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조선잡사(17)/받은 글

jn209 2025. 7. 1. 07:09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13회

 

첫째, 황희는 ‘잘못된 선택’을 신속히 수정했다.

고려왕조와 양녕대군을 선택하느라 스스로 고난의 길을 떠나는 것 같이 보였지만, 몇 년 안 가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수정하고 노선을 선회했다.

 

 

둘째, 황희는 성격이 원만한 사람이었다.

문종 2년(1452) 2월 8일자 <문종실록>에 수록된 ‘황희 졸기’에 따르면,

 

그는 ‘간사한 사람’이라느니 ‘뇌물을 받는 사람’이라느니 하는 비판을 받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원만해서 세종대에는 ‘어진 재상’이라는 존경을 받았다.

 

‘간사하다느니 뇌물을 받는다느니 하는 평판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어질다는 평판까지 함께 받을 수 있겠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간사함’과 ‘뇌물을 받음’은 얼마든지 ‘어짊’과 병존할 수 있을 것이다

 

 

간사하다는 것은 뒤집어놓고 보면 성격이 부드럽다는 것이다.

 

또 인간관계가 딱딱한 사람들은 뇌물을 잘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남들로부터 어질다는 평판도 얻기가 어렵지 않을까?

 

아무튼 실록에서는 황희의 이러저러한 다양한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셋째, 황희는 비밀을 잘 지킬 뿐만 아니라 업무를 잘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상관이 중시하는 부하의 덕목인 ‘입이 무거움’이나 ‘유능함’ 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은, 황희가 ‘잘못된 선택’ 후에 곧바로 정치적 재기를 이룩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황희 졸기’에 따르면, 황희는 비밀유지에 관한 한 태종으로부터 높은 신뢰를 받았다.

 

기밀사무를 담당하면서 거의 매일 같이 태종을 만났다고 한다.

 

태종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그는 국왕과 단둘이서만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아는 일이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내가 한 일이 되는 것이다.”(此事予與卿獨知之若泄非卿卽予)

 

 

또 황희는 일상 업무를 잘 처리했을 뿐만 아니라 주군의 정치적 의지도 잘 실현시키는 편이었다.

 

황희가 태종의 밀지를 받아 당시 태종 등극 공신으로 병권을 쥐고 있던 처남 민무구·민무질 제거를 잘 처리한 데에서도 그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14회

 

넷째, 황희는 ‘미시적 판세’를 잘 분석하는 사람이었다.

 

앞에서, 황희는 ‘거시적 판세’를 잘 읽지 못하는 인물이었다고 평한 바 있다. 그런데, 실록에 따르면 황희는 미시적 판세만큼은 잘 파악했던 모양이다.

단기간에 진행되는 사태의 흐름과 배후를 잘 가늠했던 것 같다.

 

 

황희가 미시적 판세를 잘 읽는 사람이라는 점은 태종 이방원의 입을 통해서도 훌륭하게 증명될 수 있다. 태종 8년(1408)에 모반이 발생하자 태종이 대책 논의를 위해 황희를 급히 불러들었다.

 

 

‘황희 졸기’에 따르면, “변고가 났으니 급히 대응하라”는 태종의 지시를 받은 황희가 “누가 주모자입니까?”라고 묻자,

 

태종은 “조용(趙庸)이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황희는 “조용의 사람됨을 놓고 볼 때에, 아버지와 임금을 시해하는 일은 필시 하지 못할 사람입니다.”(庸之爲人弑父與君必不爲也)라고 말한 뒤에 조용 대신 목인해(睦仁海)를 주모자로 지목했다고 한다.

 

 

나중에 진상을 파악해보니, 정말로 목인해가 주범이었고

조용은 죄가 없었다고 했다.

 

그때 태종도 감탄하고 조용 본인도 감탄했다고 ‘황희 졸기’는 전하고 있다. 이러한 미시적 판세분석 능력은 황희가 태종과 세종의 신임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든 주요 요인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세종대에 무려 18년간이나 영의정부사를 지냈을 정도로 관운이 매우 좋은 황희 정승은 고려-조선 교체기 및 양녕-충녕 교체기 같은 결정적 순간에 정치적 판단착오를 범함으로써 일시적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애당초 선택하지 않은 대상’인 조선과 충녕으로부터 크게 쓰임을 받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그가 ▲자신의 판단착오를 신속히 수정했고 ▲성격이 원만했고 ▲비밀유지와 업무처리에 능숙했으며 ▲미시적 판세를 잘 읽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줄을 잘 선 사람’보다도 오히려 더 출세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티샷(제1구)으로 날린 공이 물웅덩이나 벙커에 빠져 ‘이제 졌구나!’ 할 때에 양말을 벗고 웅덩이에 들어가서 역전의 버디 샷을 날려 우승컵을 거머쥐는 선수 또는 옛 역전의 야구 명문 군산상고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황희는 바로 그런 ‘역전의 명수’였다.

 

[출처]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15회

 

暗君(암군)에 저항한 인물,

그리고 기생한 인물 이야기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해 백성 삶은 도탄에 빠졌다.

왕권을 감시해야 할 삼사(三司: 홍문관·사헌부·사간원)는 연산군에 의해 일찌감치 입이 닫힌 상태였다.

 

시인 어무적은 그 암울한 시대를 날카로운 언어로 고발했고,

곧은 사내 류헌은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다가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1494년부터 1506년까지 연산군 재위 기간을 겪었던 네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이름은 어무적(魚無跡), 류헌(柳軒), 김처선(金處善)과 임사홍(任士洪). 순서대로 직업은 시인, 감사원장 격인 대사간, 왕의 심부름꾼 환관이고 그 다음은 천하의 간신(姦臣)이다.

 

연산군 때 사람인 어무적(魚無跡)은 아비가 양반이요 어미는 관비인 얼자(孼子)다.

평생 변변한 벼슬 하나 하지 못했으나 글은 잘썼다.

 

같은 시대 살았던 허균은 그가 쓴 시 '유민탄(流民歎)'을 동방 제일이라고 평했다.

<허균, '성소부부고'25, 성수시화>

 

'유민탄'은 '흩어진 백성을 위해 탄식함'이라는 뜻이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조선 중기의 문인인 성소(惺所) 허균이 편찬한 시문집이다.

 

‘부부고’는 "장독 뚜껑을 덮을 만한 보잘것없는 원고"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이는 허균이 자신의 시문을 겸손하게 표현한 용어이다.

 

《'사람들아 사람들아 살기 어려워라

흉년에 너희 굶을 때

나 너희 구하려는 마음은 있으나

구할 힘이 없구나

사람들아 사람들아 불쌍도 하여라

추운 날 이불도 없는 너희들인데

저들은 너희 구해줄 힘은 있되

구하려는 마음은 없구나’》

<'유민탄' 부분, '속동문선'5>

 

그 자신이 대접 못 받고 힘없는 처지이니 나라 백성 사는 꼬라지가 거지 같아도 도울 힘이 없다는 말이다.

그때 백성 삶은 비루한 지식인 하나가 구제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절대적인 빈곤이 문제였다. 빈곤은 폭정에서 나왔다.

 

1499년 왕실 족속 생일에 올리는 생선이 4800마리였고 관청용 사슴 육포는 사슴 많은 강원도와 함경도가 각각 2127근과 2851근이었다.

 

사슴 살지 않는 고장에서는 이를 모두 사서 조달하거나 사슴 사냥길에 아예 집을 버리고 떠도는 판이었다.

<1499년 3월 27일 '연산군일기'>

 

이는 사소한 예였다. 어무적에 따르면

공물 조사를 나온 서울 관리들은 귀를 닫았고,

강압에 질린 백성은 입을 닫고 살았으니

(京官無耳民無口·경관무이민무구: '유민탄')

모순이 해결될 리 만무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16회

 

이에 1501년 연산군 7년 한여름,

어무적이 과감하게 왕에게 상소했다.

 

 

"금년 봄에 주상께서 내린 구언교지(내용을 탓하지 않는 상소를 구하는 교지)에

아무 충언이 없기에 한 말씀 올리나이다."

 

 

어무적은

 

'근본을 바로잡고' '입을 꽉 다문 선비들 입을 열게 하고'

'여자와 술을 멀리하여 백성들 재물을 넉넉하게 하고'

'불교를 금하고' '토목사업을 중지하라'고 충언했다.

연산군은 이 상소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1501년 7월 28일 '연산군일기'>

 

 

상소를 올리고 보니 어무적 앞에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고향 김해 주민이 귀한 매화나무를 잘라버리는 게 아닌가.

매실 진상 요구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또 시를 썼다.

'향기 풍기는 군자, 세상에 없다.

백성이 밥 한 그릇 먹으면

벼슬아치들 침 흘리며 달려든다

매화에 황금 열매가 달리면

갑절로 거둬들이고 걸핏하면 매질이다

이 모두 매화 탓이니 어찌 베어버리지 않겠는가’

<'작매부·斫梅賦: 매화를 잘라버리다', '패관잡기'>

 

시를 읽게 된 김해 원님이 고맙습니다, 라고 할 리 없었다.

어무적은 관리들을 피해 도망다니다 객사했다.

 

그 자신이 유민(流民)이 되어 버린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17회

 

미치광이가 더 미쳐가기까지 조선의 사정기관인 홍문관과 사간원, 사헌부 삼사(三司)는 제도적으로 왕에게 간섭과 충언과 직언을 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 기관이다.

 

판단 기준은 합리성이요 처신은 투명한 사람을 가려 뽑는 삼사 관원을 사람들은 청요직(淸要職)이라고 불렀다.

 

1493년 10월 27일 연산군 아버지 성종이 삼사 관리에게 물었다.

"신하가 왕명을 따르지 않으면 의리에 합당한가?"

 

종3품 홍문관 전한(典翰) 성세명이 이리 답했다.

 

"신하는 의(義)를 따르고 임금을 따르지 아니합니다

(人臣之道從義而不從君·인신지도종의이부종군).“

<1493년 10월 27일 '성종실록'>

 

성리학적 윤리가 골수까지 스민 사림(士林)에게는 대의(大義)가 왕보다 위였다.

이듬해 12월 24일(양력 1495년 1월 20일) 성종이 죽었다.

 

다음 날 오전 7시 선왕 염습이 거행되고 문무백관이 창덕궁 인정전에서 곡(哭)을 했다.

염습이 끝나고 제사상에 제물을 올릴 차례가 왔다.

 

차기 왕인 세자는 바로 일어나 인정전 밖으로 나갔다.

우의정 신승선이 세자에게 "도로 들어가서 모든 예가 끝나면 나오시라"고 아뢰었다.

 

세자가 거부하자 좌의정 노사신이 "임금은 일반 사람과 다르다"며 재촉을 하는 것이다.

그제야 세자는 인정전으로 돌아갔다.

<1494년 12월 25일 '연산군일기'>

 

우리나라 나이 스무 살인 차기 왕이 등극하기도 전에 아랫사람에게 간섭을 당한 것이다. 다음 날에는 불교식 제사 수륙재를 지내지 말라고 간섭이 들어왔고,

이듬해 6월에는 성종 국상 기간에 술집을 들락거린 성종의 처남이자 새 왕 외삼촌인 윤탕로를 왜 처벌하지 않느냐고 삼사에서 아우성쳤다.

 

수륙재를 강행하려는 국왕에게 삼사는 한 달 동안 93번 반대 의사를 밝혔다.

윤탕로 처벌을 요구하는 간쟁은 석 달 동안 자그마치 214번이었다.(송웅섭 글)

 

집권 후반기 총체적 미치광이 짓거리를 하기 전부터 연산군은 어무적이 본 대로 환락에 미쳐 있었다.

 

왕권에 집착하는 새 왕과 이들 삼사의 갈등은 예견된 일이었다. 모든 시작은 모든 끝의 원인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18회

 

그리하여 집권 4년째인 1498년 7월 연산군은 삼사를 장악한 사림의 수장 김일손을 제거하고 그 일파도 처형과 유배형을 내렸다.(무오사화)

 

그리고 연산군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거늘, 앞으로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고 엄포를 놓았다.

 

넉 달 뒤인 11월 9일 김영정을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했다.

 

실록 사관은 김영정이

"사대부가 모두 염증이 나서 피하므로 용렬하고 나약한 영정이 헌부의 장이 되었다"고 평했다.

<1498년 7월 29일, 11월 10일 '연산군일기'>

 

경기고양과 김포를 사냥터로 만든 뒤 출입금지령을 새긴 비석이 있는데

‘법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라고 새겨져 있다.(금표비)

 

또 하나는 서울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묘

묘비. ‘왕(王)’이 아니라 ‘군(君)’이다.

 

입맛에 맞고 순한 사람을 검찰총장에 앉혔으니, 이후 정치는 뻔했다.

바깥으로는 만백성 재산을 마음대로 빼앗는 난동을 부리고 안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별의별 비상식적인 혐의를 씌워 체포하고

고문한 뒤 기발하기 짝이 없는 형벌로 처형하는 미치광이 작태를 벌여나갔다.

 

1504년 성종 왕비인 친어머니 윤씨 복위를 시도하다가

이를 반대하는 신하들 가운데 '손바닥이 뚫리고'

'배가 갈라지고'

'온몸이 마디마디 잘리는' 형을 당한 이가 부지기수였고,

'죽인 뒤 한참 지난 해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을

받은 이도 부지기수였다.

<갑자사화>

 

집권 초부터 집착했던 여색(女色)과 식도락과 사치는 더

심해져갔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무리가 '연산군일기'를 저술했지만,

절반을 접고 읽어도 처절하고 참혹한 시대였다.

 

마지막 남은 대사간, 류헌

‘모든 일을 먼저 정한 뒤에 회의에 넘기니 재상들은 다시 이의가 없고 모두 하교가 지당하다고’만 했다

<1504년 4월 23일 ‘연산군일기’>

 

모두가 암군(暗君)에게 머리를 조아릴 때 입을 연 사람이 대사간 류헌(柳軒)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19회

 

연산군 1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된 이래 류헌은

 

그 모든 풍경 속에 입장해 곧은 소리를 해댔다.

 

류헌이 주로 문제 삼은 부분은 재정이었다.

집의 시절인 1500년 왕실 금고인 내수사의 이자 놀이를 문제 삼았고,

 

4년 뒤인 1504년 또다시 이 문제를 꺼내 들어 재물에 미친 연산군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1500년 8월 14일, 1504년 6월 4일 ‘연산군일기’>

 

1500년 외직으로 쫓겨났던 류헌은 1504년 대사간으로 복귀했다.

복귀하자마자 그가 내던진 말은

 

“왜 내수사 이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가”였다.

 

왕명 절대복종을 요구했던 연산군은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연산군은 “류헌이 어짊을 알지만 죄주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1504년 6월 17일 ‘연산군일기’>

 

6월 25일 연산군이 직접 류헌의 형량을 선고했다.

곤장 100대와 제주도 유배 및 관노로 신분 추락.

목숨만 부지할 뿐, 모든 것을 빼앗는 중형이었다.

 

다음 날 류헌은 왕이 보낸 승지 권균 감시하에 곤장을 맞고 제주도로 떠났다.

끝이 아니었다.

 

실록에는 이듬해 4월 25일 ‘류헌을 법에 따라 장 80대에 처해 유배지로 돌려보냈다’라고 기록돼 있다.

 

분이 풀리지 않은 군주가 류헌을 불러내 추가형을 언도하고 집행한 것이다.

 

이 또한 끝이 아니었다.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 시대가 왔다.

 

1506년 10월 13일 제주도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유배에서 풀려나 배를 탔던 류헌이 해적 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생사불명이던 류헌은 결국 대마도 왜구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암군 시대는 갔지만 마지막 곧은 사내도 떠난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20회

 

성종~연산군 때

총명하고 정의로웠던 젊은 관료 임사홍은 길고 긴 재야 생활 끝에 폭군

연산군의 혀처럼 행동하는 간신으로 변신했다.

 

중종반정이 벌어진 1506년 9월 2일 임사홍은 몽둥이로 격살됐다.

 

그달 26일 반정 세력은 임사홍 관을 부수고 또 한번 그 목을 베어버렸다.

 

젊은 그는 문장에 능하고 총명하고 강직하여 직언을 곧잘 하다가

뭇사람들 눈 밖에 나 궐 밖을 떠돌았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매,

그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죄다 죽이고 폐주에게 젖은 낙엽처럼 붙어살았다. 어리석고 난폭하고

음탕한 권력자에게 아녀자들을 바치며 살았다.

 

심지어 그는 연산에게 증오감을 보인 자신의 아들까지 희생시키며 자기 자리를 보전하였다.

 

패기 있고 정의로웠던 젊은 날을 버리고, 사욕과 복수심에 눈이 멀어 생을 망가뜨리고 공동체를 망가뜨리고 국가를 말아먹은 임사홍(任士洪·1445~1506) 이야기다.

 

패기 넘치는 관리 임사홍의 추락 ~

성종이 재위 9년째인 1478년 4월 1일 한성에 황사 비가 내렸다.

 

어떤 이는 보지 못했다고 했으니 그리 많은 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성종은 이를 하늘이 왕에 내리는 경고, 재변(災變)이라고 규정하고 이 경고를 해결할 방안을 내놓으라 명했다.

 

그때 성종은 세조 쿠데타 공신들에게 에워싸여 있었는데, 이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 성종은 예를 들었다.

 

"내 세금이 과했는가?"

"내가 공사를 자주 했는가?"

"내가 내린 형벌이 적절치 못했는가?"

"내가 사람을 잘못 썼는가?"

"내가 탐학한 수령을 못 적발했는가?“

<1478년 4월 1일 '성종실록'>

 

황사 비가 내린 이유를 묻겠다고 해놓고 왕이 그 이유를 미리 밝혀버렸으니 훈구대신들에게는 아프기 짝이 없는 구언교지(임금이 신하에게 발른 말을 구함)였다

 

"뭐 먹을래? 나는 짜장면" 하는 이 고약한 직장 상사 앞에서 대신들이

그제야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는데,

 

주로 사치를 금하고 술을 금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때 왕실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 임사홍이 다른 말을 내놓았다.

 

"마음만 반성하면 되지 자연현상 때마다 금주(禁酒)를 해대면 어찌 살라는 말인가.

금해봤자 벼슬아치들은 무사하고 백성들만 적발될 뿐.“

<1478년 4월 21일 '성종실록'>

 

도승지 임사홍은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 능하며 직언을 서슴지 않는 관료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21회

 

임사홍의 대 변신~~

 

그런 그가 왕도, 사림도 기대 않던 말을 하니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임사홍은 그날로 사림에게 '소인(小人)'으로 찍혀 퇴출 대상이 되었다.

 

 

임사홍의 맏아들 광재는 선대 예종의 사위였다.

 

성종은 유능한 관리이자 왕실 사돈인 임사홍을 변호했지만, 삼사(三司)를 장악한 사림은 처단을 요구했다.

 

결국 임사홍은 그 다음 달 의주로 유배형을 당했다.

 

서자 출신으로 세조에게 눈에 띄어 출세한 유자광도 싸잡혀 동래로 유배당했다.

<1478년 5월 8일 '성종실록'>

 

 

 

정3품 통정대부 도승지 임사홍은 백수로 10년을 살았다.

 

10년 뒤 성종은 임사홍에게 절충장군 부호군 관직을 하사했다.

종4품이자 실권 없는 무반직이다.

 

삼사가 전원 반대했지만 성종은 관철시켰다.

 

또 3년 뒤 성종은 딸 휘숙옹주를 임사홍 넷째 아들 숭재에게 시집보냈다.

<1491년 8월 27일 '성종실록'>

 

하지만 임사홍은 여전히 백수였다. 조정을 장악한 사림은 전원이 그를 소인이라 부르며 관직 중용을 거부했다.

 

1494년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등극했다. 문득, 한 많은 임사홍에게 시대가 열렸다.

 

연산군의 기 싸움과 임사홍의 부활 ~

 

임숭재의 아내 휘숙옹주는 연산군이 예뻐하는 누이동생이었다.

중종반정 세력이 쓴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임숭재는

'자기 여동생을 연산군과 동침하게 하고,

 

(왕이 좋아하는) 처용무를 추며 왕 앞에서 온몸 마디마디로 재롱을 떨어 왕의 악(惡)을 키우는 데 못 하는 일이 없었다.

 

병들어 죽게 되자 숭재가 왕에게 남긴 말은 "미인(美人)을 바치지 못한 게 한"이었다.‘

<1505년 11월 1일 '연산군일기>

 

그런 아들 덕에 임사홍은 부활했다.

 

등극 2년째,

연산군은 임사홍의 품계를 한 등급 올리라 명했다. 삼사에서 "간교함이 한이 없으므로 불가하다"고 반대했다.

<1496년 7월 25일, 8월 5일 '연산군일기'>

 

기(氣) 싸움이 시작됐다.

1497년 4월 3일 연산군이 그에게 정3품 가선상호군 품계를 내렸다. 대간이 전원 사표를 내버렸다.

 

연이은 반대 속에 그해 12월 27일 연산군은 임사홍의 품계를 올려 종2품 가선대부 상호군으로 삼아버렸다.

 

임금 매제인 아들 '빽'과 거친 임금의 기 싸움 와중에 임사홍은 위세도, 벼슬도 수직 상승해갔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22회

 

 

이렇게 임사홍의 품계를 상승시키고 마침내 연산군이 "임사홍을 관직에 기용하라"고 대놓고 명했다.

<1503년 1월 21일 '연산군일기'>

 

절치부심에 와신상담하던 임사홍이 드디어 조정에 발을 디딘 것이다.

 

복수극, 그리고 아들의 희생 그사이 무오사화가 터졌다.

 

죽은 사림 거두 김종직이 세조를 비난하는 글을 썼다가 적발된 사건이다.

무오사화를 기획한 간신은 김종직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유자광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 유방 또한 사건에 연루됐음이 드러났다.

유자광은 연산군에게 아들 사면을 탄원했고 연산군은 유방을 석방하라고 명했다.

<1498년 8월 23일 '연산군일기'>

 

임사홍 둘째 아들 희재 또한 이 사건에 연루됐다.

 

이목이라는 사람 집에서 임희재 편지가 나왔는데, 내용이 불손했다.

연산군은 임희재를 곤장 100대와 유배형에 처했다.

<1498년 7월 27일 '연산군일기'>

그나마 아비 임사홍은 무사했다.

 

 

 

 

사람 취급 못 받았던 환관이었지만,

김처선은 혀를 잘리고 사지가 잘리고 배를 화살로 뚫리면서도 연산군이 벌이는 폭정을 면전에서 비판하며 죽었다.

 

그리고 문제의 갑자사화가 터졌다.

연산군이 재위 내내 벼르고 있던 친모 윤씨 폐비 사건을 공론화한 것이다. 연산군은 10년째인 1504년 봄부터 피바람을 일으키며 연루자들을 죽여 나갔다.

 

연산군에게도 복수였고, 임사홍에게도 복수였다. 중종반정 세력이 쓴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공조참판으로 조정에 복귀한 임사홍은

 

'오래도록 폐출돼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죄를 얽어 사건을 만들었다.'

 

임사홍을 비롯한 정승들과 판서들은 혐의를 확정한 자들을 처형하고 참시(斬屍·시체를 목 자름)하자고 결의했다.

<1504년 윤4월 20일 '연산군일기'>

 

임사홍의 아들 희재 또한 갑자사화 때 목숨을 잃었다.

무오사화 때 유배형으로 죽다 살아났으나, 그가 써놓은 글이 문제였다.

 

허균의 형 허봉(1551~1588)이 쓴 '해동야언'에 따르면,

어느 날 임사홍 집에 들렀던 연산군이 '요순을 섬기면 태평성대이거늘, 진시황은 무슨 일로 사람들을 괴롭혔나'라 쓴 병풍을 보았다.

 

연산군이 필자를 물으니 임사홍이 "아들 희재가 썼다"고 답했다.

 

분노한 연산군이 "내가 그를 죽이려 하니 경의 뜻은 어떤가" 하고 물으니 사홍이 꿇어앉으며 "일찍 아뢰고자 했는데, 제 아들이 원래 성품과 행실이 불순하다"고 답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임희재는 항시 그 아비 잘못을 간하였으므로 임사홍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참소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허봉, '해동야언'>

 

무오사화 지휘자 유자광이 자기 아들을 살린 탄원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일화다. 그래서 임사홍의 아들 희재는 살점이 조금씩 뜯겨 나가는 끔찍한 능지처사형을 당했고

<1504년 10월 28일 '연산군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