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잡사(14)/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2회
용산에서 발견된 두 발 잘린 아이
1533년(중종 28년) 2월 16일,
한성부 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은 중종에게 괴이한 사건을 보고했다.
용산강(노량진과 마포) 근처 무녀의 집 뒤에서 두 발이 잘린 여자 아이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중종은 이에 "신중히 간호해 죽지 않게 하고,
속히 포도 부장을 불러 범인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당시 분위기를 고려할 때, 매우 이례적 조치였다.
실록에 따르면 아이는 상당히 똑똑했다.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옥가이(玉加伊)'라고 했고, 발목을 자른 범인도 정확히 지목했다.
옥가이는 '"한덕'이 자신의 발을 잘랐다"고 했다. 한덕은 옥가이의 수양 엄마로, 옥가이의 생모 '중덕'과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
의금부는 한덕과 중덕을 불러 대질 심문을 했다. 옥가이에게 "둘 중 누가 네 발을 잘랐느냐"고 물었다. 옥가이는 곧장 한덕을 가르켰다. 한덕은 "옥가이의 발은 동상으로 썩어 저절로 떨어진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금부도사(의금부 심문 책임자) 이창무(李昌茂)는
"아이의 발이 칼로 잘린 게 명백하다"고 목소리 높였다. 중종이 금부도사의 의견 쪽으로 기울자,
일부 신하는 "어린 옥가이가 범인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한덕의 처형을 만류했다.
증인으로 불려온 마을 사람들은 "한덕의 집에 살던 최근까지도 옥가이의 두 발은 멀쩡했다", “
한덕 뿐만 아니라 중덕(생모), 귀덕 등 용산가 근처에 있던 집을 옥가이가 들락날락 했다"는 등의 증언을 해 사건을 더 미궁에 빠지게 했다.
한덕과 중덕, 또는 제3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중종은 장장 2주에 걸쳐 이 사건을 심문했다. 하지만 진범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3회
선조(1552~1608) -
하늘에서 내려온 '정체불명 삼형제'
1604년 12월 1일(선조 37년),
평안도 관찰사 김신원(金信元)은 조정에 '기이한 삼형제'에 대한 소문을 보고했다.
"군내에 사는 계집종의 집에 '강가시(康加屎)'라는 남성과 그의 부인 '향태'가 머물렀는데, 강가시는 집을 떠나기 전 '기이한 형제 세 명이 하늘에서 당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계집종이 반신반의하며 청소를 마치고 집에 와보니, 강가시가 언급한 삼형제가 온 자취도 없이 있었다"
김신원에 따르면 형제의 생김새는 꽤 독특했다. 장남은 수염이 한 자(약 30cm)에 큰 눈과 쟁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차남은 수염이 다섯 치(약 15cm)에 얼굴과 체격이 크고 미남이었다. 삼남은 수염이 네 치(약 12cm)에 얼굴과 체격이 컸다.
삼형제는 모두 검은 관을 쓰고,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김신원에 따르면 그 모습이 두려워 좀처럼 쳐다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삼형제와 함께 내려온 이들의 엄마는 계집종에게 "장남은 음문(성기)으로 낳았고, 나머지는 옆구리로 낳았다"며 "이들은 성인(聖人)이나 신인(神人), 생불(生佛)"이라고 설명했다.
엄마는 "출산한 지 하루도 안 돼 3형제가 모두 장성했다"며 "처음 보는 사람들의 이름도 귀신같이 맞춘다"고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기록한 사신은 김신원을 허풍선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신은 기록를 전하며 "하늘 아래 어찌 이치에 벗어난 물건이 있겠냐"며 "이 일을 보고한 김신원도 허망하기 이를 데가 없다. 또 이를 전한 계집종도 사리에 밝지 못한 것 같다"는 주석을 달았다. 실록에는 이 같이 사신이 자신의 의견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4회
조선시대에 태어난 '삼쌍둥이'들의 운명~~
교과서에 있는 딱딱한 역사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책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역사 속 숨겨진 육아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괴물 아이' 이야기다
조선시대에도 기괴한 출생이 여러 있었다.
요즘 말로 ‘삼쌍둥이’가 태어난 것이다, 삼쌍둥이는 일란성 쌍태아의 특이한 형태로, 수정란이 둘로 나눠지는 것이 불완전해 쌍둥이의 몸 일부가 붙은 상태로 나온 형태를 말한다.
안타깝게도 조선시대에는 ‘삼쌍둥이’를 인간이 아닌, 괴물로 봤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러한 ‘삼쌍둥이’에 대한 기록이 다수 존재한다
먼저 <영조실록>이다
“은진(恩津)에 머리가 둘인 아이가 출생된 것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었으니, 이것이 어찌 인류(人類)가 장차 사람 노릇을 할 수 없게 될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다음은 <중종실록> ‘삼쌍둥이’에 대한 기록이다.
“중부(中部) 정선방(貞善坊)에 사는 사노(私奴) 숙손(叔孫)의 아내 수영(守永)이 이달 4일에 딸을 낳았는데 머리가 둘이었고 각각 귀·눈·입·코가 있었으며, 낳은 뒤에 어미와 딸이 모두 죽었습니다.”
특히 중종은 이러한 일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옛일과 '문헌통고(文獻通考)'를 보아도 이와 같은 괴물이 없었다. 닭은 혹 두 머리에 두 발인 괴물이 있으나, 어찌 사람으로서 이러한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서울에 이런 일이 있으니, 더욱 놀랍다.”
< 선조실록>.<·현종실록>에서도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파주(坡州)의 양녀(良女) 고금(古今)이, 머리와 얼굴은 하나에 눈이 넷, 귀가 넷, 코가 둘, 입이 둘, 손이 넷, 발이 넷, 그리고 자지가 둘, 불알도 둘인 아이를 낳았는데 낳자마자 죽은 일이 있었다.”
“호서(湖西) 예산현(禮山縣)에 어떤 여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의 몸뚱이에 머리는 둘이며 손이 넷, 발이 넷이었다. 도신(道臣)이 이를 알려 왔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조선시대에는 삼쌍둥이나 기형아를 인간이 아닌 '괴물'로 봤다. 그래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5회
朝鮮版 ‘행운의 편지’
한마디로 가짜 편지다.
영어권에서는 체인 메일(chain mail), 또는 체인 레터(chain letter)라고 한다
"이 편지를 다른 n명에게 똑같이 보내라"는 등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유도하는 편지.
시대에 따라 변화하며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에 특히 퍼졌지만 생각보다 그 역사가 오래됐다.
신문의 1922년 기사에서 30일 이래로 경성 시내에는 괴상한 엽서가 배달되는 일이 있다고 나왔고,
1931년 기사에서 "3, 4년 전 '행운의 편지'라는 것이 성행하여 우편국 수입이 상당하였더니"라고 언급되었다.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다이쇼 시대에는 소위 '행복의 편지'가 너무 유행한 나머지 당시의 경찰청에서 발신자에게 벌금을 매기기까지 했다.
이후 1935년 무렵에는 '불행의 편지'로 내용이 바뀌어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1966년으로 1968년에는 관동지역을 벗어나 일본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이로 인해 망상에 빠진 청소년의 자살 미수 혹은 자살 사건도 벌어져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편지의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할 것을 종용하면서, 이를 따를 경우 행운이, 그렇지 않을 경우 불운이 찾아온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한다.
왠지 모르게 안보내면 불행한 일이 생길까봐 두려운 생각이 든다.
이런 ‘행운의 편지’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괴물 이야기 삼구일두귀’ 이야기는
성종 1년인 1470년 시작된다.
궁전에서 업무 중인 成宗임금에게 전라도 함평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그 내용이 550년 전 조선왕조실록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으니 아주 괴상한 괴물 이야기다. 정사에 등장하는 실록이다.
성종임금은
전라도 관찰사 고태필에게 글을 내리기를
《“윤필성의 반인(伴人:수행원) 임효생이 고하기를
’함평 사람 김내은만(金內隱萬)의 아내가 내게 와서 말하기를
<”입이 셋 ,머리가 하나인 귀신(삼구일두기:三口一頭鬼)이 하늘에서 능성
부잣집에 내려와 한 번에 밥 한 동이(益). 두붓(豆腐)붓국 반 동이를 먹었는데 그 귀신의 말이 이달에는 비가 안 오고 다음 달 스무 날에는 반드시 비가 내릴 것인데 만약 이 날 비가 안 오거든 밭을 매지 말라 하고
또 말하기를 진생(辰生). 신생(申生). 유생(酉生)인 사람들은 금년에 모두 죽는다고 했는데
이 말은 어떤 역자(驛子:역에서 일보는 시람)가 금구(金溝).영리(營吏: 감영 관리)에게서 듣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다.“>
라고 했습니다. 했다.
임효생이 또 고하기를
지난 4월 27일에 새해 감사를 뵈려고 함평 가리역에 이르니 역자(驛子:역에서 근무하는 관리) 대 여섯 명이 말하기를 나이
<”149세의 중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금년과 내년에는 열 명의 계집이 한 남자를 같이 하고 열 집에서 소 한 마리 말 한 마리를 함께 하며 군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더라.“> 했는데
”이 말을 함평 사람이 믿는 이도 있고 안 믿는 이도 있습니다“.라고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6회
”임효생의 고한 바가 이와 같아 과연 어리석은 백성이 요게 요상한 말을 가볍게 믿고 망령되게 소동해 마침내 농사를 폐하는 데 이를까 염려되니 그 말의 근원을 깊이 캐서 사람의 의혹을 풀게 하라”
<<성종실록 1470년 5월 26일>>
성종실록 1470년 5월 26일 함평에서 돌고 있다는 소문의 요지는
하늘에서 입은 셋이고 머리는 하나인 귀신이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 자못 특이한데 조선왕조실록에 삼구일두귀(三口一頭鬼)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런데 삼구일두귀는 자기 모습을 잠시 보여주고 없어지는게 아니라 사라지지 않았고 사람을 만나고 대화도 했다.
기록된 내용대로라면
삼두일두귀가 처음 내려온 곳은 함평이 아니라 능성이다.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삼구일두귀는 능성 한 부잣집에 내렸다.
이상한 모습에 겁먹은 부자는 머뭇거리다가 나름대로 우호을 표하기 위해 밥을 대접하는 듯 하다 .
삼구일두귀는 밥을 한 동이나 먹었다. 당시 유행한 이야기에서 밥을 아주 많이 먹었다는 것을 종종 신비롭게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듯 싶다.
하다 못 해 구 한말이 배경인 ‘백범일지’에도 김구에 대해 밥을 달라고 하더니, 엄청난 약을 먹었다. 라고 하는 헛소문이 퍼졌다는 얘기가 실려 있다.
그러나 삼구일두귀가 밥을 한동이나 먹었다는 부분은 이것이 단순히 입이 세개 달린 이상한 귀신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휘두를 강력한 힘과 신비한 재주를 갖추었음을 암시하기 위해 꾸며 넣은 듯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삼구일두귀가 밥뿐 아니라 두붓국도 반 그릇 먹었다고 덧붙였다.
과연 암시한 대로 삼구일두기는 사람들에게 예언을 전했다.
첫 애언은 땅이 갈라지고 산이 무너진다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대신 소박하게 <이번 달에는 비가 안 오고 다음 달 스무 날에는 비가 올 것이다.> 라고 애언한 것이다
기이한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일기예보인데 전설 속의 많은 예언가 처럼 삼고일두귀도 금기를 정해주었다 .
만에 하나 다음 달 스무 날에 비가 오지 않으면 밭을 매어서는 안 된다는 게 금기였다.
생각해보면 농사일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한 조선시대 농민들의 마음이 엿보이는 얘기다.
늦봄의 봄 가뭄이 들지 초여름에 비가 올 지 하는 문제는 한 해 농사가 달린 절박한 사안이었다.
이 때문에 소문 속 삼구일두귀는 다른 어느 재난보다 날씨 문제를 중요하게 얘기했다.
이는 식량 문제라는 점에서 밥을 많이 먹는다는 특징과 통하기도 했다.
당시 함평 사람들은 상상 이상으로 삼구일두귀 얘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함평에 살던 김내은만의 아내가 임효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널리 퍼지고
결국 성종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7회
그와 와중에 일대의 점치는 사람이 그의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거기에 덧 붙여 나이가 무려 149세인 어느 승려가 큰 난리를 예언했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삼구일두기 이야기가 함평부터 능성까지 퍼져나가는 사이에 사람들이 제법 많이 믿게 되니 이 지역의 분위기도 점차 흉흉해진 것 같다.
날씨에 대한 예언이 흉년에 대한 예언과 연결되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많이 죽을 거라는 소문 난리가 날 거라는 소문은 점차 확대되지 않았나 싶다.
이런 유언비어가 퍼지면 민심이 어지러워진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성종은 함평 일대에서 떠도는 소문이 실체가 있는 이야기인지 어떻게 퍼져 나가고 있는지 더욱 상세하게 조사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두 달 정도 지나
조선왕조실록 1470년 8월 3일자의 기록에서 조사 결과가 자세히 나와 있다.
이 기록을 살피면 지역이 보성으로 달라져 있다. 즉 삼구일두귀 이야기가 보성. 능성 함평 일대에 널리 퍼졌다는 것이니 지금의 전라남도 일대를 아우른다.
이 이야기의 뼈대는 앞서 보고된 내용과 비슷하다.
이상하게 생긴 귀신이 하늘에서 부잣집으로 내려와 밥을 많이 먹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부적인 내용이 많이 달라졌다. 이번에는 삼구일두귀가 함평의 어느 부잣집이 아닌 보성의 박석노라는 부자를 찾아 내려왔다.
먹는 양도 달라졌다 밥 한둥이가 아니라 끼니마다 쌀 1말씩을 먹어 지어먹었다.
얘기가 퍼지면서 더 많은 밥을 먹는 것으로 과장된 듯하다 .
모습도 달라졌다. 머리 하나에 입이 셋이라는 설명 없이 “몽두만 썼다”라고 표시했다. 몽두(蒙頭)라는 것은 머리에 뒤집어서 얼굴을 가리는 복면 비슷한 것으로 보통 죄인들에게 씌웠다.
그런 몽두만 썼다고 하니 옷을 입지 않고 머리에 몽두만 뒤집어썼다는 것 같기도 하고 옷을 입었으되 장식이나 장신구가 없어 매우 단출하거나 볼품없었다는 뜻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 덩치는 아주 커서 한 길( 약 3미터)가량 되는 거인이었다.
이처럼 이상한 모습의 삼구일두귀는
<“내 아우가 하늘에서 내려오면 큰 풍년이 들것이다.”>라는 이상한 예언을 남겼다.
앞서 함평에 나타났던 삼구일두귀가 아우라는 소리인가 아니면 또 다른 귀신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소리인가 그렇게 총 3명의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리인가 어디까지나 소문이었을 뿐이므로 정확한 내용을 지금에서 따지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판 행운의 편지 다만 삼구일두귀 이야기에 담긴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은 좀 더 들여다볼 만하다 .
조선왕조실록은 이 이야기를 퍼뜨린 사람 중에 막가이(幕加伊)와 무당(丹正)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들이 퍼뜨린 이야기는 귀신의 머리 하나인데 상투는 ‘둘이더라’. ‘서넛이더라’, ‘일곱이더라’, 하는 식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8회
막가이는 평범한 여성으로 최근까지 종종 접할 수 있었던 ‘막개’라는 이름의 옛날 표현으로 보인다.
이름만 있고 성이 없는 것을 보아 신분은 낮았을 것이다.
단정도 신분이 낮은 무당이니 삼구일두귀 이야기는 주로 하층민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간 듯하다,
이 이야기에는 예언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무당의 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몇몇 사람이 어떤 의도를 품고 일부러 퍼뜨렸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조선왕조 실록을 살펴보면 소문이 퍼진 과정이 매우 꽤 흥미롭다.
특히 149세나 먹은 승려라는 인물의 행적이 눈길을 끄는데
8월 3일자 기록은 앞서 5월 26일자 기록보다 이를 더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정병.주면 김자형 임효지......... 등이 요사스러운 말을 만들어서 이르기를
“운남 원광사의 나이 149세 노인이 있었는데, 정해년(609년) 6월 초 10일에 죽었다.
그런데 그 돌아온 혼(魂)이 위로는 천계(天界)에, 아래로는 지부(地府)에 통달해 인간에게 와서 구하기를 경인년(611년) 3월부터 바람과 비가 몹시 심해 약한 사람은 다 죽는다 .
전염병과 전쟁의 지변으로 경인년(611년)과 신묘년(612년_) 두 해에 사람이 8 분(分)은 죽어서 집은 있으나 사람이 없으며 땅은 있으나 경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아홉 여자가 한 지아비와 함께 살며 열집이 한 마리의 소를 함께 부르며 집에는 연기가 끊어지고 곡식을 쌓아두고 먹을 것이 없다.
만일 믿지 않는 자는 눈만 멀 뿐이고 이 글을 한 번을 전하는 자는 자기 한 몸의 재앙을 면하고 두번을 전하는 자는 자기 집의 재앙을 면하고 세번을 전하는 자는 크게 평온함을 얻을 것이다.
많이 믿지 아니하고 이 글에 집속에 감추어 둔 자는 유혈의 재변을 볼 것이다.
이 글은 요동(遼東)에서 온 신강화상(新降和尙)의 글인데 이것을 베껴 사람에게 전해주라고 했다.”]
<<성종실록 1470년 8월 3일>>
나이 많은 승려가 직접 전라도에 온 것이 아니라 명나라 운남성 원광사라는 절에 살던 어느 노인이 149세가 되어 세상을 뜬 후 그 혼백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혼백은 미래의 난리가 난다고 예언한다.
소문을 퍼뜨린 사람 중에 무당이 있는 것을 보면 무당이 무당굿 하는 중에 혼백이 씌었다고 하면서 말이나 노래로 사람들에게 전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예언이 편지로 전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편지에는 예언 외의 다른 말도 쓰여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
<여기 적힌 내용을 믿지 않으면 눈이 먼다.>
<여기 적힌 내용을 한번 전하면 한 몸이 재난을 피한다.>
<여기 적힌 내용을 2번 전하면 집안의 재난을 피한다.>
< 여기저기 내용을 3번 지나면 태평한 시절을 본다>
그러니까 삼구일두귀의 예언이 체인 레터(chain letter) 즉 행운의 편지 방식으로 퍼져나갔다는 얘기다.
체인 레터는 수신인에게 같은 내용을 퍼뜨려달라고 강조해 편지가 계속해서 새끼를 치며 퍼지게 한다. 비슷한 방식을 현대의 피라미드 식 판매 조직이나 네트워크 마케팅 기업이 활용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행운의 편지로 편지를 받아 읽은 다음 똑같은 내용을 퍼뜨리지 않으면 불운이 닥치고 반대로 뻐뜨리면 행운을 온다고 강조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9회
1470년 삼구일두귀의 이야기가 전라도 일대에 퍼져나간 과정에서도 똑같은 수법이 사용되었다.
더 재미있는 점은 행운의 편지가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라고 시작해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동시에 정말 넓은 범위로 퍼져나가고 있음을 강조하듯이
삼구일두귀의 예언을 담은 편지도 외국(중국)에서 왔음을 밝힌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이 편지를 처음 쓴 사람은 요동의 신강화상이라고 한다.
조선의 북쪽 북경 너머 먼 외국에서 온 예언의 편지가 전라도에 이르러 확인되었다는 내용은 행운의 편지 도입과 비슷하다.
한국사에서 기록으로 확인된 ‘행운의 편지’ 형태의 체인레터 사례로 이 사건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체인레터가 지금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십팔 십구세기 무렵으로 겹치는 짐작이 되는데
15세기 조선에서 그 형태에 나타났으니 무척 신기한 일이다.
삼구일두귀 이야기는 피라미드식 판매 조직의 수법을 쓰는 사람이 조선시대에 있었다는 점 외 당대의 생활상을 몇 가지를 알려준다.
우선 체인리터가 퍼져나가려면 제법 많은 사람이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삼구일두귀의 이야기가 널리 유행했다는 것은 했다는 데서 당시 전라도에 글 아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1470년이면 한글이 창제된 이후이니 어쩌면 편지가 한글로 쓰였을지도 모른다.
또한 종이를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많은 사람이 편지에서 써서 글을 써서 퍼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종이 가격이 그리 높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삼구일두귀의 이야기 결말에는 의금부(義禁府)가 등장한다.
의금부는 삼구일두귀 이야기를 유포한 사람들을 검거하고 죄를 물어 처벌한다.
박석루는 담양까지 도망치지만 끝내 잡히고 만다.
많은 사람이 매질당하고 부유한 집에서 평화롭게 살던 박성로는 북쪽 국경 지역인 의주로 유배당한다.
김내음만은 노비가 되어 지금의 개성 부근에 있던 산예역으로 끌려가 노역한다.
이후 5년이 지나 1475년 .
성종은 이만하면 충분히 벌을 받았을 테니 모두 다시 풀어주라고 명한다.
그들이 다시 자유의 몸이 되어 따뜻한 남쪽 고향으로 돌아오며 삼구일두귀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성종임금이 5년이 지나서도 이 소동을 잊지 않았다는 것인데
입이 셋이라거나 몽두만 썼다거나 하는 귀신이 신기한 모습 때문에 유독 기억에 오래 남았을 남았을 것 같다.
출처: 조선의 또 다른 풍경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90회
이상한 동물의 등장~~~
조선 왕조실록에 실린 괴물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것을 꼽는다면
중종임금 시대의 소동~~~
개와 비슷하지만 언뜻 말 같기도 한 정체불명의 이상한 짐승이 궁중에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인데
중종시대에 비슷한 일이 여러 번 발생해 눈길을 끈다.
게다가 단순한 목격담을 넘어 민심을 술렁이게 한 꽤 영향력이 큰 사건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중종시대의 괴물 이야기가 < 물개> 같은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사실 당시 ‘물개’라는 말은 물건에서 괴상함이 발견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요즘 흔히 쓰는 괴물이라는 말과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인요물괴(人妖物怪)라는 말이 종종 나오는데 즉 ‘사람 중에 요사스러운 것이 나타나고 물건 중에 괴상한 것이 나타난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일을 옛사람은 나라에 나쁜 일이 생길 징조로 여겼다.
따라서 ‘물괴’라 하면 정체의 불명의 이상한 괴물이 나타났다는 것뿐만 아니라 갑자기 강물의 색이 변했거나 오랫동안 서 있었던 바위가 갑자기 쓰러졌다거나 하는 것 등
물건에 나타난 모든 이상한 징조를 가리켰다.
예를 들어 성종시대의 일로 <조선왕조실록> 1486년 11월 10일자 기록을 보면
사람에게 절하는 듯한 몸짓을 한 쥐나 집에 들어온 부엉이를 모두 물괴의 일종으로 언급했다. 인요물괴를 줄여 요괴라고 할 때도 있었는데, 당시의 요괴는 오늘날의 요괴보다 어감상 사람과 물건에 나타난 나쁜 징조 또는 이상한 것이라는 의미가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종시대의 괴물 이야기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특히나 물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기는 한다.
이 괴물에 관한 이야기로는 1511년 5월 9일자 기록이 가장 이른 시기의 기사로 보인다.
기록은 짤막하다 「밤에 개와 비슷한 부류의 짐승이 궁전 일대의 조상들을 기념하는 사당에 나타났다.
짐승은 그곳을 지키는 사람에게 쫓겨 서쪽 담을 넘어 달아났다.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사람들을 시켜 찾게 하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이 기록 뒤에 ‘불길한 조짐’이라는 짧은 논평을 덧붙여 왔는데 이런 조짐이 나타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이를 보면 당시 사람들의 이 사건은 별것이 아닌 소동이 아니라 음침하고 무서운 느낌을 주는 일이었던 듯싶다.
특히 논평은 이 사건을 ‘짐승에 얽힌 괴상한 일’이라는 뜻에서 수괴(獸怪)라고 부른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이 사건 외에 수괴라는 단어를 쓴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91회
그로부터 16년 후
비슷한 사건이 다시 발생한다.
<조선왕조실록> 1527년 6월 17일자 기록을 보면 사거는 취라갑사 (吹螺甲士)
즉, 소라모양의 나팔을 부는 군인이 악몽을 꾼 데서 시작한다.
16일 밤 어느 취라갑사가 가위에 널려 기절했다.
악몽으로 크게 괴로워하며 공포에 떨었던 것 같다.
주변에서 자고 있던 다른 군인들이 일어나 그를 정신 차리게 하고 간호를 해 주었다.
그때 갑자기 무엇인가 튀어나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일시에 일어난 군인들이 소리 난 쪽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목격담에 따르면 방구(庬狗:크고 두터운 개) 같은 망아지 만한 짐승이 방에서 뛰쳐나와 서명문 쪽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방구를 삽살개로 번역하기도 하므로 긴 털이 많이 난 개와 짧은 듯한 개라고 하기에는 조금 커서 망아지와 비슷하다고 느낌을 줬을지도 모른다.
정원이 아뢰었다 .
“「간밤에 소라 부는 갑사 한 명이 꿈에 가위눌려 기절하자 동료들이 놀라 일어나 구료(救療)하느라 떠들썩했습니다. 그래서 제군이 일시에 일어나서 보았는데 생기기는 삽살개 같고, 크기는 망아지 같은 것이 취라치(吹螺赤: 나팔 부는 취타수) 방에서 나와 서명문을 향해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서소위부장의 첩보에도 ‘군사들이 또한 그것을 보았는데 충찬위청 모퉁이에서 큰 소리를 내며 서소위를 향해 달려왔으므로 모두 놀라 고함을 질렀다 취라치 방에는 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괴탄(怪誕:괴이한 이야기)한 일이나 취신(取信할) 것이 못되옵니다.
<중종실록 1527년 6월 17일>
공전에서 한밤중에 짐승 같은 것이 튀어나와 돌아다닌 것까지는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한 사람이 얼핏 목격한 것이 아니라 여럿이서 동시에 보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취라갑사가 있는 곳에서만 목격자가 나온 것도 아니다.
서서위 부장의 보고에도 이 짐승이 나온다.
그에 따르면 충찬위청 모퉁이에서 큰 소리를 내며 서소위로 치닫는 짐승을 많은 군인이 보고 놀라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취라치의 방에서 성전(腥膻) 냄새, 다시 말해 비린내와 노린내가 났다는 말로 덧붙여 있다.
이는 무엇인가에 있었다는 증거를 확인했다는 뜻이다.
이날 밤 궁전에서 소란을 피운 짐승은 개를 닮았고 날쌔게 움직였다는 점에서 공교롭게도 16년 전의 목격담 속 짐승과 통하는 점이 있어 보인다.
원래 밤에 근무하는 군인들은 무서운 소문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1511년 사건 이후 개처럼 생긴 무서운 짐승이 밤만 되면 궁전을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정말 비슷한 것이 나타나 유독 깜짝 놀랐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 소문은 더 빠르게 퍼질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