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정치

플라톤의 분노론 : 아테네인에게 아테네 이방인이 전하는 ‘고귀하고 정당한 분노/황옥자. 전남大

jn209 2025. 9. 7. 19:56

 

 

Ⅰ.정치와철학의근원적불화아래놓인‘분노’라는감정

 

이 글은 가장 소크라테스적인 <변명>과 가장 플라톤적인 <법률>을 ‘분노’의 개념을 통해 연결해 보면서, <법률>에서 아테네 이방인에 의해 강조된 ‘용기’가 사실상 아테네 시민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분노’에 대한 하나의 정치 철학적 응답, 즉 진정한 분노의 발현으로 읽힐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기존 연구를 검토한 뒤 이 글이 가진 논점을 살피고자 한다.

플라톤의 분노에 관한 기존 연구들은 주로 <국가> 4권에 제시된 영혼 삼분설을 둘러싸고 크게 두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4권의 영혼 삼분설이 10권의 영혼 이분설에 대한 논의 와 상충한다는 점에서 무엇이 진정 플라톤의 의도였는지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만약 영혼 삼분을 받아들일 때 그 ‘기개적인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다.

첫째 논의와 관련하여, 영혼 이분을 지지하는 입장이 있다(Penner 1971; Else 1972; Annas 1981; 김혜경 1996). 이 중 Penner(1971)의 논의가 자주 소개되는데, 그는 기개적인 측면이 이성에 종속된 것으로 해석하면서 주로 이성과 욕망의 대립이 플라톤의 진정한 의도였 다는 영혼 이분설 입장을 적극 수용한다.

이에 대응하는 주장은 10권의 영혼 이분설이 사실상 4권의 영혼 삼분설과 동일 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Halliwell 1988; Moss 2005; 권혁성 2023).

특히 Moss(2005)는 영혼의 세 부분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으로 상호 작용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10권의 영혼 이분은 기개적인 측면이 이성과 상호 작용하 는 경우와 욕망과 상호 작용하는 경우를 보여주는 것이지 고정된 것으로서 이성과 욕망을 보여주는 것도 이성에 의한 욕망의 통제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연구들은 분노의 위치를 설정하는데 있어 중요한데 영혼 이분설의 설명에 기대면 기개적인 것을 위해 마련된 분노가 욕망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영혼 삼분설의 설명에 기대면 분노는 욕망과 다른 독자적 위치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둘째 논의와 관련하여, 최근의 연구들은 위의 논리적 일관성에 관한 논의에서 후자의 입장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데 심리학적인 차원과 정치적 차원으로 분리하여 연구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전자의 경우 기본적으로 영혼 간 상호작용을 받아들이고, 기개적인 측면이 사회적 지위나 명예를 추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것이 도덕적 판단이나  행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한다.

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기개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고 도덕적 행위에 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Cooper 1998; Burnyeat 2006).

사회정치적 차원으로 진행된 연구는 기개적인 측면이 가진 사회-관계적 특성, 즉 사회적 지위와 명예, 타자로부터의 인정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분노가 사실상 사회적 감정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관점은 사회적 정의 실현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주로 내적 동기의 원천으로 분노를 해석하는 데 머물지 않고, 분노를 정의를 향한 적극적이고 열정적 감정으로 받아들인다(Allen 2000; Hobbs 2000; Mansfield 2006; Konstan 2006).

특히 Hobbs(2000)는 영혼삼분설에서 기개적인 것을 단순한 분노의 감정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닌 용기와 남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분노를 정의와 같은 높은 차원의 목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능력’이라고 본다.

기개적인 것에 대한 그의 해석은 개인적인 선과 공공선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데 그에 따르면 이 둘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며 공적 선의 추구가 개인 선의 실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분노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공동체와 정의를 향하는 용기로 발현된다는 그의 주장은 매우 흥미롭다.

정리하면 플라톤의 영혼 삼분에 관한 부정적인 해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기개 적인 측면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관점들이 지속적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주로 심리적, 정치 적 차원의 논의들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기존 연구들은 심리적이 고 정치적인 차원을 분리하는 탓에 매우 다차원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분노의 가능성을 상대적 으로 축소시킨 경향이 있다.

플라톤의 영혼 삼분설은 정의로운 국가의 모습을 구현해 내기 위한 유비적 차원에서 도입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영혼 삼분은 단순히 영혼의 심리적 상태 를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혼의 조화를 통해 국가 내의 각 계급의 조화, 즉 국가의 정의로운 상태와 직결된다.

특히 기개적인 측면은 국가 내의 수호자 계급이 갖게 되는 것인데 플라톤은 이것을 분노 혹은 용기와 관련된 것으로 규정한다.

플라톤이 언뜻 다른 것으로 보이는 분노와 용기를 하나의 것으로 본 것은 분노가 단순히 파괴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것과 동시에 용기있는 행위는 분노의 어떤 속성이 발현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분노가 공동 체의 선을 구현하는 정치적 행위인 용기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분노에 내재한 부끄러움이라는 심리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이 이러한 용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은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차원과 사회정치적인 차원으로 구분하여 플라톤의 분노론 을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영혼 삼분설에서 기개적인 측면을 ‘정치-심리학’이라는 연결 구조로 이해한다.1)

구체적으로 분노를 중심에 두고 ‘부끄러움-분노-용기’라는 큰 틀로 접근하면서,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법률>을 연결하고 ‘부끄러움–분노–용기’가 정의를 향한 도덕 감정의 전이 구조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2)

이 관점을 주장하기 위해 이 글을 다음과 같이 구성한다. 2장에서 분석에 앞선 예비 논의로 영혼삼분설의 기개적인 분노를 위해 마련된 레온티오 스의 예시를 통해 부끄러움을 동반한 분노가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 어떻게 생겨나는지 살펴 본다.

나아가 플라톤이 이러한 분노를 폴리스, 정의, 용기의 덕목과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에 대해 분석해 보면서 플라톤의 분노론이 ‘부끄러움을 앎–분노–용기(두려움 없음)’ 와 ‘부끄러움 모름-분노-무모함(두려움)’으로 설정될 수 있음을 밝힌다.

3장에서는 아테네 시민의 분노를 ‘부끄러움 모름-분노-무모함’으로 규정, 분석하고 4장에서는 플라톤의 분노 론을 ‘용기로 확장되는 부끄러움을 가진 분노’로 해석하면서 플라톤의 우애롭고 정의로운 국가가 필연적으로 분노의 감정을 요청하고 있다는 점, 이때 분노는 부끄러움을 아는 자의 분노가 용기의 형태로 발현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한다.3)

 

   1) 이 글에서는 기개적인 것을 ‘분노’와 같은 부분으로 보지만 글의 맥락에 따라 기개적인 것, 기개적인 분노, 분노를 혼용하여 사용한다. 특별히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참고로 플라톤은 기개적인 부분을 ‘그것으로써 우리가 화내는 부분(<국가>439e)’으로 설명하고 있고, 기존 연구들에서도 이를 분노로 해석하는 것에 크게 이견이 없는 것 같다. 다만 분노가 가지는 다양한 속성으로 인해 기개적인 것이 분노와 반드시 동일한 것으로 취급될 수 없다는 주장들이 제시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그러한 기개적인 것의 분화는 큰 틀에서 긍정적인 분노(플라톤은 이를 ‘고귀한 분노(<국가>731b)’로 표현)와 부정적인 분노(플라톤은 이를 ‘달래기 힘 든 분노’<티마이오스>(69d))에 포섭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한 논의는 정준영(2011). “달래기 힘든 격정 (thymos), 그러나 고귀한 격정 :『국가』에서 '격정'이 가지는 함축과 분화.”「철학사상」 제41권 참조.

    2) 이 두 대화편은 최초작일지도 모르는 초기작과 대표적인 후기작이라는 점 이외에도 흥미롭게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데, 먼저 <변명>은 플라톤 정치철학의 시작인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관련한 재판을 다루고 있으면서 가장 소크라테스적인 대화편으로 알려져 있다. 이 대화편의 첫마디는 “아테네 시민 여러분”이다. 가장 철학적인 사 람이 가장 정치적인 공간에서 한, 이 변명은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하게 되고, 그는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소크라 테스가 아테네에서 등에와 같은, 이방인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흥미롭게도 그의 말년의 대화편인 <법률>의 주인공은 아테네 이방인이다. 그리고 그가 법률 제정에 있어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용기를 먼저 언급하고 있다. 기개적인 것을 놓고 보자면 이 두 대화편은 전자는 ‘부정적인 분노’의 결과를 가장 잘 보여주고, 후자는 ‘긍정적인 분노’의 실천적 측면을 말하고 있는 셈인데, 마치 자신의 스승을 죽인 아테네인들 을 향해 아테네 이방인으로 등장한 플라톤이 ‘진정한 분노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해주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 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물론 이 아테네 이방인(Athenian Stranger)이 소크라테스인지 플라톤 자신인지, 아니 면 플라톤에 의해 각색된 소크라테스인지는 알 길 없다. Strauss(1975)는 이 이방인을 ‘독배를 마시지 않은 소크라테스’ 즉, 살아남아 크레타섬으로 망명한 소크라테스라고 해석하고, Bobonich(2002)는 이 이방인을 소크라테스의 이상을 벗어난 플라톤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는 자라고 해석한다. 이 글은 아테네 이방인에 대한 후자의 입장을 지지한다. 플라톤<법률>을 번역한 박종현 역시 아테네 이방인을 플라톤 자신으로 봐도 무방하 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박종현(2009),『플라톤의 법률』. 서광사. pp. 53-54.

     3) 모든 부끄러움이 분노로 연결되거나 모든 분노가 용기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당연하다. 따라서 부끄러움 을 안다고 해서 정의로운 감정으로서 분노가 생기는 것이 아니며,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해서 분노가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정의로운 감정으로서 분노는 적어도 부끄러움을 아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의 부끄러움은 그 자체로 다의적일 뿐 아니라 부끄러움의 방향성, 다른 감정과의 관계를 통해 매우 다면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관련한 필자의 견해는 다음을 참조. 황옥자. 2024. “플라톤과 부끄러움 의 정치”.『인문연구』 108호. 1-29.

 

Ⅱ.예비탐색:부끄러움을앎-분노-용기vs부끄러움을모름-분노-무모함

 

<국가> 4권에서 소크라테스는 나라 수립의 목적이 시민 전체가 최대한 행복할 수 있는 것에 있음을 상기시키며 그것은 성향이 다른 세 부류가 제각기 제 일을 할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433a, 435b).

세 부류가 지니게 되는 덕이 지혜, 절제, 용기로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처한 감정 상태(pathos)가 상이하기 때문이다(435b). 일단 가장 두드러지는 감정의 상태는 목마름이나 굶주림과 관련된 욕구적인(epithumētikon) 것이다. 다음으로 목말라하는 혼을 반대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혼의 헤아리는(이성적: logistikon)부분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두 종류를 혼 안에 있는 구별된 것으로 결정한 뒤 남은 한 가지, 격정(기개, 분노:thymos)이 이 둘 중 하나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 3의 부분인지를 묻는다(439d-e). 그것은 ‘욕구적인 부분과 같은 성질’이라는 아데이만토스의 대답에 소크라테스는 대답 대신 본인이 들은 이야기, 그런데 믿고 있는 이야기로 ‘레온티오스’의 사례를 소개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레온티오스는 “사형 집행자 옆에 시체들이 누워 있는 것을 목격하고서 는 한편으로는 보고 싶어도 하고, 한편으로는 언짢아하며 외면”하였다.

“얼마 동안 마음속으 로 싸우며,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결국 “보고 싶은 욕구에 압도당하자 두 눈을 부릅뜨고 시체들 쪽으로” 가면서, “보려무나, 너희들 고약한 것들아! 그래, 저 좋은 구경거리를 실컷들 보려무나”라고 말한다(<국가> 439e-440a).

 

아주 짧게 언급되고 있지만 이는 플라톤이 기개와 욕망을 어떻게 구분하고, 이때 이성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분노를 이해하는 매우 상징적 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때 기개적인 측면의 분노가 사실상 이성에 관여하는 수치심 과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좀 더 끊어 읽어보자.

 

① 한편으로는 보고 싶어도 하고, 한편으로는 언짢아하며 외면 하였다.

② 얼마 동안 마음속으로 싸우며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③ 보고싶은 욕구에 압도당하자

④ 두 눈을 부릅뜨고 시체들 쪽으로 가면서

⑤ ‘보려무나, 너희들 고약한 것들아! 그래, 저 좋은 구경거리를 실컷들 보려 무나’라고 말한다.

 

①의 경우, 영혼의 두 부분이 갈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시체를 보고 싶어하는 것은 영혼의 ‘욕구적인 부분’으로 읽을 수 있지만 이를 외면한 것은 이성의 작용인지 기개의 작용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그러나 다음 ②문장에서 대립되는 이 두 영혼은 즉각적인 행위를 하기 전에 잠시 멈추고 그 상황을 생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욕망의 혼을 반대쪽으로 끌어당 기는 것이 혼의 헤아리는(이성적: logistikon)부분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것은 이전의 갈등 상황에서 욕구적인 부분의 압도적 지배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헤아림의 영역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눈을 가리고’ 있는 행위다.

레온티오스는 두 눈을 감지 않고, 두 눈을 가리고 있는데, 이는 절대 보아서는 안된다는 사고에서 발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는 시체를 보고 싶다는 자신의 욕구를 그렇게 적극적으로 방어했던 것일까?

레온티오스의 이 행위는 그리스 사회에서 시체가 갖는 의미와 연관 지어 해석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체에 대한 적절한 처리는 종교적 의무이자 도덕적 의무였다. 전쟁에서 죽은 자들의 시체를 공공 묘지에 매장하는 것은 일종의 명예의 상징이었는데, 그 행위가 그들의 용기를 기르고 사회적 명예를 인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사들의 명예로 운 죽음과 매장은 폴리스 전체의 명예와 일치하는 것이었다.4)

 

     4)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훼손하지만 신들의 명령에 따라 시신을 아버지에게 돌려준다. 또한 그리스 사회에서 시체를 묻지 않은 행위가 어떤 의미로 불명예와 연관되며, 그 결과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한 예시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가 잘 보여준다. 그리스 사회에서 죽은 자의 몸이 갖는 상징성_공동체의 법, 그리고 신과 인간의 갈등, 수치심과 불명예 등_에 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 Dubin, Nathaniel E. “Corpse and Community in Ancient Greek Tragedy” in Arethusa, Vol. 48, No. 2 (Spring 2015), pp. 145–170. 14

 

비록 그 시체가 공적인 일의 희생자가 아닐지라도 매장되지 않는 시체 자체는 단순한 죽은 자의 몸을 넘어 불안정하고 위험한 존재로 공동체와 개인에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Johnston 1999).

이 때문 에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시체를 방치하거나 전시하는 행위는 혐오감이나 정치적 수치심과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Cairns 1993; Tarnopolsky 2010). 비록 레온티오스가 본 시체가 사형 집행 대상자였다 할지라도 그 시체를 외면하고 두 눈을 가린 것은 보고 싶어하는 자신의 욕망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이 수치심은 단순히 시체를 기피하거나 두려워하는 것, 혹은 혐오하는 것을 넘어서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는 충동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한 일종의 자기 규제 행위라 할 수 있다(Liebert 2014, 193).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대상에 대한 수동적인 반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과 이에 따른 자아 구성에 깊게 관여하 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보고 싶은 욕구에 압도당한 바로 그 시점(③)에서 수치심은 분노로 전환되는 극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수치심이 시체를 보는 행위 이전에 그것 을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분노는 그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 는 순간에 발현되고 있다.

그는 가리고 있던 두 눈을 부릅뜨고(④), 결국 시체를 보고야 만 자신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레온티오스는 이때 저 ‘좋은’ 구경거리(⑤)라는 역설적인 표현 을 통해 욕망에 굴복하고 만 자기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이 사례는 언뜻 보고자 하는 욕구와 보지 말아야 한다는 욕망에 대응하는 혼의 부분에 대한 싸움에서 결국 욕망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플라톤이 이를 영혼삼분의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는 것이 중요한데 그는 ‘욕망에 진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다.

한마디로 분노는 욕구과 다른 것이 며, “욕구와는 별개의 것으로 때로는 욕구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440a).

그것은 어떤 욕구가 헤아림을 방해할 때 이성과 한편이 되어 싸운다.

이러한 논의에 근거할 때 분노가 곧바로 기개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기개적인 것의 한 부분에 분노의 자리가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5)

 

       5)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이 지점에서 기개(격정:thymos)를 분노(orgē)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국가> 439d~440b, 특히 440a 부분).

 

또한 기개적인 것의 전반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감정으로서 분노’가 강조되고 있다(Saldaña 2021, 10).

이 특정한 분노의 감정은 시체를 보는 행위가 불명예스럽고 부끄럽다는 감정적 자원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레온티오스의 사례는 영혼 삼분과 각 영혼의 부분이 갈등한다는 포괄적 차원으 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한 감정적 자원들이 어떻게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상호작용 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기개적인 것은 이성과 한편이 되어 싸운다는 명시적 조건을 넘어 그것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는 자의 부끄러 움’이 그것을 결국 보고자 했던 욕망에 굴복하게 되면서 생기는 ‘분노’에 관한 것으로 재해석할 수 있게 된다.

‘눈을 감는 행위’와 ‘눈을 부릅뜨는 행위’가 부끄러움이 분노로 전환되는 극적인 순간이 되는 것이다.

레온티오스의 분노가 이렇듯 수치심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때 플라톤의 분노는 훨씬 풍부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상기하자면 이 사례는 기개적인 측면의 독자적인 위치를 확인하 는 과정에서 나온다. 특히 주목할 점은 레온티오스가 이성과 욕구의 싸움에서 욕구에 졌기 때문에 시체를 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욕구에 진 뒤 자신이 했던 행위에 대해 분노했다는 것에 있다.

욕망에 굴복했던 자신의 행위에 대해 그토록 분노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욕망에 굴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행위로 옮기기 전 그에게는 잠시 동안이나마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이성적 사고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데 있다.

수치심과 분노는 모두 욕구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지만 전자는 행위 이전의 감정, 후자는 행위로 전환되는 순간의 감정이다. 레온티오스는 욕구에 대항하는 수치심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위를 막지 못했다.

수치심이 있다면 행위로 옮겨가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수치심 자체가 그 행위를 막을 수있는 충분 조건은 되지 못한 셈이다.6)

소크라테스의 말에 따르면 분노는 욕구와 한편이 되어 이성적인 것과 싸운 걸 결코 본 적이 없다.

결국 시체를 보고 말았지만(욕망이 이겼지만), 그 이전에 그에 대해 수치심을 느꼈고 분노했기에(결국 욕망이 졌기에) 레온티오스의 분노는 욕망에 대항하여 이성과 한편이 된, 매우 상식적인 것이었다.

더욱 흥미로운 부분은 소크라테 스가 이 사례를 제시한 직후 부정의를 행한 경우와 부정의를 당한 경우에 따른 분노를 논의하 는 지점이다.

분노라는 감정을 (부)정의(로운 것)와 연관시키고 있는 것인데,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정의를 행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이 고귀한 사람이라 면(그럴수록) 자신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누군가가 굶주림이나 추위 같은 고통을 준다 하더라도 그는 좀처럼 분노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부정의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분노가 끓어오르고 사나워지며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것과 한편이 되어 싸울 것이다.

이성이 그 분노를 불러들이기 전까지 그는 고귀한 행동(noble efforts)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440c-d).

분노가 욕망과는 달리 정의에 감각적으 로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격정적인 부분을 제3의 것으로 확정 짓는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논의의 초반에서 처럼 이를 국가의 세 부류에 다시 적용한다.

돈벌이를 하는 부류와 보조하는 부류, 숙의하는 부류가 그것인데, 소크라테스가 여기에서 보조하는 부류를 격정적인 것(분노)이 아닌 ‘용기있게 하는 부류’로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441c, 422b).

욕구적인 부분을 지도하게 될 부분은 이성적인 부분과 격정적인 부분인데, “한쪽은 숙의를 결정하고, 다른 쪽은 싸움을 하며 지배하는 쪽을 따르고 숙의된 사항들을 용기있게 완수하게 된다”(442b-c).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용기있는 사람은 분노를 갖고 있기에 두려워 할 것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 무엇인지 이성이 알려 준 대로 끝까지 보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는 정치 체제를 논하는 부분에서 재확인되는데, 용기가 국가 체제에서 수호자에게 요구 되는 덕목임을 확인하고, “이기기를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545a, 581a-b)을 닮은 정체를 명예지상정체(timokratis)로 부른다.7)

 

    6) 이 부분은 한 논평자의 고견을 일부 수용하여 반영하였다. 애초 심사본에는 레온티오스의 분노를 “자신의 행위 가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라고 적었으나 이렇게 될 경우 분노가 욕구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잘 드러나 지 않게 된다. 분노와 수치심은 모두 이성적인 판단에 반하는 욕구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한 편에 있지만 수치심은 욕구적인 것을 실현하기 전에 오는 ‘감정’이고 분노는 욕구적인 것의 실현 상태, 즉 자신의 ‘행위’에서 오는 감정 상태라는 점에서 둘은 다르다.

    7) 명예지상정체는 최선자의 정체에서 타락한 정체이기 때문에 좋은 정치체제 유형은 아닐 테지만 이상적인 사회 가 붕괴된 후 첫 번째 단계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선자의 정체가 이상적인 체제로 그것이 불가능하다 

 

이 체제는 “격정적인 것이 우세한 탓에 승리에 대한 사랑과 명예에 대한 사랑”이 뚜렷하게 드러난다(548c).

기개적인 것과 관련하여 명예정 은 이성과 잘 협력하여 작동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이 정체를 닮은 사람은 “자유민들에 대해서 는 상냥하며, 통치자들에 대해서는 지극히 순종적”이고8) 전공(戰功)이나 전쟁에 관한 일을 대의적인 명예의 원천으로 생각하기에 공적인 일에 관심을 갖는다(549a-b).9)

 

     8) <국가> 2권에서도 수호자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분노의 기질이 누구에게나 표출되는 것이 아니며, 좋은 분노가 “천성으로 낯익은 사람들이나 아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최대한 온순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반대”라고 언급한다(375e). 이것이 “온유하면서도 대담한 성품”(375C)이다.

    9) 또한 기개적인 것이 이기기를 좋아하는 명예와 관련이 있다면, 이는 어떤 대상에 대한 인정 욕구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관계 지향적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정준영(2011)은 이 관계 지향적이라는 의미를 사람을 상대로 한다는 점에서 나와 다른 인격체, 즉 타인을 자연스럽게 상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관계 지향적이라는 의미가 반드시 타자를 상정한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이 명예정의 성격은 이를 닮은 사람의 영혼 상태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영혼삼분설은 국가의 정의, 조화를 탐색하기 위한 과정으로 논의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혼과 관련하여 더 나은 부분이 더 그렇지 못한 부분을 억제하 는 절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저 자신을 이긴다(저 자신보다 더 강하다:kreittō hautou)”라는 표현이 이 맥락과 연결될 수 있다(<국가> 430e).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준영의 타자를 전제하는 관계의 의미는 정치적 독해에서 중요한 함의를 준다.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분노가 철학적이거나 윤리적인 자기 성찰로 이어지는 측면이 있고 이것이 부끄러움을 유도한다면, 타자와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분노는 그것의 긍정적인 지향점이 정의와 깊게 연관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기개적인 것이 이성이 아닌 욕구적인 것과 협력하게 되면 과두정이 생겨나는데 “황금으로 가득 찬 각자의 금고”(550e)가 명예정을 무너뜨리게 되는 것은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다. 과두정체에 서 이를 닮은 사람은 결국 명예에 대한 사랑과 격정적인 부분을 자신의 혼 안에서 몰아내고, 이성적인 부분과 격정적인 부분을 욕구적인 부분의 노예로 삼게 된다(553c-d).

곧 수벌 같은 욕망으로 채워진 민주정으로의 이행, 바로 전 단계다.

그렇다면 민주정에서는 기개적인 것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일까? 민주정은 과두정과 참주정 사이의 정체다. 과두정이 기개 적인 측면이 이성이 아닌 욕구와 결합한 결과이기에 민주정은 욕구와 결합한 기개조차 없는 체제, 즉 욕구만이 남아있는 상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 지점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민주정체가 그보다 나은 과두정체로 기울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일부 욕구는 소멸되고, ‘부끄러움이 생성’된다는 것이다(560a). 만약 부끄러움(aidos)을 어리석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혼에서 불명예스럽게 쫓아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무지하고 부끄러 운 것인데, 그들은 오히려 그 부끄러움 모름을 용기라고 부른다(560c-561a). 소크라테스의 이 발언은 민주정체가 기개적인 분노를 갖지는 못했지만 기개적인 분노의 가능성을 부끄러움 이라는 감정 상태로 열어놓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부끄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기다리는 것은 참주정일 뿐이다. 이를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면, 현실의 가장 좋은 정치체제는 명예정이 된다.

 

<표 1> 영혼 삼분과 정치체제 영혼상태 정치 체제 : 생략(첨부 논문 파일 참조)

 

결국 플라톤이 제시하는 욕구적인 것과는 다른 기개적인 것으로서의 분노는 부끄러움을 동반한 분노여야 한다.

그것은 레온티오스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순간 잠시 멈춤’이라는 성찰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성찰적 분노는 정의와 불의에 대한 윤리적 감수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공적인 영역에서 진정한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플라톤이 개인의 영혼과 정치체제를 유비하는 것은 개인의 감정, 혹은 영혼 상태가 결국 정의로운 국가의 핵심적인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것 중 가장 나은 명예지상정 체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기 검토가 가능한 사람이기에 이성과 협력하 는 분노를 지니게 되고, 명예를 사랑하고 이기기를 좋아한다는 특징 때문에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용기의 덕목을 소유하게 된다(부끄러움-분노-용기). 그러나 현실의 민주정체는 이와는 반대다.

부끄러움 모름을 용기라 부르고,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에 오히려 분노한다(부끄러움 모름-분노-무모함). 이것이 이 정체의 비극이다. 아테네인 들은 무엇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분노하고, 그것의 결과는 무엇인지,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이 어찌할 수 없는 분노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Ⅲ.소크라테스가아테네인들에게:분노하기전에먼저부끄러워하길!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 때문에 일흔살이 되어 처음으로 아테네 대중 앞에 선다.

법정에 선 그는 자신을 ‘생소한 이방인 처지’로 묘사한다(<변명> 17d).

소크라테스 는 자신에 대한 거짓들 중 가장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는 말로 연설을 시작한다.

그것은 소크라 테스가 말하는 데 능란하기에 사람들이 기만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 테스가 생각하기에 이 소문은 자신과 대화를 하는 상대가 논박을 당했을 때 자신이 당한 것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 낸 거짓인데 이 점에서 고발자 들은 몰염치하다고 말한다(17b).

연설 초반에 소크라테스는 고발자들의 부끄러움 모름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이 몰염치함을 자신이 고발당한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곧이 어 그 고발자의 말이 거짓임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선언하면서 카이레폰이 들려준 델포이 신탁 이야기를 꺼낸다.

이때 시끄럽게 동요하는 대중을 향해 소크라테스는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부탁한다(20e, 21a).10)

어찌되었건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는 없다는 바로 그 신탁이 자신에게는 수수께끼 같았고, 이것이 정말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 지혜롭다고 여겨 지는 사람들에게 갔다는 것이다.

현명하다고 알려진, 혹은 그렇게 스스로 주장하는 세 사람인 아니토스(정치인들과 장인), 뤼콘(연설가), 멜레토스(시인)가 바로 그 대상이었다.

소크라테 스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결국 그들에게도 청중에게도 미움을 사게 되었지만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점에서 적어도 이 사람(들)보다는 지혜롭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 다.

자신이 “미움을 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통스럽고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이” 신탁을 소중히 여겨야 했기에 자신은 신이 자신에게 준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이다(21e).

여기에서 아니토스가 고발의 주도적 인물이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장인이 었지만 정치인으로 성공한 인물이었고, 30인 참주 정권이 몰락한 후 복구된 민주정에서 영향 력있는 정치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 많은 대중들 앞에서 자신의 무지가 들통난다면 그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 논박당함이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는 소크라테스의 논박을 ‘상대를 기만하는 속임수’로 규정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논박에서 지더라도 그 원인을 소크라테스에서 찾으며 그를 향한 분노를 쏟아낼 수 있다.

그가 말도 안되는 논변으로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음이 대중 앞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테네 사회 에서 정치인의 감정적 자원이 대중과 손쉽게 일치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고발자들이 대중 앞에서 쏟아내는 소크라테스를 향한 분노는 쉽게 대중에게 전이될 수 밖에 없다.11)

 

     10) 휴즈는 ‘일흔살이 되어 처음 법정에 왔다는’ 그의 발언에서 이미 시작부터 시민들이 분노했을 것이라고 추측한 다. ‘그 나이에’ 민주 아테네에서 민주적인 활동이 처음이라는 것이 귀여운 농담일 수 없고, 만약 농담이었다면 아테네에서 떠도는 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지금 이 사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데에 시민들은 분노했 다는 것이다. 배터니 휴즈. 2023. 『아테네의 변명』. 서울: 옥당출판사. p. 500.

     11) 플라톤 대화편에는 아니토스(<메논>,<변명>)나 트라시마코스(<국가>), 그리고 글라우콘과 칼리클레스(<고르기아스>)와 같이 분노하는 자로 비교적 유명한 대화 상대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들과 비교하 여 아테네 시민의 분노는 집단의 분노이기에 공분(公憤)의 형태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그런데 공분은 정치인의 연설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시민의 분노는 좀 더 세심하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진실을 비트는 일종의 여론 조작이었고 정치적 선동이었다.12)

그리고 아니토스는 여기에 매우 능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고발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비난과 고발은 검토받는 자들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고 소크라테스에게 화를 낸다는 것이다(23d, 24a).13)

 

      12) Brickhouse & Smith(1989, 2021)는 이 같은 관점에서 소크라테스를 ‘사회적 선동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보다 자세한 논의는 Socrates on Trial. Princeton University Press. 참조.

     13) 실제로 이 고발이 있기 이전 <메논>에서 아니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당대 명망있는 정치인들을 차례로 비판하 는 것을 보고 그에게 ‘조심하라고’ 충고한 바 있다. 왜냐하면 아테네에서는 사람을 쉽게 기소할 수 있기 때문이 다(<메논 94e). 이에 소크라테스는 아니토스가 분노하고 있다고 여기면서 그 원인이 아테네 정치인들을 자신 이 비방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나아가 아니토스도 이 중 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토스는 ‘진짜 나쁘게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걸 ‘알게 된다면 분노하지도 않을 테니까’(95a).

 

소크라테스 입장에서 이것이야말로 부끄럽고 몰염치한 일인데 그것을 모른다는 것 자체가 아주 놀라운 일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자신이야말로 진실을 말하고 있고, 이 진실이 아테네 시민을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곧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망치고 국가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령을 믿음으로써 불의를 행하고 있다”는 나중 고발자들에 대해 항변하기 위해 멜레토스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진짜 불의를 행하는 자가 누군인지 밝히기 위해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하는 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대답없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고발한 것이 부끄럽지 않냐고 되묻는다(24d).

아니토스에 이어 멜레토스에게 당신이 한 짓이 얼마나 부끄 러운 일인지 알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젊은이들 을 타락시키는 자는 아테네 사회에서 소크라테스가 유일하다(25a). 그의 황당한 말에 소크라 테스는 반박을 시도하지만 이내 법정은 다시 시끄러워진다(27b). 그 스스로가 잘 이해하고 있듯이 자신의 고발자는 물론이고 현장에 있는 청중들과 배심원들은 자신에 대한 미움을 갖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아니, 소크라테스, 당신은 지금 당신을 죽을 위험에 처하게 만든 그런 유의 일을 추구했던 게 수치스럽지도 않습니까?(28b)

 

소크라테스 입장에서는 부끄러워해야 할 자는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거나 인정 하지 않는 자들일 텐데, 이들은 역설적으로 소크라테스를 향해 죽을지도 모르는 행위를 하고 다닌 게 부끄럽지 않냐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뭔가 좀 이상하기도하고 아름답지도 않은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정의로운 행위 여부가 아니라 ‘죽음의 위험’을 그 안에 포함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소크라테스에 있어 죽음은 수치스러운 어떤 일을 참고 견디는 것에 비해 가벼운 위험이다.

아킬레우스가 그러했듯이 수치심은 부정 의를 당했을 때 정의를 향한 영혼의 움직임이어야 하고, 그로 인해 분노해야 하며, 그것이 결국 두려워할 것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는 용기로 나타나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발언은 진정한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통한 분노가 어떻게 두려움 없는 용기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암시하고 있다. 자신을 고발한 아니토스는 이를 알지 못하고, 그는 거짓 선동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으며 시민들은 그의 말을 믿고 있다. 만약 아테네 시민이 아니토 스를 믿지 않고 소크라테스를 방면 해주기로 결정하면서, 더 이상 이런 철학적 탐색을 하지 말라고 조건을 단다는 가정을 해보자. 소크라테스는 당연히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방면으로 인해 목숨을 구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진정한 삶이 아닐뿐더러 그가 일생을 바쳐 추구했던 영혼 돌봄의 철학적 삶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입장에서는 그것이야말로 두렵고 수치스러운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요구할지도 모 르는 부끄러움을 진정한 부끄러움과 대비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훌륭한 양반, 당신이 지혜와 힘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명성이 높은 국가인 아테네 사람이면서, 돈이 당신에게 최대한 많아지게 하는 일은, 그리고 명성과 명예는 돌보면서도 현명 함과 진실은 그리고 영혼이 최대한 훌륭해지게 하는 일은 돌보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게 수치스럽지 않습니까? (29d-e)

 

그는 사람들이 분노할 것을 뻔히 알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가정까지 끌어들이며 말하고, 아테네 시민 앞에서 나는 내가 몇 번을 죽더라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며, 부끄러워 할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당연히 더 크게, ‘고함을 지를’정도로 소란을 일으키며 분노한다(30c).

무슨 말을 해도 일단은 지켜봐 달라는 그의 호소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계속 자신의 논변을 이어 나가면서 ‘나를 죽이면 나한테 해를 끼치는 것보다 유죄를 선고한 시민들 자신에게 더 해가 되기에 자신의 변론이 아테네 시민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급기야 ‘혈통이 좋으나 큰 덩치 때문에 굼뜬 자들에게 자신이 등에와 같은 존재이기에 신이 준 선물’이라고 까지 말하기에 이른다(30c-31b).

장소는 아테네 법정이며, 자신의 죄의 유무를 가리는 변론 장소다. 유죄가 확정되면 이제 곧 형량을 결정해야 할 텐데, 그 결정권을 가진 대상들을 향해 어쩌면 너무 뻔뻔해 보이기 그지 없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장내는 너무 소란스러웠고, 사람들은 멈추라는 소리를 질러가며 분노했지만, 그는 특유의 침착함을 유지하며 자신의 말이 진실이고, 자신의 삶이 진실된 삶이었으며, 이것이야말로 정의로운 것이었음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그도 예상했듯이 이것이 오히려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할 수 있고, 그 때문에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도 있다(34dc-d).

그럼에도 그는 그 곳에 오른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재판관들에게 간청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그러한 방식이 “아테네 시민은 물론 국가 전체의 명성과 관련해서도 아름답지 못한 일”인데 지혜나 용기나 다른 덕에 있어 남다르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이 다(35a).

1차 변론 후 투표가 이루어졌고, 결과는 280 대 220으로 유죄가 선고되었다. 생각보 다 유죄가 많지 않았다는 것에 소크라테스는 놀라워했다.

이제 형량을 결정하는 2차 변론이 시작되었고, 고발자는 소크라테스의 형량을 사형으로 제안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 대한 형량을 무엇보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판단되는 “시 중앙 청사(prytaneion)에서 식사 대접을 받는 일”이라고 제안한다(36d).

생각보다 적은 표 차이로 더 도발적으로 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프리타네이온14)이 갖는 상징성을 고려하면 소크라테스의 형량 제안은 자신이 자신의 철학적 사명을 끝까지 실천할 것과 이것이 공공의 이익과 부합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4) 이 곳은 아테네 중심에 있는 행정 건물로 시민들의 모임, 공식 행사가 열리는 곳이었다. 또한 식당을 갖추고 있어서 전쟁에서 승리한 인물을 포함하여 아테네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국가의 비용으로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이 곳에서 식사를 제공받는 다는 것은 대단히 영예로운 일이었으며, 기여도에 따라 영구 적, 혹은 1회 식사 등이 제공되었다고 알려진다. 강철웅(2016).『소크라테스의 변명』. 이제이북스. 93번 주 석 참조(pp. 100-101).

 

소크라테스의 이러 한 발언은 오히려 대중의 감정을 자극했다.

 첫 번째 이유는 그의 잘난 체하는 말투였으며,

 두 번째는 그가 제안한 프리타네이온에서의 식사는 자신의 공로를 강조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한 아테네 법정을 조롱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형량 제안 직후 시민들은 그가 제멋대로 행동하며(37a),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그의 말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매우 비위에 거슬려 그곳을 빠져 나오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37c-d).

그는 다시 형량을 벌금 30므나로 제안 한다.

벌금의 제안은 소크라테스가 합의할 수 있었던 최대치였다.

이것은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지키면서 유죄라는 법적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분노한 시민들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늦었고, 결과는 360 대 140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사형 판결의 원인을 ‘대담함과 몰염치의 궁함’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38d-e).

그것은 확실히 아테네 시민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이었다.

자신은 무엇이 진실인지, 어떤 것에 부끄러워하고 분노해야 하는지 알지만 자신의 고발자와 시민은 여전히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진정 두려운 것인지 알게 되면 죽음은 두려워 할 만한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발언을 빌리면 아테네 시민들은 그의 죽음 직후 그러한 진실들을 직시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보다 훨씬 더 혹독한 앙갚음이, 곧바로 닥칠 것이라고 예언’(39b)하면서, ‘삶과 죽음 중 어느 쪽이 더 좋은지 신 말고는 아무도 모른 다’(42a)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마지막 연설을 끝낸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소크라테스를 죽였다는 일반적인 견해들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내 몬 것은 아테네 민주정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분노였다. 그것이 사실은 시민적 용기를 가장한 무모함이라는 형태로 표출된 것이다.

아테네인들의 분노는 소크라테스의 연설 내용이 진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소크라테스는 진실한 내용이 중요했지만 시민들은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 과 태도를 문제 삼았다.15)

아테네 대중 연설 혹은 법정 연설에서 청중을 설득하는 핵심은 바로 청중의 감정 상태였다.16)

 

    15) 그의 연설방식은 에이로네이라(Eironeia)와 메갈고리아(Megalēgoria)라는 두 가지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전자가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겸손을 가장한 질문을 통해 상대의 무지를 드러내는 소크라테스적 아이 러니를 상징하지만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상대를 기만하고 속이는 말하기이기도 하다. 두 번째 메갈고리아는 큰소리로,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는 것, 다소 잘난 척하는 말투를 사용하는 경우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들 은 손병석. 2013.『고대 희랍 ‧로마의 분노론』. 바다 출판사.(특히 3장),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옮김. 2017. 『수사학』. (특히 1장 2절 1356a).

    16)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설득의 세 가지 요소로 에토스(화자의 신뢰성), 파토스(청중의 감정), 로고 스(논리)를 제시하고 있는데, 당시의 수사학자들이 대개 두 번째 요소, 즉 청중의 감정 상태에만 온 신경을 쓴다고 언급한 바 있다(1356a1-1356a17).

 

때문에 많은 연설가들은 청중의 감정을 자극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고, 심지어 감정을 조작하여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 내려는 전략을 취했 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Chaniotis 2018),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말하기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그의 연설은 근본적으로 시민들의 분노를 해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철학적 삶과 아테네의 정치적 삶은 근원적 불화의 관계에 놓여 있다(박성우 2004). 주목할 점은 소크라테스가 재판 과정 내내 자신을 고발한 자들과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부끄러움을 회복하라’는 도덕적 요구를 지속적으로 제기한다는 점이다.

그가 말하는 부끄러 움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정의와 부정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윤리적 감수성이며, 이는 참된 분노의 토대가 된다.

이에 비해 아테네인들의 분노는 자기성찰이 결여된, 부끄러움을 모르는 분노로, 두려워할 것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앎의 부재로 무모하게 표출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시민들에게 먼저 분노하지 말고 부끄러워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의  고발과 죽음이 모두 이성과 단절된 감정, 즉 파괴적 분노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다.

 

Ⅳ.아테네이방인의제안:용기로발휘되는고귀하고정당한분노

 

플라톤의 후기 저작인 <법률>의 화자는 아테네 이방인이다. <변명>의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타자로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이는 매우 흥미로운 설정이다.

아테네 이방인은 플라톤이 설정한 마그네시아의 법률 설계자로 등장하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법률>에서 ‘법의 서문(prooemia)’을 통해 시민에게 법의 목적에 대해 설득하는 장치를 마련한다는 점이 다.

플라톤은 법을 강제가 아닌 설득과 교육의 수단으로 설계함으로써, <변명>에서 드러난 대중 정치의 비합리성과 법적 절차의 감정적 왜곡에 대한 철학적 대응을 시도하고 있다 (Morrow 1993, 221–235; Dodds 1973).17)

그리고 동시에 이는 <변명>의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통해 아테네 시민들에게 부끄러움과 자기 성찰을 일깨우려 한 시도와도 연결된다 (Meyer 2015, 182).

플라톤이 보았을 때 대중의 분노는 다루기 힘든 것이었고, 나라에 있어 법률의 상태는 거의 치유 불가능한 상태였다.

민주정의 사람들이 가진 그 무서울 것 없음과 대담함이 더 나은 자의 의견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18) 그들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는데, 그런 자들에게 이제 마지막 단계는 법률에 대한 불복종 밖에 없게 된다(<법률> 701a-c). 법은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 셈이다.

플라톤이 <법률>에서 분노와 관련하여 고려했던 사항은 다름 아닌 “명예와 관련한 용기”다.

이미 플라톤은 <국가>에서 기개적인 사람을 “이기기를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545a, 581a-b), “격정적인 것이 우세한 탓에 승리에 대한 사랑과 명예에 대한 사랑”(548c)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람으로 말한 바 있다.19)

 

     17) 비슷한 맥락에서 Dodds(1973, 119-120) 역시 <법률>의 입법시스템을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연결시키면서 이것이 아테네의 불완전한 정치질서에 대한 반성적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Dodds(1973). The Ancient Concept of Progress and Other Essays on Greek Literature and Belief. Oxford University Press.

     18) 소크라테스가 <변명>에서 자신에게 없다고 했던 바로 그 대담함과 몰염치다(38d-e).

     19) <티마이오스>(69e-70a)에서도 이기기를 좋아하는 부분은 용기와 분노로 규정하는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데미우르고스가 인간을 만들 때 신적인 것(지성)은 머리에 두고, 사멸적인 것은 머리와 떨어진 몸통에 두었는 데, 횡경막을 중심으로 본성상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으로 공간을 나누었다. 그 중 전자는 이기기를 좋아하는 용기와 분노로 횡경막과 목 사이에 두었고, 후자는 욕구적인 부분을 횡경막과 배꼽 사이에 정착시켜 야생동물 을 가둬 놓듯이 가두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도대체 이기기를 좋아하고 명예를 추구한다는 것이 개인의 영혼의 속성인지, 타인의 평판에 대한 인정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규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레온티오스나 아킬레우스에게 발견되는 것처럼 부끄러움으로 인해 발생하는 분노가 개인에 머무는 것인지 구체적인 행위로 나오는 것인지 역시 불분명했다.

물론 아킬레우스의 경우는 그것이 전쟁터에서 영웅적인 대범함(용기)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런데 <법률>에서 플라톤은 명예의 의미를 좀 더 세분화하고 포괄적인 차원에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명예의 종류로 혼의 명예, 몸의 명예가 있는데, 이는 조화롭고 평화로운 상태로 전자는 기개적인 것을, 후자는 힘이 쎈 것도 날쌘 것도 아닌 몸의 중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둘째는 명예의 범위의 문제인데 플라톤은 개인적인 수치심에 의한 분노에 머물지 않고, 대외 적인 전쟁에서의 용맹함과도 다른 공동체 내에서의 미덕, 즉 공동체적 가치로 명예를 확장하 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후자의 것을 가장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라 및 시민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올림피아 경기에서의 겨룸이나 일체의 전쟁 및 평화적 인 겨룸들에서 승리하는 것보다도 제 나라의 법률에 대한 봉사의 평판에 의해 이기는 쪽을 선택 하는 사람이야말로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729d-e).

공동체 내에서 정의로움과 관련된 명예에서 가장 명예로운 자는 불의를 저지른 사람이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다(730d).

불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은 훌륭하 고 명예로운 사람이지만, 불의를 참지 않고, 방관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그것을 막는 용기있는 자가 가장 명예로운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분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최대한 온순해야 하는데, 그것은 위험하고 고치기 힘든 비행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싸워 이겨야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행위가 “고귀한 분노(격정: thymos)”라는 혼의 영역 때문에 가능 한 것이라고 확신한다(731b).

고귀한 분노라는 용어는 <법률>에서 단 한 번 나오지만 이것이 명예, 용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다.

먼저 자연스럽게 모욕을 주는 방식으로 분노를 유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793e) 그것은 불명예와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다.20)

 

     20)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수치심이나 모욕과 깊게 연계되어 있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복수의 욕 망”으로 인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위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은 분노의 파괴적 성격이 강조된 것이라 할 수 있다(<수사학> 1378a, <영혼에 관하여> 403a / 414a29-415a12 / 431a). 플라톤 역시 분노에 이러한 파괴적 성향이 있음을 인정하는데, <법률>(866d~869a)에서 살인의 원인을 분노로 표현하면서 그것이 충동 적인 분노에 의해서 행해진 것인지, 계획적인 의도를 가지고 행해진 것인지를 다시 구분한다. 똑같이 파괴적인 분노라 할지라도 더 악한 것을 다시 구분하는 플라톤의 나눔 방식을 목격할 수 있다. 또한 이 점에서 플라톤의 분노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노론 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차원의 설명을 요구한다.

 

나아가 용기는 앎과 연결되어 있다.

분노가 과하지 않고 온순하게, 절제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이성적 검토를 전제하 고 있다.

이성적인 검토가 없는 분노, 그래서 지나친 분노는 자신에도 공동체 전체에도 결코 유익할 리 없는 파괴적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분노 자체의 옳고 그름보다는 분노가 가진 다중적 성격 때문에 분노는 용기와 절제와 같은 미덕을 요구는 것이다.

그는 이미 <국가>에서 이러한 의견을 피력한 바 있는데, ‘두려워할 것과 두려워하지 않을 것들에 관한 바르고 준법적 인 소신의 지속적인 보전과 능력’이 바로 ‘시민적 용기’라는 것이다(<국가> 430b).

따라서 <법률>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아테네인은 크레테와 스파르타의 법률이 전쟁(에 대비)을 위한 것이었음을, 특히 용기에 집중되었음을 확인하는데 그가 말하는 용기는 단순히 개인적 인 차원의 것이나 전쟁터에서의 용맹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서움이나 고통(괴로움) 은 물론이고 즐거움을 주는 어떤 욕구, 쾌락까지 그 모두를 상대하여 이기는 것으로( <법률> 633c-d) 매우 폭넓게 적용되고 있다.21)

 

     21) 용기에 관한 논의인데, 왜 <라케스>가 아닌 <법률>을 주요 텍스트로 다루는지 의아할 수 있다. 변을 하자면 이 글은 용기 자체보다는 분노와의 관계를 통해 용기를 해석하고 있고, 정치공동체에서 용기가 발현되는 과정 이 수치심-분노와 관련 있다는 점에 중심을 두기 때문이다. 더하여 <라케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라케스와 니키아스가 제시한 용기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논박하는 방식의 대화편이지만 <법률>은 포괄적인 법질서에 서 필요한 용기를 매우 자연스럽게 차선의 국가를 위한 덕목으로 받아들이면서 시작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두 대화편에서 용기 개념이 다소 다르게 이해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전자는 개인적인 차원을 후자는 공동체 적 가치로 용기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라케스>에서는 용기가 라케스와 니키아스의 정의에만 국한되지 않는 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반론이기에(라케스 191d-194a), <법률>에 나오는 용기의 포괄적 접근을 고려하면, <라케스>는 <법률>의 용기에 관한 예비적 논의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해 편의상 <라케스> 에서의 용기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라케스>는 라케스와 니키아스의 용기에 대한 정의와 본질,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박으로 구성된 대화편 이다. 먼저 라케스는 용기를 전쟁터에서 두려움 없이 적을 마주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그것 이 오히려 너무 구체적일 뿐 아니라 용기는 전투 상황이 아닌 다른 삶의 영역에서도 발휘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또한 니키아스는 용기를 ‘좋음과 나쁨에 대한 지식’으로 정의하는데 어떤 상황이 위험하고 그렇지 않는지를 판단할 줄 아는 지혜라고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 정의가 지나치게 지적인 접근임을 지적하면서 용기가 모든 상황에서 동일하게 작용하는 보편적 지식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용기가 지식이라는 주장은 지식이 있다고 항상 용기가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추가적인 설명이 요구된다. 결국 이 둘의 용기에 대한 정의는 모두 불충분한데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용기는 ‘그 자체가 지식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무지에 기반한 무모함(무모한 행동)과는 구분’되어야 하며,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아닌 이성 적 판단과 결합한 상태에서 발휘되어야 하는 것임을 밝힌다. 무모한 자는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고 위험을 감수 하는데, 용기있는 자는 결과를 알고도 이성에 따라 행동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는 용기가 단순히 한가지 요소가 아니라 복합적인 덕목임을 시사하고 지혜와 행동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결과라는 점을 강조한다. 용기가 지혜 라면 행위적 측면이 간과되기 쉽고, 신체적인 행위 요소로 용기를 파악한다면 이성적이고 도덕적 차원이 간과 되기 쉽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즐거움을 주는 쾌락은 부끄러움과 연관되 는데, 그 무엇보다 쾌락에 지는 것이 가장 창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장 부끄러운 것을 배제한 다는 것은 한쪽은 노예인 반쪽짜리 용기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입법자는 이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용기는 대상에 대해 겁내지 않는 기개를 의미한다. 겁을 내는 것은 두려움 때문인데, 두려운 것은 ‘무언가 나쁜 일이 생길 것이라는 예상’에서 생겨난다(646e).

그러나 두려움은 또한 ‘자신이 나쁜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라는 세간의 평판’에 의해서도 생겨난다 (646e-647a).

그런데 플라톤은 여기에서 전자는 가장 큰 존경심으로 부끄러움(공경, 경외: aidōs)으로 일컫고, 후자를 진정한 부끄러움 모름(파렴치: anaideia)으로 칭하면서, 후자를 공사 간 모두에게 가장 큰 나쁨이라고 규정한다(647a-b).

플라톤이 두 가지 두려움을 도입하 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두려움이 대개의 정치인과 시민이 생각하는 두려움과 상이하 기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지금 당장 어떤 처벌을 받는 일, 혹은 죽음, 그리고 세간의 평판이 자신에게 나쁘게 흘러간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이를 극복하는 것을 용기라 부른다.

그러나 플라톤의 입장에서 그것은 전혀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며, 그들이 용기라 부르는 것은 사실상 무모함이며, 그들을 무모한 행위로 이끈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분노에서 비롯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때문에 용기는 가짜 두려움(비겁함)과 부끄러움 모름(몰염 치)을 숨김없이 드러내어 그것과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

용기는 이런 식의 훈련과 교육을 통해 완전해질 수 있게 된다(647c-d). 나아가 플라톤이 이러한 용기를 특정 집단에 국한된 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훈련을 통해 길러지는 ‘시민 교육’의 일환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올바르게 다스릴 줄 알고 다스림을 받을 줄도 아는) 완벽한 시민(politēs)으로 되는 것에 대한 욕구와 사랑을 갖는 자로 만드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는 것이다(634e-a).

두려움과 즐거움에 관련하여 이 욕구들이나 감정들이 이성의 판단에 따를 때 용기의 덕목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한마디로 플라톤의 용기는 법의 지배에 복무하도록 조율된 도덕적 힘이자 시민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Ⅴ.정의를향해용기있게내달리는‘부끄러움을아는분노’

 

이 글은 플라톤의 분노론을 부끄러움-분노-용기라는 포괄적인 맥락에서 해석해 보고자 했다.

플라톤이 말하는 기개적인 것의 ‘분노’는 부끄러움을 아는 감정과 용기있는 행동 사이에 있는 정의에 대한 감수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분노는 무엇이 부끄럽고 부끄럽지 않은지를 아는 감정적이고 개인적인 요인에서 오는 것이면서 동시에 불의를 참지 않고 정의를 향해 내달리는 용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분노 자체가 가진 개념의 복잡성은 차치하고라 도, 이것이 단일한 의미로 이해되지 않는 다양한 감정(덕목)과 상호 작용한다는 사실은 그의 분노에 대한 이해가 매우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각 각의 감정들이 모두 까다로운 검증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면밀한 철학적 점검들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에 치중하다 보면 큰 맥락에서 분노가 가지는 정의를 향한 정치적 행위라는 분노의 정치철학적 함의가 축소될 우려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분노가 용기와 연관되어 있다는 정치적 논의들은 그 저변에 깔린 매우 중요한 감정인 부끄러움을 의미있게 포섭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물론 기존 논의들이 이렇게 진행된 데에 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노를 중심으로 놓고 본다면, 부끄러움-분노는 어렵 지 않게 연결된다(<국가>의 레온티오스, <변명>의 고발자들과 아테네 시민).

그리고 분노 용기 또한 매우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비교적 확실한 근거가 있다(<국가> 4권과 8권 9권에서 이미 기개적인 것은 화내는 것, 이기기를 좋아하고 명예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규정).

무엇보다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분노의 도덕, 심리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에 대한 연구들이 각각 이를 대변한다.

그런데 부끄러움이 분노(기개적인 것)없이 곧바로 용기와 연결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또한 모든 부끄러움이 분노로 연결되는 것 또한 아닐 것이며, 역으로 모든 분노의 표출이 반드시 부끄러움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다(황옥자 2024).

사정이 이러하니 부끄러움-분노-용기의 세 차원은 연결될 듯 하면서도 명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해명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이 글이 이 세 가지 차원을 연결하는 해석을 시도해 본 이유는 이 복잡함의 근본적인 원인이 다음과 같은 것에 기인하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첫째는 플라톤 대화편에서 분노의 개념이 다차원적인 면모로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혹은 플라톤이 생각하는 분노와 아테네인들이 생각하는 분노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기본적으로 소크라테스(&플라톤)의 모든 감정은 앎을 지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개 는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것과 한편이 되었을 때의 분노’를 의미한다.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진짜 화를 내야 하는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다.

그렇기에 그 분노는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게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자기성찰이 가능한 부끄러움을 동반한다.

그런데 아테네인들은 전혀 다른 의미로 분노를 사용한다.

주로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알지 못한 사실을 알았으나 평판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기 싫을 때’ 분노한다.

그렇기에 그 분노는 상대를 향한다. 플라톤이 정의를 향한 감정으로 고려한 이성적인 것과 한편이 되는 부끄러움이 없기에 자기성찰은 불가능하다.

아테네인들이 소크라테스에게 그 러했듯 가짜 분노는 다른 옳은 분노를 대상화시켜 자신의 분노의 정당성을 획득하기에 그것은 폭력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성격을 갖는다.

  둘째, 분노의 방향에 관련된 것이다.

소크라테스 혹은 플라톤은 공통적으로 분노가 가진 자기성찰적 특징을 전제하고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도덕, 심리적인 차원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분노에 관심을 갖고, 플라톤은 그러한 소크라테스적인 분노를 전제하면서 용기의 형태 로 정의를 향해가는 분노의 정치적 성격에 주목한다.

가장 철학적인 인물인 소크라테스가 가장 그다운 대화편에 등장해서, 그리고 가장 정치적인 현장에서 한 행동을 생각해 보자.

그는 ‘당신을 죽게 한 행동들이 부끄럽지 않냐고’ 묻는(듯한), 분노하는 아테네인들을 향해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돌보지 않는 것이 진정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한다’(3장 인용된 두 구절).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상황에서 분노하는 자들은 ‘무지에 관한 부끄러움이 없는’ 자들이다.

때문에 진정 분노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런 상대에게 올바른 분노와 올바른 두려움을 깨닫게 하는 것은 어렵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인들의 부끄러움 없는 분노 에 대응하는 흥미로운 방식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적어도 대중의 분노에 분노로 응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다소 강한 어조로 말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결코 분노하지 않는다.

그가 신탁을 받은 존재라서, 혹은 특별한 절제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자라서, 혹은 대중의 한계에 대한 통찰(앎)을 지닌 자라서_ 그래서 분노할 필요가 없어서_분노하지 않았던 것일까?

플라 톤은 왜 소크라테스를 그렇게 묘사한 것일까?

플라톤이 인식한 진정한 분노가 부끄러움을 아는 분노라는 이 글의 해석적 틀에 기대어 보면, 소크라테스를 향한 대중의 분노는 아주 사적이고, 일시적이며 즉흥적인 감정적 차원에서 제시되고 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중의 분노가 악의적인 의도가 아닌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의 입장에 서 무지로 인한 분노는 감정적 대응의 대상이 아닌 교육과 성찰의 대상이다.

이 때문에 플라톤 은 분노하지 않는 소크라테스를 통해 감정이 욕구적인 것이 아닌 이성적인 것에 관계하는 하나의 방식을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소크라 테스와 플라톤의 대중의 분노에 대응하는 방식의 차이다.

플라톤은 <변명>의 소크라테스처 럼 일일이 다니면서 대화를 통해 자기성찰을 유도할 수 없고, 그 방법은 적어도 당시의 아테네 인들을 표면적으로 설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미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보다 안전하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분노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방안을 찾아 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법률>에서 제시되고 있는 고귀한 분노이며, 이에 따라 발휘되는 용기를 법에 안착시키게 되는 것이다.

위 내용들을 고려하면, 지극히 소크라테스적인 방식의 분노는 ‘부끄러움을 앎-분노’의 연결을 플라톤적인 방식의 분노는 ‘분노-용기’의 연결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나아가 후자 의 경우, 분노는 소크라테스적인 부끄러움을 아는 분노를 필연적으로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정치철학에서 정의를 지향하는 도덕 감정의 전이 구조로서 ‘부끄러움–분노–용기’의 구조적 연쇄작용이 가능하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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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이 글은 ‘분노’ 개념을 중심으로 가장 소크라테스 적인 <변명>과 가장 플라톤적인 <법률>을 독해한 다.

분석을 통해 <법률>에서 아테네 이방인에 의해 강조된 ‘용기’가 사실상 아테네 시민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분노’에 대한 하나의 정치 철학적 대응이자 정의를 향한 진정한 분노의 발현으로 읽힐 수 있다는 하나의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관점을 주장하 기 위해 이 글을 다음과 같이 구성하였다.

1장에서는 그간 플라톤의 분노 개념이 심리적이 거나 정치적 차원으로 분리되어 해석되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정치심리학적 차원으로 분 노를 해석하는 이 글의 관점을 제시한다.

2장에서는 영혼삼분설의 기개적인 분노를 위해 마련된 레온티 오스의 예시를 통해 부끄러움을 동반한 분노가 개인 의 심리적 차원에서 어떻게 생겨나는지 살펴 본다.

나아가 플라톤이 이러한 분노를 폴리스, 정의, 용기 의 덕목과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를 분석해 보면서 플라톤의 분노론이 ‘부끄러움을 앎–분노–용기(두 려움 없음)’와 ‘부끄러움 모름-분노-무모함(두려 움)’으로 설정될 수 있음을 밝힌다.

이러한 전제를 <변명>과 <법률>의 분석을 통해 구체화한다.

먼 저 3장에서는 <변명>을 중심으로 아테네 시민의 분 노를 ‘부끄러움 모름-분노-무모함’으로 규정, 분 석하고 4장에서는 <법률>을 중심으로 플라톤이 부 끄러움을 아는 분노를 용기로 확장시켰음을 주장한 다.

이 과정을 통해 본 연구는 플라톤 정치철학에서 정의를 지향하는 도덕 감정의 전이 구조로서 ‘부끄 러움–분노–용기’의 연쇄를 규명하고자 했다.

주제어: 플라톤, 감정, 분노, 부끄러움, 용기, 무모함 

 

 

(Abstract)

Plato’s Theory of Anger: The “Noble and Just Anger” Addressed by the Athenian Stranger to the Athenians

Hwang okja (Chonnam National University)

This paper connects the most Socratic text, Apology, with the most Platonic dialogue, Laws, through the concept of "anger." It proposes that the 'courage' emphasized by the Athenian stranger in Laws can be interpreted as a political- philosophical response to the Athenian citizen's 'shameless anger,' that is, as the true manifestation of anger. To support this argument, the paper is structured as follows: In Chapter 1, it critically examines existing studies that tend to separate Plato's theory of anger into psychological and political dimensions. In Chapter 2, as a preliminary discussion, it explores how anger accompanied by shame emerges on a psychological level through the example of Leontius, who is portrayed as having a spirited anger in the Tripartite Soul. Further, it analyzes how Plato connects this type of anger with the polis, justice, and the virtue of courage, suggesting that Plato’s theory of anger can be framed as ‘knowing shame –anger –courage (fearlessness)’ and ‘ignoring shame –anger –recklessness (fear).’ Following this framework, in Chapter 3, it analyzes the anger of Athenian citizens as ‘ignoring shame –anger –recklessness,’ while in Chapter 4, it interprets Plato’s theory of anger as ‘anger with shame expanding into courage.’ Ultimately, this paper argues that ‘shame –anger –courage’ can be interpreted as a transfer structure of moral emotions towards justice.

 

Keywords: Plato, Emotion, Anger, Shame, Courage

 

정치사상연구 제31집 1호, 2025 봄 

논문투고일: 2025년 04월 18일    심사개시일: 2025년 04월 29일    심사완료일: 2025년 05월 20일

플라톤의 분노론 아테네인에게 아테네 이방인이 전하는 &lsquo;고귀하고 정당한 분노&rsquo;.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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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I : 10.37248/krpt.2025.05.3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