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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한국천주교 교회약사/http://cafe.daum.net/jangdalsoo/gCfF/173

1. 가톨릭의 기원과 동양에의 진출

 

천주교는 유대 땅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세우신 교회로서 그의 12사도들이 각지를 돌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파해 왔으며 그의 발상지는 예루살렘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펴는 사업에는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피의 순교가 뒤따랐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피로써 희생하여 우리 죄를 구속하는 표본을 보였으니 그 사업에 피의 순교가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로마 제국 통치하에 있던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피의 순교는 300년이나 계속되었으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신자들이 지하묘지(카타콤보 Cataconb)는 당시의 박해가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Constontinus, 325) 황제 때에 이르러 가톨릭은 인정을 받아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각 지역에서 수없이 박해를 받으며 명멸을 거듭하다가 땅 위에 사랑과 평화의 씨를 뿌리며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개별적으로 동양으로 눈을 돌려 여러 가지 변형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한 형태를 갖추어 본격적으로 동양에 진출한 시기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1. 고아(Goa) 교구

 

가톨릭이 동양 진출의 첫 발을 내디딘 곳은 인도의 ‘고아 교구’였다.  1534년, 교황 바오로 3세는 인도에 고아 교구를 설정했다. 관할 지역으로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에서 동쪽으로 전역을 지정했다. 이 교구는 그 후 차츰 확장되어 "말라카 교구"를 분리하고 수도좌 교구가 되었으며 1866년에는 총주교좌로 대우하게 되었다.

 

1-2. 말라카(Malaca) 교구

 

말라카 교구는 1557년 고아 교구에서 분리되어 인도 동쪽의 극동을 포함시켜 독립 교구로 정했다. 이 교구의 관할은 인도지나 일대와 중국을 포함시키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1-3. 마카오(Macao) 교구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1576년 새로 설정했다.  관한 지역은 말라기를 제외한 극동 전역을 맡았다.  인도차이나와 중국, 일본 전 지역인데 일본에는 이미 1549년에 예수회 소속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rancisco Xavie1 1506-1552)에 의해 가톨릭이 들어가 규수(九州), 야마구찌(山口) 지방에 전파되고 있었다.

 

1-4. 남경교구, 북경교구

 

교황 알렉산델 8세가 1690년에 남경교구와 북경교구를 마카오 교구에서 분리 독립시켰다.

 

 

2. 마태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

 

이보다 앞서 1595년에는 이탈리아 태생인 예수회 소속 마태오 리치(Mattel Ricci, 1552-1610) 신부가 고아에서 마카오를 거쳐 남경에 이르렀다.  1600년에는 북경에 들어가서 천주교를 전파하면서 명(明)나라 황제 신종(神宗)의 허락을 받아 1601년 북경에 교회당을 세웠으며, 이 교회의 이름은 남당(南當)이라고 하였으며, 그가 죽을 때까지(1610년)  2,500여명이 영세 입교하였다.

 

황제가 마태오 리치 신부를 아끼고 등용하여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성모상, 십자가, 고상(苦像), 천주경(기도문), 자명종, 만국지도(萬國地圖), 풍금 등을 황제에게  바쳤으며,  천주실의(天主實義), 서국기법(西國記法), 기하원본(幾何原本), 만국여도(萬國與圖)등 열일곱 가지 이상의 책을 지어 교회 발전에 크게 활약했다

 

마태오 리치 신부가 지은 남당에는 해마다 여러 차례 북경을 내왕하는 조선의 사신들이 반드시 찾아보는 명소가 되었으며 [천주실의]는 이들에게 대단히 흥미 있는 신학문이었다.

[천주실의]는 1595년 중국 남창(南昌)에서 출판되었고 1601년 북경에서 재판이 나왔으며, 1603년에는 저자 마태오 리치 신부의 서문을 붙여 3판이 나왔다.

 


2. 슬기로운 우리 조상들의 진리 탐구열 (Ⅰ)

 

3-1. 우리 손으로 옮겨 심은 씨앗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외국의 경우와는 좀 다른 경로를 밟아서 이루어졌다. 우리 스스로가 외국에 가서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고 여러 가지 서적을 들여와 뜻있는 학자들이 모여 연구와 토론을 거듭하면서 책을 풀어 쓰고 이것을 돌려가며 연구하고 가르치고 목숨을 걸고 외국 신부를 모셔다가 교리를 전파하기에 이른 것이다. 진리의 씨앗을 찾아 북경(北京) 5천리, 왕복 1만 리 길을 내왕하면서 우리나라에 심은지 200년이 되는 한국의 천주교가 어떤 경로를 밟아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이를 몸소 실천한 선각자 선구자는 누구였는지 역사에 나타난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차분히 살펴보면서 수만 명의 거룩한 피로 이어진 대박해의 연속과 그 후계자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3-2. 소현세자와 아담 샬 신부

 

만주 지방에 여진(女眞)족이 청(淸)이라는 나라를 세워 세력을 넓히고 이웃 나라들을 침범하기 시작할 무렵 우리나라도 큰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1636년, 이조 16대왕 인조(仁祖)때에 청나라에서 군신(君臣)관계를 일방적으로 제의했으나 이를 거절하자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당시 우리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연거푸 치룬데다 우리가 대국으로 섬기고 있는 명(明)나라에 요청을 했으나 명나라 역시 관료들이 부패로 나라가 어지러운 때여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왕도(王都) 한양(漢陽)을 버린 채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는데 이것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침공을 받은 지 45일 만에 우리는 청나라에 항복하였고, 그들의 요구대로 군신(君臣)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볼모로 청나라에 보내기로 하였다. 청이 명나라를 정복하고 왕도를 북경으로 정하면서 그들도 그곳으로 데려갔다.  이 때 중국에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상당히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천주교에 대한 지식층과 특히 조정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신자 수는 늘어가기만 했다 이 때 소현세자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처음으로 천주교를 접했다. 이때 접촉한 성직자는 아담 샬(Jogann A. Schall) 신부였다.

 

소현세자는 천문학과 역(曆)학, 그리고 교리를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익히게 되었다. 1645년, 청나라 황제가 소현세자를 돌려보내면서 내시 5명과 궁녀들을 딸려 보냈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였으며, 샬 신부는 천문학, 산수에 관한 책과 지구의(地球儀), 그리고 천주교에 관한 여러 가지 책과 성물을 선물로 주었으나 소현세자가 귀국한 후 2개월 만에 병사하자 조정에서는 청국에서 가지고 온 물건 때문이라고 하여 이를 몽땅 불살라버려서 천주교 전파의 첫 번째 기회는 이렇게 해서 사라졌다.

 

3-3. 남인 학자들의 학구열로 천주교 도입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은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계절마다, 청국에 사신과 선물을 보냈는데, 나라에서 보내는 원단사(元旦使), 동지사(冬至使)등 사신들의 일행이 북경에 도착하면 공식 관광순서에 유명한 천주당 네 곳인 선무문(宣武問) 안의 남당(南 堂), 동안문(東安門)안의 동당(東堂), 서안문(西安門) 밖의 북당(北 堂), 서직문(西直門)안의 서당(西堂)이 그것인데, 이들 천주당에서 성교정도(聖敎正道), 천주실의(天主實義) 같은 책들을 선물로 받아온 것이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 연구 토론이 시작되었다.

 

이 연구 활동의 중심인물은 이벽, 권철신, 정약용, 이승훈, 이가환, 정약전, 정양종, 정약용 등 남인(南人)학자들이었다. 이들이 주로 모여서 연구 토론하던 곳은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여주의 주어사(走漁寺)였으며, 당시의 천주교는 천주학, 천학, 서학, 성학이라고 해서 하나의 학문으로 연구되어 오다가 실천철학(實踐哲學)으로 받아들어졌고 이어 종교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책으로만 배우고 토론하는 데는 너무나 이론이 엄청나고 우리나라의 풍습과 맞지 않는 곳이 많아서 이러한 의문을 풀려면 북경에 있는 성직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더 많을 것을 배워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대표로 뽑힌 사람이 이승훈( 1756-1801)이었다. 남인 학자들의 왕성한 연구열은 이렇게 해서 스스로 노력하여 천주교를 우리나라에 끌어 들이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고 세계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것이다.

 


 

3. 슬기로운 우리 조상들의 진리 탐구열 (Ⅱ)

 

3-4. 우리나라 그리스도교의 반석, 이 승훈

 

1783년(정조 7년)에 이승훈은 청나라로 떠나 그해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하여 40여 일 동안 마무르면서 주교좌성당인 남당에 나가 필담으로 교리를 배웠다. 1784년 초, 이승훈은 예수회 소속 그라몽(Louis de Gramm. on t)신부에게서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청나라로 떠나기 전날 밤 '이벽'이 찾아와서 당부하였다.

 

[북경에 가거든 곧 천주당을 찾아 가서 서양 스승을 만나 우리가 의문으로 여기고 있는 것들을 상세히 물어 그 뜻을 자세히 알아 오시게. 뿐만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을 낱낱이 서술한 여러 가지 서적을 빠짐없이 소중히 가지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겠네.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한 행복과 불행, 하늘나라에 관한 지식을 분명히 밝혀 주는 좋은 책들이 하루 속이 우리 손에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무사한 여행이 되기를 믿고 기다리겠네..]

 

이승훈은 허균에 이어 우리나라 그리스도교의 두 번째 신자요 교회의 반석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베드로]의 이름을 받는데 가장 합당한 인물이다.  1784년 3월 24일 이승훈은 수십 종의 교리서와 십자고상, 묵주 등 성물과 선진국의 각종 사상서, 수리론(數理論)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3-5. 최초의 천주교도 허 균과 십이단

 

허균(許筠 1569-1618)은 유명한 [홍길동전]의 작가로 알려진 근대화 여명기의 인물로 손꼽히는 정객이요 소설가 이다. 고려(高麗) 때부터 고관을 지낸 양천(陽川) 허(許)씨의 후손 허엽(許曄)의 막내로 1594년 26세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가 광해군(光海君) 10년(1618)에 반란죄로 사형을 당할 때까지 25년 동안 여러 요직을 거쳤으며 시와 문장에 뛰어난 재질을 타고난 그는 두 번에 걸쳐 북경을 다녀왔다.

 

1614년 10월, 북경에 갔을 때 이때 북경에서는 수호지(水湖志 - 허균의 홍길동전을 이 수호지의 영향을 받고 지은 것임)라는 소설이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으며 '예수회 소속'의 '마태오 리치 신부'가 저술한 [천주실의]등 저서가 당시의 중국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정치에 관심이 있고 새로운 사상에 흥미를 느끼고 있던 허균은 이들 책을 수집하여 가지고 돌아왔으며 두 번째 북경에 갔을 때는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남인이고 대북파(大北派)에 속해 있던 류인몽(柳寅夢)은 그의 저서 어유아담(於于野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주교가 이미 동남쪽 여러 나라들에 퍼져 믿는 자가 많았으나 홀로 우리나라에서만 이를 알지 못하다가 허균이 중국에 이르러 만국지도와 게12장(偈十二章)을 얻어가지고 돌아왔다."

 

여기서 말하는 게12장은 천주교의 기도문 12장을 말하는 것으로 [십이단]이라고 한다.

이것은 천주교에서 정한 일상 기도로 신자는 매일 이 기도문을 외우게 되어있다.

그 내용을 보면

1> 성호경  2> 주님의 기도  3> 성모송  4> 영광송  5> 사도신경  6> 반성의 기도  7> 천주 십계  8> 고백의 기도  9> 통회의 기도  10> 삼덕송  11> 봉헌의 기도  12> 삼종기도이다.

 

이렇게 허균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자였으나 그 후 약 150년 동안 그의 뒤를 이은 신자가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으니 천주교와 허균의 관계는 개인적인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이벽

 

3-6.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

 

이승훈에게 성물과 교회 책을 받은 이벽(李蘗-요한 1854-1786)은 학문으로만 여기다 새로운 진리로 받아들인 후에는 곧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이 진리를 백성들에게 알려주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진리 전파에 힘쓰기로 마음을 굳힌 '이벽'은 서학 연구에 큰 열의를 보이던 권철신, 귄일신 형제를 양근(지금의 楊州) 땅으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아우인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97)가 세례를 받았으며 또한 형인 권철신(權哲身 ?-1810)도 얼마 후에 암브로시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또 양근에 살면서 자진해서 천주교 신자가 된 사람으로는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의 3형제가 있는데 이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신자의 수는 나날이 늘어났다.

 

이 중에도 가장 특기할 사실은 역관(歷官-통역)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1785)의 공적이다.

 

1785년, 이승훈을 비롯해서 그에게 세례 받은 여러 계층의 교우들이 명례방(明禮坊-명동) 김범우 집에서 교리를 배우고 전례를 행하였다. 이 때의 사회 계층은 문과(文科), 무과(武科)의 양반 계급, 궁중의 관리와 의원(醫院), 역관 회계관 등으로 이루어진 중인(中人)계급이 상류 사회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 밑으로 농사, 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상민(常民) 계급, 그리고 백정, 노비, 광대 노릇을 하는 천민 계급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동등하게 머리를 들고 의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당시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천주 앞에 만민을 평등하다고 가르치는 천주교는 번성하기 시작했으며 모여드는 예비 신자들은 나날이 늘어갔다.  그러나 1785년 봄, 유학자의 고발을 받은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이 포졸을 동원해서 김범우의 집을 급습하여 모인 사람들을 잡아들이게 했으나, 잡혀온 사람들은 모두 당대의 석학이요 벼슬을 지낸 사대부(士大夫-높은 벼슬을 지낸 특권 계급)의 명사들이기에 적당히 타일러 내보내고 가장 미약한 김범우 만을 잡아 가두고 천주학과 손을 끊으라고 강요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충청도 단양 시골로 귀향을 가서 그동안에 입은 상처가 돋쳐 홀로 고생하다가 순교한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첫 순교자이다.


4. 임시 가성직자단 시절

가성직단의 구성과 활동

1785년 을사(乙巳)박해는 우리나라 천주교가 움트기 시작한 새싹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린 비운을 가져왔다. 김범우가 잡혀간 직후부터 천주교에 대한 격렬한 통문(通文-선전문)이 들면서 날로 심한 압력이 가해졌고 장령(掌令-벼슬 이름) 류하원(柳河源)이 왕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 누구든지 서양 서적을 갖는 사람은 엄격히 금하게 해달라고 청을 하였다

"천주교는 다만 하늘이 있는 줄만 알고 임금과 어버이가 있음을 모르며 천당과 지옥이 있다는 실로 세상을 현혹시키고 있어 큰 불이나 맹수로 인하여 입는 해보다 더 크다고 합니다... ."

이 일이 있는 후부터 관가의 탄압이 본격화하여 김범우의 집에 모여서 교리공부를 하던 사람들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신자들을 잡아들였다. 이러한 압력은 1791년의 신해교난(辛亥敎難)과 을사박해로 인해서 이벽은 문중의 심한 탄압을 받아 감금상태에 있다가 단식으로 항의 순교하였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한 때 등을 돌려 한동안 박해의 거센 바람이 자고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1987년부터 한때나마 교회를 등졌던 신자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뉘우치고 중진들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이승훈 등은 자주 모임을 갖고 교회 재건과 발전책을 의논하였다. 그동안 자진해서 입교한 학자들이 합세하여 얻어진 결론은 다음과 같은 비상조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같은 신자의 입장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배우며 형제간의 우의를 지키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 신앙을 지켜나가고 발전시키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북경 교회에는 주교와 신부 등 성직자가 있어서 미사를 드리고 견진, 성체, 고해성사를 주고 있다 한다. 우리도 이러한 제도를 받아 들여 교회의 재건과 발전을 이룩해야 되겠다."

이러한 취지로 임시 성직자를 선출하여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을 구성,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은 교회의 입장에서 보아 불법 활동이었음이 분명하지만 당시의 여건과 환경 아래서는 어쩔 수 없는 돌파구였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선출한 직책을 보면 주교에 권일신, 신부에 이승훈,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등을 내세우고 북경에서 보고 온대로 성무를 집행하였으며 제의를 입고 미사도 드렸으며 가리개를 하고 의자에 앉아서 고백성사도 주었다. 이러한 상태는 2년 동안 별다른 변화 없이 계속되었다.

1789년에 이르러 이들 가성직단이 모여 교리 연구를 하다가 주교와 신부에 관한 조항에 의문이 짙어져 모든 성무 집행을 일단 중단하고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구체적인 질의서를 보내다.

윤유일이 구베아 주교에게 가지고 간 이러한 소식에 놀라움을 표했으며, 구베아 주교는 "조선의 교우들은 천주의 위대한 은총을 힘입어 스스로 진리의 길을 깨닫고 피로써 이를 지켜 나가고 용기를 보여 주고 있다니 이 어찌 경하하지 않으리요. 무한한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서 유일하시고 전능하신 천주의 위대한 사업, 교회 창건에 힘써 주기를 바랄 뿐이로다. 굽히지 말고 보다 굳센 정신으로 복음의 은총을 길이 간직할 수 있는 필요한 방책을 세우기 바라노라"라는 귀중한 글을 남겼다.

이러한 격려에 이어 천주교 교리의 요긴한 부분, 특히 성직자에 관한 부분에 역점을 두고 설명하였다. 첫째, 주교나 신부는 함부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직책이 아니고 일정한 기간을 신학교에서 전문 교육을 받은 다음 여러 단계의 품(品)을 받아서 주어지는 직책이므로 함부로 성무를 집행할 수 없으나 세례만은 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이 경우 일반 신자가 성직자 대신 세례를 주면 반드시 성직자의 보충 의식을 거쳐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이러한 회신을 접하고 조선의 신자들을 크게 자각하여 모든 성직을 집행할 수 있는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1790년 9월 청나라 건륭(建隆)황제의 80회 생일을 자는 달에 축하 선물을 보내는 데 이때 권일신, 이승훈 등이 사은사 일행 속에 윤일신과 장사꾼이며 예비 교우인 우(禹)라는 사람을 잠입시켜 구베아 주교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구주교는 다음해인 1791년 2월, 마카오 태생 중국인 신부 '요한 오(Jogann Wou)'를 조선에 보내기로 결정했으나 국경의 경비가 삼엄해서 입국에 실패했다.

그로부터 2년 동안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한다는 교리를 따르는 천주교인에게 대대적인 박해가 가해져 수많은 신자들이 잡혀 죽었고 더러는 교회를 떠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신해(辛亥 1791) 교난이라고 한다.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수는 1794년에 집계에 의하면 경상도와 황해도를 제외하고도 4천명을 넘었다.



5. 신유박해의 순교자들 (1)

1793년, 구베아 주교는 그 동안의 박해로 연락이 끊겼던 조선교회 비밀문서를 받아보고 기뻐하며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신부를 보내기로 했다. 주 신부는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20일 만에 국경에 도착하였으나 경비와 감시가 심해 입국에 실패하고 그해 12월, 동지사 일행이 돌아갈 때를 기다려 윤유일 등의 안내를 받아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12일 만에 1795년 정초에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였다.

주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자 조선 교우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대한 듯 기뻐하였으며 역관 최인길(崔仁吉)의 집에서 우리말을 배우면서 성무를 집행하였다. 그해 부활절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신자들을 모아 미사를 드렸으며 몇몇 교우에게 영성체(領聖體)의 즐거움을 맛보게 하였다. 그러나 회개를 약속하고 찾아온 배교자 한영익이 주 신부를 관가에 밀고했다(6월 이후). 이를 눈치 챈 신자들을 주 신부를 피신시키고 역관인 최인길이 주 신부 행세를 하가다 배교자 한영익에 의해 가짜임이 밝혀져 주 신부를 맞아들인 윤유일, 지황 등 세 사람이 잡혀가 모진 악형을 받고 5월 12일 모두 심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 이때 최인길은 31세, 윤유일은 36세, 지황은 29세였다.

한편 주 신부는 지하 선교활동을 하다가 1796년에는 충청도 덕산 출신인 황심(黃心)들 동지사 일행에 침투시켜 북경에 주교에게 그동안의 보고를 비단에 써 보냈다 (1797년 1월).

한동안 잠잠하던 천주교 박해는 순조(純祖) 때에 이르러 대박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11살의 어린 아들 순조(純祖)가 왕위를 이어 받으니 불가불 김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발을 내리고 정사(政事)를 보게 되었다.

김대비는 사학(邪學 - 천주교)을 엄금하는 교서를 내리게 하고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엄명을 내렸다. 김대비 천주교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조말기의 특색인 사색당쟁(四色黨爭)으로 인한 것이다. 김대비는 일가 친족이 당쟁의 제물이 되어 원한을 품고 살아오다가 어린 왕의 섭정을 하게 되자 주위에 모여드는 설움 받던 벼슬아치들이 벌 떼처럼 모여들어 반대파 소탕에 머리악을 쓰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모두 남인(南人)들이며 그들의 정적(政敵)이므로 남인을 소탕하기 위해서 빼어든 칼이 바로 [사학금지령]이라는 편리한 방법이었다.

당시 1만 여명이라는 신자를 가지고 있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위로 왕족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에 걸쳐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을 샅샅이 잡아 목을 베거나 모진 고문으로 죽게 하였으니, 이 박해로 인해서 죽은 교우 수만 줄잡아 300명에 이르고 있었다.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왕의 서숙부(庶叔父) 은언군(恩彦君) 인(철종의 조부)을 죽였고,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蔡濟恭)이 천주교에 대하여 호의를 가졌다고 해서 관직을 추탈하는 등 그들의 보복을 극도에 이르는 악랄한 것이었다.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유명한 인물로 우리나라 천주교 사상 개척의 1인자로 손꼽히는 권철신이 있다. 그는 66세의 연로한 몸으로 옥에 갇혀 모진 고문과 심한 매를 맞아 1801년 2월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아우 권일신은 임시 [가성직자단]의 주교 일을 맡아 보았으며 1791년 신해박해 때에 잡혀 옥사하였다. 정약종은 3형제의 가운데 죽을 때까지 가장 열심한 신자였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가져온 주교요지(主敎要旨)를 한글로 번역해서 한문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진리를 알게 하였고 성서전서(聖書全書)라는 교리서를 꾸미다가 잡혔다. 형 정약전과 아우 정양용도 모두 잡혀갔으나 두 사람은 귀양살이를 하다가 죽었고 정약종만 서소문 밖에서 목을 잘려 순교하였다.

또한 이가환(1742-1801)은 초기에 서학(西學)을 열심히 연구하였으나 입교하지 않았다. 1791년 신해박해 때에 광주 부윤으로 있으면서 그 자신이 박해자로 군림하기도하였으나 후에 남인(南人)이 권세를 잃게 되자 천주교에 입교, 교리서를 번역하는 등 가족과 노예에 이르기 가지 입교하기를 권하였다.

1801년 2월 9일에 60세의 고령에 잡혀가 모진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감옥에서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이존창(李存昌 ?-1801)은 [내포(內浦)의 사도]라고 불리우는 충청도 지방의 명사이다. 1791년 신해박해에 붙들려 한 때 교회를 떠났으니 곧 회개하고 돌아와 주문모 신부도 만나보고 그를 돕기도 했다. 1801년 2월 5일에 다시 잡혀 서울로 이송되어 그들 26일에 사형선고를 받고 28일에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50세였다.

5-1. 첫 외국인 성직자 주문모 신부의 순교

주 신부가 입국한 이래 5,6년간 사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교우들이 잘 보호하고 피신하도록 하여 그동안 많은 신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심해가는 수색망의 압축으로 몸을 감추기가 어렵고 그 때문에 교우들이 받는 고통이 갈수록 더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주 신부는 자수할 것을 결심하였다. 1801년 3월 12일 마침내 주신부는 의금부에 가서 자수했다.

"나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다. 나라에서 죄 없는 많은 사람을 잡아 죽인다고 하는데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나도 죽기를 원한다."

주신부를 의금부에 가둔 뒤 10여일 후에 김 대왕대비가 신하들을 모아 주 신부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의논하였다. 경고 처분으로 그대로 돌려보내자는 의견도 나왔고 도둑을 다스리는 법을 적용해서 군법(軍法)을 즉각 처단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 후 4월 15일 금위대장에게 군법을 적용해서 군문효수(軍門梟首)를 하라고 명했다. 3일후에 주신부는 순교하였다. 영문을 떠나기 전에 무릎에 매 30대를 때리고 새끼를 꼬아 만든 가마에 태워 한강 모래 언덕에 있는 새남터 형장으로 떠났다. 군졸은 목을 잘리는 죄수에게 하듯이 양쪽 귀에 화살을 꽂고 죄목을 큰 소리로 읽었다. 주 신부는 태연하게 목을 길게 내밀어 자르게 함으로써 거룩한 피로 조선 천주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다. 1801년 4월 20일 삼위일체(三位一體) 축일 오후 네 시였다. 이때 주 신부의 나이는 45세였다.



5. 신유박해의 순교자들 (Ⅱ)

5-2. 마리아. 요셉같은 이 누갈다 부부의 순교

신유박해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전라도에까지 확산되었다. 진산(珍山)에서 윤지충이 순교한 1791년 이후 1801년까지 10년간은 비교적 조용했다. 그러나 김 대왕대비가 시작한 신유박해의 여파는 전국에 퍼져 전주(全州)의 지도적인 교우들을 잡아들여 순교의 피를 뿌리게 했다.

류항검과 그의 아우 류관검, 그리고 이미 순교한 윤지충의 아우 윤지헌등 많은 교우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온갖 고문을 가했다. 이어 5월 16일에는 천주학도들을 서울로 압송하여 넉 달 동안 온갖 악형을 가해 배교할 것을 강요하였다. 9월 11일 이들은 다시 전주 감영으로 빼내어 극형에 처하도록 명했다. 윤지충의 아우 윤지헌은 특히 세 차례나 북경을 드나들면서 교회의 발전을 꾀한 죄목으로 많은 군중 앞에서 목을 잘리는 형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특기할만한 것은 이 누갈다 부부의 신앙과 순교다. 이 누갈다는 이조 제3대 태종 대왕의 11대손 이윤의 딸로써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권씨 슬하에서 굳은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왔다. 그녀가 주문모 신부를 만난 것을 열네 살 때였다. 처음으로 성체를 영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나서 동정을 지키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당시 풍습으로 처녀가 홀로 지낼 수는 없었다. 때마침 전주 부근에 살던 류항검의 아들 류종선이 같은 뜻을 품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주신부의 주선으로 동정(童貞) 결혼을 하였다. 4년 동안 함께 살면서 위험한 유혹에 빠질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나 끝내 이겨내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가열해지면서 류항검과 그 가족들이 모조리 잡혀갈 때, 아들 류종선과 그의 아우 문선도 함께 잡혀가 10월 9일 전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류종선 형제와 그이 가족들이 교수형으로 순교한 전주 숲정이(해성중고교 자리)는 지금 성지 조성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이 숲정이에서는 1839년의 기해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도 수많은 순교자들을 낳게 한 순교 성지이다.

5-3. 황사영과 황심, 옥천희의 장렬한 순교

황사영은 우리나라 천주교 초창기에 교회의 발전과 보호를 위해서 그 사료를 후세에 남긴 학자로서 문호 개방을 최초로 시도한 선각자이다. 1775년 황석범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제주가 뛰어났다. 1791년 17세 때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사영은 학문을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하여 당시 유명했던 마재(경기도 양주군) 정(丁)씨 가문을 찾아 약종의 문하생이 되었다. 초창기 천주교의 선구자 가문인 그곳에서 황사영은 권철신, 이승훈 등과도 사귀게 되었고 세 속의 공명과 영화가 뜬 구름과 같다는 결론을 얻었으며, 약종의 형 약전의 딸과 혼례를 치르고 아내로 삼았다.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들어오자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1801년 정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사영은 계동에 있는 용호영안에 있는 한 군사 집에 피신하였는데 그 집 할머니가 교우였던 2월초에 포교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삼청동 숲 속으로 해서 동대문 근처 친지의 집으로 가 상복으로 갈아입고 충청도 제천의 배론(충북 제천군 봉양면)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그는 옹기 굽는 가마 옆에 토굴을 하고 기거하면서 이상주로 행세했다.

그 후 황심에게서 주 신부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의 교회를 구하는 길은 이 사실을 하루 빨리 북경 교회에 알려 대책을 세우는 길 분이라고 판다, 장문의 탄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가로 62cm, 세로 38cm의 고운 명주 천에 1만3천3백11자의 깨알 같은 글씨를 써서 북경의 구베아(Gouvea)주교에게 보내기로 하였으나 발신으로 되어있는 황심(26일 잡힘), 밀서를 가지고 갈(9월20일) 옥천희가 잡히고, 29일 황사영은 토굴에서 잡히고 말았다.

이들을 10월 3일 의금부로 이송되어 11월 2일까지 무초와 악형을 계속 받다가 백서의 발신인으로 된 황심은 10월 23일 먼저 순교하고, 황사영은 옥천희는 11월 5일 대역죄로 몰려 목을 잘렸다. 특히 황사영은 목을 잘린 후에 머리, 손, 다리를 여섯 토막을 자르는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원주교구 배론성지 황사영 백서 토굴

5-4. [황사영 백서]와 관제 가짜 백서

"죄인 도마(黃心)등은 눈물 흘리며 우리 주교님께 호소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1만3천여자의 황사영 백서는 국내 사정과 백해 사실을 낱낱이 적고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서 잡혀간 교우들의 순교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고한 장문의 보고서이다.

"우리나라의 힘은 아주 약합니다. 200년 동안 평화하여 백성은 군사(軍事)를 모르고, 어진 임금 어진 신하가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전쟁이 닥쳐오면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어지듯 나라가 망하는 것을 기다리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 입장을 생각해서 배 수척을 무장한 군대 수만을 태워 주선 해안으로 와서 왕에게 글을 보내되 "우리는 서양 전교대(傳敎隊)이다. 우리가 온 목적은 사람이나 보물을 탐내서가 아니라 교황의 명을 받고 귀국의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데 있다. 우리가 전교하려는 일만 허락한 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티끌 하나 풀잎 하나 건드리지 않고 길이 우호를 맺고 즐겁게 되돌아 갈 것이다. 그러나 천주의 사자(使者)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곧 천주를 대신하여 징계를 가할 것이고 죽는 한이 있어도 돌아서지 않겠다. 천주교는 충효자애(忠孝慈愛)로써 가장 큰 의무를 삼으니 전국이 공손히 이를 받든다면 곧 왕에게 그지없이 복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육로로 조선의 국경을 넘어오는 길이 있으나 두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는 머리카락이고 또 하나는 말입니다. 머리카락은 자르면 되지만 혀는 쉽지 않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조선인을 청나라에 보내어 선교사에게 조선말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유능한 청나라 사람을 국경 책문 안에 보내어 나그네들이 쉬어갈 수 있는 주막집을 열게 하고 두 나라 천주교인들의 비밀 연락 장소로 쓰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빠를수록 좋겠습니다. 천주강생후 1801년 시몬, 다두첨례후 1일, 죄인 도마 등은 두 번 절하옵고 삼가 갖추나이다."

이 백서를 압수한 의금부에서는 크게 놀란 조정을 온통 뒤흔들었으며 임금에게까지 보고가 올려졌다. 이에 대한 방안을 의논한 끝에 정부에 유리하게 꾸민 가짜 백서를 써서 동지사 편으로 중국 천주교회에 보냈다. 1만3천여자의 원본은 불과 860여자로 조작되어 두개의 황 사영 백서가 나왔는데 그 원본이 8대 교구장인 민 대주교에 의해 교황 비오 11세에게 바쳐졌다. 현대 바티칸 박물관에는 원본과 같은 크기의 영인판(影印版)이 보관되어 있다.


6. 조선 교구 설정과 기해박해 (Ⅰ)

6-1. 신학생 정하상과 [상재상서]

1801년의 대박해로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성직자 주문모 신부를 잃었고 수많은 순교자가 나온 후 한동안 박해의 기세가 잠잠해졌다. 박해가 잠잠해진 10년 동안 이미 순교한 권철신의 조카 권 요한을 중심으로 한 교우들의 활동이 차츰 활기를 띠었다. 이때 정하상(丁夏祥 1795-1839)은 이 시기의 교회 재건을 위해 크게 노력한 선각자였다.

그는 정약종의 둘째 아들로 1795년 경기도 양근땅 마재(와부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1801년에 순교하자 주위에서 천주교를 버리라고 비난과 학대를 거듭하였으니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다가 함경도 무산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학덕이 겸비한 교우 조동섭을 찾아간 것은 그의 나이 20세 때였다.

그는 성직자를 맞아들이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1816년 10월 동지사 일행의 역관(譯官) 하인으로 들어가 북경 주교를 만났으나 중국에서도 박해가 일어나 형세가 불리했다. 그러나 1825년에는 유진질, 이어진 등과 함께 북경에 가서 로마 교황에게 조선교회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고 신부를 보내주도록 간청하는 편지를 북경 주교를 통해서 보냈다. 정하상 등이 로마에 보낸 편지는 1827년에 전달되어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교회 전교를 맡게 되었다.

6-2.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 소 주교 임명과 입국 실패

1827년 정하상 등의 서신을 받고 크게 감탄하여 적극적으로 조선교회를 돕겠다고 나선 사람은 당시 포교성성(布敎聖省)장관으로 있던 카펠랄리(Capelali) 추기경이었다. 1830년 11월 30일 교황 비오 8세가 선종하고 제255대 교황으로 선출된 분이 바로 그레고리오 16세(Gregorio ), 카펠랄리 추기경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9월 9일 조선 교구 설정에 관한 두 가지 교서(敎書)를 내렸다. 하나는 조선교회를 북경 교구에서 분리 독립시켜 대리감목구(代理監牧區)를 창설하다는 것, 또 하나는 브뤼기에르(Barthelemy Bruguiere) 주교를 초대 교구장에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고 있던 당신의 우리나라 실정으로 보아 파격적인 조처였다. 조선을 하나의 독립국으로 인정한 정치 외교상의 특례이며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 문호 개방 촉진 구실을 하였다. 이 무렵 조선 입국을 지원한 모방 나(Maubant 羅)신부와 샤스땅 정(Chastan 鄭)신부도 소 주교와 함께 국경을 넘어 들어올 계획을 세웠으나 번번이 청나라 북경 교회의 입국 방해를 받아 조선인 안내자와 연락을 취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소 주교는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지 3년 3개월 만에 만주에서 뇌일혈로 천주의 품에 안겼다. 소 주교는 유해는 1931년 파리외방전교회 조선전교 100주년 때 열하성 교구장 아벨스(Abels) 주교에게 교섭하여 9월 24일 서울로 모시게 되었다. 10월 15일 뮈텔 민 대주교, 라리보 원 부주교 등 20여명의 성직자와 많은 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엄한 대례 연미사를 드리고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6-3. 모방 나 신부와 샤스땅 정 신부의 입국

나 신부는 소 주교의 장례식을 마치고 봉황성 변문으로 향해 떠났다. 거기에는 정하상을 비롯해서 5명의 교우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나 신부를 맞이하였다. 1836년 1월 10일 변문에서 조선 교우들과 만난 나 신부는 12일 밤에 무사히 변문을 통과하고 검문소가 있는 두 성문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여 대망의 조선 땅을 밟게 되었다.

브뤼기에르 소 주교가 조선 입국을 눈앞에 두고 선종하자 파리외방전교회는 그 후임 교구장으로 청국 사천성(사천성)에서 전교하고 있는 앵베르 범(Laurent Imbert 范世亨) 신부를 교황청에 천거 하였다. 그리하여 1837년 5월 11일 사천성 교구장 퐁타나(Fontana)주교 집전으로 주교 성선을 거행하였다.

제2대 교구장 범 주교는 1831년 조선교구가 성립된 지 7년 만에 비로소 교구장을 맞이하게 되었다. 범 주교는 석 달 동안 조선말 공부를 하여 그런대로 고백성사를 줄 수 있게 되었다.

그해 5월에 지방 교우들을 방문하여 성무를 집행하던 샤스땅 정 신부가 서울에 와서 범 주교에게 첫 인사를 드렸다. 1836년 처음 모방 나 신부가 입국했을 때의 교우 수는 6,000명이었으나 3년 동안에 3,000명의 교우가 늘어 1839년에는 9,000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그 박해 속에서도 천주를 믿으려는 조선 사람들의 열절한 소망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6. 조선 교구 설정과 기해박해 (Ⅱ)

6-4. [기해박해의 배경과 '척사윤음']

외국인 성직자들이 서울에 들어와서 교회 세력이 차츰 살아나고 활기를 찾는 기미가 보이자 새로운 박해가 시작되었다. 모든 정파 싸움이 그렇듯이 왕실을 둘러싼 집권다툼으로 반대파를 모함하여 때려잡는다. 그 수단으로 정적을 역적으로 몰리거나 아니면 중대한 범법자로 몰아치는 것이 상례이다. 어린 헌종(憲宗)의 섭정을 맡아 보던 김 대왕비대 순원왕후가 천주교에 대한 관대한 정책을 써온 것을 기화로 헌종의 외가쪽인 풍양조씨(豊陽趙氏)가 득세함에 따라 박해의 마수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1839년 기해년에 이르러 우의정 이지연이 강력히 주장하여 3월 6일부터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불길이 퍼졌다. 그해 10월 18일 이지연을 몰아내고 풍양 조씨 가문에서 조인영을 내세워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지어 왕명으로 반포하게 하였다. 윤음이란 원래 새해 농사를 권장하는 임금의 글인데 이것을 천주교 박해에 써먹는 것이다.

윤음은 한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활용해서 시전(詩傳), 서전(書傳)의 글귀를 따서 엮어 내려가는데 척사윤음은 정부의 그릇된 천주교 해석으로 무당이나 마술꾼 취급을 하여 백성들에게 가까이 하지 말도록 금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척사(斥邪) 즉 그릇된 것을 배척한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것에 대하여 정하상은 천주교를 박해하는 나라의 정책이 온당치 못한 것이며 금지령을 풀어 신교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중국 고전을 인용해서 당당하게 그리고 이론이 정연하게 서술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잡힐 것을 각오하고 우의정 이지연에게 보냈으나 묵살되었을 뿐 아니라 그 때문에 6월 1일에 잡혀 온갖 악형을 받아다가 8월 16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목을 잘려 순교하였다. 그리나 정하상의 상재상서(上宰上書)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교론(護敎論)으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6-5. 현석문의 [기해일기]와 순교자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앵베르 범 주교는 현석문에게 순교자들의 기록을 적어 두라고 일렀다. 이 지시를 받아 오늘까지 전해진 것이 "기해일기"이다. 이 기록은 남긴 현석문은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순교자 현계흠의 아들이다. 20대부터 정하상과 전교 일선에 나서서 열심히 활동하였으며 범 주교와 두 프랑스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도 언제나 앞장서서 일 보았다. 범 주교는 1845년 기해에 들어서면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고 많은 교우가 잡혀가자 1월 16일부터 5월 27일까지 사이에 일어난 박해 실정과 순교자의 전기를 간단히 정리하였다. 그러나 자신도 머지않아 잡히게 될 것을 예측하고 자기가 회장으로 임명한 현석문에게 그 일을 맡겼다.

기해박해의 시작은 배교자 김순성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며 포졸들에게서 뇌물을 받으면서 수많은 신자들을 밀고했고 심지어 범 주교까지 포교들에게 이끌고 나타나서 잡혀가게 한 우리나라의 유다였다. 현석문은 기해년 5월에 아내와 누이와 딸 등 세 식구가 잡혀갔고 끝내 순교한 사실을 상세히 들으면서도 맡은 일이 중대하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낱낱이 기록하는 천주의 충실한 종으로 일관했다.

특히 8월 14일, 범 주교와 나 신부, 정 신부가 순교하자 흔들리기 쉬운 교우들의 신앙심을 북돋아 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렇게 3년을 지내면서 교우촌을 돌고 자료를 수집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기해일기를 집필하기에 이르렀다.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가 잡히고 이어 병오박해가 시작됨으로서 귀중한 기해일기를 은밀한 곳에 숨기고 피신하려다가 현석문도 잡혔다. 그는 7월 10일에 잡혀 9월 19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으나 그가 남긴 기해일기는 역사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되어 조선 천주교회사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여 큰 구실을 하였다.

기해일기에 기록된 순교자는 78명인데 그 중에서 복자 위에 올려진 순교자의 수는 69명이다. 여기 기록된 순교자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는 13세의 유대철이고 최고령자는 유 세실리아는 79세의 노인이었다.

6-6. 세 성직자의 순교와 기해박해의 결산

배교자 김순성에 의해 잡힌 범 주교와 범 주교에 권유로 자수한 나 신부와 정 신부 3명의 성직자는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등과 함께 포도청에 갇혀 갖가지 악형을 받았으나 1839년 8월 7일에 국사범을 다루는 의금부에 넘겨졌다가 14일 군문효수의 극형 언도를 받고 새남터에서 목을 잘려 순교하였다.

이 때 범 주교의 나이는 42세, 입국한지 2년이었으며, 나 신부는 37세로 3년 9개월이 되었고, 정 신부는 37세, 2년 9개월 만에 거룩한 이 땅에 뿌리고 조선 천주교를 위해 서양인으로서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이들은 노고산(지금의 신촌)에 임시로 모셨다가 1843년에 과천 삼성산으로 이장했다가 1901년 11월 2일 종현 대성당에 모셔서 대례 연미사를 올리고 성당 지하실에 안장되었다. 그 뒤를 이어 8월 15일에는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등 지도적인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1838년부터 1841년에 이르는 3년 동안에 걸친 기해년 대박해는 서울을 비롯해서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등 4개 도에서 벌어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곳이 서울과 경기도인데 이 지방에서 순교한 130명 중에 목을 잘린 교우가 70여명이고 고문과 목을 매달아 죽인 교우가 60여명이나 되었다.

한편 1839년 9월 6일자로 교황청 포교성성에 보낸 나 신부와 정 신부 명의로 된 연간 보고서에 의하며 조선교회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교우 총수

약 10,000

영성체

4,000

영세자

1,200

혼 배

150

견진자

2,500

종부(병자)성사

60

고해자

4,500

예비자

600



7. 병오박해와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러한 때에 파리외방전교회에서는 조선에서 벌어진 심한 박해 사실을 전혀 모르는 채 두 신부를 더 조선에 보내기로 하였다. 여기에 뽑힌 사람이 페레올 고(Ferreol 高) 신부와 매스토르 이(Maestre 李)신부였다. 고 주교는 후에 김대건에게 부제품과 사제품을 상해 근교 금가항이라는 교우촌 성당에서 1844년 8월 17일에 신품성사를 주어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를 탄생시켰다.

8월 31일 상해를 떠나 귀국길에 오른 사람은 고 주교를 비롯한 다블뤼 안 신부, 김대건 신부, 그 외의 현석문 교우 11명이었는데 이들은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강경 나바위라는 곳에 무사히 상륙하였으니 6년 만에 교회 전통이 어이진 셈이다. 기해박해에서 모진 피해를 입은 교회는 파멸 그것이었다. 세 성직자들 처형한 후 지방 포교들은 교우촌을 샅샅이 뒤져 잡아가기 시작했다.

믿을 수 있는 교우들끼리 모이게 되면 호랑이와 이리떼가 들끓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움막집을 짓고 비바람을 피하면서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바람결에 이러한 소식을 듣고 열심한 교우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새로운 교우촌이 생기고 그들은 스스로 회장을 선임함으로써 성직자를 대신하여 신앙생활을 지도 받으면서 활기찬 신앙생활을 계속하기도 했다.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1821-1846, 신부)

7-1. 김대건 신부의 순교와 순교자 임치백

고 주교는 서울로 가서 김대건 신부에게 매스트르 이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맞아들이는 준비를 서두르게 하였다. 김 신부는 교우 임성룡이 가지고 있는 배를 타고 1846년 4월 18일 마포 나루를 떠나 연평도 근해로 떠났다. 연평도 근해에는 해마다 조기잡이 철에 청나라 어부들이 조기를 잡으러 오기 때문에 그들에게 부탁해서 안 신부 등과 연락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김 신부는 거기서 잡히는 몸이 되어 온갖 악형을 당한 끝에 그 해 9월 16일 한강가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목을 잘려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였으며 신부 된지 1년만의 일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처형을 계기로 병오(丙午) 박해는 시작되었다. 이 박해 때에 순교한 사람은 기해일기(己亥日記)를 저술한 현석문등 8명인데 이 중에서 옥중 세례 입교한 임치백의 일화는 천주교 순교사에 색다른 일면을 보여준다. 임치백은 천주교에 관심은 있었으나 아내와 아들에게 먼저 입교하도록 하고 자신은 "뒤에 입교한다"고 말해왔는데 1846년 치백은 옥중에서 김 신부의 감화를 받아 기도문을 배우고 며칠 후에는 요셉이라는 본명을 받아 세례 입교했다. 원래 발이 넓어 친구도 많고 인심도 얻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구명 운동에 나섰으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9월 20일 매로 쳐 죽이라는 명을 받고 기진맥진할 때까지 때렸으나 죽지 않는 것을 보고 목을 매달아 죽게 하였다. 이 때 임치백 요셉의 나이는 45세였다. 그날 밤새 시체가 매달린 방 안이 환하게 비치는 것을 보고 하늘이 감도한 표시라고 생각하며 시체를 옥에서 5리쯤 떨어진 언덕에 묻어 장사 지냈다.

성 임치백 요셉(林致百 Josephus, 탁희성 비오 작)



8. 철종의 즉위와 박해 완화 (Ⅰ)

8-1. 천주교에 대한 박해 완화

병오년 박해를 당하게 되자 연이은 박해에 주눅이 들린 교우들은 제각기 제물 간수와 피난 보따리 싸기에 바빴다. 그러나 현종의 죽음(1849.6.6)과 풍양 조씨 가문의 조만영, 조병구 부자가 죽음으로써 박해는 자연히 수그러졌다.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강화도에서 처형된 현종의 서제 은언군의 손자 이원범을 덕완군으로 봉하고 제25대 왕 철종(哲宗)으로 즉위하게 함으로서 천주교에 대한 악감정은 스스로 풀리게 된 것이다.

대왕대비는 무고하게 죄인으로 몰려 독살당한 은언군 일가의 죄를 풀어 주어 사당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였으며,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이승훈의 아들 유학(幼學 - 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 이신규가 부친의 무죄를 청하니 철종이 이를 허락하여 죄명을 씻어 주었다.

철종시대에는 또 전에 없이 서양 배의 출입이 잦아 전후 15차례나 조선 연안에 나타나서 여러 가지로 조선 정부에 압력을 주었는데 이것 또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완화하는데 큰 구실을 하였다고 본다.

8-2. 최양업 신부의 서품과 14년만의 귀국

김대건 신부와 신학교 동창인 최양업 부제는 네 차례나 조선에 입국하려다 실패하고 1849년 4월 19일 청나라 강남 교구 마레스카 (Maersca)주교 집전으로 서품을 받아 신부가 되었다. 김대건 신부보다 4년 후에 신부가 된 것이다. 최 신부는 요동지방에 가서 사목경험을 쌓던 중 매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여 했으나 서양 사람으로 조선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고 주교의 편지를 받고 최 신부만 변문을 넘어 무사히 고국 땅을 14년 만에 밟게 되었다.

1850년 초부터 조선에는 세 명의 성직자가 있었다. 그러나 1만 명에 달하는 교우들을 돌보는데 세 성직자만의 힘으로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1845년에 입국하여 전국 각지를 돌면서 신앙 지도를 해온 고 주교와 안 신부는 겹친 과로 때문에 자주 병을 앓게 되어 최 신부가 바삐 순회를 하였다.

이런 중에도 매스트르 이 신부의 끈질긴 입국 노력은 계속되어 6년 동안 변두리를 헤매다가 겨우 청나라 고군산도를 거쳐 바다로 해서 1852년 8월말 전라도 부안 땅에 도착 하였다. 이 신부는 프랑스를 떠난 지 12년 만에 그 목적을 이룩한 것이다. 이렇게 조선 교회는 또 신부를 맞이하게 되었으나 고 주교의 병이 날로 심해져 결국은 다음 해인 1853년 2월 3일 그의 나이 45세 때 천주의 품으로 돌아갔다.

고 주교는 조선에 들어와 8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대박해를 뚫고 진리를 펴는데 온 힘을 다 하다가 천명을 마친 은인이었다. 고 주교의 유해는 본인의 소망대로 미리내 김대건 신부 묘지 옆에 안장되었다. 고 주교가 세상을 떠난 1853년경에는 정부에 관리들도 천주교에 대한 활동을 용인하는 태도로 나오고 있었다. 과거의 버릇으로 교우들을 사사로이 박해하는 포교가 발각되면 그들은 엄하게 다스리고 제제하였다. 한편 안 신부는 교리에 밝은 교우들을 전교 회장으로 뽑아 각 지방에 파견 전교에 힘쓰게 하는 한편 파리외방전교회에 신학교에 편지를 보내어 지혜롭고 용맹한 신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조선교회의 과거와 현재의 실정을 조사 기록하는데 힘을 기울이면서 교리책 저술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안 신부는 교회 출판에 책임을 맡고 [십이잔] [요리문답]등을 목각 인쇄하여 교우촌 공소에 보내어 활발하게 전교에 힘썼으며 조선말을 연구 한불자전(韓佛字典)을 편찬하고 우리나라 역사인 동국역대(東國歷代)를 번역하는 등 우리나라 문화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이렇게 해서 복음을 널리 전파한 효과가 있어 1855년에는 많은 외교인이 떼 지어 입교하였으며, 집계된 수를 보면 교우가 13,638명이고 그 중에서 연례적으로 고해성사를 본 교우는 9,040명 수시로 보는 교우는 3,380명이나 되었다.

이 작품은 조선 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 범 주교 및 두 명의 성직자,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79위 복자화이다. 이들은 1925년 7월 5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 작품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시복식 때 대성당에 걸렸던 79위 복자화이다.



8. 철종의 즉위와 박해 완화 (Ⅱ)

8-3. 4대 교구장 장 주교 부임과 일부 지방 박해

로마 교황청에서는 1854년 12월 14일 고 주교의 후임 교구장으로 만주 교구 부주교 베르뇌 장(Simon Berneux 張敬一 1814-1866)신부를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하고 조선입국을 명하였다. 1855년 9월 상해로 가서 배편으로 입국할 기회를 잡던 중 파리외방전교회의 두 프티니콜라 박(Petinicolas 朴) 신부와 푸르터 신(Pourthie 申)을 만나 1856년 3월 26일 조선에 입국하였다. 장 주교는 조선에 들어온 이후 8개월 동안에 겪은 일들을 파리외방전교회에 보고하였는데 그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껏 성당도 짓지 못하고 10여 명씩 조용한 곳에 모이게 하여 주교가 정한 기도문을 외우고 성경을 읽고 문답도 배우게 하고 있으니 조선 교우들이 주일날에 지켜야 하는 규칙이다. 조선 교우들의 신심이 놀라워서 미사 참례를 의무로 정한다면 한달도 못가서 모두 잡힐 것이다. 각 지방 교우들이 공소를 마련하여 신부 모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므로 금년(1857) 7월부터 구역을 정하여 1년에 한 번씩 신부를 보내어 성사를 보게 하였다. 겹친 피난살이로 교우들이 모두 가난하여 공소 방은 겨우 고상(십자가)이나 모셔놓고 제대를 꾸며 놓으면 더 여유가 없을 정도이다. 어떤 귀한 집 여인의 외출할 수 없는 당시의 풍습을 무릅쓰고 집안사람이 잠들거나 없는 사이에 공소로 달려와 성서를 보면서 천주의 은혜에 감사하였다........"

장 주교는 전교 활동을 보다 활발하게 펴기 위해서 11년 동안 전교에 헌신하여 온 다블뤼 안 신부를 보좌 주교로 선정하여 로마에 이를 품신하였다. 교황의 임명을 받고 1857년 3월 25일 안 주교의 승품식이 거행되었다. 이것은 천주교회가 들어온 이후 처음 있는 거룩한 행사이다. 장 주교는 곧 이어 전국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여 3일간에 걸쳐 대대적인 사목 방침을 세워 이를 전국 교우들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직자 회의였으며 그해 8월 2일자로 된 [장주교 윤시 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라는 이름의 사목 서한에는 교우들의 활동 지침, 교리, 칠성사(일곱 가지 성사), 그리고 부록 형식으로 [영해회 규칙]을 정하고 있다. 이것은 어린 아기를 교우의 자녀로써 어떻게 신앙생활을 계속시킨 것인지 규정한 것이다.

성 시메온 프랑수아 베르뇌 주교(Simeon Francois Berneux, 탁희성 비오 작)

장 주교가 입국한 후부터 천주교는 날로 활기를 띠게 되었고 철종의 장인 되는 영은 부원군 김문근(金汶根)의 가까운 친척이 영세 입교하였으며 정부에서도 교우를 박해하는 자를 꾸짖었다. 장 주교 이하 8명의 성직자들은 건강이 허락하는 데까지 전교사업에 힘을 기울였으며 교회의 요긴한 책을 만드는데 관심을 기울인 안 주교는 번역하는 사람과 글씨 쓰는 사람을 거느리고 기도서, 교리서를 지었고, 여러 지방을 순회하면서 얻어진 순교 자료를 정리하여 [기해일지]에 150장을 더 추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태평세월도 얼마 안가서 새로운 박해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1857년 김 대왕대비가 죽게 되자 철종을 암살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하려는 역모가 드러났고 이로 인하여 조야가 어수선했다. 이러한 혼란기에 천주교 박해의 선봉에 나섰던 세도가의 후손이 권좌에 앉게 되면서 교우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조 판서 김병기는 중신 회의석상에서 천주교 박해가 여러 가지 이유로 타당치 않다는 반론을 펴서 천주교를 옹호하는 기미를 보여 새로운 박해 기미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리하여 잡아들인 교우들을 놓아주고 빼앗은 재산을 돌려주었다.

경신박해를 이기고 2명의 주교와 7명의 프랑스 신부, 1명의 조선 신부를 모시고 새로운 발전을 기약하려 할 때에 최양업 신부가 애석하게도 6월 10일(1859) 병으로 선종하였다. 김 대건 신부에 이어 조선 사람으로 두 번째 신부가 된 최 신부는 12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가장 힘든 산골 구석만을 골라서 몸과 마음을 바쳐 오직 천주의 사업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했다. 그 동안의 전교 사정을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서울로 향하던 중, 문경(聞慶)새재에서 병환이 나서 교우들의 부축을 받고 겨우 충청도 진천 배티에 이르러 자리에 누운 채 일어나 지 못하고 그대로 주님의 품에 안겼다.

한편 이 무렵, 1860년에는 청나라가 프랑스 등 여러 나라와 천진조약을 맺어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였고, 2년 앞선 1858년에는 일본이 미국, 프랑스 등과 통상조약을 맺어 극동의 나라들이 문호를 개방하였으나 우리나라는 문호를 굳게 닫아 쇄국(鎖國)의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의 103위 시성 기념성당 옆벽에 설치된 한국 순교성인화

성 도리 헨리코, 성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성 베르뇌 시메온, 성 볼리외 루도비코



9. 병인 대박해와 1만 명의 순교 (Ⅰ)

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김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1857(철종 8년) 8월 4일에 70세로 죽게 되니 왕궁 여인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조 대왕대비 신정왕후는 그때 나이 50세인데 선왕 헌종의 어머니이고 기해년 큰 박해를 일으켰던 조만영의 딸이다. 이 때부터 천주교 박해의 주동 세력이던 풍양 조씨가 다시 권력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였다. 1863년 12월 8일 철종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게 되자, 후사가 없음을 기화로 조 대왕대비가 앞장서서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왕 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12세였다.

고종이 즉위한지 한 달도 못되어 안동 김씨의 세력은 깨끗이 밀려나고 그 대신 풍양 조씨 알파가 기라성같이 대궐 안에서 활개를 치게 되었다. 전후 14년에 걸쳐 안동 김씨 세력 밑에 있을 때 천주교는 비교적 큰 박해 없이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나라의 비호를 받아가며 전교 활동을 벌여 오면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고종이 즉위하던 1863년 12월 현재 조선 교회에서는 장 주교 이하 8명의 성직자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교우 수는 2만3천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런데 교회 비호 세력이라고 볼 수 있던 안동 김씨 세력 대신으로 들어선 풍양 조씨의 득세는 적지 않게 천주교의 앞날을 불안하게 하였다.

1865년에 이르러 장 주교 이하 8명의 성직자들이 거의 몸의 건강을 잃고 있었으며 교우의 수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장 주교의 요청으로 그해 5월말에는 네 명의 프랑스 신부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은 도리 김(Dorie 金), 브르트니에르 백(Bretenieres 白)신부, 유앙 민(Huin 閔)신부, 블뤼 서(Beauliue 徐)신부 등이다.

그 해도 저물어갈 무렵, 평안도, 황해도, 경상도 지방에서 뜻밖에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 병인박해의 징조를 엿보이게 해 주었다. 마침내 결정의 시간이 왔다. 대원군은 처음에 통상을 요구하는 러시아 사람을 몰아내기 위해서 장 주교에게 프랑스의 힘을 빌리도록 하자는 의견에 솔깃해져서 장 주교를 만나기로 했다가 러시아 배가 흐지부지 떠나 버리자 마음이 돌변하여 천주교 박해의 칼을 뽑아 들게 하였다.

장주교가 대원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포졸들이 대궐을 짓는데 쓸 원납전(願納錢)을 걷는다는 핑계로 두 번이나 주교 댁을 다녀갔다. 주교 댁을 지키는 임무를 맡으며 명목상 집 주인이 되어 있는 홍봉주는 장 주교에게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장주교는 "내가 일시 피해도 반드시 나를 찾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방을 뒤져 또 다시 큰 박해가 일어날 것이니 모든 것을 주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없지 않으나."고 하였다.

과연 정초에 들어서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1월 5일, 주교댁 하인 이선이를 우선 잡아들여 협박과 돈으로 매수하여 완전히 앞잡이로 만들었고 이어 최형, 전장운을 잡아들였다. 그 보다 나흘 후인 1월 9일 이선이를 앞세워 주교 댁을 습격해서 장 주교를 잡고, 함께 있던 집지기 홍봉주를 묶어 갔다. 박해는 계획한대로 착실히 잡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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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이 잔악한 대원군은 장 주교에게 평장(平杖), 주장(朱杖-곤장)등 심한 형벌을 내리니 다리는 살이 흩어지고 뼈까지 드러나는 처참한 모습이 되어도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다. 장 주교는 모든 교우 중에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누구보다도 혹독한 형을 받았다. 그리고 주교에 이어 신부와 교우들이 매일처럼 잡혀 들어갔다. 세 신부(백 신부, 서 신부, 김 신부) 도 모두 잡혀 들어가자 주교와 옥에서 만나게 되었다. 약 1주일 후인 1866년 3월 8일 처형의 날이 왔다. 들것에 실려 새남터 형장으로 가는 성직자들을 보고 구경꾼들은 욕을 하기도 하고 침을 뱉기도 했으나 그 속에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처참하게 실려 가는 성직자들을 위해 기도드리는 교우들도 많았다.

향년 52세의 나이로 장 주교가 먼저 목을 잘렸고, 두 번째는 28세의 백 신부, 세 번째는 26세의 서 신부,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로 28세의 김 신부의 목이 잘렸다. 프랑스 성직자들이 무더기로 처형된 처참한 장면이었다. 이들의 시체는 와아고개(용산우체국 뒤의 고개) 언덕에 묻혔다가 1899년 용산 신학교 뒤에 옮겼다가 1900년 9월 10일, 종현 대성당 지하실에 옮겨졌다. 장 주교는 1856년 조선에 들어와 1866년 거룩한 피를 이 나라에 뿌리고 순교할 때까지 10년 동안 있는 힘을 다해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백 신부, 서 신부, 김 신부는 조선에 들어온 지 겨우 9개월 만에 거룩한 씨를 뿌려 천주교의 발전을 위해 밑거름이 되었다.

9-1. 한 달 동안의 9명의 성직자를 살해

장 주교를 비롯해서 세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하던 그날, 서소문밖 네거리에서는 승지(承旨) 남종삼과 장 주교를 모시고 있던 홍봉주, 두 사람의 목이 잘렸다. 그로부터 3일 후인 3월 11일 역시 같은 새남터에서 푸르티 신 신부, 프티니콜라 박 신부, 그리고 정의배, 우세영 등 교우들이 목을 잘렸다. 신 신부와 박 신부는 1856년 베르뇌 장주교와 함께 입국하여 10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어가며 전교 사업에 몸 바쳐 오다가 거룩하게 순교한 성직자다.

성 정의배 마르코(丁義培 Marcus, 탁희성 비오 )

정의배는 기해박해 때에 앵베르 범 주교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즐거운 표정으로 일관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입교하고 그 후 30년간 열심한 신앙생활을 해왔다. 페레올 고 주교가 조선에 나와서 정의배의 굳센 신앙을 보고 서울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베르뇌 장 주교도 계속해서 그를 밀어 주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 순교한 정 회장의 나이는 73세였다. 우세영은 20대의 청년이었으나 전교 회장 김 요안의 감화를 받고 영세 입교하여 고향인 황해도 안에서 한꺼번에 부모를 비롯하여 20여명의 친구들을 입교시킨 매우 영향력 있는 청년이었다. 옥에서 정 회장을 만나 더욱 용기를 얻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갖 고문과 악형을 이겨 순교의 길을 택했다. 다음에 잡힌 성직자는 다불뤼 안 주교, 유앙 민 신부, 오매뜨르 오 신부다.

신 신부와 박 신부의 처형이 있던 3월 11일 충청도에서 잡혔다. 뒤이어 전교 회장 황석두와 장낙소가 잡혀 3월 30일 충청도 보령 바닷가 형장에서 함께 목을 잘렸다. 안 주교는 조선에 나온 지 21년 만에 48세로 순교하였으며 오 신부는 2년 만에 29세로 꽃다운 청춘을 조선 천주교회에 바쳤으며 민 신부는 8개월 만에 30세로 거룩한 피를 뿌렸다. 안 주교는 장 주교가 순교한 후 조선 교구 제5대 주교로 21일 동안 재임하다가 순교한 가장 짧은 재임기간을 지낸 교구장이다. 세 성직자의 유해는 1882년 일본 나가사끼로 옮겨졌다고 1894년 5월 22일 서울 용산 신학교로 이장되었으며 다시 1900년 9월 10일 종현 대성당 지하실에 안장하였다.



9. 병인 대박해와 1만 명의 순교 (Ⅱ)

9-2. 리텔 이 신부의 조선 탈출 성공

병인 대박해로 인하여 성직자 9명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되자 나머지 세 신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의 실정을 자세히 알리고 새로운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기 위하여 특사를 보내기로 하였다. 주교를 잃은 조선 교회의 지휘권을 가장 먼저 도착한 페롱 권 신부에게 있었다. 권 신부는 리델 이 신부를 먼저 출국시켜 중국으로 가게 하였다. 이 무렵 서울먼저 도착한 이 신부는 에서는 조선에 전교하러 온 신부들이 모두 순교한줄 알고 겨우 배 한척만을 마련하면 곧 떠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리델 이 신부는 조선을 탈출하여 1866년 7월 7일, 내포를 떠난 지 8일 만에 치푸에 도착하여 프랑스 함대 사령과 로즈(Roze)제독을 만나 도움을 청했다. 이 신부는 아직도 페롱, 깔레, 두 신부가 죽음에 놓여 있다는 것을 로즈 제독에게 알렸으나 프랑스 함대를 조선으로 끌어 들이는 데는 실패하였으며 이 신부를 태우고 온 교우 11명 중 8명은 본인들의 뜻에 따라 본국으로 보내고 세 명은 함께 청국에 남았다. 이 신부와 세 교우가 상해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20일 후에 이 신부를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들은 부랴부랴 서둘러서 치푸에 도착해서 9월 10일 프랑스 함대에 승선했다.

프랑스 함대는 조선에 도착하여 제물포 근해를 계속 돌아보며 프랑스 신부들을 살해한 정부에 대해 무언의 시위를 하였다. 이렇게 한동안 눈치작전을 벌이다가 로즈 제독의 프랑스 함대는 슬그머니 철수하여 10월 3일에 치푸항으로 돌아왔다. 권 신부와 강 신부를 구출하기 위해서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에 왔으나 작전에 실패하고 청국으로 되돌아가려 할 즈음 두 신부는 프랑스 배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지런히 탈출의 길을 찾기 위해 서둘렀으나 이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 두 신부는 프랑스 군함을 타지 못하고 별도로 마련한 작은 배를 타고 풍랑에 시달리면서 겨우 박해의 땅, 죽음을 부르는 땅 조선을 탈출하여 청나라로 갔다.

이 두 신부가 청나라로 간 뒤로 10년 동안 조선 교회는 성직자 없는 양 혹은 교회가 되어버렸다. 1866년 9월 20일 치푸를 떠나 제물포 연안 일대를 살피고 돌아갔던 로즈제독의 프랑스 함대는 군함 6척을 이끌고 그해 10월 11일 청국을 떠났다. 함대는 13일 제물포 앞바다에 이르렀고 14일에는 강화에 이르러 닻을 내려 수백 명의 군대가 상륙하였다. 강화 읍에서는 별다른 저항도 없어서 수월하게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했다. 이어 통진 나루에서 다소 충돌이 있었으나 군함이 쏜 대포 몇 방 맞고는 풍비박산이 되어 다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전등사(傳燈寺) 전투에서는 작전 계획의 미숙으로 도리어 큰 손해를 입고 정박 중인 군함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이렇게 섣불리 대원군의 비유를 건드려 놓았으니 피해를 보는 것은 천주교였다. 더욱 혹심하게 잡아들였을 뿐 아니라 어린 아이들까지 모조리 묶어 오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그 내용을 다음과 같다.

[천주학군으로 말미암아 서양 오랑캐가 이곳까지 와서 우리 맑은 강물을 그 배로 더럽혔으니 불가불 서학군의 피로써 그 더럽혀진 것을 씻음이 옳을 것이다.]

9-3. 병인박해의 국제 여론과 교황 비오 9세의 교서

프랑스 함대의 강화읍 점령 사건을 비롯해서 일련의 외국 선박 침입 사건을 우리나라 역사에서 병인양요(病寅洋擾)라고 한다. 그 이후 대원군의 박해는 더욱 가중되어 6년 동안 계속되었고 1866년부터 1876년 사이 10년 동안은 성직자 없는 교회였으며 이 혹독한 박해로 인해서 약 만 명에 이르는 교우들이 목숨을 천주께 바쳤다고 비공식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 숫자는 당시의 교우 수 23,000명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으로 남녀 노소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대량 학살을 자행하여 이 강토를 피로 물들였던 것이다.

조선 국토가 순교자의 피로 물들여지게 되자 이 사실은 온 세계에 알려져 모든 나라의 교우들은 이 거룩한 순교를 찬양하고 남을 교우들의 고통을 위로하며 인자하신 천주께 많은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1866년 12월 19일 교황 비오 9세는 다음과 같은 교서를 조선 천주교회에 보내어 교우들을 격려하고 위로하였다.

교황 비오 9세의 교서

"나의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강복하노라. 새해가 복되게 열려 신교의 자유가 있기를 바랐으나 뜻밖에 박해가 소낙비처럼 닥쳐와 마치 산돼지가 포도나무 덩굴을 짓밟아 열매를 다시 맺지 못하게 한 것과 같도다. 눈물이 흐르도록 슬픈 소식이로다. 주교와 신부의 순교, 신자들의 순교,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목숨을 내걸고 숨어 다니다가 감옥에 갇혀 죽을 죄인으로 몰리고 있음을 생각하니 천주께서 주신 거룩한 신덕의 보살핌이 없이 어찌 어버이의 마음에 슬픔과 눈물을 금할 수 있으리요!

너희들이 우리 주 예수를 위하여 굳센 마음으로 헛된 세상을 버리고 목숨까지 버린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리의 깊은 걱정에 위로가 되어 도리어 찬양의 소리로 바꾸어지리로다. 성교회 안에서 순교의 영광이 새로 일어나고 순교자의 피에서 많은 열매가 맺어지기 바라면서 너희들을 부러워하노라. 신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와 그 제자들의 친구가 되지 않겠느뇨! 우리는 십자가형으로 세상을 이기신 천주의 아들이 아니겠느뇨.

모든 나라에서 성교의 진리를 피로써 증명한 이의 아들이 아니겠느뇨. 저들과 같이 고난을 참아 받고 우리 주 예수를 위하여 능욕 당함을 기뻐하고 옳은 일을 위하여 박해 받음을 본분으로 알지어다! 이러한 괴로움을 참아 받음으로써 천당의 큰 복을 받게 되리라.

사랑하는 제자들아! 걱정하지 말고 눈물을 거둘지어다. 우리 주 예수께서 너희들을 사랑하심으로써 먼저 생명을 주시고 또 너희와 결합하여 계시고 그 값으로 너희들도 같이 생명을 바쳤으니 기쁜 일이 아니겠느뇨!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천당을 위하여 난 것임을 잊지 말고 순교하는 사람을 위하여 예비하신 천당의 높은 자리를 바라 볼 지어다.

세상에서 받는 약간의 괴로움이 영원한 영광의 길로 인도하는도다. 우리는 조선과 멀리 떨어져 있으나 기도로써 도우리로다. 우리의 기도가 부족할지라도 한데 합치면 효험을 얻게 되리로다. 목자가 없으니 마치 흩어진 양과 같을 것이나 많은 위험을 면하기 위하여 먼저 순교하신 주교와 같은 열심과 덕이 있는 주교와 신부를 보내노라.

천주께서 너희를 어여삐 보시어 이와 같이 시험하셨으니 시험을 잘 치르고 조선의 평안함과 앞으로 많은 공로를 주시도록 날마다 기도드리며 천주의 거룩하신 은혜와 우리가 너희를 사랑하는 증거로 모든 교우에게 즐거이 강복하노라."

교황 위에 오른지 21년 1866년 12월 19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비오 9세 서명

9-4. 외국 함대의 계속 침입과 척화비

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천주교 박해 문제로 서양의 열강들이 군함을 동원해서 기를 꺾어보려 하였으나 그 결과는 날이 갈수록 긴장을 더하게 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뿐이었다. 1866년 고종(高宗) 3년부터 시작하여 1871년 고종 8년에 이르는 6년 동안에 벌어진 병인년 대박해는 크게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 러시아의 침입을 우려해서 부분적으로 접촉하다가 긴장한 나머지 천주교를 박해하는 형태로 나타난 1866년 봄의 박해이다.

둘째 -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친 프랑스 함대가 제물포 근해에 정박하여 9명의 성직자를 살해한 사실을 들어 정부에 대해서 엄중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고, 뒤이어 강화읍을 점령하여 실력을 과시하다가 작전에 실패하여 철수하는 바람에 더욱 박해가 심해진 것이다.

세째 -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이를 거절당하자 1868년, 고종 5년에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무덤을 파서 유물을 가져다가 협상에 응하도록 유도해 보려 하였으나 이 계획에 실패하고 돌아간 후에 천주교 박해는 더욱 심해져 전국에 강력한 명령을 내렸다.

네번째 - 강력한 미국 함대의 침입 사건 이후에 벌어진 결정적인 대박해다.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네랄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평양에 이르렀다가 불태워지는 변을 당했는데 이것을 강력하게 항의하고 통상을 시작하자는 표지로 1871년 5월, 4척의 군함과 1,200명의 해군을 거느리고 아산만에 닻을 내렸다.

조선 정부는 잇단 외국 함선의 침입으로 크게 당황했고 그럴수록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가중되고 희생자는 늘어날 뿐이었다. 그러나 표면으로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 대항해서 이들을 몰아내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랑캐를 몰아내야 한다는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게 하였다.

척화비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을 때에 싸우지 아니하면 곧 그들과 화친을 하여야 한다. 화친을 주장함을 나라를 파는 것이니 만년 자손들을 경계하여야 한다."

1866년부터 1870년까지 순교한 교우의 수를 정확하게 알아볼 길이 없다. 산속에서 굶주려 죽은 교우 이외에 8천명의 순교자가 있었다고 하나 미국 함대가 다녀간 이후에 잡혀서 순교한 사람까지 합치면 적어도 1만 명 이상은 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0. 대원군 은퇴와 박해 완화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있던 10년은 천주교에 대해서 결정적인 철퇴가 내려진 시기였다.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자기의 정적이라면 모조리 소탕하고 자기 기반을 닦으려고 안간힘을 쓴 대원군도 10년을 고비로 1873년 고종 10년 10월 25일 승정원의 부승지 최익현이 글을 올려 대원군의 비정을 열거하는 등으로 해서 대원군을 할 수 없이 1873년 11월 4일 정권을 왕에게 돌리고 물러났다.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난 다음부터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추었으나 의정부, 사헌부, 사간부, 의금부, 홍문관 등 여러 관장들이 천주교인의 박해 중지에 대하여 반대하였으나 고종이 이를 굽히지 않았다. 이것으로 보아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뿌리가 여전히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6대 교구장 리델 주교 로마에서 성성식

대원군의 대박해로 인해서 거의 파멸 상태에 있던 천주교는 박해의 검은 구름이 걷히자 부지런히 성직자의 입국을 서두르게 되었다. 모진 박해를 피해서 청나라로 건너갔던 리델 이 신부 등 세 신부는 상해에서 조선인 교우들과 조선말 교리 책과 기도서를 만들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롱 권 신부는 1868년 5월에 조선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깔레 강 신부는 전교활동을 하다가 1884년에 프랑스에서 별세하였다. 이렇게 되니까 리델 이(Felix C. RIDEL 1830-1884) 신부는 조선교회의 가장 오래된 선임자로 모든 활동의 모든 활동의 지휘권자가 되었으며 1868년 4월 27일자로 교황 비오 9세에 의해서 조선 교구 제6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1870년 6월 5일 로마에서 추기경의 주례로 1866년에 제4대, 제5대 교구장을 잃었던 조선 천주교회는 4년 만에 새 주교를 맞이하게 되었다.

상해(1871년 7월 6일)에 도착한 이 주교는 상해에서 뜻밖에 조선교우 9명을 만나게 되었다. 이 주교를 만난 교우들은 그동안 추진하고 있던 교회 관례 책 출판을 도우면서 나라 안의 정세 변동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1년을 지내다가 조선 교우들이 귀국해서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이 주교에게 청하여 주교의 특별 강복을 받고 청나라를 떠나 조선으로 떠났다.

이 주교는 상해에서 교리책 번역을 마치고 1872년 10월 치푸로 가서 백 신부와 함께 다시 요동의 차코우로 갔다. 그리고 한불자전(韓佛字典) 원고를 쓰면서 조선 교우들의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874년 2월, 고대하던 조선 교우가 이 주교를 찾아와서 기쁜 소식을 전했다. "왕이 영을 내려서 함부로 교우들을 잡아들이거나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전갈이 있는 후부터는 교우를 잡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해 9월 20일 이 주교와 백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려다 실패하였다. 이 무렵, 파리와방전교회에서 새 신부가 배속되어 왔다. 1875년 4월 27일 청나라에 온 드게트 최(Degutte 崔) 신부였다. 새 신부를 맞이하여 다시 이 주교와 두 신부는 1876년 4월만 조선을 향해 떠나 무사히 조선에 들어갔으나 마중 나온 김 요셉이 "이제 우리나라는 곧 개항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교님의 청국으로 가시어 여러 나라 공사들과 접촉하여 조선의 개항을 촉진시키도록 애써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하여 이 주교는 청국으로 돌아갔다.

조선에서는 실로 10년 만에 맞아들이는 성직자였다. 과연 김 요셉의 말대로 그해 2월 27일에 강화도에서 한일수호조약이 조인됨으로써 쇄국 조선은 개항기를 접어들게 되었다. 블랑 백 신부와 드게트 최 신부는 김 요셉 등 교우들은 5월 10일에 그립던 조선 땅에 되었고 다음 날에는 서울로 숨어 들어오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청국으로 돌아간 이 주교는 북경, 치푸, 상해, 홍콩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성직자들이 자유롭게 전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파리외방전교회에서 다시 네 명의 신부를 조선 교회에 파견되었다. 1876년 초에서 도세 정(Doucet J 丁)신부와 로베르 김(Robet 金) 신부를 발령하였고, 다음 해 봄에는 뮈텔 민(Mutel 閔德孝) 신부와 청국에서 전교하고 있는 코스토 고(Coste 高) 신부를 추가로 발령하여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주교는 우선 도세 정 신부와 로베르 김 신부를 대등하고 청국 배로 조선을 향해 1877년 9월초에 항해를 시작했다. 그리고 청국에서의 뒷일은 코스트 고 신부에서 맡겨 처리하도록 했다. 위험하고 고달픈 향해 16일 만에 마중 나온 교우를 황해도 장연앞 바다에서 만나 배천 새터 김회장 집으로 갔다. 두 분은 거기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하고 이 주교는 상제 옷으로 바꾸어 입고 다시 뱃길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울로 들어왔다. 이 주교의 입국으로 조선교회는 11년 만에 다시 주교를 모시게 되었으며 이미 입국한 네 신부와 청나라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부 둘을 합치면 모두 일곱 명의 성직자가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리델 이 주교가 조선을 떠난 지 11년, 주교 임명 8년 만에 다시 입국하여 전교의 바탕을 다지며 만주에 남아서 아직 입국하지 못하고 있는 두 성직자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국경을 너머로 밀사를 보냈는데 1878년 1월 26일 최지혁이 달려와 이 주교의 밀사들이 국경을 넘다가 잡혔는데 고문에 못 이겨 모든 것을 자백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교우들이 이 주교에게 피신할 것을 종용했으나 이 주교는 태연하였다.

한국의 파리 외방전교회 12명의 순교자들

이 작품은 한국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12명의 순교자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 중에서 10명이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의 일원으로 시성되었다.

"참된 신자가 될 날이 왔다. 모든 것은 천주의 뜻이다. 천주를 위하여, 그리고 다시없는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

과연 1월 28일 포졸들이 들이닥쳐 주교와 집 주인 최지혁 등을 잡아갔다. 주교는 5개월 동안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심문을 받고 옥살이를 하다가 결국은 청국으로 추방당하는 몸이 되었다.

한편 블랑 백 신부는 숨어서 전교 활동을 하며 북경 주교와 프랑스공사에게 실정을 알리고 이 주교의 구출을 호소하는 서한을 교우 편에 보냈으며 북경 주교 들라플라스(Delaplace)와 프랑스 공사 브리니에(Brenier)는 곧 행동에 나서 총리 이홍장에게 교섭하여 조선 정부에 국서(國西)를 보내게 하였다. 청나라 예부(禮部)는 1878년 5월 15일 국서를 보내어 리텔 이 주교의 석방을 종용하였다. 이 주교는 1878년 6월 11일 포도청에서 새로 지어준 베옷을 입고 가마를 타고 서울을 떠났다. 네 명의 가마꾼과 2명의 포졸이 앞뒤를 호위하며 위엄을 갖추어 국경선까지 멀고먼 여행길을 나선 것이다.



11. 문호 개방 정책과 신교의 자유

이 주교가 국외로 추방되자 2년 전에 부주교로 임명된 블랑 백 신부가 교회 행정을 맡아 보았다. 그런데 1879년 5월 15일 공주 지방으로 전교 나갔던 드레트 최 신부가 잡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왕은 곧 서울로 올려 보내도록 명하고 이 주교의 선례에 따라 최 신부를 만주로 추방하도록 하였다. 고종은 이어 사건을 결말지은 지 7일 후에 좌우 포도대장을 바꾸었다. 이것은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졌을 뿐 아니라 앞으로는 서양 신부를 함부로 다루지 못하도록 하는 암시라고 볼 수 있다.

최 신부가 추방됨으로써 조선에서는 백 신부, 정 신부, 김 신부 등 세 신부만이 남아 있었는데 1880년에 새로 두 신부가 입국하여 성직자는 다시 타텔 민 신부와 1878년부터 역시 만주에서 대기하고 있던 리오빌 유(Lionville 柳) 신부였다. 이 두 신부는 1880년 5월 11일에 1차 조선에 입국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그해 11월에 입국하였다.

11-1. [조선책략]이 몰고 온 회오리바람

1880년에 접어들면서 서양의 통상 요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일본이 1876년에 이미 조선과 국교를 열고 있었으며 6월에 예조참의(禮曺參議) 김홍집(金弘集)이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와서부터 조야에서는 새로운 파동이 일어났다.

문제의 발단은 일본 주재 청국 공사관 참찬관 황준헌이 저술한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받은 온데서 비롯되었다. 김홍집이 이 책을 왕에게 바치지 그 내용을 논의한 끝에 영의정 이 최응과 좌의정 김병국은 다 같이 이 책의 내용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으나 많은 유생들이 상소를 올렸는데 그 중 병조정랑 유원식은 "천주학이 주자(朱子)의 가르침과 같다 함은 사학에 물들어 성현을 모독하는 말이므로 이는 물리쳐야 합니다. 이런 책은 우리나라 천주학군이 외국인과 결탁하여 만들어 냈을 것이니 하루빨리 그 흉한 무리들을 없애고 나라 일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하는 내용의 글을 바쳐 귀양을 가는 등 말리는 등, 반대가 심하였으나 결국 고종의 개화주의 정책으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11-2. 문호 개방 정책과 성직자 대거 입국

외국과의 문호 개방 정책이 굳어져감에 따라 미국은 청국의 도움을 얻어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14조항으로 된 한미수호 통상조약에 조인하였다. 일단 서양나라와 조약이 맺어지자 뒤이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이 분주하게 서둘러 1883년 한영 수호조약과 한독 수호조약이 체결되어 부산, 완산, 제물포 등 항구가 열리게 되었다.

프랑스도 미국의 뒤를 이어 곧 수호조약을 맺으려 하였으나 천주교에 관련된 사항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교섭이 4년이나 정체상태에 있다가 1886년 5월에 가서야 조약이 조인되었고 1887년 5월 30일에 비준서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어렵게 이룩한 한불 조약의 결과로 천주교는 비로소 신교의 자유를 문서상으로 보장받게 되었으며 성직자들도 상복과 방갓을 벗어버리고 검은 수단을 입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 천주교회 창설 후 103년만의 일이었고, 조선교구 설정 후 57년만의 일이었다.

한편 만주로 추방당한 이 주교는 건강이 나날이 나빠지자 1882년 6월 교황청에서 블랑 백(Jean Blanc 1844-1890) 주교를 제7대 교구장에 임명함으로써 새로운 교구장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파리에서 보낸 네 신부 포아스넬 박(Poidnel 朴), 조스 조(Josse 趙), 미라발 서(Miraval 徐), 보두네 윤(Baudounet 尹)신부 이다. 이들은 1885년 말까지 입국하여 성직자 수는 모두 11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12. 한일합방, 해방, 6.25동란, 추기경 탄생 (Ⅰ)

12-1. 본격적인 성직자 배출(페낭 -용산신학교)

어둠이 가시고 먼동이 트자 본격적으로 선교의 자세를 가다듬게 되었다. 그 기본 방향으로 신학생을 양성하여 신부를 길러 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여 국내 양성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제4대 주교였던 베르뇌 장 주교가 1856년에 충청도 제천군 배론에 신학당을 세우고 다블뤼 안 신부를 원장으로 하고 푸르티에 신 신부와 함께 10명 내외에 신학생을 가르쳤는데 1866년 병인박해 때 장 주교와 4명의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자연히 문을 닫게 되었다.

배론 신학당이 폐쇄된 다음 신학생을 외국으로 보내는 노력을 계속 기울였는데 1881년부터 1884년까지 21명의 신학생을 페낭 신학교에 보낸 기록이 있으나 이들 중 7명이 풍토병으로 죽고, 나머지 신학생들도 거의 병석에 눕게 되었다. 블랑 백 주교는 페낭 신학교로 보내는 것을 중지하고 1885년 원주 부흥골에 신학원을 개설하여 미라발 서 신부에게 책임을 맡기고 페낭에서 돌아온 네 명의 산학생과 신입생 3명을 합쳐 7명을 가르치게 하였다. 다음 해인 1886년 한불 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서울에 신학교를 세웠는데 용산에 [예수성심학원]으로 1887년 봄이다. 페낭에서 귀국하여 용산 신학교를 졸업, 신품성사를 받은 순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869년 4월 26일 강성삼, 강도영, 정규하, 1897년 12월 18일 한기근, 김성학, 이내수, 1899년 3월18일 김원영, 10월 1일 홍병철, 1900년 9월 22일 김문옥, 김승연 등의 순서로 신부가 되었으니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 천주교의 초기 성직자로서 기억될 것이다.

옛날 명동성당의 모습

블랑 백 주교는 1888년 우리나라 최초로 프랑스의 [샤르트르 성바오로수녀회] 수녀를 맞아들었고 그 뒤를 이은 뮈텔 민 주교는 한국 가톨릭의 심벌인 명동 대성당을 세웠다. 1911년, 정부에서 사범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23명의 학생을 모집하고 개교하였으나 2년 후에는 지원자가 부족하여 문을 닫았다.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날로 확장되어 천주교 교세에 따라 교구를 분리해야 되겠다는 민 주교의 건의에 따라 교황 비오 10세는 1911년 경상도와 전라도를 관할 지역으로 하는 대구 교구의 설정을 1월 23일 발표하고 그해 6월 11일, 경향신문사 사장으로 있던 드망쥬 안(Demange 安) 신부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구는 설립 80년 만에 경성교구와 대구교구로 분할되어 각각 다른 교구장을 갖게 되었으며 경성교구장은 민 주교가 맡아 보았다.

한일합방이라는 격동기를 맞이하면서도 천주교세는 날로 신장하여 1920년에는 성당 242개소, 신자 수 9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8월 25일, 경성 교구에서 함경도와 간도 지방을 분할하여 원산교구를 설립하고 초대 교구장에 사우에르 신(Bonifacius Sauer 辛)주교가 임명되었다. 이후 서울 혜화동에 진출된 독일 분도회 수도원은 함경도 덕원으로 옮겨가 해방될 때까지 함경도 지방의 신자들을 위해서 활동해 왔다.

12-2. 교구 설정 100주년 행사와 민 대주교의 서거

1931년 9월26일 일본 주재 교황사절 무니 주교를 맞이하여 조선 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 행사가 서울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 행사에는 경성 교구장 민 대주교를 비롯해서 대구 교구장 안 주교, 원산 교구장 신 주교, 연길 교구장 백 주교 등 네 주교와 세 감목대리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교회 문제를 종합적인 검토와 여러 가지 사업을 의결했다. 조선 천주교회의 개회기를 맞이하여 "활짝 피어라 순교의 꽃"이라는 표어를 가지고 제8대 교구장으로 취임하여 43년을 재임한 민 대주교는 1933년 1월 23일 역사에 기록될 큰 업적을 남기로 그의 표어대로 순교의 꽃을 활짝 피게 하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민 대주교 후임으로 부주교로 있던 라레보 원(A.Larrebeau 元亨根) 주교가 제2대 경성 교구장에 취임하여 일제 말기에 노기남(盧基南) 주교가 교구장에 임명될 때까지 10년간 재임하였다. 그 후 한일합방이 되고 36년간의 압제에서 1945년에 해방이 되는 과정에서 1939년에 평양교구를 정식주교구로 승격시켜 메리놀회 오세아 오(F.O'shea 吳) 신부를 주교로 임명했다. 이어 1940년에는 춘천교구를 설립 골롬바노 선교 퀸란구(Thomas Quinlan 具) 주교를 교구장에 임명했다. 그해에 원산 교구가 함흥교구와 덕원교구로 분리되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공격을 자행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의 막이 올랐으며 이를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평양 교구장 오세아 주교를 비롯해서 35명의 미국인 신부를 적성 국가 사람이라고 체포 감금했다. 일제는 뒤이어 프랑스인 성직자들에게도 압력을 가하여 교구장직에서 몰아내고 일본인 주교를 맞아 들여 교권까지도 식민지 체계아래 두려고 안간힘을 썼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당시 경성교구의 최연장자요, 원로 성직자였던 이기준(1884-1977) 신부가 정면에 나서서 원 주교에게 엄중히 항의를 했다.

이 신부의 항의에 원 주교는 깊은 이해를 가지고 당시의 비서 오기선 신부를 파견해서 교황 사절 마렐라(Maerlla) 대주교를 설득하여 조선인 교구장을 세우도록 적극 협조했다. 이렇게 해서 1942년 1월 6일 빌르모 우(Villemot 禹) 신부의 보좌신부로 12년 동안 종현성당에 있는 노기남 신부에게 경성 교구장 임명장이 교황 비오 12세의 이름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에 당황한 일본인들은 동경 주재 교황 사절에게 압력을 주어 대구교구장 무쎄 문(Mousset 文濟萬) 주교를 강제로 밀어내고 일본인 하야사까 신부를 대구교구장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발전을 예측하고 경성교구 신부들은 이기준 신부를 선두로 노 교구장의 주교 승품 추진 운동을 적극적으로 은밀하게 진행시킨다. 라틴어로 된 청원서에 본당 신부들의 서명을 받아 문서가 비밀리에 로마 교황청에 전달되었고 이러한 애타는 노력의 보람이 나타나 11월 24일자로 교황의 대리주교 승품 인가가 전달되었다. 1942년 12월 20일 주일날 노 주교 성성식이 종현 대성당에서 원 주교 주례로 거행되었다. 조선교구 설정 111년 만에 조선인 첫 주교가 탄생하였으며 이로써 경성 교구장 노 주교의 자리는 확고하게 굳어진 것이다. 이것은 또한 교권(敎權)이 정권(政權)을 이겨낸 천주교 역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이기 하다.

1943년 2월 7일에는 광주 교구장 대리에도 일본인 와끼다 신부가 임명되었으나 평양 교구장에는 그동안 끈질긴 교섭 끝에 1943년 3월 21일 홍용호 신부가 임명을 받게 되었고 1944년 4월 17일에는 두 번 째 조선인 주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