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야기

창조와 새 창조의 상관성에 관한 성경신학적 연구/박영복.안양대

jn209 2025. 5. 2. 08:04

I. 서 론

 

A.연구동기와 목적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성경해석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성경을 기록한 사람의 의도를 해석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 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까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역사비평가들은 상관성과 유 비,그리고 비평의 원리를 가지고 역사적 사건들을 일반화시킴으로서 역 사상 유일한 사건들,즉 하나님의 주권적 계시사건들을 가상의 역사로 환원시켜 버렸고,다양한 양식비평가들은 추측과 문헌적 형식이라는 도 구로 성경을 단순한 문헌으로 취급하고 있다.

특히 편집비평가들은 성 경 각 권의 통일적인 신학적 메시지에는 동의를 하였지만,‘편집자’의 신 학적인 의도를 밝히는 데만 중점을 두어서,오히려 성경 전체의 통시적 인 관점을 잃어버린 채,계시의 의미를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에 의 지하는 환원적 논리의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1)

 

     1) Sidney Greidanus, 『성경해석과 성경적 설교(상)』, 김영철역, (서울:여수룬, 1995), pp. 59-120.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까?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중요한 단 초를 칼빈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얻을 수 있다.

즉,하나님께서 주 권적으로 자기를 우리에게 드러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별계시가 기록된 형태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전제를 다시금 확인하게 한다.

이러한 인식론적 전제는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사건들에 대하여 역사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 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성경의 해석이 통시적이고 하나님의 주권적 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성경 전체를 조망하는 성경신학적 접근방법의 하나로 개혁주 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구속사적 성경접근”이 널리 인정받아 왔다.

“구속사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 기 때문이다. 사실 구속사 그 자체가 계시”2)이다.

하지만 이 사실 때 문에 ‘구속사’라는 정의 또한 명확하지 않다.

“구속사,거룩한 역사 및 계시사 사이의 뚜렷한 차이점을 찾아보려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차이 점을 찾는 대신 이 용어들이 실제로는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과 그 하나에 딸린 특성들이 다른 것에도 역시 딸리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 게 된다.”3)

 

     2) Sidney Greidanus,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권수경역, (서울:SFC출판부, 2003), p.145.

     3) Ibid., p.146.

 

이것은 구속사적 접근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역사,계시와 함께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안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며,이런 모 호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제들이 하나님의 역사의 주권적 통치의 관 점과 성경의 통일성 관점에서 일치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속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하 나님의 작정 속에서의 창조의 목적과 창조질서의 회복에 관하여 근본적 인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언약에서 바라본 하나님의 창 조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에 대한 서론으로 취급하고 만다.4)

 

     4) “구속의 계약은 창조의 계약 밑에서 인간의 실패와 함께 곧 세워진다. 하나님은 특별한 창조질 서로서 자신과 인간을 결속하셨다. 인간은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써 이 관계를 깨뜨렸다.” O. Palmer Robertson,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김의원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90), p.97. 여기에서 Robertson의 책을 번역한 『계약신학과 그리스도』에서는 ‘언약’이라는 용어 대신에 ‘계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 인용할 때 용어의 혼동을 주지 않기 위하여 ‘언약’이라는 용어로 전환하여 사용할 것이다. 

 

그 러므로 이와 같은 성경해석의 관점은 창조의 개념을 약화시킴으로서 모 든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창조질서에 대한 올바른 시각 을 제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언약이라는 주제로 인하여 다소 환원적인 시각으로 창조를 바라보게 된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본 연구는 하나님의 작정에서의 창조와 창조질서를 고찰에 봄으로서 비평적 시각의 오류를 지적함과 동시에 보다 개혁주의 전통의 총체적인 시각5)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성경신학적 방법인 소위 ‘창조사적 성경접 근’을 제안할 것이며,이러한 성경접근을 이용하여 성경의 통일성을 유지 하면서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와 계시록의 새 창조의 비교하고,통시적이 고 하나님 주권적인 창조역사의 의미를 드러내 보고자 한다.

 

     5) 여기에서 ‘개혁주의 전통’이란 언약의 통일성과 통일적 경륜의 관점을 의미하는 것이고, ‘총체적 시각’이란 후에 언급될 ‘총체적 성경해석(holistic biblical interpretation)’을 염두 해 둔 표현이 다.

 

B.연구방법과 내용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을 질서의 창조로 인식하게 된다면,우리는 하나 님께서 창조하신 질서 가운데에 인식의 기반을 두게 된다.

그러므로 우 리는 하나님을 인식하거나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때 우리에게 부여된 이성(질서)으로서만 이해되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학문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이성으로 하나님과 그 계시를 바라보는 비평학자들의 환원주의적 인 논리는 신학을 함에 있어서 단연히 배격되어져야 한다.

우리는 학문 적 수단들을 “연구방법들(approaches)로 취급하는 것”이지 “본문 자체 언급에 도움이 되는 필요한 도구(means)로 다루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 야 한다.6)

 

  6) G. Van Groningen, “창세기해석”, 『구약신학논문집(2)』, 윤영탁편역, (서울:성광문화사, 1993), p.8. - 4 -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를 연구해야 함으로 그 방식 이전에 신학적 전제를 암묵적인 기반으로 사용하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성경해석의 모델은 구속사적 성경접근법의 전제조건인 개혁주의 적인 신학적 통찰에 동의하면서 구성되었다.

더군다나 “구속사적 성경 해석”은 비평학자들과의 수많은 응전 속에서 잘 다듬어지고 가치 있는 짜임새를 가지게 되었는데,새로운 성경접근법,이른바 “창조사적 성경해 석”은 이러한 역사적 투쟁의 산물인 “구속사적 성경해석”을 구조와 틀을 많이 차용할 것이다. 그러나 방법론에 있어서 총체적인 성경해석 방법 을 제안하게 될 것인데,여기서 총체적인 성경해석이란 성경해석이 문예 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을 통한 성경기록자의 신학적 메시지에도 충실하면 서 동시에,성경전체의 계시목적에 부합되는 총체적 관점의 신학적 해석 을 요구한다는 점을 강조한 성경해석을 말한다.

또한 통시적이고 성경 신학적인 주제로서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정위(正位)’의 개념을 제안할 것인데,이것은 계시와 구속 및 언약의 관점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하나 님의 창조의 목적에 더욱 적합한 신학적 주제로서 기여할 것이며,성경 신학적 성경해석의 폭을 더욱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게 됨을 살필 것이 다.

II장에서 계시와 언약과 창조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어 떠한 모습을 나타나게 될까를 조명하게 될 것인데,계시를 이해하는 방 식이 통일적 경륜7)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함을 강조하고,언약과 창조가 어떤 하나의 개념이 다른 하나를 포함하는 개념이 되는 것이 아니라,하 나님의 계시 목적에 부합된 방향으로 통합되어야 함을 보여줄 것이다.

 

    7) “모든 역사를 꿰뚫어 보는 종합적인 길은 단순히 삼위일체적인 경륜의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실체가 하나라는 것은 그 존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속성들의 계시나 그 역사적 계시에 있어서도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적 통일성과 시대 에 상관없이 같은 방식으로서의 통일적 경륜을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바빙크가 정당하게 비판하고 있다. 하나의 경륜 아래서 외부를 향한 역사들(opera ad extra) 이 위격적 사역들(opera persnoalia)보다 너무 많이 강조되고 세 위격들의 공유적 사역 즉 본 질적 사역(opera essentialia)이 너무 적게 사려되는 위험이 있으며 다른 한편 유일성의 보존에 있어서 삼위일체가 단지 경륜적으로 취급되고 거기에서 존재론적인 성격이 거절되는 위험이 있 다고 지적하였다. 경륜들을 강조하면, 하나님의 속성들 중 어느 하나에 의존하거나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 밖에 있는 어떤 원리에 의해서 정리되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김영규, 『조직신 학 편람1』, (서울:개혁주의 성경연구소, 2000), pp.58-59.

 

또한 창조질서의 특징에서 살펴 본 하나님의 목적,즉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의 정(正)위치로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의 역사로서 성경을  이해하자는 제안을 하게 될 것이다.

III장에서는 이러한 성경신학적 주제를 통하여 새로운 개혁주의적이고 성경신학적인 방법론으로서 “창조사적 성경접근”에 관한 제안과 함께 “창조사적 성경접근”의 특징들을 고찰해 볼 것이다.

IV장에서는 위에서 다룬 성경신학적 방법으로 창조와 새 창조에 관한 성경을 해석함으로서,창조와 새 창조가 통일된 경륜의 모습인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이루어짐을 살펴보게 될 것이며,새 창조(new creation)가 재창조(re-cre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첫 창조의 회복(renewal)임을 성 경을 통하여 증거하게 될 것이다.

새 창조는 창조의 회복이 되어야 하 나님의 통일된 경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재창조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첫 창조의 부족함을 인정하거나 첫 경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게 할 것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의 역사가 보 시기에 좋았던 하나님의 첫 창조로 회복되는 역사임을 밝힐 것이다.

그 리고 이 회복은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이 타락 이전의 모습으로 회복됨을 말함과 동시에,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속 목적과 첫 창 조질서를 통한 창조 목적의 거대한 통합이 처음과 나중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골 1:16-17)임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III.언약과 창조

 

Greidanus는 “성경의 자료들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해석자는 반드시 여 러 주제들 사이의 복합적인 관계 및 연관성을 밝히고 분류해야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역동적이고 포괄적인 중심 주제로 인정하는 구약신학은 풍부하고 다양한 신학들을 묘사할 수 있으며 또한 종적으로 나타난 주제들과 개념들을 다양하게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고”,또한 이러한 주제들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혼합,포괄,등 가의 관계가 잘 조명되어야 제대로 성경해석에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 다.8)

 

     8) Sidney Greidanus, 『성경해석과 성경적 설교(상)』, op. cit., pp.140-143.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계시의 올바른 시각을 정리하고 언약과 창조의 관계를 살펴 볼 것이며,그 관계 속에서 창조에 대한 새로운 인 식을 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개념을 정리할 것이다.

마지막 으로 소결론에서는 하나님께서 주권적 역사 가운데에 태초의 창조질서를 회복 또는 유지시키시는 경륜의 모습을 집중 조명할 것이다. 이것은 새 로운 성경신학적 주제인 ‘정위(正位)’의 개념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A.계시,구속,그리고 언약

 

1.계시와 구속

 

하나님의 계시는 “그 내용으로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하는 크고 하나이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은혜계약 이란 약속을 가지고 있으며,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임마누엘에서 그 중심과 정점에 이르고 있다.

이는 약속과 성취가 서로 맞잡고 가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 행위의 원리요 씨요 배아이며 그 행위로 그 말씀을 완전히 실현한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을 통하여 사 물들을 무로부터 존재하게 하신 것처럼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장막 이 인간들 가운데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는 것이다.”9)

Bavinck 의 이와 같은 설명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포괄적이면서 적절하게 설명 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가 깨달을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는 그 분의 작정 속에서 신적 행 위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 특별계시10)는 구속이라고 하는 것과 불가피하 게 연관될 수밖에 없는데,Vos는 구속에 대해 “부분적으로는 객관적이고 중심적이며,부분적으로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다”라고 규정하고 계시는 ‘객관적-중심적 구속행위’하고만 같이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계 시가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속과 관계해서 전체적인 구도로 이해되어져 야 한다는 의미이다.11)

그러나 구속이 계시를 모두 포함할 수 없으므로,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속으로서 계시를 이해하는 것이 사려 깊은 행동 의 한 방편일지라도 그 구속만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판단해서는 안 되 며,특히 각 시대에 밝혀진 구속적 사건들을 종합하여 계시를 이해하는 시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계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성 속 에서 이루어진 신적 행위이고 계시 이전에 하나님의 작정이 선재하였다 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12)

 

    9) Herman Bavinck, 『하나님의 큰 일』, 김영규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p.16.

   10) 일단 계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분한다. 즉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로 계시를 구분한다. 죄와 상관이 없었던 때의 자연계시는 내재적 자연과 외부적 자연으로 나누는데, 본유적 신인식 인 내재적 자연에 외부적 자연이 의존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두 원천에서 초자연적 계시가 부가되는데 이는 자연계시가 죄의 유입으로 영향을 받고 수정되었기 때문이다. 즉 죄로 자연 계시 자체의 구조가 왜곡되고 교정 받을 필요가 생겼고 따라서 인간의 구속과 관련된 새로운 진리의 세계를 소개할 필요가 생겼다. 이것이 특별계시이다. 이 특별계시는 다시 전(前)구속적 특별계시와 구속적 특별계시로 나누는데, 전자를 행위언약, 후자를 은혜언약이라 한다. 구 약은 타락이후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은혜언약에 포함된다. 그러나 메시야의 강림을 기준으 로, 그 이전을 구약으로, 그 이후를 신약으로 설명한다. Geerhardus Vos, 『성경신학』, 이승 구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pp.39-47.

   11) Ibid., pp.24-25.

  12) 이것은 경륜적 통일성으로 성경을 이해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일된 경륜으로 이해 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그의 생각의 계시일 뿐만 아니라,그의 뜻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인 간적인 방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마음의 성찰과 의지의 결 정에 따라서만 진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13)

 

    13) Herman Bavinck, op. cit., p.152

 

결국 그 시대마다 밝혀진 구속을 바탕으로 계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 안 에서 계시를 바라보고 그 계시를 바탕으로 구속을 이해하는 시각을 가져 야 한다.

그러나 기록된 계시를 중시하는 환원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 다면,기록된 구속을 먼저 이해하고 계시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작정은 상상 속에서 그려진 그림으로 그려 갈 것이다.

이런 지향은 성경 각 권 의 오해된 밑그림을 제공할 여지를 마련하게 될 뿐만 아니라 결국 성경 의 통일성을 해치게 되는 결과를 낳게 할 것이다.

그 출발이 그렇지 않 았더라도 하나님의 작정과 계시는 두말할 나위가 없이 훼손되게 될 것이 다.

 

2.언약

 

어원적인 의미에서 ‘언약’(berith, )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확정짓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문맥에 나타난 뜻은 여전 히 ‘약정’이나 ‘관계’의 개념”을 나타낸다.14)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구체적인 제도와 수단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 어진 ‘언약’(berith)이라는 사실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 성격에 있 어서,송제근은 구약전체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생각하는 언약이란 “인격 당사자 간에,공적 관계를 법적으로 형성하는 것”15)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고,Dumbrell은 여기에 덧붙여 그 계약관계는 “언약의 수납자에 게 일방적으로 부과되는”16)형식을 띠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14) O. Palmer Robertson, op. cit., p.13.

    15) 송제근,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서울:두란노, 2003), p.20.

    16) William J. Dumbrell, 『언약신학과 종말론』, 장세훈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2003), p.42. 여기에 덧붙여 Robertson도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이라는 표현으로 하 나님의 절대 주권적 성격임을 강조하고 있다. O. Palmer Robertson, op. cit., pp.23-24.

 

이러한 언약의 대한 개념은 ‘구속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일관된 발전을 이루어 왔다. 특별히 언약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가장 풍성한 형 태로 발전하게 되는데,그 언약의 핵심은 “그분이 언약하셨다는 행위 자 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약의 내용에 있다는 인식”이다. 그 내용은 택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상급은 그 무엇도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즉,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언약의 내용과 그 통일성17)에 대해 Bavinck 는 통찰력 있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약속을 처음 말씀하셨던 순간부터 그 자체 안에 나는 너희 하나님임이라 하는 충만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스스로 그에게 줄 수 있도록 자신을 주신 것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종 반복해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심을 발견한다.

창세기 3장 15절의 모태적 약속으로부터 족장들의 생활의 매순간 마다,이 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신약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런 부유하고 모든 구원을 그 자체에 보장하고 있는 약속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감사와 찬양인 ‘당 신은 우리 하나님이요 우리는 당신의 백성이요 당신의 목장의 양입니다’라 는 끝없이 다양한 신앙의 말로 교회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것에 대답하고 있다.”18)

 

   17) Dumbrell 또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영원한 언약’의 관계임을 증명하는데, 하나님께 서 자손에 대한 약속을 상징적으로 강화시키기 위해서 아브람(높음을 받는 아버지)의 이름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으로 바꾸셨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언약의 역사적 연 속성을 보여주며 또한 이스라엘 역사를 초월해 있는 상활들을 평가하고 적용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준다고 설명한다. Ibid., pp.48-49.

   18) Herman Bavinck, op. cit., p.17.

 

그러므로 개혁주의 전통으로 지켜온 언약의 통일성은 ‘하나님 스스로 가 우리의 상급이시다’라는 하나님과 언약관계의 내용으로서 명맥을 이 어온 것이며,개혁교회 또한 그 언약의 내용에 대하여 올바른 반응을 함 으로서 신앙을 고백하였다19)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 McComiskey 또한 여기에 동의한다. “약속-맹세(the promise-oath)는 구속사 전반에 걸쳐 본질에 있어서는 변화가 없이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목적의 통일성을 표현하는 매개자인 셈이다.” Thomas Edward McComiskey, 『계약신학과 약속』, 김의원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87), p.212.

 

B.언약과 창조,그리고 질서

 

1.언약과 창조

 

(1)창조와 언약의 관계

 

언약의 범위에 대한 한 가지 의문점은 노아 이전의 인간에 대한 하나 님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Robertson은 문제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노아에서 그리스도까지의 구속역사에서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를 벗 어나는 기간이 없었다는 사실에 충분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지 만,노아이전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합법적인 언약 관계를 어떻게 취 급할 수 있는가를 물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20)

 

     20) O. Palmer Robertson, op. cit., pp.25-26. 여기에서 Robertson의 책을 번역한 『계약신학 과 그리스도』에서는 ‘언약’이라는 용어 대신에 ‘계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필 자는 여기에 인용할 때 용어의 혼동을 주지 않기 위하여 ‘언약’이라는 용어로 전환하여 사용할 것이다.

 

Robertson는 훌륭한 통 찰력을 가지고 세 가지의 논증으로 이 난제를 극복하고자 한다.

  첫째,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가 처음에 ‘언약적’으로 지칭되지 않았음에도 내용에 있어서는 언약관계이므로 드러내는 성경적 전례가 있음을 제시하 였고,(삼하 7장;대상 17장;삼하 23:5;시 89:3)

  둘째로 예레미야 33장 20절 이하와 호세아 6장 7절은 언약의 용어로써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 관계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였으며,

  셋째로 창세 기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서 언약의 존재에 필요한 요소들이 이 미 나타난 사실을 들어 ‘언약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하였다.21)

그러나 언약의 관점에서 그의 논증이 훌륭하고 가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다소 환원주의적 논리의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한다.

그는 창세기 6장 18절에서 처음 나오는 ‘언약’이라는 단어를 강조한 나머지 그 이전의 성경역사를 억지로 ‘언약’ 이라는 고리를 사용하여 맥을 연결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 속사적 관점에서 창세기 6장 18절 이전의 성경기록을 살펴보게 된다면, 이런 방식의 설명이 최선의 길일 것이다.22)

하지만 성경은 노아의 언약 이전에 천지만물의 창조가 먼저 일어났으며,그 보다 먼저 하나님의 예 정이 선재(先在)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23)

“그는 그 자 신에게만 알려져 있으시고,하나님에 관한 어떤 외부적 지식이 생기기 전에 먼저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는 신외지식(神 外知識,extra-divineknowledge)산출의 첫 단계인 것이다.”24)라는 Vos 의 설명은 여기에 적절하다고 하겠다.

 

  21) Ibid., pp.26-34.

  22) 여기에서 ‘창조와 구속의 모티브’에 관한 송제근의 설명을 그 예로 소개한다. 그가 비록 창조 를 ‘그 장엄한 시작’이라고 표현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장엄한 시작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세기라는 것은 좋은 책명이 될 수 있는 한편 이 책이 창조에 관한 내용만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창조 자체에 대한 것은 초반 중에 서도 일부(1-2장)에 불과하고 대부분(3-50장)은 인간의 타락과 그 이후의 구속역사에 할애하 고 있다. 다시 말하면 창조에 이어 나오는 인간의 타락과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이 창세 기와 오경의 나머지 책들의 내용을 움직이는 강력한 추진력이 된다. 저자는 자신의 작품의 자 연스러운 출발이 되는 창조를 언급함으로서 인간과 세계의 구속에 대한 설명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하나님의 인류구속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담긴 책이라고 할 수 있 다.” 송제근,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op. cit., pp.62-63.

    23)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 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 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 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24) Geerhardus Vos, op. cit., p.22.

 

이것은 Robertson의 언약개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바라보는 방식,즉 올바른 관점에 서 창조를 바라보자는 지적이다.

Vos의 설명처럼,창조는 “신외지식(神 外知識,extra-divineknowledge)산출의 첫 단계”인 것이다.

만약 포함 관계라면,창조가 언약에 구속되기 보다는 “산출의 첫 단계”인 창조가 언약을 포함하여야 하는 것이 더 온당치 않겠는가?

실제로 Robertson 또한 이 관계를 인식하고 있었지만,“구속의 언약은 창조의 언약 밑에서 인간의 실패와 함께 곧 세워진다. 하나님은 특별한 창조질서로서 자신 과 인간을 결속하셨다.

인간은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써 이 관계를 깨 뜨렸다.”25)라고 이 관계를 언약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언약이 “구약과 신약 모두에 걸쳐 나타나며 중심적인 주제임에는 틀림없 으나,성경의 모든 주제들을 자연스럽게 포괄할 만한 주제는 아니었 다”26)라는 비판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25) O. Palmer Robertson, op. cit., p.97.

       26) Sidney Greidanus, 『성경해석과 성경적 설교(상)』, op. cit., pp.140-141. 

 

(2)성경적 창조의 독특성

 

성경에서의 창조는 “모든 신적인 계시의 시초이자 기초이며,따라서 또한 모든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삶의 기초이다.”27)

하지만 창조에 관한 성경적인 증거는 결코 “제한된 부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 말씀의 전 부분에서 발견된다.”28)

 

    27) Louis Berkhof, 『벌코프 조직신학(상)』, 권성수․이상원역,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9), p.330.

    28) Ibid., p.332. 

 

Berkhof는 엄격한 의미에서 창조 는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에 의하여 자신의 영광을 위해,태초 에 모든 가시적이고 불가시적인 우주를,이미 있는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생기게 하시고,그리하여 자신과 구별되면서도 언제나 자신에게 늘 의존하는 실체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동”29)으로 정의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명제는 성경에서 나타난 창조의 독특성을 고려 한 표현으로서,여기서 성경 창조의 독특성을 Berkhof의 견해를 중심으 로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동이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의 조성자이며(창 1:1;사 40:12;44:24;45:12),“그 사역은 세 위격들 가운데 나누어지지 않으며,비록 다른 양상이지만 전체의 사 역이 각각의 위격들에게 돌려진다”는 사실과 “만물은 단번에 성부로부 터,성자로 말미암아,성령 안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일반적 으로 존재는 성부로부터,사상이나 이념은 성자로부터,생명은 성령으로 부터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30)

그리고 창조는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 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의한 자유로운 행동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증거한 다.

이 점에 대해 Berkhof는 창조가 하나님의 필연적인 행동이라는 주 장하는 것은 신적 작정과 그 결과인 사물의 성질에 좌우된 필연성을 오 해한 것이라고 지적하고,다음과 같은 성경적 증거를 제시하였다.

 

“성경 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만물을 그의 의지의 의도에 따라 창조하셨으며(엡 1:11;계 4:11),그는 자충족적이며 결코 그의 피조물들에 의존하시지 않 는다고 가르친다(욥 22:2,3;행 17:25).”31)

 

  둘째,창조는 어떤 것이 무(無)로부터 생기게 하는 행동이다.

성경에 는 ‘무(無)로부터 창조’라는 표현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 혹은 하나님 자신의 의 지가 원인이 되어 천지가 창조되었다는 뜻을 의미한다.32)

 

     29) Ibid., p.333.

     30) Ibid., p.334.

     31) Ibid., p.334.

     32) Ibid., pp.337-339. - 14 - 

 

칼빈 또한 창 세기 1장 1절의 주석에서,모세가 ‘창조하시니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이 지금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모세는 ‘짜맞추다’,혹은 ‘모양을 만들다’라는 뜻의 야차르( )를 쓰지 않고,‘창조하다’,‘지어 내다’라는 의미의 바라( ) 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이 무에 서부터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33)

 

더욱 명백한 성경적 증거로서 히브 리서 11장 3절의 말씀을 들 수 있다.34)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 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임을 믿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고 증명 하고 있다.

   셋째,창조는 세계로 하여금 구별되면서도 항상 의존적인 존재를 부여 한다. 이것은 세계가 하나님과는 절대적으로 구별되며 그 본질적인 특 성에서도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데,“하나님이 자존적이고 자족 적이며 무한하고 영원한 반면,세계는 의존적이고 유한하며 시간적이라 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35)

이것은 또한 유출설이나 범신론적 사상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절대적인 방어이다.36)

 

     33) John Cavin, 『칼빈성경주석1(창세기1)』, 존칼빈성경주석출판위원회편역, (서울:성서교재간행 사, 1993), p.45. 성경에서의 바라(ארב(의 용법에 대해서는 Berkhof의 설명을 참고로 한다. “바라라는 단어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의 원래 의미는 ‘쪼개다’, ‘자르다’, ‘나누다’이지만, 여기 에 더하여 또한 ‘만들다’, ‘창조하다’를 의미하며, 좀 더 파생적인 의미로는 ‘산출하다’, ‘출생하 다’, ‘재생시키다’를 나타낸다. 그 단어 자체는 ‘어떤 것을 무로부터 생성하다’라는 개념을 가지 고 있지 않는데, 그것은 이 단어가 섭리의 사역들에도 사용되기 때문이다(사 45:7; 렘31:22; 암 4:13). 그러나 그것은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항상 신적인 산출물에 관하여 사용되고, 인간적인 산출물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으며, 물질을 목적격으로 취하지 않는데, 바로 그런 이유 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역의 위대합을 강조하는 데 사용한다.” Louis Berkhof, op. cit., p.337.

     34)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 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35) Louis Berkhof, op. cit., p.339.

    36) 유재원은 창세기 1장 3절의 말씀을 주해하면서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구절이 하나님은 말 씀으로 창조하시는 인격신임을 보여주며 동시에 창조된 사물과 하나님이 엄격하게 구분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이 사실로 성경의 창조는 유출설과 범신론과는 판이하게 다름을 강조하였다. 유재원, 『창세기강해 제1장』, (서울:민영사, 1990), pp.29-30. 

 

또한 창조가 세 계에 의존적인 존재를 부여한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세계와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시는 것에 대한 사실에 기인한 것인데,“하나님은 피조물 위에 무한히 높이 계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또한 창조의 전 부분에 임재하시며,그의 영이 모든 세계 내에서 활동하시는 내재적인 하나님이다”라는 사실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37)

   넷째,창조에서의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선포적인 영광 에 있다.

 

“그의 도덕적인 피조물들의 찬미를 통하여 영광을 받는 것이 최고의 목적에 포함된 목적이며,그 자체가 그 목적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선 영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그의 영광을 발현시키며 나타내시기 위하여 창조하셨다.……창조에서의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즉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은,예속되는 목적들로 피조물들의 행복과 구원,그리고 감사 와 찬미의 마음들로부터 받는 찬양을 포함한다.”38)

 

이 목적은 Bavinck 가 말한 ‘최고의 선’개념과 부합한다.

Bavinck는 “하나님은 모든 피조 물들의 최고의 선”이라고 말하며,이것은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자이시 며 보존자이시고,모든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시고,모든 선한 것들의 큰 기초가 되시기 때문”이며,“모든 피조물들은 매순간마다 영원하고 유일 하시며 어디에나 계시는 존재이신 하나님에게만 의존하고 있다”고 표현 하고 있다. 여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피조물 스스로에 의해서 역 시 그러한 것으로서 인식되고 즐기게 된다는 사상을 항상 내포하고 있 다”는 것이다.39)

 

     37) “그는 천지에 충만하시고(시 139:7-10; 렘 23:24), 우리가 살고 기동하고 존재하는 영역을 구 성하시며(행 17:28), 또한 그의 영으로 지면을 새롭게 하시며(시 104:30), 상한 심령을 가진 이 들과(시 51:11; 사 57:15), 그의 전으로서의 교회 안에 거하시는 것(고전 3:16; 6:19; 엡 2:22) 으로 언급된다.” Louis Berkhof, op. cit., p.339.

     38) 그리고 여기에 성경적 증거를 제시하였다(사 43:7; 60:21; 61:3; 겔 36:21, 22; 39:7; 눅 2:14; 롬 9:17; 11:36; 고전 15:28; 엡 1:5, 6, 9, 12, 14; 3:9, 10; 골 1:16). Ibid., p.341.

     39) Herman Bavinck, op. cit., p.9. - 16 - 

 

결국 ‘최고의 선’개념이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의 ‘최 고의 선’일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그것을 인식하고 즐겨할 의무이자 권리를 갖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확실 히 창조의 목적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반응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또 한 언약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택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상급은 그무엇도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는 언약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이다.40)

정리하면,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동으로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신 행위이며,세계로 하여금 구별되면서도 항상 의존적인 존재로 만드셨는데,이것은 하나님의 선포적인 영광을 위함이라는 사실 이다.

 

2.창조적 질서

 

하나님의 관한 지식은 창조로부터 계시되기 시작하였고 그 계시는 무 작위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태나 질서의 모습을 가지며 우리에 게 다가온다.

성경에 기록된 천지창조의 모습은 질서 정연하게 미리 정 해진 순서에 따라,또 그 예정된 곳으로 배치되어지는 듯한 모습을 나타 낸다.

 그리고 일곱째 날,창조가 완성된 후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으며 안식하셨다.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는 거대한 질서 와 조화된 모습을 가지며 우연의 결과로만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러한 주권적 역사의 실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야말로 창조계와 인간 역사에서 만물의 자연 질서 안의 어느 곳에나 모두 스며있는 유일 한 요인(要因)이라고 말할 수 있다.”41)

 

    40) “하나님을 최고선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단순히 헬라철학이나 스콜라신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 개념은 언약의 본질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 중 쯔빙글리는 이런 개념을 사용할 때, היהא의 개념의 정의와 관련해서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자체 스스로 존재하고(per se ispum existit, seipso est) 스스로 기초요 유일한 자(sese fundamentum ac solum)'이시면서 ’우리를 위한‘자로서 자신을 은혜로우시고 거짓이 없으시며 지극히 높은 선으로 여기기를 원하시는 분이다는 것이다. 그 선은 절대적이고 부족함이 없이 완전할(Hoc solum deus est, quod perfectum est, id est absolutum et cui nihil desit, cuique omnia adsint, quae summum bonum deceant)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선이며(se ipso bonum est) 모든 선들의 샘과 원천(omnium bonorum fons et scaturigo)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외에 선이란 없다(nihilominus nemo bonus est nisi solus deus)는 것이 쯔빙글리 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다. 그의 이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좀 더 성경적인 개념들에 의해 서 잘 논증되지 않았어도 성경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지식이다.” 김영규, op. cit., p. 54.            41) Sidney Greidanus, 『성경해석과 성경적 설교(상)』, op. cit., p.85.

 

이러한 관점에서,하나님은 어떠 한 창조적 질서의 모습을 갖추게 하셨을까?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어떤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하나님께서는 명확한 질서를 가지고 창조사역을 하셨다.

“6일 동안의 사역을 통해 먼저 된 창조사역의 기초 위에 다음에 나올 사역이 놓여졌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창조는 점점 더 복잡하게 상승되 며 세분화되어간다. 그리고 각 단계가 명확한 구획이 지어져 있음을 각 각의 날마다 ‘종류를 따라서’(1:11,12,21,24,25)라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42)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창조질서가 미리 계획되어졌으며,모든 피조세계 와 피조물들은 혼돈이나 무질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질서 속 에서 존속하게 됨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우주 론적 증명을 이끌게 되는데,세계가 아무리 크고 강하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항상 시간과 공간의 형식에 제한됨을 증거하고 유한하고 우연적 이고 의존적인 존재임을 증거”함으로,따라서 “만물은 최종적인 원인인 영원하고 본질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를 요구”43)하게 되는 것이다.

 

     42) 송제근,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op. cit., p.61.

     43) Herman Bavinck, op. cit., p.33.

 

우리 의 신적 인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 을 이해할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질서의 수준에 머무를 수밖 에 없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질서를 유지하고 질서 속에서 머물러 있다면,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2)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근본 질서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 역사하셨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창조질서의 조화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파 괴 되었다.

Dumbrell은 이에 대해 하나님과의 관계질서조차 바뀌게 한 인간의 창조질서 파괴를 지적한다.

창세기 2장 18-15절에서 소개된 최 초의 관계질서는 하나님,남자,여자 그리고 동물 순이었지만,창세기 3 장에서 타락하는 순서는 뱀이 제안하고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고 남 자에게 주고 먹게 하는 순으로 바뀌었다.

Dumbrell은 하나님의 심판도 먼저 뱀에게,그 다음 여자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자에게 심판을 하 심으로서,뒤바뀐 질서가 단순한 도덕적 실수가 아니라 창조질서를 파괴 한 인간의 고의적 행동이었음을 지적한다고 설명하고 있다.44)

또한 그 결과,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에게 생명나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한다.

 

“생명나무에 인간이 손을 대지 못하게 하 심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근본 질서가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게 하셨다(창 3:22-23)”는 사실이다.45)

 

Dumbrell은 또 하나의 성경적 증거를 노아의 홍수사건을 통하여 설명 하고 있다.

먼저 창세기 6장 9절에서 노아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로 묘사되었을 때,그와 같은 선행들이 신적 은혜를 받을만한 근거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구약성경에서 ‘의롭다(차디 크, )’는 말은 주로 상대방과의 관계에 입각한 행실을 가리키는 말 이기 때문이다.” 즉,“이전에 수립된 관계에서부터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행실을 가리키는 말”을 의미하며,“이러한 행실은 이전에 수립된 관계와 조화를 이룬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이 덧 붙이고 있다는 사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세상은 11-12절46)에 묘사되고 있는데,‘강포(하마스, )’가 가득 찬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44) William J. Dumbrell, 『언약신학과 종말론』, op. cit., pp.37-38.

    45) 송제근,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op. cit., p.68.

    46)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 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창 6:11-12)   

 

히브리어에서 “하마스( )란 용어는 그 중에서도 특히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질서가 현저히 파괴되 었음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더군다나 12절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강포했다는 사실은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전 생태계가 원래의 하나님과의 관계들을 파괴시켜 놓았다는 것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47)

따라서 인간의 전적 부패와 그로인하여 모든 피조물들의 행위가 자기들 에게 주어진 질서의 한도를 넘어서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Dumbrell 은 이 시기에 홍수는 적절한 처벌이었다고 설명한다.

“본래의 창조 패 턴을 반전시키는 이와 같은 역질서에 의해 세상은 사실상 창세기 1:1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만 것이다.”48) 이를 통하여,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 물들의 질서와 조화가 파괴되는 것을 그냥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분명 하다고 할 수 있겠다.

성경은 만물은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갈 것이 다(롬 11:26)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 조물들은 결코 무질서와 혼돈의 상태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귀착점 은 바로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의 저편에 서 기다리고 계시지만은 않는다.

유재원은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자연 에 존재법칙과 보존의 법칙-즉 힘의법칙-도 부여하셨다.

따라서 그의 명령은 일시적인 효력을 지니지 아니하고 영속적인 효력을 지니게 되었 다.

이 말씀의 영속적인 효력으로 인하여 우주는 혼돈이나 무(無)로 되 돌아가지 아니하고 질서정연한 우주로서 존속한다.”라고 설명하고 있 다.49)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은 신증명에서 목적론적 증명50)을 유도하게 된다.

 

  47) William J. Dumbrell, 『언약과 창조』, 최우성역, (서울:도서출판크리스챤서적, 1990), pp.17-19.

  48) Ibid., p.19.

  49) 유재원, op. cit., pp.31-32.

  50) “그 법과 질서에 있어서나 그 통일과 조화에 있어서, 또한 모든 피조물들이 갖는 유기적 관계 에 있어서 세계는 우연으로써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어떤 목적이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무한한 총명을 가지고 그 목적을 성취했던 아주 지혜롭고 전능한 존재를 알도록 재촉하고 또한 그것을 전지전능한 힘으로 성취하였음을 가르친다.” Herman Bavinck, op. cit., p.33.

 

(3)하나님께서는 창조사역을 다 마치신 후,제 7일에 안식하셨다.

하나님의 창조는 6일 만에 완성되었고,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복 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는데,그것은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 안식하셨기 때문이였다.51)

이 때의 안식은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마치신 후 ‘쉼’을 얻기 위함이 아니였다.52)

‘쉼’을 얻기 위해 서 일곱째 날에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실 이유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안식은 바로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안식을 의미 한다.

류호영은 이 안식에 대하여,“제 7일째 하나님께서 행하신 ‘안식’ 은 창조에 관한 상대적인 ‘최종적’안식을 의미하는 것이지,하나님이 인 간을 궁극적으로 구원하여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시겠다는 표현이나, 그런 의미에서 장차 다가올 안식을 기대하는 예기적 안식이나 그 징표가 아니다.”53)라고 지적한다.

 

        51)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 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3)

       52) “창세기 2:2-3은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마친신 후 안식하셨다고 선언한다. 이 ‘안식하셨다’ 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멈추다’ 혹은 ‘그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 ‘사바트(תבש‘(를 번역한 말이다.……이 동사는 구약에 일곱 번 등장한다. 이 동사의 기본적 용례를 살펴볼 때, 이 동사 는 그 어느 곳에도 ‘끝마침’ 혹은 ‘쉼’의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제 칠일을 한 주 간 창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날 혹은 일련의 모든 창조사역이 완성된 날로 이해함이 가장 바 람직한 듯하다.” William J. Dumbrell, 『언약신학과 종말론』, op. cit., pp.32-33.

       53) 또한 이 안식이 인간의 죄로 인해 방해를 받게 되었지만, 그 자신의 ‘좋은’ 창조를 회복시키시 기 위해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그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주셨는데, “이 안식은 그가 최초에 가졌 던 안식에 대한 징표요, 또한 그 안식에 잠정적으로 참여한다는 표징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류호영, “주5일제와 노동과 쉼에 대한 신학적 고찰(2)”, 『목회와신학』, 통권 162호(2002), p.213. 

 

요약하면,창조를 마치신 후의 안식은 하나님 께서 피조물들에게 부여하신 첫 안식으로서 모든 피조물들이 마땅히 누리고 즐겨야할 안식인 것이다.

여기에는 구원을 통한 안식이나 미래에 다가올 예기적인 안식을 표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미 모든 피조물 은 안식에 참여하여 창조의 목적에 알맞게 복을 누리며 즐거워하는 상태 이기 때문이다.54)

창조에서의 안식이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이고 또한 타락 한 이후에도 그 안식이 유지되기를 바라셨던 하나님의 마음은 출애굽기 20장 8-11절과 신명기 5장 12-15절의 제 4계명에 잘 나타나 있다.

류호 영을 히브리어 구문론적 연구를 통하여 “제 4계명의 주된 관심은 ‘안식 일을 준수하라’는 명령임을 확인케 한다”고 설명하고,“안식일이 하나님 의 창조안식(출애굽기의 4계명의 경우)과 하나님의 구속행위(신명기의 4 계명의 경우)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의존 이 아닌 다른 방식,곧 삶의 통상적인 일들에 대한 종속을 멈추고( ), 삶의 근원과 생존 모두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종속과 의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하였다.55)

결국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의존적으로 창조되었으며,창조의 목적에 알맞게 복을 누리며 즐거워해야 하는 상태로 창조되었다.

인간의 안식 에 대한 다음의 설명은 이를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깊은 신학적 통찰을 보여준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고 그의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는 안식하지 못한다는 어거스틴의 말이 역시 그러한 결 론이다.”56)

 

   54) William J. Dumbrell, 『언약과 창조』, op. cit., p.193.

   55) 류호영, “주5일제와 노동과 쉼에 대한 신학적 고찰(1)”, 『목회와신학』, 통권 161호(2002), pp.199-204.

   56) Herman Bavinck, op. cit., p.14.

 

C.소결론

 

지금까지 언약과 창조에 관한 주제로 신학적인 고찰들이 이루어졌다.

언약의 내용이 개혁주의 전통 속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왔듯이,언약 의 통일성도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유지되고 있다.

성경에서 언약 개 념은 구원받은 백성의 개념보다 선행하지만 창조 개념은 언약 개념보다 우선하게 된다.

구속이 계시보다 선행할 수 없듯이 계시의 시작인 창조 보다 언약이 우선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언약의 서론으로서 창조 를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 목적에 부합된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의 양상으로 모두 동일한 무게 를 지니며,어느 개념이 어느 개념을 포함한다든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이 모두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모든 피조물에 대한 주권적 영광의 선포로서의 창조 개념이,하나님께서 스스로가 선택된 백 성들의 최상급이 되신다는 언약 개념과 함께 하나님의 계시의 목적이라 는 한 목표를 향해 집중하고 있다.

즉,하나님의 계시의 관점에서 언약 과 창조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적 질서를 특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창 조질서를 유지시키시고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욱이 타락 이후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모든 피조물들이 타락 전 의 창조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창조를 모두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는데,그 안식은 모든 피조물들이 마땅히 위치할 자리에서 창조의 목적에 알맞게 복을 누리며 하나님을 최고의 상급으로 즐기는 상 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질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질서 였으며,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부합한 피조물들의 정위(正位)였던 것이다.

비록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질서와 조화가 어긋나기는 했지만, 창조질서의 완전한 파괴는 아니며57) 완전한 회복을 위해 진행해 가고 있었다.

 

    57) Dumbrell은 세상과 창조세계를 타락한 것으로 보아선 안된다고 지적하는데, 그 이유는 “창조 의 질서, 질료로서의 세계는 항상 중립적이기 때문이다. 타락은 중립적인 창조세계를 통치해야 만 했던 인간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William J. Dumbrell, 『언약신학과 종말론』, op. cit., p.43.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인간들이 회복되기를 원하셨는데,구약의 언약과 통치역사가 인간과 함께 하시길 원하시고 인간이 하나님과의 바 른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 주고 있다. 결국 창조질서의 부조화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아 회복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고(사 11:1-10)그리스도의 재림 으로 인하여 완성될 것이다.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정위(正位)로 회복할 수 있으며(골 1:16-17),예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으로 세상의 종말은 모든 피조물들의 안식에 안착할 것이다(고후 4:6).

왜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 하나님의 “좋았던” 태초의 창조질서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사 51:3,겔 36:33-36참조).

그러므로,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즉 모든 피조 물들이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 때의 정위(正位)로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 의 주권적 역사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할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첫 창조 때에 모든 피조물들은 복을 받고 거룩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계시 목적에 부합한 최선의 상급으로서의 하나님을 인식하고 즐겼고,하나님 께서 모든 피조세계에게 태초부터 원하시던 모습 이였기 때문이다.

또 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그 정위(正位)에 위치하지 않으면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IV.창조사적 성경접근

 

A.학문으로서의 신학

 

칸트 이후로 실증주의의 득세와 함께,신학은 관찰할 수 없고 또 경험 적인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그 확실성을 학문에서 인정하는 유일 한 권위인 인간의 이성에서 찾지 않고 계시에서 찾는 무분별한 영역으로 취급되어져 왔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칸트의 비판에 기인한 것인데,그 는 “하나님과 초감각적인 것 일반에 대한 그 어떤 이론적 지식을 얻는 것도 불가능하다”58)고 하였다.

칸트의 비판은 하나님과 절대적 진리에 대한 교만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이성적인 판단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객관화하여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 하는 바이지만,칸트의 시도는 하나님과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모든 것 들을 이성적 판단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초이성적인 것으로 구분 해 버리는 성급한 판단을 하고 말았다.

당연히 그 영역을 연구하는 신 학 또한 학문적인 영역에서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진리를 다루는 학문일수록 오히려 상대적 진리인 이 성적 도구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 올바른 학문적 겸손 이다.

신학적 입장으로는 모든 인간은 “타락 이후에 살고 인간의 회복 이전에 살기 때문에 이성의 능력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것”59)이 마땅하다.

 

     58) Louis Berkhof, op. cit., p.52.

     59) Ca Tukker, “기독교 학문이란 무엇인가”, 『현대세계 개혁신학의 현황과 그 문제점』, 기독교 학술원엮음, (서울:기독교학술원, 1993), p.35.

 

그것은 그의 사고의 결과들 뿐 아니라 지성에서도 원죄의 결 과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 학자의 특징인 겸손이 모든 과정을 다시 시작하고 모든 것을 바꾸려는 것에서부터 막아준다”60)라는 Tukker박사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른 학문분야 에서 전수되어 온 좋은 것을 계속 붙잡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 할 필요는 없지만,우리 자신의 길에 우리의 힘을 더욱 기울이자는 말이 다. 이것이 다른 분야와의 학문적 교류의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절대 적 진리에 대한 올바른 겸손이다.

자신의 이성적 결론에 대해 절대적으 로 확신하는 학자는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자 신의 지성을 우상화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이성적인 학문인 과학도 잠정적인 결론61)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이것을 잘 입증해 주고 있다.

한편 이러한 실증주의의 비판에 못 이긴 몇몇 사람들은 신학의 대상을 “하나님으로부터 종교적 경험,종교적 신앙,또는 종교일반으로 바꾸어서 신학의 학문적 지위를 얻고자 노력하였는데,그들은 객관적인 것으로부 터 주관적인 것으로,신적인 것으로부터 인간적인 것으로,초감각적인 것 으로부터 인간의 관찰대상이 될 수 있는 심리적인 현상”62)으로 바꾸어 놓는,스스로 학문적 비하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신학이 학문적 천대를 받는 이유는 다른 학문과 달리 근본적으로 신앙적 요소를 포함하 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이 결코 신학을 학문적 지위에 올려놓는 데에 약점으로 작용해서는 안된다.

결국 이러한 논의는 신학이 종교가 아닌 하나님에 관한 연구를 목표로 학문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것은 학문 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다. Berkhof는 Eisler의 『철학 핸드북』의 학문(Wissenschaft)에 대한 정의를 인용하였는데,“하나의 정해진 영역에 관련되거나 동일한 관점으로 결합된 구성적 총체로서,방 법론적으로 결합되고 연결된 인식의 체계적 통일을 지향하는,체계화된 지식”이라고 정의하였다.63)

 

     60) Ibid., p.36.

     61) 지금까지 밝혀온 관찰되고 검증된 사실들을 올바른 진리로 이해하는 과학적 결론을 의미한다.

     62) Louis Berkhof, op. cit., p.53. 

      63) Ibid., p.55.

 

이 정의에 따르면,신학을 학문에 범주에 넣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계시로 얻어진 자료를 파악하고 분석하고 분류하며 조직화하는 도구로 이성을 사용할 수 있으며,다른 학문들과의 공유도 가능하다. 또한 신학이 많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다른 학문 또한 수많은 문제들을 아직 미해결상 태로 남겨두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신학이 학문의 지위를 갖지 못할 이유는 여전히 없다.

다만 신학을 하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은,다른 학문과의 교류에 있어서 그 수단인 이성적인 도구를 방법론적 으로 적절히 사용해야 할 것이다.

비평학자들은 신학이 학문으로서 이성의 테두리 안에서 연구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다른 학문에서 고안된 언어 분석적 방법들과 문학적 수단들을 동원하여 성경저자(혹은 편집자)의 원뜻을 이해하고 신 학적 본래의 의미를 해석한다는 미명아래 환원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 고 한다.

그러나 어찌 온 만물의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질서의 틀 (이성의 테두리)속에서만 이해되어지는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 가?

다만 이성으로 인식되어지는 하나님을 우리가 이성적 학문으로 논 의할 따름이지 이성으로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는 것 이다.

학문은 절대적 진리를 연구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신학은 당 연히 하나님께서 이미 부여하신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학문적인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힐 수 있 도록 봉사해야 할 것이다.

 

B.총체적 관점64)으로서의 성경 신학

 

성경 신학의 명칭에 대해 Vos는 이 학문이 목적하는 바를 적절히 표 현한 용어로 “특별 계시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지만 이 미 사용하던 “성경 신학”이라는 용어를 버리지 않았다.65)

Vos는 성경 신학을 정의하기를 “성경 신학은 성경에 보존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과정을 다루는 주경 신학의 한 분야이다.”라고 하면서,계시는 “그 신적 행위로서의 계시”를 다룬다고 하여 계시의 역사성을 강조하였다.66)

반 면에 Hasel은 “성경 신학은 개별적인 성경자료들과 여러 그룹의 작품들 의 최종적인 형태의 요약적 해석을 제공하고,성경 자료들에게 나타나는 통시적 주제들,동기들,개념들을 제시하는 과업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 여 최종적인 문예적 형태로서의 관심에 비중을 더 두었다.67)

그러나 Greidanus는 그 비중이 어디에 조금 더 있든지 간에 그 한 요소만으로 는 성경해석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 때문에 신학적 메시지를 위 한 총체적 접근방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68)

 

     64) ‘총체적 관점’이라는 용어는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주장하는 ‘총체적 관 점’이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역사적 및 문예적 해석에 기초를 두면서, 이 모든 해석이 하나 님의 계시의 성격을 고려한 신학적 메시지를 향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총체적(holistic)’을 말 한다.

    65) Geerhardus Vos, op. cit., pp.33-34.

    66) Ibid., p.24.

    67) Sidney Greidanus, 『구약의 그리스도』, 김진섭․류호영․류호준역, (서울:이레서원, 2003), p.389. Greidanus가 Gerhard Hasel의 “Biblical Theology:Then, Now, and Tomorrow”, Horizons of Biblical Theology, 4/1(1982) p.77.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하였다.

    68) Sidney Greidanus, 『성경해석과 성경적 설교(상)』, op. cit., pp.139-140. - 28 - 

 

이와 같은 맥락에서 조성재도 총체적 접근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성경신학을 취할 수 있는 형태는 교의학이 전제된 성경신학 방식이다.

즉 본문의 역사성과 문맥을 살피되 계시기록성에 관련해서 살피 고,계시의 점진적인 성격을 생각하되 언약의 통일성을 통한 신론적인 사색이 그것을 제어하며,각 저자의 의식과 시․공간성이 사려되면서도 그것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식이 궁극적으로 드러나도록 기다리고,시대의 한계 속에서 주어진 계시는 그것의 기록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 획안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파악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그 방식의 특 성을 말하면,역사성을 중시하면서도 초역사성에서 생각하고,문맥을 살피면 서도 영성을 고려하며,계시 기록자를 염두에 두면서도 그것의 원저자이신 하나님에까지 치닿는 교의학적인 사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69)

표현은 조금 다르다 할지라도 ‘교의학적 전제’를 ‘신학적 메시지’라고 이해한다면 성경해석에 있어서 총체적인 접근 방식의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본 셈이다.

성경신학의 총체적인 접근방법은 역사적,문예적,신학적 영역을 포함 한 광범위한 해석 방법이다.70)

 

    69) 조성재의 학위논문은 그 부제인 “개혁주의 교의학적 성경신학 시론(試論)”에서 알 수 있다시 피, 성경신학에 있어서 신학적 전제가 중요함을 강조한 성경신학적 방법을 시범적으로 소개하 고 있다. 그의 논문에서 G. Vos의 성경신학적 방법이 경륜적 통일성을 지향하게 됨을 비판하 고,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속성에 기초한 통일적 경륜방식으로 되어야 함을 고찰하 고 있다. 조성재, 『엄밀한 개혁주의에서 본 G. Vos의 성경신학의 역사적 방법에 대한 유용성 과 한계점 고찰』, (안양대학교신학대학원, 1998), pp.101-102.

    70) Sidney Greidanus, 『성경해석과 성경적 설교(상)』, op. cit., p.139. 번역상 ‘문학적 해석’으 로 되어있지만, 용어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문예적 해석’으로 고쳐서 인용하였다. 

 

이러한 성경신학적 방법은 통시적인 성 경 주제들을 중심으로 역사적 계시의 점진성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역 사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성경진리의 전체성을 고려하여 삼위일체 하나 님의 통일적인 경륜을 밝히는 작업이다.

이에 관한 논의는 Greidanus 의 책 『성경 해석과 성경적 설교(상)』에 잘 요약되어 있는데,이 책의 주요 내용을 골격으로 장단점을 취사선택하면서 성경신학적 방법과 그 성격을 규정하고,최종적으로 총체적이고 통시적인 성경신학적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1.역사적 해석

 

Greidanus는 신학적 메시지를 위한 역사적 해석은 우선적으로 해석자 가 물어야 할 기본적인 두 가지 질문,즉,“저자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 려고 하는가?”,와 “그 저자가 자신의 청중들에게 어떤 반응을 얻어내려 고 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71)

이것은 각각의 성경 기록자들이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해석”72)을 제시하고 있다 는 사실을 기초하여 중요한 질문들이 되는 것이다.

기록자는 그 당시의 사건들을 모두 기록할 수 없겠지만,“성경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저자가 어떤 사건들을 선택하였고 이 사건들의 어느 면을 부각시키기를 원했는가?하는 것이다.”73)

두 번째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유일한 사건들을 신뢰할 수 있 는 역사적 기록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비평학자들의 통 일되지 않은 이유의 수많은 불신들이 있었다.

이것들을 종합하면,역사 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비평학 자들은 ‘상관성의 원리’74)를 들어 닫힌 우주계(하나님이 관여할 수 없는 우주계)속에서 원인과 결과에 의한 통일된 역사를 주장하였고,이러한 인과적인 역사에서는 유사성이 인정되는 사건들만을 개연성 있는 사건으 로 받아들이고,‘유비의 원리’에 따라 특정한 사건들,즉,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기인된 유일한 사건들(예를 들어,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인정치 않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71) Ibid., pp.179-180.

    72) Ibid., p.181.

    73) Ibid., p.170.

    74) 상관성의 원리란 어떤 사건의 의미는 역사 전체의 맥락 안에서, 즉 그 사건의 원인과 결과 그 리고 그 사건의 이전 사건들과 그 결과로서 나타난 사건들에 비추어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Greidanus는 핵심적이고 명쾌한 해답으로 이러한 비판들을 조목조목 해결하고 있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하나님께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역사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Greidanus는 “다른 사 건들과 마찬가지로,기적들이 있음직한 가능성은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도구 즉 목격자의 진술과 다른 자료들을 사용하여 입증될 수도 반증될 수도 있다”라고 기적적인 사건들에 대한 사실성의 실증이 가능함을 보여 주고 있다.75)

뿐만 아니라 “일관되고 충분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많은 양의 사실들과 자료들이 수집되어 있는데,이 모든 요소들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서로 조화되도록 묶을 수 있는 설명이 제시된다면,우리는 진 정한 자료 앞에 서있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76)라는 라투렐 (Latourelle)의 생각으로 유일한 사건의 기반을 다지고 있다.

그것은 닫 힌 “상관성의 원리”와 성경적 세계관의 차이이며,역사적 본문에 대해 비평학자들의 유일한 사건에 대한 ‘무조건적 의심’이라는 역사적 방법론 을 비판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종합하면,“역사 안에서 가능한 모든 원 인들에 대해 열려 있는”77)역사관과 일관성 있고 필요한 설명이 가해질 수 있는 유일한 사건들은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들로 충분히 신뢰할 만하 다는 것이다.

즉,성경의 기록이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들로 인정될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는 설명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내용은,“총체적 역사해석이란 해석자가 본문의 메 시지를 그 본문의 직접적인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의 가장 넓고 가능한 맥락 즉 역사 전체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살펴 보는 것”78)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75) Sidney Greidanus, 『성경해석과 성경적 설교(상)』, op. cit., pp.89-90.

    76) Ibid., p.96.

    77) Ibid., p.183.

    78) Ibid., p.187.

 

왜냐하면,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역 사 속에서 계시하시며,성경 본문에서 또한 여러 기록자들을 통하여 우 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조성재는 다 음과 같이 주의 깊게 설명하고 있다.

 

“성경을 역사적인 점진성에 따라 보게 될 때,그것의 산출되는 신학이 우 리에게 많은 유익을 줄지라도,그것에 갇혀버리면 그 방식 자체가 원리적인 면에서 인간적이다. 성경은 기록된 것이지만 기록되지 않았어도 전제된 것 이 있다. 그 본문에서는 드러나지 않아도 전체성경을 통해서 지지받고 있 고,원리로써 작용하고 있는 계시정신이 있다.……다만,역사적인 사려를 통 해 성경본문을 벗어나지 않으나 동시에 그 곳에 머물러 제한하려 할 때 그 본문은 역사에 갇히고 만다.”79)

 

결국 이 말은 역사적 해석은 하나님의 총체적인 계시역사관점에서 해 석되어져야 한다는 언급일 것이다. 총체적인 역사적 해석은 역사성을 고려하면서 총체적인 신학적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염두 해 두어야 한다.

 

2.문예적 해석

 

“문예적 해석에서는 일반적으로 해석자가 성경 본문의 문학 장르,수 사학적 장치,말의 표현,문법,구문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 목 적은 그 본문이 속해 있는 문맥에서,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본문이 속 한 성경책의 문맥과 나아가서는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단어들의 의미를 결정하려는 것이다.”80)라고 Greidanus는 소개하고 있다.

 

     79) 조성재, op. cit., pp.94-95.

    80) Sidney Greidanus, 『성경해석과 성경적 설교(상)』, op. cit., p.108. 

 

그러나 성경을 하나의 문헌이라고 규정하여 계시의 측면을 약화시킨다든지,문예적 단 위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원자분해식 성경연구를 한다든지 하는 오류들 을 지적하면서,문예적 해석은 신학적 메시지를 향한 해석이 되어야 함 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어떤 특정한 문예 형식이 의식적으로 사용되었든 무의식적으로 사용되었든지 간에 그것은 단지 영감 받은 기록자가 말하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일 뿐이다. 이러한 매개 수단 이 분명히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 도구가 완전한 메시지는 아니다.”81)

 

그러므로 신학적 메시지를 향한 문예적 해석이 되어야 함을 마땅하다.

그러나 문예적 해석에서의 강조점은 ‘무슨 메시지를 얻는가’를 나타내기 이전에 ‘어떻게 메시지가 표현 되었는가’를 먼저 제시 해 두어야 할 필요 가 있다는 것이다.82)

 

    81) Ibid., p.113.

    82) Sidney Greidanus, 『구약의 그리스도』, op. cit., pp.337-338.

 

그것이 곧 올바른 신학적 메시지를 위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3.신학적 해석

 

역사적 해석과 문예적 해석을 강조하다 보면,자주 성경의 계시적 측 면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자체에 대하여 ‘하나 님에 관한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라고”말할 수 있고,이 주장이 반드시 “문예적 및 역사적 해석에 필연적으로 고려 되어야”하고,동시에 신학적 해석이 “나중에 추가되는 해석 방법이 아니 라 오히려 처음부터 해석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적 해석은 총체적 해석에서 없어서 안 될 본질적인 요소이기 도 하다.83)

 

      83) Sidney Greidanus, 『성경해석과 성경적 설교(상)』, op. cit., pp.202-203. 

 

여기에 덧붙여,Greidanus는 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할 이유 를 세 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영감으로 되었다(딤후 3:16)는 사실이 단순한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 총체적 해석 을 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고,

  둘째로 교회가 성경을 정경으로 수납했다 는 사실을 말하며,

  셋째로 믿는 사람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 할 수 없고 자연스레 믿음에서 알게 된 해석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는 당위성을 언급하고 있다.84)

결국 성경은 신학적 해석을 요구하며 그 해석 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Greidanus의 표현을 빌 리면,“이 구절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해 무엇을 드러내는가?

이 질문은 하나님에 대하여 추상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하나님께 서 자신의 창조세계와 창조물과의 관계성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관심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질문은 그 구절이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섭리,하나님의 언약,하나님의 율법,하나님의 은혜,하나님의 신실하심 등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85)

이러한 신학적 해석은 어느 한 책이나 한 문단의 기록의 의미를 아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성경 전체 안에서 그 문단, 그 책의 궁극적인 목적을 밝혀야 한다. 이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하나 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Greidanus는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인간 저자가 염두에 둔 상대적으로 제한된 직 접적인 기록 목적보다 훨씬 크며 폭넓다.

그리고 이처럼 광대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록 목적은,특별히 성경의 어는 한 책이나 서신서를 정 경 전체의 문맥에 비추어 해석할 때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86)라고 말하 고 있다.

이것은 센수스 플레니어(sensusplenior)87) 즉,충만한 의미 (thefullersense)를 염두 해 둔 것인데,“그러한 충만한 의미가 오로지 본래 의미의 확장으로서 그리고 성경 계시의 계속적인 발전에 기초하여 수립”된다면,오히려 자의적인 첨해(eisegesis)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 책으로서 그 충만한 의미를 부인하는 것 보다는 낫다고 주장하고 있다.88)

 

   84) Ibid., pp.203-206.

   85) Sidney Greidanus, 『구약의 그리스도』, op. cit., p.339.

   86) Sidney Greidanus, 『성경해석과 성경적 설교(상)』, op. cit., p.214.

   87) 여기에서 Greidanus는 브라운(Raymond Brown)의 정의를 빌어 사용하고 있다. 그 의미는 “하나님에 의해서는 의도되었으나 인간 저자에 의해서는 분명하게 의도되지 않은, 추가적인 더 깊은 의미이며, 이것은 성경 본문(또는 여러 본문들이나 한 권 전체)의 단어들 속에 들어 있는 데, 본문을 그 이후의 계시에 비추어 보거나 또는 계시의 발전을 이해하면서 연구하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라고 소개한다. Ibid., pp.215-216. 

 

필자는 이러한 신학적 해석에서의 개혁주의적인 기준을 하나 덧붙여 보완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충만한 계시의 의미를 인식하는 관점은 기독론 중심의 경륜적 통일성에 멈추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에 기초한 통일적 경륜에 비추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89)

왜냐하 면,기독론 중심의 경륜적 통일성은 늘 관심의 초점이 ‘구원받는 우리’에 있어서 주관적이고 인간중심적인 해석으로 빠질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 다.

우리의 관심의 초점은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있어야 올바른 신학적 해석을 유도할 것이다.

조성재는 이에 대하여 “이상과 같은 사 고를 통해 궁극적으로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며,그분 의 소원이다.

이것이 계시기록과 관련해서 드러나야 하는 개혁주의 교 의학적 성경신학의 목적인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90)

 

     88) Ibid., p.217.

     89)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적 통일성과 시대와 상관없이 같은 방식으로서의 통일적 경륜을 구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바빙크가 정당하게 비판하고 있다. 하나의 경륜 아 래서 외부를 향한 역사들(opera ad extra)이 위격적 사역들(opera personalia)보다 너무 많이 강조되고 세 위격들의 공유적 사역 즉 본질적 사역(opera essentialia)이 너무 적게 사려되는 위험이 있으며 다른 한편 유일성의 보존에 있어서 삼위일체가 단지 경륜적으로 취급되고 거기 에서 존재론적인 성경이 거절되는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경륜들을 강조하면, 하나님의 속 성들 중 어느 하나에 의존하거나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 밖에 있는 어떤 원리에 의해서 정리되 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김영규, op. cit., pp.58-59.

     90) 조성재, op. cit., pp.94-95. - 35 - 

 

4.총체적인 성경신학의 성격

 

총체적인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계시를 다루는 학문이기에 하나님의 계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그 본질적인 특성은 계 시의 성격을 따라 결정 될 수밖에 없다.

Vos의 도움을 빌어 계시의 성 격과 함께 성경신학의 성격을 규명해 본다.

  첫째,계시 과정의 역사적 점진성에 관한 것이다. 계시는 그 자체가 한 덩어리와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또한 앞으로도 계 속 펼쳐질 하나님의 구속의 행위와 연결되어있다.

“구속은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나타나게 되는 인류의 각 세대들에게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계시는 ‘구속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구속이 점차로 전개되듯이 계시도 점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91)

또한 “후에 주어진 계시는 자주 그 이전에 주어진 계시를 토대로 삼아 세워지며 또한 그 이전 계시를 채워 충만케 한다.”92) 하지만,오히려 이러한 점진성이라는 성격을 주목함으 로 인하여 그 시대의 한계 내에서만 계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 은 계시기록과 관련된 역사성으로 고려해야 하며,“역사의 한계 내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계시사건(과정)은 그것의 기록자와 그 기록의 제 1수 신자들의 시․공간성을 통해서 사고되어야 하며,여기서 멈추지 않고 궁 극적으로는 그 기록의 원저자이신 하나님의 높은 의지세계에까지 사색해 올라가서 그분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구약 상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계시의 역사적 점진성 보다는 기록계시를 통한 진리의 축적 혹은 계시내용에 있어서의 판명성의 차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 다.”93)

 

      91) Geerhardus Vos, op. cit., p.24.

      92) Sidney Greidanus, 『성경해석과 성경적 설교(상)』, op. cit., p.218.

      93) 이 부분에서 조성재는 김성봉 교수의 신학적 통찰을 의지하고 있다. 특별계시를 계시사건과 계시기록으로 나누어 사색하면서, 존재론적으로는 사건이 먼저이고 기록이 나중이겠지만 인식 론적으로는 기록으로 주어진 계시가 아니고는 사건 자체를 알 수 없고 오직 기록으로 주어진 계시를 통하여서만 계시사건을 추정하여 알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서 계시의 역 사적 점진성은 계시사건에 관여된 내용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기록으로 정착되었다는 특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바로 그 계시기록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전제하지 않 으면 안 된다. 조성재, op. cit., pp.95-98. 

 

  둘째,역사 안에서의 “계시의 실제적 구현과 적용성”에 관한 것이다.

계시의 과정은 역사와 동시에 일어날 뿐 아니라 역사 안에서 구현되기도 한다.

특별계시에는 행위계시와 언어계시가 있는데,이 둘은 동등으로 보아야 하지만,반드시 행위계시가 먼저 있고 언어계시가 따라온다.

또 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단순히 지적인 목적으로만 가진 것 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해 보이신 모든 것은,“그것들이 역사 속에서 나타날 때 그의 백성의 종교적인 필요의 실재성에 적합하게끔 주 어진 것이다.”94)

  셋째,계시 가운데서 관찰할 수 있는 역사적 과정의 유기적 점진성에 관한 것이다.

유기적인 점진성이라는 것은 계시가 단순히 점진성만 갖 게 되면 그 완전성이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그 성격이 유기적이라 면 계시의 다양성을 설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질적인 의미에서는 씨가 나무보다 덜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고,“씨 형태에서라도 불가결 한 지식의 최소량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계시의 유기적 성격으 로 인하여 진리의 풍성함과 다양함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95)

 

    94) Geerhardus Vos, op. cit., p.28.

    95) Geerhardus Vos, op. cit., p.26.

 

총체적인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지금까지 살 펴 본 계시의 성격에 주목하면서 수행되어져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또 한 총체적인 성경신학은 기록된 계시의 내용을 종합하여 그 내용을 파악 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되고,계시기록의 목적을 찾는 여정 속에서 파 악되어져야 한다.

 

C.창조사적 성경접근

 

1.창조사의 정의

 

(1)구속사의 문제점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를 의미하는 용어로서 ‘계시사(history of revelation)’와 ‘구속사(history ofredemption)’가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그것은 “계시 사가 구속사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계시사는 “하나님의 케리그마 (kerygma)의 역사,즉 구속사의 다른 단계들에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적절한 선포”로 정의하며,이러한 선포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 시기 위해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계획,그리고 자기 뜻에 관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라는 구속적인 초점을 가지 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Greidanus는 설명하고 있다.96)

Vos가 파악하는 특별계시의 역사도 “그리스도를 중심한 구원사역이요,구속사적 통일성 을 지향하고 있다.”97)

 

    96) 여기서 Greidanus는 계시사와 구속사의 관계에 대하여, Clowney의 설명을 빌리고 있다. “성 경은 역사의 흐름 속에 주어진 계시를 기록한다. 이 계시는 한 번에 주어지지 않았고, 신학사 전의 형태로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주어졌는데, 이는 계시의 과정이 구속 의 과정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구속은 획일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들에 의 해 결정된 획기적인 시대들(epochs)속에서였기 때문에, 계시는 정경적 성경에 명시되고 표시된 획기적인 시대구조를 가지고 있다.” Sidney Greidanus, 『구약의 그리스도』, op. cit., pp.388-389.

    97) 조성재, op. cit., p.34. 

 

이러한 구속사는 언약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계시 를 바라보고 있다는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그 용어에 있어서나 성경신학적 적용에 있어서 두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구속사 적(heilshistorisch;redemptive-historical)”이라는 용어는 이 단어의 다양 한 용법 및 독일어 기원에 의한 다양한 함축들 때문에 많은 문제점이 제 기 되었다.

대표적으로 구속사적 방법의 기원이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오해와 Bultmann과 같이,하나님의 역사와 보통역사(세속 사)를 구별을 짓는 오해를 낳기도 하였다.98)

 

    98) 용어의 오용에 대해 Greidanus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대체어든 그와 꼭 같이 그릇 된 함축들을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우리는 모든 선험적 함축들을 우리에게서 제 거해 버리고 그 용어로 하여금 그 나름의 맥락 속에서 말하도록 허용해야 할 것이다. 이 제한 을 함으로써 우리는 그 용어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구속사(구속사적)’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 다.” Sidney Greidanus,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권수경역, (서울:SFC출판부, 2003), pp.32-34. - 39 - 

 

 두 번째로,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구원사역과 구속사적 통일성을 지 향한 나머지 경륜적 통일성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계시를 계시의 목 적으로 살피는 것이 아니라,기록된 계시를 종합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까지도 하나님의 경륜의 일부분으로 구속해 버린 결과를 도출한 것 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구원사역과 구속사적 통일성,그리고 하 나님과 그의 백성 간에 언약들 등은 현재까지 우리들에게 소중하게 남은 성경신학적인 유산들이다.

그러나 성경신학적 방법이 경륜적 통일성으 로 ‘주제뽑기식’연구가 된다면,소중한 유산들은 일종의 소모품으로 전 락하게 될 것이고 신학적 전제에 따라 성경이 짜깁기되는 편집비평과 별 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사의 문제는 언약을 기초로 한 그 내용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다.

 

(2)창조사의 정의

 

계시 기록은 계시의 목적에 맞게 연구되어져야 한다. 계시의 궁극적 인 목적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심(顯現)에 있다.

이 목적 에 부합하면서 통일적 경륜의 관점으로 한 성경신학적 방법을 하나 제안 하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창조사적 성경접근(Creative-Historical Approach)’이다.

‘창조사(HistoryofCreation)’99)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부합한 모든 피조물들을 정위(正位)에 위치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적 경륜의 역사로 정의한다.

창조사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속에서 나타 나며 성령의 섭리가운데에 현존하는 역사이며,그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 적이고 역동적인 역사개입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이미 성취되었지만 다 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을 예기하는 역사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첫 창조의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평가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창 1:10;12;18; 21;25;31).

또한 하나님께서는 지으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일곱째 날 에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으며 안식하셨다(창 2:1-3).

하나님의 이 러한 평가와 역사하심은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주권적 행위이시고 앞으로 도 주권적으로 그 역사의 개입하심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창조의 목적에 부합한 모든 피조물들의 질서정연한 위치에 대해 만족하셨다는 것을 의 미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 위치에서 하나님을 최고 의 선으로 인식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따라 하나님만 의존하고 즐기는 상태에 놓여있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창조질서가 일부 흐트러지기는 했지만,그 근본 질서가 뒤바뀔 수는 없었으며,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질서와 조화의 불균형을 그냥 두지 않으셨다(창 3:22-23;창 6장 참조).

또한 성경은 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갈 것(롬 11:26)이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고,하나님께서는 첫 창조의 안식을 기 억하게 하시고 지키기를 원하셨으며,100) 일반 자연 또한 하나님의 명령 에 순종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시 147:15-18;창 8:22).101)

 

     99) ‘창조사’는 창세기 2장 1-3절과 골로세서 1장 16-17절을 기초로 하여 필자가 제안하는 내용 이다.

   100) 앞선 논의에서 ‘창조적 질서’의 단원을 참고하라.

   101) Greidanus는 일반 자연 법칙에 위반된 ‘기적들’에 대해 논의하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 였다. “하나님의 좋은 창조계와 장차 올 그분의 나라의 전망에서 볼 때는, 억압과 질병과 죽음 은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오히려 해방과 치유와 영원한 삶이 자연스러운 것이다(창 2-3장; 계 21:4). 그러므로 그러한 전망에서 볼 때, 기적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타락된 세 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뚫고 들어오는 신호이며, 잠정적으로나마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계가 그 본래의 선함으로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표시인 것이다.” Sidney Greidanus, 『성경해석과 성경적 설교(상)』, op. cit., pp.86-9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창조적 질서를 기반으로 한 실질적인 계시역사의 근 본 주체가 되시고,모든 자연세계와 일반세상 어느 곳에도 거대한 질서 와 조화로서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밝히시며 스스로 증거 하신다.

인간 의 불순종 또한 그리 오래가지 않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 원을 받는 새로운 질서의 시작을 알리셨고(성취되었고),그 분의 재림으 로 말미암아 완성될 것임을 선포하셨다.

그러나 그 질서는 인간의 타락 으로 말미암아 흐트러졌던 창조적 질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며,태초 부터 그리하셨듯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만물이 올 바른 위치에 설 것이며(골 1:16-17),하나님으로부터 “나는 저의 하나님 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라는 약속을 이루게 될 것이다(계 21:6-7).

이처럼 창조사는 하나님의 계시의 자체이며,창조사적 성경접근 통하 여 모든 세상과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와 창조질서 로 회복될 정위(正位)의 관점에서,창조의 목적에 부합되도록 통일적 경 륜의 방식을 지향하며 연구되어질 것이다.

 

2.창조사적 성경접근

 

(1)창조사적 성경접근의 초점

 

Ladd는 하나님 나라의 초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들 가운데 그의 통치를 확립하기 위해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하나님의 구속적인 통치라는 사실과,이 세상 말기에 묵시적인 행동으로서 나타날 이 하나님의 나라 가 악을 정복하고 인간들을 그 세력으로부터 구출하여 하나님의 통치의 축복 속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인류 역사 안에 이미 임하였다는 사실이다.”102)

 

이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초점과 마찬가지로 창조사적 관점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하여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중심으 로 한 구속사적 초점과도 연결되며,창조의 목적인 모든 피조물들에 대 한 하나님의 나타내심에 대하여서도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a.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Greidanus의 잠언 8:22-36에 기록된 창조 때 지혜의 역할에 대한 해석 을 살펴보면서,창조사적 성경연구의 초점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

Greidanus는 잠언 8:22-36절의 주제가 “대저 나(지혜)를 얻는 자는 생명 을 얻고”라는 35절의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 해석의 근거로 잠언 3:18의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라는 말씀을 인 용하는데,“생명나무는 에덴에 있는 생명나무요(창 2:9),하나님께서 인류 의 범죄 타락 이후 접근을 금지한 나무를(창 3:24)연상시키는 것이다.

생명나무에로의 접근의 주제는 실재적으로 그 지점에서 표면 아래로 잠 적해 있다가 새 창조 때에만(계 22:2)완전히 수면에 다시 떠오르게 된 다.”라고 설명하고,이 구절의 요점은 “지혜를 찾는 것은,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일치하게 인간의 삶을 정돈하는 것이 생명을 찾는 것이요,에덴 동산에서 얻을 수 있었던 생명과 유사한 생명이라는 것”이라고 하였고, 여기에 덧붙여 “그러나 신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만이 다시 생명나무에 이르는 문을 열 수 있다고 가르친다”라고 부연 설명하였다.103)

 

     102) Ridderbos가 G. E. Ladd의 말을 인용한 것을 재인용하였다. Herman N. Ridderbos; Robert Recker; Edmund P. Clowne; R. T. France, 『구속사와 하나님의 나라』, 오광만편 역, (서울:도서출판풍만, 1989), pp.26-27.  

 

창조질서에 일치하는 삶의 정돈을 통하여 생명나무에 도달하는 것은 곧 하나님 의 창조적 질서의 회복을 의미함과 동시에 창조목적에 일치를 의미하는 것이고,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나무에 이르는 문을 열 수 있다는 것 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의 성취와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그 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의 성취와 완성은 창조질서의 회복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신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셔 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말하고 있다.104)

 

    103) Sidney Greidanus, 『구약의 그리스도』, op. cit., p.391.

    104)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 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 43 - 

 

생명 에 이르는 지혜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한 의와 거룩함을 이루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인데,태 초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를 다 마치신 후에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면 안식하셨던 모습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는 그리스도로 인한 창조질서의 회복을 통하여 완성될 것이 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적인 경륜 가운데에 단순한 참여자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요일 2:2;엡 1:4-5;롬 8:32-33)은 옛 창조질서의 회복이며,새로운 통치 질서의 신호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옛 질서에 대한 심판자이시며,새롭게 된 창조질서의 창조자이시고,하나님 나라의 새 통치자이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새 언약의 시작이며 새 질서의 시작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목적이요(고전 1:23-24;고후 5:18-20;요 14:13),그 목적은 하나님의 통일적 경륜 속에서 성취되었고 완성될 것이다(고전 15:24-28).

결론적으로 창조사적 성경접근의 초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과 그리스도의 사역중심과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향한 통일적 경륜의 조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b.통치의 범위

 

창조사적 통치의 범위는 창조된 전 우주를 포함한 모든 피조세계가 그 적용 범위에 해당한다(창 8:22;시 82:8;94:10;96:10,13;147:15-18).

Ridderbos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창조로부터 계시된 하나 님의 전 창조역사의 통치의 범위를 적절히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 나 라의 개념은 더 포괄적이다.

그 이유를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을 지향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사역 가운데서 그의 자기주장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만 아니라 이방 나라들과 세계와 만물까지를 하나님의 모든 권리와 약속들의 성취 라는 광대한 배경 속에 두고 있다.”105)

 

    105) Herman N. Ridderbos, 『하나님 나라의 도래』, 김형주역, (서울:생명의말씀사, 1988), p.56. - 44 -

 

이 설명은 하나님의 통치가 하 나님의 나타내심을 목적으로 창조된 모든 피조세계,즉 광활한 우주와 모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통치의 효력에 있어서도 모든 피조물,심지어 타락한 피조물에게도 적절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은 성경이 스스로 증거하고 있다.

세상의 종말에 심판이 이루어짐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의 효력을 나타내시는 것이고(계 20:15),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 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는 것은 땅에서 이루어진 모든 피조물 들에 대한 새로운 질서의 정립을 의미하는 것이다(계 21:1).

그래서 창 조사적 성경연구의 범위는 모든 피조세계와 창조부터 새 창조,그리고 그 이후에 대한 것까지 접근할 수 있다. 

 

(2)창조사적 성경접근의 특징

 

지금까지 언급한 창조사적 성경접근의 특징들을 살펴봄으로서 이 단원 의 소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의 특징을 강조할 수 있다.

   첫째,창조사적 성경접근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한다.

언약은 그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동적인 역사와 통일된 약속에 배 경을 가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공적인 계약들의 관한 구속 적 한계를 나타내지만,하나님의 창조적 질서의 회복은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나타내심이라는 창조의 목적과 이를 위한 자기 백성에 대 한 회복(구속)을 설명하기에 더욱 적합하며,동시에 주권적 통치와 역사 의 범위를 창조에서부터 종말,그리고 그 이후에까지 확장시킬 수 있었 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적 성격에 의거하여 그 대상을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로 확장시켜 설명할 수 있다.

   둘째,창조사적 성경접근은 계시를 개혁주의 신학의 통일적 경륜에 입 각한 성경해석으로 이끌 수 있다.

개혁주의 신학이 왜 통일적 경륜을 지향하는가에 대하여 조성재는 “창조,타락,구속,종말의 구도 속에서 성경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정에 기초해 서 창조가 말해지고,타락이 말해지며,구속이 말해지고,종말이 말해지 는 것”에 있다고 설명하면서,다 같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말하고 있지만,하나님의 경륜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시각은 단지 “구원받은 우 리”에 대한 관심에 귀 기울일 것이지만,통일된 하나님의 경륜을 바라보 는 시각은 기본적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을 살펴보게 될 것이라고 그 관 점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106)

 

     106) 조성재, op. cit., p.112. 

 

창조사적 성경접근은 창조의 목적이 잘 드러난 창조적 질서의 회복의 관점(구원하신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펴보 기 때문에,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역동적인 경륜의 해석이 자연스레 통일적 경륜의 모습으로 드러낼 수 있다.

왜냐하면 통일적 경륜은 바로 삼 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동일하신 속성107)에 근거를 삼기 때문이다.

 

    107) 김영규, op. cit., pp.58-61

 

  셋째,창조사적 성경접근은 실천적 원리를 제공할 수 있다.

창조사적 관점은 주권적 경륜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에,그래서 우리의 경건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구원받은 우리’에 대한 시각은 하 나님께 구원을 받은 자로서,하나님께 복을 받을 자로서,‘우리의 필요를 위한 하나님’혹은 ‘우리의 모범이 되신 하나님’으로 무의식적 오해를 불 러일으킬 여지를 남겨 둔다.

반면에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시각은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와 전능자로서,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베푸시는 자 로서,모든 역사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 과 인간의 바른 위치관계를 정립함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은혜와 긍 휼을 받은 인간을 모두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각 은 기독교 윤리적 실천원리 제공하게 된다. 마땅히 모든 피조물들이 위 치해야할 정위(正位)로의 회복은 인간 스스로의 경건과 실천적 규범이 될 뿐 아니라 교육,문화,사회,경제,생태계 전반에 걸쳐 윤리적 도덕적 원리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정위(正位)에 위치한 피조물 들은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의 상급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 신 뜻에 합력하여만 선을 이루는 올바른 도구로서 작용할 수 있기 때문 이다. 

 

V.창조와 새 창조

 

성경에서 창조는 시작을 의미하고 새 창조는 종말을 말한다. 창조와 새 창조는 어떠한 상관성이 있을까?

이 의문 자체가 바로 성경해석의 열쇠이자 계시의 목적과 통일성의 근거에 관한 물음일 것이다.

하나님 에 계시목적에 비추어 생각하면 성경에서 그 통일된 경륜의 모습은 그저 문맥적인 상관성에 머무를 수는 없을 것 같다.

각 성경에 나타난 기록 자의 의도나 목적에서도 하나님의 통일된 경륜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먼저 성경의 커다란 밑그림을 그려보면,“실패한 인간의 과거와 현재의 관점에서 비추어 볼 때 성경은 미래에 관한 책이다. 성경이 인류와 사 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집중하고 있으므로,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은 종말론적이라 할 수 있다.

광의적(廣 義的)인 의미에서 볼 때,성경의 범위는 창조에서부터 시작하여 (창조의 갱신이라고 할 수 있는)구속을 통해 새 창조까지 포함한다.”108)라고 할 수 있겠다.

 

    108) William J. Dumbrell, 『언약신학과 종말론』, op. cit., p.15. 

 

하나님의 더 포괄적인 목적을 살피는 데에 비록 시작과 끝부분을 보는 것은 충분치 못하겠지만,창조와 그 회복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경륜의 역사가 비교되어지고 그 통일성이 연결되어진다면,그것이 바로 하나님 의 계시,즉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증거 하는 것이요,통시적이고 총체 적인 성경해석의 단초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모든 역사 안에서 하나님 의 주권적 개입조차도 단적으로 증거 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필자는 창조사적 성경접근으로 창조와 새 창조를 살펴봄으로서 시작과 종말의 하나님의 목적과 주권적 개입을 밝히 드러내고자 한다.

지금까지 연구되어 온 창세기와 계시록의 성경해석에 관한 논의들을 고찰해 봄으로서,창조와 새 창조의 해석의 틀을 마련하고,본문의 역사 적․문예적 이슈들을 점검하여 신학적 탐색을 위한 기반을 다진 후 결론 적으로 창조와 새 창조에 대해 신학적 논의를 진행해 보자.

 

A.창세기의 창조

 

1.해석의 틀

 

창세기는 시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시작에 대한 바른 이해는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창세기를 해석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선험적인 전제는 창세기의 기록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다.109) 창세기가 온전한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신뢰가 있어야 영감된 계시로서 연구되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창세기 1-2장은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데,“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창조기록 제시(提示)로 출발”하고 “후에 일어날 모든 사건들에 대한 토 대를 놓으며 그 장면을 제시하고 그 배경을 수립”110)한다.

그래서 그 위치나 전체적인 문맥이나 신약의 언급(롬 5:14;고전 15:45;딤전 2:13, 14))등으로 보아서 “창세기 1,2장은 오늘 우리의 전체적인 상황이 어떻 게 시작되었으며,세상은 어떻게 출발했으며,구속이 어째서 필요하게 되 었나 하는 것 등을 우리에게 말해 주기 위한 기록임이 자명하다.

그 목 적은 하나의 사실적 목적이다(afactualpurpose)”111) 창세기의 석의는 용어와 문구,문장과 구문적 구조가 먼저 취급되어야 하고,이를 통하여 본문이 스스로 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여기에 역사적 방법이 뒤따라야 하고 신학적 해석이 가해져야 한다.

 

   109) Allan MacRae, "창세기 1,2장의 해석원리“, 『구약신학논문집(1)』, 윤영탁편역, (서울:성광 문화사, 1993), pp.34-35.     110) Ibid., pp.8-9.

    111) Ibid., p.10. 

 

그러나 주의 할 점은 “고고학적,사회학적,문학적 사실들과 통찰들은 해석자가 본 문을 이해하도록 하는데 사용되어야지,창세기의 본문이 무엇을 말할 수 있다거나 말해야 한다고 지시해서는 안 된다.”112)

 

2.구조해석

 

지금까지 연구되어진 창세기 구조연구 가운데에 창조와 관련된 구조 들,즉,창세기 1-11장의 톨레도트 구조,창조기사구조,창세기 1:1-3장 구조 등을 살펴봄으로서,각각의 구조적 특성에 따른 신학적 의미를 고 찰해 보자.

 

(1)창세기 1-11장의 톨레도트(toledoth)구조

 

창세기 자체가 드러내는 구조로서 “창세기에서 10회 쓰인 ‘계보’,‘역 사’,‘후손’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톨레도트(toledoth)구조”113)이다.

송제 근이 제시한 창세기 전체의 톨레도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114)

 

   112) G. Van Groningen, op. cit., pp.39-41.

   113) 송제근, “창세기의 구조와 신학”, 『그말씀』, 통권 163호(2003년 1월), pp.19-20.

   114) Ibid., p.20. 

 

 1:1-2:4a(첫번째 toledoth) -우주의 위대한 시작을 통한 도입

 2:4b-4:26 5:1-6:8(두번째 toledoth) -아담의 계열

6:9-9:29(세번째 toledoth) -노아의 계열

10:1-11:9(네번째 toledoth) -노아의 아들의 계열

 11:10-26(다섯번째 toledoth) -셈의 계열

11:27-25:11(여섯번째 toledoth)-데라의 계열

 25:12-18(일곱번째 toledoth) -이스마엘의 계열

 25:19-35:29(여덟번째 toledoth)-이삭의 계열

  36:1-37:1(아홉번째 toledoth) -에서의 계열

   37:2-50:26(열번째 toledoth) -야곱의 계열

 

송제근은 이러한 톨레도트 구조는 표면적으로 “격렬한 투쟁을 통해 이 룩한 출애굽을 거쳐서 이제 광야에 선 존재인 이스라엘의 근본이 어디에 서 나왔는가를 보이는 목적”이 있다고 설명한다.115)

현대에는 여기에 대한 더욱 세부적 구조연구들이 있었는데,D.A. Dorsey의 연구를 기초로 한 Waltke의 세부적인 분석에 의하면,창세기 는 크게 구조적으로 두 그룹으로 나뉠 수 있는데,하나는 교대적 구조 (alternating structure)로 된 원시역사(창1:1-11:32)였고 다른 하나는 동 심원적 구조(concentric structure)로 소개된 세 사이클(창 11:27-22:24, 창 25:19-35:22,창 37:2-50:26)이다.116)

송제근은 창세기 1:1-11:32까지 의 교대적 구조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심지어 부정적으로 진행시키는”제1경륜이라고 소개하고,창세기 11:27에서부터 시작인 족장역사(동심원적 구조:concentricstructure)를 적극적이고 능동 적이며 긍정적인 진행인 제2경륜으로 소개하면서 창세기의 명확한 두 그 룹에 대한 설명을 나름대로 하고 있다.117)

 

     115) Ibid., p.21.

    116) 송제근은 David A. Dorsey 의 연구를 기초로 한 B. K. Waltke의 세부구조 분석을 소개하고 있다. 제목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1) 1:1-11:32 1:1-11:32 1:1-11:32 : 원시역사 - 교대적 구조 (2) (2) 11:27-22:24 11:27-22:24 11:27-22:24 : 아브라함 cycle - 동심원적 구조 (3) (3) 25:19-35:22 25:19-35:22 25:19-35:22 : 야곱 cycle - 동심원적 구조 (4) (4) 37:2-50:26 37:2-50:26 37:2-50:26 : 요셉 cycle - 동심원적 구조 Ibid., pp.22-23.

    117) Ibid., p.26. - 50 - 

 

그러나 두 그룹에 대한 송제근의 해석은 구조적 차이 외에는 받아들일 수 없다.

아마도 자신의 오 경해석의 기초인 하나님 나라의 “씨,땅,뜻”에 너무 얽매여 설명한 나머 지 하나님의 경륜을 구분하는 오류를 범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 계시하 심은 그 자체가 적극적이며,항상 통일된 주권적 역사개입을 하신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톨레도트 관용구를 연구함으로 서 얻은 한 가지 신학적 업적이 있다면,그것은 이 구조가 “창조주의 구 속적(재창조적)의도에 조명을 비추는 것”118)라는 홀의 설명이 더 적당 할 것이다.

이 중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된 세부적인 구조는 창세기 1-11장의 교대적 구조(alternatingstructure)에 관한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한 세부 구조는 Dorsey의 ‘7중 구조’와 ‘14중 구조’를 살펴보자. 먼저 7중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19)

 

     118) 여기서 “재창조”라는 용어로 번역되었다. 아마도 홀의 의도는 계시록의 ‘새 창조’를 염두 해 둔 표현 같다. 케빈 홀, “창세기 1-11장의 신학”, 『그말씀』, 통권 163호 (2003년 1월), p.41. 뿐만 아니라 홀은 이 구조가 “세계와 인류의 창조-심판-구원-재창조 이야기가 동일한 하나의 이야기임을 역설한다”고 주장하였다. p.44. 참조.

    119) David A. Dorsey, 『구약의 문학적 구조』, 류근상역, (서울:크리스챤출판사, 2003), p.72. 

 

a창조 :하나님께서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심 -시작(1:1-2:3)

   ○ 수면 위로 마른 땅이 드러남

   ○ 동물들 :모든 생물,조류,지면 위에 기는 모든 동물; 수컷과 암컷;그 종류대로 ○ 생물에 대한 신적 축복: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첫 번째 사람에 대한 여호와의 축복: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먹을 수 있는 음식에 대한 지시(식물)

 

b인간의 타락 :첫 번째 사람들(아담,하와,가인 등)의 죄와 흩어짐; 불택자 가인의 계열(2:4-4:26)

   ○ 인간의 죄에 대한 이야기

   ○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대해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사용하여숙의하심(3:22)

   ○ 죄인들이 추방당하여 흩어짐

 

c아담에서 노아까지 10세대(5:1-6:8)

 

a'홍수 :하나님께서 세계와 인간을 멸하심 -새로운 시작(6:9-9:29)

   ○ 수면 위로 마른 땅이 드러남

   ○ 동물들 :모든 생물,조류,지면위에 기는 모든 동물;수컷과 암컷; 그 종류대로

   ○ 생물에 대한 신적 축복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새로운 첫 번째 사람에 대한 여호와의 축복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먹을 수 있는 음식에 대한 지시(동물)

 

b'인간의 타락 :새 첫 사람들(노아의 후손)의 죄와 흩어짐,불택자의 계열(10:1-11:9)

  ○ 인간의 죄에 대한 이야기

  ○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대해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사용하여 숙의하심(11:7)

  ○ 죄인들이 추방당하여 흩어짐

 

c'셈에서 아브라함까지 10세대(11:10-26)

d결론 :아브람(11:27-32)

 

이러한 평행구조는 첫 번째 단락의 창조에 관한 내용이 네 번째 단락 의 홍수기사에서 내용상 그대로 재생되고(a-a'),두 번째 단락은 다섯 번 째 단락과 인간의 불순종에 초점에 맞추고 있으며(b-b'),세 번째 단락 의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10세대는 여섯 번째 단락의 노아의 아들 셈으로 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10세대와 내용상 대칭을 이루고 있다(c-c').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단락은 대칭되는 구조가 없는 결론적 단락120)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혹은 ‘아브라함 cycle(창 11:27-22:24)’의 첫 부분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120) 창조기사의 ‘6+1구조’에서의 ‘안식일’의 위치가 결론적이고 핵심적인 위치임을 나타낸다고 할 때, 이와 유사한 구조로 일곱째 단락 역시 결론적인 단락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견지에서,Wenham도 창세기 1-11장이 아브라함의 소명에 대한 배경을 제공한다고 소개하면서,하나님의 자비 로우신 개입이 없이는 인류가 절망적인 곤경에 처하게 될 것과 어떻게 족장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이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들을 성 취하는가를 보여준다고 하였다.121)

Dorsey는 또 다른 구조로도 설명한다.

처음 세 개의 단락과 다음 세 개의 단락이 각각 7개의 개별적 요소(이야기단위)로 구성된다는 것인데, 7개의 요소가 서로 대응하는 14중 구조는 다음과 같다.122)

 

    121) Gordon J. Wenham, 『WBC주석 창세기(상)』, 황수철역, (인천:(주)임마누엘, 1992), pp.71-72.

   122) David A. Dorsey, op. cit., p.73.

 

Section1:창세기 1:1-6:8

   a창조기사 :처음 시작,하나님의 축복(1:1-2:3)

   b아담의 죄 :벌거벗음,벌거벗은 것을 보고 가림;저주(2:4-3:24)

   c의로운 동생 아벨이 살해당함 :후손이 없음(4:1-16)

   d범죄한 아들 가인의 후손(4:17-26)

   e선민 셋의 후손(5:1-32)

   f불법적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6:1-4)

   g노아에 대한 간략한 소개,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인류를 축복하실 것임(6:5-8)

 

Section2:창세기 6:9-11:26

  a'홍수기사 :재창조;새로운 시작,하나님의 축복(6:9-9:19)

  b'함의 죄 :벌거벗음,벌거벗은 것을 보고 가림;저주(9:20-29)

  c'의로운 동생 야벳(10:1-5)

  d'범죄한 아들 함의 후손(10:6-20)

  e'선민 샘의 후손(10:21-32)

  f'한 곳에 모여 함께 살려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11:1-9)

  g'아브라함에 대한 간략한 소개,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인류를 축복하실 것임(11:10-26)

 

결국 Dorsey는 이러한 두 형태의 교대적 구조가 보여주는 것은 첫째, 자기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고,

 둘째,인간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복을 상실했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긍 휼로 회복시키시고,그를 위해 특별한 개인이나 민족을 들어 쓰심을 알 수 있다.

 셋째,모든 피조물과 인류에게 미치는 유일신 여호와의 전능하 신 능력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123)

교대적 구조와 다른 양상의 분석은 Steinmetz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는 에덴동산,에덴 밖의 세상,노아의 세상 등 세 개의 세계로 구분하 고,각각의 세계에 나타난 유사성과 상이함을 밝히고 있다. 그의 입체적 인 분석의 기준은 지리적 구분,제한된 사람,그리고 인류의 확대에서 찾 고 있는데,지리적으로는 에덴동산과 에덴동산 밖의 세상,홍수 후 노아 의 새 세상으로 나누고,여기에 수적으로 제한되어 나타났던 인류가 확 대되는 것과 인간의 범죄의 개입이 반복하여 나타난다.

그래서 그 구조 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24)

 

      123) Ibid., p.74.

      124) Devora Steinmetz, “VINEYARD, FARM, AND GARDEN: THE DRUKENESS OF NOAH IN THE CONTEXT OF PRIMEVAL HISTORY”,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13/2 (1994), pp.194-195. 

 

1)에덴 동산(1:1-3:24)

  -7일간의 창조(전체 서론의 역할)1:1-2:3

  -인간(아담)의 창조와 에덴동상 2:4-25

   -인간(아담)의 범죄와 하나님의 저주 3:1-24

       (후손의 약속 3:15)

 

2)에덴 밖의 제한된 사람들(4:1-5:32)

-아담과 하와가 후손을 낳음4:1-3

-가인의 범죄와 하나님의 저주 4:3-15

-가인의 후손 4:16-24 

 -아담이 셋을 낳음 4:25-26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 -아담 자손의 계보 5:1-32 (사람들이 세상에 퍼지기 시작하고 노아가 소개됨)

 

3)확대된 인류(6:1-8:17)

-사람이 번성하기 시작함6:1

-하나님의 사람들의 범죄 6:2-4

-하나님의 심판인 홍수 6:5-8:17

 

4)노아의 새 세상과 제한된 사람들(8:18-9:29)

 -하나님의 약속8:18-9:17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음 9:18-20

 -노아의 술 취함 9:21

 -함의 범죄 9:22-25

  -후손의 약속 9:26-29

   -노아 아들들의 계보 10:1-31

 

5)확대된 인류(10:31-11:32)

-홍수 후에 노아의 자손에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다10:32

-사람들의 범죄(바벨탑 사건)11:1-4

-하나님의 심판 11:4-9

 -셈의 계보(아브라함의 소개)11:10-11:32

 

이러한 구조로 살펴 볼 때,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볼 수 있을 뿐더러, 그 내용은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이다. 종합적으로,창세기 1-11장의 구조에 대하여 학자들이 보는 견해가 조 금씩 다른 양상을 보인다 할지라도,그 공통점은

 첫째,구조적으로 사건 의 밀접한 연관성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고,

 둘째,그 내 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사적 개입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창세기의 조망에서 창세기 1-11장에 대하여 Wenham의 종합적인 설명은 적절하다고 하겠다.

 

“원시 역사는 족장들과 그들의 소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대시키는 것 에 기여한다. 역으로,원시 역사의 속편인 것처럼 이어지는 족장 이야기도 우리에게 원시 역사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창세기의 메시지가 본질적으로 구속의 메시지라면,창세기 3-11장은 왜 사람이 구원이 필요한지 그리고 무 엇으로부터 구원될 필요가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또한 세계의 본래 상태 를 기술하고 있는 창세기 1-2장은 족장의 약속들이 완전히 성취될 때 궁극 적으로 세계와 인류가 되돌아갈,구속이라는 목표를 서술하고 있다.”125)

 

    125) Gordon J. Wenham, op. cit., p.73.

 

(2)창조기사구조

 

홀이 “강렬한 신학적 빛을 비춰주는 구조”126)라고 설명한 또 하나의 중요한 구조가 바로 창조기사(창 1:3~2:3)에 관한 “6+1구조”이다.

1일 부터 3일까지의 창조와 4일부터 6일까지의 창조가 평행을 이룬다는 사실 은,“구조적으로 동떨어져 있는,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성별된 일곱 째 날은,창조 첫 주간의 끝에 비교 무쌍한 자태로 서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127)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128)

 

    126) 케빈 홀, op. cit., p.41.

    127) Ibid., pp.41-42.

    128) David A. Dorsey, op. cit., p.62. 

 

a빛(light)

b바다와 하늘(seaandsky)

c땅(dryland)

a'광명(luminaries)

b'어류와 조류(fishandbirds)

c'육축과 사람(landanimalsandhumans) 

d안식(Sabbath)

 

Dorsey도 이 독립되어 있는 안식일이 “선형구조와 평행구조 모두에서 가장 핵심부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29)

“여덟째 날의 부재(不在)는 그 안식이 결말임을 시사한다.”는 홀의 설명처럼,하나님의 안식은 이 구조 에서 정점의 위치에 있으며,“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친밀 한 창조적 관계를 부곽”시키고 있다.130)

또한 일곱째 날에 관한 기사에 특별한 성격에 대해 Wenham은 “‘하늘 과 땅’,‘하나님’,‘창조하시다’라는 용어들이 1:1의 순서와는 역순으로 나 타나고”있어서 서두 구절에 대해 역방향으로 종결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지적하고,‘일곱째 날’을 세 번 언급하는 것,특히 일곱 개의 히브리어 단 어로 구성된 한 문장에 한 번씩 언급하는 구조는 일곱째 날에 대한 독특 함을 강조한다고 설명하고 있다.131)

 

    129) Ibid., p.62.

    130) 케빈 홀, op. cit., p.42.

    131) Gordon J. Wenham, op. cit., p.86.

 

결론적으로 창조기사의 구조는 일 곱째 날의 안식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3)창세기 1장 1-3절의 구조

 

마지막으로 살펴볼 세부구조는 창세기 1장의 1절과 2절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 구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따라 세 가지 창조론의 주 장이 있다.

 

  첫째는 복구설(TheRestitutionTheory)이고,

  둘째가 원(原) 혼돈설(The Initial Chaos Theory)이며,

  셋째가 창조전 혼돈설(The Precreation ChaosTheory)이다.

 

부연설명하자면,“첫번째 유형의 견해 에 의하면 혼돈은 원창조 이후에 발생하였으며,두 번째 유형의 견해에 의하면 원창조와 관련하여 그 과정에서 혼돈이 발생하였고,마지막 세 번째 유형의 견해에 따르면 원창조 이전에 혼돈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 다.”132)

Waltke는 세 번째의 창조론이 히브리어 문법의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켜 주는 유일한 견해로 보고 있으며,이 구조에 대하여,1절은 독 립절로,2절과 3절은 연관된 상황절로 이해한다고 결론지었다.

그 구조 는 다음과 같다.133)

 

a도입하는 요약적 서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b창조 이전의 부정적 상황을 서술하는 와우+명사+동사(היה(형태의 상황절

“땅이 혼돈하고…”(1:2)

 

c창조를 서술하는 와우 연속법+전접 변화형 형태의 주절

“하나님이 가라사대…”(1:3)

 

이와 같은 구조가 창세기 2장 4-7절에서도 똑같은 형태로 나오게 됨 은 위의 구조분석이 올바르다는 것을 구조적으로 증거하고 있다.134)

 

     132) Bruce K. Waltke, “창세기 1장 1-3절에 나타난 창조기사”, 『구약신학논문집(5)』, 윤영탁 편역, (수원:합동신학교출판부, 1989), pp.7-8.

    133) 이와 같은 견해는 Edward J. Young과 같은 견해로서, 베레쉬트(תישארב(의 용법과 창세기 2 장 4-7절과의 구문비교를 통하여 얻어진 결론이다. Ibid., pp.45-49.

    134) Ibid., p.46.

 

그 러므로 이 구조는 1절이 도입하는 창조의 선언이고,2절은 창조 이전 상 태의 설명하는 부분이고,3절은 창조를 서술하는 부분으로 해석할 수 있 다.

창조 이전 상태를 묘사한 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에 대하 여 칼빈은 이렇게 해석한다.

 

“세상의 형태와 장식과 완전성을 갖춘 창 조물에 반대적인 개념으로 사용했다. 만약에 우리가 이 구절에 기록된 창조의 시간 이후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이 세상에서 제거해 버리면 온 세상은 거칠고 모양도 갖추지 않은 혼돈 속에 놓여질 것이 분 명하다. 그래서 나는 모세가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덧붙인 말을일종의 혼돈과 공허라고 생각한다. 이제 세상에 빛이 있음으로써 만물 의 모양이 드러나게 되었다.”135)

 

    135) John Calvin, op. cit., pp.47-48. 

 

B.계시록의 새 창조

 

1.해석의 틀

 

요한계시록을 연구한다는 것은 내용상 “계시사적 진전(progress of redemptivehistory)의 끝”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기에,성경 전체를 이해 하는 기회가 되며 그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136)

하지만 그 중요 성만큼 이 책을 연구하는 것 또한 어떠한 것보다 난해한 작업이다.

왜 냐하면,요한계시록의 “복합적 사건 전개 방법 때문에”,“구조분석에 관 한 한 학자들 간에 일치하는 유일한 견해는 구조분석에 있어서 역사상 일치한 것들이 한 번도 없었다”137)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해석역사는 화려한 역사를 자랑하며,그의 따른 해석방법도 다양하다.138)

이 가운데에,권성수는 17세기 이후 현재까지 의 계시록 해석을 설명139)하면서,적절한 해석법으로 역사주의와 상징주 의가 혼합된 ‘원근통시(telescoping oftime)’의 원리로 해석되어야 한다 고 주장한다.

 

    136) 이동수, “요한계시록 해석의 역사”, 『목회와 신학』, 통권 189호 (2005년 3월), p.176.

    137) 이필찬,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울:성서유니온선교회, 2000), p.23.

    138) 이동수, op. cit., pp.176-183.

    139) “과거주의 해석법은 계시록이 초대교회와 유대주의 및 이교주의의 충돌을 묘사하는 것이며 20-22장은 당시 교회의 승리를 묘사한 것으로 보는 해석법이다. 미래주의 해석법은 계시록 4 장 이후의 내용을 예수님 재림 직전과 직후 미래의 사건들로 보는 해석법이다. 역사주의 해석 법은 계시록의 내용을 법 , 재림을 절정으로 한 교회 역사 전체의 주요사건들을 담고 있는 청사진 으로 보는 해석법이다. 상징주의 해석법은 계시록을 하나의 거대한 풍유로 보고 기독교와 악,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 사이의 충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는 해석법이다.” 권 성수, “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말씀』, 통권 64호 (1997년 11월), p.93. - 59 - 

 

그 이유는 계시록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적절한 방식 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동시에 재림 직전과 직후의 미래를 묘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140)

그의 설명은 성경 묵시 문학 전체에 나타나는 현 재와 미래의 일치성에 대해 주목한 것이다.

또 하나 살펴볼 것은 Osborne의 ‘요한계시록 해석의 기본원리’141)로 계시록해석에 지침을 설정해준다.

 

     140) Ibid., p.99.

     141) Grant Osborne, “요한계시록 해석의 기본원리”, 『그말씀』, 통권 64호 (1997년 11월), pp.100-103.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문학의 유형(type)을 주의하라.

계시록은 묵시적인 것,예언적인 것,그리고 서신적인 형식들이 공존한다.

이러한 상이점들을 주목하여야 한다.

  둘째,본문의 관점을 주의해야 하는데,특히 강조된 면들이 전개 되는 패턴을 잘 연구해야 한다.

 셋째,상징들의 기능과 의미에 해석해야 하는데,이러한 상징들이 인접문맥이나 다른 곳에서 해석이 가능한지,동 시적이고 통시적인 병행구절들의 연구에 의해 해석될 수 있는지를 점검 하여야 한다.

  넷째,묵시의 신학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꼭 필요하지만, 당대에 성취된 해석들을 겸손하게 기억하는 것도 필요하다.

 

2.계시록 21:1-8절의 구조해석142)

 

Wilcock은 요한계시록을 서막(계 1:1-8)과 대단원(계 22:20,21)을 제 외하고 총 8막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계 21:1-8절을 7막의 마지막 일 곱째 환상으로 구분하고 있다.

Wilcock의 강조점은 “계시록의 각 부분 들은 전체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그 주제 또한 막이 진행되어 감 에 따라 더 발전되고 확장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Morris의일정한 관점없이 난해한 시각으로 계시록을 완성했다는 주장에 대해 동 의하지 않는다.143)

 

    142) 계시록 21:1-8절의 구조분석은 이필찬의 연구를 요약하였다. 이 연구의 결론은 우리를 새 창조의 모습을 소개하는 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필찬, op. cit., pp.245-260.

   143) Michael Wilcock, 『역사의 저편 새 하늘과 새 땅』, 이종일역, (서울:기독지혜사, 1988), p.260.

   

Wilcock의 이러한 바탕에서 “제 7막의 일곱 번째 환 상은 곧 다가올 마지막 막을 상세히 순서적으로 묘사해 주는 예고편인 것이다”라고 설명하고,제 7막의 일곱 번째 환상(계 21:1-8)과 마지막 8 막(계 21:9-22:19)의 연관성을 설명하고 있다.

각 구절의 비교는 다음과 같다.144)

 

21:2=21:10-21 첫 번째 계시 :하나님의 도성

21:3=21:22-27 두 번째 계시 :하나님의 거하심

21:4,5a=22:1-5 세 번째 계시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

21:5b=22:6-10 네 번째 계시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

21:6a=22:11-15 다섯 번째 계시 :완성된 하나님의 역사

21:6b,7=22:16,17 여섯 번째 계시 :하나님의 최후의 축복

21:8=22:18,19 일곱 번째 계시 :하나님의 최후의 저주

 

첫 번째 계시는 혼인잔치를 위한 신부가 도성인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두 번째 계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 시켜 주는 거룩한 메시지인 복음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다.

세 번째 계 시는 새롭게 된 하나님의 세계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계 21:1)나온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네 번째 계시는 그 자체로서 하나 님의 자기 계시의 가치를 잘 드러내 주고 있는데,예수 그리스도를 통하 여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계시록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계 1:1)임을 감안할 때,말씀을 듣고 지 키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되는 것이다.

다섯 번째 계시는 에덴동 산의 하나님의 창조사역(창 2:1,2)과 갈보리 언덕의 구원사역이 완성되었 음(요 19:30)을 나타내며,그 최종적인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그 상 태는 첫 아담에게 금지되었던 ‘생명나무’에 갈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으로부터 첫 창조의 회복을 의미한다.

 여섯 번째의 계시는 계시된 하 나님의 모든 진리가 정제되어 있으며,일곱 번째의 마지막 계시는 기록 된 어떤 것도 감히 첨가하거나 삭제할 수 없음을,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다른 성경의 부분을 인용하여 해석을 더욱 풍부하게 하 는 것뿐임을 나타내고 있다.145)

결국 Wilcock의 설명을 요약하자면,하 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시고 구원하셔서 보시기에 좋 았던 그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 회복의 대 상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이다.

 

계 21:1-8절에 대한 이필찬의 연구는 자체 문맥에서 신학적 메시지를 도출하고 있다.

이필찬은 계시록 21:1-8은 17:1-19:10과 21:9-22:5의 이 중적 결론사이에 놓여 있는 19:11-21:8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설명한 다.

17:1-19:10은 사단의 통치의 대상인 바벨론의 묘사이고,21:9-22:5는 하나님의 통치의 대상인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이다.

“바벨론은 순식 간에 소멸할 것이며 새 예루살렘은 최고의 천상적 영광을 취하여 영원히 그 복락을 누리며 존재할 것이다.”146)

바로 이러한 이중적 결론의 중간 에 19:11-21:8이 삽입되어 있고,이것을 다시 19:11-20:15(최후의 심판)와 21:1-8(새 하늘과 새 땅)로 나누어 두 결론들을 보충적으로 설명하며 연 결하고 있다.147)

따라서 21:1-8의 의미는 “악의 파멸 후에 하나님께서 첫 창조에서 못다 이루시고 오랜 기간의 구속 역사 가운데 준비해 오신 목적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를 총론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148)

이필찬의 21:1-8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A-B-C-D-C'-B'-A'의 구조 로 분석하였다.149)

 

   145) Ibid., pp.270-288.

   146) 이필찬, op. cit., p.250.

   147) Ibid., pp.250-251.

   148) Ibid., p.251.

 

A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21:1a)

B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21:1b)

C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21:1c)

D “내가 보매…저희와 함께 계셔서”(21:2-3)

C'“모든 눈물을…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21:4a)

B'“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b)

A'“보좌에…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21:5)

 

이러한 도식은 언어적 병행(verbal parallelism)150)과 주제적 병행 (thematicparallelism)을 기초로 한 교차대구(chiasticstructure)를 이룬 다.

그러므로 중심이 된 D부분,즉 하나님의 백성된 교회에 대한 언급 이 강조되었고,A-B-C-C'-B'-A'는 새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151)

구조분석에 의한 본문을 주해하면,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152)

 

     149) Ibid., p.252.

     150) 언어적 병행에 대해서는 밑줄 친 단어들을 비교하여 보라.

     151) 이필찬, op. cit., pp.252-253.

     152) Ibid., pp.253-259. 

 

 첫째,A는 A'로 해석할 수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재창조가 아니라 갱신의 의미를 담은 새롭게 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신 정 도가 완벽해서 마치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져 버린 것과 같은 모습 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고후 5:17).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A'의 확정적 인 의미에 비해 A의 의미가 훨씬 유동적이라는 사실,즉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한다는 것이 더 비중이 있다는 것 과 A'의 말씀은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말씀이기에 더 비중이 있다는 것에 있다.

 둘째,B 또한 B'의 “처음 것들”에 의해 그 뜻이 분명해지는데,“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이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새롭게 되는 대상이 모든 만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C에서 ‘바다가 다시는 없다’라는 언급은 요한계시록 13장의 바다 에서 나온 첫째 짐승이 성도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강력한 존재 이기에,그 악의 근원이 새 창조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

마지막 넷째는 ‘새 창조의 참여할 주인공들은 누구인가’(D)에 대한 것 이다.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교회이다.

 

“이 제 어린 양 되신 그리스도께서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교회와 혼인 잔치를 치르시고(19:7-9),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새 창조의 주인이 되 기 위해 내려온 그 새 예루살렘과 완전한 임재와 결합을 이루셨다.”153)

 

     153) Ibid., p.258. 

 

이것은 언약의 최종적인 성취이며 교회와 그리스도의 완전한 결합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함께하실 것임(계21:22)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첫 창조 때에 보시기에 좋았던 그 모습을 새 창조를 통하여 보 게 된 것이다.

 

C.창조와 새 창조

 

1.창세기의 창조

 

창세기의 톨레도트의 구조가 보여준 창세기 1-11장의 메시지는 창조 주의 주권적 개입에 의한 구속적 목적을 잘 소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 겠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구속적 목적이 창조적 목적보다 앞설 수는 없 으므로,창세기 1-11장의 메시지는 전적인 구속적 목적의 내용을 담는다 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Wenham의 “세계의 본래 상태를 기술하고 있는 창세기 1-2장은 족장의 약속들이 완전히 성취될 때 궁극적으로 세계 와 인류가 되돌아갈,구속이라는 목표를 서술하고 있다.”154)라는 설명은 실제적으로 구속의 목적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창조의 목적을 더욱 잘 표 현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다.

궁극적으로 세계와 인류가 돌 아갈 피조물들의 제자리,즉 정위(正位)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언약의 관점에서는 타락한 인간에 대한 구속적 목표이지만,정위(正位)의 측면에서는 피조물들의 회복을 위한 창조적 목 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하늘 의 복을 누리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창조기사구조에서 더욱 드러나게 된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하나님 자신에게 그 초점을 두고 있다. 하나님의 천지만물의 창 조상황을 모세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보여 줌으로서 하나님 스스로 우리 에게 나타내시고자 하심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더욱이 창조기사의 ‘6+1구조’는 일곱째 날인 안식일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홀의 적절한 설 명처럼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친밀한 창조적 관계를 부 곽”하고 있는 것이다.155)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 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들을 영원히 관리하시는 주권적 능력과 개입 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 상으로 창조하시고,세상을 보호하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책임을 인간과 나누셨다.156)

얼마 되지 않아 인간이 비록 그 하나님과 의 공동체 관계를 깨고 스스로 죽음의 지배로 들어갔지만,반면에 하나 님께서는 타락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고(창 12:2),“진정한 공동체의 필 수적으로 있어야 할 상호성,책무,책임의 여린 균형을 파괴하시지 않고, 신적/인간적 공동체의 창조를 지휘”157)하시고 계신다.

 

    154) Gordon J. Wenham, op. cit., p.73.

    155) 케빈 홀, op. cit., p.42.

    156) Ibid., p.45.

    157) Ibid., p.46. 

 

마지막 창세기 1-3절의 해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개입은 너무 나도 당연한 사실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창조적 시작이 있지 않았다면, 세상의 만물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에 놓여져 있었을 것이다.

태초에 창조를 시작하시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2.계시록의 새 창조

 

요한계시록의 새 창조기사는 먼저 우주와 만물을 새롭게 하고 새 예루 살렘으로 상징되는 교회와 예수님과의 혼인잔치를 치르고,하늘로부터 내려온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임재와 결합을 이룸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모습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 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새 창조 를 통하여 창조 때의 보시기에 좋았던 모습으로 회복된 모습을 다시금 보게 된다.

이러한 새 창조(new creation)의 모습은 재창조(re-creation) 인가 아니면 창세기의 창조의 회복(renewal)인가?

Wilcock과 이필찬의 연구를 통한 계시록의 문맥 자체가 새 창조의 모습이 창조의 회복임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태초에 있었던 창 조계획 이였으며,창조 때에 모든 피조물들에게 주어진 마땅한 자리에서 마땅히 누려야할 피조물들의 권리이자 의무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계시 록은 구속사를 통하여 일궈낸 하나님의 걸작품이 단순히 새 창조를 통하 여 회복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그 래서 피조세계를 통하여 영원토록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계 22:5).

결국 이러한 성경적 증거는 창조의 회복 (renewal)을 통한 새 창조(new creation)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회복되 었지만,단순한 회복이 아닌 영원한 피조세계의 새 질서의 도래를 의미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 의 거대한 통합으로부터 일어나게 된 새 질서,새 통치의 도래인 것이다 (골 1:15-17).

새 창조기사의 자체에서도 창조기사와 비슷하게 우주를 먼저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교회(백성들)가 등장한다.

그러므로 새롭게 함은 하나님 의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새롭게 됨을 말한다.

동시에,기존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재창조(re-creation)가 아니라,기존 의 것이 새것과 같이 완전한 회복이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계 21:5).

이런 회복(renewal)이 있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신적/인간적 관계” 를 재정립하신다(계 21:7).

진정한 공동체가 가졌던 상호성,책무,책임 의 여린 균형을 여전히 유지하시면서 신적/인간적 공동체로서 인간들에 게 빛을 비추시고 그들이 영원히 왕노릇 하도록 하신다(계 22:5).

이것 은 분명 “새 창조를 통해 첫 창조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져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158)

Dumbrell은 새 창조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 성 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구속의 이미지에 대한 우리들의 연 구(새 예루살렘,새 창조,새 성전,새 이스라엘)은 이 모든 이미지들의 축약점인 새 창조에서 절정을 이루며,그 성취를 발견하게 된다. 창조의 신학에서 새 창조의 신학으로 이동해나가는 성경의 흐름은 인류가 하나 님 안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세상을 향한 그 분의 목적 안에서 그 의미와 안식을 발견할 수 있음을 강조해 준다.”159)

 

    158) 이필찬, op. cit., p.253.

    159) William J. Dumbrell, 『새 언약과 새 창조』, 장세훈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2003), p.245. 

 

하나님의 통일적 경륜의 모 습을 성경의 시작과 끝에서 발견하게 된다.

 

VI.결 론

 

Vos는 성경신학을 ‘계시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정의하였다.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인정하는 것이고,이 러한 인정으로부터 성경해석의 원리를 제공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 특별계시는 기록된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고,그 계시기록을 통 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계시기록 이전에 계시사건 이 주어졌으며,계시사건 이전에 하나님의 계시목적이 선재(先在)하는 것 이다. 기록된 계시를 너무 중시한 나머지,각 계시기록의 합으로서 계시 의 목적을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계시를 자의적인 해석의 수단으로 던져 놓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의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은 통일적 경륜의 방식으로 해야 한다.

창조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모든 자연계의 질서와 조화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역사가 무작 위적이고 무조건적이지 않으며 경륜의 통일성을 지니는 것이 당연한 결 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통일된 경륜이기에 통일성을 나타내는 것이지 경륜 속에서 발견해보니 통일성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계 시의 이해 방식은 통일된 경륜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언약과 창조의 관계에서 언약의 서론으로서 창조를 설명하는 것은 온 당치 않다.

그렇다고 창조의 목적이 언약이 될 수도 없다.

이렇듯 무조 건적으로 어느 개념이 어느 개념을 포함하는 식의 이해는 적당치 않으며 성경적 주제들의 관한 서로의 관계를 명확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왜 냐하면 성경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주제는 오직 하나님 자신뿐이며,언 약과 창조라는 주제도 하나님의 경륜의 한 단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약과 창조는 하나님의 계시목적에 비추어 이해되어져야 한 다.

또한 본 연구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목적에 부합되는 성경신학적 방법을 - 68 - 제안하였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창조사적 성경접근’인데,모든 세상과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와 창조질서로 회복될 정위 (正位)의 관점에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되도록 통일적 경륜의 방식을 지 향하는 성경접근법이다.

창조사적 성경접근의 초점은 삼위일체 하나님 의 경륜과 그리스도의 사역중심과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향한 통일적 경 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연구 범위와 실천적면에 서 더욱 그 가치가 있는데,정위(正位)의 개념이 바로 모든 피조물로 확 대 적용되기 때문에 창조사적 성경연구의 범위는 모든 피조세계와 창조 부터 새 창조까지 접근할 수 있으며,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정립이라는 관점에서 교육,문화,사회,경제,생태계 전반에 걸쳐 기독교 윤리적 실 천원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창조는 창조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주권적 역사 개입을 명확히 드러내며,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친 밀한 사랑을 나타낸다.

그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시하 시는 피조물들의 정(正)위치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인식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기를 모든 피조물들에게 원하셨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조화가 조금 깨어졌지만,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의 회복을 위하여 역사하시고 계신다. 그렇다면,새 창조는 창세기의 창조의 회복 을 말하는 것인가?

성경의 증거를 보면,새 창조에 참여할 주인공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이며(계 2:2-3),만물을 새롭게 하시고(계 21:5),에덴동산의 생명나무로 나아갈 수 있는 모습으로 회복되게 하심으 로 말미암아(계 22:14),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생명수가 흐르게 하셨다(계 22:1). 새 창조는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거하시고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되며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계신다(계 21:3)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첫 창조 때의 보시기에 좋았던 모습을 다 시금 보게 한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새 창조에서도 통일적인 경륜의 모습으로 들어난다.

계시록의 본문구조 자체의 증거만으로도 재창조(re-creation) 가 아니라 창조의 회복(renewal)임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창 조질서의 회복은 단순히 피조물들이 마땅히 위치해야할 정위(正位)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의 거대한 통 합을 의미하며,하나님의 계시의 목적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언약의 성 취가 다시 통합되는 영원한 안식임을 살펴볼 수 있었다.

성경은 또한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하여 우 리의 ‘구속주’라는 신앙과 소망을 반영하고 있다(사 65:17-18).

이것은 창세기에서부터 창조사역의 완성 후 안식을 통하여(창 2:1-2)분리되지 않았던 창조목적과 구속목적의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창조는 표면적 인 문맥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행위를 강조하는 것이지만,그 자체가 표명하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신학적 메시지를 가지고 있 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언약의 내용이며, “하나님의 현현(顯現)”이라는 하나님의 계시 목적과도 일치하는 내용이 다.

새 창조의 회복은 창조의 순서를 따라 우주부터 시작되어 모든 피 조물로 확대되었으며(계 21:1,5),창조질서의 회복은 곧 “나는 저의 하나 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는 구속의 약속이 성취됨을 말하고 있다.

마땅히 우리는 “만물을 새롭게 하실 그 날을 모든 피조물 과 함께 탄식 중에 고대”해야 할 것이다(롬 8:8-25;계 21:1-5).160)

 

   160) 케빈 홀, op. cit., p.52.

 

아 멘,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VII.참고문헌

A.사전류

A Greek English Lexicon ofthe New Testamentand OtherEarly ChristianLiterature TheNew Brown,Driver,Briggs,and GeseniusHebrew and English Lexicon TheologicalDictionaryoftheNew Testament TheologicalDictionaryoftheOldTestament Wigram Englishman'sGreekConcordanceoftheNew Testament Wigram Englishman's Hebrew Chaldee Concordance of the Old Test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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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Creation in Genesis clearly reveals self-revelation, sovereign economy, and continually intimate love of God to all creatures.

In such relationship,God wantsthatthey turn theirface toward him,recognize him as a creator,and enjoy him as the sovereign goodon theirregularposition oughttobesituated. With the unifiedeconomy,thepurposeofGod'screationisexposedinnew creation in Revelation so thatnew creation is notre-creation but renewal. Such discernmentguides the huge unification ofcreation and redemption,and shows in eternalsabbath which willlead the integration ofthe purpose ofrevelation and completion ofpromise betweenGodandhispeople. Thisresearchsuggests,whatiscalled,"Creative-Historical Approach"asanew holisticbiblicalinterpretation. Creativehistory isbasedon working outGod'splan in thefactsofhistory in order to be restored to allcreature's regularpositions thatoughtto be situated. - 79 -

 

국문초록

창세기의 창조는 창조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주권적 역사 개입을 명확히 드러내며,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친 밀한 사랑을 나타낸다.

그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시하 시는 피조물들의 정(正)위치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인식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기를 모든 피조물들에게 원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새 창조에서도 통일적인 경륜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계시록의 새 창조가 재창조가 아니라 창조의 회복임을 살펴볼 수 있었 다.

그러나 그 첫 창조의 회복은 단순히 피조물들이 마땅히 위치해야할 정위(正位)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 적의 거대한 통합을 의미하며,하나님의 계시의 목적과 하나님의 백성들 과의 언약의 성취가 다시 통합되는 영원한 안식임을 살펴볼 수 있었다.

본 연구에서 제안된 창조사적 성경접근은 계시의 목적에 따라 계시를 이해하는 새롭고 총체적인 성경신학접근으로서,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부 합한 모든 피조물들을 정 위(正位)에 위치시키려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역사로 정의한다

 

안양대 신대원 석사학위논문(2005.8)

TM 221 ㅂ248ㅊ

창조와_새_창조의_상관성에_관한_성경신학적_연구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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