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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스크랩] 서철원 교수 신학 서론

                                서철원 교수 신학서론


제 1장 신학(神學, Theologia)


신학은 일반 학문과 그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신학도 학(scientia)이므로 대상과 방법론 지식체계를 갖는다.

1) 대상: 일반학문은 창조세계이지만, 신학은 창조주 하나님을 대상으로 한다.

2) 방법론: 일반학문은 이성으로 접근하여 지식을 습득하지만, 신학은 믿음으로 계시를 습득한다.

3) 지식체계: (1) 일반학문은 이성으로 대상을 직접 탐구하여 지식을 구성한다.

데까르트는 이성, 죤 록크는 감각기관으로 들어온 표상을 재료로 한정.

(2) 신학은 자연이성으로 불가능하고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finitum non capax infiniti. vs Finitum capax infiniti




루터 신학자 George W. Forell이 한 말이다. 그는 적어도 3가지 점에서 루터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 율법과 복음의 구별. 2) 동시의 원리. 3) 유한은 무한을 담고 있다.




-----> 이성으로 신학을 할 때에는 인간학, 종교학이 되며 신학이 되지 못한다.




믿음으로 신학한다는 것(p. 25)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해서 신학을 하는 것. = 계시의존

출발점은 하나님의 말씀하심(Deus dixit)이다. = 계시근거

직접 탐구가 불가능함으로 계시 의존 신학=>하나님의 자기 계시(reval!!atio Dei)




믿음으로 무한한 계시를 받을 수 있는가? accomadatio 와 illuminatio




신학은 하나님의 학문이다(28) = 원형신학과 모형신학, 계시에 의해서 매개된 지식이다.

하나님의 자기 지식과 하나님의 모든 사역 = 신학.




계시는 성경계시(29). 개혁신학은 모든 성경 계시를 모든 신지식의 원천으로 삼는다.

자연은 부차적 원천.




“신지식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와 그 하나님이 구속주이심을 아는 지식이므로 그 지식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의 생명이 되어 영생에 이르게 한다.(30)”

제 2 장 신학의 대상




하나님은 무한한 영적 존재, 절대적 인격임으로 직접 탐구 대상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의존한다. 즉 계시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존재, 인격뿐만 아니라 사역까지 배운다.




1. 하나님의 존재




1) 창조주 하나님( Deus Creator ): 하나님은 창조와 자연에서 자신을 창조주로 계시하신다. 성경이 자신을 창조주로 계시한 하나님이 현 세계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구속주로 계시하신 하나님(Deus Redemptor in Christo):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구속주로 계시하셨다. 자신을 구속주로 계시하신 하나님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즉 창조주가 바로 구속주이고 구속주가 창조주(말씀으로 창조 사역을 하시고, 인격으로 구원 사역을 하셨다.)이시다. 구속의 방식은 속죄방식으로 성취되었다. 인격으로 구원하셨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로 계시하신 하나님(Trinitas Dei in Christo, p.33.)

이그나티우스가 가르친 대로 그리스도가 육체 안에 오신 하나님(Deus in carne, Deus incarnatus)이기 때문에 분명히 밝혀진 하나님의 존재(subsistentia Dei)이다.

cf) C. A. Coates 著 [Twelve Lectures on the House of God] 3장 전반부에서 “육체 안에 오신 그리스도”로 바꾸어서 제시한다. “육체 안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참된 경건이 아니다.” 요일4:2-3절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으로”번역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 정통 기독교는 육체 안에 오신 하나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러나 이단 사설은 하나님의 뜻으로 육체 안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4) 무한한 영(spiritus infinitus) 곧 절대적 인격(persona absoluta)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자기 완결적 존재(self-contained God)이심으로 필연적 존재이시다. 무한한 존재이시지만 자신의 인격을 자신의 존재방식은 영으로 자기를 계시(revelare ipsius sui)하신다. 자발적으로 기뻐하심으로 계시하시며, 절대적 생명으로 창조하셔서 생명을 주시며 자기의 지혜와 권능을 계시하셨다.
II 하나님의 사역(opera Dei) p. 35-38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존재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존재) 창조(creatio), 섭리(providentia), 구원(salus), 창조 완성(consummatio creationis)으로 사역하신다.




1. 하나님의 창조(creatio Dei)

이 세계는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사역)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 기독교의 특징이며, 기원을 정확히 밝히는 것이다. 이 창조는 하나님의 필연적 사역이 아니며, 하나님과 세계가 일치되는 것(유출설)도 아니다.

창조의 경륜은 영원하여도, 창조는 영원하지 않다. 창조는 지혜와 권능이 무한하고 그의 경륜이 영원하심으로 현 상태(광활한 우주와 영계)로 창조하신 것이다.

창조는 6일 정비 이전 첫날에 처음 물질의 출현 순간에 모든 물질과 우주를 창조하셨다.(서철원 교수의 창세기 이해의 특징) 그리고 첫 창조 직후로 지구를 중심으로 정비하셨고, 태양계도 조성하셨다. 즉 우주의 전체적인 구조가 첫째날에 완성된 것이다.

시간도 창조되었다. 시간이 피조물의 존재 방식이 되어 시간에 종속되었다. 그러므로 창조의 진행 또한 시간의 방식으로 진행하셨다.

영의 세계도 처음 창조 시에 창조하셨다. 영의 세계도 피조 세계이므로 창조기간에 창조된 것이고 영원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우주의 크기는 광대하여 측량할 수 없음으로 하나님의 무한성을 알 수 있다. 즉 우주에 펼쳐진 하나님의 전능한 창조를 묵상할 수 있도록 하셨다. (칸트, 1724-1804) 생을 마감한 그의 묘비에는 “내가 두 다지 대상을 여러 차례 그리고 오랫동안 성찰하는 데 종사하면 할수록, 그 두 가지 대상은 더욱 새롭고 높아지는 경탄과 외경을 내 마음에 가득 채운다. 이 두 가지는 ‘내 머리 위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이다.’”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이다. - 창조의 자기 향유(기쁨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단어로는 delectatio, deliciae, exultatio, gaudium, hilaritas, iubilatio)가 하나님의 우주 창조의 목표이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지으실 때, 하나님의 나라(regnum Dei)를 목표하시고,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처를 정하시기로 하심으로 합리적이고 영적인 피조물들을 지으시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으셔서 교제할 수 있도록 하셨다. -->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형상 즉 나라는 형상과 대비할 수 있겠으며, 나라의 성취는 형상의 완성에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창조는 백성의 거소이며, 거소에서 백성이 하나님의 섬김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 창조의 완성으로 인류 가운데 충만하게 거하심으로 처음 창조의 경륜을 이루신다.




2. 하나님의 섭리(providentia Dei)




섭리는 하나님이 자기 창조를 다스리고 보존하심을 말한다.

창조주의 피조물의 관계에서 피조물은 항상 창조주에게 의존적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의존하는 피조물을 유지하시는 섭리 또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후 그의 경륜을 따라 모든 창조를 운행하신다. 그러므로 창조에서 순수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인류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신다. 이 나라는 죄의 완전한 제거로 이루어진다.




3. 하나님의 구원(salus Dei) = 창조의 회복(restituio creationis)




창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큰 사역은 인류의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구속주가 되셔서 사역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창조주께서 구속주가 되시되, 자기 인격이 친히 일하셨다.

창조주가 구속주가 되실 때 그의 인격에 인성을 입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는 구원의 방식은 신비요 경탄이다. 인간의 언어로 해명할 수 없는 신비이다. 그리스도는 육체 안에 계신 하나님이며, 우리의 구원이시고 참 하나님이시다.

구원을 하나님 자신이 이루시므로 구원은 율법의 길이 아니라 은혜이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거저 받기만 하는 것을 말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데 믿음은 거저 받는 것을 뜻한다. 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4.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consummatio creationis)




창조의 완성은 구원의 완성과 창조의 계발로 이루어진다. 종말에는 인류가 처음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새 예루살렘 성에 이른다. 성은 모든 문명의 총화를 지시한다.

구원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령의 역사로 적용되어 모든 택자들이 다 중생하여 거룩한 자들이 되면 구원의 진행이 완료됨으로 이루어진다. 새 인류의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살게 된다.

창조의 완성은 창조가 계발되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거의 다 현시됨으로 이루어진다. 창조주의 지혜가 풍성하게 현시되며 사람들의 눈에 확인된다. 그 때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승인되고 넘치게 찬양됨으로 창조의 완성이 된다.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해져서 하나님이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신다. 이 창조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으로 이루어진다. 악을 소제하고 의가 완전히 섬으로 백성들이 영생에 이른다.


제 3 장 신학의 근본원리(principium fundamantale theologiae)




하나님 지식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와 구속주 되심을 아는 것이다. 창조주의 엄위와 영광을 아는 것이고, 구속주의 구원 곧 사랑의 큰 역사를 아는 것이다. 이 지식이 영생에 이르게 하는 지식이 된다. -->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이 분리된 지식이 아닌 한 지식을 이루는 것이 기독교 지식이 된다.




지식의 수납은 논리적으로 창조주 지식이 선행하나, 시간적으로는 구속주 지식이 선행한다. 즉 구속주를 믿음으로 그 구속주가 창조주이심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지식의 시작이고 전부이며 마지막이다. 시작(구속주)과 나중(창조주)이며, 시작(창조주)에서 나중(구속주)로 순환적 지식을 형성한다.




시작과 전부인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지식이 참 신지식(notitia Dei vera)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참 신지식의 표준(norma)이며, 원리(principium)이다. 따라서 모든 신학의 참과 거짓의 여부는 그리스도에 의해 판정된다. --> 신학과 신앙의 판정관이 그리스도이시다. 교리는 그리스도 지식의 집약임으로 교리가 신학과 신앙의 판정의 모범(판례)이 되게 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logos, Verbum Dei)이므로 그가 바로 하나님 지식이다. 로고스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기 객관화이므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revelatio ipsius Dei)이다. (참고, 서철원, Credo, 57-58. 3.7 아들의 출생은 하나님의 자기 객관화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영원히 객관화하시는 방식으로 계신다. 이 자기객관화가 한 인격을 이룬다. 이것이 아들의 출생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아들이 하나님의 자기객관화이므로 아버지의 모든 것이 다 아들에게 전달되어 있다. 아버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전달되어 있고 아들 안에 다 있다. 사람의 경우에는 사람의 자기객관화가 하나의 심리적인 과정일 뿐인데 하나님의 경우는 전혀 달라서 하나님의 자기 객관화는 한 인격을 이룬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우리 피조물과의 차이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자기객관화가 하나의 신적 인격을 이룬다. 이것이 바로 아들이고 아버지의 객관화이므로 로고스이다. 이제껏 해왔던 아들의 출생에 관한 논의는 합당하지 않다.




--> 인간의 인격은 자기객관화이다. 그리고 인간은 출생방식으로 자기객관화를 잉태한다. 즉 자기인격과 출생방식의 이중의 자기객관화 과정을 거치지만, 하나님은 유일한 자기객관화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의 자기객관화로서 계시의 원천이 됨으로 그리스도를 떠난 종교는 - 유대교와 모하멧교- 참 종교(religio vera)가 아니다. 유대교는 기독교 정경인 구약을 갖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거짓 종교가 되며, 모하멧은 그리스도까지 포함한 정경을 갖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한 선지자로 여김으로 자연종교(religio natrualis)가 된다.




기독교 신학은 구속주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구원임을 인정하는 신학,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신학이 바른 신학이며 성경적인 신학이다. 이 진리는 자연이성으로 수납할 수 없는 믿음(영적)에 의한 진리이다.




18세기 신학에서는 복음을 당대의 언어 즉 합리적인 사고로 제시하려하여 그리스도의 지식에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르게 제시하여 바른 신학이 되지 못하였다. 이것을 신개신교주의(Neuprotestantimus)라고 하는데, 성경의 원리를 방기(放棄)하고 일반계시로만 구성하여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포기하였다. --> 신개신교주의는 개신교를 자연종교로 전락시켰고, 신정통주의는 정통주의를 자연종교로 전락시켰다. 신개신교주의는 자연계시로 자연종교를 만들었는데, 신정통주의는 특별계시를 운운하면서 자연종교로 전락시켰다.

제 4 장 그리스도의 계시(revelatio Christiana) - 신학의 출발점과 표준 - pp. 48-51




저자는 신학의 출발점과 표준을 그리스도의 계시(특별계시)로 주장합니다. 반대로 일반계시(창조계시, 자연계시)를 출발점으로 삼을 때에는 영광의 신학, 즉 인간의 영광을 위한 신학이 되어 하나님은 한가한 신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학은 중세 스콜라 신학(아리스토텔레스를 근거로 신학함, 피조물에서 출발함)과 근세 신개신교주의 신학(칸트를 근거로 신학함, 초자연적 요소 배제한 이성을 근거)입니다.




신학은 계시(일반계시revelatio generalis가 아닌 특별계시revelatio specialis)에 의존하고 계시에 근거한다. 특별계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한 그리스도 계시이다. 모든 신학은 그리스도 계시에서 출발해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 계시에서 출발할 때 바른 신학에 이른다.

창조계시(일반계시, 자연계시)에서 신학을 시작하면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 되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창조계시에 의존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 이성에 신학함으로 그리스도 계시(특별계시)에 이르지 못한다. 첫째, 희랍의 존재의 동참도식에 근거한 것이다. 신은 존재일반을 창조한 존재가 아니고 존재일반에 동참이 최상이기 때문에 최고 존재인 것이다. 이 도식이 스콜라 신학에 도입되어 존재의 사다리를 따라 최고 존재인 신에게 이를 수 있다고 하여 자연신학을 발전시켰다.

자연신학은 낮은 단계에서 시작하여 피조물의 성질을 부정함(자기부정, via negativa, via negationis)으로 신의 성품(하나님의 존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피조물의 성격인 물질성, 유한성, 시간성의 부정은 영성(spiritualitas), 무한성(infinitas), 영원성(aeternitas)이라는 것이다. 또한 적극적인 방법(via positiva)에 의해 피조물에 나타난 선, 아름다움, 거룩등의 성격은 긍정으로 배가됨으로 존재의 유비에 의해서 하나님께 이르러 간다. 이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는 웅장한 신학을 이루고 영광의 신학을 이루지만, 성경의 하나님에 이르지 못하고 아르스토텔레스가 구성한 신학이 되고 만다.

자연이성에 구성된 자연신학은 비중생자의 신학임으로 특별계시는 전적으로 배제된다. 개신교에서도 특별계시를 배제한 신학은 자유주의(신개신교주의)이다. 이러한 신학은 중세의 자연신학의 귀결로 도달한다. -> 이것은 현재 자유주의 신학에서 추진하는 로마교회와 일치운동에서 증명되어지고 있다. 통합과 합동이 분열될 때 믿음의 선배들이 우려했던 것이기 도하다.


신학은 그리스도 계시에 의해 출발하지만, 또 그리스도 계시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어떤 신학이 기독교 하나님 지식을 바로 표현했는지의 여부를 그리스도 계시에 의해 판단한다. 그리스도 계시가 신학의 출발점이고 그 근거이면서, 또 신학을 판단하는 표준이고 원리이다. 신구약의 중심(scopus)인 그리스도에 의해 다른 모든 부분이 해석되고 조명되는 신앙 유비(analogia fidei)에 의존해야 한다. ->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와 신앙 유비(analogia fidei)는 유비(analogia)의 방식으로 신학함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Faith includes or is an act of apprehension (vernehmen) of a proper and unique object, God.1) Barth는 믿음과 이해의 행동을 동일하게 생각하고 믿음의 유비 즉 이해방식의 구현으로 제시한다. “analogy” is a method of theological thinking; that is to say, it is a gnosiological method for Man to approach God.2) 그러나 믿음은 이성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수납하는 도구이지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유비의 방식을 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이승구 교수는 성경의 유비(analogia scriptura)로 믿음의 유비와 동등하게 평가했다. 그러나 유비의 방식은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즉 이해의 설명을 통하여 신학을 구성하는 것은 결국 이성에 의한 신학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 계시에 의해 다른 모든 종교를 평가한다. 즉 그리스도 계시가 없는 다른 종교와 기독교가 동일 선상에 놓일 수 없는 이유이다. 다른 종교는 이방 종교, 우상 종교, 참 종교에서 변형된 종교이다. 이방 종교들을 우상 종교로 바라 볼 수 있는 길은 성경의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제 5 장 계시(revelatio)에 의존해서 신학함




계시 = 신지식의 길(via ad cognitionem Dei)




창조주의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직접인 대상으로 신학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고 절대적 인격이시므로 사물을 대하는 방식인 인간 이성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습득할 수 없다. 인간 존재는 하나님을 하나님대로 도저히 감당할 수도 없다. 무한한 영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의 존재방식은 물질과 전혀 다름으로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탐구할 수 없다. --> 이성, 물리적 방법, 존재론적 방법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신학은 의존적 지식으로 구성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길은 하나님께서 직접 알리시는 것에 의존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무한한 영으로서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의 존재와 경륜과 사역을 알리셨다. 이 알리심이 계시이다.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만이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계시에 의존해서 신학을 한다.




1. 계시의 가능성




하나님을 아는 길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의존하고 계시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은 무한한 영이시지만 인격적 존재이므로 스스로 자기의 기뻐하신 뜻을 따라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다. 외부의 강제나 필연 혹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닌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 계시하셨다. 자기를 계시하실 때에 자기의 존재와 성품, 뜻(경륜)을 스스로 기쁘게 알리셨으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다.




2. 계시의 내용




이 하나님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revelatio ipsius Dei)여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고(se revelare), 자기의 사역을 계시하셨다. 자신이 창조주이시고 구속주이심을 계시하셨다.

창조주로서 자기의 존재를 계시하셨다. 시 19편, 창조된 세계를 통하여 자기의 영광과 권능을 계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공포하셨다. 그리고 창조에 대한 자기의 뜻(경륜)을 알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셔서 언약을 맺어 백성 삼기를 기뻐하셨다. 인간을 자신의 백성을 삼으시사 섬김과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김과 영광을 돌림으로 창조 세계를 다스림을 위해 창조주를 모방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창조 세계가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계시의 중요한 부분은 인류의 구원 작정이다. 창조주를 아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듯이, 구속주를 아는 것도 하나님의 계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특히 구속주를 아는 지식은 성경(특별계시)에 의존해서만 알 수 있는 지식이다. 성경에서는 구원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속죄제사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실 것임을 명백히 하였다. 그리고 구속주는 하나님 자신이 되실 것임을 사전에 알리셨다(예언). 이 구원사(救援史)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의 유다 지파에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세상을 구원하시고, 성령으로 백성을 모으시고 조성하셨다. 이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세상을 정화시키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될 것을 계시하셨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사 그의 영광 가운데서 거하실 것임을 신약, 구약 성경에서 계시하셨다.




창조주와 구속주로서 하나님의 로고스(Logos) = 성자 하나님

이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로고스인 그리스도(성자 하나님)을 통하여 왔다. 모든 계시의 유래처가 하나님의 로고스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는 성육신 이전의 로고스이며, 구속주 하나님의 계시는 성육신하신 로고스이시다. 모든 계시가 하나님의 로고스인 성자에게서 왔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목표하여 진행되고 모든 구원 계시가 다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즉 성자 하나님께서 계시의 유래처이고(창조주), 그리스도는 계시의 목표(구속주)가 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계시의 절정(영원한 중보자)이다(골 2:9, 요 1:14).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Logos)이면서, 계시자이다. 그리스도께서 계시한 내용은 육을 취하신 하나님, 즉 보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이심으로 보이는 하나님(성육신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Logos)의 일치를 고백함으로 삼위일체(Trinitas, unus Deus)를 고백하게 되었다.

아버지 창조주와 구원주, 아들 창조중보자와 구원중보자

창조주에서 성자는 창조중보자로서 사역하셨다. 구속에서는 그리스도는 영원한 협약, 구원협약에 의해서 성자께서 구원중보자로서 세움 받으셨으며, 영원한 중보자가 되셨다. 창조주와 창조중보자, 구원주와 구원중보자 사이에는 사역과 경륜에 한 치의 오차가 발생할 수 없다. 오차는 곧 인류의 멸망하게 되며, 구원은 소멸되게 된다. 현재 인류의 존재는 창조주와 창조중보자 사역이 완전히 일치되며, 성도의 견인은 구원주와 구원중보자의 일치된 구원경륜에 의한 것이다. 교회는 성부와 성자의 완전한 일치에 의해서, 창조중보자와 구원중보자를 창조주와 구원주로 부름에 거리낌이 없다.




3. 계시 = 신지식의 길




계시가 이러하므로 인간의 지성으로 신지식을 구성할 수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서 하나님 지식을 획득하는 수 밖에 없다. 계시가 하나님을 아는 원천이고 근본이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 외에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계시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길이다.

6장 성경(scriptura)에 근거해서 신학함




성경 = 신학의 형식적 원리(principium formale)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기록된 말씀 계시이다. 기록된 계시인 성경 밖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만날 수 없고, 계시로 알 수 있는 다른 계시가 따로 있지도 않다. 따라서 신학을 할 때에는 성경계시에 의존해야 한다. 종교개혁에서는 성경을 신학의 형식적인 원리로 삼았다. 성경에서 모든 하나님 지식이 나올 뿐 아니라, 모든 신지식의 바름과 거짓의 여부를 판단하고 결정한다.




1. 성경 = 신지식의 원천(norma normans)




성경은 하나님의 최종 계시이다. 성경 계시가 완료된 후에는 새로운 계시는 오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마지막 말을 인류에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계시의 완성이고 계시의 절정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계시로 성경을 보충할 필요가 전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이다. 성경은 완전하고 종결된 계시임으로 더 이상의 계시의 보완이 필요없다.

하나님은 성경에 자기의 존재와 그의 작정을 다 계시하셨다. 성경에는 창조와 사역을 알리시고 해석하셨다. 구원자(구원의 경륜), 구원의 방식(구원의 동참), 구원의 실제(구원의 효과)를 다 알리셨다. 그리스도께서 속죄제사를 통해서 자기백성을 모으시고 형성하여 은혜의 왕국을 설립하셨다. 백성 형성이 완성되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역사가 완결되고, 심판으로 정화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성경에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사역에 관한 지식은 성경에서만 도출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이른다. 이 모든 계시가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왔으므로 참 신직식이고, 이 지식의 원천은 성경이다.

창조와 인간 의식에서 도출한 신지식은 바른 신지식이 결코 될 수 없고, 인간의 종교심에 투사에 불과하다.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바른 신지식을 추구할 수 있다.

신지식의 원천은 성경이다. 인간 이성, 종교 경험이 신지식의 원천이 될 수 없다. 헤겔은 인간 이성1)을 신지식의 원천으로 삼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이성으로 철학 체계를 구성하였는데, 성경이 말하는 창조주와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이성의 사고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신개념으로 성경이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에 도달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을 추구하는 방법이 전혀 다르므로 철학과 성경이 합치된 신지식을 도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스콜라 신학에서는 아리스텔레스의 철학 체계에 신학을 접목함으로 기형적인 기독교를 창출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 부합되는 [신학대전]을 완성하여 기독교 배교의 완성된 체계를 창출하였다. 완성된 체계는 자체 합리성을 가짐으로 합리적 인간 이성에 호소하여 교양 있는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인간의 종교심도 많은 종교를 생산하여 인간 존재의 구조에서도 종교심이 표현된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우상 종교가 되어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인간의 종교 의식은 하나님의 지식의 원천이 될 수 없다. 슐라이에르막허은 인간 경험인 절대의존감정에서 신지식이 발생한다고 주장하였다.

성경은 구원의 진리를 말할 뿐만 아니라 종교 경험의 표준을 제시하고 그 표준에 따른 종교 경험들을 생산한다. 즉 믿음의 내용만 성경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경험도 성경이 제시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표준대로 믿고 경험하는 것이 정통주의이다.

이에 반해서 특별한 종교경험을 표준으로 삼고, 성경을 특별경험의 증거로 제시하는 신앙의 길을 신비주의라고 한다. 신비주의는 특수한 개인 경험을 강조하는데, 개인적인 경험이기에 합리적 산물로 신비가 무산된 신비주의만 남는다.

자유주의 신학은 보편 종교경험을 표준으로 삼아 성경을 이 보편경험으로 전부 해석한 것이다. 특수한 종교 체험이 아니라, 보편적인 종교 경험이 표준이 되면, 성경의 신비와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재해석되어 무효화가 된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정통 기독교 신학이 되지 못하고, 자연주의 기독교가 되었다. 표준이 인간의 종교 경험이고 인간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종교 경험을 강조하는 주관주의나, 보편적 인간 의식을 강조하는 내재주의는 인간 중심의 종교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경험을 강조한 주관주의(경건주의)에서 내재주의인 자유주의 신학이 태동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 된다. 주관주의와 자유주의의 근거가 인간의 경험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신학 작업은 자기의 종교적 의식을 정확히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의 내용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한 본문의 분석과 이해를 추구하는 성경신학이고, 교의신학(조직신학)은 하나님의 전 경륜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믿음의 체계를 이루는 일을 한다. 이 일을 할 때에는 교회의 교리(dogma ecclesiae)를 2차적 규범(norma normata)2)으로 삼아 일한다. 교회는 교리를 규범으로 삼기 때문에 처음부터 신학 작업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며, 성경 전체를 수집해서 믿음의 내용을 체계화시키는 것이 아니다.3) 교리가 규범으로 서 있으므로 계시 내용의 이해를 증가시킨다. 이 때 교의학자의 자기-의식의 작용이 많이 일어나게 됨으로 성경이 원규범으로 역사하여 바른 신학이 되게 하고, 교회의 신앙과 일치하게 한다.



2. 성경 = 신지식의 외적 원리(principium cognoscendi externum)




성경은 신지식을 제공하는 원천일 뿐 아니라 신학의 표준이고 심판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자체 권위를 갖고서 심판관의 역할을 한다. 즉 성경이 모든 신학의 원리이다. 성경은 완결된 계시이므로 신적 권위로 역사한다. 어떤 신학이 바르게 성경 계시를 재생산했는지를 판결하는 것도 성경이다. 성경은 신학의 심판관(judex theologiarum)이다.

성경은 영감에 의해, 즉 하나님께서 호흡하심으로 무오하게 기록되었다. 그래서 바르고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의 교리가 바른 성경 계시의 권위 근거되어 있는지를 판결하는 원칙으로 역사한다.

성경과 무관하거나 성경과 문화를 혼합하여서는 바른 신앙고백과 교회의 신학이 될 수 없다. 어떤 신학이 성경의 구원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고 생산하였는지의 여부도 성경에 의하여 결정한다. 성경이 자기가신성(自己可信性=성경의 자증, autopistia)을 갖기 때문에 성경에 의하여 신학이 판단 받는다. 성경의 가기가신성은 성경의 문장이 외부의 강제나 가르침 없이도 스스로 그 내용대로 믿게 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자기 판단에 따라서 신학을 판단하게 된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ui ipsius interpres)

성경은 자기 해석자(scriputra interpres sui)여서 성경 외에 다른 유전(traditio-로마교회)과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 명료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학을 할 때 성경 외에 다른 해석자(alter interpres)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경은 교회의 가르치는 직분에 의해 그 뜻을 명료화받고 믿음의 내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근거하고 성경의 명료한 가르침에 의하여 신학한다. 이 신학 작업에서 성경이 원규범(norma normans)으로 역사하고, 교회의 교리가 이차적 표준(norma normata)으로 역사한다.

7장 교리(dogma)에 근거해서 신학함




교리 = 신학의 이차적 원리(norma normata)




신학 작업에서 성경이 원규범(norma normans)으로 역사하고, 교리가 이차적 표준(norma normata)으로 역사한다.

조직신학은 성경 계시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통일 종합하는 신학적 작업이다. 교의신학은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을 할 때, 교회의 교리들의 안내를 따라 이 작업을 한다. 이 교리는 고대 교회의 교리들이 중심이지만, 종교개혁의 신앙고백서들을 참조하고 조명을 받는다.

종교개혁의 신학고백들은 고대 교회의 교리들을 수납함과 동시에 구원 얻는 길에 특히 강조를 두었다. 종교개혁의 신앙고백서들이 고대 교회의 교리와 같은 구속력은 갖지 못하지만 교리적 성격을 갖는다. 루터는 이신칭의 교리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으로 규정하였다. 개혁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결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교리는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근본 진리이다. 교리는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신적 권위에 근거하여 교회가 신앙고백 형식으로 표현한 명제이다. 성경에서 유래하고 성경에 근거한 근본 진리를 신앙고백의 형식으로 표현하여 교회존립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 교리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립을 위해서 공교회가 확정하였으며, 복음의 이해에 대한 교회의 결정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계속해서 들어야 하듯이, 교리를 반복함으로 교회가 교회될 수 있다.

교의신학자는 교리에 의거해서 신학한다. 교리에 근거하지 않으면 교회의 신학이 되지 못한다. 기독교가 문화의 변용이 되어 교회를 세속화시킨다. 현재에 문화의 변용은 종교다원주의 신학으로 전제하게 된다. 교리가 성경에서 나왔고 근거하며, 교리의 지도만이 교회를 교회되게 할 수 있음으로 교리가 신적 권위를 갖는다.

교리사는 성경해석사이다. 시대정신에 따라서 교리를 자의적으로 변형하며 해석하는 것은 교리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신학의 용어 사용함에 고대 교리의 용어와 대비하여 검증하여 교리의 검증 과정을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을 왜곡하여 이해함과 해석을 근절하고, 구원의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한다.

신학함의 근본원리는 교리를 근거로 하는 것이다. 교리는 원규범인 성경 옆에 규범된 규범으로 역사한다. 즉 성경의 권위에 근거한 교리는 신적 권위를 갖는다. 여기에서 교의신학과 성경신학이 구별된다.

종교개혁의 신경들 외에 개신교회는 니카야-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칼케돈 신경을 표준으로 받는다. 325년과 381년에 제정된 교리와 서방교회의 아들에게서도 성령이 출래됨(Filioque, 아다나시우스 신경, 톨래도 공회의 400, 475, 589)를 받는다. 이 두 교리 외에 제2니카야 공회의(787년)의 성상숭배 결정을 성경에 모순됨으로 거부한다. 사도신경은 신앙의 표준으로 받는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공회의에서 공식화된 것이 아니므로 에큐메니칼 신경으로서 구속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사도신경은 공회의가 결정한 신경이 아니므로 서방교회만 받아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교리는 삼위일체 교리와 하나님의 성육신 교리이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이다.

기독교 신학이 되는 여부는 그리스도의 신성의 인정 여부에 의존한다.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면 기독교 신학이 되지 못하고 자연주의 기독교로 전락하게 된다. 교리가 신학함에 있어서 규범하는 규범으로 역사한다. 교리가 신학을 기독교 신학이 되게 결정하거나 배척하는 표준이다.

8장 믿음(fides)으로 신학함




믿음 = 계시 수납의 손




신학은 믿음으로 하고 자연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성취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무한한 영이시며,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이므로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사물을 탐구하는 방식인 지성(知性) 혹은 이성(理性)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

근세철학에서는 이성으로도 보편 사물의 지식을 알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더욱 무한한 창조주 하나님을 이성으로 아는 것을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피조된 인간의 지성으로 탐구할 없는 절대 영역이므로,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믿음으로 가능하다. 신학의 대상의 하나님 존재와 본성은 인간의 이성으로 탐구하거나 수립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 또한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여 수납할 수 없다. 자연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계시를 도저히 합당한 것으로 받을 수 없다. 계시의 내용도 인간 이성의 자체 이해의 범위를 넘어가므로 도저히 받아드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신학을 하고자 할 때에는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자아겸비로서 주시는 계시를 수납해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음으로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수납할 수 있다. 즉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믿음으로 신학하고 지성으로 신학 할 수가 없다. 믿음은 논증 없이 하나님에 대해 직접적으로 확실성을 얻게 해주고,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확실한 지식을 얻게 해준다. 따라서 믿음으로 신학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그 권위에 의거하여 믿음으로 신학하여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획득한다. 비록 믿음이 논증 없이 직접적으로 지식을 획득하지만, 영적이면서 이성의 기능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성의 영역에서 이미 역설(paradox)이 존재함으로 영에 대한 지식의 이성적 구조를 가능하게 한다.




1. 믿음 = 신지식의 수납의 손

= 지식의 내적 원리(Principium cognosscendi internum)




하나님을 믿음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여, 그의 사역과 성품 그리고 구원경륜에 대해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르고 확실하게 안다. 하나님의 계심과 하나님의 계시로 믿음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은 구원이 창조주 자신의 역사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임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심을 하나님 안에 구별이 있음을 논리적으로 알 수 있으며, 성경의 고백대로 한 하나님을 고백함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결론에 도달한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피의 속죄사역을 근거로 실재적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신학적 사고는 하나님의 성육신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차이점에서 신학과 신앙의 괴리가 발생하기 쉽다. 즉 신앙 시작은 피의 속죄 제사에서 시작하고, 신학의 시작은 성육신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2. 믿음의 본성




믿음이 신지식의 획득의 길이다. 믿음이란 본래 논증없이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확실성을 얻는 영혼의 기능이다. 회의론자들은 세계의 실재를 부인하거나 회의하며, 철학자들은 객관적 세계의 실재와 표상을 분리한다. 사물의 세계에서도 증명되고 논증됨으로 사물의 존재를 분명히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존재에 대한 확실성을 얻는다. 더욱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해서는 믿음으로만 바르고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불트만은 전제가 가장 확실한 것으로 주장하여, 모든 사항을 해석학적 귀결로 전환시켰다.

믿음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밝히듯 어떤 구원론적 의미의 믿음이 아니고, 인간 의식에 가장 근본적인 영혼의 형식적 기능을 뜻한다. 영혼이 자기 확실성을 수립하는 기능이 믿음이다. 확실성을 얻을 때 논증 없이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지식을 획득한다. 믿음이 사물의 존재와 행동에 대한 인식의 시발점이 된다. 이것은 사회생활에서 다른 사람의 관계 설정도 믿음에 근거한다.




3. 믿음의 발생




이 믿음의 작용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 중생하므로 하나님과 그의 구원을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것으로 받는다. 자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사실임을 받는 것은 역사적 믿음(fides historica)뿐으로 불신자의 믿음(fides irregenitorum)이다.

믿음은 중생(regeneratio)에서 시작한다. 중생의 작동 원인은 선포된 복음의 내용을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성령의 내적 증거(testominium Spiritus Sancti internum)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십자가의 구원 사역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받아드리며,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위해서 이루신 구원(salus)으로 확신한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 이 믿음으로 신학한다. 그래서 신학은 하나님의 성육신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한다.




4. 믿음의 요소




믿음은 믿음의 대상(fides, quae creaitur)과 사람의 주관적 결정(fides, qua creditur)로 이루어진다. 기독교의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이다. 그 분을 성경이 선포하고 증거하는 복음 곧 하나님의 구원과 약속을 확실하고 분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계시의 말씀을 진리로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내용은 논증(demonstratio)되는 것이 아니라, 선포(testimonium)되고 증거된다.

이 믿음은 우리의 자연적 능력(facultas naturalis)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증거로 된다. 즉 중생하므로 믿음이 발생한다. 믿음에로의 결정이 성령의 증거로 이루어지지만 믿음의 내용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성령께서 하신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므로 무한자(infinitus)를 우리의 자연적 능력으로 받을 수 없다. 성령께서 우리의 지각(sensus)을 여사 우리로 받아들이게 하신다. 성령의 증거를 받아드리는 것은 사물 지식처럼 받는 것이 아니고 진리로 승인하여 수납한다. 이 받아드림 또한 믿음의 작용이다. 우리는 유한자이므로 무한자를 수납할 수 없다(finitum est non capax infiniti).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로 받아들이게 역사하tu야 한다. 칼빈의 가르침처럼 성령께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손 역할을 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은 성령의 중생사역으로 발생하고 성령의 증거에 의해 활동한다.

믿음은 먼저 대상을 분명히 아는 지식(cognitio)을 전제한다(사 1:2-3, 요 10:1-6). 막연히 알거나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안다. 그것은 추리와 논증에 의한 지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신앙의 대상을 아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신앙의 대상을 아는 지식은 믿음에로 이름이 필연적 귀결이다.

이 믿음에 이름이 있어서 내 지성 혹은 나 자신의 전적인 승인(assensus)을 내포한다. 그 신앙 지식은 선포된 대로 전적으로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 의미에 있어서 신앙 지식과 승인은 분리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신앙 대상을 승인하게 되면 그 대상을 전적으로 받아드리려 전폭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신뢰(fiducia)에 이른다. 신뢰는 확신 가운데 신앙의 대상에게 자기를 내어 맡기는 것이다. fides에서 fiducia로




서 교수님의 진술을 보면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존재)과 사역이며, 사람의 주관적 결정(assensus)로 나뉜다. 이 대상과 주관적 결정 사이에 성령의 내적 증거가 연결고리가 된다. 성령께서는 사람을 중생시키시고,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 무한자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작용하신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가 믿음(fides)이다. 이 믿음에서 믿음(fiducia)으로 나아간다(롬 1:17, 10:17) KJV, from faith to faith. NIV, by faith from first to last, Vul, ex fide in fidem.(사고를 더해야 함)




5. 믿음의 인식




신지시을 얻음에 있어서 믿음으로 그 지식을 갖는다. 그러나 그 지식 수납에 있어서 전적으로 믿음이 그 방식이지만 중생한 이생(ratio renata, ratio christiama)이 인식 작업을 한다. 즉 믿음의 내용을 이해하는 일을 중생된 이성이 한다. 그러나 이 인식 작업은 자연 이성Iratio naturalis)의 경우처럼 논증과 증명에 근거하여 신앙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증거에 의해 신앙 내용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내가 깨닫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이해하게 하므로 받아드린다.(즉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믿음의 종교이다. 작금 교회 안에서 깨달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깨달음은 자기 자연적 능력의 산물이어서, 믿음이 아닌 자기 능력이다. 기독교 생활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어거스틴은 선인과 악인이 공히 이생에서 고난을 받은 이유는 현세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선인이라고 할지라도 현세에 대한 욕망을 절대 떨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성이 자기의 자연적 권리로서 계시의 내용을 수납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 이성은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한다. 계시의 권위에 순종함이 곧 믿음이다.

믿음은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 권위에 의해 수납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propter auctoritatem), 자기 가신성(autopistia, 자기명료성)을 갖기 때문에 우리로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와 구속 경륜을 믿게 한다. 이 자기가신성은 바로 성령의 증거와 같은 것을 뜻한다. 성령께서 성경의 원저자이시므로, 성경이 가신성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우리 속에서 내적 증거를 하신다. 그리하여 성경의 증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게 한다. 이 받은 말씀은 믿음으로 신학한다. 신학의 방법은 믿음, 즉 성령의 내적 증거이다. 신학의 근원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며, 신학의 방법은 믿음, 계시의 수납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의 내적 증거로 한다.


9장 중생 이성(ratio renata)의 역할




신학은 중생인이 한다(theologia regenitorum). 그러므로 중생한 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 또 중생한 지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고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한 진리를 문장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전체를 조직하고 체계화한다. 이 일이 신학 작업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므로(Deus dixit) 인간은 들어야 한다(audito ex verbo). 그 들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이요, 그 말씀하신 분을 신뢰하는(fidere) 것이다. 성경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이 계시를 들음으로 신학한다. 그러므로 사변적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니고 듣는 말씀에서 사고한다.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그 믿음에 근거하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사고한다. 그러므로 말씀에 내 이성이 어떤 것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내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것을 넣어서 읽고 사고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듣는다. 내 이성이 신학의 구성에 공헌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이해한 말씀을 매 말로 반복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내 신학적 사고를 결정하고 그 내용을 형성한다. 신학은 믿음에서 시작함으로 중생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 중생한 이성, 즉 믿음을 근거하여 말씀을 들음이 신학적 진보의 계기가 된다. 말씀을 성경 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들음에서 믿음으로 진행한다(롬 10:17).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계시 앞에 종속적으로 선다. 계시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이고, 말씀하심도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므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인격(Dei loquentis persona) 앞에 선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음으로 순종하고 그 말씀에 의하여 산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성이 규정되고 자기 능력과 한계가 설정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 변화되므로 처음 아담의 의식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하나님의 지식 체계와 상응해서 지식을 얻어 자기의 지식 체계를 구성한다. 또 하나님의 지식 체계에 의해 참 지식 체계를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식 체계는 성경 계시에 있다. 사도신경은 로마서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이 성경의 체계에 의해 신학 체계가 구성되었다. 즉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신 6:5). 그리고 예수는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 이 순서에 의해서 삼위일체(창조주 하나님)와 그리스도 양성 교리(구속주 하나님)가 체계와 되었다.

또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 지식은 창조주 하나님 지식일 뿐만 아이라 구속주 하나님 지식이므로, 그 지식은 이성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한다. 이성이 재생되고, 그 활동 근거가 허락된다. 그러므로 이성이 자연 사물들을 대해 활동할 때처럼 자기의 고유한 권리에 따라 지식활동을 할 수 없다. 사물 탐구의 경우도 사물의 성질과 법칙을 이성이 따르고 존중해야 법칙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물의 법칙과 성질들에 상반되는 해석을 주입해서는 그 체계는 배척된다. 마찬가지로 신학할 때 이성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순종해야 한다. 계시가 주장하고 요구하는 대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해석되어야 할 자는 이성이고, 계시가 이성에 의해 해석되고 그 타당성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이 계시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판단하는 자는 성경 계시이고, 이성은 성경의 재판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믿음이고, 진리를 아는 길이다. 진리를 알면 언제나 그 진리에 순종하게 되고 믿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아는 것은 순종과 믿음의 길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이성이 그 말씀에 의해 조명(illuminatio)되어야 한다. 이성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진리를 이해하고 활동해야 한다.

이성이 계시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이성의 능력과 한계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규정되고 설정된다. 이성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적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이성이 계시에 의해 그 활동의 타당성이 판단받고 제시받는다.

이성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사고하는 것을 뜻한다.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사고하는 것은 말씀 곧 계시의 내용을 반복하고 그 내용을 따라 사고하는 것을 뜻한다. 계시를 따라 사고하고 그 계시에 의해 사고 작용이 이루어지고 계시의 내용을 반복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상이므로 인간의 사고는 신적 사상을 따라서 사고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것을 뜻한다. 독자적 사고가 아니라 전적으로 계시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계시를 따라서 사고한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신대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상을 뒤따라 말해야 한다. 계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그의 작정 그리고 창조 해석의 계시이므로 하나님의 해석과 사상에 우리의 사상을 맞추는 것이다. 신학적 사고 후에 그 사고가 바로 이루어져서, 계시의 내용에 맞게 바로 구성하고 생산했는지는 계시에 대조해서 결정된다.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revelatio ipsius Dei)이므로 신학적 사고는 그 계시에 의해 우리의 사고가 해석되어, 그 해석 받은 대로 사고해야 한다. 계시의 내용의 반복(믿음), 계시의 사상을 따라 진행(순종)해야 한다. 믿음으로 받은 계시를 믿음으로 진행하며, 진리를 파악하여 수납하는 순종으로 이어진다. 창조 해석과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오직 계시에 의존해야 한다.

신학적 사고는 하나님의 말씀에 함의된 내용들을 중심 사상에 의해 조명 받아 사고하여 풍성한 내용을 밝히는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교회의 사고가 발굴해내지 못한 깊은 진리들을 담고 있다. 실재로 유한한 지성이 다 파악하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신학적 사고가 다 소모하지 못하는 풍성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떠 시대마다 모든 진리가 다 동시에 자명하게 현시되고 이해된 것이 아니다. 교리사의 과정에서 밝혀지듯,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 교리에 이어 성령의 인격과 하나님 되심, 기독론의 교리들, 죄와 은혜의 문제, 구원에 이르는 길이 동시적으로 이해되고 개진된 것이 아니고 시대를 따라 이루어졌다. 성경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인 하나님의 나라도 20세기에 이르러 많이 조명된 것과 같다. 아직도 종말론의 문제, 교회 시대의 이스라엘의 자리, 사회 정의, 교회와 시민 정부의 관련 등이 분명하게 규명되지 않았고, 성령의 삼위일체 내에서의 역할이 아직 분명하게 개진되지 못하였다. 또 하나님 나라의 개진에 있어서 영들의 역할과 악의 기원 문제도 바로 해명되지 못하였다. 성경에 함의된 내용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친다. 함의된 내용들을 발굴해내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밝혀 신앙의 길을 확실하게 밝히는 것이 신학의 작업이다. 물론 이것이 교의신학의 기본 임무라는 것이 더 정확하지만 다른 신학 분과도 다 그 근본은 동일한 임무를 갖는다.

이성은 계시의 자기 주장(adfirmatio sui revelationis)을 존중해야하고, 이성의 판단과 자기 법칙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계시를 변용하여 자기의 합리성에 맞추면 되지 않는다. 계시의 자기 증거에 이성이 순종하여, 믿음으로 계시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 그것은 지성의 희생(sacrificium intellectus)1)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중생하여 계시에 의해 규정되었고 본래의 자리에로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유한한 능력은 그 범위를 넘어가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리고 계시에 순종함이 인간에게 더욱 유익하다. 이성에 한계가 있다고 인정하는 논리에서 초이성적인 진술은 믿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 수납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수용한다. 계시의 자기주장을 존중하므로 자기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 체계의 요구에 따라 계시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을 면하게 해준다. 본래 계시가 주장하는 증거에 거슬러서 시대정신(Zeitgeist)에 맞추는 재해석은 계시의 본래 주장을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학적 작업은 신앙의 논리에 의해 전개되어야 한다.

출처 : 예장 서울노회
글쓴이 : 최정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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