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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해방 조선의 맑스주의 역사철학: 신남철의 ‘역사적 주체론’과 ‘비극적 운명론’/박민철.건국대

요약문 

본 연구는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맑스주의 철학자인 신남철의 역사 철학적 사유를 분석하는 것이다. 특히 그의 철학을 몇 가지 키워드을 통해 단절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분석하는 기존 연구들과는 달리, 조선의 변혁 을 담당할 ‘새로운 주체’에 대한 고민, 그러한 주체들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서 ‘역사적 주체’와 ‘역사적 실천’에 대한 설명, 마지막으로 전환기의 조선 에 필요한 역사적 주체들의 실천으로서 ‘비극적 운명론’ 등의 도입을 발전 적 과정의 관점에서 추적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본 연구는 식민지 조 선과 해방 조선을 관통하는 신남철의 역사철학이 맑스주의와 헤겔철학의 영향에 따라 구성된 ‘역사적 주체론’과 ‘비극적 운명론’으로 공식화될 수 있 음을 밝혔다. 또한 신남철 역사철학의 의의가 제국주의 시대의 역사적 비관 론, ‘정신과 자본’을 역사의 진정한 주체로 설정하는 당시의 반동적 사유들과 끈질지게 투쟁한 점에 있음을 밝히는 한편, 최종적으로는 신남철 역사철 학 기획이 식민지 조선과 해방 조선의 당면 현실에 필요한 역사적 주체들 의 자발적인 희생을 이론화하려는 것에 있었음을 논증하였다.

주 제 : 한국철학, 한국현대철학, 사상사, 서양철학1세대

검색어 : 역사철학, 맑스주의, 헤겔철학, 신남철, 비극적 운명론 

 

1. 식민지 조선에서 서양철학 연구와 ‘신남철’이라는 상징

엄밀히 말해 1920년대부터 시작된 식민지 조선에서의 서양철학 연구는 단순한 이론적 호기심을 벗어나 제국주의의 침탈의 참혹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에 대한 탐구로부터 본격화되었다.

예를 들어 식민지배를 위한 지식-담론의 생산, 그리고 식민지 엘리트의 양성을 위해 설립된 제국 일본의 근대적 대학 이식 모델인 경성제국대학을 다녔던 근대 조선의 ‘서양철학연구1세대’들조차도 제국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철학적 논리탐구에 힘썼다.

그들은 대체로 식민지 해방의 미래를 전망하고 기획하는 과학적인 방법론으로서 ‘헤겔철학’과 ‘맑스주의’, 그리고 그것들이 결합된 가장 구체적인 분야로서 ‘역사철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공유했다.

여기서 이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바로 신남철이다. 이른바 “신남철로 표상되는 지적체계”1), “근대 한국의 ‘지식 제도’ 의 전개를 개인의 차원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기호”2)와 같이 한국현대철학사에서 신남철 철학의 상징적 위상은 충분한 근거를 갖는다.

하지만 신남철이라는 지적 상징이 담아내는 가장 명징한 모습은 ‘맑 스주의의 한국적 수용과 변용’3)이다.

 

       1) 김윤식, 임화와 신남철: 경성제대와 신문학사의 관련 양상, 역락, 2011, 10쪽.

       2) 신남철, 정종현 엮음, 신남철 문장선집 Ⅰ: 식민지 시기편, 성균관대학 교출판부, 2013, 5쪽 책머리.

       3) 김재현, 한국사회철학의 수용과 전개, 동녘, 2002, 107쪽; 이태우, 「신남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수용과 한국적 변용」, 동북아문화연구 제 46집,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16, 126쪽. 

 

분명 신남철은 한반도 사상사 에서 서양 급진철학의 유물변증법을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주체적으로 적용한 대표적인 ‘한국적 맑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생각 한 철학함은 식민해방의 논리를 발굴하고 이론화는 것이었으며, 이때 그러한 철학의 의무에 가장 날카로운 방법론과 세계관을 제공하 는 것은 맑스주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사실은 신남철 이 맑스주의의 ‘보편성’과 식민지 조선의 ‘특수성’을 종합하려는 자 신만의 고유한 철학적 기획을 끈질기게 수행했다는 점이다. 신남철은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주체 생성의 문제로 집약시켰다. 그는 서구 근대성이 르네상스・종교개혁・산업혁명・프랑스혁명 등의 새로운 사회구조와 패러다임을 이끄는 주체 생성을 핵심적인 목 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 강하게 공명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지 배를 받고 있었던 당시 한반도 현실이 이를 극복・저항하려는 근대 적 주체 생성의 철학적 모색으로 그를 이끌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따라 탈식민주의적 주체 형성을 향한 철학적 지향들 이 신남철 철학체계 내에서 헤겔과 맑스의 역사철학적 모티브와 방 법론을 거쳐 ‘역사적 주체’, ‘역사적 실천’, ‘비극적 운명’ 개념 등으 로 발전적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를테면 신남철이 20대 초반에 쓴 단 편소설 「된장」의 작중 주인공은 현실의 억압과 고뇌에 대항하지 못 한 채 비극적으로 사라져가는 자신의 비극적 삶을 ‘운명’이라는 단 어로 묘사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운명이라는 키워드는 헤겔철 학과 맑스주의의 사상적 세례와 함께 신남철 역사철학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발전했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신남철에게 운명은 맑스주의 가 말한 역사발전의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한 고유한 개념어이자, 동 시에 식민지의 비극적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역사적 주체들의 실천 논리를 확보하기 위한 개념어였다.

‘주체’, ‘역사’, ‘실천과 운명’ 등과 같은 역사철학적 키워드는 신남철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하지만 그동안 이러한 개념들 을 신남철 철학체계의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 이해하려는 연구는 누락되어왔다.

더욱이 신남철 연구가 한국철학계에서 꾸준하게 수행되어 왔고 매우 중요한 결과들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남철은 여전히 한국철학계에서 비중 있게 다뤄졌던 철학자는 아니었다. 한국의 문학계와 역사학계의 연구가 신남철이 쓴 시와 소설에 대한 비평, 조선문학사 관련 논설 분석, 나아가 조선학운동과 조선신민당 활동에 이르기까지 폭넓고도 다양하게 수행4)되었던데 반해, 신남철 철학에 대한 철학계의 연구는 소수에 불과했다.

 

     4) 방기중, 뺷한국근현대사상사연구뺸, 역사비평사, 1992; 박광현, 「경성제국대 학의 문예사적 연구를 위한 시론」, 뺷한국문학연구뺸 제21집,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1999; 박광현, 「경성제대와 ‘신흥’」, 뺷한국문학연구뺸 제 26집,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03; 손정수, 「신남철, 박치우의 사상 과 그 해석에 작용하는 경성제국대학이라는 장」, 뺷한국학연구뺸 제14집,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5; 정종현, 「신남철과 ‘대학’ 제도의 안과 밖: 식민지 ‘학지(學知)’의 연속과 비연속」, 뺷한국어문학연구뺸 제54집, 동 악어문학회, 2010. 

 

한국현대철학 관련 연구성과들이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이는 마찬가지 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신남철 철학을 해석하는 데 개입하는 일종의 프레임이다. 현재 신남철 철학에 대한 철학계의 연구는 대체로 맑스주의의 한국적 수용과 변용이라는 도식이 전제되면서 서양철학 수용 및 이와 연계된 맑스주의 수용 등의 주제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신남철의 철학을 다시금 분석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남철의 철학이 서양철학의 단순수용과 같은 맥락을 제외하고 한국 현대철학의 고유한 문제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례이 기 때문이다.

결국 신남철 철학은 한국철학계의 지평 안에서 여전히 어떤 것들이 미해결인채로 우리들에게 남아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자기성찰적 대상으로 확장된다. 하지만 부족한 한국현대철학 연구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남철의 철학체계에 직접 침투하여 거기에 담긴 의도와 의미 등을 분석하는 연구들이 여 전히 소수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었으며, 특히 그가 각별하게 다루는 철학적 개념과 철학적 기획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연구5)는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다.

 

     5) 이때 이규성의 연구는 기존 신남철 연구방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방법론과 주제의식을 제공했던 선도적인 연구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규성, 한국현 대철학사론,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2, 595-673쪽을 참고. 

 

본 연구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핵심은 신남철 철학의 특 정주제와 핵심개념들을 사상사적 발전과정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신남철 철학의 출발점은 탈식민의 고민이 집약된 ‘새로운 주체 형성’의 문제로서 이것은 곧 맑스주의의 과학적 방법론을 거쳐 마침내 역사와 결합하게 되고, 그러한 토대를 기반으로 헤겔철학의 중요 모티브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비극적 운명’으로 정의 되는 전환기의 역사적 주체의 실천논리를 이론화하는 것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본 연구의 목적은 신남철 철학 의 주체, 역사, 실천, 운명과 같은 개념들이 이론적 발전과 유기적인 결합 속에서 식민지 조선의 고유한 역사철학적 테제들로 구체화되어 갔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이하의 글에서는 신남철 역사철학적 사 유의 시작을 알리는 ‘새로운 주체’에 대한 고민, 나아가 그것의 구체 적인 결과로서 ‘역사적 주체’와 ‘역사적 실천’에 대한 설명, 마지막 으로 식민지 조선에 필요한 역사적 주체들의 실천으로서 ‘비극적 운 명론’ 등의 도입을 추적할 것이다.

 

2. ‘새로운 인간 유형의 문제’: 휴머니즘과 역사철학의 결합

신남철의 철학이 ‘실천적 맑스주의’와 ‘낭만적 인문주의’ 또는 ‘로고스(Logos)’와 ‘파토스(Pathos)’라는 두 가지 요소의 ‘긴장관계’ 속 에서 결합되어 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6)

 

       6) 김재현(한국사회철학의 수용과 전개, 동녘, 2002)과 이규성(한국현대철 학사론,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2)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동일한 맥락 에서 이를 서양철학1세대들의 철학함에 내재한 고유한 ‘파토스적 경향’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병수, 「1930년대 서양철학 수용에 나타난 철학1세대 의 철학함의 특징과 이론적 영향」, 시대와 철학 제17권 2호, 한국철학 사상연구회, 2006, 85쪽. 한편 문학계의 연구들은 이러한 경향을 ‘현상학 적 흐름’으로 규정하는 한다. 외부세계인 인간과 사회에 대한 본질적 탐구 를 추구하는 현상학 연구는 경성제대 철학과 교수진의 학습내용과 커리큘 럼 등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경향(손정수, 「신남철, 박치우의 사상과 그 해석에 작용하는 경성제국대학이라는 장」, 한국학연구 제14집, 인하대 학교 한국학연구소, 2005, 196쪽.)이었으며, 이러한 경향의 내용들은 곧 “신체, 불안, 파토스적인 것 등에 근접한 것”(김윤식, 임화와 신남철: 경 성제대와 신문학사의 관련 양상, 역락, 2011, 26쪽.)으로 나타났다는 것 이다. 표현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기존 연구 모두는 신남철 철학체 계 안에 이질적인 두 요소가 모순적으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현실의 비참함은 전통적인 맑스주의에서는 발견되기 어려운 풍부한 인간성과 인도주 의적 유대에 대한 갈망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사회해방을 목적으 로 하는 맑스주의의 과학적 세계관과 인간해방을 목적으로 인문주의 가치관을 동시에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유와 평등을 주요 이념으로 삼는 가운데 과학적 방법론, 문화와 예술론, 역사철 학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산되고 있는 신남철의 논설은 대체로 이러한 판단을 실증한다. 그런데 이외에도 다른 방식의 해석가능성 도 분명 존재한다.

이를테면 신남철 철학이 특정 문제의식을 관통해가면서 과학적 세계관과 낭만적 인문주의 사이의 ‘유기적 결합’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먼저 검토할 수 있는 주제는 신남철의 ‘실존주의 비판’이다.

일제강점과 해방이라는 역사적 혼돈의 시기를 지극히 감내하면서 자신의 철학체계를 형성해 온 신남철에게 가장 중 요한 것은 무엇보다 새로운 주체 형성의 문제였다.

그는 보다 높은 삶의 이상을 추동시키고 새로운 인간상의 실현을 추구하는 낭만주의적 열정과 충동에 주목했다.

현실 삶의 생생한 감정과 높은 이상을 구현하는 주체적 인간의 실현에 몰두했던 것은 식민지 질곡에 의해 신음하고 있었던 신남철이 청년기부터 가지고 있었던 고유한 철학함 의 자세이기도 했다. 신남철 철학의 초기에 주로 수행되었던 실존철 학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과 철학함의 자세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경성제국대학 조수(助手)로 근무하던7) 1930년대 초반 신남철은 당시 서구 지성계를 이끌고 있던 실존주의 철학을 강하게 비판한다.

경성제대 철학과라는 제도와 공간이 전한 사상적 영향과 맞물리면서 신남철에게 실존철학은 인간을 ‘비역사적인, 평면적인 의미’로서만 해석하는데, 다른 무엇보다 그것은 역사적 추이에 따라 변해가는 인 간의 실천적 투쟁과 혁명적 요소를 박제화하는 사상이었다.8)

 

    7) 경성제대의 교원구조는 교수(敎授), 조교수(助敎授), 조수(助手)의 구도였으 며 조수라는 직위는 제국대학 교수에 이를 수 있었던 “아카데믹 커리어를 위한 에스컬레이터”(이효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 인맥 구조와 조수 제도」, 단국대학교 일본연구소 HK+사업단 기획, 뺷동아시아 지식인문학의 지평을 탐색하다뺸, 경진출판, 2017, 351쪽.)였다. 하지만 그의 삶의 궤적 은 이로부터 벗어난 길이었다.

   8) 신남철, 「헤겔 百年祭와 헤겔 復興」(1931.07), 歷史哲學, 서울출판사, 1948, 146쪽. 신남철은 자신의 글을 모아 歷史哲學(서울출판사, 1948) 과 轉換期의 理論(백양당, 1948)으로 출간했다. 이하에서 신남철의 글은 원래 발표된 년도를 ()안에 표기하되 원래 출처와 상관없이 이 두 권의 책 을 중심으로 인용할 것이며, 포함되지 않은 논설들은 원래 출처에 따를 것이다. 그 외에도 신남철 논설 중 歷史哲學에 포함되지 않는 글을 모아 최근에 편집・출간한 신남철의 문장선집 Ⅰ(정종현 엮음,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3)에서도 인용할 것이다. 원문 그대로를 인용하는 것을 원칙( 신남철의 문장선집의 인용은 제외)으로 하되 현재 한글용법에 맞게 최소한의 띄어쓰기를 할 것이다.

 

 

특히  하이데거 철학은 사회적 관계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개인, 다시 말해 ‘부르주아적 인간상’을 표현할 뿐이다.

부르주의적 인간상을 강조 하는 사상은 ‘실존으로의 전향’이라는 인간의 자각적 계기를 내세우 지만, 결국 인간 문제를 사회관계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된 ‘불안한 개인’의 문제로서만 관찰하도록 강요한다. 신남철은 이러한 철학이 계급적 모순과 투쟁 등 현실의 시급한 문제를 은폐시키고 사회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포기하도록 만든다고 비판했다.9) 따라서 신남철에게 우선적으로 극복대상이 되었던 것은 역사와 사 회로부터 추상화된 하이데거 식의 실존적 주체였다. 이제 신남철은 그렇게 왜곡된 주체의 회복을 철학적으로 기획하고 이를 실행한다. 이는 식민지 조선의 해방을 위해서라도 필수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사항이기도 했다. 실제로 신남철은 당시와 같은 혁명의 시기에 필요 한 것이 “새롭은 人間 類型의 問題”(신남철(1946), 1948a, 137)라고 역설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새로운 인간 유형 의 문제’가 이미 1930년대부터 신남철이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인 철학적 지향이자 신남철 역사철학의 기본적 토대를 이룬다는 점이 다. 당연하게 신남철은 실존철학적 흐름과는 달리 인간존재의 역사 적이고 사회적인 존재구속성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그러한 주체들이 ‘지금, 이곳’의 역사적 현실에서 수행하는 능동적인 실천에 대한 강렬한 열망 역시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이데거로 대표되는 실존철학은 “社會變革의 主體的 實踐 鬪爭을 傍觀 解釋만 하는 反人民的 黨派的 ‘이데올로기’”10)에 불과할 뿐이며, “身體의 主體的인 實踐을 說明할 수 없”11)는 반동적 사상에 불과했다

 

      9) 신남철, 「實存哲學의 歷史的 意義」(1934.02), 歷史哲學, 서울출판사, 1948, 186-198쪽.

     10) 신남철, 「實存哲學의 歷史的 意義(1934.02)」, 歷史哲學, 서울출판사, 1948, 200쪽. 바로 여기서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신남철의 비판은 곧 자본주의 비판과 궤를 같이한다. 하이데거의 불안의식은 자본주의 현대 사회의 사회적 위기에 처한 부르주아 인텔리의 자기 동요의 표현일 뿐이 다. 여기서 신남철은 그러한 인텔리의 자기동요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인 충성과 개인들의 희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을 우려했다. 신남철, 「나치스의 哲學者 하이덱커」, 新東亞 제4권 11호, 東亞日報社, 1934.11.01. 신남철은 불안의 문제가 결국 인간학적 존재론으로 지양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과 연관하여 실존철학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철학계, 특히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의 ‘무’ 개념, 다나베 하지메(田邊元)의 ‘행위적 자유’, 미키 키요시(三木淸)의 ‘로고스와 파토스의 변증법 등은 현실에 입각한 인간학적 존재론의 모습을 마련하지 못한다 고 비판한다. 신남철, 「最近 世界思潮의 動向: 各國에 잇어서의 若干의 問 題의 嫡出 (四)」, 東亞日報, 1933.09.17., 5면. 

     11) 신남철, 「歷史哲學의 基礎論: 認識과 身體」(1937.01) , 歷史哲學, 서울 출판사, 1948,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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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신남철은 ‘새로운 인간 유형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해명을 위해 진정한 ‘휴머니즘’에 대한 논의로 이행한다. 핵심은 새로운 인 간 유형의 필요성, 그들의 실천성과 혁명성을 근거지우는 것이었다. 휴머니즘은 신남철 철학의 근저에 놓인 기본 지향이다. 해방을 목적 으로 하는 사회변혁의 식민지 조선에서도, 새로운 통일민족국가의 건설에 몰두하는 해방 조선에서도 휴머니즘은 반드시 필요한 이념이 었다. 여기서 신남철은 휴머니즘을 하나의 체계적인 학설이 아니라, 역사적 전환기에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자유를 향한 인간의 강 렬하고 풍부한 감정’ 그리고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정신’으로 폭넓게 규정했다.12)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정신은 곧 정의와 조화를 실현하 기 위해 사회적 모순에 대항하는 ‘항쟁의 정신’이었다. 신남철이 최 종적으로 휴머니즘을 “혁명적 휴머니즘”13)으로 명명했을 때 휴머니즘에 ‘혁명적’이라는 형용사가 결합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12) 신남철, 「‘루네상스’와 ‘휴매니슴’」(1946), 뺷歷史哲學뺸, 서울출판사, 1948, 123쪽.

   13) 신남철, 「民主主義와 ‘휴매니슴’」(1946.02), 뺷轉換期의 理論뺸, 백양당, 1948, 218쪽. 어떤 연구는 이러한 신남철의 혁명적 휴머니즘을 문학적 감성과 철학적 이성이 결합한(어느 하나 충분하게 만족시키지 못하는) “양다리 걸치기로서의 기질적 운명”( 김윤식, 임화와 신남철: 경성제대와 신문학사의 관련 양상, 역락, 2011, 151-152쪽)으로 정리하기도 한다. 하지만 휴머니즘에 대한 강한 요청은 좌우분열, 남북대립과 같은 해 방 조선의 현실적 조건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신남철은 휴머니즘이라는 보편적 이념지향 속에서 좌우 및 남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했다.  

 

 신남철은 인간을 계급적 인간으로서 규정해야 하는 맑스주의의 대 원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휴머니 즘이 다른 무엇보다 반드시 선행되고 실현되어야 할 이념이라고 생 각했다. 그래서 그는 낡은 사회제도, 관념과 지식체계 등의 사회적 환경이 빚어낸 역사적인 운동으로 휴머니즘을 이해한다. 물론 르네 상스 시기의 휴머니즘을 인간의 완전한 개성 실현을 위해 필요한 인 간의 자애심,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비이기적인 사회적 정의감, 고 전에 대한 교양의 존중 등으로 공식화하지만14), 초기부터 마련된 신 남철의 진정한 의도는 휴머니즘을 인간중심주의로 단순해석하는 도 식화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있었다. 신남철이 휴머니즘의 결함을 ‘혁명적 실천의지의 부족’, ‘사상적 운동으로서의 구체성 부족’ 등으로 규정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더군다나 신남철이 봤을 때 현재의 하이데거식의 휴머니즘은 자본주의적 개인주의를 토대로 하고 있으며 결국 이것은 중세 신중심의 세계 질서를 앞세운 국가주의와 파시즘을 불러올 여지가 다분했다.15)

 

    14) 신남철, 「民主主義와 ‘휴매니슴’」(1946.02), 뺷轉換期의 理論뺸, 백양당, 1948, 214-215쪽.

    15) 신남철, 「現代宗敎 마르틴루텔의 生誕 四百五十年에 잇어서의 루텔的 課題 (四)」, 뺷東亞日報뺸, 1933. 11.30., 3면.  

 

따라서 휴머니즘에 부족한 주체의 실천성과 혁명성은 시급하게 회 복되어야 할 요소들이었다.

이를 위해 신남철은 고대 희랍철학으로부터 휴머니즘의 진정한 의의를 불러온다.

그는 희랍어 원전 번역에 있어서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 중 최정점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16) 신남철에 의하면 휴머니즘은 ‘신으로부터의 해방’과 ‘인간성의 존중’ 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인간 그 자체의 ‘역능’ 때문이었다. 이를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증하는 것이 바 로 고대 희랍철학이었다.

신남철이 주목했던 고대 희랍철학의 진정한 의의는 신에 대한 인간의 ‘주체화’에 있었다.

이러한 의도를 바탕 으로 그는 헤라클레이토스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관을 피력한 다.

그것의 핵심테제는 “모든 人間에는 제 自身을 認識하고 思惟하는 힘이 賦與되어 있다”17)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인식과 사유는 단순히 주관적인 의식 차원에서 수 행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인간의 사유하는 힘은 신에 대한 인간의 해방이었고 주체적인 실천의 출발점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어」의 번역 이전부터 신남철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적 방법론을 역사적・발전적 사색을 규정하면서 특히 이를 “行의 思索”18)으로 정의했다.

 

    16) 김주일, 「개화기로부터 1953년 이전까지 한국의 서양고대철학에 대한 연구와 번역 현황 연구」, 시대와 철학 제14권 2호, 한국철학사상연구 회, 2003, 17쪽.

   17) 신남철, 「‘헤라클레이토스’의 斷片語」(1933.07), 歷史哲學, 서울출판사, 1948, 226쪽.

   18) 신남철, 「팔메니데스的 方法과 헤라클레이토스的 方法」, 朝鮮日報, 1932.12.06., 4면. 

 

구체적 역사와 현실에서의 실천으로 나아감으로써 비로소 진리를 입증하는 것, 다시 말해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헤라클레이 토스의 철학적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신남철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이 러한 변증법적 방법론을 확장시키는 데, 그것은 세계 속의 인간이 실천을 통해 세계를 구성하는 동시에 구성된 현실세계에 의해 다시 금 자신이 역사적으로 구성된다는 유물론적 세계관의 도입이었다.

 이에 따라 신남철은 한편으로는 ‘역사와 인간의 변증법적 발전’,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역사적 필연성’ 또는 ‘역사적 운명’으로 규정했다.

동시에 그러한 역사적 운명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사회구조에 의해 규정된 자신의 피동성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능동성의 결합을 예리하게 의식 하는 ‘역사적 주체’로서 위치시켰다.19)

새로운 주체 형성의 문제를 해명하고자 휴머니즘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한 신남철의 사유는 이제 본격적으로 맑스주의의 방법론 및 세계관과 결합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신남철은 휴머니즘에 부족했던 주체의 실천성을 맑스주의의 실천성으로부터 ‘복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20)

 

        19) 신남철, 「轉換期의 人間」(1940.03), 뺷轉換期의 理論뺸, 백양당, 1948, 184-195쪽.

        20) 이태훈, 「일제하 신남철의 보편주의적 역사인식과 지식인 사회 비판」, 민족문화연구 제68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5, 307쪽. 한편으로 신남철의 인간론이 곧 인간성을 과학적 실천의 차원으로 환원함으로써 자아와 우주의 소통적 공감을 지향하는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비판(이규성, 한국현대철학사론, 이화여자대학교출 판부, 2012, 670쪽)이 존재한다. 이러한 비판은 조선의 맑스주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맞춰진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본성에 대한 탐구를 의도적으로 거부했던 맑스주의 철학자들에 대한 어울리지 않는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주체 형성의 문제가 도달한 지점은 결국 맑스주의 방법론을 통해 구 성된 역사적 주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제 신남철이 수행해야만 하는 것은 주체와 역사의 결합 필요성을 과학적으로 증 명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역사철학의 방법론적 문제이기도 했다.

 

3. 식민지 역사철학의 맑스주의적 방법론: 역사발전의 필연성과 역사적 주체의 실천

제국주의의 극복을 사유하는 식민지 철학자에게 그것을 담당할 새 로운 주체 형성의 문제는 필수적이다. 신남철은 기존 철학이 결국 정치・경제적 현실로부터 유리된 ‘주체의 추상성’에 빠졌다고 비판 하면서 새로운 주체 형성의 문제를 ‘역사’와 함께 모색한다. 이러한 배경 아래 신남철은 ‘역사’에 대한 ‘과학’적 파악을 자신의 ‘철학’의 중심주제로 삼았다. 실제로 신남철 사유에 있어서 역사와 과학, 그 리고 철학은 하나로 결합될 때에 비로소 그것들의 개념적 의미가 확 실하게 구축된다. 이때 맑스주의는 그러한 개념들을 유기적으로 매 개해주는 기반이 된다. 1930년대는 맑스주의에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사상적 지위를 부 여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의 담론장 내 이론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였다.21) 당시 맑스주의는 하나의 ‘과학’이었다. 신남철 역시 맑스주의를 “오직 한 개의 科學, 즉 歷史의 科學”22)을 정립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받아들였다. 경성제대 재학 때부터 그는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와 자본론을 비롯하여 플레하노프의 유물사관의 근본 문제, 부하린의 유물사관, 힐퍼딩의 금융자본론등을 학습했 다.23)

 

    21) 박민철・이병수,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의 맑스주의 수용 양상과 의미 - 조선지광 ‘유물-유심논쟁’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제59집,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131-132쪽.

   22) 신남철, 「‘이데올로기’의 歷史的 規定」(1947.06), 轉換期의 理論, 백양 당, 1948, 16쪽.

   23) 정종현, 「신남철과 ‘대학’ 제도의 안과 밖: 식민지 ‘학지(學知)’의 연속과 비연속」, 한국어문학연구 제54집, 동악어문학회, 2010, 393-397쪽; 이태훈, 「일제하 신남철의 보편주의적 역사인식과 지식인 사회 비판」,  민족문화연구뺸 제68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5, 313쪽. 

 

이러한 과정에서 맑스주의의 수용은 그의 철학체계 안에서 사회역사적 통일원리로서 유물론과 변증법적 세계관으로 집중되었다.24)

신남철 철학이 역사철학일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논리가 맑스 주의의 영향 아래 이렇게 구축되고 있었다. 실제로 훗날 그에게 “哲 學은 다른 모든 學問이 그러하듯이 歷史的 世界의 經濟的, 政治的, 社 會的인 모든 發展 變革의 過程과 不可分의 關聯關係를 가지고 그 反 影模寫로서 나타난 一個의 科學”25)으로 공식화되었다. 이제 그는 본격적으로 역사와 역사법칙에 대한 과학적 파악으로 나아간다. 신남철에 의하면 역사는 곧 원죄에 의한 타락으로부터 최 후의 심판에 이르는 기독교식의 초자연적인 역사도 아니며, 헤겔식 의 절대이념의 자기발전 체계도, 기술된 역사의 반성적 사색도 아니 다.26) 역사는 보편적 역사학이 규정하듯 ‘생기(生起)한 사실 그것’과 ‘생기한 사실의 서술’의 결합이다. 하지만 신남철은 기존의 역사서술 에 있어서 역사 발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비판한 다. 역사발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강조하는 것은 신남철 고유의 역사규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철학체계를 발전시켰던 경 성제대 재학 당시부터 ‘역사’를 모든 학문들의 존재 근거로서 격상 시켜 파악하고 있었다. 이는 역사야말로 계급성과 사회성뿐만 아니 라 논리학・존재론・현상학 등 모든 철학사상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 는 근거라는 논리였다. 이에 따라 신남철은 역사철학을 “온갖 理論的 學問에 先行하여 그것의 立場의 可能을 ‘베레흐티켄’하고 이어서 모 든 知識의 限界와 妥當을 規定하는 胎盤”27)으로 규정했다.

 

     24) 신남철, 「文學과 思想性의 問題: 作家와 世界觀에 대하야 (四)」, 조선일 보뺸, 1938.05.19., 5면.

     25) 신남철, 「‘루네상스’와 ‘휴매니슴’」(1946), 歷史哲學, 서울출판사, 1948, 100쪽.

     26) 신남철, 「序文」, 歷史哲學, 서울출판사, 1948, 3쪽.

     27) 신남철, 「헤겔 百年祭와 헤겔 復興」(1931.07), 歷史哲學, 서울출판사, 1948, 143쪽 註三. 

 

 

그런데 ‘지식의 한계와 타당을 규정’하기 위해서 역사는 그 기준과 진리성을 반드시 확보해야만 한다. 결국 역사는 하나의 객관적이 고 필연적인 법칙에 따른 운동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다른 학문 을 판단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연적인 것이 결코 허용될 수 없기 때 문이다. 따라서 신남철에게 역사는 “矛盾的 諸要素의 克服과 轉化發 展”28)으로 정의된다.

물론 이러한 정의는 맑스주의의 변증법적 유물 론과 동일한 것이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받아들이는 신남철에게 역사는 사회경제적 모순(정치를 포함한 소유관계의 모순)의 원동력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었다. 이때 역사는 변증법적 운동의 과정으로서 결코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며 변증법적 법칙에 따라 발전하는 ‘필연’ 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신남철이 철학뿐만 아니라 문학비평과 문화 론 등 자신의 모든 논설에서 반복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개념적 서술 어가 바로 “역사적 필연”이었다. 신남철에 강하게 전제된 사유는 단 적으로 ‘이데올로기, 문화, 예술 등 모든 요소들에는 이 역사적 필연 이 개입되어 있다’라는 인식이었다. 예컨대 그는 ‘조선어 철자법 문 제’도 사회적 정세와 역사적 필연 속에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29)했 으며, 조선학 역시 맑스주의적 관점에 따라야만 ‘동양학’과 ‘세계적 보편학’으로의 발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30)

 

     28) 신남철, 「復古主義에 對한 數言: E·스프랑거의 演說을 中心으로 (中)」, 뺷 東亞日報뺸, 1935.05.10., 3면.

     29) 신남철, 「朝鮮語綴字法問題의危機에對하야」, 뺷新階段뺸 제1호, 朝鮮之光社, 1932.12, 59쪽.

     30) 신남철, 「조선연구의 방법론」(1934.10), 정종현 엮음, 뺷신남철 문장선집 Ⅰ: 식민지 시기편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3, 274-276쪽. 

 

그런데 이 ‘역사적 필연’은 단순히 맑스주의의 사상적 영향만이 아니라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신남철이 고유하게 수행하는 역사철학 적 기획의 출발점이자 동시에 1930년대 후반 식민지적 사유의 분열 상을 낳게 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미 신남철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철학자들에게 역사발전의 객관적 필연성과 합법칙성에 대한 인식은 매우 큰 화두였다.31)

맑스주의적 관 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 진입은 역사적 필연인 동시에 조선의 식민지 진입의 필연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철학적 해명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발전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맑스주의의 보 편성을 강하게 적용할 경우, 식민지 현실에 긴급하게 필요한 혁명성 과 실천성은 ‘자본주의의 붕괴는 필연적’이라는 역사발전의 필연성 속에서 형해화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신남철의 문제의식은 맑스 주의 관점에 따른 세계사적 발전의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식민지 조선의 특수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고민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역사의 필연적 발전으로서 식민해방의 필연성을 어 떻게 인식하고 증명할 것인지를 밝히는 문제였다. 신남철의 돌파구는 ‘주체의 실천성’에 기초하여 역사발전의 필연 성과 식민지 해방의 논리를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었다. 우선 신남철 은 인간을 ‘호머 파바(homo faber, 노동하는 인간)’로 규정한다. 이 는 인간 노동의 의미를 부각시키면서 이러한 노동을 매개로 인간이 역사적 존재로서 주체화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신남철에 게 ‘실천은 곧 노동이 아니면 안 될 것’32)이었고, 나아가 역사는 ‘시 간의 논리’이자 ‘노동의 논리’에 의해 규정되는 것33)이었기 때문이다.

 

    31) 홍영두, 「1930년대 서양철학 수용과 일본형 오리엔탈리즘 문제」, 사회 와철학 제27집, 사회와철학연구회, 2014, 343쪽; 조형열,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의 학술문화기관 구상과 ‘科學的 朝鮮學’ 수립론」,  歷史學硏究뺸 제61집, 호남사학회, 2016, 143쪽.

   32) 신남철, 「歷史哲學의 基礎論 : 認識과 身體(1937.01)」, 歷史哲學, 서울 출판사, 1948, 2쪽.

   33) 신남철, 「歷史의 發展과 個人의 實踐」(1946.08), 歷史哲學, 서울출판사, 1948, 39쪽.

 

따라서 노동은 개별적이고 추상적인 주체들이 구체적인 역사와 사회적 관계로 진입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즉 신남철에게 인간의  사회적 노동은 역사의 주체적 시원이다.

사회적 노동으로부터 인간 역사가 시작된다는 이러한 인식은 역사를 일종의 해방사로 인식하는 것이기도 했다. 신남철은 철학사를 단순히 인류의 형이상학적 개념 사가 아니라 ‘자연의 위협’과 ‘사회적 질곡’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 키는 투쟁의 역사라고 규정했는데,34), 그는 동일한 맥락에 따라 인 류의 역사 역시 자유실현을 위한 인간해방의 역사와 동일시했다. 이제 신남철에게 역사는 노동하는 주체들의 자기해방을 위한 실천 들이 집적되어 탄생한 하나의 결과물로 구체화된다.

그에 의도는 “역사는 개념의 나열이 아니라 주체의 실천이 축적된 노동시간의 총체”35)라는 사실의 증명에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다른 무엇보다 중 요한 것은 신남철이 주체의 노동을 역설하면서, 결국 이를 통해 역 사발전에 대한 주체의 개입가능성을 강하게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 다. 이를 집약시킨 것이 바로 신남철이 공식화한 “신체의 변증법”이 라는 개념이었다. 신남철의 문제의식은 한마디로 맑스주의의 변증법 에 기초하여 인간의 역사적 실천의 논리를 재구성함으로써 식민지 현실이 요구하는 해방적 실천의 이론화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이는 신남철의 관점에서 볼 때 맑스주의의 과학성에 부족한 주체의 실천 성을 방법론적으로 보완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선 그는 인식의 전제가 되는 주관(주체)의 성립조건을 고찰한다. ‘자기’에 대한 인식은 외부에 대한 인식의 전제조건이다. 그런데 자기를 인식하는 것은 자기 ‘신체’에 대한 자각 외에 다른 출발을 상 상할 수 없다. 즉 ‘인식의 문제’는 ‘신체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공허 한 것이다.36)

 

    34) 신남철, 「‘루네상스’와 ‘휴매니슴’」(1946), 歷史哲學, 서울출판사, 1948, 100쪽.

    35) 류승완, 이념형 사회주의: 박헌영・신남철・박치우・김태준의 사상, 도서출판 선인, 2011, 231쪽.

    36) 신남철, 「歷史哲學의 基礎論 : 認識과 身體」(1937.01), 歷史哲學, 서울 출판사, 1948, 4쪽.

 

‘주체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역사적 현실’이 전제되어야 했듯이 ‘주체의 인식 문제’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는 ‘신 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신남철의 기본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신체를 강조하는 이유는 인식으로부터 실천으로의 변증 법적 이행을 근거짓기 위해서였다. 신남철에게 따르면 인식은 곧 ‘변증법적인 자기운동’이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신남철은 막스 라파엘(Max Raphael)의 인식이론을 ‘빌려와’37) 인식의 과정을 수용 (Aufnehmen), 가공(Verarbeiten), 표현(Entäußern)으로 설명한다. 인식의 과정은 감각적 대상의 모사로서 ‘수용’, 감각적으로 수용된 내용을 해석과 판단하는 것으로 ‘가공’38), 오성적 가공에 따른 것을 다시 물질 속에서 신체화하는 것으로서 ‘표현’으로 전개된다.39)

 

      37) 신남철의 인식론에 있어서 무엇보다 막스 라파엘의 영향은 결정적이었 다. 봉기, 뺷신남철의 철학사상 연구뺸, 전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학 위 논문, 2009, 61쪽 각주 174번.

     38) 이러한 인식의 ‘가공’에는 개인적 소질, 사회적 환경, 신분, 계급관계 그 리고 육체적 상태, 체질, 성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념형태들이 폭넓은 판단기준으로 작용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기존의 연구들은 신남철이 맑 스주의 유물론을 기계적으로 수용하지 않았으며 나름의 주체적인 철학함 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김재현, 뺷한국 사회철학의 수용과 전개뺸, 동녘, 2002, 105-108쪽.

     39) 신남철, 「歷史哲學의 基礎論 : 認識과 身體」(1937.01), 뺷歷史哲學뺸, 서울 출판사, 1948, 14-17쪽. 

 

하지만 이러한 수용-가공-표현은 개별적인 인식의 단계가 아니라 변증 법적 발전과정이다. 즉 ‘인식의 자기운동’은 육체의 감각적인 모사에 서 시작하여 오성의 작용을 통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그것을 가공 하고 표현함으로서 신체적 인식에 이르는 발전적 과정인 것이다. 육체와 신체가 위계적으로 구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육체 는 감성적 모사의 중심이지만, 신체는 보다 ‘고차적인’ 실천적 인식 이 중심이다. 그런데 신체는 주체적인 실천을 수행하면서 역사적 주체로 변모하게 된다.

신남철에 의하면 수용, 가공, 표현의 변증법적 과정은 곧 인간의 삶 자체이다.

이는 주체적인 실천이 역사적 계열 로 진입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신남 철 역사철학의 방법론은 ‘인식(=육체)→실천(=신체)→역사(=주체)’의 논리로 공식화될 수 있다. 실제로 신남철은 ‘인식의 변증법’은 ‘신체 의 변증법’이고, 이러한 ‘신체의 변증법’은 다시금 ‘역사의 변증법’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했다.40)

이는 곧 이중의 변증법이었다. 정리하자 면 제1의 변증법은 ‘수용-가공-표현’이라는 인식의 변증법이며 이는 곧 이론과 실천의 통일로서 ‘신체의 변증법’으로 전개한다. 제2의 변 증법은 제1의 변증법으로 도달한 신체의 실천을 다시금 역사적 주체 의 실천과 통일시키는 ‘역사의 변증법’이다. 바로 이때 ‘역사적 실천’ 과 ‘역사적 주체’가 비로소 완성된다. 신남철이 인간 존재의 신체성에 주목했던 것은 역사적 주체들이 수행하는 ‘근원적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 “根源的인 實踐 은 歷史的 系列에 있어서의 모든 過程이 身膚에 浸透하여 痛切하다는 것을 自覺하고 自己의 몸(Lieb)을 그 過程의 運行에 내던지는 그러한 파토스的 行爲”41)였다.

 

     40) 신남철, 「歷史哲學의 基礎論 : 認識과 身體」(1937.01), 뺷歷史哲學뺸, 서울 출판사, 1948, 25-27쪽.

     41) 신남철, 「歷史哲學의 基礎論 : 認識과 身體」(1937.01), 뺷歷史哲學뺸, 서울 출판사, 1948, 27쪽. 

 

신남철이 신체의 변증법을 통해 역사적 주체 의 실천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이유는, 식민지 현실을 타개할 주체들의 실천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실천이라는 개념적 범주를 역사철학 으로부터 이론화하여 근거 지우려는 신남철의 시도는 한편으로 맑스 주의의 사적 유물론의 적용을 통한 현실변혁의 긍정적 전망을 얻기 위한 작업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탈식민주의의 실천논리를 마련하고 자는 노력이었다.

이제 험난한 역사의 과정에 자신의 운명을 내던지는 파토스적 행위로서 역사적 주체의 근원적 실천은 신남철 역사철학의 마지막 단계인 ‘비극적 운명론’으로 구체화된다.42)

 

    42) 하지만 1937년 「歷史哲學의 基礎論」에서 등장한 ‘역사적 신체’, ‘역사적 실천’과 같은 용어는 신남철 역사철학의 모든 것을 집약시킨 개념어이지만 일제의 폭력적인 지배가 극에 달하던 1937-1942년까지의 글에서는 단순 키워드로서만 등장할 뿐이었다. 해방 이후에서야 비로소 ‘역사적 신체’는 ‘비극적 운명론’의 토대로서 다시 등장하게 된다. 

 

4. 역사적 주체의 ‘비극적 운명’: 역사적 전환기의 실천논리

신남철이 밝히고 있듯이 그의 시대, 다시 말해 제국주의 시대를 지배하던 것은 ‘결정론적인 운명론’이었다.43)

역사에 대한 신남철의 기본적인 규정 역시 이와 별다르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歷史는 運 命”44)이고 “運命은 深淵이다.”45)

 

      43) 신남철, 「‘스펭글러’의 思想: 그의 訃音을 듣고」, 뺷東亞日報뺸, 1936.05.13., 7면.

      44) 신남철, 「轉換期의 人間」(1940.04), 뺷轉換期의 理論뺸, 백양당, 1948, 191쪽.

      45) 신남철, 「베르그송의 사와 사상의 운명」, 朝光 제7권 3호, 朝鮮日報社 出版部, 1941.03(신남철, 정종현 엮음, 신남철 문장선집 Ⅰ: 식민지 시기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3, 680쪽에서 재인용).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현실 이라는 운명을 그저 고스란히 받아들일 순 없었다. 따라서 신남철에 게 운명은 결코 체념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실천과 결합된 적극 성을 내포한 개념으로 재구성되어야만 했다. ‘역사의 심연’으로부터 식민해방으로의 비약과 창조는 언제나 충분하게 실현 가능해야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철학체계의 성립 초기부터 신남철이 운명과 역사 적 실천의 연관을 강하게 강조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이를 위해 신남철은 우선적으로 ‘필연적 운명’과 ‘숙명적 운명’을 구분했다.

신남철에 의하면 ‘숙명적 운명론’이 운명의 불가변성을 그 저 편안하게 지켜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필연적 운명론’은 그

운명적 필연성이 누구를 위해 수행되고 있으며 어떤 근거로부터 도출된 것인지를 ‘과학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46)

그런데 이는 앞에서 지 적했듯이 신남철이 말한 철학의 의무이기도 했다. 신남철에게 철학은 단순한 하나의 ‘위로’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역사철학도 단순한 역사발전의 필연성과 여기에 놓인 인간의 주체적 실천의 중요성 정도를 선언하는 것에서 그칠 수는 없었다.

결국 필연적 운명에 대한 과학적 파악은 곧 역사의 발전이 “現實的 必然性과 未來의 潛在的 可能性과가 交互 媒介되는 現在의 面에서 이 集團的 實踐이 마련됨에 依하여 可能”47)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46) 신남철, 「歷史의 發展과 個人의 實踐」(1946.08), 뺷歷史哲學뺸, 서울출판사, 1948, 46쪽.

    47) 신남철, 「歷史의 發展과 個人의 實踐」(1946.08), 뺷歷史哲學뺸, 서울출판사, 1948, 49쪽.

 

이것과 관련하여 신남철이 봤을 때 헤겔 역사철학은 식민지 조선 에 적용 가능한 매우 효과적인 이론들을 담고 있는 철학이었다. 신 남철이 헤겔 역사철학을 관념적 신비주의라고 비판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그것이 역사 발전의 법칙성을 담고 있 다는 점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의 역사적 현실은 결코 헤겔이 말한 것처럼 ‘사랑’으로 ‘화해’할 수 있다거나 ‘로맨틱’ 할 수 없었다.

헤겔의 신학적 사유에서 ‘사랑’은 곧 예수의 운명을 극복하는 계기로서 설명되는 것은 분명했다.

예수는 타락한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자기의 희생(운명)을 이미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스스로 선택했다.

운명을 자기의 의지 속에서 자발적으로 감내하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랑에서 ‘운명(필연성)’과 개인의 ‘자유’가 통일된다고 헤겔은 생각했다.

하지만 신남철은 이 역사의 비극적 운명을 사랑을 통해 화해시키는 헤겔적 방식을 거부한다.

이러한 방식들은 “生産方法, 生産關係, 階級 變化 등과 같은 變化는 根本的으로 抹殺되고 따라서 歷史發展의 正當한 具體的인 實體를 把握할 수 없게 될 것”48)이기 때문이었다.

역사철학의 중요한 모티브를 받아들이는 헤겔 역사철학과 신남철의 그것이 달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

신남철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발전의 필연성과 그것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맑스주의 역사철학의 ‘알파이자 오메가’였고, 식민지 조선을 지나 해방 조선을 맞이하는 당시의 현실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과학적 세계 관’이었다.

하지만 식민지 지식인 출신의 신남철이 더욱 관심을 가 지고 있었던 부분은 그러한 역사발전의 과학적 인식 아래 도출되는 주체들의 실천이었다. 이에 따라 역사를 자기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운명적 화해와 사랑을 강조하는 헤겔과는 달리, 오히려 신남철은 역사를 직면할 때 우리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막대한 전율과 공포를 강조했다.

여기서 운명은 결코 유연하지도 않고 친근하지도 않다. 그러나 신남철은 그러한 전율과 공포를 통해 오히려 주체들의 역사적 실천을 정당화한다. 즉 역사적 운명은 “必然的으로 우리가 戰慄을 느끼도록 무서운 心的 恐怖를 주고 따라서 一定한 覺悟와 協力의 態度를 要 請”49)한다는 것이다.

 

     48) 신남철, 「歷史의 發展과 個人의 實踐」(1946.08), 뺷歷史哲學뺸, 서울출판사, 1948, 34쪽.

     49) 신남철, 「轉換期의 人間」(1940.03), 뺷轉換期의 理論뺸, 백양당, 1948, 192쪽. 

 

신남철에 따르면 역사는 헤겔의 정리처럼 정신의 자기전개 과정, 다시 말해 정신이 자기의 진리를 획득하고 자기에 관한 진정한 자기의식을 획득하는 변증법적 화해의 단계적 과정 이 결코 아니다. 신남철은 역사에는 역사를 만드는 살아가는 인간의 ‘역사적 행위’가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러 한 역사적 행위는 앞 서 말했듯이 곧 주체들의 노동을 통한 실천이 었다. 하지만 헤겔의 역사철학은 역사발전의 원리인 인간 노동을 철저하 게 도외시했다. 이 경우 역사의 발전은 단순히 우연의 발생에 불과 한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역사발전의 필연성이었지만, 헤겔의 역사 철학은 역사의 진행을 역사적 우연의 발생으로 축소시키고 역사적 주체들의 실천 또한 수단적 활용으로만 설명할 뿐이었다. 따라서 신 남철은 헤겔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통해 해방정국에 임하 는 개개인의 역사적 실천의 성격과 방향을 논증하는 것으로 나아갔 다. 이것은 신남철 철학체계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휴머니즘으 로부터 촉발된 역사철학적 사유가 역사적 주체의 정립 및 역사적 실 천의 필요성을 도출하는 것을 거쳐, 마침내 해방기에 필요한 구체적 인 실천의 모습을 논증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발전적 과정이기도 했 다. 신남철이 증명해야 할 지점은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서 역사적 주체의 실천이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였 다. 신남철 역사철학의 마지막 논리인 ‘비극적 운명론’이 이렇게 시 작되었다. 신남철의 비극적 운명론이 마련되는 때는 기존의 역사적 형태(식 민)로부터 다른 형태로의 발전(해방)이 이뤄지는 이른바 ‘전환기’였 다. 이러한 전환기의 실천논리를 해명하기 위해 그가 마련한 논리가 바로 역사적 주체들의 비극적 운명을 담고 있는 ‘엄숙성의 논리’였 다. 앞서 말했듯이 신남철에 의하면 역사는 자유라는 이념의 실현을 위해 나아가는 거대한 필연성을 갖는다.

이러한 필연성은 자유와 필 연의 비극적 대립과도 같다.

왜냐하면 자유의 실현이라는 역사발전의 과정은 개인들의 행복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들을 수단으로 사 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엄숙성의 논리’가 등장했다.

사실 ‘엄숙성 의 논리’는 1930년 초반의 미끼 기요시의 논리로부터 차용한 것이 었으며, 이때 신남철은 “嚴肅性이라는 것은 一般的으로 權力-‘팟시슴’ 과 結合하는 有力한 要因”50)으로 파악하면서 권력집중을 위해 활용 되는 하나의 요소로서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50) 신남철, 「不安의 思想의 類型化: 改造 六月號 三木淸氏 小論을 읽고」, 뺷衆 明뺸 제3호, 衆明社, 1933.07, 49쪽. 

 

하지만 이후 해방정국의 전환기에 엄숙성에 대한 관점은 긍정적으로 변화된다.

이때 사용된 것이 헤겔의 ‘이성의 간지(List der Vernunft)’ 개념이 었다. 구체적 개인들의 역사적 실천을 강조하고 이를 다시 역사발전의 필연성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신남철은 헤겔의 ‘이성의 간지’ 개념을 유물론적으로 재해석했다. 주지하듯 헤겔은 이성이라는 절대정신이 자신의 목적인 자유를 실현하는 과정에 담긴 고유한 특징을 ‘이성의 간지’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역사의 발전은 특수한 관심과 정열에 기초한 인간의 다양한 실천에 의해서 실현되지만, 결과적으로 역사는 인간의 실천의도와 무관하게 자립적인 운동을 전개한다.

자유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성은 개별적인 인간의 행위에 구애받지 않고 그들의 관심과 열정을 하나의 수단으로서 활용할 뿐이다.

따라서 ‘이성의 간지’ 개념은 자유의 실현이라는 역사 발전과정에 있어서 목적론적 필연성의 원리를 의미한다.

하지만 신남철에게 실천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역사의 모든 과 정에 개입하고 마침내 실현되는 실천을 의미했다.

주체들의 모든 실 천은 하나의 역사적 실천이 된다.

그는 헤겔의 역사 발전이 개개인의 희생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오히려 사회 변혁의 주체로서 개개인의 희생을 역사적 실천으로 규정함으로써 거기에 담긴 역사적 의의를 온전하게 복원하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신남철은 헤겔이 개인들의 역할을 “歷史 發展에서 重要한 한 개의 契機이지만, 그것은 끝까지 世界精神이 自己를 實現하는 一手段으로 밖에 보지 않는 點, 또한 그러한 運命을 가진 것”51)으로만 보고 있 다고 비판한다.

신남철이 봤을 때 개별적 인간의 실천을 통한 자유 실현은 헤겔의 설명처럼 단순한 수단이나 우연적인 성질의 것이 아 니라, 세계사적 자유 실현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것은 자 유의 원리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동반하는 ‘비판하는 인간’의 엄숙 하고 자발적인 희생을 통해서 마련된다. 그러한 비판적 인간은 구체 적인 현실을 변화, 발전시키기 위해 “自己를 獻身 放棄하는 個人”52) 인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 주체들은 현실의 위기와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자 발적으로 자기를 역사와 매개시킨다. 이때 주체들은 역사발전에 있 어서 제기되는 구체적인 모순을 지적하고 해부하며 그것과 투쟁하여 결정적으로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 헌신하는 개인이다. 하지만 이 개인이 단순히 개별적인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남철에 의 하면 개인은 세계사적 개인으로서 영웅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이 요 청하는 자기헌신의 열정적 자각을 소유한 ‘집단적 개인’인 것이다. 신남철은 필연적인 역사발전은 “헤겔에 있어서와 같이 神的 自由의 自己實現이 아니라, 이러한 批判하는 個人의 集團 部隊의 勞動 實 踐”53)을 통해서, 그리고 바로 이것이 바로 “歷史의 唯物辨證法的 發 展”54)의 의미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51) 신남철, 「歷史의 發展과 個人의 實踐」(1946.08), 뺷歷史哲學뺸, 서울출판사, 1948, 46쪽.

     52) 신남철, 「歷史의 發展과 個人의 實踐」(1946.08), 뺷歷史哲學뺸, 서울출판사, 1948, 49쪽.

     53) 신남철, 「歷史의 發展과 個人의 實踐」(1946.08), 뺷歷史哲學뺸, 서울출판사, 1948, 49쪽.

     54) 신남철, 「歷史의 發展과 個人의 實踐」(1946.08), 뺷歷史哲學뺸, 서울출판사, 1948, 50쪽.

 

따라서 엄숙성은 주체들의 희생을 각오하고 감내하면서 역사법칙을 관철해 나가는 주체들의 책임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적 운명’이라는 이념에 깔린 것은 바로 이러한 엄숙성이었다.

신남철은 필연적인 역사법칙에서 불가피한 개 개인들의 희생에 구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우리가 처한 ‘지금, 이곳’에 서의 실천의 중요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신남철은 맑스주의 역사철학의 중요한 방법론적 기반 아래 헤겔철 학이라는 또 다른 철학적 색채를 덧붙임으로써 역사발전의 필연성과 그에 대한 과학적 인식, 그리고 이를 수행하는 역사적 주체의 탄생, 나아가 역사발전에 있어 조선의 전환기를 맞이하는 역사적 주체들의 비극적 실천논리의 도입까지 밀고 나갔다. 여기에는 개인의 실천을 식민해방을 넘어서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위한 적극적 행위로까지 확장하고자 하는 신남철의 의도가 전제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이 성의 간지’에서 신남철이 강조하는 것은 개인이 개인의 영욕이나 성 공 여부에 상관없이 오히려 개인적 행복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진행되 어가는 역사의 냉혹함과 엄숙성에 있었다. 이러한 대립과 이율배반 을 자각하면서도 거대한 역사의 필연성에 자신의 생명을 과감하게 던지는 역사적 주체의 실천이 곧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의미한다. 당대의 역사적 과제를 위해 역사적 엄숙성을 자각하여 자기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야말로 이 비극성의 가장 극적 모습이 었다. 신남철은 자신의 철학체계 안에서 인간을 비극적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전환기의 역사적 주체로서 항상 위치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여기에는 역사적 전환기를 규정하는 그의 독특한 역사철 학이 전제되어 있었다. 다시 돌아와 설명하자면 이러한 시도들은 르 네상스의 휴머니즘에 대한 강조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신남철은 역사발전에 기여하는 개인의 희생을 생(生)과 사(死)의 변증법적 통일관계로부터 그 정당성을 확보하자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고대 희랍철학에서 나타난 ‘인간 주체성과 생과 사’의 합일이라는 비극 정신이었다.55)

이는 신남철이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어인 “안죽는 것은 죽고 죽는 것은 안 죽는다. 이 두 가지는 서로 한편의 死에 生하고 다른 한편의 生에 死한다.”를 번역하면서 이 명제가 “鬪爭의 事象을 渾然히 內包하고 있다”56)고 설명하는 부분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55) 17-18세기 유럽철학은 증폭되는 시민들의 자유와 이에 대립되는 운명적 필연성의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 아래, 그리스 비극 에 대한 연구를 폭넓게 진행한다. 그리스 비극에서의 운명은 오이디푸스 와 프로메테우스라는 두 모형을 통해 설명되는데, 오이디포스와 프로메 테우스의 운명은 ‘질적으로’ 대립된다. 전자에서의 운명은 최고신 제우스 가 부여한 바꿀 수 없는 필연이지만, 후자에서의 운명은 제우스가 부여 한 신적 폭력일지언정 그 자신이 충분히 인지하고 자발적으로 받아들였 기 때문에 상대적이고 비결정적인 자유의지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윤병태, 「그리스비극에서 오이디푸스와 프로메테우스의 운명론: 니체의 뺷 비극의 탄생뺸을 중심으로」, 뺷인문과학뺸 제87집,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 원, 2008, 178-197쪽.

      56) 신남철, 「‘헤라클레이토스’의 斷片語」(1933.07), 뺷歷史哲學뺸, 서울출판 사, 1948, 216쪽. 

 

여기서 그가 의도했던 것은 무엇보다 전환기의 인민대중이 노 동의 실천을 통하여 역사발전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이론화하는 것이었다. 결국 신남철에게 주체는 실천적 주체인 동시에 역사적 주체이다. 이러한 역사적 주체성은 곧 자유와 필연을 통일하는 계기이자, 가능성으로서 미래를 ‘지금, 이곳’에서 실현시키는 실천하는 주체였다. 

 

5. 신남철 역사철학의 의의: 탈식민주의 역사철학의 가능성과 의미

신남철이 자신의 책 이름으로 정할 만큼 그가 살았던 시기는 분 명 ‘역사적 전환기’였다.

역사적 전환기의 중요한 문제는 바로 새로운 인간형의 창조와 이를 기반으로 한 인간해방의 실현이었다.

이를 위해 몰두했던 신남철의 집요함은 그의 철학적 사유의 흔적들을 통 해 충분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신남철이 역사철학을 통해 도출하고자 했던 역사적 주체들은 결국 “‘테오레인(靜觀)’이나 ‘필레인(愛顧)’이나 ‘드레네인(苦悶)’만을 할 것이 아니라 ‘크리네인(批判)’하고 ‘마케인(抗 爭)’하는 ‘호프로드로모스(先驅者)’”57)이다.

이러한 선구자들은 신남철의 초기용어로 말하면 ‘개혁하는 두뇌(頭腦)’와 ‘혁명하는 심장(心 臟)’의 종합58), 다시 후기용어로 표현하면 ‘이론과 실천’의 종합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면서 구체적인 역사와 함께 등장하는 새로운 ‘역사적 주체’들이었다. 이와 같은 신남철의 철학적 문제의식은 맑스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근대적 역사철학을 조선에 적용하려 했던 ‘사회주의적 근대기획’59)(류승완 2011, 122)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신남철 역사철학의 의의는 무엇보다 당시 식민지 조선과 해방 조 선의 격변기에 필요한 새로운 주체 형성 문제와 그들의 역사적 실천 논리를 제기한다는 점에 있었다. 신남철은 ‘과거’의 경험을 참고로 하여 ‘현재’의 실천을 통해 추구되는 ‘미래’의 목적을 바로 이상(理 想)이라고 생각했다.60)

 

     57) 신남철, 뺷歷史哲學뺸, 서울출판사, 1948, 序文 3쪽.

     58) 신남철, 「헤겔 百年祭와 헤겔 復興(1931.07)」, 뺷歷史哲學뺸, 서울출판사, 1948, 143쪽.

     59) 류승완, 뺷이념형 사회주의뺸, 도서출판 선인, 2011, 122쪽.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미래적 기획이 단순한 상상이나 예측에 머무르는 것은 반대했다. 이것이 ‘역사적 주체론’과 ‘비극적 운명론’이 등장한 이론적 맥락이었다. 물론 전환 기를 대상으로 한 민감하고 섬세했던 철학적 인식은 비단 신남철만 의 모습은 아니다. 1930-40년대에 활동한 조선의 철학자들 모두는 역사과정은 보편적 자유의 실현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역사발전의 원리가 곧 자유의 실현이라는 사실은 이론적 합리성뿐만 아니라 당 시 조선의 구체적인 현실이 부여하는 현실적 정당성 또한 가지고 있 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남철 사유의 차별점은 식민지/해방 조선의 역사인식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역사주체의 실천논리를 가장 급진적 으로 이끌어가면서 자신의 역사철학을 이론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번 냉철하게 점검해야 할 것은 신남철 역 사철학의 굴절의 지점이다. 신남철 역사철학의 최종형태인 비극적 운명론이 구체화되기 전인 1940년대 신남철이 남긴 몇 편의 짧은 글들은 관념적인 자아탐구, 종교와 자연에 대한 단상, 신변 소개 등 으로만 구성된다. 더 나아가 그의 사유는 그 급진성과 실천성을 상 실한 채 일제강점의 극단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한다. 동양정신의 특색을 ‘아시아적 정체성’으로 규정하고 암암리에 조선의 정체성을 극복해야 할 것을 암시하는 글61)은 과거 조선의 역사를 세계적 보 편사 속에서 위치시키려고 했던 그의 역사철학과는 꽤나 이질적인 것이었고, 역사의 발전을 대동아공영권의 완수로 설명하고 국가에 최고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에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주장하는 글62)은 자유 실현을 위해 개인의 엄숙한 희생을 요청했던 그의 실천론과는 철저하게 모순적인 것이었다.

 

        60) 신남철, 「文學과 政治」(1946.04), 뺷轉換期의 理論뺸, 백양당, 1948, 231쪽.

        61) 신남철, 「東洋精神의 特」, 뺷朝光뺸 제79호, 朝鮮日報社出版部, 1942.05.

        62) 신남철, 「自由主義의 終焉」, 뺷每日新報뺸, 1942.07.01.-04. 제국 일본이 제국주의적 패권질서를 보다 노골화하면서 동아시아의 연대를 어느 정도 내포했던 동아협동체론을 조선으로 유입시켜 ‘내선일체론’으로 활용하는 시점에 이르자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에 대한 응답을 강요받았다.이혜진, 「아시아/일본・식민지/제국의 온톨로기: ‘식민지 공공성’의 조선 적 형식 - 일제 말 ‘동아협동체론’을 중심으로」, 뺷한국문학이론과 비평뺸 제62집,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14, 280쪽. 그리고 실제로 많은 식민지 철학자들은 1930년 후반 이후 제국 일본이 내세운 ‘동양주의’를 여러 맥락에서 수락하거나 추인하는 경향을 보였다. 정종현, 「신남철과 ‘대학’ 제도의 안과 밖: 식민지 ‘학지(學知)’의 연속과 비연속」, 뺷한국어문 학연구뺸 제54집, 동악어문학회, 2010, 406-410쪽. 

 

 물론 해방 이후의 그의 사유는 다시금 앞에서 살펴봤듯이 전환기를 살아가는 역사적 주체들의 헌신과 희생을 강조하는 것으로 회복되었다. 하지 만 엄밀하게 말해 그의 ‘식민주의적 사유’가 중단된 것은 그의 바람 과는 달리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었고 또 다른 역사적 우연이 만들어 낸 결과에 불과했다. ‘지금, 이곳, 우리’를 성찰의 대상으로 표명했던 한국현대철학의 출발점은 결국 식민지 조선의 억압과 좌절, 해방 조선의 혼란과 충 돌이었으며 따라서 당시 철학의 문제의식은 새로운 주체 형성이라는 문제로 집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식민이든 해방이든 조선변혁 의 특수성을 이끌어갈 주체형성에 대한 모색이었다. 하지만 탈식민 주의적 지향의 철학이 식민주의 철학의 영향 속에서 어두워졌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니었다. 식민지 지식인의 자기분열은 한반 도의 근현대사상사에서 익숙하게 목격되어왔던 모습이기도 했다. 식 민주의와 반식민주의의 모순적 공존은 일제강점기 지식체계에서 지 속적으로 발견되어왔으며63), 특히 식민주의 담론에 대한 비자각적 순응과 복종은 1930년대 후반기의 식민지 지식인들의 거대하면서도 충격적인 사상 전향으로 확인된 바 있었다.

 

      63) 제국 일본의 식민주의에 담긴 은폐된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앙드레 슈 미드, 정여울 옮김, 제국 그 사이의 한국, 후마니타스, 2012, 71-78 쪽 참고.

 

식민지 근대성에 제국과 식민, 노동과 자본간의 모순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가 숨겨져 있다 는 진리를 제국 일본의 근대적 교육의 세례를 받았던 그들이 온전하 게 파악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를테면 제국주의는 단순한 물리적 폭 력만이 아니라 서구 근대성을 ‘보편’으로 강제한 사상의 억압적 폭 력이었다. 즉 제국 일본이 세운 근대적 대학에서 수학한 이들에게 ‘근대’라는 이념과 그 이론은 해방의 무기이자 동시에 식민의 무기 였을 수도 있다. 경성제대에서 수학한 서양철학1세대들은 분명 조선의 독립을 위 한 새로운 철학(헤겔철학과 맑스주의)의 모색을 통해 제국 일본에 대항하고 있었으나, 이것 역시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체제 안에서 습 득하고 내재화한 지식체계라는 점에서 언제든 이율배반에 빠질 우려 가 있는 셈이었다. 경성제대는 제국의 권력이 그동안 독점하던 지식 (知) 일부를, ‘식민지 권력이 필요로 하는 통제된 인력을 생산해내기 위해서 조선인에게 이양하는 모험적인 프로젝트’였다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64) 이때 경성제대 출신 철학자들 이 처한 이러한 이율배반 내지 모순은 단순히 자신을 제국주의의 논리에 자발적으로 복속되는 타락으로 일반적용할 순 없으며, 나아가 “식민화된 국가나 이전에 식민지였던 국가에서 나타나는 지식인의 운동은 그와 반대”65)라는 경향 속에서 객관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64) 박광현, 「경성제국대학의 문예사적 연구를 위한 시론」, 뺷한국문학연구뺸 제21집,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1999, 350쪽.

     65) 피터 차일즈・패트릭 윌리엄스, 김문환 옮김, 뺷탈식민주의 이론뺸, 문예출 판사, 2004, 233-23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식민주의에 대한 인식적 혼란이었음을 전적으로 부인하긴 힘들다.

결국 다른 무엇보다 신남철 철학이 다시금 우리들에게 다가와야 할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철학체계 안에서 때론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이었을지언정 인간, 역사, 주체, 실천 등의 개념들이 체계적으로 각자의 의미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신남철 철학에 있어서 식민주의(친일)와 탈식민주의(저항)의 내적 긴장과 모 순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역사철학과 관련된 그의 의의까지 ‘전면’ 몰수할 순 없다.

신남철은 식민지 현실이 강요 하는 일종의 역사적 비관론과 끈질기게 투쟁했다.

이 비관론에 많은 식민지 지식인들이 사상 투쟁을 중단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동시에 그는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정신과 자본’을 역사의 진정한 주체로 설정하는 당시의 반동적 사유들과 투쟁했다.

신남철 역사철학 기획이 식민지 조선과 해방 조선의 당면 현실에 필요한 희생적 주체의 모습을 이론화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때, 신남철 자신이 모습 역시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가 ‘서울대학교 교수’에 있었던 남쪽에서든 ‘김일성종합대학교 교수’를 수행한 북쪽에서든 오늘날

신남철의 철학을 기억하는 공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다.

역사적 주체의 비극적 운명론이 신남철의 실존을 통해 실증되었 을 뿐이다. 

 

 

참고문헌

1.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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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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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ist Philosophy of History in Colonized and Liberated Korea: Sin Nam-ch'ŏl’s Theory of Historical Subject and Tragic Fatalism

Park, Mincheol

This study analyzes the philosophy of history of Sin Nam-ch'ŏl, a leading Marxist philosopher of Korea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particular, unlike previous studies that analyze the fragments of his philosophy discretely or individually through several keywords, this study focuses on tracing, from the perspective of developmental processes, the exploration of the new subject to lead Korea’s transformation, the historical subject and historical praxis as concrete manifestations of the new subject, and the introduction of the theory of tragic fate as a praxis of historical subjects necessary for the transformation of Korea. Through this process, the study reveals that Sin Nam-ch’ŏl's philosophy of history, which spans colonized as well as 113 liberated Korea, may be formulated as historical subjectivism and tragic fatalism, composed under the influence of Marxist and Hegelian philosophies. In addition, the paper seeks to illuminate how the meaning of Sin’s philosophy of history persistently resisted the reactionary thought of the time, which saw mentalité and capital as the true subjects of history, as well as the historical pessimism of the empire.

Subject Spheare: Korean philosophy, Korean modern philosophy, the history of ideas, the 1st generation of Western philosophy

Keywords: Philosophy of History, Marxism, Hegelian Philosophy, Subject, Theory of Tragic Fatalism

 

 

 

  시대와 철학 2022 제33권 1호(통권 98호) 

논문투고일 2022년 2월 6일 / 심사일 2022년 2월 13일 / 심사완료일 2022년 3월 15일 

식민지해방 조선의 맑스주의 역사철학 신남철의 ‘역사적 주체론’과 ‘비극적 운명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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