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깨달음의 문제
(1)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불교역사 2600여년 가운데 가장 많은 질문이고, 가장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지혜의 종교이다. ‘붓다(buddha)-불타(佛陀)’는 말 그대로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불교도의 이상인 열반(혹은 해탈)은 절대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가?
그런데 문제는, 붓다의 깨달음은 다른 유일신교의 종교와 달리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고 변용돼 왔다는 사실이다. 2600여 년에 걸친 불교사상사는 바로 무엇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권오민
불교에서 ‘깨달음’을 표현하는 말에는, 깨달음, 열반, 해탈, 대오, 혜오, 증오, 증득, 돈오, 돈증, 대각, 정각, 도피안, 득도, 달도, 견성, 성불, 등각, 무상정등각, 구경각, 묘각,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원돈, 원각, 원적, 적멸, 멸도, 적정, 한소식… 등 수십 개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 한 마디로 ‘깨달음’을 표현하기가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깨달음을 얻은 상황에 따라 그 표현하는 방법도 달라짐을 나타내기도 한다.
깨달음, 해탈이란 탐(貪)ㆍ진(瞋)ㆍ치(癡)의 소멸이고, 괴로움에서 벗어남이며, 그것은 곧 불교의 핵심 가치인 무상(無常) ․ 무아(無我) ․ 공(空)에 대한 이해를 깨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수타니파타(경집/經集)>에서 붓다는 왜 자신이 깨달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히신 바 있다.
“나는 알아야 할 바(苦聖諦)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道聖諦)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滅聖諦)을 버렸다.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깨달은 사람)이다.-수타니파타 558게” 이는 곧 깨달음은 ‘사성제를 철견(徹見)’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리고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등에서 붓다는 연기법을 통해서 정각을 이루셨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연기법을 깨달은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연기의 가르침은 무아(無我)와 같은 말이다.
이와 같이 깨달음을 일컫는 용어도 다양하고, 이를 정의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깨달음의 특징들을 통해 깨달음의 정의에 접근해야 하겠다.
① 위의 내용들을 종합해볼 때, 일단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사성제ㆍ연기ㆍ무아를 깨달아 탐 ․ 진 ․ 치, 그리고 고(苦)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겠다.
②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는,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을 새로 말들어낸다는 창조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미 있어온 진리에 대한 발견이라는 점이다. 붓다는 연기법을 설명하면서, “연기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나오지 않건 간에 이 법은 존재의 이법(理法)으로서 존재와 더불어 있어 온 것이다.”라고 하셨다. 여래는 다만 이 법을 자각해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을 뿐이란 말이다.
③ 이와 같이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진리에 대한 눈뜸’이었다.
④ 그러던 것이 대승불교, 특히 선종(禪宗)에 와서는 ‘자기 자신의 본성을 바로 봄으로써 부처가 된다[견성성불(見性成佛)]’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깨달음이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자기 자신의 발견’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을 깨달아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였음을 깨치게 되면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이 ‘견성성불’은 자기 마음을 바르게 가져, 자기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쳐야 한다는 선종(禪宗)의 이치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⑤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것은 마음의 전환을 뜻한다. 즉, 깨달음이란 해탈(解脫)을 의미하며, 해탈은 온갖 번뇌와 고(苦)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진, 해방과 자유의 개념을 나타낸 말이다. 이는 마음 상태가 바뀐, 자기초월을 의미하며, 불교수행과 실천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⑥ 깨달음은 윤리도덕을 초월한다. 왜냐면 깨달음은 윤리나 도덕과 같은 그런 관념하고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해 둘 것은, 깨달음은 윤리도덕을 초월하지만, 깨달은 인간은 윤리도덕 안에 있다. 깨달은 인간은 가장 윤리도덕적인 인간이란 말이다. 때문에 깨달음이라고 하는 경지는 윤리도덕을 초월하지만 깨달은 인간은 윤리도덕 안에 있다. 그것이 열반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불교의 문제점 중 하나는 인간이 지켜야 될 근본도리를 지키지 않고 마치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윤리도덕을 파괴하는 것을 깨달음처럼 생각해서 그것을 마치 깨달은 자의 매력처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잘못된 모순이다. 가장 윤리도덕적인 사람이 깨달음을 얻은 자이지, 깨달음과 윤리도덕의 파괴는 전혀 관련이 없다.
⑦ 깨달음이란 ‘내가 추구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궁극의 진리를 확연히 깨친 것’을 말한다. 즉, 참선을 하든, 간경을 하든, 염불을 하든, ‘나’를 비롯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는 어떤 원리로 존재하는가를 확철대오(廓徹大悟) 함을 깨달음이라 한다.
⑧ 그런데 불교라는 종교적 입장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도 단계가 있다.
그 첫 번째는 지적 단계이다.
두 번째는 정서적 단계이다.
마지막은 행동적 단계이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지적(知的) 단계의 깨달음은 있으나 정서적 단계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붓다는 ‘깨달음 지상주의자’가 아니다. 오로지 깨달음의 결과로서 자비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보리심의 참된 보살의 실천, 즉 보리행을 강조한 분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깨달음’이란 것을 단순히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설명한다든지 지적 이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렇게 되면 미국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영화에서 미국을 본 것을 가지고 미국 전문가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⑨ 깨달음이란 부처님도 알려줄 수 없고, 스승도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본인만이 수행과정을 통해 스스로 체험하고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용어가 다방면에 쓰이기 때문에 혼란을 겪는다.
⑩ 원래 깨달음이란 붓다 수준의 정각(正覺)을 말하고, 그 외에 소소한 알음알이가 타파되는 과정을 견처(見處)라 하며, 한 소식했다, 초견성했다고 하는 것이 온당한 표현일 것이다.
⑪ 그런데 수행과정에서 수행자의 업장이 소명될수록 많은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때 그런 과정을 점검하고 바른 수행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스승이 있다면 수행자는 옆길로 새지 않고 바른 수행의 길로 빠르게 갈 수 있다. 그러한 조건을 갖추지 모한 수행자는 소소한 자신의 체험을 깨달음으로 착각하고 스스로 높여서 남의 스승 노릇을 해서 마구니의 길로 인도한다. 그리하여 눈 먼 자가 눈 먼 자를 이끌어서 같이 구렁텅이에 빠지듯이 스승과 제자가 함께 마구니 함정에 빠진다.
⑫ 특히 수행자가 조심해야 할 경우는 견처, 한 소식, 초견성의 경지가 올 때이다. 이때는 어지간한 경전(經典)을 해석할 수 있게 되며, 조사어록(祖師語錄)도 무슨 뜻인지 알게 되고, 모든 사물을 볼 때마다 그 이치를 알기 때문에 그 이치를 표현하는 게송(偈頌)이 저절로 튀어나오므로 게송을 입에 달고 산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규범이 우습게 보이므로 방탕해질 수도 있고, 어린 아이처럼 순수해지기 때문에 애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또는 미친 사람처럼 쏘다니기도 한다. 이는 수행자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관념이 모두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때가 수행자에겐 가장 위험한 시기이다. 이때 올바른 스승이 바로 잡아주지 않으면 수행자는 자칫 마구니의 길로 빠져버릴 수 있다고 한다.
⑬ 깨달음의 본질은 앎이다. 다만 깨달음은 앎은 앎이되 일반적인 앎과는 다른 특별한 앎이다.
여느 앎이 사성제(四聖諦)라는 틀 밖에서 얻어지는 앎인데 비해 깨달음은 사성제라는 틀 안에서 얻어지는 앎이다.
여느 앎이 타인ㆍ타물을 대상으로 추구해 얻는 앎인데 비해 깨달음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추구해 얻는 앎이다.
여느 앎이 점진적으로 얻어지는 이지적(理智的)인 앎인데 비해 깨달음은 훌쩍 뛰어오르듯이 비약적으로 성취되는 직관적(直觀的)인 앎이다.
이를 정리해서 말하면, 깨달음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은 이런저런 논란이 붙을 수 없는 자명한(自明)한 진실이다. - 김정빈 <경>에서
이와 같이 깨달음이란 우리가 아는 일상에서 쓰는 뜻하고는 다르다. 일상에서 깨닫는다는 말은 문득 알았다는 뜻이지만 불교에서 깨달았다는 말은 알기는 안 것이지만 의식으로 안 것이 아니고 무의식마저 다 없어져서 만법의 본질을 요달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실지로 스님들은 깨닫는다는 말보다는 견성(見性)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깨달으면 바로 영원한 자유인이 된다. 곧바로 붓다 행이다. 일초직입 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다.
다음은 깨달음에 대한 조성택 교수의 글이다. 요약이지만 많은 시사점이 있다.
“깨달음의 역사는 인종적ㆍ문화적 경계를 넘어 확산된다. 대승불교는 동아시아에서 다시 진화해 선불교를 낳았다. 선불교에서는 불ㆍ보살(佛菩薩) 외에 조사(祖師, master)라는 존재가 ‘깨달음의 존재’로서 등장한다. 조사들은 깨달음이란 ‘멀리서’ 혹은 ‘오랜 세월에 걸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장’ ‘지금 여기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조사들은 ‘마음이 곧 부처요(心卽佛)’,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 곧 깨달음(見性卽佛)’이라고 가르친다.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이어지는, 사자상승(師資相承)하는 선종(禪宗)의 역사는 깨달음의 전승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출ㆍ재가를 막론하고, 깨달음이라는 ‘체험’을 불교의 요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확철대오(廓徹大悟)의 최종적 깨달음만을 유효한 불교수행의 목표라 생각하고,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깨달음을 ‘체험’이라고 하거나 혹은 ‘체험된 깨달음’만을 유효한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불교라는 종교는 불가피하게 개인화, 밀실화 될 것이며, 깨달음은 소수 선택된 자들의 ‘특권’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이후 한국불교 전통에서 소위 ‘깨달은 자’의 말과 행위에 있어 역사적ㆍ사회적 타당성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행위를 하든 어떤 법문을 하든 그것들은 전적으로 ‘깨달음의 표현’이다. 그 표현과 내용이 용납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은 중생이라서 그럴 뿐이다. 때로 세간에서 깨달았다고 믿고 있는 어떤 선지식의 ‘깨달음’이 유효한 지에 대해 의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수행의 정도가 낮은 자가 판단할 수 없는 문제로 유보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만이 체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특권화’ 돼 있다. 그리고 그 특권화 된 영역을 거론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불교계에서 금기시 된다.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교인들 스스로가 언설로써 평하기를 거부하는 ‘금기의 영역’이다. 종단에 비판적인 재가지식인들이나 활동가들조차도 종단의 ‘권력’과 ‘금력’에 대한 비판은 서슴지 않으면서, ‘깨달음의 영역’에 대한 의심과 비판은 ‘스스로’ 삼가하고 있다.
사실 이 문제의 폐해는 출가 스님의 경우보다 재가자들의 경우가 오히려 더 심각하다. 가장 큰 문제는 “깨닫지 못한 내가 뭘 할 수 있겠나”라고 하는 낮은 자존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깨달음은 신비한 ‘무엇’이 돼버리기도 하고, 일상적 체험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신비의 경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알쏭달쏭한 법문이 때로 더 큰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 현대 한국불교의 한 진경(眞景)이다. 못 알아듣는 것은 듣는 이의 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때로 고개를 주억이며 알아듣는다고 믿게 하거나 스스로 믿는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어쩌면 이런 불통의 상황 속에 스스로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이런 불통의 상황을 적절히 신비화해 오히려 자신을 숨기는 은폐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된다.
그렇다면 과연 불교의 깨달음이 일종의 ‘체험’이며 이 체험이 불교의 요체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깨달음이 단지 종교적 체험으로만 머문다면 불교는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라는 덫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문제 - 때로 불교전통에서 말하는 생사의 문제 - 가 결코 작은 문제이거나 사소한 문제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개인은 개체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사회와 결코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불교라는 종교가 개인의 생사문제에만 국한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제도적 종교로서의 존립근거를 없애는 일이며 연기와 무아를 핵심으로 하는 불교의 세계관과도 맞지 않는 일이다.”
이상과 같은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깨달음은 여전히 불교 수행자의 이상이요 목표임에는 틀림이 없다. 부처님 이래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전통에서 ‘깨달음’은 단지 어떤 경지에서 경험하게 되는 특수한 체험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에 이르는 '수행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에 자기초월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행으로 이어지는 것까지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냉난자지(冷暖自知)’라고 했다. 즉 깨달음의 세계는 자신이 직접 체험해 봐야 안다는 뜻이다. 불법(佛法)은 남에게 배워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몸소 체험해야 깨닫는다는 말이다.
“깨달음을 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리의 변하지 않는 존재성과 연기적으로 펼쳐지는 모양이 너무도 정확하고 명백하기 때문에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의식의 관점에서 깨달음을 얻지 않고 추상적으로 진리를 생각으로만 그려내는 불확실한 존재성을 직접 경험하게 함으로써 존재의 진실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서이다. 깨달음은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다. 의식을 넘어선 직접적인 앎이다. 직접 스스로의 마음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법(法)을 직접 맛을 보는 것이다.-카페 ‘言下大悟’에서
다음은 깨달음의 문제에 대한 강병조 교수의 글이다.
우리나라 선(禪)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중시한다. 무엇을 깨달을 것이며 깨닫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먼저 깨달은 상태에 대해서 간단히 논하고자 한다.
선사들은 참선하는 동안에 나타나는 시공간 개념을 초월한 몸의 상태나, 작은 물소리도 크게 들리는 지각의 변화나, 화두의 의문이 풀리는 어떤 해답을 깨달음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러한 생리적 또는 심리적 현상은 오랜 참선 후에 생길 수 있는 뇌의 상태에 불과한 것이라고 현대 의학은 말한다.
한 예를 여기 소개한다. <뉴스위크>에 실린 ‘신경 신학(neuro-theology)’이란 제목의 내용 일부이다. 제임스 오스틴(James Austin) 박사는 미국 보스턴에 사는 신경과 교수이다. 그는 참선을 오래했으며 이날도 참선하면서 영국 템스 강가에 서 있다가 이상한 경험을 했다. 오스틴은 갑자기 그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과 다른 어떤 깨침(enlightenment)의 느낌을 받았다. 주위의 물리적인 세계와 구분된 그의 개인 존재(individual existence)의 느낌은 밝은 새벽에 아침 이슬처럼 증발돼버렸다. 그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as they really are)' 보였다고 말한다. '나, 나에게, 나의 것(I, me, mine)'의 감각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고, 나는 영원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오래된 동경, 혐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나 자신을 불어넣으려는 생각은 사라졌다. 나는 사물의 종국적인 성질(the ultimate nature of things)을 이해함으로써 아름다워졌다고 그는 말했다.
오스틴 박사가 신경과 의사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 순간을 불교에서 말하는 깨침의 순간으로 생각했거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비스러운 경험으로 해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자기가 경험한 것을 뇌 회로로 설명했다. 위협감을 모니터하고 공포심을 등록하는 편도체(amygdala)의 활동이 감소해야만 한다. 공간 지남력(指南力)을 담당하고, 자신과 세계를 분명하게 구별하게 하는 두정엽 회로는 조용해져야만 한다. 시간 지남력을 담당하고 자의식(self-awareness)을 느끼게 하는 전두엽과 측두엽의 회로는 분리돼야만 한다. 개인(selfhood)의 고등기능으로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잠깐 중단되거나, 용해되거나, 의식에서 삭제되는 것 같다.
오스틴의 이 논문은 1998년 MIT출판사가 <선(禪)과 뇌(Zen and the Brain)>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불교신문> 2008년 10월 22일자에는 부산 해운정사 조실 진제 스님이 용맹정진에 참가한 사부대중에게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 나던고?"라는 화두를 내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진아(眞我)’를 찾으라는 이 화두를 여래장이나 불성처럼 불변하는 실체가 상주한다는 여래장사상을 따라 존재의 배후에 있는 그 무엇을 찾으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불성설(語不成說)에 불과할 것이다. 불변하는 실체는 없는 것이다.
필자는 '석가모니가 깨달은 것'을 우리 불자들이 다시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욕심 때문에 생기는 고통을 없애려면, 자연이 기능하는 원리(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원리)를 깨달아 욕심을 적게 부리며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이란 자연법칙을 제대로 아는 것을 말하고, 무지에 의한 고통에서 해방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해탈이요 열반이며, 이런 상태가 깨달은 상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진리를 미리 알고 바르게 살아서, 편안히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난 해탈이요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종교인 동시에 철학이요, 과학이며, 심리학이고 정신수양의 도(道)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인간 싯다르타는 생존 당시 연기(緣起), 무아(無我), 사성제(四聖諦), 삼법인(三法印), 팔정도(八正道), 공(空)사상, 중도(中道) 등 아주 과학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현대과학에 맞지 않는 교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석가모니의 과학정신을 현대과학으로 재해석하면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된다. 원래의 석가모니의 과학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한국불교 개혁의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한국불교는 이제 위에 열거한 비불교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석가모니의 깨침과 근본 가르침, 즉 연기, 무아, 사성제, 삼법인, 팔정도, 공사상, 중도사상 등으로 돌아가야 한다. 혹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현대과학에 맞지 않는 교리가 있다면 석가모니의 과학정신을 받아들여 현대과학에 맞게 재해석하면 된다. 이와 같은 개혁은 석가모니의 원래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지 결코 개혁이 아니다.
깨달음 문제에 대해 각묵 스님은, 「결론적으로는 아직 저도 고민 중이다. 불교 안에서조차 깨달음 해탈에 대해 이야기를 못 하고 있다. 불교 안에서부터 이를 명확히 이해하고 사유한 후 전 국민에게 확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 어떻게 깨달을 것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해체해서 보자는 것이다. 해체해서 보면 무상ㆍ무아가 보이고 이를 통해 깨달음이 실현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라고 했다.
(2) 깨달음에 대한 논쟁
깨달음에 대한 이해에 갑론을박이 있다. 이를 통해 붓다의 깨달음에 접근해보자.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① 현응 스님 - 「깨달음은 원래 붓다와의 문답과 기억의 억념(憶念-마음에 깊이 새김)을 뜻하는 사띠(sati)로 연기(緣起)와 공(空)을 ‘이해하는 깨달음’이었지 궁극적 완성의 ‘이루는 깨달음’이 아니었다. 조사선과 간화선을 봐도 기억을 뜻하는 사띠와 마찬가지로 깨달은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반추해서 ‘이해하는 깨달음’이다. 후기로 갈수록 사띠에 위빠사나, 삼매, 선정들이 결합돼서 ‘이해하는 깨달음’이 ‘이루는 깨달음’으로 고준해지고 연금술처럼 신비화됐지만, 오늘날은 깨달음에 스마트 폰, 다양한 분야의 책들만 봐도 연기와 공의 이해가 가능하다. 독서와 사유야말로 이 현대시대의 사띠이자 간화선이다. 그러니 ‘이해하는 깨달음’은 가능하고 실천의 영역인 역사(사트바, 자비보살행)를 실천하지 못해도 깨달음은 훼손되지 않으며, ‘이루는 깨달음’은 자신도 중생도 구제하지만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
부처님은 고행을 통해서도 아니요, 선정을 통해서도 아닌 논리적인 사유와 성찰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청할 때 삼매와 선정을 통해 수련하라고 지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선정이나 삼매 없이도 충분히 깨달음이 가능하다.」
이상과 같이 현응 스님은 “선정이나 삼매 없이도 깨달을 수 있다”며 “불교의 요체는 ‘이루는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깨달음’에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계속해서 현응 스님의 주장이다.
현재 한국의 조계종에서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평생에 걸친 과업이다. 깨달음을 위한 노력은 3개월, 6개월 정도로는 언급조차 할 수 없고, 여러 해가 지나고 수십 년 이상을 참선 수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수십 년을 투자해도 현실적으로는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 보기 힘들어 돈오(頓悟)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이다.…
깨달음은 불교도에게 선결과제이자 기본요건이기 때문에 깨달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문제에는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기 힘들다.…
한국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몸과 마음의 완성된 경지이자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로서 ‘깨달음’ ‘확철대오’ 등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정의하는 깨달음은 대단히 추상적으로, 깨달음이란 것을 이렇게 모호하게 설정해서는 이를 얻기 위한 노력의 방법도 불분명하고, 깨달음의 성취 또한 어느 수준의 어떤 것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 평생을 노력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까닭도 깨달음이라는 내용을 잘못 설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저 깨달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본다.
② 유경 스님 - 「붓다는 책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니다. 어떤 문헌에서도, 어떤 의식의 이해로도 알 수가 없는 문제, 즉 인간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야만 하는 가장 근원적 연유를 밝히기 위해서 출가했다. 붓다는 홀로 깊은 선정과 사유 중에 모든 것은 변해간다는 무상(無常)을 깨달았다. 무상한 중에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도 깨달았다. 의식의 이해 차원을 벗어난 깊은 선정 중에 12연기로 생사의 세계를 통찰했으며, 고(苦)의 원인과 처방을 밝힌 4성제(四聖諦),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중도(中道), 중도로 가는 8가지 바른 길(八正道)을 밝혔다. 붓다의 수행이었던, 사띠(sati)는 37조도품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지관(止觀) 정혜(定慧) 수행, 심지어 다른 종교의 명상수행에도 관통하는 키워드로, 이해(undetstand)가 아니라 마음집중(mindfulness), 깊은 알아차림(awareness)을 뜻했다. 이것은 몸의 감각과 마음의 의식, 무의식이 다 동원된 상태지, 그저 머리로 알아듣고 이해하고 통찰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붓다가 행하던 호흡명상 수행법을 전한 중국 후한시대 안세고의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은 제목이 ‘아나바나(anapana, 들숨날숨) 사띠(sati, 念, 알아차림awarenesss, 마음집중mindfulness, 마음을 지킨다-守意)’의 경전이다. 붓다는 수시로 숲속에 들어 호흡명상을 했으며, 그 명상의 주요 수행법이 사띠(sati,念)인 것이다. 붓다가 호흡을 지켜보면서 선정에 들었다면 간화선자는 화두를 들고 선정에 든다. 호흡이든 화두든 사마타(止)든 위빠사나(觀)든 선정(定)이든 지혜(慧)든 좌선이든 행선이든 알아차리기(사띠)는 모든 관찰 통찰 수행 명상을 관통하는 기저이다. 이 사띠를, 가르침을 외워 기억해 ‘이해하는 깨달음’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은 붓다의 말씀에도 어긋난다. 붓다는 “내가 한 말이라도 그냥 믿지 말고 꼭 스스로 확인해 보라.” 하지 않았는가. 나아가 붓다는 물질의 영역을 관찰하고 비물질의 영역을 관찰해서 소멸의 영역에 이른 이들은 생사윤회에서 벗어난다[수타니파타]고 했다. 물질의 영역은 감각의 영역이고, 비물질의 영역은 정신의 영역이며, 소멸의 영역은 물질과 몸, 정신과 마음의 장애를 모두 벗어난 영역이다. 이것을 어찌 가르쳐서 외우고 전달해서 이해로 깨달을 수 있겠는가. 붓다의 제자들 중 붓다의 말씀을 누구보다 잘 듣고 잘 기억해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던 아난이 깨닫지 못해 오백나한이 모인 결집에도 참석하지 못할 처지라 낙담한 채 베개를 베고 돌아눕다가 깨우쳐서 가까스로 아라한의 결집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일화와, 잘 외운 아난보다는 지혜제일인 사리자에게 법을 부촉했다는 고대 경전인 <수타니파타>의 기록, 그리고 꽃을 들어 보이자(拈花) 미소로 화답한 가섭에게 마음을 부촉했다는 <오등회원(五燈會元)>에 기록된 내용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깨달음은 이해가 아니라 체험, 체득이다. 깨달음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온 것과 같기 때문에 절대 다시 달걀 속으로 돌아 갈 수 없다. 중생의 고통을 듣는 관세음보살과 중생의 고통을 건지러 간 지장보살이 어떻게 이해의 차원에 머무르면서 중생들을 구제하지 못해도 나의 ‘이해의 깨달음은 훼손되지 않는다’ 하겠는가. ‘이해하는 깨달음’과 ‘이루는 깨달음’이라는 용어는 형태상 기왕의 해오(解悟)와 증오(證悟)를 풀이한 듯하다. 하나의 삼매를 제대로 이루면 백 천 삼매가 가능해지듯, 참으로 이해한 깨달음이라면 이루는 깨달음으로 변해가는 게 아니다. 자비보살행으로 확장될 뿐이다.
현응 스님은 시종일관 사띠와 간화선 모두 대화를 기억하고 잘 성찰해,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른 똥 막대기’를 들고 기억해서 잘 성찰하라는 말인가?
화두와 하나가 돼서(打成一片) 바로 비추라(照顧脚下)는 간화선의 취지에도 어긋난다. 맑음과 밝음은 스스로 아는 작용이 비추는 보너스다. ‘간화선은 참구(參句)해야지 참의(參意)해서는 안 된다’는 선사들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 모두 체험을 강조한 수행법들이다.
중국 선불교의 탄생은, 인도 승 달마의 도래를 계기로 중국의 교학불교가 이해에 치중한 이론적 천착이나 지적 이해에 갇힌 사변적 불교인 것을 붓다의 깨달음, 실천정신으로 다시 돌이키자는 성찰적 심자각(心自覺)에서 비롯됐다.」
이번에는 현응 스님에 대한 수불 스님의 논박이다.
③ 수불 스님 - 「진리란 ‘잘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라 ‘보고 얻고 알고 깨우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의심을 뛰어넘고, 의혹을 제거하고, 두려움 없음을 얻을 수 있다. 이해하는 것만으로 안 된다는 것은 수행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너무나 잘 안다. 이해하는 것만으로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전세계 불교학자들마다 깨달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깨달음이 이해라는 주장은 수행자들을 모두 바보로 만드는 희론이자 책상물림의 말이다.
무명(無明)이 사라지면 순차적으로 결국 노사(老死)도 사라져서 괴로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지만, ‘실제로 무명이 소멸되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언어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해야만 실제로 무명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명만 소멸되면 순차적으로 노사까지도 소멸될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어떻게 해야 무명이 소멸될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도 현실적인 문제이다. ‘잘 이해하는 것’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현응 스님은 연기법을 잘 이해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처럼 말하지만, 깨닫기 전에는 연기법의 진면목을 바로 알기 어렵다. ‘중도(中道)’는 사무치고 사무쳐서 끝내 통해야 하는 것이지, 이해로서는 도저히 그 실상을 파악할 도리가 없다. ‘깨달음’은 불이법(不二法)에 속하고, ‘이해’는 이법(二法)에 속하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이해하는 것이다’는 말은 곧 ‘상을 여읜 것(깨달음)은 상을 가진 것(이해)이다’라는 무의미하고 모순된 주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인 ‘이법’의 논리로 중도의 ‘불이법’을 재단하려는 모든 시도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다. 그렇게 되면 ‘범주오류’에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까지 더하게 된다. 분별망상으로 불이법을 더듬다가 ‘마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고 현애상(懸崖相)을 내어서, 하급의 차원으로 퇴타해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 운운하는 것을 고봉 화상은 <선요(禪要)>에서 ‘원숭이가 장대로 달을 따려한다’고 경책했다.- 불교닷컴에서
다음은 이재열 원장과 김재성 교수의 논박이다.
④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은 초기경전인 쌍윳따니까야의 내용을 언급한 뒤, “연기를 깨달았다는 것은 이해가 아닌 체험이고 그 체험은 선정 수행을 통해 실현된다”며,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을 포함하지만 더 나아가 체험적으로 증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경전에도 부처님은 무색계 사선정과 멸진정에 이르러 연기를 사유하고 새벽에 도를 깨쳤다고 명시돼 있다”며 “현응 스님은 경전의 근거를 무시하고 개인적인 사견으로 연기와 깨달음을 오도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고 말했다.
⑤ 김재성 능인불교대학원대 교수는 “오비구가 부처님의 대화로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선정을 통해 깨달았음이 경전에 분명히 나와 있다고 지적하고, “아난 존자가 기억력이 탁월했지만 아라한과를 얻지 못해 처음 결집에 참여하지 못했던 점도 간과돼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각묵 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반론이다.
⑥ 각묵 스님 ― “깨달음의 경지도 정확한 언어표현으로 표현돼야 한다. 비불교적인 언표를 사용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대승이라느니 최상승이라느니 하는 것은 단지 감언이설일 뿐이다. 오히려 깨달음을 신비화하고 절대화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깨달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느니 깨달아봐야 스스로 안다느니 하는 것도 깨달음을 호도하는 무지몽매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부처님께서는 불교의 창시자며 불자들의 스승이고 사표인 분이다. 그분 부처님께서는 결코 애매한 언표나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는 어떤 언어표현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은 사성제를 철견하는 것, 팔정도를 실현하는 것, 오온ㆍ12처ㆍ18계의 무상ㆍ고ㆍ무아를 통찰하는 것, 12연기를 순관ㆍ역관하는 것 등으로 명쾌하게 말씀하셨다. 부디 <대승기신론>과 같은 후대의 논서를 절대시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초기불교를 잘못이해하거나 폄하하거나 깨달음을 절대화하는 듯한 태도는 버리기 바란다."
다음은 정원 스님의 글이다.
⑦ 정원 스님 ― 「저는 현응 스님의 입장을 ‘혜학(慧學)’의 관점에서, 수불 스님의 입장을 ‘정학(定學)’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논쟁이 진정 승려의 올바른 수행관과 가치관이 확립되고 종단과 승가가 이상적 조직으로 거듭 태어나는 ‘수행과 자비실천의 환경성’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마무리 되려면 ‘계학(戒學)’이 동등한 무게로 논의에 포함돼야 한다고 줄곧 생각해 왔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나라 출가자들의 올바른 수행관과 가치관이 확립되고 승가가 이상적 조직으로 거듭나려면, 유독 뿌리가 약한 계학(戒學)과 지계청정(持戒淸淨)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인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라고 봅니다. 지계청정 없이는 아무리 좋은 수행법도 결과를 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부처님을 비롯한 숱한 역대의 선지식들께서 계ㆍ정ㆍ혜 3학의 균등한 수행을 그토록 강조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현응 스님의 문제 제기는 우리불교 풍토가 그 수승한 간화선을 실참하면서도 깨달음의 결과가 그리 잘 나오지 않는데다가 실참 과정에 있는 수행자들이 사회참여나 현실인식 혹은 역사인식이 부족한데서 시작한 것이라고 봅니다. 스님께서는 그 이유가 간화선의 지나친 강조와 교학에 대한 경시에서 원인을 찾았고, 이 후의 논쟁 역시 그 틀을 중심으로 갑론을박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일정부분은 동의할 수 있지만, 율학을 공부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러한 현상의 원인에는 수행자의 ‘지계청정’이 극미하기 때문에 참선을 해도 선정에 들기 어렵고, 혹 선정에 들었다 해도 선정에서 나오면 청정행이 오염되고 혜학이 증장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어떤 수행법을 선택하든 결국은 작금에 우리 승가가 처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위와 같이 깨달음에 대해 갑론을박하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주로 남방 상좌부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주장을 좀 더 들어보자.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란 없다. 성불에 이르는 모든 길은 붓다께서 6년의 수행 끝에 모두 다 발견하고 깨달아 놓았다. 그것은 바로 팔정도와 바라밀이 바로 그것이다. 팔정도와 바라밀은 불교적 윤리이며 도덕적 지침이자 그 자체가 도덕적 인간의 완성이다. 팔정도와 바라밀은 성불에 이르는 길이며, 그리고 성불로 가는 인간들이 살아가야 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붓다가 발견해 놓은 그 진리를 믿고 그대로 불도를 걸어가면 된다.
선불교는 무엇을 더 깨닫겠다는 것인가?
깨닫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이야기 하면 모르는 것을 알게 된다, 또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는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선불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럼 붓다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즉, 붓다가 발견해 놓은 성불에 이르는 여러 길들이 있는데, 그 중 많은 부분을 숨겼거나 아니면 붓다가 발견해 놓은 길 말고 성불에 이르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길을 찾고자 한다는 뜻으로밖에 해석이 안 된다. 붓다가 발견해 놓은 길 이외에 또 다른 길이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길로 간다면 결코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그러기에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불교는 불교가 아닌 것이다.
선불교가 추구하는 길이 올바른 길일 수도 있고, 붓다가 깨달아 놓은 진리보다 더 좋은 진리일 수 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달마교나 혜능교 또는 선교라고 하면 된다. 불교라는 이름을 덧붙이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시비비가 일어날 필요도 없다. 불교는 불교대로 선교는 선교대로 각자의 길을 가면 되기 때문이다. 굳이 선교가 불교라는 이름 속에 파 묻혀서 붓다를 들먹이거나 붓다의 진리를 도용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지금부터라도 달마교 혜능교 간화교 선교 뭐 이런 이름으로 바꾸면 된다.“ - 신비인
이런 깨달음의 논의에서 주장과 비판들이 과연 얼마나 처절한 수행 끝에 얻은 답인지. 어찌 보면 수행은 뒷전이고, 오히려 용맹정진하는 순수한 분들을 능멸하고 있는 과오를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 민망스럽기조차 하다.
요즘 일부 비판적인 스님들의 언사를 보면, 입에 담기 민망한 어투가 마구 쏟아지는데, 참으로 듣기 거북하다. 속이 답답해 그렇기도 하겠지마는 어디까지나 불교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일진대, 비판하는 언사에도 금도가 있어야 하고, 종교인다워야 하리라고 본다. 시중잡배와 같은 언사를 마구 쏟아내면 그 내용이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해도 공감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깨달음이란 열심히 정진해서 늘 깨어 있으면 저절로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경지에 참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런 걸 두고 언사만 난무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깨달음이란’ 아주 간명하게, ‘~~~이러한 것’이라고 천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하는 사유에 대한 답은 천차만별이고, 끝없이 이야기 되고, 앞으로도 그 논의는 계속되리라고 본다. 때문에 불교에서 깨달음의 문제 ―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끝없이 이어지자 않을까 한다. 따라서 이 글도 계속 추가돼야 하리라고 본다. 그래서 일까,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에 나오는 깨달음에 대한 글을 추기한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고도로 수련된 높은 정신세계를 이루는 것이라 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understanding)’이라 말하면 수준이 떨어지는가? 깨달음을 ‘~에 대한 이해’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몸과 마음의 완성된 그 어떤 경지’로 볼 것인가에 따라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방법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나 기간은 말할 것 없이 크게 차이날 것이다. 만일 깨달음을 ‘올바른 이해’라고 한다면 그러한 깨달음을 얻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 자신도 고행을 통해서도 아니요 선정을 통해서도 아닌, 논리적인 사유와 성찰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이 녹야원의 첫 설법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당신의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며칠이 걸렸을 뿐이다. 그리고 ‘납득시킨다’는 말을 썼듯이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납득시키는 방법도 선정삼매를 통한 것이 아니라 밤낮 없는 대화와 토론이었다. …
대폭 상승된 깨달음의 모습은 모호하게 추상적인 용어로 표현되거나, 언어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하고 불가지한 경지로 묘사된다. 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반증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설정하는 것이다(‘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라고 찬탄한 부처님의 태도와 대조적이다). 이렇게 되는 순간 깨달음은 엄청난 도그마가 되어 이젠 수행자도, 그 집단들도 통제 불능한 권위가 되어 천년, 이천년을 흘러가는 것이다. 아마 불교의 수행자들이 평생을 걸쳐 수행해야 하거나, 그렇게 해도 대다수 ‘그런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까닭은 깨달음이라는 그 내용을 잘못 설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종교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도초기불교의 전륜성왕 사상연구/박총환.동국대 (0) | 2020.09.07 |
|---|---|
| 우리나라의 불교의식(佛敎儀式) (0) | 2020.08.11 |
| 팔부신중(八部神衆)/blog.daum.net/bds6789 (0) | 2020.08.02 |
| 돈오점수의 (頓悟漸修) 새로운 해석 - 돈오를 중심으로 -./김성호.동국대 (0) | 2020.07.24 |
| 기독교와 이슬람의 내세론 비교 연구/김승호.한국성서대 (0) | 2020.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