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잡사(29)/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233회
사당 학동들이 끼고 다니던 교과서는 어떤 책이었을까?
天地(천지)로 시작해서 呼耶(호야)로 끝나는 ‘천자문’은 조선시대 학동들이 서당에서 가장 먼저 접하는 문자학습용 교과서다.
꼬박 1,000개의 서로 다른 글자로 구성된 이 책은 중국 양나라의 주흥사라는 사람이 지은 것인데 책을 만드느라 머리가 하얗게 새었다고 해서 白首文 (백수문)이라고도 불렸다.
‘천자문’은 가장 기초적인 문자교육용 교재이지만 문제점도 만만치 않았다.학동들이 가장 처음 배우는 교과서 임에도 세상의 이치를 이해해야 그 뜻을 알 수 있었고 쉬운 글자부터 가르치지 않고 복잡한 글자를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폐단이 있었다.
이에 많은 유학자들이 새로운 교과서를 직접 집필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을 보면 <사거정의 유합>.<최세진의 훈몽자회>.<정약용의 아학편>.<이승희의 정몽유어>등을 들 수 있다고 한다.
‘천자문’을 미스터 하고 나면 대개가 ‘童蒙先習(동몽선습)’을 배웠다고 한다.
16세기 중엽, 명종 때의 사관으로 바른 소리를 하다 조정에서 물러난 유학자 박세무의 작품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당시의 권력자 이기가 불렀지만 응하지 않고 이 책을 지어 학동을 가르치는데서 그 기쁨을 맛보았다고 한다.
먼저 오륜을 하나하나 숙지하고 총론으로 오륜이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는 원리임을 주장한 것이다.
그 다음은 명나라까지의 중국역사와 단군이래의 조선역사를 약술했다. 큼직 큼직한 글자와 알아 듣기 쉬운 단문 중심으로 책을 꾸며 학동들이 보기 좋게 했다.
비록 일개 유학자가 쓴 책이지만 내용이 좋다고 인정되어 거의 모든 서당에서 ‘천자문’ 다음 ‘동몰선습’을 가르쳤다.박세무가 지접 쓴 원문에는 여자아이들의 교양에도 필요한 여러 책에서 봅아 실었는데 나중에 널리 퍼진 목판본에는 이 부분은 빠져있다고 한다. 대개가 사당에 다니는 학동은 사내아이들이었기 때문 일 것이다.
학문 보다 도리를 먼저 배우다 ~
‘동몽선습’과 비슷한 시기에 아이들이 접하게 되는 책은 ‘明心寶鑑(명심보감)’이다.
원래 명나라의 책인데 고려 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추적 이라는 사람이 원본을 기초로 19편으로 재편집했다고 한다.
‘동몽선습’이 오륜을 중심으로 기초적인 인간의 윤리를 가르치는데 비해 이 책은 사회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도리를 가르치고 있다. 첫 머리에 나오는 ‘계선편’에는 착한 사람에게 복이오고 악한 사람에겐 호가 미친다는 금언들이 들어 있다고 한다.
‘순명편’에서는 생사와 부귀가 다 하늘의 뜻이니 분수에 맞게 살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고
‘정기편’에는 일상생활을 항상 반성할 것과 항상 맑고 청렴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들어 있다고 한다.
아이들이 글자을 읽히고 가장 먼저 접하는 ‘동몽선습’이나 ‘명심보감’은 일종의 도덕.운리책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학동들이 학문을 배우기 전에 먼저 인간의 도리부터 배웠던 것이다.학문을 하든 정치를 하든 바른 마음의 기초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 당시 교육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몇 년씩 중국 역사와 씨름을 하다~~
다음 단계로 배우는 것이 역사다.
과거의 역사를 배워 현재를 되새기고 미래를 만드는 지혜를 잏기자는 취지라고 할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 역사가 아닌 중국 역사에 너무나 치우쳤다는 점이다.
‘사락’과 ‘통감절요’ 가 그 것이다.
비록 두 가지이지만 그 분량이 엄청났다고 한다. 그래서 학동들이 몇 년씩 이 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사락’은 중국 태고부터 송나라 때 가지 역사를 여러 역사책에서 뽑아 지은 책이고 ‘통감절요’는 주나라부터 5대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자치통감’을 강소미라는 중국학자가 내용을 간추려 만든 책이다.
이 두 역사책에는 증국의 대소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앞서 배운 인간의 도리가 구체적인 역사와 사건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익히는 교재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이야기 할 때도 한국사 대신 중국사를 예를 들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실학자들이 등장하면서 이런 경향을 비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소학.효경을 떼면 고교를 졸업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대개 초급과정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234회
우리가 흔히 알고 사서삼경에 접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관문이 있었다.
좀 더 깊은 윤리와 도덕을 배우는 과정인데 바로 小學(소학)과 孝經(효경)이다.
‘소학’은 주자의 제자인 유자징이라는 사람이 지었는데 청소년의 행실에 관한 책이다.
청소하는법. 어른을 대하는 자세.사회샐횔에서 지켜야 할 도리.....
특히 조선 초기 사림파의 우두머리였던 조광조가 적극적으로 보급을 주도했다.
‘효경’은 제목 그대로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지었다고 하나 불확실하다고 한다.
대개 학동들이 이정도 과정을 이수하면 십대 후반이 되었다.요즘 식으로치면 고등학교 졸업생 수준이다.
이정도만 마쳐도 조선시대가 요구하는 기초적인 학문은 익힌 것이고 제법 문자 속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마을 제사 때 축문을 쓰거나 결혼식 때 필요한 사주나 婚書(혼서)를 손으로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제법 아는 체 하며 중국의 고사를 들어 권선징악의 훈계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배운 것은 사회적 통합의 기초인 인간의 도리와 중국의 역사가 전부라는 한계가 있었다. 한국의 역사에는 무지했고 과학기술을 비롯한 실용적인 학문에는 아예 접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서오경은
오늘 날 대학과정이다~~~
초급과정을 마치면 이제 본격적인 학문 즉,과거시험을 보기 위한 넓고 깊은 학문으로 나아간다. 즉 四書五經(사서오경)이다.
율곡 이이는 소학을 마친 사람이 거쳐야 할 단계로 ‘대학’. ‘논어’. ‘맹자’.‘중용’.예기‘.’서전.‘역.’.근사록‘.’가래.‘심경.’‘이정전서.’‘역대정사’‘.’동국제사.‘등을 꼽았다.
오늘날 대학과정 이상으로 해당하는데 여기서 부터는 본인의 열정과 성취에 따라 나아가기도 하고 중도에 포기하기도 한다.대가 시골의 서당에서 배우기는 어렵고 관립학교인 향교나 유학자의 사림학교인 서원에서 배웠다.
말단의 벼슬인 진사나 생원이 되기 위해서는 이 책들을 어느 정도 자기 것을호 삼을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 사회가 무엇을 중요시 하는지 알고 싶으면 아이들의 교과서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조선의 교과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가지 목표를 위한 책들이었다.
그 목표는 바로 유교적 이상 사회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 이에 대항하는 실학사상이 있었지만 그들의 외침은 “ 어느 동네 개가 짓고 있구나~~” 하는 정도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35회
점을 쳐서 수도를 결정하다,
임금을 몰래 미행한 사관,
젖비린내 나는 아이가 관리가 되다,
판서가 졸병과 함께 보초를 서다,
코끼리에게 밟혀 죽은 판서, 서울에 운하를 건설하려고 하다,
노비에게도 봉급과 휴가를 주다, 화폐 위조범을 찾아라,
외국 사신을 놀라게 한 불꽃놀이…….
조선판 ‘세상에 이런 일이’
조선에서 일어난 흥미롭고 놀라운 사건들!
조선 시대라 하면 고루하고 답답한 시대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아주 흥미로운 시기였다. 《조선왕조실록》을 찬찬히 읽다 보면 조선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야말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야사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마치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놀랄 정도의 역사가 가득하다.
《조선을 뒤집은 황당무계 사건들》은 실록 속에 숨어 있는 흥미진진하고 황당한, 때로는 놀라운 역사를 정리하여 담아낸 이야기보따리다.
책에 실린 이야기를 통해 조선의 생생한 역사 속으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그동안 감추어진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아가 조선 시대, 조선 사람들에 대하여 좀 더 폭넓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책의 기본 배경은 조선 건국 직후인 태조 때부터 3대 태종 때까지이다. 해당 시기의 국왕과 왕실, 관료, 백성, 명나라 사신과 관련된 역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후대 왕의 연간에서 관련 일화를 첨부하기도 했다.
왕실에 그런 황당한 일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공신들은 고려 왕실의 후예인 왕씨들이 살아 있는 한 편히 발을 뻗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모반을 도모했다는 허무맹랑한 구실을 꾸며 왕씨들을 일망타진하였다.
조선은 태조 3년 9월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지만, 그 이전에는 계룡산 부근에 수도를 정하려다가 취소하였다.
다시 서울의 무악재 아래 신촌 일대로 옮기려다가 포기한 적도 있다.
한양에 수도를 정한 조선은 ‘왕자의 난’ 이후 개성으로 잠시 옮겼다가 태종 때 한양으로 재천도하였다.
한양으로 재천도하는 결정은 종묘에서 동전으로 점을 쳐서 정했다고 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36회
‘덕수궁’이란 이름을 가진 궁궐은 엄연히 조선 건국 직후부터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1398년 10월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그가 머물던 궁궐을 태상궁이라고 불렀다. 정종 2년 6월에 당시 세자로 있던 이방원의 청에 따라 태상궁의 이름을 덕수궁이라고 고친 것이다.
신생 왕조를 안정시키고 기틀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콧대가 한껏 높아진 무신들을 억누르고 상대적으로 의기소침해 있는 문신들을 다독여 주어야 했다.
무관 출신인 태조 이성계와는 달리 과거에 급제한 문관 출신인 태종은
무관을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
태종은 무예를 한갓 미친 짓이라고 하기도 했다.
문무의 균형을 맞추려는 태종의 현명하고 원대한 정치적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조선 시대에는 재상 등의 고위직을 역임한 신하들이 사망하면 임금이 부의금을 하사하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 주며, 시호를 내렸다.
부의로
1품은 쌀과 콩을 아울러 60~100석,
정2품은 40~50석,
종2품은 30석 이하를 주었다.
1석을 2가마로 치고, 1가마를 80kg으로 환산하면 100석은 약 200가마로 16,000㎏이다.
당시 재상들은 정말 어마어마한 부의금을 하사받았던 것이다.
임금님의 지나친 부의금 때문에 나라 곳간이 거덜 날 정도였다.
사초는 사관이 임금이나 신하들의 언행을 날마다 기록한 것으로,
실록 편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초 자료였다. 사관들이 안심하고 직필하도록 실록을 편찬하기 전까지는 임금을 비롯한 그 누구도 사초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태조와 태종은 굳이 사초를 열람하려다가 신하들과 충돌을 빚었다.
고려 32대 왕으로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폐위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다.
우왕에게는 모두 9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대부분 궁궐에서 쫓겨나 본가로 돌아갔다.
본가로 쫓겨난 왕비 중에는 우왕의 제8비였던 선비 왕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비는 본가로 쫓겨난 뒤 조선이 들어서자 판통례문사를 지낸 유은지와 재혼하였다.
한때 자기가 섬기던 왕의 부인을 아내로 삼은 것은 군신의 예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삼강오륜을 어지럽히는 짓이라는 여론이 거셌다.
태종이 어느 날 포천군에서 사냥을 하였다.
수행하던 사람들 가운데 6명이 숙소에서 쑥갓과 거여목처럼 생긴 독초를 잘못 먹고 갑자기 죽는 일이 벌어졌다.
소식을 들은 임금은 앞으로 자기의 식탁에 쑥갓과 거여목을 올리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37회
조선 초기에는 나이 어린 사람들이 관리가 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는 젖비린내 나는 아이가 관리가 되어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도 요즈음의 인사 청문회와 비슷한 ‘서경署經’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관리 후보자들의 신분, 조상, 과거 합격 여부 등을 조사하여 관리로서의 적합도를 검증하는 제도로, 서경을 통과하지 못하면 관리가 되지 못했다.
조선 초기에는 관청에 출근하지 않고 결근하거나 조퇴하는 관리들이 많았다.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매를 쳐서 징계하였다.
지방으로 전출되면 부모의 병을 핑계로 관직을 내던지고 내려가지 않는 관리들이 많아 큰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임금의 부름에 항상 응할 수 있도록 2품 이상의 재상들은 지방에 머물지 말고 한양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대간들은 한 가지 문제가 생기면 수없이 간언을 올리거나 상소를 올려 임금을 괴롭혔다.
태종은 참다못해 신하들이 세 번 이상 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어이없는 일로 처벌을 받은 관리들이 많았다.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서 본인 이름 앞에 ‘신臣’ 자를 붙이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된 관리가 있었다.
시호를 잘못 정했다가 교수형을 당할 뻔한 관리도 있었다.
문서나 본인 이름에 임금과 세자의 이름을 쓸 수 없어 이름을 두 번 바꾸어야 했던 공신도 있었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저녁 8시경부터 새벽 4시경까지 4대문을 통과하거나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야간 통행 금지령을 실시했는데,
영을 어겼다가 파직된 대사헌도 있었다.
심지어 비가 많이 내려 농민들이 기르는 벼를 떠내려가게 했다는 죄로 수령을 파직하기까지 하였다.
태종 때 공조 전서를 지낸 이우가 일본에서 보낸 코끼리에게 침을 뱉었다가 밟혀 죽었다.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이제현의 증손자 이담이 미친개에게 물려 죽었다.
태종의 딸과 자기 아들과의 결혼을 단호하게 반대했다가 역적으로 몰려 노비로 강등된 전직 군수가 있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문신인 변계량은
20여 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으면서 크게 존경을 받았지만 집에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후처를 방에 가두어 두고 창구멍을 내어 음식을 주거나, 소변도 자유롭게 보지 못하게 하는 등의 박대를 하여 탄핵을 받았다.
궁녀는 일단 궁에 들어가면 왕의 여인이었다.
혹시 궁에서 나가더라도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없었다.
‘왕자의 난’을 치른 공신으로 태종의 총애를 받았던 조영무가 궁녀를 첩으로 삼았다가 많은 비난을 받았다.
조선 왕조는 신분 제도를 엄격히 하기 위하여 노비, 기생 등의 천인과 양인 간의 결혼을 건국 초기부터 강력하게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첨절제사를 지낸 정복주가 본처를 버리고 기생의 딸과 혼인하여 후처로 맞았다가 관직을 잃고 평민으로 강등된 일이 있었다.
조선 군대에는 돌을 던지며 싸우는 척석군이 있었다.
수군에서는 왜구를 추격하기 위해 쾌선 내지 경쾌선이라 불린 작고 빠른 쾌속선을 만들어 실전에 투입하기도 하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38회
재판에 불만을 품은 여인이 임금이 어가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호위병과 부딪힌 여인은 임금 앞에서 크게 부르짖으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임금이 격노하여 곤장을 때리고 지방의 관노비로 삼도록 했다.
조선 초기에는 황제의 색깔이라고 하여 황색과 황색 옷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그 외에 흰색과 옥색, 회색의 옷도 입지 못하게 했다. 황색으로 보자기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다가 귀양을 간 사람이 있었다.
국가 소속의 공노비들은 봉급을 받고 휴가를 가기도 했다.
태종 때 처음 만들어 사용한 지폐인 ‘저화’를 위조하는 사람들이 많아 유통이 부진을 면치 못한 일도 있다.
조선 시대에는 무당에게도 세금을 거두었다.
국가에서 3년마다 한 번씩 무당의 명부를 작성하여 무세巫稅를 징수했다.
무세는 원래 매년 두 번 징수하였는데, 세종 5년부터는 매년 한 차례만 거두도록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경상도나 전라도, 충청도 지방에서 조세로 거두어들인 곡식이나 베 등을 주로 배를 이용하여 한양까지 운반하였다.
이를 조운이라 하였고,
그 배를 조운선이라 불렀다.
조운선이 풍랑을 만나 난파하거나 침몰하여 곡식과 사람을 잃는 사고가 매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태종 3년에는 조운선 34척이 한꺼번에 바다에서 침몰하여 천여 명의 수군이 몰사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한 적도 있었다. 조운선의 침몰은 인명은 물론 국가 재정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는 재난이었다.
조선 시대에 중요한 재산은 토지와 노비였다.
태종 때 남양군에 봉해지고 상의중추원사를 역임한 홍길민은 노비를 무려 천여 명이나 소유하였다고 한다.
노비로만 따지면 그는 아마도 조선 초기 최대의 거부가 아니었을까.
죽은 사람의 생식기를 잘라 가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태종 3년 5월 ,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던 날, 황해도 봉산에서 어떤 남자가 소를 끌고 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 이때 죽은 사람의 손가락과 생식기인 음경을 잘라 간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 시대에도 인명 보호 차원에서 오늘날의 삼심제와 유사한 ‘삼복법三覆法’을 시행하였다.
지방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발생하면 수령이 먼저 심리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다시 심리하여 중앙의 의정부에 보고하며,
의정부에서는 세 번 심리하여 임금에게 세 번 아뢴 다음에 사형을 결정하도록 했다.
비록 사형에 처할 만한 죄를 지었더라도 죄인이 독자면 살려 주는, 이른바
‘독자존류양친법獨子存留養親法’이라는 법규가 있었다.
외아들이 죽으면 늙은 부모를 봉양할 사람이 없어지기에 살려 준 것이다.
조선 시대의 형벌 중에는 곤장으로 죄인을 때리는 장형이 있었다.
장형은 죄의 경중에 따라 최하 60대에서 최고 100대까지 치도록 했다. 때로는 곤장을 60~70대 맞고도 죽는 사람이 있었으며, 100대를 맞으면 대개 사망에 이르렀다.
곤장 100대는 치사율이 거의 100%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사라진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형벌이 많았다.
몸을 여러 조각으로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 외에도 중국 고대에 행해진 오형 중 얼굴 등에 문신을 하는 ‘묵형墨刑’, 즉 ‘자자刺字’와 발꿈치를 베는 비형(?)刑이 행하여졌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39회
전라도 장성의 길가에 큰 나무가 있었다.
사람들은 가지가 많다는 뜻의 ‘백지수百枝樹’라고 불렀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 황엄이 지나다가 그 나무에 비밀스럽게 구리 못을 박아 놓았으나, 고을의 현감 허규가 못을 뽑아 버렸다.
황엄이 나무에 못을 박은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압승술(厭勝術주술을 쓰거나 주문을 외어 음양설(陰陽說)에서 말하는 화복(禍福)을 누르는 일.)을 썼다고 생각했다
원래 중국 사신이 오면 연회를 끝내고 기생으로 하여금 수청을 들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국 사신들은 가까이했던 기생을 못 잊어 사랑에 빠지기도 했고, 급기야는 기생을 중국으로 데리고 가려 하기도 했다.
금강산은 우리나라 최대의 명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금강산의 명성은 예전부터 중국에까지 퍼져서 조선에 오는 명나라 사신들마다 모두 금강산을 유람하려고 안달을 하였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중국에 막대한 공물을 보냈다.
물품 외에도 처녀와 환관 등의 사람들도 보내야 했다.
조선 초기에 명나라에서는 환관으로 쓰기 위해 화자, 즉 고자를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15회에 걸쳐 모두 200여 명의 화자를 바쳤다.
화자 외에 처녀도 보냈다. 중국에 보낸 처녀를 이른바 공녀라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때까지 80년간 모두 50차례에 걸쳐 수천 명 이상의 처녀들이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
조선 시대에는 태종 때부터 세종 때까지 20여 년간 7회에 걸쳐 100여 명의 처녀들이 명나라에 바쳐졌다.
후기에는 인조~효종 때 20여 명의 처녀들이 청나라에 끌려가야 했다.
명나라에 보내는 공물에는 말과 소도 있었다.
태종 4년에는 명나라에서 농삿소 1만 마리를 요구하여 여러 차례로 나누어 보내야만 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숭불 풍조가 남아 궁중에도 부처의 진신 사리 같은 사리가 많았다.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가 이것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였다.
태종과 세종이 궁궐과 각지의 사찰에 보관되어 있던 사리를 모아 모두 1,300여 과를 보냈다.
조선 초기에는 왜구들이 전국의 연안에 출몰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가는 일이 잦았다.
조정에서는 일본에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려고 여러 가지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태종 16년에 돌아온 ‘전언충’이라는 사람은 무려 21년 만에 귀환하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0회(
핼리혜성 오던 날, ~~~
조선 학자들의 붓은 바빴다…
1795년 ‘성변측후단자’ 속 동양 최고 수준 관측
조선시대인 1759년 작성된 ‘성변측후단자’에 핼리혜성 관측 내용이 기록돼 있다.
글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핼리혜성의 모습을 묘사했다.
조선시대에 국가 차원에서 공식 발간된 핼리혜성 관측 기록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는 일이 추진된다.
핼리혜성은 17~18세기에 활동한 영국 천문학자인 에드먼드 핼리가 주기적으로 지구를 찾아온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는데,
비슷한 시기에 지구 반대편에 있는 조선에서도 핼리혜성의 출현 위치와 모양 등을 자세히 관측했던 것이다. 국내 학계에선 2025년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을 목표로 삼았다.
한국천문연구원은
조선의 영조가 재위하던 시점인 1759년에 작성된 국가 천문 기록서적인 ‘성변측후단자’ 속 3건의 혜성 관측 내용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겠다는 방침을 서울 연세대에서 개최한 학술대회를 통해 공식 발표했다.
성변측후단자를 보관하고 있는 연세대와 함께 한국천문연구원, 한국천문학회, 한국우주과학회가 ‘성변측후단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위원회’를 구성한다. 목표로 하는 등재 신청 시점은 2025년이다.
등재가 추진되는 혜성 기록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건 핼리혜성이다.
주기적으로 지구를 찾아오는데다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긴 꼬리가 특징이다.
성변측후단자를 보면 1759년 왕실 산하의 천문 담당 관청인 ‘관상감’에서는 총 35명의 관료가 25일간 핼리혜성을 관측했는데, 이동 경로와 위치, 밝기, 색깔, 형태, 꼬리 길이 등을 자세히 기록했다.
실제로 성변측후단자에는 핼리혜성을 두고 “북극에서의 각거리는 116도였다. 형태나 색깔은 어제와 같았다. 꼬리의 길이는 1척 5촌이 넘었다”는 등의 대목이 나온다.
글뿐만 아니라 혜성 꼬리의 모양, 주변 별자리와의 거리와 위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그림도 실려 있다.
관측자의 이름도 명시돼 있어 신뢰성을 더욱 높인다. 추진위는 동양 최고 수준의 핼리혜성 관측 기록으로 평가한다.
핼리혜성은 근대에 활동했던 영국 천문학자인 에드먼드 핼리의 이름을 따 명명됐다.
에드먼드 핼리는 1705년 발표한 자신의 저서를 통해 “과거의 관측 기록을 봤을 때 1682년 하늘에 출현한 혜성이 75~76년 뒤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정한 주기를 두고 지구 근처로 찾아오는 혜성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관측 기술이 충분치 않았던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핼리혜성이 1758년 12월 말부터 하늘에서 관측되면서 그의 예측이 맞아 떨어졌다는 점이 증명됐다.
성변측후단자의 존재는 당시 유럽뿐만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 있던 조선의 학자들도 같은 시점에 핼리혜성을 주목하고 있었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형목 유네스코 등재 추진위원장(전 천문연구원장)은 이날 학술대회를 통해 “성변측후단자는 장기간에 걸쳐 천체의 특별한 현상을 기록한 것”이라며
“이번 혜성 관측 기록은 세계 과학사에서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한국은 훈민정음, 난중일기 등 16건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1회(12.24)
수양대군에 반발하고
<죽음 선택한 대쪽 선비, 허후·허조 부자>
1453년(단종1) 10월 10일, 수양대군의 칼부림이 시작됐다. 좌의정 김종서가 수양대군의 기습을 받아 죽고 영의정 황보인과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등이 입궐하다가 궁문에서 철퇴를 맞아 죽었다.
의정부 좌참찬 허후(許후, 미상~1453)는 계유정난의 피바람 속에서 살아남았다.
허후의 호는 일영(一寧) 시호는 정간(貞簡), 본관은 하양이다.
세종과 문종, 단종에 걸쳐 좌부승지 예조판서 우참찬을 지냈다. 아버지는 문경공(文敬公) 경암(敬庵) 좌의정 허조(許稠)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박경의 딸이다.
허후는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세종대에 좌부승지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문종대에 들어와서 우참찬에 임명돼 김종서 정인지와 함께 ‘고려사’ 편찬에 참여했다.
문종이 승하할 때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와 함께 고명을 받들어 어린 임금 단종을 보좌했다.
그는 이른바 ‘고명대신파’였다.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정변을 주도한 ‘대군파’들이 살려둘 리가 없었는데 그는 살아남았다.
그가 ‘살생부(殺生簿)’에서 빠진 것은 수양대군이 고명사은사로 명나라로 갈 때 했던 진언 때문이다.
단종 즉위년 9월, 수양대군이 고명사은사로 명나라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허후는 수양대군을 만났다.
“지금 임금이 어리며 나라가 혼란스러워 대신들이 왕을 따르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도 안정되지 못합니다. 대군께서 나라의 기둥이거늘 이 시국에 명나라로 떠나신다는 말입니까” 하고 만류했다.
이 말이 나중에 허후를 살렸다.
수양대군은 허후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단종의 측근 중에서 인품이 있는 중신 한 명 정도는 품고 싶었다. 수양은 명나라로 떠나기 전 자신에게 나라 걱정을 하던 허후를 떠올리며 살생부에서 그의 이름을 뺐다.
허후는 원칙주의자였다.
강직하고 곧은 성격이 아버지 허조를 닮았다.
세종 때의 일이다. 허후는 왕의 비서인 승지였다.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이 악공(樂工)의 딸, 기녀를 첩으로 삼았다.
세종이 이를 허락했다. 허후는 단호히 말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아들을 옳은 방향으로 가르쳐 불의에 빠져들게 하지 않게 한다 하였사온데 마음대로 불의를 감행하고 음란한 행동을 하는 것은 방관한다면 왕이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라며 따지고 들었다.
결국 세종은 ‘이미 허락해놓고 즉시 버리라고 명한다는 것은 내 차마 하지 못하겠다. 앞으로 생각해 보겠다’며 물러섰다.
한번 뱉은 말을 거둬들일 수 없으니 아비의 입장, 왕의 체면도 좀 봐달라는 뜻이었다.
피바람이 그친 뒤 계유정난 성공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정난으로 단종을 무력화 시킨 수양대군은 영의정에다 주요 판서 자리를 몇 개씩이나 차지하며 국정의 전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술이 돌고 풍악이 울렸다. 누군가의 말끝에 재상 정인지와 한확 등이 손뼉을 치고 기뻐하며 웃었다.
허후는 내내 우울한 낯빛을 드러내며 고기를 먹지 않았다. 고기가 죽은 선배 동료들의 살점 같았다.
수양대군이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물었으므로 집안에 제사가 있는 날이라고 핑계를 댔다. 수양은 허후의 속내를 짐작했지만 더 이상 따지지도 묻지도 않았다.
얼마 뒤 김종서와 황보인의 머리를 효시하고 그 자손을 죽이라는 명이 떨어졌다. 왕명이었지만 수양대군이 배후에 있음을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었다.
허후가 나섰다. 목숨을 내건 진언이었다.
“이 사람들이 무슨 큰 죄인이라고 목을 내걸어 보이며 처자식을 죽이기까지 한다는 말입니까. 김종서는 저와 교류가 소원하여 그 마음을 잘 알지 못하지만, 황보인이라면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알고 있으니 모반할 리가 만무합니다”라며 지나친 처벌에 반대했다.
수양대군이 노기를 띠며 말했다.
“그대가 그날( 계유정난 성공 축하연회) 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은 그 뜻이 진실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구나.”
허후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정의 원로가 같은 날 다 죽었습니다. 저는 살아 있는 것으로도 족하거늘 차마 고기를 먹겠습니까”
허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수양대군은 크게 노했으나 그의 품성과 능력을 아껴 죽이지 않았다.
허후의 이 말은 정난 주도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샀다.
이계전이 끊임없이 탄핵했다.
결국 허후는 거제도로 유배를 떠났다.
그러나 명줄을 노리는 칼날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허후는 결국 유배지에서 교살당했다. 축하연회 이야기는 남효온이 쓴 ‘추강집’ ‘허후전’을 다듬어 정리했다.
허후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하양허씨 종친회가 발간한 ‘정간공허후선생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자에 소개된 ‘정간공 허후선생 실기’ 중 일부분이다.
정인지가 백관을 대동하여 어전에서 안평대군을 사사코자 주청하자
공(허후)은 상감에게 좌의정 정인지를 삭탈관직하옵시고 금부에 가두심이 지당한가 하오! 인지는 신자(신하)로 지친을 모함함은 관기를 문란케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결국 공(허후)은 거제도에 귀양 가고 우의정 정분,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 안평대군은 귀양지에서 사약을 내리고 공께서도 1456년* 11월11일 교형에 처해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ㅡ 사전에는 1453년 사망으로 돼 있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1회
생식기를 적출당한 조선 여성~~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에 의해 생식기를 적출당한 조선의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명월원 간판 출신 기생이었다.
당시 부자들과 고위급 관리직 친일파들이 즐겨 찾는 기방의 기생이었던 것이다. 어쩌다 고급 기방에서 최고로 잘 나가던 기생명월이 일본에게 생식기를 적출당하는 비극을 겪은 것일까?
1915년 명월관이라는 요정이 있었는데, 당시 최고의 요정이었던 곳으로 가장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난 기생들이 모여있던 당시 가장 핫한 기방이었다.
때문에 경성의 부자들과 조선총독부 관리 고위급 친일파 등이 자주 이곳을 찾아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고 국사를 논하고 했었다.
바로 이 명혈관에서도 가장 잘나가는 기생은 다름 아닌 기생명월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홍련이라고도 불리고 있다고 했다.
때문에 많은 남성들이 명월과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 했는데 불행히도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이 된다.
명월과 잠자리를 가진 남성들이 연달아 폭상사로 사망을 하게 되고 사망한 남성들 가운데는 일본인 고급 인사도 있었던 터라 그이는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되어 많은 남성들이 명혈과 잠자리를 상상하게 된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일제에 의해 고문당한 명월 당시 남성들은 그녀의 잠자리가 얼마나 어떻길래 복상사를 하느냐면 너도 나도 기생명월을 찾았지만 불행히도 연속으로 고위급 관리주들이 복상살을 당하자 명월은 결국 일본 군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게 된다.
그녀가 독립운동을 하고 있어 일부러 일본인 고위 관리직을 잠자리로 끌여들여 주겠다는 것인데 칼로 몸을 찌르거나 목을 졸라 죽인 것도 아니었는데 단지 여러 명 복상사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한 것이다.
이 때문에 기생명으로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삼십 대 이른 나이에 요절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에서 악행을 그치지 않고 도대체 그녀의 생식기가 어떻길래 남자들이 일본 고위 관료들이 복상사를 당하는지 연구한다며 그녀의 생기를 작출한 뒤 포르말린 용액에 넣어 보관을 했다.
이후 일본이 패망하면서 우리나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넘어오게 된다.
70년 동안 국과수에 보관되어 있다.
2010년에서야 가치가 없기 때문 그 행위 자체가 반인륜적이고 국격을 손상시킨다며 폐기가 된다. 최소한의 인간의 전엄성도 지키지 못하고 살아서도 죽어서도 고통을 받아야 했던 기생명의 이야기는
일본의 야만스러움과 일제강점시대의 잔혹한 역사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2회
수양대군에 반발하고
<죽음 선택한 대쪽 선비, 허후·허조 부자>
1453년(단종1) 10월 10일, 수양대군의 칼부림이 시작됐다. 좌의정 김종서가 수양대군의 기습을 받아 죽고 영의정 황보인과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등이 입궐하다가 궁문에서 철퇴를 맞아 죽었다.
의정부 좌참찬 허후(許후, 미상~1453)는 계유정난의 피바람 속에서 살아남았다.
허후의 호는 일영(一寧) 시호는 정간(貞簡), 본관은 하양이다.
세종과 문종, 단종에 걸쳐 좌부승지 예조판서 우참찬을 지냈다. 아버지는 문경공(文敬公) 경암(敬庵) 좌의정 허조(許稠)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박경의 딸이다.
허후는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세종대에 좌부승지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문종대에 들어와서 우참찬에 임명돼 김종서 정인지와 함께 ‘고려사’ 편찬에 참여했다.
문종이 승하할 때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와 함께 고명을 받들어 어린 임금 단종을 보좌했다.
그는 이른바 ‘고명대신파’였다.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정변을 주도한 ‘대군파’들이 살려둘 리가 없었는데 그는 살아남았다.
그가 ‘살생부(殺生簿)’에서 빠진 것은 수양대군이 고명사은사로 명나라로 갈 때 했던 진언 때문이다.
단종 즉위년 9월, 수양대군이 고명사은사로 명나라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허후는 수양대군을 만났다.
“지금 임금이 어리며 나라가 혼란스러워 대신들이 왕을 따르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도 안정되지 못합니다. 대군께서 나라의 기둥이거늘 이 시국에 명나라로 떠나신다는 말입니까” 하고 만류했다.
이 말이 나중에 허후를 살렸다.
수양대군은 허후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단종의 측근 중에서 인품이 있는 중신 한 명 정도는 품고 싶었다. 수양은 명나라로 떠나기 전 자신에게 나라 걱정을 하던 허후를 떠올리며 살생부에서 그의 이름을 뺐다.
허후는 원칙주의자였다.
강직하고 곧은 성격이 아버지 허조를 닮았다.
세종 때의 일이다. 허후는 왕의 비서인 승지였다.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이 악공(樂工)의 딸, 기녀를 첩으로 삼았다.
세종이 이를 허락했다. 허후는 단호히 말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아들을 옳은 방향으로 가르쳐 불의에 빠져들게 하지 않게 한다 하였사온데 마음대로 불의를 감행하고 음란한 행동을 하는 것은 방관한다면 왕이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라며 따지고 들었다.
결국 세종은 ‘이미 허락해놓고 즉시 버리라고 명한다는 것은 내 차마 하지 못하겠다. 앞으로 생각해 보겠다’며 물러섰다.
한번 뱉은 말을 거둬들일 수 없으니 아비의 입장, 왕의 체면도 좀 봐달라는 뜻이었다.
피바람이 그친 뒤 계유정난 성공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정난으로 단종을 무력화 시킨 수양대군은 영의정에다 주요 판서 자리를 몇 개씩이나 차지하며 국정의 전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술이 돌고 풍악이 울렸다. 누군가의 말끝에 재상 정인지와 한확 등이 손뼉을 치고 기뻐하며 웃었다.
허후는 내내 우울한 낯빛을 드러내며 고기를 먹지 않았다. 고기가 죽은 선배 동료들의 살점 같았다.
수양대군이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물었으므로 집안에 제사가 있는 날이라고 핑계를 댔다. 수양은 허후의 속내를 짐작했지만 더 이상 따지지도 묻지도 않았다.
얼마 뒤 김종서와 황보인의 머리를 효시하고 그 자손을 죽이라는 명이 떨어졌다. 왕명이었지만 수양대군이 배후에 있음을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었다.
허후가 나섰다. 목숨을 내건 진언이었다.
“이 사람들이 무슨 큰 죄인이라고 목을 내걸어 보이며 처자식을 죽이기까지 한다는 말입니까. 김종서는 저와 교류가 소원하여 그 마음을 잘 알지 못하지만, 황보인이라면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알고 있으니 모반할 리가 만무합니다”라며 지나친 처벌에 반대했다.
수양대군이 노기를 띠며 말했다.
“그대가 그날( 계유정난 성공 축하연회) 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은 그 뜻이 진실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구나.”
허후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정의 원로가 같은 날 다 죽었습니다. 저는 살아 있는 것으로도 족하거늘 차마 고기를 먹겠습니까”
허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수양대군은 크게 노했으나 그의 품성과 능력을 아껴 죽이지 않았다.
허후의 이 말은 정난 주도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샀다.
이계전이 끊임없이 탄핵했다.
결국 허후는 거제도로 유배를 떠났다.
그러나 명줄을 노리는 칼날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허후는 결국 유배지에서 교살당했다. 축하연회 이야기는 남효온이 쓴 ‘추강집’ ‘허후전’을 다듬어 정리했다.
허후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하양허씨 종친회가 발간한 ‘정간공허후선생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자에 소개된 ‘정간공 허후선생 실기’ 중 일부분이다.
정인지가 백관을 대동하여 어전에서 안평대군을 사사코자 주청하자
공(허후)은 상감에게 좌의정 정인지를 삭탈관직하옵시고 금부에 가두심이 지당한가 하오! 인지는 신자(신하)로 지친을 모함함은 관기를 문란케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결국 공(허후)은 거제도에 귀양 가고 우의정 정분,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 안평대군은 귀양지에서 사약을 내리고 공께서도 1456년* 11월11일 교형에 처해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는 1453년 사망으로 돼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