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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쾨르의 ‘이야기 정체성’ 이론을 통해 본 정인보의 ‘단군조선’과 ‘얼’ 사상/전종윤.전주대

jn209 2023. 8. 18. 08:57

한글 요약

본 연구의 목적은 폴 리쾨르의 ‘이야기 정체성’ 개념과 위당 정인보의 ‘단군조선’과 ‘얼’ 사상 연구를 비교하고 분석하는 데 있다. 이 연구에서 채택된 리쾨르의 변증법적 방법론은 서로 다른 두 주제나 개념을 부단히 대화·대질시킴으로써 ‘중용’이자 ‘제3의 정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방법론에는 간접적이고 매개적 요소가 되는 개념(들)이 필요한데 필자는 리쾨르의 기억, 역사, 망각에서 나오는 ‘애도 작업’과 ‘기억 작업’에 주목하여, 이를 핵심적 매개체로 삼았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정인보의 ‘단군조선’을 ‘텍스트의 세계’와 ‘독자의 세계’의 만남이라는 입장에서 재해석하였다. 리쾨르의 관점 에 따르면 정인보의 조선사연구는 우리 후속세대에 전해주는 텍스트의 산물이자 선 물이다.

주제어: 리쾨르, 정인보, 이야기 정체성, 단군조선, 얼 사상

 

1. 들어가기

본 연구의 목적은 프랑스 현대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 1913~2005) 의 ‘이야기 정체성(identité narrative)’ 개념을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의 조선사 연구(‘단군조선’과 ‘얼’ 사상)와 대화(dialoguer)하게 하고 대 질(confronter)시켜 서로의 연결 고리(articuler)를 탐색하여 궁극적으로 두 주 제의 ‘중용(le juste milieu)’을 논하는 데 있다. 리쾨르의 대화적 방법론은 서로 다른 두 주제나 개념을 부단히 대화·대질시킴으로써 단순히 절충하는 것이 아닌 ‘중용’이자 ‘제3의 정점’을 탐색한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방법론으로 채택한다. 그리고 대화적·변증법적 방법론에는 간접적이고 매개적 요소가 되는 개념(들) 이 필요한데 필자는 리쾨르의 기억, 역사, 망각에서 ‘애도 작업’과 ‘기억 작업’ 에 주목하여, 이를 핵심적 매개체로 여길 것이다. 필자의 가설은 정인보의 민족사학적 연구 결과물인 ‘단군조선’과 ‘얼’ 사상은 일종의 애도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애도 작업(travail de deuil)’은 리쾨르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차용한 용어로서 병리학적-치료적 성격을 갖는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스러운 상실이나 이별을 경험한 자아가 그것을 능 동적으로 끌어안을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과정을 애도 작업이라 한다. 리쾨르는 이 개념을 집단적 자 기 정체성의 문제로 확장해서 정체성 개념과 함께 해석하고 있는데, 필자는 정 인보를 비롯한 동시대 민족사학자들의 소위 ‘조선사 연구’ 또는 ‘조선학 운동’을 애도 작업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얼 개념도 정체성 문제와 더불어 기억 하는 작업으로 해석 가능한데, 리쾨르가 탐색한 ‘기억의 의무(devoir de mémoire)’나 ‘잊지 않으려는 의무(devoir de ne pas oublier)’ 등과 연결해 함께 숙고하려 한다. 본격적인 분석에 앞서 두 주제의 선행 연구를 살펴봄으로써 이 논문의 차별성 을 부각하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리쾨르의 ‘이야기 정체성’에 관한 연구는 대부 분 시간과 이야기 1, 2, 3(1983~1985)와 남 같은 자기 자신(1990)에 집 중되었다.1)

 

    1) 리쾨르의 ‘이야기 정체성’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 결과물들은 다음과 같다. 김한식, 해 석의 에움길. 폴 리쾨르의 해석학과 문학 (1부 3장, 2부 3·4·5장), 문학과지성사, 2019; 윤성우, 폴 리쾨르의 철학과 인문학적 변주 (1부 4장, 6장), 2017; 이기언, 「폴 리쾨르의 에두리기 철학: 자기이해의 문제를 중심으로」, 불어불문학연구 84, 한국불문학회, 2010, 401~446; 이기언, 「이인의 이야기 정체성」, 불어불문학연 구 98, 한국불문학회, 2014, 129~174; 전종윤, 「독서공동체. 자기 정체성 확립을 위한 인성교육 실천의 장(場)―폴 리쾨르 철학을 중심으로」, 대동철학 제72집, 대동철학회, 2015, 1~22 참조.

 

그러나 리쾨르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전작(前作)의 미흡한 내용을 보충하고 심화시킨 저작이 기억, 역사, 망각(2000)이다. 그래서 그는 기억,  역사, 망각의 ‘일어두기’에서 앞선 저술에서 “시간과 이야기 사이의 매개체라고 할 수 있는 ‘기억’의 문제를 다루지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망각’의 문제를 고 려하지 못하고 말았다”2)고 고백한다. 게다가 그가 기억, 역사, 망각에 무려 50쪽이나 되는 에필로그(「어려운 용서」)를 덧붙인 이유를 고려한다면 그에게 용서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리쾨르의 용서와 관련 된 몇 가지 연구 성과를 살펴보면, 윤성우의 ‘기억과 이야기, 그리고 용서와 망 각’에 관한 연구와 장경의 ‘잘못과 용서의 관계’ 연구, 그리고 김혜령의 ‘종말론 과 용서 개념’ 연구가 있다.3) 위당 정인보의 사상에 관한 선행 연구는 크게 세 분야로 구별할 수 있다.4)

첫 째, 강화학파의 사유체계를 중심으로 한 정인보의 양명학적 연구 결과물이다.5)

둘째, 정인보의 담원문록(薝園文錄)을 중심으로 한 그의 시와 시조 등을 분석 한 문학사적 연구 성과이다.6)

 

      2) P. Ricoeur, La mémoire, l’histoire, l’oubli, Seuil, 2000, I. (이하 MHO로 표기)

      3) 윤성우, 「기억과 이야기에서 용서와 망각까지 : 리쾨르를 중심으로」, 영상문화 23, 한국영상문화학회, 2013, 89~114; 장경, 「폴 리쾨르의 작품 기억, 역사, 망각을 통해서 본 ‘용서’」, 신학과 철학 제25호, 서강대 신학연구소, 2014, 173~204; 김 혜령, 「폴 리쾨르의 종말론적 지평 속에 나타난 ‘용서’(par-don) 개념 연구」, 비교 문화연구 52,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2018, 79~110 참조.

      4) 배현숙, 「정인보의 인문학적 사유에 의한 민족주체사상 연구」,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민윤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2, 5~10 참조.

     5) 금장태, 「근대적 변혁기의 한국양명학」, 종교학연구 제26집, 서울대 종교학연구회, 2007, 1~40; 김세정, 「한국양명학의 생명사상」, 동서철학연구 39, 한국동서 철학연구회, 2006, 89~112; 박광용, 「강화학파의 인물과 사상」, 황해문화 10, 새 얼문화재단, 1996, 200~211; 심경호, 「위당 정인보와 강화학파」, 열상고전연구 제27집, 열상고전연구회, 1998; 이상호, 「정인보의 실심론의 양명좌파적 특징」, 양 명학 통권 제15호, 한국양명학회, 2005, 73~117; 최재목, 「정인보의 양명학 이해 : 양명학연론에 나타난 황종의 및 명유학안 이해를 중심으로」, 양명학 통권 제17호, 한국양명학회, 2006, 97~115; 최재목, 「정인보 ‘양명학’ 형성의 지형도 : ‘세계’와의 ‘호흡’, 그 중층성과 관련하여」, 동방학지 제143집, 연세대출판부, 2008, 36~50; 정출헌, 「국학파의 ‘조선학’ 논리구성과 그 변모양상」, 열상고전연 구 제27집, 열상고전연구회, 2008, 5~40.

     6) 김학성, 「담원 정인보 시조의 정서 세계와 그 정체성」, 泮橋語文硏究 통권 제13호, 반교어문학회, 2001, 287~302; 송정란, 「전통계승과 담원시조」, 문학과 창작 70 호, 문학아카데미, 2001, 170~182; 오동춘, 「위당 정인보 시조 연구 : 담원 시조 집을 중심으로」, 한양어문연구 5, 한양대 한양어문연구회, 1987, 247~279; 이 동영, 「정인보의 생애와 문학업적」, 도남학보 17, 도남학회, 1999, 143~174.

 

셋째, 신채호, 박은식 등과 더불어 민족사학자로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대척점에 선 정인보의 역사학적 연구이다.7) 이 세 분 야 가운데 본 연구와 밀접하게 연관된 영역은 아무래도 위당 정인보가 제시한 민족의 주체적 역사인식(歷史認識) 사상이므로 그의 한국 고대사 인식에 관한 연구와 얼 사상과 정체성 문제를 다룬 연구에 대해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8) 주지하듯이 조선의 정체성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개념으로는 신채호의 ‘아 (我)’, 박은식의 ‘국혼(國魂)’, 문일평의 ‘조선심(朝鮮心)’과 더불어 본 연구의 주요 주제인 정인보의 ‘얼’이 있다. 민족적 정체성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닐 이 개념들을 전체적·유기적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이 유용하겠으나 제한된 지 면을 고려해서 본 연구에서는 위당의 얼 개념을 리쾨르의 이야기 정체성 개념과 대화시키는 데 주력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리쾨르의 ‘해석학적 관점’9)을 수용하여 ‘역사(Histoire)는 이야기(histoire)이다’와 ‘역사는 독자와의 대화를 필요로 한다’는 역사의 서사 적 성격(caractère narratif de l’histoire)10)을 전제로 하여 정인보의 ‘단군조선’ 을 ‘텍스트의 세계’와 ‘독자의 세계’의 만남이라는 입장에서 재해석할 것이다.

 

     7) 박성수, 「위당 정인보의 단군문화론」, 동양학 18,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88, 209~220; 이완재, 「1930년대 민족주의 사학의 발전 : 爲堂과과 湖岩을 중심으로」, 韓國學論集 21·22合輯(92.8),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1992, 125~160; 이완재, 「정 인보의 한국사 인식」, 한국사상사학 4·5, 한국사상사학회, 1993, 472~491; 진영 일, 「위당 정인보의 사학사상」, 공주교육대학 논문집 21호, 공주교육대학, 1985, 151~162; 진영일, 「위당 정인보의 고대사 인식」, 공주교대논총 22, 공주교육대 학, 1986, 79~93; 박성수, 「위당 정인보의 단군문화론」, 동양학 18, 단국대 동양 학연구원, 1998, 209~220.

     8) 정인보의 한국 고대사 인식에 관한 연구는 이만열, 「위당 정인보의 한국 고대사 인 식」, 동방학지 141,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8, 1~49; 이완재, 「정인보의 한 국사 인식」, 한국사상사학 5, 한국사상사학회, 1993, 471~491 참조. 그리고 정 인보의 얼 사상은 김윤경, 「정인보 ‘조선 얼’의 정체성」, 양명학 45, 한국양명학 회, 2016 79~123; 이난수, 「조선의 정신, 그 정체성에 대한 근대적 탐색-신채호의 ‘아’와 박은식의 ‘국혼’ 그리고 정인보의 ‘얼’을 중심으로-」, 양명학 54, 한국양명 학회, 2019, 31~74 참조.

     9) 실제로 리쾨르는 기억, 역사, 망각에서 현상적 접근(기억의 현상학), 인식론적 접 근(역사 인식론)을 거쳐 해석학적 접근(역사의 존재적 해석학)으로 결론에 도달한 다.

   10) P. Ricoeur, Temps er récit Ⅰ. L’intrigue et le récit historique, Seuil, 1983, p. 133. (이하 TRⅠ로 표기) 

 

리 쾨르의 관점에 따르면 정인보의 조선사연구는 우리 후대에 전해주는 텍스트의 산물(oeuvre)이자 선물(don)이다.

 

2. 리쾨르의 ‘이야기 정체성’과 위당 정인보의 ‘얼’ 사상

‘이야기 정체성’ 개념은 리쾨르의 ‘철학적 에움길’11)에서 지속해서 발전시킨 개념이다. 리쾨르는 이 개념을 시간과 이야기 1, 2, 3과 남 같은 자기 자신, 그리고 기억, 역사, 망각에서 집중적으로 언급한다.12)

이를 저작 별로 세분하 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자칫 리쾨르의 개념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부분적인 것만 보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분석13)에서는 주제별로 ‘이야기 정 체성’ 개념을 이해해 보겠다.

 

      11) 리쾨르는 그의 철학적 여정을 긴 에움길(le long détour)이라고 표현하였다. 데카르 트의 코기토 선언처럼 즉각적인 것이 아니라, 부단한 탐구와 반성을 거친 일종의 자 기 확신(l’attestation de soi)의 여정이다.

      12) 더불어 ‘이야기 정체성’이라는 제목의 다음 논문도 중요하다. P. Ricoeur, “L’identité narrative”, Esprit, juillet-août 1988, pp. 295-304; P. Ricoeur, “L’identité narrative”, in Revue des sciences humaines, tome 95, janvier mars 1991, pp. 35~47.

      13) 이야기 정체성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필자의 이전 연구에서 수행하였음을 밝 힌다. 전종윤, 「독서공동체. 자기 정체성 확립을 위한 인성교육 실천의 장(場)―폴 리쾨르 철학을 중심으로」, 1~22 참조. 

 

1) 텍스트를 매개로 한 자기 정체성

리쾨르는 철학의 오랜 주제인 시간의 문제를 이야기 문제와 연결하여 탐색한 다. 이는 사변적 탐구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시간의 난제에 대한 해법을 시 간성과 서사성의 관계에서 찾기 위함이고, 이야기라는 매개를 통해 자기의 이해 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이런 학술적 탐색의 여정이 담긴 저서가 시간과 이야기 1, 2, 3이다. 리쾨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의 역설’14)로 논의의 시작을 알린다.

 

    14) Saint Augustin, Confessions, Gallimard, 1993, XI서 14장. “그러면 시간이란 도대 체 무엇입니까? 아무도 나에게 그 질문을 하지 않을 때에는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 러나 누군가 나에게 그것을 묻고 내가 그것을 설명하려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알 수 없습니다.” 리쾨르는 시간과 이야기 1 「제1장: 시간 경험의 아포리아」에서 아우 구스티누스의 이 한탄에 대하여 논한다. 

 

고백 록에서 볼 수 있듯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 졌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직 않았고, 현재는 끊임없이 지나가 버리므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분명 히 존재한다. 우리는 실제로 시간을 측정하고 길고 짧은 시간을 비교하고 있다.

이 맥락에서 제기되는 물음은 ‘시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이다. 아우구스티 누스의 결론은 시간은 외부의 어떤 대상처럼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체험된 것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시간을 체험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정신의 이완 (distentio animi)’15)된 형태로 나타나며,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 현재는 지나가고 있는 것,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 즉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되고 동시에 이완되고 균열된 형태의 정신의 체험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시간을 체험한다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완되고 균열된 것을 인간의 의지로 통합 하려는 시도인 ‘정신의 긴장(intentio animi)’16)의 형태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로써 아우구스티누스의 그 유명한 개념인 ‘세 겹의 현재(triple présent)’가 도출되었다. ‘기억’의 현재, ‘직관’의 현재, ‘기다림’의 현재라는 체험된 시간만이 존재한다.17)

리쾨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정신의 긴장과 이완의 시간 체험 을 “화음을 이루는 불협화음(disconcordance concordante)”18)이라고 명명한다.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줄거리 구성(뮈토스)에서 “불협화음을 내포한 화음(concordance disconcordante)”19)의 특징을 발견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의 아포리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의 시학’과 대질시킨다. 이야기의 시학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야기는 미메시스 (mimesis) 곧 재현이며, 이야기는 ‘누구(qui)’의 행동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특성상 다양하고 이질적인 일(사건)들 가운데 특정한 것들을 선택하여 줄 거리를 구성하게 된다. 리쾨르는 이것을 “이질적인 것의 종합(synthèse de l’hétérogène)”20)이라고 이름 붙인다.

 

     15) P. Ricoeur, TRⅠ, p. 19.

     16) Ibid.

     17)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1, 김한식·이경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9, 42쪽: “(…) 아우구스티누스는 자명하게 이해되는 것처럼 보이는 세 겹의 등가성을 근거로 삼는 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며, 현재의 현재는 직관(vision, contuitus)[나중에 우리 는 이완과 더 좋은 대조를 이루는 용어인 긴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다림이다”([Confessions XI] 20, 26).” (이하 시간 1로 표기)

    18) 리쾨르, 시간 1, 139쪽.

    19) 리쾨르, 시간 1, 104쪽. 20) 리쾨르, 시간 1, 8쪽. 

 

비록 이질적인 것이지만 화음을 부여하는 이 작업은 시간의 축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야기하는 행위는 일어난 일들을 뒤죽박죽인 상태가 아닌 일련의 시간의 흐름을 제공함으로써 독자가 예상과 기대를 품고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게 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줄거리 구성 은 “상황, 목적과 수단, 자발성과 상호작용, 운명의 역적과 인간의 행동에서 비 롯되는 원하지 않았던 모든 결과들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것을 전체적이고 완전 한 하나의 행동 안에 다시 통합하는 작업”21)이다.

이 작업은 이야기의 시간적 통일성을 제공한다. 리쾨르는 시간과 이야기 1 2부 「역사와 이야기」에서 이야기(discours narratif)를 허구 이야기(récit de fiction)와 역사 이야기(récit historique)로 구분하여 역사 이야기에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줄거리 개념을 접목시킨다. 리쾨 르는 “만일 역사가 ‘스토리를 따라가는 우리의 기본적 능력’과 서사적 이해의 인식 작업과의 모든 관계를 끊는다면, (…) 역사는 역사적이기를 그칠 것”22)이기 때문에 역사는 궁극적으로 ‘서사적 성격(caractère narratif)’을 갖는다는 사실 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리쾨르가 역사 이야기와 허구 이야기를 교차시키는 이유 는 무엇인가? 이 두 이야기의 가장 큰 차이는 ‘있었던 일’과 ‘있을 수 있는 일’의 경계선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역사 이야기는 과거의 실재성에 근거하여 과거 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을 줄거리로 구성함으로써 특정 사건이 역사가에 의 해 재현된 것이다. 그리고 허구 이야기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과거에 마치 특 정 등장인물이 있었고, 과거에 마치 특정 사건들이 발생했던 것처럼 재현하여 현실을 새롭게 변형시킨 것이다. 두 이야기는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재현, 즉 미메시스라는 공통점을 가지며, 그런 까닭으로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 이에 대한 김한식의 의견을 들어보자. 여기서 이야기의 두 가지 양태가 과거의 실재성이라는 대상지시 측면 에서는 대립적이면서도 서로에게 빚지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우선 역 사는 지금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을 토대로 “지금은 없다고 할 수 있는 세계를 그려보는 것”이라는 점에서, 다시 말해서 역사는 있었던 그대로 의 과거가 아니라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마치 그렇게 일어난 듯이’ 비유 적으로 과거를 재현한다는 점에서 줄거리 구성이라는 허구의 방식을 빌 려온다. 반면에 허구 이야기는 ‘마치 그것이 일어난 듯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과거라는 역사의 시간성에 기대고 있다.23)

 

     21) 리쾨르, 시간 1, 9쪽.

     22) 리쾨르, 시간 1, 191쪽.

     23) 김한식, 해석의 에움길. 폴 리쾨르의 해석학과 문학, 240쪽. 

 

재현과 더불어 상상력이라는 측면에서 역사 이야기와 허구 이야기는 서로 닮 아있다. 그래서 리쾨르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의 ‘눈앞에’ 펼쳐지는 사건들의 준 -현재가 그 직관성 덕분에 과거의 과거성이 갖는 도피적 특성, 대리성 의 역설들이 보여주는 특성에 그 생동감을 더한다는 점에서, 역사는 거 의 허구적이다. 이야기되는 비실재적 사건들이,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서사적 목소리로서는 지나간 일들이라는 점에서 허구 이야기는 거의 역 사적이다. 바로 그렇게 해서 그 이야기들은 사건들과 닮게 되며, 허구는 역사와 닮게 된다.24) 이야기는 행동의 ‘누구’를 말한다. 그것은 이야기를 자신의 고유한 영역으로 이끄는 행동이며,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것이 마치 일어났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허구 이야기는 ‘준(準)의 방식(mode du quasi)’에 대한 위치상의 특징을 간직한다.25) 준-과거는 허구적 줄거리의 준-사건이자 준-인물이다. 허구 이야기는 시간과 이야기 2에서 언급한 ‘상상적 변주 (variations imaginatives)’의 방식으로 역사적 과거의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인 것들을 간파해낸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사적이거나 비극적인 우화들에 결부시켰던 진실임직함(vraisemblance)의 특성”26) 덕분이고, 역사적 상상력의 본래의 재현 기능에 결부된 “형용하는(dépeindre)”27) 능력 덕분이다. 결론적으로 역사와 허구의 교차는 “역사의 거의 허구적인 순간과 자리를 바꾸 는 허구의 거의 역사적인 순간이라는 상호 맞물림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교차, 상호 맞물림, 자리바꿈에서 바로 ‘인간의 시간’이라고 부름 직한 것이 나 온다.”28) 리쾨르가 인간의 시간이라고 칭한 것은 다시 ‘이야기된 시간’이 되며, 이것은 우주적 시간과 대비되는 한 개인의 사적인 시간 사이에 있는 시간이 된 다.29)

 

     24)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3, 김한식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368쪽. (이하 시간 3으로 표기)

     25) P. Ricoeur, MHO, p. 340~341, 각주 46.

     26) Ibid.

     27) Ibid.

     28) 리쾨르, 시간 3, 371쪽.

     29) 리쾨르는 시간의 아포리아의 문제, 내가 체험하는 시간과 우주론적 시간론에 지배 하에 있는 세계의 시간의 불일치성의 문제를 ‘이야기된 시간’으로 극복하려 한다. 현상학적 시간과 우주론적 시간의 틈새 위에 던져진 다리”(리쾨르, 시간 3, 467쪽)라고 불렀다.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 정체성’30) 개념이 나온다.

 

      30) “이야기된 스토리는 행동의 ‘누구’를 말해준다. ‘누구’의 정체성은 따라서 이야기 정 체성인 것이다.”(리쾨르, 시간 3, 471쪽) “주체는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스토리를 통해 자기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다.”(리쾨르, 시 간 3, 473쪽)

 

이야기 정체성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형성되는 정체성(서사적 성격을 지닌 정체성)을 말하며, 역사와 허구의 교차를 거치면서 특정한 개인이나 공동체에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야기 정체성은 개인적 정체성과 집단적(혹은 공동체적) 정체성으로 구분된다.

 

2) 윤리적 정체성

리쾨르는 지금까지의 자아 정체성 문제가 지닌 어려움은 정체성 개념의 두 가지 양태를 의미론적으로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31) 그래서 그는 남 같 은 자기 자신에서 자아의 정체성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한편으로 “동일-정체 성(identité-idem)”32) 혹은 “동일성(mêmeté)”과 다른 한편으로 “자기-정체 성(identité-ipse)”33) 혹은 “자기성(ipséité)”이 그것이다. 먼저 동일 정체성의 라틴어 ‘idem’(영어의 ‘sameness’, 독일어의 Gleichheit) 은 ‘매우 유사한’, ‘흡사한’과 동의어이고, 시간적 차원에서 불변성 혹은 부동성 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기 정체성의 라틴어 ‘ipse’는 영어의 ‘selfhood’와 독일어 의 ‘Selbstheit’와 동의어이고, 시간 속에서의 지속을 의미한다. 자기성의 구체 적 모델로는 ‘약속의 이행’이 있다. 약속의 이행은 “내 욕구가 변하고 내 의견이 나 내 취향이 바뀔지라도 내가 한 약속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고 실행할 것이 라는 의지의 표명”34)이다. 이처럼 자기성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자신의 다짐(“나는 유지할 거야[je maintiendrai]”35))과 타인이 내게 보이는 신뢰에 대한 보답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는데,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닌 윤리적 주체의 지속적 행위이다. 

 

       31) P. Ricoeur, “L’identité narrative”, in Revue des sciences humaines, tome 95, janvier mars 1991, p. 35.

      32) P. Ricœur, Soi-même comme un autre, Seuil, 1990, p. 13.

      33) Ibid., p. 13.

      34) Ibid., p. 148.

      35) Ibid., p. 149.

 

이런 관점에서 리쾨르는 “내가 여러 번 주장한 바 있듯이, 자기성은 동일성이 아니다”36)라고 말한다.

 

       36) Ibid., p. 140. 

 

자기가 무심코 뱉은 말조차도 행동으로 책임지려는 자기 정체성은 곧 윤리적 정체성이 된다.

자기 정체성의 윤리적 성격은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분석할 수 있다. ‘나는 [내가 한 약속을] 유지할 거야’라는 다짐은 리쾨르에게 ‘자기 유 지(maintien de soi)’이다. 이 표현은 스프노자의 존재의 코나투스(conatus)와 유사하고 존재의 자기보존 노력은 결국 훌륭하게 살겠다는 윤리적 삶에로의 의 지이기도 하다.

이것을 리쾨르는 하이데거의 ‘Sorge’ 개념을 받아들여 ‘자기의 마음 씀(souci de soi)’이라고 부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 영향을 받아서 윤리적 차원에서의 ‘좋은 삶의 추구’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기 유지는 자기의 윤리적 행동을 포함한 모든 행동 전반을 반성함을 전제로 하여 ‘자기 긍정(estime de soi)’, 즉 자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함으로 바뀐다. 이처럼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한 부단한 반성과 성찰이 좋은 삶의 추구에 초석이 된다. 이때 자기 긍정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요청된다. 리쾨르에 의하면 자기는 구조적 측면과 아울러 본질적 측면에서 타자를 향해 나가는 특징 이 있다. 자기의 타자에 대한 ‘배려(sollicitude)’가 그것인데 자기가 타자로 향 해 나가는 성향은 자기와 타자 사이의 소통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런 시각에서 귀담아 들어주는 타자의 청취 자세 없이는 나의 말과 담론은 그저 쓸데없는 독 백에 지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윤리적 성향을 덧입은 자기 정체성은 타자에 대한 배려를 통해 고 립된 ‘나’에서 벗어나고, ‘나’를 둘러싼 이기주의의 쇠사슬을 끊을 능력을 내포한 다. 이로써 윤리적 정체성이 확립된 자기는 타자와 함께 그리고 타자를 위하는 생(生)을 삶으로써 이 세상을 그나마 살 만하게 만든다.

 

3) 역사적 정체성

기억, 역사, 망각의 특이점은 ‘이야기 정체성’ 개념을 단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지만, 개인적·집단적·공동체적 정체성이라는 용어를 다른 저작에 비해 더 많 이 사용한다는 점이다.37)

 

    37) 리쾨르는 기억, 역사, 망각의 「에필로그: 어려운 용서」에서 이야기 정체성 (l’identité narrative)이란 표현을 단 한 번 사용한다(P. Ricoeur, MHO, p. 614).

 

그렇다고 정체성의 서사적(敍事的) 성격, 즉 남과 나의 이야기(récit) 그리고 허구 이야기와 역사 이야기를 매개로 한 자기반성적 성격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화시키고 있다. 기존에 없었던 ‘기억-역사 -망각’이라는 삼중의 관계구조 속에서 정체성 문제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리쾨르의 정체성 개념의 완성을 기억, 역사, 망각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제 이야기 정체성은 역사 이해를 통한 개인과 집단의 자기 정체성 문제로 연결된다.

리쾨르는 본인 스스로 2차 대전의 비극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역사 문 제를 고찰하는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역사란 과거에 있었던 일을 줄거리로 구성하는 것이며, 역사가가 어떻게 재현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내용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집단의 기억에 따른 역사는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들을 해석하는 역사가의 주관적 관점과 시대정신, 그리고 문화적 요소들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이와 같은 역사 이야기를 통해 영향을 받은 한 개인의 자기 정체 성은 집단의 자기 정체성과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한 집단안에 살아가는 개인들은 민족과 국가라는 집단의 정체성을 공유할 수밖에 없 고, 그것을 자기 정체성의 일부분으로 삼는다.

리쾨르가 예를 들고 있듯이, 유대인 개개인은 그들의 경전이자 역사책인 「모세오경」을 가정과 유대교회당에서 반복적으로 학습함으로써 집단적 정체성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개인적 정체성 을 확립하게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리쾨르의 이야기 정체성 문제는 역사 텍스트의 문제로까지 확장된다. 기억, 역사, 망각의 일관된 명제는 “역사는 기술되고 간행되고 읽히는 고문서에서부터 역사가의 텍스트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글쓰기”38)라는 것이다. 문 헌에는 “목탄을 쥔” 역사가라는 나름의 독자가 있었고, 역사책에도 나름의 독자가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잠재적 독자이지 만, 사실상 식견이 있는 대중이 그에 해당한다.39) 이처럼 “역사 하기(faire de l’histoire)”의 정점에 있는 역사책은 대중의 공간에 들어감으로써 역사가를 “역사 만들기(faire l’histoire)”의 중심으로 인도한다.40)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리쾨르가 시간과 이야기에서 개진한 ‘삼중의 미메시스’41)의 개념의 틀 중 미메시스 Ⅲ 단계, 즉 ‘텍스트의 세계’와 ‘독자의 세계’의 만남(혹은 충돌) 안에 역사책을 위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38) P. Ricoeur, MHO, p. 302.

    39) Ibid.

    40) Ibid.

    41) 리쾨르는 미메시스 Ⅰ(전형상화, préfiguration), 미메시스 Ⅱ(형상화, configuration), 미메시스 Ⅲ(재형상화, refiguration)의 삼중의 미메시스 이론을 통해 해석학적 순환을 완성한다.

인간의 체험된 시간이자, 기억 속에 사려져 가는, 그래서 아직 오지 않았지만 지금 이야기되어야 하는 ‘미메시스 Ⅰ’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현실 세계는 ‘미메시스 Ⅱ’의 이야기의 재현적 기능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마치 ~처럼(comme si)’ 바라봄으로써 형상을 갖추게 되고, ‘미메시스 Ⅲ’을 통해 독자가 사는 현실 세계와 접점을 가지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뜻을 갖게 되는 의미론적 혁신이 발생한다. 

 

 ‘텍스트 앞에서의 자기이해’42)를 설파한 리쾨르에 따르면 역사 텍스트 역시 독자가 마주해야 할 텍스트의 세계이며, 그 텍스트를 통해 독자는 삶의 지평을 넓히게 되고 삶의 비 전과 다양한 삶의 양식을 제시받게 된다. 그래서 리쾨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문서를 통해 행동의 세계에서 벗어난 역사가는 자신의 텍스트를 독 자의 세계에 편입시킴으로써 그 행동의 세계로 복귀한다.43)

 

       42) P. Ricoeur, Du texte à l'action, Seuil, 1986, pp. 116-7. “결국 내가 자기화해야 하는 것은 바로 세계의 제안이다. 그 세계의 제안은 숨겨진 의도처럼, 텍스트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전개해 주고, 발견해내고, 드러내 주는 것으로서 텍스트 앞에(devant le texte)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해한다는 것은 텍스트 앞에서 자기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결국 텍스트에게 자신의 제한된 이해 능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에게 자신을 노출하게 하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더욱 폭넓은 자기를 수용하는 것이며, 바로 이 넓은 자기의 수용이 세계의 제안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응답하는 실존의 제안일 것이다.” (이하 TA로 표기)

      43) P. Ricoeur, MHO, p. 302.

 

이 지점에서 필자는 위당 정인보의 조선사연구와 양명학연론 등이 텍스트의 세계로서 독자의 세계와의 교차점이 필요하다고 본다.

위당의 후대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와 직접적으로 대화할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텍스트를 통해 ‘만 남’을 가질 수 있고, 그의 텍스트가 제시하는 다른 세계를 소개받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독서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텍스트의 선물을 그에게서 받는다. 이는 정인보가 그토록 원했던 민족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 ‘자기화(appropriation)’하는 길이다.

 

4) 위당 정인보의 ‘얼’ 사상

위당 정인보는 조선학(朝鮮學)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실학자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그리고 다산 정약용을 계승하려는 그의 기대와 직결된다.

즉, 위당은

 

“조선근고(朝鮮近古)의 학술사를 종계(綜系)하여 보면 반계(磻溪: 유형원, 1622〜1673)가 일조(一祖)요, 성호(星湖: 이익, 1681〜1763)가 이조 (二祖)요, 다산(茶山: 정약용, 1762〜1836)이 삼조(三祖)인데, 그 중에서도 정 박(精博)하고 명절(明切)함은 당연히 다산에로 더 미룰 것이니…”44)

 

라고 말하 며 조선학의 계보를 잇고 자 하였다. 그런데 조선의 유학을 계승하고자 함이 아 닌 까닭은 수백 년 동안의 조선의 역사와 학문이 ‘텅 비고 거짓’(‘虛와 假’)되었으며, ‘자가 편의만을 도모’하고 지나치게 ‘중화사상에 빠졌음’을 비판하고자 함 이었다.

 

오호라, 과거 수백 년간 조선의 역사는 실로 ‘虛와 假’로서의 演出한 자취이라 최근 수천년래로 풍기 점점 변하게 되매 삼척동자라도 전인이 잘못한 것을 지적할 줄 안다. 그러나 前人을 攻駁하면서 依然히 도로 그 자취를 따르지 아니하는가.45)

조선 수백 년간 학문으로는 오직 儒學이요, 儒學으로는 오직 程朱를 信奉하였으되, 信奉의 弊 대개 두 갈래로 나뉘었으니, 一은 그 學說을 받 아 自家便宜를 圖하려는 私營派이요, 一은 그 학설을 배워 中華嫡傳을 이 땅에 드리우자는 尊華派이다. 그러므로 평생을 沒頭하여 心性을 講論 하되 實心과는 얼러볼 생각이 적었고 一世를 揮動하게 道義를 표방하되 자신밖에는 보이는 무엇이 없었다.46)

 

위당은 국망(國亡)으로 인한 비참한 상황을 직접 목도하고, 국망의 원인을 구 한말의 유교라 판단하여 조선학운동의 한 축으로 삼은 실학사상을 재조명하였 다. 이와 더불어 위당은 양명학을 조선학운동의 다른 축으로 생각하고 탐구하였 다.

실제로 그는 「양명학연론」 후기에서 자신을 “양명학자”로 소개하였다.47) 조선을 병들게 하고 종국에 가선 나라를 잃게 된 근본적 원인이 사대주의에 기댄 성리학(性理學)이며, 성리학의 공리공담(空理空談)을 혁파할 수 있는 철 학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실심지학(實心之學)이라 평가한 양명학 연구에 매진했던 것이다. 이는 “식민 상태의 조선사회에 새로운 정신적 패러다임을 구 축하고자 했던”48)시도라 하겠다. 

 

    44) 정인보, 담원국한산고, 문교사, 1955, 71쪽.

   45) 정인보, 擔園鄭寅普全集 2권 「양명학연론」, 113쪽. (이하 全集으로 표기)

   46) 정인보, 全集 2권 「양명학연론」, 114쪽.

   47) 정인보, 2권 「양명학연론」, 239쪽. “나는 陽明學者다, 그러니까 어떻게든지 陽明學 을 세워야겠다….”

   48) 배연숙, 「정인보의 인문학적 사유에 의한 민족주체사상 연구」,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민윤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2, 2쪽. 

 

그렇다면 그가 양명학에서 특히 관심을 가진 내용은 무엇인가? 그는 양명학의 ‘치양지(致良知)’ 개념에 주목했다.

이때 ‘致’는 무엇을 이룬다는 뜻이고, ‘良 知’는 인간이 천성으로 가진 앎이라는 것인데, 칸트 철학에서의 ‘a priori’와 유사한 의미라 하겠고,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위당은 양지의 개념을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孟子의 말씀한 바 “是타 非타 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있다” 한 그것이 니 是타 非타 하는 마음은 생각함을 기다려 앎이 아니요, 배움을 기다려 能함이 아닐 새 “良知”라 하나니 이 곧 天命의 性, 내 마음의 本體로 자 연히 靈昭明覺하는 것이라.49)

시시비비를 가리는 마음은 모든 이에게 천성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이는 배우 거나 생각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구나 마음으로 앎에 도달할 수 있다 는 것이다. 이것이 실심(實心)의 근본이고, 실심으로 학문의 허와 가를 분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위당은 “世降 俗衰함을 따라 그 학은 虛學뿐이요 그 行은 假行뿐이니, 實心으로 보아 그 學이 虛인지라 私計로 보아 實이요, 眞學으 로 보아 그 行이 假인지라 僞俗으로 보아 實이다”50)

 

라고 실심을 풀이했다.

이 말은 실심이 진가(眞假)와 허실(虛實)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고, 실심을 통한 치양지의 함양이야말로 민족정신을 부활시키고 조선의 ‘얼’ 사상을 복원할 방안 이라는 것이다.

 

‘얼’을 눈에 비유해 보도록 하자. 스르르 감았다가 딱 뜨기를 여러 번 되풀이하는 이 동작이 그동안 외부세계의 흥망과 성쇠를 얼마나 만들어 내었던가? 그러므로 학문이라는 것도 ‘얼’이 깃들지 않으면 헛것이 되고, 예교(禮敎)도 ‘얼’이 깃들지 않으면 허사가 되며, 글도 ‘얼’이 깃들지 않 으면 되는 것이 없고, 역사도 ‘얼’이 깃들지 않으면 설 곳이 없게 된다. 그 어떤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경우란 없다. ‘얼’이 참이라고 가정할 때 ‘얼’이 아니면 거짓인 셈이요, ‘얼’의 실체라고 가정할 때 ‘얼’이 아니면 허상인 것이다.51)

 

     49) 정인보, 全集 2권 「양명학연론」, 160쪽.

     50) 정인보, 全集 2권 「양명학연론」, 114쪽.

     51) 정인보, 조선사연구 상권, 문성재 역주, 우리역사연구재단, 2012, 107쪽.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얼’은 실심과 같아서 진가와 허실의 판단 기준이다.

그래서 위당의 조선학 연구를 얼 사상 혹은 실심론(實心論)이라고 한다. ‘실심 으로 조선의 얼을 회복하자’는 말은, 박은식의 표현에 따르면, 잠들어 있는 우리 의 국혼(國魂)을 깨우자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큰 개념이자 역사 인식적 측면 에서의 ‘얼’ 개념은 집단적이고 공동체적 자기 정체성의 특징이 강하다. 그렇다 고 위당의 ‘얼’ 사상에 개인적 자기 정체성의 특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얼’의 일상적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위당은 「오천년간 조선의 얼」의 서 론을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누구나 어릿어릿한 사람을 보면 ‘얼’이 빠졌다고 하고 멍하니 앉은 사 람을 보면 ‘얼’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사람에게 있어 ‘고도리’는 ‘얼’인데 그런 ‘얼’이 빠져 버렸다면 그런 사람은 거죽만 사람인 셈이다.52)

오늘날의 일상적 표현인 ‘얼빠진 사람’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어릿어릿하고 멍한 사람을 말한다. ‘고도리’라는 말은 근본이나 매사에서 핵심이 되는 것을 의 미한다는 점에서, 사람의 ‘얼’은 사람의 존재를 말하며, 사람의 정체성을 말한다 고 볼 수 있다. ‘거죽만 사람’53)이 지시하는 바는, 리쾨르의 정체성 개념에서 살 핀 것과 같이 동일-정체성으로 이해할 수 있고, ‘사람의 얼’이 지시하는 바는 자 기-정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52) 정인보, 조선사연구 상권, 53쪽.

     53) 정인보, 조선사연구 상권, 105쪽. “거죽으로만 우리의 정체성을 찾다 보니 옛 선조들이 우리가 아닌 것 같고 우리가 옛 선조가 아닌 것 같을 뿐이지 일단 그들의 ‘얼’이 되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한 치도 어김없는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다.” 

 

다시 말해 거죽만 사람은 시간 속에서 부동성과 불변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얼’을 가진 사람은 시간 속에서의 지속성으 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래서 위당이 말한 사람의 ‘얼’은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변할지라도 끊임없이 유지되는 자기 정체성이 된다. 이런 속성을 가져야만 실심 으로 진가와 허실을 분별할 수 있고, 나라를 잃은 상태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 고, 궁극적으로 조선의 민족정신을 계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위 당은 역사적 자취 속에서 얼을 탐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밝혔다.

 

우리가 그 ‘얼’의 명멸을 통하여 우리 조선의 모든 것을 탐색하고, 또 그 과정을 통하여 조선 ‘얼’의 명멸을 증명하여 오랜 세월 동안 온갖 풍파를 다 거친 우리 역사가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내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절실한 일인지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 저 역사의 줄기와 가지가 뻗어나가는 과정에서 거의 없다고 여기고 있던 ‘얼’이 번쩍이면서 다시 처음처럼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 없는 것 같지만 없어지지 않고 내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또 ‘얼’의 명멸에 따라 흥망과 성쇠가 생기는 것을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나타났다가 꺼지고 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 수많은 투쟁과 노력의 결과라는 점을 모습 을 드러낸 자취를 통하여 들여다볼 수 있다.54)

 

국망의 비극적 사건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상실을 초래하였지만, ‘얼’을 되 찾아 선조의 혈맥과 같은 혈맥을 회복한다는 것은 우리 선조의 과거 역사를 통 해 망(亡)과 쇠(衰)가 있으면 새로운 흥(興)과 성(盛)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주역의 괘에서 복괘(復卦)를 기다리는 마음이라 하겠다.55)

 

       54) 정인보, 조선사연구 상권, 100~101쪽.

      55) 김교빈, 한국철학 에세이, 동녘, 2008, 104~105.

“조선 시대 말기에 주역을 연 구하던 많은 학자들은 외세가 점점 압박해 오면서 나라의 운명이 어두워지자 박괘 를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박괘는 머지않아 맨 꼭대기에 있는 양효마저 음 으로 바뀌면서 곤괘가 될 것입니다. 주역에서 박괘의 맨 위에 붙어 있는 양효를 “딱딱한 과일이라 먹을 수 없다”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역의 기본 기호인 양은 밝음을 의미하며 음은 어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운명이 박괘와 같이 아래서부터 어둠이 점점 밀려와 맨 위에 겨우 양 하나만 남아 있는 것이며, 그 래서 배가 고프지만 딱딱해서 먹을 수 없는 과일처럼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상황이 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 하지만 일제에 나라를 잃은 뒤, 주역을 연구하는 지식인의 관심이 (…) 복괘로 향합니다. 어떻게 하면 어둠을 뚫고 다시 빛을 얻을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에서 나라를 되찾은 8월 15 일을 광복절이라 부릅니다. 광복절이란 빛을 되찾았다는 뜻도 있지만 복괘가 바로 서광이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붙인 것입니다.”

 

3. 리쾨르의 ‘이야기 정체성’ 관점에서 정인보의 ‘조선학 연구’ 다시 읽기

필자는 리쾨르의 이야기 정체성을 첫째, 텍스트를 매개로 한 자기의 이해와 자기 정체성, 둘째, 윤리적 정체성, 셋째, 역사적 정체성이라고 분석하였다. 이 를 위당 정인보의 조선학연구와 양명학연론 등의 텍스트를 매개로 한 자기의 이해로서의 자기 정체성 확립으로, 시간 속에서의 지속 개념으로서의 자기 유지와 자기 긍정을 얼 사상과 연결 고리를 모색하는 것으로, 마지막으로 역사 적 정체성을 애도 작업과 기억 작업을 통과한 위당의 동시대인과 후손들의 역사 적 정체성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1) 위당의 단군조선론과 역사인식, 그리고 정체성 문제

1933년의 양명학연론에 이어 1935년에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위당의 주요 관심사는 한국 고대사 연구였다. 이는 신채호와 박은식 등의 민족사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측면과 함께 일제의 식 민주의사관에 반박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단군신화론에 대항하여 ‘단군조선론’을 주장했다. 즉, 그는 단군조선 연구를 통해 주체적 민족 정신을 고양하기 위하여 우리 민족의 고유한 얼 사상을 강조한 것이다. 위당은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역사연구를 하게 된 계기를 「조선 사연구 부언」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나는 국사를 연구하던 사람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내 선친께서 늘 “우리나라 역사책을 좀 잘 보아 두어라. 남의 것을 공부하면서 내 일을 너무들 모르더라”라고 말씀하셨건만 다른 노릇에 팔려 많은 세월을 허 비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해인가 우연히 조선고적도보(朝鮮古跡圖譜) 랍시고 낸 ‘첫 책’을 보게 되었는데 그 속장 두세 쪽을 넘기기도 전에 벌 써 ‘분’이 터지면서 “이건 가만히 내버려 둬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또 어느 해인가는 일인들이 이른바 ‘한일 병합 몇 주 년’이랍시고, ‘경일(京日)’인지 ‘매신(每申)’인지에다 기념호(記念號)를 내었는데 거기에 이른바 ‘점제비(秥蟬碑)’ 사진이 최근 몇 년 내의 대표적인 대사건의 하나로 올라왔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은 이 석각(石刻)이 용강(龍岡)에서 처음 나왔다고 해서 용강을 ‘점제’로 단정하고 역사적으로 점제가 한나라의 낙랑군의 속현이었으므로 이 석각을 통하여 평양 (平壤)이 옛 낙랑군의 처소였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일본 학자들의 조선사에 대한 고증이라는 것이 저들의 총독 정책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깨닫게 되었으며 그들의 음모를 “언제든지 깡그리 부셔버리리라”라고 다짐하게 되었다.56)

 

        56) 정인보, 조선사연구 하권, 문성재 역주, 우리역사연구재단, 2012, 774~776쪽. 

 

이처럼 일본 강점기의 식민사학자들에 의한 역사 왜곡이 위당이 조선사를 연 구하게 된 주요 요인 중 하나이다. 위당이 언급한 조선고적도보는 일본 도쿄 제국대학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교수가 만든 사진 자료집인데, 우리나라 역사를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뒤죽박죽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중심적 사고로 우리나라 역사를 주체가 아닌 객체로 만들어버렸다.

조선고적도보라는 책과 보통 진열품 목록이라는 것을 한 번 보라.

처음에 ‘한나라 낙랑군시대’이고 다음이 ‘대방군시대’이며 그 다음이 ‘고구려시대’이다. 만일 한인들의 역사를 ‘하나라’와 ‘은나라’ 순서로 나열하고 그 다음에 ‘주나라’가 이어진다면 그것은 해괴하게 여기거나 재거나 개탄할 일도 없이 그것을 그대로 따라서 쓸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낙랑 시대’니 ‘대방시대’니 했다면 이 점을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저들의 입장에서 이 땅의 역사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흑과 백이 뒤집힐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그리고 기왕에 남의 나라 역사학을 연구한다고 표방한 바에는 당연히 이 땅의 사람들을 주체로 삼아야 하는 것이며, 한나라에 대해서 기술할 경우에는 그들이 이 땅에 군을 두었다면 객체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그런 객체를 오히려 주체 앞에 갖다 놓은 형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57)

랑케(J. Ranke)의 실증사학을 내세운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일본인 어용 역사 학자들은 우리의 고대사가 비실증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데 광분하는 상황 속에서 위당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조선의 정체 성과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시도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위당 부친의 가르침은 그를 각성시켰고,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였다. 박은식이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 였는데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인 때문이다”58)라고 가르친 것과 같은 문제의식이다. 그렇다면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어떻게 우리 고대사를 왜곡했는가? 그들은 왜곡된 단군신화론을 들고 나왔다.

육당 최남선이 무속문화(巫俗文化)를 단군문화(檀君文化)로 간주하고 소위 ‘단군 샤마니즘론’59)을 주장하면서 그 당시 학계의 지배적 이론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이를 일제 식민주의자들이 동조하면서 단군신화론이 크게 대두하였다. 

 

     57) 정인보, 조선사연구 하권, 845쪽.

     58) 박은식, 한국통사 ‘서문’, 삼성각, 1946, 2쪽.

     59) 박성수, 「위당 정인보의 단군문화론」, 동양학 18, 1988, 동양학연구소, 211쪽. 

 

그들이 제시했던 문헌적 자료는 삼국유사 와 제왕운기의 기록 일부분이었다.60)

 

    60) 이완재, 「1930년대 민족주의 사학의 발전 : 爲堂과 湖岩을 중심으로」, 韓國學論集 21·22合輯,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1992, 125~160 참조. 

 

하지만 위당은 이 기록들을 분석하여 신화적 요소와 함께 사실적 요소가 존재함을 밝혀냄으로써 신화적 요소만을 강조하는 식민사학자들의 의도적 왜곡과 곡해를 비판하였다. 단군의 사적을 기술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옛 기록’이나 「본기」에 신화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화적인 요소는 신화라고 치더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까지 무리해서 그렇게 몰아가서는 안된다.

삼국유사만 해도 “옛적에 환인이 있었다(昔有桓因)”에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孕生子)”까지는 신화라고 치부하더라도 ‘단군 왕검’이라고 불렀는데 당고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50년 되 던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號曰檀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 都平壤城, 始稱朝鮮.) 라고 한 부분까지 신화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이승휴도 환인은 탐탁지 않게 여겼던지 제왕운기에서 그 변화가 환인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을 어이하리오(無奈變 化傳桓因) 라고 아쉬워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환인의 경우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름이 단군으로, 조선의 영역에 옹거하여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 시라, 고례, 남·북 옥저, 동·북 부여, 예와 맥은 모두 단군의 후예들 인 것이다.(名檀君, 據朝鮮之城, 爲王, 故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 北扶餘, 濊與貊, 皆檀君之裔.) “그[최남선]는 檀君文化의 民族固有性을 否定하던 日帝 植民主義者들에 同調하여 그것은 古亞細亞의 모든 遺民들에 共通된 原始宗敎로 斷定하였던 것이며 결국 朝鮮 古敎는 魔術宗敎(Magico-religion)요, 그 文化는 民族固有文化라기보다 아세아적 停滯社會의 종교요 文化(Asiatic religion or Asiatic Culture)에 지나지 않다는 결 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라고 한 대목까지 허구적인 신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61)

이와 함께 위당은 단군을 신이 아닌 인간으로 보았다. 그는 “조선(朝鮮)의 시조 단군(檀君)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드높은 백두산(白頭山)과 장대한 송화강(松花江)을 터전으로 삼아 조선을 세우니 우리 겨레가 단군에게서 비롯되었고 우리의 정치와 교화가 단군에게서 비롯되었고 우리의 정치와 교화가 단군 에게서 시작”62)되었다고 말했다.

 

      61) 정인보, 조선사연구 상권, 153~154쪽.

      62) 정인보, 조선사연구 상권, 111~112쪽. 

 

위당이 단군을 인간으로 본 까닭은 신화가 아 닌 사실로서의 우리 역사를 강조하기 위함이요, 인간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민족 의 역사가 삼국시대로 이어졌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한인[漢人]에 대한 원한이 깊었던 탓에 그들의 언어와 문자를 말하거 나 쓰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으리라. 이런 식으로 한 동안을 지나다 보 니 한인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는 반면 자신들의 고유한 전통을 대대로 굳건하게 계승해 왔고 그에 따라 옛 조선의 말이 그대로 이어져 상대가 백제인이든 고구려인이든 간에 서로가 큰 불편 없이 의사를 소통하며 동 족으로서의 동질감을 공유했을 것이다. 위당은 고조선시대부터 시작되어 고구려, 백제, 신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역사를 동족(同族)의 역사로 간주하고,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적 전통을 계승한 것을 강조하여 단군조선론을 더욱 부각하였다. 이는 단군 역사를 모두 부정하고 덮어버리려 했던 식민사관론자들에 대한 비판이자 우리 민족의 고유한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위당의 노력이었다. 민족의 역사가 왜곡되었는지도 모르고 살아 가는 동시대인과 그것을 모르고 살아갈 미래의 후손에게 민족적 정체성, 즉 민 족의 ‘얼’을 일깨워주기 위한 그의 투쟁과 절규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누구든지 ‘얼’을 잃었다면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잃어버린 것이지 누 가 억지로 빼앗아 간 것이 아니다. … 우리가 만나는 운명이 어떤 것이든 간에 외부로부터의 불행은 언제나 그 외형에만 가해질 뿐이다. 빈천, 비 방, 좌천, 굴욕이 제아무리 기승을 부리더라도 내 ‘얼’을 빼앗아 가지는 못하는 법이다. 만일 그것을 잃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잃은 것이지 내 운명 탓이 아니다.

말하자면 ‘얼’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지 남의 허물이 아닌 셈이다.63)

 

       63) 정인보, 조선사연구 상권, 60쪽.

 

2) 위당의 조선학운동과 애도하는 작업

위당 정인보의 망국민을 위한 마음 씀은 민족의 ‘얼’을 되찾는 작업이고, 이를 위한 연구가 단군조선론이다. 필자는 이 마음 씀을 리쾨르가 기억, 역사, 망각 에서 개진한 ‘애도 작업’과 ‘기억 작업’의 변증법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본격적인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살펴볼 것이 있다. 그것은 ‘잊지 않으려는 의 지’인데, 리쾨르는 “잊어서는 안 되는 범죄들이 있고, 고통의 대가로 복수보다는 이야기되기를 호소하는 희생자들도 있을 것이다. 오로지 잊지 않으려는 의지만 이 그러한 범죄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다”64)라고 강조한다.

위당이 동아일보에 「오천년의 조선의 얼」을 연재하기 시작하였을 때(1935 년)는 나라를 잃은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고, 일제에 의해 민족정신 말살 작업 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이때 위당에게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었고,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우리 민족의 역사를 희생자의 관점에서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는 과업이 있었고, 조선의 얼을 회복시켜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해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을 절대 잊지 않으려는 “기억의 의무(devoir de mémoire)”65)라고 말할 수 있다.

 

     64) 리쾨르, 시간 3, 365쪽.

     65) P. Ricoeur, MHO, p. 37, 105, 107, (…). 리쾨르는 기억, 역사, 망각에서 ‘기억의 의무’라는 표현을 33회나 사용하고 있다. 

 

잊지 않으려는 의지의 독특한 사례는 캐나다 퀘벡의 자동차 번호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번호판에 새겨진 ‘나는 기억한다(je me souviens)’라는 구호는 영국의 지배 를 받던 그 시절을 절대로 잊지 말자는 기억의 의무를 웅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기억에 대한 리쾨르의 날카로운 지적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지나친 기억(trop de mémoire)’과 ‘너무나 적은 기억(trop peu de mémoire)’/ ‘충분치 못한 기억(pas assez de mémoire)’을 대비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파생하게 되는 것들의 몇 가지 걱정스러운 징후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세계의 이런저런 지역에서의 너무나 많은 기억(그러 므로 기억의 남용)과 또 다른 지역에서는 충분치 못한 기억(그러므로 망각의 남용)이 그것이다.

자, 이제 자기 정체성의 문제제기 속에서 이처럼 조작된 기억의 취약성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66)

회상하려는 노력(effort de rappel)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기억을 남용하게 되고, 반대로 억지로 잊으려는 노력은 망각의 남용이 된다. 먼저 ‘기억의 남용’ 측면에서 역사 작업의 이데올로기화를 유념해야 한다.

주지하듯이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의 의미를 은폐와 왜곡으로 규정하였다. 독일 이데올로기 에서 그는 이데올로기를 현실을 전도한 이미지라고 하며, 카메라의 어둠상자 (camera obscura) 속의 뒤집힌 이미지의 은유로 설명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이데올로기 현상은 사회의 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리쾨르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보다 풍요로운 해석을 제공한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변증법적으로 분석하면서 이 두 현상의 매개를 사회적 상상력(imagination sociale)으로 상정하고, 두 문제를 결합해서 이해하려 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각각 세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한다.67)

 

     66) P. Ricoeur, MHO, p. 98.

    67) 전종윤, 「리쾨르의 정치적 역설」, 현대유럽철학연구 제46집, 2017, 舊 한국하이 데거학회/한국해석학회 통합 학회지, 125~153 참조. 68) P. Ricoeur, TA, p. 385. 

 

첫째, 이데올로기는 부정적 현상이며 마르크스가 본 것처럼 은폐와 왜곡이다.

둘째, 이데올로기는 지배층이 지배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합법화하는 기능이다.

셋째, 이데올로기는 통합 기능으로서 긍정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리쾨르는 “모든 공동체는 기념식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의 창설자라고 생각하는 사건들을 재현한다”68)라고 말하며, 이데올로기의 긍정적 기능을 추가한다. 그리고 미국의 독립 선언, 프랑스 혁명의 바스티유 점령, 러시아 공산주의의 10월 혁명과 같은 현상을 사례로 제시한다.

리쾨르의 관점에 따라 이데올로기의 부정적 현상, 즉 사회 현실의 은폐와 왜곡이라는 차원에서 기억의 남용 사례로 일제의 식민사관을 들 수 있겠다. 역사 를 왜곡하여 영토뿐만 아니라 나라의 정신, 즉 ‘얼’까지 빼앗으려는 시도의 기저 에는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획책이 있었다. 이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위당의 조선학운동이 혹시 이데올로기의 부정적 단 계(현실의 은폐와 왜곡)에 속하지 않았는지, 즉 기억의 남용이 아니었는지 물어 야 하며, 동시에 이데올로기의 긍정적 현상, 즉 통합 기능으로서 조선학 연구를진행했는지 검토할 필요는 늘 상존한다.

그리고 ‘망각의 남용’69) 측면에서 해방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강제 징용의 문제나 위안부의 문제에 대한 일본의 반성 없는 자세를 그 사례로 들 수 있 다. 같은 가해자이지만 독일과 일본이 보인 태도는 너무나 상이하다. 그래서 일본이 보이는 망각의 남용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현재와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친일 문제에 지나치게 관대했고, 관대한 우리 사회를 망각의 남용 사례라고 아니할 수 없다.

기억 작업과 회상하려는 노력에 대한 탐색 이후, 지금부터는 애도 작업의 집중적 조명에 힘쓰고자 한다.

이 탐구와 관련된 선행 연구로는 윤성우의 논문(이 후에 책으로 엮음)70), 「기억과 이야기에서 용서와 망각까지 : 리쾨르를 중심으로」이 대표적이고, 본 연구에 훌륭한 아이디어를 제공했음을 밝혀둔다. 리쾨르는 기억, 역사, 망각에서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Trauer und Melandoloie)(1915)을 분석하고 늘 그렇듯이 자기만의 관점(제3의 정점)― “집단적 자기 정체성의 정신적 외상(外傷)에 애도라는 프로이트의 작업을 확대 하는 일”71)―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리쾨르가 인용한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애도란 항상 사랑한 사람의 상실이나 이 사람을 대신해 세워진, 조국, 자유, 이상 등등과 같은 추상물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하나의 출입구가 우리가 나중에 취하게 될 방향으로 마련되었다. 정신분석가가 제기하는 첫 물음은, 왜 몇몇 환자들에서 “동일한 상황들이 지나간 후에 애도 대신에 우울증”(강조는 우리[리쾨르]가 한 것임) 이 등장하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되느냐를 아는 일이다.72)

 

       69) P. Ricoeur, MHO, p. 96. “그렇다면 너무나 적은 기억은 동일한 재해석에 속하게 된 다. 한쪽에서 퇴폐적인 희열을 가지고 길러내는 것과 또 다른 한쪽에서 나쁜 양심을 가지고 회피하는 것이, 바로 동일한 반복으로서의 기억(반복-기억)이다. 전자의 사람들은 그 속에 빠져 몰입하기를 좋아하고, 후자의 사람들은 그 속에 빠져 매몰될 까 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전자의 사람들과 후자의 사람들은 동일한 비판의 결핍을 앓고 있다. 그들은 프로이트가 회상의 작업이라 불렀던 것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70) 윤성우, 폴 리쾨르의 철학과 인문학적 변주, 한국외대 지식출판부, 2017.

     71) P. Ricoeur, MHO, p. 95.

     72) P. Ricoeur, MHO, p. 87. 

 

이 인용문에서 필자의 관심사는 애도의 의미이다. 즉, 애도란 ‘사랑한 사람’의 상실이나 이 사람을 대신해 세워진 ‘조국’과 같은 추상물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본 연구의 가설로 내세운 바 있듯이 위당의 조선학운동은 ‘사랑한 조국’을 상실한 상태에서 그가 보일 수 있는 병리학적이고 치료적 차원 에서의 반응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애도의 정상적 현상을 애도 작업이 완결된 이후 상실에 대해 자아가 새롭게 자유롭게 되고 해방되었을 때로 정의하고, 우울증을 자아 자신이 침통해지고 자기 스스로 평가 절하하고 비난하는 등 스스로 비하의 공격을 당하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이런 시각에서 위당은 단군조선 연구와 얼 사상 회복 운동 을 통해 애도 작업을 했고,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인정(reconnaissance de nous-même)”73)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타인 앞에서의 수치심과 자신을 향한 자책에서 벗어나 자기를 존중할 수 있는 단계인 자기 자신에 대한 인정이 바로 애도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도 작업은 기억 작업과 동시에 이루어 져야 한다. 애도의 시간은 반복에서 회상으로의 이행에 관한 분석이 요구하는 인 내심과 무관하지 않다. 회상은 시간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회상은 또한 어느 정도의 시간, 곧 애도의 시간을 요구한다.74) 애도의 시간으로서의 기억 작업은 리쾨르가 프로이트의 아이디어에서 빌린 “기억의 비판적 사용”75)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회상, 반복 그리고 통과 작업(Erinnern, Wiederholen und Durcharbeiten)(1914)76)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피해자들을 분석한 이후 과거에 경험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망각 한) 그들의 정신적 피해―이는 반복·강박적으로 나타난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기억해내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에 리쾨르는 “과거의 이야기들(과거의 역사들)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야기해보는 것, 그리고 (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타자―타인, 내 친구 또는 내 상대 적수―의 관점에서도 과거의 사건들을 이야기하게 하는 것”77)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73) P. Ricoeur, MHO, p. 88.

     74) P. Ricoeur, MHO, p. 89.

     75) P. Ricoeur, Le pardon peut-il guérir?, in Esprit, N° 210, 1995 Mars-Avril, p. 79. (윤성우, 「기억과 이야기에서 용서와 망각까지 : 리쾨르를 중심으로」, 101쪽에 서 재인용.)

     76) 리쾨르는 기억, 역사, 망각에서 이 책을 기억해내기, 반복, 통과 작업(Remémoration, répétition, perlaboration)으로 번역하여 소개한다.

 

나의 기억을 다르게 이야기하고, 타자의 관점에서 그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해석학적 방법론인 ‘거리두기(distanciation)’라 하겠다.

자신이 경험한 삶의 고통과 상실, 그리고 현재 직면하고 있는 감당키 어려운 삶의 무게와 현실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이런 해석을 위당의 경험에 적용해보면,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극도로 상처 입은 게다가 병들기까지 한 기억―“불행한 기억(mémoire malheureuse)”―을 “행복한 기억(mémoire heureuse)”78)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신화로서가 아닌 우리 민족의 실제 역사로서의 ‘단군조선’이고 조선의 얼이었다. 이제 애도 작업과 기억 작업의 변증법은 정체성 문제로 확장된다. 리쾨르는 프로이트의 애도 작업을 개인의 자기 정체성과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의 문제로 확장하여 분석한다. 이는 병리학적 범주를 역사적 차원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집단적 자기 정체성의 정신적 외상(外傷)에 애도라는 프로이트의 작 업을 확대하는 일을 궁극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은 개인적 자기 정체성 과 공동체적 자기 정체성이라는 양극화된 구성이다. 사람들은 유추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정신 분석의 용어들로써, 집단적 외상 들, 집단적 기억의 상처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국가의 실체 를 구성하는 권력, 영토, 국민에게 영향을 끼친 “상실들” 속에서, 상실한 대상이라는 개념은 직접적 적용(점)을 찾게 된다. 비탄에서부터 상실한 대상과의 완전한 화해에까지 전개되는 애도의 행동들은 온 국민 전체가 운집되는 커다란 장례식을 통해 단번에 잘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애도 의 행동들은 사적 표현과 공적 표현 사이를 교차하는 관계들의 한 특권 적 예를 구성한다. 바로 이렇게 해서 병든 역사적 기억이라는 우리의 개념은 애도의 행동들의 이런 양극화된 구조 속에서 하나의 후험적(a posteriori) 정당화를 찾게 된다.79)

 

      77) Ibid. (윤성우, 앞의 논문, 103쪽에서 재인용.)

     78) P. Ricoeur, MHO, p. 37.

     79) P. Ricoeur, MHO, p. 95. 

 

여기서 환기해야 할 것은 앞서 분석한 이데올로기의 통합적 기능이다. 공동체는 장례식을 계기로, 즉 애도 행동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병든 역사적 기억은 구성원들에게 내면화하게 된다. 그 이후에나 상처받은 국민적 자긍심은 통과 작업(perlaboration)을 거치게 된다. 이로써 개인적 기억과 정체성의 차원을 넘어선 집단적 기억과 정체성의 차원에서 애도 작업과 기억 작업은 제대로 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런데 이야기 정체성을 역사적 정체성으로 확대하여 해석할 때 유의할 점을 리쾨르는 “기원적 폭력의 유산”과 “기억의 조작”이라 말한다.

“기원을 이룬 사건들(événements fondateurs)”80)이라는 명목하에 우리가 기념하는 것은 대부분 폭력적 행위들이며, 이들은 법치국가에 의해 정당화되고 합법화된 폭력들이다.

문제는 누구에게는 영광이지만 누구에게는 치욕이자 저주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현실적이고 상징적인 상처들이 집단적 기억의 보관소에 축적되면서 역사적 정체성의 문제는 취약점을 갖는다.

이 관점으로 위당의 고백을 회상해보자. 즉, “나는 국사를 연구하던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일인들이 이른바 ‘한일 병합 몇 주년’이랍시고, ‘경일(京日)’인지 ‘매신(每申)’인지에다 기념호(記念號)를 내었는데…”가 그것이다. 위당의 고백에서 볼 수 있듯이 한쪽에선 기억의 남용이 되고, 다른 한쪽에선 기억의 조작 (혹은 강요된 기억)이 된다.

그래서 리쾨르는 “가르쳐진 역사, 학습된 역사는, 그러나 또한 기념된 역사이다”81)라고 규정한다.

 

      80) P. Ricoeur, MHO, p. 96.

     81) P. Ricoeur, MHO, p. 104.

 

바로 이 지점에서 필자는 이 연구의 결론으로 세대를 뛰어넘는 기억의 중요성 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는 위당의 저술을 텍스트의 세계로 보고 독자의 세계와의 충돌 또는 만남, 즉 해석학적 순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4. 나오기

기억, 역사, 망각 1부 3장 「개인의 기억, 집단의 기억」에서 리쾨르는 프랑스 사회학자 모리스 할프박스(Maurice Halbwachs)의 집단적 기억(1950)에 관하여 탐색한다. 리쾨르가 분석한 할프박스 이론의 핵심은 기억의 문제를 사회적 현상으로 보고, 이를 집단적 기억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할프박스는 “기억의 사회적 틀(cadres sociaux de la mémoire)”82)이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적 기억조차도 사회적 틀을 매개로 형성되고 이것은 집단적 기억과 밀접하게 연관 된다고 말한다.

이는 기억 이론에 관한 전통적 관점에 반하는 것인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억 이론 이후 기억은 ‘나’의 기억이었지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83) 할프박스에 의하면 기억은 개인적 기억과 집단적 기억으로 구분되며, 이 두 기억 사이의 관계는 내밀하고, 내재적이어서 두 기억은 서로 스며들게 된다.84) 그런데 어떻게 개인적 기억과 집단적 기억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어 떻게 집단적 기억이 역사적 기억과 연관되는가? 이 질문의 답변으로 할프박스 는 학교 수업을 예시로 든다.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은 역사를 통해 “우선 날짜, 사실, 전문용어, 특이한 사건, 중요한 인물, 축제들을 기억하는 것부터 배우게 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민족을 대상지시 틀로 해서 가르치는 하나의 이야기이 다.”85) 물론 학생들로서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온 어떤 폭력과 진배 없다. 역사적 기억은 살아 있는 기억이 아닌 ‘죽은’ 기억처럼 간주된다. 그런데 도 학습한 역사는 역사적 기억이 되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것은 문화적 적응이 라 한다. 문화적 적응은 친숙하지 않은 것, 이를테면 역사적 과거의 이질감과 점 차 친숙해지는 과정이다.

 

친숙해지는 과정은 가족의 핵을 구성하는 구심적 동아리, 동지애, 우 정, 부모들의 사회적 관계를 거쳐,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상들의 기억을 매개로 하여 역사적 과거를 발견함으로써 입문의 성격을 띠는 여정으로 이루어진다. (…) 가족의 연장자들이 그들 시대의 사건들에 관심을 잃어 버리지만, 그다음 세대들은 그들 자신의 유년기의 배경이었던 그 사건들 에 관심을 둔다.86)

 

세대를 뛰어넘는 기억으로서의 ‘세대의 연속’은 교육이라는 문화 적응의 과정 으로 이루어진다. 선조와 동시대인, 그리고 후손들의 “삼중의 세계”87)라는 표현 은 ‘우리’라는 표현이며, 위당 정인보가 우리의 ‘얼’을 되찾아 선조의 혈맥을 잇 겠다는 표현과 유사한 것이다.

 

        82) P. Ricoeur, MHO, p. 147.

       83)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의 신화, 즉 글쓰기의 ‘파르마콘(pharmakon)’은 독인가, 치료제인가의 논쟁에서부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밀랍 위의 흔적에 관한 은유’에 이르기까지 기억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였다.

       84) P. Ricoeur, MHO, p. 147~151 참조.

       85) P. Ricoeur, MHO, p. 512.

       86) P. Ricoeur, MHO, pp. 513~514.

       87) P. Ricoeur, MHO, p. 514. 리쾨르는 선조와 동시대인, 그리고 후손들의 “삼중의 세계”라는 표현을 Alfred Schutz(The Phenomenology of the Social World, Northwestem University Press, 1967)에게서 가져온다.

 

 

역사적 기억이 살아 있는 기억으로 차츰 통합되는 과정은 독서이며, 독서를 통한 ‘텍스트의 세계’와 ‘독자의 세계’의 충돌(만남)이 요구된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선행 연구에서 ‘독서공동체’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독서공동체란 말은 탐구공동체(community of inquiry)라는 표현에서 빌린 것으로, 독서공동 체는 학습자가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자기의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적 교육 의 장(場)이다. 야우스(H. R. Jauss)가 독서를 ‘능동적 수용’이라고 했듯이 독서 행위는 수동적인 면과 능동적인 면을 동시에 갖는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살아 갈 것’을 제안하는 텍스트의 세계를 독자가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수동적으로 보 이지만, 독자가 도서관에 쌓여있는 책(인류의 문화유산)을 읽지 않는다면 텍스 트의 세계가 제공하는 삶의 비전과 삶의 다양한 가능태와 결코 만날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 앞에서 독서행위의 주체인 독자는 능동적이다.

 

텍스트의 세계가 텍스트의 ‘내적’ 구조와 관련하여 완전히 독창적인 지향적 목표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텍스트 세계는 그 ‘바깥’, 그 ‘타자’ 를 향한 텍스트의 열림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서를 별도로 하면 텍스트 세계는 내재성 속의 초월성으로 남아 있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 존재론적 위상은 어정쩡한 상태이다. 즉 구조와 관련해서는 넘치며, 독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형상화의 역동성이 그 여정을 끝마치는 것은 오직 독서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텍스트의 형상화가 재형상화로 변모하는 것은 독서를 넘어서, 받아들인 작품으로 인해 알게 된 실제적인 행동을 통해서이다.88)

 

위당 정인보의 저술은 늘 독서를 기다리고 있다.

독서행위를 하는 독자는 어떤 기대를 품고 텍스트를 읽고 텍스트의 내용을 수용하는 만큼, 텍스트의 세계 와의 만남에서, 많은 선물을 받는다.

텍스트의 선물은 독자에게 삶의 해석자로 참여하게 하며, 이전과 다른 세계를 추구하게 하며, 새로운 자기의 이해에 도달 하게 한다.

위당의 피와 땀의 결실을 먼지 쌓인 고문서로 취급하지 않기 위해서 그의 후손인 우리가 독자의 주체로서 그의 텍스트와 만나야 한다. 그리고 단군 조선과 얼 사상을 후속세대에게 가르쳐야 한다.

이는 할프박스의 말처럼 “사람은 아무것도 잊지 않는”89) 존재이기 때문이다.

       

       88) 리쾨르, 시간 3, 306쪽.

       89) Maurice Halbwachs, La Mémoire collective, PUF, 1950, p. 126. (P. Ricoeur, MHO, p. 515 재인용.)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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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Jeong In-bo’s ‘Dangun-Choseon’ and ‘Eul(sprit)’ thought based on Ricoeur’s theory of ‘identité narrative’

Chun, Chong-Yoon(Institut of Classical Studies of Korea Jeonju Univ.)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mpare and analyze Paul Ricoeur’s concept of ‘identité narrative’ and Widang Jeong In-bo’s research on ‘Dangun-Choseon’ and ‘Eul (sprit)’ thought. Ricoeur’s dialectical methodology adopted in this study is used to find ‘moderate’ and ‘third peak’ by constantly talking about and confronting two different subjects or concepts. This methodology requires a concept or concepts that are indirect and mediating elements; but I focused on the ‘mourning work’ and ‘memory work’ in Ricoeur’s Memory, History, Forgetting. Finally, I reinterpreted Jeong In-bo’s ‘Dangun-Choseon’ from the standpoint of meeting the ‘world of text’ and ‘the world of reader’. From Ricoeur’s perspective, Jeong In-bo’s Research on Choseon History (朝鮮史硏究) is a product and gift of text that can be passed down to our next generation. Keywords: Ricoeur, Jeong In-bo, Idnetité narrative, Dangun-Choseon, Eul(sprit) thought

 

2020년 11월 20일 접수되고 2020년 12월 16일 심사가 완료되어 2020년 12월 23일 게재가 확정되었습니다

한 국 동 서 철 학 회  동서철학연구 제98호, 2020. 12

 

 

리쾨르의 ‘이야기 정체성’ 이론을 통해 본 정인보의 ‘단군조선’과 ‘얼’ 사상.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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