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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句解釋에 관한 元曉 和諍論法의 특성: 들뢰즈의 새로운 변증법과의 대비를 중심으로/김태수.서울대

국문요약

본 논문은 후기구조주의 철학자 들뢰즈가 ‘재현(représentation)을 만드는 4 가지 굴레’의 비판에 활용한 새로운 변증법을 元曉 四句解釋에 나타난 和諍 論法과 대비한 연구이다.

검토를 위해 󰡔涅槃宗要󰡕・󰡔大慧度經宗要󰡕・󰡔金剛三 昧經論󰡕・󰡔起信論疏󰡕 등과 관련한 四句, 특히 그 非有非無觀을 분석했다.

그 결과 非有非無를

(1) 양자부정으로서의 中道와 (2) 궁극적 진리로 이해하는 입장 중,

원효의 사유는 (1)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다.

한편, 헤겔 변증법과 같은 동일성 비판의 맥락에서 제시된 들뢰즈 변증론의 경우에도 (1)과 지향점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념(Idée)이 최종적 위계로 고정되지 않고, 생성 과정 속에서 바탕을 현실로 끌어올려 현실과 근원 간 차이의 相卽을 모색하는 열린 구조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린 변증법은 경험주의적 불교 전통 안에서 의식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펼치는 원효의 인식론적 통찰을 잘 드러내는 유용한 도구로 보았다.

이는 잠재적 이념(Idée)인 問題-場에서 출발, 계열화를 거쳐 현실에서 답[解]을 도출하는 긍정적 생성존재론이다.

문제는 대상에 대한 모든 가능한 현실태를 결정하는 상호침투적 복합체들이다.

여기서 문제는 어떤 부정도 내포하지 않는다.

문제는 본성상 답을 초월하지만 답과 다르지 않고, 문제안에 모든 계열과 차이에 대한 답을 내포하고 있다.

和諍論法과 대비할 경우, 이는 이념인 一心에서 출발, 眞如/生滅로의 계열 분화와 상호훈습을 거쳐, 和諍이라는 규정을 도출하는 구조에 상응한다.

즉 四句를 모두 긍정함으로써 문제와 답의 상즉을 모색하는 歸一心源의 회귀구조 이다.

非有非無 또한 양자부정을 통해 생성의 극한에서 일체 규정을 여읜 一 味・不可說 中道이자 제법실상인 一義性(Univocité)이다.

‘하나가 아닌 까닭에 모든 측면에 상응할 수 있고, 다르지 않은 까닭에 모든 측면에서 한 맛’이라는 해석은 관점적 측면에서 ‘양자부정[4구]이 곧 긍정[3구]’이 됨으로써 無二 實性의 宗旨로 회귀되는 一義的 구조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和諍論法은 四句의 재현적 한계를 벗어나 脫性化・一義性을 통해 본래의 가치를 회복하는 생성의 사유이다.

 

주제어: 元曉 和諍論法, 四句解釋, 非有非無, 들뢰즈(Deleuze)의 새로운 변증법[열린 변증법], 一義性(Univocité), 이념(Idée)

 

 

I. 서론

불교의 四句論理(catuṣkoṭi)를 서양의 형식논리학으로만 바라볼 경우, 모순적이고 신비적이다. ‘아라한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아라 한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등의 언표방식은 모순율과 배중률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不然之大然’과 같은 ‘不一不異’ 논법으로 ‘不可言說’등을 강조하는 元曉의 논의방식에는 형식 논리를 넘어서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불교는 이러한 이율배반이나 역설을 다의적 함의로써 역동적으로 해석하는 사유체계를 지니고 있다.

사구 형태를 활용, 양극단을 모두 부정하는 중도적 사유인 붓다의 斷常・有無中道가 그것이다.

‘생하는 법들은 이미 생하고 있기에 ‘無’라 할 수 없고, 늘 멸하기에 ‘有’라 할 수 없다’는 이해이다.

그런데 사구 가운데 ‘亦有亦無’라는 3구를 부정한 ‘非有非無’, 곧 有・無를 동시에 부정하는 4번째句(koṭi)에 대한 해석에는 크게 두가지의 다른 이해 방식이 있다.

첫째는 ‘붓다의 無記’・‘아라한의 사후 존속’ 문제 등과 관련하여, 존재의 자성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四句를 모두 파기하는 방식이다.

즉 상주・단멸・동일성 및 인과관계의 조건을 전제로 하는 모든 구는 부정되며 4번째 구 또한 파기된다.1)

 

       1) 4번째 구인 ‘非有非無’를 취할 경우, 이는 󰡔中論󰡕의 ‘八不’에서와 같이 본체를 전제로 한 有無・生 滅을 부정하는 맥락에서이다. 즉 “(자성을 지닌 X를 상정할 경우) 이처럼 不生이듯, 마찬가지 논리 로 不滅이다”는 맥락에서의 양자부정이다. 󰡔中論󰡕 「涅槃品」에서 ‘生死와 涅槃에 차이가 없다’는 의미 또한 “사구 어디에도 열반이 없듯, 생사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이다.[MMK. (25.19, 25.20), 302] 즉 ‘양자가 모두 부정된다는 의미에서 다르지 않다(不異)’는 뜻이지, 동일하다는 의 미에서의 불이가 아니다. “A도 아니고 B도 아니다”, “A도 성립하지 않고, B도 성립하지 않는다” 는 양자 부정의 동사적 의미(neti~neti의 방식)일 뿐, ‘非有非無’자체를 실재로 보거나 부정 이후의 실체 X를 상정하는 명사적 의미와 구별된다. 不可說로 해석하는 경우 또한 자성의 집착을 경계하는 無記나, 고통을 낳는 虛妄見을 깨우치려는 방편일 뿐이다. 각 句에 해당하는 존재자 간의 위계는 부정되고 근기에 따른 방편적 교설 단계만 인정된다. 

 

공성에 입각한 龍樹(Nāgārjuna)나 대다수 인도 중관학파의 사유가 이에 해당한다.

또 다른 하나의 사유는 많은 동아시아 대승논사들에서와 같이 사구 중, 네 번째 구인 ‘非有非無’를 궁극적 진리로 보는 입장이다.

이 사유에서는 ‘부정의 부정[사구의 부정]’을 긍정[3구]으로 보아 4번째 구를 존재의 참 실상인 眞諦 로 상정한다.

즉 궁극적 실재인 4구의 실상을 승의제적 이상에 두고, 속제에서 나머지 견해의 모순을 조화시키는 방식이다.

하지만 會通이나 和諍의 근거가 되는 것은 각 학파에서 생각하는 근원적 차원인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如來 의 말씀[佛說]’・‘不可說’・‘法界’ 혹은 ‘一心’ 등이 그것이다.

외형적으로 보면 원효 또한 이 범주에 속한다. 하지만 二諦說 등의 내용에서 보면 ‘不二論만이 아닌 不一不異論[不一不二論]에 기초해 있다’2)는 점에서 용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眞諦는 초월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無諦[俗諦]에 의지함으로써만 얻어진다는 점에서 양자의 영역은 상호 포섭되고 의존된다. 공성을 연기로 보는 사유이기에, 무는 유에 의존하고 승의제는 세속제에 의지한다. 이런 맥락에서 원효가 사구논리를 통해 진속이제로서 有・無를 메타화한 것뿐3)이라면 非有非無에 대한 두 번째 범주와 구분되게 된다.

 

       2) 󰡔瓔珞本業經疏󰡕 (HB.1, 508c18-21): “如是二諦 常非不爾故不一, 而實非然故不二. 如經, ‘二諦常 爾故不一, 聖照空故不二’故.” [이와 같이 이제는 늘 그러한 것만 아닌 까닭에 하나가 아니지만[不 一], 실제로 늘 그러한 것도 아닌 까닭에 불이이다. 󰡔(菩薩瓔珞本業)經󰡕에서 “이제는 늘 그러하므 로 하나가 아니고, 성스러운 비춤[깨달음]이 공하므로 둘이 아닌 까닭”이라고 한 것과 같다.]: 󰡔菩 薩瓔珞本業經󰡕 (T.24, 1018b21-c7) 참조.

      3) 󰡔瓔珞本業經疏󰡕 (HB.1, 509a2-7): “所以假有不成假有者, 依名假立 是爲假有. 所依名言不可得故, 能依假有不得成立. 所以實無不成實無者 遣所計有以立實無 所遣實有不可得故, 能遣實無不得成 立.” [가유가 가유를 이루지 못하는 까닭은 명칭에 의해 가립한 것이기에 이를 가유라 한 것이다. 소의의 명언을 지각할 수 없기에, 능의의 가유도 성립될 수 없다. 실무가 실무를 이루지 못하는 까 닭은 계탁한 바의 유임을 여의고 실무를 세운다면 여읜 실유를 지각할 수 없기에, 능견의 실무도 성 립하지 않는 것이다.]

 

즉 非有非無를 명사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有도아니고 無도 아니라’ 는 中道로서의 不可說의 의미를 동사적 메타언어로 연결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말이다.

더욱이 원효의 논리적 사유는 초기불교로부터 반야의 정신을 이어, 각 개체를 외부에 고정적・항구적으로 실재하는 존재자로 이해하는 방식과 달리 관점과 상대적 관계에 따라 제 모순을 포섭하는 인식론적 전통에 서 있다.

따라서 비판불교에서 말하는 기체설이나 형식논리의 적용만으로는 해석에 어려움이 따른다.4)

이 점에 주목하여 박종홍은 원효 논리와 변증법과의 관계 규명의 중요성을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원효 논리는 생성 발전의 역사적 과정을 밝히는 것은 아니지만 변증법이 한결같은 것이 아니므로 서구의 변증법과 비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5)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원효 논리를 開合으로써 ‘多로 전개하는 宗’과 ‘一로 통합하는 要’를 밝히는 화쟁의 논리로 설명한다.6)

한편, 김형효는 이러한 원효의 개합논리를 “차이의 동거라는 해체론적 존재론의 사유”로 규정한다.7)

 

     4) 비판불교론에서 비판하는 기체설(dhātuvāda)이란 “단일 실재인 기체가 다수의 법을 생하는” 발 생론적 일원론 또는 근원실재론을 말한다.[松本史朗 2005, 288-316 참조] 하지만 원효가 일심과 같은 근원을 상정하고 여래장・불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플라톤・베단타・도가와 같은 발생론적 일 원론으로 볼 수는 없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듯이, ‘일심에서 제법이 생겨 흘러 나온다’는 의미에서 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붓다와 중생의 不二’를 강조하는 원효의 不一不異論은 본체 와 현상을 일치시키는 스피노자적 내재성론에 가까운 면이 있다. 나아가 ‘歸一心源’에 그치지 않 고, ‘饒益衆生’의 측면에서 ‘중생제도 및 사회윤리 실천과의 不二’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기체설의 비판을 벗어난다. 한편 서구 논리에 대비해 보면, ‘모순되어 보이는 현실의 바탕[根源]으로부터 새 로운 것을 생성・전화시키는 상의 상관적 운동’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형식논리가 아닌, 열린 구조 의 변증법에 가까운 면이 있다. 대립자들의 동시적 공존과 상호의존[緣起] 속에서 제 의미를 순환 시켜 화쟁을 도출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5) 박종홍 1980, 104-105.

     6) 같은 책, 87-88.

     7) 김형효 2006, 262-263. 

 

하지만 一心을 근원에 두고 제 모순을 포섭하는 화쟁적 사유를 해체론적 존재론으로만 보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다.

역으로 화쟁의 전개양상이 헤겔 변증법적 운동 형식과 유사하다고 해서 일심과 같은 화쟁의 바탕을 즉자(an sich)와 대자(für sich) 단계를 거쳐 종합된 즉자・대자(An und für sich)나 운동을 마친 절대지(Das absolute Wissen)8)로 보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

제 사상을 회통시키는 원효의 해석학적 통찰은 무자성에 입각한 연기와 공의 상즉이라는 대승적 인식론과 존재론의 결합 속에 역동적 함의[內 包]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관점들에 대한 화쟁의 준거점으로 제시되는 ‘一心’・‘여래의 말 씀[佛說]’9)・‘不可說’ 또는 ‘非有非無’에 대한 해석은 변증법이나 해체적 사유와의 검토에 핵심적이다.

화쟁의 기반으로 제시되는 一心을 “다양한 현상세계 를 통일시킬 수 있는 근원으로서의 절대적 一心”으로 볼 경우 本末論的 측면, 곧 體 중심의 근원론적 입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상을 낳고 가능하게 하는 원리나 바탕이지만 현상 속에 있으면서 현상과 다르지 않은 自體”10)로 볼 경우, 體와 相・用간의 相卽性을 지향하는 體用不二・體用一元的 現象論의 사유로 이해할 수 있다.

 

      8) Hegel 1979, 575-592 참조.

      9) 佛說 해석의 경우, ‘붓다 직설에 한정할 것인가, 올바른 이치에의 부합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에 따라 開合의 의미가 다를 수 있다. 화쟁 사례를 살펴볼 때, ‘대립한 의견들도 모두 경에 입각한 말이므로 틀리지 않는다’고 할 경우 전자의 맥락에서 쓰이기도 하지만, 주로 후자의 의미로 사용된다.

     10) 전자를 華嚴的 一心, 후자를 如來藏的 一心에 배대시켜 볼 수 있겠다. 석길암은 원효의 一心을 전자로 규정한다. 이에 비해, 상당수 학자들은 여래장 사상과의 관련에 한층 주목한다. 석길암 2008, 169-191 참조. 

 

서양 논리체계와의 비교철학적 관점에서 박종홍・김형효가 제기한 문제를 적용해 보면, 本末論은 플라톤 이래 전통 형이상학의 변증론을 완결시킨 헤겔 변증법에, 체용불이적 현상론은 후기 구조주의・현상학이나 실존주의 등의 경험주의적 사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이 글에서는 불교의 경험주의적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의식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펼치는 원효의 인식론적 함의에 근접한 모델은 헤겔 변증법이 아니라 초월적 경험주의 사유에 기반한 들뢰즈의 새로운 변증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보고, 이를 원효 논법에 대비시켜 보고자 한다.

들뢰즈는 후기 구조주의 전통에서 동일성 중심의 사유를 차이 중시의 사유로 전복시키면서도 전통 형이상학의 변증법적 역량을 그대로 끌어와 바탕[根源]을 현실로 끌어올림으로써 양자 간 차이의 相卽 및 생성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11)

검토를 위해 사유의 제 범주로 제시된 원효의 사구 이해를 재현을 만드는 들뢰즈의 4가지 굴레12)와 대비해 보겠다.

 

      11) Deleuze 1994, 28. 이는 이념, 곧 ‘잠재성 단계’에 있는 바탕이 의식의 표면 위로 떠올라 ‘현실성 으로 드러나는 자체를 ‘차이와 반복’으로 보는 상즉논법이다. 이 속에서 개체의 자아 관념 또한 해체된다. 이는 無常・無我의 존재론에 기반하여 인식주관과 객관, 眞과 俗[眞如・生滅], 연기와 공의 상즉을 추구했던 원효의 인식 논리와도 맞닿아 있다. 또 一心이라는 이상이 空性과 佛性, 二 諦와 三性의 相卽으로 전개되는 불일불이적 사유와도 상통한다. ‘세속의 각 개체가 곧 여래성을 지닌 부처’라는 이 사유를 ‘차이와 반복’이라는 분석틀로 볼 경우, 원효의 원융무애한 의식의 보편성과 역량이 한층 잘 드러날 것으로 본다.

      12) Deleuze 1994, 117-118, 262-264, 302-304.

 

이를 위해 화쟁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涅槃宗要󰡕・󰡔大慧度經宗要󰡕의 宗旨 해석 및 󰡔起信論疏󰡕・󰡔金剛三昧經論󰡕 등에 활용된 四句 및 非有非無觀을 살펴보겠다.

나아가 들뢰즈가 제시하는 변증론의 특성을 검토한 후, 양자의 논법을 대비해 보고자 한다.

 

II. 四句解釋을 통해 본 元曉 論法의 특성: 非有非無 槪念 의 含意

󰡔涅槃宗要󰡕의 종지에 대한 설명에서 원효는 여섯 논사의 주장을 四句로써 모두 긍정하면서 그중 네 번째 구인 非有非無[不一不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어떤 이는 주장하시기를, 모든 부처께서 비밀스레 감추어 두신 둘도 없는 실성[無 二實性]이 이 經의 宗旨라고 하셨다. 그러한 실성은 상에서도 벗어나고[離相], 성 에서도 벗어났기에[離性], 일체 모든 측면에서 어떤 장애도 없다. 상에서 벗어났 기에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원인도 결과도 아니며,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2구 에 기반한 4구 <-p & -q>: 離相의 측면];

성에서 벗어났기에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되고, 원인도 결과도 되며, 같은 것도 다른 것도 되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된다.

[1구에 기반한 3구: 離性 의 측면];

물든 것이면서 맑은 것이기도 한 까닭에 衆生이라 하거나 生死라 칭하 며, 또 如來라고도 法身이라고도 이름한다. 原因도 結果도 되는 까닭에 佛性이라 하거나 如來藏이라 칭하며, 菩提라고 하거나 大涅槃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되기에 二諦라고 하고

[3구: 具有具無의 측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까닭에 中道라 이름한다.

[4구 <-p & -q>: 非有非無의 측면];

하나가 아닌 까닭에 모든 측면에 상응할 수 있고, 다르지 않은 까닭에 모든 측면에서 한 맛[一味]일 수 있다.

이처럼 ‘둘이 없는 秘藏이 이 經의 宗旨가 되지만 다만 제목을 정하는 데는 여러 명칭을 함께 쓸 수 없는지라, 그래서 (붓다께서 열반하 실 때의) 일을 따라서 涅槃이란이름을 세운 것’이라 하였다.13)

 

      13) 사구를 기호화할 경우, 부정에 해당하는 2구를 <-p>, 4구를 <-p & -(-p)>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 이지만 여기서는

・・・<-p & -q>로 기호화했다. 4구의 부정이 3구와 교차되면서 긍・부정이 자재한 원효 논법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는 <-p>가 한층 적절하다. 다만 인・과의 경우, 부정 관계에 해당하지 않기에 중립적 기호인 q를 사용했다.

󰡔涅槃宗要󰡕, (HB.1, 525c11-23) [󰡔涅 槃宗要󰡕 (T38, 240a6-241c17 참조]: “惑有說者, 諸佛祕藏無二實性 以為經宗. 如是實性 離相離 性故. 於諸門無障無礙. 離相故, 不垢不淨, 非因非果, 不一不異, 非有非無. 以離性故, 亦染亦淨, 為 因為果, 亦一亦異, 為有為無為. 染淨故, 或名眾生, 或名生死, 亦名如來, 亦名法身. 為因果故, 或名 佛性, 名如來藏, 或名菩提, 名大涅槃. 乃至為有無故, 名為二諦. 非有無故, 名為中道. 由非一故, 能 當諸門. 由非異故, 諸門一味. 如是無二祕藏 以為是經宗旨, 但其題目之中 不能竝偏存諸名, 且隨 時事 立涅槃名.” 

 

이 견해에서 원효는 󰡔中論󰡕에서 사용되는 四句否定 방식과 달리,14) 連接 (conjunction)과 離接(disjunction)15)의 교차적 활용을 통해 긍정・부정을 종 합하면서 ‘相에서 벗어남’과 ‘性에서 벗어남’을 서술한다.

또 양자를 모두 인정하는 3구를 具有具無 방식의 세 가지 실례16)로 설명한다.

나아가 4구인 ‘非有非無’로서의 中道를 궁극적 진리의 차원에서 3구의 긍정과 상즉하는 것으 로 기술한다.

즉, ‘하나가 아닌 까닭에 모든 측면에 상응할 수 있고, 다르지 않은 까닭에 모든 측면에서 한 맛’이라는 역설적 표현을 통해 4번째 구인 비유비무[不一不異]적 관점을 전체를 포섭하는 無二實性으로서의 如來祕藏으로 회귀시켜 經의 宗旨로 삼는 구조이다.17)

 

      14) 관점론을 추가할 경우 원효가 모두 긍정하는 사구는 형식논리학 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처럼 모순율・배중률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사구를 전체긍정 또는 부분긍정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은 확장된 의미의 내포와 외연을 지닌 화쟁론이다. 이는 자이나교의 syāvāda 7형식에서 “어떤 관 점에서는”을 전제하는 관점주의와도 흡사한 면이 있다. 다만 syāvāda는 ‘syāt(아마도)’라는 전 제에서 나타나듯이 상대 주장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부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형식으로 고안된 것이다. 이에 비해, 원효의 非一非異論은 제 입장을 특정 관점 에서 인정하면서도, 不可說이라는 궁극적 실상의 측면에서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 화쟁방식이 다. catuṣkoṭi와 syāvāda에 대해서는 Matilal 1985, 330-350; Kim 2015, 279-283 참조.

      15) 일반적으로 기호 논리학에서 논리 연결사 중 ‘또는’에 해당하는 ‘∨’를 이접(disjunction), ‘그리고’에 해당하는 ‘∧’를 연접(conjunction) 기호로 표기한다. 이접의 경우, ‘p∨q’는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두 명제나 진술 p, q를 이접적으로 연결한 선언적 종합이다. 양자를 모두 긍정하는 경우를 포괄적 선언(inclusive or), 한 가지만 긍정하는 경우를 배타적 선언(exclusive or)으로 분류 가능하다. 원효의 경우, 주로 전자를 사용한다. ‘p∧q’는 p와 q간의 연언적 종합을 의미한다. 의미론적으로 볼 때, 연접은 동일 계열 내에서의 종합이므로 유사성이나 유비의 특성과 연관, 동일자 중심의 위계로 수렴될 수 있다. 이에 비해, 이접은 다른 계열 항들 간의 관계 속에서 종합된 공통 양태를 통해 총체성[영원성]으로 발산・회귀되는 개방성을 보인다.

     16) 세 가지 실례란 ‘물든 것이면서 청정한 것임’, ‘원인이 되기도 결과가 되기도 함’ 및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됨’이다.

     17) “다만 제목에 여러 명칭을 쓸 수 없기에, [(無二祕藏 대신), 붓다께서 열반하실 때의] 일을 따라 涅 槃이란 이름을 세운 것임”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원효의 不一不異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다.

四句偈의 네 번째 句=非有非無[不一不異]=中道=“하나가 아닌[非一] 까닭에 모 든 측면에 상응할 수 있고, 다르지 않은 까닭[非異]에 모든 측면에서 한 맛[一 味]”=“無二實性인 如來秘藏”=經의 宗旨 그런데 이렇듯 원효가 모든 구를 다 회통하면서도, 마지막 논사의 입장인 非有非無를 지지하여 여래의 秘密藏으로상정했다면, 헤겔적 변증 논법의 전거가 되지는 않을까?

非有非無를 절대적 진리로 상정하면서 기타 구들을 4번째 구에 포섭되는 것으로 본다면 카지야마 유이치나 로빈슨・무르티・이나다・체르바스키 등이 말하듯 헤겔 변증법적 특성이 되기 때문이다.18)

즉 非有非無를 有・無를 종합한 형이상학적 존재론 개념으로 해석할 경우, 헤겔 변증법에 상 응하게 된다.

하지만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라’는 연기적 사유, 곧 인식론적 전통에서 파악한다면 동사적 사유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럼 이러한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非有非無인 중도’를 종지로 제시하면서 사구를 모두 긍정하는 화쟁논법의 특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는 총체적 측면에서 󰡔大盤涅槃經󰡕의 宗旨를 不一不異로 규정하는 논의 전체에 대한 원 효의 小結論이다.

 

묻는다. 여섯 분의 설한 바는 어떤 것이 참된 것인가? 어떤 분이 말씀하시기를, “이 모든 견해가 다 옳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뜻에는 모남이 없어서 해당하지 않는 데가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분이 주장하시기를, “마지막 견해가 옳다. 왜냐하면 모남 없는 如來의 뜻에 맞는 까닭이며, 앞에서 설한 여러 논의의 뜻을 모두 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주장 또한 서로 어긋나지 않음(不相違)19)을 알아야 한다.20)

 

       18) Murti 1977, 45-46; Robinson 1978, 56; 梶山雄一 外 1994, 109-110.

       19) ‘不相違’란 因明論理 因十四過 중. “서로 어긋나는 因과 喩로써 상반된 宗을 논증함에도, 그 因과 喩가 각기 정당하기에 상대방의 宗을 논파할 수 없다”는 소극적 맥락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이다.

       20) 󰡔涅槃宗要󰡕 (HB.1, 525c23-526a3) [󰡔涅槃宗要󰡕 (T.38, 240a6) 참조]: “問; 六師所說 何者為實? 答; 或有說者 諸說悉實. 佛意無方無不當故. 或有說者 後說為實. 能得如來無方意故. 並容前說諸 師義故. 當知是二說 亦不相違也.” 

 

 (1) 여기서 첫 번째 입장은 “모든 견해가 다 옳다”는 주장이다.[p1] 그 이유 句는 ‘부처님의 뜻에는 모남이 없어서 해당하지 않는 데가 없다’로 제시된 다.[h1]21)

 

       21) 󰡔因明入正理論󰡕의 3지작법의 용어를 따라 주장인 宗[pakṣa, pratijñā]을 p, 이유인 因[hetu] 을 h, 實例인 喩[drṣṭānta]를 d로 표기하기로 한다.

 

(2) 한편, 다른 입장은 여섯 論師들의 견해 가운데 네 번째 句를 중심으로 “‘둘 없는 如來의 秘藏’을 宗旨로 하는 不一不異의 관점이 옳다”는 주장이다.[p2] 그 이유로는 ‘모남 없는 여래의 뜻에 맞기 때문임’이 첫 번째 이유 로 명시된다.[h2-1] 그에 이어 ‘여섯 번째 견해가 다른 주장들을 모두 포용 하기 때문’이라는 두 번째 이유가 부가된다.[h2-2] 그 이후, ‘이 두 주장이 서로 어긋나지 않으므로 不相違’라는 결론을 내린다.

 

전체와 부분 간의 관계에 입각해, 여래의 불설이나 불가설 입장에서 4구 모두를 회통시키는 이러한 화쟁방식은 󰡔大慧度經宗要󰡕 등 다른 저작에서도 일 관되게 나타난다. 󰡔大慧度經宗要󰡕에서는 경의 종지를 밝히는 가운데 제법실 상에 대한 다른 네 학설을 수평적으로 나열한 후, 이제 및 삼성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화쟁하고 있다.

 

문: 위에서 여러 스님이 말한 중의 어떤 것이 진실인가? 답: 여러 스님의 설이 모두 진실이다. 그 까닭은 다 성전에 근거한 것이므로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제법의 실상은 모든 희론이 끊겨 도무지 그렇다 할 것도, 그렇지 않다고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4구] 󰡔釋論󰡕에는 ‘일체가 實이요, 實이 아니며, 實이면서 實이 아니고, 實도 아니고 實이 아닌 것도 아닌 것, 이것을 모든 법의 실상’이라 하였다. [3구] 생각컨대 이에 설한 사구가 이 실상이라 한 것을 순서대로 앞의 사구에 배당할 수 있으니, 집착을 여의고 설하면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집착하여 말과 같이 취하면 파괴되지 않는 것이 없기에 실상이 아니다. 사구를 여의어야 파 괴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것을 제법의 실상이라 이름한다. 󰡔廣百論󰡕 게송에 “‘有’・ ‘非有’・‘有이면서 非有’・‘有도 아니고 非有도 아님’이라는 모든 주장은 다 적멸하다. 거기에서 논란을 일으키고자 해도 끝내 말할 수 없다”고 한 것과 같다.22)

 

    22) 󰡔大慧度經宗要󰡕 (HB.1, 481a2-14): “問; 諸師所說 何者爲實? 答; 諸師說皆實. 所以然者 皆是聖 典 不相違故. 諸法實相 絶諸戱論 都無所然 無不然故. 如 󰡔釋論󰡕云, ‘一切實, 一切非實, 及一切實 亦非實, 一切非實非不實, 是名諸法之實相.’ 案云, 此說四句 是實相者 如其次第 許前四說, 離著而 說 無不當故. 若有著者 如言而取 無不破壞 故非實相, 離絶四句 不可破壞. 如是乃名 諸法實相. 如 󰡔廣百論󰡕頌曰, ‘有・非有・俱・非 諸宗皆寂滅. 於中欲興難 畢竟不能申.’”

 

여기서 원효는 󰡔釋論󰡕, 곧 󰡔大智度論󰡕을 인용, 논의 대상인 제법실상을 각 논사들의 4가지 설에 배당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사구를 여의어야 파괴할 수 없음을 제시한다.

즉 각 사구를 수평적으로 나열한 후에, ‘모든 주장이 다 적멸 한 것이기에 논란을 일으키려고 해도 끝내 말할 수 없다’는 󰡔大乘廣百論󰡕 구 절을 활용하여 이제의 논의를 떠난 차원에서 불가설적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이렇듯 원효는 비유비무를 有・無의 동일성을 전제로 한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반야공에 기반을 두고, ‘만상만사가 일심에 의해 구성된 사태임’을 깨친 如實知見을 전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일체 규정을 벗어 난 一味・不可說을 제시한다. 즉 불가설로서의 非有非無를 ‘연기적 생성운동의 극한에서 모순과 대립을 벗어나 중도를 관함으로써 관념적 이론, 곧 개념화 [prapañca]를 떠난 인식론적 통찰’로 본 것이다.

‘하나가 아닌 까닭에 모든 측면에 상응할 수 있고, 다르지 않은 까닭에 모든 측면에서 한 맛’이라는 해석은 ‘연기적・관점적 측면에서 有見・無見의 양자부정이 곧 유무 양자의 긍정이 된다’는 의미에서 無二實性의 종지나 제법실상으로 포섭하는 방식이다.23)

동일성에 기반한 형이상학적 방식으로 사유할 경우 연기는 성립될 수 없고, 승의적 차원의 궁극적 실재는 有 또는 無의 표상으로 굳어진다.

즉, “有・無”, ‘有이면서 無’,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님’을 실재 개념으로 상정하는 한, 최소한 한 구에 집착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배중률이나 모순율에 저촉되게 된다. 하지 만 인식론적 연기의 의미에서 ‘자성 없는 공성이기에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 라’는 과정적 사유를 따르면 有・無의 동일성을 전제할 때 발생하는 모든 희론에서 벗어나 의미를 순환시킬 수 있다.

비판의 전제가 되는 자성적 근거나 매개에 갇힌 有執・無執을 떠나 平等一味를 이루기 때문이다.24)

이와 관련하여, 󰡔金剛三昧經論󰡕 「入實際品」에서도 眞如 體相 및 如來・衆生心相의 平等無二性을 非有非無의 방식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진여의 體相은 비록 있지 않으나,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진여의 체상은 이와 같이 진여의 상이 없는 진여 상이니, 바야흐로 이름 없는 진여의 이름이라고 칭한 것이다.

‘중생 심상의 상 또한 여래’라는 것은 ‘모든 중생의 분별심상의 상이 곧 상이 아니어서 평등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러한 까닭에 저 상 또한 여래’라는 것이다.

이상은 평등의 도리를 바로 세운 것이다.25)

 

     23) 󰡔金剛三昧經論󰡕「本覺利品」에서는, 3구와 4구가 교차된 始覺・本覺의 유・무불이적 開合을 통해 ‘깨달을 것 없음’에 기반한 평등일미적 인식이 제시되고 있다. 󰡔金剛三昧經論󰡕 (HB.1, 637a14-18): “旣無當於有始覺故, 雖不無覺 而不有覺. 故言不無不覺. 覺知如是無覺道理 卽知始覺不異本覺. 故覺知無覺 本利本覺.”[이미 ‘시각이 있음’에 해당하지 않는 까닭에 비록 각이 없지는 않지만 있 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없는 것도 아니고 깨달은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각이 이 ‘깨달음 없 는[無覺] 도리와 같음을 앎’이, 곧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이 무 각임을 앎’이 본래 이익인 본각이다.]

     24) 󰡔中論󰡕에서 용수는 사구분별을 통해 개념화한 非有非無 또한 비판한다.

이러한 무자성의 관점은 󰡔十門和諍論󰡕의 <空有和諍門>에 잘 나타나 있다. MMK, 299-302; 󰡔十門和諍論󰡕 (HB.1, 838b16-839a 16) 참조.

      25) 󰡔金剛三昧經論󰡕 (HB, 640c14-19): “如之體相 雖是不有 而亦不無, 如之體相 如是無如相之如相, 方稱無名之如名也. 衆生心相 相亦如來者, 謂諸衆生 分別心相 相卽非相 無不平等, 是故彼相亦是 如來. 上來正立平等.” 

 

이렇듯 원효는 平等一味의 이치에 입각하여 매개를 인정하지 않는다. ‘染 이면서도 淨이기에 衆生 또는 生死라 칭하며, 如來라고도 法身이라고도 이름 한다. 原因도 結果도 되는 까닭에 佛性 또는 如來藏이라 칭하며, 菩提 또는 大 涅槃이라 이름’할 뿐이다. 여기서 헤겔 변증법적 표상과 동일성은 여지없이 파기된다. ‘번뇌와 보리에 차이가 없다’거나 ‘중생과 여래가 다르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불성을 지니고 있기에 범부의 행동을 하면 범부라 칭하고, 여래 의 자격을 얻게 되면 여래가 될 수 있다”는 열린 사유에 다름 아니다. 일천제나 여래라고 하는 말 또한 ‘~하는 한’이라는 전제가 달린 조건적 가설일 뿐이다. 따라서 무엇인가가 ‘있어야 없어질 수 있다’는 전제하에 선행하는 有를 상정 하거나 원인을 소급하는 사유와는 다르다. 즉 인과를 어기지 않기 위해 유무 논리를 넘어선 선행실체로서 一心을 전제하는 초월론적・근원론적 존재론과는 다른 사유체계인 것이다. 나아가 󰡔涅槃宗要󰡕 宗旨 부분에서 제시된 논의 또한 인식론적 관점에서 차 이를 一心으로 종합하여 마무리 지음으로써 열린 형식의 변증법적 회귀구조 를 드러낸다. 이는 다음 장에서 살펴볼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서론의 ‘반복과 차이’가 결론에서 ‘차이와 반복’으로 순환되는 구조와 대비해 볼 수 있다.26) 즉 無二實性인 如來秘藏’이라는 宗旨에서 이념으로 제기된 문제는 결론에서 그에 대한 解로서 다시 如來秘藏과 一心으로 돌아와 회통되는 수미 쌍관식 상호 포섭구조, 곧 상의상관적 상즉론으로 개합된다.27)

 

 

      26) <서론>과 <본론> 사이에는 <즉자적 차이>와 <대자적 반복>이 있다. 이 또한 진여・생멸간의 연 속적 운동성과 같이 ‘차이와 반복’의 생성 및 연속적 운동성을 묘사한 것이다.

     27) 들뢰즈에 있어 답[解]은 문제를 구성하는 관계성 안에 내재해 있다. 따라서 현상 외부에 자기동일 적 실체를 찾을 필요가 없다. 원효 또한 인명 논증에서 주로 상대의 전제에 근거해서 ‘문제가 성립 되지 않는다’거나, ‘답이 되지 않음’을 밝히는 不定因・相違決定 등의 방법으로 개념 내부의 관계 성을 규명했다. 이 과정에서 문제 속에 이미 답이 있다는 화쟁론이 제시된다. 들뢰즈는 “해결 가능성이 문제 형식에서 비롯된다”는 아벨의 문제이론에 기반하여 자신의 변증법을 발전시켰다. 즉 문제의 조건들과 관련한 규정・외생적 기준을 문제[이념]의 내부 특성[연기적 특성]에 비추어 보면 ‘언표 안에 이미 답의 싹을 포함하고 있음’을 아는 구조이다. 문제는 解에 대해 초월적임과 동시에 본질적으로 내재적이다. 이는 문제를 통해 자체적으로 변증법적 순서에 따라 분만되는 解 의 영역 안에서 스스로를 기술적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모든 문제는 본성상 변증법적이고 그 외 에 어떤 다른 문제도 없다. 수학이 포괄하는 것은 변증법적 순서 자체를 통해 그 해결 가능성의 장 을 정의한다. 󰡔十門和諍論󰡕・󰡔二障義󰡕의 서술 또한 이 방식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들뢰즈 1993, 393-395; Deleuze 1994, 179-180. 

 

개별적으로 보면, 논의 첫 부분에서 사구 분석을 통해 수평적 방식으로 허 망한 제 존재자들을 포섭함으로써 초월성에 머물지 않음을 보인다.

이후, 뒷 부분에서는 ‘세속과 다르지 않은 붓다의 속성’을 脫性化28)의 특성[內在性]으로 제시한다.

 

      28) 들뢰즈 철학에서 ‘규정성의 파기 또는 무화’를 뜻한다. 들뢰즈는 니체를 활용, ‘결핍된 에로스를 넘은 ‘脫性化’를죽음본능(thanatos)으로 설명한다. 개체는 나르키소스적 리비도와 죽음본능의 상호 보완성을 통해 탈성화 에너지로부터 시간의 순수형식을 도출, 세 번째 종합에서 죽음을 체 험한다. 이를 통해 사유의 통일로서의 자아 개념을 넘어선다. 여기서 수동・능동의 인식능력은 기 억과 상상력을 다른 방식으로 종합하고 기능을 변화시켜 해체된 자아의 체계를 드러낸다. 이는 깨달음을 증득하는 순간, ‘자타・전후・성속의 구분이 없어지는 경지’에 비견할 만하다. 들뢰즈 2012, 252, 255-256; Deleuze 1994, 112-113; 니체에서 긍정과 부정, 그리고 재긍정에 관해서 는 Deleuze 1992, 175-185; 세 번째 종합의 함의와 짜라투스트라와의 관련에 대해서는 Deleuze 1993, 296, 351, 374, 376, 378-379, 381-382 참조.

나아가 총체적으로는 ‘모든 위계를 가로지르는 一心’이라는 일 의성 테제가 회통적 답론으로 문제와 개합된다.

그럼 이러한 원효 논법의 상즉론적 특성에 주목하면서, 이에 상응하는 들뢰즈의 논의 방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III. 대비 모델: 들뢰즈 변증론의 ‘열린 변증법적’ 특성

그의 주저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이념(Idée)의 두 측면인 차이와 반복을 각각 ‘즉자적 차이(difference in itself)’와 ‘대자적 반복(repetition for itself)’으로 표현한다. 전자는 ‘이념 속의 총체적 있음・포괄적 가능성・일의적 일자성[一義性]29)’을, 후자는 ‘이념이 전개하는 운동성’을 나타낸다.30)

또 ‘차이와 반복’이라는 말 자체는 일체의 생성을 표현하는 한 가지 음성으로 제시된다.

원효의 표현에 의하면 ‘開合’이나 ‘宗要’에 상응한다.

즉 차이가 要나 合이라면, 반복은 宗이나 開에 대응한다.31)

한편 들뢰즈 체계에서 ‘대자적 반복’은 헤겔 변증법에서와 반대로 긍정이다.

이는 원효가 4구를 모두 긍정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나아가 들뢰즈는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을 통해 헤겔이 모순에 기반을 두고 역사적 생성과정으로 파악한 시간의 순차성을 와해시킨다.32)

 

     29) 존재의 일의성(L'univocité de l'Etre)이란 “존재는 단지 한 가지 동일한 의미로만 말해진다.” [Deleuze 1993, 53.]는 뜻으로, ‘모든 총체성과 가치를 지니고 차이와 반복 운동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들뢰즈 철학의 최종목표 개념이다.

     30) ‘반복한다’는 것은 ‘유사하거나 등가적인 것 없이 유일무이하고 독특한 것과의 관계 속에서 행동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심층적・내면적임과 동시에 생명을 고취하는 단독자 내의 반복의 반향’이 다. 들뢰즈 2012, 26; Deleuze 1994, 1.

     31) 차이와 반복이란 󰡔정신현상학󰡕「자기의식」 장에 있는 ‘존재와 무 간의 변증론’에 비견될 수 있다. 헤겔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무 및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사유를 이율배반을 넘어선 변증법적 운동 을 설명하는 두 범주로 활용한다. 들뢰즈 또한 운동을 통한 불이적 사유의 틀을 차이와 반복으로 표현한다. 차이는 無[운동성]에, 반복은 存在에 대비해 볼 수 있다. 하지만 후자는 파르메니데스적인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인식론적 생성 존재론에 가깝다. 생성의 극한에까지 이를 수 있 는 인식 자체의 역량을 제시하는 개념이다. 즉 대승적 인식론과 존재론에서 차이는 궁극적 존재의 무상성을 의미하며 반복은 인과적 효과성(의타기성・연기성)을 의미한다. 또 반복과 연기성은 니체의 영원회귀와 같이 궁극적 존재의 移行의 측면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宗이나 開에 대응시킬 수 있다. 한편, 차이와 무상성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현실적 존재의 合生 측면과 유사한 맥락에서 要나 合에 대응시킬 수 있다.

        32)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을 통해, 무한 생성 속에서 잠재성이 손상되지 않은 운동성 자체로서의 시간 개념을 전개함으로써 시간의 순수 형식을 도출한다. 

 

이로써 헤겔 변증법에서 즉자・대자를 거쳐 양자의 종합으로 상승하기까지 발생하는 단계적 위계 또한 파기된다.

무시무종의 흐름 속에서 見道 이후, 일체의 時空이 사라지는 ‘覺’의 순간과 유사 한 맥락이다.

이 결과 차이와 반복 속에서 ‘잠재성’과 ‘현실성’ 간의 순차적 위 계나 매개가 사라진다.

모두 동시적이며 어떤 것도 상위일 수 없다.33)

또한 생성[因緣生]에 기반을 둔 열린 구조의 생성존재론은 의식의 흐름과도 동시적이다.

잠재성 영역에서 문제-장은 현실성 영역에서의 解와 다르지 않고, 이미 문제안에 모든 계열과 차이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마치 자신의 如來藏性[佛性]을 깨달았을 때 ‘범부 자신이 곧 여래임’을 깨닫는 구조와 유사하다.

들뢰즈는 이를 內在性으로 표현한다.

이렇듯 상즉성이나 내재성은 체용불이적 맥락에서 ‘끊임없는 생성이라는 동사적 사유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非有非無에 관한 첫 번째 사유와 상통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들뢰즈는 헤겔 변증법을 헐벗은 변증법이라고 비판한다.34)

 

      33) 들뢰즈 2012, 19.

      34) 반복의 두 형식인 ‘헐벗은 반복’과 ‘옷 입은 반복’ 중, 후자는 동태적・강도적이며 ‘봉인되어 있고 해석되어야 한다’[질 들뢰즈 2012, 74-75; Gilles Deleuze 1994, 23-24]는 점에서 如來의 祕秘藏과 유사한 함의를 지닌다. 한편, 유한과 무한을 매개하려는 점에서 헤겔과 들뢰즈는 상통한다. 하지만 양자 간 매개된 영역의 규정된 편차[규정성]의 유무와 정도에 있어 구분된다. 운동방식에 서도 차이가 드러난다. 헤겔의 무한성의 경우, 유한성을 전제하고 있지만, 그 유한성은 끊임없는 부정을 통해 언제나 무한성 안에서 소실된다. 반면 들뢰즈의 경우, 매개나 규정성이 없는 운동을 제시한다. 이로써 감성계의 유한성을 희생하지 않고 무한성의 풍부한 역량을 나타내는 긍정의 변증법이 된다. 매개가 없는 운동이므로 무한성의 역량이 그대로 유한성 속에 드러나는 방식이다. 동일자에 종속되지 않기에 차이가 대립・모순에까지 이르지 않는다. 헤겔의 차이 또한 운동의 ‘매계기들에 모든 정신이 응집된 표현’이지만, 들뢰즈가 볼 때 이 표현방식은 ‘헐벗은’ 것이다. 

 

진정한 생성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나아가, 󰡔의미의 논리󰡕에서 자신이 제시하 는 변증법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변증법[논리학/언어철학]은 명제들 속에 표현된 대로의 비물질적 사건들의 과학 이며 명제들 간의 관계 속에 표현되는 사건들의 연결이다. 변증법은 동사 변화/연결(conjugaison)의 기법이다.35)

이 기법은 특정 언어, 곧 한계들을 설정함과 동시에 설정된 한계들을 벗어나는 언어에 속한다.

나아가 그것은 한계들의 외연을 끊 임없이 변화시키고 해당 계열 내에서 연결(liason)의 전복을 가능하게 하는 항들 또한 포함한다. 사건은 생성과 同外延的이며(coextensif), 생성 자체는 언어와 동 외연적이다. 그러므로 역설(paradoxe)은 본질적으로 ‘산출점(sortie)’, 즉 끊임없 이 첨가되고 제거됨을 따라 진행하는 의문명제들의 계열(série de propositions interrogatives)이다.”36) 즉 들뢰즈가 제시한 변증법은 끊임없는 생성으로서 명제와 사건들 간의 동 사적 관계의 계열을 드러낼 뿐,37) 헤겔에서와 같이 부정과 지양을 통해 정태적 종합에 귀결되는 방식이 아니다. 헤겔 또한 “진리는 곧 전체다”38)라는 명제에 서 표현하듯, 매 계기들의 운동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는 전체적 진리에 도 달하기 위한 부정의 계기들이다. 즉 부정을 매개로 인정되는 계기들일 뿐, 즉 자・대자로서의 동일성이 중심이다. 아도르노가 비판하듯 변증법의 닫힌 구조 안에서 동일자는 지배자로서, 드러나는 매개관계의 중심으로 된다.39)

 

       35) 들뢰즈는 이를 ‘서로 의존하는 사건들의 계열들’로 설명한다. 들뢰즈 1999, 57.

       36) 들뢰즈 1999, 57; Deleuze 2002, 18; 역설을 산출점으로 본 것은 한계들의 외연과 연결로부터 ‘나 가는 순간’이라는 방식, 곧 ‘비정형화된 가로지르기 형식’으로무한계열의 진행을 기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개방성과 폐쇄성을 지님과 동시에 파기하는 산출운동[生成]의 시작이 되는 균열점 [Riss]으로 볼 수 있다.

      37) 언어의 의미 또한 ‘고정된 집착을 여의고, 생성과 외연을 같이 하는 차원에서 활용된다’는 점에서 원효 언어관과 상통한다. 38) Hegel 2011, 10-12. 39) 아도르노는 끊임없는 운동성 자체로서 관계성만을 창출하는 자신의 부정 변증법을 ‘열린 변증법’ 으로 기술한다. 그에 따르면, 헤겔 변증법은 ‘긍정성(affirmation), 즉 동일성을 긍정한다는 의미에서 닫혀있다.’ 반면 열린 변증법은 근원을 상정함 없이 표상을 파기하면서 생성과 관계성만을 남기는 방식이다. Adorno 2004, 27, 127, 158, 256, 336; 들뢰즈 또한 동일성의 상정 없이[탈주체], 변증법의 운동역량과 잠재성을 유한자의 영역에서실현시키려 했다. 후기 구조주의 인식론의 맥락에서 ‘차이 및 관계 속의 새로운 반복’은 ‘새로운 변증법’의 중심원리이다. Deleuze 1994, 168-221.

 

반면 들 뢰즈에 있어 각 차이들은 최고 권력자가 되며 동일자는 원리로만 기능한다.

완성된 각 주체[개체] 안에서 원리로만 작용하는 것이다.

범부 각자가 부처고 여래며, 해탈에 이른 위상을 점하는 구조이다. 들뢰즈 열린 변증법의 구조40)를 원효와 대비하여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 1> 열린 변증법의 구조 :생략(첨부논문파일참조)

 

            40) <표 1>은 생성 속에서 발생[발산・수렴]하는 존재들 간의 관계[생성 존재론]를 열린 구조의 평면 에 기술한 것이다. 이는 역능을 지닌 역동성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과정은 무한한 층위의 분 화를 통해 미규정(dx, dy)으로부터 규정(dy/dx)으로 이행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으로 기술된다. 단 존재/생성의 갈래들로 구성된 운동성의 계열은 ‘부정성의 매개가 없는 차이생성’이기에 전통 존재론의 변증법 체계와 구별된다. 일심과 마찬가지로 들뢰즈의 연속적 생성 또한 ‘주어진 것이 지만, 그 안에 있는 多者性의 계기들[존재/생성, 진여/생멸] 간의 상호작용으로 규정들이 산출된 다’는 점에서 열린 구조이다. 역능성의 개합은 태극의 운동 과정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들뢰즈에게 문제는 늘 역동적・변증법적이다.

미분법의 변증법과 관련, “문제는 3가지 측면을 지닌다”는 로트망(Lautman)의 테제에서 제시된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解들의 본성 배후에는 문제들이 있다. 이들은 변증법 자체 안에서 서로 구별되는 질서나 수준들을 이루고 있다.[一心 안의 진여/생 멸]

   2) 문제들은 解들에 대해 초월적인 동시에 본질적으로 내재적이다.[一心은 모든 것을 다 갖추고, 포괄하기에 이미 쟁론의 조화 속에 解가 내재되어 있다.] 또한 스스로 정의하는 해결 가능성의 場과의 상관관계를 통해 변증법적 순서에 따라 場을 정의한다.

   3) 문제는 解 안에 내재하고, 解는 이를 은폐한다. 문제 자체는 스스로 더 많이 규정될수록 더 잘 해결된다.

문제제기적[변증법적] 이념을 구성하는 이상적 연관들은 수학적 이론들에 의해 구성되고, 문제의 解로 제시된 실재적 결합관계 안에서 구현된다.

이 세 측면이 미분법을 통해 나타나는 방식을 원효와 대비해보면, ‘문 제[一心]=解[화쟁]’의 구조이다. 解는 ‘미분 방정식들과 양립 가능한 비연속성들’에 해당하고, 문제의 조건들에 의해 이념적 연속성[一心의 분화] 안에서 생겨난다. 들뢰즈 2012, 391-393; Deleuze 1994, 178-180; 이는 불설과 도리에 기반하여, 제기된 제 쟁론[질문]의 이치를 순서에 맞게 해결 가능성의 장으로 회통시켜 나가는 화쟁논법의 구조와 상통한다.

 

IV. 들뢰즈의 4범주와 원효 사구이해의 특성

그럼 이제 들뢰즈 변증법의 四句的 理解인 ‘재현을 만드는 4가지 굴레’ 개 념을 원효의 사구 이해와 대비해 보겠다. 󰡔起信論疏󰡕에서 원효는 󰡔大乘廣百論釋論󰡕을 인용하면서, 四句의 요점을 有・無나 一・異로 분류한다. 상세히 해석하는 부분에서 사구를 초월함에 대해 밝혔다. 사구가 비록 많으나 그 요점은 두 가지가 있으니, 바로 有・無와 一・異 등이다. 이 두 사구로 모든 허 망한 주장[妄執]을 포섭하였기에 이 두 가지에 의해 眞空을 나타내었다. 󰡔大乘廣 百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또한 고집하는 제법이 모두 진실이 아님 을 나타내고 외도들이 주장한 것도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다음 게송에 서 말한다. 有[1구]・非有[2구]・有이면서 非有[3구]・有도 非有도 아님[4구] 및 같 음[一; 1구]・같지 않음[非一; 2구]・같으면서 같지 않음[雙; 3구]・같지도 다르지도 않음[泯; 4구]에 순서대로 배대시켜야 할 것이니, 지혜로운 자는 진실이 아님을 환 히 안다. 󰡔大乘廣百論釋論󰡕에서 이르기를, “일체 세간의 색 등의 범주[句義, Padārtha]41) 는 언설[名言]로 나타내는 것이고 마음의 지혜[心慧]로 아는 것인데, 중생의 주장 이 같지 않아 대략 네 가지가 있으니, 유・비유・‘모두 허용함’[俱許]과 ‘모두 부정 함’[俱非]이다. 이에 따라 차례대로 네 가지 잘못된 주장[四執]에 배속됨을 알아야 한다. 즉 ‘같음’[一]・‘같지 않음’[非一]・‘양자를 용인함’[雙許]과 ‘양자를 부정함’ [雙非]이다.”42)

 

        41) 승론(Vaiśesika)의 󰡔六句義󰡕에서는 범주・원리를 의미하나, ‘말의 뜻’으로 볼 수도 있다.

        42) 󰡔起信論疏記󰡕 (HB.1, 706b7-17)[󰡔起信論疏󰡕 (T.44, 208c10; 밑줄 부분은 󰡔大乘廣百論釋論󰡕 (T.30, 234c08-12)]: “廣釋之中 明絶四句 四句雖多 其要有二, 謂有無等 及一異等. 以此二四句攝 諸妄執故, 對此二以顯眞空. 如󰡔廣百論󰡕云, ‘復次爲顯世間所執諸法 皆非眞實 及顯外道所執不同 故. 次頌曰, ‘有・非有・俱・非, 一・非一・雙・泯, 隨次應配屬, 智者達非眞.’ 論曰, ‘一切世間色等句義 名言所表 心慧所知 情執不同 略有四種, 謂有・非有・俱許・俱非. 隨次應知 配四邪執, 謂一・非一・ 雙許・雙非.’”; 이어서, “數論[Sāṃkhya] 외도가 고집한 有(Sat)등의 성은 제법과 함께 하나이기 에 有句에 해당한다. 이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왜 그런가? 만약 靑등의 색과 색성이 하나라면 색성과 마찬가지로 그 체가 모두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등의 방식으로 勝論[Vaiśeṣika; 2구]・無 慙外道[Jaina 등; 3구]・邪命外道[Ājīvika; 4구]를 차례로 논파한다. [󰡔起信論疏記󰡕 (HB.1, 706b17-c17) 참조] 

 

들뢰즈 또한 이 두 범주와 관련하여 유한-무한 양자택일의 무용성을 논하면 서, ‘재현[表象; représentation]을 만들어내는 4가지 굴레’를 제시한다. 즉 四 句 안의 분별적 메카니즘을 분류하기 위한 ‘동일성[같음; 1구]・유사성[같지 않 음; 2구]・대립[같으면서 같지 않음; 3구]・유비[같지도 다르지도 않음; 4구]’가 그것이다. 들뢰즈는 ‘이 네 가지 구가 분열되면 범주화가 일어나 매개됨으로써 재현을 만들게 된다’는 인식 및 언어의 특성에 주목한다.43)

한편 원효는 “有・無, 一・異 등의 사구 범주가 모든 허망한 집착을 포섭하는 것”이라는 󰡔大乘廣百論釋論󰡕의 견해를 수용하면서도, 모든 규정을 벗어난 一 心의 측면에서 사구를 모두 긍정한다. 들뢰즈 또한 ‘4가지 굴레의 虛妄見인 재현으로 인해 일의성[univocité]을 얻지 못하게 됨’을 경계한다.44)

 

    43) 有・無나 一・異는 변증법에서 각기 현상적・보편적인 것, 또는 비본질적・본질적인 것에 대응할 수 있다. 4구에 배대할 경우, 有[1구]와 無[2구]는 현상적 개체의 영역인데 비해, 一[3구]과 異[4구] 는 유무 실체에 기반, 관계성과 운동의 측면까지 포괄하기 때문이다. 다만 ‘有’라는 존재의 표상 [再現]이 발화되는 순간, 반대되는 무라는 개념에 의존하게 되고 배제[疎外]되어 있다가 다시 드 러난 무와의 관계성에 의해 一・異관계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有・無를 존재론적 본질[普遍]으로 보거나, 사구 모두를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의식의 순환하는 생성이라는 승의적 관점에서 각 구를 재현을 만드는 굴레, 또는 궁극적 진리를 드러내는 항으로 보아 동등한 심급에 배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有・無[1・2구]가 실체 자체의 규정성 안에 머무르기 쉬운 데 비해, 一・異[ 3・4구]의 경우, 이것과 다른 것 간의 관계적 존재로부터 사유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한층 광범위한 양태를 포괄할 수 있다. 또는 궁극적 중도나 최고 추상[本質]을 기술하는 운동성 내지 불가언설성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Deleuze 1994, 262-264; Deleuze 1993, 154, 179, 189, 193, 320, 337, 339, 369, 406 참조.

     44) 원효나 들뢰즈가 긍정을 강조, 부정 후에도 긍정으로 포섭하는 이유에는 ‘一心이나 一義性의 증득에 긍정이 효과적’이라는 禪적 함의도 있을 것으로 본다. 

 

양자 모두 붓다와 유사한 방식으로 존재론적 집착의 양 극단인 상견과 단견을 비판하는 것이다.

여기서 붓다가 비판하고자 했던 표상이 들뢰즈에게는 ‘재현을 만드는 4중의 굴레’다.45)

또 원효와 들뢰즈는 사구활용에 있어 맥락에 따라 각 범주 안에서 부정과 긍정・ 차전과 표전・해체와 종합[開合]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들뢰즈 변증법 에서 ‘문제-장’인 이념과 현실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제는 분화된 계열 안에서 사구가 드러내는 운동을 통해 현실성으로 된다.46)

 

    45) 들뢰즈 2012, 263.

    46) 박인성은 ‘들뢰즈와 원효 변증론’에 대한 논자의 발표와 관련하여, 이념-현실성의 관계는 “사건 [우발성] 및 무의미(nonsense)와 연관해서 이해해야 함”을 제시한 바 있다.(박인성, ‘2017.8.1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들뢰즈 특강’); 이념인 문제와 답[解]의 관계는 ‘현상 안의 사건에서 질과 연장을 만들어 가는 개체화 및 강도로 이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적확한 지적이다. 강도가 활동하는 개체화 발생의 장에서 표출되는 관계들은 劇化, 곧 시공간적 역동성 안에서 관계들의 특이성에 상응하는 유기체적 분화를 통해 발생한다. 즉 개체화에는 미완성된 상태에서 존재하는 불일치 한 것으로서의 특이성들이 있다. 이로써 제기된 객관적 問題-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잠재성의 현실화・불일치에 대한 소통을 통해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개체화이다. 이는 칸트적 구상화가 아니라, 공명 속에서 짝짓기(coupling)를 통해 불일치한 요소들을 통합하는 강도적인 것이다. 이 작용은 분화선을 따라 만드는 질과 연장들 속에서 현실화되는 미분적 관계 속에 있다. 들뢰즈 2012, 317-322; Deleuze 1993, 533.

 

마치 일심이 진여/생멸문 간의 연기적 생성 속에서 상호 훈습 되면서 두 측면으로 다르게 드러나지만 사구를 여읜 법성의 두 표현인 것과 같다. 또 들뢰즈 변증법에서 ‘문제 속에 解가 있듯이’, 양자에게 眞俗은 하나로 된 다. 나아가 계열분화의 과정에서 제 측면이 연속적 생성 속에 전개되는 상호 포섭과 脫性化를 거쳐 일의성으로 거듭나듯이, 진여와 생멸은 상호 훈습을 통 해 一味로 회귀된다. 역으로 ‘사구의 분열로 인해 사구 안의 고정적 견해나 부 정・긍정에 집착할 경우, 표상[매개]이 발생하게 되어 일의성이나 일심을 회복할 수 없다’는 열린 구조의 변증론이다.47)

들뢰즈의 네 가지 굴레를 사구에 따 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표 2> 四句에의 대비 방식: 외연과 내포 관계48)

 

1) 끈질긴 항존(A는 A이다.) 1-1) 동등성(A=A) 2) 유사성(A≠B) 3) 대립(A≠non-A)49),

4) 유비(이를 암시하는 것은 배제된 제삼자(C). 제삼자(C)가 규정하는 조건에 따르면 제 3의 항은 오로지 다른 두 항(A, B) 사이의 비율적 관계와 동일한 관계 A/(non-A(B))=C/(non-C(D)) 안에서만 규정 가능)]50)

[1) 동일성: (A) 2) 유사성: (-A) 3) 대립: (A∩-A) 4) 유비: [A∪-(-A)]

 

      47) 사구 안의 분별적 메카니즘인 4가지 굴레의 운동양상은 󰡔大乘起信論󰡕에서 ‘覺에서 不覺으로’, ‘不覺에서 覺으로’ 상호전화되는 과정에도 비견할 수 있다. 동일성을 실체나 자성에 해당하는 본 질적 무명으로 상정할 경우, 동일성・술어안의 대립・판단 안의 유비・지각 안의 유사성은 무명에 의해 발생하는 사구안의 분별적 메카니즘으로서, ‘無明業相으로부터 業繫苦相으로 향하는 三世 六麤’와 ‘業識으로부터 意識으로의 五意意識’ 및 ‘根本業不相應染에서 執相應染에 이르는 六染 의 진행과정’[요시히데 2008, 245-267 참조]과도 대비할 수 있다. 三世六麤에서 원효는 智相만 을 7識에 배대하고 相續識부터는 6식에 배대한다. 들뢰즈 또한 智相에 해당하는 특징을 ‘동일성 에 대한 집착에 의한 분별적 개체[자아]의식’과 연관시키고, 無明業相・能見相・境界相에 상응하 는 단계를 ‘사회 안에 구조화된 무의식’으로 본다.

     48) 재현을 만들어내는 4가지 굴레와 4구와의 관계는 외연과 내포의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외연은 1) 동일성[A] 2) 유사성[-A] 3) 대립[A∩-A] 4) 유비[-A∪-(-A)]이다. 하지만 실제 함의에서 재 현을 만드는 본질적 심급은 보편자[총체성]인 개념 안의 동일성으로 3・4구에 해당한다. 시간의 두 번째 종합에서 ‘동일성 개념’을 제시한 후 ‘유사성・동일성・유비・대립 등의 효과화’를 말하고 있기 에, 운동역량을 가능케 하는 3・4구를 동일성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성이 현실화될 때 현상 적 양태가 드러나는 것으로 보면, 본질적 내포를 지닌 1) 동일성[3・4(一・異)구]을 직접 의미를 나타 내는 表詮에 배대할 수 있다. 나아가 2) 대립・3) 유비・4) 유사성[1・2(有・無)구]을 유한자의 개체 성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遮詮에 대응시킬 수 있다: 󰡔涅槃宗要󰡕 (HB.1, 542c14-18) [(T.38, 251b-252b) 참조]: “若依如是 離邊之意, 四句皆望 當果佛性. 若使四句 齊望一果, 總別二意 有何異 者? 前二人說二句者 依遮詮義以遣二邊. 後總二人立句者 依表詮門以示中道.”[이처럼 ‘극단을 여 읜다’는 뜻에서 보면, 사구는 모두 미래의 깨달음으로서의 불성에 상대한다. 사구를 나란히 단일한 果에 상대시킨다면, 전체와 개별이라는 두 가지 뜻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앞에서 (일천제와 선근) 두 사람에 대해 두 구를 말한 것은 차전의 뜻에 의해 양극단을 여의는 것이고, 뒤에 두 사람을 모아 구를 세우는 것은 표전의 측면에서 중도를 세우는 것이다.]; 들뢰즈는 ‘존재와 무로 향하는 하위 단 계를 4 굴레로 보고, 본질 아래 비본질을 두는 헤겔과, 비본질을 내세워 본질을 설명하는 라이프니츠를 모두 비판한다.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양자 모두 궁극적으로 각 구간의 위계를 없애려는 지향은 같다. 하지만 본질과 비본질 간의 매개를 통해, 4 굴레의아래로 갈수록 같은 개체끼리 묶어 더 추상적인 것을 찾음으로써, 사구 및성속 간의 거리를 허용한다.

세계정신의 현현인 1人의 계기 밑 에 다른 계기들을 포섭하는 것과 같은 불평등성을보이는 것이다.

반면 들뢰즈에게 ’모든 것은 평등하다.’

‘중생과 부처는 하나’임을 주창한 원효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一心의 본원으로 되돌아 오듯이, 들뢰즈에 있어 각 계기들의 차이는 유비에 의한 단순한 차이 관계의 반복이 아니라, 영원회귀 안의 반복인 일의성의 회복・실현을 지향한다. 들뢰즈 2012, 263, 633; Deleuze 1994, 262-263.

      49) 항존과 동등성은 동일성 범주로 묶을 수 있다. ‘끈질긴 항존[A는 A이다]’이나 ‘동등성[A=A]’이 란 다른 조건과 상관없이 독존하는 동일성을 의미한다. 고정불변의 아트만과 같은 실체나 자성, 또 는 보편자로서 총체성 차이가 발생하지 않은 상태이다. ‘유사성[A≠B]’이란 ‘B가 함께 있는 상태 에서, B와 관계 하지 않는 차이성’이다. A와 B 간에는 교집합이 없다. ‘대립[A≠non-A]’이란, ‘A 와 -A는 같지 않음’, 곧 ‘A와 -A는 같은 면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만 관계함’을 뜻한다.

      50) Deleuze 1993, 386; 유비에 대한 공식이다. 위 항의 A는 ‘A자체의 동일성’, 아래 항의 A는 ‘B와의 관계 속에서의 A’이므로, 곧 ‘A의 차이’를 뜻한다. “‘A 자체의 동일성’과 ‘B와의 관계 속에서의 A 의 차이[A가 아님]’의 관계는, ‘개체 C의 동일성’과 ‘D와의 관계 속에서의 C의 차이[C가 아님]’와 유비 관계에 있다. “앞과 뒤가 유비관계에 있다”라는 것은 “동일성 A가 ‘B와의 관계 속에서 A의 차 이 관계’에대응함이, 동일성C가 ‘D와의 관계 속에서 C의 차이 관계’에대응하는 것과 같다”는 것, 즉 순수한 차이나 차이 관계와 달리, ‘같은 것이 반복되는 재현으로 가는 방식’임을 뜻한다. 아래 항 의 ‘B라는 관계 속에서 A의 관계’, 곧 ‘B라는 조건에서 A의 함수’란 ‘차이성 관계’를 나타낸다. 

 

 

<표 3> 재현(repreˊsentation)을 만들어내는 4가지 굴레[A: 동일자 A, B: 타자, C: 제3자, D: 제3자의 타자, S: 전체집합]: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동서의 차이를 떠나 문제나 쟁론에 대처하는 사유구조는 유사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모순되어 보이는 다른 명제들의 동치성이나 긍정을 유도해 내는 원효 와 들뢰즈의 회통방식은 상통하는 점이 많다. 양자 모두 4구를 동사적・과정적 의미에서 활용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사구의 상호연관 속에 모순을 포섭 하는 이 방식은 비록 부정 아닌 긍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용수와 구별되기는 하지만 비유비무를 이해하는 첫 번째 범주, 곧 ‘종의를 세움 없이 파기를 통해 연기적 관계의 의미만 남기는 용수’의 지향과 다르지 않다.51)

논법의 측면에 서 볼 때도 사구의 각 구를 상승시켜 이상성에 이르게 하거나, 매개나 표상을 설정함 없이 ‘생성과 상의 상관적 관계성 속에 중도만을 드러낼 뿐, 이에도 집 착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열린’ 구조를 보인다.

한편 ‘모순을 조화시키는 변증법의 역량은 그대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생성의 변증법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원효의 一心 또한 고정불변의 실체성을 띠지 않고 운동 속 에서 모든 계열을 긍정으로 포섭하는 이념 자체로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들뢰즈의 동일성은 차이생성의 구조라는 이념을 가능하게 하는 중심원리로서, 일의성의 한 요소일 뿐이다.52) 한편 원효와 들뢰즈의 주요 논술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우선 원효의 경우, ‘입장 1과 2의 차이를 보인 후 양자의 대립・차이로 인해 상이한 답이 가능함을 기술한다.

하지만 일심에 근거, 관점의 차이를 종합하면 그 답은 다르지 않다는 방식을 선호한다.

단, 일심과 같은 이념 자체에 답이 내재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점에서 두 체계는 크게 다르지 않다.53)

 

       51) 긍정[구성: cataphatic affirmation]과 부정[apophatic negation]은 그 방식에서 구별되지만, 모두 생성과정과 관계성을 중시하는 사유라는 점에서 열린 형식으로 볼 수 있다.

      52) ‘닫힌 변증법’의 체계는 동일성을 중심으로 대립의 지양을 통해 모순을 포섭하는 ‘수직적 구조’를 지닌다.

이에 비해 열린 변증법은 ‘대립 명제들을 부정을 통해 파기・무화’하거나, ‘문제[이념] 자체에서 답을 구하는 긍정을 통해 잠재적 문제를 해소・용해시키는 횡적 관계논리’이다. 아도르노는 부정의 변증법, 들뢰즈는 긍정 변증법을 활용한다.

      53) 열린 형식은 󰡔판비량론󰡕・󰡔십문화쟁론󰡕등에서 무자성이나 불상응행법 등의 새로운 범주를 통해 종적 포섭관계를 벗어나거나, 이율배반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에서도 보인다. 각 논사들이 제시한 주장의 차이를 명확히 한 후, 내적[自體] 상위・상호 모순・오류를 밝히거나,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무한퇴행・무의미 등을 드러내 화쟁으로 이끄는 방식 등이 그것이다. 

 

물론 들뢰즈의 경우 ‘차이 그 자체’를 한층 강조한다.

하지만 ‘잠재된 이념[운동성]을 현실로 끌어올려 최선의 규정 관계를 도출하는 열린 형식이라는 점에서 화쟁 논법과 상통한다. 나아가 양자 모두 긍정적 방식으로 대립이나 분열을 회통, 또는 가로지르는 변증법적 역량을 활용하고 있다.

즉 理想性이나 이념을 전제로 개별자나 전개체적 사건 간의 차이의 운동을 내적・관계적으로 연계짓는 새로운 변증법54)을 전개하고 있다.

 

    54) ‘차이가 분배되는 공간에 공존하는 모든 반복’으로 표현되는 무매개적 운동을 지칭한다. 운동의 본질 및 내면성은 대립이나 매개가 아닌 반복일 뿐이다. 들뢰즈는 헤겔 변증법이 “사유 일반의 운 동 안에 매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직접적・무매개적인 것을 배반・훼손했는가”를 비판한 다. 들뢰즈 2012, 44; Deleuze 1994, 10; 매개를 통한 이행에 관해서는 Hegel 1981, 95, Hegel 1998, 107-108 참조. 

 

이로써 기존 변증법에서 대립적으로 제시된 전체와 개별, 보편 과 특수는 우발성과 탈영역화를 거쳐 상호전화되는 유기적・연속적 생성 속에 서 하나로 만나게 된다. 또한 이 맥락에서 不一不異의 근원으로 회귀하거나 바탕이 상승하는 여정은 화쟁을 통해 구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들 뢰즈의 용어를 빌면, 일의성[一心] 안에서 ‘개체가 아닌 흐름, 높이나 깊이가 아닌 수평적 평면’이 강도를 지니고 부상하는 생성 그 자체와 다름이 없다. 원 효의 경우, 如實智見을 통해 모순적 개체들의 대립・부정성을 해소・무화하여 眞俗圓融無碍의 平等無二法性을 펼쳐내는 긍정의 논법이다. 이렇게 볼 때, 화쟁이란 一心이라는 잠재적 이념 속에서 제기된 제 문제들을 각 계열의 분화 와 상호작용[熏習]을 통해 현실성으로 구체화하는 가운데 답[解]을 도출해내 는 생성의 사유이자, 언어・논리철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V. 결론

󰡔涅槃宗要󰡕에서 원효의 주요 논지 전개 방식은 주로 p1-p2[p1에 대한 반 론]-원효의 입장을 전제하는 p3-종합적 평가[u]-결론[n: 긍정적 회통]이거나, p1-반론[p2]-답론[n: 회통]의 방식을 취한다.55)

 

      55) 원효는 6세기경까지많이 쓰이던 구인명의 5지작법, 즉 有宗(pratijñā)・因(hetu)・喻(udāharaṇa)・ 合(upanaya)・结(nigamana)의 방식을 축약, 또는 중층적으로 확대한 방식의 논법을 즐겨 사용 한다.

 

여기서 반론은 곧 근원적[如來의] 입장에서 볼 때 주장이나 답론에 대한 다른 한 측면일 뿐이므로 각 주장은 불이적 차원에서 서로 회통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p1]’라는 정립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비정립[p2=-p1]이 되었다가,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p3]라는 깨달음의 종합을 얻었다면, 원효에게 p3 와 p2는 다른 것이 아닐 수 있다.[p2=p3] 승의적 실재, 곧 들뢰즈의 표현으로 는 일의성과 바탕의 상승을 전제로 할 때, 사물의 空性과 佛性은 다른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정[p2]은 긍정을 배태하고 있고, 긍정은 곧 부정의 다 른 측면일 뿐 고정적 자성을 떠나 있다는 점에서 ‘차이와 반복’이 ‘반복과 차 이’로 되는 相卽性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전제를 통해 원효는 사구 긍정 또는 부정을 통한 완전한 회통[循環] 을 추구했다. 들뢰즈는 이를 ‘회집과 차이의 동시성’으로 표현한다. 생성 자체 일 뿐, 어떤 형태의 표상도 파기하려는 열린 변증법의 정신이다. 여기서 부정 과 긍정은 헤겔의 부정이나 모순에 해당하는 부정이 아니다. 다만 순환, 곧 운 동을 끌어내는 방식일 뿐이다. 운동성을 전제한다면 긍정으로 유도하든, 부정 으로 유도하든 그 방식은 반대편과 통한다. 원효의 경우 이를 不然之大然이라 는 眞俗圓融의 변증법으로 드러냈다. 즉 “하나가 아닌(非一) 까닭에 모든 측면에 상응할 수 있고, 다르지 않은(非異) 까닭에 모든 측면에서 한 맛(一味)”이며, 이것이 바로 “둘도 없는 여래비 장(如來秘藏)”이라는 논의 형식이 그것이다. 이는 인식론적 상호 포섭성을 보 이는 관점적 열린 변증법의 특성이다. “둘도 없는 실성이 相과 性을 떠났으면 서도, 染淨과 二門이 다르지 않기에 一味”라는 취지로 사구 간의 회통논리가 중층적으로 상호 포섭되는 것이다. 이로써 美醜・因果・善惡・一異・有無라는 재현적 장애가 다양한 관점에 따라 화쟁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如來藏의 無 二實性이 모든 性相과 有無를 여읜 中道로서 제 국면을 따라 한 가지 맛으로 열반의 덕을 펼치게 된다. 이러한 平等一味의 동사적 상즉론과 흡사한 방식으로, 󰡔차이와 반복󰡕의 마 지막 구절은 존재자 간의 상의 상관적 不二論으로의 인식론적 전회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모든 것은 평등하다”와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가 메아리치고 있는 것은 오직 一 義的인 것 안에서뿐이다. 이는 차이의 극단에 도달했을 때만 언명될 수 있다.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고, 모든 존재자들에 대해 존재의 단 일한 아우성이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먼저 각각의 존재자와 각각의 물방울은 각 각의 길에서 과잉의 상태에 도달했어야 했고 자신의 변동하는 정점 위를 맴돌면서 자신을 전치・ 위장・복귀시키는 바로 그 차이에 도달했어야 했다.56) 이렇듯 들뢰즈는 ‘끊임없는 변화 양상 속에서’ 존재자들이 한 가지 존재의 목소리임을 주창하는 일의성 테제를 제시하고 있다.57)

 

      56) 들뢰즈 2012, 633; Deleuze 1994, 253.

      57) 이는 ‘모든 존재가 자기 안에 있다’는 스피노자적 내재성에 기반하면서도 초월적 실재나 주체를 상정함 없이, 실체가 양태로 전화하여 작용하는 존재자들을 중시하는 사유이다. 즉 ‘존재는 다수의 의미로 말해지고 의미는 유비적 관계로만 존재한다’는 전통적 개념과 달리, “존재가 언급되는 대상은 다의적이지만, 존재자체는 일의적임”[Deleuze 1993, 388]을 의미한다. 들뢰즈 일의성 개념에 미친 스피노자의 영향에 대해서는 서동욱 2013, 327-344 참조.

 

이는 최고 존재와 다른 존재자 간의 위계를 구분하여 실체에 대해 유비적 존재만을 인정하는 방식과 차별되는 사유이다. 마찬가지로 인식론적 관점주의의 교차적 포섭방식으로 구성된 원효의 사구 논리에서도 어떤 구[命題] 또한 재현[表象]에 상응하지 않는다.58) 오히려 대 긍정을 통해 재현이 성립할 수 있는 쟁론의 분열을 끌어안는다는 점에서, 차이 그 자체를 긍정하는 열린 변증론적 사유에 맞닿아 있다. 문제는 각 구[項] 간에 “생성과 운동이 가능한가”이지, 긍정이나 부정이라는 계열별 운동 방식이 중 요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성의 긍정성은 들뢰즈 변증법에서 니체의 ‘영원회귀’ 및 관점주의 를 이어 ‘시간의 텅빈 형식’으로 표현된다.59) 나아가 들뢰즈는 ‘재현이나 에로 스적 자아의 파기’와 관련, 탈성화(脫性化)에로까지 생성의 긍정성을 고양시 킨다. “상(相)에서 벗어났기에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원인도 결과도 아니 며,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원효의 ‘4 구’ 또한 이러한 탈성화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60)

 

         58) 예컨대, “相을 여읜 까닭에…중략…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4구; 離相의 측면]은 현상계[世 俗]를 떠났기에 보편적 본질계[勝義]를 구현한다.” “性을 여읜 까닭에…중략…있는 것도 없는 것 도 된다.”[3구; 離性의 측면]는 “승의를 떠났기에 다양한 양태로 구현될 수 있다.[世俗]” 이렇듯 두 구절은 이제의 측면에서 열린 변증법의 상의 상관적 포섭논리를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59) 들뢰즈가 기반한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해서는 Deleuze 1992, 27-29, 47-48, 68-70; 니체의 긍 정・부정 및 재긍정은 같은 책, 175-185; 니체의 헤겔 변증법 비판은 Deleuze 1994, 8-9, 147-194 참조.

        60) 탈성화는 無常・苦・無我・空觀에 기반한 四善根 수행을 거쳐, 보살도 수행단계에서 自他의 구별과 능취・소취의 모든 분별이 사라진 無分別智・眞如나 입무상방편상(asallakṣaṇānupraveśopāyalakṣaṇa) 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김재권 2013, 85-87 참조.

 

원효는 사구해석에서 반야공과 연기론에 기반을 둔 유식・여래장 논법을 많 이 활용한다. 공성에 입각해 볼 경우,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연기 [生成]하는 동사적・과정적 X만이 있을 뿐이다. 유식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존 재하는 모든 것[諸法]은 다만 識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이렇듯 사유의 기 저에 반야와 유식의 전통이 전제되어 있는 만큼 원효의 사구 활용은 ‘논리를 통해 논리를 넘어서는 不可說 眞如’를 지향한다. 만약 그가 명사적・정태적・형 이상학적 X에 집착했다면 4구간의 순환과 운동을 이루기 위한 화쟁을 성공시 킬 수 없다. 이 경우, 들뢰즈가 비판하는 재현의 한 형식을 취하는 것이 될 뿐이 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구해석을 통해 본 원효의 화쟁논법은 인식론적 관점주의에 기반 한 동사적 사유임을 알 수 있다. 비유비무나 일심 또한 有・無라는 동일성에 기 반한 형이상학적 존재자로 상정된 개념이 아니라 연기적 생성을 드러내는 임 시적 표현일 뿐이다. 즉 사구의 재현적 한계를 벗어나 탈성화・일의성을 통해 본래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화쟁논법을 변증법 모델에 적용할 경우, 헤겔변증법보다는 들뢰즈 변증법의 열린 사유구 조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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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Characteristics of Wonhyo’s Logic of Hwajaeng regarding the Interpretation of Catuṣkoṭi: Focusing on the Comparison with a Deleuzian New Dialectic

Taesoo Kim (PhD candidate, Seoul National University)

This research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Wonhyo’s logic of hwajaeng, reflected in his interpretation of the catuṣkoṭi, while comparing it with Deleuze’s new dialectics, which criticizes the ‘Four shackles of representation.’ The main focus will be on the 4th koti, i.e., the view of ‘neither existence, nor non-existence’ in the catuṣkoṭi, which was used for interpreting the major tenets of Doctrinal Essentials of the Nirvāṇa Sūtra, Doctrinal Essentials of the Perfection of Ultimate Wisdom and Preface to the Exposition of the Sūtra on the Adamantine Absorption. After categorizing the concept of ‘neither existence, nor non-existence’ according to two different approaches, namely (1) a negation of both while revealing the middle path, and (2) an ultimate truth, the research concluded that Wonhyo’s approach is closer to case (1) in its structure of thought. Further, when analyzing the Deleuze’s new dialectics, which criticizes the concept of identity in Hegelian dialectics, it also shows a similarity to case (1). Both Wonhyo and Deleuze’s systems reveal congruence with regard to the inter-penetrative accommodation of differences between reality and foundation, by raising the latter to the surface of the former, without positing Idea (Idée) as the final end in the vertical or sequential hierarchy. They both reveal a positive ontology of ‘becoming’ which depicts an answer to reality through a series of synthesis and differentiation, in an open space. Problems are posited as interpenetrative multiplicities without implying any negation. By transcending the answer, the problem is presented as being no different from the solution, and as containing answers to all series of differences within itself. Likewise, one mind (一心) matches an Idea, while drawing its concrete determination (peras) as hwajaeng through differentiation and inter-penetration between True-suchness and the Phenomenal aspect of mind. The return of one mind shows the congruent synthesis of question and answer, based on the affirmation of catuṣkoṭi, while revealing Univocity (Univocité) as a true reality of all phenomena. The phrase, “it corresponds to all aspects since it is not one, and to one taste in all aspects because it is not different”, unravels the non-dual nature of the tenet, in the sense that the 4th koṭi equals the affirmation of the 3rd koṭi, when seen from different aspects. In turn, it reveals a process of recovering true nature through desexualization and univocity by breaking the representational bounds of catuṣkoṭi. 

 

Keywords : Wonhyo’s Logic of Hwajaeng, Interpretation of Catuṣkoṭi, Neither existence nor Non-existence, Deleuze’s New Dialectics [Open Dialectics], Univocity(Univocité), Idea(Idée)

 

2017년 11월 12일 투고 2017년 12월 4일 심사완료 2017년 12월 5일 게재확정

불교학리뷰 vol.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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