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턴의 『실낙원』과 이상의 『실낙원』 비교 연구: 칼 바르트의 신학적 관점으로/오주리.가톨릭관동大
Ⅰ. 서론
1. 문제 제기 및 연구사 검토
한국현대문학사에서 낙원상실의식이 직접 드러난 경우는 이상(李箱)의실낙원(失樂園)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상의 실낙원은 밀턴(John Milton)의실낙원(Paradise Lost)에서 제목이 차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Paradise Lost라는영문제목을 ‘失樂園’으로 번역한 것은 일본과 중국의 선례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시인이자 영문학자인 시게노 텐라이(繁野天来)가 최초로밀턴의작품을 失樂園物語(東京: 富山房)로 소개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영문학자 우치무라 타츠사부로(内村達三郎)가 失樂園(東京: 有樂社)이란제목으로일본어 번역본을 출간하였다.
주해와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1920~30년대 시게노텐라이가 Paradise Lost With introduction and notes by Masaru Shigeno(Tokyo: Kenkyusha, 1926)라는 제목으로 밀턴의 실낙원에 주해를 달고, <「失楽園」 研究>(東京 : 研究社)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인 것으로 확인된다.
중국의 경우, 중국학 교수인 푸동화(傅东华)가 失乐园(上海: 商务印书馆) 으로 밀턴의 작품을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그렇지만, 중국에는 현재밀턴의 Paradise Lost 1677년 초판본의 사본이 전래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밀턴의작품이 중국에 유입된 것은 창작된 것과 거의 동시대인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도 중국에서는 ‘낙원’이라는 단어가 오래전부터 폭넓게 쓰여, 문헌상으로 옌루위완(嚴如 熤)의 樂園文鈔에서나 푸순칭(濮舜卿)의 人间的乐园(上海: 商务印书馆) 등에서도 발견된다.
요컨대, 문헌상으로 일본과 중국에서 밀턴의 실낙원이 처음 번역된것은1900년대 초이며, 폭넓게 출간되고 읽힌 것은 1920~30년대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경우, 박종화(朴鐘和)의 <抗議 갓지 안흔 抗議者에게> (개벽 제35호, 1923.05.01)에 밀턴의 실낙원이 언급된다.
박영희(朴英熙)가 편찬한《開闢創刊四周年記念號附錄: 重要術語辭典》(개벽 제49호, 1924.07.01)에 밀턴의 실낙원이 중요한 정전(正典)으로서 소략하게 소개된다.
이종수(李鍾洙)의<「밀톤」과 失樂園 「사탄」의 性格 「밀톤」의 人生觀> (동아일보, 1928.10.30.~11.3)이란 평론이 5회에 걸쳐 발표되며 주제론적으로 깊이분석된다.
그 밖에 1920~30년대에는 개벽, 신천지, 별건곤 등에서 ‘실낙원’이라는단어는 밀턴과 연관 있든 없든 ‘낙원상실’이란 뜻으로 폭넓게 사용되는 것이확인된다.
예컨대, 곽하신(郭夏信)의 신춘문예 당선 소설 실낙원(동아일보, 1938.1.6.)이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경우는 일본의 와타나베 준이치(渡辺淳一)의실낙원이 밀턴의 작품과는 무관한 것과 유사하다.
밀턴의 실낙원이 한국어로 완역된 것은 해방 후인 1963년 이창배가 역으로 정음사에서 출간한 것으로추정된다(최성희 522).
위와 같이, 20세기 초 동아시아의 정황을 살펴본 결과, 이상에 의해실낙원이란 작품이 창작된 것이 특출한 예는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에 밀턴의 실낙원이 번역되어 소개된 정황과 아울러 시대적으로 낙원상실 의식이맞물려 ‘실낙원’이란 표현이 두루 통용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실낙원은사상적 깊이 면에서 반드시 연구의 가치가 있다.
특히, 이 작품이 밀턴의실낙원과 무관하지 않다는 데서 비교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밀턴의 실낙원과 이상의 실낙원은 인간의 ‘앎’에 대한 열망과신에대한도전이 초래한 낙원상실을 주제로 한 데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데는 과학의시대가 도래함으로써 신앙이 퇴색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바라보는 세계관이삼투되어있다.
밀턴이 살았던 17세기 영국과 이상이 살았던 20세기 식민지 조선이라는, 상이한 시간적·공간적 간극(間隙)을 갖는 만큼이나 두 작품은 형식상·내용상으로도 큰 차이가 난다.
밀턴의 실낙원은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되기까지의 과정을 극화하여 보여준다면, 반면에 이상의 실낙원은 낙원을 상실한 이후의 상태를 시화하여 보여준다.
이러한 데서 이상의 실낙원은 밀턴의 실낙원 두 작품의 비교연구가가능하다.
이 논문은 밀턴의 실낙원 원문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 이상의 실낙원에 미친 영향을 밝혀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상이 밀턴으로부터어느 부분에서는 영감을 받았으며, 또 다른 어느 부분에서는 새롭게 창조를하였는지 밝혀보고자 한다.
밀턴의 실낙원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 가운데 본고가 주목한 것은다음과같다.
드라이든(John Dryden)은 「밀턴에 대한 에피그램」(“Epigram on Milton”)에서 밀턴이 호메로스(Homeros)의 고상함과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의 웅장함을 지녔다며 극찬하였다.
애디슨 (Joseph Addison) 역시 실낙원에대한관람자의 논평(The Spectator Review on Paradise Lost)에서 밀턴의 동시대인으로서 실낙원을 일리아드와 아에네이드 같은 고전의 반열에 올린다.
존슨(Samuel Johnson)은 밀턴의 삶(Life of Milton)에서 작가론에 대한 초석을마련하였다.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는 서정담시집(Lyrical Ballads)의「서문」에서 밀턴의 실낙원을 고귀한 고전으로 극찬하였다.
블레이크(William Blake)는밀턴: 한 편의 시(Milton: A Poem)에서 밀턴의 삶과 사상에 대해 독자적으로 재구성하였으며, 천국과 지옥의 결혼(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의 창작에 밀턴의 영향을 받았다.
셸리(Percy Bysshe Shelly)는 시에 대한옹호(A Defence of Poetry)에서 밀턴의 실낙원에서 예술성과 도덕성의 관점에서논의하 였다(xxvi-xl).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은 「밀턴」(“Milton”)에서 밀턴의실낙원의 성취와 한계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논평하였다.
틸리아드(Eustace Mandeville Wetenhall Tillyard)는 밀턴(Milton)에서 밀턴의 실낙원, 복낙원(Paradise Regained), 투사 삼손(Samson Agonistes) 등을 연속선상에서 살피며 신학적·철학적 독자성을 고평하였다.
루이스(Clive Staples Lewis)는 실낙원서문(A Preface to Paradise Lost)에서 밀턴의 실낙원의 신과 악의 의미에 대해 신학적으로 구명한다.
그 밖에 길버트(Sandra Gilbert)와 구버(Susan Gubar)는다락방의 미친 여자(The Madwoman in the Attic)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밀턴에 의해 창조된 하와를 비판하였다(187-212).
피쉬(Stanley Fish)는 죄에 놀란: 실낙원의 독자(Surprised by Sin: The Reader in Paradise Lost)에서 밀턴의실낙원의 의미와 가치는 독자에게 달려 있다는 수용론적 관점의 주장을 펼쳤다(lxxi).
한국에서의 연구 가운데 주목한 논문은 다음과 같다.
우선 박영원의 밀턴과 이사야: 구원의 드라마로서의 실낙원에 대한 상호텍스트적 독해(Milton and Isaiah: An Intertextual Reading of Paradise Lost as a Drama of Salvation)를들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밀턴의 그리스도교적 서사시인 실낙원은「창세기」(“Genesis”)의 인간의 타락뿐 아니라 「이사야서」(“Book of Isaiah”)가 예언하는그리스도의 구원의 약속이 담겨 있다는 것을 주장한 데 의의가 있다.
다음으로 주목한 연구는 구영회의 밀턴의 코머스와 실낙원의 자연법사상(Idea of Natural Law in Milton’s Comus and Paradise Lost)이다.
이 논문은 밀턴의 사상이 프로테스탄트 사상으로 알려졌지만, 실상 중세 신학인 자연법 이론 또한 포괄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밀턴은, 인간의 본성은 이성적이고 선하다는 점에서 신의 본성과 비슷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칼뱅(Jean Calvin)이나 루터(Martin Luther)의 신학과 차이가 있다고 함으로써 이 논문은 밀턴의 사상적 기반을 복합적으로 분석해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최근 연구 가운데 주목한 논문은 다음과 같다.
마이어즈(Benjamin Myers)는실낙원의 자유의 신학(The Theology of Freedom in Paradise Lost)과「밀턴의실낙원에서 예정과 자유」(“Predestination and freedom in Milton’s Paradise Lost”)에서 밀턴의 사상이 후대에 슐라이어마허(Friedrich Ernst Daniel Schleiermacher)와 바르트(Karl Barth)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음을 밝혔다.
본고는 이러한 선행연구를 계승하여 밀턴의 실낙원의 사상적인 면에 주목하여연구하되, 특히 신학자 바르트의 신학적 관점을 원용하고자 한다.
이상의 실낙원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그 가운데 본고가주목한논평은 다음과 같다.
이상의 실낙원은 유작(遺作)으로 소개될 때는“신산문(新 散文)”으로 분류되었으나, 그 후, 김기림에 의해 “수상(隨想)”으로, 김윤식에의해 수필로, 김주현에 의해 시로 분류되었다(권영민 34).
그러나 신범순은 이상의 창조성은 장르 규범 자체를 깨트리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2007: 362).
특히, 신범순은 이상의 실낙원에 대하여 ‘기독(基督)’을 모티프로 한 작품들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한다.
그러한 작품으로는 시 「각혈의 아침」, 「내과」, 「2인」, 「신경질적으로비만한삼각형」, 「Le Urine」 「골편에 관한 무제」, 그리고 수필 「얼마 안되는 변해(辨解)」등이 있다.
이상의 이러한 시편에서 시적 주체는 폐결핵을 앓는 자신을 십자가를진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하고 있다(신범순, 구인회 353-74).
이러한 맥락에서 이상의 실낙원은 인세(人世)의 타락과 역사의 종말에 대한 묵시록적 시편으로 해석된다.
이상의 실낙원에 대한 단독 논문으로 본고는 오주리와 김현진의 논문에 주목하였다.
오주리는 니체의 영원회귀의 관점에서 실낙원에 의미를 부여하였으며, 김현진은 서양의 실낙원 의식은 인간의 원죄에서 신의 섭리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시원적 열망이 나타난다면, 이상의 실낙원 의식은 신이 없는 세계에서의 절망과 인간의 실존을 다룬다고 평하였다.
그밖에, 이상의 실낙원에 대해 부분적으로 다룬 김정현, 최희진 등의 논문과 이상 문학의 기독에 대해 다룬 이경훈, 김승구, 김유중, 정정호, 김주현, 김미영, 전계성 등의 논문 또한 주목할 만한 학문적 성과를 이뤘다.
그러나 기존의 논의들은 이상의 실낙원과 밀턴의 실낙원과의 직접적인 비교 연구는 하고 있지 않다.
이에 본고는 칼 바르트의 신학적 관점을 원용하여 두 작품의 영향관계를 밝히며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내는 가운데 이러한 논의를통해 비교문학적 성과를 내고자 한다.
2. 연구의 시각
이 논문은 실낙원에 나타난 창조, 하나님, 인간, 원죄 구원 등을 해석하는데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의 신학적 개념을 원용하고자 한다.
우선, 바르트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개념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버지 와 아들과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삼중으로 하나인 주권(Herrschaft)인데 이것이 삼위일체론의 뿌리이다(바르트, 말씀前 432).
하나님은 세 가지 고유한 존재 양식 에서 하나라는 상호 관계에서 존립하기 때문에 주는 ‘당신(das Du)’이므로, 인간적 인 ‘나(das Ich)’에게 다가와 하나의 주체로 결부되어 하나님으로 계시된다(바르트, 말씀前 450).
아버지 하나님은 창조자, 즉, 인간 현존의 주로서 계시한다(바르 트, 말씀前 495).
성령 하나님은 구원자로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주인데, 인 간은 그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의 사 랑의 영으로서 자신 안에 있게 된다(바르트, 말씀前 574).
하나님의 계시는 하 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됨으로써 발생하는데, 이 인간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바르 트, 말씀後 15). 즉, 말씀의 성육신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자유를 증명한다(바르트, 말씀後 15).
인간을 향한 하나 님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이다(바르트, 말씀後 45).
예수의 탄생은 피 조물로 낮아지심(Kondeszendenz)이다(바르트, 말씀後 53).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해 인간 안에 하나님이 현재한다(바르트, 말씀後 77).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 님의 계시의 비밀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본질과 현 존재를 택하여 거룩하게 하고 자신과 하나 된 존재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있다(바르트, 말씀後 158).
예 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자 참사람이다(바르트, 말씀後 171).
인간이 자신의 현존재와 존재 형식을 하나님의 창조에 힘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증거의 수용,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안에서 창조자와 피조물이 합일되었기 때문이다 (바르트, 창조1 13).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첫째 사역이며, 하나님으로부터 구분되는 모든 사물의 시작이다(바르트, 창조1 63).
창조는 시간의 시작이다(바 르트, 창조1 13).
계약의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고 종말을 갖는다.
창조 는 계약의 역사의 시작이다(바르트, 창조1 63).
창조자 하나님의 예는
첫째, 선 하신 행동으로서의 창조,
둘째, 실현으로서의 창조,
셋째, 칭의로서의 창조가 있다 (바르트, 창조1 426-70).
인간은 하늘 아래 땅 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드러난 피조물이다(바르트, 창조2 15).
인간 예수는 하나님이 계시하는 말씀이므 로,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존재에 대한 우리 인식의 근원이다(바르트, 창조2 15).
인간은 우주 속에 존재한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말씀으로 이어질 때, 인간은 신학적 인식의 대상이 된다(바르트, 창조2 33).
인간존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선택받아 자기 책임을 지고 능력을 증명하는 가운데 역사적 존재로서 나타난다(바 르트, 창조2 72).
인간은 신학적으로
첫째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
둘째, 하나님의 계약 동지로서의 인간,
셋째 영혼과 몸으로서의 인간,
넷째, 시간 속의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규정될 수 있다(바르트, 창조2 72~506).
인간은 주어진 과 거, 현재, 미래의 삶의 정해진 시한 속에 있다(바르트, 창조2 506).
인간 앞에 있었고, 뒤에 있을, 그러므로 그의 존재를 한정하는 자는 영원한 하나님, 그의 창 조자인 계약의 동지이다.
하나님은 희망이므로 이 희망 안에서 인간은 그의 시간 속을 살 수 있다(바르트, 창조2 506).
임박한 종말의 시간은 인간이 존재와 비 존재에 대해 사유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잘것없게 느끼도록 한다(바르트, 창조2 683).
섭리는 피조물과 함께하는 창조주의 탁월한 행위로서 현실을 고유한 의지에 따라 시간 안에서 보존하고 통치하는 지혜, 전능, 자비를 의미한다(바르트, 창조3 13).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의 선한 본성에 대해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무(Das Nichtige)에 의해 타락이 발생한다(바르트, 창조3 390).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하여 무를 심판한다(바르트, 창조3 390).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의 피조물에 대한 통치는 위에 있는 세계 자체를 요구하기 때문에 하늘나라라고 불린다(바르트, 창조3 507).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가 파견된다.
천사는 신빙할 만한 증인이자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는 것보다 앞서가며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는 종으 로서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혼돈의 권세에 대하여 감시자 역할 또한 수행한다(바르 트, 창조3 507).
한편 하나님의 사자에 대한 적대자도 존재한다.
그는 바로 악령이다.
천사와 악령은 각각 창조와 혼돈, 은혜와 무, 선과 악, 생과 사, 빛과 암흑, 구원과 파멸에 상응한다(바르트, 창조3 726-27).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따르면, 악마는 영원 한 불에 들어갈 것이므로 인간은 악마를 믿어서는 안 된다(바르트, 창조3 727).
또한 악령 추방의 본질은 가장 근본적인 거짓말에 대한 응징이다(바르트, 창조3 728).
악마와 악령의 유래와 특성은 무(無)이다(바르트, 창조3 730).
무는 하나 님에게 굴복하는 요소인 한편 하나님에게 반대하며 하나님의 창조에 위협하는 요 소이다(바르트, 창조3 730).
무는 성서적으로는 무질서, 암흑, 악, 하데스로 해석 될 수 있으며, 철학적으로는 비존재(das Unwesen)로 해석될 수 있다(바르트, 창 조3 730).
악령은 공허하게(nichtig) 존재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nichts)은 아니 다(바르트, 창조3 730).
다시 말해 악령은 비본래적으로 존재한다(바르트, 창조3 730).
또한 무는 거 짓으로 실존하며, 실체와 인격 등을 갖추고 하늘나라와 유사한 나라를 세워 악령 을 대표자로 세운다(바르트, 창조3 735).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끝장난다(바르트, 창조3 738).
하나님은 하늘나라에서 통치한다(바르트, 창조3 612).
하나님의 모든 업무수 행은 하늘에서 시작되어 인간이 있는 땅으로 내려온다(바르트, 창조3 612).
이 계시의 핵심은 하늘나라가 인간이 있는 땅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다(바르트, 창조 3 613).
그러나 하늘도 땅도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아래 하늘이 존재한다.
땅에 있는 인간에게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나라 이다(바르트, 창조3 663).
창조자 하나님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존재가 되길 원한다.
인간은 스스로 정성을 다해 하나님에게 고백해야 한다.
인간은 도움을 청 하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허락되었다(바르트, 창조4 73).
다음으로 실낙원의 주요한 주제인 자유에 대해서 논의하기 위해, 교회 교 의학에서 자유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유에는 크게 네 가지 자 유가 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
둘째, 사귐(공동체) 안에 있는 자유,
셋째, 삶을 향한 자유,
넷째, 제한 가운데 있는 자유이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는 다음과 같다.
고백은 자유로운 행동이다(바르트, 248 오 주 리 창조4 126).
소명은 자발적인 선택이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는데, 고백 은 소명에 맞는 순종이라는 점에서 자유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바르트, 창조4 126).
그러므로, 인간은 정성을 다해 하나님 앞에서 고백해야만 한다(바르트, 창 조4 73).
또한 고백의 자유가 아름다운 것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바르트, 창조4 127).
자유로운 인간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끝까지 존재한다(바르트, 창조4 127).
고백자는 하나님의 자유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자 유로운 인간이 된다.
둘째, 사귐 안에 있는 자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에게 부름에 있어 항상 동료를 바라보게 한다.
즉,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 등 타인 과 함께 서로 존중하고 긍정하는 관계를 원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상대자라는 것은 인간성이 처음부터 이웃됨(Mitmenschlichkeit)이었음을 의미한다(바르트, 창 조4 172).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는 자유는 공동체에서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바르트, 창조4 173).
인간의 자유 안에, 남자와 여자의 만남과 함께 존재함의 자유가 포함된다(바르트, 창조4 194).
두 사람이 사랑을 주고받을 때 인간적인 한계성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자유가 생겨난다(바르트, 창조4 307).
이 자유 가 결혼의 필수불가결한 인간적 기초이다(바르트, 창조4 307).
셋째, 삶을 향한 자유는 인간이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하나님이 대여하신 것으로 소중히 여기며,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자유이다(바르트, 창조4 447-62).
넷째, 제한 가운데 있는 자유는 인간이 시간의 유한성 안에서 한 번은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직면하면서 선택하는 자유이다(바르트, 창조4 792).
이 논문은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으로부터 창조, 피조물, 천사와 악마, 하늘 나라, 자유 등의 개념을 원용하여, 밀턴의 실낙원과 이상의 실낙원을 해석한 후, 두 작품의 비교를 통하여 영향 관계 및 전유 양상을 밝히고자 한다.
Ⅱ. 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
1. 밀턴의 일생과 실낙원
밀턴은 런던 브래드가에서 법률 공중인인 아버지 존 밀턴(John Milton Senior) 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리처드 밀턴(Richard Milton)은 가톨릭에서 프 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고, 이는 밀턴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1620년 세인트 폴 학교(Saint Paul School)에 입학하였고, 신학자였던 가정교사 토머스 영(Thomas Young)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는 1626년 케임브리지(University of Cambridge)의 기독교 대학(Christ’s College)에 입학하여 윌리엄 차펠(William Chappell)을 지도교수로 만났다.
그는 1629년에는 문학사가 되어 「그리스도 탄생 하신 날 아침에」(“On the Morning of Christ’s Nativity”)를 썼으며 첫 연은 실낙 원의 주제가 되었다.
그는 1630~32년에는 문학석사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수난」 (“The Passion”)을 썼으며, 그리스·로마 고전을 연구하였다.
실낙원에도 그리스· 로마 신화의 모티프가 적지 않게 반영되어 있다.
1637~38년에는 이탈리아 여행 중 피렌체에서 지동설(地動說, heliocentric theory) 시대를 연 갈릴레오 갈릴레이 (Galileo Galilei, 1564~1642)를 방문하였고, 지동설로 인한 세계사적인 사상의 변 화는 실낙원의 주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1641년에는 종교개혁론 (Of Reformation), 주교제에 관하여(Of Prelatical Episcopacy) 등 종교적 자유 를 위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실낙원에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에 대한 주제가 삼투되어 있다.
1649년 국왕 찰스 1세(Charles I)가 처형된 이후, 왕 과 위정자의 재임(The Tenure of Kings and Magistrates), 우상타파론 (Eibonoklastes), 영국민을 위한 변호(Defence for English People), 영국사 (History of Britain) 등 정치와 역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이후, 밀턴은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이끄는 공화정부에서 라틴어 비서관으로 발탁되어 영 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활약하였다.
그러나 1660년 찰스 2세(Charles II)의 왕정복 고로 공화정부가 붕괴된 이후 밀턴은 쫓기는 삶이 되면서 실낙원의 집필을 시 작하였고, 1667년에는 마침내 실낙원을 출판하였다.
말년인 1671년~1673년에는 복낙원(Paradise Regained), 진정한 종교에 관하여(Of the Religion) 등을 출 판하여 자신의 사상적 완성을 추구하였지만, 결국 1674년 실명과 통풍을 앓다 운 명하여 성 자일스 성당(Saint Giles’ Cathedral)에서 영면하였다. 밀턴의 실낙원은 모두 1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밀턴의 대표작 실낙원은 근본적인 악의 문제와 인류의 타락 그리고 구원을 주제로 다루었다.
주요한 내용 은 성경의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적 기 록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2. 밀턴의 실낙원의 핵심 내용과 주제 의식
II부 2장에서는 총 12편으로 구성된 밀턴의 실낙원을 1편부터 12편까지 핵 심 내용이 담긴 원문을 인용하여 분석한 후, 그 주제 의식을 해석해 보고자 한다.
우선 1편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편은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낙 원 상실과 하나님을 배반하고 지옥에 간 사탄을 다룬다.
인간이 한 처음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죽음에 이르는/금단의 나무 열매를 맛봄으로 써/죽음과 온갖 재앙이 세상에 들어왔고/에덴까지 잃게 되었으나 이윽고 한 위대한 분이/우리를 회복시켜 복된 자리를 도로 얻게 하셨으니/노래하라 이것을, 하늘의 뮤 즈여. 호렙이나 시나이의/외진 산꼭대기에서 저 목자에게 영감을 부어주어/한 처음 에 하늘과 땅이 어떻게 혼돈으로부터 생겼는가를 (밀턴의 실낙원 제1편 부분)
위에 인용된 부분은 밀턴의 실낙원 전체의 첫 부분이자 제1편의 첫 부분이 다.
이 부분은 이 작품 전체의 주제를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태초에 하나 님을 거역하고 이른바 선악과라 불리는 “금단의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죽음을 비롯한 재앙이 인간의 삶에 들어왔을 뿐 아니라, 인간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창조를 한 하나님은 바르트의 신학에서 아버지 하나님, 창조자, 즉, 인간의 현존의 주로서 계시하는(말씀前 495) 하나님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실낙원 제1편에서는 “한 위대한 분” 즉, 하나님의 성육신인 예수 그 리스도가 인간의 지위를 “회복”해 줌으로써, 인간은 다시 “복된 자리”에 갈 수 있다고 예고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계시의 비밀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 간의 본질과 존재를 선택하여 거룩하게 하고 자신과 하나 된 존재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바르트, 말씀後 158).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가운데 예수 그리스 도를 매개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실낙원 제1편에서는 “한 처음”, 즉 태초에 혼돈으로부터 창조가 이루어진 사건을 다룰 것을 예고한다.
창조는 하 나님의 첫째 사역으로 모든 사물의 시작이자 시간의 시작이다(바르트, 창조1 63).
밀턴의 실낙원 제1편은 바로 창조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의 역사의 시 작(바르트, 창조1 63)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제2편은 사탄들의 천국을 회복하기 위한 회의를 다룬다.
밀턴의 실 낙원 제2편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 위광 넘치는 권좌에 높이, 사탄은 의기양양하게/앉아 있다. 여러 공적으로 이렇 게 높은 악의 자리에/올려져서. 하지만 절망으로부터 이런 바랄 수 없는/높은 자리 에 오르고서도, 더욱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욕망으로, 하늘과의 부질없는 싸움을/꿈 꾸며 애태운다. 겪고서도 모르는지/그는 그의 오만한 생각을 이렇게 늘어놓는다./“권 력들이여, 지배자들이여. 하늘의 신들이여./비록 억눌려 떨어지기는 했지만, 이 깊은 심연도/불사의 힘을 결코 잡아둘 수는 없는 것이니, 나는 하늘을 잃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영체가 이렇게 떨어졌다 다시 오르면 떨어지지/않았던 것보다 더욱 빛 나고 더욱 무섭게 보일 것이며./또다시 비운을 당한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을 /얻으리라. 정의와 하늘이 정한 법칙에 의해서 내가/우선 그대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다음으로/그대들의 자유 선택과 또한 모의와 전투에서/성취한 공적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지만, 그래도/이 패배가 이만큼 회복되었으니, 그대들은/나를 안전하고 시기 없는 이 권좌에 만장일치로/뜻을 모아 앉힌 것이다. (밀턴의 실낙원 제2편 부분)
밀턴의 실낙원 제2편은 사탄에 초점이 맞춰진다. 사탄은 하나님께 반기를 든 타락한 천사이다.
천사와 악령(사탄)은 각각 창조와 혼돈, 은혜와 무, 선과 악, 생과 사, 빛과 암흑, 구원과 파멸에 상응한다(바르트, 창조3 726-27). 실낙원 제2편에서 사탄은 악의 “권좌”에 앉아 있으며,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욕망”, 즉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한 사탄(악마와 악령)의 유래와 특 성은 무(無)이다(바르트, 창조3 730).
무는 하나님에게 굴복하는 요소인 한편 하 252 오 주 리 나님에게 반대하고 저항하며 하나님의 창조에 위협하는 요소이다(바르트, 창조3 730).
무는 성서적으로는 무질서, 암흑, 악, 하데스로, 철학적으로는 비존재(das Unwesen)로 해석될 수 있다(바르트, 창조3 730).
밀턴의 실낙원에서도 사탄 은 암흑과 무질서 가운데 존재하며 죽음과 죄의 부모 역할을 한다.
실낙원 제2 편에서 하늘로부터 떨어진 사탄은 세상의 “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원했다며 자신의 권력을 합리화한다.
성경은 세상은 악마가 지배하고 있 다고 말한다.
그렇게 된 시초를 밀턴의 실낙원 제2편은 밝혀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악령은 공허하게 존재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바르트, 창조3 730).
또한 무는 거짓으로 실존하며, 실체와 인격 등을 갖추고 하늘나라와 유사한 나라를 세워 악령을 대표자로 세운다(바르트, 창조3 735). 위에서 사탄이 “권좌” 에 “만장일치”로 오른 것이 그러한 경우라고 해석될 수 있다.
다음으로 제3편은 하나님이 성자 예수와 함께 사탄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 을 다룬다.
밀턴의 실낙원 제3편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i) 그렇게/그들을 자유롭게 만들었으니, 스스로의 노예가 될 때까진/자유롭게 지내 리라. 아니면 그들의 본성을 바꾸고/그들의 자유를 정해준 영원불변의/높은 섭리도 폐지해야 하리라. 정녕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타락을 정하였도다.
(ii) 인간은 일단/죄로 죽고 멸망했으니 은총의 도움 구할 길이 없나이다./빚을 지고 갚지 못 했으니 자신의 속죄도/합당한 속죄 제물도 드릴 것 하나 없습니다./그러니 저를 보소서. 그를 위해 저를, 그의 생명 위해/저를 바치겠나이다./저를 바치겠나이 다. 당신의 분노를 제게 내리소서./저를 인간으로 보소서. 그들을 위해 당신의 품을 떠나/당신 다음으로 가는 이 영광을 아낌없이/버리고, 마침내는 그를 위하여 기꺼이 죽겠나이다. 죽음으로 하여금 그 분격을 제게 풀게 하소서./내 그 어두운 권세 밑에 오래 억눌려/있지는 않겠나이다. 당신은 제게 생명을 영원히/갖도록 허락했아오니, 당신에 의해 나는 사나이다. (밀턴의 실낙원 제3편 부분)
위에 인용된 밀턴의 실낙원 제3편 가운데 (i)과 (ii)는 하나님과 예수 간의 대화의 일부분이다.
(i)은 하나님이 사탄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창조를 할 때, 사탄을 창조한 것은 아니었으나, 천사 가운데 하나님의 권좌에 오르기 위하여 대적한 자들이 사탄이 된다. 그들이 하나님에게 대적할 수 있던 이유는 위의 인용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그 들의 본성으로서의 자유의지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타락을 선택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밀턴은 실낙원에서 인간의 원죄와 타락을 논의하는 데서 자유의 지를 굉장히 중요한 주제로 다룬다.
분량상으로도 자유의지에 관한 부분이 상당량 을 이룬다.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에 따르면 자유는
첫째,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
둘째, 사귐(공동체) 안에 있는 자유,
셋째, 삶을 향한 자유,
넷째, 제한 가운데 있 는 자유가 있다.
그 가운데, 넷째, 제한 가운데 있는 자유는 인간이 시간의 유한성 안에서 한 번은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직면하면서 선택하는 자유이다(바르트, 창조4 792).
바르트의 신학적 관점에서 밀턴의 실낙원에 나타난 사탄과 사탄 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이 보여준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자유를 창조한 본질에서 크 게 벗어난다.
(ii)는 성자 예수가 하나님에게 애원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었 기 때문에 그 대가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ii)에서 보는 바 와 같이, 성자 예수가 스스로 자신을 “속죄 제물”로 삼아, 인간을 죄와 죽음과 멸 망으로부터 구원해 줄 것을 하나님에게 간청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의 선한 본성에 대해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무에 의해 타락이 발생한다(바르트, 창조3 390).
실낙원에서 무는 사탄의 본성이다.
실낙원 제3편 (i)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무를 심판(바르트, 창조3 390)할 것을 미리 보여준다.
또한 (ii)에서 “저를 인간으로 보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사람(바르트, 말씀後 171)이란 것을 보여준다.
인간이 자신의 현존재와 존재 형식을 하나님의 창조에 힘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창조자와 피조물이 합일된 예수에 대한 믿음에 서이다(바르트, 창조1 13).
다음으로 제4편은 사탄이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 먹는 것이 죽음의 형벌로 금 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려고 결심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밀턴의 실낙원 제4편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i) 그때 최초의 남자 아담이/최초의 여자 하와에게 이렇게 말 시작하니,/사탄은 흘 러나오는 새 말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이 모든 기쁨의 유일한 반려요, 또한 유 일한/일부여. 누구보다도 사랑스런 자여. 우리를 만드시고,/우리를 위하여 이 넓은 세계를 만드신 전능하신/하나님은 정녕 무한히 선하시고, 그 선에 있어서도/역시 그 는 무한히 관대하고 인색지 않으십니다./[. . .]/지식의 나무만은/맛보지 말라는 그 지키기 쉬운 명령을 지키는/것 외에 다른 아무런 봉사도 바라지 않으십니다./[. . .]/ 그 나무 맛보면 죽으리라 하셨으니,/그것은 우리에게 부여된 권력과 지배, 그리고/땅 과 하늘과 바다에 가득 차 있는 다른 모든 생물을/다스리는 주권의 상징들 가운데 서/단 한 가지 우리의 순종을 바라는 표시랍니다.
(ii) 마왕은 샘이 나서/고개 돌렸지만, 악의에 찬 질투의 곁눈질로/그들을 흘겨보며 혼자 이렇게 투덜댄다./“꼴 보기 싫군. 봐주기 어려운 꼴이로다! 이렇게/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얼싸안고/이 복된 낙원과 축복 위에 축복을 마음껏/즐기는 데, 나는 지옥에 처박혀/[. . .]/지식의 나무라 불리는 한 치명적인 나무가 있어/맛보 지 못하도록 금지되었다고? 지식을 금한다고?/참으로 야릇하고 알아듣지 못할 소리 로다. 그들의/주는 어째서 그것을 시샘할까? 아는 것이 죄일 수/있으며, 또한 죽음 이 될 수 있을까? 그러면 그들은/무지로만 살아가는 것일까?/그것이 그들의 행복한/ 상태이며, 그들의 순종과 신앙의 증거일 수 있을까?/아, 그것이 저들의 파멸을 쌓아 올릴 좋은/토대이겠구나! 그러니 그들의 마음을 충동질하여/점점 더 알고 싶게 하고, 질투에 찬 주의 명령을 거역하게 하리라. 많은 것을 알면 신들과 대등하게/될까 하 여 낮은 위치에 두고자 한 계획에서 꾸며낸/그 명령을. 저들이 신처럼 되고자 열망 한 나머지/그것을 맛보고 죽을 것은 너무나 뻔한 일. (밀턴의 실낙원 제4편 부분)
위에 인용된 밀턴의 실낙원 제4편 가운데 (i)은 아담과 하와의 “지식의 나 무”에 대한 대화를 보여주고 있다.
아담은 하와를 “반려”이자, “일부”이자 “사랑스 런 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면서 아담은 창조주 하나님에게 “순종”하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을 하와에게 표현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생물을/다스리는 주 권”을 주었고, 순종의 표시로서 금지한 것은 단 하나, 에덴동산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와에게 하나님에 대한 순종 을 설득한다.
그렇지만, (ii)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담과 하와의 대화를 마왕이 엿듣게 된다.
“지옥”에 있는 마왕은 “에덴동산”에서 행복감에 젖어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샘” 이 나서 그들을 타락시킬 궁리를 하게 된다.
즉, 하나님이 금지한 “지식의 나무”를 먹게 함으로써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죄”와 “파멸”에 이르 게 하고자 한다.
“마왕”은 “지식”이 왜 죽음에 이르는 죄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의 문을 표한다.
그러면서 마왕은 하나님이, 인간이 “무지”하길 바라는 이유가 인간이 “신들과 대등하게/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바르트의 교회 교 의학에 따르면, 사탄의 본성인 무는 하나님에게 굴복하는 요소인 한편 하나님에 게 반대하며 하나님의 창조에 위협하는 요소인데(창조3 730)
그러한 점이 제4 편의 (ii)에 형상화되어 있다.
다음으로 제5편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라파엘을 보내어 그의 적 사탄의 본질에 대해 알려주는 이야기를 다룬다.
밀턴의 실낙원 제5편 가운데 핵심 내용 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i) 라파엘, 그대 들었으리라./사탄이 지옥으로부터 어두운 심연을 빠져나와/지상에서 어떤 소동을/낙원에 일으켰는가를 [. . .] 그리고/이런 대화를 하라. 그의 행복한 처 지를/알려줄 수 있는 이야기를. 의지의 자유에 맡겨진/그의 힘으로 누릴 수 있는 행 복. 즉 그 자신의 자유의지.
(ii) 꽃과 인간의/자양분이 되는 과일은 사닥다리를 올라가듯/점차 승화하여 동물에 게도, 인간에게도 활력을 높여주어,/양자에게는 생명과 감각, 상상과 오성이/주어지 게 되느니라. 영혼은 거기서/이성을 받나니, 이성은 추리적이건 직관적이건/영혼 그 자체이다. (iii) 배신자는 이것을 보고/기뻐하며, 더욱 거만스럽게 이렇게 대답한다./‘그러면 우 리가 만들어졌단 말인가. 그리고/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전수된 하청의 작품이라고?/ 그것 참으로 괴이하고도 신기한 주장이로다./어디서 배운 교리냐고 묻고 싶구나. 창 조하는 것을/누가 보았으며, 창조주가 그대를 만들었을 때를/기억하는가? (밀턴의 실낙원 제5편 부분)
(i)은 하나님이 대천사 라파엘에게 인간을 찾아가 사탄을 경계하라는 경고를 해달라고 명령하는 장면이다.
천사는 신빙할 만한 증인이자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 이 계시되는 것보다 앞서가며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는 종으로서 하나님에게 저항 하는 혼돈의 권세에 대하여 감시자 역할 또한 수행한다(바르트, 창조3 507).
라파엘은 아담에게 현재도 충분히 “행복”하니, “자유의지”로 끝까지 “행복”을 지키 라고 당부한다. 이 부분에서는 죄에 대하여 인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 지”가 있다는 것이 강조된다.
밀턴의 실낙원의 주제 의식과 닿아있는 부분이다.
(ii)는 라파엘이 아담에게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명”과 “감각”, “상상”과 “오 성” 그리고 “이성”을 부여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신학적으로 이성적 존 재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도록 이성을 부여받은 것이 다.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교파 가운데, 밀턴은 이성을 중시하는 신앙을 주장하였다 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iii)은 사탄이 라파엘의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천사들 앞에 서 말하는 장면이다.
사탄은 하나님에 대하여 “배신자”이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즉, 창조를 부정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창조주가 자신을 만들었을 때를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탄(악령)의 유래와 특성은 무 (無)이다(바르트, 창조3 730).
무는 성서적으로 무질서와 악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바르트, 창조3 730).
밀턴의 실낙원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질서를 흩으려 무 질서를 만드는 데 이것은 악이며, 존재를 창조하는 유(有)에 대립되기 때문에 무 이다.
다음으로 제6편은 천사 라파엘, 미가엘, 가브리엘과 사탄의 전쟁에 이어 성자 메시아의 등장에 대해 다룬다.
밀턴의 실낙원 제6편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면 다 음과 같다.
(i) 가라, 미가엘. 천군의 왕자여./그리고 무용에서 그 다음 가는 너/가브리엘이여. 무적의 내 아들들을 싸움터로/인도하라. 저 수천 수백만의 전열을 짜서 갖춘/나의 무장한 천사들을. 그 수가 신을 잃은/반역의 무리들과 대등하리니,/불과 대적의 무기 를 갖고/대담하게 그들을 공격하여, 하늘 끝까지/추격하여, 하나님과 그 축복으로부 터/그들의 형장인 지옥의 심연으로/쫓아내라.
(ii) 성자는 이렇게 말하고 너무나 엄숙하여/바라볼 수 없을 만큼 무서운 형상으로/ 변하더니 분노에 가득 차 적에게로 향한다.
(iii) 적을 추방한 메시아는 유일한/승리자로서 개선의 전차를 거기서 돌렸도다./그 전능한 위엄의 목격자로서 조용히 서 있던/성자들은 그를 맞이하기 위해 일제히/환 호성을 올리며 나아갔느니라. (밀턴의 실낙원 제6편 부분)
제6편은 천사 라파엘, 미가엘, 가브리엘과 사탄의 전쟁과 성자 메시아의 등장 에 대해 다룬다.
(i)은 라파엘, 미가엘, 가브리엘이 사탄을 “지옥”으로 추락시키기 위해 공격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장면은 성경의 「창세기」가 아니라, 「요한계시 록」을 연상시킨다.
(ii)는 성자 예수가 사탄을 공격한다는 내용이다. 실제 성경에 서 예수는 신약에서 등장한다는 사실에 견주어 볼 때, (ii)는 밀턴의 상상력에 의해 창작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iii)은 마침내 예수가 “메시아”로서 “승리자”가 되 는 장면이다.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에 따르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하여 무를 심판한다는(창조3 390) 점이 드러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제7편은 라파엘이 아담에게 창조에 대해 알려주는 이야기를 다룬다.
밀턴의 실낙원 제7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i) ‘빛이 있으라!’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즉시/만물의 시초인 하늘의 빛, 순수한 제5원소가/심연에서 튀어나와 빛나는 구름에 싸여/그 태어난 동쪽으로부터 어두운 허공을 지나/나아가기 시작했으니, 이는 해가 아직은 나타나지 않고 잠시 구름의 장 막 안에/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노라. 하나님은 빛을 보고/좋다고 하셨도다
(ii) 이 세계의 자연 현상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대의 기억 이전,/처음부터 무엇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고,/그것을 자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그대의 소원 은/이로써 충족되었으리라. (밀턴의 실낙원 제7편 부분)
(i)은 아담이 라파엘에게 하나님의 창조에 관해 물은 데 대한 대답이다.
창조 주 하나님에 의해 “빛”이 “만물의 시초”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같이 라파엘은 순차적으로 하나님의, 태초의 창조에 관해 상세하게 알려준다.
밀턴의 실낙원은 성경의 창세기를 바탕으로 하되, 상상력에 의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ii) 역시 라파엘이 아담에게 하는 말인데, 아담이 “세계의 자연 현상”의 창조에 대 해 충분히 알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에 따르면 창조는 하나님의 첫째 사역이며, 모든 사물의 시작이자, 시간의 시작이다(창조1 63).
이러한 창조의 순간을 제7편에서 라파엘이 보여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 데 하나이다.
인간은 하늘 아래 땅 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드러난 피조물이다(바르트, 창조2 15).
제7편은 인간인 아담이 하나님 의 그러한 창조의 섭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됨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제8편은 라파엘이 아담에게 천체의 운행에 대해 하는 이야기와 아담 이 에덴에서 겪은 일을 라파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룬다.
밀턴의 실낙원 제8편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i) 라파엘은 아담이 제시한 질의에/이윽고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답한다./“묻고 탐구 하는 그대를 탓하지는 않으리라. 하늘은/하나님의 책처럼 그대 앞에 놓여 있으니/거 기서 신묘한 창조의 위업을 읽고, 계절과 시간,/날과 달 또는 해를 배워 알라.
(ii) ‘너의 집이 너를 기다리니,/아담, 일어서라. 무수한 인류의 최초의 아버지로/정 해진 최초의 인간이여, 너의 부름 받고/마련된 곳, 축복의 낙원으로 너를 인도하러 왔노라.’
(iii) 그러나 선악의 지식을 가져다주는 나무,/너의 순종과 믿음의 보증으로서 낙원 가운데/생명나무 옆에 내가 심은 그 나무에/대해서는 내 경고하노니, 결코 잊지 말 라. 맛보는 것을/피할지어다. 그리하여 그 쓰라린 결과를 면하도록 하라./네가 그것 을 맛보는 날엔 나의 유일한 명령을/범하는 것이니,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고,/행복 함을 잃어버린 채 괴로움과 슬픔의/세계로 쫓겨나리라.
(iv) 아담아, 지금까지 나는 너를 시험하여, 네가/옳게 이름 지은 짐승뿐만 아니라, 너 자신까지도/스스로 알고 있음을 보았도다. 짐승에게는/주지 않은 나의 모습, 네 속에 있는/자유의 영을 잘 나타내는도다. (밀턴의 실낙원 제8편 부분)
위에 인용된 (i)은 밀턴의 실낙원 제8편 가운데 라파엘이 아담에게 하나님이 창조한 천체의 운행에 대해 알려주는 장면이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첫째 사역이며, 하나님으로부터 구분되는 모든 사물의 시작이자 모든 시간의 시작이다 (바르트, 창조1 63).
창조는 하나님의 역할 가운데 창의로서의 창조가 실현되는 (바르트, 창조1 426-70) 순간이다.
라파엘은 아담에게 “하늘”의 “해”와 “달”, “계절”과 “시간” 등에 대해 알려준다.
“하늘”은 하늘나라와 다른 개념이다.
“하늘” 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 아래 “하늘”이 존재한다.
이와 달리, 인간에게 오 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나라이다(바르트, 창조3 663).
(i)에서는 창조자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천체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밝혀진다.
(ii)는 라파엘이 “인류의 최초의 아버지”이자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축복 의 낙원”, 즉, 에덴동산으로 초대했다는 것을 알리는 장면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드러난 피조물이다(바르트, 창조2 15).
(iii)은 “선악의 지식을 가져다주는 나무”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라파 엘이 아담에게 전하는 장면이다.
이 부분에서 “지식의 나무”의 “지식”이 “선악”에 관한 지식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iv)에서는 우선 하나님이 “아담아”라고 인간을 부르신다.
이처럼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말씀으로 이어질 때, 인간은 신학적 인식의 대상이 된다 (바르트, 창조2 33).
이어서 (iv)에서는 “아담”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짐승”에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인간존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 선택받아 자기 책임을 지고 능력을 증명하는 가운데 역사적 존재로서 나타난(바르트, 창조2 72) 것이다.
나아가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하나님의 모습으로서의 “자유의 영”이라는 점이 알려진다.
여기에서 인간은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계약 동지로서의 인간일 뿐만 아니라, 영혼과 몸으로서의 인간(바르트, 창조2 72-506) 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영은 영혼과 몸의 근거이기 때문이다(바르트, 창조2 403).
이 부분은 신의 모상(模像)으로서의 인간, 즉, 이마고 데이(Imago Dei)로서 의 인간관이 나타난다.
이마고 데이에 대한 관점에서 아퀴나스(Thomas Aquinas) 가 이성을 강조했다면, 바르트는 관계를 강조했다.
밀턴의 실낙원에서는 문학작 품으로서의 상징성과 중의성 때문에 이성 또는 관계 모두를 강조했다고 해석될 수 있다.
다음으로 제9편은 사탄이 뱀에게 침투하여 하와에게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으 라고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하는 사건을 다룬다.
밀턴의 실낙원 제9편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i) 교활한 간계로 가득 찬 머리를/두고 깊이 잠든 뱀을 발견한다. [. . .] 악마는/그 입으로 들어가 가슴이나 머릿속, 그 짐승의/의식을 즉시 사로잡아 거기에 지적인 활 력을 불어넣었다.
(ii) “놀라지 마소서, 여왕이여./[. . .]/아름다운 조물주와/흡사한 어여쁜 자여, 모든 생물들,/그대에게 내려준 모든 것들이 그대를 바라보며,/황홀한 눈으로 그 하늘의 아 름다움을 찬미하나이다.
(iii) 이윽고 나무 한가운데 이르러,/많은 과실이 매달려 눈앞에서/유혹하기에 배가 찰 때까지 주저 없이 따서/먹었나이다./[. . .]/정신력에 이성이 생길 정도에 이르렀 나이다.
(iv) 아, 거룩하고, 슬기롭고, 지혜 주는 나무여,/지식의 어머니여!/[. . .]/죽음의 위 협 믿지 마소서. 그대 죽지 않으리니,/열매를 맛본다고 죽음을 얻다니, 어찌 그러리 오?/그것은 지혜뿐 아니라 생명도 주리라.
(v) 그런데 왜 금했을까? 그의/숭배자인 그대들을 다만 위협으로 낮고/우매하게 두 어두고자 한 것일까? 하나님은/아시리다. 그대들이 그것을 먹는 날, 밝게 보면서/실 은 어두운 그대들의 눈이 완전히 열리고 밝아져/신들같이 되고 신들처럼 선악을 알 게 되리라는/것을. 내가 사람과 같이 내적인 존재가 되었은즉./그대들이 신들과 같이 됨은, 내가 짐승에서 인간이 되고/그대들이 인간에서 신이 됨은 사리에 맞는 일.
(vi) 그러니 마음을/확고히 하고 아담과 화복을 나눠야겠다./사랑이 지극하니 그와 함께라면 어떤 죽음도/견딜 수 있으리라. 그가 없으면 살아도 죽음이다.
(vii) 배은망덕한 하와여! 내가 아니라 그대가/타락했을 때 불변의 사랑을 확언했고 살아서/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나 자진하여/그대와 함께 죽기로 작정한 나에게. 그런데도/타락의 원인이 내게 있다고 비난받아야 하다니. (밀턴의 실낙원 제9편 부분)
제9편은 사탄이 “뱀”에게 침투하여 하와에게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으라고 유 혹하여 원죄를 범하게 하는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밀턴의 실낙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i)은 악마가 뱀에 침투하자 뱀에게 “의식”과 “지적인 활력”이 생기는 장면이다.
(ii)는 뱀이 하와를 “여왕”이라고 칭송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미”함으로써 유혹하는 장면이다.
이어서 (iii)은 하와가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밀턴의 실낙원과 이상의 실낙원 비교 연구 261 맛본 다음 “정신력”과 “이성”이 생기는 장면이다.
(iv)는 뱀이 하와에게 “지식의 나무”는 “지혜”와 “생명”을 주지, 죽음을 주지 않는다고 거짓말하는 장면이다.
그 러나 인간은 주어진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의 정해진 시한 속에 있다(바르트, 창조 2 506).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존재이다.
죽음이라는 임박한 종말의 시간은 인간이 존재와 비존재에 대해 사유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잘 것없게 느끼도록 한다(바르트, 창조2 683).
그렇지만 뱀은 하와에게 죽음을 두 려워하지 말라고 거짓말한다.
(v)는 하나님이 “지식의 나무”를 금한 이유가 인간이 “신들과 같이 되고 신들처럼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며 이간 질하는 장면이다.
(vi)은 하와가 자신이 사랑하는 아담에게 “지식의 나무”의 열매 를 권하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vii)은 아담과 하와가 함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타락”하게 된 후, 아담과 하와 가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며 원망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아담과 하와의 불화는 바 르트의 “사귐 안에 있는 자유” 개념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인간의 자유 안에, 남 자와 여자의 만남과 함께 존재함의 자유가 포함된다(바르트, 창조2 194).
두 사 람이 사랑을 주고받을 때 인간적인 한계성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자유가 생겨 난다(바르트, 창조2 307).
이 자유가 결혼의 필수불가결한 인간적 기초이다(바르 트, 창조2 307).
즉, 아담에게도 하와에게도 서로 자유가 있었으나, 그 자유에 따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빠져 타락하고, 아담은 하와를 사랑해서 함께 타락하게 된다.
다음으로 제10편은 인간의 범죄가 낙원에 알려져 하나님이 그 범죄를 심판하 기 위해 성자를 보내고, 사탄이 지옥에서 나와 인간 세계로 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밀턴의 실낙원 제10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i) 그들의 죄를 심판하기/위하여 내 대리자인 아들 너 아니고 누구를 보내랴./하늘 과 땅, 지옥 등 일체의 심판을 너에게/맡기리라. 인간의 친구이며 그 중재자인, 스 스로/원하여 지명된 대속자인 동시에 구세주인, 타락한/인간을 심판하려고 스스로 인간이 된 너. 자비와 정의를 짝짓게 하려는 뜻에서 너를/보냄은 쉽게 이해할 수 있 으리라.
(ii) 성공을 거두고 돌아와 그대들에게 지금/선언을 한다. 이 미움받고 저주받은 지 옥의 골짜기,/비애의 집, 우리 폭군의 감옥에서 그대들을/당당히 데려가겠다고. 이제 는 군주로서/큰 위험을 무릅쓰고 힘든 모험으로 얻게 된/우리의 고향인 하늘에 못지 않은, 한 넓은/신세계를 영유하라. (밀턴의 실낙원 제10편 부분)
위에 인용된 (i)은 인간의 범죄가 낙원에 알려져 하나님이 그 “죄를 심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대리자”인 성자(聖子) 예수를 보내는 장면이다.
말씀의 성육신 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예수의 탄생은 피조물로 낮아지심(바르트, 말씀後 53)이다.
(i)에서 예수는 “인간의 친구”, “중재자”, “대속자”, “구세주”, “심판자” 등으로 규정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 안에 하나님이 현재한다(바 르트, 말씀後 77).
이러한 데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님의 “중재자”가 된다.
그럼으로써 “대속자”, “구세주”, “심판자”가 될 수도 있다.
또한 (i)에서는 예 수가 “스스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한 맥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자 참사람이다(바르트, 말씀後 171).
이 부분에서 예수는 “자비”인 동시에 “정의”라는 신학적으로 의미가 구현된다.
(ii)는 사탄이 지옥에서 나와 인간 세계로 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사탄은 인간 을 타락시키는 데 “성공”한 후, “비애의 집”인 “지옥”에서 나와 세상의 “군주”가 된다.
「마태복음」 25장 41절은 악마는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이므로 인간은 악마 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바르트, 창조3 727).
악마와 특성인 무는 하나 님에게 반대한다(바르트, 창조3 730).
악마는 공허하게 존재하지만, 아무것도 아 닌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비본래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바르트, 창조3 730).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악마의 본질을 올바로 간파해야 한다.
(ii)에서는 사탄 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데 성공하고 세상의 “군주”가 되고자 한다.
악마는 거짓으 로 실존하며, 실체와 인격 등을 갖추고 하늘나라와 유사한 나라를 세워 악령을 대 표자로 세우는 것이다(바르트, 창조3 735).
다음으로 11편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미 가엘을 파견하여 죽음, 질병, 홍수 등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을 다룬다.
밀턴의 실 낙원 제11편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i) 아, 아들들아, 인간은 그 금단의 열매를/맛본 이래 우리들 중의 하나처럼 선과 밀턴의 실낙원과 이상의 실낙원 비교 연구 263 악을/알게 되었도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잃은 선과 얻은 악의 지식을 자랑케 하 라./만일 선만을 알고 악은 전혀 모르는 것으로/만족했더라면 더욱 행복했으리라. 그 는 지금/슬퍼하고 뉘우쳐 회개하며 기도를 하고/있도다. 그것은 내가 그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것./그런 자극 그치고 혼자 있게 되면/그 마음은 변하기 쉽고 공허해지 리라./이제 한층 대담해진 그 손이 생명나무에도/뻗쳐 그 열매 따 먹고 영원히 살 수 있지 못하도록/적어도 그렇게 망상하지 못하도록 그를 낙원에서/쫓아내어 그가 태어난 땅, 그 적합한/흙을 갈아먹도록 명령하노라.
(ii) 무서운 질병이/지상에 들어오리라. 그중에서 기괴한 것이/그대 앞에 나타난 터 인데, 그것은 하와의/파계가 어떠한 불행을 인간에게 가져오는가를/보여주리라.” 돌 연 그의 앞에 나병자 수용소인 듯한, 슬프고 소란하고 어두운/한 장소가 나타난다. 그 안에 무수한 환자들이/누워 있다. 온갖 질병, 즉 [. . .] 풀죽은 우울증, 달의 저 주받은 착란증 [. . .] 따위들이다. (밀턴의 실낙원 제11편 부분)
제11편의 (i)은 하나님이 “금단의 열매”를 맛본 아담과 하와가 “악의 지식”을 알게 되어 그들을 낙원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하는 장면이다.
또한 아담은 “생명나 무”의 열매를 따 먹을 수 없게 되고, 대신 농사를 지어 “흙을 갉아 먹”도록 운명 지어진다.
(ii)는 하나님이 대천사 미가엘을 아담에게 파견하여 낙원에서 추방된 이 후, 세상에 질병이 창궐할 것을 알리는 장면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완벽한 세계에 질병이 생긴 것은 “하와의 파계”라는 죄에 대한 대가이다.
이처럼 제11편에는 인 간의 죽음, 질병, 홍수 등 미래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
이러한 불행이 낙원을 잃어 버린 실낙원의 상황이다.
이제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은 질병에 고통스러워하며 임 박한 종말의 시간 때문에 비존재, 즉, 자신의 무화(無化)에 대해 불안하게 만든다 (바르트, 창조2 683).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카인의 살인, 대홍수와 노아 의 방주 등도 밀턴의 실낙원 제11편에서 예언의 내용으로 전달된다. 다음으로 실낙원 제12편에서는 미가엘이 아브라함과 예수에 대해 예언한 후, 아담과 하와를 낙원 밖으로 인도하는 것이 다뤄진다.
밀턴의 실낙원 제12편 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에게 천사도 마지막으로 답한다./이것을 배웠으니, 그대는 지혜의 극치에/이르렀도 다. 이보다 더 높은 것은 바라지 말라./모든 별의 이름을 알고, 모든 하늘의 능력 들,/모든 심연의 비밀들, 모든 자연의 일들,/하늘과 공중과 땅이나 바다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위업들을 알더라도, 또한 이 세상의 온갖 부를/다 향수하고, 모든 지배권, 즉 한 나라를 다 얻더라도, 다만 그대의 지식에 부합되는/행위를 더하고, 이에 믿음 을, 믿음에 덕을,/덕에 인내와 절제를, 절제에 사랑을, 그밖의/일체의 영혼인, 자비라 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랑을 더하라./그러면 그대 이 낙원을 떠나도 싫지 않을/것이 니, 한층 행복한 낙원을 그대 마음속에/갖게 되리라. 정해진 시간이 우리의 출발을/ 재촉하니, 이젠 이 전망의 꼭대기에서 내려가자. (밀턴의 실낙원 제12편 부분)
위에 인용된 제12편에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에게 대천사 미가엘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언하는 부분이다.
밀턴의 실낙원 제12편 은 이 작품 전체의 마지막 부이다.
그러면서 실낙원의 궁극적인 주제의식이 나 타나기도 한다.
주제의식은 미가엘의 말을 통해서 드러난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 에게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한 이유가 여기서 밝혀진다.
미가엘 은 “지혜의 극치”, 즉, “하나님의 위업”을 다 알게 되거나, “부”와 “지배권”을 모 두 얻더라도, “지식에 부합되는/행위를 더하고, 이에 믿음을, 믿음에 덕을,/덕에 인 내와 절제를, 절제에 사랑을, 그 밖의/일체의 영혼인, 자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 랑을 더하라”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미가엘은 인간에게 지식만을 추구하지 말고, 그에 부합하는 실천을 더하라고 조언한다.
나아가, 그러한 실천에는 신앙, 인내, 절 제, 사랑, 그리고 자비를 더하라고 조언한다.
지식을 많이 가진 자는 그것으로써 권력을 얻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면서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이는 그것을 경 계한 것임을 미가엘은 가르쳐 준다.
또한 낙원으로부터 추방된 이후에도 자비를 베풀면 다시 낙원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 준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미가 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쳐주는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밀턴이 독자에게 전달하 고자 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못하도록 금한 것은 사탄이 짐작한 바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처럼 지혜로워져 하나님의 지위를 넘볼 것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자발적인 선택이길 원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도 자유에서 나오며, 소명에 대한 순종도 자유에 서 나온다(바르트, 창조4 126).
자유로운 인간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끝까 지 존재한다(바르트, 창조4 127).
밀턴의 실낙원은 이와 같은 자유의 신학적 문제를 세심하게 다룬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은 한편 사귐, 즉, 공동체 안에서 자유를 누리길 원해서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에게 부를 때 항상 동료를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 등 타인과 함께 서로 존중하는 관계를 원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상대자라는 것은 인간성이 처음부터 이웃됨 을 의미한다(바르트, 창조4 172).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는 자유는 공동체에서 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바르트, 창조4 173).
미가엘이 “자비라는 이름으로 불 리는 사랑”을 지식보다 강조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긴 자유가 공동체 에서 실현되는 자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미가엘이 사랑의 실천으로서의 “지식”에 부합되는 “행위”를 강조한 것은 공동체 안에서의 봉사를 의미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바르트 역시 삶을 향한 자유는 인간이 삶을 하나님이 대여하 신 것으로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자유라고 하였다(창조4 447-62).
즉,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맡긴 의미는 자비로서의 사랑을 타인에게 베풂으로써 하나님의 위업에 봉사하라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밀턴의 실낙원은 인간의 원죄와 그 대가로서의 낙원 상실을 형상 화하고 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시 낙원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미가엘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노래한 대서시라고 할 수 있 다.
밀턴의 복낙원이 후속작으로 창작될 수 있던 실마리가 실낙원의 결말에 내포되어 있던 것이다
Ⅲ. 이상의 실낙원
1. 이상의 일생과 실낙원
이상은 1910년 경성부 통동에서 아버지 김연창과 어머니 박세창 사이에서 장 남으로 태어났다.
1913년 이상은 총독부 상공과 관리였던 백부 김연필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1926년에는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하였고, 1929년에는 수석 으로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발령났다. 1930년에는 조선 국문판에 12월 12일을 연재하였고, 이해부터 객혈을 하면서 폐결핵 증세가 시작 되었다.
1931년에는 조선과 건축에 「이상한 가역반응」 등의 시를 발표하였지만, 폐결핵이 악화되었다.
1933년에는 조선총독부 기수를 사직하고, 황해도 배천에서 요양을 하다 기생 금홍과 인연이 되었으며, 문단에서는 구인회에 가입하였다.
정지 용의 도움으로 가톨릭 청년에 「꽃나무」, 「이런시」 등을 발표하였고, 이즈음 구 본웅의 부친 소유이자 명동성당에 편집실을 두었던 ‘朝鮮基督敎 彰文社’에 근무 하면서 이상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김승구 163).
1934년에는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으나, 독자들의 항의로 중단하였다.
1935년 에는 성천 등을 유랑하며 시 「정식」, 수필 「산촌여정」 등을 발표하였다.
「산촌여 정」에 「누가복음」을 다독하였다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에, 이상이 ‘四史聖經 倂 合 宗徒行傳’ 또는 성경젼서 또는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를 읽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전계성 11).
1936년에는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 창간호를 발간하였고, 「지주회시」, 「날개」,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뿐만 아니라 연작시 「역단」, 「위독」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변동림과 결혼하 고 동경으로 건너가 삼사문학 동인과 어울렸다.
그러나 1937년 사상 혐의로 동 경 니시간다 경찰서에 피검된 후 조사를 받다 폐결핵이 악화되어 동경제국대학 부 속병원으로 옮겨졌고, 「동해」, 「종생기」를 발표하였지만, 운명하였다.
이상의 실낙원은 사후에 유고로 발표되었다.
이상의 실낙원은 밀턴의 실 낙원의 제목을 차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낙원 상실 의식을 여섯 단편, 「소녀」, 「육 친의 장」, 「실낙원」, 「면경」, 「자화상」, 「월상」의 연작(連作)으로 구성되었다.
다 음 장에서는 이상의 실낙원의 여섯 단편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이상의 실낙원의 핵심 내용과 주제 의식
이상의 실낙원의 첫 번째 작품은 「소녀」이다.
「소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소녀는 확실히 누군가의 사진인가 보다. 언제든지 잠자코 있다.//소녀는 때때로 복통 이 난다. 누가 연필로 장난을 한 까닭이다. 연필은 유독하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탄환을 삼킨 사람처럼 창백하고는 한다.//소녀는 또 때때로 각혈한다. 그것은 부상한 나비가 와서 앉는 까닭이다.//[. . .]//그리고 허다한 독서가 시작된다. 덮은 책 속에 혹은 서재 어떤 틈에 곧잘 한 장의 ‘얇다란 것’이 되어버려서는 숨고 한다. 내 활자 에 소녀의 살결 냄새가 섞여 있다. 내 제본에 소녀의 인두 자죽이 남아 있다.[. . .] 내 자궁 가운데 소녀는 무엇인지를 낳아놓았으니―그러나 나는 아직 그것을 분만하 지는 않았다. 이런 소름 끼치는 지식을 내어버리지 않고야―그렇다는 것이―체내에 먹어 들어오는 연탄처럼 나를 부식시켜 버리고야 말 것이다.//나는 이 소녀를 화장 해 버리고 그만두었다. (이상의 「소녀」, 실낙원 부분)
이상의 실낙원의 첫 작품 「소녀」는 이상의 여성적 자화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신범순, 구인회 371).
이상의 작품세계 전체를 조망해 보았을 때, ‘기독’과 관련된 시편들에서 그는 자신이 폐병을 앓으며 죽어가는 것이 타락한 인류의 역사 를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죽어가던 기독과 같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이상의 작품들 중 “기독” 또는 “크리스트”라는 단어가 직접 쓰인 예로 시 가운데는 「각혈의 아침」, 「내과」, 「이인」1·2, 「육친」 등이 있으며, 수필로는 「얼 마 안 되는 변해」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시 「오감도 시제15호」, 소설 「12월 12 일」, 「지주회시」, 수필 「산촌여정」 등, 기독교 문화의 상징 체계가 차용된 후 전 유되어 재창조된 작품이 다수 존재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상은 폐결핵을 앓는 자신을 타락한 인류를 위해 십자가의 희생양이 된 기독에 견주었다.
김기림이 「고 이상의 추억」에서 이상을 추도하며, 현대에 “십자가를 걸머지고 간 ‘골고다’의 시 인”이라고 의미부여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성경에서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주와 빵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는데,포도주는 예수의 피를, 빵은 예수의 살을 상징한다. 이것을 종교적으로 의례화한 성찬례(聖餐禮)는 예수의 피와 살을 받아먹음으로써 예수와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이다.
그렇게 인간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성부와 성자의 영이 인간 자신 안에 있게 된다(바르트, 말씀前 574).
기독교에서는 신앙인이라면 누 구나 자신의 자아를 버리고 예수와 같아지려고 해야 한다.
누구나 저마다의 십자 가를 지고 예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그리스도인이 지는 자신의 십자가는 예수의 십자가와의 동등성 안에서가 아니라 유사성 안에서이다(바르트, 화해2 834).
이러한 신학적 논리에 따라, 이상이 자신을 기독으로 본 것은 타당한 일이 다.
전기적으로 이상이 기독교 신자였던 것은 아니다. 또한 문학적으로도 그의 작 품이 신앙시나 종교시인 것도 아니다.
다만, 신학적 논리를 바탕에 둔 문학적 상상 력으로 이상의 ‘기독’ 관련 작품들은 쓰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이 신학과 충 돌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갈등, 소멸성, 고통, 어둠에의 참여 등 을 상징하는데, 비신자라 할지라도 한 시대의 고난 때문에 죽음을 향해갔다면 십 자가를 졌다고 볼 수 있다(바르트, 화해2 840).
그러므로 이상이 폐결핵으로써 죽음을 향해간 것을 한 시대의 고난으로서의 십자가를 졌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이상은 기독으로서 자신이 짊어진 소명은 극한의 글쓰기와 독서라고 믿었다(바르트, 화해2 840).
그것은 ‘시인-학자’로서의 소명이었다고 의미부여될 수 있다.
그러한 맥리에서 이상이 서구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형상화한 최고의 고전이자 지식의 문제를 다룬 밀턴의 실낙원과 상통하는 주제의식으로 실낙원 이라는 유작을 남긴 것은 한 작가의 내적 논리 안에서 필연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 다.
「소녀」에서는 글쓰기를 상징하는 시어 “연필”, “활자”, “제본”, 그리고 독서를 상징하는 시어 “독서”, “책”, “서재” 등의 시어가 쓰이고 있다.
이 시에서는 이상 의 ‘시인-학자’로서의 상이 “소녀”에게 투사된 후 여성적으로 변용되고 있다.
이러 한 점이 「소녀」의 “소녀”가 서정적 주체 “나”의 거울상으로서의 분신적 존재로 해 석될 수 있게 한다.
한편 “소녀”는 이 작품의 주제 의식에도 지식의 문제가 내포 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예컨대, 글쓰기의 상징인 “연필”은 “탄환”만큼이나 “유독”하여 “소녀”로 하여 금 “각혈”하게 만든다.
“연필”로 “장난”을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난”은 진실 성이 결여된 것으로서의 거짓이라고 볼 수 있다면,
악의 지배를 받은 글쓰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신학적으로 악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독”한 “연필”은 타락한 지식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 한 타락한 지식에 대한 문제 제기는 밀턴의 실낙원에서 선행되었다.
선에 대한 지식만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써 악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인간이 낙원으로부터 추방되어 던져진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다.
이상은 바로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악에 대한 지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부상”당한 “나비” 때문에 “각혈”하는 “소녀”로 형상화한 것이다.
“나비”는 원형 상징적으로 영혼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상의 시 「나비」에서도 “나비”는 같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시의 “나비”는 병 든 영혼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소녀」에서 “나”는 “소녀”를 “화장(火葬)”하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소 녀”가 “나” 안에 낳아놓은 것은 “소름 끼치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름 끼치는 지식”이란 밀턴의 실낙원에서의 ‘악에 대한 지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분만”하지 않고 “화장”한다.
“화장”은 기독교적 선 악관에서 악에 대해 심판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선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인간이 낙원으로부터 추방되 었다는 주제 의식에서 밀턴의 실낙원과 이상의 실낙원의 「소녀」는 유사한 면 이 있다.
그러나 이상의 실낙원이 밀턴의 실낙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와 대신 “소녀”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상의 실낙원에서 “소녀”는 “누군가의 사 진”이라는 것은 분신적 존재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밀턴의 실낙원 에서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로 빚어졌다는 데 상응될 수 있다.
이어서 하와가 지식 의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타락하게 되는 것에 상응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녀”가 “유독”한 “연필”에 찔려 “각혈”을 한다는 것,
둘째, “제본”에 “소녀”의 “인두 자죽”이 있다는 것,
셋째, “허다한 독서”가 “소름 끼치는 지식”을 전달한다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내용들은 자비로운 사랑 없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맹목적인 지식의 추구가 주는 해악을 경계해야 한다는 밀턴의 실낙원의 주제 의식을 암시적으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 가, “소녀”와 “나”가 불화하는 것도 밀턴의 실낙원에서 지식의 열매를 따 먹은 후, 아담과 하와가 서로 책임을 전가하여 다투는 모습에 상응될 수 있다.
지금까지 예증한 바와 같이 이상의 실낙원 중 「소녀」는 밀턴의 실낙원와 심층적 차원 에서 닿아있지만, 20세기 식민지 조선의 ‘시인-학자’로서의 이상의 자화상이 투사 되어 새롭게 재창조되었다.
다음으로, 이상의 실낙원의 두 번째 작품은 「육친의 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에 혹사한 한 사람의 남루한 사나이가 있었다. 다만 기독에 비하여 눌변이요. 어지간히 무지한 것만이 틀린다면 틀렸다./연기오십유일./나는 이 모조기독을 암살하 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 일생을 압수하려는 기색이 바야흐로 농후 하다./한 다리를 절름거리는 여인.―이 한 사람이 언제든지 돌아선 자세로 내게 육 박한다. 내 근육과 골편과 또 약소한 입방의 청혈과의 원가 상환을 청구하는 모양 이다. 그러나―내게 그만 한 금전이 있을까. 나는 소설을 써야 서푼도 안 된다. 이 런 흉장의 배상금을―도리어―물어내라 그리고 싶다. 그러나―/어쩌면 저렇게 심술 궂은 여인일까. 나는 이 추악한 여인으로부터도 도망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이상 의 「육친의 장」, 실낙원 부분)
이상의 실낙원 중 「육친의 장」에서는 “기독”이라는 시어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기독(基督)”은 그리스도의 음역(音譯)이다.
그리스도의 의미는 ‘기름 부음 을 받은 자’, 즉, ‘구세주’이다.
밀턴의 실낙원에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첫째, 하 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으며,
둘째, 천사와 사탄과의 전쟁에 뛰어들어 승리로 이끌고,
셋째,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 먹은 인간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삼아 스스로 인간이 되어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상의 실낙원 중 「육친의 장」에서도 “기독”, 즉, 예수가 등장하는 것은 밀턴의 실낙원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육친의 장」에서의 예수는 전도(轉倒)된 예수, 즉 “모조기독”으로 형상화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예컨대, 「육친의 장」에서는 “기독”에 “혹사(酷似)”한, 즉, 매우 유사한 “사나 이”가 바로 “모조기독”이다.
그는 “눌변”이고 “무지”한 “모조기독”이다.
“모조기 독”은 기존 연구사에서 일반적으로 이상의 생부 김연창으로 추정되어 왔다.
이와 같이 이상의 전기(傳記)가 시 해석에 참조는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상의 실낙 원이란 작품 전체가 사실성이 아니라 상징성 위에 창작되었다는 점이 분명히 고 려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조기독”은 사실적 차원보다 상징적 차원에서 해 석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모조기독”은 사탄의 우두머리로서 밀 턴의 실낙원에 나오는 “마왕”과 같은 상징적 위상을 지니는 것으로 해석될 여 지를 가정해 볼 수 있다.
악마의 특성은 무이다(바르트, 창조3 730).
무는 거짓 으로 실존하며, 실체와 인격을 갖추고 하늘나라와 유사한 나라를 세워 악령을 대 표자로 세운다(바르트, 창조3 735). 여기서 “모조기독”이 바로 “기독”과 “혹사” 한 모습, 즉, 위장한 사탄의 모습으로 상징화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육친의 장」에서 “나”는 이 “모조기독”을 “암살”해야만 한다고 진술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일생을 압수”하려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는 “모조기독”이 자신의 존재를 무화하려는 악마적 기운을 끼친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때, 이상의 시세계 전체의 상징적 맥락에서 “나”는 자신이 “기독”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이상은 폐결핵을 앓으며 죽어가 는 자신이 타락한 인류의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어간 “기독”이라는 의식을 표현하였다.
그러한 맥리(脈理)에서 이 시의 심층에는 ‘아버지=모조기독’ 대(對) ‘나=진짜 기독’이라는 이항대립적 구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육친의 장」에서 ‘나’가 “모조기독”을 “암살”하려는 것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 도가 사탄을 물리치는 것 또는 악을 심판하는 것에 비견될 수 있다.
악령을 추방 하는 것의 본질은 가장 근본적인 거짓말에 대한 응징이다(바르트, 창조3 728).
“모조기독”은 그 존재 자체가 거짓이기 때문에 응징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무, 즉, 악마를 심판한다(바르트, 창조3 390).
그것은 악마가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바르트, 창조3 738).
그러므로 이러한 신학적 논리에서 ‘나’는 “모조기독”을 “암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조기독”을 “암살”하는 것은 악을 심판하여 거짓을 물리치고 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밀턴의 실낙원에서도 대천사의 군대와 예수가 악의 세력 인 사탄과 전쟁하여 이기는데, 이와 비슷한 맥리라고 볼 수 있다.
「육친의 장」 중반부에는 “나”를 위협하고 파멸로 몰아가는 “절름거리는 여인”, “추악한 여인”, “심술궂은 여인”이 등장한다.
이 “여인”은 일반적으로 “모조기독” 의 아내이자, “나”의 어머니로 해석된다.
기존의 연구사에서는 그 “여인”이 이상의 친모 박세창인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전기적으로 이상은 백부 김연필에게 입 양된 이후에도, 장남으로서 친부모를 경제적으로 부양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에서 “여인”은 “나”에게 “원가 상환”을 요구하지만 “돈”이 없 는 “나”는 오히려 “배상금”을 받아야 한다고 진술한다.
“나”를 이처럼 착취하는 “여인”으로부터 “도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처럼 “여인”이 악의 표상으로 상징된 것을 밀턴의 실낙원과 견주어 볼 수 있다.
밀턴의 실낙원에서도 하와는 사탄이 들어간 뱀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과 아담을 파멸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악에 대해 일깨웠으며 원죄의 시초가 되었다.
밀턴의 실낙원에 견주어 볼 때 「육친의 장」의 “여인”은 “하와”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상징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육친의 장」에서 “나”는 “지 능”을 “포기”한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밀턴의 실낙원에서 선과 악에 대한 지식 을 모르는 것이 낫다는 구절과도 의미 면에서 유사하다.
다음으로 이상의 실낙원의 세 번째 작품 「실낙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천사는 아무 데도 없다. ‘파라다이스’는 빈터다./나는 때때로 2,3인의 천사를 만나는 수가 있다. 제각각 다 쉽사리 내게 ‘키스’하여 준다. 그러나 홀연히 그 당장에서 죽 어버린다. 마치 웅봉처럼―//천사는 천사끼리 싸움을 하였다는 소문도 있다.//[. . .]// 천사는 왜 그렇게 지옥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지옥의 매력이 천사에게도 차차 알 려진 것도 같다.//천사의 ‘키스’에는 색색이 독이 들어 있다. ‘키스’를 당한 사람은 꼭 무슨 병이든지 앓다가 그만 죽어버리는 것이 예사이다. (이상의 「실낙원」, 실낙 원 부분)
이상의 실낙원 중 「실낙원」은 제목이 표제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여섯 연 작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파라다이스’는 빈터” 라는 구절 자체가 “실낙원”이라는 낙원 상실 의식을 표현한다.
“파라다이스”는 신 학적으로 하늘나라로 해석될 수 있다.
성경에는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 또 는 천국이 어떠한 곳인지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다만,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마태복음」 13장 33절)와 같이 주로 ‘하늘나라는 ~와/과 같다.’라는 통사구 조를 통해서 비유로서 제시되고 있다.
신학적으로 하늘나라는 우선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이다(바르트, 창조3 612).
핵심은 하늘나라가 인간의 땅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다(바르트, 창조3 613).
그러므로 땅의 인간에게 오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나라이다(바르트, 창조3 663).
주기도문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담고 있는 의미가 바로 하늘나라가 인간의 땅으로 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해진다.
예 수의,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통치는 하늘 위에 있는 세계를 요구하기 때문에 하 늘나라라고 불린다(바르트, 창조3 507).
요컨대,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로서 이 땅의 인간에게 오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이 다.
그런데, 이상의 「실낙원」에서 “천사”가 부재한다는 진술은 맥리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또한 부재하는 상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실 낙원」의 시공간은 하나의 “지옥”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다.
이상의 「실낙원」에서는 “천사”의 부재 또는 “천사”의 타락이 진술되고 있는 것을 보다 깊이 살펴보기로 한다.
천사와 악령은 각각 창조와 혼돈, 은혜와 무, 선 과 악, 생과 사, 빛과 암흑, 구원과 파멸에 상응한다(바르트, 창조3 726-27).
그 런데, 이상의 「실낙원」의 “천사”는 반대로, 무(無), 사(死), 파멸에 상응한다.
이러 한 맥락에서 이상의 「실낙원」의 “천사”는 타락한 천사로서의 사탄이라고 볼 수 있 다.
그러나 사탄은 악한 천사가 아니다.
하늘과 지옥 사이에 공통분모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천사와 사탄 사이에도 아무런 공통분모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사탄의 본질은 하나님 또는 천사와 대립하고 자신이 우위에 서려는 데 있다(바르트, 창조3 725-26).
그러므로 이상의 「실낙원」에서 “천사”의 부재와 타락이 거론되 는 것의 의미는 이 시의 시적 주체가 “천사”로 불리는 그 대상과 대립 관계에 있 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는 “천사”의 악으로의 타락을 주제로 한다기보다는 대립 관계, 즉, 관계상에서의, 진실한 사랑의 부재를 주제로 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기존의 연구사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상의 실낙원에서 “키스”에 “독”이 든 “천사”는 유곽의 여인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었다.
「흥행물천사」의 “천사”가 유 곽의 여인을 연상되게 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이다.
그렇지만, 이상의 「실낙원」 에서의 “천사”는 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밀턴의 실낙원의 사탄과 같이 타락한 천사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지옥”을 좋아한다든지, “병”을 옮겨 사람을 죽게 한다든지 하는 특징, 즉, 신학적으로 무성(無性)이 사탄과도 같기 때문이다.
밀턴의 실낙원에도 라파엘, 미가엘, 가브리엘 등 다양한 천사들이 등장한다.
또한 하나 님에게 반역한 천사인 사탄도 등장한다.
이 시점에서 사탄도 처음에는 천사였다는 것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상의 실낙원에서 “천사는 천사끼리 싸움을 하였다는 소문도 있다.” 라는 구절은 밀턴의 실낙원의 전쟁 장면에 상응한다.
밀턴의 실낙원 가운데 제6편에서는 가브리엘, 미가엘, 라파엘이 모두 나서서 사탄과 전쟁을 한다.
이 전 쟁에 예수가 참전함으로써 사탄에 대해 승리를 거둔다.
성경에서는 「요한계시록」 12장 7절과 「마가복음」 1장 2절에 이러한 전쟁이 묘사된다.
이상의 「실낙원」에서 전쟁은 “소문”으로 소략하게 다뤄진다.
그렇지만, 이 “싸움”에 대립자으로서의 사 탄의 본질이 내포되어 있다.
사탄은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 특히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생명 파괴자로서의 영원한 죽음을 맞게 하는데(바르트, 창조3 110), “싸 움”을 하는 “천사”는 사탄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이상의 「실낙원」은 실낙원 전체의 표제작으로서 “천사”가 없는 “파라다이 스”, 즉,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현세, 사탄이 지배하는 현세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요컨대, 이상의 「실낙원」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폭로이자 낙원 상실 의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밀턴의 실낙원의 주제 의식에 직 접적으로 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
차이점은 밀턴의 작품과 달리 구원의 메시지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한 이유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폐결핵 환자로서의 이상의 체험 에는 희망의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 이상의 실낙원의 네 번째 작품 「면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철필 달린 펜 축이 하나, 잉크병. 글자가 적혀 있는 지편. (모두가 한 사람치.)/부근 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읽을 수 없는 학문인가 싶다. 남아 있는 체취를 유리의 ‘냉담한 것’이 덕(德)하지 아니하니, 그 비장한 최후의 학자는 어떤 사람이 었는지 조사할 길이 없다. 이 간단한 장치의 정물은 ‘투탕카멘’처럼 적적하고 기쁨 을 보이지 않는다.//피만 있으면 최후의 혈구 하나가 죽지만 않았으면 생명은 어떻 게라도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이상의 「면경」, 실낙원 부분)
「면경」 역시 덕 없는 지식의 해악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밀턴의 실 낙원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면경」은 이상의 실낙원의 여섯 단편 가 운데 자비 없는 지식이 초래한 해악이라는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한편, 「면경」은 ‘거울’에 비친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바르트의 신학 적 관점에서 시적 주체가 자기이해(‘Selbstverständnis’, 화해1 774)를 구하고 있 다고 해석될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이 자신을 타락한 인간으로 자기이해를 하는 것 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받아들인 것이다(바르트, 화해1 774).
그렇기 때문에 「면경」에서는 지식의 해악을 다루는 데 있어 자아비판적 어조가 강하게 나 타난다.
이 시에서 “펜”, “잉크병”, “지편” 등은 글을 쓰는 지식인을 환유적으로 상징 하는 시어들이다.
이상 자신의 ‘시인-학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 “면경”이 라는 소재를 통해 전개된 것이 바로 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은 자신이 이 시대를 위해 십자가를 진 기독으로서 학문의 첨단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 니고 있었다.
그러나, 학문의 첨단에 서고자 했던 ‘시인-학자’로서의 자화상은 “읽 을 수 없는 학문”, 즉, 지나치게 난해하여 누구로부터도 이해받을 수 없는 “학문” 을 하는 모습으로 반성적으로 성찰된다.
“투탕카멘”, 즉, 고대 이집트의 미라처럼 “생명”과 “기쁨”을 잃어버린 “학자”가 시적 주체의 지식인으로서의 자기반성적인 자화상으로 거울 위에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한 “학자”는 마침내 미래에 대한 희 망 없는 “최후의 학자”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이 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구절은 “‘냉담한 것’이 덕하지 아니하니”라고 판 단된다.
“냉담한 것”은 다름 아닌 거울 위에 비친 시적 주체의 자화상이다.
그러므 로 “‘냉담한 것’이 덕하지 아니하니”는 지식은 있으되 덕이 없는 ‘시인-학자’를 가 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읽을 수 없는 학문”에 “덕”이 결핍되어 있다는 시적 주체의 깨달음은 밀턴의 실낙원의 제12편에서 지식을 추구하더라도 덕과 사랑과 자비를 함께 추구하라는 대천사의 가르침과 완전히 상통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후의 학자”는 밀턴의 실낙원에서 시종일관 경고하는,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신에 도전하기 위해 끝없이 지식을 추구하는 자 로 볼 수도 있다.
그러한 욕망을 보이는 것은 사탄이었다.
이미 높은 자리에 있으 면서도 더 높은 자리로 오르려는 욕망에 항상 결핍감을 느끼는 사탄이다.
“덕”이 결핍된 “학문”을 하는 “최후의 학자”에게 “투탕카멘”처럼 생명력이 없는 이유가 끝없는 욕망의 갈증 때문일 수 있다.
이상의 「면경」은 단순히 난해한 학문의 해악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이성중심 주의가 팽배한 과학의 시대에 생명감을 잃어버린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의 「면경」과 밀턴의 실낙원은 공통적으로 이성의 시대, 과학의 시 대에 자비를 잃어버린 지식의 추구를 냉철하게 비판하고 있다.
다음으로 이상의 실낙원의 다섯 번째 작품은 「자화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는 폐허다. ‘피라미드’와 같은 코가 있다. 그 구멍으로 ‘유구한 것’이 드나들고 있다. 공기는 퇴색되지 않는다. 그것은 선조가 혹은 내 전신(前身)이 호흡하던 바로 그것이다. 동공에는 창공이 응고하여 있으니 태고의 영상의 약도다. 여기는 아무 기 억도 유언되어 있지는 않다. 문자가 닳아 없어진 석비처럼 문명의 ‘잡답한 것’이 귀 를 그냥 지나갈 뿐이다. 누구는 이것이 ‘데드마스크’라고 그랬다. 또 누구는 ‘데드 마스크’는 도적맞았다고도 그랬다./주검은 서리와 같이 내려 있다. 풀이 말라 버리 듯이 수염은 자라지 않는 채 거칠어 갈 뿐이다. (이상의 「자화상」, 실낙원 부분)
「자화상」은 「면경」이 시적 주체의 거울상으로서의 자화상을 다룬 작품이었다 는 점에서 연결된다.
두 작품은 연속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자화상」 의 “폐허”라는 시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작품은 문명의 불모성 또는 인간의 불모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전작인 「면경」에 이미 제시되어 있 다.
바로, “읽을 수 없는 학문” 즉, 자비 없는 지식의 추구가 “폐허”의 원인이다.
「자화상」에서 문명의 불모성은 “폐허”가 된 “피라미드”로, 인간의 불모성은 “풀이 말라 버”린 “수염”으로 형상화된다.
이상의 「자화상」은 시간적 배경이 “태고(太古)”로 설정되어 있다.
밀턴의 실 낙원의 시간적 배경은 “한 처음”, 즉, 태초로부터 시작되어 「창세기」 전반부(前 半部)까지 이르는 시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창세기」는 크게 1부(1장~11장) 태고 사(太古史)와 2부(12장~50장) 족장사(族長史)로 구분된다.
밀턴의 실낙원은 「창 세기」의 1부 태고사까지 다루고 있다.
이러한 시간적 배경을 기준으로 비교할 때, 이상의 「자화상」과 밀턴의 실낙원 두 작품 사이에 유사점이 발견된다.
이상의 「자화상」에서 “태고의 영상의 약도”라는 시구는 창세기의 신화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한 표현이다.
「창세기」는 태고를 신화적으로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다.
이 시점에서 “선조”와 “내 전신”이 은유되고 있는 이유를 추론해 볼 필요가 있다.
바르트는 아담이 행한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의 모든 단계마다 되풀 이했음을 지적한다(화해1 234).
유사한 맥락에서 “선조”와 “내 전신”이 은유되 는 것은 원죄의 반복성 혹은 역사의 반복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 다. 「자화상」에서의 “기억”도 “유언”되지 않는다는 시구도 「창세기」가 문자로 기록된 역사의 시간이 아니라 신화의 시간이라는 것과 유사하다.
밀턴의 실낙원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한 이후, 제11편에서 더 이상 인간 은 “생명 나무” 열매를 따 먹을 수 없게 되며,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을 일궈 먹고 살아가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 죽음, 질병, 재난이 유입된다.
낙원에 서 추방된 이후의 인간의 삶은 폐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의 「자화상」의 “폐허”의 불모성은 밀턴의 실낙원에서 인간이 낙원으로부터 추방된 이후의 상황 과 상통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낙원 추방의 원인이 공통적으로 지식에 대한 교만으 로부터 비롯된 죄였다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르트는 인간의 죄는 곧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비롯되며, 인간의 타락은 교만으로부터 비롯됨을 상기시 킨다(바르트, 화해1 773).
이상의 「자화상」이 밀턴의 작품을 전유한 부분은 “나”라는 1인칭을 통해 “폐허”의 이미지의 “나” 자신의 이미지를 중첩한다는 것이 다.
이상은 자기 자신을 인간을 실낙원의 풍경의 하나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상의 실낙원의 여섯 번째 작품 「월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주야나 늦어서 달은 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심통한 차림차림이었다. 만신창 이―아마 혈우병인가도 싶었다./지상에는 금시 산비할 악취가 미만하였다. [. . .] 달 은 제 체중에 견디기 어려운 것 같았다. 그리고 내일의 암흑의 불길을 징후하였다. [. . .] 달은 추락할 것이다. 지구는 피투성이 되리라./사람들은 전율하리라. 부상한 달의 악혈 가운데 유영하면서 드디어 결빙하여 버리고 말 것이다./이상한 귀기가 내 골수에 침입하여 들어오는가 싶다. 태양은 단념한 지상 최후의 비극을 나만이 예감 할 수가 있을 것 같다. [. . .] 새로운― 새로운― 불과 같은― 혹은 화려한 홍수 같 은―. (이상의 「월상(月傷)」, 실낙원 부분)
「월상」은 실낙원 연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대단원으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 다.
실낙원 연작 전체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 바로 「월상」이기 도 하다.
“월상”은 이상이 만든 조어(造語)로 판단된다.
“월상”의 뜻은 ‘달의 상처’로 해석된다.
“달”이 앓고 있는 “혈우병”은 피가 응고되지 않아 멈추지 않는 병이다.
이 시에는 “달”이 피를 흘리는 이미지가 형상화되어 있다.
또한 “달”의 “추락”으 로 “지구”도 “피투성”이 되는 이미지가 형상화되어 있다.
이러한 “피”가 낭자하는 이미지는 “악혈”이라는 시어에 함축되어 있다.
“월상”은 “홍수”의 이미지로 귀결 된다.
이처럼 “월상”의 이미지와 상상력은 밀턴의 실낙원 제11편의 “풀죽은 우 울증, 달의 저주받은 착란증”이란 구절과도 상당히 유사점을 지닌다.
기독교의 상징체계 내에서 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 린 피는 성혈(聖血)로서 인간의 죄를 씻어 준다.
반면에 하혈하는 여인은 생명력 을 잃어가는 여인이다.
「월상」의 피의 이미지는 지옥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사람들”이 “악혈” 가운데서 “유영”하면서 “전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계약 파기자가 되면서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범죄자로 존재하게 된다(바르트, 화 해1 152).
이렇게 저주받은 인간의 심연에는 공허한 것(Nichts) 즉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있게 된다(바르트, 화해1 152-53).
「월상」은 낙원 상실 이후에 저주받고 공허에 시달리며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비극을 그려 보인다.
「월상」은 「자화상」과 연결되며 밀턴의 실낙원 제11편과 주제적으로 연관된다.
밀턴의 실낙원의 제 11편에는 인간이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죄에 대한 응징으로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이후, 죽음, 질병, 홍수가 재앙처럼 넘쳐나게 되는 데 대한 예언이 나온다.
이상의 「월상」 역시, 죽음, 질병, 홍수 등의 재앙을 그려 보인다는 점에서 밀턴의 실낙원 의 제11편과 유사하다.
차이점은 이상의 「월상」은 1인칭으로 자기 자신을 재앙 가 운데 있는 인간으로 그린다는 점이다.
Ⅳ. 결론
밀턴의 실낙원과 이상의 실낙원의 공통점은 과학의 시대가 도래하고, 신 앙을 의심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바라보는 세계관이었다.
밀턴의 실낙원과 이 상의 실낙원은 각각 이성과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 인간은 타락하고 사랑은 부 재하는 폐허가 된 문명의 실낙원을 신화적 상징으로 그려 보였다.
그럼으로써, 밀 턴과 이상의 자신의 시대의, 낙원 상실 의식을 형상화하였다.
밀턴의 실낙원은 「창세기」에서 에덴동산을 잃어버리기까지의 과정을 극화하 여 상세하게 보여준다.
이상의 실낙원은 낙원을 상실한 이후의 상태, 낙원이 상 실된 상태를 보여준다.
밀턴과 이상의 실낙원에 나타난 창조, 하나님, 인간, 원 죄, 구원, 천사, 악마, 하늘나라 등을 해석하는 데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의 신학 적 개념을 원용하였다.
밀턴의 실낙원과 이상의 실낙원을 바르트의 신학적 관점에서 면밀히 분 석해 본 결과, 주제 의식 면에서 굉장히 깊은 상관관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밀턴 의 실낙원과 이상의 실낙원 두 작품은 모두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자비라는 이름의 사랑 없이, 무제한으로 지식을 추구하는 교만에 대해 경고하였다.
그러한 교만은 인간을 타락시켜 죄에 빠지게 하고, 그 대가로 인간은 낙원으로부터 추방 되어 죽음, 질병, 재앙 등의 비극을 겪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경고 는 역설적으로 낙원의 회복을 위해 사랑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메시지일 수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점은 밀턴의 실낙원이 낙원 상실 이후 에 구원에 대한 약속을 그려 희망적인 결말을 맺고 있다면, 이상의 실낙원은 낙 원 상실 이후 구원에 대한 약속 없이 비극적인 결말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밀턴 이 성경에 기반한 신화적 상상력의 대서사시를 그려낸 가운데 예수의 구원을 예언하고 있다면, 이상은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자기 자신을 신화적 상상력의 자화 상으로 그려낸 가운데 인간의 절망을 고백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두 작품 모두 결 론적으로 밀턴의 실낙원과 이상의 실낙원이 오늘날 우리에게 지식을 추구하 는 데서 인류 전체를 위한 자비로서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 다.
마지막으로, 바르트의 신학적 관점 이외의 다른 신학적 관점과의 논쟁에 대해 서는 차후 연구과제로 남겨 두기로 한다.
주제어: 존 밀턴, 이상, 실낙원, 칼 바르트,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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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Paradise Lost: From Karl Barth’s Theological Point of View: John Milton’s Paradise Lost and Lee Sang’s Paradise Lost
Juri Oh (Catholic Kwandong U)
both vividly portray the profound loss of paradise within a ruined civilization, one overwhelmed by the relentless forces of reason and science. In these worlds, where humanity is deeply corrupt and love is conspicuously absent, mythological symbols are employed to convey the overarching themes. These texts powerfully symbolize the profound sense of paradise lost in the respective historical and cultural contexts of John Milton and Lee Sang. The sophisticated theological concepts drawn from Karl Barth’s Church Dogmatics were meticulously applied to interpret the central ideas and themes within both John Milton’s and Lee Sang’s compositions. A close analysis from Barth’s theological perspective clearly demonstrates a deep and striking thematic correlation between the two works. Both John Milton and Lee Sang pointedly caution against the dangerous arrogance of pursuing knowledge without limit, devoid of love in the name of mercy, with the intent to dominate the world. Paradoxically, their poignant warnings may be interpreted as a compelling call for the restoration of love, which is deemed necessary to reclaim the lost paradise. The most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the two compositions lies in their conclusions: while John Milton’s work culminates in a hopeful tenor, offering a promise of eventual salvation after the tragic loss of paradise, Lee Sang’s work concludes in a deeply tragic manner, with no promise of salvation whatsoever. In conclusion, both John Milton and Lee Sang emphatically stress that in our relentless pursuit of knowledge, we must never overlook the essential importance of love, particularly as an expression of mercy toward all humanity.
Key Words: John Milton, Sang Lee, Paradise Lost, Karl Barth, Mercy
동서비교문학저널제69호
접수일 24.8.29 심사일 24. 9.9 계재확정일 24. 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