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야기

양계초의 「음양오행설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연구/허재수.영남大

jn209 2025. 6. 4. 09:18

 < 목 차 >

1. 서론

2. 「음양오행설의 역사」에 대한 분석

3. 양계초의 주장에 대한 비판

4. 결론

 

 

 

 

1. 서론

 

본 연구의 목적은 양계초(1873-1929)의 논문, 「음양오행설의 역사」1)를 분 석하여, 그가 음양오행설을 ‘이천 년 미신의 소굴’로 선언하고 그 기원을 전국시 대로 주장한 불합리성을 지적함으로써, 그동안 음양오행설에 대해 왜곡된 인식 을 바로잡는 것이다.

1923년 발표된 이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이른바 음양이라든가 오행이라든가 하는 말이 매우 드 물게 나타나고, 그 의미도 극히 평이한 것이었다.

또 이 두 가지 말이 함께 연용 된 적도 없었다. 모든 경전과 공자, 노자, 묵자, 맹자, 순자, 한비자 등 모든 사 상가들도 그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없었다.그렇다면 이러한 사설(邪說)을 지어 내어 혹세무민한 자는 누구인가.그 시원은 대개 연나라와 제나라의 방사(方士) 에게서 비롯되나 그 이론을 구축하고 전파한 죄를 물어야 될 사람은 세 사람이 다. 곧 추연(鄒衍)과 동중서(董仲舒), 유향(劉向)이다.”2)

 

양계초는 춘추전국 시대의 유가 경전에 ‘음양’, ‘오행’ 등의 단어가 매우 적게 나타나므로 음양오행설의 기원은 춘추시대 이전이 될 수가 없다고 주장하며, 이 로 미루어 볼 때 전국 말 추연이 구축한 음양오행설은 유가의 정설을 벗어나 만 든 것이므로 사설이라는 것이다.

이 논문 발표 후 고사변파의 유절,3) 고힐강4) 등의 지지 논문으로 양계초의 주장은 더욱 힘을 얻어 한동안 정론으로 굳어질 정 도였다.

 

    1) 1923년 양계초가 󰡔東方雜誌󰡕 제20권 12호에 발표한 이 논문의 원제는 「陰陽五行說之來歷」이다. 본고에서는 양계초·풍우란 외, 김홍경 편역, 󰡔음양오행설의 연구󰡕에 실린 󰡔음양오행설의 역사󰡕를 저본으로 하고, 󰡔古史辨󰡕, 1971, 第五册, 343-362쪽에 실린 「陰陽五行說之來歷」의 원문을 참 고로 한다.

    2) 양계초·풍우란 외, 김홍경 편역, 󰡔음양오행설의 연구󰡕, 1993, 43쪽.

    3) 1927년 발표된 󰡔東方雜誌󰡕 제25권 제2기에서, 󰡔홍범󰡕 오행의 成書연대가 전국말이라고 주장함. 劉節, 「洪範疏證」, 󰡔古史辨(第五册)󰡕, 1971, 388-403쪽 참조.

    4) 고힐강은 1930년 발표한 논문에서 음양오행설을 전국말 추연이 창시했다는 양계초의 주장을 지지 함. 顾颉刚, 「五德终始说下的政治和历史」, 󰡔古史辨(第五册)󰡕, 1971, 404-617쪽 참조. □ 허 재 수—양계초의 「음양오행설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연구 25

 

그 후 찬반양론이 있었으나 최근까지도 학계는 어느 한 의견으로 통일되 지는 않고 있다.

이로 인한 문제점은 음양오행설에는 미신적 성분만 아니라 합리 적 성분이 함께 있는데, 대중들에게 미신이란 편견을 너무 강하게 심어 주었다는 것과, 음양오행설의 기원을 전국시대로 설정하는 바람에 기원 및 발전사를 장기 적 관점에서 유기적으로 구성하기 어렵게 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1950년대 중반 조셉 니덤이 중국의 고대과학과 문명에 대한 수십 년간 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음양오행설에 고대 자연주의 과학의 성격이 있다5)고 인정해 주었고, 1969년 서복관이 고증학적인 연구방법론에 의해 僞書 판단에 대 한 보다 합리적인 기준을 제시하고6) 이를 근거로 유절과 굴만리의 주장을 반박 하여 많은 지지를 받았다.7)

그러나 이것으로 양계초의 주장이 완전히 불식된 것 은 아니므로 음양오행설의 기원을 殷代로 주장하는 논문은 최근까지 꾸준히 이 어져 왔다.8)

기존의 많은 선행 연구 자료에서는 음양오행설이 殷代의 음양, 오 행부터 시작하여 前漢에서 종합 완성되는 장기적이고 일관된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간의 자료들이 이러한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양계초 논문 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1920년대 서세동점의 시대 상황과 개혁 정치 가이자 계몽사상가인 양계초의 신분9)을 고려하면, 당시 이 논문이 대중 계몽을 위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5) 니덤(Joseph Needham), 이석호·이철주·임정대 옮김, 󰡔중국의 과학과 문명 II󰡕, 1986, 337쪽 참조.

   6) 서복관, 「음양오행설과 관련 문헌의 연구」, 김홍경 편역, 󰡔음양오행설의 연구󰡕, 1993, 79-84쪽 참조.

   7) 같은 논문, 84-94쪽 참조. 󰡔尙書󰡕 「甘誓」가 전국 말의 僞書라는 굴만리의 주장에 대한 반박임.

   8) 张强, 「阴阳五行说的历史与宇宙生成模式」, 󰡔湖北大学学报(哲學社會科學版)󰡕 第28卷 第5 期, 湖北大学, 2001, 77쪽 재인용.

    9) 徐剛 저, 이주노·김은희 옮김, 󰡔중화유신의 빛 양계초󰡕, 2008. 참조. : 양계초 인물평전인 본서에 서 저자는 양계초(1873-1929)에 대해, 광동성 출신으로 조부로부터 정통 유학을 배운 후, 강유위 의 제자로 신학문을 배우고, 1898년 광서제의 신임을 받아 강유위를 도와 무술변법을 주도했으나, 100일 유신으로 실패한 뒤 일본으로 망명, 중국 근대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개혁 정치가, 계몽사상 가, 신유학자, 역사연구 저술가로 소개하고 있다. 

 

본론인 제2장에서 양계초의 논문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3장에서는 음양오행 설이 미신이라는 혹평과 그 기원이 전국시대라는 주장에 대한 필자의 반론을 제 시하고 이를 극복할 방안을 제안한다.

이를 통해 그동안 양계초에 의해 왜곡되고 저평가되어 온 음양오행설의 실상을 바르게 정리하여 음양오행설에 내재된 동아 시아 고대 자연주의 사상 이론을 연구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사용하는 용어를 정리한다.

본고에서 논하는 고대 음양 오행설의 관련 지역을 지칭함에 있어 ‘중국’으로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나, 문맥 상 필요에 따라 중국을 포함하여 포괄적으로 ‘동아시아’로 표현하기도 한다. 

 

2. 「음양오행설의 역사」에 대한 분석

 

양계초는 ‘음양오행설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는 그의 논문 목적을 달성하기 위 해 음양오행설이 미신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제시해야 했는데, 그 핵심은 공자 원시 유가를 正, 음양오행설을 邪說로 분리한 것이다.

전통의 공자 유가 경전을 正說로 설정하고, 이에 비추어 음양오행설 속의 단어가 가진 의미가 정설인 유가 경전의 해당 의미와 다르다는 것과, 경전에는 음, 양, 음양, 오행 등의 단어가 적게 나타난다는 것을 이유로 음양오행설은 곧 사설이라고 주 장한 것이다.

이런 방식의 논리로 양계초는 전통 유학으로부터 음양오행설을 분 리해 내고 그 기원을 하찮은 것으로 격하하여 미신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으 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1) 유가 경전을 기준으로 한 비교

 

양계초는 철저히 유가적 입장에 서서 은⋅주의 음양, 오행을 마치 유가의 전 유물인 것처럼 논리를 펴고 있다.

먼저 그는 ‘음양의 의미 변천’에 대해 논하면 서, 詩⋅書⋅周易⋅老壯의 경전에 나온 음, 양, 음양에 대해 “은주 시대 이전 의 이른바 음양이라는 것은 자연계 속의 하찮고 미세한 현상에 불과하였으며, 어 떤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10) 라고 했다.

 

   10) 양계초·풍우란 외 저, 김홍경 편역, 󰡔음양오행설의 연구󰡕, 1993, 35쪽. 

 

양계초의 이 주장에 대해 음양가가 진화 발전의 관점에서 변호한다면, 유가는 공자의 述而不 作 전통에 따라 음양 관념을 추상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 다.

사실 하⋅은⋅주대에는 유가도 음양가도 없으며 이 시기의 음양, 오행 관념 은 儒家만의 학술이 아니라 중국 고대 인민 전체의 학술자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은⋅주의 음양, 오행은 유가 경전의 의미와 상관없이 음양가에서 발전시킨 음양 오행설의 뿌리나 기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오행의 의미 변천’ 에 대해 논한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오행은 물질을 다섯 가지 종류로 구분하고 각각의 기능과 성질을 설명하는 것 에 불과하다. 거기에 어떻게 털끝만 한 철학적 혹은 술수적 의미가 존재할 수 있는가. …중략… 서경의 이 두 편(감서, 홍범)을 제외하면 󰡔시경󰡕 󰡔의례󰡕 󰡔역경󰡕 󰡔역전󰡕 그리고 󰡔노자󰡕 󰡔논어󰡕 󰡔맹자󰡕에는 모두 오행이라는 글자가 없다.11)

 

이 역시 은대와 춘추전국 시대 오행의 의미에 대해, 유가의 주요 경전에 ‘오 행’이란 글자가 없다는 이유로 춘추시대에 나타나는 ‘오행’의 존재를 무시하고 부정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묵경󰡕과 󰡔좌전󰡕의 오행에 대해 독단적 판단12)을 하 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음양가의 성립과 음양오행설의 전파’에 대해 논한 결론으로, 춘추전국시대 이전의 경전에는 음양, 오행이라는 말이 매우 드물게 나타나고 그 의미도 극히 평이한 것이었다고 하면서, 모든 경전과 공자, 노자, 묵자, 맹자, 순자, 한비자 등 모든 사상가들도 그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없었다13)고 주장했 다.

이 역시 유가 경전을 절대적 판단 기준으로 하여 음양오행설이 가진 추상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음양오행설의 ‘음양’, ‘오행’이 가진 진화된 의미가 유가 경전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음양오행설의 기원은 전국시대보다 앞설 수 없다는 논리를 펴기 위한 것이다.

전국시대 이전의 유가 경전에 음양, 오행이라는 단어가 매우 드물게 나타나고 철학적 의미를 가진 단어로 사용되지 않은 이유는, 前漢 동중서 이전까지는 유가 와 음양가는 서로 탐구 영역이 다른 분과 학문으로서 대등 관계 혹은 경쟁 관계 였으므로, 음양가의 용어들이 유가 경전에 유의미하게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특히 전한 이전의 공자 원시유학은 관리가 되기 위한 선비들의 자기 수양 도덕이 주요 내용이었으므로, 이런 유가 경전 속에 당시로서는 기술분야라 할 수 있는 음양, 오행의 구체적이고 의미있는 내용이 많이 등장하기는 어 려운 것이다.

 

2) 음양오행설의 始原을 方士로 제시

 

이와 같이 양계초는 음양오행설이 전통 유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 름의 방법으로 논증한 후, 그 기원을 전국시대 연⋅제의 方士에서 시작된 것으 11) 양계초·풍우란 외 저, 김홍경 편역, 󰡔음양오행설의 연구󰡕, 1993, 38-39쪽. 12) 양계초·풍우란 외 저, 김홍경 편역, 󰡔음양오행설의 연구󰡕, 1993, 39-41쪽. 13) 양계초·풍우란 외 저, 김홍경 편역, 󰡔음양오행설의 연구󰡕, 1993, 43쪽. 28 철학·사상·문화 제44호 로 설명한다. 이는 음양오행설이 태생적으로 방사로부터 기원한 것이라고 제시 하여 미신이란 인상을 강화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사설(邪說) 을 지어내어 혹세무민한 자는 누구인가. 그 시원은 대개 연나라와 제나라의 방사 (方士)에게서 비롯된다”14)

라고 했는데 이것은 상당한 왜곡이다.

왜냐하면 전국 당시에 ‘方士’란15) 음양, 오행 이론을 응용하고 이용하는 술수의 한 부류이며, 이들이 1200여 년 이상의 긴 음양오행설 발전 과정에서 시원 혹은 원조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양계초가 음양오행설의 기원부터 이론 형성까지의 역사를 전 국시대로 짧게 설정하고 추연을 음양오행설의 창시자로 본 데에서 비롯된 왜곡이 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추연을 음양가로 분류하고 그 우두머리로 보는데, 그의 五德終始 說에 나타난 미래예측 사상을 보면 방사로서의 성격이 엿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관자󰡕에 나타나는 음양오행 이론 연구와 관련된 학자들을 제1세대 음양가, 전국말 추연과 관련된 그룹을 제2세대 음양가로 구분하기도 한 다.

이 제2세대 음양가의 주요 대표자들이 방사였다는 의견도16) 있고, 전국시대 음양가는 곧 방사였다는 견해도17)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양 계초의 주장이 무리하다고 하는 이유는 추연이 음양오행설을 만들었다는 주장18) 아래 음양오행설의 시원을 방사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음양오행설은 전국 중기에 방사들이 시작하여 추연이 창시한 것이 아니며, 추연의 오덕종시설 은 음양오행설 전체 발전사에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특히 양계초 이후 발표된 다수의 연구에서 󰡔관자󰡕의 음양오행 이론 개발 내용을 보면, 오행 상생의 기본 이론은 추연보다 앞선 전국 중기 제나라 직하학파에 의해 개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9)

 

     14) 양계초·풍우란 외 저, 김홍경 편역, 󰡔음양오행설의 연구󰡕, 1993, 43쪽 참조.

     15) 方士 : 方術을 체득하거나 행하는 사람. 이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漢書󰡕 「秦始皇紀」이나 이 미 전국시대 때부터 醫經, 經方, 房中·神仙의 술을 중심으로 이들 계층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 다. 이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秦에서부터 前漢에 걸친 시기로 …중략… 이들이 활약하 게 됨에 따라 풍속이 신비화되고 학술 활동이 俗化되는 등 폐단이 생겨났다. 封禪說, 災異說, 讖 緯說 등의 학설과 緯書의 출현도 이들 활동의 부산물로 인식된다. …하략…. 유교사전편찬위원회, 󰡔유교대사전󰡕, 박영사, 2004, 499쪽 참조.

     16) 马思劢, 「󰡔管子·幼官󰡕中的时间、空间与统治: 阴阳家之研究」, 󰡔管子学刊󰡕 第4期, 齐文化研 究院, 2017, 19쪽 참조.   

     17) 풍우란 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상)󰡕,1999, 725쪽 참조.

     18) 양계초·풍우란 외 저, 김홍경 편역, 󰡔음양오행설의 연구󰡕, 1993, 44쪽.

    19) 허재수, 󰡔음양오행론의 시·공간 복합성 고찰 및 도식화󰡕, 영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3, 42-65쪽 참조. 

 

그러므로 전국시대 상황을 기준으로 음양오행설의 시원을 방사로 설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추연은 방사이기 이전에 그가 속한 학파는 음양가 이며, 음양가의 원조는 羲和의 관직으로부터 나왔고,20) 희화는 고대 당시 천문, 曆學 담당 최고 관직으로서 오늘날의 우주천문학에 해당하는 당시로서는 최고 과학기술의 하나이다.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이 지은 「六家要旨」에는 음양가가 유가, 묵가, 법가, 명가, 도가와 함께 거론되는데, 사마담이 음양가를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진한 당시 음양가의 높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일찍이 나는 음양가의 학술을 관찰해 본 적이 있는데, 대체로 상서로움에 치 중하고 금기하고 꺼리는 것이 많아 사람으로 하여금 구속받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바가 많았다. 그러나 四時(춘하추동)가 운행하는 큰 순서를 배열한 점만은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중략… 저 음양가는 사시, 八位, 十二度, 二十四節마 다 교령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여러 가지 규정을 마련하여 이 교령에 따르는 자는 번창하고, 거스르는 자는 죽지 않으면 망한다고 한다.21)

 

이 내용으로부터 유추해 보면, 음양가의 주 연구 관심 분야는 크게 방술과 四 時敎令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을 거두절미하고 전국시대 ‘방사’를 음양오행설을 시작한 시원으로 표현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렇게 하여 양계초 는 음양오행설의 기원을 전국시대로22) 늦춰 잡고, 전국 말에 추연이 만든 술수 적 邪說로 선언할 수 있었다.

 

    20) 음양가(陰陽家) : 天文과 算定을 주로 한 諸子百家의 한 학파. 곧 천문·역수·방위 등으로 吉凶禍 福을 점치고자 한 학파를 음양가라고 한다. 󰡔漢書󰡕 「藝文志」에서는 음양가로 鄒衍·張蒼·鄒奭 등 을 들고 있으며, 그 저작으로 󰡔鄒子󰡕 49편, 󰡔鄒子終始󰡕 56편과 󰡔鄒奭子󰡕 12편을 들고 있는데 전하지 않는다. 󰡔한서󰡕 「律曆志」의 “黄帝가 희화(羲和)를 시켜 해(日)를 점치게 하고, 常儀를 시켜 달(月)을 점치게 하였다.” 라는 기록과 「藝文志」의 “음양가는 희화라 는 관직에서 나왔다.” 라고 한 기록에 의하면, 음양가는 고대의 천문·역법을 근원으로 했으며, 전국 시대 이후로 현저히 진보한 우주·자연에 관한 과학적인 음양·오행의 체계를 종합하여 이룬 일종의 자연 自然哲學이었 다. …하략…. 유교사전편찬위원회, 󰡔유교대사전󰡕, 2004, 1155쪽.

     21) 司馬談의 「六家要旨」는 사마천의 󰡔史記列傳󰡕의 맨 마지막 편인 「太史公自序」에 실려 있다. 사 마천 저, 김원중 옮김, 󰡔사기열전(2권)󰡕, 2020, 831-832쪽.

    22) 논문에서 양계초가 직접 ‘전국시대’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전후 맥락상 연·제의 방사란 전국 중기 제나라 직하학궁에서 진행된 󰡔관자󰡕의 음양오행 연구자들을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음.(논자 의 의견). 

 

양계초 이후 학계에 발표된 󰡔관자󰡕의 「유관」, 「사 시」, 「오행」, 「경중기」 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전국 중기 음양과 오행의 결합 을 시도하고 연구한 그룹은 제나라 직하학궁의 여러 학자들로 알려져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관자󰡕의 成書 연대를 대체로 전국시대로 보고 있으며, 대부 분 학자들이 직하학궁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기는데, 이러한 견해는 믿을 만한 것이다. 성서 연대를 확정하는 것은 곧 작자를 확정하는 것과 다름없는데, 그들 이 바로 직하학궁의 선생과 학사들이다.23) 󰡔관자󰡕의 「유관」⋅「사시」⋅「오행」⋅「경중기」 4편에는 풍부한 음양오행 사상 이 담겨있다. …중략… 필자는 「유관」 등 4편이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중국 전통적 기본 구도인 음양오행이란 모식이 바 로 이 편들에서 정형화되었기 때문이다.24)

 

 

양계초가 방사를 음양오행설의 시원으로 지목하고 추연이 음양오행설을 창시 한 것으로 주장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는 이유이다.

 

3) 사상사적 관점에서의 평가

 

여기서는 사상사적 관점에서 이 논문이 나온 시대적 상황과 저자인 양계초의 신분, 논문의 가치 및 후대에 미친 영향의 측면에서 분석해 본다. 이 논문은 동 아시아 사상사적으로 다음 3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1920년대는 시대적 으로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 중국 대륙은 사상 철학적으로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 야 하는 절박한 시기였다. 이미 명확해진 서양과학의 절대 우위에 비해 전통 음 양오행설은 하루빨리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제국주의의 막강한 힘의 근원이 서양과학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선각자로서는, 중국 대중들이 서 양과학과 학문을 하루빨리 수용하도록 하기 위해 음양오행설을 퇴출시키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양계초의 이 논문은 유학자로서의 입장과 개혁 계 몽사상가로서의 입장이 잘 반영된 것이며, 당시대에 필요했던 대중 계몽과 의식 의 근대화에 꼭 필요한 연구라고 생각된다. 둘째, 이 논문은 음양오행설에 대한 근대적 논의를 한 효시이며,25) 양계초는 자기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나름의 논리적 방법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 다.

이 논문이 음양오행설을 과도하게 비판했지만, 근대적 논술구조로 최초로 음 23) 白奚 저, 이임찬 옮김, 󰡔직하학 연구󰡕, 2013, 415-416쪽 참조. 24) 白奚 저, 이임찬 옮김, 󰡔직하학 연구󰡕, 2013, 446쪽 참조. 25) 양계초·풍우란 외 저, 김홍경 편역, 󰡔음양오행설의 연구󰡕, 1993, 12쪽. □ 허 재 수—양계초의 「음양오행설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연구 31 양오행설의 역사를 비판, 소개한 것은 동아시아 학술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 다.26)

왜냐하면 당시 중국의 전통 사상과 이론을 반성적으로 검증해봐야 했던 시대적 격변기에 음양오행론에 대한 학술토론의 장을 열어 준 의미가 크기 때문 이다.

  셋째, ‘이천 년 미신의 소굴’ 주장과 같은 혹독한 비판은 사실 음양오행설에 대한 파산선고나 다름없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이는 유가가 음양오행설을 유학으로부터 분리해 내 방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를 사상사적으로 보면 기 원 전 2세기 前漢 동중서의 건의로 한무제가 채택한 罷黜百家獨尊儒術27) 정책 으로 음양가는 유가에 통합되었다.

 

      26) 이런 의견은 주로 고사변파 학자들의 견해이지만, 필자도 이 의견에는 동의한다.

      27) 파출백가 독존유술(罷黜百家獨尊儒術) :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동중서가 현량대책(賢良對 策)을 올려서 이 건의가 수용되자 ‘제자백가(諸家)의 주장을 폐기하고, 유가(儒家)의 학술만을 높 인다[罷黜百家 獨尊儒術]’는 인식(認識)이 비로소 크게 확산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유가의 학설 이 중국을 교화하는 정통 학술로 정립되면서 통치 철학의 근간이 되었다.” - 蘇輿 저, 허호구·유재 환·정동환 옮김, 󰡔역주 춘추번로 의증󰡕, 2016, 4쪽.

 

당시 동중서는 유가의 필요에 의해 음양오행 설이 가진 장점을 활용하고자 음양오행 이론을 유학에 융합하여 공자 원시 유가 를 일신할 수 있었고, 이때 ‘음양가’는 퇴출되어 없어졌다.

이후부터 음양오행 설은 약 2000년 간 유가 소속으로 통합돼 그 관리 아래 동아시아 중요 사상 철 학으로 발전해 왔다.

그 대표적 예가 주자학의 聖典인 󰡔성리대전󰡕의 ‘태극도 설’에서 우주의 만물창생 과정을 음양오행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고대 중국의 대표적 술수 이론이며, 漢代 이후 동아시아의 대표적 사상 철학 이론의 하나로 역할해 온 음양오행설이 1923년 유가로부터 방출당한 것 은, 동아시아 고대철학 내의 기술 분과가 철학으로부터 학문적으로 분리된 것으 로 해석할 수 있다.

근대의 외부 자극과 충격이 없었다면 동아시아에서 스스로 학문의 분과가 일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인데, 그런 측면에서 이는 동아시아 사상 사에 일정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필자는 양계초가 음양오행설을 분리 방출한 그 순간, 유가는 그동안 음양오행설에 대해 가졌던 관리권을 포기한 것이며, 음양오 행설은 이 때 제도권으로부터 초라하게 퇴출되었으나 비로소 분과 학문으로 독립 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3. 양계초의 주장에 대한 비판

 

전국 중기 제나라 직하학궁에서 진행된 󰡔관자󰡕의 음양오행 이론 개발 관련 내 용을 고찰하면, 그것은 당시 농경민들이 농업 생산성을 올릴 수 있도록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

즉 문자와 문서 기록 환경이 열악하던 시대의 농업 중심 사회에서, 주로 경험에 의지하는 농부들이 四時敎令을 보다 잘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曆法을 개발하고, 이것이 漢代에서 ‘月令’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사시교령이란 사상은 처음에는 옛사람들이 오랫동안 농업 생산에 종사하면서 획득한 자연법칙에 대한 초보적 인식과 연관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천인관 계라는 이론 형태로 발전하고 또 사회⋅정치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음양 사상의 발전에 의존한 바가 있다.

사계절의 변화를 음양의 유행으로 보는 것은 매우 자 연스럽고 용이한 것이었기 때문에 음양과 시령의 결합은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이 었다. 따라서 사시교령 사상이 음양설의 모든 내용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 다.

오행설은 음양설과 결합하기 위해 시령을 선택하여 연결점으로 삼았는데, 이 는 가장 간결하고도 가장 효과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오행과 시령이 어떻게 결합 하는가가 두 사상 결합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만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 다면, 오행과 음양의 결합은 그저 빈말에 불과할 뿐이었다. 역으로 말하면, 이 문제의 해결이 바로 사상 결합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관」이 맨 처음으 로 오행과 시령의 결합을 시도하였다.28)

 

    28) 白奚저, 이임찬 옮김, 󰡔직하학 연구󰡕, 2013, 459쪽. 

 

그렇다고 한다면 당시 군주의 입장에서 농업 생산성을 올리는 것이 부국강병 의 기반이므로, 음양오행 이론의 개발과정은 오늘날 최고의 국립연구소에 해당 하는 제나라 직하학궁에서 국가 정책 차원의 중요 과학기술 개발을 진행한 것에 비교할 수 있으며, 이 연구에 참여한 고대 음양가는 오늘날의 과학 기술자의 역 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음양오행설의 기본 목적과 사유가 이러했다면, 이론의 원형을 있는 그대로 연 구하기 위해서 100여 년 전 파산 선고된 음양오행설을 이제 복권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시는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 새로운 과학 문명을 하루빨리 수용하기 위해 전통사상은 비난받고 퇴출되어야 할 대상이었지만, 21 세기 초인 지금은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과도하게 미신으로 비판받 은 부분에 대해 재검토하여 미신성분은 제거하되 합리적 요소는 동아시아 고대 원형 사유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근대 이후 서양 과학기술 문명으로 인 한 환경파괴와 기후위기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서구의 많은 학자들이 그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상관적 사고방식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동아시아 고유의 사상이론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융(C. G. Jung, 1875∼1961)의 동시성 이론은 동아시아 고대 철학사상이 심리학과 같은 현대 인문사회과학의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중국 고대 사상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예지몽의 심리학적 원리을 연구하던 융은 자신의 동시성 이론을 수립한 후에, 중국의 도가 사상과 주역이 그것의 선행이론이었음을 파악하고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성 현상의 인식 또는 비인과적 동시성적 사고acausal synchronistic thinking는 융에 의해서 심리적 차원에서 이론화되기는 했으나 여기에 선행된 관 념들이 있었음을 융은 지적하고 있다.

그 첫째가 고대 중국의 도와 역易 사상이 며, 둘째가 서구의 철학사상이다.29)

이는 융의 동시성 이론과 같은 원리가 그가 접했던 도가의 󰡔태을금화종지󰡕와 󰡔주역󰡕에 들어 있었다는 뜻이다.30)

 

    29) 이부영, 󰡔분석심리학󰡕, 2011, 334쪽.

    30) 이현구·신성수, 「분석심리학의 동시성원리와 주역의 통(通) 개념」, 󰡔철학·사상·문화󰡕, 2015, 81-82쪽 참조 : “그는 우연히 중국 선교사로 일하던 리하르트 빌헬름(Richard Wilhelm, 1873∼ 1930)의 소개로 중국 도교 경전인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를 접하게 된다. 이 동양의 연금술 서적을 통해 자신의 심리학 모델과 연금술의 그것이 맞아떨어짐을 확인하고는 서양의 연금술 연구에 매진한다. 이로써 그의 심리학은 하나의 전체적 체계를 완성하게 된다. …(중략)… 그 구체적인 예가 동양의 고전에 속하는 주역(周易) 이라고 할 수 있다. 점(占)을 치는 모든 행위가 그렇듯이, 주역 도 아무런 인과적인 연결도 없는 상태에서 초월적인 대상에게 질문을 던져 의미를 얻는 것이다.” 

 

물론 융은 이러한 원리가 동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경계하며 서구의 철학사상에도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이러한 철학사상이 비주류로 억제된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이것이 주류 학문이었기 때문에 동시성 이론과 관련된 풍부한 사유와 원리가 훨씬 더 많 이 연구되고 축적돼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주역이나 음양오행설의 상관적 사고방식과 순환론적 사유원리가 서양의 인과적 방법론의 한계를 돌파해 현대 인 문사회과학 이론을 수립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례와 관점에서 볼 때, 서양 과학기술과 방법론을 수용, 체화한 21세 기의 동아시아인들이 이제 스스로 서양학문과 동아시아 고대 사상철학 원리를 결 합해 ‘동시성원리’와 같은 이론을 먼저 정초해내기 위해서는 음양오행설의 복권 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양계초의 비판에 대해 반론을 제시한다.

 

1) ‘이천 년 미신의 본거지’라는 혹평에 대한 반론

 

1923년 양계초가 음양오행설을 혹평한 이후, 음양오행설에 대한 비교적 정당 한 평가는 1900년대 중기 서양과학의 지식을 가진 영국 생물학자 조셉 니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니덤이 음양오행설에 대해 이렇게 말해주기 전까지 동아시아인 스스로 음양오행설이 가진 합리적 성격에 주목하여 심도있게 연구한 학자는 찾아보기 어려웠으나, 니덤의 발표 후 음양오행설이 지닌 자연주의 과학 성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다.

대만 신유학자 곽위는 “음양오행가의 사상에는 종교적 성분도 있고 과학적 성분도 있다.”고 하면서 종교적 성분과 함께 과학적 성분을 같이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대 유자들이 음양오행설의 종교적 성 분만 계승하고 과학적 성분은 방기하였다고 지적한다.31)

니덤, A.C 그레이엄은 음양오행설의 상관적 사고에 대해 깊이 연구한 바 있으며,32) 한국의 소광섭, 강 용균33) 등은 음양오행설이 가진 안정적인 되먹임 구조(Feed back)를 수학의 미 분방정식으로 해석하여, 음양오행설이 일정한 법칙에 의해 체계(System)의 안 정을 유지하는 고유한 이론체계임을 논증한 바 있다.

이러한 선행연구 내용으로 볼 때, 양계초가 음양오행설을 이천 년 미신의 본거 지라고 비판한 것은 과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이 문제를 제기하는 목적 은 음양오행설이 과학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음양오행설은 경험적 범주론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근대과학과 같은 의미의 과학이 될 수는 없 다.34)

 

    31) 郭爲, 「음양오행가의 사상」, 김홍경 편역, 󰡔음양오행설 연구󰡕, 1993, 159-160쪽 참조.

    32) A.C 그레이엄 저, 이창일 옮김, 󰡔음양과 상관적 사유󰡕, 2001.

    33) 소광섭, 「五行의 數理物理學的 모형」, 󰡔과학과 철학󰡕, 1994, 35-56쪽. ; 강용균, 「五行과 八行 의 수학적 모형」, 󰡔韓國精神科學學會誌󰡕 Vol.3 No.1, 1999, 17-31쪽.  

 

그러나 ‘음양오행은 미신이다’와 같은 과도한 인식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양계초는 당시 근대 서양 과학의 눈높이에서 음양오행설을 바라보고 평가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비교하는 시대’에 있어서 공정하지 않다.

왜냐하면 동양은 자체의 근대철학이 없으므로35) 근대과학도 없었고, 1923년 당시의 음양 오행설은 이천여 년 전의 고대에 만들어진 이론으로서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고 대 사상이론’인 것이다.

이것을 서양 근대과학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비교하면 당연히 비과학적 미신으로 평가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 평가는 공정하지 않 으며 적절하지 않다.

서양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이나 중세 스콜라 자연학도 근대 과학의 관점에서 평가하면 음양오행설만큼 미신적이라고 평가받을 것으로 본다.

만약 동서 사상의 비교 관점에서 음양오행설을 공정하게 평가하려 면 서양의 고대나 중세 사상과 비교 평가해야 한다.

오늘날 음양오행설을 동아시아 고대 사상이론으로 복원시키려고 하는 이유는 음양오행설 속에 포함된 사상이 서양과학이나 철학의 그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 기 때문이다.

음양오행설이 비록 동양 자체적인 근대 과학을 창출하지는 못했지 만, 그것은 음양오행론 만의 책임이나 문제라기 보다는 앞서 곽위가 말한 대로 음양오행론을 통합 관리해온 유가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볼 때 미신이 제거된 음양오행설 본래의 사유는 서양과학이나 철학에서 찾을 수 없는 동아시아 고유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다.

앞에서 언 급한 니덤, A.C. 그레이엄 등이 연구 발표한 상관성 철학과, 최근 더글러스 호 프스테터 등이36) 연구 발표한 범주화 사고의 가치가 음양오행설의 기본 사유방 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

 

    34) 근대과학의 기본 정신인 ‘실험결과로 검증된 데이터가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다. 실험으로 재현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는다.’에 비춰 볼 때, 경험 기반의 범주론인 음양오행설은 이러한 실험검증에 의한 재현이 불가하므로 근대과학과 같은 의미의 과학은 아니다.

    35) 풍우란 저, 박성규 옮김, 󰡔중국철학사(하)󰡕, 1999, 3쪽 참조.

    36)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에마뉘엘 상데 저, 김태훈 옮김, 󰡔사고의 본질󰡕, 2017, 32쪽, 82쪽 참조. 36 철학·사상·문화 제44호 

 

이와 같은 연구들은 음양오행설이 비록 서양과학과 같은 자연과학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현대의 인문사회과학으로 접목될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지난 100여 년간 동아시아 철학계에서 음양오행설에 대한 깊이 있 는 이론 연구가 부족해진 사이, 서양 학자들이 먼저 음양오행설과 관련된 연구 주제를 선점하여 관심을 모으는 연구 결과로 발표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우리가 미신이란 굴레 아래 음양오행설을 고대 이론 수준으로 방치하지 말고 연구해야 하는 이유이다.

과거 음양오행설이 미신으로 평가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20세기 초까지 동 아시아에는 음양오행설이 철학이나 종교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 다.

19세기 초 근대인들이 이러한 음양오행설을 바라보고 평가할 때 여기에는 기술 관련 이론만이 아니라 철학, 종교, 정치 등의 분야에서 각각의 목적에 맞게 파생된 응용이론까지 포함돼 있어 모두 한 덩어리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이에 비 해 1920년대 당시 서양과학은 수백 년 전부터 데카르트 등에 의해 철학에서 분리 된 全科 학문으로 발전되어 100% 과학의 모습으로 동아시아인 앞에 나타날 수 있었고, 음양오행설은 동아시아 인문⋅철학⋅종교라 할 수 있는 유학과 미분리 된 체 이 서양과학과 비교되었기에 미신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1세기 오늘날은 이 조건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기본적으로 각 학문 은 분리 독립돼 있으니 음양오행설을 근대적 기준에 맞게 학문적으로 재정리한다 면, 음양오행설도 미신 성분이 혼입되지 않은 前漢 시대의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주론의 특성 때문에 음양오행설은 인문사 회적 응용 분야와, 종교, 술수학 분야에서 견강부회의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근 대적 표준화 관리에 의해 옛날보다는 훨씬 잘 관리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고⋅중세에는 인식의 수준이 오늘날에 비해 훨씬 낮았고 과학적 분석 도구의 미 비로 미신 성분을 분간해내기 어려웠으며, 표준화 관리에 한계가 있어 미신적 요 소가 기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확보한 서양과학의 인과적 분석 능력과 첨단 과학 도구를 이용해 미신적 요소를 대부분 걸러 내거나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2) 음양오행설의 기원이 전국시대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

 

양계초의 이 주장에 대해서는 그동안 학계에서 많은 반론이 제기된 것으로 알 고 있다.

관련 선행 연구를 살펴보고 필자의 주장을 더한다.

張强은

“추연 이전 의 먼 옛날, 음양오행설은 이미 풍부한 형태로 나타났다. 음양의 특수한 함의는 殷商 이전에 이미 출현했고, 음양과 재이가 하나로 결합해 󰡔주역󰡕 시대에 나타 났다. 오행은 夏代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고 商代에는 확실하다. 음양과 오행 이 서로 결합한 시기는 추연의 오덕종시설보다 앞선다.”37)

라고 하면서 양계초의 주장에 명확히 반대하며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고 있다.

张峰屹은 선진 음양가의 저술이 모두 산실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상세하 고 체계적인 이해를 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전제하고, 일부 저명한 학자들이 현대 의 지식과 사상의 입장에 근거해 망평(妄評)하고 억단(臆断)하여, 후대의 잘못 된 인식을 더욱 유도하였다38)고 하며, 양계초의 논지 전개 방법이 독단적이고 터무니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양계초의 글을 예로 들면, 그는 현대인의 지식체계와 사상적 입장에서, 서론 에서 음양오행학설을 ‘이천 년 미신의 본거지’로 일축하고, ‘혹세무민의 邪說’ 이라 규정하고, 터무니없이 황당하게 ‘연⋅제 방사’의 소행으로 단정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불리한 사료(예를 들어 󰡔좌전󰡕, 󰡔국어, 󰡔상서⋅홍범󰡕 등)를 의 심하거나 배척하고, 버릴 수 없는 사료(예를 들어 󰡔여씨춘추⋅12기󰡕, 󰡔예기⋅ 월령󰡕)는 터무니없는 자료로 배척하거나 그 존재를 무시하였다.39)

詹筌亦은 음양오행설의 기원이 전국시대라는 양계초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은 대의 四時宇宙圖式이 고대 중국인의 우주도식이자 지식체계였음을 갑골 기록 등을 통해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전국 말에 나타난 음양오행설을 五方과 五 時가 결합한 五行宇宙圖式이라 하면서, 이런 오행 우주도식과 지식체계는 전국 후기의 짧은 시간에 완성될 수 없으며, 은대의 四時宇宙圖式이 오랜 시간에 걸 쳐 조금씩 발전하여 나타난 것이니 양계초의 주장은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40)

이들 선행 연구들의 대체적 형식은 양계초의 무리한 주장이나 논리적 맹점을 지 적하면서, 음양오행설의 기원은 전국 시대가 아니라 은대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 고 있는 것이다.

2013년에 발표한 丁四新의 논문에 그동안 핵심 쟁점이었던 유 절의 󰡔상서⋅홍범󰡕 戰國著作說에 대한 찬반 논쟁 과정과 그의 새로운 주장이41) 잘 정리돼 있다.

 

  37) 张强, 「阴阳五行说的历史与宇宙生成模式」, 󰡔湖北大学学报(哲學社會科學版)󰡕 第28卷 第5 期, 湖北大学, 2001, 77쪽 참조.

   38) 张峰屹, 「先秦阴阳五行思想检论」, 󰡔文学与文化󰡕, 南开大学出版社, 2021, 第四期, 4쪽 참조.

   39) 같은 논문, 5쪽 참조.

   40) 詹筌亦, 「先秦漢初五行思維方式研究」, 대만 국립 정치대학 석사학위논문, 2012, 5쪽 참조

   41) 丁四新, 「近九十年 ≪尚书·洪范≫作者及著作时代考证与新证」, 󰡔中原文化硏究󰡕 第5期, 河南 省社会科学院, 2013, 14-15쪽 참조. 

 

위에서 살펴본 선행연구들에는 주로 문헌론적 관점의 주장이나 자료 제시가 많은데, 필자는 이와 달리 사상사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극복할 대안을 제안하고 자 한다.

결론을 먼저 언급하면, 이 문제를 음양오행설의 개발자였던 고대 음양 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책이 자명해진다는 것이다. 제2장에서 분석, 고찰한 바 와 같이 양계초가 음양오행설을 분리 방출하면서 옛 음양가의 손으로 다시 돌려 준 셈이니, 이제 음양오행설의 기원 문제는 양계초가 1923년 유가적 입장에서 주장한 그 조건42)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1923년 당시에는 하⋅ 은⋅주 시대의 믿을 만한 전적 자료가 부족해, 확실한 논증 자료로 詩⋅書⋅易 등의 경전 내용을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어 양계초와 같은 무리한 논리 구성이 가능했으며, 이에 대한 반박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갑골문 기록이 경전보 다 더 확실한 자료로 나타나고 해석되어 경전을 절대 기준으로 하여 논하던 과거 와는 조건과 환경이 달라졌다.

갑골 복사에 음, 양, 음양, 오행의 관념이 나와 있고, ‘商, 東方, 西方, 南方, 北方’의 오방 기록이 있고43) 은대에 ‘五를 강조 하는 관념’이 있다면, 음양오행설의 주인인 음양가의 입장에서 이것을 근거로 음 양오행설의 기원을 은대로 하여 전한대에 이론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42) 양계초의 주장을 달리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조건문으로 표현 가능하다.‘음양오행설이 하·은·주를 기원이라고 주장하려면, 하·은·주 관련 믿을 만한 기록인 시·서·역·묵경·노자 등에 ‘음양’, ‘오행’ 의 단어가 일정 이상의 빈도로 나오고, 그 의미가 음양오행설에서의 ‘음양’, ‘오행’과 같은 의미여 야 한다.’즉 양계초는 ‘하·은·주를 기원으로 인정받으려면, 이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라고 조건을 붙인 셈이다.필자는 이를 ‘양계초가 제시한 조건’이라 한 것이다. 

   43) 葉舒憲·田大憲, 鈴木博 譯, 󰡔中國古代神祕數字󰡕, 1999, 113쪽, 121쪽 참조

 

춘추시대에 나타난 공자 유가는 은⋅주 시대의 음, 양, 음양, 오행 관념을 뿌 리로 하여,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이상에 따라 유가의 사상이론을 구축한 것이며, 음양가는 유가와 다른 분야에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자기네 강점을 살 려 음양오행설을 은대부터 조금씩 발전시켰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양계초 가 적용한 조건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은⋅주 및 춘추전 국시대에 진행된 음양가의 학술 기원 문제를 더 이상 유가의 경전 해석 기준에 맞춰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음양오행설의 기원은 전국 시대가 아니라 殷代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면 음양오행설은 은대 에서 음, 양, 오행 관념이 발생하여 약 1200년 이상의 시간 속에서 조금씩 발전 하여 전국시대 󰡔관자󰡕와 추연에 의해 이론의 형태를 갖추고 前漢代에 공인되고, 이후 약 이천 년간 동아시아의 중요 철학사상으로 자리해 온 이론으로 정립될 수 있다.44)

음양오행설의 완성 시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는데, 동중서의 음양오 행설도 미완성이라 보고 후한의 󰡔백호통의󰡕나 수나라의 소길이 지은 󰡔오행대의󰡕 에서 완성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45)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 지만 동중서 이후에 추가된 내용은 발전사적 측면에서 큰 의미는 없다고 본 다.46)

또 다른 이유는 이 시기에 음양오행설이 국가의 공인을 받았다는 점 때문 이다.

어떤 이론이 국가의 공인을 받았다는 것은 일단 완성된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음양오행설이 유교에 수용되어 인재선발 시험의 과목에 포 함되고,47) 국가의 관학으로 공인되었으니 이론의 1차적 완성으로 볼 수 있다.

 

     44) 허재수, 󰡔음양오행론의 시·공간 복합성 고찰 및 도식화󰡕, 영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3, 10-84쪽 참조. 이 논문에서 필자는 은대부터 전한 동중서까지의 음양오행 발전사를 장기적 관점에서 유기적 으로 정리하고자 시도하였다.

     45) 김만원 역주, 󰡔白虎通義譯註󰡕, 2018, 133쪽 참조. ; 蕭吉 저, 김수길·윤상철 역, 󰡔오행대의(상)󰡕, 2020, 143쪽, 263쪽 참조.

     46) 연구자들 중에는 󰡔백호통의󰡕나 󰡔오행대의󰡕에는 ‘A가 B를 生하는 이유’가 설명돼 있고, 󰡔춘추번 로󰡕에는 그런 설명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런 설명은 오히려 견강부회 적 설명이며, 오행을 재료적 관점에서 보고 만들어 낸 상생의 이유이기 때문에, 오행의 의미가 추상화된 한대 이후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되며, 그러한 설명을 ‘음양오행설의 발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 허재수, 󰡔음양오행론의 시·공간 복합성 고찰 및 도식화󰡕, 영남대학 교 석사학위논문, 2023, 66쪽, 각주163 참조.

    47) 郭爲, 「陰陽五行家의 思想」, 󰡔陰陽五行說의연구󰡕, 김홍경 편역, 1993, 252-253쪽 참조 : 한대의 인재 선발에는 음양오행학이 독립된 과목으로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 중략… 그 때의 과목에 는 묵가나 도가, 법가, 종횡가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오직 음양오행가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4. 결론

 

지금부터 100여년 전 양계초는 「음양오행설의 역사」에서 음양오행설을 극복, 퇴출하기 위해 크게 두 가지의 논지를 전개하고 주장했다.

 첫째, 음양오행설에서 사용된 음, 양, 음양 및 오행의 의미는 전통 유가 경전의 의미와 다르므로 그것 은 정설이 아닌 邪說이며 이천 년 미신의 소굴이니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둘째, 음양오행설의 시원은 전국시대 연⋅제의 방사로 볼 수 있으며 그 이론을 구축한 것은 전국 말 추연이다.

첫 번째 주장에 대한 필자의 비판은, 1950년대 이후 니덤 등 여러 학자들이 음양오행설이 지닌 고대 자연주의 과학 성분을 인정해 주었으므로, 양계초가 음 양오행설을 이천 년 미신의 본거지라고 비판한 것은 과도하다는 것이다.

특히 양 계초 이후에 발표된 갑골문 자료로부터 나온 은대의 오행 관념에 대한 사실적 연 구 내용을 고려할 때 오늘날 음양오행설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일반인들의 인식 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학문적 환경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 으며, 오늘날의 과학기술적 방법과 분석 도구와 기법을 이용하여 고대 음양오행 설에 기생했던 미신 성분을 구분, 분리하여 동아시아 고유의 자연주의 철학 이론 을 더 깊게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주장에 대해 필자는 사상사적 관점에서 음양오행설의 기원 문제를 극 복할 대안을 제시했다.

고대 음양가의 입장에서 볼 때 양계초가 음양오행설을 분 리 퇴출한 그 순간 음양오행설의 기원 문제를 양계초가 설정한 조건에 맞춰 유가 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음양가는 이제 자기의 입장과 관점에 서 은⋅주의 관련 사실을 인용해 자기 이론의 기원과 발전사를 구성하면 된다.

지난 이천여 년간 음양오행설이 유가 철학에 통합, 종속돼 있다가 1923년 학문 적 분과가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고대 음양가의 입장에서 음양오행설의 기 원을 殷代로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음양오행설의 기원과 발전사는 은대로부터 전한대까지 약 1200년 이상의 기원과 발전사를 가진 동아시아 사상이론으로 재 정리될 수 있다.

본 연구의 한계는 음양오행설이 현대의 인문사회 과학으로 접목될 수 있는 가 능성만 언급하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본론에서 언급한 니덤, A.C. 그레이엄 등이 음양오행설을 분석 연구한 ‘상관성 철학’으로서의 성 격과, 최근 더글러스 호프스테터 등이 연구한 사고의 본질로서 유비와 범주의 기능이 음양오행설의 기반 사고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에 대해 향후 깊이 연 구 분석한다면 의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음양오행설의 기 원을 은대로 하여 전한대에서 음양오행설이 국가에 의해 공인되기까지의 1200 년 이상의 장기적 발전 과정을 일관되고 유기적으로 정리하는 후속 작업도 필요 하다.

양계초가 음양오행설을 사실 이상으로 과도하게 폄하하고 그 위상을 크게 추 락시킨 것은 사실이나, 개혁 정치가이자 계몽사상가인 그에게 부여된 시대적 요 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동아시아는 더 이상 서학을  무조건 수용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라 우리 고유의 것이 무엇인지를 되돌아 봐야 할 때가 되었다.

시대적 환경이 달라졌음을 인식하고 음양오행설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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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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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문】

본 연구는 1923년 발표된 양계초의 논문, 「음양오행설의 역사」에 의해 왜곡된 음양오행설의 기원 및 인식을 바로잡아 그동안 저평가되어 온 음양오행설의 위상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다. 양계초는 음양오행설을 ‘이천 년 미신의 소굴이며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선언하고, 전국시대 연⋅제의 방사로부터 기원하여 전국 말 추연이 창시한 미신적 이론으로 혹평했다. 이로 인한 문제점은 첫째, 음양오행설에는 미신적 성분만 아니라 합리적 성분도 함께 있는데 미신적 성격만 지나치게 강조된 점, 둘째, 음양오행설의 기원을 전국시대로 짧게 설정하여 사상적 발전사가 왜곡된 점, 셋째, 이런 영향으로 학계는 그동안 음양오행설에 내재된 동양 고대 자연주의 철학 성분을 밝히는 연구에 집중하지 못한 점이다. 그동안 많은 선행 연구자들이 양계초의 주장이 가진 불합리성과 논리적 맹점을 지적하고, 은⋅주의 음양, 오행을 음양오행설의 기원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름의 논리를 제시해 왔다. 그럼에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 문제에 대해, 필자는 양계초의 주장을 비판하고 극복 방안을 제안한다. 음양오행설은 1923년 양계초에 의해 유가로부터 분리되어 방출된 것으로 볼 수 있으니, 고대 음양가의 입장에서 양계초가 제시한 조건과 상관없이 은⋅주의 음양, 오행 관념을 그 기원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음양오행설은 은대에 기원하여 약 1200년 이상의 발전 과정을 거쳐 前漢 동중서 시대에 공인, 완성된 동아시아의 전통 사상 이론으로 재정리될 수 있다.

【주제어】 음양, 오행, 음양오행설, 음양오행설의 기원, 양계초

 

 

Abstract

A Critical Study of ‘The history of Yinyangwuxing(陰陽五行) theory’ by Liang Qichao(梁啓超)

Heo, Jae-soo(PhD student. Department of East Asian Cultures, Yeungnam University Graduate School)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store the undervalued status of the ‘Yinyangwuxing(陰陽五行) theory’ by correcting the history of its origins and development, which was distorted by Liang Qichao (梁啓超)’s 1923 paper “History of the Yinyangwuxing Theory”. In his treatise, Liang Qichao declares the Yinyangwuxing theory as a “2,000-year-old den of superstition” that needs to be overcome. As a result of these influences, the perception of the Yinyangwuxing theory as a superstition has been perpetuated, the origins of the theory have been set in the Zhanguo(戰國) period, making it impossible to construct a long-term history of its origins and development, and scholars have been unable to focus on uncovering the philosophy of ancient East Asian naturalism inherent in the Yinyangwuxing theory. In response to these problems, I propose that Liang Qichao’s 1923 criticism of the Yinyangwuxing theory was excessive, and that Liang Qichao’s criticism can be interpreted as a separation of the Yinyangwuxing theory from Confucianism, and that we can now redefine the origins and history of the theory from the perspective of the Yinyangjia(陰陽家). Yinyangwuxing theory can then be defined as a traditional East Asian thought and ancient naturalistic philosophy that was perfected in the Han(漢) dynasty after more than 1,200 years of development.

【Key words】 Yinyang(陰陽), Wuxing(五行), the theory of Yinyangwuxing, Liang Qichao, The history of Yinyangwuxing theory 

 

논문접수일: 2023.12.20. 논문심사기간: 2024.01.02.~2024.01.13. 게재확정일: 2024.01.15.

『철학·사상·문화』 제44호 2024.01. 

 

양계초의 「음양오행설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연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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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x.doi.org/10.33639/ptc.2024..44.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