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의 ‘개성화’와 다석 유영모의 ‘바탈타기’로 성서 읽기 ― ‘다시 나지 않으면’(요한복음 3:3)/송화재 .연세大
Ⅰ. 들어가는 말
분석심리학(Analytical Psychology)의 아버지인 카를 융(Carl Jung)은 자신의 생애 전체를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로 회고한다.
인간의 잠 재 능력인 무의식에 대한 특별한 관심으로부터 융은 영지주의와 연금술, 동양의 철학들과 요한복음에 풍성하게 나타나는 주요 개념들과 신화, 상 징들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 안에 이미 선험적으로 존재하며, 시공을 초 월하여 전체로서 살도록 하는 창조적 원동력인 자기 원형(Self archetype) 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1)
1) 융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Selfstverwirklichung)의 역사다’로 정의 하며 ‘자아’가 무의식의 중심에 있는 ‘자기’의 신호를 듣고 포착하는 여정으로 여겼다. 이때, 신화나 꿈, 종교적 상징들은 ‘자기’가 ‘자아’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나 비상수단에 해당한다. 카를 구스타 프 융/조성기 옮김, 『기억, 꿈, 사상』(서울: 김영사, 2007), 11.
융이 자신만의 독특한 심리학의 토대를 동양의 사상과 철학에 두고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컨대 융은 자신의 자서전인 『기 억, 꿈 사상』에서 연금술 연구에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 것은 리하르트 빌 헬름(Richard Wilhelm)이 보낸 중국 연금술서인 ‘황금꽃의 비밀’(태을금화 종지)이었다고 언급한다.2)
도교의 명상법인 ‘황금꽃의 비밀’은 무의식에 관한 연구에 있어 ‘해후상봉’(邂逅相逢)이라 여겨질 정도로 융에게 매우 중 요한 이론적 실마리를 제공하였고, 영지주의를 포함한 연금술 연구에 용 기를 부여했다.
이를 계기로 융은 동양 사상에 한층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동양의 도교나 역학, 불교의 선(禪), 인도 힌두교나 철학을 연구 하며 인류 공통의 집단 무의식, 대극의 합일, ‘무의식의 의식화’로서 자기 실현 또는 개성화(Individuation), 온전성(Completion) 등과의 유사성을 연 결하기에 이른다.3)
2) Ibid., 370-371.
3) 이부영, 『분석심리학 이야기』(서울: 집문당, 2014), 121-123.
이렇듯 융이 서구의 종교와 신화, 철학, 심리학의 기반 위에 동양 사 상의 접목을 통해서 자신만의 독특한 인간 이해와 서양 정신사의 심층 이해를 마련하였다면, 융과 동시대를 살면서 동양의 종교와 신화, 철학 의 기반 위에 서구의 기독교와 철학의 주체적 수용을 통해서 새로운 신 학과 인간 이해를 마련한 한국의 사상가가 있다.
바로 다석(多夕) 유영모 (1890-1981)이다.
동·서양이라는 시공의 대극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융과 유영 모의 주요 사상과 인간 이해에는 여러 접점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융과 유영모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중요한 자료 가운데 하나가 요한복음이라 는 사실은 이들의 사상적 접점으로부터 다시금 요한복음을 새로이 바라 보고 그로부터 새로운 해석과 풍성한 이해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 소고는 융과 유영모의 사상적 핵심과 그 접점을 살펴보고, 그 가운데 이들 사상과 인간 이해의 핵심 개념인 ‘개성화’와 ‘바탈타기’를 통해 요한복음의 니고데모와의 담화(요 3:3)에 나타난 ‘다시 나지 않으면’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목적이 있다.
나아가 새로운 시각에 서 마주한 해석과 그 의미가 오늘날 한국 교회와 목회에 던지는 시사점 이 무엇인지를 제언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Ⅱ. 본론
1. 카를 융과 다석 유영모의 사상적 접점
1) 카를 융의 사상적 핵심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융의 독특한 사상적 핵심의 정립은 1913년, 그가 아버지처럼 따랐던 스승 프로이트와의 사상적 차이로부터 비롯된 결별에서 보다 명확하게 진행되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부정적인 것, 즉 무의식에는 의식에서 억압된 욕구나 소망, 사회적으로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수치스러운 성적 욕구나 힘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본 것과 달리, 융은 무의식에서 의식이 발생하며, 이때 그 무의식은 영원 속에 있는 ‘창 조적인 어머니’라며 긍정하였다. 또한, 융은 정신분석을 통해 인간 무의 식에 대한 면밀한 탐구의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개인적 차원의 무의식뿐 만 아니라 ‘집단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며 인간 안에 있는 종교성에 대해서 긍정하기에 이르렀다.4)
4)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끓어오르는 흥분으로 넘쳐나는 도끼’이며, 그 의미를 일종의 ‘악’으로 보았던 프로이트와 달리, 융은 무의식의 본질이 억압된 소망이거나 악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융의 관점에서 무의식은 의식과 대립하는 적대적인 것이 아닌 의식 작업에 없어서는 안 될 협력자 이며, 상호 동화의 차원에서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교류하고 결합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김태연, “종교와 과학 담론으로 바라본 융의 분석심리학.” 「신학사상」 169 (2015/여름), 247-248; 유아시 야 스오/이한영 옮김, 『융과 그리스도교』(서울: 모시는사람들, 2011), 57-59.
융의 무의식에 대한 관심과 이해에서 도출된 핵심 개념이 바로 ‘자기 (the Self)’이다.
여기서 ‘자기’는 인간의 중심이며 의식과 무의식 모두를 통 틀은 전체 정신을 말한다.
이것으로부터 자기 원형은 전체 정신으로 인간의 마음을 통합하고 합일할 수 있는 원초적 · 선험적 인간 조건이 된 다.
그래서 융은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누구나 전체 정신을 실현할 수 있 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잠재력의 실현은 무의식의 의식화 곧 ‘개성 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때, 자아는 의식의 중심이며, 자기 는 전체 정신의 중심이 된다.
융은 신적 존재와 같은 자기를 중심으로 온 전한 전체성의 실현이 우리 인간 삶 전체의 지속적인 과제라고 보았고, 그것을 개성화의 여정이라고 보았다.
이때 개성화는 그리스도화라고도 볼 수 있으며, 그 핵심은 자기 자신, 즉 자신 내부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자기의 원형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에 있다.5)
5) 자기 실현과 동의어로 쓰이는 개성화는 좁은 의식의 중심이던 자아가 의식과 무의식을 아우르는 전체 정신으로 다가가는 길이다. 손호현, “융의 사위일체 신정론: 넷째는 어디에 있는가,” 「신학사 상」 182 (2018/가을), 304; 이부영, 『노자와 융: 『도덕경』의 분석심리학적 해석』(파주: 한길사, 2012), 15-16.
2) 다석 유영모의 사상적 핵심
융과 유사하게 유영모 또한 동양 철학이자 종교인 유교의 중용(中庸) 이나 부자유친(父子有親), 불교의 철학과 도교의 현학에 깊은 관심을 지녔 다.
나아가 유영모는 이러한 동양의 사상적 전통의 바탕 위에 서구의 기 독교나 과학,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수용하고자 하였다.6)
6) 박재순은 유영모가 자신의 삶 속에서 동양 종교의 핵심을 체득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여 창조적인 사상과 정신 세계를 펼쳤다고 평가한다. 박재순, 『다석 유영모의 철학과 사상』(파주: 한울, 2013), 248-249.
앞으로 논의할 유영모의 ‘씨ᄋ’이나 ‘바탈타기’역시 동양 종교의 기본적인 사상과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의 토대에서 세워진 것들이다.
그렇기에 유영모의 사상적 핵심을 언급하기에 앞서 그의 사상적 근간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창조적인 사상과 정신 세계에 영향을 준 동양 종교를 유영모가 어떻게 기독교에 잇대어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했는가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유영모의 유교 이해: 중용(中庸)과 부자유친(父子有親)
유영모는 구한말 시기인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조선 말기 외세 의 압력과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구 문물이 혼재되어있던 시대에서 유영 모는 기독교 사상의 맥락과 이해에서 유교를 새로이 해석하고자 했다.
먼저, 유교의 핵심 개념인 중용과 관련하여 유영모는 원래의 중용(中庸) 대신 중용(中用), 곧 ‘줄곧 뚫림’으로 이해했다.
유영모는 이때의 ‘중’을 ‘속 의 속’, ‘참나’로 보았는데, 이런 해석으로부터 그는 중용을 ‘속의 속’인 ‘나’가 비워져서(줄곧 뚫림으로) 절대자인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을 받는 것 이라고 여겼다.7)
한편 유영모는 유교의 핵심을 부자유친(父子有親)에서 찾는다.
이런 이해에서 그는 성자 예수와 성부 하느님의 부자유친이 삼위일체 교리를 통해 하느님과 모든 인간의 부자유친으로 확장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유교의 핵심 가치인 부자유친은 상대계를 초월하여 절대적 존재인 하느 님과 소통하며 귀일(歸一)하는 것, 즉 절대계의 지존한 신과 같은 존재인 ‘얼나’가 되는 길이라고 보았다.8)
7) 유영모는 마음의 중심이 뚫려서 성령과 통하는 신통(神通)을 중용이라고 해석했다, 박재순, 『다석 유영모』(서울: 홍성사, 2017), 326-330.
8) Ibid., 332.
(2) 유영모의 불교 이해: 공(空)과 가온 찍기
한편 유영모는 불교의 공(空)에 기초하여 만물을 공(빔, 空) 으로 보 고, 하느님의 본성 또한 공으로 여겼다.
특별히 허공을 강조하고 적극적 으로 평가한 유영모는 ‘하느님의 마음’과 허공을 동일시하는 기독교적 수용과 해석을 통해 허공(하느님의 마음)과 ‘나’의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역 설했다.
또한, 유영모가 강조하는 ‘가온 찍기’9)는 ‘얼나’10)가 솟아나 깨치 는 순간으로, 순간 속에서 영원을 만나게 되는 불교의 견성(見性)에 비교 할 수 있는 개념이다.
불교에서 모든 인간은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해탈 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과 같이 유영모는 ‘나’와 세상을 깨뜨리고 솟아 올라 하늘 숨을 쉬고 하느님과 사귀는 것을 ‘가온 찍기’라고 보았다.
이때 의 가온 찍기는 ‘참된 나’를 발견하는 것임과 동시에 영원한 생명과 진리 가 드러나는 순간이다.11)
9) 유영모의 주요 개념인 가온 찍기는 시간과 공간, 지금-여기의 정점을 찍어 참된 중심에 이르는 것 을 의미한다. 다석은 가온을 찍어 바른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핵심이자 목적이라고 보았다. 유영 모는 참-자아가 깨쳐지고 견성(見性)을 하는 순간을 ‘가온 찍기’라고 불렀다.
10) 유영모는 인간을 ‘몸나’, ‘맘나’, ‘얼나’로 분류한다. 이는 인간의 육체, 정신, 영적 차원을 각기 가리 키는 것이기도 하다. 유영모는 ‘몸나’와 ‘맘나’를 일컬어 ‘제나’로, 하느님의 얼이 담긴 ‘참나’를 ‘얼 나’로 이해했다. 박영호, 『다석 류영모 어록: 다석이 남긴 참과 지혜의 말씀』(서울: 두레, 2002), 94-98.
11) 박재순, 『다석 유영모』, 166-173. 12) Ibid., 356-358.
(3) 도교 사상
유영모는 스무 살 되던 해부터 노자를 읽었다.
나아가 그의 나이 69 세에 노자를 우리말로 번역했을 만큼 도교 사상에 관심이 지대했다.
특 히 그는 노장사상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삶과 사상, 인간 이해의 중요한 원리로 받아들였다. 유영모는 도교 사상을 불교적으로 이해한 무와 공의 개념을 절대자 사상으로 융합하여 하느님을 절대 존재자인 무의 존재임 과 더불어 모든 존재를 존재하도록 하는 존재 근원으로서의 무이고, 일 회성의 존재가 아닌 지속적이고 무한하게 만물을 생성하는 원인으로 보 았다.
그의 생애 후반에 이루어진 단전호흡, 1일 1식, 냉수 마찰 등의 금 욕적 · 수도적 삶은 일종의 도교적 수행으로 깨달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12)
3) 카를 융과 다석 유영모의 사상적 접점
의식(意識)의 세계보다 무의식의 세계가 더 센 나이다.
무의식에서 초 의식이 되면 그때는 참나(얼나)가 된다.
예수가 “사람이 성령으로 거 듭나지 아니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 것은 제나(자아 (自我))를 초월한 진리의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초의식의 참나, 곧 솟난 얼나가 영원한 생명이다.13)
13) 박영호, 『다석 류영모 어록』, 105.
(1) ‘씨ᄋ’과 ‘얼나’ 그리고 자기(the Self)
‘씨ᄋ’은 1956년 12월, 유영모가 연경반 강의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강의에서 〈대학〉에 나오는 ‘친민(親民)’을 ‘씨ᄋ 어뵘’으로 풀면서 백성을 ‘씨 ᆞᆯ ᄋ’이라 보고 백성을 ‘어버이 뵙듯 하라’ 고 강의했다.
유영모는 ‘씨’를 몸의 유전적 형질로서 근원이 되는 생명의 물질과 더불어 ‘하느님의 아들 될 씨(얼나)’로 설명했다.
여기서 ‘씨’는 시 공을 초월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보편적으로 우리가 쉽사리 깨닫지 못할 뿐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유영모는 각각의 사람이 가진 ‘씨’ 인 ‘얼나’를 깨닫게 될 때 하느님께로 갈 수 있다고 보았다14)
묵은 떡 덩어리에 낀 곰팡이 한 알갱이 같은 나라는 존재인데 내 속 에 으뜸인 하나(절대)에서 나온 이상한 것, 바른 것, 근본인 것이 하 나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씨(얼나)다. 이것을 인식하려고 하는 것이 삶의 지상목표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이 하느님의 씨(얼나)를 싹틔 운 사람이라고는 몇 안 된다.15)
14) 박재순, 『다석 유영모의 철학과 사상』, 304.
15) 박영호, 『다석 류영모 어록』, 103.
한편, 유영모에게 있어 ‘ᄋ’은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생명체로 ᆞᆯ 서의 ‘알’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진짜’ 혹은 ‘알짜’와 같이 생명의 변화를 포함하는 존재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내포한다.
‘ᄋ’은 태극 우주를 상징 ᆞᆯ 하는 ‘ㅇ’, 가온 찍기의 한 점인 ‘ · ’, 운동의 의미를 지닌 ‘ㄹ’이 한데 어우 러진 것이다.
이때, 가온 찍기의 한 점인 사람은 우주의 중심(‘ · ’)이면서 동시에 테두리(‘ㅇ’)이다.
이를 우주적 개념 혹은 신적 개념으로 확장하 면, 큰 우주의 절대적 존재인 하느님은 광대하기 때문에 ‘크다’는 의미의 ‘한 얼’로서의 존재이며, 사람은 그 ‘한 얼’의 끝 점(點, 긋=획=‘ㅣ’)으로 볼 수 있다.
유영모는 이 끝점을 찾으면 하느님의 ‘긋’과 연결될 수 있으며, 그렇게 찾은 ‘긋’을 ‘제 긋’ 이라고 한다.
참(하느님)을 찾으려면 내 속에 있는 긋(얼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래서 예수가 이르기를 “하느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 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 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1)”고 했다.
참(하느님)과 긋(點)은 그 크기다 다르다. 참(하느님)은 가장자리 없는 무한대이고 긋은 자리만 있고 없 는 점과 같다. 그래서 긋(點)이라 한다. ‘긋’의 ‘ㄱ’은 하늘이고 ‘ㅡ’은 땅이고 ‘ㅅ’은 사람이 합쳐진 것이다.16)
16) Ibid., 343.
유영모는 우주의 한 점으로서 ‘제 긋’은 정지된 것이 아닌 매 순간 변 화무쌍하게 운동하며, 무한한 절대적 존재인 참 하느님의 ‘한 얼’의 끄트 머리인 긋이 이 땅에 부딪히면서 나타난 것이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리 고 모든 사람은 ‘긋’을 가진 ‘나’로 보편성을 가지지만 나를 몸에서 찾는 ‘몸나’와 마음에서 찾는 ‘맘나’, 얼에서 찾는 ‘얼나’의 단계적 위계 구조를 갖는다고 보았다. 최고의 위상인 ‘얼나’의 단계에 이르면 참(진짜) 생명에 맞닿은 ‘제 긋’이 드러나게 되고, ‘씨ᄋ’이 ‘얼나’로 솟아나고자 하는 것을 ᆞᆯ 참 생명에 연결되려고 하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이치로 여겼다.
이처럼 ‘씨ᄋ’은 백성 안에 있는 신성 혹은 하늘 생명의 씨앗이 있음 을 천명한 것이다, 나아가 ‘씨ᄋ’은 자연과 생태, 인간의 생명, 신적·우주적 생명의 통합과 소통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유영모의 ‘씨 ᄋ’이나 그로부터 도달하고자 했던 ‘얼나’의 개념은 융의 ‘자기 (the Self)’ 곧 의식과 무의식 모두를 아우르는 전체 정신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음 을 확인할 수 있다.17)
17) 박재순, 『다석 유영모의 철학과 사상』, 75.
(2) ‘바탈타기’ 그리고 개성화
우리가 불안한 것을 느끼기 때문에 절대 평안한 것을 구하려고 한다.
절대 평안한 것은 우리 본 바탈인 본성(本性)이다. 우리가 잊었던 본 성, 얼나를 회복해야 한다.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영원 자리(얼나)를 일생에 두고 광복(光復)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신앙일 것이다.얼마 동안만 얼의 나라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쳐서 자꾸 올라가 는 것이다. 이것이 얼의 나라의 영원한 부흥이요 얼나를 회복하자는 부흥이다.18)
18) 박영호, 『다석 류영모 어록』, 129.
앞서 언급한 유영모의 핵심 개념인 ‘얼나’는 이제 그의 ‘바탈’ 개념으 로 확장된다.
유영모에게 있어 바탈은 곧 성(惺)으로 하느님의 생명이자 인간의 본성에 해당한다.
유영모는 궁극적으로 로고스나 도(道)처럼 현상 계 차원의 지식으로는 이 ‘바탈’을 느낄 수 없으며, 도리어 ‘바탈’을 하늘 이며 인간의 참 본질로 보았다.
나아가 그는 이 ‘바탈’ 개념을 실천적 수 행으로 연결 시키며 자신의 성품을 발달시키고 하느님께 다가가는 방법과 그 수행을 ‘바탈타기’19) 라고 명명하기에 이르렀다.20)
19) 바탈의 ‘받ᄒ’은 받아서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늘의 소명이나 명령을 받아 행동하고 실천한다 는 의미를 내포한다.
20) 김흡영, 『가온 찍기』(서울: 동연, 2002), 198.
인간의 참 본질 이요 하늘(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한 일련의 수행인 유영모의 ‘바탈타기’는 융의 ‘개성화 과정’, 즉 신적 존재와 같은 자기(the Self)를 중심으로 온전 한 전체 정신을 실현하는 과정과 그 접점을 이룬다.
이 접점은 다음의 다 석 어록에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난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생명인 바탈(얼나, 성)을 살려낼 때 참나를 느끼게 된다. 자기의 개성이 자랄수록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 에 더 깊은 바탈(얼나)을 느끼게 된다. 자기를 더 깊이 느끼게 될수록 더 깊이 자기 바탈을 찾아내어 타고 가게 된다. 땅을 파들어 가듯이 자기의 바탈을 파고들어 가는데 인생은 한없이 발전해 가는 것이다. 이 바탈(얼나)을 타고 우리는 하느님에까지 이른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듯 우리는 바탈을 타고 하느님에게 이른다.21)
21) 박영호, 『다석 류영모 어록』, 444.
2. 개성화와 ‘바탈타기’로 성서 읽기: ‘다시 나지 않으면’(요한복음 3:1-8)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융과 유영모의 사상적 접점, 즉 사람이 가 장 자기 자신다워지는 그 한 중심의 핵심 개념인 ‘자기’와 ‘씨알’, ‘얼나’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무의식의 의식화라는 전체성과 온전성을 실현하는 ‘개성화’와 ‘바탈타기’의 접점과 그 핵심을 확인하였다.
사실이거니와 융 과 유영모는 사상적 접점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전체성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노력에서도 접점을 이루었다.
융은 진정한 자기와 의 대면과 실현을 위해 인격의 변환은 물론이고 임사 체험을 경험하는 일까지 감수하였으며, 유영모는 자신의 일평생을 그리스도에게 내맡기 며 자기 자신의 내면의 울림과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노력하였다.
이제 본 연구는 융과 유영모의 여러 사상적 접점 가운데 ‘개성화’와 ‘바탈타기’라는 독특한 관점으로부터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예수와 니 고데모의 대담을 새롭게 읽고 해석하는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특별히 이 대담에 핵심어로 등장하는 ‘다시 나지 않으면’이 개성화와 ‘바탈타기’ 의 관점에서 어떻게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는지를 조망하고자 한 다.
1) 니고데모는 누구인가?: 영적·심리적 차원의 갈증을 지닌 상징적 인물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는 어떤 인물인가를 묻는 작업은 중요하다.
니고데모가 어떤 인물로 전제되고 이해되는가에 따라서 예수와의 대담과 그 안에 담긴 내러티브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공관복 음서 가운데 마태복음에서 흔히 다루고 있는 바리새파 유대주의자에 대 한 비판의 맥락에서 니고데모를 이해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해석할 경우 요한복음 3장의 대담은 유대주의자들과 차별화된 예수의 우월성과 이와 대조적으로 평가절하되고 비판의 대상으로 풍자된 니고데모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 지 않습니까?”(4절)
더욱이 이런 이해와 해석에서, 요한복음 3장 4절에 등장하는 ‘다시 나는 것(거듭나는)’과 관련한 니고데모의 대답은 예수의 비유와 그 비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며, 문자주의의 한계에 봉착한 유대인들에 대한 강한 비판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으로 읽어갈 수 있다.
특히 요한 복음 3장 10절에 나타난 예수의 대답, 즉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는 물음은 종국에 이 대담이 당시 유대주의에 대한 조롱과 조소의 성격이 짙게 반영하고 있음을 확증하고 강화하는 쪽 으로 이해될 소지가 크다.22)
그러나 공통된 이야기와 비유를 바탕으로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건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에는 상징적이고 심오한 영적 의미들이 월등히 많이 등장한다.
특히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빛과 어둠, 위와 아래, 빵, 물, 어린양, 목자와 같은 상징들은 그 단어의 문자적인 해석을 넘어서 영적이고 무의식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그리스도 와 아버지의 독특하고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으며, 예수의 부활 사 건 이후 나타나는 보혜사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 다수 나타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요한복음이 지닌 특징과 독특성으로부터 융은 요한 복음이 자신의 핵심 사상이나 이론과 관련된 상징들의 무의식적 의미를 풍부하게 들어내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유영모 또한 예수의 말씀을 본 래 뜻에 가장 가깝게 전하는 영성 신앙의 핵심이 요한복음에 있다고 본 것이다.23)
22) F. J. Moloney, Belief in the Word Reading the Fourth Gospel: John 1-4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107-108.
23) 박영호, 『잃어버린 예수: 다석 사상으로 다시 읽는 요한복음』(서울: 교양인, 2012), 40; Michael Willett Newheart, “Johannine Symbolism,” David L. Miller (ed.), Jung and the interpretation of the Bible, New York: Continuum Publishing Company (1995), 79-80.
특별히 니고데모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상징적인 개념이 ‘밤’이다.
요한복음 기자는 3장 2절에서 니고데모가 예수에게 나아온 때가 ‘밤’이었 음을 드러내어 밝히고 있다.
만일 니고데모가 다른 바리새파 종교지도자 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시험하거나 정죄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라면 밤이 아닌 낮에 왔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니고데모 는 여러 시간과 상황에서 예수를 ‘밤’을 선택해 찾아왔고, 요한복음 기자 는 이 밤을 부각하고 있다.24)
이런 ‘밤’의 상징과 관련하여 융은 밤이 무의식과 내면의 어둠을 상징 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융은 인간이 무의식의 영역으로 하강하는 것을 밤으로 비유하며, 이 과정이 개성화를 이루는 중요한 상징적 경험 임을 강조했다.
그는 밤이 의식적인 태도와 무의식적 내용을 통합하는 역할을 하는 시련의 시간이라고 보았다.
한편, 융 학파인 토머스 무어 (Thomas Moore)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존재 자체를 흔드는 고통의 시간 이고 삶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과정으로, 쉽게 해결하거나 피할 수 있 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남기고 변화를 유도하는 시기라고 보았다.
그 래서 이 시기가 비록 귀찮고 고된 작업이지만, 영혼의 어두운 밤을 문제 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에 머무르고 성찰하는 과정을 통 해 변화를 향한 기회로 삼을 것을 강조했다.
이처럼 ‘밤’과 관련한 상징과 그 해석으로부터 니고데모는 자기의 내적 변화가 요청되는 피할 수 없는 밤의 여정에 영적·심리적 갈증을 머금고 예수를 찾아온 것으로 볼 수 있 다.25)
24) 니고데모가 예수를 ‘밤’에 찾아온 것과 관련해서 니고데모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의 반 대나 그로부터 받을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해석과 더불어, ‘밤’이 단순한 시간적 표현이 아 닌 니고데모의 영적 어둠과 영적 무지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해석이 공존한다. 자세한 내용 은 다음 책들을 참고하라.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200-201; Craig S. Keener, The Gospel of John (Peabody, MA: Hendrickson Publishers, 2003), 1, 535-540; J. Ramsey Michaels, The Gospel of John (Grand Rapids, MI: Eerdmans, 2010), 190-193.
25) 요한복음에서 빛(φῶς)과 어둠(σκοτία)이 지닌 상징성에서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한 밤은 영혼의 어두운 밤에서 빛으로 나온 니고데모를 부각한다. Carl Jung, Symbols of Transformation, Collected Works of C. G. Jung, Vol. 5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7), 129-135; Thomas Moore, Dark Nights of the Soul: A Guide to Finding Your Way Through Life’s Ordeals (New York: Gotham Books, 2004), 3-4.
한편 밤의 상징과 잇대어진 니고데모 이야기는 요한복음의 후반부, 즉 요한복음 19장 39절에서 예수의 시신을 방부처리 하려는 목적으로 몰 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져오는 이야기에 다시 등장한다. 이때도 요한복 음 기자는 니고데모를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눈여겨볼 것은 해당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찾아온 때는 더는 밤이 아닌 ‘낮’이라는 것과 여전히 그의 신분은 처음 예수를 만나던 때와 같은, 즉 바리새파 사람이며 유대 의회원 신분이라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독자들은 예수를 만난 첫날 밤 이후로부터 이제는 공개적으로 예수의 장례를 준비하는 변화된 니고데모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나아가 이렇게 변화된 니고데모의 모 습과 그 담대함으로부터 그가 어떤 형태로든지 내적 변화의 여정이 있었 음을 자연스럽게 추론하게 된다.26)
26) Grant R. Osborne, John Verse by Vers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8), 524-526.
2) 개성화와 ‘바탈타기’로 성서읽기: ‘다시 위로(부터)’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ἀπεκρίθη Ἰησοῦς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ῷ·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σοι, ἐὰν μή τις γεννηθῇ ἄνωθεν, οὐ δύναται ἰδεῖν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οῦ θεοῦ.
니고데모가 예수를 처음 만난 그 밤 이후로 겪은 내적 변화는 무엇이 었을까?
어떤 깨달음이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의혹을 사거나 심하게는 추 방당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하여금 예수의 시신을 수습할 용 기를 부여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 아래서 본 연구는 요한복음 3장 3절에 등장하는 ‘다시 나지 않으면’의 의미를 반추해보고자 한다.
본문에서 ‘다 시 나지 않으면’은 헬라어 원문에서 ‘ἄνωθεν’(아노덴)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ἄνωθεν’은 이중적인 의미, 즉 ‘위로부터’와 ‘다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27)
27) Carson, D. A.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Grand Rapids MI: Eerdmans, 1991), 188-189.
(1) ‘위로부터’
‘ἄνωθεν’의 첫 번째 의미인 ‘위로부터’의 의미를 문자적으로만 받아들 이면 물리적이고 지리적인 의미에서의 ‘위쪽’, 즉 하늘이나 창공 나아가 우주를 떠올리기 쉽다.
동시에 ‘위로부터’의 반대 개념인 ‘아래로부터’는 ‘아래쪽’, 즉 땅이나 땅 아래 지하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앞서 언급 한 것과 같이 요한복음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해석하기보다는 그 이면 의 상징이 지닌 영적 · 심리적 의미를 함께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관점과 그 신학으로부터 ‘위로부터’ 의미는 하늘로 부터 땅으로 성육한 그리스도의 하강 모티브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28)
‘위로부터’의 상징, 그리고 성육한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융이 관심했 던 기원후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바실리데스파의 ‘삼중 아들’(threefold sonship)설과 맞닿아 있다.
‘삼중 아들’(threefold sonship)설에 따르면 세 계의 구원자인 그리스도는 본래 아이온계에 속한 존재이다.
그러나 현상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참 신’(true God)을 잊어버리고 악의 지배를 받게 되자, 그리스도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전해주고자 성육신하여 지상으 로 내려온다.
바실리데스에 따르면, 본래 예수가 아이온계에 속하는 영 적 존재이기 때문에 본디오 빌라도와 로마 병정들에게 처형당한 예수는 육적 예수에 지나지 않을 뿐 영적 예수는 육체의 고난 이전의 아이온 계 로 돌아갔다고 본다.29)
28) Michael Willett Newheart, “Johannine Symbolism,” 82-83.
29) 아이온(αἰών)은 그리스어로 ‘기나긴 시간’(영겁)을 의미한다. 1951년 융은 『Aion』을 출간하면서 인간 존재의 심리적, 영적 측면을 깊이 있게 탐구하며, 특히 그리스도교 상징을 통해 인류의 집단 적 무의식과 의식의 변천을 분석한다. 유아시 야스오/이한영 옮김, 『융과 그리스도교』, 217-218.
〈그림1〉 바실리데스의 우주 개념:생략(첨부 논문파일 참조)
바실리데스에 의하면 아이온계의 제1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영적 존재이며, 본래적 온전성(original wholeness)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중재적 위치를 차지하는 제2아들의 경우 제1아들보다는 열등 하며 낮은 존재이다.
그리고 마지막 제3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높은 아이온계의 씨앗을 은폐하고 있으며, 물질 혹은 무형(amorphia)의 형태로 혼합물로부터 정화와 분리가 필요하다.
제3아들에게서 등장하는 혼합물과 관련하여 융 학파의 에드워드 에딘저(Edward F. Edinger)는 연 금술의 주요 개념인 원질료(prima materia)나 혼돈(chaos), 분리 이전의 상태로 인식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이미지는 자기(the Self)의 개 념에 대비되는 대극의 합일을 상징하며, 개성과 과정을 통한 온전성과 전체성의 회복의 과제를 개인적 의무 이행으로 수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았다.30)
한편 융은 바실리데스파의 ‘삼중 아들’(threefold sonship)을 해석하면 서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는 인간성의 ‘원형’이면서 ‘성육신’이 만인에게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이며 선험적인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런 차원에 ‘위로부터’ 하강을 내포하는 ‘성육신’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선천적으로 잠재되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으로부터 곧 원형 의 상징인 예수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 혹은 ‘인자’라는 것과 더불어 우리 인간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임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31)
30) Edward F. Edinger, The Aion Lectures: Exploring the Self in C. G. Jung’s Aion (Toronto: Inner City Books, 1996), 105-126.
31) 유아시 야스오/이한영 옮김, 『융과 그리스도교』, 219.
(2) ‘다시’
이제 ‘ἄνωθεν’의 두 번째 의미인 ‘다시’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특별히 본 연구에서는 ‘다시’의 상황이 시작되는 이전의 상황, 즉 무언가 를 반복하도록 이끄는 상징적 의미가 전제되어 있음에 관심하고자 한다.
이 관심으로부터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다시 나지 않으면’은 문자적인 의미와 일회성 차원의 육체적 재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영 적 · 정신적 변화와 새로워짐을 상징하며, 동시에 또 다른 수준에서 앞서 언급한 ‘위로부터’ 하강한 새로운 원형적 중심인 그리스도를 통해 기존의 낡은 자아가 죽고 ‘다시’ 새로워지는 것을 내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의 의미는 앞선 ‘위로부터’와 분리되거나 분절되 지 않고 오히려 독특한 의미와 연결되어 ‘다시 위로’라는 보다 통합적이 고 반복적이며, 근본적인 변화가 함축된 의미를 형성한다.32)
32) 여기서 ‘다시 위로’는 ‘ἄνωθεν’ 이중적인 의미를 결합한 것으로 그리스도(또는 성령)의 성육신(성령 임재)에 내재된 하강 모티브와 승천(구원)에 담긴 상승 모티브의 반복적인 순환 과정을 나타내 기 위해 연구자가 고안한 개념임을 밝힌다.
이러한 ‘다시 위로’ 의미와 그 내용은 유영모의 독특한 우주관이자 인간관인 ‘몸나 - 맘나 - 얼나’의 단계적 위계 구조와 그 맥을 같이한다.
유영모는 이 단계적 위계 구조를 보본추원(報本追遠)이라고 하였다.
그는 보본추원을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자 영적 행위로 보면서, 각 단계를
‘1단계: 삼성오신(三省五身)의 몸(身)나’,
‘2단계: 존심양성(存心養性)의 맘(魂)나’,
‘3단계: 궁신지화(窮神知化)의 얼(靈)나’라 는 점증적 관계로 구분하고 있다.33)
33) 류영모, 『다석 강의』(서울: 현암사, 2016), 372
각각의 단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1단계인 ‘삼성오신(三省五 身)의 몸(身)나’는 땅의 모든 생명과 연결되어있는 것으로 대속적 차원에 서의 자아 개념이다.
논어에 등장하는 삼성오신(三省五身)은 몸을 살핀다 는 의미로 정신의 그릇인 몸을 잘 보살핀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런 맥락 에서 ‘다시 나지 않으면’을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의 모습은 그의 영 적 성찰의 수준이 여전히 1단계인 ‘몸나’의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 고 있다.
이러한 ‘몸나’의 건강과 성함은 정신의 그릇의 역할을 온전히 해 낼 수 있으며 다음 2단계인 ‘존심양성(存心養性)의 맘(魂)나’로 솟아날 수 있다.
여기서 ‘맘나’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연결고리로 불교에서 말하 는 인간의 칠정(七情)이 일어나는 곳이다.
끝으로 맘나가 솟아야만 일어 나는 3단계: ’궁신지화(窮神知化)의 얼(靈)나’는 ‘한 얼’에 닿아 참 생명을 일구는 단계이다.
유영모는 ‘얼나’의 단계에서 존심양성(存心養性)을 강조 하는데, 이는 ‘몸나’에서 솟나서 ‘맘나’에서 만나는 칠정의 감정을 잘 만나 서 보내주고, 하느님의 아들을 품어서 성(性)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유 영모는 성(性)의 회복을 ‘바탈’을 기르는 것으로 보았는데, ‘바탈’은 하느 님께로부터 받는 본래의 본성을 의미하며, ‘씨ᄋ’의 단계적 위계 구조에 ᆞᆯ 서 최상위에 자리한다.
결국에 ‘몸나’로 시작하여 ‘맘나’로, ‘맘나’에서 ‘얼 나’로 솟아난 씨ᄋ은 절대 존재인 하느님과 합일할 수 있는 바탈을 찾아 ᆞᆯ ‘제 긋’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가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언급하고 있 는 ‘물과 성령으로 난 사람’, 8절의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이 3단계인 ‘얼나’로 솟은 사람인 것이다.34)
이처럼 가장 상위의 하느님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가온 찍기(ᄀ)ᆞᆫ 하 며, 변화무쌍한 우주의 한 연결점으로 전체 내부의 한 부분으로 전체가 순환하며 반복하는 ‘씨ᄋ’은 단계적 위계 구조를 지니면서 상위 단계로 ᆞᆯ 상승할수록 이전 단계와의 현저한 질적 차이를 나타낸다.
더불어 온전히 제대로 솟아나서 최상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제나’는 ‘한나’이신 하느님 의 얼(靈)과 같은 상태가 되어 완성된 ‘씨ᄋ’ 혹은 ‘얼나’의 삶에 이를 수 ᆞᆯ 있게 된다.
이렇게 완성된 ‘씨ᄋ’ 혹은 ‘얼나’의 삶은 반복적인 ‘바탈타기’, ᆞᆯ 즉 인간의 참 본질이요 하늘(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한 일련의 수행을 통해 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유영모의 바탈타기는 창조주 하느님과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요청되는 일종의 구도 작업으로 볼 수 있다.35)
34) 심리학적 상징 안에서 물은 사막에 활기를 주고 생명체가 열매를 맺게 하며, 여성의 자궁과 같은 것이며 여성적인 직, ‘음’ 적인 상징을 지닌다. 반면, 바람과 깊은 상관이 있는 성령은 그것이 접촉 하는 천지 만물과 대상에게 영향을 미치고 움직이는, 생명력 있고 생식력 있는 ‘양’적 상징을 내 포하고 있다. 이러한 심리학적 상징의 이해를 통해 종국에 4절에 ‘물과 성령’으로 난 사람은 곧 음 과 양의 대극의 합일을 이룬 사람으로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류영모/박영호 풀이, 『다석 마지막 강의: 육성으로 듣는 동서 회통의 종교 사상』(서울: 교양인, 2010), 42-43.
35) Ibid., 116-117; 김진희, “동양사상의 우주론에 입각한 유영모의 신학,” 「신학사상」 131 (2005/겨 울), 247-248.
(3) 대극의 합일: ‘다시 위로’ = ‘개성화’ 그리고 ‘바탈타기’
앞서 논의한 새로운 해석으로서 ‘ἄνωθεν’의 두 가지 의미인 ‘위로부 터’와 ‘다시’는 분리되거나 개별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중적 이고 통합적인 의미인 ‘다시 위로’로 결합되어 영적 재탄생을 보다 풍성 하게 강조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융이 언급했던 자기 실현의 ‘개성화’와 다석 유영모의 ‘바탈타기’를 통해 동·서양을 아우르는 통합적 접점을 이루게 된다.
전자가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강의 모티브 에 기반을 둔 서구의 자기실현 개념이라면 후자는 ‘다시’ 아래로부터 하 느님께로 점차 올라가는 상승의 모티브에 기반을 둔 동양의 자기실현 개념인 것이다.
연구자는 이러한 새로운 해석과 그 의미의 전거를 융의 말년의 저서 인 『Aion』에 등장하는 ‘사위체’(Quaternio)의 개념에서 찾고자 한다.
카를 융이 관심했던 영지주의 분파인 나아센파의 전승을 보면, 영지주의의 세 계관에서 주지하는 세 개의 세계로부터 가장 위쪽에 안트로포스 혹은 축 복받은 아담(천)이, 아래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열등한 인간의 본성(지) 이, 중간에는 구약의 출애굽 전승에 등장하는 모세와 그 가족들이 위치 한다.36)
36) 『Aion』의 사위체 개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C. G. Jung, Aion: Researches into the Phenomenology of the Self, trans. R. F. C. Hull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의 14 장을 참조하라.
〈그림2〉: 모세 사위체(Moses Quaternio):생략(첨부 논문파잉일참조)
이때 중간계에 있는 네 사람은 신의 인도하심으로 물질계의 육적 속 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아이온 계에 근접해 있는 혼의 상태를 나타내며, 이들의 생명은 아래로부터가 아닌 ‘위로부터 산출’된 것으로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
이 영적 생명은 다석 유영모의 인간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 는데, 천( · ), 지(ㅡ)의 사이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이며, 복잡하고 다양한 물질세계를 이끌어 천(하늘)으로 귀일한다는 것으로 앞선 ‘위로부터’ 와 ‘다시’의 대극의 합일과 상응한다.
아래에 제시한 다석의 어록은 영적 생명으로의 합일을 잘 드러내고 있다.37)
얼나라는 생각밖에는 다른 생각이 없다.
모든 게 얼나가 원점이 되어 서 나온다. 얼나를 생각하면 묵은 것도 새 것도 없다.
얼나가 중심(中 心)이다.
불교의 중도(中道), 노자의 수중(守中), 유교의 중용(中庸)은 일체가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다.38)
한편 융은 나아센파의 전승에 나타난 중간계의 모세 사위체를 두고 모세의 혼이 아니마로 상징되는 미리암으로부터 노현자의 상징인 이드로 를 거쳐, 최종적으로 십보라와 영적으로 합일체가 되는 양성구유(兩性具 有)의 ‘헤르마디프로디적 인간’의 과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종 국에 이러한 상징들이 육적 인간의 제약인 성적 차별을 넘어 자기(the Self)의 온전성과 전일성을 설명하고 있다고 보았다.39)
37)유아시 야스오/이한영 옮김, 『융과 그리스도교』, 242.
38) 박영호, 『다석 류영모 어록』, 139.
39) Jung, Aion, 209-210.
이제 융은 그의 말년의 저서인 『Aion』에서 나아센파에서 등장하는 모세사위체를 모티브로 하여 〈그림3〉과 같이 자기의 구조(The Structure of the Self)를 상징하는 사위체 형태의 도형을 그리게 된다.
〈그림3〉 :생략(첨부 논문파일 참조)
〈그림3〉 자기의 구조(The Structure of the Self) 도형에 나타나는 네 개의 사위체는 자기(Self)를 상징하는 정신적 수 준(안트로포스)에서 시작하여 자아(호모, ego)를 거쳐, 식물의 영역과 무기 물질의 단계까지 내려오는 것을 나타내는데, 융은 이러한 과정이 무의식 의 상태가 점차 의식적인 수준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으며, 인간의 정신과 물질의 통합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았다.40)
40) 머리 스타인/김창한 옮김, 『융의 영혼의 지도』(서울: 문예출판사, 2015), 232-242.
융은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창조성을 발휘 하여, 각각의 사위체들의 연결고리를 한 데 엮어 원형 사위체(The Quaternities as a Circle)를 고안하는데, 이는 종국에 ‘무의식의 의식화’ 혹은 ‘자기 실현’이라는 개성화의 연속적이고 반복적이며 역학적인 순환의 과 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림4〉는 연구자의 적극적 상상을 통하여 다석 유영모의 ‘바탈타기’와 융이 자기의 구조와 역학(The Structure and Dynamics of the Self)에서 개성화를 형상화한 원형 사위체(The Quaternities as a Circle)를 융합한 것이다.41)
41) Jung, Aion, 248 331
〈그림4〉 원형사위체(The Quaternities as a Circle) :생략(첨부 논문파일 참조)
〈그림4〉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융의 원형 사위체는 하늘과 땅, 인간과 물체(질)의 대극의 역학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무의식이 점차 의식 화되어 자기(Self)를 실현하는 개성화 과정의 연속된 순환 과정, 즉 지속 적으로 ‘위로부터’ 하강하고 ‘다시‘ 상승하는 ‘개성화’ 그리고 ‘바탈타기’의 반복적인 순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다시 나지 않으면’은 ‘바 탈타기’로 인간과 물질의 완성을 함께 추구했던 유영모와, ‘개성화’로 정 신세계와 물질세계의 다리를 연결하고, ‘자기(Self)’가 시공의 연속체를 초월해서 존재하고 있음을 밝혔던 융을 통해서, ‘다시 위로’라는 통합적 이며 반복적인 순환 과정으로서의 영적 변화를 의미하고 상징한다.
Ⅲ. 나가는 말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요한복음 3:3의 ‘다시 나지 않으면’을 ‘개성화’ 와 ‘바탈타기’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하는 시도를 진행해보았다.
이 시 도로부터 ‘다시 나지 않으면’은 ‘다시 위로’ 즉,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성육 신하여(하강 모티브) 십자가 사건을 통해 부활 후 승천한(상승 모티브) 그리 스도의 원형적 삶을 드러내 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신성을 지닌 사람(씨 ᄋᆞᆯ) 또한 이미 선험적으로 주어진 본래적 전체(얼나, Self)로의 회복과 변 화를 상징하는 의미이며, 동시에 영적 수행의 여정임을 확인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나지 않으면’에 내포되어 있는 ‘다시 위로’는 융 의 표현대로 중심을 향한 길이며, 전체성을 이룬 존재를 형성시켜 가는 끊임없는 연속적 과정이다. 동시에 또 다른 수준에서 ‘다시 나지 않으면’ 은 유영모의 표현대로 우리 사람(씨ᄋᆞᆯ)의 마음 안에 이미 선험적으로 주 어진 본래적 전체(얼나)로 살게 하는 창조적인 바탈타기의 여정이기도 하 다.
이때 본래적 자기 또는 얼나를 향한 잠재력은 시공의 범주를 초월할 뿐 아니라 여기와 저기, 과거와 지금에 동시에 존재하며, 끊임없이 ‘위로 부터’ 하강하고 ‘다시’ 상승하는 연속적 운동을 통해 그 중심을 향해 지속 적으로 수렴되고 있다.
요한복음을 통해 나타난 니고데모의 내적 변화는 ‘다시 위로’의 통합적이며 반복적인 순환 과정으로서의 영적 변화인 것이 다.
오늘날 물질문명의 혁신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현대판 니고데모들은 ‘참나’의 주권이 회복된 주인의 삶이라기보다는 노예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
자기의 삶에 정작 자신은 없다며 영혼의 상실감에서 비롯된 불안, 신경증적 고통으로부터 영혼의 어두운 밤을 보내고 있다. 더욱 심 각한 문제는 한국 교회가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복음의 메시지,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교회가 여전히 ‘죄-징벌’이라는 도식에 갇혀 ‘다시 나지 않으면’의 의미를 죄로부터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으로 제한된 의미를 부여하고 전달하는 것은 요한복음이 지닌 전체의 메시지와 그 상징의 의미로부터 동떨어지 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나아가 현대인들을 다시금 노예의 삶으로 거듭 가두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소고에서 다룬 융의 ‘개성화’와 유영모의 ‘바탈타 기’는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담을 통해 우리 안의 ‘신성’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힘들고 아픈 것은 우리 안에 신성이 발현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그 신성을 억압하고 짓누르며 살기 때문은 아닌 지, 이 억압의 역할에 교회가 앞장서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때-거기’와 ‘지금-여기’의 니고데모들에게 물음과 성찰의 자리로 초대한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인이 무엇 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 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 15:15).
이제 한국 교회는 현대인들이 물질문명의 변두리 인생이나 노예로 전락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임을, 하나님의 신성이 이 미 ‘당신’ 안에 있음을 보게 하고, 신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동행하며, 통 합적이고 반복적인 순환 과정이라는 기나긴 여정에 마중물과 위로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꿈꾸고 요한 공동체 가 선포했던, 나아가 융과 유영모가 꿈꾸었던 평화와 생명이 충만한, 즉 온전성과 전체성으로 가득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수 있도록 그 소명을 다할 수 있어야 하겠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나는 참나가 아니다.
하느님이 보낸 얼나가 참 나(無我)이다.
어버이가 낳은 제나(自我)가 죽으면 흙 한 줌이요 재 한 줌이다.
그런 참나인 얼나는 하느님 나라를 세운다.
그래서 예수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라고 했다.
얼나는 하느님의 생명인 얼로 우주 안팎으로 충만한 호연지기(浩然之氣)의 나 이다.
그러므로 지강지대(至剛至大)하여 아무도 헤아릴 수 없고 무엇 에도 견줄 수 없다.42)
42) 박영호, 『다석 류영모 어록』, 119.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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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본 연구는 카를 융의 ‘개성화’와 다석 유영모의 ‘바탈타기’ 개념을 기 반으로 요한복음 3장 3절에 등장하는 ‘다시 나지 않으면’이라는 구절을 새롭게 해석한다. 이 연구는 융과 유영모의 사상적 접점을 탐구하며, 특 히 무의식의 의식화와 온전성을 실현하는 과정인 ‘개성화’와 ‘바탈타기’를 중심으로 성서 본문을 분석한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가는 장면 을 통해 그를 영적·심리적 차원의 갈증을 지닌 상징적 인물로 이해하며, ‘다시 나지 않으면’의 ‘ἄνωθεν’의 이중적인 의미를 분절하는 대신 ‘다시 위 로(부터)’라는 통합적 의미로 확장하여, 이 구절이 인간의 영적 재탄생과 신성(神性)의 회복을 의미하고 있음을 논의한다. 또한, 융의 ‘사위체’ 와 그로부터 파생한 원형사위체(The Quaternities as a Circle)에 담긴 개성화 와 유영모의 바탈타기 수행을 통합적으로 분석하여 서구와 동양 사상의 융합을 통한 성서 해석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니고데모’들을 위한 한국 교회와 목회 적 실천에 변화 요청과 제언을 함으로써 마무리하려 한다.
주제어 개성화, 바탈타기, 카를 융, 다석 유영모, 다시 나지 않으면
Abstract
Reading the Bible Through Carl Jung’s ‘Individuation’ and Dasuk Ryu Youngmo’s ‘Bataltagi’ — ‘Unless He is Born Again’ (John 3:3)
Hwa-Jae Song( Ph.D. Candidate, Counseling & Coaching Graduate School, Department of Theology Yonsei University)
This study seeks to reinterpret the phrase “unless he is born again” from John 3:3 by drawing upon Carl Jung’s theory of ‘individuation’ and Dasuk Ryu Youngmo’s concept of ‘Bataltagi.’ The research explores the intersection of Jung’s and Yoo’s philosophical ideas, particularly focusing on the processes of individuation and Bataltagi, which center on the realization of wholeness and the integration of the unconscious. Through a symbolic interpretation of Nicodemus’s nighttime visit to Jesus, the study examines his spiritual thirst and inner transformation, expanding the meaning of “born again” to encompass the notion of “born from above.” This discussion explores how this phrase signifies the spiritual rebirth of humanity and the restoration of divine nature. Furthermore, by integrating Jung’s concept of the ‘Quaternity’ with Yoo’s practice of Bataltagi, the study demonstrates a novel approach to biblical exegesis that merges Western and Eastern thought. The findings offer significant insights for contemporary Korean church practices and pastoral care, shedding new light on the profound spiritual meanings inherent in the biblical text.
Key Word Individuation, Bataltagi, Carl Jung, Dasuk Ryu Youngmo, Unless He is Born Again
神學思想 206집 · 2024 가을
논문접수일: 2024년 8월 31일 논문수정일: 2024년 9월 14일 논문게재확정일: 2024년 9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