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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

(1257)
진관사에서/이병일 진관사 외진방, 빗소리 곁에 두고서내 것 아닌 것을 생각한다더러운 것을 몸뚱이에 두르고 와서그 어디에도 버릴 수가 없다우연찮게 앵두의 그것처럼 탱글탱글익어가는 빗 줄기를 보면서 밥 생각없이 구운 두부 찜을 먹었다좋아라, 피가 돌고 숨이 돌았다두부 자체가 간수인데 몸에 붙은흰 그림자 잔뜩 으깨진 것이 보였다
해바라기의 비명(碑銘)/함형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질투는 나의 힘/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니 청춘을 세워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간장 항아리/김은하 콩과 소금이 조화를 부린 것이 아니다항아리 속 검붉은 엣센스는콩밭 이랑에 불던 바람 소리​지난 여름 따갑게 내리 쬐던단디 단 햇살이 녹아난 것​오김으로도 말할 수없는깊고 깊은 아득한 오천 년​우리 어머니가 우리를 잉태하여둥그런 배를 쓰다듬듯​지켜온 곰삭은 세월이거늘
폭설(暴雪)/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남도(南道)땅끝 외진 동네에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온 천지(天地)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
11월의 시 11월 나태주​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11월 들꽃​오보영​이 시린 계절에..​고운 꽃을 피워내게​기쁨을 주고활기를 돋우는네게나도​마음을 주련다​내가줄 수 있는 만큼의사랑을네게​듬뿍 안겨주련다​​​​​​11월의 노래​김용택​해 넘어가면 당신이 더 그리워집니다.잎을 떨구며 피를 말리며가을은 자꾸 가고당신이 그리워 마을 앞에 나와산그늘 내린 동구길 하염없이 바라보다산그늘도 가버린 강물을 건넙니다.​내 키를 넘는 마른 풀밭들을 헤치고강을 건너 강가에 앉아헌옷에 붙은 풀씨들을 떼어내며당신 그리워 눈물납니다못 견디겠어요아무..
저무는 꽃잎 ​/도종환 장 화려하게 피었을 때그리하여 이제는 저무는 일만 남았을 때​추하지 않게 지는 일을준비하는 꽃은 오히려 고요하다​화려한 빛깔과 향기를다만 며칠이라도 더 붙들어두기 위해조바심이 나서머리채를 흔드는 꽃들도 많지만​아름다움 조금씩 저무는 날들이생에 있어서는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아름다운 날에 대한 욕심 접는 만큼꽃맺이 한 치씩 커오른다는 걸아는 꽃들의 자태는세월 앞에 오히려 담백하다​떨어진 꽃잎 하나가만히 볼에 대어보는봄날 오후
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이 몇 개저 안에 천둥이 몇 개저 안에 벼락이 몇 개 저게 저 혼자둥글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저 안에 땡볕두어 달저 안에 초승달 몇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