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도연명의 새로운 이상적 인간 ‘철인’과 ‘달인’ ― 금(琴)의 의상(意象)을 중심으로/盧又禎.대구大

jn209 2025. 6. 28. 19:05

1) 目 次

1. 들어가며

2. 현학 사조와 동진 말 송 초의 도연명 3. 도연명의 새로운 이상적 인간의 제시

   1) 철인, 무위(無爲)로의 자발적 인간 완성

   2) 달인, 삶의 주체성과 자연(自然)의 인간 완성

4. 나오며

 

 

1. 들어가며

 

공자가 도덕 감정과 정치 관념을 ‘예악(禮樂)’으로 관철시킨 이래로, 중국 고대 사회의 사상과 문예는 유가 학설에 도가 사상이 대립하거나 보충하는 것이 기본 맥락이 되었다.1)

 

    1) 리쩌허우, 《미의 역정》, 이유진 역, 파주: 글항아리, 2014, 106-107쪽. 

 

한(漢) 초에 이미 육가(陸賈)는 역사는 진화하고 발전하므로 인위(人爲)와 무위(無爲)를 결합한 통변(通變)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통변과 통물(通物, 物理와 人情의 통달)이 가능한 ‘성인(聖人)’을 이 상적 인간으로 제안하였다.2)

중국 고대의 유가와 도가 사상의 ‘통변’ 정신은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기 위해 새로운 인간관을 모색하는 시대 미학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현학(玄學)은 위진 시대의 정치, 문학, 문화, 예술 등의 영역에 영향을 미 쳤다. 현학 사조는 위진의 사인들에게 고도의 이론적 사유와 사변적인 특징 을 고양시켜 위진 문학이 철리적인 특색을 갖는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동진 (東晋)에 들어서서 사인들은 노장(老莊)의 자연(自然)과 불교(佛敎)의 허심 (虛心)을 접하면서 강남의 유려한 산수에서 편안한 심태를 유지할 수 있었 고, 현학 사상의 사변과정을 경험하며 독특한 심미취미를 문학으로 끌어오며 예술적 분위기와 진솔한 감정이 충만한 인생 경계를 지향하였다.

동진 중기 이후 사인들의 지적 교류는 청담(淸談)에서 불리(佛理)를 포함한 현담(玄談) 의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이 밖에 산수 유람을 비롯하여 시문(詩文), 음악 (音樂), 서법(書法), 회화(繪畵), 바둑과 같은 예술적 취향으로 자신의 특출 한 문화적 소양을 드러내면서,3) 인격미와 예술미를 갖춘 이상적 인생의 형 상들을 삶으로 구현해내었다.

 

    2) 류쩌화, 《중국정치사상사2》, 장현근 역, 파주: 글항아리, 2019, 34-39쪽.

   3) 羅宗强, 《魏晉南北朝文學思想史》, 北京:中華書局, 1996, 96-99쪽. 

 

동진(東晋) 말 도연명(陶淵明)의 시에 등장하는 음주(飮酒), 독서(讀書), 고금(鼓琴), 작시(作詩)는 도연명의 인생의 정취를 드러내는 의상(意象)이 자, 그의 이상적 인생을 철학, 예술, 문학으로 구현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특 히 ‘금(琴)’은 도시(陶詩)에 빈번히 출현하는데, ‘어려서부터 거문고와 책을 배웠고(少學琴書)”(<與子儼等疏>)’, “거문고와 책으로 즐기면서 근심을 없앴 으며(樂琴書以消憂)”(<歸去來兮辭>), “즐겁게 서적을 읽고 칠현금을 연주했다 (欣以素牘, 和以七絃)”(<自祭文>)고 하며, 도연명 자신이 금(琴)에 능숙하고 악(樂)을 애호했음을 분명히 밝힌다.

공자가 예악으로 선(善)에서 미(美)로 진입한 심미적인 ‘인간의 완성’을 제시한 이래로, 이러한 관념은 한대를 거쳐 위진 시기로 이어졌으며, ‘악(樂)’으로 대표되는 ‘금(琴)’은 위진 사인이 문화 소양을 갖췄음을 의미하는 보편적인 악기로 인식되었다.

건안시기에 인간의 개성, 감정, 욕망을 중시하는 풍조가 형성되고, 정시(正始) 시기에 출현한 현 학 사조가 발전함에 따라 사인들은 인간 존재에 대해 성찰하며 자아의 개성 과 욕망을 각성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음악의 악기와 문학 창작자의 개성과 감정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게 되었다.

동진에 들어서서 사인들에게 ‘금(琴)’ 을 배우고 악(樂)을 이해하는 것은 유가가 제시하는 사회적 공리와 효능에 도달하기 위한 목적성에서 벗어나서, 사인들의 고아한 인생 정취와 인생에서 의 심미를 향유하는 아취(雅趣)로 발전한다.

동진 말 도연명 시의 금의 의상 은 사회적 선을 실현하여 예술의 미로 진입하려 한 이상적인 인생과 인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함축되어 있으며, 동진 시기 사인 문화의 진화와 예술의 심미에 대한 탐구가 반영되어 있다.

이 글은 현학사조가 종식되고 정치적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동진 말 송 초’ 의 특수한 시기에 도연명이 ‘이상적 인간’, ‘인간 완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시의 문체로 창작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도연명의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규명하고자 한다.

도연명이 인간 완성에 대한 자신의 정치 철학과 인생 철학 을 시에 유입하기 위해 금(琴)의 의상(意象)을 활용하였고, 고금(鼓琴)의 아 취와 예술의 심미성을 통해 인간 존재와 인간 삶의 의미를 미적으로 승화시 켰음을 확인할 것이다.4)

이것은 도연명과 중국 문학, 중국 사상, 중국 미학 의 관계에서, 위진 시기 성행한 현학 사상과 도연명의 문학은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중국 미학과 도연명의 시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 는 작업이다.5)

 

    4) 본 연구는 도연명이 ‘琴’의 의상을 자신의 정치 철학과 인생 철학을 전달하는데 운용하 였다는 점에 중점을 두었다. 도연명과 琴의 관계에서, 南北朝의 史書와 傳記에서 제기 되어 후인의 주목을 받은 無絃琴과 不解音律의 문제는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5) 陳寅恪은 도연명을 新自然說을 창시한 대사상가로, 袁行霈는 陶詩를 ‘哲人’이 시의 형 식으로 쓴 철학저서라고 보았다.(袁行霈, 박종혁 외 역, 《도연명 연구》, 고양: 학고방, 2017, 4-5쪽.) 두 학자는 도연명을 중국사상사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로 부상시킨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도연명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간과되었던 도연명 문학과 위진 현학, 도연명과 인간 완성에 주목한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중국사상사, 중 국미학사, 중국문학비평에서 배제되었던 도연명이 재평가될 수 있는 실마리 를 마련하고자 한다. 

 

2. 현학 사조와 동진 말 송 초의 도연명

 

중국 고대 철학 사상은 중국 고전 미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유불도 (儒佛道) 철학 사상에서의 ‘성인관(成人觀)’, ‘인간 완성’의 문제는 철학의 영 역에서 예술과 심미 영역으로 확장된다.6)

따라서 중국 고대 철학에서 제기 된 이상적인 인격과 인생의 문제는 미학적 인간의 탐구로 귀결된다.

그래서 중국 고대 철학은 ‘성인(成人)’의 문제를 핵심으로 삼아 유가는 ‘성인(聖人)’ 을, 도가는 ‘진인(眞人)’과 ‘지인(至人)’을, 불가는 ‘성불(成佛)’을 제시하며 이 상 인격에 도달한 인간의 완성을 실현하고자 한다.

공자는 인간의 성정을 함 양시키는 도덕적 감화력에 주목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시(詩)와 예악(禮樂)의 교화 기능을 강조하였다.

공자는 “시에서 감흥을 일으 키고, 예에 서며, 악에서 완성한다”7)고 하여, 인(仁)을 지향하여 사회적으로 선(善)을 실현한 다음에 미(美)의 가치로 진입한 인간의 완성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한대(漢代)에 동중서(董仲舒)가 유가를 독존하게 하여 양한(兩漢) 기간 유 학은 강력한 관학(官學)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한말 사인(士人)들은 조정의 덕치(德治)가 무너지자 경학을 정신의 지주로 삼아 정권이 작동하는 것에 동요하고, 명교(名敎)로 현실 사회가 구제될 수 있다는 신념에 대해 회 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유가의 명교를 중심으로 한 통치 방법이 유효 하지 않다는 담론은 사상과 정치의 동요로 이어지며, 통치자들은 새로운 인 간형과 이상적인 인재를 모색해야 하는 시대적 문제에 봉착하였다.

이에 따 라 새로운 사조의 출현이 요구되며 두 가지 사조가 출현하였다.

하나는 명실 (名實) 논쟁과 재성(才性) 논법을 융합한 명법(名法) 사조이고, 다른 하나는 명교(名敎)와 자연(自然)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주된 사유 방법으로 한 현학 (玄學)이다.8)

 

     6) 한린더, 《한권으로 읽는 동양미학》, 이창훈 역, 서울: 이학사, 2012, 169쪽.

     7) 《論語⋅述而》: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

     8) 류쩌화, 《중국정치사상사2》, 장현근 역, 파주: 글항아리, 2019, 914쪽.

 

현학은 위진(魏晉) 시기 심원한 영향을 미친 사조로, 한(漢)의 유가 사상이 위진 현학(玄學)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출현한 명리학(名理學)사조의 영향을 받았다.

명리학은 인재(人才) 문제를 토의하면서 사람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중시하여, 사람의 가치를 발굴하고 사람의 특징을 품평, 감별 하여 이상적 인격을 만들어내었다.9)

 

    9) 류쩌화, 《중국정치사상사2》, 장현근 역, 파주: 글항아리, 2019, 938쪽. 

 

위진 시기에 발생한 현학은 학술에서의 명교와 자연의 철학적 문제를 담론하고, 현실적 측면에서는 세계의 본질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유무(有無)의 철학적 문제로 탐구하며 이상적 인간을 모 색하였다.

현학 사조의 발생과 성행에 따른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위진 사인의 새로운 인간상을 모색하는 시대정신, 시대미학과 연관되어 있다.

위진(魏晉, 220-420) 시기에도 유가 사상은 여전히 가장 위력 있는 이데 올로기로서 작동하였지만, 중국 역사상 위진은 유학이 가장 쇠미한 시기로 평가된다.

특히 위진은 중국 역사에서 사상, 학술, 문화의 다원화가 가장 두 드러지고 유가(儒家), 도가(道家), 불가(佛家) 사상의 학술적 통변(通變)이 자유로웠던 시기이다.

위진 정시(正始) 시기 하안(何晏), 왕필(王弼)에 의해 발생한 현학(玄學)은 독보적 위상의 유가(儒家)를 《노자(老子)》, 《장자(莊 子)》, 《주역(周易)》을 중심으로 담론하는 학술 사조로, 명교(名敎)와 자연(自 然)의 관계를 현실적 측면에서 유(有)와 무(無)로 분석하고 파악하려고 하였 다.

현학가(玄學家)들이 명교와 자연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무(無)’를 인정한 것은, 유가(儒家)와 도가(道家), 인위(人爲)와 무위(無爲), 인의(仁義)와 개 인의 욕망, 감정, 개성의 충돌이 학술적 논의로 돌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학 사조는 동진 말까지 발전하면서 사인들의 철학적 사유와 사변을 촉진시 켜 중국 고전시의 철리화 경향을 형성하였고,

 사인들이 노장철학의 인생 태 도와 인생 경계를 시에 유입하도록 하였다.

한대 이후 삼현경(三玄經)은 지식인들의 필독서였고, 한나라 때 불교(佛 敎)가 중국에 유입되어 불경이 번역, 전파되면서 학문적 교섭과 지식의 통섭 은 자유로웠다.

위진 시기 지식인들에게도 유가, 도가, 불가 사상의 회통과 흡수에 대한 사상적 경계는 압박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정시 시기에도 유가 사상은 정권의 중추적 지위에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사인에 게 주류적 영향은 현학 사조였으며, 담현(談玄)은 사림(士林) 풍조에서 특유 한 문화소양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10)

현학 사상의 발전 추세가 형성되자,  명사들이 명교와 자연의 관계를 분석하는 사유 방법에서 토론한 논제들은 매 우 광범위한데, 생사(生死), 성인유정무정(聖人有情無情), 본말유무(本末有 無), 성무애락(聲無哀樂), 공사(公私), 양생(養生), 언진의(言盡意) 등이다.

현학가들의 담론은 삼현으로 현원(玄遠)과 현리(玄理)를 추구하는 것으로 표 면화되었지만, 사실상 현학은 정치 철학의 위치에서 논제들을 토론함으로써 유가(儒家) 명교(名敎)의 합리성에 대한 재인식을 진행하는 것이었다.11)

동진 시기에 현학(玄學)과 불학(佛學)이 교융(交融)되고 융합되는 현상이 출현함으로써12) 정시 시기부터 200년간 지속된 현학은 동진(東晋, 310- 420) 말에 이르면 거의 종식되고,13) 남북조(南北朝) 시기는 불교의 독무대 로 전환된다.14)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현학이 종식되는 동진 말, 불교 가 흥성하는 남조 송 초의 과도기에 창작 활동을 한 시인이다.

따라서 도연 명의 문학과 사상의 관계에서, 도연명의 문학이 유가, 도가, 불가 사상이 충 돌하면서 통섭(通燮)되는 동진 말 송 초에 거대 조류의 영향을 받아 출현하 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더욱이 도연명은 동진 시기의 불학, 도학, 경학 등의 각종 사조가 충돌한 대표적인 지역인 강주(江州) 심양(尋陽)에서 생존하였 다. 동진 말의 심양은 여산(廬山)을 중심으로 한 남방불교가 융성한 지역으 로, 도연명은 유불도의 학문적 융섭과 사상의 회통이 자유로웠던 시대사조와 학술적 분위기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지위를 가진 인물들뿐만 아니라 각종 사상의 신봉자나 학술을 대변하는 인물들과도 교류하였다.15)

 

     10) 羅宗强, 《魏晉南北朝文學思想史》, 北京:中華書局, 1996, 32쪽.

     11) 류쩌화, 《중국정치사상사2》, 장현근 역, 파주: 글항아리, 2019, 914쪽.

     12) 羅宗强, 《魏晉南北朝文學思想史》, 北京:中華書局, 1996, 5쪽.

     13) 許坑生 外, 《위진현학사(하)》, 김백희 역, 서울: 세창출판사, 2013, 269쪽.

     14) 劉宋 시기의 玄學은 兩晉 시기의 현학이 아니라 단지 노장의 학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유송이후부터 남조까지 현학을 담론하는 습관이 남아 있었지만 노장의 문제를 말하였 지 현학을 말하지 않아서, 유송 이후의 현학 담론은 현학의 발전을 보아서는 안 된 다.(《문학유산》 편집부, 이홍진 외 역, 《중국 고전 문학 연구의 회고와 전망》, 서울: 역락, 2010, 148쪽.)

     15) 陶潛, 逯欽立 校注, 《陶淵明集》, 北京:中華書局, 1979, 213-214쪽. 

 

가령, 강주 자 사 왕응지(王凝之)와 사촌 동생 도경원(陶敬遠)은 도교도였고, 여산(廬山)의 혜원(慧遠)과 ‘심양(尋陽)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벗 유유민(劉遺民)과 주속 지(周續之)는 불교도였으며, 도연명의 상관이었던 환현(桓玄)은 자연관을 견 지한 현학파(玄學派)였으며, 친구 조기(祖企), 사경이(謝景夷)는 《예경(禮 經)》을 연구한 경학가였다. 동진 심양은 사상이 융화되는 조류와 학문이 통섭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연명의 문학에도 유가적 요소와 도가적 요소, 그리고 당시 성행한 불학(佛學)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도연명이 시의 형식으로 사상을 표현하였기 때문에 그 사상적 요소를 분별해 내기가 어렵다. 유불도 의 사상 가운데, 도연명 시에 표층적으로 드러난 많은 요소가 유가사상의 경 전에서 나왔다.

그래서 도연명이 경술(經術)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도가, 불가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명료하게 드러난다.16)

그러나 주목할 점 은 도연명이 시에 유가 사상을 이입했다 할지라도 유가의 사상을 재해석 했 다는 점이다.

도연명 시의 《논어》는 유가의 본의(本意)를 벗어났으며, 도연 명 시의 공자(孔子)는 원형 그대로 운용되지 않았는데,17) 이것은 도연명이 위진 현학의 영향을 받은데 기인한다.

더욱이 도연명의 주요 철학 개념은 유 가 경전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18) 도연명 문학의 독창적 사상과 철학적 사 유의 연원은 위진 현학 사조에서의 ‘도가 사상’과의 관계를 통해 파악해야 한다.

도연명은 유가, 도가, 법가, 묵가, 명가, 음양가 등을 학습하며 특정 사상 에 전념하지 않았고 《초사(楚辭)》, 《회남자(淮南子)》, 《열자(列子)》 , 《사기 (史記)》, 《한서(漢書)》, 《목천자전(穆天子傳)》, 《산해경(山海經)》등의 도가 서, 역사서, 신화서를 널리 독서했다.19)

 

    16) 眞德秀, <跋黃瀛甫擬陶詩>: “나는 근래에 시를 평하는 사람이 ‘연명의 말은 매우 고아 한데 그 말이 가리키는 것은 장자와 노자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내가 살펴보니 연명 의 학문은 바로 경술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것을 시로 형상화하였어도 감출 수가 없다 (予聞近世之評詩者曰, 淵明之辭甚高, 而其指則出於莊老.……以余觀之, 淵明之學, 正自 經術中來, 故形之於詩, 有不可掩).”(北京大學中文系文學史敎硏室等 編, 《陶淵明資料彙 編》, 北京:中華書局, 1962, 104쪽.)

    17) 袁行霈, <陶淵明崇尙自然的思想與陶詩的自然美>, 《陶淵明研究》, 北京:中華書局, 2009, 58- 59쪽.

    18) 袁行霈, <陶淵明崇的哲學思考>, 《陶淵明研究》, 北京:中華書局, 2009, 16-17쪽. 

 

이 가운데 도연명이 가장 가까이 두 고 숙독한 책들은 《시경(詩經)》, 《초사(楚辭)》, 《장자(莊子)》, 《열자(列子)》, 《사기(史記)》, 《한서(漢書)》 6권이다.20) 이 목록에서 도연명이 유가와 도가 의 경서와 역사서를 두루 섭렵했으며, 도가의 사상은 《장자》와 《열자》를 통 해 흡수했음을 알 수 있다.

위진 시기에 유행한 《장자》는 곽상(郭象)의 《장자 주》로, 도연명은 곽상을 통해 장자의 철학 범주인 자연(自然)과 독화(獨化) 이론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학의 성행 과정에서 출현한 장담 (張湛)의 《열자주(列子注)》는 노장 사상과 불학 이론을 융합하였는데, 도연 명은 《열자주》를 통해서 소요(逍遙), 자적(自適), 허정(虛靜)의 철학 범주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도연명 시의 도가적 요소에 대해 유학(儒學)의 집 대성자 주희(朱熹, 1130-1200)는 “도연명이 말한 것은 장자와 노자이지만, 표현이 질박하고 고아하다”21)고 하였고, 주자청(朱自淸)은 도시(陶詩)의 용 사(用辭)는 《장자》가 가장 많고, 《논어(論語)》가 두 번째이며, 《열자》를 인용 한 것도 많아, 《장자》와 《열자》의 인용을 합치면 《논어》보다 많은데, 육조부 터 북송까지 대부분 도연명을 ‘은일시인의 으뜸(隱逸詩人之宗)’이라 하고 남 송(南宋) 이래로 그의 ‘충분(忠憤)’의 인격을 널리 확산시켰으니, 도연명 사 상이 유가와 도가의 영향을 받았지만, 유가의 성분이 많은지 도가의 성분이 많은지는 토론해 봐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도시의 주요 사상은 사실상 도가’라고 주장하였다.22)

오태석은 중국문학의 내재미(內在美) 지향의 관념 은 직접적으로 도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문학 창작에서 도연명은 도가 색 채를 띄고 있으며, 도연명 이래 졸박미(拙朴美)의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이어졌다고 보았다.23)

 

     19) 허세욱, 《중국고대문학사》, 서울: 법문사, 1989, 186-187쪽.

     20) 朱光潛, <陶淵明>(北京大學中文系文學史敎硏室等 編, 《陶淵明資料彙編》, 北京:中華 書局, 1962, 362쪽.)

     21) 《朱子語類》 卷136: “淵明所說者莊老, 然辭却簡古.”

     22) 朱自淸, <陶詩的深度>(北京大學中文系文學史敎硏室等 編, 《陶淵明資料彙編》, 北京: 中華書局, 1962, 288-289쪽.)

     23) 吳台錫, 《中國文學批評思維 試論》, 《중국문학》 제29집, 1998, 19-20쪽. 

 

도연명과 불가 사상의 관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 진 시기 흥성한 불교가 신불멸론(神不滅論)을 선전하여 사람들이 영합하자 도연명은 혜원(慧遠, 334-416)의 <형진신불멸론(形盡神不滅論)>24)을 겨냥하여 신멸론(神滅論)의 <형영신(形影神)>을 창작하여 현학관(玄學觀)을 드러 내었으며,25) 공관(空觀)과 자애(慈愛)26)의 불가의 개념을 시에 융합하였다.

도연명은 종교적으로 불교도는 아니며, 그의 시의 불리(佛理)는 당시 불교가 흥성한 거대 흐름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도연명은 동진 말 불교, 도교, 현학 사상이 회통되는 동시에 범람 하면서 부정적인 현실적 문제들이 출현한데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도연명은 유가 경전을 학습하였지만 유교가 명교를 설파하며 사인들이 작위적이고 부 정한 방식으로 명예를 탐내도록 부추기는 것에 대해 비판하였고, 도연명 집 안은 대대로 천도교도였지만 도교의 오두미도(五斗米道)가 부적과 연단(煉 丹)을 선양하며 승선(升仙)하여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을 좇지 않았으며, 현학 사조에서의 무위(無爲)와 자연(自然)을 수용하였지만 고관(高官)과 귀족이 현학의 무위와 자연을 빌어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또 도 연명은 동진 불교의 흥성으로 많은 정치 권력자나 사인들과 마찬가지로 불교 도들과 왕래하며 문화적, 문학적 교류를 하였지만 당시 불교가 종교적으로 정토사상을 선양하며 인과응보와 윤회설을 설파하고 내세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배척하였다.

도연명은 유가사상의 윤리도덕의 가치를 존숭하였으 나 교조주의로 변모된 당시의 유교에 전적으로 회동하거나 찬동하지 않았고,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 허정(虛靜), 소요(逍遙), 자연(自然)을 지향하였지 만 도교의 신선사상과 퇴폐적이고 공허한 청담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불가사 상의 공관(空觀)과 자애(慈愛)는 흡수하였지만27) 불교의 윤회설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24) 노장철학의 용어와 내용으로 불경을 해석하거나 노장의 사상과 절충하여 해석하는 방 법으로, 강남불교의 대표 승려인 혜원도 격의의 방법을 채택할 만큼 상당히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혜원은 유교 경전으로 교육받았고, 《노자》와 《장자》를 공부하였으며, 불 교 이념을 설명하기 위해 저술과 강술에서 도교 용어와 개념에 크게 의지하였다.(아 서 F. 라이트 지음, 최효선 역, 《불교와 중국 지성사》, 서울: 예문지, 1994, 69쪽.)

     25) 陶潛, 逯欽立 校注, 《陶淵明集》, 北京:中華書局, 1979, 213-214쪽.

    26) 劉大杰, 《中國文學發展史》 上, 北京:中華書局, 1984, 245쪽.

    27) 劉大杰, 《中國文學發展史》 上, 北京:中華書局, 1984, 308쪽.

 

도연명의 사상과 문학에서의 공헌은 유가와 도가가 대립하고 도가가 불가사상과 융화하는 상황에서, 통변(通變)으로 유불도의 정수를 흡수하여 ‘조화’ 로 귀결되도록 한 데 있다.

임어당(林語堂)은 “도연명의 사상은 유학의 성분 과 도가의 형상이 있으며, 위진 시기 문학의 낭만주의, 도가(道家)의 한산 (閑散)한 생활, 유가(儒家) 교의(敎義)의 반대와 저항이 200년 동안 진행되 었으나 도연명은 이전 세기의 유가철학과 융합하여 화해로운 인격을 만들어 내었으며, 중국 모든 문학 전통에서 가장 조화롭고 가장 완전하고 훌륭한 인 물이다”28)라고 평가하였다.

도연명이 후대 많은 사인들이 존경하는 시인이 자 인격 전범의 문화 코드가 된 것은 철학 이론과 관념을 제시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삶과 문학에서 ‘조화’와 ‘화해’를 실천해 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진(魏晉)과 남북조(南北朝)가 분기되는 과도시기에 출현한 도연명 문학의 의의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위해서는 도연명과 현학 사조의 관계, 도연명과 도가 사상, 도연명과 불학의 영향 관계를 파악하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 며,29) 도연명의 새로운 이상적 인간에 대한 고찰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 발하고 있다. 

 

    28) 林語堂, 《生活的藝術》, 哈爾濱:北方文藝出版社, 1987, 93-94쪽.

   29) 위진남북조 기간의 문학 연구는 새로운 자료의 발견도 중요하지만 연구자들의 관념의 변화가 더욱 중대하다. 위진남북조 문학 연구에서 획기적인 진전은 관념 면에서 노력 을 해야 하며, 종교 방면, 현학과 문학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가 필요하다. 위진남북조 사상과 문학의 관계에서 유가사상의 개입으로 현학에 대한 부정적 관념이 있는데, 낡 은 틀은 버리고 새롭게 이러한 문제들을 살펴보고 연구 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 東 晋, 南朝 작가와 불교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매우 빈약하여, 陶淵明을 비롯하여 남 조의 시인들과 불교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아직 제대로 깊이 연구하지 못했다. 또한 莊子 사상의 위진남북조 문학에 대한 영향이나 도교 사상의 위진남북조 문학에 대한 영향은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도교는 南北朝 시기에 이미 상당한 높은 수준으 로 발전하였는데, 사상사적 시각에서 문학에 대한 영향은 아직 충분한 연구가 진행되 지 못했기 때문에 불교와 도교의 문학에 대한 영향이 연구되어야 한다.(《문학유산》 편 집부, 《중국 고전 문학 연구의 회고와 전망》, 이홍진 외 공역, 서울: 역락, 2010, 126-148쪽.) 

 

3. 도연명의 새로운 이상적 인간의 제시

 

1) 철인, 무위(無爲)로의 자발적 인간 완성

 

위진 시기 유학은 양한의 경학이 흥성한 시대와 비교하여 침체에 들어서 면서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위진의 사인에게 유가가 유지하려는 명교 (名敎)와 강상(綱常)의 도덕윤리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동진 초기에도 현학의 성행이 계속되며 불교도 흥성하였다.

그렇지만 도연명이 생존한 시기 에도 관학은 여전히 유학이었고, 유가를 숭배하는 사인들이 지배적이었다. 한편 당시 명교를 지향한 사인들로 인한 부작용이 현실적 문제로 부각되었 다.

일면에서는 유가의 조화와 공리를 버리고 개인의 이익을 취하여 부귀공 명을 탐하는 위정자와 관료가 출현하였으며, 다른 일면에서는 지나치게 유가 의 선을 취하되 미를 버려 공리성을 강조한 교조적 인물이나 관료가 출현하 게 되었다.

도연명은 당시 유가 명교의 성인(聖人) 정치의 문제를 겨냥해 ‘철 인(哲人)’ 정치를 주장한다.

 

<勸農>

悠悠上古, 아득한 상고 시대

厥初生民. 태초의 사람들은

傲然自足, 떳떳하고 스스로 만족하였고

抱樸含眞. 순박하고 진실하였다네.

智巧旣萌, 술수와 기교가 싹트게 되자

資待靡因. 필요한 것을 공급할 수 없게 되었다.

誰其贍之, 누가 그들을 풍족하게 해주었나?

實賴哲人. 진정으로 철인에게 의지하였네.

哲人伊何, 철인은 누구였나,

時爲后稷. 이는 바로 후직이었네.

贍之伊何, 어떻게 풍족하게 하였나,

實曰播殖. 실은 씨 뿌리고 모종하게 하였네.

舜旣躬耕, 순 임금은 몸소 밭을 갈았고, 

禹亦稼穡. 우 임금 역시 곡식 심고 거두었다.

遠若周典, 옛날 주나라의 법전도

八政始食. 여덟 가지 정사 중에 먹는 것이 으뜸이었다. ……

孔耽道德, 공자는 道와 德에 열중하여

樊須是鄙. 농사에 대해 배움을 청한 번수를 비루하다 여겼고

董樂琴書, 동중서는 琴과 書를 즐기며

田園不履. 전원을 밟지 않았네.

若能超然, 만약 초연할 수만 있다면

投迹高軌. 옛 철인들의 고귀한 법도를 본받아서

敢不斂衽, 기꺼이 옷을 바르게 하고

敬讚德美. 덕이 아름다움을 공경하고 칭송하지 않겠는가.

 

도연명은 융안(隆安) 2년 두 번째로 출사하여 음모의 장막극의 투쟁을 목 도하였다.

당시 황제 사마창명(司馬昌名)은 주색(酒色)에 빠지고 사마도자 (司馬道子)와 왕국보(王國寶)는 아첨하였고, 동진 왕실과 번진은 서로 잔혹 하게 살해하는 혼란한 시기에 있었다.

도연명은 원흥(元興) 원년(元年, 402 년) 강릉(江陵)에서 상경(上京)으로 되돌아간 후, 그 다음 해 봄이 되자 이주 하여 궁경하며 이 시를 지어, ‘철인(哲人) 정치’를 자신의 정치 철학으로 제시 한다.

도연명은 <권농>을 통해 ‘철인’을 인재로 발탁하여 능력에 맡게 직책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요순과 같은 태평성대를 이룰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의 배경은 당시 사인들이 명교의 성인 정치를 표방하면서 솔선과 공평무 사를 버리고 사사로움으로 권력을 탐하는 부작용이 드러난데 있다.

그렇다면 “철인은 누구인가?”

《시경(詩經)》⋅대아(大雅)⋅억(抑)》에 ‘철인’ 의 개념이 출현하는데,30) 철인은 거짓을 일삼고 부정(不正)한 우인(愚人)과 는 반대 개념으로, 덕에 따라 일을 실행하는 인물이다.

 

    30) 《詩經⋅大雅⋅抑》: “철인들은 좋은 말을 해주면 덕에 따라 실행하지만, 어리석은 사람 들은 도리어 내게 거짓말을 한다. 이르나니 사람들이 각기 다른 마음을 갖고 있도다 (其维哲人, 告之話言, 順德之行. 其维愚人, 覆谓我僭, 民各有心).” 

 

유가는 인간 완성의 최고 경지이자 모범으로 ‘성인(聖人)’을 제시하는데, 공자는 요, 순, 우, 탕,  문, 무왕을 성인의 표준으로 보았다.31)

이들 성인이 인의(仁義)로 통치하면 개인과 사회를 조화시키고 예속의 붕괴로 생긴 각종 정치적, 사회적 해악을 일소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도연명은 황제, 요, 순, 우를 철인 정치의 표준으로 제시한다.

황제, 요, 순, 우는 권력 계승의 방식에서 덕과 재능을 겸비한 인물에게 권력을 선양(禪讓)한 대공무사(大公無私)한 인물들로, 백성 들이 풍족한 의식주와 순박한 풍속을 유지하도록 하는 선정을 펼쳤다.32)

탕 왕으로부터 시작된 무력의 권력 쟁취 방식은 요, 순의 덕치와 선양의 미덕을 상실한 것이다.

그래서 순임금의 도덕 정치는

 

“소리의 아름다움이 지극할 뿐 아니라 그 내용의 선함도 지극한 것이지만, 무(武)의 음악은 소리가 아름다 워도 그 정치의 내용은 지극한 선에 이르지 못한다.”33)

 

    31) 이재영, <공자와 플라톤의 비교연구-성인군주론과 철인군주론을 중심으로>, 《영남국 제정치학회보》 제3권, 2000, 45-46쪽.

   32) 《論語⋅泰伯》의 “위대하도다! 순임금과 우임금은 천하를 가지시고도, 거기에 사사로 이 관여치 않으셨다(巍巍乎, 舜禹之有天下也而不與焉.)”, 《論語⋅泰伯》의 “우임금에 대해서라면 나는 비난할 것이 없다. 자신의 식사를 형편없으면서도 귀신에게는 정성 을 다하셨고, 자신의 의복은 검소하게 입으시면서도 제사 때의 예복은 아름다움을 지 극히 하셨으며, 자신의 집은 허름하게 하면서도 농민들의 관개사업에는 온 힘을 다하 셨다. 우임금에 대해서라면 나는 비난할 것이 없다(禹, 吾無間然矣. 菲飮食, 而致孝乎 鬼神, 惡衣服, 而致美乎黻冕, 卑宮室, 而盡力乎溝洫. 禹, 吾無間然矣).”

   33) 《論語⋅八佾》: “韶, 盡美矣, 又盡善也. 謂武, 盡美矣, 未盡善也.” 

 

무력으로 권력을 획 득하면 음악의 형식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덕치의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한 것 이다.

도연명이 황제, 요, 순, 우를 철인의 표준으로 제시한 것은 권력 이양 과 획득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위정자의 높은 도덕심인 대공무사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가의 성인 정치와 철인 정치는 어떻게 다른가?

도연명은 성인 정치를 표방한 인물로 공자와 동중서를 과감하게 언급하여, 당시의 위정자가 성인 정치를 표방하면서 도덕과 예악의 이론에 몰입하지만 이론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고 백성의 생계를 위해 솔선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공자는 번 지(樊遲)가 농사짓는 법을 직접 배우는 것에 대해 묻자, 번지가 위정자의 덕 목인 예(禮), 의(義), 신(信)을 배워서 백성들에게 농사짓도록 사민(使民)하 려 하지 않고 번지 자신이 농사짓는 법을 직접 배우려 한다며, 공자는 번지 를 소인(小人)이라고 평가한다.34)

이렇게 위정자가 실천이 아닌 예, 의, 신 의 도덕적 행실로 백성을 다스리려고 하는 것에 대해, 《장자》는 공자를 겨냥 하여

“농사짓지 않고 먹고 살며, 길쌈하지 않고도 입고 지낸다. 입으로만 옳 고 그름을 판단하며 천하의 임금을 미혹시키고 천하의 학자들이 학문의 근본 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다”35)고 말한다.

공자의 ‘성인’은 인격적으로 지극 히 고상한 존재이자 군자(君子), 현자(賢者)의 경지를 종합하여 덕치를 이룩 할 수 있는 인격의 완성자이다.

그러나 공자가 요순과 같은 ‘성인’의 정치에 서 추구한 사회적 목표는 서주(西周) 시대 이래의 봉건종법제도 사상을 계승 하여 백성들이 ‘의(義)’의 도덕규범에서 재화를 추구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드는데 있었다.36)

 

     34) 《論語⋅子路》: “번지가 농사짓는 법을 배우기를 청하였다. 공자는 “나는 늙고 숙련된 농사꾼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채소 기르는 법을 청해 묻자 공자는 “나는 채소를 심는 데 숙련된 늙은이만 못하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가 말했다. “소인이로다, 번지여! 윗 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들은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의로움을 좋아 하면 백성들이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으며, 윗사람이 신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 히 진정으로 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만 한다면 사방의 백성들이 그들의 자식을 포대기로 싸서 업고 찾아오게 될 텐데 농사짓는 법을 무엇에 쓰겠는가(樊遲請 學稼. 子曰, 吾不如老農. 請學爲圃. 曰吾不如老圃. 樊遲出. 子曰, 小人哉, 樊須也. 上好 禮, 則民莫敢不敬, 上好義, 則民莫敢不服, 上好信, 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 則四方之 民襁負其子而至矣, 焉用稼).”

    35) 《莊子⋅盜跖》: “不耕而食, 不織而衣, 搖脣鼓舌, 擅生是非, 以迷天下之主, 使天下學士, 不反其本.”

    36) 조원일, 《공자의 성인관 연구》, 《동서철학연구》 제67호, 2013, 272쪽. 

 

이는 권력층이 백성들에게 노동하게 하는 구 조라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노동하지 않는 자와 노동하는 자로 계층화 되어, 결과적으로 백성이 노동을 해도 민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도 연명은 백성과 함께 농사에 참여하는 요, 순, 우를 철인으로 제시하여 솔선 과 무사(無私)의 도덕으로 백성을 위해 노동하는 위정자가 요구된다고 보았다.

동중서는 학문과 금예(琴藝)가 높은 경지에 이른 인물로, 공자의 유교 철 학에 음양사상을 통합하여 유교의 국교화를 이루고 사인들에게 인, 의, 예, 지, 신의 수양 덕목을 체계화시켜 한나라의 통일 체제에 기여하였다.

유가의 예악(禮樂)은 유가 정치사상의 핵심이다.

‘예’는 국가와 사회의 각종 제도와 규범을 나타내고, ‘악’은 예에 상응하는 인간의 도덕 감정과 문화 심리를 나 타낸다.

예는 백성의 절도를 음악은 백성의 화합을 교화하는 기능을 한다.

외재적인 예의 제도와 내재적인 음악의 정감이 상호 작용하고 융화하게 되면 제도가 정감으로 바뀌고 백성의 도덕 감정과 문화 수준은 순화된다.

공자는 고금(鼓琴)을 즐긴 성인으로, “사람이 되어서 인하지 못하다면 예를 지킨들 무엇하겠는가, 사람이 되어서 인하지 못하다면 음악을 한들 무엇하겠는 가?”37)라고 하여, 사회적으로 ‘선’에 부합한 도덕적 인간이어야 ‘예술’과 ‘심미’ 의 경지에 진입하여 인간의 성정을 함양시키고 도덕적 감화를 실현할 수 있 다고 보았다.

동중서는 유가의 명교로 중화(中華)의 정책을 구현하지만, 권 력과 재부를 장악한 극소수가 사회의 절대다수 구성원을 지배하므로 근본적 으로 빈부대립의 사회 갈등을 피할 수 없어 치세와 성세가 실현되기 어려웠 다.38)

더욱이 위진의 양진(兩晉) 시기는 유가 명교의 타락과 사회적 혼란으 로 민심이 극도로 황폐화 되었다.

도연명은 당시 사인들이 공자와 동중서처 럼 경술을 익히고 금예를 익혀 제도와 규범으로 다스리려는 인위의 방식으로 는 민생을 해결할 수 없었다고 인식한 것이다.

도연명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철인의 무위이치(無爲而治)를 주장한다.

‘무 위이치’의 정치사상은 양한 이래 유행해오던 관점으로 도연명의 새로운 사유 는 아니다.

배위(裵頠, 267-300)는 현학의 유행으로 사인들이 현명을 천시하 고 명리를 찾는데 전념하여 청렴한 몸가짐을 한 사인이 없다고 지적하며,

“옛 날의 성철(聖哲)은 치도를 깊이 탐구하여 수많은 정무를 처리하면서 한 사람 의 재주에 맡기지 않았다.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을 뽑아 각자의 위치를 지키 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요임금, 순임금이 힘들어 현인을 구했으되, 유능한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고 편안해진 것을 칭송했다. 이미 분업이 잘되고 사람 을 얻어 임무를 맡기면 무위이치하게 되었으니 어찌 마땅하지 않겠는가?”39)

라고 무위이치(無爲而治)를 주장하였다.

 

   37) 《論語⋅八佾》: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38) 류쩌화, 《중국정치사상사2》, 장현근 역, 파주: 글항아리, 2019, 216-222쪽.

  39) 裵頠, 《群書治要》 卷29: “古之聖哲, 深原治道, 以爲經理群務, 非一才之任. 選賢擧善, 以守其位. 故稱堯舜勞於求賢, 逸於使能. 分業旣辨, 居任得人, 無爲而治, 豈不宜哉?” 

 

배위의 이러한 무위로의 ‘적극적인 다스림’은 정시, 원강(元康) 시기의 방만한 정치 풍도의 회의적 분위기에서 명교와 무위의 상호 결합의 정치사상을 주장한 것이다.40)

도연명의 철인 정 치는, 현명한 인재들이 직위를 맡아 무위(無爲)의 방식으로 다스려 노자(老 子)가 제시하는 무위(無爲)하여 백성이 자발적으로 교화되는 경지에 이르도 록 하는 것이므로41), 이는 정치적 작용을 긍정한 것이다.

도연명은 무위로 다스리는 정치 방식이 백성을 “꿋꿋하게 스스로 만족하게 하고”, “순박하고 진실”한 본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서, 무위 정치의 전범인 요임금과 같이 문화적으로 찬란한 국가42)를 구현하고, 순임금이 오현(五絃)으로 <남풍(南 風)>을 노래하며 다스리려 하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크게 다스린 것과 같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40) 위진 현학가들은 崇有論과 貴無論으로 나누어 名敎와 無爲에 대해 논쟁하였는데, (267-300)는 崇有와 貴無 간의 논쟁이 국가, 사회의 존망에까지 관계가 있다고 생각 하여, 하안과 왕필의 귀무론에 반대하여 숭유론을 제기하면서, 옛날의 聖哲은 치도를 깊이 탐구하여 정무를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맡겨 치도가 극진해졌으므로, 요순이 현 인을 구하여 유능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태평했던 것처럼, 분업이 잘 이루어진 상태 에서 사람을 얻어 임무를 맡기면 ‘無爲而治’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류쩌화, 《중국정 치사상사2》, 장현근 역, 2019, 파주: 글항아리, 1019-1025쪽.)

    41) 《道德經》 57章: “성인은 말하길, 내가 무위해야 백성은 스스로 교화되고, 내가 고요함 을 좋아해야 백성은 스스로 바르게 되며, 내가 무사해야 백성은 스스로 부유해지고, 내가 욕심을 내지 않아야 백성은 스스로 순박해진다(聖人云, 我無為而民自化, 我好靜 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42) 《論語⋅泰伯》: “위대하도다. 요의 임금됨이여! 높고 높도다. 오직 하늘만이 이토록 위 대하거늘 오직 요임금만이 이를 본받았도다. 넓고 아득함이여! 백성들이 무어라 말로 형용할 수도 없도다. 높고 높도다. 그가 이룬 공적이여! 빛나도다. 그 찬란한 문화여! (大哉堯之爲君也! 巍巍乎! 唯天爲大, 唯堯則之. 蕩蕩乎, 民無能名焉. 巍巍乎! 其有成 功也, 煥乎其有文章.)” 

 

도연명의 철인 정치는 다스리려 하지 않음으로써 백성 이 자발적으로 교화되도록 하는 것이지 다스림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도연 명이 주장한 철인의 무위이치(無爲而治)는 유가 성인의 유위이치(有爲而治) 와 노자 성인의 무위(無爲)의 대안이다.

도연명은 자신이 요순과 같이 분업 의 체제에서 유능하고 솔선하는 훌륭한 인재로 발탁되어 예악은 순수함, 순 박함으로 돌아가게 하고 백성은 의식이 풍족해지도록 하고자 하였다.

도연명은 철인 정치를 구현하려는 이상이 있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실현할 수 없었다. 도연명은 동진 말 정치에서 핵심적인 두 인물인 환현(桓玄, 369-404)의 막부에 있었고, 그 후에 환현과 그 세력을 소멸하고 송조를 세운 유유(劉裕,363-422)의 막부에 출사하여 참군(參軍)의 직책에 있었다.

이것 에서 그가 동진의 왕조에서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는 의지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도연명은 은거하기 1년 전인 원흥(元興) 3년 3월 (404) 40세에 <시운(時運)>을 지어,

 

“맑은 소리 나는 금은 침상에 놓여있고, 탁주는 술병에 반이 남았다. 황제와 요를 따를 수 없으니, 고독이 나에게 있 음을 개탄한다”43)

 

    43) <時運> 其四: “淸琴橫牀, 濁酒半壺. 黃唐莫逮, 慨獨在余.” 

 

고 하며, ‘맑은 소리를 내는 금’을 연주할 수 없다는 것으로 자신이 고대 황제와 요와 같은 ‘철인’의 정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상심과 실 의를 드러내었다.

시제 <시운>은 세월과 시대의 운행이면서 도연명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인생의 운행이다.

시운은 순응해야 하는 것이니, 늦봄 출유(出 游)하여 ‘홀로’ 탄식함에는 그림자와 짝하여 노닐 수밖에 없는 깊은 고통이 함축되어 있다.

도연명이 철인 정치를 실현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송(宋) 원가(元 嘉) 3년(426) 도연명이 62세에 쓴 <영빈사(詠貧士)>로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榮叟老帶索, 영계기는 늙어서도 새끼줄로 허리띠 맸지만,

欣然方彈琴. 기뻐하며 금을 연주했다.

原生納決履, 자사는 떨어진 신발을 신고서,

淸歌暢商音. 맑고 고상한 소리로 상송(商頌)을 흥겹게 불렀다.

重華去我久, 요순의 시대는 나의 시대에서 한참 오래전이며,

貧士世相尋. 가난한 사인은 연속되었다. ……

賜也徒能辯, 자공은 헛되이 교묘한 말재간이 뛰어나니,

乃不見吾心. 내 마음은 보지 못하리.

 

영계기는 《열자(列子)⋅천단(天瑞)》에 수록된 춘추시대의 은사로,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공자가 그런 영계기를 보고 그 까닭을 묻자, 영계기는

“빈궁함이란 선비에게 항상 있는 일이고, 죽 음이라는 것도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종말인데, 당연한 일에 처하여 살아가다 죽음의 종말을 얻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걱정하겠는가?”44)

라고 반문한다.

공자의 제자 자사(子思)는 집에 비가 새어 축축하게 젖은 방에서도 정좌(正 坐) 하고 거문고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는데,45) 자공은 빈곤하면서 거문고 를 타는 자사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영계기와 자사는 인간의 숙명에 초연하 여 인생의 이치를 통달한 인물들로, 도연명의 지음(知音)이다.

도연명은 이 와 대조적인 인물로 ‘자공’을 지적한다.

성인을 흉내 내며 백성의 일을 경시 하고 구변으로 통치하는 자공과 같은 사인들은, 영계기, 자사와 같은 철인의 탄금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다.46)

그래서 장자는 유가 성인의 예악이 일으 킨 폐해를 지적한다.

장자는 성인이 출현하여 인위적인 예악으로 천하를 통 치하려 함으로써 백성이 다투어 이익을 추구하게 하였고,47) 또 세상이 혼란 한 것은 성인이 예악의 명교를 앞세워 음악을 작곡하고 예의를 제정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비판하였다.48)

 

    44) 《列子⋅天瑞》: “貧者士之常也, 死者人之終也. 處常得終, 當何憂哉.”

    45) 《韓詩外傳》 卷一: “原憲居魯, 環堵之室, 茨以蒿莱, 蓬戶瓮牖, 揉桑而爲樞, 上漏下濕, 匡坐而弦歌.”

    46) 《莊子⋅天地》의 자공이 채소밭을 손질하는 노인과의 대화에서 “‘선생은 뭐하시는 분입 니까?’ ‘공자의 제자입니다.’ 밭을 손질하던 사람이 말한다. ‘선생은 널리 배움으로써 성인의 흉내를 내고, 허망한 말로써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홀로 금(琴)을 뜯으면서 슬픈 노래를 함으로써 천하에 명성을 팔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당신의 몸도 다 스리지 못하면서 무슨 천하를 다스릴 겨를이 있다는 것입니까?(子奚爲者邪? 曰孔丘 之徒也. 爲圃者曰, 子非夫博學擬聖, 於于以蓋衆, 獨弦哀歌, 以賣名聲於天下者乎? …… 身之不能治, 而何暇於治天下乎.)”(莊子, 《장자》, 김학주 역, 서울: 연암서가, 2017, 304쪽.)

   47) 《莊子⋅馬蹄》: “성인이 나와 예의와 음악을 번거로이 하여 천하의 모양을 뜯어 고치 고, 인의(仁義)를 내걸고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려 하자, 백성들은 다급하게 발 을 둥둥 거리면서 일에 힘쓰고 지식을 좋아하고 다투어 이익을 추구하게 되었으니, 이 를 금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도 역시 성인의 잘못이다(及至聖人, 屈折禮樂, 以匡天 下之形. 縣跂仁義, 以慰天下之心, 而民乃始踶跂, 好知, 爭歸於利, 不可止也. 此亦聖人 之過也.).”(莊子, 《장자》, 김학주 역, 서울: 연암서가, 2017, 241-242쪽.) 

   48) 《莊子⋅馬蹄》: “성인이 나와 애써 어짊을 행하고 힘써 의로움을 행하게 됨에 이르러 천하 사람들은 비로소 의심을 지니게 되었다. 터무니없는 음악을 작곡하고 번거로운 예의를 제정하게 되자, 천하 사람들이 비로소 분열되게 되었다(及至聖人, 蹩躠爲人, 踶跂爲義, 而天下始疑矣. 澶漫爲樂, 摘僻爲禮, 而天下始分矣.).”(莊子, 《장자》, 김학주 역, 서울: 연암서가, 2017, 239쪽.) 

 

이러한 관점에서 도연명은 심양 삼은(三隱) 중  한 명인 주속지(周續之), 학사(學士) 조기와 사경이(謝景夷)가 당시의 정권 에 부화하여 예경을 강의하자 이들을 비판한다.49)

이는 명교의 기능이 작동 하지 않는데도 사인들이 무력으로 권력을 쟁취하려는 통치자와 영합하여 예 악을 가르치는 세속적 행위에 대해 반대를 표명한 것이다.50)

도연명은

“설맹 상은 일찍이 널리 나가 공부를 했으나, 조정의 법도와 제도가 성김을 법도를 보고 철우(哲友)를 그리워하며, 갈옷 떨치고 돌아왔네”51)

라며 설맹상을 지음 (知音)에 빗대어,

“거문고와 책이 있으니”, “혼자 노닐기로 약속한다.”52)

 

    49) <示周續之祖企謝景夷三郎>: “負痾頹簷下, 終日無一欣. 藥石有時閒, 念我意中人. 相去 不尋常, 道路邈何因. 周生述孔業, 祖謝響然臻. 道喪向千載, 今朝復斯聞. 馬隊非講肆, 校書亦已勤. 老夫有所愛, 思與爾爲鄰. 願言誨諸子, 從我穎水濱.” 50) 당시 사인들은 정치적 횡포와 검열에 유학의 고증에 집중하고 정치적 암흑을 도발한 환관과 군벌의 불의에 대해 비판하거나 유가적 공능인 義理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정권에 복종하거나 반동적으로 노장사상의 자연을 숭상하는 경향이 출현하였다. 그런 데 416년 8월 劉裕가 북쪽으로 後秦을 정벌하고 世子 義符가 建康을 지키고 있었는 데, 강주자사 檀韶가 《禮》를 강설해 줄 것을 요청하자 주속지가 安樂寺에 임시 거주하 며 《禮》를 여러 달 강의하고 廬山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에 도연명은 이 시에서 이 삼 인의 행실을 완곡하게 비판하고 있다.

   51) <扇上畫贊>: “孟嘗游學, 天網時疎, 眷言哲友, 振褐偕徂.

   52) <扇上畫贊>: “曰琴曰書, ……託契孤游.” 

 

도연 명이 유가의 정치적 이상을 지향하며 예악을 하였던 것에서 벗어나 요순의 무위에 기반 한 새로운 정치적 모범인 ‘철인’을 제시하였으나, 결국 독자적으 로 ‘홀로’ 노니는 인간으로서의 탄금을 선언한 데에는, 도연명이 유가가 표방 하는 성인 정치와 명교의 폐해를 인식한 것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2) 달인, 삶의 주체성과 자연(自然)의 인간 완성

 

도연명은 동진의 명장 도간(陶侃)의 후손으로 환현의 막부에서 참군의 직위에 있었고 유유의 막부에서 진군참군(鎭軍參軍)을 역임하였으나, 철인의 정치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결국 팽택령(彭澤令)의 직위에서 사직하였다.

명문가 출신의 사인으로서 정치적 이상을 이루지 못하고 은거를 선택하기 위 해서는 합리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동진 말 도연명이 거주한 강주 지역은 경 학이 성행하였지만 학문을 즐기는 가난한 사인들은 과거의 사인들과 같이 출 사나 조정의 추천을 받아서 명리를 얻는데 전념하는 대신 저술 활동을 하거 나 학당을 운영하며 유가의 윤리강상이 약화된 현실에 적응하는 분위기가 조 성되어 있었다.

한문(寒門) 출신 도연명이 29세에 출사하여 은거와 출사를 반복한 것이나 41세에 팽택의 현령을 사임하고 귀향을 선언할 수 있었던 것 은 강주 지역의 사인 문화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도연명의 선택과 주체적 변화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현학 사조의 성행에서 출현한 도가 서(道家書)이다.

도연명은 사상적으로 곽상(郭象, 252-312)의 《장자주》에서 나온 독창적 개념인 ‘독화론(獨化論)’의 영향을 받아, 삶의 변화는 무궁하고 각각의 변화는 합리적이라는 학술에서의 철학 이론을 인생의 철학으로 수용 한다.

‘독화론’은 만물은 어떠한 다른 사물과 관련되지 않으면서 독립적, 자 족적으로 존재하고 변화하며, 만물은 모두 자생(自生)하는 것이므로 모든 만 물은 각자 자신의 성질 그대로 존재(自性)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이론이 다.53)

 

    53) 羅宗强, 《玄學與魏晉士人心態》, 天津:天津敎育出版社, 2006, 198-209쪽.

 

따라서 현실적 측면의 모든 일의 변화, 모든 운명의 변화에서 모든 인 간의 일이 변화하는 것이 이치이다.

현학의 핵심 논제인 명교와 자연, 유무 (有無)의 본말(本末)이 대립되는 상황에서, 곽상은 독화론을 제기하여 명교 를 지향하든 자연을 지향하든 각각의 본분에서 편안히 거처할 수 있으므로 이것으로 저것을 옳다고 해서도 서로 배척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 서 유(有)가 본(本)인가 무(無)가 본(本)인가의 문제에서 유(有)는 무(無)에 서 생겨날 수 없고 무(無)도 유(有)에서 생겨날 수 없으므로 각각의 합리성 을 가진다고 하였다.

곽상의 독화론은 당시 현학의 논제인 명교와 자연, 유 와 무의 이론적 대립을 ‘조화’로 귀결하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도연명은 사물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이치이며, 만물은 자생(自生), 자성 (自性)하여 변화가 끝이 없으므로 “독화는 탁월한 것”54)이라는 사상적 이론  을 현실의 인간 삶에 적용시킨다.

독화론은 도연명 자신이 명교에서 자연으 로, 출사의 지향에서 은거자로 변화하는 것은 합당하며, 출사든 은거든 각각 그 일과 성질 그대로 존재하며 편안히 거처할 수 있다는 합리성을 확보해준 다.

도연명은 유유의 막부에 있던 원흥(元興) 3년(404) 40세에

 

“젊어서부터 세상사 밖에 몸을 붙이며, 마음을 금과 책에 맡겼다.……참됨은 애초에 가슴 에 새겨진 것이라 떠올려보나, 몸과 행적이 구속되었다 누가 말하리. 잠시 자연의 변화를 따랐지만, 결국 어진이의 초가로 돌아가리라”55)

 

라고 하여 출 사한 것도 자연의 변화를 따른 것이고 전원으로 돌아가는 것도 자연의 변화 를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도연명은 우주만물은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변화하므로 만물의 하나인 인간도 변화에 순응해야 한다고 보았다.

곤액과 형통은 걱정할 것이 없으며, 노쇠는 우주만물의 변화에 따라 움직인 다.(<歲慕和張常侍>)56)

변화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순탄하기도 험난하기도 하니, 자기 뜻대로 따르 면 인생의 기복을 일삼음이 없다.(<五月旦作和戴主簿>)57)

큰 변화 속에서 파란을 따르며 기뻐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形影 神⋅神釋>)58)

 

    54) 郭象, 《莊子注》<大宗師>: “卓者, 獨化之謂也.”

    55) <始作鎭軍參軍經曲阿作>: “弱齡寄事外, 委懷在琴書. ……眞想初在襟, 誰謂形蹟拘. 聊且 憑化遷, 終返班生廬.”

    56) <歲慕和張常侍>: “窮通靡攸慮, 顦顇由化遷.”

    57) <五月旦作和戴主簿>: “遷化或夷險, 肆志無窊隆.” 58) <形影神⋅神釋>: “縱浪大化中, 不喜亦不懼.” 

 

도연명은 만물(萬物)이 만화(萬化)하여 변화하는 주체가 끝이 없다는 독 화의 이론을 시에 유입시켜, 인생의 행과 불행, 빈곤과 부귀, 순탄함과 험난 함은 우주만물의 큰 변화에서 보면 하나의 현상이므로 기쁨과 두려움의 감정 을 초월하여 변화를 바라봐야 한다고 인간의 삶을 해석한다.

특히 도연명은 만물만화(萬物萬化)의 이치에 순응하는 가운데서도, 인간 스스로 독립적, 주 체적으로 뜻을 세우고 그 뜻을 따를 때 인생의 기복과 파랑을 일일이 따지지 않을 수 있고 감정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인간이 비록 거스를 수 없는 우주만물의 변화를 따라야 하는 존재이지만 인생의 주체는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해준다.

도연명은 세상의 변화에 순응해야 하는 이치를 깨달고, 변화의 시기를 파 악하여 자신이 세운 뜻을 주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독립적인 사람을 ‘달인 (達人)’이라고 말한다.

하늘의 도에 추위와 더위에 바뀜이 있듯이, 인간의 도 또한 항상 이와 같다.

달 인은 그 시기를 분명히 알아, 다시는 의심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飮酒> 其 一)59)

몸은 만물의 변화에 따르고 마음은 고정된 준칙이 없다.

이래서 사리에 통달한 사람은, 때에 따라서 감추는 것이다.(<扇上畫贊>)60)

저 통달한 이는 깨우침이 뛰어났기에, 봉록에서 벗어나서 돌아가 밭을 갈았 다.(<感士不遇賦>)61)

운행하는 것과 멈추는 것이 천만 가지이니, 누가 옳음과 그름을 알겠는가. 옳고 그름은 진실로 모습이 닮아있어 부화뇌동하여 모두 칭찬했다 비방했다 한다. 삼 대 말엽에 이런 일이 많았으나, 통달한 선비는 이와 같지 않다.(<飮酒> 其六)62)

‘달인(達人)’의 개념은 도가 사상에서 연원한 것이다.

《장자⋅달생》의 “삶 의 실정에 통달한 사람은 타고난 본성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힘쓰지 않는 다.

운명의 진실에 통달한 사람은 지혜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에는 힘쓰지 않는다”63)에서 ‘달자(達者)’는 자신의 본성과 운명의 진실을 안 사람이다.

 

    59) <飮酒> 其一: “寒暑有代謝, 人道每如茲. 達人解其會, 逝將不復疑.”

    60) <扇上畫贊>: “形逐物遷, 心無常準. 是以達人, 有時而隱.”

    61) <感士不遇賦>: “彼達人之善覺, 乃逃祿而歸耕.”

    62) <飮酒> 其六: “行止千萬端, 誰知非與是. 是非苟相形, 雷同共譽毁. 三季多此事, 達士似 不爾.” 

    63) 《莊子⋅達生》: “達生之情者, 不務生之所無以為. 達命之情者, 不務知之所無奈何.” 

 

동 진 갈홍(葛洪, 283-343)은 《포박자⋅행품》에서 “통함과 막힘에 따라서 전념 을 다하고 사람의 천성과 천명에 임하여 얽매이지 않는 자가 달인(達人)이 다”,64) 또 《포박자⋅박유》에서 “탁월한 유생(儒生)은 천박 비속한 무리에서 세세하게 시비하고 꾸며대지 않으며, 달인(達人)과 위사(偉士)는 세속의 흐 름을 세밀하게 관찰하면 다시는 바꾸지 않는다.”65)고 하여 천성과 천명이 있 음을 알고 인생의 파란과 기복에 초탈할 수 있는 사람을 ‘달인(達人)’이라고 보았다.

도연명에게 ‘달인’은 만물의 이치와 그 이치에 따른 인간 존재의 의 미를 통달한 사람이다.

그래서 달인은 변화의 시기에 주체적으로 변화를 수 용하여,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방식으로 인생을 살 수 있는 사람 이다.

그리고 삶의 운행과 멈춤의 양상이 천만 가지고 옳고 그름의 모양도 다양한 형상이므로, 변화에 대한 칭찬과 비방에도 자신의 의지를 의심하지 않는 자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독화의 이론을 실천한 도연명의 형상은 어떠한가?

사귐을 쉬고 한가한 일로 노닐며, 누우나 서나 책과 금을 즐긴다.(<和郭主 簿>)66)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에 기뻐하고, 금과 책을 즐기면서 근심을 푼다.(<歸去 來兮辭>)67)

친척들 한데 모여 살고, 자손들도 서로 보살핀다. 거문고 늘어놓고 날마다 타고 노래하고, 술독에는 술이 마르지 않는다.(<雜詩> 其四)68)

누추한 거처지만 금이 있고 책이 있네. 타기도 하고 노래 부르기도 하며, 이것 으로 나의 즐거움을 얻는다. 어찌 달리 좋아함이 없겠는가만, 이렇게 그윽하게 사는 것이 즐겁다.(<答龐參軍>)69)

 

    64) 《抱朴子⋅行品》: “顺通塞而一情,任性命而不滞者,达人也.”

    65) 《抱朴子⋅博喻》: “英儒硕生,不饰细辩於浅近之徒. 达人伟士,不变皎察於流俗之中.”

   66) <和郭主簿>:“息交游閒業, 臥起弄書琴.”

    67) <歸去來兮辭>: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68) <雜詩> 其四: “親戚共一處, 子孫還相保. 觴絃肆朝日, 罇中酒不燥.”

 

공자는 “도(道)에 뜻을 두고, 덕(德)에 근거하여 행동하고, 인(仁)에 의지 하고, 예(藝)에 노닐어라”70)라고 하여, 인격미와 예술미에서 선(善)과 미 (美)의 통일을 강조하였다.

유가는 개인과 사회의 화합과 조화로 일체가 되 어야 진정으로 심미적 가치가 있는 미적인 인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대에 강상윤리의 공리적 가치가 강화되면서 유가의 예악으로 실현 하려는 예술의 심미적 가치를 약화시켰다.

그래서 음악으로 발현되는 인간의 진솔한 감정과 개성이 통제되고 순수한 인간의 예술적 욕구와 유희성이 상실 되었으니, 이는 자연(自然)의 미에 위배되는 것이다.

한말 사인들은 유가학 파에서 예악의 정치와 윤리의 교화 작용을 강조하는 대 대하여 회의를 가지 게 되었고, 유가사상의 공리성이 과분하게 예술에 적용되는데 대하여 반성하 게 되었다.

건안 시기에 진입하면서 사인들은 유가의 사상적 속박에서 벗어 나 경학으로 마비된 개인의 정신과 마음을 소생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로 예술에 대한 심미성과 예술정신이 고양되면서, 사인들은 악의 공리적 기능에서 탈피하여 음악 자체의 감화력을 인식하고 이를 발전시켰다.

갈홍은 《포박자․박유》에서 “현(絃)과 대나무, 금속, 돌 등으로 만든 악기는 그 음계와 기이한 운율이 제각기 다르기는 해도 즐거운 소리로 들린다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71)고 하여, 다양한 악기의 개성적 소리를 인정하고 음악을 통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과 즐거움을 긍정하였으니, 이는 미적 관념이 예술의 심미와 유희의 공능을 인식한 데로 발전하였음을 반영한다.  

 

    69) <答龐參軍>: “衡門之下, 有琴有書. 載彈載詠, 爰得我娛. 豈無他好, 樂是幽居.”

    70) 《論語⋅述而》: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

   71) 《抱朴子⋅博喩》: “絲竹金石, 五聖詭音, 而快耳不異.” 

 

도연명에게 금(琴)은 미학적 인간을 구현하게 하는 물상이다. 연주는 감정 세계의 자연스러운 노출에서 자아만족을 얻고 음악의 운율에서 생명력과 감 화력을 얻음으로써 인생에 미적 향수를 유입시키게 해준다. 도연명의 아취 (雅趣)는 예악의 공리성에서 벗어나서 주체적으로 ‘낙(樂)’을 실현해냄으로 써, 인간을 스스로 기쁨과 긍정을 만들 수 있는 미적인 존재로 상승시킨다. 

곽상은 “사정이 변화한다면 감정도 변화하니, 죽고 사는 바람은 같을 수 없 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때는 살아있음을 즐거워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즐거 워해야 한다”72)라고 하였는데, 도연명은 관료 생활에서의 두려움과 불안의 감정에서 변화하여 스스로 인생에서 즐거움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자신의 인 생을 즐거운 것으로 상승시키기 위해서 도연명은 자발적으로 인위적인 사귐 을 멈추고 나다울 수 있는 공간에 위치한다.

그래서 도연명은 동진 시기 상 류계층에서 유행한 “상가(商歌)는 나와 무관한 일이네”73)라고 하며, 공동의 감정과 의식을 갖게 하여 개인을 공동체의 목적에 결집되게 하는 음악의 작 용을 거부하고,74) 금서(琴書)로 홀로 여유를 즐기거나 친척들과 정답고 흥 겨운 일상을 보내는 것을 낙(樂)으로 여긴다.

도연명이 현실의 삶에서 만들어내는 ‘자발적인 즐거움(自樂)’은 외재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내재적인 자아의 만족과 삶에 대한 충만함에서 발산되는 것 이며, 인간의 삶을 기쁘고 즐거운 것으로 고양시키는 것이다.

마치 <도화원 기>의 “노인과 어린이가 기뻐하며 스스로 즐거워하는”75) 것처럼, ‘즐거움’과 ‘기쁨‘은 순박하고 순수한 인간에게 유발되는 것이며, 인생의 만족을 아는 인 간이 느낄 수 있는 긍정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도연명은 독화한 자신에 대하 여 “몸은 변화 따라 가지만, 마음은 언제나 홀로 여유롭다”76)고 말한다.

삶에 서 자신의 감정에 진실, 진솔한 것은 “점차 자연에 가까워지는 것이며,”77) 자 성(自性)의 나를 회복한 것이니 ‘자연으로 돌아 온 것’ 78)이다.

 

    72) 《莊子注⋅齊物論》: “事苟變, 情也變, 則死生之愿不得同矣. 故生時樂生, 則死時樂死矣.”

    73) <辛丑歲七月赴假還江陵夜行塗中>: “商歌非吾事.”

    74) 서진 시기 성행한 상화가는 전란과 정권의 남하로 사라지고, 동진 시기부터 淸商樂이 대체하여 유행하게 되었다. 청상악은 淸樂으로 불리는데, 浙江 지구에 유전된 남방민 가 ‘吳聲’과 號北省 荊楚 지구에 전승된 민가 ‘西曲’을 바탕으로 상화가의 형식을 계승 한 새 악종인데, 이 민가곡들이 동진 시기 사회 상층의 중시를 받게 되었다.(오금덕⋅ 이진원, <오쇠, 유동승 저, 《중국음악사략》 제 2장 진, 한, 위, 진, 남북조 음악>, 《한 국음악사학보》 39권, 2007, 198쪽.)

    75) <桃花源記>: “黃髮垂髫, 怡然自樂.”

    76) <戊申歲六月中遇火>: “形迹憑化往, 靈府長獨閒.”

    77) <晉故西征大將軍長史孟府君傳>: “漸近自然.”

    78) <歸田園居> 其一: “久在樊籠裏, 復得返自然.”

 

달인의 경지에 서 도연명이 금의 연주로 도달하고자 한 것은 자연(自然)과 자발적인 내적 즐거움이다.

이것은 정시 시기 금예(琴藝)에 뛰어난 명사 혜강(嵆康)이 명교 를 초월하여 자연을 좇으며(超名敎而任自然) 고금(鼓琴)으로 사마씨 정권에 반항하여 끝내 자아를 보존하지 못한 것과 다르고, 서진의 사인들이 음악을 쾌락적으로 향유하며 인생을 소비한 것과도 다르다.

동진 말 도연명의 ‘고금’ 은 명교에 대항하지도 자연에 몰입하여서 현실을 벗어나지도 않았다.

달인 도연명의 고금을 해음(解音)하기 위해서는, 도연명이 지향한 ‘인간 완성’의 경지가 인간의 천명을 깨닫고, 천명에 순응하며, 자연(自然)을 회복하는 자 기 극복의 단계에 도달해야 하고, 여기서 나아가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자신 의 삶을 기쁘고 즐거운 것으로 상승시킬 수 있는 자기 초월에 있음을 이해해 야 한다.

 

4. 나오며

 

도연명의 문학과 사상의 문제에서, 도연명이 현학사조에서 얻은 중요한 성취 중 하나는, 도가사상과 노장의 인생경계를 끌어들여 인간 완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시의 문체로 표현한 것이다.

위진 현학의 철학적 명제는 주로 현담(玄談), 논저(論著), 주석(注釋)의 형식으로 표현되었는데, 도연명은 시 의 형식으로 위진 시대의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 ‘철인(哲人)’과 ‘달인(達人)’ 을 제시한다.

이것은 도연명이 중국 철학 사상의 인간 완성의 문제를 중국 시의 주제로 진입시키고, 중국시를 중국 미학의 영역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철인은 도연명의 정치 철학에서의 인간 완성을, 달인은 도연명 의 인생철학에서의 인간 완성을 제시한 것이지만, ‘철인’과 ‘달인’이 모두 주 체적 인간됨을 ‘인간 완성’으로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특히 ‘달인’ 은 주체적으로 변화하는 인격적 성숙을 보여주며, 인간은 주체적인 존재로서 내적 ‘즐거움’과 ‘기쁨’의 정서로 스스로를 고양시킬 수 있는 숭고가 있음을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다른 하나는 도연명이 철학의 철리성과 시의 서정성을 결합하면서도 시적 정감을 확보하여, 동진 현언시(玄言詩)의 한계를 극복하였다는 것이다.

중국 시가 발전에서 위진 시기를 철리화, 사변화 경향의 기점으로 볼 때, 철학적 사유를 시화하면 철리성이 시의 의상과 정감을 덮어버려, 결과적으로 철학이 문학을 압도하게 된다.

때문에, 창작에서 철학적 사고를 시로 표현하면서 시 적 서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도연명은 철학의 이론을 인생 에서 체험하고 그 체험한 인생을 시로 형상화하면서, 서정성과 철리성을 의 상에 기탁하였다.

‘금’의 의상은 철학적 인간으로서의 독자적 사고와 예술적 인간으로서의 미적 감수를 응축하였다.

도연명은 문학 창작에서 도가사상을 끌어들였는데도 도가적 이론과 요소 가 유가 사상과 대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도연명이 유가 사상은 드러내고 도 가 사상은 은유적, 함축적으로 감추는 수사법을 성공적으로 구사했기 때문이 다.

또한 도연명이 현원적인 사상과 학술 이론을 그대로 시에 유입시키지 않 고 이를 변용하는데 능통했기 때문이다.

도연명은 위진 이전의 유가 사상과 위진 현학 사조의 발전 과정에서 출현한 도가 사상의 개념과 이론을 통섭(通 燮)하여 각 사상의 정수를 흡수한 뒤 새로운 개념으로 창출하여 시에 융화시 켰다.

도연명의 문학은 위진의 시대사상과 시대 미학에서 탐구한 인간 완성, 이상 인격, 이상적 인재, 독화론, 무위이치, 명교와 자연 등의 주제와 관념들 을 시의 형식으로 구현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도연명의 문학이 위 진 시대의 주류와는 별개로 인식되던 관점을 전환하여 역으로 도연명이 위진 의 시대정신에 호응하면서 새로운 문학 내용과 주제를 창출하고 인도하였다 는 관점에서 도연명의 문학을 다시 고찰 할 필요가 있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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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ao Yuanming’s New Ideal Human ‘The Philosopher’ and ‘The Wise Man’: Mainly on the Image of the Qin(琴)

 

In the question of Tao Yuanming’s literature and thought, One of the  most important achievements from a trend of the pedagogism on the subject of the Eastern Jin’s Confucianism and Nature is the expression of the philosophical thought about the ideal human being in the form of poetry by incorporating the Taoist ideology and the life boundary of the thought of Laotzu into literature. Tao Yuanming expanded Chinese poetry into the area of Chinese aesthetics by expressing the ideal man as ‘the Philosopher’ and ‘the Master’ with the form of a poem. On the other hand, Tao Yuanming overcame the limitations of the Eastern Jin’s Metaphysical Poetry by combining the philosophical principles of the philosophy with the lyricity of poetry. From the point of view of considering Wei-Jin period(220-420) in the progression of Chinese poetry development as the starting point of the rationalization and change trend, The poetry of the expression of philosophical thoughts ideology obscures ‘meaning and thought’ and emotions of the poem, as a result, philosophy overwhelms literature.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secure poetic lyric while expressing philosophical thinking in poetry in creation. The Meaning and thought on the Geum is a condensation of independent thinking as a philosophical human and aesthetic sense as an artistic human.

Key words: Tao Yuanming, Metaphysics, Qin(琴), Culture code, Aesthetic human, ideal human

 

 

투고(접수)일   2019년 11월 20일 심사일 2019년 11월 25일~12월 13일  게재 확정일 2019년 12월 13일

中國語文學誌 第69輯

도연명의 새로운 이상적 인간 &lsquo;철인&rsquo;과 &lsquo;달인&rsquo; ― 금(琴)의 의상(意象)을 중심으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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