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월리스 부통령의 訪中과 중미관계
Ⅲ. 임시정부의 월리스 면담 시도와 비 망록 전달
Ⅳ. 국민정부의 대응: 九個準繩의 철폐 와 임시정부에 대한 “통제완화”
Ⅴ. 맺음말
Ⅰ. 머리말
1919년 4월 上海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 종전 후인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으로 그 활동의 막을 내릴 때까지 거의 전 적으로 중국 국민당정부(국민정부)의 지원에 의존하여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임시정부와 중국 간의 관계를 다루는 그간의 많은 연구들에서 국민정부 의 “협력과 지원”을 강조해왔다.
물론 국민정부의 협력과 지원이 없었다면 임시정부의 존립 자체가 어려웠다는 점에서 본다면 “협력과 지원”은 엄연한 사실이 며 20세기 한중관계의 역사 가운데에서 가장 우호적 대목으로 평가받아서 마땅 할 것이다.
그러나 蔣介石을 비롯한 중국국민당 주요 지도자들과 그 휘하 국민정부의 한국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 정책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협력과 지원”과는 또 다른 면모, 곧 “협력과 지원”을 통한 “통제와 동원”이라는 면모를 보게 된다.
그것은 중국의 입장에서 한국을 단순히 가까운 이웃나라나 友邦으로 서 도왔다기 보다는 중국의 國益을 먼저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어찌보면 당연한 입장의 결과였다.
이런 관점에서 그 동안 한국 학계에서 중국 측의 “통제 와 동원”을 강조하는 연구들이 나왔고1) 최근 들어 일부 중국학계에서도 “협력과 지원” 뿐만 아니라 “통제와 동원”도 공존했음을 인정하는 연구가 나오고 있는 것 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2)
1) 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서울, 일조각, 1993); 구대열, 「이차대전 중 중국의 한국정책국민당 정권의 임정 정책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28-2(한국정치학회, 1995); 배경한, 「중일전쟁시기 장개석 국민정부의 對韓정책」 『역사학보』 208(역사학회, 2010); 배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화민국의 외교관계(1911-1945)」 『중국근현대사연구』 56(중국근현대사학회, 2012); 조덕천, 「중일전쟁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중화민 국 국민정부의 지원」 『동양학』 63(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2016); 배경한, 「윤봉길의 거 이후 蔣介石 국민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과 ‘長期抗戰’」 『역사학보』 236(역사학회, 2017); 염인호, 「중일전쟁기 한국광복군 창설에 관한 일 연구-창설 배경 및 과정을 중심 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6(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1); 손염홍, 「한국광복군의 자주권 확보와 한중교섭」 『한국근현대사연구』 95(한국근현대사학회, 2020) 등 참조.
2) 陳紅民, 「蔣介石對韓國的認知」, “20世紀 韓中關係와 東亞連帶” 국제학술회의(2022. 9. 부산대학교) 발표 논문 참조.
중국 측이 지원과 통제라는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점 을, 임시정부 측에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 점은 임시정부 내부 에서 중국으로부터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과 함께 중국 측의 통제 시도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 노력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의 통제 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한국광복군에 대한 국민정부의 엄격한 통제와 관련하여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임시정부의 다양한 노력이 치 열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은3)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전쟁이 중국을 넘어 태평양 전체로 확대되기에 이르자 임시정부는 최대 열강 미국의 참전과 그로 인한 국제 정세의 변화를 전망하면서 새로운 “독립의 꿈”을 모색하기에 이른다.4)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전개된 이러한 국제 환경의 변화는 임시정부로 하여금 중국의 지원을 넘어서는 새로운 전략을 짜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으니 이를테면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임시정부와 중국 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의 對日戰 참전 이후 임시정부의 미국을 향한 외교적 노력은, 임시정부 산하 주미외교위원부의 활동뿐만 아니라 워싱턴의 국무성이나 重慶주재 미국대 사관을 통한 활동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다.5)
임시정부의 對美 접근이 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러한 활동들 가운데에서, 이 글에서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 건을 통하여 임시정부의 대미 접근의 실상과 그것에 대한 중국의 대응이 어떻 게 나타나고 있었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은 1944년 6월 하순 에 있었던 미국 부통령 월리스(Henry A. Wallace)의 중국 방문을 둘러싸고 전 개된 임시정부의 대미 접근 노력과 그에 대한 국민정부 측의 대응이다.
월리스 의 訪中에 관해서는 중국학계에서 중일전쟁 시기 대미외교를 보여주는 중요한 주제의 하나로 관련 연구들이 여러 편 나오고 있지만 국내학계에서는 전문적인 연구가 거의 없는 형편이다.6)
3) 한시준, 앞의 『한국광복군연구』; 배경한, 앞의 「중일전쟁시기 蔣介石 국민정부의 對韓政 策」; 손염홍, 앞의 「한국광복군의 자주권 확보와 한중교섭」; 김영신, 「重慶時期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對中國交涉과 중국의 대응」 『한중관계연구』 7-1(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 원, 2021) 등 참조.
4) 배경한, 「1941년의 ‘꿈’-한국광복군의 국제정세 인식-」 『중국근현대사연구』 59(2013).
5) 한시준, 「중경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3(2016); 차현 지, 『태평양전쟁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미군사외교: 한국광복군에 대한 지원 청원 외 교를 중심으로』(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21).
6) 월리스의 중국 방문과 관련한 중국 학계의 연구로는 張北根, 「蔣介石對待華萊士訪華的 態度-以<蔣介石日記>爲主要資料的分析」 『社會科學』 2018年 4期; 胡越英, 「華萊士訪 華: 延安美軍觀察組的最終成行」 『社會科學硏究』 2009年 4期; 付辛酉, 「再論華萊士訪 華與1944年的中美關係」 『史林』 2013年 4期 등이 있다. 한국학계의 연구로는 앞의 차현 지, 『태평양전쟁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미군사외교: 한국광복군에 대한 지원 청원 외 교를 중심으로』가 있는데 임시정부 측의 대미 군사외교라는 맥락에서 월리스 방중 시기 를 다루고 있다.
이 글에서 중점을 두고 다루려는 것은 월리스 방중 前後 시기에 임시정부의 대미 접근 노력 그 자체와 함께 임시정부의 대미 접근 노력에 대한 중국 측, 곧 蔣介石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정부 측의 입장과 대응을 자세하게 밝히면서 그것이 갖는 의미를 규명해보려는 데에 있다.
이를 통하여 태 평양전쟁 시기 미국의 주도권 아래 재편되어 가고 있던 동아시아 국제절서 가운 데 임시정부의 대응전략으로서의 대미접근 노력이 갖는 의미와 함께 이에 대한 중국 측의 대응이 갖는 성격과 의미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II. 월리스 부통령의 訪中과 중미관계
12월에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했던 蔣 介石과 국민정부는 그러나 미국 측의 신탁통치 주장에 밀려 “적당 시기”를 인정 하는 선에서 戰後 한반도 문제의 해결방안으로서 4대 열강에 의한 신탁통치 방 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과정에서 蔣介石과 국민정부 측에서는 신 탁통치 실현과정에서도 중국의 역할을 가능한 한 극대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하여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유지되어 온 한국임시정부를 중심으 로 하는 전후 한국 정부 구성 방안을 추진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7)
7) 배경한, 「카이로회담에서의 한국문제와 蔣介石」 『역사학보』 224(2014).
중국 측의 이러한 의도는 그러나 미국의 반대에 부닥쳤으니 미국은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거부함으로써 중국의 의도를 제지하고 나섰던 것이다.
미국이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임시정부에 대한 외교적 승인을 거부한 가장 큰 이유는 사실 戰後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주도적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것이었지만 8), 미국 측에서 내세우고 있던 임시정부 불승인의 표면적인 이유는 임시정부가 전체 한인들을 대표하지 못한다거나 그 조직이나 운영이 통일적이지 못하다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9)
카이로회담을 전후하여 중국이 임시정부에 대하여 요구한 가장 중요한 사 항이 각 政派 사이의 통합이었는데 이는 중국의 지원을 둘러싸고 복잡하게 진 행되고 있던 임시정부 내 각 정파들 간의 치열하고 반복적인 다툼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이 나서서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로부터 임시정부 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받아 내는 데에 통합된 임시정부의 면모가 필요했던 때 문이었다.10)
역설적으로 보자면 그만큼 중국은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 을 추진하는 데에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텐데 그 이 면에는 戰後 한국에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親中政府를 구성함으로써 한반 도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 영향력을 회복, 유지해가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통제를 통한 戰後 한반 도에 대한 영향력 확보라는 중국의 구상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등장으 로 크게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1937년 7월 중일 전면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對 中 정책은 일본과의 경제적 관계를 고려한 중립정책을 기본으로 하면서 민간 차 원에서의 차관이나 상업적 거래를 허용하는 수준이었다.11)
8) 구대열, 『한국 국제관계사 연구2』 (서울, 역사비평사, 1995), 116-127쪽; 박다정, 「태평 양전쟁 초기 중국의 팽창주의와 미국의 한반도 신탁통치 결정」 『역사학보』 256(2022), 364-371쪽.
9) 重慶 시기 임시정부가 가지고 있던 인적, 물적 토대가 매우 취약했던 것은 사실이다. 고 정휴, 「重慶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외교 실패 원인에 대한 검토」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33(2009), 7-11쪽.
10) 김영신, 앞의 「重慶時期 대한민국임시정부의 對中國交涉과 중국의 대응」, 171-175쪽.
11) 김지환, 「中日戰爭期 重慶國民政府의 對美外交-미국의 중립정책에 대한 대응을 중 심으로-」 『중국사연구』 42(중국사학회, 2006); 김지환, 「중일전쟁기 중국의 전시외교와 국제관계」 『동양사학연구』 147(2019), 104-107쪽.
그러다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對中 지원 에 나서게 되었으며 전쟁이 진전될수록 그 지원 규모가 점차 커지게 되었다.
그 만큼 蔣介石 국민정부의 對美 의존도가 커지고 있었고 동시에 전쟁의 주도권은 미국으로 옮겨 가고 있었던 것이다.12)
그러나 미국의 지원을 둘러싸고 미중 양국 사이에 적지 않은 마찰음도 함 께 생겨나고 있었다. 특히 蔣介石 국민정부가 對日戰 이외에 공산당 토벌과 같 은 國內 문제에 치중하면서 대일전을 소홀히 하는 상황이 나타나자 이에 대한 미국의 불만과 시정요구가 자주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1942년 이후 연합군 에 의하여 새롭게 설정된 중국-버마-인도 戰區의 총사령관에 오르게 된 蔣介 石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미국 측 중국 戰區 최고지휘관(참모장) 파견을 요청 하여 重慶에 오게 된 스틸웰(Joseph W. Stilwell)과 蔣介石 사이의 잦은 마찰 은 미국의 지원과 군사지휘권을 둘러싼 미중 간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13)
12) 중일전쟁 시기 미국의 중국에 대한 재정 지원과 중국의 대미 의존에 대해서는 吳景平, 「抗戰時期中美租借關係述評」 『歷史硏究』 1995年 4期; 吳景平, 「蔣介石與戰時美國對 華財經援助」 『史學月刊』 2011年 1期; 陶文釗·楊奎松·王建郞 共著, 『抗日戰爭時期 中國對外關係』 (北京, 社會科學出版社, 2009), pp. 270-294.
13) 항일전쟁 시기 중미관계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스틸웰과 장개석 사이의 대립 마찰문제(이른바 스텔웰사건)는 중국학계에서 중요 연구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黃道 炫, 「緬甸戰役蔣介石史迪威的失敗責任」 『抗日戰爭硏究』 2001年 第2期; 付辛西, 「第 一次史迪威危機與中美戰略分歧」 『抗日戰爭硏究』 2011年 第1期; 章百家, 「抗戰時期 中美合作的歷史經驗-由史迪威在華經歷所想到的」 『新遠見』 2012年 第1期; 吕迅, 「論蔣介石與史迪威矛盾中的中共因素」 『社會科學硏究』 2016年 第2期; 付辛西, 「第二 次史迪威危機與1943年中美軍事同盟關係硏究」 『民國檔案』 2018年 第3期 등 참조. 당초 蔣介石의 요청은 미국의 지원을 강화할 수 있는 군사고문을 파견해달라는 것이었 던 데에 반하여 미국 측의 기대는 미국 지원의 효과를 증대시키기 위해 중국군의 개혁 을 추진하는 데에 맞추어져 있어서 양측 간의 대립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주 천, 「미국의 대중국 군사원조(1942-1944)-Joseph W. Stilwell의 활동을 중심으로-」 『원광대학논문집』 23(원광대학교, 1989).
이에 더하여 1944년 봄 이후 유럽 전선에서의 연합국의 우세 확보와는 달리 중국에서는 이른바 ‘1호작전’이라고 불리는 일본군의 대공세에 밀려 5 월 18일 河南省 洛陽이 함락되고 6월 18일에는 湖南省 長沙가 함락되는 등 전 세가 크게 불리해지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결과로 미군 주둔지인 湖南 省 衡陽이 위기에 놓이게 되었을 뿐 아니라 湖南 지역으로부터 미군의 집중 주 둔지인 雲南省 昆明에 이르는 배후 교통선까지 위협당하는 형세에 이르고 있 었다.14)
미국 부통령 월리스의 중국 방문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일이었다.
루즈벨 트는 중국 戰區의 실제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와 함께 전후 예상되는 국공 간의 내전을 방지하기 위한 國共調整, 그리고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를 비롯한 전후 열강들 간의 관계 설정을 위한 구체적 실상 파악을 위해 월리스의 중국 파 견을 구상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미국 측에서는 일본군의 군사력을 파악하기 위하여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華北과 滿洲 일대에 대한 현지조사단을 파견할 수 있도록 국민정부에 요청함으로써 사실상 蔣介石과 국민정부의 군사력과 공산당 토벌 정책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15)
미국 측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蔣介石은 크게 반발하였다.
蔣介石은 루 즈벨트의 의도가 蔣介石의 최대 약점인 국내 분열, 곧 國共 간의 대립을 조정하 려는 것이라고 의심하면서16) 특히 미국 현지조사단의 공산당 중심지 延安 방문 요청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14) 張憲文 主編, 『中國抗日戰爭史(1931-1945)』(南京, 南京大學出版社, 2001), pp. 1045-1119 참조. 15) “President Roosevelt to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FRUS, 1944, China V. 6, p. 329. 공산당 지역에 대한 현지조사단 파견 문제는 중국에 파견되어 있 던 미국 군사당국에서 여러 차례 요청하고 있던 일이었다. 「美軍促華萊士取得委員長 同意,可以派人訪問延安」, 郭榮趙 編譯, 『蔣委員長與羅斯福總統戰時通訊』(臺北, 幼 獅文化事業公司, 1978), pp. 226-227.
16) 「魏道明電蔣中正此次華萊士訪華似有意探討中蘇關係及中共問題(1944.5.15.)」 『蔣中 正文物-革命文獻-對美外交: 華萊士訪華』, 臺灣國史館(이하 國史館으로 약칭) 所藏 檔案, 檔案番號: 002-020300-00038-004; 「蔣中正電魏道明向美表示華萊士若有調 解國共之意則共將更囂張(1944.5.20.)」 『蔣中正文物-籌筆: 抗戰時期(五十四)』, 國史 館 所藏檔案, 檔案番號: 002-010300-00054-005.
2월 21일 미국 측 지휘관 헌(Thomas G. Hearn) 장군과의 담화에서 蔣介石은 미국 현지조사단이 일본군 주둔 상황 파악을 위해 陝西와 山西 등 華北 지역을 방문하는 것은 환영하지만 延安에는 갈 수 없다고 언급하였다.17)
蔣介石은 미군과 공산당 측의 직접 교류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 명히 하였던 것이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중국과 미국 양측 간의 여러 달에 걸친 협상의 결과 6월 20일 부통령 월리스가 重慶에 도착하였다.
월리스가 6월 24일 미군 주둔지인 昆明으로 떠나기 전까지 중미 간의 현안을 두고 월리스와 蔣介石 간에 前後 다섯 차례 회담이 이루어졌다.18)
월리스는 회담에서 국공 간의 관계 개선과 중소 간의 관계 조정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蔣介石의 반응은, 표면상 매우 정중했던 것과는 달리, 사실상 미국 측의 ‘내정간섭’이라고 보며 불 쾌한 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蔣介石은 월 리스와의 회담에서 공산당과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힘쓸 것과 소 련과의 선린우호 관계 유지를 약속하였으며20) 이후 미중 상호 간에 대표 파견을 통하여 군사 정치적 합작을 증진시켜나가기로 하였다.21)
월리스는 귀국 도중에 루즈벨트에게 전보를 보내 “현재로서는 蔣介石을 지 지 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보고하였다.22)
17) 『蔣介石日記』 1944년 2월 21일; 葉惠芬 編, 『蔣中正總統檔案: 事略稿本』 56卷(臺北, 國史館, 2011), pp. 354-355; 呂芳上 主編, 『蔣中正先生年譜長編』 第7冊(臺北, 國史 館, 2015), p. 583.
18) 『蔣中正先生年譜長編』 第7冊, pp. 673-677.
19) 張北根, 「蔣介石對待華萊士訪華的態度-以<蔣介石日記>爲主要資料的分析」 『社會科 學』 2018年 4期. 20) 「與華萊士總統談話要旨: 參事室呈蔣委員長建議(1944年6月)」 『蔣中正總統文物-革 命文獻-對美外交: 華萊士訪華』, 國史館 所藏檔案, 檔案番號: 002-020300-00038- 007. 5차례의 회담 내용은 「蔣委員長與華萊士副總統會談記錄摘要(一)~(五)」, 앞의 『蔣委員長與羅斯福總統戰時通訊』, pp. 227-240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21) “Wallace to Chiang(June 27, 1944) from Chengtu”, 『蔣中正總統文物-革命文 獻-對美外交: 華萊士訪華』, 國史館 所藏檔案, 檔案番號: 002-020300-00038-013.
22) “Vice President Wallace to President Roosvelt”, FRUS, 1944, China V. 6, pp. 243-244.
또 워싱턴 도착 후 蔣介石 에게 보낸 건의문에서도 소련과의 외교교섭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戰後 발생할 수 있는 외교적 문제를 방지할 것, 중미 군사합작이 효율적으로 진행되도록 개선 할 것, (공산당과의 관계를 포함한) 중국 국내 항전 정세를 조속히 개선할 것 등 을 지적하는 데에 그쳤다.23)
다만 협상 끝에 미군의 현지조사단은 延安까지 방문 하게 되었으며 毛澤東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자들과 직접 면담을 가졌다.
이로써 미국의 국민당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확인하는 한편으로 공산당으로 하여금 그 를 틈타 미국과 독자적 협상을 전개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게 만들었다.24)
결국 1944년 5월 중순 이후 새로 추진되기에 이른 국공협상의 과정 속에서 미국은 국 민정부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으로 공산당을 포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으니 蔣 介石과 국민정부로서는 미국의 군사 재정적 지원의 대가로 미국의 국공 조정 권 유와 개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25)
23) 「華萊士向羅斯福報告訪華觀感,提出建議」, 앞의 『蔣委員長與羅斯福總統戰時通訊』, pp. 241-244; 『蔣介石日記』 1944년 6월 29일. 루즈벨트는 월리스의 보고를 받은 직 후 蔣介石에게 전보를 보내 공산당 측과의 협상을 추진하겠다는 蔣介石의 결정을 격려 하였다. “Roosevelt to Chiang(July 17, 1944)”, 『蔣經國總統文物-蔣中正函電錄底 (一)』, 國史館 所藏檔案, 檔案番號: 005-010100-00001-022.
24) 胡越英, 「華萊士訪華: 延安美軍觀察組的最終成行」 『社會科學硏究』 2009年 4期; 付 辛酉, 「再論華萊士訪華與1944年的中美關係」 『史林』 2013年 4期; 侯中軍, 「美軍延安 觀察組與中共對美外交的轉變」 『中共黨史硏究』 2011年 第2期; 楊冬權, 「關于1944 年美軍觀察組考察延安的幾個問題-基于中央檔案館藏相關檔案的硏究」 『黨的文獻』 2015年 第5期; 胡越英, 「美軍觀察組赴延安動機揭秘」 『炎皇春秋』 2017年 第1期 등 참조.
25) 정형아, 「國共兩黨의 갈등과 화해에 대한 미국의 태도변화(1941-1944」 『중앙사론』 31(한국중앙사학회, 2010).
요컨대 1944년 6월 말, 월리스 부통령의 중국 방문과 蔣介石과의 회담은 전 쟁 수행 과정에서의 미국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국 공관계라고 하는 이후 중국사의 전개과정에서 최대 관건이 된 문제를 둘러싸고 서도 미국의 적극적인 개선요구와 관여 의도가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만큼 미국의 중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 양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III. 임시정부의 월리스 면담 시도와 비망록 전달
전술한 바대로 重慶 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미국과의 직접적인 교섭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었다.26)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인 1941년 12 월 10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외교부장 조소앙의 명의로 발표된 대일선전포고 를 루즈벨트에게 보낸 것을 시작으로 하여 1942년 3월 초에는 임시정부 명의로 워싱턴에 보낸 서신 형식의 보고서에서 한국인들이 전쟁에서 모종의 역할을 수 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을 함으로써27) 임시정부의 참전 가능성을 타진하기 도 하였다.
같은 해 10월, 조소앙은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연합국의 군사 작전에 참여하고자 하는 임시정부의 입장이, 그것을 통한 국제적 승인을 얻으려 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연합국의 승리를 돕고자 하는 열정에서 나온 것이라 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미국에 대한 접근 노력 가운데에는 임시정 부에 대한 중국의 지나친 통제에 대한 불만도 표현되고 있었음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1942년 12월 조소앙은 重慶주재 미국대사인 고스(Clarence E. Gauss)와의 면담에서 중국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했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중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것은) 일본 패망 후 한국을 중국의 (전통적) 종주권 아래 두려는 의도 때문”이라는 언급을 했던 것이다.28)
26) 이하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전개된 임시정부의 대미 접근에 대해서는 차현지, 앞의 『태 평양전쟁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미군사외교: 한국광복군에 대한 지원 청원 외교를 중심으로』, 114-118쪽에 자세하다.
27) “Letter from Chungking(3th March 1942)”, 『백범김구전집』 5권, p. 133.
28) “The Ambassador in China to the Secretary of State(12th December 1942)”, FRUS, pp. 860-861.
조소앙의 이 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임시정부 측에서는 임시정부에 대한 국민정부의 통제에 대한 불만이 있어왔고 그것을 미국에게 직접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제까지 중국에게만 의존하던 임시정부로서 이제는 對日戰爭 수행에 서 새롭게 주도권을 가지게 된 미국의 지지와 지원을 구하는 데로 적극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1944년 5월 이후 전개되고 있던, 미국 부통령 월리스 의 重慶 방문과 미국 현지 조사단의 화북 파견 문제를 둘러싼 미중 간의 협상이, 임시정부에게 하나의 중요한 기회로 받아들여졌음이 분명하다.
임시정부측 기록이나 중국 외교부 및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그리고 미국 외교문서 가운데에 서 월리스의 방중과 관련하여 임시정부와 중국 및 미국 측 사이의 왕래나 교섭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적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임시정부에게 있어 서 월리스의 방중이 어떤 비중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1944 년 6월 30일에 작성된 임시정부 외무부의 “6월분 업무(工作)보고”에서 첫 번째 사항으로 “미국부통령 월리스와의 회견을 위한 운동”을 들고 있는데29) 이 사실은 당시 임시정부가 월리스 면담을 얼마나 중요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단 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업무를 맡고 있던 중국국민당 조직부 산하 정보기 구인 중앙조사통계국(中統) 30)의 정보를 바탕으로 중앙비서처(中秘處)에서 만들 었을 임시정부 관련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임시정부 외교부에서는 월리스가 소련을 경유하여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월리스와 회견하기 위해 중국 외교부와 교섭하면서 환영대표로 참여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중 국 측의 허가를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31)
29) 「1944년 6월분 外務部工作報告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6권(한국사데이터베이 스). 이하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소장 자료는 모두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인용한 것이다.
30) 국민정부의 양대 정보기구인 국민당 중앙조사통계국(中統)과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軍統)의 임시정부 지원 관련 역할과 활동에 대해서는 별고를 준비 중이다.
31) 「韓國臨時政府備忘錄之硏究(1944年 6月 30日, 溫叔萱處長作成)」, 中國國民黨黨史 會 所藏檔案, 檔案番號: 特16/3.4. 임시정부에서는 국민정부 외교부 뿐 아니라 外交 部長 宋子文과 行政院長 孫科에게도 따로 월리스 부통령 면담을 도와주도록 요청하 였다.
다만 도착 이후에 회견을 주선하겠다는 중국 측의 제안에 따라 부주석 김규식, 외무부장 조소앙, 선전부 차장 안훈(趙擎 韓)의 3인 면담자 명단을 제출하였다.32)
이와 동시에 임시정부 외무부에서는 차 장 閔弼鎬를 미국대사관에 파견하여 월리스 면회를 직접 요청하는 한편으로 영 문으로 된 성명서와 비망록을 준비하여 공문(公函)과 함께 미국대사 고스에게 전 달하면서 월리스에게 전달해주도록 요청했다.
면담 요청을 받은 국민정부 외교 부와 미국대사관 측에서는 월리스가 미리 짜진 일정을 소화하는 데에도 힘들 정 도로 시간이 나지 않아 면담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함으로써33) 임시정부 측 과 월리스의 면담은 끝내 성사되지 못하였다.
임시정부 측에서 월리스에게 전달했다고 하는 성명서는 1944년 6월 10일 외 무부장 조소앙이 발표한 것으로 그 내용은 1944년 4월 24일, 임시의정원 명의로 임시정부 改組와 관련해 발표한, 즉 約憲 개정과 새로운 국무위원 선출을 통한 통합 체제 구성 이후 발표한 성명서34)를 영문으로 만든 것이다.
32) 앞의 「1944년 6월분 外務部工作報告書」.
33) 미국대사관 측에서는 월리스 도착 이후 임시정부에 편지를 보내 월리스 부통령이 “6월 17일자의 두 가지 문건과 6월 21일자의 편지를 잘 받았다”는 통지를 貴方에 보내라는 부탁을 했다고 하면서 “방문 일정이 짧아서 미리 배정된 일정 외에 시간 여유가 없다”고 해명해왔다. 같은 「1944년 6월분 外務部工作報告書」.
34) 「1944년 4월 24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발표한 성명서」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2권(한국광복군Ⅲ). 이 성명서는 미국 대사관 서기관 스프라우즈(Philip D. Sprouse) 가 임시정부 외무부 선전위원회 소속의 安原生을 면담한 보고서 뒤에 첨부한 것이다.
그리고 비망록은 월리스의 방중을 맞아 임시정부 측에서 급하게 작성한 다음 월리스뿐만 아니라 重慶 주재 각국 대사관을 통해 각국 정부에게 전달한 것을 말한다.
먼저 조소앙 명의의 성명서의 내용은, “1943년 10월 개최된 제35차 임시의정원 회의에 상정 되었던 臨時約憲 개정과 국무위원 改選은 각 당파 간의 이견으로 통과되지 못했 었다.
그러나 1944년 4월 20일에 열린 제36차 회의에서 다시 논의한 결과 원만 하게 합의에 이르게 되어 約憲을 개정하고 국무위원 改選이 이루어져 4개 정당 이 모두 지지하는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게 되었으니 이제 중·미·영·소 4개국 을 비롯한 연합국과 함께 反日戰線에 적극 나서자”는 것이다.35)
重慶 임시정부의 최대 목표인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얻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로 지적받 아 왔던 임시정부의 분열 문제를 해결하고 통합 체제를 구축했으니 이제 각국의 승인을 얻는 데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고 하면서 각국의 승인을 촉구한다는 것이 이 성명서의 요지이다.36)
다음으로 비망록은 “反樞軸國 전쟁에서 한국의 역할(Korea’s Role in the Anti-Axis War)”이라는 제목의 5페이지에 달하는 장문의 영문 비망록 (Memorandum)으로, 앞에 인용한 중국국민당 측 정보보고에 의하면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과 외무부장 조소앙이 기초를 하고 小組를 만들어 검토한 다음 국무회의를 통과한 임시정부의 공식적 외교문서였다.37)
35) “Statement by Y. Tjosowang, Minister of Foreign Affairs”, 『國民政府外交部 檔案: 韓國獨立運動(二)』, 國史館 所藏檔案, 檔案番號: 020-990600-2000-0097. 이 성명서는 6월 21일자로 조소앙이 국민정부 외교부장 宋子文에게 보낸 편지에 첨부 한 것이다.
36) 같은 날짜에 각 정당 및 단체들의 통합 임시정부 지지성명이 발표되었는데 “한국독립 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새로 개정된 臨時約憲을 인정 준수하고 김구를 비롯하여 새로 선출된 국무위원들을 최고지도자로 인정하며 통합 임시정부의 깃발 아래 연합국과 함께 최후의 일전을 전개할 결심이며 가장 빠 른 시일 안에 국제적 승인과 원조를 받도록 매진한다”는 내용이다. 「1944년 4월 24일 여러 한국단체들이 발표한 성명서」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2권(한국광복군Ⅲ).
37) 앞의 「韓國臨時政府備忘錄之硏究(1944年 6月 30日, 溫叔萱處長作成)」 참고.
실제로 1944년 5월 6일에 열린 국무회의 의결 내용 가운데에는 “승인 운동에 대하여 중국을 향해서는 十二 中全會(12차 중앙집행위원회 전체회의)를 기회로 하여 정면과 측면으로 적극 운 동하기로 하고 其他國을 향해서도 우리 정부의 승인을 요구하기로 하였다.
특히 미국 부통령 월리스(華萊斯)씨가 중국에 오는 것을 기회로 하여 각서를 작성하여 그를 통해 미국정부에 전달하고 아울러 그 각서를 등사하여 중·영·소 등 각국에 송부하도록 하였음”이라고 적시되어 있다.38)
38) 「經費籌劃及承認運動案」 『國務會議決議案綴(1944.5-1945.4)』, 『대한민국임시정부자 료집』 8권(政府首班). 여기서 말하는 國民黨十二中全會는 1944년 5월 20일부터 26일 까지 重慶에서 열린 國民黨 中央執行委員會 全體會議를 말한다. 榮孟源 主編, 『中國 國民黨歷次代表大會及中央全會資料』 下冊(北京, 光明日報出版社, 1985), pp. 863- 869 참조. 실제로 당시 韓國革命志士의 명의로 十二中全會에 備忘錄을 제출하였는데 그 핵심 내용은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원조 요청이다. 「韓國革命志士致中國國民黨 十二中全會的備忘錄」 『白凡金九全集』 제5권, 481쪽.
앞의 성명서와 마찬가지로 6월 10일자로 조소앙의 이름으로 발표된 이 비 망록의 내용은, 우선 서론에서 청일전쟁에서부터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기간 동 안 아시아의 파시스트 국가인 일본의 대외 침략과 그 악행을 열거하면서 그 가운 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한국이 독립을 되찾는 일이야말로 반파시스트 전쟁의 핵 심 목표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어서 본론으로 두 가지 주 장, 곧
①(반추축국 전쟁에서 발휘할 수 있는) 한국인들의 역량이 얼마나 큰지와
②각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먼 저 한국인들의 역량에 대해서는 華北·華中 일대에 수천 명의 한인군대(광복군) 가 군사연락 등을 담당하고 있고 關內에 수천 명, 東北三省에 300만 명의 한인이 살고 있어서 군대 동원이 충분히 가능하며 長白山 일대에는 수천 명의 한인들 이 중국유격대에 협력하고 있고 시베리아를 비롯한 소련에도 30만이 살고 있어 서 만약 제대로 된 한인 군대를 조직한다면 연합군 측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어서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하는 이유로는 모두 12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그 주요 내용은, 임시정부가 (연합군과 협력하고 있는) 한인 군대를 지도하고 있는 유일한 기구이고 26년의 역사를 가진 독립운동의 중심 기구이며 기회만 주어진다면 국외 한인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커다란 역량을 발휘할 수 있 고 임시정부 승인을 통하여 한인들의 전쟁 참여를 공식화하고 확대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일본의 괴뢰 한인조직 시도를 막을 수도 있으며 종전 후 1년 안에 정 식 정부를 만드는 데에도 승인된 임시정부가 역할을 할 수 있고 한인들에 대한 연합국의 무기 제공 등 실질적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도 임시정부에 대한 승 인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는 점 등이다.39)
요컨대 비망록의 내용은 연합국의 반 파시스트 전쟁에 참여하여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임시정부를 조속하게 승인해달 라는 데에 그 초점이 있다.
임시정부의 이러한 의도는 월리스 방중 일정이 마무 리된 직후인, 7월 3일자로 김구 주석이 蔣介石에게 편지를 보내 임시정부에 대 한 조속한 승인과 九個準繩의 철폐를 다시 한 번 주장한 것과도 완전히 같은 맥 락이다.40)
임시정부 측에서 월리스 부통령을 면담하려고 적극 시도한 것이나 위와 같 은 내용의 성명서와 비망록을 월리스를 통하여 미국 정부에 전달하려고 시도한 것, 그렇게 만들어진 비망록을 중국 국민정부 및 각국 대사관에 전달한 것, 그리 고 바로 이어서 김구 주석 명의의 임시정부 승인요청 및 구개준승 철폐 요청 公 函을 蔣介石에게 보낸 것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1944년 4월 임시정부의 개조 직후 임시정부 승인과 광복군 운영의 자주권 회복을 통해 참전을 적극 모색하려 는 重慶 임시정부의 당면목표와 그것을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앞 장에서도 언급한 바, 중국의 통제에 대한 실망과 불 만, 그리고 새로운 국제 질서 가운데 중심 세력으로 떠오른 미국에 대한 기대와 접근 시도가 깔려 있었다.41)
39) “Memorandum: Korea’s Role in the Anti-Axis War”, 『國民政府外交部檔案: 韓國獨立運動(二)』, 國史館 所藏檔案, 檔案番號: 020-990600-2000-0098~0102. 이 비망록 또한 6월 21일자로 조소앙이 국민정부 외교부장 宋子文에게 보낸 편지에 첨 부되어 있던 것이다.
40) 「金九主席致蔣主席七月三日函」 『蔣中正總統文物-革命文獻-蔣總統訪韓』, 國史館 所藏檔案, 檔案番號: 002-020400-00034-074. 구개준승 철폐 문제는 다음 장에서 상술한다.
41)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임시정부 내부의 이러한 인식 변화와 대응책 모색은, 광복 군에 대한 국민정부의 통제 정책의 핵심인 구개준승이 철폐된 이후 시점인 1945년 3월 초, 광복군 政訓處 선전과장 趙時元이 새로 重慶에 도착한 韓籍 대원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강연에서 조시원은 “중국은 한국 혁명을 돕는다고 하지만 무성의할 뿐이고 결국 (한국을 침략하고 지배하고 있는) 일본의 제국주의 사상과 같다”고 말하면서 “장래 한국의 독립은 영국과 미국, 소련과의 협력에 의 지해야 한다.”고 국민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정부 측에서는 이 런 사태(곧 임시정부, 혹은 한인들의 중국에 대한 불만과 중국으로부터의 이탈 시도) 를 예의주시하면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에까지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軍委會致中秘處代電(1945.3.14.)」, 國民黨黨史會 所藏檔案, 檔案番號: 特 16/11.12.
IV. 國民政府의 대응: 九個準繩의 철폐와 임시정부에 대한 “통제완화”
임시정부가 미국대사관 측에 전달한 성명서와 비망록은 전술한 대로, 1944 년 5월 6일의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각서를 작성하여 월리스를 통하여 미국 정부에 전달하고 등사하여 중·영·소 등 각국에 전달하기로” 한 결의에 의하여 重慶 주재 미국대사관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 전달되었고42) 중국 국민정부 측과 重慶 주재 각국 대사관에도 전달되었다.
앞에서도 인용한 국민당 中秘處에서 만든 관련 정보보고에 따르면 임시정부 측에서는 “반추축국전쟁에서의 조선의 역할(反軸心戰中朝鮮之作用)”이라는 제목의 비망록을 40부 인쇄하여 重慶 소 재 각국 영사관에 전달하였다고 되어 있다.43)
42) 重慶 주재 미국대사관 측에서는 1944년 6월 21일자로 워싱턴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 고 서신에 임시정부의 성명서와 비망록을 동봉하여 보냈다. “C. F.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June 21, 1944)”, 『美國務省 한국관계문서(Internal Affairs of Korea)』 V. 4 (원주문화사, 1998), 286-287쪽. 동봉된 성명서는 같은 책 290쪽에, 비망록은 291-295쪽에 들어 있다.
43) 앞의 「韓國臨時政府備忘錄之硏究(1944年 6月 30日, 溫叔萱處長作成)」에 들어있는 “備忘錄之發出經過” 참조.
같은 정보보고서의 후반부 에는 이 비망록에 대하여 중국 측이 취해야 할 입장을 3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첫째는 “임시정부에 대한 정식 승인은 중국 정부의 확정적 방침이며 총재(蔣介 石)의 지시로 이미 나와 있다.
반드시 다른 나라에 비하여 앞서 승인할 것이다” 라는 것이고
둘째는 “이러한 답변과 함께 외교부에 명하여 미국과 영국의 의견 을 탐문하도록 할 것”이며
셋째는 “한국광복군 문제로 한인들이 국민정부를 불신하는 가장 중요한 일로 九個準繩의 폐지를 주장해오고 있다. 심지어는 3개월 안에 철폐하지 않는다면 무효화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고 특히 김원 봉과 조소앙이 이 일로 인하여 불쾌해 하고 있다. 구개준승 철폐 문제는 한인들 의 중국에 대한 신임과 직결된 문제이므로 총재(蔣介石)께서 何部長(何應欽 국 방부장)과 긴밀하게 상의해주실 것”을 구체적인 대응방안으로 건의하고 있다.44)
44) 앞의 「韓國臨時政府備忘錄之硏究(1944年 6月 30日, 溫叔萱處長作成)」에 들어있는 “吾人對於此項備忘錄之意見” 참조.
요컨대 국민당 중비처에서는, 임시정부에서 월리스에게 전달한 비망록이 미칠 파장을 고려하여 한인들의 주장인 임시정부 승인 문제와 구개준승 철폐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蔣介石에게 적극 제시하고 있었던 것 이다.
주지하듯이 임시정부 승인 문제는 임시정부의 重慶 도착 이후 최대 목표였 으니 임시정부 측에서는 국민정부의 선도적 승인과 함께 미국 영국 소련 등 열강 의 승인을 이끌어내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발발 이 후 전쟁 수행에서의 주도권과 함께 국제적 주도권을 확대하고 있던 미국은 중국 의 영향력 아래 있는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에 원칙적인 반대 입장을 내세 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중국의 선도적 승인 자체도 어려운 일이었 을 뿐 아니라 중국이 다른 열강 국가들에게 승인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의 의도대로 重慶 주재 각국 대사관을 통한 외 교적 선전의 효과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즉 월리스 방중을 계기로 한 임시 정부의 외교활동에 대한 각국의 반응과 관련하여 외무부의 “8월분 외무부 공작 보고”에서는 “임시정부 승인 획득 운동에 대하여 中西 각국 인사로부터 이야기들(傳說) 이 紛紛하다.
비교적 믿을 만한 중국 인사로부터의 소식에 의하면 (국민정부 측 에서는) 本 外務部에서 보낸 성명서와 비망록을 상당히 重視하고 일차 黨政 방 면 인사들이 모여 논의한 결과 원칙상으로 승인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이것은 외교부에서 절차(手續)만 문제가 되고 있다. 외교부에서는, 이 문제는 중국이 단 독으로 진행치 못하고 반드시 동맹국 측의 동의가 있어야 될 것인데 현재 형편 으로는 영국과 인도, 소련과 일본 간의 관계 때문에 시기를 좀 더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마 중국 측이 우리 승인문제에 (다른 국가들과의 협력 관계를) 구 실로 삼는 것 같다. … 또 8월 15일, 본 부장(조소앙)이 王寵惠 박사(전임 국민정 부 외교부장)를 방문하여 상의한바 … 정부 승인에 관해서는 카이로회의 이후에 삼국이 한국문제 취급에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결정된바 단독으로 제기하기는 어렵지만(불편하지만)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고 하여 조소앙이 직접 王寵惠를 만난 결과까지를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 런 상황은 달리 말하자면 월리스 방중을 계기로, 그리고 그 이후에 가서도 임시 정부의 계속된 승인 요구와 국제적 선전활동이 국민정부로 하여금 상당한 압박 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임정 승인 요구와 함께 임시정부 측에서 요구하고 있던 九個準繩의 철폐 문 제는, 광복군 창설 직후부터 임시정부 내에서 많은 논란을 낳았고 임시정부 측에 서도 그 개정이나 철폐를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추진하고 있던 일이었다. 구개준 승의 내용은 한마디로 광복군의 소속, 운영, 인사, 지휘 등 모든 방면에서 임시정 부의 주도권을 완전히 부정하고 광복군을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소속의 외인부대 로 규정하는 것이었다.45)
45) 「光復軍이 軍事委員會의 직접 통할을 받는 관련규정 9項을 통보하는 代電 (1941.11.1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0권(한국광복군Ⅰ).
광복군의 실제 운영에서도 광복군에 대한 군사위원회 의 장악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으니 예컨대 광복군 총사령부의 간부인원 가운데 참모처장을 비롯한 주요 직위를 맡은 45명의 장교 가운데 33명을 중국인 장교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각 지대를 포함한 전체 장교 117명 가운데 중국 인 장교가 65명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46)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 측에서 구개준승을 받아들인 것은, 대일항전에 서 교전단체로 자격을 인정받고 그것을 통해 임시정부의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 을 수 있고 나아가 그 과정에서 구개준승도 개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 이었다.47)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태평양전쟁과 미국의 참전은 종전에 대한 전망 을 앞당기면서 중국 측이나 임시정부 측 모두에게 구개준승 문제를 다시 중요한 현안으로 만들어 주었다.
특히 임시정부 측에서는 중경 주재 미국 대사관을 비롯 하여 미국, 소련 등 열강들을 상대로 하는 외교활동 가운데 중국의 비협조와 전 후 한국에 대한 종주권 행사 우려 등을 제기하고 나섰다.48)
국민정부 측에서도 1942년 7월 이후 종전 이후 한국 재건에 대한 방안을 마련하는 관계기관 협의회 의를 개최하는 한편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의 선도적 승인과 광복군의 자주 권 인정에 대한 검토를 개시함으로써 임시정부 측의 불만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시작하였다.49)
임시정부 내에서 구개준승의 철폐를 둘러싼 요구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 은 광복군 창설 단계에서부터 한국국민당 중심의 광복군 창설에 대하여 중국 측 에 비판적 입장을 내세우고 있던 김원봉 중심 좌파세력의 정치적 공세와도 관련 이 있었다.
김원봉, 손두환, 유자명 등 좌파 인사들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의정 원에 들어온 직후인 1942년 10월 말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중국 측의 국 민참정회와 구개준승의 개정을 위한 교섭을 하도록 의결하였다.
또 11월 3일의 의정원 회의에서는 구개준승 취소안을 의결하였으며50) 1943년 1월 말에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한중 간의 평등 호혜의 새로운 군사협정(韓中互助軍事協定)을 마 련하기로 의결, 2월 1일 초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국민정부에 대한 협상을 압박 하고 나섰다.51)
46) 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서울, 일조각, 1993), 118-119쪽.
47) 「군사행동에 관한 군무부 군사보고」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9권(군무부).
48) 차현지, 앞의 『태평양전쟁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미군사외교: 한국광복군에 대한 지 원 청원 외교를 중심으로』, 116-119쪽.
49) 구대열, 「2차대전 중 중국의 한국정책-국민당정권의 임정 정책을 중심으로-」 『한국정 치학회보』 28-2(1995), 763쪽.
50) 「臨時議政院第34回會議速記錄(1942년11월2-3일)」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제3책 (임시의정원Ⅱ).
51) 「九個準繩廢止要請公函(1943.2.2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제10책(한국광복군 Ⅰ) ; 손염홍, 「한국광복군의 자주권 확보와 한중교섭」 『한국근현대사연구』 95(한국근현 대사학회, 2020), 101-104쪽.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은 이런 입장을 정리하여 2월 20일 국 민정부 외교부장 宋子文에게 구개준승의 폐지와 한중호조군사협정의 제정을 정 식 제의하였다.52)
이때 조소앙이 첨부한 한중호조군사협정초안에는 광복군을 임 시정부 아래 소속하여 인사권과 훈련 등에 관하여 자주권을 인정하되 항전 기간 동안의 지휘권은 태평양전구 中國區 최고지휘관에게 예속되도록 하며 광복군에 대한 재정 지원도 신용차관의 형식을 갖추도록 정하고 있었다.53)
그러나 구개준승 수정 내지 철폐를 둘러싼 국민정부와의 협상은, 군사위원회 주도의 광복군에 대한 점검 실시, 인도 버어마 전선에 한인 대원 파견 문제, 한독 당과 민혁당 사이의 대립과 갈등 등을 둘러싸고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 이전 까지 지지부진한 상황을 되풀이하였다.
다만 1943년 5월 초부터 시작된 광복군 에 대한 점검은 군사위원회 판공청,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軍統), 국민당 중앙 조사통계국(中統), 광복군총사령부의 4개 부서에서 2개 點檢組를 조직 파견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대원들의 사상, 체격 등에 대한 조사와 함께 “철저한 점검 을 통하여 광복군에 대한 한인들의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꺾기 위한 것”을 목적 으로 내세우고 있을 정도로54) 국민정부의 기본 입장은 여전히 광복군 ‘통제’에 있 었다.
52) 「임시정부의 ‘韓國光復軍九個行動準繩’폐지 제의서(1943.2.20.)」 『대한민국임시정부자 료집』 10.
53) 「韓中互助軍事協定草案(1943.2.2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0.
54) 「軍事委點檢韓國光復軍(1943.5.4.)」, 國民黨黨史會 所藏 檔案資料, 檔案番號: 特 16/3.12 참조.
그러다가 카이로회담으로 종전과 전후 한국의 독립이 어느 정도 가시권에 들 어오자 광복군의 자주권 회복과 참전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한 문제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2월 초 임시의정원에서는 국무위원들이 구개준승의 철폐를 책임지고 협상을 진행하되 3개월 내에 해결하지 못하면 일 방적으로 구개준승을 폐지한다는 강경론을 의결하기에 이르렀다.55)
55) 「光復軍九個行動準繩에 대한 임시의정원의 결의안(1943.12.8.)」 『대한민국임시정부자 료집』 10권.
앞에서 인용 한 1944년 6월 30일자의 중국국민당 중비처의 임시정부에 대한 정보보고서 안 에
“한인들의 우리(중국) 정부에 대한 불신이 크고 특히 구개준승의 폐지를 주장 하고 있는데 3개월 내에 철폐하지 않으면 무효로 한다는 의견이 나왔고 특히 김 원봉과 조소앙의 불만이 크다. 이번 일은 우리나라(중국)에 대한 한인들의 신임 과 관계가 크기 때문에 총재(蔣介石)와 하부장(何應欽 군정부장)이 긴밀하게 상 의하여 조속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고 한 것은 바로 1943년 12월 초 이루어진 임시의정원의 결의안을 말한 것이다.
이를테면 1943년 12월 초 카이로회담을 계기로 임시정부 측에서 구개준승의 폐지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제기한 것에 대한 국민정부의 검토가 월리스 방중 전후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1944년 6월 6일자로 서명된 국민당 중앙비서처장 겸 조직부장 吳鐵城이 군정부 장 何應欽에게 보낸 광복군 관련 문서(公函)에는, 그 전해 곧 1943년 12월, 임시 의정원의 구개준승 폐지 결의안을 언급하면서 임시정부 내부의 분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리고 구개준승 안에 한국독립당 등 불필요한 문구가 있다는 점 등을 이 유로 구개준승의 개정 내지 폐지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56)
6월 13일자로 中秘處 비서 溫叔萱이 작성한 문서(수신자 불명의 공함)에서도 6월 6 일자 오철성의 편지를 그대로 옮기고 있다.57)
이런 협의를 거쳐 오철성의 요청으로 군사위원회에서는 6월 22일부터 7월 10일까지 4차례에 걸쳐 조소앙, 이청천, 박찬익, 민석린, 김원봉 등 임시정부 측 인사들을 초청하여 광복군의 지위에 대한 협상 회의를 개최하였다.58)
56) 「光復軍行動準繩 개정에 관한 건(1944.6.6.)」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0.
57) 「韓國光復軍行動準繩九項의 심사에 관한 函(1944.6.1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0.
58) 「광복군 교섭에 관한 第一次會商 內容略錄(1944.6.22.)」; 「광복군 교섭에 관한 第二次 會商 內容略錄(1944.6.30.)」; 「광복군 교섭에 관한 第三次會商 內容略錄(1944.7.9.)」; 「광복군 교섭에 관한 第四次會商 內容略錄(1944.7.10.)」, 모두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 집』 10.
이 회의에 군사위원회 측에서는 侯成 군사처장, 趙德樹 광복군 참모장, 王繼賢 군통 요원 등이 참석하였는데 중국 측 대표로 참석한 侯成은, “九個準繩이 만들어진 후 3개월간은 아무런 문제 제기도 없었는데 임시의정원의 33차 회의 이후 구개 준승 철폐 문제가 김구 주석을 공격하는 의제로 제출되면서 한·중 사이에 문제 가 되기 시작했으니 이 문제의 본질은 임시정부 내의 정치적 분쟁 문제라고 해 야 한다.
따라서 군사위원회는 이러한 정치적 분쟁에 개입할 의사가 없으며 책 임 또한 우리 중국 측에 있지 않다.
더군다나 九個準繩을 폐지하고 군사협정을 요청하는 것은 임시정부가 승인받지 못한 단계에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 이다.”라고59) 주장함으로써 九個準繩이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이 문제 를 둘러싼 잡음의 책임도 임시정부 측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30일에 속 개된 2차 협상 회의에서도 侯成은 “임시정부가 승인을 얻지 못하는 것은 임시정 부가 3천만 한인 전체를 대표하고 있지 못하고 영토와 주권을 가지고 있지도 못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인문제는 외교부의 문제이므로 (여기서 논의할 수 없 고) 구개준승 개정에 대해서는 향후 군사위원회에서 한두 명의 대표를 파견하 여 상의를 시작할 수는 있다”고 발언하였다.60)
59) 위의 「광복군 교섭에 관한 第1次會商 內容略錄(1944.6.22.)」.
60) 앞의 「광복군 교섭에 관한 第2次會商 內容略錄(1944.6.30.)」.
임시정부 불승인의 책임이 임시정 부 자체에 있다고 하면서 그나마 九個準繩의 개정 문제에 대한 협의 가능성만을 열어 두는 데에 그친 것이다.
또 “중국 측이 한국 측을 일방적으로 원조하는 경 우이기 때문에 互助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거나 “(광복군에 대한) 점검 결과 제 2지대의 경우 3명의 공산분자가 적발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엄격한 통제가 불가 피하다”는 등의 부정적 의견을 노골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 에서는 원칙적으로 구개준승의 폐지와 함께 광복군의 임시정부 소속 등 관련규 정을 담을 새로운 한중군사협정초안을 심의해나갔다.
그리하여 1944년 7월 3일 김구의 공식 요청 편지에 이어 7월 10일, 군정부장 何應欽의 검토와 7월 15일의 외교부장 宋子文의 검토를 거쳐61) 9월 초, 蔣介石의 최종 결정으로 한국광복군 에 대한 통제정책의 핵심인 九個準繩의 철폐 방침이 임시정부에 통보되기에 이 르렀다.62)
국민정부의 이러한 대응은 한 마디로 九個準繩으로 상징되는 그간의 임시정 부에 대한 “통제” 정책의 기조를 “통제완화” 쪽으로 변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통제완화” 정책으로의 변경 배경에는 1942년 말 이래 계속되어온 임시정부의 끈질긴 구개준승 폐지 내지 수정 요구가 있었고 태평양전쟁 발발과 미국의 참전 이후 가시화된 종전에 대한 전망과 전후 한반도 문제에 대한 국민정부의 현실적 대처 필요가 들어 있었다. 63)
61) 앞의 「金九主席致蔣主席七月三日函」 『蔣中正總統文物-革命文憲-蔣總統訪韓』의 뒤 에 붙어 있는 「何應欽七月十日簽呈」 및 「宋子文七月十五日簽呈」 참조.
62) 「“光復軍九個行動準繩”廢止에 관한 건(何應欽->吳鐵城, 1944.8.28.)」 『대한민국임시 정부자료집』 10권(한국광복군Ⅰ); 「光復軍의 臨政 歸屬에 관한 指示(蔣介石->吳鐵城, 1944.9.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0권(한국광복군Ⅰ).
63) 배경한, 「중일전쟁 시기 蔣介石 國民政府의 對韓政策」 『역사학보』 208(2010), 279- 280쪽.
거기에다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월리 스 방한과 임시정부의 대미 접근, 그리고 국민정부에 대한 임정의 불만 표출 또 한 그것을 본격화 내지 가속화시키는 매우 중요한 계기였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 요가 있다.
물론 九個準繩 철폐의 원칙이 정해지는 과정이나 이후 실행 단계에 가서도 중국 측의 고압적이고 비협력적 태도와 그것으로 표현되는 “통제”적 모습이 여 전히 남아있다는 점 또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전술한 바대로 1944년 6 월 22일 이후 4차례에 걸쳐 개최된 임시정부 측과 국민정부 측 사이의 광복군 문 제 해결을 위한 교섭회의에서 국민정부 측 대표로 참석한 군사위원회 판공청 군사처장 侯成의 발언은 임시정부 측 참가자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侯成의 이러한 부정적 발언에 대하여 광복군 政訓處長을 맡고 있던 중국군 少將 黃紹美는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비서처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광복군의 人事를 거의 모두 군사위원회 판공청 군사처 侯成 처장이 전담하다시피 했는데 그 조치가 적절치 못하여(미흡하여) 한인들의 많은 불만을 샀다”고64) 비판할 정도였다.
그런 데 侯成의 발언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입장은 사실 많은 중국 측 인사들,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군부 지도자들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蔣介石의 외교 적 결정에도 불구하고 九個準繩 철폐 문제의 실무적 책임자라고 할 군정부장 何 應欽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기 일쑤였으며65) 九個準繩 철폐 결정 이후 그 실 시과정에서도 중국 국적 군인들의 철수가 이루어지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지체 되었고 그마저도 광복군 소속 중국 군인들이 항의형식으로 일괄 사직하는 불미 스러운 사태까지 일어났던 것이다.66)
뿐만 아니라 앞에서 인용한 광복군 정훈처 장을 맡고 있던 중국군 장교 黃紹美 또한 “1944년 9월 16일부터 광복군을 임시 정부 소속으로 전환했지만 군사상으로는 중국군의 지휘 체계 아래 있게 해야 하 고 인사제도도 적당하게 조정하여 불만이 나오지 않는 선에서 (중국 측에서) 시 행해야 하며 광복군에 필요한 경비도 임시정부에 발급할 것이 아니라 국민정부 에서 직접 집행해야 한다.
(광복군의) 작전의 우선순위도 중국 국내 작전이 먼 저이고 그 후에 東北으로 진출케 하고 그런 다음 한국 국내 진입의 순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67)
64) 「韓國光復軍過去之經驗及今後發展之方針(光復軍政訓處長 少將黃紹美->中央祕書 處, 1945年 1月 15日)」, 國民黨黨史會 所藏檔案, 檔案番號: 特16/5.30.
65) 1944년 7월 17일의 국민당 연회에서 김구 주석이 何應欽에게 만날 期約을 달라고 하 여 다음 주 중에 연락하겠다는 대답을 얻었지만 7월말이 가도록 회답이 없었다. 「外務 部 七月份 工作報告(1944.7.3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제16권(외무부).
66) 國民黨의 정보기관 中央統計局(中統) 葉秀峯 局長이 吳鐵城 국민당 비서장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지적한 내용이다. 「韓國臨時政府內部問題報告(1945年 4月 26日)」, 國民 黨黨史會 所藏檔案, 檔案番號: 特16/3.34. 67) 위의 「韓國光復軍過去之經驗及今後發展之方針(光復軍政訓處長 少將黃紹美->中央 祕書處, 1945年 1月 15日)」 참조.
이를테면 월리스 방중을 둘러싸고 진행된 임 시정부의 적극적인 외교, 선전, 홍보 정책과 국제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어쩔 수없이 한국광복군에 대한 통제 수단인 九個準繩을 철폐하여 임시정부의 요구를 들어주며 달래기는 하되 어디까지나 중국 군부의 주도권 아래 두려는 의도를 노 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내키지 않는 통제완화”가 국민정 부 대응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한 가지 언급해두고자 하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국민당 내부 정보보고서의 내용 가운데 특별히 주목할 또 한 가지 대목으로, 임시정부 측에 서 월리스와의 면담을 추진하고 있던 6월 7일에 中國共産黨의 파견을 받아 重慶 에 와있던 林伯渠(林祖涵)가 임시정부 관련 인물들을 초청하여 월리스에게 관련 문서들을 전달할 방안을 협의하였다는 사실이다.68)
원래 국민정부 측에서는 항 일전쟁의 기본 출발점이 되었던 국공합작을 복원 유지하려는 의도로 공산당 측 에 대표자 林伯渠, 周恩來, 朱德의 重慶 주재를 요구했는데 답변이 없다가 월리 스의 방중을 기회로 삼고자 하는 공산당의 새 전략에 따라 갑자기 董必武와 林 伯渠를 重慶에 파견해왔다.69)
林伯渠는 重慶에 온 다음 월리스와의 면담을 강력 하게 희망하여 6월 22일 아침에 만났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고 한다. 70)
그러 나 앞에서 말한 대로 월리스의 訪中 목적 가운데 국공 간의 관계 조정 문제가 들 어 있었고 중국공산당 측에서는 미국을 상대로 蔣介石 휘하 국민당 군대가 공산 당을 억압, 공격하는 것에 대하여 대대적인 반대 선전을 진행하고 있었다.71)
68) 앞의 「韓國臨時政府備忘錄之硏究(1944年 6月 30日, 溫叔萱處長作成)」에 들어있는 “備忘錄之發出經過” 참조.
69) 「朱家驊徐恩曾呈蔣委員長五月二十四日情報」 『革命文憲-中共爲謀與移動(二): 蔣中 正總統文物』, 國史館 所藏檔案, 檔案番號: 002-020300-00050-085.
70) 「徐恩曾呈蔣委員長六月二十四日情報: 林伯渠希圖與華萊士晤面」 『蔣中正總統文物革命文憲-國共協商與共軍叛亂』, 檔案番號: 002-020400-00003-011.
71) 시기적으로 약간 뒤의 이야기이지만, 重慶에 온 공산당 대표(林祖涵)는 10월 초 국민 당 측 교섭상대인 張治中과 王世杰에게 보낸,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담은 편지를 傳單 으로 만들어 시중에 살포하기도 했다. 이 전단의 내용은 중공에 대한 평화적 담판 진행 과 공동항일의 추진, 미국대표단의 延安 방문, 毛澤東, 周恩來의 중경 방문과 국공 간 의 회담 추진 주장 등이다. 「徐恩曾呈蔣中正渝市中共散發林祖涵致張治中王世杰函之 傳單(1944.10.9.)」 『蔣中正總統文物-革命文獻-國共協商與共軍叛亂』, 國史館所藏檔案 檔案番號: 002-020400-00003-016.
또 이에 호응하듯 미국 측에서도 공산당 군대 지배 아래 있던 華北 및 東北 지역에 대한 현지 조사를 추진했으며 그 결과로 미군의 현지조사단이 공산당의 중심지역 延安을 방문하여 毛澤東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과 면담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미국 측의 이런 움직임에 대하여 蔣介石과 국민정부 측에서는 커다란 불 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국의 국공조정 시도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었던 것 이다.72)
72) 앞의 侯中軍, 「美軍延安觀察組與中共對美外交的轉變」 『中共黨史硏究』 2011年 第2 期; 楊冬權, 「關于1944年美軍觀察組考察延安的幾個問題-基于中央檔案館藏相關檔 案的硏究」 『黨的文獻』 2015年 第5期 참조.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林伯渠의 임시정부 인사들과의 접촉은, 아마도 김원봉이나 그 측근들과 같은 좌익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닐까 짐작은 되 지만, 임시정부로서는 국민당에 대한 누적된 불만을 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방 편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대목이라고 여겨진다.
임시정부 측에서는 蔣介石 과 국민정부에 대한 불만을 미국이나 공산당 측과의 접근을 통하여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셈인데 이에 대한 국민정부의 입장은 가능한 한 현상을 유지하 면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중국의 주도권 아래 묶어 두려는 의도로부터 부득이 하지만 “통제완화”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V. 맺음말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944년 6월 하순의 미국 부통령 월 리스의 중국 방문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본격화된 미국의 중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보다 효율화해야 한다는 미국 정부의 실제적 필요를 내세운 것이었으나 소련의 대일 참전과 전후 중국의 정치적 안정을 염두에 두고 중소관계와 국공관 계의 안정적 관리를 중국 측에 요구하기 위한 미국의 외교적 포석 아래 나온 것 이었다.
그러나 蔣介石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정부 측에서는 특히 國共 관계 개선 요구가 미국의 과도한 내정 간섭일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공산당의 입지를 강 화해줌으로써 중국의 정치적 상황을 오히려 혼란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주장 하면서 강한 반발과 함께 윌리스의 방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러한 상황은 기 본적으로 태평양전쟁 수행이 미국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戰 後 아시아의 판도 또한 미국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는 국제 질서의 새 로운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1937년 중일 전면전쟁 발발 이후 국민정부의 지원 아래, 그리고 국민정부의 西遷을 따라 1940년 重慶에 정착하게 된 한국임시정부에게 있어서도,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전쟁 상황과 국제적 질서의 등장은, 새로운 과제와 함께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1919년 성립 당초부터 중 국의 지원 아래 그 명맥을 유지해오던 임시정부는 따라서 거의 전적으로 중국의 통제와 동원 아래 놓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임시정부로서는 이제 새로운 국제 질서의 주도권자로 떠오른 미국에게 접근하여 미국으로부터의 군사적 외교적 지 원을 따내기 위해 노력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를 통하여 重慶 임시정 부 성립 이래로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던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 획득과 광복군의 자주적 운영을 통한 항일전쟁에의 참전, 그리고 戰後 강화회의에서의 발언권 획득이 다시 한 번 임시정부의 당면 목표로 부상하였다.
여기에다 임시정 부가 1944년 4월 제36차 임시의정회 회의에서 約憲을 개정하고 국무위원을 개 선하면서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주요 정당 단체들이 모두 참여 하는 통합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니 이 또한 두 가지 당면목표를 추진하는 새로 운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국무회의의 의결과 외무부의 주도 아래 임시정부 측에서는 국민정부 외교부 와 重慶 주재 미국대사관 등 여러 경로를 통하여 월리스 부통령과의 면담을 추진 하였으나 미리 짜진 일정을 이유로 면담이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러자 임시정부 측에서는 영문으로 된 성명서와 비망록을 만들어 미국대사관 측에 전달하였고 관련 문서를 잘 받았다는 윌리스의 회답도 받았다.
임시정부 측에서는 이와 동 시에 성명서와 비망록을 40부 정도 등사하여 국민정부 외교부와 重慶 주재 각국 대사관을 통하여 각국 정부에 전달하도록 함으로써 임시정부 승인과 광복군 참 전 요구를 국제적 운동으로 확대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프랑스와 체코, 폴란드 망명정부 측에서 보낸, 성명서와 비망록에 대한 접수 확인 회답을 받은 것 이외에 이 운동의 외교적 성과를 확인할 자료는 아직 없지만 임시정부 외무부의 보고로 는 당시 重慶 외교가에서 상당한 호응이 있었다고 한다.
이 논문의 핵심 주제인, 월리스의 방중을 계기로 한 임시정부의 이러한 외교 적 노력에 대한 중국 측의 대응은 여러 자료에 의하여 비교적 자세하게 밝힐 수 있다.
특히 윌리스의 重慶 방문이 끝난 직후에 국민당 내부에서 만들어진 관련 정보보고서는,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파견되어 있거나 중국공산당을 전담하던 군 사위원회 조사통계국(軍統) 및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 조사통계국(中統) 소속의 전문 정보원들로부터 수집된 정보를 종합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월리 스 방중에 대한 임시정부의 동향 및 그에 대한 중국 측의 대응방안을 비교적 자 세하게 다루고 있어서 임시정부의 외교 운동에 대한 蔣介石과 국민정부 측의 대 응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이 보고서는 임시정부의 중국 측에 대 한 불만과 비판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중국 측의 보다 적극적인 해결 의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문제에 대해 서는 다른 어느 국가보다 중국이 앞서서 임시정부를 승인한다는 것이 蔣介石의 결정사항이며 카이로회담 이후 한국 문제에 대하여 영국·미국과 함께 보조를 맞 출 수밖에 없어서 현재로서는 영국·미국과의 협력을 보다 강화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점을 임시정부 측에 다시 한 번 알려주어야 한다는 제안을 하고 있다.
또 광복군의 자주성 회복 문제와 관련해서는 광복군의 人事에 대한 한인들 의 불만이 극심하다는 점을 들면서 九個準繩의 조속한 철폐를 구체적으로 검토 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월리스 방중을 전후하여 진행되고 있던 임시정부 측의 구개준승 철폐 요구와 이에 대한 국민정부 내의 검토들은 구개준승으로 상징된다고 할 임시정부에 대 한 국민정부의 “통제”정책이 구개준승의 철폐를 받아들이는 “통제완화”정책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월리스 방중이 마무리된 직후인 7월 3일자 로 김구가 다시 蔣介石에게 임시정부 승인과 구개준승의 철폐를 요구하는 公函 을 보냈고 바로 이어서 김구의 공함에 대한 군정부장 何應欽과 외교부장 宋子文 의 검토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로 8월 중순 구개준승의 철폐원칙이 정해지고 9 월 초 임시정부에 공식 통보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연결선상에서 볼 때 구개준승 의 철폐는 윌리스 방중을 전후한 임시정부 측의 외교적 ‘대공세’의 결과였다고 보 아서 무리가 없겠다.
물론 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蔣介石과 국민정부의 이러한 변화는 전쟁의 진전과정에서 분명해진 미국의 주도권과 戰後 미국 중심 의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전망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고 봐야 하겠지만 단기적 관점에서는 윌리스 방중 전후 임시정부의 외교운동이 가져온 결과였다는 점 또 한 주목해야 할 것이다.73)
73) 이런 점에서 본다면 월리스의 重慶 방문 뒤 보름 정도가 지난 7월 17일, 國民黨 中央 黨部 주최로 열린 한국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한 宴會는, 中央黨部 祕書長 吳鐵城이 致 詞에서 말한 대로 “임시정부의 改組 성공”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지만, 그보다는 월 리스 訪中 이후 고조된 임시정부의 외교 “대공세”를 무마하기 위한 성격이 강한 모임 이었다고 하겠다. 「吳祕書長鐵城致詞(1944.7.17.)」; 「中國國民黨中央黨部歡宴韓國 臨時政府首長金主席白凡答詞(1944.7.17.)」, 國民黨黨史會 所藏檔案, 檔案番號: 特 16/25.9. 이날 김구의 答詞 가운데 눈에 띠는 대목은, “아주 일부 사람이라도 불평등한 부분이 있다면 혁명은 멈출 수 없다”는 월리스 부통령의 말을 인용하면서 카이로회의에 서 中·英·美 삼국이 합의한 사항 가운데 戰後 한국의 독립이 “適當時期를 거쳐” 이루 어질 것이라고 했지만 장차 한국의 노력과 중국의 도움으로 이 조항(適當時期)이 삭제 될 것을 기대한다고 말한 점이다.
그러나 九個準繩 철폐의 실제 실시 과정이나 이후 광복군의 자주권 회복 과 정에서도 중국 측 특히 군부 측의 미온적이거나 비판적인 태도가 자주 문제를 일 으켰음을 본다면 九個準繩의 철폐라는 “통제완화” 정책이 그야말로 중국 측의 마지못한 선택이었다는 점 또한 확인하게 된다.
이런 사실들은 전쟁 수행에 있어 서나 국제적 외교에 있어서 미국으로의 주도권 이전이라는 대세 속에서, 戰後 미 국 주도의 한반도 내지 동아시아 국제질서 성립 이후, 국민정부가 겪게 될 한반도 상황에 대한 무기력과 함께 상황에 따라서는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 대립의 불 가피성을 예견케 하는 대목으로도 주목된다.
주제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정부, 장개석, 한중관계, 중미관계
[Abstract]
The Chinese Nationalist Government’s Policy on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during the Pacific War
Bae, Kyounghan (Silla Univ.)
The visit of U.S. Vice President Henry A. Wallace to Chongqing in late June 1944 further accelerated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s approach to the United States, which had taken the lead in the Pacific War since the U.S. participation in December 1941. The provisional government’s request for a meeting with Wallace was not accepted due to a tight schedule. However, the Provisional Government made an english statement and memorandum and delivered it to the U.S. Embassy in Chongqing, including the United Kingdom and France, to expand it into an international propaganda campaign aimed at the international approval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and restoring the independence of the Korean Liberation Army. The Chinese Nationalist Government’s response to the Provisional Government’s approach to the U.S. is evident in an intelligence report by the Military Commission around Wallace's visit to China. The Nationalist Government has shifted from the previous “control-oriented policy” to the “control relaxation policy” for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The Nationalist Government’s response gives us a glimpse of the possibility of confrontation or conflict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China, as well as the helplessness China will experience when the postwar Korean Peninsula falls under the leadership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Keywords: Korean Provincial Government, Chinese Nationalist Government, Chiang Kai-shek, Korea-China Relations, Sino-American Relations
(투고일자: 2023.05.10. 심사일자: 2023.05.12. 게재확정일자: 2023.05.26.)
歷 史 學 報 第 258 輯 ( 20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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