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창군고난사(2)/받은 글

jn209 2026. 4. 2. 08:57

 

https://blog.naver.com/pjjyym/224157153194

 

 

《創軍의 苦難史 제11회》

☆제 4연대 창설☆

 

제4연대는 1946년 2월 15일 전남 광산군 극락면 쌍촌리(현 광주 광역시 서구 쌍촌동)에서 김홍준 중위(만주군 출신)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쌍촌리는 상무대가 장성으로 이전하기 전까지의 步兵ㆍ砲兵ㆍ機甲ㆍ工兵ㆍ化學 學校가 있었던 자리입니다.

 

창설 소대장으로는 최홍희 소위(학병출신), 조암 소위(학병출신)가 있었습니다.

 

창설중대인 A중대에 입대한 사병들 중에는 나중에 이름을 날리게 되는 김점곤(경비사관 1기입교), 임충식(")이 있었고, 또 전부일(경비사관 2기 입교), 김재명("), 신동금("), 김종관("), 김 련("), 한진영(") 등 우수한 인재들이 입대하였습니다.

 

김홍준 대위는 대대 편성까지 해놓고 6월 24일경에 떠났으며 정일권 대위가 2대 연대장으 부임하였습니다.

 

4연대도 예외없이 질이 좋지않은 병사들이 입대하여 난장판을 벌였습니다.

 

일본군 지원병 출신 하사관들이 다수를 이룬 대대병력 중 좌익분자들은 연대장으로 부임한 정일권 대위에게 신고를 하지 않는다고 집단구타를 하는 일까지 발생하였습니다. 그들은 일본군에 갔다왔다는 경력을 내세우며 장교들에게 대하는 태도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밤이면 내무반에는 적색 삐라가 붙어 있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막사 주변에 불온 삐라들이 뿌려져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탈영하는 병사들이 많았으며 외출을 나가면 경찰들과 시비가 붙어 싸움박질이 벌어지기 일수였습니다.

 

정일권이 47년 1월에 경비사관학교 교장으로 영전하고 조 암 대위가 대대장겸 연대장으로 취임하였는데 이사람이 좌익이었습니다.

 

47년 4월에는 새로 임관한 경비사관 3기생들이 4연대 소대장으로 전입을 왔는데 거기에 나중 여수 14연대 반란 주모자가 된 김지회와 홍순석이 끼어 있었습니다.

 

김지회와 홍순석은 광양에서 경찰과 폭력사건을 일으키는 등 말썽꾸러기들이었습니다.

 

광양사건으로 조암 연대장이 47년 5월 20일 해임되고

 

동년 5월 21일부로 이한림 소령이 4대연대장에 부임하였습니다.

연대가 완편된 것이 48년 1월이었는데 동년 5월 4일부로 1대대장 이영순 소령(일본군 해군 중위 출신)이 14연대장으로 발령을 받고 안영길 대위와 함께 1개대대 병력을 이끌고 14연대 창설을 위해 여수에 내려가 구일본 해군 부대 주둔지에서 14연대 창설에 임하였습니다. 이때 4연대에서 말썽꾸러기들을 골라서 내려 보냈는데 여기에 김지회 중위와 홍순석 중위 그리고 지창수 상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4연대 병력은 경찰과 자주 충돌을 하였는데 광양, 구례, 영암 등 세곳의 충돌사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습니다.

 

48년 8월에는 제 5대 연대장으로 이성가 중령이 부임하였습니다.

 

4연대는 여수14연대 반란사건으로 14연대를 해체 시킬 때 4字는 재수가 없다고 하여 20연대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군에는 4字 들어가는 부대 번호가 없습니다.

 

20연대로 개칭한 4연대는 50년 개과천선하여 50년 2월 16일 공비토벌작전에서 최고로 많은 무기를 노획한 공(功)으로 채병덕 참모총장의 표창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12회》

☆경비대 총사령부 군감사령관이 간첩이었다.☆

 

1947년 4월 19일부로 경비사관 3기로 임관한 김창룡 소위는 태릉 제1연대 정보과에 정보장교로 보직되었습니다.

 

김창룡은 함경도 영흥 출신으로 관동군에 징집되어 중ㆍ소 국경지대인 "하이라루"의 관동군 헌병대에서 중국공산당 간첩 <왕근례> 일당 50명을 잡은 베테랑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되었다시피 그 당시 경비대에는 좌익분자들이 너무 많아 초급지휘자인 중ㆍ소대장들이 지휘에 애를 먹었습니다.

 

이 좌익들을 마땅히 잡아들일 법도 없고 미군정청에서는 공산주의를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지휘에 애를 먹었습니다.

 

그럴 때인데 47년 4월 말에 경비대 총사령부 군감사령관(군기와 감찰업무를 관장하는 직위) 이병주 소령(만주 간도 태생, 신경군관학교 2기/군사영어학교 군번 14번)이 군수품을 부정유출하여 남로당에 지원하고 있다는 정보가 1연대 정보과 김창룡 소위의 인테나에 걸렸습니다.

 

사실을 조사해보니, 군수품 부정행위가 문제가 아니고 이병주가 경비사령부의 공금을 빼돌려 좌익세포 확장에 사용하고 유사시 무장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세포조직들을 이용하여 부대의 무기를 절취하거나 구매하여 문산, 연천 등지의 아지트에 숨겨놓은 사실이 들어났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부정행위가 아니고 역적행위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된 김창룡의 고민은 깊었습니다.

 

계급으로 보나 직책으로 보나 소위가 상급부대 군감사령관을 체포할 능력이 안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창룡 소위는 공산주의자는 절대 용서할 수없다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이병주를 수사하여 잡아들여야 한다는 보고서를 이성가 연대장에게 제출하니, 이성가 연대장은 승인하고 즉시 통위부(국방부 전신)의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에게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김창룡은 백선엽 국장에게 사건전말을 보고하고 신변을 보호해줄 것을 확약 받았습니다.

그런 조치를 취해놓고 수사를 추진하였습니다.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준장)에게는 보고하지 않고 은밀히 수사를 하였습니다. 보고하지않은 이유는 송호성이 간첩 성시백의 공작금을 받아쓰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병주는 세포조직으로부터 숨겨놓은 무기와 무장폭동 예비음모가 김창룡의 정보팀에 발각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송호성 경비사령관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송호성은 47년 5월 21일 이병주를 청주 7연대장으로 발령을 내고 잠시 피해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김창룡은 즉시 청주 7연대로 정보원들을 급파하여 47년 6월 10일 체포하여 압송하였습니다.

 

태릉으로 압송된 이병주 소령은 군법회의에 넘겨져 미군정 재판에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부평 감옥에서 복역하다 6.25 전쟁 때 탈옥하여 빨치산이 되었다는 소식을 끝으로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김창룡은 상관인 이병주 소령을 조사하여 감옥에 가게 했다고 하여 선배 장교들로부터 욕도 많이 먹었으며 송호성 경비대 사령관으로부터는 강제 전역시키겠다는 협박까지 받았으나, 이병주의 죄상이 명백했고 백선엽 통위부 정보국장과 미군 재판장의 보호로 무사하였습니다.

 

김창룡이 공산주의자를 살려두면 안된다는 신념을 가진 것은 첫째 중국공산당 간첩들(모택동의 간첩)

이 중국을 망쳐먹은 원흉이라는 사실을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았으며 경비사관학교 교육중에 생도대장 오일균 소령이 자신의 동료인 3기생들을 세뇌교육 시키던 일을 자세히 알고 있기때문이었습니다.

 

위와같이 경비대 총사령부의 군감사령관 같은 고위급 장교가 좌익활동을 하고 있 었다는 것은 창군을 어렵게 만든 원인 중에 하나였습니다.

 

# 왜 1연대 정보과에서 군내 좌익분자들을 색출하는 임무를 수행했는가? 의문이 갈 것입니다.

 

경비대 창설 초기에는 경비대 내부에 좌익분자들이 넘쳐났지만, 총사령부나 통위부에도 사상문제를 다루거나 좌익분자들을 제어할 기능이 없었습니다. 통위부에 정보국이 있었다 해도 미군이 갖다주는 북한의 소식과 남한의 정치상황 정도만 받아서 아는 정도였지 부정부패를 감시하거나 좌익분자들을 감시하는 일은 할 능력도 없었고 할 생각도 안하였습니다.

 

당시 경비대 사령부는 태릉의 건물 2층에 있었고 1연대는 1층에 있었는데 경비대 사령부의 감찰 사령부라 해봐야 이병주 사령관 1명과 사병 1명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병력이 많은 1연대 정보과에서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그것도 김창룡이 보직되어 와서 인원을 증강하고 일본군에서 일을 해봤던 사병 출신들을 선발하여 짧은 시간에 정보팀을 구성하여 초보적이나마 부정행위자와 특히 좌익분자들을 조사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다른 연대는 그런 일을 할 여력도 없었고 할 줄도 몰랐을 때였습니다.

 

김창룡 소위는 말이 소위이지 나이로 보면 1916년생이니까 백선엽 중령(1920년생)보다 네살이나 위였고 관동군에서 생활한 군경력도 많았고 특히 첩보계통에는 누구도 근무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김창룡이 자신의 경험을 살려 첩보수집과 방첩업무는 스스로의 아이디어로 개발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일을 하다보니, 자연히 1연대에서 좌익 사범에 대해 제재를 가하는 방첩업무를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나중에 건국이 되고 육군본부가 조직되면서 정보국 방첩과가 되었습니다.

*당시 육본방첩과장 김안일 장군 증언

*당시 통위부 정보국장 백선엽 장군 회고록

 

 

《創軍의 苦難史 제13회》

☆제 5연대 창설☆

 

제5연대는 1946년 1월 29일 부로 박병권 소위(학병출신/연희전문)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박병권 소위는 미군 <우드>소령과 함께 부산시 감천동의 구 일본군 해군훈련소에서 창설하였습니다.

 

A중대를 창설하고 2월 3일 이치업이 소대장으로 전입되었는데 이 사람은 경찰학교 교관을 하다 미고문관으로부터 군사영어학교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군정청으로 들어가 이응준 고문과 이형근 보좌관으로부터 면접시험을 보고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3일만에 군번 34번을 받고소위로 임관되었습니다.

 

박병권은 충남 논산 태생이라 부산에 연고가 없어서 모병이 쉽지않아 어떻게 하면 낯선 부산 땅에서 장정들을 빠르게 모집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해방직후 사설군사단체인 경남 국군준비대 간부직을 맡았던 경험이 있는 학병출신 오덕준을 찾아갔습니다. 박병권과 오덕준은 일본 후꾸지야마(福地山) 예비사관학교의 동기생이었습니다.

 

박병권이 오덕준에게 5연대 창설에 협조를 부탁하자 흔쾌히 동의해 주었습니다.

 

부대로 함께 돌아온 박병권은 <우드>소령에게 부탁하여 오덕준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도록 하여 일주일간 교육을 받고 2월28일에 군번 59번

을 받고 소위로 임관되어 돌아왔습니다.

 

오덕준과 이치업이 부산 출신이고 특히 오덕준은 부산에서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모병이 수월하게 되어 1연대를 제외하고 다른 연대보다 빨리 창설되었습니다.

(1연대는 경비대 총사령부와 같이 창설준비를 하였기 때문에 군정청에서 지원을 하여 제일 먼저 창설된 것임)

 

5연대에도 우수한 자원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나중에 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장교가되고 장군이된 노재현(국방장관 역임), 서종철(국방장관 역임) 등이었습니다.

 

46년 3월 1일부로 백선엽 중위(봉천군관학교 9기)가 군사영어학교를 마치고 연대장으로 부임하고 박병권 소위는 A중대를 창설해 놓고 부연대장으로 자리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무렵에 이치업 소위는 진주에서 모병을 하여 B중대를 창설했는데 이때 박태준(포항제철 창업)이 사병으로 지원해 들어왔는데

박태준은 나중에 경비사관 6기로 임관하였습니다.

 

그 때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백남권, 김익열, 이후락, 송요찬 등이 소대장으로 보충되었습니다.

 

교육훈련은 제식훈련과 총검술,폭동진압훈련이 주요과목이었는데 하루는 총검술 훈련을 하다 한병사가 실탄이 장전된 총으로 상대방 병사와 약속 대련을 하던 중 상호간에 장난으로 "쏜다" "쏠라면 쏴봐라"라는 장난을 치다 실탄이 장전된 줄 모르고 방아쇠를 당겼는데 상대방 병사의 가슴을 관통하여 사망하는 웃지못할 사건도 발생하였습니다.

 

그 사건이 있던 이후로 사회에서도 "쏜다, 쏜다" ~ "쏴봐라, 쏴봐라"는 장난이 유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ㅎㅎ

 

당시에 미군에서는 한국인 장정 1명이 얼마를 먹는지를 몰라 1인당 하루 식사량으로 쌀 한되(2L)씩을 주다보니, 잔밥이 많이 발생하여 6홉으로 기준을 정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미군들이 통조림과 식용유를 제공한 일도 있었는데 영어를 몰라 보혁유(가죽 닦는 기름)를 식용유로 알고 국솥에 넣어서 먹는 웃지못할 일도 발생하였습니다.

 

백선엽 중령은 통위부로 영전하고 다시 부연대장 박병권 소령이 3대 연대장으로 컴백했다가 4대 장도영 - 5대 백남권 - 6대 박기성이 연대장으로 재직중 6.25를 맞았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14회》

☆제6연대 창설☆

제6연대는 연대창설 명령을 받은 김영환 소위(학병출신 군번16번)가 하재팔 소위(학병출신/군번33번)를 대동하고 미군 중대장 매커리 중위와 함께 대구시 중동에 있는 구일본군 80연대 주둔지에서 2월 18일부로 A중대를 창설한 것이 시초입니다.

 

A중대원들 중에는 하재팔 소위를 비롯하여 좌익분자들 많았는데 사병으로 입대한 사람 중에 49년 5월 4일 춘천 8연대 1대대장을 하면서 대대병력 을 이끌고 월북한 표무원(경비사관 2기)이 있었습니다.

 

하재팔은 해방직후에 대구지역의 국군준비대(좌익단체) 참모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알았던 좌익분자들을 대량으로 모집하여 A중대를 창설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하재팔은 창설 중대장인 김영환 소위를 집단구타하도록 뒤에서 조종한 죄로 파면되었습니다.

 

좌익사병들로부터 집단구타를 당한 김영환 소위는 중대장 직책을 내던지고 상경하여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배로스 중령에게 사실을 보고하였습니다.

 

경비대에서는 즉시 원기섭 소위를 A중대장 대리로 내려보냈습니다.

 

원기섭 소위가 내려오자 좌익분자들은 원기섭 소위에게도 행패를 부리려고 시도하였으나 원기섭은 완력으로 강력하게 이들을 눌러 꼼짝 못하게 하였습니다.

 

역시 비겁한자들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것 같습니다. 원기섭의 배짱과 힘에 압도 당한 좌익들은 기가 죽어 거칠게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총사령부에서 최남근 중위(만주 봉천군관학교 7기/만군 대위 출신)를 (2월 26일부) A중대장으로 발령을 내었습니다.

 

최남근 중위는 남로당 푸락치로 좌익의 선봉이었습니다.(49년 숙군 작업 때 총살됨)

 

최남근 중위가 중대장으로 부임해오자 좌익들은 말썽을 부리지 않고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나 분위기는 좌익색채가 농후했고 또 다른 BㆍC 중대를 창설해야 하지만, 4월이 되어도 더 이상 모병을 하지않고 있는데 일본 육사 56기 출신 김종석 대위(49년 숙군작업 때 총살됨)가 4월 2일부로 중대장 명령을 받고 부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최남근 중위는 자연히 부중대장이 되었습니다.

 

최남근 중위가 있는데도 경비대 총사령부에서 김종석 대위를 보낸 것은 6연대가 창설이 늦어지고 골통분자들이 많음을 감안하여 일본육사 출신을 보직시켜 강력한 통솔력을 발휘하라는 취지에서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김완룡, 장도영, 이상철 소위가 소대장으로 보충되었습니다.

 

김완룡은 일본 중앙대 법대를 졸업한 학병 출신인데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6연대 소대장 요원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부교장 원용덕 소령이 "6연대에는 좌익분자들이 많으니, 정신교육을 철저히 하라는 엄명을 받았을 정도로 6연대 A중대에는 좌익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다 남로당 푸락치인 김종석이 중대장을 하고 최남근이 부중대장을 하면서 창설업무에는 신경을 쓰지않고 좌익세포 확장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9월까지도 초대 중대장 김영환 소위가 창설해놓은 A중대 하나 외에는 중대를 추가로 창설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창설이 늦어지게 되자 경비사령부에서는 김종석을 빼올리고 심언봉 중위(학병출신/보성전문/군번22번)를 9월 11일부로 B중대 창설 중대장 요원으로 내려보냈습니다.

 

심언봉 중위는 장도영, 이상철, 최영희 등 소대장들을 지휘하여 단시간에 BㆍC중대를 창설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차츰 1개 대대가 되었는데, 11월 27일부로 최남근이 대위로 진급하여 대대장에 취임하였습니다.

 

11월 25일에는 이한림 대위가 부관겸 작전주임으로 보직되어 대구 칠성동에서 수일만에 무려 800명의 장정을 모집하여 대대 하나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래서 최남근은 연대장 및 2대대장을 겸임하고 이한림은 1대대장이 되었습니다.

 

46년 12월에 임관한 경비사관 2기생 14명이 공석으로 있는 연대의 소대장으로 보충되자 부대가 제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도 내무반에서는 좌익분자들이 주도권을 장악한 가운데 벽에다 적색선전 삐라를 붙이고 애국가도 "대한사람 대한으로"를 "조선사람 조선으로"라고 개사하여 부르는 등 적색지대(赤色地帶)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를 심히 우려한 1대대 서재관 소위가 이한림 대대장에게 이런 사실을 보고하면서 좌익분자들을 찾아서 퇴출시켜야 한다고 건의하였습니다. 이에 이한림 대대장은 승인하고 색깔이 진한 좌익분자들을 골라내어 병영에서 쫓아냈습니다.

 

최남근 소령의 뒤를 이어 총사령부에서 김종갑 소령(학병출신/연희전문/군번 30번)이 연대장 발령을 받고 내려와 취임하였습니다.

 

김종갑 소령은 이미 46년 4월 1일부로 8연대를 창설하여 연대장직을 필하고 경비대 총사령부 작전국장과 군기사령관직을 겸하고 있는데 경비대 군기대장 김종원 중위(경비사관 1기)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과의 언쟁 사건에 책임을 지고 좌천된 것입니다.

 

48년 6월에 3대대가 추가 창설되어 연대는 3개대대로 완편이 되었습니다. 동년 7월과 8월에는 2개대대 규모의 병력이 제주도 인민유격대 토벌작전에 참가하였습니다.

 

이 무렵에는 경비대가 경찰 예비대라는 굴레를 벗어나려는 찰라였는데 동년 10월 19일 밤에 여수 14연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이에 영향을 받은 6연대에서도 11월 2일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6연대 반란사건은 다음회에 소개하겠음)

 

6연대는 49년 4월 15일부로 빨갱이 연대라는 오명(汚名)을 벗기위해 22연대로 개칭되어 새출발을 하였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15회》

☆제1연대가 몰살당할 뻔 했던 아찔한 순간☆

 

제1연대는 1947년 8월 15일 광복절 2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여 시가행진을 하도록 지정되었습니다.

 

그래서 1연대는 2개월 전부터 행진연습과 VIP경호계획을 수립하는 등 업무가 바빴습니다.

 

이때 1연대 정보과에서는 행사에 참석하는 VIP들의 안전을 위해 부대원들에 대하여 암암리에 신원점검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연대 정보팀장 김창룡 소위는 정보과 내 사병들에게 전우들 중에 좌익성향을 가진 사병들을 은밀히 접촉하여 동태를 파악하여 보고하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7월 하순 경에 정보과 최희섭 일병이 연대 본부중대 김덕용 일병을 밀착 감시한 결과 어떤 낯모르는 중년신사가 매주 한번씩 김덕용 일병에게 면회를 온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김창룡 팀장은 최희섭 일병에게 김덕용에게 좀더 밀착하여 내밀한 정보를 캐내도록 추가적인 임무를 부여하였습니다.

 

그래서 최희섭 일병은 김덕용 일병의 말에 박수를 치며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척 친분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렇게 연기를 한 결과 김덕용은 자신이 남로당에서 푸락치로 입대시킨 간첩이라는 사실과 1연대 정보과를 말살시키고 다가오는 8.15 광복절 기념 행사에 나가는 1연대를 몰살시킬 계획도 가지고 있다는 어마어마한 비밀을 알아내었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김창룡은 즉시 이성가 연대장과 연대 고문관 <갓소> 소령에게 보고하여 검거하기로 결심을 받았습니다.

 

47년 8.15 행사 사흘전인 8월 12일 중년신사가 김덕용 일병을 면회왔다는 정보를 위병소로부터 보고 받은 김창룡은 본부중대장에게 외출을 보내주도록 연락해놓고 각본대로 부사관으로 구성된 정보원 2명에게 김덕용과 중년신사를 미행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면회 온 중년신사와 김덕용은 위병소를 나가 효자동 중년신사 (최만수)의 집을 잠깐 들렸다가 돈암동에서 수상한 사람으로부터 보자기에 싼 도시락 크기의 물건을 하나 받아들고 용산역 근처의 중국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김창룡은 즉시 정보원 1명과 함께 용산역 근처의 중국집 골목으로 달려가 미행하는 정보원들을 만나 김덕용은 중국집에 머무르고 있고 최만수는 옆집 큰 저택으로 갔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정보원 1명은 김덕용을 감시하게 하고 김창룡은 정보원 2명을 데리고 옆집 울타리 너머에 숨어서 관측을 해보니, 최만수는 집안에 있던 2명의 중년신사들과 마루에서 이야기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밖으로 나올 것처럼 일어서는 틈을 이용하여 김창룡이 두 정보원에게 이들을 덮치자는 신호를 보내고 3명이 집안으로 뛰어들어 갔으나 피아가 3:3이라 고전하고 있는데 마침 찦차를 타고 지나가던 경비대 사령부 최경록 소령(나중에 참모총장 역임)이 지나가다 도와 주어 무사히 체포하고 김덕용 일병도 체포하여 1연대로 압송하였습니다.

 

1연대 정보과에서 이들을 조사해 보니, 도시락 크기의 물건은 다름아닌 독약이었고 이독약을 감정한 결과 5,000명을 동시에 독살할 수 있는 양이었며 이들은 8.15행사장에서 땀흘리고 돌아오는 장병들이 마시게될 우물에 이 독약을 넣어 몰살시키려 했다는 진술을 받아내었습니다.

 

하마터면 국군의 모체부대인 1연대가 놈들의 음모로 대참사를 당할뻔한 아찔한 순간을 용케도 모면하였습니다.

창군 초기에는 군 내부에 침투한 좌익들에 의해 전복될 수 있었던 순간들이 여러차례 있었습니다.

 

이런 악조건을 무릅쓰고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강군으로 키워놓은 軍을 무기력한 군대로 만들려는 세력들이 있으니, 이거 빨리 막아야 합니다.

- 참고자료 -

*김창룡 자서전 "숙명의 하이라루"(100쪽~106쪽)

*1965년 박성환 연합통신 기자의 "파도는 내일도 친다" (153쪽 ~ 154쪽)

 

 

《創軍의 苦難史 제16회》

☆제7연대 창설☆

 

제 7연대는 46년 2월 7일부로 충북 청주 출신 민기식 소위(만주 건국대/학병출신/육참총장 역임)에 의해 청주군(현 청주시) 사주면 개설리 前 농사훈련원에서 창설되었습니다.

 

민기식 소위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군번 18번을 받고 1월 15일부로 졸업하고 미군 <하브스>소위와 미군 부사관 2명과 함께 청주에 내려가 단시간에 A중대를 창설하였습니다. 단신으로 빠르게 중대를 창설할 수 있었던 것은 청주가 자신의 고향이고 일본군에 지원병으로 갔다온 가까운 친구들이 있어서 그들을 입대시켜 적극적인 협조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A중대를 창설해 놓고 B중대를 창설할 무렵인 4월 2일에 오일균 소위(청주 중/일본육사 61기/49년 숙군작업 때 총살)와 이희권 소위(학병출신)가 임관하여 소대장으로 전입되었습니다.

 

민기식은 혼자서 고생하다 소대장 2명을 받으니, 뛸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46년 7월 15일에는 B중대가 창설되어 이희권 소위가 중대장이 되었으며 ᆢ이렇게 중대, 대대로 증편되면서 47년 1월 15일에는 연대 편성이 완료되어 민기식 대위가 소령이 되어 연대장에 취임하였습니다.

 

47년 5월 21일 민기식 소령은 경비대 사령부로 올라가고 대신 이병주 소령이 2대 연대장으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병주는 부정과 좌익사건으로 김창룡 정보팀의 조사를 피하기 위해 송호성 경비사령관이 7연대로 피난시킨 것이어서 한달도 못채우고 6월에 체포되어 압송되고 6월 16일부로 최원개 소령(광복군 출신)이 부임하였습니다.

 

최원개 소령도 얼마 안된 10월에 경비사령부로 전출되고 부연대장 심언봉 소령이 4대 연대장에 취임하고 49년 2월에 강원도 원주로 이동하였다가 5월 3일에 다시 춘천으로 이동하여 38선 경계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49년 6월에는 5대 연대장으로 고시복 중령(광복군 출신)이 부임 했다가 동년 12월에 그만두고 부연대장 임부택 소령(경비사관 1기)이 중령 진급과 동시에 6대 연대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임부택 중령은 6.25를 맞아 최초로 북괴군의 남침 상황을 육본상황실로 보고한 전방 지휘관이었습니다.

 

#청주 7연대도 46년 4월에 A중대가 창설된지 얼마 안되어 좌익사상을 가진 하사관들의 시위로 잠시 고통이 있었습니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인 남영희가 주동이 되어 자기들 "하사관도 장교들과 똑같이 봉급을 인상해주고 영외거주를 하도록 허락해 달라."며 시위를 하였습니다.

 

만약 요구조건을 들어주지않으면 그만두고 집으로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개 소위가 들어줄수 있는 요구조건이 아니었으므로 좌익들이 트집을 잡기위한 생떼라는 것을 알아차린 민기식 중대장과 소대장들은 진짜 위병소를 나가는 남영희 등 5,60명을 총으로 위협해 불러들여 오일균 소위가 자원하여 야구배트로 보리타작 하듯 사병들의 엉덩이를 불이 나도록 두둘겨서 버릇을 고쳐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7연대는 그뒤로 좌익문제로 애를 먹은 일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오일균 소위는 좌익인데 왜 좌익 사병들의 편을 들지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좌익사병들의 엉덩이를 두들겼을까입니다.

 

이유는 자기 고향에서 빨갱이 색채를 나타내지않고 숨기기 위해 그랬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나중에 軍內 남로당 책임자라는 것이 발각되어 총살을 당했지만ᆢ ᆢ

 

 

《創軍의 苦難史 제17회》

☆제8연대 창설☆

 

8연대는 김종갑 소위(학병출신/연희전문/군사영어학교 군번30번)에 의해 46년 4월 1일부로 창설되었습니다.

 

김종갑은 46년 2월 7일 8연대 창설 임무를 받고 미군< 하우스만> 대위와 소위 1명, 그리고 김형일, 황헌친 소위와 함께 춘천에 도착하여 남춘천의 방직공장에서 모병을 시작하여 4월 1일부로 A중대를 창설하였습니다.

 

이때 3월 23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강원도 출신 김병휘, 장호진 등이 소대장으로 보충되어 BㆍC 중대 창설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B중대는 김병휘 소위가 창설하여 중대장이 되고 C중대는 장호진 소위가 창설하여 중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1개대대 편성이 완료되자 김종갑은 1대대장이 되었으며 연이여 B중대장 김병휘가 원주에서 자신의 중대를 기간으로 2대대를 창설하던 중에 강영훈 중위가 이어받아 2대대 창설을 완료하였습니다.

 

그리고 3대대는 46년 9월에 부산 5연대에서 박병권 중위가 송요찬 소위 등 장교 3명과 사병 123명을 대동하고 강릉으로 이동하여 창설하였으며 8연대에 예속되었습니다.

 

동년 12월 7일부로 원용덕 대령이 연대장 발령을 받고 내려오자 김종갑 대위는 부연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2월 말에는 경비사관 2기가 임관하여 박정희, 한신 등 10명의 소대장이 보충되었습니다.

 

그리고 통위부에서는 8연대에 임무를 주어 춘천에서 부터 주문진에 이르는 38선에 경계초소를 설치 운용하기 위해 경비사관 1기생 김점곤 중위를 38경비 중대장에 임명하고 자은리-현리-광원리-송청-주문진 정면에 1개 소초씩을 설치하였습니다.

 

47년 12월 1일부로 원용덕 연대장은 2여단 창설 여단장으로 발령이 나고 3대 연대장으로 최남근 중령이 부임하였습니다.

 

최남근은 6연대장을 하면서 좌익을 양성했던 자인데 8연대장으로 다시 자리를 옮긴 것입니다.

 

8연대에는 장교들 좌익세력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49년 5월 4일과 5일 연이어 대대장 두명이 대대병력을 이끌고 월북한 사건이 있었고, 최남근 연대장의 지령을 받고 월북한 소대장과 정보징교가 있었습니다.

 

최남근은 48년 5월 21일 마산의 15연대장으로 전출되고 김형일 중령(학병출신/서울법전)이 4대 연대장으로 부임하였으나 1대대장 표무원 소령과 홍천의 2대대장 강태민 소령이 대대를 이끌고 월북한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해임되고 이춘경 중령이 49년 5월 29일부로 5대 연대장으로 부임하여 와해된 연대 재건작업을 위해 춘천을 7연대에 인계하고 원주로 이동하여 새로 병력을 모집하여 3개대대 건제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연대는 다시 50년 4월에 원주에서 홍천으로 이동했다가 6월 20일 38선 경계 임무를 2연대에 인계하고 수도경비사령부에 예속되어 서울로 이동했다가 6.25를 맞았습니다.

 

8연대 2개대대 월북사건은 다음 회에 별도로 소개하겠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18회》

☆창군초기 경비대와 경찰은 앙숙(怏宿)이었다.☆

창군초기에 경비대와 경찰은 앙숙이었습니다.

첫째 원인은 미군정청이 경비대를 경찰 보조기관이라는 기구로 창설방침을 세운데에 있으며 두번째는 일제시대 부터 경찰에 대한 인상이 나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는 아이를 달랠 때 순사 온다고 하면 울음을 그칠정도로 경찰은 일반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겠습니다.

 

하여간 한국사람들은 일제경찰에 대해 아주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다 경비대 장병들이 시내로 외출을 나가면 경찰들이 경비대 장병들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경우가 있고 시비끝에 경찰이 가까운 파출소로 구인하여 구타를 하거나 취조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그 일례들을 몆가지 소개해 보겠습니다.

 

1. 수도경찰청장 장택상과 경비대원의 충돌

46년 가을 어느 일요일에 노량진 수원지(水源池)에 1연대 경비대원 몇명이 외출을 나와 노는데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한복을 입고 나들이를 나왔습니다.

경비대원 한명이 장택상에게 다가가 "담배불 좀 빌립시다."라고 하자, 장택상은 " 이런 버릇없는 놈 같으니라고, 누구에게 담배불을 빌리자는 거야!"고 소리를 지르며 "이놈 당장 묶어가라"고 주위에 있는 비서에게 지시하였습니다. 비서는 경비원에게 이분이 수도경찰청장이니, 그냥 사과하라고 해서 무마된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젊은 경비대원이 어른에게 잘못은 했지만 자기 권위만 믿고 묶어가라고 소리를 지른 것 하나만 보더라도 경찰이 경비대를 무시하고 있었다는 증거였습니다.

 

2. 수도경찰청장 장택상과 경비대 최홍희 소령의 충돌

최홍희 소령(학병출신/일본중앙대)은 원래 대전 2연대에서 대대장을 하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경비대원들이 경찰에게 얻어맞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태권도 유단자인 최홍희를 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으로 보직하여 경찰을 눌리려고 하였습니다.

 

또 송호성 경비대 사령관은 1연대를 순시하다 등치가 큰 김종원 중위(경비사관 1기)를 경비사령부 본부사령겸 군기대장으로 차출하였습니다.

 

47년 3월 어느날 저녁에 서울 묵정동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경비대원과 경찰이 시비끝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숫자가 많은 경찰이 경비대원들을 구타하고 경찰서로 끌고 갔다는 보고를 받은 최홍희 소령은 나학선 대위를 대동하고 중부 경찰서에 가서 이구범 서장을 만나 경비대원을 구타한 순경들을 처벌하고 당신도 사표를 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이튿날 최홍희 소령은 다시 수도경찰청으로 장택상 청장을 만나러 갔습니다.

 

수도청장을 만나야겠다니, 안된다니, 하고 부청장실에서 시끄러우니, 장택상 청장이 문을 열고 나오며 "어느 놈이 건방진 소리를 하는거야? 네놈이 무엇이길래 누구를 파면시키라 마라 하는거야?"라고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이에 최소령은 "여보시오. 당신 누구요? 무슨 이따위 인간이 있어" 하면서 수도로 앞에 있는 부청장의 책상을 후려치니 책상이 두쪽으로 쫙 갈라졌습니다. 이걸 본 장택상은 아뭇소리 없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며칠 뒤에 장택상은 통위부로 찾아와 사과를 하며 앞으로 잘해보자는 약속을 하고 무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티격태격 하는 싸움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3. 광주 4연대와 경찰의 충돌

가. 4연대 1대대와 광양 경찰 충돌

47년 5월 초에 전남 광양이 고향인 4연대 1대대 경비대원 한명이 자기의 兄이 좌익혐의로 경찰에 붙들려 가 고문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중대원들에게 말했는데 20여명이 5월11일(토) 단체로 외출을 하여 광양경칠서를 찾아가 당직하는 경찰 몇명을 집단 구타하였습니다.

 

그 다음 주에는 외출을 나간 병사가 경찰에게 보복을 당하고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트럭 2대에 병력이 탑승하고 광양경찰서를 습격하여 쑥대밭을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연대장 겸 1대대장 조 암 소령은 해임되고 이한림 소령이 연대장에 부임하였습니다.

(조 암은 숙군작업 때 남로당 간첩혐의로 총살되었음)

 

나. 4연대와 영암 경찰 충돌 사건

이한림 연대장이 취임한 뒤 10일 쯤 지난 47년 6월 1일 전남 영암군 신북면 고향으로 외출을 나간 경비대원 1명이 신북 지서 경찰들에게 얻어맞고 영암 경찰서에 압송되었다는 정보를 전남 경찰청 미군 고문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당직사령 김희준 중위는 군기대장 정지원 중위와 함께 영암경찰서로 달려가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싸움만 하고 선임하사관 한명이 경찰에게 맞아 광주 도립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별어졌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연대 사병들이 일본군 출신 김은배 중사의 지휘로 총과 실탄으로 무장하고 영암으로 출동하였으며 뒤이어 1대대장 최창언 대위가 트럭으로 300여명의 병력과 함께 출동하였습니다.

 

영암경찰서는 정문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접근을 막았으며 망루에는 기관총을 걸어 놓고 위협사격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경비대원들도 사격을 하게 되고 피아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간 이한림 연대장이 영암 군수를 만나 영암 경찰서장과 함께 사건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이 충돌에서 경비대원 6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 당하는 피해를 보았습니다.

 

이런 앙금이 남아 있어 다음해 10월 19일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을 일으킨 경비대원들이 여수 및 순천 경찰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것은 우연이 아니고 평소에 쌓인 악감정이 폭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경비대와 경찰이 주요시설을 공동으로 경비하면서 경찰은 경비대원을 "노랑 개"라고 놀리고 경비대원은 경찰을 "검은 개"라고 놀리며 장난을 치다가 싸우는 경우도 허다하였다고 합니다.

 

경비대원 복장은 누런 색이고 경찰복장은 검정색이었기 때문에 그런 놀림을 했다는 것이지요.

 

 

《創軍의 苦難史 제19회》

☆제6

연대 반란사건☆

 

독자 여러분께서는 여수 14

연대 반란사건은 귀가 아프도록 들어서 잘 아시겠지만 대구 6연대 반란사건은 좀 생소하게 들릴 것입니다.

 

6연대는 창설과정에서 설명하였듯이 남로당과 연계를 맺고 있는 최남근과 김종석이 번갈아 가며 연대장을 하면서 좌익분자들을 확산시켜 놓은 곳입니다.

 

최남근이 2대, 5대, 김종석이 3대 연대장으로 근무한 기간이 합산 20개월이었으니 시간적으로도 충분히 좌익세포조직을 확산시킬 수 있는 여건이 되었습니다.

 

또 그 당시 대구는 경상도의 모스크바라고 할 정도로 좌익성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46년 10월에 대구 폭동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하간 6연대는 세번이나 반란사건이 일어나 결국은 부대를 해체하여 22연대로 재편성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 1차 반란사건

제1차 반란사건은 48년 11월 2일에 발생하였습니다.

 

이 무렵 6연대는 1대대가 제주도 토벌작전에 참가하고 있었으며 3대대는 여수 14연대 반란군 진압작전에 참가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대대는 포항, 영천, 김천 등지에서 경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연대참모부와 본부중대만 대구에 남아 있었습니다.

 

연대장 김종갑 중령도 여수 14연대 반란군 진압부대로 출동한 3대대에 가 있었고 대구 본부에는 부연대장이 잔류대장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비대 총사령부에서는 6연대 군기대장 김진위 대위(경비사관 3기)에게 6연대 좌익 우두머리로 감시망에 들어 있는 연대인사계 곽종진 특무상사와 정보과 선임하사관 이정택 일등상사를 연행해 오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를 시행하기 위해 군기대 보좌관 조장필 소위(경비사관 6기)가 이들을 잡으러 갔는데 곽종진 인사계가 권총으로 조장필 소위를 사살하고 옆에 있던 연대 수송관 이 갑 소위(특별 7기)도 사살하였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이정택 상사가 주위에 있는 좌익병사들에게 병기고에서 총과 실탄으로 무장하게 하여 본부중대 병력을 집합시키고 평소에 좌익에 반대해온 하사관 10명과 장교 2명을 사살하고 40명의 병사들과 함께 추럭을 타고 김천으로 탈출하다 칠곡, 동명, 가산 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관을 사살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6연대 장교 4명, 사병 10명, 경찰 4명이 피살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곽종진과 이정택 일당은 포항으로 탈출하였으며 나중에 태백산 지구에서 국군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 2차 반란사건

6연대는 1차 반란사건으로 연대본부와 2,3대대는 조사를 받고 좌익혐의자들은 전부 구속되었는데 1대대 본부와 2중대 그리고 하사관 교육대는 대대장 차갑준 대위(경비사관 2기) 지휘하에 경남 함양에서 공비토벌작전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12월 5일 경비사령부에서는 6연대 1대대도 토벌작전을 중지하고 무장해제시켜 조사를 하라고 작전을 통제하고 있는 3여단에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6연대 1대대가 불응함으로 대대장 책임하에 실탄만 회수하고 대구로 본대로 복귀하라고 하였습니다. 12월 6일 대대장 차갑준 대위는 실탄을 회수하여 대대장 차와 다른 차 두곳에 보관하고 함양을 출발하여 복귀하는데 실탄을 반납하지 않고 가지고 있던 대대 인사계 이동백 일등상사가 달성군 성당지 부근에서 뒷차 7대를 세운 다음 장교 2명을 쏘아죽이고 좌익병사들에게 "우리는 복귀하면 숙청당하게 된다. 모두 차에서 내려 도망가자!"라고 선동하여 20여명의 좌익 병사들을 데리고 팔공산 방향으로 튀었는데 밤이 어두워 추격을 못하고 대대장은 부대로 복귀하였습니다.

이것이 2차 반란입니다.

 

* 3차 반란사건

3차 반란사건은 49년 1월 30일 포항에 주둔하고 있던 1대대 4중대(중대장 이영삼 중위/경비사관 4기) 발생하였는데 4중대는 좌익혐의자들에 대한 조사를 하지않았기 때문에 1대대 3중대를 포항으로 보내고 4중대를 대구로 소환하여 조사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를 포항으로 탈출했던 1차 반란 주모자 곽종진이 알아차리고 이정택과 함께 4중대 인사계에게 접근하여 "당신들은 이번에 소환되어 가면 숙청당하고 감옥에 가게 된다 우리도 그래서 탈출했는데 좌익 사병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우리와 같이 행동하자."고 부추겼습니다.

 

이에 동조한 4중대 인사계는 30일 밤에 술집으로 중대장 이영삼 중위를 안내하여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해놓고 중대로 돌아와 소대장 백달현(경비사관 7기)와 하사관 1명을 쏘아죽이고 30명의 좌익사병을 데리고 산악지대로 튀었습니다.

 

이들도 포항경찰서를 습격하여 뒤집으려고 하였으나 동조자가 많지않아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수습하지 못한 이영삼 중대장은 파면되었습니다.

 

이 정도로 창설초기의 각 연대에는 좌익세포들이 기생을 하고 있었고 틈만 보이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던 위험천만한 시기였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20회》

☆제 9연대 창설☆

원래 미군정청에서는 남한의 8개 각도에 1개연대씩만 창설하기로 계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46년 8월 12일부로 濟州島(郡)가 전라남도 행정구역에서 분리되어 濟州道로 승격됨에 따라 46년 11월 16일 모슬포에 9연대를 창설하게 된 것입니다.

 

창설 연대장은 장창국 중위(일육사 59기)가 안영길 소위(경비사관 1기)를 대동하고 제주도에 내려가 모슬포의 구일본군 병사에 터를 잡고 모병을 하였는데 그해 12월에 임관한 경비사관 2기생 김진태, 윤춘근, 김득룡 소위가 보충되었습니다.

 

연대 창설의 기간요원으로는 광주의 제4연대에서 차출된 50명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일본군 지원병 출신으로 좌익 색채가 진한 골치덩어리들이었습니다.

 

또 제주도에는 해방과 더불어 6만여명의 해외동포들이 갑자기 밀려드는 바람에 사상이 건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군대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 창설을 하는데 애로가 많았습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소대장들의 적극적인 모병활동으로 A.B 2개 중대를 우선 창설할 수가 있었습니다.

 

장창국 연대장은 47년 5월 20일 소령이 되어 경비대 총사령부 작전참모로 영전하고 2대 연대장으로 이치업 소령(학병/군번 34번)이 부임하였습니다.

 

47년 4월 19일에 임관한 경비사관 3기생들이 소대장으로 보충되었는데 문상길, 전순기, 이수복, 이윤락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48년초에 중위로 진급하여 전순기는 1중대장이 되고 문상길은 2중대장, 이수복은 연대 보급관이 되었으며 이윤락 중위는 정보과장이 되었습니다.

 

동년 12월 1일부로 이치업 소령은 타부대로 전출되고 김익렬 소령(학병/군번 47번)이 3대 연대장으로 부임하였습니다.

 

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한라산 인민유격대가 제주도 내 12개 파출소를 기습하여 방화와 살인만행을 저지르는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당시 1대대장은 이세호 대위(경비사관 2기/육참총장 역임), 2대대장은 오일균 소령(일육사 61기)이었는데 오일균이 9연대의 좌익 우두머리였습니다.

 

9연대에는 2중대장 문상길 중위와 정보과장 이윤락 중위 그리고 하사관들이 좌익세포 조직으로 뭉쳐져 있었고 이들은 이미 인민유격대장 김달삼과 내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폭동진압작전에 군이 지원해 달라고 제주 경찰청장이 협조요청을 해도 치안상황에 군대가 동원될 수 없다며 응하지 않았습니다.

 

4월 15일 경에 경비대 총사령부에서 경찰의 진압작전에 협조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오일균은 김달삼과 사전에 모의하여 김익렬 연대장에게 인민유격대장 김달삼과 원만한 협상을 하면 서로 무력충돌을 하지않고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건의를 하여 4월 28일 김달삼과 김익렬이 소위 평화협상이라는 것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협상은 일주일이 못가서 깨지고 더 격렬한 살육전이 벌어졌습니다.

 

일이 이렇게 꼬여버리자 경비대 사령부에서는 상부의 승인도 없이 연대장 멋대로 폭도와 협상을 하였다고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시키고 수원에서 11연대를 창설하고 있는 박진경 중령(학병/군번 91번)을 5월 6일부로 9연대장으로 보냈습니다.(이때 5월 1일부터 창설하고 있던 11연대 1개중대 정도를 데리고 제주도로 이동하였음)

 

박진경 중령은 9연대 병력을 흡수하여 11연대를 편성하고 토벌작전을 진행하던중 6월 15일부로 대령에 진급되었고 6월 18일 새벽에 좌익세포 문상길 중위 일당에게 피살되었습니다.

 

갑작스런 비보를 받은 경비대 총사령부에서는 최경록 중령(일본군 준위 출신/군번 11번/육참총장 역임)을 6월 21일부로 연대장 발령을 내고 사건을 처리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최경록 연대장은 부임 즉시 범인 색출과 진압작전에 몰두하다

7월 15일부로 9연대를 재편성하는 송요찬 부연대장에게 공비토벌 임무를 인계하고 11연대 일부만 데리고 수원으로 철수하였습니다.

 

11연대 부연대장 송요찬 소령(일본군 하사관 출신/군번 96번/육참총장 역임)은 11연대가 남기고 간 병력과 장비를 인수하여 다시 9연대를 재편성하고 연대장이 되어 토벌작전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습니다.

 

9연대는 48년 12월 29일 토벌작전 임무를 2연대에 인계하고 대전으로 이동하였다가 49년 2월 1일 서울로 이동하여 수도경비사령부에 예속되었습니다. 동년 5월 25일에는 장도영 중령이 6대 연대장으로 부임하였고 동년 11월 13일에는 윤춘근 중령(경비사관 2기)이 7대 연대장으로 부임하여 6.25를 맞았습니다.

 

#9연대 집단 무장탈영 사건

박진경 연대장이 피살되기 전인 48년 5월 20일 9연대 2대대장 오일균 소령과 2중대장 문상길 중위가 작당하여 좌익병사 41명을 무장탈영시켜 박진경 연대장을 처벌받게 하려는 악질적인 음모를 꾸민 일도 있었습니다.

 

탈영한 좌익병사들은 대정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관 5명을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의 신고를 받은 인접 경찰과 9연대 병력이 출동하여 20명은 사살하고 21명은 생포하였습니다.

 

생포된 21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