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잡사(35)/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3회
조선 중기 문신 이정형의 ‘동각잡기’는
이성계의 인품에 대해 부하들을 예의로 대접하고 존중했기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이성계의 부대에 속하기를 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는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겸손으로 주변에 신망을 얻는 좋은 인품을 가졌다.
그에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다.
그 매력의 핵심은 포용력과 소통 능력으로 보인다.
당시 신진 사대보들은 개혁 의지는 강했지만, 권문 세력에 밀려 힘이 없었을 뿐더러, 기회도 잡기 어려웠다.
그때 그들의 눈에 띈 사람이 힘과 인품을 갖춘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젊은 신진사대부들과 나이가 많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났음에도 그들의 생각을 잘 받아들이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포용력과 소통 능력을 보여줬다 또한 자신은 부족한 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통해 채우려는 의지도 있었다.
이성계는 무장으로서의 능력도 출중했으며 야심도 있었다.
한마디로 이성계의 개인적인 자질은 뛰어났다.
이러한 부분이 최영과 조민수 등 경쟁자들을 제치고 젊은 개혁세력들의 추대를 받은 결정적인 이유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들로서의 중요한 덕목이 책임감과 선택 상황에서 냉정함에는 의문의 부호가 남는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꼭 해야 할 일은 주변의 평가와 관계없이 밀고 나가야 한다.
평소 주변으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갖고 싶었던 이성계는 정몽주와의 제거에 반대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지 않으면 이성계파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모두가 역적이 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욕을 먹더라도 끝까지 목표 중심으로 판단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또한 사적인 감정을 앞세워 후계자를 선정한 것은 그가 보여준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실망스러운 결정이었다.
큰 산을 넘고 이제 내리막에서 돌부리에 걸지 않도록 시야를 분명히 해야 할 텐데 명분도 설 리도 없는 선택으로 왕조를 분열과 혼란으로 위태롭게 했다.
이후 이방원을 용서하지 않고 미워했으며 태종이 즉위한 후에도 함흥 세력과 규합을 통해 아들과 반목하는 모습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이것이 정말 리더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출중한 능력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리더의 자리에 올라 대업을 ㅈ달성했지만 번영을 위한 그림을 그리지 못해 쓸쓸한 노년을 보내야 했던 조선 창업자 이성재계
만약 그가 미래를 바라보고 준비하는 리더였다면 조선의 창업과 새로운 역사의 시작은 더욱 빛을 발했을 것이다.
태조 실록에 기록된 그의 뼈아픈 실책에 대한 회한을 보자.
“내가 일찍이 나라를 세우고 난 후에 장자長子를 버리고 유자幼子를 세워 이에 방석으로 세자를 삼았으니 이 일은 다만 내가 사랑에 빠져 의리에 밝지 못한 허물일 뿐만 아니라
정도전 남은 등도 그 책임을 사피辭避할 수 없을 것이다.”
<태조실록 7년 8월26일>
태조 7년 8월 26일,
태조 이성계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사랑하는 아내의 욕구 때문에 판단력을 상실한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정도전은 자신의 국가 운영 철학인 재상 정치를 펼치기 위해 어린 방석을 차기 왕으로 세우려는 의도를 이방언을 포함한 왕자들이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생각했어야 했다. 그리고 조선 건국의 가장 큰 지분을 가진 방언의 능력과 야심을 과소평가한 것이 너무나 뼈아픈 실책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4회
태종 이방원~
태조는 토산으로 유배를 간 자신의 아들 방간을 한양으로 불러 올리라고 욕구했지만, 태종 이방원은 대신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들어주지 않자 옥새를 들고 함흥으로 간 것이다.
그리하여 조사의 진영에 가담한다.
<태종실록>에는
당상관 정용수와 신효창이 태상왕을 호종(임금이 탄 수례 호송)으로 동북면에 가서 조사위와 역모에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태조를 설득하고 반란군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사자使者들을 계속해서 보냈지만 하나같이 반란군에 의해 죽거나 쫓겨 오게 됐다 하여 ‘힘흥차사’ 말이 생겨났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야사의 내용일 뿐이다
아버지의 환궁 소식을 들은 태종은 반가운 마음으로 살곶이(현재의 왕십리 부근)로 마중을 나갔다.
이곳에 도착한 태조는 아들 보자마자 화살을 들어 쏘았고 날아온 화살은 땅에 박혔다 아마도 마지막 화살로 아들에 대한 징계를 끝내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화살이 꽂혔다는 의미가 전해지면서 이곳이 지금의 살곶이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함께 조선을 세운 아버지 태조와 아들 태종은 관계가 회복되지 못하고 끝까지 반목한다.
아버지를 향한 분하고 섭섭한 마음이 강한 만큼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 노력했다. 노력했던 아들이었으나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태종즉위 일등공신 아내인 원경향후였다.
세종의 어머니로서 세종실록에는 ‘어려서부터 맑고 아름다우시며 총명하시고 인자하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인 민재는 고려의 명성이 있는 여흥 민씨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은 사람으로 외손자인 세종대왕의 천재성을 외가 쪽 영향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이방원님은 혼인 당시 민재의 가문은 고려의 명문가로 충선왕 때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 15 가문에 들 정도로 명문가였다.
원나라 관리를 지낸 이성계의 가문에는 민씨와의 혼인이 가문의 격을 가문의 격을 높이는 반가운 일이었다.
민재는 이방원의 범상치 않음과 이성계의 미래를 보고 혼인을 결정했다.
그는 사위 이방원의 출세를 위해 도울 만한 사람들을 물색하고 관계를 연결해 준다. 대표적으로 하륜을 이방원에게 소개해 붙여준다.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이방원에는 하륜이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하륜은 이방원의 핵심 참모 역할을 했다.
태종은 결혼 초에는 아내 원경왕후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즉위 후 태종이 후궁을 들이며 부부관계의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생에서 과부까지 귀천을 따지지 않고 20년간 19명의 후궁을 두었기 때문이다. 왕권의 안정을 위해서 후손이 많아야 한다는 것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실제로 조선 왕 중 자녀가 가장 많은 왕이 태종이다.
하지만 원경왕후는 배신감이 들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던 원동정은 원경왕후 민씨의 처남들이 활약했기 때문이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먼저 기획하고 실행에도 옮기도록 한 사람이 원경왕후와 민무질이었던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5회
<태조실록>에는 원경황후와 동생 민무질이 상의 후 노비 소군을 궁으로 보내 이방원을 급히 귀가하도록 해서 함께 거사에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환수령이 내려진 무기들을 친정집에 숨겨놨다가 중요한 순간 내놓은 사람도 원경황후였다. 제2차 왕자의 난 때도 부인 원경황후가 이방원에게 갑옷을 입히며 대의를 따라 군사를 움직이도록 권면勸勉했다고 <정종실록>을 전한다.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 모두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이 선봉에서 병사을 이끌었다,
이방원의 거사에는 처가 식구들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그렇기에 원경하고는 태종을 왕으로 세운 절대적 지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종 직의후 서로 서로 입장이 다르기에 갈등이 시작됐다.
민 씨 형제들을 매형을 도와 거사를 일으키는 일등공신으로 자신들도 권력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종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이 임금으로 즉위함으써 그들의 임무는 끝이 났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강력한 왕권을 세워 국가를 안정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졌기에 권력의 배분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
결국 어린 세자인 양녕대군을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 한다는 이유로 4명의 처남을 모두 역모로 죽이게 됐다.
자신이 왕이 되기까지 가장 큰 공을 세운 처남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외척이나 공신들의 죽음은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이 일어난다 .
이를 태종 이방원의 잔인함으로 보기보다는 새로운 권력 창출로 나타나는 구조적인 문제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당시 형제들이 새 정권의 공신이며 왕실의 사돈으로 그들의 세력을 확대한다면, 태종과 왕조에 엄청난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병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태종은 가볍게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태종은 자신의 계모인 강 씨가 아버지를 움직여 막내 방석을 세자로 세운 사건 즉 외측의 전횡을 경험했기에 더욱 경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많은 피를 모았지만 태종은 왕권 안정이라는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태종의 장인 민재가 아들 민무구.민무질 등 두 아들을 항상 이르기를 “너희들은 교만하니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였으니......” 라고 <태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가문이너무 성하면 화를 입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
하지만 이미 권력 맛을 본 아들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이 어리석은 권력의 끝자락에 항상 불행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때가 되었을 때 그 힘을 놓아야 하는데 화를 입는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6회
태종은 이러한 과정을 겪고 왕이 된 만큼 백성들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고 싶었다 .
그래서 능력 있는 인재들을 필요로 했다.
문과와 무과 시험을 통해 발탁하는 식년 시 외에 각 지방 관찰사들이 우수한 인재를 중앙에 추천하는 제도인 ‘도천법道薦法’으로도 인재들을 등용했다.
우리가 잘 아는 장영실도 도천법에 의해서 발탁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종은 천문과 기상이변에 관심이 많아서 장영실과 같은 영재들을 발탁해 연구를 장려했고 지원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태종은 천둥과 벼락을 매우 두려워했다. 자신에게 천벌이 내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해는 가뭄이 심각해 논이 갈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늘이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울면서 자책하기도 했다고 한다.
왕위에 오르기까지 수차례 정변을 느끼며 피를 본 도덕적 양심이 죄책감으로 형성돼 하늘을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
태종은 적장자 승계 원칙을 지키고 싶었다 .
아버지 이성계의 무원칙이 가져온 아픈 역사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태종 2년 9살의 어린 이제(양녕대군)을 원자로 책봉했다. 사실상은 세자 책봉이다.
그러면서 세자를 교육하기 위해 경승부를 설치했다.
태종 이방원은 문과에 급제한 사람답게 학습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태종실록>은 주상이 배우기를 좋아하며 게으르지 않고 매일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역사서와 경서를 많이 읽었는데 이는 현실 정치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들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자 또한 학문적으로 부족함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한 태종은 좋은 스승들을 붙이며 세자가 잘 성장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들들의 성장 과정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문제가 많은 양녕대군과 비교되는 셋째, 충녕대군의 빼어남을 보면 혼란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태종은 자신이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며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으므로 제대로 된 나라를 세워야 자신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문제가 많은 양녕대군이 보위를 물려받아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게 된다면 그동안 흘린 피값을 갚을 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1418년,14년 동안 차기 왕으로 내정돼 있던 세자 양녕대군이 폐위됐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 여자 문제로 매년 문제를 일으키며 아버지를 실망시켰던 양녕대군은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태종 15년 세자 양녕대군이 만나던 기생 초궁장이 상왕 정종의 옛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초궁장을 궁에서가 내쫓았다.
하지만 세자는 사가까지 나가 초궁장과 어울렸다 .공부에 소홀하고 여색과 잡기에만 관심을 두는 세자를 보고 걱정하던 태종은 세자의 선생인 이래와 변계량를 향해
“경들은 무엇이 두려워 세자를 올바르게 훈육하지 못하는 가?” 라고 진심어린 충고까지 했다.
이에 세자를 찾은 스승 이래는 “전하의 아들이 저하뿐인 줄 아십니까? ”라고 진심 어린 충고까지 했다.
이러다 세자 자리에서 폐위되고 동생의 왕이 될 수 있다는 분명한 경고를 한 것이다. 그럼에도 양녕대군은 바뀌지 않았고 여자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뿐 만 아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7회
은퇴한 관료 곽선의 첩인 어리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첩도 엄연히 부인이므로 유교 사회의 조선에서는 불륜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태종은 노발 대발하며 종묘에서 반성문을 읽도록 했는데 세자는 1년 만에 다시 어리를 데리고 와 임신까지 시키면서 일이 커지게 된다.
이에 세자를 구전으로 쫓아 냇지만 적반하장격으로 세자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면 항의했다.
“전하殿下의 시녀侍女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인 것이겠습니까? (중략) 지금에 이르도록 신臣의 여러 첩을 내보내어 곡성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하니 어찌 스스로에게서 반성하지 않으십니까?(중략) 전하는 어찌 신이 끝내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이 첩妾 하나를 금하다가잃은 것이 많을 것이오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
< 태종실록. 태종 18년 5월 30일>
편지를 받은 태종은 세자를 교체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종신들을 불러 편지를 보여줬다.
편지 항명 3일 후인 6월 2일 양녕대군은 세자에서 폐위되고 신하들과 논의 후 택현을 통해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운다.
이후 태종은 2 달 만에 세자에게 왕위를 계승한다.
태조와 태종의 시대가 칼로 정권을 유지한 과적이었다면 이후로는 힘이 아닌 가치로 나라가 운영되는 안정된 나라가 필요했다.
태종이 충녕을 선택한 것은 역사를 위한 현명한 선택이었으며 피로 세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지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태종이 충녕대군에게 마음이 많이 움직였음을 보이는 주로 일화가 있다.
1415년 충녕대군은 우의정 남재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남재는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군께서 학문이 출중하시니 제가 기쁩니다” 라고 말을 했다.
왕조 국가에서 이 말은 목숨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상당히 위험한 말이었다.
이 말을 들은 충녕대군의 반응은 어땠을까?
당연히 펄쩍 뛰며 남재를 꾸짖었어야 자신에게 미칠 화를 덜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충녕대군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태종이 이 사실을 듣고
남재를 처벌하거나 정치적으로 사건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태종실록>에는 임금이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길
“과감하구나 그 늙은이가.....”라고 했다고만 기록만 돼 있다.
어찌 보면 역모에 가까운 이 발언을 작은 해프닝으로 넘겼다는 모습을 보면 많은 신하들이 태종의 바뀐 의중을 알 수 있었지 않았을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8회
남재의 놀라운 발언,
충녕대군의 위험한 대처.
태종의 뜻밖의 반응
기록에는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이 세 사람은 같은 뜻 아래서 충분한 교감이 이루어졌기에 이러한 행위들이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고 두 달 만에 왕위에 오른 것을 보면 사전에 준비된 것으로 봐야 한다. 리더는 길러지는 것이라는 철학을 가진 태종은 자신의 후계를 차근차근 그리고 든든히 준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버지 태조에게서 배운 반면교사였을 것이다.
1418년 태종은 22살이 된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그러면서 세종의 직위를 명나라에 허락받기 위해 사헌사로 보내는데 세종의 장인인 심온이 낙점됐다. 태종은 심온에게 영의정을 제소했다. 그때 심온은 나이 44세였다.
세종의 장인이며 조선 최고의 직위인 영의정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심원의 앞길은 영광만이 기다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돌아오자마자 반역 혐의로 체포돼 의금부로 압송됐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태종은 세종에게 선의하고 물러났음에도 병권을 놓지 않고 군사에 관한 일은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이때 병조참관(국벙부 차관) 강상인이 군사 문제를 세종에게 보고하면서 사건이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태종은 강상인에게 압슬형(사기 조각위에 무릎을 꿀리고 무거운 돌덩이로 무릎을 누르는 고문)을 가해 그 배후가 누구인지를 묻게 되고 고문을 못 여긴 강상인의 입에서는 결국 심온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
심온이라 답을 정해놓고, 벌인 태종의 표적 수사다.
<태종 실록>은
“심온이 억울함에 3차례나 압슬형을 받고도 굴복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외척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태종이 세종의 집권을 위해 너무나 커버린 장인세력을 정리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강상인을 고문하고 얻어낸 제목이라는 것이 고작 군사에 관한 일은 한 군대에서 관장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 말 한마디로 왕의 장인을 역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또한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이 못 되어 수상직위에 오르게 되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여 이날 전송 나온 사람으로 온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심온이 왕의 장인이라는 이해를 믿고 권세를 부린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겠으나 실록에는 심온은 인품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자기를 낮추고 올바르지 못함을 경계한 겸손한 원칙주의자로 기록하고 있다. 결국 태종은 심온의 처와 4명의 딸들을 천민으로 만들고 세상까지 몰수한다. 불과 몇 달 전에 사위가 왕이 되고 딸이 왕비가 됐던 집안의 하루아침에 노비 신세를 전락해 버렸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했을까?
태종이 즉위할 때 아버지 이성계는
“강명한 임금이니 권세가 반드시 아래로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은 신하들이 권력을 갖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
아버지가 본 아들의 성품은 틀리지 않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9회
태종의 이러한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조선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역사를 빛낸 세종의 태평성대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책임감이 떨어지는 리더는 자신의 욕먹는 일에 앞장서지 않는다. 누군가가 해야 하지만 그 그냥 좋은 사람으로만 남고 싶은 그에게 성과라는 결과물도 없다.
목표가 분명한 리더는 자신이 욕망 욕먹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과를 보상해도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사람이 있으니 당시 태종은 그런 희생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자신만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태종의 리더십을 도덕적으로 모두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목적이 그럴싸 해도 과정이 올바르지 못하고 억울한 희생양을 재물로 삼는다면 더욱 문제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왕조를 안정적 기반 위에 올려놓은 태종의 선택이 주요했음은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태종은 왕권 강화만이 사직을 안정시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들을 철저하게 그리고 냉혹하게 숙청을 단행했다.
자신이 왕좌에 앉을 수 있도록 도운 최고의 공신들인 처남들과 최측근인 이숙번 그리고 사돈인 심온에 이르기까지 왕권 강화라는 한 가지 목표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제거했다.
그렇다면 태종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을까?
태종의 또 다른 이면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태종은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권력층을 확실하게 제거했지만, 위협 요소가 아닌 인재들에게는 관대했다.
대표적인 예가 정도전의 아들을 등용한 것이다. 자신이 제거한 정적이었지만 몇 년 후 그 가족들을 복권시켜주고 그의 아들을 등용해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에까지 오르게 했다.
또한 정도전의 증손자는 세종대에 우의정까지 오르는 것을 보면서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넷째, 형 이방간은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자신을 제거하려 했다. 차기 왕을 죽이기로 한 역모로 얼마든지 그를 죽일 수 있었다.
실제로 측근들은 불씨를 없애야 한다며 방간을 죽여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태종은 끝내 방간을 죽이지는 않았다. 피를 나눈 친형제였기 때문에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복동생들을 죽인 것과는 다르게 자기의 혈육에 대한 면모를 보인 것을 알 수 있다.
큰아들 양녕대군이 수년간 여자 문제로 계속 말썽을 부렸지만 태종은 그때마다 달래고 타이르면서 어떻게든 마음을 잡아보려고 노력했다.
양녕대군은 할아버지 태조와 아버지 태종의 기질을 많이 닮아 무예를 좋아하고 활쏘기 위한 사냥을 즐기는 호박한 성격이었다.
양녕대군은 원래 넷째, 아들이었지만 위로 세 아들이 어릴 적에 모두 사망하여 장남이 된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태종은 어려서부터 그를 무척 아끼고 예뻐했다.
태종은 결국 양녕대군을 폐위시켰지만 국가 경영에는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 아버지로서의 못난 장남을 보며 상당히 마음을 아파했다.
그리고 세종에게 양녕대군의 안위에 대한 특별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00회
태종의 자식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태종은 마흔이 다 되어 막내 성년대군을 낳는다 늦둥이를 아들을 보며 태종과 원경황후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애지중지 아들을 키웠다.
하지만 성령대군은 14살이 되던 해 홍역으로 사망하게 된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태종은 너무 괴로워했고 35일간이나 고기 반찬을 먹지 않으며 죽은 아들을 그리워했다.
이렇듯 태종은 자기 피붙이 자식들에게는 무척 약했다. 냉철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태종의 이면이다
태종은 정적들 뿐만 아니라 옆에서 함께 했던 측근들마저도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무서우리만큼 냉정하게 숙청한 사람이다.
하지만 여러 차례 피바람이 분 것치고는 그가 죽인 사람으로서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정적이라 해 그 가족들과 아들까지 모조리 죽이는 무조건적인 살육이 아니었다 .
자신의 목적에 맞지 않는 대상을 핀셋으로 골라내듯 제거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도전 시 형제들이 왕권 강화라는 목적의 걸림돌에 대한 인물들을 제거했으며 세종의 장인은 사실은 죄가 없으나 후일 세종이 치세에 방해가 될 것으로 여겨 제거한 것이다.
잔인한 살육을 통해 세력을 초토화시킨 것이 아니라 목표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선을 그으며 불필요한 살인은 자제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목적에 맞는 행위라 할지라도 모두 정당화될 수는 없다. 심온과 그 가족의 경우처럼 너무 억울하게 시행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고려의 중심 정몽주의 조선 창업에 최대 공신이었다는 정도전을 죽이고 왕좌에 오르기 위해 두 동생을 죽인 데서 알 수 있듯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함을 보여줬지만
혼란의 시대에 행동으로 대응하고 과감한 선택으로 자신의 권력을 구축해간 인물이기도 하다 태종은 행동하는 리더였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 행동은 그 시기를 놓치면 성공할 수 없기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과감하게 계획하고 실행하고 성과를 만들어냈다 또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빠르게 판단하고 주저없이 실행했다.
그 결과 조선 3대 임금이 된 것이다. 실패하는 리더의 대부분은 단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실행력 부족’이라고 《포춘》자는 소개한다.
리더의 자리는 결정하는 자리다.
‘디시즌 메이커라는 말이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
라더가 결단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며 행동을 하지 못한다면, 어떤 결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변화가 빠른 현대사회에서는 과감하게 행동하는 자기 성과를 빨리 도달하게 될 것이다.
좀 더 먼 시각으로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왕
왕조를 안정시키기 위해 후계를 미리부터 준비시키고 학습시킨 왕
후계의 위험을 미리 제거해 버린 악역을 마다하지 않은 아버지
태종은 자신이 건재할 때 후계자를 선정하고 훈련시켰다 자신이 돌봐줄 수 있을 때 왕위를 물려줘 옆에 앉아 시험 운행을 도왔던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 가야 할 길에 걸림돌을 다 치워 버렸다.
공신들과 측근들을 제거하며 악역을 자처한 이유는 아버지 자신 그리고 아들의 조선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고 번영하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3대 국왕 태종은
조선의 창업과 수성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임금이고
자신의 생존시에 후계자가 임금으로 등극한 유일한 임금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01회
조선역사에 가장 위대한 임금중 한 분인
세종대왕편은 책에 있는 내용 전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모든 걸 아버지에게 물어봤던 허수아비(?) 왕~~
우리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 세종이 2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장자인 양녕대군이 아닌 셋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태종의 안목이 역사의 큰 틀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세종의 집권 초기는 우리가 아는 세종대왕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임금 자질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요즘 말로 하면 전형적인 마마보이가 아닌 파파보이였다.
세종은 신중한 성품이기도 했지만, 임금으로서 주체적이기보다는 모든 것을 아버지 상왕 태종에게 물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해 신하들은 왕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을 정도였다.
“대사헌 허지가 정용수와 신효창에게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상왕께 아뢰겠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즉위년 12월 13>
“ 승정원에서 병조가 파선하였다는 보고를 30여 일이나 지연시킨 죄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내 장차 상왕께 아뢸 터이니 너희들도 또한 마땅히 빠짐없이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1년 7월 25일>
“우의정 이원 등이 계하기를 ‘지난번에 수재로 인하여 감선減膳도 하였고 이내 어원도 감량하였으니 이제 추성秋成이 되어 벼농사가 풍성하니 청하건대 그전 대로 장만하여 올리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앞으로 상왕에게 말씀드리겠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3년 9월 4>
세종 집권 초기부터 아버지 태종이 사망하기까지 4년 남짓한 기간 동안 상왕께 아뢰겠다. 상왕께 여쭈어 보겠다는 표현이 실록에 40차례 이상 나타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신하들은 태종의 의사를 더 존중하며 무겁게 여겼고 상대적으로 임금인 세종을 더 가벼이 여겼다.
결국 왕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신하들끼리 싸우는 일까지 발생했다.
“김점이 승서를 꾸짖어 악한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으며 승서에게 말하기를 ‘내가 장래에 불의를 많이 할 것이니 수레에 찢겨 죽게 될 것이며 멸족의 환을 당하리라’ 고까지 악담을 하니 승서가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1년 7월 4일>
한마디로 세종 집권 초기는 전혀 기강에 서지 않는 시기로 왕의 권위조차 찾기 어려운 시기였다. 세종은 왜 왕다운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을까?
우리가 알다시피 세종은 왕이 될 계획이 없었다.
세자인 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이 갑작스레 세자가 된 세종은 책봉 두 달 만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세자가 된 것도 갑작스러웠지만 곧바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차기 왕이 되기 위한 필요한 학습과 준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또한 세종은 아버지 태종에게 철저히 복종적이었다. 대부분의 권력을 태종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왕으로서의 모습보다 아들로서의 모습으로 임금의 자리에 앉은 것이다.
상왕이 되어 사냥을 즐겼던 태종을 따라 함께 사냥을 다니고 밤늦게까지 음주 가무에 동석하며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던 세종, 신하와 백성들은 기대와 다른 세 임금을 보며 실망했다.
세종 역시 자신의 장인 심온이 대역죄인으로 몰려 죽음 앞에 이르렀을 때 아내 소헌 황후의 간절한 눈물을 보면서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내를 사랑했지만, 무고한 장인이 죽고 장모와 처제는 노비가 되어 처가가 풍비박산이 나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02회
그만큼 세종은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절대적으로 복종했던 아들이었다.
아쉬운 것은 아버지에게 효심이 지극한 아들인 것처럼 처가 부모에게도 효를 행하는 것이 도리인데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처가 문제에 대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위대한 업적 가운데 오점 또는 옥의 티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이 세종의 젊은 시절 집권 초기의 모습이었다.
태종은 왜 이토록 빠르게 세종에게 왕위를 한 것일까? 태종은 자신이 건재할 때 안정적으로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폐위는 됐지만 양녕대군의 지지 세력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혹시 모를 반란의 위험성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태종의 계산이 있었다.
안정적으로 정권을 교체하기 위한 한 박자 빠른 선택이었다.
그러면서 국정의 운영을 옆에서 도우며 아들이 자리를 잡아갈 수 있도록 지도하겠다는 아버지 태종의 성실한 배례 아닐까 생각한다.
조선 초 최대의 부패, 뇌물 스캔들 ~
고려 말 김원용이라는 상인이 당시 세력가인 임견미에게 뇌물을 주고 김생의 가족들을 불법적으로 노비로 만들었다.
하지만 임견미가 사망하고 조선이 시작된 후 이들은 모두 불법적으로 노비가 됐음을 인정받아 양인 신분으로 회복됐다.
세월이 흘러 김원용 아들인 김도련이 노비를 되찾기 위해 당대의 권력가들에게 뇌물을 준 사건이 발생했다.
무려 426명이나 되는 엄청난 인원을 노비로 삼겠다며 김 도련은 당시 권력가들에게 총 132구(口.노비를 세는 단위)의 노비를 뇌물로 상납했다. 당시 노비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쉽게 비유하면 말 한 마리 가격과 비슷했다.
(말 1마리=베450필=약 1,000만원)
하지만 자녀를 출산하면 그 자녀도 노비가 되었으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재산이 불어나는 엄청난 재산 증식의 가치가 있었다.
당시 최고 권력가인 병조판서 조말생이 김 도련에게 노비 24구 를 뇌물로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김 도련의 노비 뇌물 사건은 세종 4년의 일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세종 8년 사헌부에서 문제 제기를 하면서 수사하게 되었고 전말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조말생은 태종의 오른팔로 7년 동안이나 승지(비서실장)을 역임한 최측근이었다.
그는 태종이 실시한 첫 번째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고 자신의 아들을 태종의 사위로 만들어 왕실과는 사돈지간이었다.
이런 조말생의 뇌물 스캔들은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은 권력형 비리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말생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를 가게 됐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세종은 함경도로 사람을 보내 강력한 재조사를 명했다. 현대판 ‘특검’을 실시하여 여죄를 밝혀내 부패를 척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특검결과
조말생이 노비와 장물 등 총 780관(현재가 15억원 수준)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추가로 밝혀져 아버지 태종 때부터 권세를 쥐고 있던 그의 민낯이 드러나게 됐다.
뇌물 80관(1관= 3.75㎏) 이상을 받은 자는 교형에 처한다는 당시 법률을 근거로 하면 780관을 받은 조말생은 사형에 처하여야 하지만
세종은 그간의 공헌을 참작해 유배형으로 조말생의 비리 사건을 처리했다. 김도련이 당 관리 17명에게 노비 132구를 뇌물로 바친 사건은 조선 초 정기사에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 됐다.
적폐청산을 기점으로 태종 이방원대의 권력과 고신들을 몰아내고 세종의 사람들로 채워나가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