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2)/받은 글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21회
연로 관원의 대우가 융숭하였다. 그래도 근은 차마 바로 서울로 들어올 면목이 없어서 이리저리로 길을 돌아 간신히 수원(水原)까지 왔을 때에 희가 사람을 수원까지 보내어 성화같이 근을 재촉하고 근은 또 부명을 거스를 수 없다 하여 곧 서울을 향하여 한강에 다다랐다(漢江).
아비 희는 한강까지 친히 마중 나와서 근과 함께 밀실에서 종일 무슨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근이 곧 서울로 들어가는 길에 대궐로 향하여 빈례(賓禮)로 태조께 뵈오니 이것은 무른 첫 번 뿐이요, 둘쨋번 부터는 조그마한 벼슬아치로 칭신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태조대왕이 청하시는 대로 전국 명승지에 기(記)를 지어 올리고 고려 왕조의 역사를 편술한다는 핑계로 지제교(知製敎)라는 벼슬을 받았다.
이렇게 권근은 절을 헐었다. 이 일이 있은뒤로 부터 사람은 다 권근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침을 뱉았다. 그의 친구인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은 그의 훼절을 평하는 시를 지었는데 후에 그 자손이 후환을 무서워하여 불에 던진 것이 기구만 타버리고 나머지 세 짝만 남은 것이 이러하다고 한다.
이리하여 권근은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까지 되어 태조, 태종 두 분 대왕의 충실한 대서인(代書人)이 되었다.
그러한 권근의 손자요, 권 제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 권제도 세종의 사랑을 받아 일생 대제학(大提學)을 내어놓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권근이나 권제나 다 벼슬은 좋아도 재산은 없었다. 재산이라고는 남산 밑 비서감(秘書監) 동편에 태조 대왕께서 권근에게 하사하신 집 하나가 덩그렇게 있을 뿐이다. 이 집은 찾아 오는 사람 없기로 유명한 집이다.
권근이 한 번 절개를 굽히어 전국 선비가 고개를 돌린 뒤로부터 권근을 이 집에 찾는 사람이 없었다. 충주(忠州) 모옥(茅屋)에는 문전여시(門前如市) 하더니 장안갑제(長安甲第)에는 찾는 이가 없다고 세상은 권근을 비웃었다.
아무리 왕의 세력이 커도 인심은 어찌할 수 없었다.
장안에 벼슬하는 사람들 치고 누구는 고려 왕씨의 신하 아닌 이가 있으리요마는 다른 사람 훼절한 것은 그다지 심히 책망함이 없으면서 하필 권근을 책망함이 그리 심한가.
그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세상에서 평소에 권근에게 바라던 바가 큰 것이다. 비록 대세가 다변한 뒤에 그가 득려긍로 천운을 만호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모든 권세와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고 하늘은 무너질지언정 끝끝내 고절(苦節)을 지키다가 죽기를 바랐던 것이다.
둘째는 그가 예사 정치가나 관료가 아니요, 천하에 대의명분(大義名分)을 가르치던 사람인 까닭이다. ‘머리 허연 양촌(陽村)이 의리를 말한다면’하고 운곡(耘谷)이 빈정댄 것이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이런 연유로 남산 밑 권근의 구택인 후조당(後凋堂)은 권근의 생전에도 친구 아니 찾기로 유명하였거니와 그 아들 권제도 대제학이라는 맑은 벼슬을 하기는 하나 집현전(集賢殿)에서는 잘 고개를 들지 못하였고, 세상에서도 될 수 있는 대로 널리 교제하기를 꺼려 여전히 그 집은 찾는 사람 없는 일종의 흉가가 되었었고, 또 그 아들 권람(權擥)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권람으로 말하면 권근의 손자라, 권근 때부터 삼대나 지났으니 세상이 권근의 일을 잊을 만도 하건마는 그렇지를 아니하였다. 전하고자 하는 공명은 곧 잊혀지어도 잊어 주었으면 하는 허물은 전하는 것이다. 권람도 재주 있고 글 잘하고 하건마는 선비를 틈에 끼어지지를 아니하여 매우고격하게 살았다.
그뿐더러 세종께서 병환이 계시어 정사를 친히 보시지 못하게 된 때로부터는 권람을 권근의 손자라 하여 특별히 끌어 올릴 사람도 없고 또 웬일인지 나이 삼십 오세나 되도록 과거에는 연하여 낙제를 하게 되어 권람의 신세는 더욱 궁하게 되었다. 그 친구 서거정(徐居正)이 일찍,
"옛날 맹교(孟郊)가 낙제를 하고서 출문즉유애(出門卽有碍)하니 수위천지관(誰謂天地寬)고 하여 몸 둘 곳이 없는 듯이 슬퍼하더니 자네 지금 신세가 꼭 그러이 그려."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에 권람은 웃으며,
"팔잔걸 어찌하나."하고 태연하였다.
권람은 결코 녹록한 장부가 아니라고 서거정이 탄복하였다고 한다.
권람은 별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또 찾아갈 곳도 없어서 자기 집인 후조당 벼랑 위에다가 조그맣게 초당한 채를 짓고 소한당(所閑堂)이라고 부르고 거기서 혼자 글 읽기로 일을 삼았다.이 소한당은 후일에 세조 대왕이 임행한 일까지 있은 곳이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하여 수양 대군과 사귀게 되어 저주 수양대군 궁에 출입하게 되었다.
피차에 뜻이 맞아 수양 대군은 때때로 궁노(宮奴)를 시키어 남산골 권생원(權生員)댁에 식량을 보내었다. 권생원이라 함은 물론 권람을 가리킨 것이다.
이번 문종 대왕 임종에 소명이 내렸을 때에도 수양 대군은 권람에게 미리 말을 하였고 권람도 그 하회를 기다리노라고 사랑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것이다.
이윽고 수양 대군이 장히 불쾌한 얼굴로 사랑으로 나왔다. 원체 기골이나 몸집이나 남보다 큰이지마는 무슨 일에 성이 나서 밖으로서 들어올 때에는 몸이 더 커지어 방에 그득 차는 듯하였다.
<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22회>
권람은 일어서서 읍하여 대군을 맞으며, ‘벌써 대궐에서 나오이었소? 상감 환후 어떠하오시니까?’ 하고 슬쩍 눈치를 살피었다.
수양 대군은 상감 환후에 대해서는 대답도 없고,
"늙은 것들한테 보좌(輔佐)의 고명(顧命)을 내립시었다네."하고 아랫목에 앉는다.
"늙은 것들이라시니 누구를 말씀이오니까?"
"황보인(皇甫仁), 남지(南知), 김종서(金宗瑞)이런 것들이지 누구여?“
"황보인은 영의정이요, 남지는 좌의정이요, 김종서는 우의정이니 삼공(三公)이 보좌의 명을 받잡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하오니까."하고 권람은 슬쩍 한번 수양 대군의 비위를 건드리고 하희가 어찌되는가 하고 수양의 뒤룩뒤룩하는 눈자위를 본다.
수양은 벌떡 일어설 듯이 몸짓을 하며,
"이 사람, 자네마저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자네 마저 그 늙은 것들의 편당이란 말인가. 그따위 귀신 다 된 것들이 무엇을 한단 말인가."하고 소리소리 지르며 펄펄 뛴다.
권람은 수양이 자기의 놓은 덫에 걸린 것을 보고 속으로 웃으며, 그러나 겉으로는 가장 엄숙하게 무릎을 다시 꿇며,
"아니요, 소인이 황보인의 편당이 되는 것이 아니외다마는 달리는 그만한 중임을 말을 사람이 없길래 그리된 것이란 말씀이요."하고 또 한 번 단단히 수양 대군의 간을 건드리었다.
수양 대군은 그제야 권람의 말 뜻을 알아 듣는 듯이, 이 사람아 ", 글쎄 상감께서 그리하시는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하고 푹 누그러지며 권람을 바라본다.
"글쎄외다. 나으리 모르시는 일을 소인이 어찌 아오리까마는 막비천명이니 천명을 상감께선들 어찌하오리까. 모두 어수선한 일이요, 또 소인 같은 무리가 알 바는 아니나 나으리가 작히나 잘 알으시겠소. 이런 때에 여러 말하는 것이 다 긴 하지 아니한 일이요. 또 소인이 소간사도 좀 있으니, 소인 물러가오."하고 권람이 벌떡 일어나서 읍하고 물러나가려 한다.
권람의 말이 황당해서 무슨 소린지 알 수는 없으나 그래도 무슨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을 수양이 모를 리가 없다. ‘천명을 상감께선들 어찌하랴’하는 말이 수상하였다. 또 겉으로는 아무렇게 구는 듯한 권람의 일언 일동에는 다 무슨 의미가 있는 줄을 수양 대군은 미리부터 잘 알거니와 오늘은 특별히 권람의 말이 무슨 참언(讖言)같이 들리었다.
"이 사람 앉게.“
"아니요 일후 또 오지요.“
수양 대군의 만류도 묻지 아니하고 권람이가 부득부득 신을 신는 것을 보고 성급한 수양 대군이 참다 못하여 벌떡 일어나서 권람의 소매를 끌어당기어서,
"정경(正卿)이, 오늘 내가 꼭 자네를 붙들어야만 할 일이 있네." 한다. 정경(正卿)은 권람의 자다.
권람은 부득이한 듯이 수양 대군에게 끌리어 들어갔다.
수양 대군은 권람을 끌고 큰 사랑을 지나 안 사랑 가장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다. 권람은 수양 이끄는 대로 끌리어 들어갔다. 권람이 말 없는 술책은 생각하던 바와 같이 효과를 생하여 수양 대군의 흉중에는 자못 알 수 없이 풍랑이 일어난 모양이다. 무른 이 술책은 오늘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수양 대군은 술을 내오라 명하고는 좌우를 물리고 권람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마주 볼 뿐이요,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수양 대군은 권람이가 먼저 입을 열기를 바랐으나 권람은 아주 무심한 듯이 벽에 걸린 서화와 활과 전통, 검(劒) 등 속을 이것저것 돌아 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권람이가 진실로 무심할 리는 만무하다. 다만 수양 대군의 비위를 가장 힘있게 건드리어 성급한 그의 오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를 기다릴 뿐이다.
장차 조선 팔도를 흔들려는 큰 뇌성벽력과 폭풍광랑이 지금 이 자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벽상에 걸린 활시위가 스르릉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사람이 헛들음인가.
"여보게, 자네가 내게 할 말이 있지 아니한가. 있거든 하게."하고 수양 대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하는 수양 대군의 사색은 매우 은근하였다.
권람은 무엇을 주저하는 듯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모든 것은 나으리 마음에 있사외다."하고 대답하였다.
"하면 된다는 말인가?"
"그러하오이다. 잘하면 된다는 말씀이외다."
"자네가 나를 도우려는가?"
수양 대군의 이 말에 권람은 대답이 없다.
수양 대군은 초조한 듯이 권람이 손을 잡아당기며, 자네 오늘 나허구 맹학하려나? 나는 오직 자네를 믿으니 자네가 나를 도우려는가?"
그래도 권람은 대답이 없다.
수양 대군은 다른 손으로 권람의 다른 손을 마주 잡으며,
"왜 대답이 없는가? 내 인물이 부족하다는가, 또는 내 정성이 못 미쳐 그러함인가.“
수양 대군의 사색은 더욱 간절하여졌다. 그제야 권람이 수양 대군 앞에서 자리를 피하여 앉으며,
"나으리께서 그처럼 소인을 믿으신다면 인생(人生)이 감의기(感義氣)라니 소인이 견마지역(犬馬之役)을 다하오리이다."하였다.
권람의 허락하는 대답을 듣고 수양 대군은 극히 만족하여 다시 한 번 권람의 손을 힘있게 잡고는 이내 주안을 대하여 술을 마시었다. 큰일을 생각하면서도 만사를 잊은 듯이 술을 마시는데 수양 대군이나 권람은 행내기가 아닌 기상이 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23회>
상감이시오, 수양 대군에게는 친형님이 되시는 이의 목숨이 정각에 있는 이때에 술을 마시고 취흥이 도도하다 함은 심히 불충부제(不忠不悌)한 일이어니와 수양 대군이나 권람은 그런 것을 교계하도록 양심이 예민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동기에 이르러서는 두 사람이 다 달랐다. 수양 대군은 충효(忠孝) 같은 것은 남이 내게 대하여 가지기를 바랄 것이지마는 내가 남에게 대하여 가질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권람은 충효란 것은 할 형편이 되면 하여도 좋고, 못할 형편이 되면 말아도 좋은 것같이 생각한다.
이를테면 충효란 술과 같은 것이다.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은 것이다. 그러니까 권람의 생각에는 남이 내게 불충불효를 하더라도 ‘그러면 어떠냐’하고 치지도외하겠지마는 수양 대군은 그렇지 아니하여 자기의 불충불효는 용서하더라도 남이 내게 대한 불충불효는 추호만큼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술을 마신다기로 가슴에 큰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속까지 취할 리는 없었다. 그래서 겉으로 취한 눈을 무심히 굴리는 듯하면서도 피차에 서로 저편의 눈치를 엿보고 일시의 해학(諧謔)같이 나오는 말 한마디에서도 피차의 속을 들여다보려고 칼날 같은 마음이 저 편의 가슴 깊은 속으로 들락날락하는 것이다.
"무릇 큰일을 하는 법이 선살후생(先殺後生)이요, 먼저 살(殺)하는 후에 생하는 법이외다. 죽이는 일이 첫 일이외다.“
"꼭지를 먼저 따는 것이지요.“
"나으리께서 사냥을 아시니 만사가 사냥과 같습니다. 먼저 몸을 숨기어 가만히 엿본 뒤에 분명히 겨누어 번개같이 활을 당기는 것이요. 살이 맞은 뒤에는 크게 소리를 치는 것이요.“
이러한 말을 권람이가 수양 대군에게 한 것도 무른 취답에 섞였었다. 이런 기회 저런 기회에 지나가는 소리를 한마디씩 권람이가 던지면 수양 대군은 듣는 체 만체하는 동안에다 귀담아 듣는 것이다.
위선 몇 사람을 죽일 것, 죽일 때에는 꼭지 되는 큰 사람부터 먼저할 것, 죽이되 가만히 죽이고는 질풍같이 몰아 들어갈 것---이런 뜻을 수양 대군은 권람이가 지나가는 말로 던지는 말 속에서 다 알아들었다.
그뿐 아니라 그 먼저 죽여야 할 꼭지가 김종서(金宗瑞)인 것까지 이 자리에서 모르는 결에 말이 다 되었다. 수양 대군은 처음에는 황보인(皇甫仁)을 죽일 사람이 꼭지로 알았었다. 황보인이 영의정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에 대하여 권람은 ‘양호유환(養虎遺患)’이란 말을 슬쩍 한 마디 던지었다. 김종서의 별명이 ‘호랑이’이다. 이만하면 수양 대군은 김종서가 죽일 사람의 꼭지란 뜻을 알아들었다. 실상 무섭기는 김종서 하나다.
점점 이야기가 노골하게 되어 서로 꺼림이 없이 된다.
"이 일에는 세 가지 사람이 있어야 하오. 첫째는 모략(謀略)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용력(勇力) 있는 사람이니, 이 두 가지 사람은 일을 이루는 데 쓰오. 그러나 일이란 이루기보다도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요. 수성(守成)이 창업(創業)보다 어렵다는 것이 이를 두고 이른 것이요. 그런데 모사(謀士)와 용사(勇士)는 창업에 쓰지마는 수성지재는 따로 있는 것이요."하며 어떠한 사람을 구하여야 할 것도 말하였다.
"모사야 자네를 두고 달리 구하겠나마는 용사와 치평지재(治平之材)는 어떻게 구할꼬? 이것도 자네 방촌(方寸)에는 있을 것이니 아끼지 말고 말하소."하고 수양 대군은 다시 권람의 손을 잡았다.
수양대군의 말에 권람은,
"나으리아시는 바에 소인 같은 썩은 선비가 무슨 모략이 있으리까. 그뿐 아니라 매양 몸이 성치 못하니 모든 일이 다 귀찮을 뿐이외다. 남산 밑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소인의 일이외다.“
이런 말로 한 번 슬쩍 몸을 빼었다.
"그 웬 말인고? 자네는 천하 호걸이 많이 교유(交遊)하니까 사람을 많이 알 것이니 내게 말을 하게. 내가 오직 자네만을 믿는 뜻을 자네가 모르겠나. 만일 사양하는 말로나 모피하면 그것은 친구에게 대한 도리가 아닐세.
자네 말이 세 가지 사람이 요긴하다고 하였으니 심중에 먹은 사람이 없을 리가 있겠나. 자네 마음에 쓸 만한 사람이면 내가 쓸 것이요, 자네가 믿는 사람이면 내가 믿을 것일세. 원체 이런 일을 시작하려는 것이 자네 말을 듣고 하는 것이니까 무엇은 자네 말을 아니 듣겠나. 언청계종(言聽計從)할 것일세.“
권람의 목적은 수양 대군의 입에서 이러한 말이 나오게 하자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수양 대군이 자기를 믿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양 대군 자신의 높은 지위를 더 많이 믿었었다.
그러나 이미 보좌의 고명이 황보인, 남지, 김종서 등에게 내리었으니 이제 문종 대왕이 승하하시고 세자궁이 즉위하시는 날이면 수양 대군은 일개 권세 없는 종친에 불과할 것이다. 어제부터는 수양 대군은 자기 지위를 지혜와 힘으로 획득할 길밖에 없으니 이리되면 권람은 수양 대군에게 있어서 가일충 중요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수양 대군의 입으로 한 번 선언하게 하는 것이 권람 자신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하여서나 장차 일을 하여 갈 때에 자기의 말이 수양 대군에게 큰 위력이 되기 위하여서나 긴요하다고 권람이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수양 대군은 완전히 권람의 수중에 쥐어진 것이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24회>
이만하면 권람도 만족이다. 권람의 눈앞에는 자기의 부귀가 번쩍번쩍 빛나는 듯하였다.
"나으리가 그처럼 소인을 믿으시니 소인도 생각하는 바를 아뢰오리다.
첫째 모략 있는 사람으로는 한명회(韓明澮)만한 이가 없소이다."하는 권람의 말에 수양대군은,
"한명회---그 뉘 아들인가?"하고 묻는다.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오이다.“
"나이는 몇 살이나 되었나?“
"지금 서른 여덟이외다.“
"무슨 벼슬을 하나.“
"경덕궁직(敬德宮直)이요.“
"어? 경덕궁직?"하고 수양 대군은,
"이 사람아, 나이가 서른 여덟에 벼슬이 겨우 궁직이야? 허허허."하고 대소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권람은 정색하고 수양 대군이 웃기를 그치기까지 가만히 있었다. 수양 대군은 한참 웃다가 권람에게 대하여 미안한 생각이 나서 웃음을 그치고,
"그래, 그 한 무슨 횐가가 그렇게 모략이 용하단 말인가. 자네가 그만큼 칭찬하는 것을 보면 엄연하겠나마는 어떻게 출세가 늦은가?"하고 아직도 수양 대군의 입 언저리에는 억지로 누른 웃음이 늠실거리고 남아 있다.
권람은 그제야말을 이어,
"한생(韓生)의 재주는 옛날 관중(管仲)에나 비길까 지금에는 비길 사람이 없소이다. 나으리가 만일 치평대업(治平大業)을 하시려거든 한생이 아니면 불가하외다." 하였다. 수양 대군은 곧 송도(松都)에 사람을 보내어 한명회를 불러올리라 하고 다시 권람을 향하여,
"지금 공경(公卿)으로 있는 사람 중에는 쓸 만한 사람이 없을까?“
"우의정(右議政) 김종서(金宗瑞), 하지마는 김종서는 호랑이니까 호랑이는 길드는 법이 없소이다. 정분(鄭笨)이가 있으나 무해무익하니 말할 것 없고, 혹 반연이 있으시거든 정인지를 끌어 보시겨오.
첫째 인지는 명(明)나라 대관 중에 안면이 넓고 집현전에도 최항(崔恒) 이하로 인지의 당여(黨與)가 있으니 끌어 둘 만하외다.“
"인지가 내게로 끌릴까?" 하는 수양 대군의 말에 권람은 웃으며,
"인지는 절개보다도 부귀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외다."하였다.
수양 대군도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경덕궁직(儆德宮直) 한명회(韓明澮)는 벼슬은 미미하지마는 송도에서 아는 사람은 알았다.
“어 그 녀석한테 걸렸다가는 큰 코 떼네.”하는 것이 송도 사람들의 한명회 평이었다.
경덕궁 기와를 벗기어 팔아 먹는다는 둥, 궁 후원 나무를 찍어 팔아 먹는다는 둥 하는 소문도 한명회가 궁직으로 온지 석 달이 못하여 나기 시작하였다.
그 소문이 결코 헛소문은 아니었었다. ‘탐재기주색(貪財嗜酒色)’이라는 그의 특색은 이때부터 드러났었다.
한명회의 아내는 민중추대생(閔中樞大生)의 딸이다. 민대생의 사위가 넷이나 되는 중에 셋째인 한명회는 다른 동서들에게 업수이 여김을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장모 되는 민대생 부인도 다른 사위와 같이 귀애하지를 아니하고 매양 쓴 외 보듯 하였다. 명회가 이렇게 장모와 동서들에게 푸대접을 받은 까닭은 여러 가지 있거니와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용모가 괴상하게 생긴 것이다.
한명회는 그 어머니가 잉태한지 일곱 달 만에 나왔다. 그 어머니가 명회를 잉태하고 그가 나기까지 일곱 달 동안을 죽도록 신고하여 말하자면 더 참을 수 없어서 일곱 달 만에 지레 낳아버린 것이다.
나은 것을 보니 사람의 새끼 비슷하기는 하나 ‘사체유미형성(四體猶未形成)’이라 하도록 아직 사람 꼴이 되지를 아니하여서 그까진 것을 젖을 먹이려고 애쓸 것도 없이 내다가 버리자고 하는 것을 그 집에 있던 할멈 하나가 주워다가 솜에 싸서 더운 방 속에 두어 길러 내었다고 한다.
명신록(名臣錄)을 보면 ‘시생월수년방시성형(始生越數年方始成形)’ 이라고 하였으니 난지 이삼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사람같이 형성이 되었단 말이다.
그러하던 것이 자라서 한명회가 되었다. 얼굴이 아래가 펴지고 위가 빠르고 코가 크고 눈은 크나 사팔뜨기요, 머리는 쀼족하게 잡아 뽑은 듯하였다.
이것을 보고 영통사(靈通寺)에서 어느 늙은 중이 ‘광혁첨(光赫尖)’이니 귀히 될 징조라고 하였다. 어찌하였으나 날 때에는 병신스러웠고 자라매 괴물 같았지마는 재주도 있고 엉큼하여 범상치 아니하게 보는 사람은 보았다.
그 종조부 한상덕(韓尙德)이가 ‘이 아이는 내 집 천리구(千里駒)야’ 하여 데려다가 양육한 것이나 중추 민 대생이 사위를 삼은 것이나 다 그를 범상하지 않게 본 까닭이다. 진실로 한명회는 열 달을 못 채우고 지레 낳을 때에 선악을 가리는 양심 하나를 잊어버리고는 다른 것은 다 찾아 가지고 나온 것이다.
이리하니 장모가 귀에 할 리가 없고 처남과 동서들이 비웃지 아니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명회는 그런 것들은 다 부족괘치라고 생각하는 듯이 태연하였다. 그렇게 명회는 뱃심이 있었거니와 명회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배심 좋은 것이 더욱 미웠다.
다른 동서들 중에는 옥관자를 붙인 사람까지 있어도 명회는 집을 이루지 못하여 조부 되는 문렬공(文烈公)의 자당이 있는 집도 비어버리고 아내는 처가에 갖다가 맡겨두고 이따금 생각이 나면 가서 만나 보고 자기는 이 사랑 저 사랑으로 돌아다니었다. 그중에 가장 많이 가 있던 곳은 권람의 집이였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25회>
명회는 권람의 집을 자기 집과 같이 여기어서 만일 어떤 친구와 만날 일이 있으면 권람의 집을 지정하였고 권람의 집에서도 한명회를 한집 식구로 알아서 아침밥은 아니하여도 저녁밥은 차려 놓았다.
그러면 흔히 명회는 밤이 깊어서 술이 잔뜩 취하여 무어라고 혼자 지껄이고 웃고는 권람의 집으로 돌아와 밥을 찾아 먹고 아직도 기운이 남으면 권람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떠들다가는 탈당도 아니하고 이튿날 밤이 기울도록 코를 골고 잤다. 그러면 아침 밥상은 부엌에서 그대로 있었다.
명회가 돌아다니는 곳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형제 이상으로 절친한 권람도 명회가 사귀는 사람을 다 알지는 못하였다. 다만 가끔 권람의 집으로 사람을 데려오는 사람의 꼴을 보아 그가 한량(閑良), 술객(術客) 등속과도 추축하는 줄은 알았다.
한번은 권람이가,
“여보게 자준(子濬)이, 자네 무슨 술(術)을 배우나?”하고 물은 일이 있다. 자준(子濬)이라 함은 명회의 자다.
명회는 너털웃음을 치며,
“왜? 내 눈에 벌써 신기로운 빛이 나타나나?”하고 그 사팔뜨기 눈을 번득거리며 되집어 권람에게 묻는다. 따는 그 눈이 술객의 눈과도 같다고 권람은 생각하였다. 어찌보면 청맹인가 싶으면서도 자세히 보면 그 눈에는 일종의 광채가 있었다.
권람은 웃으며,
“과연 자네 눈에는 신기(神氣)는커녕 귀기(鬼氣)가 있네.”
“어, 거 무슨 소린고 귀기가 있다니. 내 눈이 이래 보여도 천강성(天罡星) 정기를 받은 눈이야. 자네 눈보다는 나으이.”하고 명회는 어떤 도인(道人)이라는 자가 자기의 상을 보고 하던 소리를 옮기었다.
권람은 그래도 조부 이래로 유가서(儒家書)를 존숭하는 집에서 자라났으므로 술이란 것을 믿지 아니하였으나 명회는 사실상 잡술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어느 술객에게서 얻어들은 소리를 가장 제가 할 줄이나 아는 듯이 흉내를 내고는 웃었다.
한 번은 명회가 어떤 술객 하나를 데리고 권람의 집으로 달려왔다. 그때에는 조선에 도사(道士)라는 것이 많아서 무슨 풍운 조화나 부리는 재주가 있는 듯이 사람의 마음을 혹하게 하고 돌아다니었다.
그 술객이란 자가 권람의 상을 보더니,
“십년 내에 배상(拜相)하시겠소.”하고 능청스럽게 일어나 권람에게 절을 하였다. 권람도 너무나 기뻐서 부지불각에 일어나 마주 절을 하였다. 그것을 보고 명회는 웃었다.
술객은 불출 수년에 조선에 큰 정변(政變)이 일어난다는 말과 인명이 많이 상할 것과 그 일을 맡을 사람이 한명회, 권람 두 사람인 듯하게 말하였다. 명회를 보고는,
“귀하시기로 말하면 영의정을 삼십년은 지내시겠소마는 눈에 살기가 많으니까 인명을 많이 해하겠고 혹시 검난(劍難)이 있다 하겠지마는 생전에는 염려 없소.” 하였다.
이날에 권람과 한명회는 희불자승하여 온종일 술을 마시고 즐기었다. 그리고 이날에 두 사람은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았다. 그리고 일생을 관중포숙(管仲鮑淑)으로 자처하였다.
“상감은 승하하시면 세궁은 유충(幼沖)하시어 반드시 수양(首陽)과 안평(安平)이 무슨 일을 내고야 말 것일세. 그런데 안평은 지금 명성이 높지마는 의리를 아는체하고 문하에 사람이 없으니 무슨 일을 하겠나. 수양은 인물이나 명망이나 안평만은 못하지마는 사람이 영악 하니까 인정이고 의리고 얽맬 사람은 아니요, 자네와 나와 우리 둘만 붙으면 반드시 성사가 될 것일세.
그리되면 우리 둘이 십년 내에 정승(政丞)이 된다는 말도 그럴듯하지 아니한가. 문장도덕(文章道德)으로야 내가 자네를 당하겠나마는 사업을 경륜하는 데는 과히 자네만 못지아니할 것일세. 마침 자네가 지금 수양 대군 궁에 긴히 다니니 이것이 다 천의야.
내가 부탁 아니하기로 어련하렷나마는 기회를 잃지 말고 수양 대군을 바싹 경마를 들고 나를 천거만 하게. 내가 수양을 만난 뒤에야 만사가 다 내 장중에 있으니까.”
이것은 한명회가 월전 다니러 상경하였을 때에 권람에게 하고 간 말이다.
명회가 말한 바와 같이 문장 도덕은 권람이가 명회보다 승하였으나 모략으로는 명회가 권람보다 훨씬 상수였다. 권람이나 명회에게 도덕이란 것도 우습지마는 그래도 권람은 선악을 변별할 줄은 알았다.
어떤 것은 인정에 맞는 일이요, 어떤 것은 인정에 맞지 않는 일이요, 어떤 것은 세상에서 옳다고 하고 어떤 것은 세상에서 마땅하지 못하게 여길 것임을 잘 알았다. 다만 그까짓 것을 그다지 요긴한 것으로 알지 아니하였을 뿐이다.
그렇지마는 명회는 전혀 선악을 변별하는 양심이 없다. 그에게는 오직 욕심과 그 욕심을 달하려는 한량 없는 꾀가 있을 뿐이었다. 어느 놈의 돈을 먹으리라 하면 반드시 먹었고 어느 계집을 내 것을 만드리라 하면 반드시 만들었다.
그래서 정보(鄭保)의 서매(庶妹)가 자색이 있는 줄을 알고는 곧 정보와 친한 체하여 마침내 그 서매를 첩으로 얻었다. 그것도 석달 안에. 그러고는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의 손녀를 첩으로 삼았노라고 제배간에 대언장담하였다. 썩은 선비들이 충신이라 떠들고 종사(宗師)라고 존중하는 정몽주의 손녀를 첩으로 삼아 그 이름을 짓밟는 것이 쾌하였던 것이다.
누구나 도덕적 양심만 떼어 놓으면 상당히 꾀가 나오는 법이지마는 한명회의 계교는 실로 무궁무진하였다. 그는 체면이라든지 선악이라든지 인정이라든지를 전연히 몰아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아무려한 짓이라도 목적을 위하여서는 가리지 아니하였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26회>
후일에 세조 대왕이,
“한명회는 내 자방(子房)이야.”하고 누누이 칭찬한 것이 다 이 꾀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귈 때에도 그는 도덕 있는 사람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상놈이거나 깍정이거나 도둑놈이거나 죄인이거나 어떠한 사람이든지 자기의 욕심을 달하기에 필요하다고만 생각하면 사귀었고 필요만 하면 도덕 있는 사람이라도 사귀기를 사양하지 아니하였다.
집현전 여러 학사들 중에 후일에 가장 상저한 이는 신숙주(申叔舟)였었다. 그것은 신숙주가 도덕지사인 까닭은 몰론 아니요. 도리어 그가 목적을 위하여서는 수단을 가리지 아니하는 것이 자기와 서로 합하였던 까닭이다.
명회가 경덕궁직으로 있을 때에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따라다닌 사람 셋이 있다.
그것은 양정(楊汀)과 유수(柳洙)와 임운(林芸)이다.
세 사람은 다 골격이 장대하고 여력이 과인하여 모두 고향에서 사람깨나 때려죽이고 혹은 옥을 깨뜨리고 혹은 대로변에서 행인을 엄습하여 돈을 빼앗아 먹고 살던 무리다. 그들은 한명회가 두호하여 숨겨 주는 은혜를 감격하여 죽기로써 명회의 명에 복종하기를 맹세하였다.
그중에도 임운 한 사람은 명회의 구종이 되어 상시에 명회의 시중을 들고, 양정, 유수 두 사람도 명회가 가는 곳이면 그림자 모양으로 따라다니다가 만일 어느 누구가 명회를 건드리려고나 하면 맹호같이 내달아서 그 사람을 반 주검을 만들었다. 송도 사람들이 명회를 무서워하는 것은 그의 쀼죽한 머리나 사팔뜨기 눈이 아니요, 실로 명회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는 흉물 세 사람이었다.
명회도 세 사람에게는 극진하였다. 그렇게 궁한 신세로도 생기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경덕궁직으로 받는 요도 받는 날로 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명회가 경덕궁 기와를 벗기어 파는 것도 이렇게 자기 분에 상당하지 아니한 부하를 세 사람이나 기르는 까닭이다.
양정과 유수는 자기네와 같은 무리를 많이 알았다. 그 무리들은 대개 귀신 모양으로 낮에는 숨고 밤에만 나와 다니는 무리들이다. 다 사람깨나 죽이고 포도청 출입을 예사로 아는 무리들이었다. 그들의 겨레는 모래판에 무뿌리 모양으로 얼키설키 끝 간 데를 몰라 조선 전국에 편만하여 있다. 그들은 일종의 도적 나라를 건설하여 신라, 고려는 바뀌되 이 나라 만은 영세 불면할 듯하였다. 양정, 유수는 이 도적 나라 백성이었다.
양정과 유수는 한명회가 종시 곤궁한 것을 보고 도적의 굴혈에 들어가서 거기 두령이 되기를 권하고 만일 그러한 뜻만 있으면 자기네가 앞장을 서마고까지 말하였다.
“가만 있게. 경덕궁기와나 벗겨 먹어 가며 좀 더 기다려 보세.”하고 명회는 두 사람의 권함을 아직 거절하였다. 그렇지마는 만사가 다 불여의하면 양(讓) 양(陽)으로 들어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였다. 강원도 양양 어느 산골짜기에 도적 나라의 대두령이 있단 말을 들은 까닭이다.
그리고 자주 권람에게 편지를 부쳐 기회를 잃지 말 것을 당부하고 일변 임운(林芸)을 시키어 안평 대군 궁과 수양 대군 궁의 동정을 정탐하게 하였다. 그것은 임운의 일가 되는 사람이 수양 대군 궁 궁노로 있던 까닭이다.
또 양정과 유수도 장안에 돌아다니는 끄나풀을 통하여 명회가 시키는 대로 이 사람 저 사람의 행동을 정탐하였다. 이렇게 정탐을 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정승도 있고 관서도 있고 집현전 문신들도 있고 수령 방백도 있었다.
명회는 손에 여러 백 명 되는 사람의 명부를 만들어 가지고는 양정과 유수와 임운이 정탐하여 보하는 대로 각각 이름 밑에다 적어 넣었다.
“아무 달 아무 날 밤 안평 대군이 담담정(淡淡亭)에서 시회(詩會)를 열었는데 모인 것은 누구누구요, 한 이야기는 무엇무엇이요.”
“누구가 누구를 심방하였소.”
“어느 벼슬이 갈리고 누구가 망에 올랐소.”
모두 이런 것들인데 열 가지에 한 가지도 들을 만한 것이 없건마는 그대로 명회는 일일이 명부록에 깨알 같은 잔글자로 적어 넣었다.
그 보고들 중에 종성부사(鐘成府使) 이경(李耕)이가 이번 서울 올라 오는 길에 함길도(咸吉道) 절제사(節制使) 이징옥(李澄玉)이가 우의정 김종서에게 보낸 선물 야인이 쓰던 활 하나를 가져왔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 보고를 듣고 명회는 무슨 보물이나 얻은 듯이 기뻐하였다.
“그런 것은 다 아시어서 무얼 하시오?”하고 양정이나 유수가 물으면 명회는,
“심심파적일세.”하고 웃거나,
“내가 장차 염라대왕(閻羅大王)이 될 터이니까 모두 알아 두는 것이야.”하기도 하였다.
양정이나 유순는 힘쓰고 날랜 것밖에 별로 아는 것도 없고 꾀도 없는 무부들이다. 명회가 자기네보다 모략이 많은 것을 잘 알고 반복하는 바이니와 아직도 명회가 무슨 큰일을 낼 사람이라고까지는 생각지 아니하였다.
바로 요전번 단오날 일이다. 유수부(留守俯) 벼슬아치들이 만월대(滿月臺)에다 잔치를 베풀고 하루를 즐거이 놀았다. 그 끝에 누가 말하기를 우리는 다 서울 친구로서 같이 옛 서울에 벼슬을 사는 터이니 오늘을 기회로 하여 계(契)를 모아 오래 두고 서로 사귐이 어떠한고 하여 만좌가 다 찬성하였다. 그때에 명회도 자리에 있다가,
“그거 좋은 말이요. 나도 넣어 주시오.”하였다. 사람들이 보니 경덕궁직 한명회이므로 모두 입을 비쭉거리고 아무도 명회를 입참시키자는 이가 없어서 톡톡히 망신을 당하였다.
명회는 이 말을 양, 유양인에게도 하지 아니하고 다만 혼자 마음에 새기어 언제 한번 이 분풀이를 하리라고 맹세할 뿐이었다.
<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27회>
명회가 말하지 아니하더라도 이 말은 송도에 짜아하게 퍼지었다. ‘그놈 밉더니’ ‘그놈 껍죽대더니’하고 모두 잘코사니 하였다. 오직 이 말을 듣고 분히 여긴 것은 양, 유, 임 세 사람이었다. 양정은 발을 구르고 임운은 울고 유수는 당장에 그놈들을 모두 때려죽인다고 야료를 하였다.
명회는 웃으며,
“잠간만 참으소. 다 그럴 날이 있네.”하고 가까스로 무마하였다.
“참기는 언제까지나 참으란 말이요. 이러다가는 밤낮 마찬가지지.”하고 세 사람은 좀체로 평을 거두지 아니하고 어서 양양으로 가서 도적이 되기를 조르고 만일 명회가 안 들으면 자기네는 달아날 뜻까지 보이었다.
이러한 때에 문종 대왕이 승하하시고 세자궁이 즉위하시었다는 소문이 송도에 들리었다.
명회는 이 소문을 듣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 사람이 과단이 부족하여.”하고 권람을 원망하였다.
명회 생각에는 세자궁이 즉위하시기 전에 수양 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때나 자기가 좌명(佐命) 원훈(元勳)이 되어 볼까 함이었다. 그랬는데 새 임금이 등극하였으니 큰일은 모두 틀려버리고 말았다.
“내가 서울에만 있었다면 이렇게는 안되는 걸.”하고 명회는 이를 갈았다.
세자궁이 즉위하기 전에 수양 대군을 들여 앉히기는 용이한 일이지마는 한 번 세자가 왕이 된 이상 그 왕이 승하하시기 전에 왕을 바꾸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까딱 잘못하면 역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명회는 차라리 도적 속에 들어가 전국에 있는 도적의 무리를 몰아가지고 한 번 설레어 보다가 잘 되면 조선왕이라도 한 번 되어 보고, 못 되더라도 일신이 안락하게 살아 볼까하고 양정과 유수를 불러 도적의 일을 자세히 물어보았다.
양, 유, 양인은 인제야 명회가 바른길로 들어가려 하는 것을 기꺼하여 자기네가 아는 대로 도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도적의 대두목이 되면 서울 장안에 고루 거각에 앉아서 처첩, 비복 거느리고 영화를 누릴 수가 있다는 말을 하여 명회의 비위를 끌기를 힘썼다.
그렇지마는 정승, 판서의 높은 벼슬---이를테면 이조(吏曹)판서(判書), 병조판서(兵曹判書)의 푸른, 서슬 영의정(領議政), 좌우(左右)의정(議政) 까지는 못 바라더라도 의정부(議政府) 좌우(左右) 찬성(贊成)의 높고 귀함, 그 좋은 권세 ---이런 것을 단념하기가 심히 어려웠다.
그래서 하룻밤을 이럴까 저럴까로 새우고 새벽에 편지 한 장을 닦아 임운(林芸)을 주어 성화같이 서울 권람에게로 보내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었다.--- ‘시세 이와 같고, 안평 대군이 임금의 자리를 엿보니, 화란이 일어날 것이 아침이 아니면 저녁이라. 그대 홀로 이 생각을 못하는가……
화란을 평정함엔 제세발란의 힘이 있는 임금이 아니면 불가하거늘, 수양 대군은 활달함이 한 고조와 같고, 영무하기 당 태종과 같으니, 천명이 있는 곳을 소연히 알지라. 이제 그대 가까이 모시거늘 어찌 종용히 건백하여 늦기 전에 결단케 하지 아니하나뇨.’
이 편지를 보면 명회는 분명히 조금도 꺼림도 없이 수양 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찬탈하게 하기를 권한 것이니 이것은 권람도 감히 발설 못한 바요, 수양 대군도 감히 자주 생각 하지 못한 바다.
명회는 권람이가 이 편지를 반드시 수양 대군에게 보일 것을 알고 수양 대군이 이 편지를 보면 반드시 크게 구미가 동하고 기뻐할 줄을 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권람이가 보기 위하여 하느니보다 수양 대군이 보기 위하여 한 것이다.
얼마쯤 만시지탄이 없지 아니하지마는 지금부터라도 수양 대군을 충동하는 것이 자기의 욕심을 달하는 길이라고 믿은 것이다.
수양 대군을 한 고조와 당 태종에 비긴 것은 다만 아첨 뿐이라고만 할 수 없으나 안평 대군이 신기를 엿본다고 한 것은 전혀 명회가 지어낸 말이로되 수양 대군을 움직이기에 가장 큰 힘이 있는 말이다.
첫째는 수양 대군이 안평 대군을 미워하는 심리를 이용한 것이요, 둘째로는 수양 대군이 거사할 좋은 핑계를 장만하여 드린 것이다.
“안평이 신기를 엿보기로 부득이 하여.”
수양 대군이 일어나서 새 임금을 옹호하는 파를 안평 대군의 당으로 몰아 없애버리고 수양 대군이 정권을 잡는 날이면 일은 칠분이나 성공이 되는 것이다. 그 후사는 더 되면 좋고 안되더라도 한명회가 이조판서 한 자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안평이 애매하지마는 나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이 팔자이지.”하고 명회는 혼자 웃었다.
이 편지를 주어 임운을 서울로 떼어 보내고 명회는 자못 심기가 불편하였다.
이 편지는 최후 수단이다. 말일 이 편지에 무슨 향기로운 회답이 없으면 자기는 영영 궁 직으로 늙어 죽을 수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나이 벌써 삼십팔, 사십이 근당하였으니 이제 다시 과거를 보러 다닐 면목도 없을 뿐더러 글짓기는 본래 싫어하는 데다가 그것도 놓아 버린지가 오래어서 붓대를 들면 골치부터 먼저 아프니 제힘으로 과거(科擧)에 급제할 가망도 없고 그렇다고 조정에 자기를 알아 남행으로 원한 자리라도 시켜 줄 사람도 없으니 인제는 꼼짝 없이 일생을 망쳐버리고 만 것이다.
정당한 길을 밟으려면 경덕궁직으로 그냥 있어서 어떻게 좋은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좋지마는 그것도 지나간 사오삭에 진절머리가 나고 말았다. 기왓장 벗기어 술값을 벌고 마루창 널을 뜯어 불 때일 나무를 삼는 것이 겉으로는 웃고 하는 일이지마는 속으로는 그리 즐거울 리는 만무하였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28회>
지난 단오에 부료(府僚)들한테 망신을 당한 뒤로는 송도(松都)라는 곳이 지긋지긋 하였다. 길에 나서 다니면 모두 뒤로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고 사실상 만월대 망신이 있은 뒤로는 송도 사람들은 명회를 미워하기만 하지 아니하고 멸시하기까지 하여 길에서 마주칠 때에는 분명히 비웃는 눈살을 보이었다.
송도 와서 소득은 정포은 선생의 손녀를 첩으로 삼은 것이어니와 그도 이렇게 일생을 궁하게만 산다 하면 귀찮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돌아갈 곳은 양양 밖에 없는 듯하였다. 자기만한 모략을 가지고 도적청에만 들어가면 곧 한 목메는 두목이 될 것이요, 지금 대두령이 어떤 놈인지 모르나 몇 해 동안이면 그까진 놈 하나 치어버리고 자기가 대신 들어앉기는 땅 짚고 헤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낮에 자고 밤에 다니는 사람이 되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나 아까왔다.
이렇게 명회의 번뇌한 생각은 개미 쳇바퀴 몰 듯이 뱅뱅 돌았다.
이때에 명회의 첩 정씨가 밖으로서 황황히 들어오며,
“여보시오. 서울서 사람이 왔어요.”한다. 정씨는 이제 열여덟 살, 분홍 치마 연두저고리에 계집애 모양으로 어리게 차리었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에 손수 아침 저녁 동자를 짓노라고 손이 거칠고 앞치마는 거뭇거뭇 때가 묻었다.
송도서 사는 명회의 가정은 실로 우스웠다. 명회, 양정, 유수, 임운 합하여 사내가 넷에 여편네라고는 정씨 모녀뿐. 마치 막벌이꾼 치는 주막집 같았다.
“서울서 사람이?”하고 명회는 대문으로 뛰어나갔다. 거기는 낯익은 권람의 집 종 바람쇠가 서 있다가 명회를 보고 반가운 듯이 허리를 굽히고는 품속으로서 서간 한 장을 내어 명회에게 준다.
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에 사랑에 있던 양정과 유수도 뛰어나와서 멀거니 명회와 바람쇠를 번갈아 바라본다. 바람쇠는 전에도 두어 번 편지를 가지고 왔었으므로 두 사람을 잘 안다.
그러나 그전 편지도 별 신통이 없었으므로 이 빈 것도 그저 그러리라고 생각하고 두 사람은 실망한 듯이 혹은 방으로 들어가고 혹은 밖으로 나가버리었다. 두 사람의 꼴은 기름장수와 같이 꾀죄죄 흘렀고 얼굴은 낮잠을 과히 잠인지 부석부석하였다. 혹은 즐기는 비지를 좀 과식하였는지도 모른다.
명회는 비 처방에도 들어오기 전에 권람의 편지를 떼었다. 처음에는 예사로 읽더니 차차 눈이 종이에 꼭들이 박히고 말이 마당에 꽉 붙었다. 명회는 다시금 편지를 보아 자기 눈이 잘못 본 것이 아닌 줄을 확실히 안 뒤에는 편지를 한 손에다 꽉 쥐고 껄껄껄 웃기를 금치 못하였다. 명회는 한 번 크게 에헴 하여 가래를 뱉고 마루에 올라섰다.
“무슨 좋은 기별이 있어요?”하고 정씨도 남편이 근래에 드물게 기뻐하는 양을 보고 창으로 내다보며 물었다.
명회는 정씨가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정씨더러, 이봐
“내가 급히 상경할 일이 생겼으니 의복 내어놓게.”하고는 사랑으로 나가려 한다.
정씨는 놀라는 듯이 일어나 나오며,
“아니, 서울을 가시다니. 오늘 가시오?”하고 말로 명회를 붙든다.
“옷이나 내어 놓으라면 내어놓아. 무엇을 안다고 참견이야.”하고 핀잔을 주고는 사랑으로 들어가 버린다.
남편이 상경하는 데는 두 가지 일이 있다.
한 가지는 귀하게 되어 좋은 벼슬로나 올라 가는 일이니, 그렇다 하면 작히나 좋으랴. 정씨 자기도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일이지마는 궁상이 덕지덕지한 남편의 꼬락서니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아니하고 그렇다 하면 이번 서울 올라 가는 것은 자기 집 일로 가는 것이요, 집 일로 간다하면 본 마누라 민씨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민씨도 나이 사십이 되었으니 서방을 빼앗길까 보아서 겁날 것도 없지마는 그래도 여편네 마음이라 자기는 첩이고 다른데 본 마누라가 있어서 남편이 그리로 간다면 비록 제삿날 제사 참례를 가더라도 싫었다. 그래서 정씨는 반닫이 열쇠를 든 채로 눈물을 흘리었다.
명회가 사랑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양정과 유수 두 사람은 장기판을 밀어 놓고 명회의 자리를 내었다.
명회의 시치미 떼는 얼굴에는 아무리 하여도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있었다.
“서울서 무슨 기별 있소?”하고 양정이가 잠자코 있기가 미안한 모양으로 그러나 그다지 흥미 없는 어성으로, 이를테면 명회의 얼굴을 보아 물은 것이다. 유수는 지금까지 두던 장기 수만 생각하고 있었다.
명회는 양정이가 묻는 말을 기회롤 의기양양하게,
“나는 오늘 곧 서울로 가야 하겠네.”하고 대단히 바쁜 듯이 벽장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집은 전조적 집이 되어서 큼직하지만 안에는 거미줄뿐이라 벽장 문을 연대야 케케 앉은 먼지밖에 있을 것이 없고 혹 있다면 양가 유가의 발고린내 나는 버선짝일 것이다.
명회가 서울 길을 떠나게 되었단 말에 두 사람은 좀 놀래었다. 그러면 바람쇠가 가지고 온 편지에 그래도 무슨 뜻이 있었던가 함이다.
“아니,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해가 저녁때가 다 되었는데 길을 떠나신단 말이요. 엊긎 국상이 났거든 어명(御命)이 내리실 리도 만무한데.”
이렇게 양정이가 반쯤 빈정대어 말하는 것을 유수가 곁에서,
“어디 서울 가까운 능참봉(陵參奉)으로나 승차를 하여 가시오? 그리되면 우리도 서울 구경이나 자주 하게. 또 하늘에 올라야 별을 따고 서울을 가야 과거를 한다는 셈으로 그래도 서울 가까이 있어야 무엇이 생기는 것이 있지 그려. 송도 만월대 구석에서 도깨비 모양으로 궁 기왓장이나 굴리고 있으면 백년을 갔자 신통한 구석이 있소?”농담 절반, 신세타령 절반으로 손에 든 장기쪽을 딱딱거린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29회>
명회는 이 버릇 없는 말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사팔뜨기 눈으로 한 번 두 사람을 노려 보고 일어나려 하다가, 도로 앉으며,
“이번에 내가 상경하는 것은 일체 발설 말게. 수양 대군이 밤도와 올라오라고 나를 부른 것이니까 아마 무슨 큰일을 의논하실 모양인즉, 양정이 자네는 나와같이 오늘 떠나고 유수 자네는 집에 있게. 생각하건대 내가 이번에 서울 가면 다시 송도에 오지 못할 듯 싶으니까
임운이가 오거든 같이 가속 데리고 서울로 올라오게. 내가 가는 대로 또 곧 기별도 할테야. 하고는 여전히 바쁜 듯이 안으로 들어 가버린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유수가 장기줌을 장기판에 내어버리며,
“무슨 수가 나는가봐.”하고 눈을 꿈쩍한다.
양정이도 ‘흥’ 하고 코로 웃는다.
한명회는 양정을 데리고 그날로 집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 하필 유수로 하여금 집을 보게 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양정은 유수보다 얼굴이 잘 생기고 풍채가 좋아서 집에 혼자 두면 젊은 첩 정씨를 빼앗길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명회는 결코 사람을 믿는 일이 없었고 특별히 첩에 대하여서는 항상 반반한 남자가 가까이하는 것을 의심하였다. 자기 얼굴이 흉하기 때문에 더욱 풍채 좋은 양정을 의심한 것이다.
명회가 정씨와 대화하기를 허하는 남자는 정씨의 적형(嫡兄)되는 정보(鄭保)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정보도 근래에는 서울 올라가 성삼문, 박팽년 같은 집 사람으로 돌아다니고 송도에는 없었다.
“대문 밖에 나지 말고 아무도 대문 안에 들이지 말어!”하고 정씨를 단단히 노려 보고 명회는 집을 떠났다.
한명회, 양정 두 사람은 바람쇠를 따라 말을 탈 형세도 못되므로 터덜거리고 걸어서 성화같이 서울로 향하였다. 만일 주막이나 나룻배에서 거행이 더디면 양정이 눈을 부라리고,
“이 양반은 어명으로 급히 가시는 양반이야.”하고 호통을 떼었다.
“이 사람아, 어명을 함부로 쓰다가 목 날아나려고 그러나?”하고 단둘이 되었을 때에 명회가 책망하면 양정은 어깨를 으쓱 올리며,
“한번 그랬으면 작히나 좋소?” 하였다. 홍제원(弘濟院)에는 임운이가 인마를 데리고 마중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명회와 양정이가 오월도 다 지난 염천에 땀을 뻘뻘 흘리고 먼지 투성이가 되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허덕거리고 오는 것을 본 임운이가 일마장이나 마중 나아가 맞았다.
“생원님, 얼마나 더우시오?”
“덥구 무엇이구 다리가 아파 죽을 지경일세. 사람을 부르거든 말 탈 노수라도 보내는 것 이 아니라 오뉴월 염천에 이거 어디 살겠나.”하고 명회가 길가 조그마한 나무 그늘에서 볕을 피하며 연해 부채질을 한다.
임운은 손을 들어 홍제원을 가리키며,
“저기 수양 대군 궁에서 인마가 나와서 아침부터 기다리오. 말이 두 필에 안장이 어른어른하고 말 잔등까지 은이요. 전배 한 쌍, 구종 한 쌍에, 수령 행차 이상이요. 소인이 다 어깨가 으쓱하오.”하고는 편지 한 장을 내어 명회에게 준다.
떼어 보니 편지는 권람의 것인데 수양 대군께서 명회가 오기를 심히 고대한다는 말과 선비를 존중하는 예로 대군이 몸소 명회를 나와 맞을 것이로되 국상 중이라 그리 못한다는 말과 또 명회가 명색 없이 수양 대군 궁에 출입을 하면 남의 의혹을 살 염려가 있으므로 명회를 송도서 청해 오는 의원으로 대접한다는 것과 인마를 보내니 타고 다른 데 들리지 말고 곧 수양 대군 궁으로 오라는 말과 거기 오면 권람 자기도 만날 것이란 말이 쓰여 있다.
명회는 심히 만족하였다 하늘에 오를 듯이 기뻤다. 그러나 그런 빛은 내지도 아니하고 날이 더운 것과 발이 부르튼 것만 짜증을 내었다. 그러고는 인마고 수양 대군이고다 귀찮은 듯이 나무 그늘에 퍼더버리고 앉아서 하늘에 떠도는 구름만 바라보았다. 양정과 임운은 명회의 속을 들여다보는 듯이 물끄러미 보다가 픽 웃었다.
명회와 양정은 은안 준마에 덩그렇게 올라앉아 사오인 구종의 호위를 받아 거드럭거리고 서대문을 들어 자핫골 막바지 수양 대군 궁으로 들이몰았다.
명회가 온다는 선문을 듣고 수양 대군과 권람은 제하에 내려서 맞았다. 명회의 초초한 행색이 오늘은 땀이 배고 먼지에 젖어 더욱 초초하건마는 지어서 기고만장한 모양을 보였다.
수양 대군은 명회가 권람에게 한 편지를 보고 더 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안평 대군이 신기를 엿본다는 말이나 천명이 분명히 자기에게 있단 말이나 자기를 한 고조, 당 태종에 비긴 말이나 다 일생에 처음 듣는 보비위하는 말이었다. 급기야 명회를 대하매 그 머리와 눈이 미상불 우스꽝스러웠으나 그것이 도리어 비범한 표인 것같이 생각되었다.
수양 대군의 한명회에게 대한 대접은 실로 융숭하였다. 처음 계하에서 서로 맞을 때에는 한명회가 읍할 때에 같이 읍함으로써 대답하였고 그보다도 놀라운 것은 정청에 올라 한명회가 대군께 대하는 예로 절할 때에 수양 대군이 마주 절한 것이다.
애초에는 수양 대군이 하는 양을 보아 좀 거드름을 부리려 하던 한명회도 수양 대군이 이처럼 공손하게 하여 주는 것을 당하고는 그만 감지덕지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다만 권람이가 곁에서 보아두었다가 후일에 자기의 천착스러움을 비웃지 아니할이만큼 하였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30회>
수양 대군은 국상 중에 궁중을 떠나지 못할 계제이지마는 궁중에 들어 간대야 황보인, 김종서 같은 고명받은 늙은 것들이 좌지우지하는 꼴이 보기 싫고 안평, 금성 같은 아우님 되는 대군들도 수양 대군을 슬슬 따돌리는 기미를 보고는 그만 상기가 되어 될 수 있는 대로는 궁중에 있기를 피하였다.
더구나 오늘은 한명회를 만났으니 시각이 바쁘게 그의 계책이 듣고 싶어서 한명회와 권람을 밀실로 끌어들이어 두 시각이나 넘도록 이야기를 하였다.
“대사가 장차 어찌될 것이요?”하고 수양 대군이 먼저 문제를 끌어내었다.
한명회는 이때야말로 자기 일생이 부침이 달린 큰 시험인 줄 알므로 평생의 정력을 다하여 자기의 의견과 계책을 수양 대군이 묻는 대로 대답하였다.
“소인이 무엇을 알리이까마는 민심은 곧 천심이라 민심이 돌아가는 것을 살피읍건대 천명(天命)이 나으리께 있는 것은 소연한 일인가 하오.”하고 자기가 권람에게 한 편지를 수양 대군이 보았을 줄은 번연히 알면서도 또 한번 수양 대군을 칭찬하여 한 고조와 당 태종을 끌어내었다. 그러하되 그 성음과 안색이 진실로 지성스러웠다.
수양 대군은 좀 낯이 간지러운 듯이 권람도 바라보고 바깥도 바라보더니 명회의 송덕하는 말이 한 대문이 지나간 때를 타서,
“천명이 내게있다니, 그게 될 말이요? 나같이 덕이 적은 사람이 어찌 천명을 감당하겠소?”하고 수양 대군은 정중한 언사로 겸사를 한다.
한명회는 수양 대군의 이 말에 펄쩍 뛰며,
“아니외다. 그렇지를 아니하외다. 겸양지덕이 좋기는 하오나 그것은 태평무사할 때에나 쓰는 것이외다 천명에 대하여는 겸양이 없는 것이외다. 만일 천명을 모피한다 하면 그것은 겸양이 아니라 역천(逆天)이외다.
태조 대왕께서 창업하신 간난을 생각하시거나 창생이 대한에 운예와 같이 바라는 것을 생각하시든지 겸양하시는 것이 옳지 아니하외다. 원형리정으로 말씀하오면 대행 대왕께옵서 승하하옵시면 나으리께서 상주가 되시어야 할 것인데 그리 안되온 것이 황보인, 김종서 배의 간계에서 나온 것이외다.하고 도도히 말하였다.
어찌하여 왕세자를 두고 수양 대군이 상주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그것은 수양 대군도 알 수 없는 이치었으나 그래도 명회의 말은 언언구구가 다 비위에 맞았다. 마치 내 속에 들어와서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다 살핀 뒤에 내가 할 말을 대신하여 주는 것과같이 마음에 꼭 맞았다.
더구나 수양 대군 자기가 상주가 되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원형리정이란 명회의 말이 이치에는 닿지 아니하면서도 마음에 맞았다.
그렇지마는 수양 대군은 도리어 송구하는 빛을 보이며,
“그것은 지나치는 말이요. 세자궁이 계옵시니 세자궁이 상주 되옵심이 마땅하고 나는 오직 충성을 다하여 어리신 상감을 도움이 될뿐이요. 어찌 터럭끝만큼이나 다른 뜻이 있겠소.
오직 걱정되는 것은 황보인, 김종서의 무리가 안평을 떠받들고 국가 사를 그르치려는 것이니 그것을 막을 계책을 내게 말하오.”하였다. 수양 대군의 이 말에 한명회는 마른하늘에 벼락을 맞는 것 같았다.
‘아뿔사 수양 대군에게 한 수 졌구나’하고 명회는 고개를 숙이었다. 잘못하다가는 이 모가지가 날아 날는지도 모른다.
명회는 수양 대군의 진의를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생각하기를 수양 대군이 왕의 자리를 엿본다고 한 것은 자기의 잘못이던가. 수양 대군은 과연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돕던 옛일을 본받으려 하는 충성밖에 다른 뜻이 없었던가. 그렇다 하면 자기가 오늘 말한 것은 큰 실수였었다. 하고 명회는 후회도 하였다.
그러나 그만한 일에 움츠러질 명회가 아니다. 그는 한 수를 내어 수양 대군을 걸어 볼려 하였다.
첫수는 졌지마는 둘째 수에는 자기가 이길 것을 믿었다. 그야말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심으로 명회는 자리에서 분명히 일어나며,
“소인 물러가오.”하고 한 번 읍하였다. 명회의 용모와 눈매에는 실로 비장한 빛이 떠돌았다.
이 뜻하지 아니한 행동에 권람이 먼저 놀라서 일어나 명회의 소매를 잡으며,
“이 사람, 이게 웬 일인가.”하였다. 명회는 권람이 잡은 소매를 뿌리치며,
“아니, 나를 붙잡지 말게. 선비의 행색이 한 번 말을 내었다가 용납이 되면 머물고 용납이 아니 되면 물러가는 법이야. 나는 원래 세상일에 뜻이 없는 사람이야. 부귀와 공명이 내게 부운이로세.
가만히 세상에서 숨어 유유자적하는 것이 나 같은 사람의 본색이어늘 자네 말을 그릇 들고 서울에 올라 왔다가 이제 나으리 뜻이 내가 생각던 바와 다르니까 나는 물러가는 것이 옳은 일일세.”하고 다시 수양 대군을 향하여,
“소인 물러갑니다.”하고 두어 걸음 문을 향하여 나갔다.
이때에 수양 대군도 장황히,
“여보, 앉으오. 나를 버리지 마오.”하였다. 그 말은 심히 은근하였다.
권람은 명회를 붙들어 앉히었다.
‘나를 버리지 마오’하는 수양 대군의 말 한 마디면 명회도 목적은 달한 것이다. 수양 대군은 마침 내내 약낭 속에 들었다고 명회는 속으로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한명회가 다시 자리에 앉은 뒤에 수양 대군은 단도직입으로 시국에 처할 계책을 물었다 ---.
“낸들 나라일에 무심할 리가 있소? 근심이 되길래 이렇게 계책을 묻는 것이 아니요? 그렇지마는 내가 무슨 힘이 있소? 군국대사(軍國大事)가 모두 황보인, 김종서 배의 손에 있으니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아끼지 말고 높은 계책을 말하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31회
한명회는 수양 대군의 말하는 바가 모두 도리에 맞고 또 대인의 기상이 있음을 탄복하였다. 그리고 저절로 고개가 숙음을 깨달았다.
“일을 하는 데는 힘이 으뜸이니 힘을 기르시어야 하오.”하고 명회가 대답한다.
“힘을 기르는 법이 어떠하오?”하고 수양 대군이 다시 묻는 말에 명회는,
“힘을 기르는 데 가장 속한 방법은 불평객을 모아들이는 것이요.”하고 아뢴다.
“불평객이 누구며 불평객을 모으는 방법은 어떠하오?”하고 수양 대군이 묻는 말은 점입가경한다.
“세상에 불평객이 없는 때가 없사외다. 세종 대왕께옵서는 요순과 같으신 성군이시옵거니와 재위하신지 삼십여 년에 문(文)을 높이시옵고 무(武)를 가벼이 하시오니 태평성대에 그럴 만한 일이어니와 그 때문에 무신(武臣)의 불평은 면치 못할 일이요,
또 재야(在野)한 인재도 문장 재사는 달하기 쉬우되 궁시(弓矢)를 잘하는 사람은 일생에 달할 길이 없으니 자연 문인은 교만하여지고 무사는 불평하게 되는 것이외다. 또 문신(文臣) 중에도 자기의 현재 처지를 불만히 여기어 매양 불만한 생각을 가지는 이가 있는 것이니
이러한 무리를 가리키어 불평객이라 하는 것이외다.”하고 한명회는 좋은 구변으로 기운차게 말할 제, 수양 대군은, 혹은 눈을 감고, 혹은 눈을 뜨고, 혹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혹은 무릎을 치며 명회의 말을 탄상하는 표를 보인다.
수양 대군이 자기의 말에 탄복하는 눈치를 보매 명회는 더욱 기운이 나서 불평객을 모아들이는 계책을 말한다---.
“이렇게 불평을 가진 사람들은 매양 어디에 자기네를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외다.
마치 목마른 사람과 같이 어디서 물소리만 나면 그리로 모여드는 것이외다. 이제 만일 나으리께서 세사의 불평 가진 무리를 받으신다는 소문만 나면 한 달이 못하여 팔도의 불평객은 나으리 문하에 모여들 것이외다.
사람이란 궁할 때에는 일반지덕(一飯之德)도 골수에 사무치는 것이니까 사방으로서 모여드는 불평객에게 우선 술 한 잔, 밥 한 그릇으로 그 모여 온 뜻을 사례하고 후일에 각각 공로를 따라 높은 벼슬과 많은 녹이 있을 것을 보이면 나으리를 위하여 죽을 사람이 천이요, 만뿐이리이까. 이리하면 나으리의 힘은 대적할 수 없이 커지는 것이외다.”
명회의 이 말에 수양 대군은 고개를 끄떡임으로써 옳이 여긴다는 뜻을 표하다가,
“그렇지마는 그 따위로 궁하여서 모여드는 사람들이 만 명이면 무슨 일을 하겠소? 좀 큰 사람을 얻어야 할 것이 아니요? 큰 사람 얻는 방략은 어떠하겠소?”하고 새 문제를 내었다.
한명회는 이렇게 대답한다.---.
사마골을 오백금으로 “(死馬骨)(五百金) 사는 것이 천리마를 구하는 법이외다. 범상한 사람을 비사후례로 맞아들이면 걸출한 사람도 찾아오는 것이외다. 천하사에 뜻이 있는 사람은 항상 사람 많이 모이는 곳으로 가는 것이외다. 나으리가 많은 사람을 문하에 모으시면 모인 사람이 비록 모두 다 하잘 것 없는 무리라 하더라도 세상이 다 나으리의 세력을 두려워하고 우러러보게 될 것이외다.
한 번 나으리의 세력이 이만하게 되면 마치 천하의 물이 다 한바다로 모여드는 모양으로 천하의 인절이 다 나으리 세력을 따라 모여들 것이외다.”하고 한명회는 한층 더 기운을 내고 어성을 높이어,
“지금 황보인 같은 무리가 국정을 잡았다 하나 그까진 문신(文臣)들은 난시에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것이외다. 난시에는 백 명의 문장지재보다도 한 명 힘쓰는 사람이 힘이 있는 것이외다. 이제 소인을 따라다니는 양정 한 사람에게 철여의(鐵如意) 하나만 들려 내어 놓으면 만조백관은 경각에 끽소리를 못하게 만들어 놓을 것이외다.
안평 대군이 아무리 문객이 많다 하더라도 그까진 심장적구(尋章摘句)하는 무리들이야 만 명이면 쓸 데가 무엇이오니까. 하고 보면 소인이 말하는 불평객은 결코 힘없는 무리가 아닐뿐더러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실로 큰 힘을 내는 무리외다.
이 불평객들을 하나씩 하나씩 흩어놓으면 아무 힘이 없지요마는 위에서 거느리는 이만 있으면 무서운 힘을 발하는 것이외다. 말씀하기 황송하오나 태조 대왕께옵서 천명을 받으심도 불평객을 모으신 것이 큰 힘이 되신다고 생각하옵니다.”하였다. 수양 대군은 더욱더욱 한명회의 말에 탄복하여 마치 무엇에 취한 이와 같았다.
권람의 말도 매우 지혜로운 데가 있거니와 이처럼 구구절절이 귀신 같지는 못하였다. 한명회에 비기던 권람은 예사 선비에 불과한 듯하고 한명회는 진실로 옛날 장량(張良)이나 제갈량(諸葛亮) 같은 신통한 모략을 가지어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듯하였다.
어떻게 이러한 사람을 오늘에야 만났던가 하여 수양 대군은 다시금 한명회의 괴상한 용모를 바라보고 이는 하늘이 자기를 위하여 보낸 사람이라고 기뻐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불평객들을 모을 수가 있겠소?”하고 한 가지 새로운 문제를 또 꺼내었다.
명회는 수양 대군이 자기의 말을 잘 알아들음과 연해 제출하는 문제가 모두 긍경에 맞음을 보고 더욱 기뻐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어렵지 아니하외다. 광활하고 조용한 땅을 택하여 사정(射亭)을 세우고 습사장(習射場)을 베풀고 나으리가 친히 사정에 임하시어 같이 활을 쏘시고 그날에 가장 잘 맞힌 사람에게 상금을 내리시고 나으리 친히 그 사람을 부르시어 칭찬하는 말을 주시면 팔도에 활 쏘는 사람이 다 그리로 모일 것이외다.”
명회의 말은 절절이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