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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유물론의 이론적 토대로서 칸트의 물자체 /이재유.건국대

 

요약문 

마르크스 유물론에서 현실을 인식하는 과정은 관찰되는 대상뿐만 아 니라 관찰하는 주체까지 변화시키는 ‘실천’의 과정이다. 그런데 전통적 철 학인 경험론과 합리론에서 인식 과정은 관찰되는 대상을 변화시키지도 않 을 뿐만 아니라 관찰하는 주체까지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관조’의 과정이 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실천적 요소의 결여가 경험론을 비롯한 전통 적인 유물론과 관념론이 지니고 있는 공통점이라고 말한다. 관조적인 전통적 철학은 주관과 객관의 불일치라는 모순에서 벗어나 지 못하고, 이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즉 주관이 선차적인가 아니면 객 관이 선차적인가 하는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이항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는 것이다. 이러한 이항 관계 속에서는 ‘주체’가 성립할 수 없다. 주체가 성립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이항 관계의 대립·모순을 종합·통일시키 면서도 이항 관계 체계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이는 마르크스가 철학은 스 스로를 지양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실현할 수 없으며, 스스로가 실현되지 않는 한 스스로를 지양할 수 없다고 한 말의 의미이다. 칸트 역시 마찬가지이다. 칸트는 경험론과 합리론이라는 이항 관계를 종합·통일시키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관조적인’ 순수 이성이 자신을 지양하면서 실현시키기 위하여 이 이항 관계 틀을 넘어선 ‘초월론적인’ 실천이성으로 자신을 새롭게 생산한다. 이러한 새로운 자기(이 성) 생산으로서의 실천은 ‘정언명령’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정언명령은 자 기가 자신에게 내리는 자발적이고 ‘초월론적인’ 명령이다. 순수이성은 자기 를 지양하여, 새로운 자신으로서의 실천이성으로 자기를 실현시킨다. 이러한 실천의 근거는 바로 ‘물자체’이다. 물자체는 단순히 ‘인식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규정되지 않은 것이지만, 앞으로 ‘규정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다. 물자체는 지금 규정될 수 있는 것과 앞으로 규정되어야 만 하지만 지금 규정될 수 없는 것을 종합·통일시키는 ‘초월론적’ 특성, 즉 ‘타자의 타자성’을 내재하고 있다. 물자체의 타자의 타자성은 마르크스에게 철학의 지양과 실현을, 칸트에게는 이성의 지양과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근 거이다.

 

주 제 : 사회철학, 정치철학

검색어 : 유물론, 물 자체, 주체, 타자성, 자유, 실천, 자본, 자기 생산, 사회성, 보편성 

 

Ⅰ. 들어가는 말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인간이 세계 창조를 주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전제와 연관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해방의 계기를 헤겔의 의식의 변증법에서 찾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헤겔을 죽은 개 취급하는 자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헤겔을 그대 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역시 『자본』에서 헤겔의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고, 즉 대단히 관념적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이중성은 엥겔스, 레닌, 카우츠키, 플레하노프 등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기계적 유물론’의 형태로 나타났다. 엥겔스는 『자연 변증법』에서 물질이 정신에 역사적으로 선행할 뿐만 아니라 의식 진화의 원인이고 진화의 원인이며 원천으로 보았다.

또한 레닌 역시도 『유물론과 경험 비판론』에서 의식을 객관 세계의 단순한 반영에 불과하다고 여겼다(이러한 것은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관계에서도 상부구조가 토대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이론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는 유물론이 관념론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위치에만 머무른다는 것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근대 철학사 내에서 합리론(관념론)의 부정으로서의 영국 경험론(유물론)의 대립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러한 대립을 ‘지양’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지양을 헤겔의 의식 변증법에서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헤겔 에게서 이러한 지양은 절대정신으로의 귀환 또는 환원의 의미이지 만, 마르크스에게는 절대정신과 같은 절대적·보편적인 것의 해체와 새로 도달해야 할 보편적인 것의 지향이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물신(物神)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끝으로 인간의 전사(前史)가 끝이나고, 공산주의와 더불어 인간의 새로운 후사(後史)가 시작된다’는 말로 연결시킨다.

이러한 해체와 지향은 보다 고차적이고 총체적인 의식으로 나아가 는 것인데, 이 의식은 마르크스에게 의식적인 존재, 즉 유적 존재에 다름 아니며, 이 유적 존재는 자신을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로 새롭게 생산한다.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생산은 수동적으로 외부의 객관을 단순히 반영하는 재생산이거나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객관 적 소여(원리, 법칙 또는 실체)에 적응한다는 의미에서의 관념론적인 재생산이 아닌 질적으로 새로운 자신의 능동적인 생산이다. 마르크 스의 질적으로 새로운 자신의 능동적인 생산은 기계적 유물론적인 성향(경험론)과 헤겔 변증법의 관념론의 성향을 초월하고 비판하면서 도 이 둘을 종합적으로 통일시킨다. 이는 칸트가 경험론과 합리론 (관념론)을 초월하고 비판하면서도 종합적으로 통일시키고 있는 것과 아주 비슷하다. 마르크스의 해체와 지양, 즉 초월론적 통일은 ‘프락시스(Praxis, 실천활동)’라는 개념으로 나타나는데, 이 프락시스를 통해 인간은 자 신을 끊임없이 유적 존재로서 질적으로 새롭게 생산한다.

마르크스 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자신의 유물론의 특성을 한마디로 정리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프락시스’였다. 이러한 프락시스의 방법 과 태도를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환경과 교육의 변화에 관한 유물론적인 학설은 환경이 인간에 의해 변화되고 교육자 자신 이 교육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는 칸트 식으로 말하 면 대단히 ‘초월론적’(transzendental)인 것이며, 『실천이성비판』에 서 ‘너의 의지의 준칙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할 수 있는 입법의 원칙으로 행위하라’, ‘타인을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 라’는 정언명령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 유물 론은 칸트의 물 자체에 이론적 지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마르크스의 ‘유물론’(Materialism)의 ‘실천적 특성’에 주목하여 이 유물론이 포이어바흐, 엥겔스나 레닌 등의 기계적 유물론의 특성을 지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헤겔의 변증법에 의존하는 스탈린주의의 특성을 지닌 것도 아니라 이러한 양자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고 비판하는 초월론적·비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 을 밝히고자 한다.

즉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지니고 있는 초월론적인 비판의 의미가 칸트의 ‘물자체’에 이론적 지반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2. 칸트 물자체에 기초한 ‘실천성’과 마르크스 유물론의 ‘실천성’

칸트는 경험론과 합리론(관념론)을 초월하고 비판하면서도 종합적 으로 통일시키고 있다.

이러한 종합적 통일은 칸트의 『순수이성비 판』에서 보면, 인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의 인식, 즉 경험은 감성(경험적 잡다)과 지성(오성)의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두 요소는 서로 이질적인 것이다. 이 이질적인 것들을 종합하여 잡다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상상력’ 이며, 이 인식은 오로지 주체로서의 나의 의식(나는 생각한다라는 의식)으로서의 “근원적 통각”(KrV, B132)1)에 근거함으로써 통일성 을 확보한다. 그리고 이 근원적 통각은 자기의식으로서 “자발성의 작용”인 한에서 “순수 통각”(KrV, B132)이라 일컬어진다.2)

 

       1) 다른 저작에서 『순수이성비판』의 내용을 재인용할 경우, KrV(『순수이성비 판』)로 표시하겠다. 

       2) 백종현, 『한국 칸트사전』, 아카넷, 2019, 797~800쪽 참조.

 

그런데 이 자기의식에 머무르게 되면, 칸트는 합리론자로서의 데카르트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칸트에게서 이 자기의식의 근거는 인식론의 측 면에서 현상의 근거와 마찬가지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칸트에게서 이질적인 이 두 가지가 결합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 구하고 결합될 수 있는 근거는 ‘인식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물자체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칸트의 종합·통일은 경험적 인식이라는 시·공간적인 한계를 넘어서서 그 경험적 인식이 가능하게 하는 ‘초월론적’인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초월론적’인 측면에서 칸트의 경험론과 합리론의 종합적 통일은 경험론과 합리론의 기계적 결합도 아니고, 선차-부차 관계로서의 유기적 결합도 아니다. 전자는 경험론에, 후자는 합리론에 기반한 결 합이다. 경험론과 합리론은 상호 대립·모순된다. 그렇지만 경험론은 합리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어서 헤겔의 변증법으로 귀착된다(물론 경험론은 헤겔 변증법에서 안티테제의 역할을 한다).

헤겔 변증법은 후자에 속하는 결합관계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 철학은 대륙 합리론의 계보에 속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칸트의 종합·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이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관조의 영역, 즉 현상(사실,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관조의 영역을 넘어서는 영역, 즉 실천적 영역(초월론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천적 영역은 ‘규정할 수 있는’ 영역인 현상의 영역을 넘어선, ‘규정해야만 하는’ 영역인 물자체의 영역과 직결된다.3)

 

         3) 칸트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순수이성은 그에게 커다란 관 심을 끌어오는 대상들을 예감한다. 이성은 이것들에 다가가기 위해 순전 한 사변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성에서 달아난다. 짐작컨대 이성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유일한 길, 곧 실천적 사용의 길에서 이성을 위한 더 좋은 행운이 기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경험의 한계를 넘어 편력하는 이성의 명예욕 가득한 모든 의도들이 허사가 된 후 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충분히 남는 것은, 우리가 실천적 관점에서는 그에 만족할 원인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2』, 백 종현 옮김, 아카넷, 2008, 926쪽, 952쪽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관조의 영역, 즉 현상의 영역과 실천 영역, 즉 물자체의 영역 사이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칸트는 물자체를 “현상의 원인” 또는 “현상들의 근거”4)라고 말하면서도, “현상으로서 모든 표상은 대상 자체인 것과는 구별된다고 생각된다(감각적인 것과 예지적인 것)”고 말하기 때문이다.5) 다시 말하자면 칸트에게서 현상과 물자체의 관계 는 이중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형태는 순수이성비판 출간 당시에도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대표적으로 야 코비의 비판이 있다. “(현상에 작용하는 물자체라는) 이런 전제가 없 이 나는 그 체계(칸트의 체계)에 들어갈 수 없고, (그럼에도 물자체 는 가능한 경험의 대상이 아니므로) 이런 전제를 갖고서는 거기 머 물 수 없다.”6)

 

      4) 같은 책, 589쪽, 696쪽.

      5) 이에 이어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후자=X는 특히 나의 표상 바깥에 실존하는 객관이 아니라, 단지 감각적인 것에서 추상한 이념[관념] 일 따름이되, 이 이념은 필연적인 것으로 인정된다. 그것은 예지적인 것으로 인식 가능한 것(cognoscibile)이 아니라, X이다.”(Opus Postumum (유작), ⅩⅩⅡ23). 백종현, 『한국 칸트 사전』, 아카넷, 2019, 409쪽에서 재인용.

      6) F. H. Jacobi, David Hume über Glauben oder Idealismus und Realismus in Werke, Leipzig, Gerhard Fleischer, 1815, vol. 2, p. 304; 임건태, 「칸트의 물자체에 대한 니체의 비판」, 『니체 연구』 제35집, 52쪽에서 재인용.

 

이후 현상과 물자체의 관계와 관련하여 크게 세 가지 입장이 있 다.

   첫째, 야코비처럼 물자체와 현상을 서로 완전히 별개의 세계로 간주하고, 수적으로 상이하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이는 두 세계설 (two worlds view)로 불린다.

   둘째, 물자체와 현상은 수적으로 동일한 대상을 각각 다른 두 측면에서 고찰하는 방식일 뿐이라고 주장 하는 입장이다. 이는 두 측면설(two aspects view)로 불린다.

  셋째, 물자체와 현상은 각각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본 대상을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이는 두 관점설(two perspectives view)이며, 두 측면설 의 난점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다.7)

  첫째, 두 세계설은 로크의 경험론과 같이 객관과 주관이라는 이원 적 세계관에 기초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객관이 주관의 표상 작용의 원인, 근거인 것과 마찬가지로, 물자체 역시 현상의 원인, 근거라는 관계 구조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로크의 경험론에서는 객관이 주관의 원인이며, 그리하여 이 둘이 일치한다는 것을 증 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객관이 그 자체로 그렇게 있는가를 감각경험의 표상으로서는 증명할 수 없다는 것, 즉 서로 어떤 연관성 도 없는 두 세계가 어떻게 본질-현상으로 관계하고 또한 일치하는가 에 대해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질적으로 전혀 다른 물자체와 현상이 어떻게 원인-결과 관계로 연관되고 있는지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세계설의 모순 때문에 두 측면 설로 넘어간다.

    둘째, 두 측면설은 칸트가 현상과 물자체를 동일한 대상의 다른 성질의 것으로 구분하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8)

 

           7) 임건태, 「칸트의 물자체에 대한 니체의 비판」, 『니체 연구』 제35집, 52쪽.

           8) “우리는 다른 한 편으로, 같은 대상을 그 성질 자체에 따라서,…혹은 우리 감관의 대상이 되지 않는 다른 가능적 사물을 지성에 의해서 생각된 대상 으로서, 소위 감각적 대상과 대립시켜, 예지적 대상(예지계)이라고 말한 다.” KrV(『순수이성비판』), B306; 임건태, 「칸트의 물자체에 대한 니체 의 비판」, 『니체 연구』 제35집, 53쪽에서 재인용. 

 

그런데 이러한 구분 은 감각 경험 대상으로서의 현상과 이성의 대상으로서의 물자체가 어떠한 공통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의 동일한 대상 속에서 결합할 수 있는가 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모순은 흄의 경험론과 같이 다발이론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흄의 다발이론에서의 기계적 결합은 연합의 원리라는 주관적 ‘믿음’ 에 근거한 것이다. 주관적 믿음을 빼버리면, 동일한 대상의 각각의 다른 성질들이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불가지론에 이르 게 된다. 이러한 불가지론의 특성이 두 측면설에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관적 믿음과 불가지론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물자체 와 현상 사이의 관계가 데카르트의 신과 자아의 관계, ‘생각’과 ‘의 심’의 관계와 같은 인과관계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과관계의 가능성을 가진 입장이 두 관점설이다.

  셋째, 두 관점설은 인간의 관점과 인간을 넘어선 신의 관점을 전 제하고 있는데, 신의 관점이 인간의 관점의 ‘원인’ 또는 ‘근거’로 작 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데카르트, 헤겔로 이어지는 대륙 합리론의 관점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 가지 입장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철학사의 맥락에서 볼 때, 경험론이 합리 론으로 귀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셋째 입장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특히 헤겔 변증법에 기초해 보면 더욱 그렇 다).

결국 이 세 가지 입장은 경험론-합리론이라는 관계 구조를 전 혀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입장은 칸트의 종합·통일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칸트의 종 합·통일은 이러한 관계 구조를 넘어서 있는 초월론적인 것이기 때문 이다.

현상과 물자체의 관계와 관련한 위의 3가지 입장은 경험론-합리 론이라는 관계 구조 항의 철학적 세계관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경험론과 합리론에 기반한 해석, 즉 관조에 기 반한 해석에 기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넘어서지 못함은 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것, 현상을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 한정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조적 해석은 결코 칸트의 ‘실천’을 이끌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칸트는 “순수이성”이 관조적인 해석과 직결되는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현상영역을 넘어서서 물자체를 지 향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리고 물자체 “그 자체만으로 실천적이고, 우리가 윤리법칙이라고 부르는 보편적 법칙을 준다”9)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9) 임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3, 89쪽.

 

물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가 또는 인식할 수 없는가’라는 인식의 영역에 매어 놓는다면, 위에서 말한 경험론적 해석과 합리론 적 해석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러한 관조적 해석으로부터는 주체가 등장할 수 없다. 경험론에 따르면, 인식주관은 객관을 수동적으로 반영할 뿐이고, 합리론에 따르면, 알튀세의 ‘유사 주체(또는 호명된 주체)’에 머물게 된다. 이렇게 되어서는 칸트에게서 실천의 ‘주체’인 순수이성, 즉 실천이성이 나타날 수 없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바로 경험론과 합리론에게서 나타 날 수 없었던 주체의 형성에 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서의 이 주체는 ‘이론적’ 또는 ‘사변적’ ‘구성’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구성’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현상과 물자체의 관계를 인식 의 영역에서 찾으려고 하면 실천 개념을 도출해 낼 수 없다. 왜냐하 면 인식 영역에서 인식 주관은 수동성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주체는 ‘규정해야만 함’이라는 실천을 통해서, 즉 실천의 영 역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규정해야만 함’이라는 실천은 ‘지금 여 기’라는 현상적 차원에서는 ‘규정할 수 없는’ 물자체에 기인하는 것 이다. 또한 현상 역시도 실천의 영역에서 보아야 한다. 즉 인식된 것으로서의 현상 역시, 아직 현상되지 않은 규정되어야만 했던 것에 서 이제 규정할 수 있고 규정된 것으로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므 로 칸트의 실천은 지금 ‘규정할 수 없는’ 또는 ‘규정되지 않은’ 물자 체를 ‘규정할 수 있는’ 또는 ‘규정된 것’으로서의 물자체로 새롭게 생산하는 활동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인식의 차원에서도 그대로 적 용될 수 있다 할 수 있다. 즉 지성(오성)에 의하여 아직 무엇으로 규 정되어 있지 직관으로서의 잡다를 종합·통일하여 개념, 판단으로서 의 ‘현상지’로 새롭게 생산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데도 현상의 근 원으로서의 물자체는 기존의 독일관념론에서는 여전히 인식될 수 있 는 것의 계열의 끝자리에 위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 변증법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칸트의 물자체 개념은 사라지고 만 다. 왜냐하면 물자체를 상정하는 순간 기존의 독일관념론으로서의 선험적 관념론자의 인식론적 체계가 허물어지기 때문이다.10)

 

    10) “예를 들어 피히테는 ‘나의 체계는 칸트의 체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 다’고 자인하면서도, 물자체가 우리의 감성을 촉발한다는 해석을 강력히 부정하여, “칸트가 감각을 물자체의 마음에 대한 각인에서 인도한다고 확실히 明言하지 않는 한, 나는 이 해석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우리 는 다만 촉발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며, 그 촉발은 대상에 의해서 이 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고 있다. 즉 피히테는 ‘선험적 감성론’에 서 물자체의 존재라는 가정을 없애고자 한다. 하르트만도 칸트를 관념론 적으로 해석하려면 물자체의 개념을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 다. 즉, ‘칸트 학자의 괴로움의 전형적인 것은 옛날부터 물자체였다. 선 험적 관념론은 본래 어떠한 물자체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물자체의 개념이 이 관념론적 체계 속에서 차지하여야 할 장소는 없는 것이며, 이 개념은 그 체계를 실재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 곤란은 칸트에 있 어서는 반쯤 숨겨진 모습이었으나, 라인홀트의 기초론에 의하여 명확하 게 된 것이다. 마이몬 이후의 관념론자들은 이것을 분명하게 통찰하고 있으며, (특히, 피히테 및 헤겔,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신칸트주의의 많 은 사람들도 그렇다.) 그들은 물자체를 전적으로 제거하여 그것을 무의 미한 것 즉, 무의미한 개념이라고 설명하려는 유일한 가능적인 정합적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다’라고 말한다.” 한단석, 뺷칸트철학사상의 이해뺸, 養英閣, 1983, 282~283쪽. 이재헌, 「칸트의 물자체 개념」, 『철학·사상· 문화』 제6호, 2008. 01. 162쪽에서 재인용. 다른 한편 니체 역시 칸트 를 선험적 관념론자로 보고 그를 비판한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임건태 의 논문 「칸트의 물자체에 대한 니체의 비판」(『니체 연구』 제35집)을 참 조하기 바란다.

 

선험적 관념론으로서의 칸트의 철학 세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인식론의 체계를 완전히 합리론적(관념론적) 측면에서 해석해야만 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될 때, 칸트의 실천행위로서의 정언명령은 필연적으로 헤겔의 ‘이성의 간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칸트의 실천 성은 사라지고 만다. 물자체는 칸트의 실천성의 근간이다.

그래서 물자체를 ‘규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것은 순수이성의 본성에 의한 것이다)으로, 그리고 현상은 규정할 수밖에 없는 행위의 결과인 ‘규정된 것’으로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물자체와 현상의 관계는 실천 에 의해서만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다. 즉 현재 지금 이곳의 현상은 과거의 그곳에서는 규정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의 물자체였음을 깨 닫는 것이 중요하다.

인식 영역(관조의 영역) 차원에서 단순히 ‘인식할 수 없는 것’으로 서의 물자체가 아니라 규정되어야만 하고 규정될 수밖에 없는 물자 체로 인해서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은 비로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혁명)’가 될 수 있다.

이때의 전회(혁명)는 단순히 주관으로부터 모 든 객관이 발생한다는, 그리고 이 주관(정신)의 능력은 신으로부터 온다는 독단적인 관념론(근대 합리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거꾸 로 단순히 모든 객관에 의해 주관이 수동적으로 촉발된다는 유물론 (근대 경험론)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즉 이 두 항을 왔다갔다 하 는 것도 아니고 기계적으로 결합시키는 것도 아니다. 전회(혁명)는 바로 물자체에 의해 촉발된 정신이 단순히 물자체(또는 현상)를 반 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물자체(또는 현상)를 ‘구성한다’는 인간 이성 (주체)의 ‘실천적 행위’ 차원이라는 전혀 새로운 관점에 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칸트의 물자체는 독단적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의 영역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넘어서서 혁명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철학을 코페르니쿠스의 전회(혁명)에 비유하는 것이다.

독단적 형이상학의 비판에만 머문 다고 한다면, 이는 경험론에 머무르는 것이고, 데카르트에 비유한다 면 ‘의심’의 단계에 머무르는 것이 될 것이다. 칸트철학의 혁명적인 의미는 독단적인 형이상학과 경험론에 의거하면서도 이 둘을 넘어서 는 ‘초월론적’인 것이며, 이 초월론적인 것은 실천적인 것이다.

데카르트에 비유한다면, 의심을 넘어서서 ‘생각’하는 단계에 있는 것이 다. 이 실천적인 것은 인간의 ‘능동적’ 구성으로서 ‘인간의 주체성’ 과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실천은 인식(관조)의 전제이면서 동시에 인식(관조)보다 ‘고차 적인’ 것으로서, 실천이성은 순수이성보다 더 고차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칸트의 물자체는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공 산주의를 규정할 때 “현실을 지양하는 운동”이라고 했을 때의 운동 (실천)을 자기 자신에게 내포하고 있다.

이 운동이 현상과 물자체를 연결해주는(통일시키는), 고차적인 차원에 있는 유물론의 특성을 보 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실과 현실의 지양의 관계는 후자의 전자에 대한 초월론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11)

 

     11) 비유적으로 보자면, 데카르트의 ‘의심’과 ‘생각’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플라톤에게서 이데아 세계가 아니라 이데아 세계를 통한 인간의 영 혼론(어떻게 이데아 인식을 통해 지상세계에 이데아 세계를 구축해 나갈 것인가 하는 영혼의 실천을 강조함)이 훨씬 더 중요했음을 떠올릴 수 있 다. 플라톤의 인간 영혼론과 관련해서는 ,이정호, 「고대 그리스 정치철학 의 기원과 의미」, 2014년 1월 9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신년회 강연 원 고, 9~10쪽 참조.  

      

마르크스의 유물론 역시 물자체에 기반한 칸트 철학과 마찬가지로 실천적·초월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는 기존의 유물론자와 관념론자인 포이어바흐와 헤겔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의 결과가 마르크스 자신의 유물론을 실천적 유물 론으로 부르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유물론이 경험론과 같은 소박한 유물론 그리고 합리론(독일 관념론)과 철저하게 구별될 뿐만 아니라 ‘초월론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말하고 있는 ‘물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유물론의 물질은 단순히 정신에 대립하는 추상적인 수준에 서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노동)을 통해서 ‘구체적인’ 모 습으로 현상(표상)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물질은 인간의 실천(노동) 으로서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구성’되는(현현되는) 것이다. 마르크스 의 물질은 경험론에서처럼 정신-물질이라는 관계 항들 속에서 정신 에 대립하면서도 정신에 우선하는 ‘주어진 소여’도 아니고, 헤겔의 소외로서 절대정신의 자기의식 속으로 지양되어야 할 ‘부정의 대상’ 도 아니다. 마르크스의 물질은 인간의 노동이라는 실천활동에 의해 ‘규정되어야 할’(규정될 수밖에 없는), 규정될 수 있는 그리고 규정 되어 왔던 존재 그 자체이다.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은 이렇게 경험론 그리고 합리론의 최고 정점으로서의 헤겔의 이원주의를 극복하였다. 실천적 유물론의 물질 은 역사 속에서, 칸트 식으로 현상이기도 하지만 물자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물질은 인간의 실천활동에 의하여 과거에 규정되었고, 현재에 규정될 수 있으며 그리고 미래에 규정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포이어바 흐가 헤겔의 소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는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자기소외(selbstentfremdung)라 는 사실, 즉 세계가 종교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로 이중화 (verdopplung)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종교적 세계를 그 세속적 기초 안에서 해소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세속적 기초가 그 자신으로부터 이탈하여 구름 속에서 하나의 자립적 영역으로 고착한 다는 사실은 이 세속적 기초의 자기 분열 및 자기모순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속적 기초 그 자체는 우선 그 모순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다음에는 이 모순을 제거함으로써 실천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따라서 예컨대 지상가족이 신성가족(heilige Familie)의 비밀임이 폭로된 이상은 이제 지상가족 자체가 이론적 및 실천적으로 전복되어야 한다.”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 안에서 해소시킨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 (ensemble)이다.” “환경과 교육의 변화에 관한 유물론적인 학설은 환경이 인간에 의해 변화되고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 한다는 사 실을 잊고 있다, …… 환경의 변혁과 인간 활동 혹은 자기변혁의 일 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12)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가 지상가족을 신성가족 의 자리로 대체시키면서 신성가족이 지상가족의 소외로서 지상가족 의 동일성으로 환원시키고 있는데, 이 환원이 헤겔의 변증법 울타리 안에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포이어바흐의 지상가족이 인간 실천 활동의 결과물이 아니라 헤겔의 절대정신처럼 이미 ‘주어진’ 소여일 뿐이며, 따라서 여전히 “단지 객체 또는 관조의 형식 하에서만 파악 되고”13) 있다는 것이다.

 

       12) 칼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독일 이데올로기』, 김대웅 역, 두레, 1989, 38~39쪽, 39쪽, 38쪽.

       13) 같은 책, 37쪽. 

 

또한 환경의 변혁은 ‘규정되어야만 하는 것’으로서 ‘아직 규정되지 않은 것’을 ‘지금 규정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며, 이는 ‘혁명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실천의 결과 물이다. 인간의 실천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변화시킬 뿐 만 아니라 실천의 주체인 인간 자신도 변화시키는 것이다. 왜냐하 면 인간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자신의 내용으로 삼고 있 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의 특성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공산주의를 현실을 지양하는 운동의 상태라고 하는 것 에서 찾아볼 수 있다.14)

 

       14) “우리에게 공산주의는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Zustand), 혹은 현실 이 따라야 할 하나의 이상(Ideal)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적인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일컫는다.” 같은 책, 78쪽. 

 

이때 공산주의 역시 물질과 마찬가지로 보 편성과 총체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 실천활동의 결과물(현상)임과 동시에 이 현상을 다시 지양하여 새로운 보편성과 총체성을 현실화 할 수밖에 없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물 질과 공산주의는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규정되어 왔고 규정되어야만 하는 또는 규정될 수밖에 없는 칸트의 물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 보편성과 총체성을 확보해나가는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운동에서 인 간 실천활동의 결과물과 새로운 결과물을 생산해야만 하는 또는 생 산해낼 수밖에 없는 절대정신의 자기의식의 실천성과 그 결과물(절 대정신의 내용)로부터 인간 실천으로서의 노동(보편성과 총체성을 실 현해야만 하는 또는 실현할 수밖에 없는 주체로서의 인간 운명 또는 본성)을 보았고 그 물질성을 보았다. 이것은 거꾸로 선 헤겔을 바로 세우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 철학의 특성은 헤겔의 관념론 철학 그리고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비롯한 기존의 유물론 철학이 보여주는 철학의 본질과 역할을 비판하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이들 전통적인 철학의 공통점은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의식을” 이론적으로 만 “제공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서는 이론(의식)과 실천(물질적 활동)이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론의 소외 형태로서의 실천이 이론으로 회귀되어야 하는 것으로 나타 난다.

 

“따라서 그(포이어바흐-필자 삽입)는 『기독교의 본질』(Wesen des Christenthums)에서 오직 이론적인 태도만을 참된 인간적 태도로 보고, 반면에 실천은 저 불결한 유대적 현상형태 속에서만 파악하고 고정시켰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이들이 철학을 단지 이론적이고 사변적(관조적) 측면에만 머물게 함으로써 철학의

“‘실천적· 비판적’”, “‘혁명적인’” “활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15)

이들은 철학이 스스로를 지양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실현할 수 없으며, 스스로가 실현되지 않는 한 스스로를 지양할 수 없음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의 인식론이 경험적 현실을 파 악하는 과정이 파악되는 대상을 변화시키는 과정과 대상을 파악하는 주체도 변화시키는 과정이 종합·통일되어 있음을 의미한다.16)

 

       15) 칼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독일 이데올로기』, 김대웅 역, 두레, 1989, 37쪽.

       16) “환경과 교육의 변화에 관한 유뮬론적인 학설은 환경이 인간에 의해 변 화되고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따라서 이 학설은 사회를 두 부문-그 중 한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더 우월하게 된 다-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환경의 변혁과 인간 활동 혹은 자기변혁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 해될 수 있다.” 같은 책, 38쪽. 

 

이러한 마르크스 철학의 의미는 칸트가 인식론적 측면에서의 기존 형이상학이 스스로를 지양하여 실천적인 측면에서의 형이상학으로 실현될 수밖에 없으며, 인식의 주체인 순수이성(일반, 특수로서의 현상, 인식)이 자신을 실천이성(보편, 총체로서의 당위, 실천)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에 이론적으로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3. 개인주의와 집산주의에 대한 비판-유물론과 물 자체

“부르주아 사회에 있어서 살아 있는 노동은 축적된 노동을 늘리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공산주의 사회에 있어서 축적된 노동은 다름이 아니라 노동자의 존재의 폭을 넓히고 존재를 풍부하게 하여 증진시키는 수단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자본은 독립적이고 개별성을 갖지만, 살아 있는 사람은 종 속적이고 개별성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의 지양을 부르 주아는 개별성과 자유의 폐지라고 부른다.”17)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를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특히 혁명적 실천임은 의심할 바 없다. 이렇게 하여 새로이 원점에 서게 된 것이 다.”18)

 

       17) 쉴로모 아비네리(Shlomo Avineri), 『칼 마르크스의 사회사상과 정치사 상』, 이홍구 옮김, 까치, 1989, 164쪽.

       18) 같은 책, 201쪽.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를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가 지고 있는 모순과 한계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자본의 물신성이고 이 물신성은 인간의 추상력이 만들어낸 산물임과 동시에 소외의 조건이 된다. 이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선험적 분석론을 먼저 시작하는 이유와 동일하다. 선험적 분석론을 통해 (순수)이성의 한계를 드러내고, 선험 변증론을 통해 순수이성의 오류를 드러낸다. 이것을 통해서 이성의 새로운 관점인 실천이성의 관점에 서게 된다. 이 실천이성의 관점은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기존 유물론과 관념론의 관계항 자체를 뛰어넘은 새로운 관점인 실 천 유물론의 관점이 된다.

마르크스 유물론 철학의 핵심 중 하나가 소외론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소외가 인간의 삶의 영역을 두 영역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는 사적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보편성의 영역(공적 영역)이다. 보편성의 영역은 국가이고, 사적 영역은 시민사회이다. 소외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또는 일반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신비화되는 것이다.

이런 보편적인 것의 최고 형태가 국가이다(이는 헤겔의 정치철학이 이룩한 성과이자 한계이다).

마르 크스에 따르면 국가는 개인의 모든 사적인 욕구와 이해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사적인 욕구와 이해에 공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즉 사적인 욕구와 이해=공적인 욕구와 이해라는 동일성의 성격 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이러한 동일성의 최고 형태로서 국가는 경험적 현실 속에서 이 국가를 형성하는 사회적, 역사적 조건 속에서 추상된 ‘결과물’이지 본래부터 이미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이런 실체와의 동일성으로부터 인간 소외가 시작된다 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더 나아가서 이러한 동일성으로부터의 소외를 『자본』에서 자본의 물신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칸트 역시도 보편적인 것으로서 본래부터 이미 존재하는 실체에 대해 비판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소외라고 비판했지만, 칸트는 이를 순수이성의 ‘오류의 근원’이라고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칸트는 이 실 체가 인간의 경험적인 앎을 위해 순수이성이 구성해낸 결과물로서의 가상임에도 불구하고, 순수이성이 이 실체를 이미 존재하는 제1원인 또는 원리로 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칸트에게서 이 실체는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보편적인 실체가 아니라 현실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특수하고 일반적인 원리 또는 법칙일 따름이다. 보편적인 실체는 이미 본래부터 그렇게 존재한다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 한 자발적인 정언명령의 실천활동(실천이성)을 통해 인간이 끊임없이 구성해내야만 하는, 하지만 현재의 현상 수준에서는 그렇게 존재한다고 규정할 수 없는 물 자체이다.

마르크스와 칸트의 동일성 비판은 경험론과 관념론(합리론)의 전제에 대한 비판과 직결된다.

이는 개인주의와 집산주의 비판의 형태로 나타난다.

개인주의 이론은 스스로의 욕구를 위해 생산하는 개인적 생산자, 즉 로빈슨 크루소 같은 생산자로부터 출발한다.

이런 개인은 개별적이고 원자화된 순수한 개인, 즉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같은 개인인데, 만일 이런 개인을 가정한다면 필히 포이어바흐의 ‘유’(Gattung)와 같은 추상적인 본질을 가정하거나 사회계약론의 ‘동의’에 의거한 공리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 절대권력으로서의 국가나 자본의 ‘동일성’ 논리 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인주의는 추상적인 총체성(절대적 보편성) 아래 개별자를 포괄하는 집산주의(collectivism)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와 칸트는 이러한 비판을 통해 인간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의존속에서 자신을 유적 존재로서, 정언 명령 을 통한 보편적 존재로서 끊임없이 생산하는 존재가 된다.

“마르크 스에 따르면, 이런 태도(타인을 수단으로서만 간주하는 태도-필자 삽입)는 인간이 유적 존재로 행위할 가능성을 미리 배제한다. 즉 인간이 근본적인 인간적 규정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배제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 존재를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목적으로도 볼 때에만 인간으로 유적 존재로서 행동하는 것이라고 봄으로써 마르크스는 칸트의 범주적 명령을 인간학적 방식으로 되풀이한 다.”19)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생산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생산이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생산력은 ‘인간의 생산력’이 된다.

마르크스의 유적 존재는 포이어바흐의 이미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본질’(형이상학적인 인간의 제1원리로서의 본질)이 아니라 현실적인 경험을 통해 자신이 ‘고립된’, 그리고 “지역적으로 국한된 개인”임을 의식하고서 자신을 “세계사적 보편 경험을 가진 개인들로 바꾸어 놓는”20), 즉 보편적으로 생산하고 규정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19) 쉴로모 아비네리(Shlomo Avineri), 『칼 마르크스의 사회사상과 정치사 상』, 이홍구 옮김, 까치, 1989, 122쪽.

        20) 칼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김대웅 역, 두레, 1989, 77쪽. 

 

이러한 유적 존재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즉 ‘무산자’(Eigentumsloss)이다.

그리고 이 무산자는 현실적인 ‘사적 소유’로 규정할 수 없는 ‘물자체’이다. 사적 소유는 원자적이고 ‘배타적’인 개별적 개인을 전제로 한다. 이 개별적 개인을 바탕으로 근대의 개인주의가 등장한다. 개인주의는 타자를 완전히 배제한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 한 개인주의는 근대 경험론(유물론)과 합리론(관념론) 모두와 직결되 어 있다. 그런데 배타적 영역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는 개인들이 서로 관계를 가지게 될 경우에는, 이 개인들 사이에서 만인 대 만인 의 투쟁, 즉 자신의 배타적인 고유한 영역을 유지하기 위해 타자의 고유한 영역을 ‘수단으로만’ 삼고자 하는 ‘인정 투쟁’이 일상화된다. 일상화된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속에서는 ‘각기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 즉 ‘유적 존재’로서의 연대가 불가능해진다. 이는 ‘타자를 수 단으로서뿐만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위배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곧바로 규제적 요소를 제1원리로 삼는 집산주 의로 나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현실적으로 배타적 존재가 아니라 관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계를 맺지 않을 수밖에 없는데, 이 관계를 위해서는 개 별적 개인 외부로부터 이 개인과는 이질적이고 외부적인 규제 원리 를 개인 외부로부터 ‘요청’해야만 한다. 이 요청된 것은 칸트의 이율 배반에 따르면, 순수이성으로부터 나타난 오류의 근원으로서의 ‘가 상’이다. 또한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 요청은 배타적 개인으로부터 나타난 ‘소외’로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집산주의는 개인주의의 내적 모순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개인주의와 집산주의는 경험론과 합리론의 대립·모순과 같은 관계의 두 항일 따름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은 오직 인간의 사회성과 타자 지향성을 승인하는 사회적 맥락 에서만, 즉,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만 의미 있는 인간 관계 를 맺을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는 인간이 198 이재유 유적 존재라는 사실에 걸맞도록 정의된 유일한 사회이다. 이런 사회 에서는 인간 존재의 뿌리에 놓여 있는 타인에 대한 욕구가 의식 속 으로 떠오른다. …… 오직 이런 사회에서만 인간은 그의 욕구가 육 체적 생존 수단으로 환원될 수 없음(필자 강조)을 깨닫는다.

이런 사회는 동료 인간에 대한 욕구가 인간성에 있어서 근본적인 욕구(필자 강조)임을 반드시 인정한다.”21)

 

    21) 쉴로모 아비네리(Shlomo Avineri), 『칼 마르크스의 사회사상과 정치사상』, 이홍구 옮김, 까치, 1989, 124쪽. 

 

마르크스의 이러한 생각은 칸트의 물자체와 그에 따른 정언명령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칸트 역 시 개인주의나 집산주의처럼 경험적이고 특수한 존재, 즉 신체 감각 과 연관된 존재로서 인간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서 보편적 존재인 유적 존재(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을 생산하고자 한다. 이러한 생산은 정언명령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의존”을 위해 타자를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목적으로 대함 으로써, 서로 다른 의지의 준칙을 보편타당한 입법의 원리로 생산하 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보편적인 유적 존재, 즉 사회존재로 자신을 생산하게 된다.

 

4.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생산-유물론과 물 자체

“근본적으로”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생산은 인간의 기회와 개 인의 능력을 넓히고 확대시킨다.”22)

 

      22) 같은 책, 166쪽.

 

개인주의와 집산주의로는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생산할 수 없다. 개인주의와 집산주의의 전제인 개별적 개인으로서의 배타적 개인은 분업이라는 현상 형태로 나타난 다.

분업은 인간을 개별적 개인으로서 일면적인 존재자로 만들어 버 린다. 그리고 이러한 일면성은 서로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경향을 만 들어낸다. “분업의 지양에는 또한 보편적 인간성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좌절시키는 구별의 지양도 포함되어 있다.”23)

 

     23) 같은 책, 167쪽.

 

자본주의 분업 형태 하에서 개개인은 어떤 사회적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용가치로서의 상품의 생산자이자 소유자이다. 이 사용 가치로서의 상품은 배타적이어서 그 생산자와 소유자인 개개인 역시 원자화되고 배타적인 존재가 된다. 그런데 이 사용가치로서의 상품 은 사회적 관계가 배제되어 있는 배타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상품이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사용가치로서의 상품은 사회적 관계 를 가지기 위하여, 즉 관계의 규제적 원리를 가지기 위하여 사용가 치로서의 상품 내부에서 그 외부인 ‘가치’를 요청하게 되고 ‘요청’할 수밖에 없다. 이 요청된 가치는 배타적인 사용가치의 소유자로서의 개인들을 관계의 규제적 원리로서 서로 관계시켜 준다. 가치는 이제 배타적인 개개인들을 관계시키지만, 그 관계 외부에 독립적인 객관 적인 형태, 즉 사물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 사물화된 형태는 ‘상품 의 물신주의’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본론』에서 상품 물신주의에 대 한 분석을 통해 이것이 ‘가상’에 지나지 않으며, 가치는 인간 실천활 동의 산물임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작업이며 주장이 다. 이는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에서 이성의 한계를 분석하고 있는 작업과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은 곧 규정할 수밖에 없고 규정해야만 하는 실천이성의 실천활동, 즉 정언명령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분업 상태 하에서 하나의 상품이 자본주의를 이루는 개별적인 세포형태라고 말하였다. 개별적 상품들이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상품의 물신적 형태인 가치, 화폐, 자본이라는 추상적 총체성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추상적 총체 성은 모든 개별적인 상품들을 자신의 동일성으로 표현하는 ‘집산주 의’로 나타난다. 이 집산주의의 총체성은 또한 각 개별 상품의 물질 적 특성인 ‘사용가치’와 대립·모순의 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마르크 스의 유적 존재의 생산은 개인주의나 집단주의의 어느 항을 선택해 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상품 물신성의 기본 형태인 가치 대 신에 사용가치를 대안으로 내세워도 이 사용가치는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관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집산주의의 총체성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치의 소외 형태일 뿐 가치 를 넘어서는 대안이 될 수 없다. 마르크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주의 는 가치를 넘어서는, 더 나아가서 이 두 항을 종합·통일하면서도 넘 어서는 초월론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공산주의, 사 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두 축인 개별(개인주의), 특수(집산주의)를 넘어 서고자 하는, 즉 현실을 지양하여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식적인 실천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하여 정치경제학의 부와 빈곤 대신 부유한 자가 충만한 인간 욕구를 갖게 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한 자는 삶의 복합적인 인간적 표현을 요구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자기 실현이 내적 필요, 즉 욕구로서 존재하는 사람이다.”24)

 

       24) K. Marx, Early Writings, p. 164. 쉴로모 아비네리(Shlomo Avineri), 『칼 마르크스의 사회사상과 정치사상』, 이홍구 옮김, 까치, 1989, 124쪽 에서 재인용.

 

인간의 유적 보편성의 실현은 ‘삶의 복합적인 인간적 표현을 요구 하는’ 실천활동이다. 이러한 실천활동은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실천활동이 다. 이는 개별과 일반(특수)을 종합·통일하면서도 초월론적인 특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뜻한다.

마르크스에게 이러한 초월론적 특성은 ‘사회적인 것’으로서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타자성’을 지향 하는 것이다. 타자의 타자성 지향은 의식적으로 “환경의 변혁과 인 간 활동 또는 자기변혁”을 “일치”시키는 “혁명적 실천”이다.25)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 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26)

여기에서 변혁은 ‘인간의 실천활동’(Praxis)을 의미한다. 이 실천활동은 인간 자신의 ‘유적 본성’을 구체화시키고 현실화시키는 활동이다. 그런데 인간의 유적 본성은 칸트의 물자체와 마찬가지로 ‘초월론적’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인간의 유적 본성은 ‘타자의 타자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데카르 트의 ‘코기토’처럼 “다수의 개인들을 자연적으로 결합시켜주는, 내적 이고 침묵을 지키는 보편성”27)이 아니라 “감성적인 인간활동”, 즉 실천을 불러일으켜 끊임없이 자신을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로 확장 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25) 칼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독일 이데올로기』, 김대웅 역, 두레출판사, 1989, 38쪽.

      26) 같은 책, 41쪽.

      27) 같은 책, 39쪽. 

 

그러므로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가상적인 것으로서의 ‘본질’인 포이어바흐의 ‘유’(Gattung)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새로운 ‘인간’, 즉 보편적 존재로서의 ‘유적 존재’로 생산(실천)해 내는 존재이다.

이 새로운 자기 자신의 생산은 ‘부르주아 사회 체계 안’에서의 추상화되고 원자화된 자신을 만드는 인간관계로부터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실현할 수 있는 인간관계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성은 타자의 타자성을 지향하는 실천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 보편적인 것을 배제하고 특수한 일반적인 것을 절대적인 보편적인 것으로 삼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들을 해 결할 수 있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이념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5. ‘타자의 타자성’을 통한 민주주의 실현의 출발점 - 물질적 욕구의 충족

새로운 민주주의 이념은 타자의 타자성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이는 직접민주주의, 즉 만장일치의 이념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는 자본 주의 하에서의 보통 선거로는 실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보통 선 거로는 보편으로 나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껏해야 일반, 특수 를 보편으로 둔갑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민주주의, 만장일치의 이념은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욕구를 서로 충족시킴으로 써, 즉 물 자체로서 서로 규정되지 않은 것을 각자의 동일성으로 환 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보편적 원리로 현실화시킴으로써 서로 유적 존재로서 관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타자의 타자성을 향한 새로운 민주주의 이념을 공산주의, 사회주의라 불렀 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회는 ‘각기 자유로운 개인들이 서로 연대 하는 사회’이다. 각기 자유로운 개인들은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물 자체이다. 연대의 의미는 타자의 타자성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이는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욕구가 의식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타 자의 타자성을 ‘규정’하려고,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실천활동을 의미 한다. 이러한 실천활동은 마르크스의 ‘지양’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난다. 마르크스의 ‘지양’으로서의 “실천은 기존 현실을 인간의 행동을 통하여 혁명하는 것이다.”28)

 

         28) 쉴로모 아비네리(Shlomo Avineri), 『칼 마르크스의 사회사상과 정치사 상』, 이홍구 옮김, 까치, 1989, 188쪽. 

 

여기서 지양, 실천, 혁명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일반, 특수이면서도 보편이라는 가상을 뒤집어쓰고 있는 ‘규정되어 있는 것’(자본)을 넘어서서 의식적으로 보다 고차적 이고 새로운 보편을 지향하는 것이다.

실천은 인간의 ‘사회성’과 ‘타자의 타자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물자체는 현상과 동일시되지만 현상으로 동일화되지 않는 타자의 타자성(사회성)을 가지고 있다.

물 자체와 현상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는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물질적 욕구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에게서 물질적 욕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자의 임금’으로만 ‘규정되는 것’ 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 노동자의 임금은 ‘다음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최소한의 재화(사용가치)’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은 ‘자연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노동력의 (재)생산은 자본으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의 타자성 영역, 즉 물 자체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노동력의 (재)생산에는 경제적이고 상품의 규정으로서는 규정 되지 않는, 그리고 규정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계급으로서의 노동자의 ‘자기 생산’을 위한 노동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자기 생산을 위한 노동은 타자의 타자성을 배격하는 배타적인 사적 소유(배타적 개인주의)를 넘어서는 ‘초월론적’인 사회성을 내포하 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생산은 인간 활동의 보편적 지향과 완전히 무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각 개인은 상대방의 잠재력을 생산 활동을 통하여 발전시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잠재력을 극소화시키는 데 급급한 경쟁자가 된다. 그러므로 경제 행위와 재산은 상호성의 유대가 아니라, 각 개인을 갈라 놓는 힘이 된다.

각자는 타인을 희생시켜서 자신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각 개인은 자기 폐쇄적인 원자가 되며, 상호성은 경쟁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29)

 

      29) 같은 책, 166쪽. 

 

그러나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과정은 자본의 생산 과정 처럼 노동 과정이다. 노동자를 생산하는 과정은 수동적으로 사용가 치들을 소비만 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러한 소비를 통해 유적 존재로 서의 인간을 지향하며 새롭게 자신을 질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과 정이다. 억압과 통제, 감시가 이루어지는 자본의 재생산 과정 외부 에 있는 초월론적 ‘자유 시간’에 일어나는 일은 일정한 생산 과정이 며, 노동자의 본성과 능력은 이 과정 중에서 바뀌게 된다. 따라서 이 과정 중에서 노동자라는 인간 존재는 주체로 변하게 된다. 이러 한 노동자 생산 과정은 노동력을 행사하는 과정인 동시에 노동력을 키워내는 과정이다. 사용가치를 소비할 때마다 노동자는 어떤 특정 한 측면에서 생산된다.30)

 

         30) “여가 시간이자 보다 고차원의 활동을 위한 시간인 자유시간은 그 소유자를 당연히 다른 주체로 전환시키고,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다른 주체로서 직접적인 생산과정에도 들어간다.” “우리가 부르주아 사회를 고찰하면 사회적 생산의 마지막 결과로서 그 곳에는 언제나 사회 자신, 즉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인간 자신이 나타난다. 생산물 등처럼 고정된 형태를 가지는 모든 것은 이 운동에서 계기로, 소멸의 계기로만 나타난다. 여기에서 직접적 생산 과정 자체는 계기로서만 나타난다. 과정의 조건들과 대상화들은 스스로 균등하게 과정의 계기들로 나타나며, 과정의 주체들로서는 개인들, 그러나 그들이 새롭게 생산하듯이 재생산되는 상호 관계 속에서의 개인들만이 나타난다. 이 개인들은 자신의 고유하고 지속적인 운동 과정 속에서 그들 자신이 만들어 내는 부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만든다.” K. Marx, Grundrisse, MEW 42, S. 607~608 205 

 

다시 말하자면 사용가치 소비 활동의 모든 과정은 노동자를 주체로 만든다. 이 사용가치는 육체적․생리적 필수 품뿐만 아니라, “순수한 동물화”와 구별되며 “노동자를 노예와 구별 시키는 더 높은 수준의, 나아가 문화적인 차원의 만족, 자신의 이익 을 열띠게 옹호하는 일, 신문을 구독하는 일, 강의를 듣는 일, 자식 들을 교육시키는 일, 취미를 계발하는 일 등등의 것들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31) 등 사회적으로 계발된 인간의 요구에 부응하는 사용가 치이다.

 

     31) K. Marx, Grundrisse, MEW 42, S. 212

 

그러므로 마르크스에게서 물질적 욕구 충족은 자본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규정되지 않는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규정하고자 하는 노 동자계급의 실천활동이다. 이러한 실천활동을 통해 노동자계급은 배 타적 개인으로부터 ‘사회적 개인’으로 새롭게 자신을 생산함으로써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뿐만 아니라 자기자신까지도 변혁’하게 된다. 그러므로 “환경의 변혁과 인간 활동 또는 자기 변혁의 일치” 로서의 노동자의 자기 생산, 즉 물질적 욕구의 충족은 자본에 의해 이미 규정된 것(개별적 개인)을 넘어서서 자본에 의해 규정되지 않 은 것 또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을 새롭게 규정해야만 하는 ‘자기명 령’으로서의 ‘정언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6. 나가는 말

마르크스의 생산 또는 생산력은 기존의 경험론(유물론)-합리론(관 념론)의 관계구조를 넘어섬(해체함)과 동시에 질적으로 새로운 관계 방식을 의식적으로 창조해내는(혁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천은 해체와 창조를 동시에 내포하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 역시 규정되지 않은 것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관계구조(경험론-합리론)를 초월하는 것임과 동시에 억압되지 않고 배제되지 않는 새로운 관계구조를 ‘의 식적으로’ 생산해내는 것이다. 생산력에 의하여 기존의 생산관계(경 험론-합리론 관계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생산관계가 수립될 수밖에 없고, 새로운 생산관계의 확립은 당연히 기존의 상부구조를 해체 하고 새로운 상부구조를 생산하게 된다. 실천으로서의 마르크스의 생산 또는 생산력은 포이어바흐가 생각 한 것과 같은 ‘불결한 유대적 현상 형태’로서의 실천, 즉 단지 오감 에 의한 ‘동물적’ 생활 방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끊임없이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자신으로 생산하는 능력이자 그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실천은 혁명적이다. 실천으로서의 칸트의 정언명령 역시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를 지향함으로써 개별적인 개인을 보편적인 존재, 즉 타자의 타자성을 지닌 ‘사회적’ 개인으로 생산하고자 자유의지를 내포하고 있다.32) 마르크스와 칸트의 실천 둘 모두는 혁명적이며 초월론적이다. 이 둘은 근대 경험론-합리론의 이원적인 대립항 체계를 종합·통일시키 면서도 그 대립항 관계 자체를 넘어서고 있다. 그리고 이 실천의 가 능 근거는 바로 ‘물자체’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실천 유물론에 기 반하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는 헤겔의 절대정신이 자신을 실현하 는 최종적인 목표(게르만 민족이 지배하는 보편적인 세계국가) 또는 현실이 형성해야 할 동일성의 이념이 아니라,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 즉 ‘타자의 타자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는 타자의 타자성에 기반하는 ‘각기 자유로운 개인들 이 연대하는 사회’이며, “우리가 성취해야 할 어떤 상태, 그것을 향 해 현실이 형성되어야 하는 어떤 이념도 아니”고, “현상의 상태를 지양할 현실적 운동”33)으로서 인간의 유적 본성의 실현, 즉 자기 자신의 새로운 생산이라는 “완전한 자발성”34)에 기초하고 있다.

 

       32) 이와 관련하여 리쩌허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천이야말로 ‘물자체’(‘스스로 존재하는 사물’)를 ‘나를 위한 물체(위아지물爲我之物)’가 되게 하며, ‘불가지’를 알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실천이라는 것은 결코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개체의식의 활동에 머물지 않는다.” 리쩌허우 (李澤厚) 지음, 『비판철학의 비판-칸트와 마르크스의 교차적 읽기』, 피경 훈 옮김, 문학동네, 2017, 284~285쪽.

      33)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김대웅 역, 두레, 1989, 78쪽.

      34)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 비판 2』,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8, 735쪽.

 

 마르크스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 이는 마르크스 자신, 자신의 유물론 그리고 그 유물론이 지향하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에 대한 초월론적인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1』,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8. , 『순수이성비판 2』,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8. , 『실천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2. K. Marx, Grundrisse, MEW. 42. , Das Kapital Ⅰ, MEW. 23. , Die deutsche Ideologie, MEW. 3. 칼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김호균 옮김, 백의, 2002. , 『자본론』,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1.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김대웅 역, 두레, 1989. 쉴로모 아비네리(Shlomo Avineri), 『칼 마르크스의 사회사상과 정치사 상』, 이홍구 옮김, 까치, 1989. 가라타니 고진, 『유머로서의 유물론』, 이경훈 옮김, 문화과학사, 2002. 리쩌허후(李澤厚), 『비판철학의 비판-칸트와 마르크스의 교차적 읽기』, 문학동네, 2017. 사카베 메구미, 아리후쿠 고가쿠 외, 『칸트 사전』, 이신철 옮김, 도서출 판 b, 2009. 백종현, 『한국 칸트 사전』, 아카넷, 2019. 한단석, 뺷칸트철학사상의 이해뺸, 養英閣, 1983, 282~283쪽. 이재헌, 「칸트의 물자체 개념」, 『철학·사상·문화』 제6호, 2008. 01. 임건태, 「칸트의 물자체에 대한 니체의 비판」, 『니체 연구』 제35집, 2019. 04. 김석수, 「칸트철학과 물자체」, 『현대사상』 13호, 2014. 03. 이진경, 「마르크스주의에서 생산력 개념의 문제」, 『마르크스주의 연구』, 3권 2호, 2006. 35)

 

 

Kant’s Thing Itself as a theoretic Basis of Materialism in Marx

Lee Jae Yoo

In Marx’s materialism, the process of recognizing reality is a process of ‘practice’ that changes not only the observed object but also the observing subject. However, in the traditional philosophies of empiricism and rationalism, the process of cognition is a process of ‘contemplation’ that neither changes the observed object nor the observing subject. For this reason, Marx says that the lack of practical elements is a common feature between empiricism and other traditional materialism and idealism. Contemplative traditional philosophy does not escape the contradiction of the inconsistency between the subject and the object, and goes back and forth between the two. In other words, it cannot escape the antagonistic and contradictory binary relationship of whether the subject is prior or the object is prior. In this binary relationship, ‘subject’ cannot be established. In order for the subject to  be established, it is necessary to transcend the binary relation system itself while synthesizing and unifying the oppositions and contradictions of the binary relation. This is the meaning of Marx’s saying that philosophy cannot realize itself without sublimating itself, and cannot sublime itself unless it is realized. The same goes for Kant. Kant tried to transcend the binary relation between empiricism and rationalism while synthesizing and unifying it. Thus, ‘contemplative’ pure reason produces itself anew as ‘transcendental’ practical reason that transcends this binary relational frame in order to realize it while substituting itself. This new practice as self (reason) production appears in the form of a ‘categorical imperative’. The categorical imperative is a voluntary, ‘transcendental’ imperative one gives to oneself. Pure reason subverts itself and realizes itself with practical reason as a new self. The basis for this practice is ‘thing itself’. Thing itself is not simply ‘unrecognizable’, it is something that has not been defined now, but has to be ‘determined’ in the future. Thing itself has a ‘transcendental’ characteristic that synthesizes and unifies what can be defined now and what can be defined in the future but cannot be defined now, i.e., the ‘otherness of others’. The otherness of the other of thing itself is the ground that makes the subversion and realization of philosophy possible for Marx and the 212 이재유 subsumption and realization of reason for Kant. Subject sphere: Social Philosophy, Political Philosophy

 

Key words: Materialism, Thing Itself, Subject, The Otherness, Freedom, Praxis, Self-Production, Sociality, Universality

 

 논문투고일 2022년 5월 4일 / 심사일 2022년 5월 16일 / 심사완료일 2022년 6월 18일 

 시대와 철학 2022 제33권 2호(통권 99호)

마르크스 유물론의 이론적 토대로서 칸트의 물자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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