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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

11월의 시

11월

나태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11월 들꽃

오보영

이 시린 계절에..

고운 꽃을 피워

내게

기쁨을 주고

활기를 돋우는

네게

나도

마음을 주련다

내가

줄 수 있는 만큼의

사랑을

네게

듬뿍 안겨주련다

11월의 노래

김용택

해 넘어가면 당신이 더 그리워집니다.

잎을 떨구며 피를 말리며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이 그리워 마을 앞에 나와

산그늘 내린 동구길 하염없이 바라보다

산그늘도 가버린 강물을 건넙니다.

내 키를 넘는 마른 풀밭들을 헤치고

강을 건너 강가에 앉아

헌옷에 붙은 풀씨들을 떼어내며

당신 그리워 눈물납니다

못 견디겠어요

아무도 닿지 못할 세상의 외로움이

마른 풀잎 끝처럼 뼈에 스칩니다.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에게 가 닿고 싶은

내 마음은 저문 강물처럼 바삐 흐르지만

나는 물 가버린 물소리처럼 허망하게

빈 산에 남아 억새꽃만 허옇게 흔듭니다

해 지고 가을은 가고 당신도 가지만

서리 녹던 내 마음의 당신 자리는

식지 않고 김납니다

 


11월 마음의 기척

박노해

흙마당

잡초를 뽑듯

말을 속는다

가을마당

낙엽을 쓸듯

상념을 쓴다

마당가

꽃을 가꾸듯

고독을 가꾼다

흰 서리

아침 마당에

시린 국화 향기

첫눈이 오려나

그대가 오려나

11월 마음의 기척

11월에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

이채

말을 하기보다 말을 쓰고 싶습니다

생각의 연필을 깎으며 마음의 노트를 펼치고

웃음보다 눈물이 많은 고백일지라도

가늘게 흔들리는 촛불 하나 켜 놓고

등 뒤에 선 그림자에게 진실하고 싶습니다

피었을 땐 몰랐던 향긋한 꽃내음이

계절이 가고 나면 다시 그리워지고

여름 숲 지저귀던 새들의 노랫소리가

어디론가 떠나고 흔적 없을 때

11월은 사람을 한없이 쓸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바람결에 춤추던 무성한 나뭇잎은 떠나도

홀로 깊은 사색에 잠긴 듯

낙엽의 무던가에 비석처럼 서 있는

저 빈 나무를 누가 남루하다고 말하겠는지요

다 떠나보낸 갈색 표정이 누구를 원망이나 할 줄 알까요

발이 저리도록 걷고 걸어도 제자리였을 때

신발끈을 고쳐 신으며 나는 누구를 원망했을까요

그 길에서 하늘을 보고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나는 또 누구를 원망했을까요

하늘을, 세상을, 아니면 당신을

비록 흡족지 못한 수확일지라도

그 누구를 원망하지 말 것을

자신을 너무 탓하지 말 것을

한 줄 한 줄 강물 같은 이야기를 쓰며

11월엔 한그루 무소유의 가벼움이고 싶습니다

11월의 나무

남정림

나는 너에게 갈 수 없지만

너는 내게로 올 수 있다

우리가 함께 걸었던 순간에

단풍처럼 빛나던 심장을

널 위해 가지에 걸어 두었다

와서 보아라!

사랑하기에

낮은 곳으로 질 수 있는

낙엽 속에서 움트는

생명의 밑거름을

다가오는 겨울의 희망을

꼬옥 껴안을 수 있게

불타는 마지막 빛으로

너를 감싸주고 싶다

다 떠나가는 듯한 하늘 아래

일자로 허리 세우고

꿋꿋하게 너의 곁을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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