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정치

좋은 삶을 방해하는 구조적이고 구성적인 악운에 대하여 -후기식민주의 비평에 대한 덕 윤리적 접근/홍혜빈.보스톤大

jn209 2025. 6. 25. 18:35

 

Ⅰ. 들어가는 말

 

후기식민주의 비평가들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을 넘어서는 식 민주의의 파괴적이고 비인간화하는 영향력에 대해 다층적인 분석을 제공 해 왔다. 본 연구는 이러한 후기식민주의 비평의 흐름을 계승하면서도, 기존 논의에서 상대적으로 간과되었던 식민 지배가 피식민지의 도덕적인 역량에 영향을 끼쳐 우리가 좋은 삶을 영위하는 것을 방해하는 방식과 그 심각성을 도덕철학의 개념인 ‘도덕 운’(moral luck)에 관한 논의를 통해 이해해 보고자 한다.

특히 이 연구는 탈식민화를 추구하는 후기식민주의 비평이 억압받는 사람들이 변혁의 과정을 시작하고 지속할 때 필요한 도 덕적 역량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이것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 편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으로 가정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 한다.

한국 사회는 일제 식민 지배, 분단, 전쟁, 군사 독재를 거치며 구조적 불의를 경험했고, 이로 인해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약화되었다.

이러 한 역사적 경험은 현재 한국 사회의 도덕적 지평을 형성하고 있으며, 현 정부 하에서 나타나는 역사 인식 퇴행, 혐오 표현 확산, 공동체적 가치 쇠퇴는 미해결된 식민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

식민지와 독재의 유산을 직면하지 못한 사회는 배제와 적대의 논리를 쉽게 선택하며, 이는 개인 의 도덕적 결핍이 아닌 구조적 문제로, 불의에 대한 감수성과 도덕적 실 천 역량을 약화했다.

이러한 후기식민 사회에서 탈식민을 위한 변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손상된 도덕적 역량을 회복하고 사회 변화를 위한 집 단적 노력을 지속해야 하는 이중 부담을 지닌다.

구조적 한계가 개인에 게 미치는 영향이 인식되지 않으면, 변혁 운동의 어려움은 개인 책임으 로 환원되어 변화의 동력을 약화한다.

그러나 변혁의 노력이 이상적 결 과에 도달하지 못해도, 그 과정은 가능성을 이어가는 중요한 실천이며, 실패와 한계조차 해방 과정의 일부로 포함하는 인식이 필요하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식민주의가 피식민인의 도덕 적 역량에 미치는 영향과 그 회복 가능성을 다층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먼저 후기식민주의 비평의 주요 흐름을 살펴보고, 이를 덕 윤리(virtue ethics)적 관점과 결합하여 좋은 삶을 방해하는 식민주의의 구조를 이해 할 방법론적 접근법을 먼저 제시한다.

이어서 도덕 운에 관한 철학적 논 의, 특히 구조적이고 구성적인 악운의 개념을 통해 식민주의가 좋은 삶 을 방해하는 방식의 심각성을 조명할 것이다.

특히 여성 윤리학자들의 도덕 운에 대한 구조적 접근을 중심으로, 한국의 후기식민적 현실에서 탈식민적 실천이 직면하는 딜레마와 그 지속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할 것 이다.

궁극적으로 본 연구는 완전한 번영에 대한 낙관적 희망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윤리적 실천을 지속하는 길을 모색함으로써, 한국 사회가 식 민주의의 도덕적 유산을 극복하고 새로운 공동체적 윤리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Ⅱ. 후기식민주의 비평에 대한 덕 윤리적 접근

 

1. 후기식민주의 비평

 

후기식민주의 이론가들은 서구/비서구, 식민/피식민, 지배/피지배의 단순화된 이분법을 문제 삼고, 피식민자가 일방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식 민 담론을 흡수하고 변형하며, 저항과 동화 사이에서 복합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체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해체주의적 접근을 기반으로 서구 중심적 지식 생산 방식과 재현의 정치학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그녀의 유명한 질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는 식민지 담론 내에서 피식민자, 특히 여성 하위주체의 목소리가 어떻게 침묵되고 왜곡되는지를 드러낸다.

스피박 은 식민지 지배 담론이 남성 중심적임을 지적하면서, “식민지 생산의 맥 락에서, 하위주체가 역사를 갖지 못하고 말할 수 없다면, 여성으로서의 하위주체는 더욱 깊은 그림자 속에 있다”라고 주장한다.1)

그녀는 “이데 올로기적 젠더 구성이 식민주의 역사학의 대상으로서든 반란의 주체로서 든 남성을 지배적으로 유지하기”에 하위주체가 식민지 담론 경제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발휘할 수 있는 자원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다.2) 이러 한 맥락에서 스피박은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 essentialism)라는 개념 을 제시했다.

전략적 본질주의는 본질주의의 한계와 위험성을 인식하면 서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일시적으로 집단적 정체성을 전략적으로 주장 하는 접근법이다.

스피박은 이를 “철저히 가시적인 정치적 이해관계 속 에서 실증적 본질주의의 전략적 사용”이라고 정의했다.3)

 

1) Gayatri C. Spivak, “Can the Subaltern Speak?,” C. Nelson · L. Grossberg (eds.), in Marxism and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 (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88), 287.

2) Ibid., 286.

3) Gayatri Spivak, “Subaltern Studies: Deconstructing Historiography,” Donna Landry · Gerald Ma- clean (eds.), in The Spivak Reader (New York: Routledge, 1996), 19.

 

이는 식민지 담론에 저항하고 하위주체의 목소리를 회복하는 데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호미 바바(Homi Bhabha)는 『문화의 위치』(The Location of Culture)에 서 식민지 경험의 상호 교차성으로부터 창발하는 새로운 주체성의 가능 성을 논하였다.4)

바바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제3의 공간’(the Third Space)으로, 이는 모든 식민 담론이 구성되는 문화적 공간을 의미한다.5)

이것은 단순한 다문화주의나 문화적 다양성의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화적 차이’(cultural differance)의 공간으로, 모든 차이가 ‘양가적’(ambivalent) 소통을 통해 상호작용하며, 이 과정에서 “계급, 젠더, 인종, 국 가 간의 일상생활 경쟁과 표현 속에서 의미의 상실”이 항상 일어나는 공 간이다.6)

이 공간의 불안정성과 양가성은 정체성에 대한 전체주의적 개 념이 이질적이고 경합적인 소수자 담론의 현실 앞에서 항상 실패할 수밖 에 없음을 드러낸다.

바바는 이러한 양가적 공간에서 형성되는 문화적 정체성을 ‘혼종성’(hybridity)이라 명명했다.7)

 

4) Homi Bhabha, The Location of Culture (New York: Routledge, 2004).

5) Ibid., 37.

6) Ibid., 34.

7) Ibid., 37.

 

혼종성은 식민 담론 내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한 주체 형성의 복잡한 과정을 특징짓는다.

문화적 정 체성의 이러한 양가성을 인식함으로써, 종종 헤게모니적 장치로 사용되 는 다문화주의의 공허한 수사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바바의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인 ‘식민적 모방’(colonial mimicry)은 후기식민 주체의 전복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방법론이다.

식민적 모방은 식민지 피지배 자가 지배적인 식민지 정체성의 요소들을 모방하는 반복적이고 전복적인 수행으로, “거의 같지만 완전히 같지 않은(almost the same, but not quite)” 타자로서 모방하는 주체는 지배 담론에 균열을 가져옴으로써 체 제를 전복한다.8)

이러한 접근은 스피박의 전략적 본질주의와 중대한 차이를 보인다.

바바는 식민지 경험의 복잡성을 인정하면서 식민 담론 내에서도 저항과 전복 가능성을 강조한다.

그는 제3의 공간에서 내면화된 트라우마적 이 야기를 열어젖히고, 식민적 모방을 통해 불합리성을 드러내는 혼종적 자 아의 역동성에 집중하며, 피식민자의 능동적 개입과 주체 형성의 창조적 잠재력을 강조한다.

반면 스피박은 하위주체가 협상 기회를 원천적으로 가지지 못할 가능성과 지식인 담론의 ‘재현’(representation) 과정에서 발 생하는 대상화 위험을 경고한다.9)

최순양은 이 두 이론가의 차이점에 주 목하면서 바바의 ‘혼종성’과 ‘모방’ 개념이 피식민 주체에게 질서 교란 가 능성을 제공하지만, 하위주체의 발화 불가능성 문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평가한다.10)

바바는 피식민자들이 협상과 모방으로 지배 구조 를 교란하며 제3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을 낙관적으로 보는 반면, 스 피박은 피식민 주체가 협상 과정 접근 자체에 제한이 있거나 목소리 전 달 과정에서 왜곡이 발생한다고 분석한다.

최순양은 스피박이 탈식민적 주체의 구조적 배제 문제를 더 철저히 파고들며 ‘비판적 협상’의 필요성 을 강조했다고 보며, 그녀가 여성 하위주체 재현 과정의 권력 관계를 근 본적으로 문제 삼았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를 기반으로 최순 양은 민중신학과 아시아 여성신학이 하위주체를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지 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스피박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면서 하위주체의 목소리를 왜곡 없이 ‘직접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대안을 제시한다.11)

 

8) Ibid., 86.

9) Spivak, “Subaltern Studies,” 20.

10) 최순양, “스피박의 서발턴(하위주체)의 관점에서 바라본 아시아 여성신학과 민중신학적 담론에 대한 문제 제기,” 「신학논단」 72 (2013/6).

11) Ibid., 233, 257-259.

 

2. 도덕적 약화

 

스피박과 최순양의 이러한 접근은 하위주체가 말할 수 없는 현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식이다. 스피박이 하위주체의 발화 불가능성 문제를 재현의 차원에서 분석하고, 최순양이 이에 대한 대안으로 직접 듣기를 제시했다면, 본 연구는 이들의 접근에 근본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또 다른 차원의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하위주체가 비판적 협상의 테 이블에 접근하지 못하는 데는 재현을 포함하여 다양한 원인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던 ‘도덕적 약화’(moral debilitation)의 문제를 조명할 필요가 있다.12)

탈식민화는 인식론적 전환과 제도적 개혁을 포함하여 여러 층위의 역량과 자원을 요구하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생계와 주거 같은 기본적인 물질적 조건, 의지할 수 있는 관계망과 같은 사회적 조건, 이론적 이해와 비판적 사고 능력뿐 아니라 용기, 정의감, 부지런함, 연민 과 같은 도덕적 덕목들도 필요하다. 또한 지배적 담론과 다른 좋음을 상 상할 수 있는 창조적 역량, 그리고 지속적인 저항과 변혁 과정에서 좌절 과 허무를 견딜 수 있는 정서적 회복력 같은 넓은 의미의 도덕적 역량도 필수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덕 윤리와 기독교 윤리 전통이 강조 하듯, 개인의 이와 같은 덕성은 공동체 속에서 형성된다.13)

그러나 식민 지배와 같은 역사적 폭력은 이러한 공동체를 해체하거나 왜곡시켜 개인 의 도덕적 성장과 좋은 삶을 저해하는 억압적 구조로 변질시키기도 한다.14)

 

12) ‘도덕적 약화’라는 개념은 물질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을 통해 공동체의 외적 조건을 약하게 만드 는 데 그치지 않고, 도덕적 역량과 행위성까지 체계적으로 약화하는 식민주의 체제의 과정과 결 과를 설명하기 위해 필자가 후기식민주의주의 트라우마 연구와 장애학 이론가인 재스비어 푸아 (Jasbir Puar)의 ‘debility’ 개념을 종합하여 제시하는 개념이다. 장애학의 ‘debility’가 주로 쇠약해 진 상태를 의미하는 명사라면, ‘debilitation’은 약화하는 과정이나 그 결과를 의미하는 명사이므 로 후자를 사용했다. Jasbir K. Puar, The Right to Maim: Debility, Capacity, Disability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7).

13) Alasdair MacIntyre, “Chapter 15. Virtues, Unity of Life and Concept of a Tradition,” in After Virtue: A Study in Moral Theory (Notre Dame, IN: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2007).

14)  식민지 경험이 피식민지에 입히는 다양한 피해 중 도덕적 측면에 대한 논의는 세대를 넘어 전이되는 트라우마(transgenerational trauma)에 대한 연구들을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야엘 다니엘 리 외의 연구에 따르면, 식민지 경험의 트라우마는 “가족 내에서 특정 행동 패턴, 증상, 역할, 가 치 등을 통해 세대를 넘어 전달”된다.베셀 반 데어 콜크는 이러한 세대 간 트라우마가 “부정적인 태도와 부적응적인 행동을 전달하여 가족 및 사회 구조에서 역사적 트라우마를 지속”시킨다고 분석한다. 특히 메리다 블랑코가 남아메리카의 다섯 세대에 걸친 폭력의 영향을 분석한 연구는 초기 세대의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가 광범위한 가족 및 사회적 맥락에서 후속 세대의 기능 장 애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Yael Danieli · Fran H. Norris · Brian Engdahl, “Multigenerational Legacies of Trauma: Modeling the What and How of Transmission,” American Journal of Orthopsychiatry 86/6 (2016/1), 639–651. Bessel van der Kolk, The Body Keeps the Score: Brain, Mind, and Body in the Healing of Trauma (New York: Viking, 2014); Merida Blanco, “Multisystemic Approach to the Treatment of Traumatic Stress and PTSD in Vulnerable Populations,” E. Ovuga · D. Marotta · K. Cullivan (eds.), in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in a Global Context (London: IntechOpen, 2012). 이처럼 후기식민주의 트라우마 연구는 식민 지배가 피식민자들에 게 물리적, 정치적, 경제적 약화뿐 아니라 도덕적 약화까지 초래한다는 점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스피박이 지적한 하위주체의 말할 수 없음의 문제는, 재현의 문제 이외에도 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요구되는 다양한 전제조건 중 하나 인 도덕적 역량이 구조적으로 침범당해 약화되었다는 관점을 포함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하위주체가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가 왜곡되어 전달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협상의 테이블에 앉기 위해 필요한 도덕적 자원과 역량이 역사적·사회적 억압 속에서 체 계적으로 약화되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탈식민 담론은 따라서 억압 속 에서 훼손된 도덕적 역량에 대한 이해와 그 재구성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공동체적 조건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수반해야 한다.

이러한 접 근은 스피박이 지적한 하위주체의 발화 불가능성 문제를 도덕적 역량의 차원에서 더 깊이 이해하고, 바바가 제시한 혼종적 주체성 형성의 실천 적 조건을 보다 현실적으로 탐색할 수 있는 기반을, 그들의 핵심적 기여 를 존중하면서도 확장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3. 덕 윤리적 접근

 

하지만 식민지 경험으로 인한 피식민인들의 도덕적 약화는 논의하기 에 매우 조심스러운 주제이다.

식민지 경험이 다양하고 복잡하여 일반화 하기 어렵고, 구조적 불의 피해자의 도덕적 역량 훼손을 주장하는 것이 불공정한 구조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린다는 의혹을 살 수 있기 때문이 다.

이런 논리가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노예제 옹호론에서 억압적 구조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억압적 사회 구조가 피억압자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 적 역량을 훼손한다는 주장은 비교적 쉽게 받아들인다. 필자는 이 차이 가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의무론적 관점, 더 넓게는 행위 중심 윤리학적 관점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넓게 보면, 행위 중심 윤리는 공통적으로 모 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평등하게 합리적 이성을 소유한 상태에서 보편적 법칙에 근거하여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는 가정에 따라 논의를 진행한 다.15)

 

15) Ruth Groenhout, “Virtue and a Feminist Ethics of Care,” K. Timpe · C. Boyd (eds.), in Virtues and Their Vice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481–501.

 

정치적, 경제적, 관계적 역량들이 운이나 노력, 혹은 여타 다른 조 건들에 의해 얻기도 하고 잃을 수도 있는 것과 달리, 도덕적 역량이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소유한 합리성의 올바른 사용에 내재한다면, 구조적 불의로 그것이 훼손되었다는 것은 피해자의 인간성 자체가 훼손되었다고 보는 것과 같아진다.

그렇다면 구조적인 불의로 피해자의 도덕성이 훼손 되고 약화될 수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도덕성을 이해하는 방식은 그러나 행위 중심적 관점만 있는 것이 아 니다.

고대와 중세에 지배적이던 행위자 중심의 목적론적 윤리학인 덕 윤리에서는 도덕성이 보편화할 수 있는 도덕 원칙에 내재한다고 보는 행 위 중심 윤리학의 전제와 달리, 도덕성을 이상적인 선에 귀속시킨다.

여 기서 도덕성이란 사람이 이상적인 선과 관련된 덕을 함양하여 최대한 그 선을 좇아 살아가는 데 있다.

리스토텔레스적 사유에 기반한 고전적 덕 윤리학자들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을 궁극적 선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 목적론적 삶이 곧 행복(eudaemonia) 혹은 번영(flourishing), 즉 좋은 삶을 의미한다.16)

 

16)  Aristotle/J. A. K. Thomson (tr.), The Nicomachean Ethics (London: Penguin Classics, 2004), 1.13. 1102a28, 1102b13–30.

 

이렇게 볼 때 도덕성은 규칙 준수나 결과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의 도덕적 상태, 즉 행위자가 이상적인 선에 가까워지기 위한 덕을 얼마나 함양했는지, 혹은 이상적 선에서 멀 어지게 하는 악덕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옳은 행동 을 하는 사람에게 도덕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덕을 함양하고 악덕을 멀 리하는, 즉 도덕성이 있는 사람이 옳은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행위 자 중심의 목적론적 덕 윤리의 근본적 질문은 “무엇이 옳은 행동인가?” 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가 된다.17)

이와 같은 접근은 기독교 전통에서도 낯선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덕 을 중심으로 도덕성을 이해하는 방식은 기독교 윤리의 핵심적인 전통이 며, 아퀴나스를 비롯한 중세 신학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해 왔다.

정의를 단순한 법적 원칙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도덕적 덕으 로 이해한 아퀴나스의 윤리학은 개별적 행위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행 위자가 궁극적으로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중심에 놓으며, 그 과정에서 공동체의 역할을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한다.18)

 

17) 물론 전통적 덕 윤리학에도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가 있다. 특히 페미니스트 윤리학자들은 이상 화된 남성적 행위자를 전제하고 쌓아 온 미덕과 악덕의 체계가 그동안 여성들에게 지워 온 속박 에 대해서 고발해 왔다. 페미니스트들은 전통적 덕 윤리학에 대한 비판은 Sandrine Berges, A Feminist Perspective on Virtue Ethics (London: Palgrave-Macmillan, 2015)를 참고하라.

18) 김민석, “아퀴나스의 정의론 - 정의의 목적으로서 공공선(common good) 추구,” 「신학사상」 186 (2019/가을), 323-353.

 

이러한 이해는 기독교 공동체를 단순한 신앙적 결사체가 아니라 도덕적 형성이 이루어 지는 공간으로 바라보는 관점과 연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 중심적 도덕성 이해는 현대 기독교 윤리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현대 윤리학에 이른바 ‘덕의 귀환’의 흐름을 주도한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 (Alasdair MacIntyre)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 워스(Stanley Hauerwas)는 도덕적 형성이 단순한 개인적 결단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신앙과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며, 교회를 단순한 신앙의 집합체가 아니라 성품을 형성하는 공간으로 이해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9)

 

19) Stanley Hauerwas, A Community of Character: Toward a Constructive Christian Social Ethic (Notre Dame, IN: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1); 박우영, “도덕적 주체 형성과 사회 참여 주체로서의 교회 이해 - 래리 라스무센의 생명공동체를 위한 기독교윤리를 중심으로,” 「신학사 상」 197 (2022/여름), 257-291. 박우영은 이 논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덕 윤리와 기독교 윤리 의 연계를 통해, 도덕적 성품이 공동체적 실천 속에서 길러진다는 점을 강조하며, 교회가 폐쇄적 으로 신앙적 가치를 유지하는 공간이 아니라,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적극적 참여자로 기능해야 함을 주장한다.

 

도덕성의 핵심인 덕의 형성이 행위자의 일생에 걸쳐 일어난다면, 개 인이 속한 사회 구조가 중요해진다.

한 사람의 도덕적 행위를 다양한 상 호작용 속에서 이해하게 하는 덕 윤리학은 지배와 억압 맥락에서 피억압 자들의 번영을 막는 구조에 대해 포괄적인 해석을 제공할 수 있다.

후기 식민 주체들이 비판적 협상의 테이블에 앉지 못하게 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인 도덕적 약화를 덕 윤리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있어 도덕적 주 체의 의지를 넘어 존재하지만 도덕적 판단과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들을 뜻하는 도덕철학의 개념인 도덕 운은 중요한 분석 도구가 된다.

기 존의 도덕 운 논의는 개인의 도덕적 책임 문제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 으나, 아래에서 소개할 여성 윤리학자들의 연구는 이 개념을 구조적 차 원에서 확장시켜 식민지 경험이 어떻게 개인의 도덕적 역량을 형성하고 약화하는지 이해할 초석을 제공한다.

 

Ⅲ. 좋은 삶을 방해하는 구조적이고 구성적인 악운

 

1. 도덕 운의 의미와 종류

 

버나드 윌리엄스(Bernard Williams)는 1979년, 도덕적 판단에서 모든 임의적 요소를 제거하고 모든 사람이 합리적 이성을 사용하여 보편적 준칙에 따를 것을 기대하는 ‘칸트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며 도덕 운 논쟁에 불을 붙였다.20)

윌리엄스는 도덕 운을 행동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사 건적 운(incident luck)과 행위자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구성적 운 (constitutive luck)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운이 ‘도덕성’에 대한 칸트주의 적 이해를 어떻게 문제화하는지 설명한다.

먼저, 두 사람이 같은 의도를 가지고 같은 행동을 하여도 한 사람에게는 행운이, 한 사람에게는 악운 이 개입하여 각각 도덕적으로 칭찬받을 결과와 비난받을 결과를 낳았다 면, 이 사건적 운은 우리가 행동하기 전에 우리의 선택이 이성적이고 도 덕적으로 정당한지 판단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를 뒤흔든다.

또한 기질 이나 성장 배경 등 우리를 구성하는 조건들 자체에 운이 개입한다면, 이 는 모든 도덕적 행위자가 평등하다는 전제를 파기한다.21)

윌리엄스는 도 덕은 운에 면역되어야 한다는 칸트의 입장을 부정하고, 우리 동기, 의도, 성격 형성에 작용하는 운의 영향을 재조명하였다.

같은 해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은 도덕 운이 행위자의 통제 너 머의 요인들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을 세밀하게 구분함으로써 도덕 운에 대한 논의를 확대하였다.

그는 도덕 운이 “누군가의 행위의 중요한 측면 이 그의 통제를 벗어난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었음에도 우리가 그를 도덕 적 판단의 대상으로 간주할 때” 일어난다고 정의하고,22) 도덕 운을 결과 적, 상황적, 구성적, 인과적 네 가지로 유형으로 구분하여 논의했다.23)

 

20) Bernard Williams, Moral Luck: Philosophical Papers 1973–1980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20-22.

21) Ibid., 22-30.

22)  Thomas Nagel, “Moral Luck,” in Mortal Questions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26.

23)  Ibid., 27–38.

 

첫째, 결과적 운(resultant luck)은 행동의 결과에 작용하는 운으로, 술을 마신 두 명의 운전자 중 한 명만 살상 사고가 난 경우 첫 번째 운전자는 살인자로서 도덕적 및 법적 책임을 지게 되지만, 두 번째 운전자는 단순히 부주의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이는 운이 작용한 결과에 따라 상반되는 도덕적 판단이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둘째, 행위가 일어나는 상황에 개입하는 운(circumstantial luck)을 설명하기 위해, 네이글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장교로서 홀로코스트에 가담한 사람과 전쟁 전에 운 좋게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나치에 협력하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을 비교한다.

만 일 독일군 장교에게도 전쟁 전 독일을 떠날 상황이 주어졌다면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을 테고, 이는 상황적인 운도 도덕적 판단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 의미한다.

셋째, 구성적 우리 행동에 작용하는 다층적 운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네이글이 주장하듯 행위 중심 윤리학이 전제하는 “합리적인 도덕적 판단의 영역은 확장 불가능한 지점으로 축소되는 것처럼” 보인다.24)

구성적이고 상황적 인 운은 행위자에게 직간접적 영향을 미치고, 행위 자체는 행위의 선행 조건들과 그 행위의 결과에 또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보면 운은 우리 삶 의 거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 운 개념은 도덕 적 책임의 개념과 충돌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누군가의 성격이 선천 적 요소나 환경적 영향에 의해 형성되었다면, 그의 도덕적 책임을 어디 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윌리엄스와 네이글이 시작한 도덕 운에 관한 논 쟁은 따라서 자연스럽게 도덕적 책임의 맥락에서 진행되었다.25)

 

24) Ibid., 38.

25) 국내의 도덕 운에 관한 연구들도 대부분 도덕 운의 개념을 소개하고 이것을 도덕적 책임의 맥락 에서 논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구인회, “도덕적 우연에 관한 고찰,” 「철학연구」 45 (1999/6), 329-353; “도덕적 우연과 책임에 관한 소고,” 「철학논총」 65 (2011/7), 31-51; 양선이, “도덕 운과 도덕적 책임,” 「철학연구」 91 (2010/12), 265-293; 전성은, “도덕적 운의 도덕 교육적 함의,” 「한국초등교육」 34 (2023/6), 21-34.

 

하지만 도덕 운이 개인의 도덕적 형성, 판단, 결과 등에 미치는 영향 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논의는 단순히 책임의 문제를 넘어서 도덕적 형성 자체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조건과 억압의 구조적 작동 방식에 대한 탐구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기존 도덕 운 논쟁이 주로 개인의 행위와 책 임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이 연구는 후기식민주의적 문제의 식과 덕 윤리적 접근을 결합하여, 도덕 운이 특정한 집단에게 지속적으 로 불균등하게 작용하는 구조적 맥락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 는 단순히 개인의 행위가 운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정치적·역사적 조건이 특정한 집단의 도덕적 형성 을 저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탐구하는 시도이다.

식민주의적 억 운(constitutive luck)은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 능력 등에 영향을 주는 운으로, 유전자, 선천적 질 병, 가정 환경, 성장 배경 등 인간을 형성하는 모든 요소를 뜻한다.

누군가를 이기적이거나 비겁 하다고 비난할 때 그의 이기심과 비겁함이 불운한 성장 배경 등의 그의 통제 밖의 요인들의 결과 라면 이는 구성적 운이 작용한다는 의미이다.

네이글은 마지막으로 선행한 사건이 행위에 인과 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인과적 운(causal luck)은 제시하는데, 많은 학자들은 이 개념이 상황적 운 과 구성적 운과 중복된다고 여긴다.

억압과 제도적 불평등이 단순히 물질적 자원의 배분뿐만 아니라, 도덕적 주체로 성장할 기회를 비대칭적으로 부여함으로써 특정한 집단의 좋은 삶을 구조적으로 방해할 수 있음을 분석하고자 한다.

 

2. 도덕 운과 좋은 삶의 연약함

 

마사 누스바움은 『연약한 선』(The Fragility of Goodness)에서 도덕 운 과 그로 인한 취약성이 바로 인간 삶과 도덕적 자아의 중심 요소라는 점 을 주장하며 도덕 운 논쟁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였다.26)

이 책에서 누스바움은 그리스 철학에서의 운의 문제를 탐구하며, 좋은 삶의 연약함 (fragility)을 재조명한다.

누스바움은 운에 대한 우리의 취약성(vulnerability)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결정짓는 조건이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 이는 것이 인간 번영, 즉 좋은 삶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라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들은 운에 취약한데, 이로 인해 우리의 좋은 삶은 연약해진다고 보았다.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미덕을 가진 상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활동’을 의미하기 때문이 다.27)

 

26) 마사 누스바움/이병익 · 강명신 · 이주은 옮김, 『연약한 선: 그리스 비극과 철학에서의 운과 윤리』 (서울: 서커스, 2023).

27) Ibid., 631-646.

 

활동은 필연적으로 외부의 자원을 필요로 하고, 이런 자원의 유무 가 좋은 활동의 수행을 방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애라는 덕을 함양 하기 위해서는 우정을 쌓을 친구와 그 친구와의 우정을 향유할 수 있는 다른 많은 자원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친구가 병에 걸릴 가능성, 내가 다 른 가치들을 중시하느라 친구와의 우정을 소홀히 할 가능성, 재난으로 인해 친구와 나의 주거지가 파괴될 가능성 등, 우연은 수많은 방식으로 우정이라는 활동을 방해하여 우애의 덕 함양을 좌절시킬 수 있다.

더 심 각하게, 지속적이고 심각한 악운은 결국 덕의 함양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여 좋은 삶을 방해한다.

또 어떤 경우는 도구적 수단이나 대상의 상실로 인해 탁월한 활동 자 체가 완전히 차단될 것이다. 평생의 예속 상태, 심각한 만성 질환, 극도의 빈곤, 사랑하는 사람 모두가 사망한 경우와 같은 예에서는 탁 월성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바와 같 이 좋은 활동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심각한 지장을 받을 수는 있다. 사회적 지위 면에서 불리한 사람의 경우 지위가 좋은 사 람에 비해 좋은 정치 활동의 기회가 적을 것이다.28)

운의 이런 파괴적이고 재난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누스바움은 운 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위험의 원인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려는 철학적인 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보는데, 이는 그러한 시도들이 우리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요소들을 제거하여 삶을 좁고 빈약하게 만들기 때 문이다.29)

예컨대 사랑하는 사람과의 애착은 그들을 잃을 때 깊은 고통 을 초래하지만, 이를 피하려고 처음부터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삶은 궁 핍해진다. 누스바움이 말하듯, “완전하게 강건한 삶은 빈곤한 것이 되기 쉽다.”30)

또한 칸트가 그러했듯 보편성을 매개한 도덕 법칙을 최고의 가 치를 두고 다른 가치들을 그 아래 두어, 운의 파괴적인 속성으로부터 도 덕 가치를 지키고자 한다면 도덕적 자아를 단편적이고 피상적으로 만들 어버릴 것이다.31)

인간은 무엇보다 이성적이면서도 동시에 감정적인 존 재로, 감정적 삶의 풍요로움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운의 영향으로부터 면 역될 수 없기 때문이다.32)

 

28) Ibid., 648.

29) Ibid., 82-97.

30) Ibid., 38.

31) Ibid., 68-71; 146-147

32) Ibid., 732-759.

 

누스바움은 좋은 삶의 불안정하고 연약한 본질을 인식하고, 이러한 이해에 비추어 사회적 정의와 평등을 위한 수단으로 공감과 열정 등의 덕을 함양해야 한다고 본다.

『선의 연약함』 이후 그는 감정 연구에 집중 하며, 불안정한 삶을 사는 도덕적 주체가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여 존엄 하고 교양 있는 세계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서사적 상상력’을 통해 사랑, 연민, 공감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함양하고, 혐오, 질투, 수치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는 논의를 이어나간다.33)

누스바움은 고 전적 자유주의에 뿌리를 둔 보편주의적 입장을 고수하며, 지역적인 것을 넘어 자유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인간은 본래 사랑하는 존재이며, 사랑을 통해 자유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있던 개인들 은 세상과 마주하고, 세상을 창조하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

불확실하 고 불안정한 시대에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세상은 다른 사람들 과 함께 사랑을 바탕으로 공동 창조하는 세상이며, 인간은 자유로운 개 인으로서 이러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자유주의적 보편주의와 적절한 인문학적 교육이 구조적 불의를 해결할 수 있다는 그 의 믿음에 근거한다.34)

 

33) Martha Nussbaum, 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4); Political Emotions: Why Love Matters for Justic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3).

34) 누스바움은 인간을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율적인 개인으로 가정하며, 인문주의적 교육 을 통해 인성을 함양하는 것을 사회적 변혁보다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헌신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누스바움의 이러한 자유주의적 경향이 고대 그리스 시대의 교육적, 문화적, 사회적 이상을 수용한 미국의 신자유주의 접근을 지지하게 한다고 비판한다. Rosi Braidotti, The Posthuman (Cambridge: Polity Press, 2013), 38–39. 안나 밀란과 알리 칸 윌디림은 누스바움이 자 신의 이론이 매우 북반구 엘리트주의적 특수성과 지역성을 띠고 있음에도 스스로를 보편적이라 고 간주하며 북반구의 학자들과 남반구의 소외된 개인들 간의 지나치게 단순화된 유사성을 가정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Anna Millan · Ali Can Yildirim, “Decolonizing Theories of Global Justice,” Nikita Dhawan (ed.), in Decolonizing Enlightenment: Transnational Justice, Human Rights and Democracy in a Postcolonial World (Toronto: Barbara Budrich Publishers, 2014), 195–208; 204.

 

3. 구성적 악운과 도덕적 훼손

 

클라우디아 카드는 『부자연스러운 복권』(The Unnatural Lottery)에서 누스바움이 조명한 인간 삶에서 운과 취약성의 중심성을 받아들이면서, 이것을 억압의 맥락 속에서 논한다.35)

윌리엄스와 네이글, 그리고 누스 바움이 어느 정도 특권적인 관점에서 주로 개인의 도덕적 행위에 작용하 는 운의 ‘우연적’ 성격과 그에 따르는 결과들에 대해 검토했다면, 카드는 운이 “필연적으로 우연의 문제는 아니”라고 단언한다.36)

한 사람의 운이 다른 사람에게는 선택이거나 사회적 관행의 결과, 혹은 제도적 억압의 산물일 수 있다.

예컨대 A는 대기업에서 우연히 승진 기회를 얻었지만, B는 동일한 환경에서 성차별적 조직 문화로 인해 지속적으로 불이익을 당한다. A에게는 단순한 운이지만, B에게는 구조적 억압의 결과이다.

이 런 의미에서

 

“우리는 책임을 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질 수 있 는 잠재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 잠재성은 운과 노력에 따라 더 크거 나 작게 실현될 수 있다. 이때, 그 노력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사회적 특 권이라는 운의 영향을 받는다.”37)

 

카드는 특히 성차별이나 이성애중심주의, 아동 학대와 같은 억압의 조건 속에서 악운을 경험하는 자아가 도덕적으로 훼손되는 방식을 이해 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선해질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가지 지 못하며, 우리의 선함은 종교적, 도덕적 전통에서 믿는 것처럼 온전히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

기 때문이다.38)

 

35)  Claudia Card, The Unnatural Lottery: Character and Moral Luck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1996), 특히 Chapter 2, “Responsibility and Moral Luck”.

36)  Ibid., 22.

37) Ibid., 24.

38) Ibid., 22.

 

이를 위해 카드는 도덕 운이 개 인의 행위에 일방적으로 개입하는 임의적 우연이 아니며, 실제로 행위와 운이 서로 밀접하게 얽혀있다는 것을 논증한다.39)

따라서 “구성적 도덕 운의 주요한 원천은 중요한 타인(부모, 연인)과의 관계 및 기본 사회 제도 (교육, 경제)로 구성된 관계이다.”40)

그러나 카드는 억압은 피억압자들이 완전하고 통합된 자아로서 구성 되고 기능하는 것을 방해하여 억압된 자들이 관계적인 악운에 더 취약하 게 만들고, 다른 행위자들과의 결속을 막아 결과적으로 도덕적 훼손을 일으킨다는 점에 주목한다.

억압은 “우리를 분열시키고”, 내적이고 관계 적인 ‘이중구속’(double-bind)을 통해 억압된 개인이 안정적이고 통합된 자아를 형성하지 못하게 한다.41)

내적으로 일관된 자아가 없는 개인은 자 신의 신념과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어려워져 종종 책임질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관계적으로 분열된 자아는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 기 어려워, 견고하고 건강한 사회적 관계를 구축하지 못하게 한다.

이는 사회적 결속과 집단적 도덕적 행동에 필수적인 공감, 이해, 연대에 장벽 을 만든다.

개인이 자신의 분열된자아를 화해시키지 못할 때, 억압적인 조건을 저항하거나 극복하기 위한 집단적 노력에 참여하는 능력도 감소 한다.

이렇게 억압의 파편화하는 힘은 억압받는 자들에게 도덕적 훼손을 입힌다.42)

 

39) Ibid., 40-41. 카드는 여성 윤리학자인 마거릿 어번 워커(Margret Urban Walker)의 ‘행위성 매트 릭스’(agency-matrix) 개념 위에서 이 논증을 펼친다. 워커는 운과 행위성은 서로 의존적 개념으 로, 개인의 운이 그들의 행위성에 영향을 미치고, 반대로 개인의 선택과 행동이 운의 결과를 변화 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Margaret Urban Coyne (now Walker), “Moral Luck?” The Journal of Value Inquiry 19 (1985/12), 319-325.

40) Card, Unnatural Lottery, 41.

41) Ibid., 42; 목회상담학자 홍영택은 이중구속(double-bind)을 가족체계적, 실존적, 목회심리학적 차원에서 정의한다. 가족체계적 이중구속은 부모의 모순된 기대가 자녀의 도덕적 형성을 방해하 는 구조적 딜레마를 초래하며, 실존적 이중구속은 인간이 개별성과 관계성, 자유와 운명 사이에 서 갈등하는 구조적 긴장을 의미한다. 목회심리학적 이중구속은 종교적 신념 체계가 도덕적 자 학(moral masochism)과 결합하여 신경증적 죄책감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홍영택과 카 드는 모두 이중구속이 도덕적 형성을 왜곡하고, 피억압자가 어떤 선택을 해도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억압을 낳는다고 본다. 그러나 홍영택은 신학자로서 신앙적 초월을 통해 이중구속 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며, 참된 신앙인은 자기 초월을 통해 실존적 긴장을 해소하고 도덕적 회복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홍영택, “이중구속에 대한 목회상담학적 접근,” 「신학 사상」 160 (2013/봄), 43-74.

42)  ‘훼손’이라는 다소 어색한 번역어는 주로 상이군인의 트라우마에 대한 논의에서 사용하는 ‘도덕적 손상’(moral injury)이라는 번역어와 구별하기 위해 채택하였다.

 

여성 억압과 아동 학대는 역사적으로 얽혀있다. 둘 다 도덕적 훼손을 초래하며(morally damaging), 하나의 해로운 효과가 종종 다른 하나 를 악화시킨다.

억압은 선택을 조작하여 일부 결정을 어렵게 만들고 다른 결정을 지나치게 매력적이거나 쉽게 만든다.

이는 열악한 보육 환경을 조성하고, 취약한 사람들 — 연약함으로 특징지어지고 어린 아이 같은 특성을 체득하도록 교육받은 여성들과 — 을 성적 학대의 대상으로 지정함으로써 아동 학대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며, 돌봄 책임자들이 책임을 지지 않도록 보호한다.43)

억압이 만드는 구성적 악운에 쉽게 노출됨에도, 카드는 억압의 피해 자들이 동료와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윌 리엄스와 네이글 이후 도덕적 책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도덕 운에 대한 논의는 책임을 ‘공로’의 관점에서 이해하여 운이 어떤 사건의 도덕적 원 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행위자는 이 일에 대한 공로 혹은 비난을 받 아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44)

 

43)  Card, Unnatural Lottery, 41.

44)  Ibid., 22, 28-29.

 

하지만 이런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는 도덕성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억압받는 자를 도덕적으로 훼손한다는 점에서, 억압의 상황에서 “운은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의의 부재를 나타내”며, 이런 기본적인 정의의 부재 속에서 도덕적 책임을 논하는 것은 실제로 응보적 정의의 근간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 피해자 는 지속적인 트라우마와 심리적 압박으로 인해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기 어려우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들이 폭력적인 상황에서 방어적으로 행동했다면, 그 행동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이에 반해 카드는 도덕적 책임을 공로의 관점이 아닌 덕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도덕적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무가 아닌 ‘성취’로 여긴다.45)

그 는 윌리엄스나 네이글처럼 과거지향적 관점에서 운의 우연성에 맞서 상 황을 통제하기 위해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 관점에 서” 상황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책임을 지는 것을 더 중시한다.46)

그리 고 미래 지향적 관점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우리를 분열시키는 구성적 악운 속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되지 않는 완전성(integrity)을 의식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47)

 

45) Ibid., 22.

46) Ibid., 23.

47)Ibid., 24.

 

가장 중요한 윤리적 성취 중 하나는 개인 의 통합성을 함양하고 유지하며, 적대적인 조건에서도 우리가 충실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4. 구조적이고 구성적인 악운과 조건부 번영

 

카드가 구성적 운을 경험함으로써 자아가 도덕적으로 훼손되는 방식 과 그 훼손을 극복하여 온전하고 책임 있는 주체로 서는 것을 강조했다 면, 리사 테스만은 좋은 삶의 가능성이 부정적으로 영향을 받을 때 발생 하는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며, 지속적인 억압을 겪는 사람들이 겪는 회복할 수 없는 도덕적 훼손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을 마련하고자 한다.

테스만은 규범적 페미니스트 해방 이론들이 구조적 문제를 인정하면 서도, 해방을 위한 덕목(용기, 분노, 의리 등)으로 성격을 변화시키는 일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점을 간과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억압받는 주체 가 욕망과 원칙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고, 규범적 모델에 따라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48)

그러나 예를 들어 성차별적 직 장에서 일하는 여성은 평등을 원하면서도 직업 안정을 위해 갈등을 피하 려는 욕망 사이에서 심각한 내적 충돌을 겪을 수 있다.

성격 변화는 단순 한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기대와 제도적 억압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제약된다.

이럴 때 억압받는 자들에게 해방을 위한 덕목은 ‘부담스러운 덕’(burdened virtues)이 된다.49)

이런 의미에서 테스만은

“페미니스트 윤리학 및 사회 정치 이론에서 지배적인 규범적 이론화가 도덕적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잘못된 긍정적 인 태도를 가지면서 도덕적 실패를 은폐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50)

따라 서 테스만은 억압의 사실을 진정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어떤 도덕적 훼 손은 해방에 관한 규범 이론들이 제시하는 방법(누스바움의 공감이나 카드의 책임의 성취 등)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다 소 과격한 주장을 한다.

이 가능성을 받아들여야만 불리한 조건에도 불 구하고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일의 의의와 방법을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 다.51)

테스만은 카드의 구성적 악운과 도덕적 훼손의 논의가 이 어려움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텄다고 평가하지만, 그가 도덕적 훼손을 바로잡기 위한 해결책을 제안하는 데 있어 너무 쉽고 빠르게 접근한다고 본다.52)

이를 해결하기 위해 테스만은 ‘구조적이고 사건적인 악운’(systemic, incident bad luck)과 ‘구조적이고 구성적인 악운’(systemic, constitutive bad luck)의 개념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53)

 

48) Ibid., 25.

49) Ibid., 107-131.

50) Lisa Tessman, “Idealizing Morality,” Hypatia 25 (2010/Fall), 798.

51) Lisa Tessman, Burdened Virtue: Virtue Ethics for Liberatory Struggl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23.

52) Ibid., 17-23. 53) Ibid., 27.

 

전자는 자유, 자 원, 권력 박탈과 같은 외부적 한계를 통해 억압받는 자의 번영을 방해하 며, 특정 사건이나 상황에 의해 발생하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개인의 권리를 제한한다.

예를 들어, 경제 불황으로 인한 실직이나 정치적 탄압 으로 인한 표현의 자유 제한이 이에 해당하며, 사회적 저항과 정책 개혁 을 통해 극복될 가능성이 있다.

반면 구조적이고 구성적인 악운은 억압 적 조건이 개인의 도덕성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단순한 권리 박탈을 넘어, 억압받는 환경이 개인의 성격과 행동을 왜곡하는 문제로, 예컨대 불평등한 사회에서 성장한 개인이 도덕적 가치 관 자체가 왜곡되는 상황을 포함한다.

이러한 악운은 단순한 저항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내면적 성찰과 변화가 필요하지만, 억압적 구조 속에 서 이는 때로 불가능할 수도 있다.54)

테스만은 구조적이고 구성적인 악운 개념이 덕 윤리적 관점에서 억 압받는 자를 부당하게 비난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도덕성이 훼손되는 구 조와 심각성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데 유용하다고 본다.55)

 

54) Ibid., 27-29.

55) Ibid., 36–39.

 

덕 윤리에서 는 심리적 손상(psychic damage)과 도덕적 훼손을 분리하지 않기 때문이 다.

반면 의무론과 같은 행위 중심 윤리 이론은 외부 요인(운)이 정신적 손상을 초래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 손상이 성격 결함이나 악의로 이어지면 행위자는 도덕적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식민 지배로 인해 형성된 바람직하지 못한 성격이 특정 해로운 행동으로 이어 졌을 때, 행위 중심 윤리는 정신적 손상의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충 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행위자를 비난할 수 있다.

반면 덕 윤리는 인간의 번영을 방해하는 심리적 손상을 곧 도덕적 훼손으로 간주한다.

 

덕 윤리적 관점에서 (중략) ‘손상’으로 분류될 수 있는 모든 심리적 특 성은 실제로 도덕적 특성, 즉 성격 특성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는 우 리가 그러한 심리적 특성을 손상이라고 지칭할 때, 그 특성이 인간의 번영을 방해한다는 부정적 판단을 이미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심리적이고 도덕적 손상은 불의한 일을 당했을 때 분노 대신 죄책감 이나 체념을 느끼는 경향, 지속적인 절망감을 느끼는 성향, 타인을 조종하거나 거짓말하는 습관, 자신감의 결여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 난다.56)

 

그렇다면 덕 윤리에서 도덕적 논의는 유해한 결과에 대한 책임 논의 에서 벗어나 바람직하지 못한 성격을 만들어 낸 사회적 조건의 불의를 향할 수 있다. 여기서 테스만이 억압의 영향으로 인해 형성된 바람직하지 못한 성 격이나 유해한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는 바람직하지 못한 성격을 형성하게 만드는 구조적이고 구성적 악운 의 강력한 성격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억압으로 인한 도덕적 훼손이 회복하기 매우 어렵고, 때로는 어떠한 처방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본질적이고 심각하다면, 그리하여 억압받는 자 들이 좋은 삶을 일굴 가능성을 시작부터 근본적으로 방해한다면, 해방적 담론들은 그러한 회복 불가능한 훼손까지도 이해하고 인정한 후에야 ‘그 럼에도 불구하고’의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테스만은 희망이나 낙관적 기대가 없는 상태에서도 도덕적 실천을 지속하는 일이 가능하며 또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좋은 삶을 ‘이상적 번 영’(idealized flourishing)과 ‘조건부 번영’(conditioned flourishing) 두 가지 로 구분한다. 전자가 억압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 가능한 번영이라면 후자는 억압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부분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번영을 의미한다.57)

 

56) Ibid., 37.

57) Lisa Tessman, “Expecting Bad Luck,” Hypatia 24 (2009/Winter), 9-28.

 

억압받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조건부 번영만을 경험할 가능 성이 크며, 이는 이상적 번영에 비해 충분히 좋은 상태로 여겨지지 못할 수 있다.58)

 

58) Ibid.,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부 번영을 위해 이루어지는 다양한 시도들이 — 전통적인 윤리학에서 옳거나 덕이 있는 행위로 정의하기 어 려울지라도 — 갖는 도덕적이고 또 저항적 함의를 이해하고 또 그것을 윤리학의 주제로 다루는 것은 중요하고 주장한다. 억압받는 이들은 종종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해야 하며, 어떤 날 은 윤리적 실천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날들 속에서도 도덕적 삶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과, 여전히 의 미 있는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바로 이 점 에서, 후기식민 사회의 해방 윤리는 기존 윤리학이 전제했던 도덕적 성 취와는 다른 형태의 도덕적 지속성을 탐구해야 한다. 윤리적 실천이 완 벽하지 않아도, 때로는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아도, 그 지속이 가능하다 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절망에 빠지지 않고 해방을 향한 여정을 이어가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Ⅳ. 나가는 말 ― 완전한 번영에 대한 낙관적 기대 없이도 변화를 일구어 나가는 일

 

본 연구는 피식민자가 서구/비서구, 지배/피지배의 단순한 이원론의 일부가 아니라 저항과 전복의 가능성을 가진 역동적 주체임을 긍정하면 서도, 피억압자의 저항이 항상 가능하고 지속적일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스피박이 제기한 하위주체의 발화 불가능성 문제는 바바의 혼종 적 주체가 갖는 낙관적 시각이 충분히 포착하지 못하는 지점을 드러낸 다.

본 연구는 하위주체가 비판적 협상의 테이블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 은 스피박이 제기한 재현의 문제를 넘어, 협상에 필요한 도덕적 역량 자 체가 역사적·사회적 억압 속에서 약화했기 때문이라 점을 도덕 운의 개 념을 통해 밝히고자 했다.

카드와 테스만의 연구는 식민 지배와 같은 구조적 억압이 외부적 자 원의 박탈을 넘어, 피억압자의 성격과 도덕적 역량 형성에 깊이 개입하 여 좋은 삶을 방해하는 방식을 분석한다.

특히 테스만의 구조적이고 구 성적인 악운의 개념은 행위 중심 윤리학이 전제하는 보편적 도덕성이 식 민 지배의 현실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행위 중심 윤리는 모든 인간이 합리적 이성을 기반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 다고 보지만, 이는 억압이 개인의 도덕적 역량 자체를 형성하고 제한할 수 있다는 현실을 간과한다.

덕 윤리적 접근은 도덕성의 형성이 개인의 도덕성에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적 조건에 깊이 의존한다는 점을 강조한 다.

이를 통해 식민 지배가 피식민인의 도덕적 역량을 어떻게 약화하는 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작업은 피억압자의 저항 가능성을 부정하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 려 변혁이 지속되기 위해 어떤 윤리적 조건이 필요한지를 더 면밀히 탐 구하기 위함이다.

테스만의 조건부 번영 개념은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구조적 억압 속에서도 변혁을 추구하는 이들은 완전한 이상적 번영에 대한 낙관적 기대 없이도, 억압이 지속되는 환경에서도 부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조건부 번영을 추구해 나간다.

하위주체가 협상 테이블에서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때로는 그 테이블 밖 에서 목소리를 내야 할 수도 있다.

어떤 순간에는 최적의 선택을 할 수 없으며, 심지어 윤리적 실천을 지속할 정신적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조건 속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모 색하는 것과, 변혁을 완전히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노력은 즉각적인 성과나 완전한 번영을 전제하지 않는다.

도덕적 실패와 훼손, 실패한 협상과 제한된 발 언의 한계까지도 해방의 과정으로 포용하며,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좌절을 미래를 향한 동력으로 전환하는 윤리적 시각이 필요하다.

신앙 공동체는 이러한 변혁적 실천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덕적 형성 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어야 하며, 이는 개인의 덕성을 강조하는 기존 윤리적 틀을 넘어, 도덕적 탁월함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변화시키 고, 억압적 환경 속에서도 윤리적 실천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공 간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59)

 

59) 기독교윤리학자 문시영은 하우어워스의 신정론에 대한 논의를 도덕 운과 연결하여 해석하면서, ‘통제할 수 없음’이 기독교인의 도덕적 형성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설명한다. 하우어워스는 덕 윤리적 관점에서 인간의 고통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전통적 신정론의 시도를 거부하고, 고 통 속에서도 ‘답 없이 살아가기’를 배우고, 교회를 덕의 공동체로 형성하는 것이 신앙적 실천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시영은 하우어워스가 도덕 운을 개인적 실존의 문제로 접근 하는 경향이 있어,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이 특정한 집단의 도덕적 형성을 어떻게 제한하는지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진다고 지적한다. 문시영, “고통의 문제에 대한 덕 윤리의 통찰 - 하우어워스를 중심으로,” 「장신논단」 52/5 (2020/12), 131-152.

 

 

한국적 후기식민 상황에서 신앙 공동체의 윤리적 실천에 대해 고민하기 위해서는 본 연구가 적용한 서구의 덕 윤 리와 도덕 운 개념은 동양의 덕(德)과 운(運) 개념과의 비교, 고찰하는 후 속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후속 연구에서는 가족과 공동체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동양의 덕에 관한 전통적 이해가 후기식민 사회의 도덕적 약화 극복에 어떤 통찰을 제공할 수 있는지 탐구함으로써 본 연구의 이 론적·실천적 적합성을 높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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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본 연구는 식민 지배가 피식민인의 도덕적 역량을 손상시켜 좋은 삶 을 영위하는 것을 방해하는 방식과 그 심각성을 도덕철학의 ‘도덕 운’(moral luck) 개념을 통해 분석한다. 후기식민주의 비평가들이 식민주 의의 다층적 영향력을 분석해왔으나, 식민 지배가 피식민인의 도덕적 역 량에 미치는 영향은 주목받지 못했다. 본 연구는 후기식민주의 비평의 주체성에 대한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하위주체가 비판적 협상의 테이블에 접근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로 ‘도덕적 약화’(moral debilitation)의 문제에 주목한다. 덕 윤리적 관점에서 마사 누스바움, 클라우디 아 카드, 리사 테스만의 도덕 운에 대한 논의를 검토하여, 식민 지배가 물질적·정치적 억압을 넘어 피식민인의 도덕적 역량 자체를 약화하는 구 조적 메커니즘을 규명한다. 특히 테스만의 ‘조건부 번영’ 개념은 억압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의미 있는 윤리적 실천을 모색할 이론적 기반을 제 공한다. 본 연구는 완전한 번영에 대한 낙관적 기대 없이도 지속 가능한 도덕적 실천의 가능성을 탐색함으로써, 한국 사회가 식민주의의 도덕적 유산을 극복하고 새로운 공동체적 윤리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주제어 도덕 운, 좋은 삶, 선의 연약함, 도덕적 훼손, 부담스러운 덕, 후기식민주의 덕 윤리

 

Abstract

On Systemic, Constitutive Bad Luck that Interferes with a Good Life — A Virtue Ethical Approach to Postcolonial Critique Hyebin Hong Doctor’s Degree(Ph. D.), Christian Ethics School of Theology Boston University This study analyzes how colonial rule impedes the colonized from leading a good life by damaging their moral capabilities, examining the severity of this damage through the philosophical concept of “moral luck.” While postcolonial critics have analyzed the multilayered impacts of colonialism, the influence of colonial domination on the moral capabilities of the colonized has not received adequate attention. This research critically examines postcolonial critique’s discussions on subjectivity, highlighting “moral debilitation” as one of the reasons why subalterns cannot access the table of critical negotiation. From a virtue ethics perspective, it examines discussions on moral luck by Martha Nussbaum, Claudia Card, and Lisa Tessman to identify the structural mechanisms through which colonial rule weakens the moral capabilities of the colonized beyond material and political oppression. Particularly, Tessman’s concept of “conditioned flourishing” provides a theoretical foundation for meaningful ethical practice even in situations where oppression persists. This study aims to contribute to Korean society’s efforts to overcome the moral legacy of colonialism and build a new communal ethics by exploring the possibility of sustainable moral practice without optimistic expectations of idealized flourishing.

 

Key Word (Moral Luck, Good Life, Fragility of Goodness, Moral Damage, Burdened Virtues, Postcolonial Virtue Ethics)

 

 

논문접수일: 2025년 2월 28일 논문수정일: 2025년 3월 18일 논문게재확정일: 2025년 3월 20일

神學思想 208집 · 2025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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