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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스크랩] 조직신학(1) 강의 내용 요약(이승구 교수)

조직신학 I 


국제신학 독일분교.

2008년 8월 20-26. 독일 프랑크푸르트.

강의자: 이승구 교수.

정리자: 문정은, 송다니엘.


정리자가 임의로 내용구분을 하고 소제목을 달았다. 이에 주로 벌코프의 책을 참조함.

“성경의 영감”은 원래 신론에 해당되지 않지만, 강의자 편의대로 삼위일체내에서 다룸.

[…] 대괄호 안에 있는 말들은 다른 곳에서 인용된 것이거나 정리자의 의견임

강의는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기본 교과서로 한다.


이승구 교수는 짧은 시간에 개혁신학을 매우 잘 정리하여 강의함. 이 강의를 잘 숙지하면 신앙생활에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조직 신학은 총 4학기에 걸쳐서 강의가 된다.

1학기: 신학서론, 신론.

3학기: 인간론, 기독론

5학기: 구원론, 교회론

7학기: 종말론, 현대신학


이번 학기는 주로 신론을 다룸. 

학생은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여러 지역에서 왔음. 강의는 조직신학 외에 김태훈 교수의 구약 해석학, 시편 강의가 있었음.


목차: 


1부: 신학서론

2부: 신론

  I. 하나님의 존재

    A. 삼위일체

     * 성경의 영감

    B. 하나님의 속성

       1. 비공유적 속성

       2. 공유적 속성

  II. 하나님의 사역

    A. 작정

    B. 예정

    C. 창조

    D. 섭리





1부: 신학서론


1) 신학의 정의: 


Theologieren, doing theology.

희랍어: Theos (하나님) + Logos (말, 이성. Logia는 복수)  theologia. 

라틴어: Scientia dei 신학  Science of God


하나님에 대해 알 뿐만 아니라 그가 창조하신 세상에 대해서도 아는 것. 하나님과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연구하는 것. 따라서 신론은 “1. 하나님의 존재, 2. 하나님의 사역” 두 부분으로 나눈다. 하나님 존재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면 추상적인 철학에 빠진다. 신학에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사역을 Oikonomia라고 하는데 경세, 경륜이라는 표현도 사용된다  Economy(경제)


인간은 하나님의 원형적 신학(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것: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하나님만이 정확하게 아심)에서 비롯된 모형적 신학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원형적 신학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하려고 애쓴다. 이에 어려움이 따른다.

우리의 신학은 모형적 신학. 세상에서의 불완전한 신학, 길 위의 신학 theology on the way Theologia viatorum. 모든 신자는 신학자이다. 그런데 좋은 신학을 해야 함. 신학자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2) 잘못된 신학


a) 이성 중심  rationalism (이성주의)

- 이성을 강조하는 합리주의.

- 근대 철학의 출발점은 인식론이다. 이성(ratio)에 근거한 신학 시작. 계시를 의심하고 이성으로 판단하기 시작함. 이성적인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계시를 판단하는 것이 문제. 하나님의 일은 계시로 주어지는 것이 많다. 이것을 이성으로 제단할 수 없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알 수가 없다. 

- 타락 전: 아담의 신학: 원상의 신학 - 완전한 이성. 아담이 눈을 뜨자 마자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았음.

- 타락 후: 사람의 인격을 구성하는 3가지, 이성, 감성, 의지가 동시에 타락. 따라서 이성을 절대화시키는 것은 위험하다(감성도 마찬가지)


- 서구의 이성주의(17세기)는 Descartes (데카르트)에서 시작됨. 그는 하나님에 대해 “명석하고 판명한 개념”을 가지려 하였다 (Clear and distinct idea)

- 따라서 일단 이성을 가지고 모든 것에 대한 의심, 회의를 해봄. (더 명확한 것을 얻기 위해 의심하는 것을 방법론적 회의라고 한다) 그는 소박 실재론 (사과가 책상 위에 있다는 사실) 까지도 의심해 봄. 그런데 그가 “모든 것을 의심할 지라도 의심을 하는 주체는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름. 그래서 cogito ergo sum이라는 말이 나옴. 


* Cogito(나는 생각한다) ergo(그러므로) sum(나는 존재한다)

(1) 나 자신이 존재해야 의심이 가능. 내가 아무리 의심을 해도 의심하고 있는 내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 그래서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먼저 확립하고(나는 존재한다) 

(2) 다음에 하나님의 존재증명을 함 (존재론적 증명)

(3) 그 다음에 세상의 인식을 확립: 곧은 막대기는 물에 들어가면 굴절됨. 이와 같이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사탄이 속여서 실상을 못 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은 나를 속이지 아니하신다. 따라서 사람은 올바로 세상을 인식을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이성으로 인식하는 것은 올바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이야기가 당연한 것 같지만 문제는 인식에 있어서 계시와 이성의 순서를 바꾼 것이다. 우리는 계시가 이성을 가르친다. 그러나 데카르트에게는 이성이 계시를 판단한다. 그는 이성으로 인식하는 것은 옳다고 전제함.


- Cartesian theology: 데카르트의 뒤를 이은 합리주의 신학. 문제는 그들이 이성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 인간은 계시를 받아들여야 한다. 타락한 이성만으로는 올바른 신학이 불가능하다.


b) 칸트 이후의 신학

- 칸트는 데카르트를 수정함. 이는 사람이 이성으로 하나님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함. 그러나 칸트는 순수 이성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가 없다고 한다. 즉 우리의 순수 이성으로는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계시는지를 판단할 수가 없다. 그의 저작 “순수이성비판”은 순수이성의 인식의 범위를 정한 것. 그러나 우리의 실천이성은 하나님을 postulate (요청)한다. 인간의 도덕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있어야만 한다. 만약 하나님이 있어서 인간의 사후에 선한자를 상주고 악한자를 벌주지 않는다면 사회는 즉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는 현상계와 예지계를 구분함

phenomena 현상계: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 가능한 영역. 물자체(Ding an sich)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보편 타당한 인식을 할 수는 있다1).

noumena 예지계: 물자체의 세계.


하나님을 이성으로 알 수가 없다면, 그 다음 단계에서는 사람들이 체험을 중시 여기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각자마다 체험하는 것이 다르다. 예를 들어 장님이 코끼리의 일부분을 만지고 전체를 판단하는 격. 체험자체는 옳을 수가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체험을 근거로 이야기 하는 사람은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해서 말릴 수가 없다. 



3) 올바른 신학.


고린도 전서 2:9-10: 하나님이 자신을 성령으로 계시(revelation)하심.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으로 보지 못하고 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인간은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을 수납해야 한다. 

타락한 인간은 수납(믿음)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 하나님이 성령으로 계시를 주셔서 인간에게 받게 하셨으나,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비판(계시를 받아들일 태도가 부족)하여 받아 들일 만한 것만 받아들임.


계시에는 항상 걸림돌이 있다. (스칸달론) 걸림돌을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제거하길 원함. (동정녀 탄생 불신). 그런데 걸림돌을 제거하면 계시가 증발되어 버린다. 이것이 이성주의의 문제이다. 


계시 의존 신학 thinking after God's thought  성경적 신학.

걸림돌을 인간의 생각으로 제단하여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변형시키면 안 됨.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사색해야 한다. 이것만이 올바를 신학이다. 우리는 이성주의 신학, 경험주의 신학을 떠나야 한다. 


James Dunn의 예를 들자면: 

영국 Durham 대학교수. 그의 저서 “신약성서의 단일성과 통일성”에서 한 이야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동정녀탄생의 기록이 없다. 이것은 마태공동체와 누가공동체에서만 동정녀 탄생을 받아들였음을 말하고 있다. 다른 공동체에서는 이것을 받아 들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투지 않고 공존함. 

비판: 이러한 신학은 성경에서 동정녀 탄생의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다. 여기서 마태공동체란 마태복음이 나온 곳. 자유주의자들은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했다고 믿지 않는다.


중생한 이성과 타락한 이성: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도들이 신약성서를 씀. 우리 입장에서는 성경의 말씀을 계시로 받아들여야 함. 이성과 경험은 도구가 될 수 있으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됨.

중생한 이성: 중생을 한 사람은 타락한 이성이 변하게 됨. 그렇다고 해서 이성이 올바로 회복이 된 것이 아니다. 단지 계시를 받을만한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는 항상 조심스럽게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 

Anselm: fides quarentes intellectum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AA전통: Augustin & Anselm의 태도


신 의식과 자연계시

바울(롬1) "하나님의 알만한 것"/ 칼빈 "sensus deitatis(sensus divinitatis) 신 의식"

신의식은 모든 사람 안에 있다. 

자연계시: 롬1:20.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신성이 나타남.

이 두 가지가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경배를 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의로 신지식을 억누름으로써 신 지식을 가지지 못함.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a) 자연/일반 계시 하나님의 창조물이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원과 관련 없음.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

b) 특별계시 : 구원과 직접적 관련.

성경; 구전으로 전해지는 도중 발생 가능한 왜곡을 피하기 위해 성문화하여 계시를 보존한 것.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특별계시(성경에 기록됨)를 주심. 성경이 특별계시이다.


- 구약시대는 말라기(나의 사자) 선지자 때 끝. 약 BC 400. 그 후 약 400년 동안 계시가 없었다(신구약 중간기). 그 동안 사람들은 이전의 계시에 근거하며 살면 된다. 믿음으로 산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음.

- 신약시대에는 정경/성경은 닫혀졌다(canon is closed). 더 이상 새로운 계시가 없다. 누가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그는 이단이다.

-기독교: canon 66권에 근거해서 모든 일을 함 = 성경만을 믿는다.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

-천주교: 외경(66권외의 추가적인 천주교 성경)과 전통을 믿는다. 그 외에 위경(예수님의 소년시절 얘기, 사도들의 황당한 기적)을 참조함. 교황의 칙서(성경과 같음. 권좌에서-ex cathedra-선언한 것은 오류가 없다: 교황 무오설). 영아림보사상 (어린애가 세례 못 받고 죽으면 영아림보에 간다 - 베네딕트16 현직 교황이 부인함.)

-이단 : 정경의 내용을 더하거나 뺌. (여호와의 증인 : 성경 +교주 요셉 스미스의 계시)

요한계시록 22:18-19. 원칙적으로 계시록에만 해당되는 말. 그러나 성경의 다른 책에도 적용할 수 있다. 


- 거룩한 공회 the holy catholic church(참 교회)는 성경을 따라간다. 그러나 천주교는 성경 외에 다른 것들도 믿는다. 천주교는 교회가 성경을 결정했다고 함으로써 교회를 성경앞에 세운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 이전에 있었다. 교회는 성경에 따라서 구성되고, 교회는 원래부터 있었던 성경을 찾아서 결정을 한 것 뿐이다. 



4) 개혁파 신학 Reformed theology 


개혁신학은 성경에 근거한 계시만 의존한다. 

그외 여러가지 종파:

1. Roman Catholic: 예수님/마리아상을 중시, 미신화됨. 필리핀, 브라질, 중세. 아직도 마리아가 나타나서 계시함. 신기하게도 신교도에게는 마리아가 나타나지 않음.

2. Greek orthodox 희랍 정교회: 성상 숭배 금지. 그러나 그 대신에 Icon 성부,성자의 그림을 그림 = 화상)

3. 로마 카톨릭을 부정하고 나온 루터파.

4. 그외 영국 Anglican, Methodist(웨슬리: 세계는 나의 교구), Baptist 

이에 대한 천주교 입장 표명 : 루터의 종교개혁이 문제의 근원지이다.


Reformed: 칼빈이 루터의 영향을 받고 제네바에서 나름대로 좀 더 개혁함. 

칼빈의 가르침을 잘 이어받은 곳: 네덜란드(개혁교회: Dutch Reformed Church)와 스코트랜드 (장로교회). John Knox (1505-1572)가 제네바에서 배움. “그리스도인의 가장 완벽한 신앙을 제네바에서 볼 수 있다” 스코틀랜드에 돌아와서 장로교회를 세움. 



5) 책과 신학자 소개


Mdiv(Master of Divinity ? 목회학 석사) 과정 - 과거의 선배들이 생각한 것을 구경하는 것.


1. 조직신학 일반

Herman Bavinck: 19c말 20c초. 화란의 자유대학. Magnalia Dei (Our Resonable Faith, 하나님의 큰 일). 모든 성도들이 읽을 수 있을 만큼 쉽게 쓰여진 책. 상당히 중요하고 좋은 책.

Louis Berkhof: 벌코프. 칼빈 신학대에서 가르침. Systematic Theology (조직신학). 1939초판. 매우 좋은 교과서. 바빙크의 개혁파 교의학(4권)을 거의 요약함. 17-20세기 초까지의 개혁신학을 잘 요약함. 

Robert Ra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그의 선생 Buswell것 보다 더 좋다. Covenant신대 조직신학 교수. 장로교 신학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Gordon Sykeman: “Reformational Theology: A New Paradigm for Doing Dogmatics”. 좋은 책인데 지나친 면도 있음. 


2. 신론

Herman Bavinck: The Doctrine of God. 이승구역. 역주가 많아서 읽기 좋다. 신학사 전체를 연구함.

Lorraine Boettner: “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예정론을 정리함.

Gerald Bray: “The Doctrine of God” IVP 조직신학 시리즈. 좋은 책

Millard Erickson: “Christian Theology”. 침례교회 보수. 침례교의 특징이 나타남.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An Introduction to Biblical Doctrine” 벌콥의 책을 현대적으로 읽고 싶은 사람. “지금도 하나님 계시가 있다”는 침례교적인 성향이 있다. 

J. Parker: “Knowing God” 경건서적으로 좋다. 꼭 읽을 것.

Cornelius Van Til: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원래 화란의 개혁파. Vos의 제자. 두 가지 전통인 화란 개혁교회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신학을 잘 조화시킴. 



6) 신학 과목


a) Biblical studies 성경신학.

Exegetical theology: 주경신학. 성경을 주해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 조직신학은 주경신학을 바탕으로 한다. 주경신학을 위해서는 히브리어, 헬라어와 신, 구약 배경사(고대 근동의 문화와 역사, 중간사), 성경 형성사등을 배워야 한다.

exegesis: 주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끄집어냄. 성경 안에 있는 그대로를 가져와야 함.

eisgesis: 잘못된 주해. 내 생각을 성경에 집어 넣어서 그것을 다시 끄집어냄.

이 연구의 마지막 과정은 성경신학(구약신학, 신약신학). 특별계시의 역사를 찾아냄. 각권의 특성을 잘 연구하면서도 성경으로부터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선을 발견하는 것. 벌콥의 서론에 잘 나와 있음.


b) 교회사 (역사신학 Historical theology) 

과거의 교회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 왔는지, 어떻게 적용해 왔는지를 배워서 어느 것이 옳은가를 판단함. 

우리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된다. 잘한 것을 발전시키고 나쁜 것을 버린다. 

우리는 현재 20세기를 거쳐온 교회의 대변인으로 있다. 


c)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

우리가 믿는 바를 체계적으로 제시함. 과거에 나타난 잘못된 교리의 잘못된 이유를 체계적으로 설명해줌. 


d) 실천신학 Practical theology 

교회에서 실천에 옮기기 전에 한번 점검하는 것. 하기 전에 검토, 한 후에 검토. 성경에 맞는지를 늘 검토함.

- 우리의 실천에 대한 것을 검토. 설교 비판. 교회에 도움이 되도록 함.

- 실천신학의 예 (그 범위가 갈수록 광대해짐): 과거에는 예배학, 설교학, 전도학, 목회학. 점차로 목회상담학, 기독교교육학, 사이버목회학, 교회행정학 등이 추가됨. 

- 재능이 제일 많은 사람이 실천신학을 해야 한다. 실천신학은 신학의 꽃이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에서 실천신학이 점점 세속화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 조직신학


조직신학의 방법: 우리는 종합적 방법(벌코프의 조직신학)으로 공부하는데 과목은 다음과 같이 나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고찰하는 방법이다. 결국 하나님의 인식이 올바로 되도록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물론 조직신학을 하는 다른 방법도 있다. 

Prolegomena                        서론 

Theology proper            신론

Anthropology                        인간론, 인죄론

Christology                        기독론

Soteriology                        구원론

Ecclesiology                        교회학

Eschatology                        종말론


루터와 칼빈의 비교

1) 루터는 믿음생활에 대한 자유를 강조하고, 그 당시에 대중들의 종교심을 감안하여 상을 모두 없애지 않고 일부분은 허용하였다. [교회에 쳐들어가 상을 파괴시켜서 혼란을 야기했던 과격파들을 멀리함]. 칼빈은 상을 모두 없앴다.

2) 루터는 교회 안의 역할을 Priester 제사장/사제와 Minister 섬기는 사람으로 구분하였으나 두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함. 그러나 후에 루터교에 와서는 제사장의 의미가 강해짐. 

cf) Anglican 은 Prister of church 선호. 그러나 개혁파에서는 제사장이라는 말을 없애버림. 

한국인들은 목사에 대해 제사장이라는 의식을 가짐(목사의 축복이 필요함)


[루터와 칼빈의 근본적인 차이 몇가지]

루터:                                                            칼빈

하나님의 사랑 강조  십자가 신학            하나님의 영광 강조  하나님의 주권

성경에서 금하지 않는 것은 허용적.            성경에 명기되지 않은 것을 금지함


목사의 역활

1) 설교하는 자리에서는 원칙 중심(성경). 성경의 진리가 가감 없이 선포되어야 한다. 

2) 목회적인 접근이 필요: 사목현장에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서 그 신자를 존중하고 수준에 맞춰서 진리의 세계로 인도함(인격의 문제)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내용을 왜곡하면 안된다. 이것은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님을 왜곡시켜 전하는 행위이며, 성도에게도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2부: 신론 (Theology Proper)

I. 하나님의 존재

A. 삼위일체

1. 유대인의 유일신 신앙: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 모세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르치지 않고 유일신을 강조한 이유


신 6:4 Shema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 이 말씀은 출애굽 후 광야생활 40년이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신신당부한 말씀이다. 그런데 왜 그는 정확하게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다”라고 가르치지 않았을까? 

- 그는 한 분 경배에 초점을 두었다. 다른 신(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의미에서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계시를 하셨다면, 이스라엘은 다신으로 이해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유일신이시며 모든 다른 우상을 제거하라고 하셨다. 

-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계시 방법을 배운다: 성경의 계시방법은 점진적이다. 점진적으로 계시를 하면서 앞의 계시를 번복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계시가 점점 명확하게 되는 것이다. 구약에 희미하게 계시된 예수님은 신약에서 완전히 계시되었다. 


- 아브라함의 조상까지도 다른 신을 숭배하였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가운데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큰 축복이다.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 이스라엘은 다신론적 이집트에서 빠져나와서 다시 다신론적 사회인 가나안으로 들어감. 그래서 모세가 유일신을 매우 강조함. 유대인들은 왜 우리만 유일신을 섬겨야 하는가 하고 회의를 가질 수가 있음.

- Monotheism: 여러 신들 중에 한 분만 섬김. Poli-Theism 다신론과 반대. 

- 유일신론: 신은 하나 밖에는 없다.

- 유일신론의 종교는 3가지 밖에는 없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김)


실천적 무신론자 

- 실천적 무신론자란, 하나님이 계심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이다. 예: 아담의 타락 직후에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변명함. 하나님과 대화를 한다고 해서 신앙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가인의 예에서 더 뚜렸하게 나타남. 

- 노아 시대의 사람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알지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못했다. 

- 대홍수 이후에 8명이 살아남음. 그의 후예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고 바벨탑을 쌓음.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를 생각하지 않음. 

- 하나님 말씀에 순종을 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실천적 무신론자이다. 


- 너의 존재 전체(100%)를 다 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절대(하나님)는 절대(100%)를 요구함.

- 영적인 간음: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 99% 사랑하는 것. 부부관계도 마찬가지 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적은 거의 없다. 가장 심할 때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던 아합왕 때이다. 850 vs 1. 바알 사제와 엘리야의 기도 대결.

- 이스라엘 족속들은 산마다 산당이 있었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면서 다른 신을 함께 섬김. 

- 가나안 신화: 가나안의 남신과 여신이 성관계를 맺어 이 땅이 비옥해졌다. 비는 바알이 뿌린 스페르마이다. [거룩한 구약과 이방종교가 너무나 대조적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 vs "가나안의 옛 신들이 이 땅을 지켜줬는데, 우리가 마음을 주지 않으면 화가 올 수도 있다" 


-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한 분만 섬기라고 그토록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야훼와 함께 이방신을 섬겼다. 하나님은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다 멸하라고 명하였음. 아이들까지도 다 죽이라고 했음. 이것은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이 명령을 순종하지 않았을 때에, 그들에게 우상이 들어왔다. 

-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들어온 우상을 없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망한다.

- 신 6:6-9: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라. 항상 자녀들을 위해 교육적으로 생각하며 실천하고, 그를 위해 교육적 환경을 조성해라. 집에 앉았을 때 든지, 누워있을 때든지…

- 그러나 이것이 습관화가 되었을 경우 

1) 생활지침 2) 하나님 말씀에 대한 마음이 없이 하는 습관(형식만 존재)


- 기본적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다. 세속적 신앙. 번영의 신학.

- 한국 목사들의 설교 방법: 하나님을 잘 섬기면, 재물 운은 자연스레 뒤따라온다. 하지만 결국엔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게 되고,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경우가 된다.


- 그러나 그들이 선지자들의 심판예고를 듣지 않자 북 이스라엘은 722, 남 유다는 586에 멸망함. 엘리트들은 전부 잡혀가고 땅의 사람들2)만 남게 됨. 

- 그 이후에는 그들이 각성을 하여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자 함. 한 분의 하나님 신앙이 강조됨. 그리고 성경이 강조됨. 성전이 없어져서 제사를 드릴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을 필사하는 일이었다. 성경 해석집 탈무드가 등장. 성경을 가르치고 필사하는 사람들인 율법사가 중요하게 됨. 그들은 또한 율법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 마가복음 2장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에서 유대인들의 신앙이 잘 드러남.

막2:1 가버나움: 갈릴리 사람의 중심지

2:7 참람 = 신성모독. 당시의 유대인들 관념으로는 하나님 한 분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음.


-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성을 주장(가끔 자신이 하나님 이심을 드러내심). 그러나 바빌론 포로의 쓰디쓴 체험이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들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려고 함. 그들이 만약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몇 분이신가를 의심하게 됨. 사도 바울도 같은 문제를 갖고 있던 것 같음. 우리가 바리새인의 입장을 잘 이해하여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 유대인들은 바빌론 포로 이후에 우상숭배를 한 적이 없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성경에 계시된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우상숭배를 할 수 있다. 



2. 삼위와 일체의 문제


# 서론적인 문제


- 계시는 계속해서 진전하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믿지 않으면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구약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성자와 성령에 대한 암시가 많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몇 명인가? 

- 요14:16에서 성령까지 끄집어 내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듦: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의미 해설:

·또 다른 보혜사(알로스 파라클레토스: 옆에 불림을 받은 자) = 성령

·allos는 다르지만 동질의 것. Hetero는 질이 다른 것. hetero sexual. 

·보혜사는 고대의 재판시에 자기를 도와주는 법적인 친구(legal friend)이다. 법률적 지식이 없는 경우 이를 옆에 세워두고 전부 귀속말로 이야기를 해준다. 

·이렇게 우리 곁에서 우리에게 예수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다.


- 이단들은 이 교리를 일단은 받아들이고 쉬운 해결책을 택한다. 대표적 이단 교리: 

·삼신론: 3명의 신은 하나님-예수님-성령의 위계질서를 가진다.

·Modalism(양태론): 성부/성자/성령은 서로 다른 mode를 가졌지만, 한 분이시다. 예)H2O: 얼음-물-수증기


- 양태론에 대한 반박: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앉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을 세례자 요한이 직접 경험했다. 양태론에 따르면,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이 역사할 수가 없고, 하나님이 자리를 바꾸면서 서서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 본문에는 동시에 일어난 일로 묘사되고 있으므로 양태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 과제: 三 과 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삼位일체(Trinitatis)로 해결함


# 삼위일체


* 하나님의 존재방식 

God the Father                        아버지 하나님

God the Son                        아들 하나님

God the Holy Spirit            성령 하나님

각각은 구별되지만, 모두 다 한분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가 함께 천지를 창조하심. 하지만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구분가능 = 서로가 서로의 안에 존재).


* 삼위일체란 용어의 의미

1. 일체: 

- 일체란 한 본질이라는 의미이다. Homo-ousios(호모우시오스) = 동일 본질의. 호모라는 말은 같다는 의미이고, 우시오스는 우시아의 형용사. 우시아(essentia, substantia)라는 말은 본질이라는 의미이다. 본질이 같으므로 하나이다.

- 문제는 왜 성자가 성부에게 순종을 하는가? 삼위는 권능, 영광, 존재에 있어서 동등하시다. 그러나 사역상 순종이 가능하다  경륜상의 순종. 성자가 순종을 하신다고 해서 성부보다 조금 못하신 것이 아니다. 


2. 삼위

- 위격: hypostasis = persona = prosopon (가면). 영어로는 person, subsistance라는 표현을 사용함. 로만 그레코 문화에서 연극을 할때 배우는 등장인물을 나타내는 가면을 쓰고 나타남. 가면을 쓰면 실제로 등장인물이 되는 것과 같다. 

- 본질은 같지만 서로 구별된다. 같은 분이 아버지 페르소나, 아들 페르소나, 성령 페르소나로 구분됨. 

-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페리코레시스(상호 교통, 순환, 점유)라는 표현을 사용함. 구별이 되면서 서로가 서로 안에 존재한다. 요17:5: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 삼위는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은 모두 같이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성부께만 영광을 돌린다. 

- 이 개념이 서지 않으면, 성경이 말한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다(예수님=하나님. 성령님=하나님. 아버지=하나님). 또한 이런 삼위일체의 관계를 이해하면, 양태론을 막을 수 있다. 잘못된 설명을 없애고 되도록 간략하게 설명을 해야 한다. [삼위일체를 완벽하게는 설명할 수는 없다]

Augustinus: Si comprehendis, non est Deus: 만약 당신이 완전히 이해한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다. 



3. 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시사들


* 계시의 이해:

- 캄캄한 방에 한줄기의 빛이 들어오면, 물건들이 자세히는 보이지 않지만, 그들의 대강의 구도는 볼 수가 있다. 이것이 구약시대의 계시이다. 그러나 낮이 되면(신약시대) 분명히 보인다. 성경계시의 특성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명료하게 계시된다는 것이다. 뒤에 오는 계시가 앞에 잇는 계시를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앞의 계시를 더 밝게 자세히 계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계시의 목표이다. 희미한 그리스도의 계시가 신약에 와서 뚜렸하게 나타남. 

- 예: 구약의 자세하고 복잡한 정결법은 그리스도의 속죄죽음으로 성취됨. 정결법은 신약에서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얼마나 정결해야 하는지를 가르침. 

- 계시의 명료성: 그러나 구약의 계시는 구약 사람들에게 희미한 것이 아니다. 그 시대 안에서는 명료하며, 이것은 신약에 비교할 때에 희미하다는 의미이다. 


* 하나님의 계시는 교육적(점진적)이다: 

- 다신론의 사회에서는 하나님이 한 분임을 강조한다. 구약에서 삼위일체론을 강조했다면 기독교가 다신론으로 갔을 것. 그러나 구약에도 삼위일체의 가르침이 있다. 이 가르침은 애매하지는 않다. 

- 예: 성령에 대해서는: 창1:2의 하나님의 신(루아흐 엘로힘)은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요14-16장에서 명확해진다. (운행하신다 = 품고 계신다. 그 위에 펄럭인다)


# 구약에 나타난 성자님


1. 요 1:1: 태초에 계신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ν ?ρχ? ?ν ? λ?γο?, κα? ? λ?γο? ?ν πρ?? τ?ν θε?ν, κα? θε?? ?ν ? λ?γο?.


- 여기에서 태초에 계신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한다. 성자도 성부와 같은 하나님이다. 

- 그리고 만물이 그(로고스, 말씀)로 말미암아 지음 받았다고 한다. 즉 창세기 1장의 창조가 성부 하나님 홀로 하신 일이 아니고 성자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창세기에 이미 성자 하나님이 계시되었다. 

- 성자 하나님을 구분해서 부르기도 한다: 태초로부터 계신 성자 하나님, 즉 몸을 입지 않은 로고스를 “로고스 아싸르코스”라고 하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로고스 엔 싸르코스”라고 한다. 

- 요한이 창세기 1창을 읽고서 창조에 참여한 말씀이 성자이신 것을 깨달음.


- 요1:1 말씀에서 성부 하나님은 정관사 “호”를 붙여서 “호 테오스”라고 하고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는 정관사 없는 테오스라고 했다. 그러나 의미는 동일하다. 즉 말씀이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정관사가 없다고 해서 정관사가 있는 하나님보다 낮은 신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 여호와 증인은 테오스를 형용사로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피조물인 신으로 본다. [주신이 다른 신들을 창조. 그리이스 로마신화. 에누마 엘리쉬등 근동의 신화]

- 오리겐은 “테오스”는 “호 테오스”보다 조금 못하다라고 봄. 


2. 지혜의 세상창조 (wisdom christology: 지혜기독론)

- 이미 구약시대에도 지혜가 세상의 창조에 관여했다는 시사가 있다.

·잠 8;1 지혜.

·잠 8;20 지혜를 의인화 시킴. 속성을 의인화하여 얘기했다.

·잠 8;22 지혜가 창조 전에 있었다.

·잠 8;30 창조자 아몬.

아몬이란: 1) craft workman(장인) Werkmeister; 지혜는 이 세상을 실제적으로 만드시는 분이다. 2) 사랑받는 사람(Liebling ? 성자)

- 지혜는 요1:1의 말씀과 같다. 


3. 여호와의 사자: 말락 아도나이. 

(삼위일체의 논거는 되지 않지만 그 암시는 된다)

i) 창16;7 여호와의 사자=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 

창16:? 자기가 하나님처럼 하는 사자. 

ii) 출14:19: “이스라엘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출13;21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심.

한번은 여호와라고 하고 한번은 여호와의 사자라고 함.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자기가 하나님처럼 하는 여호와의 사자라고 해석하고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13잘과 14장은 다른 자료라고 한다. 

iii) 삿6:11-24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는데, 여호와와 대화하는 것처럼 내용이 전개됨. : 11,20: 말락 아도나이. 14,23: 여호와.

iv) 삿13:3: 말락 아도나이 (삼손의 출생 이야기)

삿13:18 나의 이름은 기묘 geheimnisvoll, wonder

v) 말3:1: 내 사자를 보내노니. 언약의 사자. 말락 아도나이가 말락 베릿이 됨.


추론: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성자가 성육신 했다. 장차 성육신 하실 분이 먼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남. 


배울점: 옛날에는 예배할 때는 항상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찬양했다. 오늘날 CCM에는 삼위일체가 없다. 오늘날 실천적인 Unitarian들이 많다. 성부 Unitarian, 성자 Unitarian, 성령 Unitarian.

Unitarian ; 삼위일체설을 부인하고 유일 신격(神格)을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


4. 창18: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1: 야훼가 나타남. 2 세 사람. 3: 아도나이. 9: 주어가 복수. 10: 주어가 단수로 바뀜. 19장 1: 두 천사가 소돔으로 감. 

추론: 세 사람 중 한 명은 성자.


5. 사6: 이사야의 비젼

비전(환상) 가운데서 봤으므로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로 묘사됨.

성경에 언급된 천사들은 영이고 성이 없으나, 계시로 나타났을 때는 모두 남자의 모습이었다.

천사이름: 가브리엘, 미하엘 (남자이름)


* 우리가 배울점: 예배, 찬송, 기도의 대상은 삼위일체신 하나님께.

- 성경을 중요시하되, 말씀을 통한 성령님과의 살아있는 교제가 있어야 한다. 성경만 중시하고 성령님과의 교제가 없으면 죽은 정통이 된다.

- 환상이나 음성을 듣는 신자들은 문제: 그 경험에 의존하여 성경과 멀어짐. 그들은 사도 바울과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는 수많은 영적체험을 하였으나 그것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현상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는 도무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나아갈 수 있다(비 기독교적인 생각: 지성이면 감천이다) 주께서 이 기도를 받아 주셨다는 감사가 있어야 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앞에 뜻을 구한다. 

- 다음 중 아무거나 사용가능

1)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다 찾고 기도하기.

2) 영광을 성부 하나님께 돌려드림-전유

3) 우리의 구원을 위한 기도: 성자께.

4) 삶을 인도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 성령.

-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도: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 성부, 성자, 성령을 의식하고 알맞은 것들을 돌려드리는 것이 성숙한 예배이다. 



# 구약에 나타난 성령님


* 본문


1) 사63;7-11

- 내용: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비유: 아버지-자녀, 왕-백성(남편-아내),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반역함.

10,11: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 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이스라엘 백성 안에 성령(성신)이 거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음.


2) 학2:5: 안약한 말 - 성경, 영 - 성령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3) 시51: "하나님의 신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마소서". 

 다윗이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의 존재를 자각함.


- 그렇다면 요7:39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가 되는가?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이것은 구속사적으로 임하시지 않음을 말함. 요한복음의 로고스는 구속사적인 작용이다. 예수님의 성육신, 성령이 오심, 재림은 구속사적인 사건이다. 로고스와 성령은 그 이전에도 사람 가운데에서 활동하심. 그 이전에도 중생, 성화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가운데서 계시다가 이제는 교회공동체에 계심


* 성령님의 역사와 삼중적 은혜

1) 일반 은총: 모든 일반 사람들에게 역사. 성령님의 힘으로 살지만, 구원과 관계는 없다. 

문제: 어떤 이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죄를 짓는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다. 

2) 직임적 임재: 특별 사역. 구원과 관련 없이 사역자에게 은사로 나타날 수 있음. 사울 왕에게 성령님이 함께 하셨다가 후에 떠나심.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 고레스왕에게도 “나의 종”이라고 하심. 

3) 구원적 임재: 하나님의 참백성에게 영원히 함께 하신다. 

문제: 성령님께 순종하지 하고 근심을 많이 끼쳤을 경우; 회개하지 않으면, 성령님의 내주하시는 임재가 아니다.


* 이적 신앙의 문제: 

- 사람이 이적을 경험하는 경우는 성령님의 직임적 임재이다. 이것은 구원과 관계가 없다. 성령을 받지 않고 은사를 받을 수 있다.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들의 문제점: 주제 넘음, 잘못된 확신.

진짜 하나님 백성에게는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 이들에게는 “영원히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을 주심. 


* 구속사적 사건

[창조 ? 타락 ? 이스라엘의 부르심] - 1) 성육신 2) 십자가 3) 부활 4) 성령이 오심 5) 예수님의 재림.

- 구약시대는 준비단계로 볼 수 있음.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심. 구약은 이렇게 후에 이루어질 구속사적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해석을 해야 한다. 


- 구약시대에는 민족적 특별은총particularism으로 이스라엘 백성만 택하셔서 성령님이 역사하셨으나, 신약시대 이후로는 믿음이 있는 모든 자들에게 성령님이 역사하신다. 두 시대 사이의 성령님 역사의 강도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없다. 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존속함.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역사가 끊어짐. 

- 구속사의 역사 주인공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다. 구약시대에도 성령의 활동이 있었지만 구속사적인 면에는 없었다. 구속사적인 임재는 단회적이다.


* 창세기 1장의 삼위일체에 관한 해석문제

- 창1:1: 충만의 복수. 동사는 단수를 받음.

- 창1:26 let us create/make …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 '우리'에 대한 해석 가능한 견해들

1) 하나님의 위격의 복수성 시사  점진적 계시. 자체에서는 몇명인지 수는 모르지만, 신약시대에 가서는 삼위일체임을 알 수 있다. 

2) 충만의 복수 : 엘로힘이라는 명사는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로 쓰인다.

3) 하나님의 자기 의논의 복수. 중요한 일을 할 때 복수로 자신을 칭하심.

4) royal "we". 왕적인 우리. “우리가 대마도를 치자!”


잘못된 견해들

1) 천상의 어전회의설 - 사람이 천사의 모습으로 되므로 (천상의 어전회의; 하나님이 천사들을 모아놓고 하는 회의.)

2) 헤르만 궁켈: '다신론의 잔재' - 종교의 발생을 진화론적으로 본다.



4. 삼위간의 관계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잘못된 비유; “광열, 광선, 광원”등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


A. 삼위일체 교리에 있어서의 이단들


1) Arius 파 

[4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삼위일체설을 부정하였던 아리우스와 의 추종자들. 니케아 공의회에서 최초로 기독교의 이단으로 결정되었다]

-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만, 영원 전에는 성부만 계셨다. 성부가 창조계획을 세우실 때에 성자를 만드셨다. 그 다음에 성령이 있다"; 성자는 있지 않았던 때가 있었고, 성부는 영원했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성부가 성자보다 우월하다고 시사한다. 


313. 기독교 공인.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 거의 반이 아리우스를 따름.

325. 니케아 종교회의. 황제가 통합을 하고자.

392.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자 공직에 진출하려는 자는 무조건 예수님을 믿어야 했다. 태어나면 유아세례를 받음.

영향: nominal christian. Christentum 기독교권 형성. 유아세례의 의미 변질.

(비교: 이전 상황- 생사의 문제 앞에서도 진실한 신자만이 존재)


- 콘스탄틴의 밀라노 칙령 동기: 콘스탄틴이 막센티우스와의 생명을 건 전투에서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을 믿음. 그는 기독교가 분열되지 않기를 바람.

- 325 니케아 공회; 교회의 교리를 결정하는데 콘스탄틴 황제가 소집함. Homoousios(동질) vs. Homoiousios(유사본질)

- 모인 사람들 1) 아리우스파 2) 아타나시우스파(정통파) 3) 중도파.

- 회의 결정내용: "성부, 성자는 동일한 본질이시다"(이 논란 때문에 모임) = 성부, 성자는 영원하시다. 그러나 아리우스파는 보편교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음.


2) Modalism 양태론(성부 = 성자)

- 한 하나님이 가면만 바꾸어 나타남. 옛날 배우들은 남자가 여자의 가면을 쓰고 나타남.

- 대표자: Noetus. 양태론은 Patripassionism(성부수난설)로 귀착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으므로 하나님 자신이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 Cleomenes의 반박: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 드립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기가 자신에게 영혼을 부탁한 것이 된다. 

- 교황들도 초기에는 양태론에 가담함. 교황무오설은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로마의 교황제도에 따르면 베드로가 1대 교황인데, 베드로 본인은 자신이 교황인지 모른다.


B. 과거의 정통파


1) Justin Martyr. 기독교의 변증가

- 당시 기독인이 받은 대표적인 비난: 

·무신론자: 로마12신을 믿지 않으므로 무신론자이다. 

·피와 살을 먹고 마신다(성찬식을 오해)

·혼음: 교인들끼리 사랑하는 것을 오해했다.

- 저스틴은 이것을 논리적으로 변증함. 기독교는 가장 높은 철학. 플라톤이 모세에게 배웠다고 함.

- 그의 삼위일체에 대한 의견은: 성부 하나님은 안 보이는 하나님이고 성자 하나님은 보이는 하나님.

 성부가 성자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시사했다. 동일본질에 어긋남(종속설 잔재)


2) Irenaeus 

- 기독교 신학의 좋은 기초를 놓음. 좋은 선생님.

- 성부하나님은 안 보이는데, 두 팔(성자, 성령)을 가지셨다. 성자는 조금 보이심. 종속설이 남아 있지만 성부 중심설로 가는 기초를 만듦.


3) Origen 

- 그의 신학은 오류는 많지만 이단은 아니다. 예수님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었으나 나중에 잘못을 인정함. 기독교 교리를 플라톤 주의와 유사하게 만듦.

- 영혼 선재설을 가르침: 우리의 영혼이 하늘에서 이미 타락해서(창3은 이것을 비유) 그 벌로 아기로 하나 하나씩 태어남. 영혼은 육체(감옥)을 떠나는 것이 목표. 빨리 많은 사람을 데리고 하늘에 가는 것. 

- 알레고리칼(풍유적) 해석: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기 위해 318명을 데리고 감. 318에서 영적 의미를 찾기 위해 음가를 더하여(고전어는 숫자를 나타낼 때 알파벳을 사용한다) 그리스도라는 말을 찾아냄: “우리를 구원해 내신 분은 그리스도다” 라는 메시지를 끄집어 냄.


4) Tertulian

- 삼위일체 단어 창시. 라틴교부. 이때부터 라틴어가 중심이 됨. 그는 법률가였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위해 일함. 법률가로서 쌓은 지식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잘 설명하였다. 나아가서 기독교 신학에도 공헌하였다. 

- 그러나 희랍교부들과는 반대로 모든 철학을 버릴 것을 주장: '아테네(희랍철학)과 예루살렘(성경)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반대로 저스틴은 기독교를 최고의 철학으로 봄. 로고스, 합리적 철학.

- 그는 철학을 많이 알고 있었다. Trinitatis라는 말을 만들어 냄(위격은 3분, 존재는 1분). 아테네의 자원을 잘 사용하여 기독교를 잘 설명. 


문제점: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성자는 아버지의 말씀으로 나오신 성육신의 결과로서 독자적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불행한 표현. “성육신의 결과”라는 말이 잘못됨.


5) 어거스틴

- 삼위일체론을 거의 완성함. “삼위일체론”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김광채). 큰 기여를 함.

1. Vestigium trinitatis. 삼위일체의 흔적.

예: 나무는 뿌리, 줄기, 잎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삼위일체를 증명하기에 부적절하다.

2. 심리적 유비: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심.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시도도 역시 부적절함)

예: 성부는 love, 성자는 The Beloved 성령은 Love.

알다: 아는 사람, 아는 대상, 사랑.

Knowing God: Understand

Remembering God: Remember

Loving God: Love


- 어거스틴의 기여: 삼위의 관계성을 잘 설명한 점. 아무도 삼위일체를 올바르게 설명한 사람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삼의일체 교리를 정립하는 데에 기여를 했다. 



C: 올바른 설명


-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영원한 관계이다. 인간의 부자관계와는 다르다(아들은 아버지 이후에 존재함). 인간의 관계를 적용할 경우에 Arius주의에 빠진다.


1)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독생자의 영광…”

모노게네스: 홀로 나아진 자 "독생자" 유일하게 나아진 자, 성육신 하기 전에도 독생자

- 성부; 한번도 나아진 적이 없었다. agennesia(낳아지지 않음)는 성부에게만 해당.

- agenesia: 시작이 없다(영원함)라는 말은 3위 모두에게 해당된다. 

- 오리겐은 성자를 Eternal generation(시작이 없는 영원한 출생)이라고 표현함(관계성이 영원하다). 이것은 오리겐의 큰 기여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낳아지고 있다는 유출설의 의미로 사용함.


2) 시2: 제왕시(Thronbesteigerung. 왕이 등극할 때 사용하는 시편)

-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왕(기름 부음을 받은 자)을 대적함.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 시 2;2 에서는 이스라엘의 왕을 나타냄.

- 시 2;7 해석 

·일차적인 성취; 이스라엘 왕의 등극.

·궁극적인 성취; 2;12 아들에게 입맞추라. 사람의 왕에게 적용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 몇몇 유대인들이 그 아들을 장차 오실 메시아라고 생각함. 멀리서 산(왕)이 하나만 보이다가도 가까아 가면 또 하나의 산(메시아)이 보임. 교부들은 이 이야기를 영원 전에 낳아지신 분(요1)으로 여김. 


3) 요15:26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 표현의 문제

- 사용할 수 있는 말: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서는: 낳으신다(generation).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구별을 위해. 

·발출, 발생은 은 금지된 표현이다. 기독교 영지주의에서 사용. 성부로부터 성자가 유출한다. 가까운 것일수록 선하고 멀수록 악하다. 


- 올바른 표현: 성부는 성자를 영원히 낳으신다. 하나님은 영원히 말씀하신다. 성부는 영원히 숨을 쉬신다(성령).

- 다음의 표현도 사용한다: 

·metaphysical fatherhood 형이상학적인 아버지 되심.

·ontological fatherhood 본체론적인 아버지 되심.

·official sonship 직무적 아들 되심. 행2:31.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이것을 adoption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adoptional (성부와 성자의 관계와 다름)

- 낳으셨다 라는 말의 의미에 집착하면, 출발점을 찾게 되고 이는 아리우스주의(아버지가 정하신 영원의 시점 존재를 주장)의 생각과 같아진다. 영원의 세계에서는 시작과 끝의 개념이 없다.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아버지와 자신을 구별하기 위함이고, 아버지가 더 나으시다는 말을 의도하신 바는 없다. 서로 동등한 관계.

구속의 역사가 종지부를 찍고 나라를 모두 아버지께 바치고(경륜상의 순종) 나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 예수님은 겸손을 나타내시고자 우리들을 형제 자매나 벗이라고 하셨으나(감사해야 할일)

우리들이 좋은 의미로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형제라 생각할지라도, 우리는 그의 종이다.


 삼위(세분이 아님)의 관계는 영원함!



5. 삼위일체 교리의 진전사


* 필리오케 논쟁

-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보다 발전된 Athanasius 신조의 문구: Credimus in Spiritum Sanctum qui a Patre (Filioque는 후대에 삽입) procedit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나온 성령님을 믿습니다' (요 15:26: “내가 보내는”: missio, “곧 아버지로 나오는”: processio) 

톨레도 공의회에서 Filioque(and from the son)를 첨가함. 신조에 무엇을 첨가한 것은 문제가 있으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아들로부터라는 말은 성경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성경적이다. 

- 그러나 동방교회(greek orthodox church 희랍 정교회)에서는 Filioque를 거부함. 

- 그들은 라틴어로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희랍어를 사용함. 일부가 러시아 정교회가 됨. 결혼한 사제. 머리 속에 성부 우위설이 있다. 성부중심적. 그러나 그렇다고 표현은 안 한다. 

- 튀빙엔 교수 Moltmann은 Filioque를 첨가한 것에 반대하고 Eberhard Juengel은 Filioque를 찬성한다. 


* 그리스도의 임재

1) Spiritual presence 영적으로 (파루시아). 성령이 보내진 후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고 물리적으로는 우리와 함께 계시지는 않지만, 영적으로는 함께 계신다.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언급되진 않았으나, 하나님도 같이 계셔야 삼위일체가 성립. 항상 삼위가 함께 하심. 삼위의 교제 속에 우리를 끌여 들여서 우리와 교제하심.

- opera trinitatis ad extra sunt indivisa; 삼위일체의 밖으로의 사역은 나누어 지지 않는다.


2) physical presence: 예수님은 몸과 인성을 가지시고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올라가심. 영적으로만 세상에 존재하심.


* 본체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 ontological trinity: 존재론/본체론적 삼위일체. 영원전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원래 그러시다.

- economic trinity: 경륜/계시적 삼위일체. 


- 경륜적 삼위일체 때문에 존재론적 삼위일체를 알게 되었다. 따라서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인식근거가 됨. 반대로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근거가 된다.



* 현대 신학자들의 삼위일체 논쟁


§ Karl Rahner. 대표적 천주교 신학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큰 역활을 함.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음.]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교수. 논문집으로는 “신학적 탐구”가 있다. 그 중 1권은 삼위일체에 관한 것: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이다. 그 역도 성립한다. 

- 그러나 보수신학자들의 입장은: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인식근거.


§ Karl Barth는 삼위일체론을 20세기에 부흥시킴. 쉴라이어머하를 비판. 

- Schleiermacher는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인간의 감성을 강조. 그의 신학이 19세기를 석권함. 그의 저서 “Christlicher Glaube”: 신앙은 신학이다. 그 시대 사람이 어떻게 믿는가가 신학이다. 신학학은 시대마다 다르다  주관적 신학. 그는 삼위일체를 부록으로 다룸.

- 바르트는 처음에 이 사상에 동조함. 그 후에는 “우리의 신학은 삼위일체부터 시작한다”라고 역설함. 그 이후 조직신학자들이 삼위일체를 근거로 신학을 하게된다. 그의 신학의 문제는 정통신학과 다르다  Neo-orthodoxy.

- 성부, 성자, 성령은 존재양식이다(Seinsweise). 이 말은 마치 양태론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런 의미가 아니다. 몰트만은 이것을 양태론이라고 비판함.


§ 몰트만: 십자가를 중심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함. 십자가에서 삼위일체가 계시될 뿐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삼위일체가 규정되어진다. 십자가가 없으면, 삼위일체가 의미가 없다. 

- Doxological Trinity 주장함: 본체론적 삼위일체를 찬양할 수 있다. 이것을 최소한도로 말해서: 역사가 하나님께 영향을 미친다. 궁극적으로 역사가 끝났을 때 하나님은 다르다  Neohegelianism. 헤겔의 역사전개 과정. 


§ 에버하르트 융엘

몰트만과 더불어 새로운 십자가의 신학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본질은 고난이며 완전에서 더 완전으로 변한다. 그들의 신학은 오류.


§ Hendrikus Berkhof

- “Christian Faith”: 화란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조직신학 교과서. 경륜적 삼위일체만 인정. 그는 삼위일체의 틀 속에서 이야기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언약관계에 대해서만 거론한다. 그의 생각을 끝까지 좇아가면 예수님은 결국 사람이다. Neoliberalism. 이 세상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역사이다. 삼위일체론이 결국에는 없어짐. 


* doxological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 

- 몰트만: 십자가에서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하나님은 자신을 예수와 동일시 하면서 구별한다  하나님의 자기소외. 십자가에서 하나님 됨이 드러나심. 하나님으로 규정되심. 그러나 영원 전부터 규정됨. 예배 때에만 송영적으로…

- 융엘: “Gottes Sein ist im Werden”. 유명한 책. 이 책에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바르트의 동의 여부는 모른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변함이 없다고 했는데 융엘은 바르트가 하나님은 변하는 분이라고 했다고 말함. 


신인동형론적인 표현:

Anthropomorphism: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심.

Anthropopathism: 하나님의 후회, 분노. 그분은 감정이 있지만 우리와 같은 류의 감정이 아니다. 그분은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변하시는 분이다. 



* 정리


-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 그 위에 있어서는 셋인데 우열을 가릴 수 없다.

- 성부, 성자, 성령간의 교제가 풍부하셔서 이것에 근거해서 삼위일체적 교제를 반영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는데 가장 첫번째로 교회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교제 속으로 끌어들임.

- 요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를 하되 우리는 창조자인지 피조물인지 구분을 잘해야 한다. 

- 독일의 신비주의자: 그들의 목표는 ?물방울이 떨어져 대양 속에 스며들듯이(물이 사라짐) 우리가 하나님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의 일부가 된다).

- 하나님은 우리를 끌어올리시지만,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일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삼위일체의 실천적 의미

- 삼위일체와 교회의 관계성: 요즈음 교회의 큰 테마. 삼위일체(서로가 서로 안에 계심 '페리코레시스")를 모델로 하여 교회 공동체를 만든다. 각자가 성령님과 교제하면서 형제들과 교제함. 이때의 모델이 삼위일체. 구별성이 유지되면서 통일성을 갖춘다. 


애매한 이론들

OPEN TRINITY , OPEN HISTORY OF TRINITY(개방된 역사의 삼위일체), SOCIAL TRINITY(사회적 삼위일체). 사용하는 사람마다 의미가 달라진다. 마치 삼위일체의 교제를 사람 셋의 교제와 혼동시킬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의 구분이 명확하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B. 하나님의 속성

- 의미: 하나님에 속하는 성품(Properties, Virtues of God).


-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찾아내려는 시도(잘못된 방법)  철학적 방법.

예) Via causalitatis(인과성의 방도): 원인, 결과를 계속 따져가면 최초의 원인(Prima causa)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 이 최초의 원인이 하나님이다.


* 하나님의 속성을 탐구하는 방법 


1) Via negationis(부정의 방도): 제한적인 사람이 갖는 속성의 반대 속성. Aristoteles가 대표.

사람의 속성                        하나님의 속성

Mens:                                     immens                         연장이 없다. 즉 무한하다.

Corporal:                         incorporal                         몸이 없다. 

Mortal:                                    immortal                         죽지 않는다. 영원하다. 

Comprehensible:             incomprehensible.             불가해하다. 

Finite:                                    infinite                                     끝이 없다.


사람이 있는 것을 가지고 부정을 하여 하나님을 정의하게 되는데, 그 하나님은 진짜가 아니다.


2) Via eminentiae(우월의 방도, 우수성의 방도): 최대한으로 우월하게 한다. 

omni-scientia                        전지

omni-presentia                        전재(편재)

omni-potentia                        전능

omni-benevolentia            전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것을 찾아냄. 중세의 신학자들이 이것을 그대로 야훼 하나님에게 그대로 적용. 이런 하나님은 철학자들의 하나님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비슷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일반 은총 가운데 찾아낸 것이지, 성경에 근거해서 찾아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정리할 때는 사용할 수 있으나, 그렇게 찾아어서는 안된다. 야훼 하나님의 속성은 이것과는 다르다. 

파스칼: 철학자의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다. (역사를 통하여 계시하시는 하나님,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계시의 진전…)


* 하나님의 속성을 올바로 아는 방식


하나님의 속성을 알려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것을 살펴봐야 한다(물론 지금도 행동하시지만, 이것의 해석은 과거의 계시, 즉 성경에 의존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과거 행하신 일을 보여주고 반드시 설명을 해준다. 이것을 찾아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삶 속에서 확증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추상적으로 보이는 말씀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체험 되어야 한다. 

시 37: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

이 먹을거리는 살면서 실천해야 한다.

역사, 체험, 경험: 이것을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 종속시켜야 한다. 체험에 의존하는 신앙은 위험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싶은 이유: 

1) 하나님을 진짜로 사랑하면 알고 싶다.

구원이 완성이 되어 하늘나라에 있어도 하나님을 알아 나간다.

성 어거스틴: 나는 하나님과 나의 영혼을 아는 것 밖에는 관심이 없다.

세월이 지날수록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증진되어야 한다. 

2) 배워나갈수록 우리는 피조물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본 받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완전해 질 수는 없으나 상대적으로 완전해져야 한다.



하나님의 속성 

1) 비공유적 속성; 우리하고는 성질이 다르다. 하나님만 가지신 속성.

2) 공유적 속성; 엄밀히 따지면 비교는 안되지만 , 피조물들이 상대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



1. 비공유적 속성


1) 하나님의 자존성(스스로 존재하심) 


- 인간은 어머니가 낳아야 존재한다. 사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셔야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인이 없다. causa sui(철학적 용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원인이시다. 


-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

스스로 있는 자 = (70인역; 나는 그 존재하는 자이다. ?Εγ? ε?μι ? ?ν?=“Ich bin der Seiende”) I am who/what I am. I will be what I will be(미래로도 해석가능).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나를 규정하려고 하지 말라. 나와 함께 이 구속사건에 참여하면 내가 누군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독립적이다. 

-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며, “만물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그러나 만물이 그를 통해서만 존재하며, 모든 것이 자기를 통해 의존하게 하신다3)”. (하나님 사역에 내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은 비성경적이다. 교회에 특정한 사람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은 스스로 복되신분. 그분은 원칙적으로 인간을 필요로 하시지 않으신다. 그분은 인간의 도움도 받지 않으신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역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나님 모독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을 원하신다. 


* 그외 관련 성구(출3:1-14)를 통해 배울 점:


출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인간이 생각하는 불이 아니다.)

출 3: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여호와의 사자: 성자로 추론됨.

- 네가 선 곳: 하나님 앞에 있는 자리. 사실은 우리는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 있던지 바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하나님 면전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 우리는 이제 성지, 성지순례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천주교는 성지가 있으나, 개신교는 신자가 가는 곳이 성지이다. 성지순례는 성경지리 및 문화연수로 바뀌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성지가 하나님 앞이라 거룩했으나, 신약시대 이후로는 신자가 가는 곳이 성지이다. 청교도는 예배당 뿐만 아니라 상점(속이고 이익을 많이 봐야 함)도 거룩하게 여겼다. 그렇다면 상점에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성직, 성전이라는말도 없다. 


출 3: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출 3:11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 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출 3:13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여기에서 신인동형적 표현을 사용함.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도록 하기 위한 것. 신인동형적 표현이란, 하나님은 형체가 없으시지만 때때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시거나 인간처럼 말을 하시는 것. 

- “내가 내려가서”: 하늘에 계서도 모든 것을 아시고 하늘에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지만,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함. 또한 하나님이 그들을 이끌어 내신다고 함. 



2) 불변하심 Immutability


- 정의: 부동성(Immobilit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그리고 목적과 행동의 동기, 약속에 있어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4)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정지하신 분이 아니라 시간, 역사속으로 들어오셔서 인간과 함께 일을 하신다. 하나님(예수님)은 감동도 하시고 눈물도 흘리심.

- 일반적으로 변화란 더 좋아진다거나 나빠진다는 뉘앙스가 있다. 하나님은 발전도 퇴보도 없으시다. 

- 범신론: 하나님은 영원히 스스로를 생성해 나가는 분. 무의식적인 절대자가 인간의 의식속에서 의식적인 인격성으로 발전한다(헤겔의 정신현상학). 현대신학자(철학자)들중에 하나님은 변화하시는 분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말 3:6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언약관계에 있어서는 불변하심

약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림자는 빛에 따라 변하는 속성이 있다.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는 말은 변하시지 않는 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믿을 만하다.

시편: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의지하는 요새시로다.


- 질문: 하나님은 후회도 하시는가?  인간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심(창6:5). 주의: 이것은 하나님의 감정을 인간의 감정으로 표현한 것이다(anthropopathic)

- 배울점: 하나님의 신실하심. 죄인에게 대한 사랑, 계획은 불변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과 보호하심을 끝까지 신뢰하고 살 수 있다. 절대로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신다.


3) 무한성 Infinity 


정의: 하나님은 모든 제한으로부터 자유하시다: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에 대해 제한이 없다5)


a) 시간과 관련한 하나님의 무한성: 영원

- 어거스틴: 하나님은 시간 가운데서(in tempore) 창조하신 게 아니라 시간과 함께(cum tempore)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즉 세상과 시간을 동시에 창조하셨다. 시간도 피조물이다. 시간은 창조 때부터 흘러간다. 그 이전에는 시간이 없었다.

- 창조 전; 시간이 없는 상태 timelessness 무 시간성 (플라톤과 거의 모든 철학자는 시간과 영원을 대립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시간과 영원을 대립시키지 않는다) 

- 종말 이후; 시간은 끝없이 계속 간다. 모든 피조물이 소멸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시간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endlessness. 인간은 부활후에 시간과 함께 영원히 산다. 


- Oscar Cullmann 바젤신학자. “Christus und Zeit” 아주 좋은 책. 완전히 옳지는 않음. 플라톤에 대항하여 endlessness를 주장. 창조 전과 세상 끝 이후의 영원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한 사람. “플라톤은 timelessness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endlessness라고 해야 한다”.


- 하나님은 시간 안에 들어오신다. 모든 시간 내에 계신다. 내재하시면서 시간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의 존재는 시간으로 나누어질 수 없는 항상 전체이다6)

- Eternal Now: 이 순간 안에 영원이 들어있다. 왜? 영원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 영원의 3중적 의미: 하나님과 관계해서 영원은 3중적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간(과거, 현제, 미래)이 동시대적이다. 우리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도. 모든 순간이 영원으로 차 있다.

-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모든 사람이 함께 살아 있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동시대적 이면서도 나와 함께 동시대적이다. 


Karl Barth: 시간 안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하나님이 유한적 존재가 되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시간을 스치고 지나가셔야 한다. 시간과 접하지 않으면서 접한다. 탄젠트 point. 하나님이 시간에 들어오시면 검증 가능해진다. 예수는 역사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역사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하나님 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의 일부를 주심. 우리가 영원성에 참여하도록. 우리는 시간 내에서 살지만 십자가 때문에 영생을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의 본래적 의미가 나타난다. 십자가가 시간을 구속함. 우리의 삶 전체가 구속된 삶을 산다. 


십자가 이전에는 십자가의 예언을 믿는 자는 십자가 구속을 믿는 것과 같다.


b) 공간과 관련된 하나님의 무한성 

- omni - presence 무소부재.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 “모든 순간의 공간에 하나님이 전 존재로 참여하신다” “공간을 초월하시면서도 공간의 각 부분을 그의 존재 전체로 채우신다7)

- 인간의 존재방식: Circumscribitively. 부피를 차지해야 존재. 동시에 다른 곳에 있을 수 없다. 

- 천사: 바늘 끝에도 있을 수 있다. Definitively. 시공의 차별을 거의 안 받는다. 한 사람에게 2000의 귀신이 들어감(거라사인) 

- 하나님: 하나님은 온 세상을 채우고 계신다. 부피와 상관이 없다.


- 존재론적;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이들과 함께 있다.

- 도덕, 윤리, 종교적; 하나님의 백성하고 만 함께 있다.

- 배울점: 우리는 하나님을 어디에서나 경배할 수 있다. 불교사원에서도 모스크에서도 무당 굿하는 곳에서도. 아무리 귀신과 우상이 많은 곳에서도 하나님은 Lord로 계신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보호하심을 체험할 수 있다. 귀신은 우리를 해할 수 없다. 그러나 우상상배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단지 경건한 자에게만 함께 하신다. 


c)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

- 정의: 무한성이란 어떠한 제한이나 결핍이 없는 것 = 완전성.



2. 공유적 속성


- 몇 가지 하나님의 속성은 인간에게도 있는 것이지만 이것이 우리의 속성과 같다는 것은 아니다.


1) 하나님은 영이시다


* 하나님의 독특하심


- 하나님은 영이시고, 몸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요4:24)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며”: 가시적으로 본다는 것이 아님.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영적으로 뵙고 산다. Spritual vision

-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하나님을 뵈오나이다” : B. Warfield


딤전 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 지어다 아멘

딤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 아담도 하나님을 보지 못함. 모세를 굴속에 넣으시고 손으로 보이시고 등만 보이심: Anthropomorphism. 하나님이 형체를 가지고 계신 것처럼 묘사.


- 왜곡된 개념: “우주 전체가 하나님의 몸이다”라는 범신론의 가르침은 잘못 되었다. 하나님은 창조 전에도 계셨기 때문이다. 우주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 우리가 죽고 나서 영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가는데 하나님을 더 가깝게 느낀다. 나중에 부활하여 신령한 몸을 가지고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드린다. 그러나 하나님을 물리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만약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인간이 예수님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으로 나타나심.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음.

-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심. 그래서 기도가 매우 중요함. 기도란 삶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대화하며,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주기도문). 따라서 신자는 성화가 이루어 지지 않을 수가 없다. 


* 3위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


영적인 관계라는 말은 원래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지정의의 전 인격적으로 나타남.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좋으면 좋을수록, 세상에서 좋게 살아야 한다. Abraham Kuyper(화란 자유대학 창설자)가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함. [그는 유명한 신학자 이면서도 기독당을 만들어 화란의 수상이 됨] 우리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무엇이든지 할 수 있도록 지어짐.


























2) 지성적인 속성들


a. 하나님의 지식 


i. 하나님의 지식의 성질: 하나님의 지식은 원형적 지식이다. 원형적 지식이란 통찰에 의해 얻어지는 후천적 지식이 아니라 모든 것은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생각속에 존재하므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계시다. 하나님의 지식은 논증적, 추론적 지식이 아니다. 


ii. 인간의 지식의 성질: 이에 대비해서 인간의 지식은 모형적 지식이라고 한다. 우리의 지식은 항상 원형(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의 지식의 세가지 성질은: 종합적 지식(우리는 종합 해봐야 하고), 분석적 지식(분석 해봐야 하고), 연속적 지식(계속해서 알아 나가야 한다)


iii. 필연적 지식(scientia neccesaria)과 자유로운 지식(scientia libera): 하나님의 지식은 이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 바 필연적 지식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대해 아시는 것. 하나님은 그분이 존재하시는 만큼 아신다. 하나님은 존재와 그 의식이 범위가 같다. 동연적이다(연장이 같다). 자유로운 지식이란 통찰의 지식(scientia visionis) 이라고도 함. 역사의 과정에서 실현되는 일에 관한 지식. 어느 영원의 시점에서 천지창조의 마음을 먹으심(작정). 그때부터 이 세상을 아심.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창조 계획이 없으시면 세상에 대한 지식이 필요 없으셨음. 작정은 scientia libera의 원천이다.


iv. 하나님의 지식의 범위: 하나님의 지식의 범위는 완전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식은 우리에게 진리가 된다.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일도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섭리)이므로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다. 우리의 모든 시간은 과거와 오는 미래 사이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모든 시간이 동시적이다. 작정하신 순간부터 인간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 


b. 하나님의 지혜


- 지혜란 지식을 적용하여 최선의 길을 아는 것(성경에서의 잠언, 전도서, 아가서등의 특별한 위치). “인간의 지식은 학문에 의해 얻어지지만, 지혜는 사물에 대한 직관적인 통찰력으로 부터 생겨난다. 전자는 이론적이지만 후자는 실천적이다”8) 하나님께는 지식과 지혜가 떨어져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이 길은 항상 가장 최선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가야 한다.

- 벌콥의 하나님의 지혜의 정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영화롭게 하시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식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시는 데 적용되는 그의 속성” “지혜의 최종적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 최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삶을 가장 이상적으로 인도하시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라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고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한다.


- 인간의 지식은 유비적 지식이다. thinking after God’s thought. 우리는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바에 따라서(성경에 근거해서) 살아야 한다. 이 세상 전체를 파악하려면 하나님(말씀)을 통해서 보아야 한다. 말씀을 떠나면 사변으로 빠져서 철학이 된다. 기독교 학문은 성경적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자기 주장하는 것이다. 

- 잘못된 삶: 

·아무 생각 없이 살기. 목사나 예언자를 따라감. 만약 하나님만 생각하고 산다면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신비주의. 신앙은 신비적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아니다. 


c. 하나님의 참되심(진실성)9)


- 하나님은 진리시다. 믿을만하다. 미쁘시다. 그분의 약속은 항상 실현이 된다.

i) 하나님은 윤리적인 의미에서 진리이다: 자신을 진실 그대로 계시하기 때문에, 그 계시는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 

ii) 하나님은 논리적인 의미에서 진리이다: 사물을 존재하는 그대로 아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는 모든 지식의 기초이다. 모든 분야의 학문적인 노력에 있어서까지도 하나님 말씀은 진리의 원천이 된다. 

iii) 하나님의 신실성(faithfullness): 언제나 그의 언약을 생각하시고, 그가 백성들과 맺은 모든 약속들을 성취하신다. 



3) 도덕적인 속성들


1. 하나님의 선하심


일반적으로 대상에 따라 구분되는 몇가지의 다양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 하나님의 선은 사랑, 은혜, 긍휼, 오래 참으심으로 나타난다. 


a) 일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선. 

- 하나님은 이 세상 전체에 대해서 선하시다. “하나님은 자기 피조물에 대해서도 선하시기 때문에 모든 선의 근원(fons omnium bonorum)이라고 한다10)” 따라서 신자들도 세상에 대해 선해야 한다(인류애, 자연보호). 

- 일반 은총 (common grace) 이라고도 한다. 

시 145: 9.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15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16 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자연계시: 이렇게 피조물(자연)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선과 영광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주이심을 계시하셨다. 이것을 자연계시라고 한다. 즉 성경을 통하지 않고도 인간은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있다. 

- 특별계시: 성경을 특별계시라고 한다.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면 왜 성경이 필요한가?

롬1:20-21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인간들이 자연계시를 받아들이지 않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인간들이 눌러서 우상숭배로 나타남. 인간의 마음이 너무 어두워져서 성경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자신을 제대로 깨닫지 못함.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온전한 회개를 할 수가 없음. 자신의 죄를 깨달을 지언정, 이것을 회개하고 죄사함을 구할 능력이 없다 .


(칼 바르트는 특별계시만 인정. 일반적 계시, 자연계시를 인정안함 - 성경에 반함)

- 특별은총 = 구원은총: 초자연적인 것. 특별히 하나님 백성에 대해서 더 선하시다. 신자는 일반은총도 인정하고, 구원에 대해 인정하고 감사하며 산다.

-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모두를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기도해서 나은 병자와 의사가 고친 병자. 둘 다 하나님의 은총에 해당된다. 병이 났을 때 좋은 의사를 찾기보다 하나님께 먼저 아뢰야 한다.


- 선하신 하나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최고의 선(summum bonum)은 행복(eudaimonism)이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하나님만이 선이다.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옴. 하나님과 관계 없이는 선한 것이 없다.

상대적인 선. 시민적인 선: 인간들의 일반적인 선. 안 믿는 사람들도 남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이것도 죄다  빛나는 악, 빛나는 죄(어거스틴)


b) 사랑

- 정의: “하나님으로 하여금 영원히 자기전달을 하게 하는 하나님의 속성”. “자신의 백성에게 그의 모든 은혜와 자비의 충만함으로 자신을 전달하시는 것”11)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 따라서 신자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삶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 히브리말에서 미워한다는 말은 둘 중에 하나를 더 사랑한다는 말이다(가족을 미워하지 않으면).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함: 특별 은총적 사랑.

- 타종교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구원과 관련이 없다.

- 일반은총과 관련된 성령의 역사: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반은총을 내리며,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불신자들에게도 은사를 주실 수 있다. 

마7:22-23 “그 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예언)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c) 자비(긍휼)

- 정의: 공과에 관계없이, 곤궁과 비탄에 빠진 자들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선과 사랑12).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자비하게 여기시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더 특별히 불쌍하게 여기신다. 헤세드(lovingkindness). 타조는 자기 알을 불쌍히(헤세드) 여지지 않거니와(사막의 열로 부화)


-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가 배워서 실천해야 한다: 불쌍히 여김/ 사랑/타인에게 은혜를 미쳐야 함.

- 인격요인(인격변수):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나지 않으면 신학이 잘못 되었다. 그러나 인격요인은 부차적인 것이다. 이 부차적인 것을 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함. 


- John Hick: 종교다원주의자. “어느 종교를 믿어도 구원 받을 수 있다” 그는 원래 복음주의자. IVF 출신. 살펴보니 신자나 불신자나 인격(도덕성)이 똑 같더라. 따라서 특별은총은 없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인격변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피조물의 수준 하에서 인격이 변해야 한다. 


- 신자는 성령에 의해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다: 신자는 과거의 빛나는 행위를 다 버리고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 믿은 후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자비로움을 강화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새로운 시작.


* 내적치유의 문제:

- 정의: 내적치유란 변화되지 못한 성품, 속사람이 치유되는 과정이다.

- 그러나 거듭남과 함께 내적 치유가 자연적으로 이루어짐. 예수를 믿으면 (중생 시에) 본질적인 변화가 이루어 짐. 성화라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본질적 변화가 차차 드러나는 것이다. 즉 성화는 정돈이다. 영적인 어린아이라는 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안 된다. 자신이 말씀에 복종함으로서 스스로 변화가 된다. [독일사람의 경우 그들이 거듭나면 거의 즉시 성인이 된다. 그들에게는 어린이의 과정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 성화에 대해서는: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신약에 나와있는 수많은 이러한 구절은 거듭남과 동시에 성화가 이루어 짐을 보여준다. 


- 옛날에 가지고 있던 것이 변화되어(세례받고) 사용되면 좋을 수 있다(사도 바울의 지식). 그러나 이것이 우상(금송아지)이 될 수가 있다. 주께서 그것을 사용하시지만, 그것을 발전시키거나 향상시킨 것이 아니다. 

- 우리는 중생의 시점을 잘 모른다. 


d) 은혜 

- 정의: 요구할 권리가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베푸는 인자.

- 구원은 오직 은혜로 이루어진다.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100% 하나님의 긍휼로.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신자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감사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잘되면 자신이 잘나서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고 감사하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취해 있는 사람이다. 


e) 복되심 

- 하나님의 복 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그 복에 참여 시키심. 우리를 여기에 초청하심. 믿으면 참으로 복이 옴. 세상의 복이 아니다. 

- 시편1: 복 된자는 하나님 말씀을 늘 묵상하는 자.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복이다. 


- 하나님은 영광(무거움; 무게의 중심이 하나님에게로)으로 가득 차 계시다. 하나님 이름만 영광스럽게 된다면 나는 만족. “하나님 백성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실제로 땅부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자는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의 거주자가 된다.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구약으로부터 발전해오는 개념으로, 일단 세속적 복 개념은 배제해야 한다. 신자는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아야 한다. 최악의 순간에도 감사해야 한다. 


- 번영의 신학: 한국과 미국. 하나님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 잘된다. 

-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도다. 이 말 앞에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므로”가 붙음. 그런데 감옥에 들어감.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형통. 

- 신자는 모든 상황에서 복되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이다. 복은 순간에 결정됨. 하나님을 믿는 순간은 영원으로 가는 순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순간에 복됨. 십자가 사건의 절대성 때문에 예수님 이전의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음.

- 신자는 하나님의 복 되심에 참여하는 자이다: 영원토록 감사해도 부족함. 하나님이 이루신 구속, 구원의 감동이 삶의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동양적인 사상; 세상은 돌고 도니, 순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기독교 사상; 그 순간이 귀하고, 항상 영원처럼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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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코프 조직신학에 나와있는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하나님의 속성은 시간 관계상 다루지 않음. 정리자가 간단히 추가함. “… ”은 벌콥책의 인용부분. 


2. 하나님의 거룩함


- 하나님은 선하신 동시에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지만 거룩하지 않은 자를 심판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인간도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 거룩하다의 히브리 단어는 “카다쉬”인데 이것의 기본 의미는 “자르다, 분리하다”이다(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으로 인해 몇명이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 추리심). 


a) 하나님의 거룩함의 성격

- 하나님은 피조물과 절대적으로 구별된다: 범신론과 불교에서는 신과 피조물과의 구별이 흐릿하다. 기독교의 중요한 가르침은 하나님과 피조물, 하나님과 인간과의 절대적이고 엄격한 구분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은 죄인이다.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아서는 안되며, 하나님께만 속한 것(영광)을 탈취해서는 안된다. 

-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윤리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모든 도덕적인 악과 죄로부터 분리된 것. “하나님은 절대로 죄와 교제하실 수 없다”. 절대적인 순수함, 순결함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 벌코프의 거룩함의 정의: “하나님께서 … 자신의 도덕적인 탁월성을 유지하시며, 죄를 혐오하시며,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 속에서 순결을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속성”


b) 거룩함의 현현

- 하나님의 거룩함은 인간의 마음에 심겨져 있으며(우상숭배의 이유), 양심을 통하여 말하는 일반 도덕법 속에서 나타나며, 특별하게는 성경에서 계시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율법에서 현저하게 드러난다”

- “모든 방면에서 이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의 개념을 새기게 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필요를 백성들에게 촉구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이것은 거룩한 나라, 거룩한 땅, 거룩한 도성, 거룩한 장소, 거룩한 제사장직과 같은 상징과 모형들에 의하여 쓰인 용도였다. 게다가 이것은 하나님이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을 베푸시며, 범죄자들에게는 무서운 벌로써 심판하셨던 방식에서 계시되었다”

-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최고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으로 완전한 거룩함을 보여 주셨다.

- “하나님의 거룩함”은 또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계시되었다. 

-교인은 거룩한 자라고 한다.

-교인은 그리스도의 피흘림으로 거룩하게 되었다.

-거룩하게 된 자는 세속을 따르지 말고 마음을 항상 새롭게 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산제사로 드려야 한다.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신자는 욕심을 가져서도 안되며, 미움과 음란한 마음을 품어서도 안된다. 

-항상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속화되어 거룩함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3. 하나님의 의


-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관계적 개념”으로 이해가 된다. 아울러 절대적으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불의한 인간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로서 이해된다13). 이것을 인간편에서 보면 아무 공로없이 받는 선물(칭의)이며, 칭의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가 맺어진다.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을 받아들일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아 의인이 된다. 따라서 죄인이면서도 의인이 되는 것이다. 마틴 루터의 표현: “simul iustus et peccator”






II. 하나님의 사역

A. 작정


* 서론


작정의 의미: 무릇 되어질 일을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에 미리 계획하심. 


행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정하신 뜻: 작정. 경륜(계획, council)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심사숙고와 협의의 의미를 가지며, 삼위의 하나님의 내적 교제의 암시를 준다.

미리 아신 대로: 예지.

즉 하나님께서는 미리 계획하신 다음에 아심. 작정에 근거해서 아심. 

예정예지: 주의주의 voluntarism. 의지가 앞선다. 미리 정하신다  우리가 배우는 개혁신학. 

예지예정: 주지주의. 천주교와 알미니안 주의. 미리 보고 정하심. 하나님을 조금 더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한 이론을 제안함.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독재자 같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님은 어디에 종속하시는 분이 된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다.

[지혜: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식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시는 데 적용하시는 그의 속성]



* 작정의 성질


단일하고 전 포괄적이며 동시적인 행동



* 작정의 특징들


1) 자신의 지혜에 근거하여 정하심. 하나님이 가장 지혜롭고 선하신 뜻대로 이루심. (따라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하며 근본적으로 평안을 찾을 수가 있다)


2) 한번 정하신 것은 불변하다 (하나님의 성질; 불변성)

우리가 계획을 바꾸는 이유; 지혜가 모자라서 계획을 잘못 세움. 또는 우리가 굉장한 계획을 세웠는데 수행할 만한 능력이 없어서.


3) 작정은 영원하다. (창조하기 전부터 있으면서 계속되어 진다)


4) 하나님이 중요한 일만 작정하신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전 포괄적으로 계획하셨다. All comprehensive. 일어날 모든 일을 포괄함(물리적, 도덕적, 선한 것, 악한 것까지도14)).


a. 선한 일

엡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중생)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는 반드시 선한 일을 하도록 지음 받음. 따라서 사람이 선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공로의식을 가지면 않된다. 우리가 이렇게 살도록 하나님이 영원 전에 작정하심.

빌 2:12-13: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무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Kierkegaard의 공포와 전율은 여기에서 온 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심.

벧전 4:11 “만일…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 하나님께만 영광: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도록 작정하시고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치유하는 은사가 있다면 알리지 않고 같이 기도하여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생긴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치유하는 것은 옳지 않다.


b. 유연이 일어난 것 처럼 보이는 일

- 우연은 없다. 우연/행운/불운/재수/운수라는 말은 없다.

왕상 22:4-35: 여호사밧이 아합에게 내려감. 대답을 해 놓고 다음에 하나님 뜻을 물어봄. “우연히” 아합을 죽임.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있었음.

 우연히 일어난 일이란 없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심


c. 죄악된 일

- 가장 큰 죄악은 십자가 사건. 그러나 미리 정하신 대로 내어주신 바가 됨. 죄악된 일도 하나님이 작정.

행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행4:27-28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잠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d. 인간의 생명의 연한(욥14:5; 시39:4)


5) 죄악에 대해서는 허용적 작정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선한 일이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은 이해를 할 만 하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가르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죄를 유발하셨으므로 인간이 죄를 지어도 이것은 하나님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와 상반된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허용적 작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 허용적 작정

- 죄악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인간이 죄를 짓도록 결정하지 않으셨다. 즉 인간이 죄를 짓도록 적극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셨다15).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스스로 죄를 짓는 것이다. (루터: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이것은 죄를 짓는데 사용하는 자유의지 뿐이다. 선을 행하는 데에는 자유의지가 없다)

-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범죄를 일으킨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통제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작정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를 통제하시어 마음대로 죄를 짓도록 용납하지 않으신다. 인간의 악한 자유도 하나님의 작정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이 모든 일어날 일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일어난다. 세상에서 아무리 불행하고 악한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모두 하나님의 선한 일이 이루어지는 데에 사용되므로 신자들은 불안해하거나 걱정을 할 필요가 없고, 선한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혹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긍정적 의미) 하나님을 찬양한다. 


*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

하나님의 의지는 이 땅에서 무조건 이루어 지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운명론에 빠진다. 그러나 만약 이루어 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 아니지 않는가?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신 29:29 “감추어진 일(하나님의 작정)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율법)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작정적 의지(decretive will of God): 하나님께서 주권으로 세상에서 되어질 모든 일을 작정하시는 의지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는 필히 그대로 일어나므로, 우리는 그것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이러한 작정적 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오묘한 일들이 많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에 의해 이미 작정된 대로 흘러간다. 


교훈적 의지(preceptive will of God):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인간은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에 의해 살기를 거부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시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의 표현은 구약시대에서는 구약의 율법이고, 신약에서는 구약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잘 이해해 적용한 하나님의 교훈16)과 신약 성경에서 주어진 모든 하나님의 교훈까지를 포함하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인간은 그것을 따라야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



철학적 의미로서는 인간에게는 항상 자유의지가 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이 우리에게 강요나 자극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원해서 죄를 짓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으로 볼 때는 작정.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따라서 매순간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은 인간이 하는 것이다. 다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에 하나님이 작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자유까지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셨으므로 우리가 어느 길로 가던지 이미 작정은 되어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을 믿고, 교훈적 의지에 따라서 살면 된다.

하나님의 작정은 사건이 일어난 후에 깨닫게 되므로, 무언가를 하기 전에 하나님이 작정하셨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스스로 나를 위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두개의 축을 항상 똑같이 잡고 있어야 한다: 작정(하나님의 주권)과 의무(책임과 자유)


행 27:9. 우리의 사역을 통해 믿게 된 자는 구원키로 작정된 자들이다. 우리는 누가 작정되었는지 모르므로 열심히 전도하여야 한다. 

우리는 작정을 모르므로 교훈만을 찾아간다. 


초 칼빈주의; hyper Calvinism. 이단에 가까운 사이비. 칼빈주의가 아님. 작정만 강조하여 운명론에 빠진다. 

동양 운명론; 사주팔자

서양 운명론; 희랍문학 오리시우스 이야기.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창조와 섭리가 이루어 진다. 섭리는 하나님의 작정대로 창조물을 이끌고 가는 것. 하나님은 작정하시고 우리는 교훈적 의지에 따라서 매 순간 결단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크신 일을 찬양하고, 나쁜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의 불순종에 의해서 일어난 것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 원망하거나 미워해서는 안 된다. 용서할 수가 있다.



B. 예정

I. 예정론


- 예정(Predestination)은 하나님의 작정에 속하는 것으로서, 구원을 위한 작정을 예정이라고 한다. 따라서 예정은 작정의 한 부분이다. 인간의 구원에만 해당됨. 날파리가 거미줄에 걸려서 죽은 것은 예정과 상관이 없다. 


- 예정에 관계되는 구절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엡 1:4  곧 1)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2)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3)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4)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5)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딤후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두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시는 수단이였다


행 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할 자시다.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 이들을 위해 사도 바울이 사역을 한다. 


유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작정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거짓 선지자, 거짓교사가 항상 있다. 이러한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 (벧후 2:1)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 유기 된 자. Reprobation. 

double-predestination: 유기(선택하지 않은 것)가 없으면 선택도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 어거스틴도 믿음.

그런데 유기를 빼는 사람들: single predestination 단일예정.


- Horst Poehlmann: “Abriss der Dogmatik” Guetersloh. 17세기 정통신학을 잘 정리함.

“바울은 은혜로서의 선택을 말하지, 유기를 말하지 않는다. 이중예정의 표상은 비성경적이다. 이중예정은 인간을 모독하는 설”

- Emil Brunner: “Unser Glaube”. 성경이 말하는 불균형을 그대로 놔 두라: 유기는 말하지 말라. 단일예정 주장.

- K. Barth: 우리는 이중 예정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예정론은 다른 의미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심.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버림받은 사람. [“Der Einzig Verworfene” 그리스도 혼자서만 버림받았다. 우리는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뉘앙스. 만인 구원론에 가깝다]. 바르트 책은 배울 것이 많다. 

- Tom Torens: 그의 제자. 스스로 은혜를 차단하는 사람은 어린양의 진노 가운데서 있다 .


Arminian주의: 예지 예정. 신인 협력설. Semipelagianism(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받아들여야 한다)보다 조금 낫다. 

믿음이 좋다는 말은 나쁜 말이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피를 흘렸는가? 자기 백성을 위해서. 피 한 방울도 헛되지 않다. 선택된 자들을 위해서만 피를 흘림. 이들 때문에 불신자들이 덕을 봐서 살고 있다 (일반은총)


노예의지. 그러나 회복된 자유의지. 좋은 나무로 변한다(칼빈)



II. 전택설과 후택설


타락전 선택설(전택설): Supralapsarianism.

타락후 선택설(후택설): Infralapsarianism.


17세기 화란의 개혁파 신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 표현에 속지 말것. 

전택설: “타락이 이루어 지기 전에 선택했다”라는 의미가 아님. 에베소서에서 창세전에 선택했다고 함. 


작정의 순서: 영원전에 하나님의 머리속에서 생각.

시나리오 1

1. 선택/유기

2. 창조 작정

3. 타락 허용 작정

4. 선택된 자를 구속하기로 작정

5. 적용 작정


시나리오 2

1. 창조 작정

2. 타락 허용 작정 (하나님이 인간을 타락하도록 작정하지 않으심)

3. 선택/유기 (이유없이 무조건 선택)

4. 구속

5. 성령 적용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순서이다.

굳이 따질 필요는 없지만 유익을 얻기 위해 따져본다.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말이 강조되어서 유리하다. 


Dort(recht)회의: 

알미니안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란 도르트레히트에서 열린 종교회의. 1619에 끝남. 알미니안주의는 정죄받음. 이것은 역사적인 선언이다. 당시에는 그렇게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알미니안주의는 역사적 이단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알미니안주의를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다. 

웨슬리(자신이 알미니안주의자라고 밝힘)는 자신에게 일어난 구원을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우리는 판단한다. 물론 그는 이단이 아니다.

구원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즉 구원을 잘 설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다. 

도르트회의는 후택설을 택하고 전택설을 정죄하지 않음. 소수의 사람들은 “시나리오 1”만 선택할 것만 주장. 정죄를 하지 말고 유익한 토론을 하기로 결정. 



III. 예정론의 5대교리(TULIP)


Dort회의 내용을 5가지 내용으로 요약한 것. 5가지의 첫 자를 따온 것. 화란은 튤립의 나라이다.

Total Deprevity                                    완전타락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Limited Atonement                        제한구속

Irresistable Grace                        저항할 수 없는 은혜

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견인


Total Deprevity: 완전타락. 인간에게 타락으로 물들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 Inability가 함의됨. 스스로 구원으로 결정할 수가 없다. 자유의지 부인. 이에 알미니안 주의는 인간은 복음적 순종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침. 즉 복음을 듣고 결단 할 수 있다고  부분타락.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하나님의 선택에는 조건이 없다. [무조건적인 선택을 조금 약하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안들이 있음] 알미니안 주의는 Conditional Election. 즉 하나님의 예지예정으로 구원 받을 자들만 선택하심. Saumur(소뮈르)는 가정적 보편구원설 주장. 그는 원래 칼빈주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생각하심. 그러나 실제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 구원.


Limited Atonement: 제한구속. 예수님은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서 돌아가심. 예수님의 피는 헛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함. 알미니안 주의는 보편구속. 십자가는 만민을 위한 것. 


Irresistable Grace: 저항할 수 없는 은혜. 하나님의 중생의 은혜는 우리가 저항할 수가 없다. 100%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 그러나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잘못된 확신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견인. 구원은 취소가 안 된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붙들고 계신다. 영원가운데서 나를 선택한 은혜. Our great salvation! 만약 우리가 다시 타락해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면 우리는 불안해진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너무도 작다. 


Once saved, eternally saved. 한번구원, 영원구원. 

[이 말은 튤립을 짤막하게 설명한 말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을 비난하는 말로도 사용됨. 실제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에 대해 칼빈주의자들은 구원 받은 자들은 반드시 성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성령께서 구원받은 자들의 양심을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의 삶을 동행하면서 그들을 거룩하게 만드시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는 예정이 반드시 열매로 나타난다. 또한 택함을 받은 자는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 사이에 지나친 다툼이 일어나거나 서로 정죄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구원을 설명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본회퍼의 값싼 은혜: 말씀을 실천하지 않고도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잃을 까봐 두려워 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항상 두려운 마음을 갖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알미니안 주의의 3가지 문제:

1.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인함

2.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들을 결과적으로 다 못 구원하심: 하나님의 무능.

3.하나님의 구원을 확실하게 붙잡지 못함.


튤립은 성경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사람은 100% 노력을 해야 함. 항상 회개를 해야 함. (simul iustus et peccator: 의인인 동시에 죄인. 루터의 말) 최선을 다해서 복음 전파. 인간에게 책임과 자유가 있지만 단지 구원은 하나님이 하신다. 

Monergism: 독력주의. 

Synergism: 신입협력주의 (알미니안 주의)


[알미니안 주의에 대한 송다니엘의 견해: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행위와 인간의 결단, 이 두가지가 전제된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즉 구원에 있어서 본인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은 성경적이다. 그러나 본인의 결단이 구원에 영향을 미친다던가 자신의 결단이 자유의지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없이는 자유롭지 못하다. 도르트 회의 이후에 알미니안 주의를 택한 사람중에서 인본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 후고 그로티우스가 대표적. 그는 성서비평에도 일조함. 그러나 알미니안 주의자들 중에는 실제로 거듭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자신이 거듭났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구원을 제대로 설명을 못하는 자들도 보아야 한다. 예정론 논의는 거듭난 자들이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좋지만, 단지 토론만을 위한 논의는 무익하다. ]



IV. 예정론의 역사적 배경

(송다니엘 추가)


*펠라기우스와 은혜17)

(어거스틴의 예정론, 속박의지론은 어떠한 환경에서 나왔는지를 살필 것) 

- 펠라기우스 주의: 인간의 완전타락 거부  복음의 핵심을 거부하는 이단.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펠라기우스와의 싸움에서 완성됨. 

- 예정론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을 받을 수가 있지만, 예정론 비판을 하기 전에 먼저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할 수 있어야 한다. 

- 그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을(?인간이 선행을 하는 데에 있어서, 혹은 자유롭게 되는 데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체계적으로, 큰 소리로 반발을 한 사람 중의 대표자. 


펠라기우스: 370 브리타니아 출생. 로마에서 법학공부. 출세하는 것을 포기하고 수도승이 되어 금욕생활을 함. 유능하고 박식한 인물. 많은 책을 저술함. 설교가로서 당시 로마의 도덕적 타락을 공격함. 또한 설교에 어거스틴의 은혜론을 공격함. 그의 은혜론은 당시의 교회로서는 새로운 가르침이었다. 어그스틴이 이교도의 운명주의를 가르친다고 비판. 

그는 로마인에게 산상수훈을 지향하는 진지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전파함. 그는 진지한 사람이었다. 신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죄 없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침  당시로서는 상당히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신자가 일생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을 위해 많은 신자들이 고행을 하였다. 부도덕하게 사는 신자들은 그들에게는 가증한 것이었다. 죄없이 사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펠라기우스의 주장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다. 인간은 선과 악을 택하고 실행할 능력이 있으며(죄를 짓지않고 선을 행할 능력), 자신의 타고난 능력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완수할 수 있다.

·이러한 타고난 선(Bonum naturae)을 그는 찬양하기까지 함. 이교도도 본성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최고의 덕을 발전시킬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으면 이는 인간이 성취할 능력이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앞에서 선행으로 공적18)을 쌓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죄는 인간 본성의 상태나 의지의 경향(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인간에게 범죄로 강요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원죄의 교리를 배격. 

·아담은 단지 인간에게 좋지 않은 모범이(나쁜 예) 되었다. 그의 죄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단지 악한 선례의 매력이 모든 개개인을 범죄케하는 기회가 된다. 

·아담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어차피 죽었을 것이다. (창2:17에서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고 하심. 즉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우리 죄를 용서하옵시고“라는 기도문을 거부함(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거부).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우리의 의지가 죄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지을 의무는 없다. 따라서 이러한 기도는 가장된 겸손이다. 

·세례를 통해 인간은 원 상태로 회복된다. 즉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 범죄하기 전의 아담이 된다.

·세례 교인은 죄 없는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또한 죄 없는 삶을 누릴 수가 있다.

·성령은 무흠한 삶을 위한 지도자이다. 

·은혜란 단지 인간이 더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할 때에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아담의 나쁜 예에 반하여 좋은 모범(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은 의미가 없다)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완벽한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가끔 흔들림. 즉 때로는 인간의 범죄의 필연성을 인정하기도 하고, 세례 시에는 아무런 공적없이 그리스도의 죄 사함으로 칭의가 이루어진다고 함. 


* 어거스틴의 주장

-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 논쟁 이전에 하나님께로 귀의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신앙을 갖는 데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함을 확신함: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변화시킬 수가 없고 순전하게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한다. (그의 삶의 경험이 그를 은혜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정욕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정욕으로부터 해방되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다)

- 그는 펠라기우스와의 싸움에서 원죄론과 은혜론을 발전시킴.

·인간에게는 낙원에서는 자유의지가 있었으나 타락 후에는 완전한 죄의 노예가 되었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다(5:1219)근거)

·사람이 구원의 음성을 듣고 화해의 말씀에 마음을 여는 것은 자기의 공로가 아니다죄인은 은혜를 받아들일  있는 능력이 없다

·이것은 순전히 선택의 은혜에 기인한다  거역할  없는 은혜. (그는 정원에 달려나가서  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그때 tolle, lege라는 소리를 들었다방에들어가 성경을 펼쳐서 눈에 들어온 구절이 롬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이 구절을 읽자마자 은혜가  마음속에 들어왔고 그때부터 정욕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인간의 의지도 하나님이 변화를 시켜주셔야 선행을  수가 있다.

·세례받은 사람도 자신의 노력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성도의 견인).

·예정론을 가르침: ?믿음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선물이다!“

·예정론은 비밀로서 토론으로 결말지을  없는 가르침이라고 말함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이며 마지막이라고 .

·그는 이중예정을 가르침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는 이미 예정되었다.

·이것을 칼빈이 수용함루터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가르치면서도  이상은 나가지 않았다(deus absconditus: 숨겨진 하나님하나님이 침묵하실  우리도 침묵해야 한다)


- 그의 은혜론은 인류의 문명을 뒤집어 놓았다. 당시의 지성인들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선하고 질서있는 분이 아니라 자의로 행하시는 분으로 여겨졌다. 인간이 태생부터 악해서 선한 행위를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선하시고 하나님만이 인간을 선하게 하실 수가 있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은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이것을 발견한 것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 


* 반펠라기우스 주의

- 남부갈리아 지방에서는 승려들이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반발함.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이 혼동을 일으킴. 그 해결책으로 파우스투스 감독이 반(Semi)펠라기우스 주의를 주장.

- 신인협력설: cooperatio hominis cum deo.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함. 

- 인간은 타락을 했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다. 자유의지는 소멸되지 않고 약화됨. 하나님이 약화된 인간의 의지를 도와준다. 은혜는 인간의 믿음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며 인간의 의지를 계발시켜준다  펠라기우스주의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논리의 합리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음. (그럴듯 하지만 완전타락설을 부인하면 결국 자력구원으로 이룬다: 조금 남은 의지를 살려서 구원에 이른다)

- 예정도 예지예정으로 바꿈. 하나님은 누가 구원을 받으실지를 알고 계시다. 

- 529 오렌지 공의회에서 세미 펠라기우스 주의가 정죄 됨. 어거스틴의 이중예정과 거절할 수 없는 은혜도 채택되지 않았지만 어거스틴의 기본노선을 따름. 

- 그러나 중세기에 세미 펠라기우스 주의가 부활함20).


- 어거스틴에 의해 칭의론이 서방신학의 중심이 됨.

·어거스틴의 공로는 은혜론을 확립한 것  종교개혁의 sola gratia.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서방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의 칭의론을 발굴함. 인본주의, 계몽주의, 현대신학은 칭의론에 문제 제기. 




C. 창조


* 서론적인 문제들


창조와 섭리는 영원 전에 하신 작정을 이루어 나가시는 방법.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은 많은 부분이 믿음으로 안다. 초등학교에서 배운 것은 일일이 검증해보지 않고도 믿음으로 안다. 불신자들은 검증을 요구.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검증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 검증이 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세상에는 믿음으로 아는 지식이 상당히 많다. 20세기 종교철학자들은 이것을 Basic Belief(근원적 신념)라고 한다. 하나님의 세상 창조의 믿음도 이와 같은 원리이다. 


현대인의 언어구사: 

안다 ? 정확히 아는 것.

믿는다 - 불확실한 지식. 확신이 조금 없는 것.

의견 ? 내 생각.


기독교: 믿는 것은 아는 것보다 훨씬 분명한 것(칼빈: 믿음은 "확실한 지식").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천지창조를 역사책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배웠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사실과 그 의미까지 성경에서 배웠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알아야 한다.

자유주의자: 사실은 안 받아 들이지만 의미는 받아들인다. 

사실을 믿지만 의미는 불신하는 사람들과, 의미는 믿지만,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사실과 의미를 동시에 받아들여야 한다. 


천지창조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

공자쪽; 이 세상의 일도 모르는데, 하늘의 일을 어찌 아리요.

철학/과학자; 빅뱅(큰 폭발)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창세기에 관한 생각

자유주의신학; 창조의 사실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장르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1-11장은 신화다.


1-11장을 보수적인 사람들 가운데서도 잘 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Albright(약간 자유) 역사 고고학자. 그는 아브라함 얘기부터는 사실로 받아들이지만 1-11은 믿지 않는다. 

화란 방문 시 바르트는 “뱀이 진짜로 말을 했습니까”라는 질문에 “당신은 매우 화란적인 질문을 한다”고 답변함. 독일에서는 믿는 사람들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1-11장과 12-50장이 떨어져서 생각될 일이 아님으로 historical narrative 역사적 서술로 보아야 한다.


1장 본문 해석에서 배제해야 할 부분:

1. gab theory(간격이론). 

1절과 2절 사이에 갭이 있다. 성경 어느 곳에도 천사가 타락한 시점이 없으므로 그 사이에 그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혼돈을 창조하실 리가 없다. 천사타락으로 창조가 황폐해짐. 그 후에 다시 창조하신 것이다. 중조설(restitution theory). 그러나 성경에 그러한 이야기가 없다.

2. 바빌론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

1860년대 이후로 바로 전에 발견된 앗수르 제국(장소: 니느웨)의 토판들을 해독하게 됨. 그 문서 가운데 Enuma Elish(마르둑의 대관식 노래라고 볼 수있음)가 있다. (예전에는 문서제목을 그 글의 첫 단어들로 정했다)

바벨론 사람들의 창조설화가 기록: 아직 하늘이 하늘로 불리우기도 전에, 땅도 그러하기 전에 신이 둘이 있었다. 아빠신은 단물신이고, 엄마는 짠물신이다. 티아맛(Tiamat)은 엄마신. 아빠신이 낮에는 빛(≠햇빛)이 비춰서 못자고, 밤에는 애들이 떠들어서 못자겠구나. 애들신들은 아빠가 자신들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 힘을 합하여 아빠를 죽였다. 엄마신이 나중에 Kingu를 총사령관으로 일해서 전쟁을 벌린다. 애들신의 총사령관은 마르둑. Marduk이 킹구를 죽임. 엄마신을 반으로 갈라 죽이고 윗물과 아랫물을 나누어 하늘에 빗장을 쳐서 윗물이 내려오지 않도록 함. 

4째토판: 마르둑이 태양창조. 태양이 있기 전에 빛이 있었다. [이것은 확인을 요함. 본인이 가지고 있는 버전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없음. 해석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음.]


ANET(모음집)에 신화들이 모아져 있음.

1860년 부터는 학자들이 이러한 관점으로 성경을 보았다. 차차로 창세기 1장은 바빌론 신화를 토대로 쓰여졌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 됨.


창 1:2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물)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깊음= 히브리어로 태홈. 이 말이 티아맛과 비슷함. “물과 물이 나뉘다”라는 것도 바빌론 신화와 유사함,


Jean Astruc:

루이 14세의 주치의. 당시는 일반대학을 졸업한 후에 신학, 의학, 법학을 공부함. 일반대학에서 헬라어, 히브리어등 기본적으로 신학을 공부함.

그는 하나님 명칭이 1장의 “엘로힘”과 2,3장의 “여호와”와 다른 점에 착안하여 창세기를 서로 다른 두 가지 문서로 나눔. 문서가설의 시초(Quellentheorie)


문서가설이 진전됨: J-E-D-P은 오늘날의 콘센스. 

하나님의 이름대로 분류.

창2(J문서): 사람을 고운 흙으로 만듬. 물이 없는 건조한 곳으로부터 영향. 기원전 850경에 남유다에서 발생.

창1(P문서): 물이 많은 곳으로부터 영향. 바빌론 신화의 영향.


성경을 믿는 사람들: 복음주의, 정통주의(루터파, 개혁파) '모세오경은 문서가설처럼 쓰여지지 않고, 모세가 썼다.'

Martin Noth 야곱의 열두지파가 아니라 12 동맹체가 있었다.

Von Rad 아브라함 얘기가 다는 아니지만 있을 수 있다. 전승사를 받아드림. 약간 보수적인 편. 

창세기는 사실이 아니라 의미만 던져준다.


Geschichte와 Historie의 구분. 

Historie: 역사가가 자신의 역사관을 가지고 사실을 서술한 역사.

Geschichte: 의미로서의 역사. 해석한 역사. 내 존재를 변화시켜주는 것.


바르트가 이것을 구분하여 사용.

Urgeschichte(원역사)는 발생한 역사가 아니다. 

Mythos 신화. 우리 존재의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 하나님의 이야기를 쓸때 하는 말. 이것은 의미를 주는 역사이다. 바르트는 미토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음. 사화라는 말을 사용함(Sagen, Saga). 미토스는 전혀 발생하지 않은 이야기. 사화는 실제로 발생한 어떤 일을 후세 사람들이 불려서 만든 이야기.

다른 사람은 의미를 찾지 않지만 그나마 바르트는 창조기사에서 의미를 찾아내고자 함. 


3. 창 1.1. 브레쉿(태초에)…. 이 문장의 해석 방법.

1) 연계형;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라고 해석하는 것. 그렇다면 세상 창조전에 공허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하나님은 이미 있는 것으로 만드셨다. 조성자 일뿐. 그렇다면 철학에서의 신 Demiurgos와 같다.

2) 절대격; 현재 대체로 번역되어 있는 것.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에는 난하주에 연계형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고 되어 있음.

유대인들은 절대격으로 읽음. 맛소라 사본에는 모음+엑센트(분리형 엑센트)로 되어 있다.

11, 12세기에 이븐 에즈라가 연계형으로도 불 수 있다고 주장함. 그 이후에 그렇게 읽는 사람들이 등장.



* 본론


1. 창조는 Creatio ex nihilo(무로부터의 창조).

외경에서 빌려온 용어. 이 말은 성경에 없으나 개념은 있다.

a) 하나님의 전능성;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b) 바르트 ' Nihilichkeit' 무성. Chaos가 아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도 있고, 무로부터 온 존재도 있다. 후자는 죽음으로 이끄는 성격이 있다.


2. Creatio per verbum Dei.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창조.

a) 하나님의 전능성 Omni-Potentia. 내 영혼이 죽어가다가도,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살아나야 한다. 주일날 설교 때 마다 말씀이 살아나야 한다. 

b) 성자를 통한 창조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골 1:15-19: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 모든 피조물 보다 먼저 나신다. 히 1:2: 아들로 말미암아 창조.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께서 히브리어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님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3. Trinitarian Art of creation 

시 104:29-30 온 세상이 겨울에 꽁꽁 얼어붙었는데, 주께서 영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사 새롭게 하시나이다. 성령님의 작용. 하나님의 창조는 삼위일체적 창조이다.


* ?창조하실 때에 혼돈하고 공허함“의 해석 문제.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이 전체에 대한 선언이면서, 동시에 뭔가를 창조하셔야 된다. 원물질 창조(뒤섞여 있음):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 원물질이 뒤섞여진 상태. 물과 비슷.

신 32: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운행)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운행: 메라헤페트. 

하나님 말씀은 창조의 객관적 원리. 성령은 주관적 원리. 


4. orderly creation 질서 있는 창조

첫째 날: 어두웠었는데, 빛을 만드니. 어둠-빛

둘째 날: 궁창(창공)창조. 윗물과 아랫물 구분. 

셋째 날: 물아 모여라. 뭍이 들어 남

넷째 날: 태양, 달, 별 창조. 낮과 밤을 주관하시게 함. (새 하늘 새 땅에서는 태양이 필요없다. 하나님이 빛이시다)

다섯째 날: 물고기, 공중 새.

여섯째 날: 동물. 인간


질서 있는 창조. 하나님이 먼저 form을 만드시고, 그 다음에 내용물을 만드심.

혼돈하고 공허함의 의미?


5. after each kind. 그 종류대로 지으심. 

말과 나귀가 교배하여 노새가 나온다. 같은 종 내에서는 교배를 통해 다른 생물이 나올 수가 있다. 

그런데 사람을 만들 때는 after God's image(인간은 전혀 다르다)

1859 다아윈의 종의 기원.


6. very good 선한 피조계.

딤전 4:1-5. 참 믿음에서 떠나서 미혹케 하는 영. 귀신의 가르침. 금욕주의를 영적인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것. 우리의 삶 전체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로 인해 선한 것이다. 혼인도 선한 것이다. 인간이 피조계를 잘 다스려야 한다. 


창조 함의; 창조를 진짜 믿는다면

1) eco friendly: God is green.  

이 세상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잘 보살펴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계. 돌보시는 건 예수님. 몰트만 God in Creation

2) 우리 삶 영역 전체에 대해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의식. 영과 몸이 하나님의 피조물.

잘못된 형태의 영육이원론을 막는다. 식사, 성관계, 직장일과 기도, 예배 등을 영적이고 육적인 것으로 구분하면 안 된다. 어떠한 태도로 하는가에 따라서 영,육으로 가려짐.

영지주의들이 영육이원론을 주장. 영혼만 구원받는다고 주장. 

3) 삶 속에서 살아있는 말씀의 능력을 드러내야 한다. Creativity 창조성, 창조의 능력을 우리의 삶 속에서 잘 드러내야 한다. 주어진 은사에 따라서 살 것.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사에 따라서 삶을 살아야 한다.


창1:1: 천지창조. 하늘과 땅, 그 안에 있는 것을 모두 창조. 영의 세계도 포함함. 이 말씀은 대 전제이면서도 원물질도 창조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영적 세계의 창조”는 시간 관계상 다음 학기로 미룬다.



D. 섭리

요 10:25-30.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따른다.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 성도의 견인. 아무도 예수님의 양을 예수님의 손안에서 빼앗을 수 없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셨다(창세 전에) ? 내 백성.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자유주의; 뜻이 하나다)

아버지와 아들이 처음부터 하나시며 사역을 함께 하신다. 

섭리. Providentia: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을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섭리하심. 

아일랜드 비숍 Usher: "하나님께서 BC 4004에 세상을 창조하셨다"

왜 4004년? 족보의 모든 연대를 더함. 그러나 족보는 쉽사리 계산되지 않는다. 창조의 시기를 알 수가 없다.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다. 


칼빈주의의 유명한 원칙: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멈추는 데서 멈춘다.

인간의 궁금증. 상상의 나래가 성경 밖으로 인간을 데려간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


섭리란? 창조하신 것을 목표지로 향하여 끝까지 이끌어 가시는 것 


1) Preservation

conservatio 보존. 하나님이 보존하셔야 한다.

이신론자. Deist: 하나님이 창조한 후 내버려 둔다. 하나님의 개입이 없음. 섭리 부인. 창조는 믿음. 세상은 시계와 같이 정교하다. Intelligent Designer. 그들의 하나님은 blind watch maker와 같다(비판해서 하는 말). 


그러나 하나님은 매순간 창조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신다. 세상을 만들어 놓으시고 지속해서 보살피심. 이 세상을 놓아 두신다면 이 세상은 곧 파괴된다.

뉴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계에서 자연의 법칙을 찾아냄. 기독교적 과학 발전. 


2) Government 

Gubernatio. 정해진 목표를 따라 이끌어 가심.

Telos를 향해. 이 세상의 역사는 유목적적이다.

히 1:2-3  

요 1:4-5: Logos의 작용이 영원 전부터 계속된다. 


'예수를 믿었지만, 역사를 보니 무의미하다.' - 신앙이 없는 사람.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 나가시기 때문에 세상은 의미가 있다.

니체, 까뮈: "실존은 무의미하다" "그러니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인간에 대해 절망을 덜했다

시지푸스 신화: 삶을 표현. 

삶에 대해 비관적이면서 동시에 낙관적.

신자: "하나님 없이 무의미". 이 사람들보다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훨씬 더 잘 알지만, 

이 세상을 다른 측면으로 보면 이 세상은 굉장히 의미가 있다.


개인이나 역사는 나선형을 그리며 하나님의 목표, 역사의 목적지를 향해 간다.


Cooperatio: 하나님께서 이 역사에 협력으로서 개입하심.

비상 섭리, 이적: 제 2의 원인(causa secunda) 이 없이 직접 관여하실 때. 일반적으로는 제2원인과 협력하여 사역하신다. 

Adolf von Harnack: 이적은 없다 쉴라터에게 "당신과 나 사이의 문제는 오직 이적에 관한 견해 차이다"

Adolf Schlatter 중도 보수주의자. 이적을 믿는다 "이적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이다.". 상호간에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다른 것“이 문제라는 것을 지적함. [이 두 사람은 베를린 대학 교수였음. 하르낙은 황제로부터 귀족의 칭호를 받았으며, 정치에도 간접적으로 참여함. 당시에 그는 최고의 석학이였으며 쉴라터의 학문을 높이 평가함]


비상섭리를 잘못 이해한 경우; 이적은 매일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이적의 일반화 금지.

이적과 이적이 아닌 것을 구분해야 한다.


하나님이 동정녀 마리아를 제 2의 원인으로 사용하여 이적을 행하심. 

인간이 태어날 때는 제 2의 원인인 부모님을 통해서.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이적이 아니다.


주의: 신앙이 좋은 자들은 이적을 많이 경험해야 한다? 오히려 반대이다. 신앙이 좋으면 이적이 없어도 된다. 이적은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manipulation 하려 한다. 우리가 주문하는 대로: 자동판매기.

대표적 이적:

1.예수님 탄생: 초자연적으로 아기가 생겼으나, 열 달 동안 사람들처럼 자연적으로 자라다가 탄생하였다. 시작은 초자연, 그 다음은 자연적.

2.출 14:15 홍해사건. 이적은 제 2의 원리(동풍이 밤새도록)를 사용.


섭리를 믿는 자의 자세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창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형들은 죄를 지었지만, 이것 조차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있다. 하나님이 허용하심.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요셉의 가족의 생명이 구원된다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구속사를 이루기 위해서 이적이 행해진 사건.


요셉의 가족사나 이스라엘의 민족사가 아니라, 구속사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

우리의 삶도 구속사의 일부분이다. 우리도 구속사적인 인물이다.

하나님의 구속사가 아직도 진행중이다.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본다.

일차적: 구속사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이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구속사적으로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되어지는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전에 받았던 계시의 말씀에 근거해서 산다. 


창50:24ff: 요셉은 계시를 근거로 해서 앞날을 알았다(우리의 계시는 성경이다). 애굽에서 400년 고생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갈 것을 알았음. 자신의 해골을 갖고 갈 것을 부탁함. 26절: 미이라로 만듦. 

50:2: 야곱도 미라로 만들었다. 미이라로 만드는 데 40일이 걸림. 


섭리로 사는 사람들의 태도:

1. 감사.

2. 용서: 보복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죽게 되어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심. 

50:15. 형들은 요셉의 진정한 동기를 못 믿음. 아버지가 살아 계시니 그렇다. 또 하나의 잔 머리를 만듬. 그러나 요셉은 진짜로 용서하는 사람이었다.

순교자: 죽을 때까지 억울함. 그들의 삶에 하나님이 역사를 안 하신 것 같지만 역사에서는 선으로 바꾸심.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를 하실런지 모르므로 따져볼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대속: 용서. 스테반도 예수님과 같은 말을 하고 죽음. 그들의 용서를 빔. 

하나님께서 개인을 통해 역사 전체를 섭리하심.

3. 인내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 ?참고 선을 행하라!“


우리의 삶은 이 세가지로 구성됨. 섭리를 믿는 사람은 ?감사, 용서, 인내“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산다.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와의 경우에서: 말씀대로 하면 어려워 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춘다. 요셉은 말씀 순종하다가 감옥에 가게 됨. 그 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열심히 살았다. [말씀대로 살면 잘 풀리는 경우보다 안 풀리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이다. ]


히 11:39: 우리가 마지막 주자이다. 우리가 제대로 살아야 그들의 사역이 완성된다. 

히 12:1-2: 이것을 의식하면서 죄를 벗어 버리고 죽을 때까지…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님은 믿음의 주시며, 시작하신 분이며 완성하실 분이다. 

고난의 복음: the gospel of suffering. 그 앞의 즐거움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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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영감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기록되고 바로 해석된 말씀.

딤전4:13: 성경(구약)을 낭독하고 전하고 가르치라.

딤후3:15 성경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책.

딤후3:16 하나님의 감동을 받음(pneumatos). 영감(Inspiration). 글이 영감됨.


- 성경에서 Pneumatos라는 말은 단 2번 사용됨:

1.아담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

2.성경 저자들을 감동시킴. 독특한 감동.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 성경을 읽으면 온전해져야 한다. 성화가 되어야 한다. 성경의 영감을 받아들이면서 성화가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벧후1,20f: 성경기자들이 영감되었다는 의미.

벧후1:20  먼저 알 것은 경(성경=구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 딤후에서는 성경자체가 영감이 되엇다고 하고 벧후에서는 기자가 영감되었다고 한다.


* 어떤 식으로 영감을 받아 성경을 저술했는가?


1. 잘못된 견해

1) dictation theory: 구술설. 사람의 각 특성이 나타날 수 없다.

- 눅 1:2-4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구원의 확신을 위해

-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사람들을 찾아가 인터뷰함. 누가는 예수님의 친 제자가 아니였으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누가의 모든 기능이 작용하게 하시고, 공부한 모든 것이 작용하게 하셨다. 행, 눅은 누가(직업; 의사)가 썼으나 의사다운 말로써 썼고 인간적인 오류가 스며들지 않도록 성령님이 작용하셨다  Organic inspiration 


2) dynamic inspiration 역동적 영감: 하나님이 기본적 영감을 주시면, 인간이 스스로 알아서 쓰는데 이때 오류가 있을 수 있다.


2. 개혁신학의 견해

- 유기적 영감 organic inspiration: 그 사람의 특성이 다 나타나되, 인간적 실수가 없게 하신다.


3. 영감의 정도 

1) 사상 영감; 하나님이 기본 아이디어는 주심.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쓴다. 낭만주의적 견해.

2) 부분 영감; partial inspiration. 교리서인 로마서는 완전 영감이고 복음서와 같은 것은 역사적인 부분에서 오류가 있을 수가 있다.

3) 축자 영감; 글자 하나 하나까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셨다.

이 것은 원본에만 해당한다. 우리는 원본이 없다. 양피지로 썼으니, 소멸되었다.

추측: 모세가 광야에서 놋 뱀을 들고 나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후세에 음란하게 사용.

원본이 남아있었으면, 우상숭배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사본학: 여러 사본들을 놓고서 가장 가까운 원본을 찾아내는 것. F.F. Bruce “신약성경은 믿을 만 한가?”

사본비평: 16세기 종교개혁 이후로 개혁자들이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우게 되어 사본비평을 하게 됨. 이전에는 Latin Bulgate를 사용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다. Lower criticism이라고도 함. 원본 찾는 작업. Erasmus와 Luther(독일어성경)가 공헌를 함.

사본과 원본 사이에는 사소한 차이점들이 있다.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인쇄술이 나오기 전에는 손으로 일일이 써서 사본이 수천개가 있다.

공인기관(구약시대의 서기관)에서만 사본 출판이 가능. 사본을 쓸 때에는 영감이 없었다. 이때는 섭리적인 보호를 하셨다. 기도하고 목욕재개 후 경건한 마음으로 씀. 쓰고 난후 검토, 비교. 그럼에도 사소한 차이점이 있다. 예) 철자가 비슷하게 생긴 단어들.


* 신학성경의 영감:


벧후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 15절에서 보면 베드로는 사도바울의 편지를 알고 있음. 그는 바울의 성경을 읽으면서 “다른 성경과 같이”라는 표현을 사용함. 바울 서신을 성경으로 인정. 교회가 인정하기 전에 성경이다. 그 자체가 자증성을 갖고 있다.

-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으므로,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들이 성경으로 인정했다. 가톨릭에서는 교회가 성경을 결정했다고 함. 그러나 성경이 교회를 만들었다. 즉 성경이 교회보다 앞선다.

- 구약 성경은 에스라시대에 확정. 이미 에스라시대부터 성경으로 받아들여졌다

- 무라토리안 정경에는 신약 27권의 리스트가 들어있다.


- Harris의 '성경의 영감과 정경'은 이 분야에서 제일 좋은 책이다. 

- 정경 대부분은 늘 교회에서 받아들이던 것임. 몇 개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 후대에 결정됨.

- 신학을 하지 않으면, 설교를 하나님 앞에서 책임질 수가 없다.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기 위해서 신학을 배운다.

- 조명(Illumination): 하나님이 우리를 밝혀주셔서, 성령님의 의도를 말씀해주신다. 조명을 위한 기도가 절실히 필요. 성경 봉독 전에 '하나님이 말씀을 보도록 마음을 밝혀주십시오' 


* 고등비평


- higher criticism. 성경비판. 자유주의. 

- 그들의 주장: 성경에 오류가 있다. 그럼에도 성경 안에는 하나님 말씀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을 포함한다.

- Adolf von Harnack: “기독교의 본질“을 읽어볼 것. 예수는 삼위일체를 안 믿었다. 사람들이 순수한 예수님 말씀에 희랍철학의 옷을 입혔다. 순수한 말씀을 헬라화 한 것. 

- Karl Barth: Harnack의 제자. 후에 그를 비판함.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인간의 말이지만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한다" Das Wort wird Gottes Wort. 성령님이 역사해서 나를 감동시키면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계시 사건은 순간적인 것이므로, 말씀을 붙잡으면 안 된다. 신 정통주의; 성경비판 용인.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한다. 

- Tota scriptura: 전체 성경으로. 한 말씀에만 은혜를 받으면 안 된다. 상호순환 ? 선순환.

-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 성경은 최종적 권위이다.

- 예수 세미나의 문제.


- 성경의 독특성: 각 성경마다 차이점을 발견한다. 차이가 있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것을 신학적 작업을 통해 하모니시켜야 한다. 


- 이런 신학자들의 말을 따른다면, 본인이 성경을 연구하지 않고, 오직 학자의 말에만 의존하게 된다. 학자의 종이 된다.

- 복음주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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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끝


1) 예를 들어 우리가 사과를 보면 조명에 따라 모양이 배, 공으로 보이고 색갈도 달리 보인다. 사과의 본래의 모습(Ding an sich은 결코 볼 수가 없다.
2)
 
지배자들이 볼때 별 쓸모없는 사람들
3)
 
벌콥 251,252.
4)
 
벌콥 252쪽
5)
 
벌콥 253쪽
6)
 
벌콥 254쪽
7)
 
벌콥 254쪽
8)
 
벌콥 264쪽
9)
 벌콥 265쪽
10)
 
벌콥 265쪽
11)
 
벌콥 266쪽
12)
 
벌콥 268쪽
13)
 
이러한 깨달음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시작이 되었다. 
14)
 
엡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5)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16)
 
율법의 제3용법. Tertius legis usus
17)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은 매우 중요한 테마이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와 속박의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어거스틴의 승리로 끝났지만 오늘날까지 교회에서 완전히 해결된 문제가 아니다. 종교개혁때에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논쟁으로 다시 불이 붙음. 17세기에 아르미니우스의 논쟁으로 이어져 오늘날 교회는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 영대진영으로 갈림.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극단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알미니안주의와는 차이가 나지만, 알미니안주의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르친다. 
18)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인정되면 공적사상이 나온다.
19)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20)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을 세미 펠라기우스주의라고 비판함. 신교에서는 Charles Finney(1792-1875와 같은 부흥설교자들에 의해 세미 펠라기우스주의가 도입됨. 

출처 : 예장 서울노회
글쓴이 : 최정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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