까봐 두려워 괌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만약 괌이 건재했다면 태평양 전쟁의 초기 진행이 많이 달라졌을 거라며 아위숴했다.

 

일리가 있는 생각이지만 일본군의 전면적 침공에서 괌을 지키려면 대규모 수비대를 주둔시켜야 했을 것이며 그렇게 해도 점령을 면할 뿐 고립되어 무력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키고자 했던 웨이크에도 방어병력을 충분히 배치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미국이 괌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능력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우며 가능하다고 해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을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