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주의의 해체와 팔레스타인의 해방/최형묵.제3세대그리스도연구소
Ⅰ. 들어가는 말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름 때문에 사람을 이토록 골치 아프게 하 는 나라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1)
1) 모리드 바르구티,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자카리아 무함마드·오수연 엮음/오수연 옮김, 『팔레스 타인의 눈물』(서울: 아시아, 2006), 147.
2023년 10월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가 새삼 세계의 관심거리가 되었고, 최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재임과 더 불어 다시 그 해법의 향방에 귀추가 쏠리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지속 적으로 관심거리가 되고 있을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여러 운 동이 펼쳐지고 있다.
운동에는 많은 기독교인 또한 참여하고 있다. 그 러나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에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상당한 편견이 자리하고 있다.
성서에 등장하는 선민 이스라엘과 그 대적의 싸움으로 여기는 편견의 시선이다.
그 편견은 성서를 문자주의적으로 받아들이며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데서 비롯된다. 역사적 진실은 그 편견이 실로 터 무니없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이 글은 한국 교회 안에 만연한 그 편견을 극복하고 팔레스타인 민중 과의 연대를 지향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이스라엘의 팔 레스타인 점령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시온주의가 과연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전망하려는 것이다.
이 과제는 신학적이자 동시에 역사적 성찰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글은 먼저 제국주의 유산으로서 팔레스타인 문제의 성격을 다 룬다.
이어 시온주의를 형성한 유대 민족 귀환 신화와 기독교 신학의 공 모 관계를 다루며, 그 대안으로서 팔레스타인 해방을 지향하는 신학을 소개한다.
더불어 팔레스타인 저항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실천적 차원에 서 팔레스타인 해방의 전망을 모색한다.
Ⅱ. 제국주의 유산으로서 팔레스타인 문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전쟁이라 할 수 없는 참담한 사태가 지속되고 있다.
1948년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탄 생 기점부터 78년, 1917년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부터 그 기점 을 잡자면 100여 년 넘게 지속되고 있지만, 그 비극적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은 과연 어떨까?
많은 경우 종족 간 뿌리 깊은 갈등의 한 현상으로 바라보거나, 조금 더 나아간다면 아랍 민족주의와 시온주의의 대결 구도 로 바라보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중동’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문제에 해당하는 그 사태는 그 처럼 모호한 일반화로 해명할 수 없는2) 분명한 역사적 기원에서 비롯되 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종족적·종교적 갈등 양상이 겹쳐 있는 것도 사 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근본적인 갈등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 이다.3)
팔레스타인 문제는 1948년 시온주의를 따르는 유대인들의 팔레 스타인 강점이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부터 촉발되었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강점 배경에는 현대 서구 제국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배어 있다.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정착 운동을 불러일으 킨 시온주의 운동의 태동이 서구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이며 동시에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강점을 뒷받침하고 있는 배경 역시 서구 제국주 의라는 점에서 그렇다.
유대인과 아랍인, 이스라엘 정권과 아랍 정권들 사이의 관계 역시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제국주의의 규율하에 놓여있는 점도 팔레스타인 문제가 단순한 인종적 종교적 갈등이 아니라 는 것을 뜻한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자 하는 팔레 스타인 민중과 제국주의와의 숙명적 대결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4)
2) 에드워드 사이드/성일권 편역,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서울: 김영사, 2001), 229.
3) 하랄트 뮐러/이영희 옮김, 『문명의 공존』(서울: 푸른숲, 2000), 112.
4) 필립 마플릿/이정구 옮김, 『팔레스타인의 저항: 이스라엘과 제국주의에 맞서 해방은 어떻게 가능 한가』(서울: 책갈피, 2021) 참조.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은 언제나 제국주의가 만들어 놓은 구조 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을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해 명되어야 할 것이 시온주의 운동이다.
시온주의 운동은 19세기 유럽 자 본주의 위기의 산물이었다.
진 서유럽의 유대인들은 대개 자본주의적 체제에 동화되어 있었지만, 후진 동유럽에 자본주의가 침투함에 따라 봉 건 경제 구조에 의존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위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동 시에 자본주의의 위기가 전개되면서 발생한 대중의 분노를 무마하기 위 한 ‘희생양’으로서 공격 표적이 되었다.
그 반작용으로 형성된 유대 민족 주의의 완성 형태가 바로 시온주의였다.
시온주의 운동은 유대인의 독립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고, 그 귀착지로 선택된 곳이 성서에 나오는 ‘약속의 땅’이었다.
옛 조상들의 땅이라 여겨진 곳에 다시 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유대인들의 목표는 제국주의 열 강의 승인과 후원으로만 가능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시온주의 운동의 모 순적 성격이 배태된다.
유럽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시 작된 시온주의 운동이 반유대주의에 대한 해결책으로 구체화한 방안에는 바로 그 유럽 사회의 모든 특징이 들어 있었다.
보수적이고 배타적이며 식민주의적인 성격이었다. 각기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후원에 의존하던 시온주의 운동의 분파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팔레스타인을 지 배하던 영국의 선택에 자신들의 운명을 맡기게 된다. 밸푸어 선언으로 가시화된 제국의 후원 약속으로 독립 국가의 염원을 안은 유대인들은 팔 레스타인에 정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땅은 ‘임자 없는 땅’이 아니었 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만 이미 100만 명에 이르는 아랍인들이 있었다. 또 다른 독립 국가 건설 후원 약속을 받고 있던 아랍인들에게 유대인의 이주는 분쟁의 화근이었다.
게다가 현지 아랍인들과는 구별되는 경제 구 조를 고수한 유대인들의 정착촌은 처음부터 배타적이고 적대적이었다.
영국은 공식적으로는 ‘공명정대한’ 입장을 취한다고 했지만, 시온주의에 기울어 사실상 유대인과 아랍인을 차별하였다.
따라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고양된 아랍 민족주의 운동과 시온주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936년 아랍인의 대규모 항쟁이 실패로 끝난 후 피폐해진 아랍 사회 를 대체하는 세력으로 유대인 공동체는 오히려 급성장하게 된다.
수에즈 운하에 대한 확실한 통제와 걸프 유전 지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영 국의 정책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소요를 무마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세력 의 분리 공존을 표방했지만, 점차 강력해진 유대인 세력 편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퇴조 와 더불어 시온주의 운동은 새로운 파트너를 찾게 된다. 새롭게 영향력 을 확보한 미국 제국주의가 그 파트너였다.
유럽 제국주의 열강이 물러간 자리에 미국은 기민하게 그 영향력을 확대했다.
아라비아반도에서의 석유 발견은 미국이 중동에 대한 지배력 을 확대해야 할 충분한 이유였다.
게다가 제2차 세계 대전 후 새롭게 형 성된 냉전 체제는 미국에게 소련을 배제하고 중동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 운동은 중동에 새롭게 관심을 기울인 미국에 손을 내밀었다.
여기에 제2차 세계 대전 중 급성장한 미국 내 시온주의 운동의 영향력 또한 영국을 대신한 미국을 강력한 파트너로 삼게 되는 한 요인이었다.
초 친유대인 정책 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아랍 세계에서의 역효과를 염려하여 미온적이었 던 미국은 안정적인 동맹국이 없는 중동에서 친서방 국가 건설의 필요성 을 잘 알고 있었던 시온주의 운동의 요구에 결탁한 것이다.
미국과 이스 라엘 사이 흔들리지 않는 협력 체계의 기틀은 이렇게 마련되었다.
47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의 통과와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은, 시온주의와 제국주의의 커넥션에 맞서는 팔레스타인 및 아랍 민 중들에게 중대한 기점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인들 은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교도를 통합하는 독립 국가를 주장하였고, 이 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려는 원칙을 폐기 할 것과 독립국 정부가 이민 정책을 결정할 때까지 시온주의자들의 이주 중단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분할안과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 은 그와 같은 요구를 가볍게 묵살해 버린 결과였다.
그 결과 험난하고 지 루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Ⅲ. 시온주의 신학과 팔레스타인 해방신학
1. 유대 민족 귀환 신화와 기독교 신학의 공모
팔레스타인 문제가 제국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또한 현재 진행 형으로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정착 식민 운동’5)이라는 점에서, 그 해법 또한 그 역사적 맥락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예컨대 2023년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벌어진 현재의 사태만을 문제시하는 시선으 로는 그 해법을 찾을 수 없다. 엄연히 원주민이 거주하던 땅에 ‘정착 식민 지’로서 이스라엘의 건국과 이로부터 이어지는 참혹한 폭력적 지배의 현 실을 고려할 때 그 적절한 해법을 찾을 수 있다.
그야말로 일관된 ‘제거’ 와 ‘인간성 말살’의 논리6)로 점철된 점령 정책을 간과하고서는 적절한 해 법을 찾을 수 없다. 이를 신학적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그 부당한 지배의 현실을 정당화 하는 데 신학이 어떻게 기여해 왔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뜻한 다. 신학적 접근을 시도할 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이스라엘의 팔레스 타인 점령과 식민화를 정당화하는 ‘시온주의’의 문제이다. 시온주의는 기 원후 70년 로마에 의한 유대 국가 멸망 이후 흩어진 유대인들이 조상들 로부터 물려받은 ‘약속의 땅’에 귀환하여 자신들만의 민족국가를 형성하 는 것을 요체로 한다. 오늘날 시온주의는 단순히 종교적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 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정당화하는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성격을 분 명히 하고 있다. 일종의 정치적 운동으로서 시온주의 운동이 처음부터 유대인들 사이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굳이 말해 그 5) 일란 파페/백선 옮김,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유대인 역사학자의 통렬한 이스라엘 비판 서』(고양: 틈새책방, 2024), 24. 6) Ibid., 113. 214 神學思想 208집 · 2025 봄 원형이라 할 만한 ‘시온에 대한 열망’은 백성의 거듭남을 지향하는 종교 적 이상을 함축하는 것이었다.7)
그것이 ‘약속의 땅’으로의 실제적 귀환을 지향하는 정치적 운동으로 제창되었을 때 유대교의 많은 분파들은 본래 의 이상을 훼손하는 것으로 보았고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어떻게 강력한 정치적 동기를 지닌 이념으로 부상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사실상 시온주의의 선구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의 경험이 말해 주듯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 박해 경험 때문이었다.
헤르츨은 처음에는 정치적 시온주의에 무관심하였으나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 (Dreyfus Affair)을 계기로 유대인만의 조국을 바라는 시온주의로 선회하 였고 그 선구가 되었다.
이처럼 시온주의 운동은 유럽 사회의 유대인 박 해라는 강력한 외적 동인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시온주의의 모체가 유대인들의 그것에 앞선 기독교의 시온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천년왕국8) 을 믿는 이들은 그 성취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이 필수적이라고 믿었 다.
7) 이영미, “시온의 은유로 그려진 제1이사야의 이상공동체의 비전,” 「신학사상」 106 (1999/가을), 135-152 참조.
8) 천년왕국의 기본 개념과 그 요체에 대해서는 신동욱, “천년왕국(계 20:4-6)의 정치적 해석의 가능 성,” 「신학사상」 174 (2016/가을), 77-111 참조.
마침내 메시아의 재림으로 심판이 이뤄지기 이전 유대인은 예루살렘 으로 귀환해야 했다.
그것은 유대인을 옹호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고, 그 믿음 자체로 반유대주의의 표현이었다.
기독교 세계 안에서 기독교인의 구원을 증명하는 반증으로서 남아 있던 유대인은 끝 내 기독교 세계 안에 통합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침내 유대인이 천년왕 국 도래와 더불어 이뤄질 심판 앞에 서게 되는 것을 뜻하였다.
귀환한 유 대인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할 것인지 완고하게 유대인으로 남아 심판을 받게 될 것인지는 그들의 몫일 뿐이었다.
유대인의 귀환은 유럽 열강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도 부합했다.
“나 는 유대인이 동화될 수 없으며, 어디에 있든 항상 국가 안에 국가를 세우리라 생각한다. 내 생각에는 그들이 쫓겨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간단하다.”
18세기 후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육군 원수였던 샤를 조제프 라모랄(Charles-Joseph Lamoral de Lign)의 말이다.
이는 시온주 의를 형성한 사상이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되어 왔던 반유대주의와 분명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9)
9) 일란 파페/백선 옮김,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55.
그것은 유럽 사회 편에 서 볼 때 유대인 추방의 정당한 근거였다.
유럽 열강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안이기도 했다. 특별히 중동 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던 영국의 입장에서 팔레스타인에 세워질 유대 인 국가는 오스만 튀르크와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도 있 었다.
마침내 1917년 유대인 국가의 지원을 약속하는 밸푸어 선언이 나 오게 된 배경이다.
그와 같은 일련의 맥락 가운데서 애초 반유대주의와 연결된 시온주 의 사상은 이제 거꾸로 유대인의 자기 결속의 이념으로 변화되었다.
더 불어 명확하게 실현 가능한 정치적 운동으로 변화하였다.
나치 독일에 의한 반유대주의가 극에 달했을 때 그 운동은 더욱 강력한 동인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귀환한 땅이 ‘임자 없는 땅’이 아니라 는 데 있었다.
현지 원주민과의 필연적인 갈등이 예견되는 상황이었지 만, 유대인의 귀환이 결정된 이래 그 문제는 진지하게 다뤄진 적이 없다.
적어도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 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주민에 의한 정착 식민화의 시도는 포기된 적 이 없다.
그것이 오늘의 비극을 낳았다.
시온주의를 배태하고 자극한 기독교 신학의 공모는 이스라엘 국가가 형성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성서의 서사는 의심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그 전제하에 이뤄진 성서 해석은 유대인의 귀환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유럽 사회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죄의식 탓이었다.
유럽과 북미의 주류 신학계에서 이를 의심하는 해석은 쉽사리수용될 수 없었다.
이를 더욱 확고히 입증하는 방편으로 성서 고고학이 동원되었다. 성서의 서사를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야심찬 시도 였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국가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고고학적 발굴이 시도될수록 성서의 서사와 고고학적 증거 사이의 일치보다는 괴리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오늘 날 ‘성서 고고학’(Biblical Archeology)보다는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 (Syro-Palestinian Archeology) 또는 ‘레반트 고고학’(Levantine Archeology) 이라는 개념이 널리 통용되는 것도 그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10)
그 지역 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는 성서의 서사와 괴리되어 있다는 것을 더욱 확 연하게 드러내 주었다.
예컨대 장엄하게 묘사된 출애굽 사건의 실체는 모호했고,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제국으로서 유대 국가 또한 그 존재가 의심받게 되었다.
성서가 서술하고 있는 고대 왕국 시대부터 유 일신 신앙과 유대인의 정체성이 확고하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전제도 의 심받게 되었다.11)
이로부터 1980년대 이래 일군의 ‘신역사학자들’(New Historians)이 등 장하게 되었고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12)
10) William G. Dever, “Syro-Palestinian and Biblical Archaeology: Into the Next Millennium,” William G. Dever and Seymour (Sy) Gitin (ed.), Symbiosis, Symbolism, and the Power of the Past: Canaan, Ancient Israel, and Their Neighbors, from the Late Bronze Age through Roman Palaestina (Penn State University Press, 2003) 참조.
11) 성서에 기술된 것과 같은 출애굽 사건이나 초기 다윗과 솔로몬 시대 국가의 면모도 고고학적으 로 입증하기 어렵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스라엘 핑컬스타인·닐 애셔 실버먼/오성환 옮김, 『성 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서울: 까치, 2002), 65 이하, 153 이하 등 참조.
12) 우리말로 번역된 그 대표적 저작으로 Israel Finkelstein &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Archaeology’s New Vision of Ancient Israel and the Origin of Its Sacred Texts, New York: Free Press, 2001 (이스라엘 핑컬스타인·닐 애셔 실버먼/오성환 옮김,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서 울: 까치, 2002); Keith W. Whitelam, The Invention of Ancient Israel: The Silencing of Palestinian Histor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6 (키스 W. 휘틀럼/김문호 옮김,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침묵당한 팔레스타인의 역사』, 서울: 이산, 2003); Shlomo Sand, The Invention of Jewish People, London and New York: Verso, 2009 (슐로모 산드/김승완 옮김, 『만들어진 유대인』, 고양: 사월 의책, 2022); Ilan Pappe, Ten Myth About Israel, New York: Verso Books, 2017 (일란 파페/백선 옮김,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고양: 틈새책방, 2024) 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역사학 파의 연구에 기초하여 우리말로 저술된 저작으로 정의길, 『유대인, 발명된 신화: 기독교 세계가 만들고, 시오니즘이 완성한 차별과 배제의 역사』(서울: 한겨레출판, 2022)도 주목할 만하다.
그 연구 결과들은 이스라엘 역사가 성서에 기록된 것과 곧바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내고 있 다.
또한 유대인 귀환의 근거로서 고대 유대인의 정체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한 유대 국가 멸망 후 흩어졌던 유대인 들이 다시 고토로 되돌아온다는 논리는 흩어진 유대인들의 종족적·민족 적 정체성을 전제로 하며, 더불어 그들이 떠난 고토에 유대인들이 사실 상 남아 있지 않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신역사학파는 유럽 등으로 흩어 진 유대인이 종족적·민족적 집단이라기보다는 개종을 통해 확산한 종교 집단으로 이해한다.13)
이들을 민족 집단으로 볼 수 있다면 유럽 사회에서 민족주의 열풍과 더불어 일어난 시온주의를 통해 비로소 민족의식을 형 성한 그 시점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대 국가 멸망 당시 팔레스 타인에는 유대인들이 아예 사라진 것일까?
유대 국가 멸망 당시 대다수 의 유대인은 본토에 남아 역사의 부침 속에서 변모하였다.
유대교인, 기 독교인, 무슬림 등 유일신교를 믿는 몇 집단으로 분화하였고 이슬람 제 국 지배 이래 다수가 무슬림이 되기는 했지만, 그들이 원주민의 후예라 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굳이 말하자면 팔레스타인인들이야말로 오 히려 고대 유대인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 이해에 따르면 귀 환을 정당화하는 믿음 자체가 일종의 신화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신화에 근거한 믿음과 정책으로 팔레스타인 사 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제거’와 ‘인간성 말살’의 논리로 규정지을 수밖 에 없는 국가적 정책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더욱이 이 스라엘은 건국 70주년을 맞이한 2018년 ‘유대인의 민족국가’를 표방하는 기본법을 채택하였다.
기본법의 하나로 제정된 ‘유대 민족국가 기본법’ (Basic Law on the Jewish Nation-State)은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역사 적 조국이며, 그들은 배타적 자결권을 지닌다”고 규정했다.14)
13) 슐로모 산드/김승완 옮김, 『만들어진 유대인』(고양: 사월의책, 2022).
14) 정의길, 『유대인, 발명된 신화: 기독교 세계가 만들고, 시오니즘이 완성한 차별과 배제의 역사』(서 울: 한겨레출판, 2022), 4.
아예 인종 주의 국가임을 스스로 표방한 것이다.
그 경로가 특이하기는 하지만 이미 형성된 유대 민족의 자결권을 인 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원주민의 자결권을 부정하는 기초 위에 성립되 는 것이라면 과연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 현실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일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인가?
가당치 않은 이야기이다.
2. 시온주의 신학의 해체와 팔레스타인 해방신학
‘신역사학파’는 대개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 학자들로, 이들 은 기존의 신화를 해체하고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자 신들이 속한 사회와 국가에 대한 비판의식과 더불어 책임의식을 밑바탕 으로 하고 있다.
그들의 연구 성과는 그간 강고하게 자리 잡은 성서학과 신학의 중요한 전제들을 재검토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고 있다.
기독교 신학이 그 연구 성과를 수용하여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 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그것은 성서를 보편적 구원의 전망에 대한 생생한 증언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배타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 는 도구로 오용되도록 방치할 것이냐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15)
15) 학문적 연구 성과를 당대의 실천적 문제의식에서 재조명하고 신학을 새롭게 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과제이다. 그에 관한 중요한 통찰을 일깨워 주는 글로는 Dorothee Sölle/이강실 옮김, “평 화운동을 위한 성서 사용 방법,” 「신학사상」 53 (1986/여름), 325-346.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를 기초로 하여 성서의 서사를 재조명하고 있 는 이스라엘 핑컬스타인(Israel Finkelstein)과 닐 애셔 실버먼(Neil Asher Silberman)은 고고학적 발굴 결과와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갖는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의 진실성은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벽이 나팔 소리에 무너 지고 다윗이 팔맷돌로 골리앗을 죽인 것 등의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의 실존을 뒷받침하는 충실한 역사적 ‘증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 서사시의 위력은 인간의 해방, 압제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 사 회적 평등의 추구 등 시공을 초월한 여러 가지 주제를 설득력이 강하 고 명확하게 표현한 데서 우러나온다. 성경은 모든 인간 사회가 생존 하는 데 필요한 공동의 기원, 체험, 운명의식에 대한 뿌리 깊은 의식 을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16)
16) 이스라엘 핑컬스타인 · 닐 애셔 실버먼/오성환 옮김,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서울: 까치, 2002), 368.
팔레스타인 현지에서 팔레스타인 해방의 신학을 추구하는 사빌에큐 메니칼해방신학센터(Sabeel Ecumenical Liberation Theology Center)를 이 끄는 나임 아텍(Naim Ateek)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믿는 신이 타자를 포용하고 나만큼이나 그들을 돌보는 신이 아 니라면 이 신은 우리 모두를 창조하고 사랑하시는 우주의 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각 종교가 각자의 신학적 근거에서 그 안의 폭력과 테러를 비판하고 신이 그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거부할 수 없다면, 우리의 신에 대한 이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정의, 평화, 사랑, 자비, 긍휼의 하나 님이며, 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강 력한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우리가 이 일에 성공하지 못한 다면 우리는 파멸할 것이며, 우리의 종교는 하나님이나 우리 주변의 이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낡은 신학 체계에 계속 갇혀 있을 것이 며, 우리의 종교는 오늘날 우리 세계의 고질적인 문제 해결에 가치 있는 기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참되고 진실한 신은 모두를 위한 정 의와 평화의 신이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 불의가 행해지는 것을 기뻐할 수가 없다.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 또한 기뻐할 리가 없다. 억압받는 사람은 자유로워져야 하고, 지배의 멍에를 지고 사는 사람은 해방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억압받는 팔레 스타인 사람들도 포함된다.”17)
망명자로 더블린 트리니티 대학(Trinity College Dublin)에서 가르치고 있는 주드 랄 페르난도(Jude Lal Fernando)는 유대-기독교 승리주의 제국 신학으로서 시온주의 신학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시온주의가 오랜 반유대주의의 심화에 대한 대응으로 생겨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식민지화된 유대교의 한 형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반제국주의적 저항이 아닌 반작용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이 반작용의 문법은 유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문법은 근대 제국주 의의 초석인 서구 국민국가 형성의 핵심인 유럽의 식민지성에 의해 구성된다. 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신학적 상상력은 세계 정복을 정당화하고 이를 영적 선, 하나님의 뜻으로 제시하는 백인 기독교 승 리주의와 우월주의이다. 하지만 어떤 하나님일까? 현대 시온주의와 성서 남용에 대한 비판은 유럽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야 하 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다시 지배적인 서구 또는 제국주의 기독교 신학을 폭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8)
17) 나임 아텍/신승민 옮김, “진정한 종교의 시험대로서의 해방신학,” 「기사연 도시에」 1 (2024/6), 36-49.
18) Jude Lal Fernando, “The War on Gaza and the Bible: Has God Abandoned the Palestinians?,” 「2024 기사연 평화원탁회의 발제문」(2024/11).
더불어 그 대안으로 “위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민중들과 함께하며 힘을 주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제국 ··· 밖에서 해방을 추구하는 가자로부터 출발하는 신학적 상상력은 팔레스타인의 국경을 넘어 제국의 다른 희생자 공동체와 수평적 연대를 지속할 수 있는 영성으로 퍼져 나가야 한다”19)는 것을 강조한다.
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한 이상과 같은 역사적 탐구와 신학적 성찰 은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에 근거해 친이스라엘 편향을 강하게 띠 며 팔레스타인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에 커다란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이래 형성된 제국 신학에서 기원하는 지배의 신학을 거부하고 민중의 자리로 그 시좌를 옮긴 민중신학이 세계 적 지평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중요한 주제를 환기해 주고 있다.
시온 주의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해체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호소에 연대하는 신학적 과제이다.
는 날로 우경화하는 한국 교회20)와 신학에 맞서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신학으로서도 회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19) Ibid.
20) 양명수·이진구·정재현·강원돈, “한국 개신교 교회에 대한 비판담론 분석,” 「신학사상」 165 (2014/ 여름), 9-54.
Ⅳ. 팔레스타인의 저항과 해방의 전망
1. 팔레스타인 저항의 역사
이스라엘은 유대인 국가를 표방하며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일방적 지 배 정책을 강화하고 있고, 그에 맞서는 팔레스타인은 ‘요르단강에서 지중 해까지’ 해방의 목표를 내걸며 대결하고 있다.
결코 대등한 대결이라 할 수 없는 일방적 지배와 저항의 점철 과정이다.
그 일방적 지배와 저항의 구도가 바뀌어 그 땅의 사람들이 대등한 관계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미래 전망은 가능할까?
전망을 모색하는 것은 현재의 대결 구도와 정 세만을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일련의 과정을 주목하는 것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역사가 라시드 할리디(Rashid Khalidi)는 그의 저작 『팔 레스타인 100년의 전쟁: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21) 을 통하여 그 주요 국면을 여섯 시기로 나누고 있다.
21) 라시드 할리디/유강은 옮김, 『팔레스타인 100년의 전쟁: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 2017』(파주: 열린책들, 2021).
정착민 식민주의 국 가로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향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관점에서 각 국면을 ‘선전 포고’로 규정하고,
첫 번째 1917-1939년,
두 번째 1947-1948년,
세 번째 1967년,
네 번째 1982년,
다섯 번째 1987-1995 년,
여섯 번째 2000-2014년으로 그 국면을 나누고 있다.
그가 미처 다 루지 못한 현재의 상황을 포함한다면 일곱 번째로 2023년 하마스와 이 스라엘의 대결 국면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첫 번째 국면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이 시온주의자들에게 팔레 스타인에 시온주의 국가를 건설하도록 돕겠다고 약속한 밸푸어 선언 (1917년) 이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이주하기 시작하고, 이어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나치의 박해를 피해 유대인들이 대거 팔레스타인에 이 주한 국면이다.
이 국면에서는 사실상 준국가 체제를 이룬 유대인들이 제국주의 국가의 후원하에 팔레스타인에 이주 정착하면서 팔레스타인인 들과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1936년 팔레스타인인들은 대대적인 저항을 시도하였지만 좌절하였고, 나치의 박해가 강화되는 가운데 유대인들의 이주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두 번째 국면은, 제국주의 국가 영국이 그 영향력이 쇠퇴하여 팔레스 타인에 대한 통치권을 국제연합(UN)에 넘기고 국제연합 결의안 제181호 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탄생한 국면이다.
국제연합은 그 결의안을 통하여 팔레스타인을 양분하였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인구는 1/3이었 으나 그 땅의 55%를 할양받았다.
애초 분할안에 동의하지 않은 팔레스타 인인의 입장에서는 그 결의안을 인정할 수 없었다.
국제연합의 결의와 서구 세력의 후원에 고무된 시온주의 세력은 팔레스타인인 85만 명을 학 살·추방하고 이스라엘을 건국하였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그것은 ‘재앙 (나크바)’이었다.
같은 시기 요르단과 이집트는 팔레스타인 땅 일부를 점 령하였고, 예루살렘은 분할되어 동편은 요르단이 서편은 이스라엘이 차 지하였다.
이 시기 1959년에 민족주의 성향의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 ‘파 타’가 결성되었고, 파타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의 중추 세력이 되어 1960-1970년대 팔레스타인 저항 을 이끌었다. 세 번째 국면은, 1967년 이스라엘이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기습 공격해 승리하고, 1948년에 강탈하지 못한 나머지 땅을 차지한 국면이 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비견’으로서 자신 의 진가를 입증하였고, 특히 미국과의 관계 또한 더욱 밀착하게 되었다.
이로써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더욱 가 혹한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팔레스타인의 민족의 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 분위기 가운데서 1968년 이 스라엘이 요르단 카라메에서 파타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게릴라에 굴욕적 인 패배를 당한 이후 파타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한편 1978년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캠프 데이 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을 맺었고, 이로써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아랍 국가들 간 합의가 깨졌다.
덕분에 이집트는 미국의 많은 원조를 받게 되었다.
네 번째 국면은,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여 팔레스타인 난민 수천 명을 학살한 사건으로 펼쳐진 국면이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 구의 군대가 요르단에서 철수하여 레바논에 주둔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 를 격퇴하려는 의도로 침공하였던 이스라엘 군대는 팔레스타인 군대가 아랍의 여러 나라로 이동한 후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비무장 난민들을 학살하는 사건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이를 방조 지원하였다.
사실상 미 국의 승인하에 이뤄진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22)
22) Ibid., 209.
그 전쟁의 역설적 효과는 오늘날까지 지속될 만큼 큰 영향 을 끼쳤다.
레바논에서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대신하여 ‘헤즈볼라’가 부상하였고 내전이 격화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포위 공격으로 오히려 팔레스타인의 대의가 국제적 공감을 얻게 되었다.
국제적 여론에 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이스라엘이 선전하는 것과 정반대로 역전되 었다.
이스라엘 사회 내부의 비판적 여론도 높아져 ‘피스 나우’(peace now) 운동 등이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의 무게중심이 이웃 아랍 나라들로부터 팔레스타인 내부로 옮 겨갔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국면은, 1987년 12월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에 저항하 는 대중 항쟁이 일어난 국면이다.
‘인티파다’로 일컬어지는 대중적 항쟁 은 1982년 전쟁의 역설적 효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바논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약화되었지만,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대중들의 저항은 거세졌다.
가자 지구 난민촌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팔 레스타인인 4명이 죽음에 이른 사태로부터 촉발된 1차 인티파다는 광범 위하게 일어났고 1993년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이집트, 튀르키예, 쿠웨이트, 시리아, 튀니지 등에서 연대 시위가 확산되었고, ‘하마스’가 결 성되어 주요한 저항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인티파다는 태어나면서부터 점령지의 현실밖에는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를 주축으로 한 자생적 저 항 운동으로서 시위와 더불어 파업과 불매 운동, 납세 거부 운동 등에서 부터 여러 창의적인 형태의 시민 불복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술을 활 용했다.
덕분에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고무되었고, 마침내 1988년 독 립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중적 저항으로 이스라엘이 군사적 점 령으로만 팔레스타인인들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해졌다.
이러 한 조건은 두 국가의 공존 가능성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졌다.
결국 1993 년 미국의 개입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가 오슬로 협정 (Oslo Accords)을 체결하고 팔레스타인 당국(PNA 또는 PA: 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 협정은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과 팔레스타인의 최종 지위 등 핵심 문제는 비켜갔다.
1995년 후속 협정 으로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 대한 잠정 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그 오슬 로 협정의 실체는 더욱 분명해졌다.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은 누더기처럼 나뉘어졌고(A·B·C 지역 분할)23) 장벽과 울타리로 기존에 보장되었던 이동 로마저도 단절되어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고통이 가중되었다.
오슬로 협 정은 사실상 팔레스 타인의 투항을 강요 한 셈이었다.
이전까 지는 이스라엘의 일 방적 공세 양상이었 다면 이번에는 팔레 스타인 지도자들이 스스로 투항한 양상 이었다.24)
23) 18%에 해당하는 A 지역은 팔레스타인 자치 당국이 행정·치안권을 보유하고, 22%에 해당하는 B 지역은 팔레스타인 자치 당국이 행정권을, 이스라엘이 치안권을 보유하고(면적으로는 두 지역이 40%이지만, 인구로는 87%), 나머지 60%에 해당하는 C 지역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관할 하에 놓였 다. Ibid., 292. 팔레스타인 중앙 통계국에 따르면 2021년 현재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 1,400만 명 가운데 530만 명은 팔레스타인 영토 안(서안 지구와 동예루살렘 320만 명, 가자 지구 210만 명)에 살고 있으며 170만 명은 이스라엘에, 그밖에 해외에 700만 명이 살고 있다. 이스라엘 중앙 통계 국에 따르면 2021년 말 기준 이스라엘의 인구는 서안 지구에 거주하는 이스라엘인을 포함하면 944만 9,000명으로 집계되었다. 이스라엘에 거주 중인 이스라엘 인구는 74%가 유대인이고 21% 가 아랍인이며, 약 5%는 유대인도 아랍인도 아닌 인구이다.
24) 라시드 할리디/유강은 옮김, 『팔레스타인 100년의 전쟁』, 297.
여섯 번째 국면은, 오슬로 협정의 효과로 팔레스타인의 식민화 과정 이 오히려 강화되고 독립 국가 건설의 기대가 실현되지 않은 채 팔레스 타인 자치 정부마저 사실상 양분되어 갈등을 겪고 있는 국면이다.
오슬 로 협정의 결과로 분리 정책은 가속화하였고, 이로 인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생활상 고통 또한 가중되었으며25) 경제적 차원에서 국민 총생산 도 현저히 감소하였다.26)
2000년 캠프 데이비드 정상 회담도 실패한 데 다가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Ariel Sharon)이 성전산을 방문한 사건 을 계기로 2차 인티파다가 분출하였다.
그 와중에 2004년 아라파트 (Yasser Arafat)가 죽고 팔레스타인에는 압바스(Mahmoud Abbas) 정권이 들어섰으며, 2006년 총선이 있었다.
총선은 예상을 뒤엎고 하마스의 압 승(132석 가운데 하마스 74, 파타 45)으로 귀결되었다.27)
25)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가 단절되었고, 서안 지구는 다시 예루살렘과 단절되었다. 팔레스타인 자 치 지구 안에서도 이스라엘의 정착촌을 연결하는 도로망으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자유로운 이 동이 제약을 받았다. 1991년까지는 다수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별도의 허가 없이 이스라엘에서 일을 할 수 있었으나, 그마저 차단되었다. Ibid., 300.
26) 1995년부터 2000년까지 팔레스타인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은 1,380달러에 머물렀으나, 2000 년부터 2004년까지는 340달러 이상 감소했고, 이후에는 훨씬 더 감소했다. 1995년 기준으로 하 면 팔레스타인의 1인당 국내 총생산은 1,692달러, 이스라엘은 15,600달러였다. UNCTAD, “Report on UNCTAD’s Assistance to the Palestinian People,” TD/B/52/2, July 21, p.6 〈표1〉; ESCWA, Impact of Peace Process on Selected Sectors: Textiles and Electronics Industries (New York: United Nations, 1997), p.7; Ibid., 419; 필립 마플릿/이정구 옮김, 『팔레스타인의 저항』, 333.
27) 라시드 할리디/유강은 옮김, 『팔레스타인 100년의 전쟁』, 315.
당연히 민주적 절 차에 따라 하마스에게 팔레스타인의 합법적인 정부 구성 권한이 주어져 야 했다.
그러나 애초 분열을 노리고 하마스를 지원했던 이스라엘은 물 론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팔레스타인은 기존 의 파타를 중심으로 하는 서안 지구의 자치 정부와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 지구로 양분되었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를 봉쇄하고 하마스를 격 멸하려는 공격을 지속적으로 펼쳤으나, 오히려 하마스에 대한 지지와 더 불어 저항의 강도는 높아졌다.
그러나 하마스의 지도를 받게 된 인티파 다 역시 이전 1차 때와는 달리 좌절을 겪어야 했다.
자살 폭탄 공격 등 폭 력성을 띠면서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에 대한 내부 비판자들이 되돌아서 게 되는 효과와 더불어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 역시 약 화하는 효과가 발생하게 되었다.
파타를 중심으로 하는 자치 정부의 외 교 노선도, 하마스를 중심으로 하는 무장 투쟁 방식도 이스라엘의 지배 현상을 변경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형국에 인티파다의 정당 성마저 훼손되는 사태 가운데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야만적 불균형’28) 상태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28) Ibid., 326.
그 일련의 과정 끝에 2018년 7 월 이스라엘 의회는 유대인의 배타적 국가를 명시한 ‘민족국가법’을 기본 법 가운데 하나로 제정하였다.
이후 상황은 여섯 번째 국면의 연속일지 그와는 다른 국면일지 재고 의 여지가 있으나, 2020년 이후 이른바 ‘아브라함 협정’으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의 수교가 이뤄지는 가운데 이에 고립감을 느낀 하마스 가 2023년 ‘알아크사 홍수 작전’을 개시함으로써 펼쳐지고 있는 현재의 국면이다.
이스라엘은 2020년 9월 아랍 에미리트 연합국, 바레인과 수 교하였고, 이후 모로코, 오만, 수단과 수교하였으며, 2023년 사우디아라 비아와 수교를 맺을 예정이었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후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감행하여 사실상 인종 학살을 저지르고 있으며, 더불어 2024년 7월에는 헤즈볼라를 제거 한다는 명분으로 레바논 남부를 침공하였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문제는 다시 세계 여론의 관심을 끌고 있지만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불투명하다.
최근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재임한 후 해법을 제시하였지 만,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방식이기에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2. 팔레스타인 해방의 전망
이상과 같이 팔레스타인 저항의 역사를 환기하는 것은 현재의 ‘야만 적인 불균형’을 넘어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이 루는 방안이 무엇인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각 국면마다 적절한 전략이 어떤 것이어야 했는지 따져볼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을 되돌리는 수는 없기에 누적된 역사적 과정으로서 현재의 상황을 주목하며, 그 해법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어느 편에서든 배타적 지배와 말살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동등한 관계 안에서의 평화로운 공존 이 유일한 해법이다.
그러나 100여 년의 역사에서 그 공존의 정신은 사 실상 심각하게 왜곡되어 왔다.
이스라엘의 편에서 그 정신은 사실상 부 정되어 왔다.
오슬로 협정은 외견상 상호 존재의 인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사실상 근본적 해결보다는 현재의 ‘야만적인 불균형’ 상태를 고착 화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그 점에서 대등한 관계는커녕 사실상 팔레 스타인의 투항을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외교적 해법이 신뢰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두 국가 방안’이 근본적 해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현재 상황 이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전쟁 또한 근본적인 해법이 되지 못하고 있 다.
특정한 국면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수단이 되기는 하지만 오히려 팔 레스타인 민중의 고통을 강요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해법은 아래로부터의 동력, 곧 민중들의 저항이다.
인 티파다의 효과가 항상 긍정적 결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그간 모 든 현상 변화의 국면마다 그 저항이 근본적 동인이 되어 왔다.
그 동력이 그나마 자치 정부의 수립과 외교적 과정을 이끌어내는 기반이 되어 왔 다.
문제는 그 동력이 과연 정착 식민주의이자 인종주의 국가로서 이스 라엘의 지배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그간 팔레스 타인 민중을 대변해 온 정치 세력으로서 파타와 하마스의 한계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이스라엘과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는 팔레스타인의 경제 구조와 노동 인구 구성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파타는 물론 하마스 역시 팔레스타인인 자본가와 중간 계급 일부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29)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수립 이후에 그 내부 의 계급 갈등 양상은 더욱 분명해졌다.30)
29) Joseph Choonara, “두 번째 나크바?,” 이원웅·앤 알렉산더 외, 『이스라엘의 인종 청소 실패와 팔 레스타인 해방의 전망』(서울: 책갈피, 2024), 74. 30) Ibid., 66.
포퓰리즘과 권위주의를 결합한 통치 방식 역시 두 세력은 닮았다.31)
더욱 결정적인 난관은 팔레스타인인 들이 이스라엘의 경제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군 수, 하이테크 부문과 같은 이스라엘 경제 핵심 부문에서 팔레스타인인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2021년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벌어진 팔레스타 인 노동자들의 파업은 건설과 교통 부문 일부에 타격을 가하는 데 그치 고 이스라엘 국가와 경제에 큰 타격을 가할 수 없었다.
이는 과거 남아공 이 다수의 흑인 노동자를 기반으로 자본을 축적한 만큼 흑인 노동자들의 저항이 인종주의 체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양상과는 다른 점이다.32)
그러나 그것이 팔레스타인 민중 저항의 동력을 부정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중요한 국면 전환의 계기는 항상 아래로부터의 저항에서 비 롯되었다.
또한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은 항상 주변 아랍 국가 민중들 을 고무하는 효과를 지녔고, 동시에 아랍 지역 민중들의 저항이 일어났 을 때 팔레스타인 문제는 늘 핵심 구호로 등장하였다.
예컨대 이집트에 서는 2000년 2차 인티파다가 일어났을 때 민주주의 권리를 요구하는 운 동들이 펼쳐졌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와 지원 활동이 이뤄졌다.
아 랍 국가들 대부분이 왕정이거나 권위주의 국가 체제를 형성하는 가운데 서구 제국주의 세력과 유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는 아랍 혁명을 관통하는 핵심 쟁점이 되고 있다.
이는 2011-2013 년 아랍 혁명 과정에서도 입증되었다.33)
31) Ibid., 75. 32) 이원웅, “팔레스타인 해방은 아랍 혁명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원웅·앤 알렉산더 외, 『이스라엘 의 인종 청소 실패와 팔레스타인 해방의 전망』, 226. 33) Ibid., 231-232.
그 점에서 필립 마플렛(Philip Marfleet)의 다음과 견해는 매우 시사적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역사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다고 주장했다. 비록 팔레스타인 문제가 베이루트의 난민촌이나 서 안의 마을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지라도, 그 해결책은 다른 곳에있다. 변화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은 무엇보다 이집트의 산업 도시들, 즉 아랍 자본주의의 중심지에 존재한다. 이집트의 대중 운동 은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대결하는 데 진정 한 이해관계를 가진 하나의 계급이 집권하도록 할 수 있다. 노동자들 이 공장을 장악하고 농민들이 토지를 점거하게 되면, 아랍 자본주의 와 시온주의 국가 모두에 대한 대안이 처음으로 나타날 수 있다.”34)
팔레스타인 민중의 주도성을 부정하는 견해라기보다는 오늘의 팔레 스타인 문제를 만들어낸 제국주의 질서의 균열을 냄으로써 그 해법을 찾 을 수 있다는 견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더욱 광범위한 국제적 연대의 중요성 또한 간과할 수 없 다.
국제적 연대와 지원은 팔레스타인의 시민 사회와 노동조합이 호소하 는 BDS(Boycott, Divestment, Sanctions; 보이콧, 투자 철회, 제재) 운동35)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운동을 호소하는 팔레스타인의 시민 사회와 노 동조합은 기존의 민족주의 조류 바깥에 있으며, 팔레스타인 자치 당국에 대한 충성파가 지배적이지도 않다.36)
34) 필립 마플릿/이정구 옮김, 『팔레스타인의 저항』, 314.
35) 이스라엘을 향한 BDS 운동은 2005년 팔레스타인인들의 사회 운동들과 노동조합들의 선언으로 시작되었다. 그 선언은 팔레스타인 인민의 세 핵심 요소, 곧 팔레스타인인 난민, 점령지(서안 지 구·가자 지구·동예루살렘)에 사는 팔레스타인인,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진 팔레스타인인의 이름으 로 선포되었다. 노동자 연대, “[기획 연재] 팔레스타인, 저항, 혁명 - 해방을 향한 투쟁 ⑦: BDS 운 동의 부상과 시온주의 세력의 반격,” 「노동자 연대」 497 (2024/3), https://ws.or.kr/article/32425 참조.
36) Anne Alexander, “팔레스타인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기 위한 전략,” 이원웅·앤 알렉산더 외, 『이스라엘의 인종 청소 실패와 팔레스타인 해방의 전망』, 267.
그 운동이 국제적으로 확산할 때 이스라엘의 인종주의적 시온주의 체제에 균열을 내고, 팔레스타인 민중 의 동력을 강화하며 해방의 전망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줄 것이다.
이 밖에도 다양한 국제적 연대 활동이 이뤄지고 있고, 더불어 각 사 회에서 적절한 연대의 방안이 요청되는 상황이다.
세계 교회 차원에서 팔레스타인 민중과 연대하는 여러 활동(Kairos Palestine, WCC의 EAPPI: Ecumenical Accompaniment Program in Palestine and Israel, 올리브나무 심 기 등)은 팔레스타인 민중의 생존권과 자결권을 보장하고, 나아가 궁극적 평화를 이루는 데 기여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별히 정부를 향하 여 대이스라엘 무기 판매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환기하는 것과 더불어 팔레스타인의 완전한 자결권 인정을 요구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의의를 지 닌다.
Ⅴ. 나가는 말
지금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볼 때 팔레스타인 해방의 전망은 쉽 사리 낙관하기 어렵다.
그저 그 해방의 전망은 다양한 가능성 안에 있다 고 할 수밖에 없다.
간단히 예단하기는 어렵다. 결국 그 해법은 서로 얽힌 당사자들의 역관계에 따 라 다양한 형태로 가시화될 가능성 안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고통을 겪고 있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생존권과 자결권이 온전히 보장되는 조건 안에서 평화적 공존의 길로 나 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관심과 연대는 바로 그 방향에 집중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노동자 연대. “[기획 연재] 팔레스타인, 저항, 혁명 - 해방을 향한 투쟁 ⑦: BDS 운동의 부상과 시온 주의 세력의 반격.” 「노동자 연대」 497 (2024/3), https://ws.or.kr/article/32425. 마플릿, 필립/이정구 옮김. 『팔레스타인의 저항: 이스라엘과 제국주의에 맞서 해방은 어떻게 가능 한가』. 서울: 책갈피, 2021. 뮐러, 하랄트/이영희 옮김. 『문명의 공존』. 서울: 푸른숲, 2000. 바르구티, 모리드.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무함마드, 자카리아·오수연 엮음/오수연 옮김. 『팔레스 타인의 눈물』. 서울: 아시아, 2006. 사이드, 에드워드/성일권 편역.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서울: 김영사, 2001. 산드, 슐로모/김승완 옮김. 『만들어진 유대인』. 고양: 사월의책, 2022. 신동욱. “천년왕국(계 20:4-6)의 정치적 해석의 가능성.” 「신학사상」 174 (2016/가을), 77-111. 아텍, 나임/신승민 옮김. “진정한 종교의 시험대로서의 해방신학.” 「기사연 도시에」 1. 양명수·이진구·정재현·강원돈. “한국 개신교 교회에 대한 비판담론 분석.” 「신학사상」 165 (2014/여 름), 9-54. 이영미. “시온의 은유로 그려진 제1이사야의 이상공동체의 비전.” 「신학사상」 106 (1999/가을), 135-152. 이원웅 · 알렉산더, 앤 외. 『이스라엘의 인종 청소 실패와 팔레스타인 해방의 전망』. 서울: 책갈피, 2024. 정의길. 『유대인, 발명된 신화: 기독교 세계가 만들고, 시오니즘이 완성한 차별과 배제의 역사』. 서 울: 한겨레출판, 2022. 파페, 일란/백선 옮김.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유대인 역사학자의 통렬한 이스라엘 비판 서』. 고양: 틈새책방, 2024. 핑컬스타인, 이스라엘 · 실버먼, 닐 애셔/오성환 옮김.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서울: 까치, 2002. 할리디, 라시드/유강은 옮김. 『팔레스타인 100년의 전쟁: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 2017』. 파주: 열린책들, 2021. 휘틀럼, 키스 W./김문호 옮김.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침묵당한 팔레스타인의 역사』. 서울: 이산, 2003. Dever, William G. “Syro-Palestinian and Biblical Archaeology: Into the Next Millennium.” William G. Dever and Seymour (Sy) Gitin (ed.). Symbiosis, Symbolism, and the Power of the Past: Canaan, Ancient Israel, and Their Neighbors, from the Late Bronze Age through Roman Palaestina. Penn State University Press, 2003. ESCWA. Impact of Peace Process on Selected Sectors: Textiles and Electronics Industries. New York: United Nations, 1997. Fernando, Jude Lal. “The War on Gaza and the Bible: Has God Abandoned the Palestinians?.” 「2024 기사연 평화원탁회의 발제문」(2024/11). 234 神學思想 208집 · 2025 봄 Sölle, Dorothee/이강실 옮김. “평화운동을 위한 성서 사용 방법.” 「신학사상」 53 (1986/여름), 325- 346. UNCTAD. “Report on UNCTAD’s Assistance to the Palestinian People.” TD/B/52/2. July 21.
한글초록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강점 배경에는 현대 서구 제국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배어 있다.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정착 운동을 불러일으 킨 시온주의 운동의 태동이 서구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이며, 동시에 현 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강점을 뒷받침하고 있는 배경 역시 서구 제국 주의라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은 언제나 제국주의가 만들어 놓 은 구조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가장 먼 저 해명되어야 할 것이 시온주의 운동이다. 시온주의 운동은 19세기 유 럽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이었다. 선진 서유럽의 유대인들은 대개 자본주 의적 체제에 동화되어 있었지만, 후진 동유럽에 자본주의가 침투함에 따 라 봉건 경제 구조에 의존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위협을 받았을 뿐 아니 라 동시에 자본주의의 위기가 전개되면서 발생한 대중의 분노를 무마하 기 위한 ‘희생양’으로서 공격 표적이 되었다. 그 반작용으로 형성된 유대 민족주의의 완성 형태가 바로 시온주의였다. 오늘날 시온주의는 단순히 종교적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정 당화하는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논문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서 시온주의가 과연 역사적·신학적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전망한다. 이 과제는 신학적이자 동시 에 역사적 성찰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논문은 먼저 제국주의 유산 으로서 팔레스타인 문제의 성격을 다룬다. 이어 시온주의를 형성한 유대 민족 귀환 신화와 기독교 신학의 공모 관계를 다루며 그 대안으로서 팔 레스타인 해방을 지향하는 신학을 소개한다. 더불어 팔레스타인 저항의 역 사를 되돌아보며 실천적 차원에서 팔레스타인 해방의 전망을 모색한다.
주제어 시온주의, 아랍인, 유대인, 이스라엘, 점령, 제국주의, 팔레스타인, 해방
Abstract
Dissolution of Zionism and Liberation of Palestine
Hyung-Mook Choi (Director, Christian Ethics The Christian Institute for the 3rd Era)
Behind the Jewish dominance of Palestine lies the dark shadow of modern Western imperialism. In the same way that the Zionist movement, which gave rise to the Jewish settlement of Palestine, is a legacy of the Western imperialist era, so too is Israel’s current dominance of Palestine. Therefore, the current Palestinian struggle has always been characterized by factors that put it in conflict with the structures of imperialism. The first thing to note here is the Zionist movement. The Zionist movement was a product of the European capitalist crisis of the 19th century. Jews in developed Western Europe were largely assimilated into the capitalist system. On the other hand, Jews who were dependent on the backward feudal economies of Eastern Europe, were not only threatened by the penetration of capitalism, but were simultaneously targeted as “scapegoats” to deflect popular anger as the capitalist crisis unfolded. Zionism was the Jewish nationalism that formed as a reaction. Today, Zionism is not simply a religious aspiration, but a political ideology that justifies Israel’s occupation of Palestine. This paper critically examines the historical and theological legitimacy of Zionism as an ideology that justifies Israel’s occupation of Palestine and looks forward to the liberation of Palestine. This assignment is simultaneously a theological and historical reflection. This paper first addresses the nature of the Palestinian question as a legacy of imperialism. It then addresses the complicity of Christian theology with the myth of Jewish return that shaped Zionism and introduces an alternative theology of Palestinian liberation. It also looks back at the history of Palestinian resistance and explores the prospects for Palestinian liberation on a practical level.
Key Word:Zionism, Arabs, Jews, Israel, Occupation, Imperialism, Palestine, Liberation
神學思想 208집 · 2025 봄
논문접수일: 2025년 1월 30일 논문수정일: 2025년 2월 26일 논문게재확정일: 2025년 3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