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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민주주의 이해 : 교회의 실천적 과제로서의 민주적 법치국가 /이용주.숭실대

 I. 들어가는 말

칼바르트가현실정치적인문제에대해적극적으로발언하고개입 하였다는사실은이미잘알려져있다. 하지만바르트의정치윤리에대한 국내연구들은대체로그의사회주의자로서의면모에한정되는경향이 있었고, 1) 그가민주주의에대해어떤이해를지니고있었는지에대해서 는그다지관심을기울이지않아왔다고해도과언은아닐것이다.

 

      1) 최근의사례로는: 이용주, “칼바르트의신학과사회주의의상관관계에대한연구: 로마서주석 2판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한국조직신학논총」 (2017), 209-248; 박성철, “칼바르트 초기 신학속 하나님 나라와 사회주의 담론의 변화에 대한  연구,” 「한국개혁신학」 (2016), 169-197. 130 

      

본 논문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바르트가 자신의 신학적관점으로 인해민주주의에대해서우호적이지않았다는그라프(F.W. Graf)의비판을논박하면서(II장) 바이마르공화국시기에형성된 그의 교회중심적, 그리스도중심적 신학이 민주적 법치국가에대한지지와관련되어 있다는사실을밝힌다(III장).

또한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선포라는교회의 과제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국가와 교회의 분리및  종교적 중립성이라는자유주의 정치의 핵심원칙을 신학적으로 도출해냄으로써 세속국가 내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하도록 돕는 것을 바르트가   교회의 정치적 실천의 과제로 제시한다는 것을 밝힌다(IV). 이를통해바르트 에게있어서교회의정치적실천은하나님나라를이땅위에구현하는 것이아니라, 하나님나라의유비인민주적법치국가자체를위해기여하 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 제시될 것이다.

 

II. 민주주의자 칼 바르트?! :

   역사적 논쟁점 개요와 검토 사안들

 

프랑크옐레는바르트의 평생에 걸친 정치적 실천에 대해 다룬 자신의 책에서 바르트를 가리켜 “위대한 민주주의자”2)라고불렀다.

 

    2) 프랑크옐레/이용주옮김, 『편안한침묵보다는불편한외침을』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14. 이용주

 

실제로 바르트는히틀러의전체주의에반대하면서독일에서완전한민주주의 가실현되기를희망하였고, 2차세계대전기간동안에는나치독일의 위협앞에 침묵하는 스위스 정부를 향해 스위스연방의 민주적인 헌법 가치를 실행에 옮길 것을 촉구하는 등 민주주의의 증진을 위해 일하였다.

특히 독일에서 추방당하여 스위스 바젤에 정착한1935년 이후 바르트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 혹은 교회의 정치적 과제에   대한 강연들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의견을공개적으로표방하는데3), 이런 점에서바르트가 민주주의자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반면, 바르트가 민주주의의 지지자로 분류되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있는것도 사실이다.

이같은 입장의 대표적인 인물은 뮌헨대학의 조직신학과 윤리학교수인 그라프(F.W. Graf)이다.

그라프의 비판은 특히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 시기동안 독일에서 교수로 활동하던 바르트에게맞추어져있다.

이시기 동안 바르트는 이후 자기만의 신학적 입장을 형성하는 작업에 몰두하는데, 이는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라프에 의하면 이 시기 바르트의 신학적자유주의에대한비판은동시에정치적자유주의에대한비판과 분리할수없이결합되어있고, 이로인해바르트는바이마르공화국이 민주주의를기초로안정화되는것을오히려방해하기까지했다는것이 그라프의주된논지이다. 4) 이에대해하인츠퇴트는이미바이마르공화 국시기에바르트가전체주의를비판하였다는여러전거들을제시하면 서매우격정적인태도로그라프를비판하였고,5)

 

      3) 이 주제와 관련된 바르트의 입장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문헌은『칭의와 법』(1938) 과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시민공동체』(1946)이다. 이두글들은서로 다른 시기에 스위스에서실시된 강연 원고들인데 아래에서는두글이합본되어출판된다음의 책으로부터인용될것이다: Karl Barth, Rechtfertigung und Recht. Christengemeind e und Bürgergemeinde (Zürich: TVZ, 1989).

     4) Friedrich W. Graf, “Der Götze wackelt? Erste Überlegungen zu Karl Barths Liberalismu skritik,” Evangelische Theologie 46 (1986): 422-441.

     5) Heinz E. Tödt, “Karl Barth, der Liberalismus und der Nationalsozialismus,” Evangelisc he Theologie 46 (1986): 536-551. 

 

이에 대해 그라프가 다시금 논박하는 방식으로6) 논쟁이 진행된 바있다.7)

두사람 사이에 진행 되었던 논쟁을 세부사항까지 비교·검증하는것은 본고의 목적은 아니므로 이를 상세히 다루지는 않을것이다. 다만본장의아래에서는 그라프의주요논점들을소개하고이를논박하는과정을통해바르트가 민주주의자로분류되기위해서검토되어야할사안들이무엇인지를제시하고자 한다.

바르트가자신의스승들의신학, 즉자유주의신학을 비판하면서 자기만의고유한 신학을모색해 갔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는 일이다.

그라프가밝히는것처럼자유주의신학에대한바르트의비판은정치적자유주의 에대한비판과밀접히결합되어있는데, 이같은특징은그가 로마서 주석제1판(1919)을 출판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나타난다.

예를 들어 바르트는스위스자펜빌에서 목회하던 1914년에 자유주의 신학진영의 핵심 잡지였던 「기독교세계」(Christliche Welt)에 당시 독일제국내에서 사회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정파들간의 협력을 추구하던 자유주의 정치인인 프리드리히 나우만(Friedrich Naumann)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는데, 이 글은 자유주의 전반에 대한 바르트의 거부를 한눈에 드러내주는자료이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나우만과같은 독일제국내의 시민계층이 자유주의적 정치이념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이들이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른 경제적 이익을추구하기 때문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한다.8)

 

    6) Friedrich W. Graf, “Der Weimarer Barth-ein linker Liberaler?,” Evangelische Theologi e 47 (1987): 555-566.

    7) 앞에서 언급한그라프의 논문들은 다음의 논문집에도수록되어있다: Friedrich W. Graf, Der heilige Zeitgeist (Tübingen: Mohr Siebeck, 2011), 425-446; 447-459.

    8) Karl Barth, “Die Hilfe”(1914), ed. Hans A. Drews. Vorträge und kleinere Arbeiten 1914-1921 (Zürich: TVZ, 2012), 61-76. 

 

정치적 자유주의와 신학적 자유주의는 모두가 ‘근대적 개인주의’라는 하나의 문화적 이상의 두 측면에 불과하며, 개인을  하나님의 지위로 까지 고양하려는근대의 문화적 시도일 따름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적 자유주의는“절대적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복음”에 대한 거부이며, 정치적 자유주의는 신학적  자유주의의 일종의 현실적 쌍둥이로서 그것이인간 개인에 집중하는 한 역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정치적으로 배신하는   행위에불과하다. 9)

마찬가지로 바르트는 로마서주석제1판에서도“자유 의의 근본적인 무가치함”(radikalen Unwert des Liberalismus)10)을

천명 한다.

자유주의 전반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바르트가 독일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바이마르공화국 시기에까지도 그대로 이어지는데, 모든종류의 자유주의의 조속한 종말을기대하면서 바르트는 자유주의는“빈사상태에빠졌다”(moribund)11)고 평가하기까지한다.

 

      9) Friedrich W. Graf, “Der Götze wackelt?” (1986), 423.

    10) Karl Barth, Der Römerbrief 1919 (Zürich: TVZ, 1985), 243.

    11) Eduard Thurneysen, ed., Karl Barth-Eduard Thurneysen. Briefwechsel, Bd. 2 (Zürich: TVZ, 1974), 330. 

 

스위스에서  목회하던 때부터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이르기까지 바르트가 신학적 자유주의를 비판했던 것은 부정할 수없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바르트는 정치적 자유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역시 비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있었고, 따라서 현실정치적으로도 독일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그라프의 논지이다.

그라프의분석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바르트가 교수로 재직하던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사전 이해가필요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제 1차세계대전의 결과 독일제국이 붕괴하면서 수립된 독일최초의 민주공화국으로서 자유주의 진영과사회주의 진영간의 연정을 통해 출범하였다.

하지만 당시 독일의 사회구성원 대부분은 여전히 독일제국에 대한향수를 지니고있었고, 이로인해 바이마르공화국은 수립되자마자 그 토대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특히제1차세계대전의발발과패전을초래 했던군부는공화국정부를구성한자유주의자들과사회주의자들이전쟁 중에군부의등뒤에서칼을꽂았기때문에독일제국이멸망한것이라는 내부단도설(Dolchstoßlegende)을유포시켰고, 당시정치적, 사회적으로 독일내에서다수를차지하고있던민족주의자들은비스마르크시대에로 의복귀를희망하면서민주공화국을전면적으로거부하였다.12)

신학자들가운데에서도공화국을 지지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하르낙이나 라데같은 소수의 자유주의자들만이 공화국의

성공과 민주주의의 안착을 위해 노력했다. 13)

 

      12) 바이마르공화국의혼란스러운정치적상황에대한이해를위해서는다음을참고 하라: 닐 맥그리거/김희주 옮김, 『독일사 산책』 (고양: 옥당, 2016), 414ff.; 마틴 키친/유정희 옮김, 『케임브리지 독일사』 (서울: 시공사, 2001), 264ff.

      13) 하르낙이비스마르크시대에대한민족주의적향수를거부하고,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연정을통해수립된바이마르공화국을지지했던역사적사실과 그신학적기초에대해서는다음을참고하라: 이용주, “민족주의와문화개신교의 관계 연구: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하르낙의 정치적 입장 및 그 신학적 토대를 중심으로,” 「한국조직신학논총」 42 (2015): 7-45, 특히 26ff.

 

반면 같은시기에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을 넘어서는 자기만의 고유한 신학적틀을 형성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사안들에대해서는 거의 침묵하였다.

신학적 자유주의를거부하였던바르트는 정치적 자유주의 원리에입각한 공화정과 의회민주주의 헌법국가와 정당정치등 현실정치영역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는 것이 그라프의 입장이다.

1920~1930년대에 바르트가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피력한 사례는 발견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또한 바르트가 1915년에 스위스 사회민주당에 가입한 것을 보더라도 바르트가 시민들의 형식적인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보다는사회 민주주의를 선호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바르트가 바이마르공화국의 현실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렸다는 사실이 곧바로 그가 민주주의를 거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그라프의 주장은 지나친면이있다.

왜냐하면독일제국과바이마르공화국당시 자유주의와사회주의는서로대립적이기만한것은아니었고, 사회주의 자들은정치적자유주의자들과마찬가지로신분제도의철폐, 보편선거 의실시등을똑같이추구하고있었기때문이다.

아울러 바르트자신도 자신이사회민주주의자가되었던것은그자신이대단히“자유주의적이 었기때문”이라고회고한바있는데14), 이를염두에둔다면, 사회민주주의자였던 바르트는 자유와 평등, 연대와 같은 자유주의의 기본가치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결코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당연시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일이다.

 

      14) E.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Zürich: TVZ, 2005), 95.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라: 이용주, “칼 바르트의 신학과 사회주의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2017): 209-248. 바르트가 사회민주주의자가 된 것은 민주주의를 총 체적으로부정했기때문이라기보다는사회민주주의가자유주의의가치중하나 인 평등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현실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아야할것이다. 바르트는이미 1913년에“시민적민주주의가사회민주주의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들 사이의 법적인 평등”이 단지 주장되기만 해서는안되고, “물질적인평등의현실화”를통해실질적으로구현될수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Karl Barth, “Ziel: Zur politischen muß die wirtschaftliche, soziale Demokratie kommen. Noch unveröffentlicher Vortrag vom 1. Nov. 1913”. F.W. Graf, “Der Götze wackelt?” (1986), 429에서 재인용. 

 

다만, 바르트는 독일국적을 취득하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는 이중국적을 지닌 스위스인이었고, 바로 이로인해 당시 독일의 정치적 현안들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것을 주저했던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15)

그라프의가장큰취약점은1928/29년의뺷윤리학뺸 강의에서바르트가 “국가의모든권력은국민으로부터나온다”고말하면서민주주의를지지 하고있다는사실을간과했다는데있다. 16) 같은강의에서바르트는“법치 국가이자문화국가”를구성하는요소로서“헌법의제정”, 입법부에의해 이루어지는“법률의제정”, 법률의실행을위한“정부”, 그리고사법부에 의해이루어지는“법률에따른심판” 등을국가의필수조건으로제시하기 도한다. 17)

 

       15) 바르트는1925년에야비로소독일국적을취득하게된다. 그는이중국적의스위스 인이었기때문에1920년대독일의정치적상황을여전히외부자의관점에서바라 보았고, 독일의정치적문제에대한직접적인언급을자제하였다. 이는바르트의 선생이자 친구이면서 「기독교세계」의 편집자이기도 했던 마틴 라데의 조언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Timothy J. Gorringe, Karl Barth. Against Hegemony (Oxford/New York: Oxford Univ. Press, 1999), 15.

      16) Karl Barth, Ethik II (Zürich: TVZ, 1978), 338.

      17) 앞의 책, 337. 

 

헌법의민주적인제정과삼권분립이민주적법치국가의기본 요소라는것을고려한다면, 뺷윤리학뺸 강의는1920년대의바르트가민주주 의에대해우호적이지않았다는평가가일방적이라는사실을드러내는 좋은 사례라고할 수 있다. 반면, 그럼에도불구하고뺷윤리학뺸에는여전히국가와교회의관계 에대한자유주의적이해에상충하는것처럼보이는진술이등장하는 것도사실이다. 특히바르트는하나의민족이하나의국가를형성하는 것처럼, 국가는특수한형태의교회를자기의영역안에서“유일한교회의형태”로선호할수있다고말한다. 이는“교회와국가의통일성의상 징”이며, 이렇게일종의국가교회를인정하는것이“교회와국가의분리 의체계”에비해서우월하다는것이다.18)

이에대하여그라프는바르트 가선호하는국가와교회의통일성은당시바이마르공화국헌법에명시 되어있는‘교회와국가의분리’라는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헌법원리 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19)

국가와종교의분리, 공적영역과사적영역의구분은헌법학분야에 서는“자유주의적인자유이해의총괄개념”20)이라고까지평가되는중 요한사안이다.

따라서국가와교회의분리를거부하는바르트의태도는 그가여전히자유주의적민주주의국가에대한이해가부족하다는것을 드러내는것처럼보인다. 바르트에대한이와같은비판은바이마르공화 국시기에만한정되지않는다.

칭의와법(1938), 그리스도인공동체와 시민공동체(1946) 같은강의들에서바르트는초창기와는달리민주주 의를더욱적극적으로지지하면서민주적인법치국가를형성하기위한 교회의적극적인참여를촉구한다.

하지만, 이는거꾸로1930년대이후의 바르트의 정치윤리에서도 여전히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분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평가가 나오게 하는 요인이기도하다. 21)

 

    18) 앞의 책, 342.

    19) Friedrich W. Graf, “Der Weimarer Barth-ein Linksliberaler?” (2011), 458.

    20) Hortst Dreier, Säkularisierung und Sakralität (Tübingen: Mohr Siebeck, 2013), 36. 이주제와관련한보다상세한논의를위해서는다음의논문을참고하라: 이용 주, “공공신학의 ‘탈사사화테제’ 비판,” 「기독교사회윤리」 45 (2019): 63-93, 특히 79-84.

    21) Eckhard Lessing, Das Problem der Gesellschaft in der Theologie Karl Barths und Friedrich Gogartens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shaus, 1972), 189; M. Beintker, “Die politische Verantwortung der Christengemeinde im Denken  Barths,” S. Holtmann & P. Zocher, eds., Krisis und Gnade (Tübingen: Mohr Siebeck, 2013), 197.

 

만일  이와같은평가가 사실이라면, 민주주의를위한교회의실천을촉구하는 것은오히려국가와교회의분리를제거함으로써자유주의원칙에기초 한민주적법치국가를약화시킬수있는위험성을내포할수도있기때문 에 이는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사안이다.

지금까지정리한쟁점들을중심으로보자면민주주의에대한바르트의이해와관련하여검토되어야할사안들은다음과같이정리될수 있다:

  첫째, 바르트는바이마르공화국시기동안자유주의를비판하면 서자신의신학을형성해갔는데, 이과정에서그의신학적관점은민주주 의에대한그의정치윤리적이해에어떤영향을끼쳤는가?

  둘째, 민주적 인국가를위한교회의적극적인실천을강조하는문헌들에서바르트는 국가와교회, 공적영역과사적영역사이의분리라는자유주의적헌법국 가의원리를간과함으로써민주주의의성숙에저해가되고있는가? 아래 에서는위의질문들을각각의독립된장으로구분하여해명할것이다.

 

III. 민주적 법치국가를 위한 교회의 정치적 책임 :

      말씀 선포의 과제와의 일치

 

바이마르공화국시기동안바르트가독일의정치적문제에대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 놓고 밝히지는 않았던 반면, 나치 정권에 의해 교수직을박탈당하고바젤로이주한1935년이후부터바르트는민주주의적 법치국가에 대한 지지를 적극적으로 표방하기시작한다.

이때 주목해야할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바르트의 지지는 바이마르공화국시기 동안 독일에서 그가 발전시킨 자신의 고유한 신학적 사유방식과 분리할 수없이 결합되어있다는사실이다.

마치제1차세계대전을전후하여 나타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바르트의 지지표명이 로마서주석에 이르기까지 진행되었던 그의 신학적 사유의 귀결이었던것처럼22),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역시도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동안 형성된 그의 신학 작업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동안, 구체적으로는 로마서 주석 제2판 (1921)의 출판이후 바르트는 인간적활동으로서의 신학적   작업의 근거와 과제를확정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1932년에 출판된 교회교의학 I/1은 그 오랜 탐색의 결과이다.

이시기동안이루어진바르트의신학적 발전의핵심적인사안은두가지로정리될수있다: 첫째, 교회가인간에 의해수행되는모든신학활동의포괄적인조건으로파악되었다는것, 둘째, 교회의기능인인간적신학활동의핵심을하나님의말씀에대한 선포로정리하기에이르렀다는것이다. 다른말로하자면, 신학의형식 적인틀로서교회의상황에로의집중이, 신학의내용적인핵심으로서 그리스도론적 집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23)

 

      22) 이와같은관점은바르트의신학이사회주의에대한그의이해에기초해서형성된 것이라는마르크바르트의주장과는반대되는것이다. 사회주의가바르트의신학을 근거지우는것이아니라, 바르트의신학이사회주의수용의토대가된다. 이에대해 서는 다음과 같은 윙엘의 분석을 참고하라: Eberhard Jüngel, “Die theologischen Anfängen. Beobachtungen,” Barth-Studien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shaus, 1982), 126.

      23) 『로마서 주석』을 통해 명성을 얻게 된 바르트는 1922년에 자신의 고유한 신학에 대해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기독교적 선포의 곤궁과 약속”이라는 강연을 진행한다. 여기에서바르트는“하나님의말씀의선포”라는설교의상황에서발생 하는인간적‘곤궁’과그곤궁을넘어서게하는하나님자신의행위로서의‘약속’이 라는 일종의 변증법적 상황이야말로 “전체 교회의 상황”이며, 이 상황에 대한 묘사야말로 자신의 신학적 관심사라고 밝힌 바 있다: Karl Barth, “Not und Verheißung der christlichen Verkündigung,” H. Finze, ed., Vorträge und kleinere Arbeiten 1922-1925 (Zürich: TVZ, 1990), 65-98, 89. 이후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말씀”에서바르트는역시동일한인간적곤궁과하나님자신의활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 곤궁의 해소, 그리고 그 결과 주어지는 신학의 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고 그러한 바로서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우리의 의무와 무능력, 양자를 우리는 알아야만 하고, 바로 그로 인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Karl Barth, “Das Wort Gottes als Aufgabe der Theologie,” H. Finze, ed., Vorträge und kleinere Arbeiten 1922-1925 (1990), 144-175; 특히151. 아래본문에서 다루어지는 『교회교의학』 I/1은이처럼 1922년 부터 지속되어 온 신학의 과제에 대한 바르트의 탐색의 결과이다. 이 시기 동안 이루어진 바르트신학의 발전과정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E. Herms, “Karl Barths Entdeckung der Ekklesiologie als Rahmentheorie der Dogmatik,” M. Beintker et al. eds., Karl Barth in Deutschland (1921-1935) (Zürich: TVZ, 2005), 141-189. 

 

바르트가 교회의 상황을 신학의 포괄적인 가능성의 조건으로 파악하게 되었다는 것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표현은 “교의학의 과제”를 묘사하는 교회교의학 I/1의§ 1의 명제이다:

“신학적학문으로서교의학은교회에게 고유한하나님에대한진술의내용과관련하여이루어지는학문적인자기검증 이다.”이명제는우선적으로는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이루어지는하나 님에대한교회의모든진술들은하나님에대한신앙에기초해서인간에의해 이루어지는인간적활동이라는사실을전제로한다: “교회는하나님에대해 이야기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고백한다.” 그러나하나님에대한모든 진술들은 그것이 ‘인간적’ 활동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진술이 아닐 수 있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교회의모든진술활동은일종의변증법적인구조를지니게된다.

하나님에대한진술이라는“행위의책임성”을실현하고자하지만, 동시 에하나님에대한교회의모든진술은“반박가능성”(Anfechtbarkeit)을 그안에지닌다. 즉하나님에대한교회의모든인간적진술들은부정성과 긍정성모두를그안에동시적으로지니고있다는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에대한증언의과제를지닌교회가처하고있는“곤경”(Not)이다.

따라서 교회는하나님에대해진술함에있어서하나님으로부터오는 “은총”(Gnade)에의지할수밖에없다. 하나님에대한교회의인간적인 진술활동자체에내포되어있는변증법적상황에직면하여“하나님에 대한교회의진술에대한비판과수정”을수행하는것이바로 신학의 과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신학을 “교회의 기능”이라고 정의 내린다. 24)

 

      24) Karl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I/1 (Zollikon-Zürich: Evangelischer Verlag, 1932), 1. 

 

그렇다면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교회의 진술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상기한 질문에 대해 바르트는 다시금 “교회의존재”를 그 대답으로 제시한다.

“교회에게고유한하나님에대한진술이교회의존재에일치”하 도록하는것이바로신학의비판적인과제이다.

바르트에게  이“교회의 존재”란 다름 아닌“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신학은하나님에대한교회 의인간적인증언이예수그리스도“그분으로부터유래한것인지? 그분을 향하도록인도하는지? 그분에게부합하는것인지?”를비판적으로검증함 으로써하나님에대한교회의진술이참된것이되도록한다.

바르트의 분류에의하면, 첫번째 질문은 성서학이, 두번째 질문은실천신학이, 마지막으로세번째질문은‘교의학’이담당한다. 이제야비로소앞에서진술되었던 뺷교회교의학뺸 I/1의§ 1의명제가의미하는바가무엇인지보다선명하게드러 나게된다. –신학일반이아니라–엄밀한의미에서의‘교의학’은교회에게 고유한하나님에대한인간들의진술의‘내용’과관련하여교회의신앙을토대 로인간에의해이루어지는“자기검증”의활동이다. 이인간적인자기검증의 활동의기준이‘예수그리스도’라는점에서교의학의‘그리스도론적집중’은 불가피한일이며, 바로이이유로인해서교의학은예수그리스도안에서“자비 롭게계시하시고화해하시면서인간을향한돌봄가운데계신하나님”25) 자신 의행동에대한증언을자신의과제로삼을수밖에없다.

 

     25) 앞의 책, 2. 

 

교회교의학 I/1에 이르러서 바르트가 하나님의 자비로운 계시인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에 대한 증언을 교회와 신학의과제로 확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이해를 평가할 때에도잊어서는안되는핵심적인요소이다.

왜냐하면이시기에이르러서바르트는 민주적법치국가를위한책임적인참여를교회가지향해야할과제로 공공연하게표명하기시작하는데, 이처럼교회의정치윤리적과제에 대해진술할때에도–교의학적진술들에서그랬던것처럼– 철저하게 ‘교회중심적’이면서‘그리스도중심적’인방식으로서술하고있기때문 이다. 이는우선적으로는교회와국가의관계에대한해명가운데드러난다. 바르트는교회와국가가서로‘구분’되는실재라는사실을자명한 것으로받아들인다. 교회는구원의질서를, 국가는법질서를다룬다는 점에서둘은명백히구분된다. 하지만이러한차이에도불구하고교회와 국가가서로완전히독립적이거나대립적이기만한것은아니다.

두 영역 사이에는분명한“긍정적인연관성”(der positive Zusammenhang)이 있는데,26) 이를바르트는철저하게‘그리스도론적인’ 방식으로해명한 다. 교회는죄인들을향해은혜를베푸시는하나님의행위가나타나는 예수그리스도를증언하는것을그과제로한다. 하늘로부터오는영원한 정의의나라를기다리면서땅위에서“어린양의피를통한죄인들의칭의 를믿고선포하며” 살아가기때문에교회는이세상의나라가영원하다는 환상을품지않는다. 반면, 국가는그리스도의복음의진리를알지못하 며, 이런 점에서 교회와 국가는 철저히 구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국가는“그리스도안에서토대지워지고, 파악되고, 재수립되는” 관계가운데있다. 27) 이는죄인인인간들에의해발생할수있는혼란과 무질서를법과질서를통해제어하는가운데그리스도의복음을증언할 수있는자유를국가가교회에게보장해주기때문이다. 이로써국가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칭의에 봉사”28)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교회는결코국가에대해근원적인적대심을품지않는다. 그보다 는오히려인간들사이의법을제정하고시행하는국가는“칭의에대한 설교”가교회에의해시행될수있도록하는하나님의은총과예수그리 스도의주권적행위를위해수립되었으며, 바로이점에서“예수그리스 도의영원한법”과그에대한“칭의의설교”야말로“참된국가의토대를 놓는다.”29)

 

      26) Karl Barth, Rechtfertigung und Recht. Christengemeinde und Bürgergemeinde (1989), 10.

     27) 앞의 책, 26.

     28) 앞의 책, 32.

     29) 앞의 책, 28f. 

 

교회와 국가는 이처럼 서로 구분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대한선포가운데에서구체적으로구별되는기능을수행함으로 써긍정적인관계를이룬다. 이런점에서교회와국가, 칭의의선포와 정치권력이라는상이한영역들은“기독론적인근거” 위에기초하고있 으며, 양자사이에는“내적이고도필연적인연관성”이주어져있다.30) 상기한것처럼바르트는복음의선포라는교회의과제에대한인식 을토대로국가를형성하는정치적, 법적질서를교회의과제실현에있어 서필수적인요소로제시한다. 그렇기때문에교회는국가의법질서와 다양한법적요구들을존중한다. 하지만바르트가국가의지배에전적으 로순응할것을요구하는것은결코아니다. 오히려바르트는소위‘권세 자에대한복종’을요구하는신약성서의가르침들이지니는시대적한계 를 지적하면서 이를 넘어서고자 한다. 신약성서는 “권위주의 국 가”(Obrigkeitsstaat)의“신민으로서의그리스도인”에대해서만알고있 을뿐, “국가를위해공동책임을지는시민”에대해서는전혀이해하지 못한다. 이에반해바르트는교회와그리스도인들의국가에대한태도는 단지“수동적인법률준수”라는의미로한정되어서는안되며, 오히려 “적극적인정치적행위”로이어져야한다고강조한다. 31)

 

         30) 앞의 책, 7; 9.

         31) 앞의 책, 44. 

 

이와관련하여 바르트는교회가적극적으로추구해야할다양한정치적활동의사례들 을제시하는데, 이는바르트가민주주의적법치국가를지지한다는것을 보여준다. 아래에서는 그 내용이 간략히 정리될 것이다.

바르트가 이미 1928/29년의 윤리학 강의에서일찌감치민주주의를 지지했다는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된 바있다.

뺷교회교의학뺸 시기에이르러서는민주주의에대한지지는그리스도의복음선포라는교회의 과제에대한인식을기초로더욱강화된다. 마치교회가선포하는그리스도에의한칭의의복음이‘모든사람’을위한것인것처럼, 교회는‘모든’ 시민들이국가의운영에적극적으로참여할것을보장하는민주주의적 정치제도를지지하는경향성을지닐수밖에없다: “복음으로부터도출 되는그리스도교적-정치적방향과노선은일반적으로 ‘민주주의적’ 국 가라고부르는측면을향한경향을지닌다.”32)

특정한민족구성원이나 신분, 집안, 혹은남녀등을국가운영에서배제해서는안되며, 교회는 모든시민들이차별없이정치적사안에의견을표출할수있는“기본권 으로서의자유”가보장되도록노력해야한다.

이는교회가은총의말씀 과사랑의영을통해“자유가운데하나님의자녀로불리움을받은사람들 의공동체”이기때문이기도하다.

복음의선포가언제나자유롭게이루 어져야하는것처럼, 양심의자유와“표현의자유”가제약받지않는국가 가되도록하는것역시교회의과제이다.

더나아가서바르트는모든 시민들에게서“자유와책임의평등”이실현될수있도록교회는노력해 야한다고강조한다.

자유와평등은서로대립하는가치가아니다.

모든 개별시민이국가공동체의정치적결정에평등하게참여할수있을때에 만그들의자유가현실화될수있기때문이다.

따라서‘모든’ 사람들이 국가공동체의사안들에대한규칙인“법을형성”하는데참여하는일이 보장되어야만한다.

이렇게모든자유로운시민들이“법앞에서의평등” 을보장받을수있도록하는것역시도교회의정치적책임의하나이다. 33)

 

          32) 앞의 책, 75f.

          33) 앞의 책, 69f.

 

자유와평등이자유주의적정치사상에기초한민주주의의기본적 인가치라는데에는의문의여지가없다. 바르트에의하면이것들외에도 교회가주목해야하는더중요한과제가있다. 그것은바로“아래를바라 보는” 일이다. 자유와평등이라는민주주의의가치가단지선언되기만 해서는안되며, 사회적, 경제적으로연약한사람들, 가난한사람들이 우선적으로보호받을수있어야만한다. 그때에야비로소자유와평등이 실질적으로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더욱 중요한 교회의 활동은가난한사람들을위한“법을형성”하는일이다. 시민들의자유와 평등이라는정치적가치가단지선언되기만해서는안되며, 이가치들이 실질적으로구현될수있도록시민들의공동의정치적참여를통한법률 의제정을강조한다는점에서바르트에게있어서민주주의는법치주의 와 동일시된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는 민중에 의한 지배 (Demos+kratie)를의미하지만, 그보다더중요한것은“헌법”과“법률” 에의해시민들의“권리를보호”하는일이다. 이런점에서민주주의란 “공동체성과자유”라는모든시민들의“권리와의무”가법률의보장에 따라공동체를지배하는하나의“특수한삶의질서”를가리키는말이 다. 34)

 

       34) Karl Barth, “Unsere Kirche und die Schweiz in der heutigen Zeit(1940),” Eine Schweizer Stimme. 1938-1945 (Zürich: Zollikon-Zürich, 1985), 157-178; 특히 164f.

 

그러므로교회의정치적과제는단지민주주의에대한선언적지지 에그쳐서는안되고, 한걸음더나아가서정치적자유, 법적평등, 경제적 정의와연대등이법률에의해보장되는민주적법치국가가구현되도록 하는데까지나아가야한다.

이를위해서교회는정부당국자들에대한 선출, 법률에대한결정과실행, 이에대한책임있는감시와통제등에 지속적으로관심을둘수밖에없다.

교회는  결코“빌라도의국가” 즉 전제 국가를 지지할 수없으며, 오직“법치국가”만을 지지할 따름이다.

이는법치 국가라는조건 아래에서만 칭의의 복음의 선포라는 교회의 과제가 올바르게 구현될 수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영역으로부터의 외적인 도피”는교회의 과제가 아니다.

교회와그리스도인들은“법치국가(Rechtsstaat)라는국 가의속성을위한책임”을함께진다.35)

지금까지살펴본것처럼뺷윤리학뺸 강의가이루어졌던1928년을전후 로한바르트는-그라프의주장과는달리- 이미명시적인‘민주주의자’였 다고평가할수있다. 바이마르공화국시기인1920년대말경부터바르트 는민주주의에대한지지를직접적으로표명하였으며, 나치정권에의해 추방된1935년이후부터는민주적법치국가36)를형성하는일을교회의 책임적인정치적과제로제시하고자애쓴다.

 

      35) Karl Barth, Rechtfertigung und Recht. Christengemeinde und Bürgergemeinde (1989), 45.

      36) 이와 관련하여 플라이더러역시도 『칭의와 법』(1938)의 핵심 내용을 계시신학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근대 법치국가적 민주주의에 대한근거지우기”라고정리한 다: Georg Pfleiderer, “Karl Barth, Rechtfertigung und Recht(1938),” M. Brocker, ed., Geschichte des politischen Denkens. Das 20. Jahrhundert (Frankfurt a/M.: Suhrkamp, 2018), 233-248, 234 

 

바르트가그리스도의은총 의복음의선포라는교회의과제에입각하여민주주의적법치국가를 형성하는데동참하는것을교회의정치적인책임으로제시하고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바르트가국가와교회의과제를철저히구분하고 있다는사실이간과되어서는안된다.

바르트는민주주의를위한교회의 정치적 책임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국가와 교회, 정치적 실천과 복음 선포를 서로 엄밀히 구별되는 두 영역으로 철저히 구분해 낸다.

다음 장에서는이와같은구분을통해바르트가국가의정치적·종교적중립성 이라는자유주의적세속국가의가치를지지하고있으며, 이는예수그리 스도의복음선포라는교회의고유한과제에대한신학적통찰에기초하 고 있다는 사실이 다루어질 것이다.

 

IV. 민주적 세속국가 :

     말씀 선포의 과제에 기초한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

 

그리스도의은총의복음에대한선포라는교회의과제에대한인식 을토대로하여이은총의복음이선포될수있도록평화와질서를유지하 는국가의필요성을바르트가제시한다는것은앞에서살펴보았다. 교회 와국가는모두인간의죄에대립하여인간을위해작용하는“하나님의 은총의도구”이다. 신앙의관점에서보자면교회뿐만아니라국가역시 도외적인평화와질서의구현을통해인간을향한하나님의구원활동을 섬기도록 하나님 자신에 의해 수립되어진 “하나님의 은총의 질서”이 다. 37)

따라서바르트는교회를가리켜그리스도의왕국의“내부권역”으 로, 국가를그리스도의왕국의“외부권역”으로묘사한다. 38)

 

      37) Karl Barth, Rechtfertigung und Recht. Christengemeinde und Bürgergemeinde (1989), 54.

      38) 앞의 책, 56f.

 

그기능상의 차이가분명하지만양자는모두인간을위해하나님에의해수립된인간 들의공동체이다.

그러므로교회는결코국가를운영하는일에있어서 무관심할수없다.

오히려교회는민주적법치국가가형성되도록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책임을 져야한다.

심지어바르트는교회의 이러한과제를가리켜“일종의 정치적인 하나님섬김”39) 즉 정치적인 ‘예배’(Gottesdienst)라고묘사하기까지한다.

하지만이를교회가국가 권력을획득하려는정치활동에뛰어들어야한다거나, 기독교신앙에 기초해서국가를운영할것을바르트가촉구하는것으로오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바르트는소위‘내부권역’으로서의교회와‘외부권역’으 로서의국가사이의기능상의차이를선명하게강조하며, 양자사이의 차이가상실되지않도록촉구함으로써오히려교회는국가를위한정치 적책임을잘실현할수있다는사실을제시하고자애쓴다. 아래에서는 국가와교회의기능상의구분을강조하는바르트의입장은국가의종교 적·세계관적중립성이라는자유주의적가치를그가적극적으로수용하 고있다는사실을방증하는것이며, 바르트는이를통해세속국가의강화 를 통한 민주주의의 성숙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 제시될 것이다. 바르트에의하면교회의본질적인과제는그리스도의복음의선포 이며, 바로이“자신의고유한 과제를성취하는”40) 일을소홀히해서는 안된다.

따라서“그리스도의왕국과오직신앙을통한칭의”를선포하면 서, “성서에부합한설교와가르침, 참으로성서에부합하는성례의실행” 을수행하는것이야말로교회가가장집중해야할과제이다.41)

 

      39) 앞의 책, 5.

      40) 앞의 책, 56.

      41) 앞의 책, 46.

 

이처럼 “전적으로비정치적”인과제를수행하는것이야말로국가를위한교회 의가장큰‘정치적인’ 기여이다.

그이유는, 교회는모든사람들을위한 복음의선포라는자신의고유한과제를실행에옮기기위해서국가로  하여금교회에대해이복음선포의자유를“단지허용하는” 것을넘어서 서“적극적으로제공”할것을요구하는데, 이를통해교회는교회가신앙 하는“자유의법”에따라국가내의모든사람들이신앙과종교의문제와 관련하여“인간적인자기규정”을실행에옮길수있는법을마련하고 이를보장하도록촉구하기때문이다.

즉교회는복음의선포의자유를 존중할것을국가에게요구함으로써국가내의모든시민들이자신의 삶을스스로결정하고형성해나가는법적규정이마련되고준수될수 있도록애쓴다.

복음의선포라는교회의과제를충실하게실현하고자 노력함으로써교회는모든개별시민들의자유가존중받는법치국가가 구현되는 것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복음의 선포를 위한 국가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는그와 똑같은 강도로 국가의 활동의 범위를 제한하고자 애쓴다.

국가는오직법률에따라공권력을행사함으로써외적 인평화와질서를유지하는것으로만그기능이제한된다.

반면국가가 시민들을“그내면에있어서국가를위해복속시키려” 한다거나, 혹은국가 자신이형성한“세계관”을중심으로시민의내적양심을침해하고자한다 면, 이는거부되어야만한다.

특히국가는시민들에게“국가에대한사랑을 요구해서는안된다.” 시민들에게국가를사랑할것을요구하는국가는 더이상“법치국가”(Rechtsstaat)가아니고“불법국가”(Unrechtstaat)에불 과할따름이다. 바로이지점에서국가에대한바르트의가장급진적인 비판이나타난다. 그와같은국가의시도안에는“심연으로부터나오는 짐승”이 어떤방식으로든 작용하고 있다.42)

 

       42) 앞의 책, 43. 

 

본래바르트는국가를“심연으로부터나오는짐승”으로간주하면 서원칙적으로부정하는것은국가에대한교회의올바른태도가아니라 고보았다.43)

그럼에도불구하고바르트는본인이직접거부한은유를 사용하면서까지개인의내면으로부터우러나오는충성과사랑을요구 하는국가를강력하게비판한다.

이러한태도는바르트가국가와종교의 엄격한분리라는자유주의적민주주의헌법정신을적극적으로수용하 고있다는사실을보여준다.

정치와종교가일치되었던근대이전의세계 에서와는달리근대이후의민주주의적법치국가에서는국가와종교의 분리가헌법적으로보장된다. 44)

국가는더이상종교적문제에개입하지 않으며, 종교적·세계관적신념은어디까지나개별시민들의사적인신앙 과양심의자유의영역으로인정되고보호받는다.

뿐만아니라국가역시 도특정한종교나세계관적신념을토대로스스로를정당화하지않으며, 오직시민들의민주적합의에의해형성된헌법과법률에의거하여통치 할뿐이다.

이런점에서민주적법치국가는오직‘세속국가’로서존재한 다.

세속국가는종교적·세계관적인중립성을유지함으로써개별시민들 이각자의종교와양심의자유를따라자기삶을자율적으로형성해갈 수있도록돕는다.

이런점에서국가와종교의분리, 국가의종교적·세계 관적중립성은개별시민의자유를존중하고이로써민주주의가실현되 도록하는데있어서제거할수없는요소이다. 45)

 

       43) 앞의 책, 18.

      44) 일례로대한민국헌법제20조2항도이 원리를수용하고 있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https://www.lawnb.com/Info/ContentView?sid=L000001444(2022년 12월 13일 접속)

       45) 세속국가의 종교적 중립성과 종교의 사사화가 민주주의의 발전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Herbert Schnädelbach, Religion in der modernen Welt (Frankfurt a/M.: Fischer, 2009), 99f. 이주제에대한보다간략한해명을위해 서는다음의논문을살펴보라: 이용주, “공공신학의‘탈사사화테제’ 비판: 탈세속 화시대에 다시 보는 종교의 사사화의 공공성.” 「기독교사회윤리」(2019), 63-93. 

 

이러한이해를토대로 본다면, 국가와 교회의 역할을 엄격히 구분하고, 시민 개개인의 내적 신념에대한국가의개입과요구를거부하는바르트의태도는종교적·세 계관적문제에대한국가의중립성이라는원리를그가적극적으로수용 하고있다는것을보여준다.

실제로바르트는다음과같이말한다: “국가는진리 문제에 있어서 중립적이다.”46)

 

    46) Karl Barth, Rechtfertigung und Recht. Christengemeinde und Bürgergemeinde (1989), 12. 

 

국가와교회를철저히구분하고, 국가가그종교적중립성의원칙을준수할것을요구함으로써교회는 세속국가내에서민주주의가강화되는데기여할수있게된다.

복음의 선포의자유에대한보장이라는교회의가장비정치적인요구가가장 큰 정치적인 기여라는 바르트의 말은 이를 뜻한다. 그렇다면, 바르트로 하여금 국가와 종교의 분리라는 세속국가의 원리를수용하도록한신학적통찰은무엇일까?

여기에서우리는다시금 예수그리스도의복음의선포라는교회의과제에대한바르트의신학적 관점에게로복귀하게된다.

국가와교회가서로‘긍정적인관계’를이루 는것이사실이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국가는외적인질서와평화를, 교회는내적인신념을다루는서로명백히‘구분되는’ 질서이며, 양자 간의차이는결코제거되어서는안된다. 국가를교회화해서도안되며, 교회가국가기관화되어서도안된다.

국가의종교적중립성은철저히 고수되어야하고, 국가는어디까지나세속국가로머물러있어야만한다.

그때에야비로소복음의선포라는교회의과제가국가의개입이나간섭 없이 자유롭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와 교회가 이처럼 서로 관여되어있으나, 서로구분되는상이한행위를요구한다는것은오직 예수그리스도의복음의선포라는교회의토대와과제에대한인식으로 부터도출된다.

“칭의의복음에대한자유로운설교”는교회와국가가 상호간의본래적인행동양식가운데상이한형태로존속할수있도록 한다. 복음의설교가자유롭게이루어질수있기위해서라도교회와국가 는각자의상이한영역속에머물러있어야만한다: “각자의것은각자에게”(suum cuique).47)

 

      47) 앞의 책, 47. 바르멘 신학선언(1934)에서도 바르트는 이 시기에 자신의 신학적 틀로 확정된 교회론과 그리스도론에 근거하여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촉구하고 있다. 이는제5조에서가장명백하게드러난다. “우리는 국가가자신이위임받은 영역을넘어인간삶의유일하고도총체적인질서가되어야하고, 그럴수있다고 말하는, 그리하여국가가교회의규정까지좌우해야한다거나혹은그럴수있다 고하는거짓된가르침을단죄한다. 우리는교회가그특수한위임을넘어국가의 방식, 국가의과제, 국가의존엄을자신의것으로삼아스스로국가기관이되어야 만한다거나혹은그럴수있다고하는거짓된가르침을단죄한다.” 프랑크옐레/ 이용주 옮김, 『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2016), 199. 이 책의 독일어 원서에는 바르멘 신학선언이 실려있지 않다. 번역본의 부록으로 수록된 바르멘 신학선언은 번역자가 추가해 넣은 것이다. 

 

국가의종교적·세계관적 중립성과 국가와 교회의 분리라는 자유주의적 세속국가의 헌법원리에 대한 존중은 칭의와법(1938)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지만, 이미윤리학(1928/29) 강의에서도 제한적인 방식으로나타난다.

여기에서 바르트는1938년이후의 표현과 비슷하게 국가는“법적규칙의보호자”로서“자기자신의영역” 안에머물러있어 야하며, 결코“국가의이상에일치하는세계관과도덕의선포자”가되고 자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또 국가는 교회의 제의와 교리, 교회법, 설교와신학에있어서“자유”를제공해야한다고주장하고있는것을 보면, 48) 바르트는그라프가생각했던것과는달리이미바이마르공화국 시기말부터국가와교회의분리라는자유주의적세속국가의원리를 수용하고있었으며, 이를통해민주주의적법치국가가실현되는것을 지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해도 무방할 것이다.49) 바르트가비교적상당히이른시기에서부터국가와교회의분리를 촉구하고있다는것은바르트의정치윤리와관련한논의에있어서시사 하는바가크다. 국가의종교적·세계관적중립성의원칙이“자유주의적 인자유이해의총괄개념”50)이라는것을염두에둔다면, 자유주의에대 한바르트의신학적비판이자유주의적인정치이념에기초한민주주의 에대한총체적인거부로직접적으로이어진다고보기는어렵다는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48) Karl Barth, Ethik II (1978). 341f.

       49) “국가와교회의분리”라는시스템보다“국가와교회의통일성”을선호하는것처 럼보이는『윤리학』 강의의진술은바르트가국가와종교의분리라는자유주의적 원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증거라기보다는, 국가와 교회가 헌법과 법 률에따라‘원칙적’으로는분리되지만, 유럽의각나라들에서특정한기독교교회 분파(예를 들어 독일의 루터교회)가 ‘현실적’으로는 국가와 상호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고있는현실에대한인정정도로간주하는것이더타당한것으로보인다. 왜냐하면 바르트 자신도 국가가 “하나의 특정한 교회형태”와 결합하는 것은 “원 칙적인” 것은 아니고, 다만 “현실적인”(praktisch)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 다: Karl Barth, Ethik II (1978). 342.

       50) Hortst Dreier, Säkularisierung und Sakralität (2013), 36; 이용주, “공공신학의 ‘탈사사화테제’ 비판” (2019), 79-84. 

 

오히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선포라는교회의과제의빛아래에서국가와교회의분리,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구분이라는정치적자유주의의원리를도출해내고있으며, 이를토대로교회의복음선포의자유에대한국가의보장과보호를요청 함으로써세속국가내에서민주주의가강화될수있도록촉구하고있다.

바르트가예수그리스도의은총의복음의선포라는교회의과제에 대한인식에기초해서민주주의를지지하는것은사실이지만, 민주주의 를위한교회의책임적활동그자체를곧교회의선포의내용인예수 그리스도의복음에대한선포나하나님나라와동일시하지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래에서 묘사될‘유비론’이다. 교회는책임적인정치적실천을통해민주적인법 치국가가형성되도록도와야하고, 동시에국가와교회의역할의차이를 강조함으로써국가내에서민주주의가정착되도록기여할수있다. 하지 만그모든노력에도불구하고“정치는교회의반복이나하나님나라의 선취를드러내는것은아니”라는사실이간과되어서는안된다. 51)

 

        51) Karl Barth, Rechtfertigung und Recht. Christengemeinde und Bürgergemeinde (1989), 75f. 52) 앞의책, 64. 이는앞에서도살펴본것처럼신학의과제를예수그리스도의은총의 복음에대한‘선포’라는‘인간적활동’으로정의한것으로부터도출되는관점이다.

 

이는 국가와교회모두예수그리스도의복음과하나님나라의선포를위한 ‘인간적’ 활동의영역이긴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두영역모두하나 님나라를실현하고인간의구원을완성시키는‘하나님자신’의활동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기인한다. 교회는하나님나라가아니다. 교회는다만예수그리스도안에선취 된“하나님나라를기억”하며, 또한하나님나라를선취시킨“예수그리스 도를기억”하는가운데인간을향한하나님의은총과통치에대해‘선포’ 하는‘인간적활동’을수행할뿐이다. 52) 그러한바로서교회는복음가운 데선포되는하나님나라와‘상응’하는방식으로국가가형성될수있도 록 비판적인 준거점을 제공한다. 국가 역시도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민주적인방식으로운영되고법적절차에따라적법하게통치되는한에 서국가는다만하나님나라에대한‘유비’가될수있다는점에서“유비의 능력”(Gleichnisfähigkeit)을 지닌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있어서 유비 개념이언제나유사성속의비유사성, 동일성속의비동일성이라는긴장 을함축하는것처럼, 하나님나라의유비로서의국가와이를위한교회의 정치적책임은결코하나님나라와‘동일시’되어서는안된다: “정치와 교회의동일화혹은정치와하나님나라의동일화는있을수없는일이 다.” 하지만, “정치와교회사이의, 혹은정치와하나님나라사이의단순 하고도절대적인비동일화역시도있을수없는일이다.” 예수그리스도 의복음의선포와그리스도의통치라는신학적관점에입각해서보았을 때국가와그안에서이루어지는시민들의민주적인정치적참여는“교회 안에서신앙되고교회로부터선포되는하나님나라에대한하나의유비, 하나의 상응(Entsprechung), 하나의 유비체(Analogon)이다.”53) 국가 는예수그리스도의복음이선포되도록질서와평화를유지하고, 그안에 서모든시민들의종교와양심의자유가민주적인방식으로제정된법률 에따라보호되고보장받을수있도록하는한, “간접적으로, 거울상안에 서” 하나님의나라를“반영”한다. 이런점에서국가와정치는“유비로서의 능력(gleichnisfähig)”을 지닌다.54)

 

     53) 앞의 책, 65.

     54) 앞의 책, 65.

 

반면, 국가는“유비의 필요성”(Gleichnisbedürftigkei)을지니기도 한다.

이는국가가종교적·세계관적중립성으로인해지니는한계에기 인한다. 국가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고백과 선포”에 대해 “중립적”(neutral)이며, 바로이로인해“하나님나라의비밀, 자신의중심의 비밀”에대해무지하다. 따라서교회는“국가의형태와현실이하나님의 나라를지시”할수있는방식으로운영될수있도록도와야한다. 55)

바로 그구체적인방안의하나가국가로하여금종교적·세계관적중립성을 유지하는가운데외적인질서와평화를도모함으로써모든시민의자유 와평등을실현시키도록기능할것을촉구하는일이다. 56)

이처럼국가와 교회의기능을엄밀히구분하되, 이를통해세속국가내에서민주주의가 현실화되도록도움으로써교회는하나님자신의행위에의해실현될 하나님나라에유사한방식으로국가가“모사되도록”(abgebildet) 애쓴 다. 마치예수그리스도의복음에비추어교회의선포를비판적으로점검 하는신학이라는인간적활동이하나님에대한신앙고백인것처럼, 복음 에비추어국가가그세속성속에서하나님나라에상응하는방향으로 형성되도록애쓰는교회의인간적노력역시도“신앙고백”이다. 57)

 

     55) 앞의 책, 65.

     56) 이와 관련하여 국가안에서“예수그리스도의 계시에 정초한 세상적 유비를 만들어야 한다는 바르트의 주장”이 “국가의 세속화를 극복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주장”이라는 김명용의 해석은 바르트가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을 촉구하고 있다 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오해라고 평가할 수밖에없다. 바르트는 중세적 기독교 국가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배하는 국가”를 결코 지향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선포라는교회의 과제가 자유롭게 구현될 수있도록 종교적 중립성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외적인 질서의 유지로만 제한하고, 모든 인간들이 자신의 종교적 자유를 실현하면서 살도록 보장하는 민주적 세속국가를 지지한다. 뿐만아니라 김명용은“교회는국가를변화시켜하나님나라를만들어 가야” 한다고바르트가말한 것으로 해석하는데, 이는국가를 위한 인간들의 활동을 다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간적 ‘유비’로 말하는 바르트의 진술을 왜곡하는 것이다. 김명용의 오해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김명용, “칼 바르트(Karl Barth) 신학에 있어서의 교회와 국가,” 「장신논단」 35 (2009), 76-108, 특히 103f.

      57) Karl Barth, Rechtfertigung und Recht. Christengemeinde und Bürgergemeinde (1989), 67. 

 

그러나 이 신앙 고백은 국가안에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게 한다거나 혹은 국가를 교회화할 수있다는 환상속에서가 아니라, 하나님나라나교회로부터 는철저히구별되는국가만의고유한과제를구현하도록돕는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V. 나가는 말

바르트는민주주의자였는가?

 

지금까지진술한내용을토대로한다면, 이에대한대답은긍정적일수밖에없다.

바르트는바이마르공화국 시기동안자기만의고유한신학적사유의틀을발견하고자모색했다. 이와같은작업이자유주의신학에대한비판과결합되어있었던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이것이곧바르트가자유주의정치이론에기초한 민주주의적정치체제자체를원칙적으로부정했다는것을의미하는것 은아니다.

오히려바르트는 교회가 선포해야할 예수그리스도의복음이라는관점에 입각하여 민주적인 국가를 위한 교회의 적극적인 참여적 활동을 촉구하였는데, 그구체적인방안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있다:

하나는, 모든시민들의자유와평등, 연대라는민주주의의핵심가치가 실질적으로실현되는민주적법치국가를위해애쓰는것이고, 또하나는 국가의종교적중립성이엄격하게준수됨으로써–교회를포함하여- 모 든시민들의종교적자유, 양심의자유가보호받을수있는국가를형성하는데참여하는일이다.

특히 두번째 제안은 교회 혹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인 실천 그 자체를 세상의 기독교화 혹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으로 종종 과장하곤 하는 위험을 사전에 제어할 수 있는 장치로 기능한다.

교회의 정치적 활동의 목표는국가를 기독교화 한다거나 혹은교회화 하는데있는 것이 아니고, 국가가 그 세속성을 상실하지않는 가운데 민주적 법치국가의 고유한 가치를 현실화할 수있도록 돕는데 있을뿐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교회의 정치적 실천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활동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인간에의해 이루어지는 일종의‘선포’ 혹은‘증언’의 행위일 뿐 결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 자신의 활동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는것을 바르트는상기시켜준다.

민주적 법치국가의 고유한 가치가 실현되도록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비판함으로써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선포라는 자신의 고유한 과제에 세속적인 방식으로 ‘상응’하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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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초록

 바르트는 1920~1930년대에 걸쳐 진행된 신학적 작업의 결과 예수 그리 스도의 복음의 선포라는 교회의 상황을 자신의 신학적 사유의 기본 틀 로 갖추게 된다. 이러한 신학적 관점에 입각하여 바르트는 민주적인 국 가를 위한 교회의 적극적인 활동을 촉구하였는데, 그 중요 내용은 다음 과 같다: 첫째, 교회는 모든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자유주의의 핵 심 가치가 실현되는 민주적 법치국가가 형성되도록 일해야 한다. 둘째, 교회는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 원칙에 기초한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관 철하도록 촉구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위한 교회의 정치적 활동이 하나님 나라의 ‘유비’라는 바르트의 제안은 교회의 정치적 실천을 촉구하면서도 그 절대화를 방지할 수 있는 사유 방안을 제공하고 있다. 

 

주제어 ‖ 칼 바르트, 민주주의, 교회와 국가, 그리스도중심주의, 유비

 

Abstract

Karl Barth's Understanding of Democracy : The Democratic Constitutional State as a Practical Task of Church

Lee, Yong Joo, (Dr.Theol. Associate Professor Soongsil University Seoul, Korea)

As a result of his theological elaboration, carried out in the 1920s and 1930s, Karl Barth came to achieve his own standpoint for theological reasoning: that is, the situation of the church whose task is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Based on this theological perspective, Barth urged church to work actively for the construction of democratic constitutional state. Barth's suggestion that the political activities for democracy is an 'analogy' of the kingdom of God not only urges active political engagement of church but also provides a way of preventing the absolutization of human political activities.

 

‖ Keywords ‖   Karl Barth, democracy, church and state, christocentricism, analogySense, Conscience and Free Will ∙

 

투고접수일: 2023년 2월 6일 ∙ 심사(수정)일: 2023년 2월 26일 ∙ 게재확정일: 2023년 2월 28일

164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0집(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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