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남북문화 동질성 회복 위한 북한 서예문화 현황 고찰 (2) - 북한의 서예 시원 및 주체서예 성장·정립과정 고찰/김정남.성균관大

jn209 2025. 6. 29. 21:19

Ⅰ. 들어가는 말

Ⅱ. 북한 서예 시원에 대한 고찰

    1. 북한 주체사상의 태동

    2. 북한의 한국서예의 시원

    3. 항일혁명시기 북한 주체서예 시원

Ⅲ. 북한 주체서예의 성장·정립과정 고찰

    1. 주체서예 적용사례와 성장

    2.「김정일미술론」을 통해 본 주체서예 사명과 요건

Ⅳ. 나오는 말

 

 

Ⅰ. 들어가는 말

 

본 논문은 한국연구재단의「남북문화 동질성회복을 위한 북한서예문화 현황 고 찰」대과제(大課題) 중 “북한의 서예시원 및 주체서예 성장·정립과정”에 대한 고찰 이다.

이는 첫 번째 논문「근대기, 남북한 서예문화 분화 초창기 현황 고찰」에 이 어서 진행되는 연구다.

본고는 연구재단에 선정된 연구과제로 연구목표는 북한정권 전 기간의 서예문화 현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여러 개의 소주제(小主題)를 정하여 단계적으 로 연구를 수행해 나가고 있다.

연구방법도 이전 과제에서 언급한대로 북한 서예문 화 관련 자료가 절대 부족한 현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북한의 현실을 객관적 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초자료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향후 북한의 서 예문화연구에 대한 지렛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논문의 논술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북한이라는 특수한 상황(자료구 입의 제한, 관점의 차이 등)을 남한의 상식으로 접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 이다.

여기에 논자의 논술전개에 고민이 컸다.

특히 이번 서예의 시원과 관련된 연구주제는 어느 분야보다 남북한 간 괴리가 큰 부분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다.

사실관계의 옳고 그름의 문제 이전에 북한 현실 을 있는 그대로 인정·파악, 정치적 사상적 내용에 담겨진 서예시원에 대한 실상을 정확히 들추어내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현 단계에서는 그 학술 적 가치가 크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논리 전개에 있어서도 북한의 원 자료 내용을 될 수 있으면 윤색 없이 실어서 왜곡됨 없이 실상을 보여주려 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비평을 가하면서 논리를 전개하고자 한다. 북한사회주의가 시작하면서 배태된 주체의식이 1960년대 이후 주체사상으로 정 립되어 모든 영역에서 북한의 기본 사상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이에 따라 북한은 주체적인 관점에서 한국서예문화1)의 시원을 바라보게 된다.

 

    1) 남북한의 서예문화를 통틀어 본 논문에서는 ‘한국서예’ 또는 ‘한국의 서예’로 통칭하여 사용할 것이다.

 

김정일정권 시기에는 전통적인 서예문화와는 별도로 ‘주체서예’개념이 창출하여 오늘의 북한서예의 주류 로 자리 잡았다.

이에 본 논문은 북한에서 정립한 한국 서예문화 시원과 이후 주체서예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발전되었는가에 대하여 제한된 자료를 바탕으로 고찰해 본다.

 

Ⅱ. 북한의 한국서예 시원(始元)에 대한 고찰

 

서예는 동양예술의 여러 장르 중 가장 대표성을 띠는 예술로, 오랜 역사적 과정 을 경과하면서 정립되어온 산물이다.

이 서예는 일반적으로 처음부터 예술로 출발 한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용도로부터 출발되었다.

동한의 허신은『설문해자(說文解 字)』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창힐이 처음에 만든 글씨는 지사문과 상형문으로 문(文)이라 하고 그 뒤 형성자와 회의자가 나와서 자(字)라고 한다. 字란 새끼 치듯 점점 많아지는 것을 말하고 書란 죽간이나 포백(布帛)에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서란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이다.2)

‘書란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이다’하였다. 이렇게 실용의 관점에서 출발한 서예가 동한 말 채옹에 의해 예술적 경지로 발전하게 된다. 실용적인 글씨의 서예에서 아 름다운 글씨의 서예로, 그리고 사대부들의 개성을 표출하고 신장시키면서도 고상한 소일거리 수단의 차원으로까지 발전한다.

이때 서성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 (321~379 또는 303~361)가 출현하였다.

이러한 서예의 발전은 남제시대의 왕승건(王僧虔, 426~485)과 당나라 장회관 (張懷瓘)에 의해 더 높은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된다. 장회관에 이르러 서예는 곧 개성이라는 관점이 내포된 예술의 한 장르로 출발하 게 된다.

이러한 흐름이 당나라 한유(韓愈)를 거쳐 청나라 유희재(1813~1881)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하였다.3)

 

      2)『說文解字』제15권, “蒼頡初作書 蓋依類象形 故謂之文, 其後形聲相益 卽謂之字 字者 言孶乳而寖多 也 箸於竹帛 謂之書如也”

     3)『中國美學彙編』, 劉熙載, 「書槪條」, 書者如也 如其學, 如其才, 如其志, 總之曰 如其人而已(서예 는 닮는 것이다. 그 사람의 학문을 닮고, 그 사람의 재주를 닯고 그 사람의 뜻을 닮는다. 종합하 여 말하면 그 사람을 닮을 뿐이다.)

 

즉 서예는 동양예술의 여러 장르 중 가장 대표성을 띠는 예술로 동양의 사유와 문화의 특징을 가장 많이 내함(內含)하면서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대표적 예술이다.

서예는 조형예술 속에 포함되는 문자예술이면서 또한 추상적 상상력의 격발에 의 해 이루어진 고도의 추상예술이다.

그리고 생명력과 자유정신 그리고 한 개인의 정 신적 풍모와 개성의 일체가 담겨진 일종의 심리적 심상예술이면서 시공예술이다.4)

 

    4) 송하경,『서예미학과 신서예정신』, 도서출판 다운샘, 2003, 56~63쪽.

 

이러한 서예가 3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거쳐서 오늘에 이른 것으로 그동안 학습해왔다.

이러한 그동안의 서예역사와 이론에 대하여 북한사회주의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서예문화의 역사를 정립한다.

즉 북한정권의 근간을 주체사상으로 정립하고 이에 따라 고대로부터의 한국서예의 시원을 재정립하였다. 이어서 주체서예로까지 발전 시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따라 본 장에서는 먼저 주체사상의 태동에 대하여 살펴본다. 그리고 주체 사상의 관점에서 북한학계가 정립한 한국서예의 시원과 이후 백두산3대장군 서체 가 주축이 된 주체서예의 태동과정에 대하여 살펴본다.

 

1. 북한 주체사상의 태동

 

이데올로기는 대중에게 일관된 사고체계를 제공하여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통 치자의 정치리더십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 서 이데올로기가‘집단 혹은 공동체의 신념, 생각, 태도, 특징의 집합체’로 정의되는 이유다.5)

셔만(Franz Schurmann)은 사회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관념과 행동의 연결체 계가 간접적인가 혹은 직접적인가에 따라 순수이데올로기와 실천이데올로기로 구 분하였다.6)

 

    5) Plamenatz,『 Ideology』, New York Praeger, 1970.

    6) 셔만은 중국공산당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면서 수수이데올로기는 추상적 세계관을 제공하는 마르 크스-레닌주의이며, 실천이데올로기는 실천의 원칙과 방법을 제공하는 마오쩌퉁사상이라고 설명 했다.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중국혁명과 건설의 실천경험을 통해 실천이데올로기인 마오쩌퉁 사상을 만들어 냈다고 본 것이다.(Schurmann, Franz1968, 『Ideology and Organization in Communist China』, Berkeley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8-24쪽) 

 

순수이데올로기가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목표를 강조한 것이라면 실천 이데올로기는 그 목표달성을 위한 실천원칙에 방점을 둔다.  1950년대까지 북한의 공식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

순수이데올로기로써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라 북한은 전후복구와 사회주의적 개조에 나섰다.

그러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북한의 처지와 조건에 그대로 적용되기는 어려웠다.

이에 김일성은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주체의 확립을 강조함으로써 주체사상의 토 대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는 곧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순수이데올로기를 바탕 으로 북한식 실천이데올로기가‘주체’라는 이름으로 형성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주체사상은 1980년대에 와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함으로써 순수이데올 로기로 격상을 시도하였다.

이는 1970년대의 정치적 시대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이 시기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결정되고 그의 주도로 유일사상 10대원칙이 강 조되면서, 김일성의 유일영도체계로서‘수령제’가 완성되는 시기였다.

이는 주체사상 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뛰어넘는 독자적 사상체계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수령제 정치구조의 정착과 후계자의 등장, 그리고 수령제를 지탱하는 문화적 기저로서의 사상적 유일화와 동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체사상은 김일성이 혁명건설의 과정에서 자주성을 강조하는 소박한 노선에서 복잡한 혁명실천단계로 발전된 것이다.

1950년-60년대의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항 일혁명투쟁을 중시한 혁명사상과 접합됨으로써 북한체제의 정통성을 정당화하였다.

주체노선의 제시는 중·소의 수정주의를 배격하고 내부의 정적을 제거하는 등 김일 성체제 정당성의 토대를 세우는 도구로 활동되었고, 천리마운동과 같은 대규모 대 중동원과 교화를 위한 규범적, 심리적 기능도 하였다.

1960년 후반에는 주체사상이 김정일에 의해 종자론 등 다양한 범용화 도구를 사용하면서 보편적인 사상논리로 체계화된다.

북한은 1970년 11월 제5차 당대회 에서 당규약을 개정하여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함께 당의 공식이념으 로 채택하였고, 1972년에는 주체사상을 사회주의 헌법에도 명시하였다.

이후 주체사상은 1973년 김정일 자신으로의 후계 계승작업을 진행해 가던 와중 에‘김일성주의’,‘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으로 포괄되었다가 1982년 김정일이「주체 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철학사상으로 그 체계화작업을 완비했다.

1972년 당시에 개념적으로 모호했던 주체사상을 김일성은 ‘혁명과 건설의 주인 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라 하 였다.

그리고 ‘자기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신 에게 있다’는 것으로 주체사상을 규정하였다.7)

김일성은 또 주체사상은 사람과의 사업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 한다는 것이 주체사상의 진수’라고 하였다.8)

북한은 1997년 7월 8일 김일성 서거 3주기를 맞아 김일성 탄생연도인 1912년 을 주체 원년으로‘주체’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주체사상의 시원을 김일 성이 처음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나섰다는‘ㅌㄷ(타도제국주의 동맹)’로 소급하기도 하였다.9)

2009년 4월 김정일은 헌법개정에서 주체사상에 이어 선군사상을 자기활동의 지 침으로 삼는다고 병기하였다.

김정은은 김정일 사후 김일성-김정일주의를 들고 나 왔다.

여기 선군사상이나 김일성-김정일주의의 뿌리는 주체사상이라는 종자에서 발아된 것이다.10)

로동신문(2003.3.21.) 논설에서도‘주체사상은 선군사상의 뿌리 이고 세계관적 기초이며 선군사상과 선군정치가 새 세기의 요구에 맞게 전면적으 로 정립될 수 있게 한 방법론적 지침이다’하였다.

주체사상을 오늘날 북한 세습체제 유지의 주술처럼 만든 도구는 다름 아닌 김정 일의 종자론11)이다.

김정은은 ‘우리 당과 혁명은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영원한 지 도사상으로 확고히 틀어쥐고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하였다.12)

 

     7) 김일성, ‘우리 당의 주체사상과 공화국정부의 대내외 정책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김일성저작 집』26권, 평양:조선로동당출판사, 1984, 394쪽.

    8) 김일성, 『김일성저작집』, 평양:조선로동당출판사, 1984, 394쪽.

    9) 김정일선집(1996),「조선로동당은 영광스러운 ㅌㄷ(타도제국주의 동맹)의 전통을 계승한 주체형의 혁명적 당이다」, 252쪽.    10) 장용철, 「김정일의 ‘종자론’과 주체사상 ‘종자’화에 관한 연구」, 『북한학연구』제12권 제2호, 2016, 6쪽.

   11) 김정일선집(1973), 5쪽 : 김정일은『영화예술론』에서 ‘종자란 작품의 핵으로서 작가가 말하려는 기본문제가 있고 형상의 요소들이 뿌리 내릴 바탕이 있는 생활의 사상적 알맹이다 종자는 소재와 주제, 사상을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 하나로 통일시키는 작품의 기초이며 핵이다.’라 정의함. 종자 의 핵심은 사상성에 있고 사상성이란 당의 정책과 노선을 똑바로 잡는 것이다. 그것은 사상적 알 맹이인 ‘주체사상’이라는 우수한 종자선택의 정치사회적 의미가 있다.

    12)『노동신문』,「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를 힘 있게 다그쳐나가자」, 2012년 5월 25일 

 

주체사상의 이론 적 측면과 현실적 실천이 결합된 통치담론이‘ 김일성-김정일주의’이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은 사회주의의 기본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북한식으로 변형되어 정착된 북한식 사회주의다.

즉 전후 복구와 역사적 과정에서 중소간의 분쟁, 동구 의 몰락과 소련의 해체, 서독의 동독 흡수통일, 미국의 대북강경정책 등으로 북한 이 총체적인 위기로 내몰렸던 상황에서 이전의 마르크스-레닌주의로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에 북한은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명제로 그 우월성과 견고성 을 과시하면서 ‘주체사상’을 정립한 것이다.

즉 주체문제는 사회주의 건설기의 와중 에서‘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노선의 측면에서 강조되었는데 반해 1960년대 후 반부터는 ‘사상’으로서의 주체, 곧‘종자’로 개념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에 근거하여 북한의 서예문화도 주체적 입장에서 재정립되었고 나중 에 주체서예라는 북한식 서예가 태동하게 된다.

 

2. 북한의 한국서예의 시원

 

북한은 한국의 서예시원을 그동안의 중국문화 종속에서 벗어나 자주적 입장에서 언급하였다.

이는 주체사상의 관점에서 한국의 서예를 고대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재정립하려는 몸짓이다.

즉 한국서예의 뿌리가 되는 글자로 신지글자가 고조선시기 에 썼다고 비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립하였다.

김일성은 <우리 조상들은 고대로부터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으며 동방문화를 꽃피웠습니다.>라고 교시하였다.13)

이는 우리의 찬란한 문화가 동방문화를 꽃피운 시발이라는 것이다.

그 만큼 우리 민족문화의 유구성을 강조한 것이다.

북한의 각 자료에서 한국서예의 시원에 대한 북한의 관점을 도출해 내기 위해 다음의 자료, 즉 2006년도 탁영한의「우리나라에서 서예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 가?」와 2008년도 박영도의『조선서예발전사』, 2011년도『조선녀성』에 실린 「조선글의 시조서체-신지글자」, 2014년도 오광섭의『조선글서예』, 2011년도 한효성의「훈민정음체의 서체사적 의의」에 실려 있는 한국서예의 시원과 관련된 내용을 바탕으로 살펴본다.14)

 

    13) 오광섭, 『조선글서예』, 조선출판물수출입사, 주체103(2014), 13쪽.

    14) 주 검토대상을 위 자료에 중점을 둔 것은 동 자료들이 북한서예 관련, 북한에서 중심적 위치에 있는 것이고, 아울러 북한에서 북한서예 관련내용이 거의 동 자료내용의 반복에 그치기 때문에 동 자료로써도 충분히 북한서예를 파악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들 각 자료의 내용을 통해서 북한에서 일반화된 한국서예의 시원에 대한 의견을 도출해 본다.

한국서예의 시작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 미숙하지만 서예가 처음으로 전국적 판도에서 시작된 것은 고대 단 군조선 초기부터이다.

BC 3000년경에 원시공동체사회가 무너지고 노예소유자국가로 건립된 단군조선은 그 최초기에 벌써 국가권력과 문서 거래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서 신지글자를 창제하여 사용하였다.당시 신지글자는 창제되면서 자기의 고유한 형태와 필법을 갖춘 신지글자체를 설정하고 쓰여졌다.단군조선 중심지인 평양에서 창제된 신지글자, 신지글자체는 광활한 고조선영력의 전국적 범위에서 사용됨으로써 우리나라에서는 그 시기부터 서예를 할 수 있는 바탕 이 마련되었으며 그리하여 국가활동 및 경제문화발전과 더불어 널리 벌어진 글쓰기 생활은 곧 맹아적이기는 하지만 서예생활, 서예활동을 동반하게 되었다.15)

 

서예의 시작을 고대 단군조선초기부터로 보고 있다. 그 수단이 되는 글자인 신 지글자를 창제하여 사용하였는데 여기에는 고유한 형태와 필법을 갖춘 신지글자체 를 설정했다는 것이다.

‘신지’란 왕이나 지배자, 통치자의 글자를 말하는 것으로 신 지글은 당시의 통치자의 글이라고 보면 되겠다.16)

 

문헌 및 유물유적에서 신지글자 관련내용이 아래 다양한 자료에서 발견된다. 역사문헌들인 <단군세기>, <태백일사>, <평양지>, <영변지>에 기록된 <단군 조선의 3대왕인 기록 2년에....국문정음을 만들었다>, <단군 때에 신지전서(신지글 자, 신지글자체)가 있었는데 그것을 태백산과 흑룡강, 청구, 구려17) 등의 지역들에서 널리 썼다.>, 평양 법수교다리의 옛비를 신지씨가 썼다, <단군천부경>을 신지글자로 비석에 썼다는 자료들과 역사유물들인 고조선유민들이 사용하던 낙랑벽돌, 통천군 신암리의 토기, 요녕성 려대시 윤가촌의 토기굽접시 등에 새겨진 신지글자, 신지글자체 필적들은 단군조선 최초기에 글자가 창제되었으며 그에 의한 글쓰기생활과 서예활동 이 전반적으로 벌어진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18)

 

    15) 탁영한,「우리나라에서 서예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예술교육』(2006.4), 2.16예술교육출 판사, 65쪽.

    16) 박영도,『조선서예발전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인쇄소:평양종합인쇄공장), 2008, 84쪽.

    17)『남한 통일뉴스』,「北학자, 中 고구려사 왜곡 비판」, 2004(12.22) : 북한 김일성종합대학 김은 택 부교수는 중국 사서를 인용해 우리 민족이 독자적으로 세운 첫 봉건국가는 고구려였다고 주장 했다. “고조선을 세운 ‘예’족이나 부여국과 구려국(고구려)을 세운 ‘맥’족, 진국을 세운 ‘한’족은 다 같이 조선민족이다”며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의 ‘위서예전’에는 예족의 늙은이들이 스스로 자신 들을 ‘구려’와 같은 종이라고 했고 ‘후한서’의 ‘고구려전’에는 구려를 일명 ‘맥’이라고 한다고 명백 히 씌어있다”고 밝혔다. 중국의 고구려사 귀속 움직임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그는 “‘삼국사 기’ 고구려 본기의 마지막에 있는 사론부분에는 고구려가 진나라, 한나라 때 중국의 동북쪽에 있으 면서 중국의 나라들과 맞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며 “일련의 기록들은 고구려가 진시황의 진나라 보다 훨씬 앞선 BC 277년에 성립되었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서울=연합신문 김귀근 기자)

    18) 탁영한,「우리나라에서 서예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예술교육』(2006.4), 2.16예술교육출 판사, 65쪽. 

 

좀 더 북한학계에서 신지글자 관련,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주요내용을 대략적으 로 정리해 보면 아래 (표 1)와 같다.

 

                  (표 1) 북한학계에서 한국서예 시원 고증에 활용한 주요내용

 

 연번     북한학자들의 기록 및 유물·유적 내용                  북한학자들의 의견 등 내용

 

1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19)                훈민정음이전에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민간에서 쓰인 글자가 있었는데 그 수는                                                                            다 갖추어지지 못하 고 그 모양이 일정한 규범이 없어 한 나라의 말을 적어내기에는

                                                                         모자라나 일부 제한된 범위에서는 쉽 게 쓸 수 있게 되어있었다    

                                                          

 

2 16세기의 학자 이맥의 <태백일사>20)            단군때에 신지전서(神志篆書)>가 있었는데 그것을 태백산과 흑룡강, 청구(조선),                                                                          구려 등의 지역들에 서 널리 썼다. <태백일사>에 인용되어있는 <대변설>의 <주)

                                                                      에서는 남해현 양하리의 계곡에 있는 바위에 신시(神 市)글자의 옛 새김이 있었는데                                                                         그 글은 환웅이 <사 냥을 가서 세 신에게 제사를 지내다>라는 내용을 담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 바위새김은 <서불의 글>이라고 전해 오는 것으로서 이것은

                                                                      원래 <옛 조선의 글>을 가리키는 말이다.(<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연구론문집>,                                                                              1994, 90-92쪽)

 

3 <영변지>21)와 <해동역대명가필보>22)        <영변지>와 <해동역대명가필보>에 실려 신지글자 로 전해지는 16자의 글자가

                                                                        수록되어 있다.

 

4 8세기의 발해사람 대야발의『단군기사』23)     ‘가림토(加林土, 加林多)’에 관한 자료가 실려 있다.

와14세기의 이암의 『단군세기』24)                      그 책들에서는 고조선의 3대왕 가륵 때에 정음(正 音) 38자를 만들게 하였는데                                                                              그 이름을‘가림토’라 한다고 하였다.

 

5 일본의 옛 책인 『혼석언문해』                        훈민정음에 대하여 옛날체와 지금체의 두 가지가 있 었다.

                                                                          옛날체는 삼한 초(고조선 말기)에 만들어 전 하는 것이고(신지글자),

                                                                          지금체는 조선 세종 때에 옛날체의 글자를 고쳐서 만든 것이다(훈민정음체)

 

6 17세기의 학자 북애자가 쓴 <규원사화>25)       단군시기에 신지가 사냥을 하다가 사슴발자국을 보고

                                                                          처음으로 글자를 만들었다고 한 기록

 

7 <평양지>26)에는 1583년 법수교 밑에                전언에 의하면 돌비 명문이 지금 우리글자도, 인 디아의

    묻혀있는 돌비가 드러남                                    범자도 중국의 옛글자 인전자도 아닌 누구 도 알 수 없는 것으로                                                                                                    혹시 단군 때의 신지가 썼다 는    글자일 것  이라고 하나                                                                                                               오래되어 그 돌비가 잃어 졌다는 기록이 있다.  

 

8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에서 나온 토기               신지글자와 비슷한 모양의 두 글자가 새겨져있다

(BC8-7세기)  및 BC 5-4세기경의 것으로                (<조선유적유물도감>2권, 1989, 38쪽.76쪽)

추정되는 유가촌 12호무덤에서 발굴된 굽접시 . 

 

9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에서 발굴된 BC 2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고조선 유민들이 제작 이용한 붓과 벼루가 발굴 붓은 선을 긋거나 글쓰기에 알맞춤한 지금의 면상 필과 같은 작은 붓으로서 붓촉은 붓대 안에 들어가 있다. 붓 전체길이는 17㎝, 붓대 굵기는 7㎝고 붓 대 재질은 참대다. 짐승 털로 만든 붓촉은 약 5㎜ 정도 남아있는데 원래 길었으나 닳아서 짧아진 것 으로 보인다. 특징적인 것은 지금의 붓대보다 훨씬 길다. (<로동신문>, 1994,2.2일자)

 

    19)『훈민정음운해』 : 조선후기 문신 · 학자 신경준이 훈민정음의 음운을 도해(圖解)하여 1750년에 편찬한 연구서.

    20)『태백일사(太白逸史)』: 저자 이맥(李陌, 1455-1528)은 중종반정 후에 대사간에 이른 자이고 실록을 기록하는 찬수관을 지낸 자로, ‘정사에서 빠진 태백의 역사’라는 뜻으로『태백일사』를 저술하였다. 당시 성리학적 세계관이 주를 이루는 세태 속에서 이맥이 74세에 세상 떠날 때까지 집안에 비장되었다. 1911년 계연수의 한국상고사 역사서인 『환단고기』범례에『삼성기』,『단 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 한국고대사에 대한 인식이 현저한 차이가 있어 이들 책들에 대한 사료적 가치에 대하여 남한학계는 일반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위 서로 간주하는 경향이 우세하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1)『영변지』: 평안도 영변군의 연혁 · 인문지리 · 행정 등을 수록하여 1800년대 중반에 편찬한 읍 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2)『해동역대명가필보』 : 1926년 백두용이 우리나라 역대 명가의 필적을 모아 엮은 서첩. 자발(自 跋)에 보면 돌아가신 아버님의 뜻을 이어 수십년 동안 우리 역사 4,000년간의 고금명가의 필적 700점을 모아 6권으로 편집하여 ‘해동명가필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 과사전』)

     23)『단기고사(檀奇古事』: 719년 발해의 시조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탈고한 것으로 전해지는 단 군조선과 기자조선에 대한 역사서. 연대기.

    24)『단군세기』: 1363년 이암이 단군조선에 관해 저술한 역사서·연대기. 계연수(桂延壽)의 ≪환단고 기 桓檀古記≫에 수록되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5)『규원사화(揆園史話)』는 조선 숙종 1년인 1675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하였다는 역사서 형 식의 사화(史話)로, 상고시대와 단군조선의 임금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동 자료에 대 해 위작 시비가 있고 그 내용이 실제 역사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이르다는 견해도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6)『평양지(平壤志)』: 평안도관찰사 윤두수가 평양부의 연혁 · 인문지리 · 행정 등을 수록하여 1590년에 편찬한 읍지. 비교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로 편찬을 시도하였고, 내용상으로는 전반적으 로 역대 삼조선(三朝鮮:前朝鮮·後朝鮮·衛滿朝鮮)의 도읍지, 특히 기자(箕子)의 도읍지 및 오랜 역사를 지닌 도회지로서의 자부심을 강하게 반영하여 인물·시문 등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표 1)의 자료에서 나타난 북한이 한국역사에서 고대글자로 칭하는‘신지글자’와 ‘가림토글자’의 내용을 살펴본다.

 

<신지(神志, 神誌), 臣智, 臣芝)>는 <신시(神市)>라고도 표기하였는데 원래 <큰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서 처음에는 <임금>을 가리키었으나 나중에는 높은 벼 슬이름으로 되어 지배자,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로 되었으므로 <신지글자>란 <왕이 나 지배자, 통치자의 글자>라는 뜻으로 된다. 오늘 <영변지>와 <해동역대명가필 보>에 실려 전해지는 글자는 16자이다. 여러 기록을 통하여 고조선, 부여, 구려, 진 국 등 고대노예소유자국가들이 성립된 시기 신지글자가 만들어져 조선반도의 북쪽 끝인 육진지역으로부터 남쪽 끝인 남해지방에 이르기까지는 물론 압록강, 두만강 이 북의 넓은 지역을 포괄한 전 지역에 걸쳐 널리 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시기 신지글자 이외에도 우리 글자인‘가림토’,‘비인서(옛날체)’등이 쓰였다는 기록도 있다. 8세기의 발해사람 대야발의『단군고사』와 14세기의 이암의『단군세 기』에는‘가림토(加林土, 加林多)’에 관한 자료가 실려 있다. 그 책들에서는 고조선의 3대왕 가륵 때에 정음(正音) 38자를 만들게 하였는데 그 이름을‘가림토’라 한다고 하 였다. 일본의 옛 책인『혼석언문해』에서 훈민정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 다. 옛날체와 지금체의 두 가지가 있었다. 옛날체는 삼한 초(고조선 말기)에 만들어 전하는 것이고 지금체는 조선 세종 때에 옛날체의 글자를 고쳐서 만든 것이다.......이 를 통하여 고조선 시초의 신지글자가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가림토 글자’에 이르고, 그것이 고조선 말과 삼한 초기에 훈민정음의‘옛날체(비인서)’로 발전하여 부단한 변 화과정에‘훈민정음(지금체)’로 계승 발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27).

 

    27) 박영도,『조선서예발전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인쇄소:평양종합인쇄공장), 2008, 84-85쪽. 신지글자 가림토글자 (그림

 

1) 신지글자와 가림토글자

 

여기에서『영변지』와『해동역대명가필보』의 신지글자 16자와 8세기 발해사람 대야발의『단군고사』와 14세기 이암의『단군세기』에는 신지글자 이후에 출현된 가림토글자 38자에 대하여 (그림 1)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 1) : 생략(별첨 논문파일 참조)

 

가림토글자는 ‘고조선의 3대왕 가륵 때에 정음(正音) 38자를 만들게 하였는데 그 이름을‘가림토’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이 고조선 말과 삼한 초기에 훈민정음의 ‘옛날체(비인서)’로 발전하여 부단한 변화과정에‘훈민정음(지금체)’로 계승 발전하 였음을 짐작하게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신지글자와 지금 우리가 쓰는 훈민정음 의 한글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만큼 한글의 역사성이 깊다는 것을 언급하 고 있다.

북한에서 신지글자 16자와 가림토글자 38자는 한국서예의 시원을 가름하는데 중요한 단서로 삼고 있다.

이 글자는 북한의 입장에서 고대문자와 서예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다.

이 글자의 의미를 구명하 는 것은 각종 자료에서 언급되고 있는 신지글자의 실재성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 이다.

이를 위하여 북한은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이 글자에 근거하 여 북한은 신지글자와 관련된 이론과 의미를 전개하고 있다.

대표적 증거자료로 <평양지>에는 1583년 법수교 밑에 묻혀있는 돌비에 새겨진 명문,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에서 나온 토기(BC8-7세기) 및 BC5-4세기경의 것 으로 추정되는 유가촌 12호무덤에서 발굴된 굽접시에 있는 명문 등을 내세워 이들 명문이 신지글자와 유사하다면서 신지글자의 실재성을 확정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영변지』등에 전해져오는 16자는 북한의 신지글자의 실재성과 오늘의 훈민정음체와의 관계성을 증명해 내는 기준이 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북한학계의 논리를 살펴본다.

 

신지글자체는 네모방정한 틀러기안에 고르로운 굵기의 획들을 균등하게 구성하는 서법으로 쓰이는 글씨체로서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지역들이 국가이전의 미개한 상태 에 있던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28) 신지글자가 남해의 바위글자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그림 및 상형글자와 같은 글 자발생의 첫 단계를 거쳐 <영변지>에서 보여주는 높은 단계로 발전되었으며 <단군 세기>의 가림토글자와 같은 자모글자의 단계에로 도약하고 15세기 중엽에는 훈민정 음과 같은 가장 발전된 단계에로까지 계승되고 완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신 지글자는 당시로 볼 때 글자들의 형태가 매우 짜여 져 있었다. 그 시기 이웃나라들에서 나온 사물의 모양을 본 따 구불구불한 선으로 그려 쓰는 그림글자나 상형글자들 과는 달리 신지글자는 형태의 부호화, 방형화가 높은 수준에 이르러 글자체모를 손색 없이 갖추었다.....이와 같은 신지글자는 조선글서예의 맹아적 단계로 불 수 있다.29)

영변지』의 신지글자체와『단군세기』의 가림토글자는 같은 자모글자 형태의 높 은 단계의 발전된 글자체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주변 다른 나라의 상형문자나 그 림문자와 달리 글자가 부호화되고 방형화된 높은 수준의 글자로서의 체모를 갖추 었다는 것이다. 이런 신지글자가 추후 훈민정음체와 같은 가장 발전된 단계로까지 계승되는 맹아적 단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지글자체와 훈민정음체와의 관계에 대하여 한효성은 추가하여 언급하고 있다.

 

‘훈민정음체는 단군조선시기에 창조된 신지글자체의 서체학적 특성을 계승한 민족 서체였다. 훈민정음체는 신지글자체의 서체학적 특성을 계승하는 한편 그것을 서체의 조형예술성을 비교적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하였다. 이것은 훈민정음 창제집단의 모든 성원들이 문자의 기호적 의미제정으로부터 서체의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행정에 서 문자와 서체의 조형예술성을 매우 중시하여 왔다는 것을 말하여주고 있다.......훈 민정음이 신지글자의 특성을 계승하여 창제되였다는 첫째 징표로 정방형의 외형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보아진다. 훈민정음체는 서체학적 특성의 가장 주요한 징표로 되 는 글자의 외형이 신지글자와 꼭 같은 네모글자류형으로 창조됨으로써 조선민족서체 의 본질적 특성을 고대로부터 중세에로 확고히 이어지게 하였다..........훈민정음체가 5개의 획 체계 즉 가로획과 세로획 비낌획과 점획, 둥근획으로 되어있다면 신지글자 체는 가로획과 세로획, 비낌획과 점획으로 되어있다. 즉 둥근획을 제외한 4개의 획이 훈민정음체와 신지글자체에서 동일성을 가진다. 이것은 신지글자체 획 체계에서 둥근 획이 없을 뿐 나머지 모든 획들은 벌써 고대에 마련되었으며 이것을 그대로 계승하 면서 둥근 획을 첨가하는 형식으로 훈민정음체가 발전하였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이처럼 훈민정음체는 선행시기의 유산에서 좋은 측면을 계승하고 부족 되는 것은 보충하는 원칙에서 창조된 우리 민족의 서체유산이며, 조선민족서체가 중세부터 발생 발전 한 것이 아니라 고대시기에 시원들 둔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력사를 가진 서체 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된다.30)

 

       28) 탁영한,「우리나라에서 서예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예술교육』(2006.4), 2.16예술교육출 판사, 65쪽. 남북문화 동질성 회복 위한 북한 서예문화 현황 고찰 (2) · 161 

      29) 오광섭,『조선글서예』, 조선출판물수출입사, 주체103(2014), 13-14쪽.

      30) 한효성,「훈민정음체의 서체사적 의의」,『력사과학』, 2011.4호, 67-69쪽. 

 

훈민정음체를 민족의 서체로 규정하고, 신지글씨체의 서체학적 특징을 계승한 서체로 규정하고 있다.

문자와 서체의 조형예술성을 매우 중시하여 16자 신지글자 체 외형이 정방형으로 되어있는데, 훈민정음체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훈민정음 체가 5개의 획 체계 즉 가로획과 세로획 비낌획과 점획, 둥근획으로 되어 있는데 신지글자체는 둥근획을 제외한 4개의 획이 훈민정음체와 같다는 것이다.

이는 신 지글자체 획 체계에서 둥근획을 제외한 모든 획들이 고대에 이미 마련되었고, 이것 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둥근 획을 첨가하는 형식으로 훈민정음체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민족서체가 고대시기에 시원을 둔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력사 를 가진 서체라는 것이다.

 

신지글자체와 훈민정음체의 사이의 기간에 한자체(漢字體)가 쓰여 진 것과 관련 하여 고대조선사람들은 이처럼 한자를 쓰기 이전에 민족고유의 글자에 의한 서예를 창 조하고 발전시켜왔다. 고대조선사람들은 또한 고유한 고대문자를 사용하는 한편 서사 생활에서 한자를 받아들여 써오는 과정에 우리 민족의 사상 감정이 담긴 한자서예도 창조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고대조선사람들이 한자와 접촉하게 된 것은 매우 오래며 서주시기 (BC 11세기경)에는 이미 한문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서 한문문헌들을 번역할 수 있었다고 한다.(<조선민족어발전사>,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6, 16-17쪽)............... 고대조선인민들은 한자를 사용하는 과정에 한자의 음과 뜻을 다양하게 이용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식표기도 창안하였다. 이처럼 고대시기 민족고유의 글와 함께 한자로 서사생활을 하는 과정에 한자에 의한 서예도 발생하여 발전하였다.31)

 

     31) 박영도,『조선서예발전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인쇄소:평양종합인쇄공장), 2008, 82-90쪽.

 

한자를 쓰기 이전에 우리 고유의 글자(신지글자)를 이미 쓰기 시작하였고 서예 를 창조하여 발전시켰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후에 도입된 한자서예도 우리 민족의 사상감정이 담긴 한자서예로, 즉 한자를 사용하는 과정에 한자의 음과 뜻을 다양하 게 이용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식표기도 창안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대시 기 민족고유의 글과 함께 한자로 서사생활을 하는 과정에 한자에 의한 서예도 발 전했다 하였다. 신지글자가 쓰여 지기 시작한때부터 서예를 하였다는 다른 증거자료로는

 

옛 문헌들에서 <신지전>, <신지전서>, <신전>, <신시전서>라고도 하였다. 그 것은 글자의 형태가 한자의 예서, 행서, 초서들과는 달리 전서와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32) 중세의 역사문헌에서 서예가 동양에서 독자적인 예술형식으로 등장하기 이전인 고 조선시기의 신지글자체를 가리켜 별개로 <신지전>, <신지전서>라고 이름하여 표기 한 것은 서체적 풍격을 완벽하게 갖추고 쓰여졌음을 의미하고 있다.33)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에서 나온 토기(BC8-7세기)에는 신지글자와 비슷한 모양 의 두 글자가 새겨져있으며 BC 5-4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가촌 12호무덤에서 발굴된 굽접시에도 이와 비슷한 모양의 글자가 새겨져있다.(<조선유적유물도감>2권, 1989, 38쪽.76쪽).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위의 글자들은 지금까지 한문글자에서 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서 그 필치는 펜이나 그와 유사한 꼿꼿한 서사도구가 아니 라 붓으로 쓴 글씨라는데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BC 7세기 이전부터 민족고유의 글자를 가지고 붓으로 서사생활을 하였으며 그 과정에 서예가 발행하여 고대조선사 람들이 자기의 사상 감정을 토기나 굽접시에 붓으로 글자를 새겨 표현한 서예발전의 한 특면을 보여주고 있다......고대시기 우리나라에서 문자의 사용과 서사생활은 그에 고유한 서사수단인 붓이 제작 이용되었음을 실증하고 있다. 고대시기 우리나라의 붓 은 글자의 서사적 요구에 맞게 거의 완성된 것으로 보아진다.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 동에서 발굴된 BC 2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고조선 유민들이 제작 이용 한 붓과 벼루가 발굴되었다. 붓은 선을 긋거나 글쓰기에 알맞춤한 지금의 면상필과 같은 작은 붓으로서 붓촉은 붓대 안에 들어가 있었다. 붓의 전체길이는 17㎝, 붓대의 굵기는 7㎝되는 붓으로서 붓대는 참대를 이용하였다. 짐승의 털로 만든 붓촉은 약 5 ㎜정도 남아있는데 원래의 붓촉은 길었으나 닳아서 짧아진 것으로 보아진다. 특징적 인 것은 지금의 붓대보다 훨씬 긴 것이다.(<로동신문>, 1994,2.2일자)

이 붓은 우리나라 붓 유물 가운데서 가장 오랜 시기의 것이지만 그 이전시기인 고 대시기 붓의 발전수준을 엿볼 수 있게 하며 그것은 의심할 바가 없이 붓에 의한 서 예의 발생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본다.34)

 

   32) 오광섭,『조선글서예』, 조선출판물수출입사, 주체103(2014), 13-14쪽.

   33) 학사 탁영한,「우리나라에서 서예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예술교육』(2006.4), 2.16예술 교육출판사, 65쪽

   34) 박영도, 『조선서예발전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인쇄소:평양종합인쇄공장), 2008, 82-90쪽 164 · 서예학연구 제44호

 

신지글자를 <신지전>, <신지전서>, <신전>, <신시전서>라고 한 것은 글자의 형태가 전서와 비슷하기 때문인 것으로, 이는 서예를 하였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는 것이다.

신암리에서 나온 토기의 명문 등의 경우에 꼿꼿한 서사도구가 아니라 붓으 로 쓴 글씨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BC 7세기 이전부터 민족고유의 글자 를 가지고 붓으로 서사생활을 하였다는 증거가 된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에서 발굴된 BC 2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 덤에서 고조선 유민들이 제작 이용한 붓과 벼루가 발굴되었는데, 그 이전 고대시기 부터 붓의 발전수준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남한에서도 창원 다호리에서 동시대의 붓이 발견된 바 있는데35) 향후 이와 관련하여 남북간의 학술적 교류도 가능할 것 으로 본다.

또 북한학자들이 언어학적 측면에서 신지글자의 유구성을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의 이른 시기에 글쓰기 생활이 벌어졌으며 서예를 하였다는 근 거는 글쓰기생활, 서예생활의 기본어휘들인 <글>, <붓>, <먹>, <스다>, <벼루> 등 말들이 고유한 조선말로서 태고로부터 쓰인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36)

그 글자의 모양이 소리글자인 범자(인디아의 옛날글자)의 모양과 같은 데가 있다 고 한 것으로 보아 그 글자가 뜻글자 유형이 아니라 소리글자 유형이었다는 것을 짐 작할 수 있게 한다.37)

 

      35) 이건무,「다호리유적출토 붓에 대하여」,『고고학지』4, 한국고고미술연구소, 1992 : 1988년 1월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 1호분에서 삼한시대 붓 5점과 나무판에 쓴 글씨를 긁어서 지우는 용도로 사용된 손칼(삭도)이 출토. 붓 5점은 모두 길이가 약 23센티. 붓대는 나무를 깎아 만든 후 그 위 에 흑칠을 했으며, 횡단면은 원형에 가깝고 筆毛가 달린 양단은 폭이 약간 넓은 편이다. 중국에 서 유입된 것이 아니고 다호리지역에서 직접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기원전 1세기 삼한 시대부터 문자를 사용한 증거를 보여주는 것으로 한국서예의 시원을 연구하는데 의미가 크다.

     36) 탁영한,「우리나라에서 서예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예술교육』(2006.4), 2.16예술교육출 판사, 65쪽

     37) 박영도, 『조선서예발전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인쇄소:평양종합인쇄공장), 2008, 82-90쪽. 

 

16세기의 학자 이맥의.....『태백일사』에 인용되어있는 <대변설>의 <주>에서는 남해현 양하리의 계곡에 있는 바위에 신시(神市)글자의 옛 새김이 있었는데 그 글은 환웅이 <사냥을 가서 세 신에게 제사를 지내다>라는 내용을 담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 바위새김은 <서불의 글>이라고 전해 오는 것으로서 이것은 원래 <옛 조선의 글>을 가리키는 말이다.(<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연구론문집>, 1994, 90-92쪽) 여 기서 <서불>이라는 말은 결코 그 어떤 다른 나라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사라보로/ 서러부루/사보로/서부루>라는 우리나라의 옛 겨레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38)

서예생활의 기본 어휘들인 <글>, <붓>, <먹>, <스다>, <벼루> 등이 순수 우리말인 것을 볼 때 태고로부터 한국에서 서예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하 였다.

그리고 신지글자의 모양이 소리글자인 범자(인디아의 옛날글자)의 모양과 같 는 것으로 보아 지금 한글의 소리글자와 같은 유형이라는 것이다.

이어 이맥의『태 백일사』에 수록된 남해현 양하리 계곡 바위에 새겨진 신시(神市)글자가 <서불의 글>이라고 전해 오는 데, 여기서 <서불>이라는 말은 그 어떤 다른 나라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옛 겨레이름으로 서예의 뿌리가 되는 신지글자의 유구 성과, 신지글자가 지금의 훈민정음체인 한글과의 연관성이 있다고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북한에서 한국서예의 시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신지글자체의 의의에 대하여 다 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고조선 최초기에 민족서예의 뿌리로 내린 신지글자체는 우리나라 서예사의 발원체로 될 뿐 아니라 매우 이른 시기에 나왔다고 하는 중국최초의 글씨인 갑골문 자체보다 1000여년 앞서나온 것으로서 동양서예의 발원체로도 된다. 따라서 신지글 자체가 나온 평양은 동양서예의 발원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인류문명의 여명기 에 평야에서 시작된 신지글자체에 의한 우리나라 고대서예는 그 유구성과 우수성으 로 하여 동양서예사의 첫 장을 빛나게 수놓았다.39)

 

신지글자체는 세계서체학발전의 기초로 된다.

고대시기에는 문자를 가진 나라가 매 우 드물었고 문자가 있었다고 해도 네모형의 외형으로 통일되여 있는 문자는 그 어 디에도 없었다.

지금 세계에는 수백 개의 민족글자가 존재하는데 서체형식을 서로 비 슷한 것들끼리 묶어 놓으면 라틴계문자, 아랍게 문자 그리고 아시아나라들에서 쓰이 고 있는 정방형의 글자 등 3개의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모든 글자의 규격을 정방형으 로 통일시킨 서체형식은 고조선시기에 창조된 신지글자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처 럼 신지글자는 세계문자와 서체형식을 더욱 다양하게 하는데 기여하였다.40)

 

   38) 탁영한,「우리나라에서 서예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예술교육』(2006.4), 2.16예술교육출 판사, 65쪽

   39) 위의 글

  40)「조선글의 시조서체 – 신지글자」,『조선녀성』, 2011. 7호, 55쪽 본사기자 

 

북한서예계는 신지글자체가 한국서예의 발원체가 될 뿐 아니라 중국최초의 글씨 인 갑골문보다 1000여년 앞선 동양서예의 발원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평양은 동양서예의 발원지가 된다 하였다.

그러면서 신지글자체는 세계서체학 발전의 기초 가 된다고 한다. 고대시기 문자를 가진 나라가 드문 상황에서 정방형의 외형을 통 일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조선시기 창조된 신지글자는 세계문자와 서체형식을 더욱 다양하게 하는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즉 신지글자는 조선말과 글, 민족서예발전과 동방과 세계 글자역사에서 큰 의의 를 가진 문자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북한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한국서예 시원이 중국의 서예문화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자주적인 문화역량에 의하여 독자 적인 서예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중국의 서예문화 보다 앞서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문자와 서예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학술적으로 정립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북한에서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태백일사』,『단군세기』 등의 자료는 남한의 학계에서는 위서로 여기고 학술적 자료로 활용하지 않고 있는『환단고기』 에 실려있는 자료들이다.『규원사화(揆園史話)』도 상고시대와 단군조선의 임금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남한의 사학계에서는 위작 시비가 있고, 그 내용을 실제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르다는 견해다.41)

이러한 자료들은 성리학을 국시로 하여 창건된 조선의 세계관과 상치되는 것으 로 조선시대에서도 금서로 규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북한은 이를 토대로 한국서예의 시원을 자기들의 방식으로 정립하였다.

이는 주체사상과 이와 관련된 조선민족제일주의42)에 근거하여 역사적 주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정립된 논리 로 판단된다.

 

     41) 1911년 계연수의 한국상고사 역사서인『환단고기』범례에『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 『태백일사』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 한국고대사에 대한 인식이 현저한 차이가 있어 이들 책들에 대한 사료적 가치에 대하여 남한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위서로 간주하고 있는 상 황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2) 김정일, 1989,「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을 높이 발양시키자」,『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의 문 헌집』,249쪽 ;『철학연구』4호, 사회과학출판사, 1990 (조선민족제일주의는 ‘민족자주의식의 높 은 표현’으로서 “조선민족의 위대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조선민족의 위대성을 더욱 빛내어 나 가려는 높은 자각과 의지로 발현되는 숭고한 사상 감정”으로 규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남북한 서예계는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앞으로 그 차 이를 극복해 가야할 숙제를 안고 있다.

여기에서 좀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은 북한이 주장하는 신지글자체와 훈민정음 창 제와의 연관성에 대해 남한학계 등의 의견을 살펴본다.

김일성은 교시로 <이미 삼국시기부터 리두문자를 사용하여 오던 우리 인민은 1444년에 가장 발전된 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함으로써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 였습니다>43)라고 하였다.

이는 북한이 훈민정음에 대하여 얼마나 비중을 두고 있 는 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신지글자와 훈민정 음체와의 필연적인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은 그들의 연구성과에서 결론으로 도출하 고 있다.

한효성은 신지글자와 훈민정음체와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 다.44)

 

    43) 김일성전집 1권, 555쪽.

    44) 한효성,「훈민정음체의 서체사적 의의」,『력사과학』, 2011.4호, 67-69쪽 ;「조선글의 시조서체 – 신지글자」,『조선녀성』, 2011. 7호 55쪽. 

 

‘훈민정음체는 단군조선시기에 창조된 신지글자체의 서체학적 특성을 계승한 민족 서체였다. ..........훈민정음체가 신지글자의 서체학적 특성을 계승하여 창조되였다는 것은 또한 신지글자체의 획 체계가 그대로 훈민정음체에 반영되여 있는 데서 알 수 있다..........이처럼 훈민정음체는 선행시기의 유산에서 좋은 측면을 계승하고 부족 되 는 것은 보충하는 원칙에서 창조된 우리 민족의 서체유산이며, 조선민족서체가 중세 부터 발생발전 한 것이 아니라 고대시기에 시원들 둔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력사를 가진 서체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된다.

 

훈민정음체는 단군조선시기에 창조된 신지글자체의 서체학적 특성을 계승한 민 족서체라는 것이다.

즉 훈민정음체는 선행시기의 유산에서 좋은 측면을 계승하고 부족 되는 것은 보충하는 원칙에서 창조된 우리 민족의 서체유산이며, 조선민족서 체가 중세부터 발생 발전한 것이 아니라 고대시기에 시원을 둔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력사를 가진 서체라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남한 학계에서는 훈민정음의 기원설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을 제 시하고 있다.

한글서예의 뿌리가 되는 훈민정음의 기원과 관련한 연구는 개신교선 교사들에 의해 연구가 시작되었다.

서양인들의 일반적인 의견은 ‘梵字起源設’이고, 1892년 헐버트는 ‘티베트어 문자기원설’, 이익습은 헐버트의 논의를 비판하며 훈민  정음 창제에 반영된 유교적 원리를 지적하며‘발음기관 상형설’을, 게일은 국조보감 의 기록45)에 의거하여 ‘임금이 중국 고대의 전서(篆書, seal characters)를 따라 초성, 중성, 종성으로 언문 28자를 만들었다.’46)는 진술을 제시하며 ‘古篆起源設’을 주장하였다. 기타 파사파문자모방설, 몽고자기원설, 세종대왕친제설47), 서장문자기 원설, 기일성문도설(起一成文圖設) 등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다48).

그런데 1940년『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된 이후부터 한글의 창제원리와 기원 에 대하여 발음기관 상형설에 보다 비중이 실리고 있다.49)

이러한 다양한 기원설 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북한은 신지글자가 훈민정음체의 전범이라는 설을 견고 히 하고 이와 관련된 논리를 계속하여 구축해 나가고 있다. 민족의 문명이 얼마나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은 민족문자의 시원과 많이 관계된다.

북한은 한국서예의 시원과 관련, 고조선 시초의 신지글자가 가림토 글자에 이르고 이것이 훈민정음으로 계승 발전하였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문명의 발상을 그동안 일반적으로 중국(갑골문 등 상형문자, 금문 등)과 연계하여 설명하 던 방식이 아닌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문화50)를 발상지로 하는 주체적인 관 점에서 모든 역사를 설명해 나가고 있다.

 

     45)『國朝寶鑑』7, 「世宗朝 3」(병인28년 1446) :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協七調 三極之義二氣之妙

     46) 이상헌,「한글의 기원과 훈민정의의 흔적-게일의 ‘The Korean Alphabet’(1912)에 새겨진 서양 인 훈민정음 기원론의 역사-」, 『국제어문』제72집, 2017, 43쪽.

     47) 세종실록 권102(세종25년12월끝자리)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 를 만드셨다)

     48) 姜信沆,「훈민정음 연구」,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91, 87쪽 ; 황경수,「훈민정음 기원설」,『새 국어교육』70, 한국국어교육학회, 2005

      49) 황경수,「훈민정음 기원설」,『새국어교육』70, 한국국어교육학회, 2005, 234쪽.

     50) 조법종,「북한의 ‘대동강문화론’과 고조선인식 검토」,『선사와 고대』43, 2015, 39쪽 : 북한학계 가 1993년 단군릉 발굴이후, 1998년 새롭게 제기한 ‘대동강문화론’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이 인류 고대문명의 발상지이자 중심지로서 세계 4대문명에 비견되며 기원전 4천년 후반기 에 문명사회로 변화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1989년 김정일이 제창한 ‘조선민족제일주의’에 근거하여 나타난 일련의 과정

 

문자와 서예문화도 중국문화에 종속된 것 이 아니라 자주적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오히려 중국보다 1000여년이 앞선 유 구한 문자와 서예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북한은 전해오고 있는 자료와 출토된 유물·유적의 상관관계 를 실증적으로 확증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고대에 창조된 신지글자체가 중세시기에 창제된 훈민정음체와 연관이 있으며 서체학적 계승관계가 어떤 측면에서 맺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밝히고 그 정당성을 확보하고 자 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학술적 연구는 주체사상에 종속되어 한국서예계의 시원에 대해 결론을 견강부회식으로 유도해 가는 느낌이다.

이는 남한의 학계에서 인정하지 않 는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이에 대해 남북한 간의 열린 맘으로 학술교류의 필요성 이 어느 때 보다 크다고 본다.

 

 

3. 항일혁명시기 주체서예 시원

 

북한에서 주체사상은 1960년대 김정일 종자론의 등장과 더불어 이후 보편적인 사상논리로 체계화되었다.

주체에 대한 자각은 일제강점기 항일혁명투쟁과정에서 점점 태동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정권의 정체성도 일제에 대한 항일혁명 투쟁의 역사에서 찾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의 주체서예도 주체사상이 정립되기 이 전에 일제에 대한 항일혁명투쟁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배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북한에서의 주체서예의 시원은 김일성가계의 항일혁명과정과 직간접적으로 연 관되어 있다.

북한은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을 후계자로 공식화하였고 82년에 는 김정일이「주체사상에 대하여」(김정일,1987)를 발표하였다.

사람중심(인간중 심)의 주체사상을 수령중심의 주체사상으로 바꾸기 위하여 ‘혁명의 주체(역사의 주 체)’개념을 변화시켰다.

즉 역사의 주체를 인민대중에서 수령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86년에는 김정일은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김정 일,1992,144-169쪽)를 교시하여 혁명의 주체는 수령·당·대중의 통일체 중에서 수 령임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 같은 1980년대의 주체사상은 혁명계승론과 혈통계 승론을 핵으로 한 수령중심론을 노동당의 유일지도사상으로 규정하여 권력세습을 정당화하였다.

그래서 북한에서 주장하는 주체서예의 시원은 김일성과 그 주변사람들로부터 시 작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김정일은 <항일혁명문화예술은 일찍이 그 어느 시기에 창조된 문학예술에도 없었 던 사상이론적 재부와 창작실천적 재부를 가진 문학예술이었습니다>라 하였다.

김일성의 영도 밑에 창조된 항일혁명미술에 의하여 우리 미술은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 섰으며 그때부터 시대의 요구, 인민대중의 지향을 가장 정확히 반영한 주체미술의 시 원이 열리게 되었다.51)

주체미술의 시원을 항일혁명미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표 2)에서 김일성은 1954년 평양미술대학창립 40돌기념 미술전람회장을 찾아서 미술교육에서 주체를 세워 나갈 데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표 2) :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이후 남한에서 현재 확인된 자료로 ‘주체미술’ 이라는 공식적 용어는 1985년『조선미술연감』에서 처음이다.52)

동 자료에는「주 체미술의 전성기를 더욱 빛낸 자랑찬 한해」라는 소제목이 등장한다.

김일성은 1991년 2월 11일 만수대창작사를 방문하여 사회주의 민족미술 건설과 창작에서 근본지침으로 삼아야 할 강령적인 교시를 하고, 이후 김정일은 1992년 그의 미술 론에서 “주체미술은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은 혁명적이고 인민적인 미술이며 사상성과 예술성이 완벽하게 통일된 새 형의 미술이다”고 주체미술의 개 념을 분명히 적시한다.53)

서예도 넓은 의 참조)미의 미술에 포함되기 때문에 주체서예에 대한 의미도 주체미술의 의미 속에 이미 담겨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이후 1997년 오광섭54)이『주체서예』를 발간하면서‘주체서예’라는 용어가 처음 공식적으로 등 장한다.

 

    51)『로동신문』,「주체미술의 빛나는 전통」, 2014.5.13., 4면.

    52)『조선미술연감』1985, 문예출판사, 1985.

    53) 김정일,『김정일미술론』,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1쪽.

    54) 오광섭 : 평양미술대학 교수, 서예연구가

 

 2001년 2월 9일자『민주조선』에「서예에 관한 주체적문예사상연구모임이 인민 문화궁전에서 진행되었다」는 기사가 있다.55)

 

     55)「서예에 관한 주체적문예사상연구모임이 인민문화궁전에서 진행되었다」,『민주조선』, 2001.2.9, 2면·4면 기사 

 

모임에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주체서예의 거장이시다>, <백두산위인의 풍모와 기상이 넘쳐 나는 천출명필체에 대하여>,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밑 에 주체서예는 민족적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은 혁명적인 서예로 찬란히 발전하 였다>라는 제목으로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서예분과위원회 위원장 허이화, 평양 미술대학 강좌장 학사 오광섭, 만수대창작사 실장 공훈예술가 리재명이 토론하였다.

여기 서예관련 주체적 연구모임은 주체미술 속에서 주체서예의 의미를 좀 더 분 명히 해 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주체서예』의 저자인 오광섭이 토 론에 참여한 것이 확인된다.

2001년 7월 8일자『문학신문』기사에서 오광섭은「주 체서예의 최고정화 <태양서체>의 특징」이라는 기사를 연재하였다.

이와 같이 오 광섭은 주체서예에 대한 개념을 정립해 나가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2005년 2월 5일자『로동신문』은 「주체적인 서예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라 는 기사를 통해

“서예가 시대를 반영하여야 한다는 것은 시대가 요구하고 제기하 는 문제를 안고 있는 단어나 문장을 인민들의 사상감정과 미적정서에 맞는 필체로 형상한다는 것, 즉 철저히 서예에서 민족적 특성을 잘 살려 우리 식으로 한다는 것 을 의미한다”

고 언급하면서 주체서예의 시대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광섭이 그의 저서『주체서예』에서 ‘주체서예’에 대하여 언급 한 내용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체서예의 시원과 전통을 살펴본다.

주체서예의 태동 배경 및 그 시원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벌써 오래전에 서예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고유한 민족서 예는 사대주의에 물젖은 역대 봉건통치배들의 한문숭상과 일제침략자들의 악독한 민 족문화말살정책을 하여 여지없이 짓밟히고 빛을 일었다. 바로 이런 역사적시기에 혁 명적 가정에서 탄생하시어 뛰어 난 붓글씨 재능을 소유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독립>이라는 불후의 서예작품을 친필하시여 주체서예의 빛나는 시원을 열려 놓았다. 일찍이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님께서 <지원>의 사상으로 마련하시고 가꾸어 오신 혁명적 서예는 이처럼 주체서예의 시원을 열어 놓게 하는 비옥한 터전으로 되었다.”

고 하였다.

김일성이 친필한 <조선독립>으로부터 노동계급의 혁명적 서예발전의 새로운 단계 가 펼쳐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조선독립>은 그 이전시기의 서예와는 근본적으 로 다른 주체적이며 혁명적인 서예가 발전해나갈 수 있는 앞길을 열어주어 인민의 혁명투쟁에 적극 나서는 사상적 무기로서의 서예의 출현을 힘있게 담보해 주었다는 것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식민지 예속에서 허덕이던 우리민족에게 당시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조선을 독립하는 것이었는데, 이 <조선독립>은 인민의 염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는 것이다.

친필서예 <조선독립>은 부모로부터 이어진 숭고한 애국의 넋이 그대로 담겨져 있으며 조선독립을 기이어 성취하시려는 뜻이 깊이 담겨져 있다 고 하였다.

 

오랜기간에 걸쳐 우리나라의 서예는 한자에 기초하여 왔으며 특히 일제에 의하여 짓밟히면서 서예는 민족성을 잃고 있었다. 그동안 전해져 오던 궁체 등 우리의 글씨 는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이러한 속에서 우리 글자로 서예의 고전적 본보기를 참조하여 주체서예의 빛나는 시원을 열러놓았다.56)

 

주체서예가 태동하게 된 배경으로 오랜 역사의 우리 고유의 민족서예가 역대 지 배층의 사대주의사상에 젖은 한문숭배와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짓밟히는 상황을 들고 있다.

이러한 때 혁명적 가정에서 태어나 붓글씨에 재능이 있던 김일 성이 5세 때 <조선독립>이라는 서예작품을 친필 한 것이 주체서예의 시원이라는 것이다.57)

 

    56) 오광섭, 『주체서예』,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7, 21쪽.

    57) 주체서예의 시원은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 친필 <지원>으로 보기도 한다. [김철민,「주체서 예의 시원」,『천리마』, 2011.5, 천리마사, 18쪽 ; 김사득, 「백두산3대장군의 명필체」,『조선 문학예술년감』, 문학예술종합출판사, 2002] :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식선생님께서는 대를 이어서라도 기어이 나라의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지원의 사상을 내놓 으시고 그것을 붓글씨로 쓰시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 쓰신 <지원>이라는 붓글씨는 우리나라 주 체서예의 시원으로 되었다.” 

 

이 시원이 된 김일성 친필 <조선독립>에 다양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첫 째, 김일성의 <조선독립> 친필이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적 서예발전의 새로운 장 을 열었다 한다.

『천리마』(2011.5)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20세기초까지 우리나라에서 서예는 주로 지배계급의 취미와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근로인민대중의 문화생활과는 관계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예술적 일면에만 치우치면서 발전하였다. 더욱이 일제의 악랄한 민족문화말살책동이 극심해지던 시기에는 민족서 예가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다.58)

 

당시에 하류계층에 속하는 노동계급에게 서예는 그들과 전혀 무관한 문화활동이 었다.

이는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일성 친필 <조선 독립>은 이전 시대의 상류계층의 서예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노동계급에 의한 주 체적·혁명적인 서예라는 것이다.

  둘째, 순수예술적의미의 서예가 아닌 사상적 무기로서의 서예를 말하고 있다.

김 정일은 그의 미술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오늘 우리 서예는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인민들의 혁명적인 사상감정과 높은 뜻을 반영하고 있으며 필치도 달라지고 서체도 새로워졌다. 오늘 서예는 시대를 반영하여 야 수령, 당, 대중이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되어있는 우리의 참 모습을 보 여줄 수 있으며 고상한 서예기풍을 세우고 풍부한 미적정서가 흐르는 서체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 서예가 시대를 반영하여야 한다는 것은 시대가 요구하고 제기하는 문제를 안고 있는 단어나 문장을 인민의 사상감정과 미적 정서에 맞는 필체로 형상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59)

 

     58) 김철민,「주체서예의 시원」,『천리마』, 2011.5, 천리마사, 18쪽.

     59)『김정일선집12』(증보판)2, 177쪽.

 

서예는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인민들의 혁명적인 사상감정과 높은 뜻을 반영하고 필치도 달라지고 서체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시대가 요구하고 제기하는 문제를 안고 있는 단어나 문장을 인민의 사상감정과 미적 정서에 맞는 필체로 형 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문학예술은 마땅히 혁명의 전진에 보조를 맞추어야 하며 인민들의 높은 문화정서적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김일성 친필 <조선독립>에 담겨진 민족성, 인민성과 혁명성의 형식에 대 하여 다음과

 

김일성의 친필서예 <조선독립>은 심원한 사상적내용을 우리글자에 담아 표현한 새로운 형식의 민족서예다. 우리글자로 구성된 민족적이며 인민적인 형식의 것으로 친필서예 <조선독립>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우리 인민의 기호와 정서를 참답게 반영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주체서예의 시원을 몸소 열어놓은 김일성은 부단한 창조 적 실천으로 혁명적 서예의 화원을 끊임없이 가꾸어 나갔다........ 북한의 처음신문인 <새날>을 창간하고 그 제호를 친필하였다. 김일성은 초기의 혁명활동시기를 기초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조직 전개해 나가는 가운데 서예활동을 더 욱 폭넓게 진행하였다.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시기 서예활동을 출판물발간사업, 문학 예술창조사업과 밀접히 결합시켜 진행하였을 뿐아니라 격물과 호소문, 포고문, 삐라 등 다양한 직과선전선동사업의 중요한 분야로 확장해 나갔다. <3.1월간>, <서광>, <철혈>을 비롯한 각종 출판물을 발간하면서 거기에 실을 글들과 전투적 구호들을 친필하였다. 1930년 후반기의 혁명적 현실에 맞게 문학예술활동을 정력적으로 벌리 며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 <경축대회> 등 불후의 고전적 명작을 친필 하는 한편 <반일전가>와 같은 수많은 혁명가요들을 친필하며 글씨를 남겼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의 친필원고는 그 대표적인 실례의 하나이다. 항일무장투쟁 시기에 창조된 문학예술작품들은 물론 각종 출판물들과 직간선전물들에 반영된 전투 적이며 혁명적인서예들은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과 우리 인민들을 항일대전에로 힘 있게 불러일으켰고 적들에게는 무서운 공포와 절망을 안겨주었다.60)

 

김일성의 친필서예 <조선독립>은 심원한 사상적내용을 우리 글자에 담아 표현 한 새로운 형식의 민족서예라는 것이다.

주체사실주의의 기본원칙에 대하여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았다고 하였다.61)

 

     60) 오광섭, 『주체서예』,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7, 21쪽.

    61)『김정일선집12』(증보판)2, 60쪽 ; 창작방법에서 주체사실주의가 내세우는 중요한 원칙은 사회 주의적 내용과 민족적 형식의 통일에 의해서만 성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민족적 형식에 사회 주의적 내용을 담는 것은 당성, 로동계급성, 인민성을 구현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된다. 

 

그 만큼 주체서예에서 민족성은 중 요한 개념이다.

즉 김일성 친필서예 <조선독립>은 우리나라 처음으로 인민의 기 호와 정서를 참답게 반영한 민족적이면서 인민적 새로운 형식의 서예라는 것이다.

이는 부단한 창조적 실천에 의해 맺어진 혁명적 서예형식으로 간주하고 있다. 김일성 등은 항일혁명활동시기에 서예활동을 더욱 폭넓게 진행하였다.

즉 서예 활동은 혁명활동의 일환으로 출판물발간사업, 문학예술창조사업과 밀접하게 결합하 여 격문과 호소문, 포고문, 삐라 등 다양한 선전선동사업의 중요한 분야로 확장해 나갔다.

  넷째, 김일성 등의 항일혁명활동시기 서예활동이 주체서예의 전통이고 원전이 된다는 것이다.

 

김정숙동지를 비롯한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청봉숙영지와 백두산일대의 여러 밀영들의 나무들에 새긴 수많은 구호글씨들은 항일혁명투사들의 숭고한 정신세계를 힘있는 필치에 담아 생동하게 반영한 것으로 혁명적서예의 귀중한 원전이 되고 있다.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이룩된 빛나는 서예형상- 이것은 단순한 글발이 아니라 하나하 나의 획과 글씨마다에 혁명적수령관과 백절불굴의 투쟁정신, 혁명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심이 그대로 흘러넘치고 혁명실천을 통하여 그 위력이 남김없이 발휘된 주체서예 의 귀중한 혁명적 재부이다.....전면적으로 계승발전시켜야 할 주체서예의 전통이다. 항일혁명서예가 주체서예의 전통인 것은 혁명적 수령관으로 일관되고 영생불멸의 주 체사상과 주체적 문예사상을 구현한 혁명적 서예이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을 처음으로 구현한 혁명적 서예이다......특히 구호나무를 통한 서예형식은 오늘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항일혁명투쟁시기에 전통적 서체들을 발전시켜 박력과 무게, 변화있 고 필력있는 서체인 청봉체의 시원이 마련됨으로써 우리나라 서예발전에서는 새로운 시대가 열려지게 되었다.62)

 

항일혁명투쟁시기 김일성의 부인인 김정숙과 그 동지들의 서예를 통한 항일활동 은 주체서예의 전통을 구축해 나가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다.

청봉숙영지 와 백두산일대의 여러 밀영들의 나무들에 새긴 수많은 구호글씨들은 항일혁명투사 들의 숭고한 정신세계를 힘있는 필치에 담아 생동하게 반영한 것으로 혁명적서예 의 귀중한 원전으로 여긴다.

김정일은 교시하기를 <항일혁명투쟁시기 나무에 쓰여 진 글씨를 보면 수령님의 위대성과 령도의 현명성, 혁명의 승리에 대한 신념을 역력히 보여주고 항일혁명투 사들이 지닌 숭고한 민족적 정서가 깊은 힘있는 필치로 살려냈다>63) 하였다.

 

     62) 오광섭,『주체서예』,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7, 21쪽.

     63) 김정식,「혁명적 구호문헌은 주체서예의 만년재보」,『예술교육』, 2007.3, 18쪽.

 

이 시기에 쓰여 진 서예형상은 단순한 글씨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획과 글씨마다 에 혁명적수령관과 백절불굴의 투쟁정신, 혁명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심이 그대로 흘러넘치고 혁명실천을 통하여 그 위력이 남김없이 발휘된 주체서예의 귀중한 혁 명적 재부라는 것이다.

항일혁명서예가 주체서예 전통이 되는 것은 그것이 인민의 감정과 정서에 맞는 서체를 기본으로 하여 항일혁명투쟁의 혁명적 현실에 맞는 전투적인 형식을 창조 한 혁명적 서예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특히 구호나무를 통한 서예형식은 이후 북한 서예에서 새로운 서체개발 등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다섯째, 항일투쟁시기에 서예의 주체는 전문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항일혁명서예는 개인의 창작적 지혜와 집단의 힘을 밀착시키고 창작실천과 군중의 힘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였다.

항일혁명서예는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 의하여 창작 되었으나 그것이 그처럼 커다란 작용과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항일혁명투사들과 인민들의 지혜가 남김없이 발휘된 창작품이였기 때문이다.

항일혁명투사들은 서예를 하면서 전투를 해야 하였고 전투의 여가에 붓을 들어야 하였다. 이것은 항일혁명서예 의 혁명적인 창작방법과 창조기풍을 확립하는 기본조건으로 되었다.

김일성 등의 항일혁명서예는 개인의 창작적 지혜와 집단의 힘을 밀착시키고 창 작실천과 군중의 힘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항일혁명서예가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 의하여 서예가 창작되었다는 것은 그동안 한국서예가 사 대부 및 전문서예가를 중심으로 서론 및 서체 등이 발전되어 온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남한서예가 근대기 전통서예가와의 연관관계 속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반하 여 북한서예는 현재 근대기 전통서예가와 연관관계를 상정하지 않고 서예역사를 전개해 가고 있다.

전통서예가와의 서맥 즉 계통상의 연계관계가 단절되어 있다.

그렇다고 전통서법에 대해서까지 단절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통적인 글 씨체와 한자의 표의문자 특성 등의 고유성을 중시하고 이를 현대적 미감으로 발전 시켜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64)

 

    64)『김일성선집』12(증보판2),「김정일미술론」, 179쪽.

 

이렇듯 김일성의 <조선독립>친필서예와 이어진 항일혁명서예는 그 내용의 심오 성과 혁명성, 전투적인 형식과 창조기풍으로 하여 주체서예의 시원과 전통이 되었 다는 것이다.

이러한 항일혁명투쟁시기의 전통적 서체들을 발전시켜 박력과 무게, 변화있고 필력있는 서체인 청봉체의 시원이 마련되었다 한다. 이로써 우리나라 서 예발전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주체서예는 김일성의 어린시절 <조선독립>이라는 친필서예로부터 시작된 것 으로 항일혁명투쟁의 과정에서 민족적 정기와 혁명적 발상에서 배태된 것이다.

이 는 전문 서예가들에 의한 것도 아니고 지배층의 사대부들에 의해 창조된 것도 아 니다.

항일혁명투사들과 인민들의 지혜가 남김없이 발휘된 창작품으로 혁명적 서예 다.

이러한 항일혁명투쟁과정에서 생긴 백절불굴의 투쟁정신, 혁명승리에 대한 확 고한 신심이 서예에 흘러넘쳐 주체서예의 전통이 되었고, 북한의 주체서예가 배태 된 것이다.

주체서예는 시간이 갈수록 계속적인 성장을 통해 북한 인민의 미적정서를 반영 한 주류 서체로 정체성을 확보하며 다양하게 발전하게 된다.65)

 

     65) 김철민,「주체서예의 시원」,『천리마』, 천리마사, 2011.5, 18쪽. 

 

다만 인적관계 등 에서 북한 서예의 서맥이 전통서예 서맥과 단절되었다는 것은 한국서예사에 있어 서 주목해야할 대목으로 본다. 이어서 주체서예가 성장하여 발전해가는 과정은 다음 장에서 살펴본다.

 

Ⅲ. 북한 주체서예의 성장·정립과정 고찰

 

1. 주체서예 적용사례와 성장

 

주체서예에 대한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김정일시대에 들어와서 주체사상이 안정적으로 정립되고 1991년(10.16) 김정일이 그의 미술론 에서 주체미술에 대한 이론을 발표한 이후다.

그 이전에 항일혁명투쟁 및 전후복구 과정에서 아직까지 주체에 대한 개념이 모호할 시점에 김일성은 친필서예를 다양 한 형식으로 활용하여 그 의미를 확장시켜 나갔다.

김형직의<지원>사상 바탕위에 주체서예 시원으로 여기는 김일성 친필 <조선독 립>이 등장한다.

이후 항일투쟁시기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주체적 의미를 담은 북 한의 서예는 해방 후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의 강력한 사상적 무기로의 역할을 펼쳐 나갔다.

김일성의 대표적 친필서예 사례에서 주체서예로의 발전과정을 살펴본다.

1946년 3월 지주집 대문기둥의 문패를 대대로 머슴 살아온 농민의 이름 <박장반>을 김일 성 친필로 바꾸어 달았다.

이는 식민지 노예에서 해방된 인민의 기쁨과 인간에 대 한 존엄을 집약한 것이다.

한국전쟁기간 어간에는 1950년 9월 25일 전선사령관이었던 김책, 1951년 2월 22일 홍명희부수상, 1952년 11월 15일 만경대 혁명학원교원에게 친필로 격려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기념비적건축물의 이름을 친히 짖고 친필함으로써 주체서예를 향한 새로 운 경지를 개척해 나갔다.

<옥류교>, <향산다리>, <미림다리>, <충성의 다리>, <은파호>, <청천다리>, <무지개동굴>, <금릉동굴> 등이 있다. 교육문화기관들 의 경우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 <김형직사범학교>, <김책공업종합대학>, <고 려성균관> 등이 있다.

<대성산혁명렬사릉>,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서해 갑문>과 같은 대기념비적 창조물에도 서예작품을 남기였다.

김정일시대에 와서는 인민의 정치사상생활과 문화정서생활에서 서예가 주는 중 요한 역할에 큰 의의를 부여하였다.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서예의 본질과 특성을 새롭게 정식화하고 인민대중의 자주위업에 참답게 이바지하는 우리식 서예 즉 주 체서예를 정립해 나갔다.

김정일은 김일성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정을 표하는 김일성 친필현판, 친필비, 친필 문주들을 세우며 기념비적 사업을 창조하였다. 당과 수령을 칭송하고 혁명과 건설에서 이룩한 김일성의 업적을 명문장으로 길이 전하는 기념비서예창조사업에 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김일성의 혁명역사와 혁명업적이 깃들어 있는 사적지와 전적지, 유서깊은 곳에 혁명적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면서 서예적 형상을 통해 길이 전하는 사적비66)를 포함시켰다.

이러한 기념비서예는67) 그 형식과 방법에서도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66) 북한에는 김일성주석 혁명사적지 34개와 김정일 혁명사적지 15개를 포함 모두 60여개의 혁명사 적지가 조성되어 있다.(『통일뉴스』,「북, ‘백두산3대장군 혁명사적지’ 최초 조성」, 연합뉴스, 2001.11.20)

     67) 기념비미술(서예 등)은 대규모 시각 조형물로,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혁명 역사 및 업적을 기념하 기 위해 제작되는 미술을 말하며 북한 미술을 대표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여기에 사적비 등 서예 조형물을 기념비서예라 말한다.

 

동상과 탑, 조각군상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적비를 세우는 등 독창적인 이론을 내놓으며 기념비서예의 새시대를 열었다.

왕재산기념비, 삼지연기념비, 주체사상탑, 조국해방전 쟁승리기념탑을 비롯한 혁명적 기념비 등이 그것이다.

예로부터 정적인 수준에서 행해오던 서예가 김정일시대에 들어서서 인민들을 격 동시키고 투쟁심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무기로의 역할을 하는 등 서예의 사회적 기능이 새롭게 더 부각되어 나타났다.

즉 주체서예의 찬란한 개화발전을 위한 창작 역량이 강화되어 서예 대중화에 새로운 전환이 일어났다. 그리고 김정일은 중장기적인 서예발전을 위해 교육사업으로 평양미술대학에 서 예학과를 설립하였고, 1982년에는 어린 학생의 서예적 재능을 귀중히 여겨 서예발 전의 강령적지침을 마련하여 널리 홍보하였다.

그래서 유치원에서부터 어린이들이 서예가로서의 꿈을 가지는 것이 하나의 사회적 기풍이 되어 많은 서예가 새싹들이 자라나게 되었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비롯한 청소년 과외교양기지들과 학교들에 서는 서예소조활동이 활성화 되는 등 북한은 짧은 기간에 정치사상적으로나 예술 적으로 잘 준비된 서예가의 대열이 튼튼히 꾸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국가미술전람회를 비롯한 여러 전람회들에서 서예작품들이 그 어느 때 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선전홍보사업(직관선전선동사업)과 근로자들의 사상교양에도 서예가 큰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김일성은 서예를 통해 항일혁명투쟁과 건설사업 등에 강력한 사상적 무기로 역할을 펼쳐나갔다.

김정일시대에 와서 북한의 주체서예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 대표적으로 기념비서예사업을 선창하고 서예미래세대를 위해 교육사업에도 과감한 투자를 하였다.

즉 평양미술대학에 서예학과 설립, 꿈나무와 어린 학생들을 위한 서예소조활동 활성화 그리고 나라의 홍보사업과 인민들의 사상교육에도 서예 를 적극 활용하였다.

이와 같이 김일성과 김정일 세대를 거치면서 주체서예는 단단 하게 자리를 잡아가게 되어 서예문화가 북한에 든든하게 뿌리내려 가게 되었다.

 

2. 「김정일미술론」을 통해 본 주체서예의 사명과 요건

 

북한의 주체사상이 물리적으로 기반을 다지고 아울러 사상적 이론적으로 제 대로 정립된 것은 김정일 때에 이르러서다. 김정일은 1987년 문학예술부분 일 군들과 한 담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68)

 

     68)『김정일선집』9(증보판), 「작가, 예술인들 속에서 혁명적 창작기품과 생활기품을 세울 대 대하 여」(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부 책임일군들 및 문학예술부문 일군들과 한 담화), 1987.11.30.  

 

우리 당의 로선과 정책은 우리 시대의 유일한 지도사상인 위대한 주체사상에 기초 하고 있으며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의 지향과 의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작가, 예 술인들은 당의 노선과 정책을 가장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무조건 끝까지 관철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을 숭고한 의무로 여겨야 합니다......문학예술창작기관이 나 예술단체는 결코 안식처가 아닙니다. 문학예술창작기관과 예술단체는 작가, 예술 인들이 하나의 사상의지로 굳게 단합하여 서로 돕고 이끌면서 당과 혁명에 이바지할 문학예술작품창작에 모든 재능과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할 전투장입니다......문학예술창 작에 있어서 조선민족제일주의를 구현한다는 것은 우리 인민의 고유한 생활감정과 정서에 맞는 민족적형식에 인류사상발전의 최고봉을 이루는 주체사상을 담는다는 것 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우리의 문학예술이 우리 인민의 민족적 특성에 맞 을 뿐 아니라 그 사상적 내용을 수준이 가장 높은 것으로 될 수 있습니다........제13 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내놓을 음악작품들도 민족적 선율을 바탕으로 하여 철저히 우리 식대로 창작하여야 합니다. 세계의 여러 대륙에서 오는 청년들의 기능을 고려한 다고 하여 음악작품들에서 쟈즈와 록크음악 냄새를 피워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우리 의 음악작품들에서는 우리의 민족적인 선율이 현대적 미감에 맞게 흘러넘쳐야 청년 들이 거기에서 조선음악의 진미를 느끼고 우리 노래를 더 즐겨부르게 됩니다. ........문학예술작품은 다 자기의 고유한 특색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문학예술작 품이 자기의 고유한 특색을 가지지 못하면 문학예술로서의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러 므로 작가, 예술인들에게는 언제나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발견하고 개척하려는 탐구 정신이 강하여야 합니다..... 작가, 예술인들의 창작적 사색은 반드시 사회현실에 대한 주체적 관점과 입장에 기 초하여야 합니다. 오직 주체의 관점과 일방에 튼튼히 서서 자주적인 인간의 생활을 깊이 연구하고 창작적 사색을 무르익히며 왕성한 열정을 내어 창작활동을 벌릴 때에 만이 인민대중이 좋아하는 새롭고 독창적인 형상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작가, 예술인들이 현실 속에 들어가야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고 힘차게 나아가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전진운동과 우리 인민의 높은 정신세계를 뜨겁게 느낄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새롭고 의의있는 문제를 찾아내어 생활을 진실하 게 형상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습니다....현실을 떠나서는 생활을 진실하게 형상한 참 다운 문학예술작품을 창작할 수 없습니다..... 주체사상 교양에서는 로작원문을 학습하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당의 노선과 정책은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의 지향과 의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작가, 예술인들은 이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위 해 투쟁하는 것을 숭고한 의무로 여겨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민족적 형식에 인류사상발전의 최고봉인 주체사상을 담는 것이 문학예술창작에 있어서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음악작품들의 경우 민족적 선율을 바탕으로 하여 철저히 우리 식대로 창작하여 민족적인 선율이 현대적 미감에 맞게 흘러넘쳐 조선음악의 진미를 느끼도록 하여 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서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이라고 본다.

작가, 예술인들의 창작적 사색은 오직 주체적 관점과 입장에 튼튼히 서서 반드 시 사회현실에 직접 참여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래야 인민대중이 좋아하는 새 롭고 독창적인 형상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김정일은 1991년 그의 교시에 그의 미술론을 담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 미술의 여러 장르(조선화,조각,출판미술,건축장식미술,영화·무대미술,산업미술,서예) 를 언급했다.

여기에서 ‘서예는 뜻과 획의 예술’이라는 제목으로 서예에 대한 그의 이론을 정립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이는 북한의 주체서예에 대한 결정판이 라 보면 될 것이다. 서예의 주체성, 고유성, 민족성, 창작성, 시대성, 혁명성, 당성, 현실성에 대해 포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뜻을 가진 글자가 획의 조화를 이루고 감정과 정서로 충만 된 필치로 조형화된 것 이 곧 서예라 하였다.....서예를 뜻을 가지고 한다는 것은 글자에 담겨진 뜻과 그에 대한 서예가의 사상감정을 조형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말한다. 뜻을 가지고 서예를 하여야 글자의 뜻과 서예가의 사상감정이 결합된 포현되며 글자의 획과 점이 형상화 되고 붓글씨 전체에서 미적정서가 살아난다....서예에서 뜻을 살려내는 기본수단은 획 이다. 획은 한 번에 긋는 선이나 점으로 글자의 조형미를 돋구어낸다.....서예가의 사 상감정과 창작적 열정도 획을 통하여 표현되며 서체와 필법의 특징도 획의 운필에서 살아난다.69)

 

     69)『김일성선집』12(증보판)2,「김정일미술론」, 1991, 175쪽.

 

즉 뜻을 가진 글자가 획과 조화를 이루어 감정과 정서로 충만 된 필치로 조형화된 것이 곧 서예라 하였다.

뜻과 획은 서로 대대관계이며 상보적 관계이다. 서로는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다. 겉으로 보면 전통서예의 이론과 부합된다. 즉 유 가사상의 기본이 되는 ‘문이재도(文以載道)’(글씨는 그 속에 도를 담아내야 한다)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북한에서의‘道’는 주체사상이다.

이는 순수예술적 의 미가 아니라 수령과 당과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서예를 말한다. 서예의 요건을 김정일은 그의 미술론에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70)

 

    70)『김일성선집』12(증보판)2,「김정일미술론」, 1991, 177-179쪽. 

 

    첫째, 서예는 시대를 반영하여야 한다. 서예는 시대를 반영하여야 한다.

서예는 뜻을 중시하고 획의 필치에서 사상감정을 표현하는 것인 만큼 서예가의 뜻과 필치를 통하여 시대를 옳게 반영하지 못하면 의 의있는 서예를 창조할 수 없다.

시대가 발전하는데 따라 사람의 의식과 미적정서도 발전풍부화되고 서예의 주제사상적 내용이 달라진다.

오늘 우리의 서예는 시대를 구현하고 인민들의 혁명적인 사상감정과 높은 뜻을 반영하고 있으며 필치도 달라지고 서체도 새로워졌다는 것이다.

수령, 당, 대중이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되어, 여기에 고상한 서예기풍과 풍부한 미적정서 가 흐르는 서체를 새롭게 창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서예가 시대를 반영하여야 한 다는 것은 시대가 요구하고 제기하는 문제를 안고 있는 단어나 문장을 인민의 사 상감정과 미적정서에 맞는 필체로 형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서예는 인민대중의 생활과 밀접히 결부되어 발전시켜야 한다.

힘 있고 전투적인 구호,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격언, 혁명사적 내용을 집약화 한 명문장, 서정이 넘치는 좋은 시구는 정치생활, 사상문화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정신적 양식이다. 이를 재료로 인민대중들의 생활과 밀접히 결부되도록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기념비서예가 정치사상성을 가장 뚜렷이 구 현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새로운 서예형식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를 여러 가지 형식 과 방법으로 계속 힘있게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고상한 윤리도덕, 역사와 문화, 자연풍치와 관련한 주제도 중요한 소재가 된다 했다. 이렇게 서예의 내용을 인민들의 생활과 밀접히 결부하여 폭넓고 다양하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서예는 대중적으로 하여야 한다. 

서예는 글자를 쓰는 예술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할 수 있다. 학교에서 글씨를 곱게 쓰는 버릇을 키워주고 붓글씨를 쓰는 방법을 배워주면 서예를 할 수 있는 기초가 마 련된다.

모든 학생이 초보적인 서예기초만 닦아도 서예를 대중적으로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

대중 속에서 명문장을 가지고 붓글씨를 쓰는 것이 생활화되면 사람들의 사 상문화수준도 더욱 높아지게 될 것이다.

서예는 글자와 한 몸으로써 글자를 쓰는 곳에 당연히 서예가 따르는 것으로 학 교에서 모든 학생들에게 서예기초를 닦아주면 서예를 대중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유치원에서부터 서예교육을 시작하고 있으며,71) 학 생들은 서예소조활동 등을 통해 북한 서예교육의 풀뿌리가 잘 조성되어 있다.72)

그리고 인민대중이 사회의 주인으로서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생활을 마음껏 누리 고 있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인민대중은 서예의 참다운 주인, 서예의 창 조자, 향유자라는 것이다.

    넷째, 서예가는 시와 그림을 알아야 하며 원숙한 필력을 소유하여야 한다.

시와 그림을 알아야 뜻이 깊고 사상성이 높은 문장이나 단어를 골라잡을 수 있으 며 조형적으로 아름답게 형상할 수 있다.

서예가는 시문학도 연구하고 격언도 많이 알아야 한다. 시를 모르는 서예가는 남이 써놓은 글을 붓글씨로 옮겨놓는데 그치고 만다. 문학이 있고 열정이 넘치는 시구를 자체로 지어 서예를 하게 되면 더 좋다.

서 예는 그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시서화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말은 서예, 그림, 시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그림을 알아야 글자와 획을 조형적으로 다룰 수 있으며 서예화면을 아름답게 구성하고 조화롭게 통일시킬 수 있다.73)

 

    71)『민주조선』,「축복받은 서예재간둥이-평양동흥유치원 김문정 어린이」, 2005.12.4., 3면.

   72)『통일뉴스』,「6.15남측위 대표단 소년문화궁전 참관」, 2005.6.15. : 만경대 소년문화궁전에서는 약 144개의 소조실(서예,수예,합창,개량가야금,조선무용 등)이 운영되고 있으며 하루 5000여명 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

    73)『김일성선집』12(증보판2), 「김정일미술론」, 178쪽. 

 

서예가는 시와 그림을 알아야 하고 여기에 원숙한 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송나라 때 등장한 문인화의 시서화일치(詩書畵一致) 이론과 같은 맥 락이다.

북송(北宋) 화가 곽희(郭熙)가 "그림은 소리 없는 시(詩)이고, 시(詩)는 형태 없는 그림”이라는 글에서 시작하여 소식에 이르러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되었 다.74)

이는 문인화에서 기법에 얽메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사물에 담긴 의미와 작가의 정신을 맘껏 담아내라는 순수미학적인 이론이다. 필묵을 움직여 그 일상과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유희(遊戲)하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김정일은 시와 그림을 알아야 뜻이 깊고 사상성이 높은 문장이나 단어를 골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사회주의적 사실주의75)에 입각하여 사상성을 높이 는 수단으로 시서화일치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

  다섯째, 서예는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청봉체를 비롯한 여러 가지 붓글씨체를 다채롭게 발전시켜 서예의 예술적 형상을 풍부히 하면서 전통적인 글씨체도 현대적 미감에 맞게 발전시켜야 한다.한자는 표의 문자의 특성과 획의 구성으로 하여 서예형상을 창조하는데서 좋은 점을 가지고 있다.한자붓글씨에도 여러 가지 체가 있는 것만큼 그 특징을 잘 살려야 한다.사회가 발전 하고 생활이 풍부하고 유족해질수록 서예에 대한 요구는 더욱 높아진다.서예가는 서 예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폭넓게 반영하여 다양하고 특색 있는 서예작품을 더 많이 창작하여야 한다.76)

 

    74) 郭熙,『林泉高致·畵意』, ‘畵是無聲詩 詩是無形畵’ ; 북송(北宋) 장순민(張舜民)은 ≪화만집(畵墁 集)≫ 제1권(卷一) <발백지시화(跋百之詩畵)>에서 "시(詩)는 형상(形象)이 없는 그림이고, 그림 은 형상이 있는 시(詩)"(詩是無形畵 畵是有形詩) 소식(蘇軾)은 <서언릉왕주부소화절지(書鄢陵 王主簿所畵折枝)> 詩에서 '시서본일률'(詩畵本一律)이라고 했다. 시(詩)와 서(畵)가 본래부터 일 사(一事)요, 일률(一律)임을 밝힌 것이다. 서(書)와 화(畵)는 근원적으로 같은 것(書畵同源)이요, 시(詩)와 서(畵)는 一事이고 一律이니 시(詩)와 화(畵)의 관계 또한 一律이고 一事일 수밖에 없 다. 이로부터 '시서화일률론'(詩書畵 一律論)'이 형성되었고, 학문하는 선비들은 일신(一身)에 시 서화(詩書畵)를 겸비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75) ‘사회주의적사실주의미술은 어디까지나 자기 본성적요구로부터 인민의 지향과 요구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광범한 인민들의 지향과 요구를 추분히 발양할 때 자기의 시대적 의무를 다하 였다고 말할 수 있다.’(『조선미술연감』1986, 문예출판사, 1986)

    76)『김일성선집』12(증보판2), 「김정일미술론」, 179쪽. 186 · 

 

사회가 발전하고 생활이 풍부해 지고 유족해질수록 사회적 요구를 폭넓게 수용하 여 다양하고 특색 있는 서예작품을 창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붓글씨체를 다채 롭게 발전시켜 서예의 예술적 형상을 풍부히 하고 전통적 글씨체도 현대적 미감에 맞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서예에 있어서 서체의 조형성뿐만 아니라 서예도구의 재질에 대해서도 아래와 같이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늘 서사도구가 다양하게 발전되고 서사활동이 대중화되고 있는 조건에서 붓의 전통적인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거나 그 필법을 살려 쓸 수 있다면 마지크나 펜으로 도 서예를 할 수 있다. 서사도구와 재료에 관계없이 일정한 뜻을 가진 글자의 조형미 를 한번에 긋는 선이나 점으로 돋구어내고 있는 사람의 사상감정과 열정이 획을 통 하여 표현되면 그것은 다 서예로 되는 것이다.77)

여기에서 서사도구로서 붓의 전통적인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거나 그 필법을 살 려 쓸 수 있다면 붓 이외의 마지크(매직)나 펜으로도 서예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그의 많은 작품을 매직이나 펜 등을 활용하여 썼다. 이는 오늘날 남한에 서 캘리의 경우에 붓펜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작품을 하는 것과 대동소이한 경향으로 볼 수 있다.

서예도구에 있어서 붓 이외의 도구를 허용한다는 것은 한국서예에 있어서 페러 다임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향후 북한과의 관계에서 서예에 대한 개념정립은 중요한 숙제로 남아있다.

김정일은 북한서예가 주체사상에 입각한 주체서예가 자리 잡아 가는데 제반 제 도적·교육적 여건 조성과 주체서예의 이론적 정립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에서도 김정일에 대하여‘역사상 처음으로 서예의 본질을 뚜렷이 밝혀냄 으로써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에 적극 이바지 하는 강력한 무기로서의 서 예의 기능과 역할을 명확히 정립하였다’78)고 김정일의 공헌을 칭송하고 있다.

 

     77) 오광섭,『주체서예』,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7, 30쪽.

     78) 오광섭,『주체서예』,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7, 29쪽. 

 

Ⅳ. 나오는 말

 

서예시원에 대하여 고찰을 하게 된 계기는 북한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발생 된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의 일반적인 관점과는 다르게 한국서예를 규명하고 ‘주체 서예’라는 별종의 서예개념을 창출하였다. 이에 ‘북한의 서예시원 및 발전과정’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이번 연구과제인 서예의 시원과 관련된 내용은 어느 분야보다 남북한 간 괴리가 큰 부분이다.

그럼에도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아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여 사실관계의 옳고 그름의 문제 이전에 북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도출해 내는 것을 이번 연구목표로 하였다.

북한은 한국서예와 주체서예의 시원을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정립하였다.

김일성 은 교시에서 <우리 조상들은 고대로부터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으며 동방문화를 꽃피웠습니다.>라 하여 우리 민족문화의 유구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첫째, 북한은 한국서예의 시원이 고조선시기의 신지글자(가림토글자 포함)라고 하였다.

이는 중국최초의 글자인 갑골문보다 1000여년 앞선 것으로 평 양이 동양서예의 발원지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자료와 출토유물 및 유적을 통 하여 북한은 그 실존성을 증명해 내고자 하였다.

대표적으로『영변지』등에 수록되 어 있는 신지글자 16자와 이후『단군세기』에 수록된 가림토글자 38자가 북한의 한국서예 시원을 주장하는 기준이 되는 글자체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으로 북한은 신지글자체가 훈민정음체의 전범(典範)으로 조 선민족서체가 고대시기에 시원을 둔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서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에서 근거자료로 제시하고 있는『태백일사』,『단군 세기』·『규원사화』등은 남한 학계에서 위서시비가 있고 그 학술적 가치도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또 훈민정음체의 기원을 신지글자체에 둔 학설에 대하여도 남한 에는 다양한 학설이 상존하고 있다.

1940년대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이후에 남한은 한글창제 기원을 발음기관 상형설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아 직 결론이 난 문제는 아니고 아직도 남북간에 계속적인 논의가 필요한 영역이다.

   둘째, 북한의 주체서예 시원과 관련, 주체서예 태동배경은 우리 고유의 민족서예 가 역대 지배층의 사대주의 사상에 젖은 한문숭배와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의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주체서예 개념은 1992년 김정일이 “주체미술은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 을 담은 혁명적이고 인민적인 미술이며 사상성과 예술성이 완벽하게 통일된 세형 의 미술이다”고 정립한 이후 1997년 오광섭이『주체서예』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공식화 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 주체서예 시원으로 김일성 5세 때 친필 한 <조선독립>으로 여기고 있 다.

<조선독립>이 나옴으로써 노동계급의 혁명적 서예발전에서 새로운 단계가 펼 쳐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시기 서예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주체적이며 혁명적인 서예가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즉 인민의 혁명투쟁에 적 극 기여하는 사상적 무기로써의 서예의 출현을 담보하였다.

주체서예의 전통은 항일혁명투쟁시기부터 이루어져, 그때 쓰인 서예형상이 혁명 적 서예의 귀중한 원전으로 이를 계승발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또 주체서예는 전문가가 아닌 인민들에 의하여 창작된 것으로 글씨마다에 혁명적 수령관, 백절불 굴의 투쟁정신과 혁명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심 등 인민들의 지혜가 심오하게 담겨 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대부 및 전문서예가 중심으로 발전해온 전통서예 인맥과 계통적 연관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서예사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대 목이다.

  셋째, 김일성·김정일의 북한서예 발전에서의 역할이다.

서예가 해방 후 김일성의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의 강력한 사상적 무기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김정일에 와서는 대를 이어 체제를 더욱 공고화하기 위한 수단 등으로 김일성 친필을 활용한 기념비서예를 창조하며 서예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 다.

특히 김정일시대에 와서 서예관련 교육사업과 서예를 활용한 다양한 사업이 확 장되어 북한서예의 튼튼한 기반이 조성되었다.

대표적으로 평양미술대학에 서예학 과 설립, 어린 학생들 서예적 재능 육성기반 조성, 서예소조활동 활성화, 서예를 활용한 홍보사업(직관선전선동사업) 및 서예전시활동 활성화 등이다.

그리고 김정일은 1992년 교시를 통해 그의 미술론은 발표하였는데, 미술론에서 ‘서예는 뜻과 획의 예술’이라는 명제를 명확히 규정하고 주체서예의 사명 및 나아 갈 길을 이론적으로 명확히 정립하였다.

즉 주체서예의 시대성, 대중성, 다양성, 현 재성 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북한 주체서예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 였다. 김일성, 김정일시대 북한서예는 주체사상의 도구로 전락해가면서 남한서예와 상 당할 정도로 이질화되어 있는 상황을 확인하였다. 이에 대한 향후 남북한 문화동질 성 회복을 위한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아직 베일에 싸여있는 북한서예의 현실을 명확히 규명해 내, 이를 바탕으로 그 돌파구를 찾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역할이 고 숙제라고 본다.

이어서 다음 과제로 백두산 3대장군서체와 부간 서예의 분류체계 형성과정 등에 대해 계속하여 연구를 진행해 나간다.

 

< 참 고 문 헌 >

『김일성전집』 『김정일선집』 『북한언론기사』(노동신문,민주조선,문학신문) 『남한언론기사』(통일뉴스, Daily NK) 『북한잡지』(조선예술,천리마,력사과학,민족문학유산,문화어학습,예술교육,인민 교육,교육신문사, 교양원,조선녀성,조선미술연감,조선문학예술년감) 『조선미술사』, 2.16예술교육출판사, 주체103(2014) 오광섭,『주체서예』,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7. 김철민,「주체서예의 시원」,『천리마』, 천리마사, 2011.5. 김정일,『김정일미술론』,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황경수,「훈민정음 기원설」,『새국어교육』70, 한국국어교육학회, 2005. 오광섭,『조선글서예』, 조선출판물수출입사, 주체103(2014). 조수현,『한국서예문화사』, 도서출판다운샘, 2017. 송하경,『서예미학가 신서예정신』, 도서출판다운샘, 2003. 조법종,「북한의 대동강문화론과 고조선인식 검토」,『선사와 고대』43, 2015. 

 

< 국 문 요 약 >

 

본 연구는 한국연구재단 연구과제 두 번째 소주제인 ‘북한의 서예시원 및 주체서 예 성장·정립과정’에 대한 고찰이다.

서예시원에 대하여 북한은 일반적인 관점과는 다르게 한국서예를 정립하고 아울 러 또 다른 ‘주체서예’라는 별종의 서예개념을 창출하였다.

이번 연구과제 중 서예의 시원과 관련된 내용은 어느 분야보다 남북한 간 괴리가 큰 부분이다.

이번 연구는 사실관계의 옳고 그름의 문제 이전에 북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 적으로 파악, 그 실상을 정확히 도출하는 데 있다. 이것이 북한서예를 제대로 아는 지름길이고. 그 학술적 가치도 크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일부 비평을 가하면서 논리를 전개하였다.

북한은 한국서예와 주체서예의 시원을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정립하였다.

  첫째, 북한은 ‘한국서예 시원’이 고조선시기의 신지글자(가림토글자 포함)라고 하 였다.

중국최초의 글자인 갑골문보다 1000여년 앞선 것으로 평양이 동양서예의 발 원지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자료와 출토유물 및 유적을 통하여 북한은 그 실존 성을 증명해 내고자 하였다.

대표적 자료가『영변지』의 신지글자 16자와 이후『단 군세기』에 수록된 가림토글자 38자가 한국서예 시원을 주장하는 기준이다.

그리고 신지글자체는 훈민정음체의 전범(典範)으로 조선민족서체가 고대시기에 시원을 둔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서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근거자료로 제시하고 있는『태백일사』,『단군세기』·『규원사 화』등은 남한 학계에서는 위서시비가 있고 그 학술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데 문 제가 있다.

또 훈민정음체와 관련하여서도 남한에는 이에 대해 다양한 학설이 상존 하고, 1940년대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이후에는 한글창제 기원을 발음기관 상형설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남북간에 계속적인 논의가 필요 한 영역이다.

  둘째, 북한의 ‘주체서예 시원’과 관련하여 주체서예의 태동배경은 우리 고유의 민 족서예가 역대 지배층의 사대주의적인 한자숭배와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의 상황 속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주체서예의 시원으로 김일성 5세 때 친필 <조선독립>으로 본다.

<조 선독립>이 나옴으로써 노동계급의 혁명적 서예발전에서 새로운 단계가 펼쳐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시기의 서예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주체적이며 혁명적인 서예 가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특히 항일혁명투쟁시기 때의 서 예형상이 주체서예의 전통이고 원전이라는 것이다.

   셋째, 주체서예의 발전과정으로

      ①해방 후 김일성의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의 강력 한 사상적 무기로 역할

     ②김정일시대에 와서는 기념비서예를 창조하며 북한서예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오늘의 북한서예가 뿌리내리게 된 제도적·교육적 여건을 확 고히 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남북한 간의 서예문화 이질화가 더 깊어가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주제어 : 북한서예, 김정일 미술론, 주체사상, 주체서예, 한국서예 시원, 신지글자, 가림토글자, 기념물서예.

 

 

 

Abstract

A review of the current status of North Korean calligraphy culture to restore the homogeneity of inter-Korean culture.(2) - 'A Study on North Korea's Calligraphy Origin and Juche Calligraphy(주체서예) Growth and Establishment Process'

 Kim, Jung-nam

This study is a review of the second sub-topic of the research project of the Korea Research Foundation, 'A Study on North Korea's Calligraphy Origin and Juche Calligraphy Growth and Establishment Process'. Regarding Calligraphy Origin, contrary to the general point of view, North Korea established Korean calligraphy and created another concept of calligraphy called 'Juche Calligraphy(主體書藝)'. The content related to Calligraphy Origin, this research project, has a greater gap between the two Koreas than any other field. This study aims to objectively grasp the reality of North Korea as it is and accurately derive the reality before the problem of right and wrong. This is a shortcut to knowing North Korean calligraphy properly. It was judged that its academic value was great. The logic was developed by making some criticisms on this. North Korea established the origins of Korean calligraphy and Juche calligraphy based on the Juche ideology(主體思想). First, North Korea said that 'Korean calligraphy origin was Shinji letter (including Garimto letter) from the Gojoseon period. It is more than 1,000 years earlier than the first Chinese letter, Gapgolmun(甲骨), and Pyongyang is the origin of oriental calligraphy. Through the evidence, excavated relics, and historical ruins, North Korea tried to prove its existence. The representative data are the 16 Shinji letters in "Yeongbyeonji" and the 38 Garimto letters in "Dangunsegi", as the standard for claiming the origin of Korean calligraphy. And Shinji letters is the model(典範) of the Hunminjeongeum typeface, and it is the world's longest-standing typeface with Korean national calligraphy in the ancient period. However, there is a problem in that South Korean academia does not recognize academic value, such as Taebaekilsa, Dangunsegi, and Gyuwonsa, which are presented as evidence in North Korea. In addition, various theories exist in South Korea regarding the Hunminjeongeum font, and after the discovery of the Hunminjeongeum Haerye version(훈민 정음 해례본) in the 1940s, the origin of the Hangeul creation was placed on the theory of hieroglyphics. These are still areas that require continuous discussion between the two Koreas. Second, the birth background of Juche calligraphy is that our own national calligraphy took place in the context of Chinese character worship of the ruling class and the Japanese national culture extinction policy. The Juche calligraphy theory seems to have started with Kim Jong-il's Juche art theory in 1992 and was formalized in Oh Kwang-seop's『Juche calligraphy』in 1997. In North Korea, it is regarded as "Joseon Independence" by handwritten by Kim Il-sung five years old as the origin of Juche calligraphy. With the emergence of "Joseon Independence", a new stage has unfolded in the revolutionary calligraphy development of the working class. It is said that it opened the way for the development of independent and revolutionary calligraphy that is fundamentally different from the calligraphy of the previous period. In particular, the calligraphy shape during the anti-Japanese revolutionary struggle is a tradition of Juche calligraphy and is the original. Third, as a process of developing Juche calligraphy, ① played a role as a strong ideological weapon of Kim Il-sung's revolutionary struggle and construction projects after liberation. ② Kim Jong-il created monument calligraphy and opened a new era of calligraphy. ③ It solidified the institutional and educational conditions related to calligraphy that have taken root in today's North Korean calligraphy. As such, it is confirmed that the calligraphy culture between the two Koreas is very differentiated. Key words: North Korean calligraphy, Kim Jong-il art theory, Juche ideology, Juche calligraphy, Korean calligraphy, Shinji letter, Garimto letter, monument calligraphy *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Ministry of Educ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NRF-2022S1A5B5A17038590).

 

 

투고일: 2024. 2. 22. / 심사개시일: 2024. 3. 9. / 심사완료일: 2024. 3. 25

서예학연구 제44호

06_김정남_남북문화 동질성 회복 위한 북한 서예문화 현황 고찰(147~191)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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