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의 혐오 심상과 수사학:이세벨과 바벨론을 중심으로/이상목.평택大
초록
본 논문은 계시록의 심상과 언어를 혐오 수사학의 관점에서 조명하여 계시록이 수 사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한 혐오의 특성을 밝힌다. 계시록은 교회 내부와 외부 모두를 향하여 성적인 혐오 코드를 강렬한 심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특성은 계시록의 바벨론과 이세벨 단락에서 잘 포착된다.
우선, 바벨론은 교회를 탄압하는 로마와 로마 제국을 상징하며 성적으로 타락한 혐오스러운 음녀로 묘사된다.
바벨론의 최후에 관한 계시록의 묘사는 외부의 강력한 적인 로마에 대한 독자의 혐오를 강화하고 그에 대한 대응 행태를 설득한다. 계시록은 그리스도인에게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촉구하기 위해 혐오 감정을 수사적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분리의 행동 양식은 두려움과 유사한 일차 혐오의 특징이다.
다음으로, 이세벨은 그리스도인들을 호도하는 교회 내부의 적으로서 음녀로 묘사된다.
계시록은 혐오의 원인인 이세벨을 제거하는 것을 문제의 해결로 본 다.
그의 자녀들을 죽임은 이세벨을 향한 처벌의 일환이다.
이세벨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은 혐오 유발자에게 접근하여 그를 제거하려는 적극적 행동 유형을 보여준다.
제거 라는 대응 행태는 분노 감정과 유사한 이차 혐오의 특성이다.
계시록의 혐오 심상과 수사는 외부의 탄압과 내부의 타협에 맞서 신앙을 지키고 교회를 존속시키려는 계시록 의 강한 수사적 목적을 보여준다.
주제어 혐오 수사, 혐오 심상, 요한계시록, 이세벨, 바벨론
I. 들어가는 말
요한계시록(이하 계시록)은 풍부한 심상의 언어를 사용하여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한다.
그들 중 많은 심상은 매우 폭력적이고 위계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계시록의 이러한 특징은 많은 선행연구의 주제가 되었다.
가령, 탈식민주의 비평이나 젠더 비평을 적용한 연구들은 계시록의 (성)폭력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규명하여 계시록 해석의 지평을 넓히기도 하였다.1)
1) 이러한 연구의 예는 다음과 같다. Tina Pippin, Death and Desire: The Rhetoric of Gender in the Apocalypse of John (Eugene: Wipf & Stock, 2021); Stephen D. Moore, Empire and Apocalypse: Postcolonialism and the New Testament (Sheffield: Sheffield Phoenix Press, 2006); idem, Untold Tales from the Book of Revelation: Sex and Gender, Empire and Ecology (Atlanta: SBL Press, 2014); Amy-Jill Levine, ed. A Feminist Companion to the Apocalypse of John (London: T&T Clark, 2009); Elisabeth Schüssler Fiorenza, The Book of Revelation: Justice and Judgment (Minneapolis: Fortress, 1998); Luis Menéndez-Antuña, Thinking Sex with the Great Whore: Deviant Sexualities and Empire in the Book of Revelation (London: Routledge, 2018).
계시록은 폭력적인 로마의 압제에 맞서 신앙을 지키도록 소아시아 교회들을 격려하면서, 그 심상과 언어는 폭압에 맞서는 폭력과 제국에 맞서는 제국주의를 드러낸다.
계시록은 배교의 위기를 이기고 순교를 불사하는 신앙을 고취하려는 수사적 목적을 보여준다.
계시록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세상과는 구별된 삶(“거기서 나오라,” 계 18:4)을 살도록 독자를 독려한다.
이 러한 목적을 위해 계시록은 신앙의 경계를 설정하면서 교회의 내부와 외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전자는 로마제국의 종교문화와 타협하는 신앙이며, 후자는 교회를 억압하는 로마제국이다.
계시록은 이들 위협에 대한 인식을 수신자 교회들과 공유하고 그들의 신앙 행태를 인도하고자 혐오의 심상과 언어를 사용한다.
계시록에서 혐오의 감정은 신앙을 위협하는 ‘불순한 세력’을 향한 역겨움과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그에 따라 관계를 설정하게 하는 중요한 수사적 도구이다.
계시록의 혐오 심상과 언어는 성을 중요한 모티프로 사용한다.
계시록은 교회 내부와 외부 모두를 향하여 성적인 혐오 코드를 강렬한 심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특징은 외부의 탄압과 내부의 타협에 맞서 신앙을 지키고 교회를 존속시키려는 계시록의 강한 의도와 관련이 있다.
상술한 선행연구들은 계시록의 폭력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밝혔으나 그것을 계시록의 수사적 목적과 연결하여 충분히 고찰하지 않았다.
또한, 계시록의 혐오 심상과 언어라는 관점에서 그러한 폭력적 성격을 살피지 않았다.
본 연구는 혐오 감정의 수사학이라는 관점에서 계시록의 심상과 언어를 고찰하여 계시록의 수사적 목적 달성을 위해 사용된 혐오의 특성을 규명한다.
이러한 연구 목적을 위해 이세벨과 바벨론에 관한 계시록의 심상과 언어를 연구 범위로 한다.
양자에 관한 계시록의 기록은 성적 모티프와 연결된 혐오 심상과 언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연구는 계시록 이해의 폭을 넓히며, 아울러 계시록의 혐오 수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현대의 독자에게 제공한다.
II. 혐오 감정의 다층적 성격
혐오는 매우 복잡하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감정이다.
많은 연구는 혐오를 다른 감정과 비교해 더욱 원시적이며 생물학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또 다른 여러 연구는 도덕적인 혐오 감정의 보편성을 지적하면서 도덕적 혐오를 유발하는 매우 다양한 사회문화적 원인을 열거하기도 한다.
전자의 연구들은 상한 음식이나 고약한 냄새, 구토물이나 배설물 그리고 오염물과의 접촉을 통해 오염이 전이될 위험 등을 혐오 감정의 유발자로 제시하면서 이러한 혐오 유발자들은 문화적으로 매우 광범위하게 발견되지만 동시에 각 문화권에 따라 무척 다양하다고 지적한다.2)
2) P. Rozin, J. Haidt, and C. R. McCauley, “Disgust: The Body and Soul Emotion,” Handbook of Cognition and Emotion, ed. by T. Dalgleish and M. J. Power (Chichester, England: Wiely, 1999), 425-29; idem, “Disgust,” Handbook of Emotions, ed. by M. Lewis and J. Haviland (New York: Guilford Press, 2000), 637-38.
반면, 후자의 연구들은 문화적, 역사적 그리고 개인적인 차이에 따라서 도덕적 혐오를 일으키는 인자가 다양하지만, 도덕적 혐오 감정은 그러한 다양성 속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위의 연구들을 주목하면, 혐오는 생물학적이며 동시에 도덕적인 감정 경험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혐오 감정의 이중적인 특성은 혐오가 단일한 감정이라기보다 인접 감정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쉽게 구분하기 어려운 감정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많은 연구가 혐오를 정의하면서 인접한 감정들과 명확히 구별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혐오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때로는 그러한 구분이 과연 타당한지 또는 그러한 구분이 혐오 감정을 넓게 조망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너스바움(Martha C. Nussbaum)은 혐오와 분개(indignation)를 구분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전자는 오염의 위협에 관한 것이며 그러한 위협에 대한 거부로 표현되는 반면, 후자는 “부당함이나 위해에 대한 사고가 중심을 이룬다”라고 말한다.3)
3) Martha C. Nussbaum, 혐오와 수치심: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조계원 역 (서울: 민음사, 2020), 185-86. 직접 인용은 186쪽
이러한 구분은 너스바움의 법철 학적인 관심을 반영한다.
그는 혐오가 법률적인 규제나 처벌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분개와의 차이점을 부각한다.
다시 말해, 분개는 부당함이나 위해라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감정인 반면, 혐오는 자신이 오염될 수 있다는 “신비적” 사고에 근거한다.4)
너스바움에 따르면, 이러한 혐오의 특성은 혐오가 법률적 규제나 처벌의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의 설명은 혐오를 명확히 정의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혐오를 너무 협소하게 이해하여 혐오 감정에 동반된 여러 감정 양태를 혐오에서 과도하게 분리한다는 제한점도 있다.
물론, 법철학적인 논의라는 점을 고려하면, 너스바움의 구분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혐오를 감정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감정작용의 수사적 기능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혐오 감정과 인접 감정의 중첩 및 연관성을 살펴야 한다.5)
콜라이(Aurel. Kolnai)는 혐오의 양태를 공포, 역겨움, 증오라고 설명한다.6)
그가 말하는 혐오의 세 양태는 혐오가 여러 다른 감정 양태로 표출됨을 지적하는 것으로서 혐오 감정이 단일한 순수감정이라기보다 여러 감정과 함께 경험되고 표현되는 것임을 말한다.
가령, 콜라이는 역겨움과 공포를 방어 작용의 주된 유형이라고 설명하는데,7)
4) Nussbaum, 혐오와 수치심, 191-92. 직접 인용은 191.
5) 혐오의 수사적 기능에 관한 보다 일반적인 연구는 다음을 보라. 이상목, “혐오 감정의 사회수사학 그레코로만 문헌과 고대 유대교 문헌의 혐오 언어에 관한 서설,” 신약논단 29/1 (2022), 157-91.
6) Aurel Kolnai, “The Standard Modes of Aversion: Fear, Disgust and Hatred,” Mind 107 (1998), 581-95.
7) Aurel Kolnai, “Disgust,” On Disgust, ed. by Barry Smith and Carolyn Korsmeyer (Chicago: Open Court, 2004), 33-35.
이는 혐오 감정이 공포와 함께 작용한다는 점에서 단일 감정이 아님을 보여준다. 곧, 혐오 감정은 자기방어의 기제로 작용할 때 역겨움과 공포 를 동반하며 이는 혐오 감정을 고찰하면서 인접 감정들을 주목해야 함을 알려준다. 최현철은 콜라이의 혐오 양태를 기초로 혐오 감정을 분석하여 네 가지의 혐오를 설명한다. 그는 이 네 가지 혐오를 감각적 혐오감, 생존의 혐오감, 문화적 혐오감, 권력적 혐오감이라 구분한다. 저자는 감각적 혐오감과 생존의 혐오감은 공포의 감정으로 경험되고, 문화적 혐오감은 역겨움으로, 권력적 혐오감은 증오를 동반한다고 설명한다.8)
이러한 분석은 혐오 감정은 다양한 유발요인과 양태를 지닌다는 점을 알려준다.
특히, 혐오가 공포, 역겨움, 증오라는 여러 감정을 동반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혐오는 일차 혐오와 이차 혐오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생물학적 또는 생리학적 유발요인과 관련된 혐오이며, 후자는 사회문화적 유발요인에 의한 혐오이다.
이 두 혐오를 가리키는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지만,9) 모두 위의 구분을 유지한다.
인간의 혐오 경험은 최초 생물학적 또는 생리학적인 유발요인에 대한 반응으로 시작되었더라도 이후 사회문화적인 영역으로 그 대상을 넓힌다.10)
다시 말해, 이차 혐오는 생리적인 혐오가 사회문화적인 경험에 적용되어 그 대상을 역겹게 인식하게 되는 혐오이다.11)
8) 최현철, “혐오, 그 분석과 철학적 소고,” 철학탐구 46 (2017), 175-99.
9) 일차 혐오는 “primary disgust,” “core digust,” “pure disgust” 등으로, 이차 혐오는 “secondary disgust,” “complex disgust,” “(socio)moral disgust” 등으로 불린다.
10) 이상목, “혐오 감정의 사회수사학,” 161-66.
11) 혹자는 일차 혐오와 이차 혐오가 동일 대상에 대한 반응이며 후자는 전자의 경험 후에 일어난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이차 혐오는 일차 혐오와는 별개로 사회문화적 인 영역에 대한 감정반응으로 일어난다. 양자는 그 유발요인을 공유하지 않기 때 문이다.
이러한 혐오의 확장성을 주목하면 혐오 감정이 다양한 감정 기제를 띨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일차 혐오와 이차 혐오는 혐오 감정이 다양한 유발요인에 의해서 생겨남을 보여주며 이러한 다양성은 반응 양태의 다양성으로 이어짐을 추정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리(Spike W. S. Lee)와 엘즈워스(Phoebe C. Ellsworth)는 혐오 감정과 인접한 감정에 관해 주목할 만한 연구를 발표하였다.12)
이들 저자는 그리드 테이타 세트(GRID data set)를 사용하여 미시건 대학에 재학 중인 182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하였다.
각 실험 참가자는 그리드 설문지를 작성하면서 24개의 풀에서 무작위로 선택된 네 가지 감정을 평가하였다.
저자들은 설문 결과를 분석하여 일차 혐오와 이차 혐오의 차이점 및 이들과 긴밀하게 동반되는 감정과 행동 유형을 설명하였다.
리와 엘즈워스는 두 가지 혐오가 지닌 각기 다른 평가, 경험, 생리학적 반응, 행동 경향 들을 분석하였다. 우선, 물질적 혐오(physical disgust; 일차 혐오)에 있어서, 가치 평가나 도덕성 그리고 작위성(agency)에 대한 평가는 대개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으며, 혐오 대상을 피하려는 수동적 행동 경향을 보였고, 경험의 주관성은 약하거나 더 순응적이었으며, 사회적 관계성은 단순하다는 특징을 보였다.
반면, 도덕적 혐오(moral disgust; 이차 혐오)의 경우, 가치 평가 및 도덕성, 작위성에 대한 평가가 고려되었고, 혐오 상황에 접근하여 처벌하려는 능동적인 행동 경향을 보였으며, 경험의 주관성이 강하였고, 사회적 관계성은 더욱 복잡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일차 혐오와 이차 혐오를 같은 혐오라는 단어로 표현하더라도 실제로는 혐오 상황과 사회적 관계성, 작위성 및 경험의 주관성 등에 영향을 받아 매우 다른 기제로 작용함을 보여준다.
물질적 혐오는 공포 감정과 유사하며, 도덕적 혐오는 분노 감정과 중첩되는 면이 크다고 리와 엘즈워스는 결론 내린다.
상술한 연구에 따르면, 혐오와 공포의 차이점은 도덕적 혐오의 특성을 보여주고, 혐오와 공포의 유사점은 물질적 혐오의 특성을 나타낸다.
혐오와 분노의 관계에서도 이들의 차이점은 물질적 혐오의 특성을, 유사점은 도덕적 혐오의 특성을 보여준다.
우선, 물질적 혐오는 가치 평가나 도덕성, 작위성, 사회적 관계에 대한 평가가 개입되지 않으며 혐오 대상을 피하려는 수동적 행동 유형을 보인다는 점에서 공포와 유사하다.13)
13) 다음 연구는 혐오와 두려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혐오가 오염, 병원균 또는 죽음의 위험으로 규정될 때 두려움의 하위 범주로 이해될 수 있다.” Rozin, Haidt and McCauly, “Disgust,” 828.
반면, 이러한 유사점은 물질적 혐오와 분노의 차이점이 된다.
도덕적 혐오는 가치, 도덕성, 작위성 및 사회적 관계에 대한 평가가 개입되며 혐오 대상에 접근하여 처벌하거나 변화시키려는 행동 유형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분노와 유사하다. 따라서, 물질적 혐오는 도덕적 혐오와는 다른 감정 기제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이 두 혐오의 구분에 있어 중요한 점은 작위성 및 사회적 관계에 대한 평가와 대응 행동 유형이다. 혐오 유발자에게 작위성이 있다고 판단되고 관찰자가 직접 연루된 일은 도덕적 혐오를 유발하고 혐오 유발자를 처벌하거나 혐오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적극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반면, 작위성이 없고 관찰자가 직접 연루되지 않은 사건은 일차적 혐오를 유발하며 혐오 유발자에게서 멀어지거나 혐오 상황을 벗어나려는 수동적인 행동 유형을 보인다. 이러한 특성은 아래에서 살펴볼 이세벨과 바벨론에 관한 계시록의 혐오 심상과 수사를 이해하기 위해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는, 양자에 관한 계시록의 혐오 수사는 각기 일차 혐오와 이차 혐오의 특성을 보여주며 독자를 향한 수사적 목적도 그러한 특성과 연동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시각적 심상은 “복합적인 매체”(mixed media)라는 특성을 갖는다.14)
미첼(W. J. T. Mitchell)은 시각 매체(visual media)라는 용어를 해체하고 새로운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면서 시각 문화(visual culture)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시각 매체라고 간주되는 매체가 사실은 시각만이 아닌 다른 감각 영역을 포함한다고 지적하면서 시각 매체라는 말은 해당 매체가 시각 정보만을 담았다고 오해하도록 만든다고 설명한다.
무성영화는 소리가 배제된 시각만의 매체가 아니라 변사의 목소리와 음악 등이 복합되어 의미를 전한다.
회화는 시각 정보만을 담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시각 정보는 감상하는 사람에게 다른 감각적 경험을 일으킨다. 가령, 그림 속 인물이 입은 옷을 표현한 붓질의 시각 정보는 그림을 보는 사람이 옷감을 촉감으로 느끼는 경험으로 이어진다.
미첼의 표현을 빌리면, “순수하게 시각적인 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애초에 순수한 시각적 인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5)
미첼의 연구를 주목하면, 언어나 문자로 표현된 시각적 정보는 시각적 경험에 그치지 않는 복합적 감각 경험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매체의 복합적 감각 경험이라는 특성은 혐오 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구화(口話)나 문자로 표현된 혐오는 시각적으로 표현되었다 하더라도 다양한 감각의 복합 작용으로 경험된다.16)
14) W. J. T. Mitchell, “There Are No Visual Media,” Journal of Visual Culture 4 (2005), 257-66. 직접 인용은 257.
15) Mitchell, “There Are No Visual Media,” 264.
16) Jamie Gunderson, “The Super Foul Apostles: Sexual Impropriety, Disgust, and Stinky Affective Histories in 2 Cor. 11:2-4,” Biblical Interpretation 30 (2022), 578-81; 이상 목, “그들은 기생충, 개다 바울의 혐오 수사학 돌아보기,” 신약논단 30/2 (2023), 327-28.
어떠한 대상을 시각적으로 혐오스럽게 묘사한다면, 그러한 묘사는 독자의 다른 감각을 일깨운다. 독자는 혐오를 인지하면서 시각만이 아닌 청각, 후각, 촉 각, 미각 등의 감각적 혐오를 경험하게 된다. 지저분해 보이는 양말은 시각적 불결을 넘어서 역겨운 냄새와 더러운 양말을 만졌을 때 느낄 수 있는 촉감 등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감각 경험은 새 양말이나 세탁된 깨끗한 양말에 대한 감각 기억과 대조되어 혐오를 더욱 강화한다.
독자는 언어나 문자로 전달되는 정보를 해석하고 관련된 다른 감각 경험을 더하여 더욱 강화된 심상을 만든다.
건더슨(Jamie Gunderson)은 “이미지텍스트”(imagetext)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텍스트는 시각 정보와 언어 정보가 함께 작용하는 장이라는 점을 지적한다.17)
17) Gunderson, “The Super Foul Apostles,” 580.
독자의 해석 과정에 복합적 감각이 작용한다는 점은 혐오 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혐오 심상은 복합적 감각 경험을 일으키는데, 이러한 특성은 혐오 심상을 매우 효과적인 수사 도구가 되게 한다.
III. 바벨론: 분리를 위한 혐오 수사학
계시록 17장은 음녀에 대한 천사의 심판 예고로 시작된다.
천사는 장로 요한에게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당할 심판을 보여줄 것이라 말한다(1절).
계시록은 그 음녀의 이름을 “큰 바벨론”(5절)이라 기록하면서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5절)라고 규정한다.
지상의 지배자들은 바벨론과 함께 음행하였고 땅의 거주민들은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2절).
요한은 바벨론의 외양이 화려하며 휘황찬란하다고 기록한다.
그는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자주색과 붉은색 옷을 입었고18) 금, 보석, 진주로 장식했다.
18) 이상목, 요한계시록, 연세신학백주년기념 성경주석 56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9), 213.
하지만, 바벨론의 찬란함은 혐오스러운 물건 및 행위와 공존한다.
그가 들고 있는 금잔은 가증하고 음 행의 더러운 것들로 가득하다(4절). 바벨론의 혐오스러움은 실은 그의 등장부터 현저하다.
그가 타고 있는 붉은 짐승의 몸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3절)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혐오는 피에 취한 모습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6절) 취하였다. 음행으로 시작된 바벨론의 역겨움은 이제 피에 취한 모습으로 한 단계 상승한다.19)
1세기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성도들의 피는 순교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역겨움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무고한 피에 취한 바벨론의 모습은 역겨움을 일으켰을 것이다.
바벨론의 화려함과 역겨움의 대조는, 적어도 현대 독자에게는, 후자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계시록은 혐오를 강조하기 위해 화려함을 사용한다.
그러나 음녀 바벨론을 대하는 요한의 태도는 앞서 말한 대조 및 강조와 잘 들어맞지 않는다.
화려하고 값진 의복과 장신구로 치장한 바벨론은 성도들과 증인들의 피에 취하여 있지만,20) 그것을 본 요한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겼다”(ἐθαύμασα ἰδὼν αὐτὴν θαῦμα μέγα, 17:6).
19) 참고로, 성(性)과 체액은 일차 혐오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유발인자이다. Paul Rozin, “Psychology of Disgust,”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 Behavioral Sciences, ed. by James D. Wright (Oxford: Elsevier, 2015), 546-47.
20) 성도들의 피 흘림은 순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세기에는 아직 제국 단위의 조직적이며 전체적인 박해는 없었더라고 지역적인 박해가 산발하였다. “충성된 증인 안디바”의 죽음은 박해가 계시록의 현실이었음을 내비친다(계 3:13). 이상목, 요한계시록, 214. 그렇다면, 요한의 시각에서 성도들의 무고한 피에 취한 바벨 론은 더욱 혐오스럽게 비칠 것이다. 성도와 증인들의 피 자체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흘리게 하고 그것을 마시고 취한 바벨론의 모습이 기괴하고 혐오스럽다
이러한 반응은 바벨론을 음녀로 규정하고 혐오스러운 인물로 전하는 것을 주목하면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요한의 놀람은 부정적인 어조가 아니라 긍정적인 어조를 지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동사 싸우마제인(θαυμάζειν)은 신약성서 여러 곳에 긍정적 인 어조를 담은 표현으로 사용된다(가령, 막 9:33, 눅 7:9; 요 7:21; 행 7:31 등).
물론 그러한 용례가 유일한 것은 아니며 때로는 부정적인 어조를 나타내기도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수신자들이 그토록 빠르게 바울의 가르침을 떠나 다른 복음을 택한 것에 놀란다(θαυμάζω, 갈 1:6)고 말한다. 이러한 예는 문제의 그리스어 동사가 부정적인 놀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도 쓰였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바벨론에 대한 요한의 놀람은 긍정적인 어조를 띤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천사는 놀라는 요한을 향해 “왜 놀랍게 여기느냐?”(διὰ τί ἐθαύμασας, 17:7)라고 묻는데, 이 질문은 피에 취한 음녀를 보고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요한을 경계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요한의 놀람이 부정적인 성격을 띠었다면, 천사가 요한에게 놀라는 이유를 묻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또한, 천사는 그 질문에 이어 요한에게 음녀와 짐승의 정체를 알려주겠다고 말한다(17:7).
천사의 설명은 바벨론 짐승의 정체를 밝혀 그들이 혐오스러운 자들임을 요한에게 주지시킨다(17:8).
이로 미루어 보면, 요한은 아직 음녀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 외양이 주는 화려함과 호소력에 끌려들어 간 것으로 또는 혐오스러운 바벨론을 제대로 혐오스럽게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한의 놀람을 설명하는 데 피핀(Tina Pippin)의 연구가 도움이 된다.
피핀은 계시록의 바벨론과 짐승이 괴물로 등장한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의 기괴함은 욕망과 혼재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계시록은 한 등장인물 속에 두려움과 욕망이 공존함을 보여준다.
피핀의 표현을 빌리면, “계시록에서 기괴함과 성적 도착은 연결되어 있다. 두려움은 에로틱한 측면을 지닌다. 괴물들은 두려워해야 하며 동시에 욕망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21)
21) Tina Pippin, Apocalyptic Bodies: The Biblical End of the World in Text and Image (London: Routledge, 1999), 110-11. 직접 인용은 110-11.
이러한 피핀의 지적은 요한의 반응을 설 명하는 데 유용하다.
음녀 바벨론은 두려움의 대상이며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다. 요한의 놀람은 바벨론에 대한 혐오와 욕망이 혼재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피에 취한 바벨론 앞에서 놀라는 요한은 혐오와 분리의 반응이 아닌 욕망(과 동경)의 반응을 보인다.
이러한 점을 주목하면, 바벨론은 복합적 이미지를 가진 인물이다. 요한은 양가적 반응을 보이며 혼란스러운 상태이고, 천사는 혐오와 욕망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설정하여 요한을 혐오로 끌어들인다.22)
22) 다음을 참고하였다. Pippin, Death and Desire, 59.
천사의 경계 설정은 요한을 향한 질문과 바벨론의 종말 예고로 이루어진다.
우선, 천사의 질문은, 상술한 대로, 요한을 경계하여 그가 바벨론을 향한 양가적 반응에서 벗어나 강한 혐오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다음으로, 바벨론의 최후에 관한 천사의 예고는 요한이 양가적 반응에 다시 빠지지 않고 바벨론에 관한 혐오의 태도를 확고히 하도록 한다.
계시록은 바벨론의 현재가 매혹적일지 모르나 그 최후는 비참하고 혐오스러울 것이라 밝힌다.
음녀는 열 뿔과 짐승의 미움을 사서 망할 것인데, 그들은 음녀를 벌거벗기고 그 살을 먹고 남은 시신을 불태워 없앨 것이다(17:16). 짐승과 열 뿔은 현재 바벨론과 연합했지만, 장차 그를 성적으로 유린하고 죽여 그 살을 먹을 것이며 그 남은 것도 불사를 것이다.
이러한 최후 묘사는 음녀에 대한 요한과 계시록 독자의 혐오를 불러일으킨다. 바벨론의 최후 장면은 하나님과 대적하는 세력의 내부 분열을 보여준다.
곧, 성도들이나 증인들과는 대척점에 선 자들의 자기 파괴적 폭력을 나타낸다.
이러한 극한 행태는 요한이 속할 곳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한다. 바벨론에 관한 혐오 심상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바벨론에 관한 성적인 묘사는 그를 혐오스러운 인물로 인식하도록 하는 중요한 수사적 도구가 된다.
바벨론은 등장에부터 “큰 음녀”라고 명명되고 모 든 음녀와 가증한 것들의 어미로 규정된다.
바벨론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음행의 원천으로 지목된다.
계시록은 “땅의 임금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과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말한다.
바벨론은 단순히 음녀라는 명사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계시록은 그녀의 행실을 “음행하였다,”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등의 동사로 묘사한다.
이러한 표현은 “큰 음녀”라고 명명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혐오 심상을 일으킨다.
계시록의 독자나 청자는 더욱 구체적으로 바벨론의 성적 부정을 상상하게 되고 음행에 동반되는 복합적 감각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가령, 포도주에 취함은 술에 취해 성적으로 문란한 장면을 세밀하게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레코로만 문화의 심포지엄은 포도주를 마시고 성적인 유희를 즐기는 자리였음을 고려한다면,23) 음행, 술 취함, 손에 든 금잔과 그 속의 더러운 것 등은 성적인 문란을 복합적인 감각 경험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하여 더욱 높은 혐오 감정을 유발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음녀의 모습은 정적이고 조용한 장면이 아닌 욕망이 한껏 고조된 시끌벅적한 연회장에 있는 화려한 고급 매춘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계시록은 음녀의 신분을 이중적으로 묘사한다.
앞서 설명했듯, 바벨론의 차림과 행동은 고급 매춘부를 연상시키지만, 계시록은 동시에 바벨론을 매춘부 중에서도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자로 그린다.
음녀의 이마에 있는 문신(17:5)은 그가 매춘부 중에서도 가장 천한 신분인 문신이 새겨진 노예 매춘부임을 보여준다.24)
23) 다음을 참고하였다. Jason König, Saints and Symposiasts: The Literature of Food and the Symposium in Greco-Roman and Christian Culture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2012); Denis Smith, From Symposium to Eucharist: The Banquet in the Early Christian World (Minneapolis: Fortress, 2003), Kindle.
24) C. P. Jones, “Stigma: Tattooing and Branding in Graeco-Roman Antiquity,” The Journal of the Roman Studies 77 (1987), 151
계시록은 이러한 이중성을 통해 로마를 격하하려는 비판의식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25)
로마 황실의 인물이 성매매를 알선하거나 직접 매춘부로 나서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황후 메살리나가 대표적인 예이다.26)
25) Jennifer A. Glancy and Stephen D. Moore, “How Typical a Roman Prostitute Is Revelation’s ‘Great Whore’?” JBL 130 (2011), 551-69.
26) Glancy and Moore, “How Typical a Romans Prostitute,” 562-69. 유베날리우스는 메살리나를 meretrix augusta(매춘부 황후)로 기록한다(Satire 6.119; 116-135 참고). 풍자 시인의 기록은 성적으로 방종한 황실 인물이라는 평판이 널리 퍼졌음을 내비 친다. 이러한 평판은 계시록의 바벨론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바벨론의 이중적 모습, 곧 고급 매춘부와 하급 노예 매춘부의 모습을 동시에 보이는 바벨론의 이중성은 로마제국의 최상층에 속하였지만 동시에 성매매를 주도하고 직접 매춘부가 된 자들의 모습과 중첩된다.
신성을 모독하는 짐승에 올라탄 여자의 휘황찬란한 외모는 위엄이나 고귀함을 나타낸다기보다 혐오스러운 천박한 욕망을 나타낸다. 둘째, 바벨론의 최후는 욕망과 혐오의 교차점이 되어 일차 혐오를 강화한다.
물론, 바벨론의 음행 및 포도주와 피에 취함 등은 일차 혐오와 이차 혐오를 모두 일으키고 음행이라는 부정한 행위는 도덕적 혐오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짐승의 외모, 천박한 화려함, 술, 더러운 것, 피 등의 모티프들을 통해 구체화된다.
바벨론의 음행에 관한 계시록 보도의 초점은 그것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생리적인 일차 혐오의 강화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계시록은 “큰 음녀”를 묘사하면서 일차 혐오를 주된 수사 도구로 사용한다.
위의 특징은 바벨론의 최후 장면에서 한층 고조된다.
바벨론과 함께하였던 짐승과 열 개의 뿔은 돌연 바벨론을 미워하여 죽이고 벌거벗기고 그의 살을 먹고 시신을 불로 태워 없앤다.
바벨론의 최후 장면 묘사는 복합적 감각 경험을 일으킨다.
짐승과 열 뿔이 바벨론의 삶을 먹는 장면은 잘 가공되고 조리된 음식을 우아하게 앉아 먹는 만찬이 아니다.
피와 살이 튀고 짐승과 뿔들의 얼굴과 몸은 피로 범벅된, 음녀의 비명이 귀청을 때리고 살이 뜯기고 배가 찢어져 내장이 흘러나온, 살을 뜯어내 씹는 소리가 들리는 장면이다.
음녀의 최후는 누구의 동정이나 애도도 받지 못한다. 잔혹함과 기괴함, 그리고 역겨움만이 남는 최후, 혐오스러운 여자에게 걸맞은 최후일 뿐이다.
바벨론의 비참한 최후는 성적인 욕망의 자리가 되기도 한다.
짐승과 열 뿔은 음녀를 죽이고 벌거벗긴다. 혹자는 이 행동을 음녀의 살을 먹기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바벨론을 죽인 자들이 열 뿔과 짐승이라 불리는 점을 주목하면, 살을 먹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옷을 벗겼다는 설명은 어색하다.
짐승과 뿔들이 바벨론을 그 의복과 함께 물어뜯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하지만, 계시록은 그들이 음녀를 벌거벗겼다(ποιήσουσιν αὐτὴν καὶ γυμνήν)고 적는다(17:16).
생전에는 화려한 차림으로 욕망의 대상이 된 바벨론은 마지막엔 그 옷도 벗겨져 나신을 드러내고 욕망의 시선을 받는다.27)
음녀를 벌거벗긴 자들은 그의 몸을 성적으로 유린하고28) 그 살을 먹고 몸을 불태운다.
27) Pippin, Apocalyptic Bodies, 92-93.
28) 다음을 참고하였다. Stephen Young, “Revelation Naturalizes Sexual Violence and Readers Erase It,” Sex, Violence, and Early Christian Texts, ed. by C. Cobb and E. V. Eykel (Lanham: Lexington Books, 2022), Kindle.
바벨론의 매혹은 마지막 순간에도 욕망을 자극하는 힘을 발휘한다.
앞서, “큰 음녀”를 보고 매우 놀란 요한의 욕망이 천사의 질문을 통해 경계되었다.
이제, 바벨론의 최후는 그를 향한 욕망의 가능성을 요한과 독자에게서 모두 제거하려는 듯 보인다.
살해와 식육 장면의 기괴함과 혐오는 시신을 불태움이 주는 역겨움을 통해 강화된다.
시신을 태우는 불길과 연기, 속을 뒤집는 냄새와 주변에 늘어선 짐승과 열 뿔의 흉한 모습, 이 모두는 바벨론을 혐오하도록 유도하고 그 강도를 높여가도록 한다.
바벨론은 더 이상 매혹적인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계시록이 전하는 음녀의 최후, 곧 죽음과 화형은 멸시와 혐오의 표현 방식이다.
세네카의 기록에 따르면, 검투장에서 당당히 싸우지 못하고 죽음 앞에서 겁을 내는 검투사를 향해 관객들은 “그를 죽여라! 채찍질하라! 불태워라!”(“Occide, verbera, ure!,” Seneca, Epistles 7.5)라고 외쳤다.
검투사의 덕목에 미치지 못하는 패자를 향한 관중의 처벌 요구는 검투사다움을 잃어버린 자에 대한 멸시와 혐오를 나타낸다.
프리링고스(Christopher A. Frilingos)는 검투사에 대한 고대 사회의 양가적 태도를 설명하는데,29) 검투사는 “남자다움”(virtus)의 전형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천한 신분의 경멸스러운 대상이기도 하였다.
비겁하게 패한 검투사를 죽이고 불태우라는 요구는 “남자다움”을 배반한 자에 대한 멸시와 혐오를 의미한다.
비겁한 검투사에 대한 처벌 요구와 처벌 방법은 음녀의 최후를 연상시킨다.30)
29) Christopher A. Frilingos, Spectacles of Empire: Monsters, Martyrs, and the Book of Revelation (Philadelphia: Univ. of Pennsylvania Press, 2004), 32-35.
30) 무어는 바벨론을 남성성이 제거되고 여성성과 동물성(animality)으로 축소된 로마 로 해석한다. Stephen D. Moore, “Rapig Rome,” Untold Tales from the Book of Revelation, 125-54.
물론, 처벌의 방법이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이고 불태우는 것은 죽임을 당하는 자에게 가해지는 모멸과 혐오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점을 주목하면, 계시록은 바벨론을 그 최후 묘사를 통해서 새롭게 혐오 속에 가둔다.
계시록의 묘사처럼 바벨론이 혐오스러울 뿐이라면, 이제 계시록 독자가 취할 행동은 무엇인가?
계시록은 독자들이 바벨론을 떠나라고 권고한다.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ἐξ- έλθατε ὁ λαός μου ἐξ αὐτῆς, 18:4)라고 명령한다.
이러한 떠남은 혐오 대상을 회피하고 분리하려는 행동 유형과 같다.
특히, 음녀의 화려함에 매혹된 듯한 요한의 반응과 천사의 경계를 고려하면, 계시록이 바 벨론을 떠나라고 명하는 하늘의 음성을 기록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바벨론에 매혹된 자들의 실상은 그를 혐오하지 않고 떠나지 않은 자들이 피할 수 없는 타락상을 보여준다.
계시록은 그러한 범죄에 동참하지 않는 길은 ‘바벨론을 떠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바벨론의 현실과 미래를 그리는 계시록의 혐오 심상과 언어는 오염원에 대해 생리적 역겨움을 느끼고 회피의 행동 유형을 보이는 혐오 반응과 유사하다.
바벨론의 성적인 문란과 최후에 관한 계시록의 기록은 “복합적인 매체” 또는 “이미지텍스트”가 되어 독자에게 복합적인 감각 경험을 일으킨다.
바벨론의 천박한 화려함과 음행 그리고 참혹한 최후는 독자의 뇌리에서 시각, 후각, 청각, 미각, 촉각 경험으로 재구성되어 강한 혐오를 유발한다. 계시록은 바벨론의 작위성에 대한 도덕적 판단보다는 오염의 가능성에 대한 생리적 반응을 부각한다.
또한, 바벨론에 대한 반응도 혐오 대상에 접근하여 처벌 또는 변화시키려는 적극적 행동 유형이 아니라 오염으로부터 멀어지려는 회피의 행동 유형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을 주목하면, 바벨론에 관한 계시록의 혐오 수사는 이차 혐오가 아닌 일차 혐오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리와 엘즈워스가 주장하였듯이, 바벨론에 대한 혐오는 두려움의 감정과 유사한가? 위의 저자들은 이차 혐오와 두려움이 사람들이 행동하던 것을 멈추게 하고 감각적인 접촉을 방지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설명한다.31)
31) Lee and Ellsworth, “Maggots and Morals,” 277.
여기서 두려움은 공포에 질린 공황 상태를 의미한다기보다 오염될 가능성에 대한 걱정이 앞선 감정이다.
계시록의 바벨론 묘사는 일차 혐오 기제를 활용하여 바벨론에 대한 평가와 향후 행동 대응을 권고한다. 물론, 일차 혐오와 이차 혐오는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주된 혐오 기제를 살펴보면, 계시록의 바벨론 묘사는 일차 혐오를 주된 수사적 도구로 사용한다.
결별을 위한 계 시록의 수사는 일차 혐오의 기제를 통해 완성된다.
IV. 이세벨: 제거를 위한 혐오 수사학
계시록의 혐오 심상과 수사의 또 다른 특성을 보여주는 것은 이세벨 단락이다.
이세벨은 두아디라 교회의 여성 예언자로서 교회 내부의 서로 다른 신학적 견해와 신앙 윤리가 충돌하는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세벨이 문제가 된 예언자의 본명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합왕의 아내인 문제적 인물 이세벨과 비유하기 위해 두아디라 교회의 여성 예언자를 이세벨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이세벨은 이방 종교문화를 이스라엘에 들여온 인물로 야훼 신앙을 훼손한 이유로 비난받는다(왕상 18, 21 참고).
이와 유사하게,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도 교회의 신앙을 훼손한 인물로 기록된다. 계시록은 이세벨의 문제를 음행과 간음 등의 성적인 언어와 심상으로 표현하지만, 실상 그의 잘못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함”(계 2:20)이라고 적시한다. ‘우상 제물을 먹음’은 1세기 지중해 사회에서 사회종교적이며 사회정치적인 문제였다.
우선, 우상 제물을 둘러싼 문제의 이면에는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황제 제의가 있었다. 황제 제의는 제국의 동부에서 일찍이 발전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생전에 신으로 추앙받았던 것을 비롯해 헬레니즘 시대의 여러 왕이 신적인 존재로 높여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헬레니즘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집트 및 고대 근동 왕국들의 지배자들은 신적인 존재로 높여졌다.
이러한 전통은 로마제국에도 이어져, 특히 제국 동부에서 먼저 황제 제의가 발전하였다.
기원전 1세기 소아시아의 중앙과 남부를 지배하 던 아민타스 왕(King Amyntas, 39-25 BCE)이 전사한 후, 아우구스투스는 힘의 공백이 생긴 소아시아 중앙부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이 지역을 로마의 속주로 편입시킨다.32)
이후, 로마의 존재와 위상을 속주민에게 알리고 갈라디아가 로마 황제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을 선전하기 위하여 도시 계획, 황제의 상(像) 건립, 황제의 신전 건축, 동전 주조 등의 방법이 사용되었다.33)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라 불린 후 황제의 지위를 신격화의 지점까지 고양했다.
그는 시저의 양아들로서 시저의 신격화 이후 신의 아들로 선포되었다.
율리우스 시저의 시대에는 세 개의 도시에서 시저의 얼굴이 새겨진 주화가 발행되었으나,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엔 200개가 넘는 도시에서 그의 얼굴을 담은 주화가 발행되었다.34)
티베리우스 황제(재위 14-37 CE)는 데나리우스 주와 앞면에 “티베리우스 시저 아우구스투스, 신인 아우구스투스의 아들”(TI CAESAR DIVI AVG F AVGVSTVS)이라 선전되었다.35)
32) Ramsay MacMullen, Romanization in the Time of Augustus (New Haven: Yale Univ. Press, 2000), 1-29.
33) Richard A. Horsley, “Religion and Other Products of Empire,” JAAR 71 (2003), 30-31.
34) Christopher Howgego, Ancient History from Coins (London: Routledge, 1995), 84.
35) Gavin Drew, “‘Show Me the Money!,” Stimulus 17 (4, 2009), 42; Edgar Thurston, Coins: Catalogue No. 2. Roman, Indo-Portuguese, and Ceylon (Chennai: Government Museum, 1894), 10. Cf. Larry Kreitzer, “Apotheosis of the Roman Emperor,” Biblical Archaeologist 53 (1990), 211-17.
황제 제의의 발전에 따라, 소아시아 거주민들이 황제 제의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제의에 사용되었던 음식을 받을 기회가 증가하였을 것이다.
또한, 황제 제의에 참여하고 제물을 먹도록 강하게 권하는 사회 분위기가 강화되었을 것이다.
둘째, 그레코로만 사회문화에서 성행한 조합 활동은 우상 제물을 먹는 또 다른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조합은 종교 조합(cultic association) 이 아니어도, 특정 신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6)
조합 모임은 그러한 신에 대한 의례를 동반하였다. 가령, 전제(libation)는 조합들에서 흔한 사회종교적인 행위였다.
이것을 통해 조합은 수호신을 섬기거나 공로가 있는 조합원들의 명예를 높였다.37)
이러한 제의적 행위는 조합의 공동식사에 차려진 음식이 우상 제물로 인식되는 이유가 되었을 수 있다.
물론, 조합의 종교의식이 아니더라도 도축 과정에서 종교적인 요소가 개입되기도 하였다.38)
고린도와 로마의 교회들을 향한 바울의 권고는 우상 제물을 둘러싼 이견이 신앙공동체에서 상당한 쟁점이 되었음을 보여준다(고전 8장; 롬 14장 참고).39)
계시록은 두아디라 교회와 버가모 교회에 우상 제물로 인한 문제가 있었음을 전한다.
상술한 사회종교적, 사회정치적 환경을 주목하면,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은 그리스도인이 우상 제물을 먹을 수 있다는 신학적 견해를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로마제국의 현실과 제도에 수용적 태도를 보이며 참여한 인물로, 반면, 요한은 제국주의 이념과 주장을 배격하는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40)
요한과 이세벨의 대립은41) 선지자라 는 명칭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36) John S. Kloppenborg, Christ’s Associations: Connecting and Belonging in the Ancient City (New Haven: Yale Univ. Press, 2019), 25.
37) Kloppenborg, Christ’s Associations, 44, 205-206, 230.
38) Anthony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IGTC (Grand Rapids: Eerdmans, 2000), 617-18.
39) 이상목, “1세기 로마교회의 ‘다스리는 자’(로마서 12장 8절) 그리스-로마 사회의 자발적 조합 관점에서,” Canon&Culture 15 (2021), 194-206. 다음도 참고하라. Sang Mok Lee, “Spoude and Philotimia of Greco-Roman Associations and Paul’s Exhortations for the Roman Church,” 서양고대사연구 64 (2022), 155-88.
40) Warren Carter, “Accomodating ‘Jezebel’ and Withdrawing John: Negotiating Empire in Revelation Then and Now,” Interpretation (2009), 32-47.
41) Marshall은 ‘subalternity’의 문제로 요한과 이세벨의 출동을 해석한다. John W. Marshall, “Gender and Empire: Sexualized Violence in John’s Anti-Imperial Apocalypse,” A Feminist Companion to the Apocalypse of John, ed. by Amy-Jill Levine (New York: T&T Clark, 2009), 29.
계시록 곳곳에서 요한은 예언자임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난다(1:10; 10:11; 19:10; 22:7, 10, 18, 19 참고).
하지만, 이세벨은 “자칭 선지자”(ἡ λέγουσα ἑαυτὴν προφῆτιν, 2:20)로 폄훼된다.
이러한 차이점을 주목하면, 요한과 이세벨은 예언자의 정체성과 메시지를 둘러싸고 대립하였던 정황을 재구성할 수 있다.
이세벨은 일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선지자로 여겨졌고 두아디라 교회에서 영향력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세벨, “간음하는 자들,” 그리고 이세벨의 “자녀들”에 대한 강한 심판 선언은 상당했던 이세벨의 영향력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계시록은 이세벨의 악행을 성적인 심상과 언어를 사용하여 묘사한다.
이러한 특징은 두아디라 교회와 같은 문제를 겪던 버가모 교회에 대한 메시지와 비교하면 확연하다.
우선,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는 교회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가르침을 “발람의 교훈”(2:14)이라고 표현하면서 우상 제물을 먹는 행동을 “행음하기”(πορνεῦσαι, 2:14) 라 규정한다.
이교 문화의 유입을 성적인 모티프로, 이교를 받아들이는 자들을 음행하는 자들로 책망하는 것은 현저한 구약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은 계시록으로 이어져 ‘우상 제물을 먹음’은 “행음”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는 우상 제물 문제를 다루면서 그 이상의 성적인 심상과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둘째, 두아디라 교회를 위한 메시지는 버가모 교회의 경우보다 더욱 현저한 성적 심상과 언어를 사용하여 우상 제물의 문제를 다룬다.
계시록은 이세벨의 문제를 우상 제물과 행음이라고 질타한(2:20) 후에도 거듭 “그의 음행”(τῆς πορνείας αὐτῆς, 2:21), “침상”(κλίνην, 2:22), “그와 간음하는 자들”(τοὺς μοιχεύοντας μετʼ αὐτῆς, 2:22), “그의 자녀”(τὰ τέκνα αὐτῆς, 2:23) 등의 표현으로 성적인 심상을 강화한다.42)
42) “그의 자녀”는 직접적인 성적 표현은 아니지만, 음행과 간음, 침상 등으로 이어지는 성적 심상은 부정한 교합의 결과인 자녀라는 의미 또는 행음하는 여자의 자녀 라는 뜻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이세벨에 관한 부정적 평가의 주된 표현 방법이 성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특히, 버가모 교회의 문제적 인물은 “발람”이라는 남성으로 지목되지만,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이세벨”이라는 여성으로 지목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양 교회에서 같은 문제의 주도자로 지목된 인물이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고, 후자에 대한 비판과 처벌만 성적인 심상과 언어를 사용해 구체화한다는 점은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버가모 교회의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의 범죄는 “행음”이라고 규정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심판에는 성적인 심상과 혐오가 사용되지 않는다(계 2:16 참고).
이세벨에 대한 성적 혐오 사용은 그에 대한 처벌 선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리스도는 이세벨에 대해서 “보라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것이다”(ἰδοὺ βάλλω αὐτὴν εἰς κλίνην, 2:22; 개역개정)라고 말한다.43) 클리네(κλίνη)는 고대에서 다양한 뜻을 내포하였다.
그것은 잠자리, 음식을 먹는 소파, 성교의 자리, 질병이나 죽음의 자리 등을 의미했다.44)
본 연구와 관련된 해석을 살펴보면, 우선, 이세벨이 던져진 클리네를 병석(“sickbed”) 또는 고통의 침상(“bed of suffering”)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45)
찰스(R. H. Charles)는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것이다”를 히브리어에서 온 표현으로 보고 출애굽기 21:18을 예로 들면서 ‘침상에 던짐’은 ‘병에 걸림’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46)
43) 이 구절에 관한 다양한 해석은 다음을 참고하라. Chantel R. Heister, “Jezebel’s Punishment in Revelation 2: Research and Trends,” CBR 20 (2022), 186-99.
44) Greg Carey, Elusive Apocalypse: Reading Authority in the Revelation of John (Macon, GA: Mercer Univ. Press), 157.
45) 참고로, NASB는 “a bed of sickness”로, CJB는 “a sickbed”로, NJB는 “a bed of pain” 등으로 옮긴다. 한국어 번역은 “침상”(개역개정), “병상”(새번역, 새한글성경), “고 통의 침상”(공동번역 개정판) 등이다.
46) R. H. Charles, The Revelation of St. John, Vol. 1, ICC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20), 71.
그는 이러한 관용구의 예로 ἔπεσεν ἐπὶ τὴν κοίτην(1 Macc. 1:5; Jdt. 8:3)을 추가로 언급한다.
유사한 설명은 이후 많은 주석에서 발견되는데, 가령 언(David Aune) 은 문제의 헬라어 표현이 “병상에 던짐”을 뜻하는 히브리어 관용구라고 설명한다.47)
그는 고대 유대인의 부적을 예로 든다. 해당 부적은 “그들이 훔친 장소에서 살아가는 한 질병으로 침상에 떨어지기를” 빈다.48) 퀘스터(Craig R. Koester)는 ‘침상에 던짐’이 하나님의 심판과의 균형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49)
그는 침상이 죽음의 자리로 등장하는 예(창 49:33; 대하 16:14)를 지적하면서, 종종 고대의 장례 기념물에 죽은 자가 연회를 즐기는듯한 모습으로 침상에 기대에 누운 모습이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세벨의 침상을 죽음과 관련하여 해석할 수 있다.
다음으로, 본문의 클리네가 연회의 소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성적인 함의를 지닌 표현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50)
이러한 견해는 다수를 차지하는 ‘병석’ 또는 ‘고통의 침상’이라는 해석이 문맥상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에마뉴엘(Sarah Emanuel)은 클리네가 질병의 문맥에서 사용될 때 병석이나 고통의 침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면서 계시록 2:22의 클리네는 성적인 학대와 성적인 모욕이라는 쟁점을 일으킨다고 설명한다.51)
47) David Aune, Revelation 1-5, WBC 52A (Grand Rapids: Zondervan Academic, 2017), 205. 다음도 보라. Robert H. Mounce, The Book of Revelation,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97), Kindle.
48) Aune, Revelation 1-5, 205.
49) Craig R. Koester, Revelation: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New Haven: Yale Univ. Press), 299.
50) 가령, Colleen Conway, Behold the Man: Jesus and Greco-Roman Masculinity (Oxford: Oxford Univ. Press, 2008), 162. 그 외의 연구는 이어지는 논의를 보라.
51) Sarah Emanuel, Humor, Resisteance, and Jewish Cultural Persistence in the Book of Revelation: Roasting Rome (New York: Cambridge Univ. Press, 2019), 109-10, 110 n52.
이러한 에마뉴엘의 지적은 타당하다.
가령, 출애굽기 21:18은 개인 간의 다툼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이나 주먹으로 때려 상처를 입힌 상황에서 침대에 눕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문맥은 침대를 병석으로 볼 수 있게 한다.
마카베오1서 1:5은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에 관해 기록하면서 그가 “이후에 침상에 누웠고 자기가 죽을 것을 알았다”고 적는다.
여기서 ‘침상’ 은 알렉산더 대왕의 요절이라는 문맥에서 죽음의 자리를 의미한다.
반면, 이세벨 단락의 문맥이 음행과 간음이라는 점은 클리네를 ‘병석’ 으로 보기 어렵게 한다.
영(Stephen Young)은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면서 ‘침상에 던짐’이 이세벨의 성적인 죄에 합당한 보응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저자는 ‘이세벨을 침상에 던짐’을 그의 음행과 간음을 성적 학대로 갚아주어 벌함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52)
이세벨은 자신의 행위를 돌이키지 않았으며 이는 성적 학대라는 보응으로 처벌된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처벌은 행위대로 갚아준다는 계시록의 신학과도 부합한다(2:23; 18:6; 20:13 참고).53)
52) Young, “Revelation Naturalizes Sexual Violence and Readers Erase It,” 360-61.
53) 혹자는 ‘행위대로 갚아 줌’을 들어 이세벨과 그의 자녀들에 대한 처벌이 불균형적 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후자는 죽임을 당하지만, 전자는 ‘침상에 던져짐’으로 끝나 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은 아래에서 다루는 전시 강간이 라는 역사적 경험과 그것을 간직한 문화적 스크립트의 관점에서 보면 타당하지 않다. 이세벨의 자녀를 죽임은 핵심 대적자인 이세벨을 향한 처벌의 일환이다. 이세벨은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추락하는 어미가 되기 때문이다. 아래에 이어지 는 논의를 보라
영은 이세벨을 향한 그리스도의 성적 처벌을 그레코로만 문헌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전시 강간(martial rape)으로 설명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계시록 2:22-23에서 이세벨에 대한 하나님의 아들의 폭력적 처벌은 고대 청중에게는 전시 강간의 문화적 스크립트를 연상시켰을 것이다.
이것은 요한이 예수를 정복자인 신적 전사들 사이에 위치시 키는 방법을 고려하면 그러하다.”54)
신적 전사인 예수의 활동은 전쟁과 정복이며 대적자에 대한 처벌은 패전 그룹에 대한 보복과 멸절이다.
이러한 계시록의 비전은 1세기 소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시 강간의 문화적 스크립트를 일깨웠을 것이다.
이세벨에 대한 그리스도의 처벌은 그러한 역사 문화적 환경과 분리되기 어렵다. 가카(Kathy L. Gaca)는 전시에 패자를 유린하고 황폐하게 하는 방법으로 살해와 성적인 학대가 사용되었음을 광범위한 고대 사료와 현대의 예를 통해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55)
그의 연구에 따르면, 전쟁의 승자는 패자가 다시 반항할 수 없도록 여러 방법을 사용하여 패자를 무력화한다.
가령,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나이의 남성을 모두 죽이거나 나아가 모든 남성을 살해하는 방법이다. 패자에 대한 잔혹한 처벌은 여성에게도 해당된다.
패배한 적의 여성을 강간하고 죽이거나 성적인 노예로 삼는 방법은 흔하게 발견된다.
나아가, 패자의 여성을 강간하여 승자의 후손을 낳게 함으로써 패자의 대를 끊는 방법은 패자가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하면서 동시에 패한 집단의 여성을 모멸하고 성적으로 복속시키는 방법이다.56)
계시록은 예수를 신적인 전사로 묘사하면서 정복자의 모습으로 그리는데, 바로 이세벨 단락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적인 이세벨을 이기고 패자를 성적으로 처벌하고 그 후손을 절멸시키는 자로 묘사된다.57)
54) Young, “Revelation Naturalizes Sexual Violence and Readers Erase It,” 363.
55) Kathy L. Gaca, “The Martial Rape of Girls and Women in Antiquity and Modernity,” The Oxford Handbook of Gender and Conflict, ed. by Nahla Valji et al. (Oxford: Oxford Univ. Press, 2018), 305-15.
56) 가카는 20세기 말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참상을 현대 전시 강간의 예로 들기도 한다. Gaca, “The Martial Rape of Girls and Women in Antiquity and Modernity,” 311.
57) Young, “Revelation Naturalizes Sexual Violence and Readers Erase It,” 364.
상술한 전시 강간의 문제 이외에도 이세벨을 향한 처벌을 성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계시록에서 발견된다.
계시록은 이세벨과 음녀 바벨론을 병행하는 존재로 기록한다.
양자는 각각 교회 내부의 적 그리고 외부의 적으로 등장하고 이들에 대한 처벌은 모두 성적인 학대를 포함한다.
바벨론은 등장부터 “큰 음녀”로 규정되지만, 이세벨은 ‘음녀’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계시록은 이세벨의 행동을 음행, 간음 등으로 표현하고 그가 음행을 회개하지 않았다고 명시하여 이세벨이 음녀임을 드러낸다.58) 음녀라는 상태는 이세벨과 바벨론에게 그것에 상응하는 성적인 처벌을 정당화한다.
계시록은 보복법(lex talionis)의 원칙에 충실한 처벌을 선언한다.
앞서 살핀 바벨론의 최후는 ‘벌거벗김’이라는 표현으로 그리고 이세벨은 ‘침상에 던짐’으로 그들을 향한 처벌이 성적 유린이라는 점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이세벨을 성적으로 처벌한다는 해석은 현대 독자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계시록이 기록하는 폭력적인 보응과 처벌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더라도 패배자를 성적으로 처벌하는 그리스도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독법일 것이다.
이세벨의 처벌을 강간으로 해석하는 무어(Stephen D. Moore)도 현대 독자의 부정적 반응을 예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아마도 [현대 독자에게] 강간은 너무 나간 것으로서 계시록의 주인공에게 돌릴 수 없는 형태의 폭력으로 보일 것이다.”59)
그렇다면, 과연 그러한 해석은 근거 없이 너무 나간 것일까? 구약의 여러 예는 이세벨을 향한 처벌을 성적으로 해석함이 “너무 나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구약의 예언자 전통은 예루살렘과 주변 이방 도시들에 대한 야훼의 징계를 성적 학대로 묘사한다.60)
58) Frilingos도 이러한 점을 지적한다. Frilingos, Spectacles of Empire, 22.
59) Stephen D. Moore, Revelation: Book of Torment, Book of Bliss (London: T&T Clark, 2021), 66.
60) 다음을 참고하였다. Susanne Scholz, Sacred Witness: Rape in the Hebrew Bible (Minneapolis: Fortress, 2010), 특히 182-201.
예루살렘의 예를 보면, 예레미야 13:20-27은 예루살렘에 닥칠 침공을 예언하며 부정한 예루살렘에 대한 야훼의 징벌을 성적인 공격으로 묘사한다.
특히, 22절과 26절은 “…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 …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라고 예언한다.
이 예언은 예루살렘을 여성으로 보고 그의 범죄를 성적인 부정함이라 규정한 후 그에 대한 보응을 성적 학대와 강간으로 표현한다.61)
이사야 3:16-17은 예루살렘 여성 거주민들의 범죄를 성적인 심상으로 묘사한 후 야훼가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닦지가 생기게 하시며 … 그들의 하체가 드러나게 하시리라”로 선언한다.
에스겔은 16:32, 35-37, 39, 40 등은 야훼와 예루살렘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설정하고 예루살렘의 범죄를 성적인 문란으로 규정한 후 그에 대한 보응을 벌거벗김, 성적 유린, 살해로 표현한다.62)
이러한 구약의 예를 살피면, 계시록이 이세벨을 향한 그리스도의 처벌을 성적인 학대로 해석함은 무리하지 않다.
오히려 계시록은 예언 전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혹자는 상술한 예언이 말하는 성적 처벌의 직접 행위자는 하나님이 아니며 그것은 예루살렘을 침공한 이방이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역사의 전개를 통해 그것이 예루살렘을 향한 징계라고 선언할 뿐이며 그 징계의 행위자가 아니라는 견해이다. 하지만, 그러한 반론은 예레미야의 동사 용법을 살펴보면 유지되기 어렵다.
숄츠(Susanne Schloz)가 지적한 대로,63) 예레미야 13:22 동사는 수동태로 사용되어 그 행위자가 분명하지 않지만, 26절은 능동태 동사를 사용하여 그 행위자를 분명히 한다.
61) Graigie는 많은 연구자가 치마와 발꿈치를 예루살렘의 강간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 로 본다고 설명한다. Peter G. Graigie, Jeremiah 1-25 (WBC 26; Grand Rapids: Zondervan Academic, 2016), 193.
62) 에스겔 23장도 보라.
63) Scholz, Sacred Witness, 183-84.
곧, 예레미야 13:26(“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의 주동사는 능동형으로서 하나님이 성적 침해자임을 명확하게 표현한다.64)
마이어(Christl M. Maier)의 표현을 빌리면, 예루살렘을 향한 성적 공격에 대해 “야훼는 자신을 행위자로 드러낸다.”65)
이러한 해석을 주목하면, 야훼를 예루살렘을 향한 성적인 공격의 행위자로부터 분리하려는 해석은 유지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계시록 2장 이세벨 단락의 그리스도는 구약 예언서가 말하는 처벌 행위자 하나님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로열티(Robert M. Royalty, Jr)는 ‘침상에 던짐’을 성적인 처벌로 해석함에 반대하며 계시록 2:22을 심포지엄 모티프로 읽는다.
그는 NRSV 의 번역(“a bed”)을 예로 들면서 이것은 성적인 메타포가 아니라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익숙한 심포지엄 모티프라고 설명한다.
클리네가 식사를 위한 소파를 의미했기 때문이며, 나아가 성적인 부적절함은 심포지엄에 대해 잘 알려진 바였고 심포지엄에 대한 비판점이기 때문이라고 로열티는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점들을 주목하여 “이세벨에 대한 요한의 공격은 이 대적자[이세벨]를 그레코로만 심포지엄 전통과 연결하며 그리고 바벨론과 이방 나라들의 악마적 심포지엄과 연결한다”라고 주장한다.66)
64) 다음에 인용된 여러 연구자의 해석을 참고하라. Scholz, Sacred Witness, 184-87.
65) Christl M. Maier, Daughter Zion, Mother Zion: Gender, Space, and the Sacred in Ancient Israel (Minneapolis: Fortress, 2008), 108. 다음의 주석도 같은 해석을 제기한 다. William McKane, Jeremiah 1-25: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Edinburgh: T&T Clark, 1986), 306, 312.
66) Robert M. Royalty, Jr, “Demonic Symposia in the Apocalypse of John,” JSNT 38 (2016), 503-25. 직접 인용은 520.
하지만, 심포지엄 모티프를 유지하더라도 여전히 ‘이세벨을 침상에 던짐’을 성적 학대로 해석할 수 있다.
‘침상에 던 짐’을 성적 처벌로 보지 않고 클리네를 성적 문란의 함의가 다분한 공동식사의 소파로만 이해한다면, 계시록 2:20은 이세벨이 범한 성적 부정의 현장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침상에 던짐’이 어떻게 이세벨에 대한 심판과 처벌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성적 타락의 자리인 심포지엄의 소파는 행위대로 갚아주는 처벌의 자리이다.
계시록은 이세벨의 신학적 견해를 성적인 심상과 언어로 표현하여 독자의 혐오를 일으킨다.
이세벨의 행위는 반복하여 성적인 심상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이세벨을 혐오스러운 자로 묘사하여 독자도 이세벨을 혐오하도록 이끈다.
이세벨에 대한 처벌을 주목하면, 그에 대한 혐오는 분노와 유사한 이차 혐오로 보인다.
이세벨의 음행과 간음에 대한 계시록의 태도는 일차 혐오와 이차 혐오가 혼재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세벨을 침상에 던짐’과 ‘그의 자녀를 죽임’은 혐오의 원인에 접근하여 적극적으로 제거하려는 행동이다. 이는 혐오의 원인을 제거하거나 혐오 상황을 바꾸려는 이차 혐오의 행동 유형이다.
이세벨과 그의 영향을 제거하려는 계시록의 의도는 이세벨이 교회 내부의 적이라는 점과 깊이 관련된다.
1세기 소아시아 교회에서 이세벨을 둘러싼 쟁점은 교회 내부의 문제였다.
계시록의 시각에서 “자칭 선지자”(계 2:20)는 교회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문제적 인물이었다.
이러한 점은 바벨론의 경우와 매우 다르다. 바벨론 단락은 로마라는 교회 외부의 적을 향한 혐오를 보여주지만, 이세벨 단락은 교회 내부의 적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바벨론에 대해서 요한과 계시록의 독자인 1 세기 소아시아 교회는 방관자 또는 목격자의 시각을 견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이세벨에 대해서는 교회의 내부 문제이기에 제삼자의 관점을 유지하기 어렵다. 요한의 시점에서, 이세벨의 해악은 현재진행형이고 교회 내부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배교로 이끄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리와 엘즈워스의 설문 연구에 따르면, 일차적 혐오에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평가가 개입되지 않지만, 이차적 혐오에는 그러한 평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67)
67) 리와 엘즈워스는 혐오가 직접적인 문제일수록 더 강한 혐오를, 특히 도덕적 혐오 를 유발한다고 설명한다. 각주 12를 보라
이를 본 연구에 적용하면, 강한 적이면서 동시에 교회 내에 있는 이세벨은 계시록(또는 장로 요한 및 일차 독자)의 사회적 관계 속에, 그것도 무척 가깝고 복잡한 관계 속에 자리한 매우 위험한 인물이다.
이러한 사회 관계적 성격은 계시록이 이세벨에 대한 비판과 처벌의 수위를 높이는 이유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세벨은 교회 내부의 오염원이기에 그의 문제는 회피 또는 격리 정도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세벨에 대한 처벌은 성적인 공격 외에도 ‘그의 자녀를 죽임’이라는 극단적 형태를 띤다.
이세벨은 그리스도의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처벌을 받지만, 바벨론은 그렇지 않다. 바벨론의 멸망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지만 바벨론을 실제로 모욕하고 멸망시키는 자는 짐승과 열 뿔이다.
다시 말해, 바벨론의 최후는 자기 진영의 내부 분열의 결과이다.
반면, 이세벨을 향한 처벌이 보여주는 적극성과 직접성은 그에 대한 혐오 감정이 바벨론의 경우와 달랐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세벨 단락 이면에는 앞서 설명한 “전시 강간”이나 전시 강간의 문화적 스크립트가 자리한다.
1세기 소아시아 독자들에게 그러한 문화적 스크립트는 친숙한 것이었고 그에 따라 계시록을 이해하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하지 않다.
그들은 교회 안의 위험한 적인 이세벨은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받았을 뿐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계시록은 독자들을 혐오로 이끌어 이세벨과 그의 자녀에 대한 분노 반응을 유도한다.
그들의 분노는 이세벨과 그의 자녀에 대 한 학대와 죽임을 악에 대한 정당한 징계라고 판단하고 그러한 처벌을 지지하게 한다.
계시록은 이세벨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물론, 이 가능성은 이세벨과 그 자녀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이세벨은 회개의 기회를 거부했고, 그의 자녀는 그러한 기회도 없이 죽임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세벨과 함께 간음한 자들에게는 아직 회개의 기회가 있다.
그들에 대한 처벌은 회개를 조건으로 가변적이다. 만일 그들이 회개한다면 “큰 환란”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22절 참고). 이러한 회개의 가능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모든 책임을 이세벨에게 돌리려는 의도 때문인가? ‘간음한 자들’은 이세벨의 가르침에 유혹된 잘못은 있지만 이세벨과 같은 수준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 계시록의 관점인 듯하다.
계시록은 ‘간음하는 자들’에게는 능동적인 책임이 아닌 수동적인 책임을 묻는다.
일련의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전적으로 이세벨에게 있다.
계시록은 이세벨과 ‘간음하는 자들’을 구분한다.
또한, 그들은 ‘이세벨의 자녀’와도 구별한다.
이세벨의 ‘디엔에이(DNA)’를 지닌 자녀들은 죽어야만 한다. 계시록은 ‘간음하는 자들’이 이세벨을 포기하기를 권유한다.
계시록이 보이는 이러한 태도 차이는 요한과 이세벨의 경쟁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요한은 자기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회개의 가능성을 주목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의 목적은 음행하는 자들의 전면적 제거가 아니라 이세벨에 동조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전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교정과 수용의 가능성이 중요하다.
혐오의 정점에는 이세벨이 있고 그를 제거함이 관건이다. 그의 자녀는 어디까지나 이세벨에 딸린 부수적인 문제이며 그들을 죽임은 바로 이세벨을 향한 처벌의 일부이다.68)
68) 각주 53을 보라.
V. 나가는 말
계시록의 이세벨 단락과 바벨론 단락은 각각 교회 내부와 외부를 향한 혐오 수사를 보여준다.
우선, 계시록은 이세벨을 “자칭 선지자” 라고 폄훼하면서 우상 제물을 먹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이끈 그의 활동을 “음행”이라 규정한다. 계시록은 ‘음녀’ 이세벨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받을 것이라 예언한다.
이세벨을 향한 성적 혐오와 처벌은 분노의 감정과 혐오의 감정이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교회 내부를 타락으로 이끄는 자에 대한 혐오는 그 행위자의 작위성과 책임을 묻고 사회적 관계를 주목하기 때문에 분노와 유사한 이차(도덕적) 혐오의 특징을 보인다.
계시록은 혐오의 원인에 접근하여 제거하는 그리스도의 처벌을 정당한 심판으로 기록한다.
계시록은 일차 독자들과 이세벨에 대한 이차 혐오를 공유하기를 도모한다.
또한, 이세벨을 향한 그리스도의 성적 처벌을 지지하도록 독자들을 설득한다.
하지만, “이세벨과 함께 간음한 자들”은 아직 회개의 기회가 있다. 계시록은 문제의 핵심이 되는 이세벨을 혐오의 정점에 두고 “그의 자녀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라 예언하면서 ‘간음한 자들’은 교회에 수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계시록은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이세벨을 제거하고 요한의 지도력을 확장하려 한다.
이는 이세벨의 자녀의 제거 및 ‘간음한 자들’의 전향을 통해 실현된다.
둘째, 바벨론 단락은 로마에 대한 계시록의 혐오를 보여준다. 계시록은 바벨론을 “큰 음녀”라고 규정하고 그의 복색과 외모 묘사를 통해 성적인 혐오와 멸시를 묘사한다.
바벨론에 대한 성적 혐오는 그의 최후 장면에서도 이어진다.
바벨론의 성적 타락과 최후는 독자에게 복합적인 감각 경험을 야기한다.
계시록은 바벨론의 작위성에 대한 도덕적 판단보다는 오염의 가능성에 대한 생리적 판단을 부각한다.
또한, 바벨론에 대한 반응도 혐오 대상에 접근하여 처벌 또는 변화시키려는 적극적 행동 유형이 아니라 오염으로부터 멀어지려는 회피의 행동 유형을 보여준다.
이러한 혐오 감정은 두려움의 감정과 유사하다. 계시록은 일차 혐오의 기제를 사용하여 바벨론 대한 평가와 향후 행동 대응을 권고한다.
바벨론의 멸망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지만, 그 행위자는 바벨론과 연합했던 ‘그들’이다.
요한과 일차 독자의 시각은 방관자 또는 목격자의 그것이 된다.
바벨론은 그들의 사회관계에서 이세벨과 같이 가깝거나 내부의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계시록은 1세기 소아시아 교회에 있었던 중대한 신학적 이견과 그에 따른 신앙윤리의 차이를 성적인 코드를 사용하여 독자가 혐오하도록 이끈다.
그러한 성적 혐오는 위험한 여성이라는 인식을 기저에 깔고 있다.
여성은 유혹하는 자, 성적인 타락으로 이끄는 자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이러한 해석은 계시록이 여성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논박할 수 없다.
계시록 12장의 해산한 여자 및 19장과 21장에 등장하는 어린 양의 아내인 신부는 위험한 여성의 유혹이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기 어렵다.
계시록 14장 4절은 “이 사람들이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라고 말하는데, 이는 여자가 순결을 더럽히는 원인이 된다는 생각, 곧 위험한 여성이라는 인식을 드러낸다.
이러한 인식은 여성에 대한 혐오를 사회문화적 코드로 공유했던 계시록의 사회문화적 한계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성찰 없는 계시록 읽기가 현대의 독자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성적 코드와 폭력에 기반한 혐오 수사는 저자가 의도한 목적에만 봉사하지 않을 것이다.
혐오의 판단이 자칫 자의적인 것이 된다면, 그 파괴적 결과는 교회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
계시록의 혐오 언어와 심상은 묵시문학의 세계관과 관련된다.
선과 악의 극명한 대립과 하나님의 신원에 대한 기대는 이분법적 세계관과 연동된다.
이는 혐오의 심상으로 ‘나와 다른 자’를 이해하여 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한다.
이러한 계시록의 특성은 혐오 수사가 지닌 문제점을 간파하기 어렵게 한다.
이와 같은 문제점은 현대 교회에서도 발견되는데, 가령, 교회를 향한 비판은, 그것이 정당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혐오스러운 악한 세상이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며 선을 이기려는 악의 발흥으로 인식되곤 한다.
이러한 현상은 계시록의 혐오 언어와 심상을 충분한 성찰 없이 수용하여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준거로 사용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계시록의 교회와 현재 한국 교회에 대한 비교와 성찰은 각자의 사회문화적 위치 및 사회적 역할 그리고 쟁점에 대한 다면적 평가를 동반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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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Disgust Imagery and Rhetoric of Disgust in John’s Revelation Focusing on Jezebel and Babylon
Lee, Sang Mok (Pyeongtaek University, Associate Professor)
This study examines the language and imagery of Revelation through the lens of disgust rhetoric, illuminating the specific type of disgust employed to achieve its rhetorical objectives.Revelation clearly articulates standards of sexual distaste directed at adversaries both within and outside the early church.The verses concerning Babylon and Jezebel effectively illustrate these characteristics. The image of Babylon, representing the Roman Empire, is that of a vile, sexually immoral prostitute symbolizing Rome’s persecution of the church. The descriptions of Babylon’s ultimate fate in Revelation intensify the reader’s sense of disgust. Revelation employs primary disgust mechanisms to compel its audience to abandon Babylon. Jezebel is portrayed as sexually corrupt, an evil adversary of the church in Thyatira who led astray wayward believers. Revelation’s foresight regarding her actions exemplifies the secondary disgust mechanism. According to the text, Jezebel is the central issue, and her removal is the solution. Ultimately, Jezebel’s retribution includes the death of her children. Such hate speech and imagery in Revelation are linked to the book’s unwavering commitment to oppose both internal and external oppression in its mission to defend the faith and the church.
Keywords rhetoric of disgust, imagery of disgust, the Revelation of John, Jezebel, Babylon
신약논단 제31권 제3호
투고일: 2024. 7. 30. 최종심사일: 2024. 8. 25. 게재확정일: 2024.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