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獄第一劍(지옥제일검) 제2권 - 서효원
- 차례 -
제1장 잃어버린 과거의 열쇠
제2장 무저갱(無底坑)의 기우(奇遇)
제3장 천하제일의 마공(魔功)을 얻다
제4장 늙은 영웅(英雄)의 참회(懺悔)
제5장 검노인(劍老人)의 정체
제6장 지옥제일검(地獄第一劍)의 재출현
제7장 독계(毒計) 심계(心計)
제8장 지옥궁(地獄宮)의 대혈전(大血戰)
제9장 천하제일의 재녀(才女)
제10장 몸을 바친 검선자(劍仙子)
제1장 잃어버린 과거의 열쇠
완산에서 이어진 산이 하나 있다.
곽산(?山)이라 불리고 있는 기봉준령(奇峰峻嶺)으로 검은 안개가 산봉우리를 항상 휘감고 있어 한여름 대낮이라 해도 그 산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날이 저물면 산의 모습이 더 신비로워졌다.
산은 항상 제 모습을 감추었기에 사람들은 언제나 으스스하고 귀기스러운 대상으로만 생각하게 되었다.
그 안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다시 산 아래에 발을 딛지 못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휘― 이이잉―!
밤바람이 차게 일어났다.
여름의 끝이라 나무는 무성의 극을 달렸고, 이름 모를 잡초와 넝쿨이 곽산의 후미진 계곡 안을 살풍경한 지옥같이 만들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넝쿨이 움직여 귀신이 살아나 꿈틀꿈틀 거리는 것 같이 보였다.
달이 떠있으나 곽산의 골짜기에는 달빛이 비치지 않았다. 검은 구름은 아주 짙게 깔려 있어 달빛이 계곡 바닥을 비추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서였다.
밤이 깊어지면서 초추(初秋)를 연상케 하는 싸늘한 바람이 일어났다.
"으음……!"
어디선가 나직한 신음성이 들려왔다. 우거진 넝쿨 안에 드러누워 있는 사람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신음소리였다.
"아……, 내가 왜 그런 짓을……?"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청년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 뛰어나 보이는 용모인데 얼굴이 고뇌에 가득 차 있었다.
"지옥제일검의 눈빛이 나를 미치게 했다. 내가 왜 그가 시키는 것에 따라 행동해야만 했을까? 그 무슨 신비한 힘이 나를 지배했던 것일까?"
누워 있는 청년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수십 군데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 했다. 가장 위험한 부상은 등판을 관통하고 배까지 튀어나온 백색보검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몸에 칼을 꽂고 있으면서도 빼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참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지만 청년으로서는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검은 지금 뽑아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 뱃속의 상처가 조금 아문 후 뽑아내야 상처가 크게 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모르나 그는 은연중 자신이 한 사흘은 요양을 해야 회복되리라 생각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아주 착잡한 표정이 되어 이마에 주름을 펴지 못했다.
"낙헌지……, 그 이름이 나의 이름인가? 아……, 머릿속에 맴돌면서도 확실히 떠오르지 않는 또 어떤 이름이 있는 듯한데……!"
심한 부상 속에 누워 있는 청년은 다름아닌 낙헌지였다.
그는 백의검제가 딸을 구하기 위해 시전한 어검술에 적중돼 다 죽게 되어 여기까지 달려와 정신을 잃었다.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즉사할 일이었지만 그는 금강불괴의 몸이라 여태껏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칠 일 전의 일이었다.
낙헌지는 칠 일 내내 잠들었다가 일 각 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마룡단을 먹은 사람이라면 정확히 한 시진이 될 때 기력이 탈진되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낙헌지는 극한 허탈감을 느낄 뿐 죽지는 않았다.
"너무도 무기력하군. 이런 허탈감은 사흘 후 사라진다. 사흘 후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있다. 그때까지 이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을 짓자."
낙헌지는 지금 남천관의 바보 하인이 아니었다.
그의 두뇌는 인간이 이를 수 있는 가장 어려운 단계라 할 수 있는 오묘지경에 빠져 있고,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식이 한 자 한 자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낙헌지는 바보로 지냈던 사 년 간의 일도 확실히 기억해 냈다. 그리고 간혹 왜 그런 바보짓을 했는지 웃음을 흘렸다.
"푸후……, 그랬단 말인가?"
그는 웃다가 인상을 찡그렸고 그러다가 다시 무표정하게 되었다.
"나는 머리를 크게 다쳐 기억을 잃은 상태이다. 다행히도 지옥제사검 독목수라가 나를 가격하는 바람에 뇌호혈이 타통돼 회복하게 되었다. 아직 기억을 되찾지는 못했으나 나는 이제 바보가 아니다."
낙헌지는 독목수라에게 죽은 낙검엽 노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낙 노인이 은인인 것은 분명했지만 혈육은 아니었다.
'내게는 분명 다른 신분이 있다!'
낙헌지는 그것을 알아내려 했으나 아무리 궁리해 봐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영원히 기억해낼 수 없는 것을 애써 기억하려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낙헌지는 집착을 훌훌 털어냈다.
"기억을 되찾을 운명이라면 언제고 기억을 찾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과는 관계없이 지옥궁 무리에 대한 복수를 필히 이루리라!"
낙헌지는 과거와 같이 순박하고 우직스럽지 않았다.
강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성격은 아주 치밀했고, 뜻을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할 줄 아는 대담성을 보였다.
"몸이 회복된다면 철저히 복수해 주리라!"
그는 마음 깊이 다짐하며 일부러 잠을 청했다.
사흘은 아주 빨리 지나갔다.
낙헌지는 백의검제가 이백 장 밖에서 던진 백색보검을 몸에서 뽑아들고 겉옷으로 둘둘 말아 허리띠 사이에 찔러 넣었다.
"누군지 모르나 실로 강한 사람이었다. 금의검선자를 도왔으니 아마도 협객일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되더라도 원망은 하지 않겠다."
낙헌지는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골짜기가 여명에 훤히 비치고 있는데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아니었다.
"물 맑고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가서 푹 쉬자. 그래야 원기를 찾을 수 있으리라."
낙헌지는 중얼거리다가 품안에 딱딱한 물건이 들어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군.'
낙헌지는 그제야 남천관 안에서의 모든 기억을 선명히 되찾을 수 있었다.
그가 지닌 것을 모두 꺼내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옥령이라는 영패 하나, 지옥제일검의 흑색복면, 그리고 남천신군이 준 금갑이 있었다.
"이것은 그 분의 선물이다."
낙헌지는 남천신군의 최후 모습을 기억하고 눈시울을 붉히다가 금갑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있었다.
첫 번째 것은 뇌공부(雷公符)였다.
그것은 도가(道家)의 모든 고수들이 우러러보는 도가제일인(道家第一人)의 지위를 상징하는 신물이었다.
남천신군은 무공보다는 해박한 학문과 심오한 지혜, 그리고 도량으로 정사오기의 일 인이 된 사람이었다.
뇌공부는 도문고수들이 그를 존경해 상정한 신표로 도가 어디를 가도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도가지보(道家之寶)였다.
둘째는 뇌공비급(雷公秘 )이라는 양피지 책자였다.
세 번째 물건은 옥병이었다. 옥병은 자색을 띠고 있으며, 아주 정교하게 조각된 명품이었다.
"무엇이 들었을까?"
낙헌지는 호기심에 얼른 자기병 마개를 열었다. 병마개가 빠져나오는 찰나 폐부를 시원하게 하는 향내가 물씬 풍겼다.
"오……, 이건……?"
낙헌지는 냄새를 맡는 순간 그것이 두 가지 전설적인 영약을 섞어 만든 당대의 보물임을 알 수 있었다.
"공청석유(孔淸石油)와 만년옥지액(萬年玉芝液)을 반반 섞은 것이군. 이것을 마신다면 내외상을 씻은 듯이 낫게 할 수 있다."
낙헌지는 누구에게도 글을 배운 일이 없었는데 아는 것이 아주 많았다.
냄새만으로 영약을 알아낸다는 것은 의학의 전문가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너무도 정확히 파악할 정도였다.
그는 자기병 안에 든 영약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과연 천고의 영약답게 내외상이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낙헌지는 맑은 정신으로 뇌공비급을 펼쳤다.
뇌공비급은 뇌공문의 진산무공이 되는 것으로 천 년 전 무림이인 뇌공자(雷公子)가 창안한 것이었다.
뇌공자는 살아 생전 합당한 전인을 두지 못했기에 자신의 절기를 비급 한 권으로 엮어 언제고 인연이 있는 사람을 위해 고동(古洞)안에 감춰 두었다.
남천신군은 육십 년 전 뇌공비급을 얻는 행운아가 되어 결국 정사오기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뇌공비급 안에는 세 가지 무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뇌정신공(雷霆神功)!
뇌정신공은 도가현문강기(道家玄門 氣) 중 가장 뛰어난 세 가지 수법 가운데 하나였다. 그 하나는 자전신공(紫電神功)이고 나머지 하나는 태청신공(太淸神功)이었다.
오묘하기는 자전신공과 태청강기가 뛰어났지만 순수하게 위력만을 따진다면 뇌정신공은 도가 삼대신공 중 최강이었다.
뇌정파천지력(雷霆破天指力)!
그것은 뇌정신공을 지력으로 펼쳐내는 것으로 동금지(洞金指)나 벽철지력(劈鐵指力)보다 더한 위력이었다. 지력을 발출할 때 우레소리가 난다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
뇌음칠검(雷音七劍)!
뇌정신공을 십 성 익힌 후 뇌음칠검의 검결대로 검을 시전하면 십 장 안이 뇌성으로 진동하게 된다. 그리고 검기가 천여 가닥 일어나 십 장 안의 사람들을 살상하는 도가 최고의 검식이었다.
낙헌지는 구결을 읽으며 간간이 무릎을 쳤다.
"호오, 정말 신묘하군."
낙헌지는 무공초식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뇌공비급을 보며 줄줄 이해할 수 있었다. 때로는 뇌공자가 다 적지 못한 것까지 대번에 깨닫기까지 했다.
낙헌지는 뇌공비급을 한 시진 가량 읽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흘이면 이 세 가지 무공을 완벽히 익힐 수 있다. 이 정도라면 지옥제일검이란 놈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낙헌지는 복수하리라 맹세하며 비급을 쥐고 무작정 걸었다.
우선 허기와 갈증을 메우고 싶었다. 불사신의 몸뚱이를 가진 낙헌지였지만 인간인 이상 먹어야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얼마를 걸었을까?
낙헌지는 한참 동안 걷다가 안개가 자욱히 피어오르고 있는 협곡(狹谷)앞에 이르게 되었다.
"신기한 곳이군."
낙헌지는 안에 무엇인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안으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짙은 안개가 시야를 방해했지만 낙헌지의 안력에 장애가 되지는 못했다. 낙헌지는 지배(紙背)를 꿰뚫을 정도의 안력을 웃도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협곡의 길이는 백 장 정도였다.
협곡을 벗어남과 동시에 안개가 사라지고 세외선경(世外仙景)이 눈에 들어왔다. 전인미답의 처녀지인 듯 어느 한 군데 훼손된 곳이 없었다.
푸른 풀밭과 과일나무가 즐비했고 한가로이 노니는 꿩과 노루가 간혹 눈에 띄었다.
잔디 사이를 흐르는 맑은 물은 너른 골짜기의 사방에 마치 병풍같이 둘러져 있는 절벽의 거대한 샘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물줄기였다.
"아……, 정말 멋진 곳이군."
낙헌지는 신선한 꽃 냄새와 풀 냄새에 취해 있다가 일단 갈증을 메울 생각을 하고 샘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샘은 깊이를 알아볼 수 없이 짙푸르고 아주 맑았다. 물 속에서 유영하는 청수어(淸水魚)들은 난데없는 침입자에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하……, 진정 선경이로다."
낙헌지는 샘에 머리를 처박고 십여 모금을 잇따라 들이켰다. 이빨이 시리도록 차가운 물을 뱃속에 가득 담자 허기와 갈증이 한꺼번에 가시고 맑은 기분이 들었다.
"후아……,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낙헌지는 샘 가에 털썩 걸터앉아 흰 구름이 둥둥 떠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무엇을 위해 살아 왔는지 이후 무엇을 해야 할지가 혼동되어 느껴졌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있었다.
문득 그는 샘물 바로 위쪽 벼랑에 나 있는 작은 구멍을 보게 되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구멍이었다.
낙헌지의 예리한 안력이 아니라면 발견할 수 없을 정도였다.
"뱀이나 새가 드나드는 구멍인가?"
낙헌지는 잠깐 호기심을 느꼈으나 곧 털어버렸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남천관의 원수 지옥제일검을 죽일 정도의 무공을 수련하는 일이었다.
"과일로 배를 채우고 뇌공비급을 시작하자."
낙헌지는 잡념을 훌훌 털어 버리고 나무숲을 향해 뛰어갔다.
그는 제철을 만나 탐스럽게 익어 있는 복숭아 열다섯 개를 한아름 따 들고 으적으적 소리를 내며 씹어먹었다.
"햐아, 저절로 녹는구나."
낙헌지가 복숭아 맛에 감탄해 외칠 때였다.
"이 노옴……, 웬 놈이 어르신네들의 잠을 깨우는 게냐?"
머리 쪽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구멍에 와서 제멋대로 까부는 놈은 대체 누구냐? 우리들이 갇혀 있는 몸이라 나가 죽이지 못한다고 제멋대로 구는 것이냐?"
살기 짙은 목소리였다. 그것은 낙헌지가 잠깐 의아하게 생각했던 절벽 위 작은 구멍 안에서 흘러나왔다.
'저 안에 사람이 있단 말인가?'
낙헌지가 복숭아 먹기를 중단하며 잠시 숨을 멈추었다.
"으잉……? 사람이 없는 모양이군. 내가 잘못 들었을까? 젠장, 잠이나 더 자야겠군."
예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다시 낙헌지의 고막을 근질거렸다.
낙헌지는 놀라움에 젖어 외쳤다.
"저 안에 사람이 있단 말인가?"
반응은 즉각적으로 왔다.
"아니?"
"뭐… 뭐야, 사람이 왔단 말인가?"
구멍 안에서 서너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같이 흥분된 목소리였다.
그 중 가장 강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가 있었다.
"누… 누구냐? 어서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곳으로 와 보거라!"
골짜기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음성에는 한(恨)과 마성(魔性)이 깃들여져 있었다.
"하하……, 그 높은 데를 어찌 간단 말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무… 무인이 아니란 말이냐?"
창노한 목소리는 바로 곁에서 말하는 듯 아주 잘 들려왔다.
"무림인이 아니오. 하지만 곧 무림고수가 될 것이오. 뇌공비급을 익히고 나면 절세고수가 되지 않겠소?"
"뇌공비급이라고? 그럼 남천관을 세운 남천 꼬마도사 놈하고 어떤 사이냐?"
낙헌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꼬마도사라니? 지금 남천신군을 말하는 것이오?"
"흐흐……, 하긴 지금이라면 그 놈도 백발이 성성했겠군. 하지만 노부가 한참 이름을 날릴 때에 그 놈은 아주 어린 나이였다."
"당신은 뉘시오?"
"크흐흐……, 이 놈아, 노부가 먼저 물을 말이다."
아주 악랄한 가운데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낙헌지(落軒志)라는 사람이오."
낙헌지는 순순히 자신의 성명을 밝혔다.
"흐음……, 목소리로 보아 어린 나이인 듯하구나."
"그렇소. 아직 혼례도 하지 않았소."
"흠……, 남천신군의 전인이냐?"
낙헌지는 갇혀 있는 자들의 신분이 사뭇 궁금했다.
"글쎄…… 전인이라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소."
"웬 개소리냐?"
"하하……, 그 분이 나를 잘 봐 비급을 전했으니 그 분의 전인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배사지례(拜師之禮)를 하지 않았으니 전인이 아닐 수도 있소."
"카하하……, 그깟 뇌공비급 정도는 거저 준다 해도 익히지 않는 것이 낫다."
괴노인이 빈정되자 낙헌지가 인상을 찡그렸다.
"노인장이 어떤 수법을 갖고 있기에 뇌공비급을 그리 하찮게 보는 것이오?"
"크흐흐……, 노부의 무공은 네가 상상할 수 없이 고강하다. 뇌공비급을 삼 년 익히기보다 노부에게서 단 한 번 가르침을 받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아주 사악한 기운을 띠고 있는 목소리였다.
'심성이 바른 사람은 아니다. 목소리에 마의 기운이 서려 있다. 지옥제일검과 마찬가지로 악의 무리다.'
낙헌지는 반감을 갖게 되어 싸늘히 외쳤다.
"흥, 노인이 제 아무리 강하다 해도 심보가 바르지 않은 이상 소용이 없소. 그렇게 강한 사람이 왜 갇혀 있소?"
"뭐… 뭐라고? 네… 네놈이 노부를 비웃는단 말이냐?"
"하하……, 바른 대로 말하는 것뿐이오."
괴노인은 음성에 짙은 살기가 배어 나왔다.
"고얀 놈! 노부와 의형제들이 갇혀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제멋대로 까부는구나. 그러나 네놈을 죽일 수 있을 정도는 된다."
"나올 수 없는 데 나를 죽일 수 있단 말이오?"
낙헌지는 움찔하여 한 걸음 물러섰다.
괴노인은 다소 음울한 음성을 전하였다.
"흐흐……, 회선마강(廻旋魔 )이라는 절기를 쓰며 네놈을 쓰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네놈을 죽일 마음은 없다. 사실 오래 전이었다면 네놈은 이미 노부의 회선마강 아래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살기가 많이 없어졌지."
"갇혀 산 탓이오?"
"갇혀 살아온 탓도 있고…… 복수할 길이 영원히 사라져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낙헌지는 대화를 나누면서 그에 대한 막연한 반감을 누그러뜨렸다.
"복수할 길이 사라지다니?"
"노부 손으로 죽여야 할 자가 천수를 다하고 죽어 버렸다. 그래서 낙담해 있는 중이다."
"원수가 누구요?"
괴노인은 나름대로 호의를 보였다.
"흐흐……,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안으로 들어와라. 노부가 모든 이야기를 해주겠다. 다행히 네놈의 근골이 쓸 만 할 경우 흔쾌히 무공을 전수해 주겠다. 뇌공비급 따위에 시간을 허비할 것 없다."
낙헌지는 낭랑히 웃으면 그의 말을 받았다.
"하하……,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있으나 뇌공비급을 먼저 익혀야겠소. 뇌공비급을 익힌 후 그 안으로 들어가 보겠소."
"으윽, 고얀 놈! 회성마강 아래 죽고 싶으냐?"
벼락같은 소리와 함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르르르― 릉―!
구멍 안에서 우레소리가 나며 핏빛 기류가 흘러나와 낙헌지 쪽으로 날아들었다.
"어엇―?"
낙헌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핏빛 기류는 무려 오십 장을 날아 그의 발앞 땅바닥을 호되게 후려쳤다.
꽝―!
지축이 흔들리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으음……, 무시무시하군."
낙헌지는 그들의 능력을 새삼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보았느냐? 그것이 회선마강이다. 너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네놈의 기백이 제법 쓸만하다 여겨 제자로 키우고픈 마음이 들어서였다. 흡인력으로 안으로 오게 해 줄 것이니 들어는 즉시 노부를 사부로 섬기거라!"
괴팍한 음성은 지극히 오만했다.
낙헌지는 오기가 생겨 일언지하에 그의 지시를 거부했다.
"하하……, 마도고수를 사부로 섬기지 싶지 않소."
"뭐… 뭐야? 노부의 전인이 되기 싫다고?"
"그렇소."
"으음, 이유가 뭐냐?"
"마도고수는 나의 원수요. 내가 어찌 원수와 한패거리일 수 있겠소, 그리고 노인의 회선마강이 강하기는 하나 나도 언젠가 그 정도 무공을 시전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오. 구태여 마공을 익혀 맑은 심성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소."
괴노인은 나직한 침음성을 토해냈다
"으음, 정말 어처구니없는 놈이군."
"하하……, 모두 진심에서 한 말이외다."
"이럴 수가 있는가? 뇌공비급의 무공보다 백 배 강한 마공을 시전해 보였는데도 노부의 전인이 되기를 마다해? 하찮은 뇌공비급을 연마하겠다고……, 으음, 미친놈이 아니면 이럴 수 없다!"
다소 허탈함이 섞인 자조적인 음성이었다.
이때, 갑자기 낙헌지의 고막 속으로 파고드는 전음집밀에 의한 신비한 말소리가 있었다.
"낙헌지라는 청년, 고집부리지 말고 승낙하게. 마공이라고 하지만 당금천하에 가장 강한 무공이네. 자네를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어 줄 수 있네. 익히는 것이 바람직하네."
역시 동굴 안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였지만 일점의 사기(邪氣)도 갖고 있지 않은 맑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낙헌지가 주춤할 때 신비스런 음성의 말이 다시 한차례 귀를 때렸다.
"노부의 말을 믿게. 뇌공비급을 갖고 있는 남천신군을 잘 안다면 노부에게도 외인은 아닐 것이네. 노부는 남천관에 있는 청삼서생이란 사람에게 사숙조(師叔祖)라 불리던 사람이라네."
청삼서생이라는 말이 낙헌지를 망연자실하게 했다.
'청삼서생의 사숙조가 되는 분이 저 안에 계신단 말인가?'
낙헌지는 심한 의혹와 혼란함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노부는 지금 잡혀 있는 신세이네. 그러니 노부와 말을 주고 받았다는 것을 내색하지 말게. 하여간 혈발마(血髮魔)의 전인이 되어 그의 절세마공을 익히도록 하게. 의협심을 가진 절세고수 하나가 꼭 필요한 세상이니 노부의 말을 명심하게."
신비한 음성은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낙헌지는 고심해야 했다. 최강의 마공을 수련해 지옥제일검을 죽일 수 있다면 굳이 거부할 일도 아니었다.
괴노인의 살기 어린 거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물어 보겠다. 노부의 절기를 익히고 노부를 스승으로 섬길 마음이 없느냐? 없다고 하면 그 즉시 골통을 으스러뜨려 버리겠다."
"협박이오?"
"흐흐……, 협박일 수도 있지."
"후후……,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오."
이제는 의지와 기백의 대결이었다. 괴노인은 분노를 깨나 참고있는 음성을 흘려보냈다.
"기어코 거절하고 죽음을 택하겠다는 말이냐?"
"꼭 그런 것만은 아니오."
"이 놈아, 정확히 대답해 봐라!"
낙헌지는 태연하게 응수했다.
"하하……, 솔직히 절세적 절기라는 데에는 매력이 있소. 하지만 노인의 전인이 된다는 것은 사실 내키지 않소."
"고약한 놈! 노부의 절기는 마음에 들고 노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구나?"
"그렇소."
괴노인은 낙헌지를 몹시도 탐내는 기색이었다.
"흐흐……, 귀여운 구석이 있는 놈이야. 그러기에 네놈을 더더욱 전인으로 두고 싶다. 능농섭물 진기로 끌어들일 테니 준비하고 있거라!"
"잠깐!"
낙헌지가 목청껏 크게 소리쳤다.
"지금은 싫소!"
"뭐가 싫다는 말이냐?"
"나는 하던 일을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사람이오. 뇌공비급을 다 익힌 후 그 안으로 들어가겠으니 서두르지 마시오."
"뭐… 뭐라고?"
"내 뜻이 그러하단 말이오."
괴노인의 음성에 은근히 짜증이 섞여 나왔다.
"이 놈아, 그곳에서 몇 년이나 머물 작정이냐? 노부가 거북이나 학같이 수백년 오래 살 사람으로 보이느냐?"
"오래 걸리지 않소. 한 칠 일이면 되오."
괴노인이 폭갈에 골짜기가 진동되었다.
"칠 일? 그 안에 뇌공비급을 다 익히겠단 말이냐? 네놈이 머리 두 개에 팔이 네 개란 말이냐?"
"하하……, 여기서 도망가지는 않을 것이니 칠 일만 기다려 주시오."
낙헌지는 가진 것이 없었으나 배포만은 컸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낙헌지의 진면목이었다. 하인 나부랭이로 일생을 보낸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진정 사람중의 영웅이 될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낙헌지는 겁 없이 말한 후 그 자리에 앉아 비급 연마에 들어갔다. 그가 책장을 넘겼다.
"이 놈, 썩 그쳐라! 노부를 우롱하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괴노인이 고래고래 외쳐도 낙헌지는 비급에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대꾸했다.
"칠 일이라 하지 않았소? 죽이고 싶으면 죽이시오. 산 나를 보고 싶다면 칠 일만 기다리면 되오."
"으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낙헌지는 말을 나누는 와중에도 뇌공비급에 눈을 떼지 않았다.
"칠 일만 기다리면 들어오지 말라고 해도 그 안으로 들어갈 작정이오. 사실 나는 뇌공비급을 칠 일 간 익혀 노인과 한바탕 겨뤄볼 생각이오."
"뭐라고?"
"아무리 마공이 강해도 정의로운 수법에 꺾이기 마련인 것이오."
"으음……!"
노인은 기가 막히다는 듯 다시 말하지 않았다.
낙헌지는 당당한 기백으로 전대의 마두를 일축하고는 계속 뇌공비급에 심취해 있었다.
이때, 아주 청아한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허허…… 아주 대단한 아이로군. 오마(五魔)가 너에 대해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오마는 너를 공동전인으로 삼게 될 것이다. 네가 지금 같은 강인한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 오마의 공동전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낙헌지는 눈으로 비급을 읽으며 귀로 노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이 안에는 모두 여덟 사람이 있다. 그중 다섯은 마도 사람이고, 노부를 비롯한 세 사람은 협의도 사람이다."
"……."
"다섯 마두는 노부의 전주인(前主人)에게 패해 여기 갇혔다. 벌써 칠십 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노부와 두 명의 친구는 십 년 전 여기 갇혔다. 오마의 우두머리인 혈발마의 흡인력에 끌려 이곳 무저갱(無底坑) 안으로 빨려든 것이지."
아아……, 무저갱(無底坑)!
그것은 전설로만 알려지고 있는 장소가 아닌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곳으로 그 안에는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다섯 마두가 갇혀 있다고 했다.
물론 낙헌지로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청아한 음성은 계속되었다.
"다섯 마왕을 이 안에 가둔 노부의 전 주인은 고금제일의 고수이셨다. 하지만 그 분이 돌아가시고 후계자를 두지 못해 천하가 사악한 무리들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 분의 절기가 실전된 이상 천하를 사마의 손에서 구할 수 있는 수법은 바로 이곳 무저갱 안에 갇혀 있는 다섯 마왕뿐이다."
낙헌지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물을 수 없었다. 의어전성술(議語傳聲術)을 펼칠 수 있는 단계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남천관은 지금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다. 청삼서생이 서른두 명의 고수와 함께 남천관을 지키고 있는지 궁금하군."
청아한 음성은 다소 한숨이 섞여 들려왔다.
낙헌지는 답답한 마음을 참다못해 꾀를 내어 시를 읊듯이 중얼대기 시작했다.
"오호라……, 하늘은 피로 물들고 천주봉(天柱峰)은 마풍(魔風)에 씻기었구나!"
"뭐이라고? 남천관이 마풍에 씻기다니……, 설마 남천관이 멸망하였단 말이냐?"
노인은 다급한 전음으로 물었다.
낙헌지는 목청을 높여 느릿하게 시를 읊었다.
"애석토다, 푸른 옷의 선비여. 원통하도다, 남천의 주춧돌이여!"
"으음……, 청삼서생이 정녕 죽었단 말이냐?"
노인의 음성은 문풍지처럼 떨렸다.
"그 안에서 무엇인가가 나오는 것을 보았느냐?"
"검은 매가 시체를 뜯고, 도적 떼가 금패를 갖고 날아오르다!"
낙헌지가 괴로운 표정이 되어 말하기를 마쳤다.
그는 자신이 청삼서생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섭안마공에 의해 벌인 일이기는 했으나 평생토록 그를 괴롭힐 부끄러운 일이었다.
낙헌지가 시를 빌어 말을 전하자 노인의 청아한 말소리가 한동안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런 물건은 천후사에도 있고 검보에도 있다. 그것마저 악도들의 손에 들어갔느냐? 들어갔다면 돌을 두드려 신호를 해라. 하나가 들어갔으면 돌을 한 번 치고, 둘 마저 다 뺏겼으면 돌을 두 번 쳐라!"
낙헌지는 조약돌을 치고 바위에 한 번 쳤다. 모든 상황을 정확히는 몰라도 검보의 것은 아직 남아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동굴 안에서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가 없어진 후라면 천후사의 것이겠군."
노인의 무거운 음성이 다시 전해졌다.
"검보에 하나 남았을 뿐이라면 젊은이는 반드시 오마의 절기를 익혀야 하네. 그래야 칠마령의 마지막 한 조각이 놈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네."
낙헌지는 일의 자초지종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없었다.
노인은 그의 심사를 헤아린 듯 모든 것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칠십 년 전 단신으로 십이거마(十二巨魔)를 굴복시킨 무림 사상 가장 위대한 기인이 계시었네."
"……."
"정의무성(正義武聖) 무천형(武天衡)이란 분이시지."
순간, 낙헌지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정의무성이란 이름이 아주 익숙하게 들렸다. 그 이름을 듣자 가슴이 심하게 동요되었다.
'정의무성……, 정의무성! 내게는 너무도 친숙한 이름이다.'
낙헌지는 상실된 과거의 기억 저편으로 줄달음질 치는 기분이 되었다.
"정의무성께서 제압한 열두 명의 마두는 두 종류로 분류될 수 있네. 한 부류는 꺾이면 꺾였지 굴복하지 않는 자들이고, 다른 한 패는 악착같이 살아 언제고 복수를 하려는 무리라네. 먼저의 무리는 이 안에 갇혀 있는 다섯 마왕이고, 나중의 무리는 남천관을 친 칠마전의 무리이네."
칠마전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이 들어갔다.
낙헌지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서 몇몇의 글귀가 그의 피를 끓게 한 것이다.
'십이마두, 오대마왕, 칠마전……! 그 모든 것이 나와 커다란 연관이 있음에 틀림없다.'
청아한 음성은 차분히 이어졌다.
"정의무성께서는 사후(死後)에 변괴가 생기리라 예상하시고 서장의 칠마를 금제하셨네. 칠마령을 만드신 일이 그 때문이네."
노인은 하나도 숨김없이 모든 일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칠마가 누구이며 지금 어디에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지옥궁(地獄宮)을 중원에 세운 당금 배후 조종 인물이라는 것 등을 일러주었다.
"칠마령은 세 조각으로 나뉘어 보관되었네. 검보, 천후사, 남천관이 그 장소이고 대무신국에서 나온 고수들이 그것을 지키고 있었네."
낙헌지는 더 이상 비급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노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상하게도 뼈에 사무쳤다.
"그것을 지키는 임무가 바로 노부와 두 사제의 임무였지. 정의무성께서 십오 년 전 명한 것인데 우리는 힘이 모자라 명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이지. 어째서 이런 꼴이 되었는지 궁금할 것 같아 솔직히 말해 주겠네."
청아한 음성의 노인은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우리 세 늙은이는 삼밀사(三密使)라 불리는데, 십 년 전 정의무성께서 돌아가셨다는 천기를 보고 급히 대무신국을 향해 가다가 이 근처에 이르러 혈발마의 흡인력에 빠져들게 되었다네."
아……, 삼밀사!
십오 년 전 일백검수(一百劍手)를 이끌고 대무신국을 떠났던 대무신국의 삼대봉공이 아닌가?
이들이 오대마왕과 함께 무저갱에 있다니 진정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적지만리객(赤地萬里客).
― 비천신매(飛天神魅).
― 광승(狂僧).
이들 셋은 하나같이 놀라운 고수들이었다. 한데도 감금되어 있는 혈발마의 흡인력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오대마왕이란 존재는 가히 신화적이라 할 수 있었다.
"오대마왕은 무저갱 내에서 만년한철삭(萬年寒鐵索)에 비파골(琵琶骨)이 뚫려 잡혀 있고, 우리 늙은이들은 두 다리가 부러진 채 누워 있네. 혈발마가 우리 세 늙은이들을 쉽게 끌어들인 이유는 그의 회선마강이 절묘한 탓이고, 당시 오대마왕이 격체전력술(擊體傳力術)로 내공을 한데 모아 펼쳤기에 우리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네."
낙헌지가 듣기에는 아주 신비한 말이었다.
'이토록 무서운 오대마왕을 감금한 정의무성은 진정 신에 이른 분이시겠다.'
삼밀사의 한 사람 되는 노인의 전성술은 계속되었다.
"일백검수는 우리들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네. 그런데 우리 삼밀사는 잡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어찌 하겠는가? 젊은이가 정도 사람이라면 소신을 굽히는 한이 있더라도 안으로 들어와 절세고수가 되어야 하네."
노인은 오랜 전성술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전음집밀로 오랫동안 말하기란 쉽지 않다. 진기를 극도로 소모기키는 상승무학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인은 온전한 몸이 아니었기에 탈진이 된 듯 더 이상 전성술을 펼쳐오지 않았다.
낙헌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그대로 사흘을 보냈다.
사흘이 지났을 때 낙헌지는 스스로 운기행공할 수 있게 되었다. 뇌정신공의 구결대로 운기행공하자 두 가지 놀라운 현상이 나타났다.
첫째는 혈도 곳곳에 막힌 부분이 있어 운기행공하는데 아주 심한 통증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이 상상하지 못한 강한 힘이 운기행공에 따라 일어나 사지백해를 타고 흐른다는 것이었다.
낙헌지는 원래부터 막강한 내공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인 듯 혈도를 타통시키며 운기행공을 벌였다.
운기를 거듭할수록 웅후한 진기가 모아졌다. 내상이 절로 치료되면서 전신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동시에 그는 뇌정신공의 오묘함을 어렵지 않게 터득할 수 있게 되었다.
제2장 무저갱(無底坑)의 기우(奇遇)
1
칠 일 동안 밥 한 끼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뇌공비급을 벗하고 있던 낙헌지의 귀를 때리는 음성이 있었다.
"칠 일째다. 이제 확답을 해라!"
칠 일 내내 들리지 않았던 혈발마의 목소리였다.
낙헌지도 오랜만에 입술을 떼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정확하군."
그는 몸을 일으켰다.
"내 들어가서 말하리라."
칠 일 동안 꼼짝하지 않는 사지가 갑작스럽게 움직이며 저려 왔다. 그는 팔다리를 몇 번 움직여 보다가 절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날쌘 원숭이라도 그같이 빠르지는 못할 것이다.
낙헌지는 조그만 돌부리에 건장한 몸뚱이를 의지시키며 위로 오르다가 결국 작은 동굴에 머리를 디밀 수 있었다.
동굴은 오 장 정도 수평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아래로 꺾여져 있었다. 음습한 곰팡내가 물씬 풍겨 나왔다.
"왔소. 한데 여기서부터 갈 재간이 없소."
낙헌지가 크게 말하자 처음 들어보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축골법(縮骨法)의 구결을 말해 줄 테니 익힌 다음 몸을 축소시켜 들어오너라. 뇌정신공을 칠 일 안에 익힌 놈이니 축골신공 정도는 간단히 익힐 수 있을 게다."
그는 백가지 재간을 익히고 있다 해서 백절마왕(百絶魔王)이라고 불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수많은 재간을 지니고 있는데 각각의 능력은 무림십절(武林十絶)이 가진 모든 재간에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역용화신(易容化身), 변성(變聲), 신투(神偸), 그리고 암기(暗器)와 금나수(擒拿手)의 오대절기였다.
백절마왕은 낙헌지가 잘 알아듣게 아주 천천히 축골공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흐음, 그렇게 어렵지는 않군.'
낙헌지는 워낙 뛰어난 오성을 지녔기에 축골술의 구결을 이내 깨닫게 되었다. 그는 손끝으로 동굴 가장자리에 매달린 채 몸소 술법을 펼쳤다. 구결대로 운기행공 하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두두둑― 둑―!
뼈마디가 우지직거리며 키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의 건장한 몸이 사 척 단구로 화하는 데에는 극히 짧은 시간이 걸렸다.
원래 축골법은 범상한 수법이며 흔히 도적의 수법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축골법은 시전하고 있을 때에는 내공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하지만 백절마의 축골법은 전혀 달랐다.
몸을 줄이고 늘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아주 짧았고 축골공을 시전하고 있으면서도 내공의 운용이 자유로웠다. 가히 절학이라 불릴 만한 절기였고 마공 중의 마공이었다.
원숭이 크기로 키를 줄인 낙헌지는 동굴 안으로 쉽게 기어들어 갈 수 있었다.
수평으로 오 장쯤 기어 들어가 아래로 뚝 떨어진 부분에 이르자 득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들은 십 장 아래에 있다."
"몸을 던져라. 받아 줄 테니 안심해도 좋다."
환호에 가까운 음성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몹시도 반기는 태도들이었다.
낙헌지는 어둠을 뚫고 여덟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섯은 기둥에 묶여 있고, 셋은 반 백골이 되어 돌 바닥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지옥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끔찍스러운 광경이었다.
기둥에 묶인 다섯 사람은 머리카락으로 몸을 덮고 있고 눈빛은 지독히도 강렬했다.
그중 가장 섬뜩한 사람은 핏빛 머리카락을 일 장 가량 기르고 있는 거구 노인이었다.
낡은 가죽으로 겨우 치부를 겨우 가리고 있는 혈발노인의 얼굴이 낙헌지 쪽으로 돌려져 있었다.
"이 녀석 내려오너라!"
혈발노인이 크게 외치자 그의 몸 주위에서 핏빛 기류가 형성되어 낙헌지 쪽으로 날아들었다. 그의 무공은 무형지기(無形之氣)를 유형지기(有形之氣)로 바꿀 수 있는 정도였다.
붉은 구름이 피어오르며 낙헌지를 휘감았다.
"으음……!"
낙헌지는 굵은 오랏줄에 몸을 칭칭 동여 매이는 기분이 되었다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실로 가공할 내공이다.'
낙헌지는 단숨에 십 장을 떨어져 희디흰 돌바닥에 가볍게 내려서게 되었다.
"어엇……?"
"이 놈이 이렇게 생겼을 줄이야!"
"고약한 생김새다. 우리들을 묶은 정의무성 너무도 흡사하다. 도저히 화를 못 참겠다."
하반신 대혈(大穴)에 엄지 손가락 굵기의 한철삭을 꽂아 넣어 기둥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는 노인들의 눈에서 살광이 일어났다.
"재수 없는 놈이다!"
"죽이자!"
네 노인은 울분을 토하며 당장이라도 낙헌지를 쳐죽일 기세를 보였다.
"아우들, 모든 것을 내게 맡기게!"
혈발노인이 일갈을 하자 다른 네 노인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낙헌지는 축골공을 해소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멋들어진 용모가 동굴 안의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했다.
그곳은 아주 넓은 동굴이었다.
낙헌지가 들어온 구멍 이외에 사람 다섯이 쉽게 들어설 수 있는 아주 큰 동부가 보였다. 그곳이 바로 입구였고 낙헌지가 들어온 작은 구멍은 공기 구멍의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왔소."
낙헌지가 옷에 묻은 흙은 툭툭 털며 태연히 미소지었다.
"앉아라!"
혈발노인은 미묘한 표정이 되어 차게 말했다.
"앉으시라면."
낙헌지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혈발노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담하군. 어떤 신분이냐?"
"하하……, 나는 낙헌지요. 신분이라면 보잘 것 없소. 남천관의 하인이었소. 남천관이 지옥제일검에 의해 제명당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소. 하지만 높여 말한다면 제 이대 뇌공문주라고도 할 수 있소."
혈발노인은 강렬한 눈빛으로 낙헌지를 직시했다.
"태생은 어떻게 되느냐?"
"아버지를 모르는 천애고아요. 낙검엽이라 하는 양부 한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은 남천관이 제명당하기 며칠 전 돌아가셨소."
"어떻게 이 근처로 오게 되었느냐?"
"부상을 당해 우연히 오게 되었소. 여기 온 이유는 뇌공비급을 익힐 적당한 장소인 듯해서였소."
혈발노인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무공은 원래 모르냐?"
"일초무학(一招無學)이오. 하지만 남들이 나를 금강역사(金剛力士)라 부르고 있소. 힘이 강하기 때문이오."
"흠……!"
혈발마를 비롯해 모두 야릇한 표정이 되었다.
이때, 기둥 사이에 길게 누워 있던 세 명의 노인 중 하나가 낙헌지의 허리띠 사이에 끼어져 있는 검을 보고 놀라 물었다.
"검제(劍帝)의 신검(神劍)? 백의검제를 아느냐?"
세 노인은 바로 대무신국의 삼밀사였다. 목소리의 임자는 적지만리객(赤地萬里客)이라는 사람이었다.
"모릅니다. 이 검은 나의 등을 관통하여 내 손에 들어왔을 뿐입니다. 누가 던졌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낙헌지는 속여 말하는 성질이 아니었기에 남천관에서의 모든 일을 여덟 노인에게 아주 소상히 말했다.
자신이 섭백마안에 걸려 청삼서생의 목을 잘랐다는 것조차 숨기지 않았다.
그가 말하자 모두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도 살아 날 수 있다는 것이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낙헌지가 이야기를 마치자 모두 탄성을 발했다.
"대단한 녀석이군. 너 같은 아이가 그제껏 무림고수를 사부로 두고 절기를 익히지 않은 것은 무림을 위해 애석한 일이다."
낙헌지의 자질에 놀라는 사람의 말이었다.
"칠대사마(七大邪魔)! 그 어린 놈들이 재주를 피우고 있다니, 크흐흐……. 우리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면 아마 땅 속으로 만리나 들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서장의 칠마전의 발호에 대해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오대마왕의 우두머리 혈발마는 낙헌지를 세심하게 관찰하고는 나름대로 생각을 굴렸다.
'중원을 정복한 다음 서역으로 은거했던 정의무성과 너무도 비슷한 놈이다. 으음……, 게다가 이 녀석은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근골과 자질을 지녔다.'
혈발마는 과거 인간의 내장을 식량으로 삼았던 극악한 마두였다.
사람과 짐승을 분간해 생각하지 않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해 강호에 있을 때 전설적인 악행을 무수히 남긴 자였다.
그의 악행이 인간의 상상을 넘어서는 지독한 것이 아니었다면 정의무성은 자비한 성품으로 그들을 용서해 주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의무성은 생전에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지만 이들 오대마왕에 대해서는 가장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그들의 비파골에 만년한철삭을 꿰어 가둔 것이 그것이었다.
혈발마는 처음 갇혔을 때 내공을 금제 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이를 악물고 운기행공한 결과 정의무성의 점혈법 아래 폐쇄되었던 내공의 힘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년한철삭을 끊을 수는 없었다.
정의무성은 언제고 오대마왕이 내공을 되찾는 날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내공을 찾은 후에도 만년한철삭을 끊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던 것이다.
만년한철삭이 잘려진다는 것은 무저갱의 붕괴를 의미한다.
무저갱의 붕괴는 갱 아래에 있는 분화구의 대폭발로 이어지고 그럴 경우 무저갱을 중심으로 십 리 이내는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생명체는 그 어떤 것도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오대마왕은 그것을 알기에 내공이 회복된 후에도 만년한철삭을 끊지 못한 채 다시 수십 년을 보내야 했다.
혈발마의 무공은 십이거마라 불려졌던 열두 명의 마두 중 가장 뛰어났다. 회선마강(廻旋魔 )과 혈발마공(血髮魔功)이 그의 두 가지 수법이고 정의무성도 혀를 내둘렀던 수법이었다.
그는 작심을 하고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크흐흐……, 네 녀석이 썩 마음에 들었다. 배사지례를 취할 경우 절기를 전수해 주겠다. 그러니 어서 절을 해라."
"싫소. 나는 마두를 스승으로 모시지 않소."
낙헌지의 말이 여덟 사람을 긴장시켰다.
혈발마의 비위를 건드린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삼밀사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고, 다른 사대마왕은 두 사람의 대면을 예의 주시하였다.
혈발마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폭발하려는 노리를 애써 참는 모습이었다.
"노부의 전인이 되고 싶지 않단 말이냐?"
"그렇소."
"노부의 절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냐?"
낙헌지는 꿋꿋하게 자시의 입장을 밝혔다.
"그것은 아니오. 절기는 마음에 들지만 마두를 스승으로 섬겨 절기를 얻는 일이라면 죽어도 사양하겠소."
"크흐흐……, 고약한 놈이군. 절기는 탐나도 우리들은 마음에 들지 않아 사부로 모실 수 없다 이 말이냐?"
"하하……, 그렇소. 하여간 나의 마음은 목이 떨어진다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니 죽이던 살리던 마음대로 하시오."
낙헌지가 팔짱을 끼자 혈발마는 몹시 고뇌하는 표정이 되었다.
이때, 아주 칼칼한 노인의 음성이 침묵을 깨며 흘러들었다.
"대형(大兄), 저 놈의 고집을 꺾는 일을 아우에게 맡겨 주시오."
혈발마 바로 옆에 돌기둥에 묶여 있는 산발노인이었다. 혈발마는 무릎을 탁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우 생각을 하지 못했군."
"크크……, 이 아우의 솜씨는 칠십 년 전에 비해 오히려 배나 증가되었지 않소? 대형이 하명만 하신다면 저 놈을 벌벌 기게 만들 수 있소."
"현제(賢弟)의 뜻대로 하시게!"
혈발마가 쾌히 승낙하자 입이 유난히 큰 백발의 마왕이 낙헌지를 향해 왕방울 같은 눈알을 부라렸다.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아! 감히 천하제일의 마왕 혈발형님의 지시를 거절한단 말이냐? 네놈에게 따끔한 충고를 해서 혈발마의 전인이 되기를 네 입으로 간청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의 눈알에서 자색 광채가 번쩍거렸다.
'고약한 늙은 괴물이군.'
낙헌지가 눈살을 찌푸릴 때 땅에 누워 있던 적지만리객이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전음집밀로 말했다.
"저 마왕은 취마(醉魔)라는 자네. 취마의 파천음(破天音)은 탈백마안공과 함께 마도의 가장 무서운 최면술일세.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는다면 그의 파전음 아래 심령을 금제당하게 될 것이네."
적지만리객의 경고가 끝나기 무섭게 취마는 괴소를 흘렸다.
"카하하……!"
오대마왕의 두 번째이자 혈발마와 일만 초를 겨룰 수 있는 절세고수 취마가 한바탕 괴소를 터뜨리고는 표정을 굳혔다.
낙헌지는 무슨 수작을 하나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앉아라!"
취마의 입술 사이에서 본래 취마의 목소리와는 아주 다른 신비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에게는 다정한 음성이었지만 낙헌지의 귀에는 뇌성벽력과 같았다.
"으음……!"
낙헌지는 고막이 터지는 듯해 진기로 귀를 틀어막았다. 혈맥이 진탕되며 몸을 휘청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흥……, 제법 끈질긴 놈이군. 좋아, 그러면 이번에는 삼성 공력이 아닌 칠성 공력으로 너를 제압하겠다."
취마는 낙헌지가 쓰러지지 않자 화를 못 참고 살광을 폭사하며 다시 마음(魔音)을 터뜨렸다.
"엎드려라!"
낙헌지의 몸을 으스러뜨릴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파천음이었다.
낙헌지는 혼몽한 상태가 되어 취마가 지시대로 엎드리려 하다가 갑자기 냉정을 되찾게 되었다. 뇌정신공을 익힌 이후 생긴 임독양맥을 맴도는 강한 내공으로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된 것이다.
낙헌지는 쓰러지려다가 벌떡 일어나 코웃음을 쳤다.
"흥, 이 정도로는 날 굴복시킬 수 없소."
삼대마왕은 저마다 외쳤다.
"이럴 수가!"
"놀라운데? 취마형님의 파천음이 무산되다니?"
취마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정의무성에게 패해 제압 당했을 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굴욕감이 취마의 마성을 폭발시켰다.
"으드득!"
취마가 이빨을 가는 동시에 그의 모발이 창끝같이 일어났다. 그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죽어라!"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낙헌지가 오공에서 붉은 피를 토하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막상 낙헌지가 피범벅이 되어 나뒹굴자 취마가 제일 먼저 사색이 되었다.
"으음……, 화를 참지 못하고 십이성 공력을 주입했으니……. 저 놈의 오장육부가 모조리 으스러졌겠군."
취마는 혈발마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실수를 부끄러워했다.
"으음……!"
신음소리와 함께 낙헌지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십이성 파천음 아래서도 죽지 않았던 것이다.
"아… 아니,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이냐?"
취마는 낙헌지가 일어설 듯 안간힘을 쓰면서도 일어나지 못하자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노부가 잘못했다. 내공이 강하지도 않은 네게 삼백 년 공력이 실린 파천음을 썼으니 너는 심맥(心脈)이 터졌을 것이다. 모두 나의 주책없는 행동 때문이다. 미안하구나."
취마가 마왕답지 않게 한 인물이 호탕하게 외쳤다.
"카하하……, 크게 다쳤으니 누군가 개정대법(開頂大法)을 써야 본래대로 건강한 놈이 될 것 같구나."
오대마왕의 하나인 만독마(萬毒魔)가였다.
만독마는 만독경(萬毒經)과 독문보록(毒門寶錄)이라는 두 가지 독공 비급을 얻어 천하제일독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독술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고 의술에 있어서도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저 놈을 살리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오."
만독마가 음침히 말하자 취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내가 죽겠네. 혈발마 대형이 전인을 얻는 아주 중대하니 내가 죽는다 해도 유감은 없네."
취마가 단호히 말할 때였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듯하던 낙헌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하……, 정말 엄청난 내공이었소."
낙헌지가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낭랑히 웃자 오대마왕과 삼밀사의 얼굴이 일제히 누렇게 변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이 녀석은 사람이 아니다.'
'무쇠보다도 단단한 놈이다. 내공이 극도로 강하거나 금강불괴지신을 연성했음에 틀림없다.'
'칠마전의 수하들이 놈을 죽이지 못한 것이 무리는 아니었군.'
낙헌지는 뒷목이 뻣뻣하고 사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에 젖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파천음은 정말 대단한 무공이었다. 낙헌지가 뇌공삼보를 수련하기 전에 파천음을 당했다면 지금같이 살아 있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낙헌지는 의지가 굳고 기백이 뛰어났다.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었었지만 아픈 표정은 짓지 않았다.
"나와 또 시비할 사람이 계시오?"
낙헌지가 소매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자 혈발마가 웃으며 말했다.
"크흐흐……, 취마의 파천음은 노부의 혈발마공 다음으로 강한 마공이다. 취마음 아래 살아났으니 다른 수법이 시전된다 해도 너를 쓰러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하하……, 그럼 어찌 되는 것이오?"
"전인이 되고 아니 되고는 지금 따지지 말자."
"무슨 말이오?"
"이렇게 하자."
혈발마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 우리들의 마공을 배우거라. 배우는 가운데 우리들이 존경스럽다 여기면 우리들을 사부로 모셔라. 하지만 네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네놈이 모든 수법을 다 배운 이후 너를 죽이기로 하겠다."
"하하……, 내 마음이 변함이 없을 것이오. 무공을 다 배운 후라도 지금과 마찬가지일 테고. 그러니 지금 죽이도록 하시오."
낙헌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죽음을 초연히 여기는 그의 태도는 진정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으음……!"
혈발마는 낙헌지를 승복시키지 못하자 안타깝고 분해 주먹을 쥐고 입가를 실룩실룩 거렸다.
취마와 잔도마(殘刀魔), 백절마와 만독마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오마가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 그들의 전인이 되기를 꿈속에서라도 원했던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그들은 목숨을 버려서라도 오마의 절기를 간절히 원했었다.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낙헌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태연하게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은 혈발마였다.
그는 이곳 무저갱의 주인이고 사마에게 죽으라는 명을 내릴 수 있는 마도 제일의 생사판관(生死判官)이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 깊은 한숨을 토했다.
"후우……, 이것도 인연인가?"
그는 드물게 차분한 눈빛으로 낙헌지를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고집은 천하제일이다."
"나의 고집을 꺾지 못하겠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제 죽이기로 작정하셨소?"
"아니다. 네 고집을 꺾지 못했지만 죽이지는 않겠다."
혈발마는 마음을 정한 듯했다.
"네게 절기를 전수하겠다. 스승과 제자라는 관련을 맺지 않은 채 말이다."
"아……!"
낙헌지가 너무도 의외로운 제의에 탄성을 발했다.
혈발마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신 마공을 익힌 후 노부의 부탁을 들어다오."
"어떤 부탁이오?"
"칠마전(七魔殿)을 멸망시킨 다음 마종(魔宗)이 되어다오. 우리 오마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어달란 말이다."
"칠마전을 없앤다는 것은 당연히 받아들일 일이오……. 하지만 마도제일인이 되라는 제의는 좀 어렵소."
"할 수 없단 말이냐?"
낙헌지는 단호하게 응대했다.
"나는 결코 마도를 걷지 않을 것이오."
"으음……!"
혈발마는 다시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
그는 한참을 고뇌하였다.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한 청년에게 얽매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결국 혈발마는 체념한 표정이 되어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좋다, 마종이 되라는 부탁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우리들에게서 무공을 익힌 후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천하제일인이 되지 못했기에 이렇게 패배해 갇혀야 했다. 그랬기에 천하제일인이란 자리에 대해 지독한 한을 갖고 있다. 우리들에게 절기를 배운 아이가 천하제일인이 된다면 우리들의 한도 풀릴 것이다."
과연 그가 전대의 대마왕인가 의심스러우리만치 간절한 부탁이었다.
'오마에게 약한 면이 있군.'
낙헌지는 이때 만큼은 혈발마가 희대의 마두가 아니라 아주 평범한 늙은이로 보였다.
"어떠냐?"
혈발마가 애처로운 표정이 되어 묻자 낙헌지는 두 손을 모으며 장읍을 올렸다.
"혈발마 어르신네를 비롯한 여러 어르신네들에게서 마공을 배운다면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외다."
혈발마가 가장 기뻐했다.
"크하하……, 네녀석이 이번에도 거절했다면 아마 노부는 화를 참지 못하고 네놈의 머리통을 으스러뜨렸을 것이다."
"하하……, 나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낙헌지는 혈발마와의 스스럼없는 웃음을 교환하고는 적지만리객을 비롯한 세 사람을 내려다봤다.
세 사람의 모습은 아주 비참했다.
허리 아래 부분이 백골(百骨)로 화해 있고, 상체도 뼈와 가죽이 달라붙은 아주 마른 모습이었다.
산발한 백발, 주름지고 진물로 뒤덮인 늙은 얼굴, 안광은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졌고, 이빨 하나 남지 않아 흉측한 형태는 썩어가고 시체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은 낙헌지가 자신들을 살피자 주름진 입가에 웃음을 매달았다.
"……!"
그들의 아련한 눈빛과 낙헌지의 맑은 눈빛이 교차되었다.
"젠장…… 이제 봤더니 적지만리객 늙은 녀석이 몰래 전음집밀을 보내 저 녀석을 사주한 것이군."
혈발마가 투덜대며 눈을 꾹 감았다. 전대의 마왕답게 상황판단이 아주 빨랐다.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낙헌지에게 지시했다.
"나는 이대로 잠에 빠져들 것이다. 아우들의 절기를 모두 다 익힌 후에야 깰 것이다."
혈발마는 말을 마치고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쉽게 잠에 빠질 수 있는 것 또한 그의 내공이 상상을 초월한 경지라는 것을 말하는 증거였다.
혈발마가 코를 골며 숙면에 들자 오마의 마지막인 백절마(百絶魔)가 낙헌지를 불렀다.
"헌지야, 이리 와라."
"예!"
낙헌지가 삼밀사를 등지고 백절마 앞으로 가 앉았다.
백절마는 눈을 반개하며 제법 의젓하게 말했다.
"네게 아주 장문(長文)의 구결을 말해 주겠다. 그 안에 백절마공(百絶魔功) 모두가 담겨 있다. 그러니 한 자도 빠뜨리지 말고 외워야한다."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나 너는 쉽게 외울 수 있을 게다."
백절마는 아예 눈을 감고 구결을 외웠다. 매우 긴 구결이고 아주 난해한 구결이었다.
낙헌지는 정신을 한데 모으고 구결을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귀담아 들었다. 백절마는 한 시진 내내 구결을 외웠고, 이어 두 차례 반복해서 구결을 되풀이해 외워 주었다.
그가 외는 구결 안에는 백가지 수법이 담겨 있었다.
하나하나 절기로 불릴 수 있는 것인데 당금 강호에는 실전되어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수법이 대부분이었다.
백절마가 세 번 연거푸 설파한 후 네 번째 외우려 할 때 낙헌지가 손을 내저었다.
"다 외웠소."
"뭣이라고?"
낙헌지의 뛰어난 암기력을 인정하고 있는 백절마였으나 낙헌지가 구결을 다 외웠다고 하자 눈을 번쩍 떴다. 적어도 여덟 번을 말해 준 후에야 외우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정말 다 외웠단 말이냐?"
"하하, 어찌 거짓을 아뢰겠소?"
"흠, 그럼 외워 보아라. 한 자라도 틀리면 혼쭐을 낼 것이다."
백절마가 눈을 부라리자 낙헌지는 백절마가 일러준 길고 어려운 구결을 쉬지 않고 외워 나갔다.
백절마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낙헌지가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구결의 전문(全文)을 외워버렸기 때문이었다.
낙헌지가 외운 것은 백절마경(百絶魔經)의 첫장부터 맨 끝장까지의 모든 내용이었다. 그것은 백절마왕이 수십년 동아 수집한 천년무림의 절기들이고 아주 오묘한 재주였다.
"카하하……, 과연 기재로다, 기재야!"
백절마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암기한 세 시진 만에 암기한 낙헌지를 몹시도 대견스러워했다.
"구결은 기나 그 안에서 쓸만한 것은 단 한 가지 백절마장법(百絶魔掌法)뿐이다. 허기를 메우고 충분히 쉰 다음 그것을 노부와 함께 익히자. 다른 것들은 네 스스로 터득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먹을 것은 동굴 벽에 붙어 있다. 검은 이끼와 누런 버섯이 그것이다. 물은 저쪽 샘에서 얻으면 된다."
백절마는 무뚝뚝하게 말한 후 눈을 감았다.
낙헌지는 몸이 근질근질한 지라 두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백절마가 말한 식량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검은 이끼와 누런 버섯이 무저갱의 벽을 뒤덮고 있었다.
낙헌지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 이것은 청심균(淸心菌)과 세심지(洗心芝)가 아닌가? 이것을 장복할 경우 사악한 마음을 완전히 없애고 부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했는데……"
낙헌지는 누가 가르쳐 주었는지 모를 의학의 지식으로 버섯과 이끼의 효능을 간단히 알아낼 수 있었다.
"허허……, 그렇다네. 정의무성께서 오마를 여기에 가둔 이유가 이곳 무저갱이 두 가지 영약(靈藥)의 자생지인 탓이라네. 오마가 그래도 지금 만큼이나 선량해진 이유가 바로 칠십 년 동안 영약을 식량 삼아 복용하고 산 까닭이지."
반 백골이 되어 있는 적지만리객의 설명이었다.
무저갱은 과거 속의 세상이었다. 그 안에 있는 사람 중 낙헌지만 백 살이 안 되었지 다른 사람 모두 백 살 이상이었다. 그 중에는 백이십 살을 훨씬 넘긴 사람도 있었다.
낙헌지에 비한다면 사배(四拜)가 높은 인물이고 하나같이 강호에 전설적인 이름을 남겼던 절세고수들이었다.
남천관의 하인이었던 시절이라면 전설로만 알고 있었을 인물들을 근거리에서 접하게 된 낙헌지는 이 일로 인해 천하에서 중요한 몇 사람 안에 끼이게 된 셈이다.
오마에게 절기를 배운다는 것은 기연중의 기연이었다.
물론 낙헌지의 자질이 뛰어났기에 오마가 먼저 절기 전수를 청했기는 했으나, 이 일이 낙헌지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이 있을 수 없었다.
낙헌지는 청심균과 세심지로 주린 배를 채우고 차가운 샘물로 목을 축인 후 백절마와 마주하게 되었다.
백절마는 백절마경 안의 무공 중 가장 강한 백절마장법에 대해 아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백절마장은 천하에서 가장 변화막측한 장법이다. 장영(掌影)이 일어나면 이십 장 내가 장영으로 뒤덮인다. 최상의 경지에 이르면 단 일 초로 일백 명을 동시에 격살시킬 수 있다."
"일백 명이나요?"
"손을 번개같이 휘둘러 일백 명의 심장을 거의 동시에 으스러뜨리는 것이다.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데 아주 좋지."
백절마는 득의해 하며 구결을 완벽히 풀이해 주었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백절마장을 십이성 익힐 경우 동시에 일백 명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었다.
"어떠냐?"
백절마가 어깨를 으쓱하자 낙헌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심쩍은 것이 있습니다."
"뭐라고? 완벽한 백절마장법에 허점이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낙헌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절마가 크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평생토록 수련하며 보완을 거듭한 백절마장법이 미흡하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무엇이 허점이란 말이냐?"
"백절마장법은 더 오묘해질 수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백절마장법을 두 손으로 동시에 시전할 경우 그 위력이 배가 되리라 봅니다."
백절마는 놀란 가슴을 내리쓸며 실소를 흘렸다.
"크흐흐……,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백절마장은 너무도 어려워 한 손으로 수련해 시전하기도 힘든 일이다. 어느 누가 그것을 동시에 두 손으로 시전할 수 있겠느냐?"
"하하……,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두 손으로 각기 다른 수법을 쓸 수도 있는데 어찌 두 손으로 같은 수법을 쓰지 못하겠습니까?"
"뭐… 뭐라고?"
"보십시오."
낙헌지가 몸을 일으키고는 두 손바닥을 어지럽게 휘둘렀다.
우우웅―!
그의 손바닥이 흔들리며 수백 개의 장영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오른손 왼손을 모두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며 각기 다른 초식을 시전했다.
낙헌지는 두 손을 어지럽게 휘두르다가 손을 거뒀다.
"어떻습니까?"
"이… 이럴 수가!"
백절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네가 양심신공(兩心神功)을 알고 있단 말이냐? 네가 어이해 두 손을 각기 다르게 놀릴 수 있단 말이냐?"
기쁜지 슬픈지 모를 야릇한 표정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남달리 신기한 재주인가?'
낙헌지는 자신이 아주 오래 전부터 두 손을 각기 다르게 놀리고 한꺼번에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 근원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정확히 언제부터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는 기억되지 않았다.
"우하하하……, 하여간 기쁘다. 네놈이라면 백절마장법을 노부보다도 오히려 더 지고한 경지로 익힐 수 있을 것이다."
백절마의 기쁨에 찬 웃음소리가 동굴 곳곳에 메아리쳤다.
2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낙헌지는 백절마에게 하루 여섯 시진씩 백절마장법을 전수 받아 백절마장법을 완벽 이상으로 익힐 수 있었다.
그 사이 적지만리객과 비천신매, 광승은 낙헌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고, 낙헌지가 허기를 메우며 쉴 동안 자신들의 절기를 아낌없이 전수해 주기도 했다.
삼밀사의 무공은 대무신국의 무공이었다.
왕가의 무공에 비할 수는 없는 것이고, 오마의 마공에 비해서도 크게 뒤지는 무공이었지만 역시 절학이었다.
적지만리객의 광풍만리권법(狂風萬里券法)!
비천신매의 비천추운신법(飛天追雲身法)!
소림사 출신 광승의 복마금강신강(伏魔金剛神 )!
이러한 삼밀사의 최강 수법은 가히 일절로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마공을 익히고 짬짬이 다른 절기를 익힌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로 여길 것이나 낙헌지는 아주 쉽게 익혔다.
양심신공을 익힌 사람같이 마음을 두 군데로 쓸 수 있어서였다.
삼밀사는 낙헌지가 뛰어난 재주에 감탄하며 지상 최강의 무공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 정의무성의 대무신공강기(大武神功 氣)는 다섯 단계로 나누어진다. 철골(鐵骨) 금갑(金甲) 양심(兩心) 섬수(閃手) 무형(無形)의 경지로 천하에서 제일 뛰어나다!
삼밀사는 오마를 잡아 가둔 정의무성에 대한 내력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의 용모가 낙헌지와 아주 흡사하다는 말에는 신비롭게만 생각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기이한 사실은 대무신국과 정의무성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뛴다는 것이었다.
운명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적지만리객은 암울한 미래에 대해서도 우려하였다.
"대무신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상왕(上王)이신 정의무성께서 승하하신 직후 칠마전이 들이닥쳐 모두 다 죽여 버려 그리된 것이다. 대검제(大劍帝)와 천룡태자(天龍太子)를 비롯해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남은 사람이라고는 십 년 전 중원으로 나온 일백정검수(一百正劍手)들인데 네 얘기를 들으니 그들마저 누란의 위기에 있는 것 같구나!"
삼밀사는 세상이 마도의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를 이기기 위해서는 오대마왕의 마공을 익히는 길만이 있을 뿐이라 했다.
대무신국의 절대절학이 단절된 지금 정파의 어떤 것으로도 마도를 물리친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일이라 누차 말하곤 했다.
3
파파팍―!
낙헌지는 두 손으로 석벽에 이백 개의 장인(掌印)을 남기는 것으로 백절마장의 수련을 마쳤다.
백절마는 자신의 평생 절학을 너무 쉽게 빼앗겼다면 몹시 아쉬운 표정으로 그를 보냈다.
낙허지는 만독마(萬毒魔) 앞으로 갔다. 만독마는 그제까지 자고 있다가 낙헌지가 오자 기지개를 켜고 눈을 떴다.
"크크……, 어디 보자!"
그는 낙헌지의 근골을 유심히 살핀 후 점잖게 입을 열었다.
"만독경과 독문보록의 모든 절기를 네게 전수해 주겠다. 그리고 네가 원할 경우 노부의 골수 속에 있는 독강(毒 )을 반 정도 네 몸에 주입해 독중지성(毒中之聖)으로 만들어 주겠다."
"독중지성은 싫소. 독인이 될 경우 독을 식량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크크……, 싫다면 굳이 나눠주지 않겠다. 못난 놈!"
낙헌지는 마치 빚을 받아야 할 사람처럼 당당하게 요구했다.
"나는 만독경 안의 파독강기(破毒 氣)를 배우고 싶소."
"그… 그 이름을 어찌 아느냐?"
"적지만리객이 말해 주었소. 파독강기를 익힐 경우 어떠한 마공이라도 격파해 버릴 수 있다고 했소."
"흐음……!"
만독마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게 모든 것을 전수해 주겠다. 대신 노부의 사적인 부탁 한 가지를 들어 주겠느냐?"
"어떤 부탁입니까?"
"여기로 잡히기 전 잃은 비급 하나가 있다. 독경(毒經)이라는 것인데 노부가 직접 지은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손에 들어갔을 경우 세상이 독으로 뒤덮이기 쉽다. 강호에 나가 독경의 주인을 만나면 회수해 태워 버려라."
낙헌지는 흔쾌히 수락했다.
"명심하겠소."
"독경 안에는 백 가지의 독공이 수록되어 있다. 노부가 알고 있는 일만 가지 독공 중 위력이 강한 백 가지를 추려 적은 것이 바로 독경이다."
"정말 무서운 독경이군요."
만독마는 녹색 안광을 발했다.
"크크……, 이 안에 갇혀 연구해 본 결과 과거 노부가 절기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의 허점과 결점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일곱 가지 독공을 만들었다. 일컬어 칠대독공(七大毒功)이다. 앞으로 칠 일 동안 그것을 네게 고스란히 전수해 주겠다."
"고맙습니다."
"아니다. 절기를 실전시키지 않게 해주는 것으로 너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다."
만독마는 얄팍한 입술에 한껏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아쉬운 것은 독주머니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정의무성이 그것을 훔쳐 갔지. 그래서 네게 진짜 독을 갖고 시범을 보일 수는 없다. 말로만 할 것이니 강호에 나가게 되면 재료를 구해 연구해 보거라!"
낙헌지는 만독마가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독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무공은 오마 중 가장 약했다. 그러나 과거 강호에 있을 때 만독마의 마명은 혈발마 다음으로 높았다. 그가 누구를 죽이려고 생각할 경우 그것은 사흘 안으로 실현되었다.
어느 누구도 그의 득공 아래 숨을 부지하지 못했었다.
적지만리객이 말해준 바에 의하면 강호에서 일천 명을 죽여 가는 곳마다 시체의 산을 쌓았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아득한 과거지사였다. 지금 만독마의 모습은 평범한 노인보다도 추레했고 과거의 살기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칠십 년이나 갇혀 있으면서도 미치지 않다니……. 오마는 모두 뛰어난 사람들이다. 하나같이 마두이기는 하나 남다른 데가 있다.'
낙헌지는 오마에 대해 막연하나마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부터 이런 마음이었다면 혈발마가 물었을 때 악착같이 전인 되기를 거절하지는 않았으리라.
제3장 천하제일의 마공(魔功)을 얻다
1
무저갱에서의 세월은 아주 빠르게 흘러갔다.
낙헌지는 하루가 다르게 고강해질 수 있었다. 그는 칠 일만에 만독마의 일곱 가지 독공을 익혔고, 다음 열흘 간 잔도마(殘刀魔)의 잔도경(殘刀經)에 통달할 수 있었다.
무저갱에서 들어오고 이십 일이 지났다.
낙헌지는 파천음(破天吟)으로 자신을 쓰러뜨리려 했던 취마에게 음공과 보법을 배우게 되었다.
취마의 절기는 다른 삼마의 것과 아주 달랐다. 이제껏의 무공은 초식의 변화를 위주로 하는 것인데 반해 취마의 무공은 순수하게 내공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거기서부터 난관이었다.
낙헌지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취마가 전수해 주는 오묘한 절기를 몸에 터득치 못했다.
"으음……!"
낙헌지는 운공을 하다가 신음 소리를 내며 운공을 중단하곤 했다. 내공의 한계도 한계였고, 파천음에 의해 혈맥이 진탕당한 내상은 쉽게 쾌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쯧쯧……, 내상이 아직 낫지 않았군. 내상을 갖고 있는 채 절기를 익힌다는 것은 무리다. 그러니 구결만 외우거라."
취마는 낙헌지가 겉보기와는 달리 중병을 앓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혀를 끌끌 찼다.
낙헌지는 파천음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음공과 소법(簫法), 그리고 보법을 구결로 터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실질적인 시전은 막강한 공력을 보유할 때로 미루어야 했다.
마침내 오마의 우두머리이자 천하에서 가장 위대한 혈발마 앞으로 가게 되었다.
혈발마는 그제까지 코를 골고 자다가 낙헌지가 다가오자 눈을 뜨고 낙헌지를 향해 혁혁한 안광을 폭사해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네게 두 가지를 가르쳐 주겠다."
"……?"
"칠마전을 격파하는 대가로 가르쳐 주는 것임을 언제고 잊어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혈발마는 두 손을 가슴 앞에 세웠다.
"혈발마공(血髮魔功)과 회선마강(廻旋魔 )을 전수하겠다. 그것을 위해서는 적어도 이백 년의 내공이 필요하다."
"이백 년 내공이오?"
"크흣……, 내 나이 이미 이 갑자를 넘어섰다. 나름대로 기연을 얻어 사갑자에 달하는 공력을 지니게 되었다. 네 나이로 보아서는 어마어마하나 행운이 따른다면 엄청난 내공을 얻을 수도 잇다. 아마 여기 나가기 전 그 정도는 될 것이니 낙담할 필요는 없다.
낙헌지는 그의 위로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되찾았다.
"고맙습니다."
"우선 구결을 다 외워라. 그 다음 운기를 시작해라. 뇌공문의 시시한 무공을 배울 때와 같이 허술히 생각해서는 하나도 이룰 수 없는 상승의 마공이니 성심성의를 다해 익혀야 한다."
"예."
"그럼 먼저 회선마강을 전수하겠다."
혈발마는 원래 중원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고향은 청해(靑海) 훨씬 너머였고 소국(小國)이지만 왕자(王子)라는 지고한 신분을 지녔다. 그는 부처가 수행을 위해 왕자 지위를 버렸듯 무공의 길을 택해 왕자의 지위를 버렸다.
그는 처음 도가(道家)의 절예를 익혔다.
그러나 그것은 살상을 멀리하는 무공이었기에 혈발마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혈발마는 손을 쓸 경우 상대를 살려 두지 않는 무공이야말로 진정한 무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도가 절기의 수련을 중단하고 극히 악랄한 수법을 지닌 무공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 결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회선마강이었다.
회선마강은 부드러운 가운데 막강한 위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유형화된 내공의 힘을 자유자재로 발출해 낼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바위를 부수지 않고 바위 뒤에 숨어 있는 적을 죽일 수 있던가, 아니면 나무를 박살내지 않고 나무 속에 있는 벌레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이 회선마강의 위력이었다.
그것이 마공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위력이 실로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선마강의 기초는 도가의 현문강기(玄門 氣)에 있었다.
낙헌지는 회선마강의 구결을 배운 후에야 혈발마가 뇌공문의 절기를 아주 우습게 여긴 이유를 알게 되었다.
혈발마는 사실 천하에서 도가 무공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다행히도 회선마강은 도가의 한 부류인 뇌공문의 뇌정신공과도 일맥상통하였다. 그랬기에 뇌정신공을 익힌 낙헌지는 훨씬 회선마강을 터득할 수 있었다.
모두 강기류( 氣流)의 무공이기에 낙헌지는 놀랍게도 단 하루만에 회선마강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혈발마를 경악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으음……, 네놈은 실로 기이하구나. 어려운 것일수록 오히려 더 쉽게 익히는 체질이다."
"하하……, 더 어려운 무공은 없습니까?"
혈발마의 입이 찢어져라 벌어졌다.
"카하하하……, 네녀석을 칠십 년 이전에 먼저 만날 수 있었다면 정의무성의 대무신공강기도 노부의 무공 아래 제압당했을지도 모르겠구나!"
혈발마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강호인들은 인간이라 여기지 않는 오마에게도 눈물은 있었던 것이다.
'이미 과거의 죄값을 치른 불행한 노인들이다. 이 분들의 마공을 익히게 되면 천하를 안정시켜 이 분들의 은혜에 보답하리라!'
낙헌지는 오마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마공이라는 것이 소문과는 달리 익히는 사람에 따라 마성(魔性)을 조절할 수 있음도 깨닫게 되었다.
낙헌지는 살기 어린 마공을 익히면서도 포악해지는 부작용이 없었다. 그것은 무저갱 안의 오마와 삼밀사가 누구도 알지 못할 신비로운 일이었다.
회선마강에 대한 수련은 끝났다.
마침내 낙헌지는 혈발마의 최고 절학인 동시에 과거 대무신공강기와 함께 천하쌍절기(天下雙絶技)라 불려졌던 혈발마공(血髮魔功)을 전수받게 되었다.
혈발마공 역시 강기 무공이었다.
그 위력은 지극히 강했고, 유순한 데라고는 단 한 곳도 없었다. 그리고 한번 펼쳐지면 거두기 힘든 절학이기도 했다.
"혈발마공은 천축국(天竺國)에서 비전되어 오던 적발공(赤髮功)의 비급에서 유래되었다."
혈발마가 자랑스러운 눈빛을 하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위력은 적발공의 열 배다. 오백 년 전 사도일인(邪道一人)으로 불려졌던 천마(天魔)의 천마경(天魔經)이 혈발마공의 또 다른 연원이기 때문이지."
적발공이나 천마경은 모두 전설 속의 기학(奇學)이었다.
혈발마공이 그 두 가지 마공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밝혀진 비밀이었다.
"천마경의 주인이신 천마는 대무신국을 세운 정의무성이 얻은 비급의 원주인과 함께 정사이존(正邪二尊)이라 불려졌다."
"아……, 그렇습니까?"
낙헌지는 아득한 전설시대에서 비롯되는 무공의 원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기라는 것은 누가 익히느냐에 따라 큰 차이를 나타낸다. 아무리 고강한 무예라도 자질이 부족한 자가 수련하면 하오문의 잡기로 전락하고 만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남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어려운 시련을 견뎌야만 한다."
"어떤 시련입니까?"
혈발마는 치렁치렁 늘어진 핏빛 모발을 어루만지며 내보였다.
"혈발마공을 몸에 지니는 데에는 극한 고통이 따른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운공을 도중에서 중단할 경우 엄청난 부작용이 된다. 혈발마공의 힘을 체내로 다 모으지 못하면 노부와 같이 머리가 핏빛으로 되고 눈이 새빨개지는 추물이 된다."
"그럼…… 본래 머리 빛이 아니었습니까?"
낙헌지는 새삼 그의 머리카락을 다시 보았다.
"크허허……, 연공을 잘못한 결과이지."
"아……, 그럼 나도 자칫 하다가는 머리카락이 새빨개질 수 있겠군요?"
"그렇다."
낙헌지는 짐짓 고민스런 표정을 지었다.
"크허허……, 그렇게 겁이 나면 익히지 않아도 된다. 천하의 미남이라 불릴 만한 용모를 훼손시킨다는 것은 사실 애석한 일이지."
혈발마가 조롱하자 낙헌지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제가 우려한 것은 머리가 붉어지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收支父母)라 불감훼손(不敢毁損)이기에, 머리 모양이 바뀌면 그 도리를 저버리게 될까 두려워서입니다."
그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했습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하하……, 당연히 익혀야지요."
"역시 노부의 눈이 정확하군. 네놈은 머리가 붉어질 뿐 아니라 피부가 시뻘개진다 해도 혈발마공을 익힐 것이다."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혈발마는 붉은 정광을 발했다.
"흐흐……, 네가 담담한 체하나 노부는 너의 눈에 철천지 한이 담겨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 원한을 풀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고 할 녀석이다. 너는 겉보기 유순하나 사실은 아주 지독한 놈이라는 것을 노부는 다 알고 있다."
"하하, 과연 예리한 안목이십니다."
낙헌지가 웃자 모두 따라 웃었다.
낙헌지가 들어온 이후 무저갱의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하게 바뀌었다. 낙헌지는 모든 사람의 전인이었고 모든 사람에게 귀여움을 받는 존재였다.
모두들 낙헌지가 강호로 나가 자신들이 다 하지 못한 일을 풀어주리라 생각했고, 낙헌지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사흘 후, 낙헌지는 혈발마공의 구결을 다 외운 후 혈발마와 두 손바닥을 마주 하게 되었다.
콰류류류―!
혈발마의 몸은 핏빛 기류로 뒤덮여 있었다. 그 기류는 상당히 넓은 지역을 휘감아 낙헌지의 몸도 붉은 기류에 잠겨 바깥에서는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마공을 성취하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네게 노부가 지니고 있는 혈발마공 중 칠성을 전하겠다."
"노인, 하지만 그렇게 되면……"
혈발마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다그쳤다.
"잠자코 듣거라! 그것을 너의 것으로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네가 고통을 얼마나 참느냐에 달려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구결을 외우기 시작해라."
낙헌지가 눈을 감고 구결을 외우기 시작하자 혈발마와 그를 휘감고 있던 붉은 기류가 점점 짙어졌다. 그리고 한 줄기 소용돌이로 화해 두 사람 몸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낙헌지의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비한다면 아주 사소한 변화였다.
낙헌지는 두 손바닥이 타는 고통을 느꼈다.
강력한 혈발마공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찰나 오장육부가 끓는 기름에 튀겨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그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낙헌지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전수되는 혈발마공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낙헌지의 몸 안 삼십육개 대혈 하나 하나가 불에 달구어진 듯 달아올랐고 사지백해가 화끈화끈 거렸다.
순간, 혈발마가 무거운 침음성을 발했다.
"으윽……!"
그는 엄청난 놀라움에 휩싸였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녀석의 몸 안에 나의 내공보다 강한 반탄력(反彈力)이 잠재돼 있다. 이 반탄력을 막지 못하면 노부는 물론 헌지도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고 만다.'
혈발마의 얼굴빛이 갑자기 희어졌다. 그리고 붉은 기류가 여지없이 흐트러지며 두 사람의 모습이 중인의 눈에 들어왔다.
혈발마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채 혈광을 폭사해 냈다.
"크으윽―!"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는 심상치 않았다.
취마가 가장 먼저 변괴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앗, 운기행공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 혈발마 큰형님의 내공은 수백 년에 달하는데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취마는 혈발마 다음으로 강한 내공의 소유자였다.
취마는 혈발마의 이마 위로 지렁이같이 굵은 핏줄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놀라 급히 우장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이 부풀어오르더니 손바닥 가운데에서 희디흰 기류가 혈발마의 등판 배심혈(背心穴)에 가 닿았다.
"으음……!"
혈발마는 그제서야 진정되는지 한결 좋아진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혈발마의 배심혈에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한 취마는 혈발마의 배심혈에서부터 막강한 반탄력을 느끼며 앙연히 놀랐다.
'으음……, 이게 어찌된 일인가?'
진기주입이 잘되지 않고 손바닥이 으스러지는 듯했다. 그 막강한 반탄력은 혈발마가 아니라 낙헌지 때문이었다.
낙헌지의 몸에는 아주 엄청난 잠재력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단단히 뭉쳐 있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다가 혈발마의 혈발마공 덕에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 움직임은 마공과 극성이 되는 것이었다.
혈발마가 고통을 느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낙헌지의 몸 안에서 나타나는 반탄력은 혈발마의 막강한 내공력을 갖고도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취마의 도움이 조금만 늦었다면 혈발마는 낙헌지의 몸 안에서 일어난 반탄력 아래 전신이 으스러져 죽었으리라.
다행히도 혈발마와 취마가 내공을 합하자 낙헌지의 반탄력도 더 이상 분출되지 못하고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까지의 과정은 지극한 고통을 수반했다.
낙헌지는 몸이 세 조각으로 나뉘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껴야 했고, 혈발마와 취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으윽……!"
삼인은 생사(生死)에 있어 한 몸이라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낙헌지와 두 손바닥을 맞대고 있는 혈발마, 그리고 혈발마에게 진원지기를 불어넣고 있는 취마는 진기에 엮여 있는 한 목숨 줄에 걸려 있는 셈이었다.
셋 중 한 사람이 잘못되는 날이면 그 화가 나머지 두 사람에게 전가되어 결국 셋 다 쓰러지게 된다.
그로부터 두 시진 동안 혈발마와 취마는 허탈감을 느낄 때까지 일신의 진원지기를 낙헌지의 몸 안에 불어넣었다.
낙헌지는 망아지경(忘我之境)에 들어가 몸 주위로 붉은 기류를 일으킨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휴우……, 이제 됐군."
혈발마가 한숨을 내쉬며 낙헌지와 마주했던 두 손바닥을 내려뜨리며 눈을 스르르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취마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겨우 안도했다.
"후아……, 칠십 년 만에 이런 고생은 처음이었다."
잔도마와 만독마, 그리고 백절마는 일의 자초지종을 몰라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삼밀사도 마찬가지는 매한가지였다.
취마는 몸서리를 치며 낙헌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아이는 몸 안에 신비를 갖고 있네. 저 아이의 몸 안에는 혈발마 형님의 내공을 능가하는 잠재력이 있단 말일세. 바로 그것 때문에 혈발마 형님이 진기 주입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지."
만독마는 낙헌지를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취마 형님, 잠재력이라니요?"
"저 아이는 몸 안에 막강한 내공의 힘을 갖고 있네. 그 힘은 우리 다섯 중 둘의 내공을 합한 것보다도 오히려 강한 것이네."
"오, 그럴 수가!"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공력이 아닙니까?"
모두 놀라워하자 취마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쉬운 것은 그 막강한 힘이 어떤 사람의 도움으로도 풀지 못할 정도로 단단히 뭉쳐 있었다는 것이네. 저 아이 스스로 운기행공해 풀 희망도 없고, 영원히 그렇게 잠재해 있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는 것이 매우 유감이네."
그도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도 낙헌지와 혈발마를 구하기 위해 내공의 칠할 정도를 잃은 후라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낙헌지의 얼굴에 중인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주 준수한 용모, 그리고 매우 선량하게 생긴 기운은 중인에게 호감을 주는 동시에 도저히 풀지 못할 신비감을 던져 주었다.
2
낙헌지는 십주야 내내 운기행공하다가 한순간 코로 붉은 기류를 빨아들이며 감았던 눈을 스르르 떴다.
번― 쩍―!
그의 눈에서 활활 타는 혈광이 흘렀다. 그 눈빛은 금석이라도 녹여 버릴 듯 강했다. 또한 눈빛에 접하는 사람의 내공지기를 흩트리고도 남음이 있는 안광이었다.
모두들 그런 낙헌지를 바라보며 만족해했다.
혈발마, 취마, 잔도마, 백절마와 만독마 등 오대마왕과 과거 대무신국의 삼밀사는 환희에 젖었다.
"허허……, 이제 정신이 드느냐?"
혈발마가 웃자 낙헌지가 얼른 그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은혜라고 할 것은 없다. 네가 마음에 들어 지니고 있던 것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었을 뿐이다. 어차피 거래였지 않느냐?"
"저의 오만무도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허허……, 너는 오만하지 않았다."
낙헌지는 감격한 마음에 계속 고집을 부렸다.
"아닙니다. 저는 무례한 놈이었습니다."
"허허……!"
혈발마는 전에 비해 백 살은 더 늙어 보였다.
치렁치렁하던 혈발은 어느새인가 반 잿빛으로 물들었고, 전보다 열 배는 깊은 주름살이 얼굴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보였다.
낙헌지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저… 저는 다섯 분을 사부(師父)로 부르고 싶습니다."
낙헌지가 넙죽 절을 올리자 혈발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녀석, 그렇게 전인이 되기 싫다 할 때는 언제고."
혈발마는 잔잔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헌지야, 노부의 전인이 된다면 좋은 평판을 얻기 힘들다. 그리고 노부에게는 많은 원수가 있어 네가 노부의 전인임을 밝힐 경우 신상에 화를 초래하기 쉽다. 그러니 굳이 사제지간(師弟之間)을 맺을 필요는 없다."
"아… 아닙니다."
"허허, 고집 부릴 일이 아니다. 너를 위해서 그리고 노부가 사랑하는 네 자신을 위해서 사제지간의 예를 맺지 않겠다."
"이 후 혈발마의 전인임이 밝혀져 화를 입게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지금 사부님께 배사지례를 취하겠습니다."
낙헌지는 구 배를 올리며 제자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허허허……!"
혈발마의 진물 가득한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그의 가슴은 감동으로 요동쳤다.
낙헌지는 힘있게 외쳤다.
"사부님!"
혈발마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입술을 천천히 떼었다.
"네가 노부를 굳이 사부로 섬기겠다니 뭐라 고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노부의 전인이 되었다고 마도(魔道)를 걸으려 하지는 마라."
"예에……?"
"허허……, 노부는 제자가 마도제일인(魔道第一人)이 되어 노부의 전철을 밟기보다 천하제일협(天下第一俠)이 되어 노부가 과거 중원무림계에 지은 죄를 씻어주기를 오히려 바라고 있다."
혈발마의 눈빛은 득도한 고승처럼 맑았다. 낙헌지는 눈시울을 붉혔다.
"사… 사부님!"
"네가 이 안에서 배운 마공으로 협행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노부가 말할 것은 그게 전부다."
"삼가 사부님의 뜻을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이 안에서 배운 절기는 모두 상승 절학이다. 그러나 서장의 칠마 또한 만만치 않은 수법을 지니고 있다. 심마지안(心魔之眼)이 그러하고 음마지장(陰魔之掌)이 그러하다. 그들과 지금 싸운다면 이기기보다 패하기 쉽다."
혈발마는 백수십 년을 살아온 노마답게 진중했다.
"하지만 너는 뛰어난 아이이라 이후 무공이 일취월장할 것이다. 청산(靑山)이 있는 한 땔감 걱정이 없다는 말을 기억하고 매사를 서두르지 마라.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허허……, 그럼 이제 이곳을 나가거라. 무저갱은 피가 펄펄 끓는 젊은 사람이 오래 있을 만한 장소는 아니다."
낙헌지는 막상 헤어진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 사부님! 제자는 여기 더 머물러 있고 싶습니다."
"아니다. 강호에 나가 천하제일협이 되어 무저갱을 다시 찾거라.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겠다."
"아……!"
"저기 대무신국의 삼밀사를 함께 데리고 나가도록 해라."
그러자 삼밀사의 으뜸인 적지만리객이 외쳤다.
"그럴 것 없소, 무저갱주(無底坑主)!"
그는 뻣뻣하게 누운 상태에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반 시체이니 강호에 나간다면 추하다는 소리를 들을 뿐 아무 일도 할 수 없소. 오히려 헌지의 짐이 될 뿐이오."
"나가고 싶지 않느냐?"
혈발마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적지만리객은 아주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허허……, 헌지가 여기 들어오기 전이라면 나가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만 이제는 다르오. 헌지가 칠마전을 막아줄 것이니 구태여 강호에 나가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허비할 필요가 있겠소? 차라리 이 안에 계속 머물며 오대마왕과 우의나 새로 쌓는 것이 나을 듯 하오."
"으허헛……,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역시 정의무성의 부하들은 남다른 데가 있군. 정의무성은 우리 다섯을 칠십 년 간 가두었고, 우리는 정의무성의 충복 셋을 십 년 간 가두었으니 피차일반이고 원한도 없는 셈이다."
혈발마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마침내 오마와 삼밀사 사이의 원한이 결말을 보게 되었다.
'하늘의 뜻이다. 선주(先主) 정의무성이 오마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은 정말 다행이다. 지금 선주를 대신할 정의의 호법(護法)을 만들지 않았는가?'
적지만리객은 하늘 어딘가에서 정의무성의 혼백이 이곳 무저갱 안을 지켜보고 있다고 믿었다.
낙헌지는 정의무성의 혼백이 보낸 선물이리라.
얼마 후, 낙헌지는 두 개의 패(牌)를 품에 지닌 채 여덟 노인에게 하직인사를 하게 되었다. 두 개 중 하나는 마존령(魔尊令)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검령(正劍令)이었다.
마존령은 칠십여 년 전 중원의 마도를 장악한 혈발마에게서 받았고, 정검령은 적지만리객에게 받았다.
여기에 뇌공부와 낙헌지를 지옥제일검으로 오인케 하기 위해 낙헌지의 손에 쥐어주었던 지옥령을 합한다면 네 개의 영부가 낙헌지의 품안에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보검 하나가 낙헌지의 모든 소지품이었다.
백룡(白龍)이라 불리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명검(名劍)이 검집이 없이 낙헌지의 허리띠 사이에 찔려 있었다.
백룡검의 전주인은 백의검제였다.
낙헌지에게 어검술을 시전했던 사람이 백의검제라는 것이 백룡신검으로 밝혀진 셈이었다. 낙헌지는 영부와 백룡보검을 지닌 채 오마와 삼밀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직 인사를 했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들어올 때와는 달리 무저갱의 진정한 출입구 안으로 걸어나갔다.
'뜻을 이룬 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낙헌지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뒤돌아보지도 않았고, 오마와 삼밀사도 낙헌지의 마음을 약하게 하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회자정리(會者定離)요 거자필반(去者必返)이었다.
낙헌지는 다시 만나기 위한 이별이라 여기며 짐승의 아가리처럼 입을 쩍 벌린 음침한 굴 안으로 몸을 날렸다. 흑의인영이 흐르는가 싶더니 낙헌지의 모습은 무저갱 어디에도 없었다.
제4장 늙은 영웅(英雄)의 참회(懺悔)
1
초추(初秋).
이제 대낮이라 해도 그리 뜨겁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침과 저녁으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신선한 바람이 불었고, 간간이 홍엽(紅葉)이 눈에 띄었다.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인지 들판에는 결실에 임박한 오곡백과가 있고, 들에는 이제 단풍(丹風)의 절경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안휘성(安徽省)의 도계진(桃鷄鎭).
황혼을 등지고 도계진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흑삼청년 하나의 모습이 유난히 두드러졌다.
약간 큰 키에 찌지도 마르지도 않은 체격에 준수하다는 말로도 표현의 부족을 느끼는 이목구비를 한 약관(弱冠) 청년이었다.
봉황(鳳凰)이 까마귀의 날개를 한 듯 복장은 형편없었다.
너덜너덜해진 흑의는 거지라도 입기를 주저할 정도로 흉칙했고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짐승 굴 안에서 수십 일을 살다 나온 사람처럼 옷에서 누린내와 곰팡이가 피어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청년은 몹시 허기진 표정이었다.
'큰일이군. 지니고 있는 은자가 없으니 어떻게 해야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을까?'
주린 배를 채울 궁리를 하기에 여념이 없는 청년의 눈빛은 담담한 가운데 붉은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충혈되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은은한 홍광(紅光)이었다.
눈빛이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눈이 피로해서가 아니었다.
청년의 몸 안에 있는 막강한 마공의 힘이 반박귀진의 한계를 넘어서 눈빛을 그리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도계진은 화려한 가옥, 장원, 누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근처에서도 이름난 부촌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도계진 전역에 알 수 없는 살기(煞氣)가 팽배해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군. 거리거리를 지키고 있는 무사 차림의 사람들의 눈빛이 살기에 차 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거리를 걷는 청년은 가다가다 눈에 뜨이는 경장 차림의 강호인들을 보고 야릇한 기분이 되었다.
아주 기묘한 진세를 이루고 있는 일단의 무사들은 도계진 안에서 가장 화려한 장원(莊院)을 철통같이 포위하고 있는 중이었다.
〈 강남제일장(江南第一莊)〉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닌 고가(古家)인데 대문이 꼭 닫혀 있고 인기척이 없었다.
하지만 무공을 조금이라도 익힌 사람이라면 그곳이 나는 새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방비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강남제일장이라……, 무사들이 왜 강남제일장이란 곳을 중심으로 매복(埋伏)하고 있는 것일까? 누구를 기다리고 중인가?'
청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전방(錢房)을 발견하고 눈을 번쩍 떴다.
'일단 허기를 메우고 의복을 새로 사 입어야겠군.'
흑삼청년은 강남제일장에 대한 의혹을 훌훌 떨쳐 버리고 전방 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방 안에는 무사들이 눈알을 번들거리고, 노인이 주판알을 퉁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검을 가슴에 안은 무사 셋이 있고, 수염을 한 자 정도 기른 노인 하나가 있었다.
흑의청년이 전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세 명의 검사가 눈알을 부라리며 그 앞을 가로막았다.
"걸인은 환영하지 않는 곳이다."
검사 중 하나가 다짜고짜 내공을 발휘해 청년의 가슴팍에 일장을 가했다. 바람소리와 함께 개비수(開碑手)가 시전되어 청년을 때리기 직전 청년의 왼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미안하네만 걸인이 아니네."
"크으윽!"
개비수로 청년을 치려 했던 검사는 자신의 손이 청년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크게 놀랐다. 더군다나 잡힌 부분이 불 속으로 들어간 듯 화끈거려 고통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는 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아이구……, 무림고인을 몰라본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검사가 사색이 되어 눈물을 주르르 흘리자 흑삼청년이 웃으며 손을 풀어 주었다.
"다음부터는 무작정 사람을 치려 하지 말게."
청년은 금나수를 회수한 후 주판을 퉁기고 있는 노인 앞으로 다가가며 품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노인은 더럭 겁부터 집어먹었다.
"무… 무슨 일입니까? 은자를 원하신다면, 조… 조금은 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러다 실내에 은은히 퍼지는 보광(寶光)을 보고 입을 벌리며 탄성을 발했다.
"오오……!"
거지보다 궁색한 옷차림의 청년이 꺼내든 것은 아름답게 생긴 금갑(金匣)이었다.
용과 봉황의 무늬가 표면을 가득 장식하고 있고 군데군데 녹두알 만한 명주(明珠)가 박혀 있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이것을 팔고 싶소."
청년이 금갑을 내밀자 노인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입술에 침을 발랐다.
"이… 이것은 춘추(春秋)시대의 보물인 뇌정금갑(雷霆金匣)? 오, 이것을 직접 보게 되다니……, 이런 기연이 다 있나!"
"뇌정금갑이 그리 유명한 것이오?"
"이것은 도인들이 선계(仙界)의 보물이라고 하는 것이오. 소문으로는 남천관의 관주가 이것을 얻어 안에다 아주 귀한 물건을 넣어 두었다고 들었소."
청년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게 되자 빙긋 웃었다.
"그렇소. 바로 그것이오."
"그… 그럼 남천관 사람입니까?"
"그렇소."
노인은 뇌정급갑을 몹시 탐내 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그럼 왜 이것을 파시려 하십니까?"
"허기를 메워야 하는데 지닌 돈이 없어 팔려 하오. 사부라 할 수 있는 남천신군도 용서해 주실 것이오. 지금 약간의 돈으로 이것을 사 준다면 언제고 돈을 모아 세 배로 갚아주겠소."
"아이구, 남천신군의 제자이시란 말입니까?"
노인이 놀라 허리를 숙였다. 세 명의 검사도 마차가지였다.
'신군의 덕망(德望)이 여기까지 알려져 있군.'
뇌정금갑을 꺼내들고 감탄해 하는 청년은 남천신군에게서 뇌공삼보를 선물로 받은 낙헌지였다.
"헤헤……, 허기를 메우실 목적이시라면 이 귀한 물건을 제게 보여주신 값으로 충분히 은자(銀子)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도관에 기부금을 내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노인이 미소지으며 은자 백 냥을 서랍 안에서 꺼내 가죽 주머니에 넣어 낙헌지의 손에 들려 주었다.
"아… 이럴 수는 없소."
낙헌지는 깜짝 놀라 사양했다.
노인은 한껏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사양 마시고 받아 두십시오. 그리고 굳이 부담이 되신다면 언제고 기회를 봐 되돌려 주십시오. 남천관의 고수시니 신용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협명을 떨치려 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남천신군이 쌓고 복은 낙헌지가 받는 셈이었다.
낙헌지가 뭐라 감사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자 전방 주인은 밖을 가리키며 조그맣게 말했다.
"혹시 강남제일장의 일로 여기 오신 것은 아니십니까?"
"강남제일장의 일이 어떤 것인지 아시오?"
"헤헤……, 강남제일장의 노장주(老莊主)는 과거 강남십검(江南十劍)이라 불리던 열 분 절세검사의 우두머리 운리신룡(雲裏神龍)이십니다. 남천신군과도 안면이 있는 이곳 도계진의 영웅이시지요. 그 분의 고향집에 변괴가 생겨 도계진 사람들은 모두 걱정하던 중입니다."
낙헌지는 한껏 호기심을 보였다.
"변괴라면……?"
"얼마 전 괴무사들이 강남제일장을 힘으로 점령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지요. 안타깝게도 근처 오백 리 안에서 가장 어여쁘시다는 강남미인(江南美燕) 아가씨가 지금 붙잡혀 있지요."
노인은 무엇이 두려운지 들리 듯 말 듯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운리신룡은 삼십 년 전부터 강남제일검이라 불리던 절세고수였다. 십여 년 전 갑자기 자취를 감춰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의 명성은 여전했다.
돌연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전방의 나무문이 산산조각이 되어 부서졌다.
콰앙―!
일곱 명의 황의인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아주 신속했다. 전방의 호위무사 셋을 간단히 점혈해 쓰러뜨리고는 낙헌지와 전방노인을 완전히 에워쌌다.
"흐흐……, 네놈이 마을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지켜봤다."
황의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아이구!"
전방 주인은 사색되어 꿇어 엎드렸고 낙헌지는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일곱 사람을 쭉 둘러봤다.
모두 흉악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특징이라면 허리에 가죽주머니 서너 개씩을 차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옷자락에 글씨를 수놓고 있었다.
〈 百毒魔府(백독마부) 〉
그렇다. 그들은 천하의 어떤 문파와도 어울리지 않으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 나가고 있는 백독마부의 무사들이었다.
낙헌지는 백독마주에 대해 아직 잘 알지 못했다.
황의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낙헌지를 향해 손을 쳐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네놈이 강남제일장 근처로 올 때부터 강남십검의 우두머리이자 강남십검 중 유일하게 살아 있는 운리신룡의 하수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수인?"
낙헌지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크훗……, 네놈이 하는 말을 다 들었다. 걸인 차림으로 여기 온 이유가 강남제일장의 정세를 염탐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하……, 그렇소?"
"크훗……, 천리(天理)를 거역한 강남십검 중 아홉은 이미 죽었다. 하나 남은 운리신룡도 죽고 말 것이다."
황의인의 말이 점점 살기에 찼다.
낙헌지가 점잖게 타일렀다.
"난 운리신룡을 모르는 사람이네. 잘못 짚었네."
"속일 수 없다. 네놈이 운리신룡의 하수인으로 여기 와 강남제일장에 누가 있나를 알아보려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단 말이다."
"후훗……,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군."
황의인은 낙헌지의 태도에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다짜고짜 일지를 쳐냈다.
"쓴맛을 봐야 실토를 하겠느냐?"
바위에 동전만한 구멍을 뚫을 수 있는 지공이 시전되는 찰나 낙헌지의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검은 그림자가 흐르는 듯하더니 지공이 무위로 돌아갔다.
"어엇……, 이형환위(移形還位)!"
황의인은 그제서야 낙헌지가 고수라는 것을 알고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낙헌지는 언제 보법을 밟았느냐 싶게 제자리에 우뚝 서서 뒷짐을 지고 천천히 말했다.
"나는 과객(過客)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들이 하는 수작을 보니 협의도를 걷는 한 사람으로 도저히 간과할 수 없구나."
낙헌지는 황의인을 향해 오른손을 쳐들었다.
아무런 음향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이 붉게 변했다가 은은한 기류를 만들어 황의인의 가슴을 뒤덮었다.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황의인은 몸이 얼음 굴로 빠지는 듯한 냉기를 느끼며 빳빳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꼼짝 못하게 되자 여섯 무사가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귀… 귀신 같은 놈이다!"
"암기를 쓰자!"
황의무사들이 공격을 가하려 할 때 낙헌지가 크게 외쳤다.
"멈춰라!"
취마음(醉魔吟)에 의한 호통이 떨어지자 여섯 황의인은 낯빛을 희게 물들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으윽……!"
"크으억!"
그들의 귓구멍에서 붉은 피가 내비쳤다.
낙헌지는 말 한마디로 여섯 사람을 굴복시키고는 여섯 중 가장 나이 어린 자를 골라 바짝 다가가며 물었다.
"살고 싶으냐?"
"제… 제발 살려 주시오."
낙헌지 나이 정도의 무사가 아래턱을 덜덜 떨었다.
"그러면 바른 대로 말해라."
"예예!"
"너희들은 어느 문파에 속하고 있느냐?"
"저… 저희들은 백독마부의 호법무사들입니다."
낙헌지는 뒷짐을 쥐며 그 앞을 천천히 거닐었다.
"여기 왜 왔느냐? 백독마부는 이 근처에 있느냐?"
"저희들은 수백 리 밖에서 왔습니다. 소부주(小府主)이신 독랑자(毒娘子)와 태상호법(太上護法), 그리고 총관(總官) 어르신네와 함께 왔습니다."
"무슨 일로?"
청년은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려는 요량으로 숨김없이 대답했다.
"숨어 지내고 있는 운리신룡의 수급을 잘라 백독마부로 돌아가기 위함입니다."
낙헌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를 죽이려 하느냐?"
"강… 강남십검은 백도마부의 불공대천지수라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강남십검을 모두 죽인 후 강호를 상대로 복파대전(復派大展)을 열고 세력을 넓히겠다는 부주님의 말씀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더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있습니다."
낙헌지는 그와 마주 선 채 물었다.
"강남제일장을 친 무리가 너희겠군."
"예."
"운리신룡을 끌어들이기 위함이냐?"
"그렇습니다. 그의 딸을 잡아두고 있습니다. 숨어 지내고 있는 운리신룡은 딸을 천금같이 귀히 여기고 있는 지라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낙헌지는 표정을 엄하게 굳혔다.
"고약한 짓이군, 인질로 사람을 끌어들이려 하다니……. 너희 백독마부는 지옥궁(地獄宮)같이 고약하구나!"
"지… 지옥궁!"
무사의 얼굴에 검은 그늘이 만들어졌다.
백독마부의 힘은 지옥궁에 비해 십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옥궁과는 털끝만한 충돌도 없었다.
백독마부의 부주는 지옥궁이 장차 천하를 얻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기에 부하들에게 지옥궁 사람들과는 절대로 충돌을 해서 안 된다는 명을 내린 바도 있었다.
하여간 지옥궁의 악명은 당금천하 어떤 사람에게라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낙헌지가 지옥궁과 백독마부를 한 무리로 보고 말할 때였다.
"흐음……!"
전방 밖에서 한숨 어린 침음성이 들려왔다.
부서진 문 사이로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흰옷을 입고, 얼굴을 흰 복면으로 가린 괴인이 언제 나타났는지 뒷짐을 지고 낙헌지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그의 눈빛은 낙헌지의 눈빛만큼이나 신비로웠다.
"하수들을 상대하기보다 노부와 시비를 가려 보는 쪽이 낫지 않을까?"
"당신은 누구요?"
낙헌지가 싸늘한 질문에 백의복면인은 차분하게 응대했다.
"노부는 백독마부의 태상호법이 되는 사람이네."
복면인이 창노한 음성으로 말하며 뒤로 물러났다.
'태상호법이라고? 제법 강한 자다. 백독마부를 속된 무리로만 생각했는데 내 판단이 잘못된 것 같군.'
낙헌지는 태상호법의 내공이 아주 강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역시 절대고수이기에 고수를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두려움이라고는 기러기 털끝만큼도 없었다.
"좋소. 나가 따져 보겠소."
낙헌지는 태상호법의 청을 쾌히 수락하고 전방 문을 지나 태상호법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태상호법은 낙헌지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일순 크게 놀랐다.
"그… 그 물건을 어디서 구했나?"
태상호법에게 지극한 놀라움을 주는 물건은 검집도 없이 허리띠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백룡신검(白龍神劍)이었다.
'이 물건을 재빨리 알아보는군.'
낙헌지가 뭐라 둘러대기도 전에 태상호법이 지레 짐작했다.
"그것은 백룡신검이 분명하다. 백의검제가 지옥제일검을 죽일 때 사라진 것인데……, 설마 지옥궁 사람은 아니겠지?"
"지옥궁? 하하……, 지옥궁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오."
태상호법의 눈빛이 기묘하게 반짝였다.
"지옥궁과 혹…… 원한이 있나?"
"내가 오래 살게 된다면 지옥궁은 내 손아래 멸망된 문파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오."
태상호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정 오만한 자군. 당금무림에서 감히 지옥궁에 대고 그토록 도전적인 언사를 표할 사람은 너 뿐일 것이다."
"흥!"
낙헌지는 냉소를 치며 강남제일장 쪽을 가리켰다.
"저 안에 운리신룡의 딸을 잡아두고 있는 일부터 해결을 하고 지옥궁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합시다."
"너는 강남제일검을 대신해 온 사람이냐?"
"아니오."
태상호법은 당당한 자세로 팔짱을 꼈다.
"그럼 왜 나서느냐? 설마 검노인(劍老人)으로 불리는 노부가 강남십검 중 아홉의 수급을 잘라 백독마부주에게 바쳤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단 말이냐?"
"노인이 강남구검을 죽였단 말이오?"
"허허……, 오래 걸린 일이었지. 지난 십 년을 구검을 죽이는데 바친 사람이 노부다. 이제 하나가 남았을 뿐이다. 강남제일검의 딸은 운리신룡의 수급이 노부의 품안으로 들어올 때 자연히 자유로운 몸이 될 것이다."
낙헌지는 태상호법이라는 자가 독랄한 악인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의 악독한 처사가 더 궁금했다.
"강남십검을 왜 끝까지 죽이려는 게요?"
"그는 죽어야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마라. 노부는 부주께 은혜를 입어 강남십검을 죽이는 것으로 그 은혜를 갚으려 할 뿐이다."
"흐음……, 그렇소?"
낙헌지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태상호법 검노인은 다시금 그를 유심히 살폈다.
'괴청년이군. 백독마부에 대한 소문을 모르고 있는 강호인이 있다니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군. 그리고 백룡신검은 어디서 구했단 말인가?'
그는 굳이 낙헌지와 격돌하고픈 생각이 없는 듯 한 마디 던졌다.
"운리신룡과 관련이 없다면 나서지 마라. 살신의 화를 자초하게 된다."
"하하……, 내 고집은 남의 말에 꺾이지 않소."
"관(棺)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단 말인가?"
낙헌지는 상대의 살기 어린 분위기를 전혀 무시했다.
"나를 놀라게 할 무공이 있다면 상관하지 않겠으나…… 내가 강남제일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오."
검노인의 눈빛에 잠시 갈등이 비쳐 나왔다.
"흥, 정말 검노인이라는 이름을 모르는군. 죽기를 자청한단 말이냐? 하지만 노부는 아무나 죽이는 살인마가 아니다. 어서 떠나라!"
"하하……, 그냥 가지는 않겠소.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소."
낙헌지가 호기롭게 외칠 때 어디선가 전음집밀에 의한 음성이 들려왔다.
"굳이 노부를 돕겠다면 검노인과 싸우기 보다 취영루(聚英樓) 이층으로 와 노부를 찾게."
아주 가는 음성이었다. 물론 낙헌지로서는 처음 듣는 음성이기도 했다.
'누굴까?'
낙헌지는 전음집밀이 상당히 먼 거리에서 들려왔음을 짐작해 상대의 무공을 가늠해 보았다.
돌연, 검노인이 손을 흔드는가 싶더니 낙헌지의 몸 주위로 백팔 개의 검화가 피어올랐다.
"어엇―?"
신비한 목소리에 잠시 정신이 팔려 있던 낙헌지는 갑작스런 공격에 놀라 뒤로 세 걸음 급히 물러났다.
쐐애애액―!
낙헌지의 옷자락이 검기에 잘려 나비같이 날아오르며 검노인의 손이 허공에서 정지되었다.
검노인은 크게 놀라 외쳤다.
"놀랍군, 노부의 쾌검을 피한 유일한 사람이다. 운리신룡보다도 낫구나!"
낙헌지의 역시 상대를 달리 보게 되었다.
'무서운 수법이었다. 아무리 방심했다 해도 순간적으로 나의 옷 자락을 자르다니……, 이 노인의 무공은 남천관을 괴멸한 지옥제일검과 버금갈 정도다.'
낙헌지는 검노인과 한 번 싸워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보다 신비한 목소리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일단 그곳으로 가보자. 일이 점점 재미있게 되어 가는군.'
낙헌지는 옷자락이 잘린 데서 오는 노화를 간단히 풀어버린 후 검노인을 향해 차가운 눈빛과 함께 말했다.
"잠시 후 와서 따져보겠소. 그러니 떠나지 마시오."
"어디로 가려 하느냐?"
"하하……, 잠시 후 봅시다."
낙헌지는 웃으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
비천추운신법(飛天追雲身法)이라는 상승절학이 시전되며 낙헌지의 몸은 순식간에 검노인의 망막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검노인은 얼떨떨해 하는 눈빛을 보였다.
"대체 저 자는 누군가? 당세에서 들어보지 못한 초고수다."
이때 한 줄기 향풍(香風)을 끄며 검노인 바로 곁으로 떨어져 내리는 홍의여인(紅衣女人)이 있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육체를 가진 경성(傾性)의 미인으로 입술 끝이 밑으로 처져 아주 매서운 맛을 풍겼다. 하지만 눈이 번쩍 뜨일 절색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용모였다.
"검노인의 일 검을 피하는 자가 있다니 놀랍군요."
홍의여인은 검노인과 친숙한 듯 가까이 다가서 한 마디 던지고는 낙헌지가 자취를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다시 오면 살려 보내서는 안 됩니다. 검이건 독이건 가리지 말고 놈을 죽여야 합니다. 백독마부의 일을 방해하는 자는 하나도 살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용모는 절세적이지만 마음은 아주 독한 여인 같았다.
검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운리신룡을 죽이기 전이라면 소부주(小府主)의 말에 따라 괴청년으 죽일 것이나, 운리신룡이 죽은 후라면 손을 쓸 수 없소. 운리신룡의 수급을 잘라내는 것으로 부주와 나와 사이의 모든 거래가 끝나는 것이니까."
"호호……, 맞는 말이에요."
홍의여인의 눈에서 차가운 빛이 흘렀다.
'흥, 어리석은 늙은이! 사부님의 수단이 그 정도뿐인 줄 알았더냐? 운리신룡을 죽인 후라도 너는 떠나지 못한다. 네 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안다면 말이다.'
홍의여인은 아주 자신만만해 보였다.
'운리신룡이 새벽에 이백 리 밖에서 모습을 보였다는 정보가 정확하다면 그 자는 이 근처에 당도해 있을 것이다. 죽이는 일은 시간문제이다.'
홍의여인은 매서운 눈빛을 흘리다가 유령처럼 사라졌다.
"아……!"
검노인은 여인이 사라지자 나직이 한탄하며 눈을 꾹 눌러 감았다.
'십 년 노예생활이 이제 끝나게 되는지 모르겠군. 그 사이 세상에 대한 불충(不忠)의 죄를 어찌 씻어야 한단 말인가?'
그의 노안에 짙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2
낙헌지는 도계진 안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취영루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취영루는 도계진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누각이 훌륭하고 음식 맛이 좋았으나 워낙 후미진 장소인지라 단골이 아니고는 잘 찾지 않는 고급 주루가 바로 취영루였다.
주루 안은 한산했다.
낙헌지는 취영루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다시 신비한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빠르군. 벌써 오다니."
이층 난간에 서서 낙헌지를 바라보는 백발노인 하나가 있었다. 매우 평범해 보이는 모습인데 얼굴빛이 낙헌지를 가볍게 긴장시켰다.
'진짜 얼굴이 아니다. 역용환(逆容丸)을 써서 변색시킨 얼굴이다.'
그는 노인이 역용하고 있다는 것을 즉시 간파했다.
"노인장이 나를 불렀소?"
"그렇네."
"하하……, 곧 가리다."
낙헌지는 흔쾌한 표정으로 계단을 통해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층은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노인 혼자만 있는 것이 아주 쓸쓸해 보였다. 수수한 마의(麻衣)를 걸치고 있는 노인의 눈빛은 아주 밝았다.
'고수다. 적어도 백년내공(百年內功)을 지녔군.'
낙헌지가 나름대로 상대를 가늠할 때 노인은 품안을 뒤져 옥갑 두 개를 꺼냈다. 두 개의 옥갑은 노인의 손짓에 의해 탁자 바닥을 파고들었다. 저저로 뚜껑이 열었다.
"흐음……, 멋진 구슬이군."
낙헌지는 옥갑 안에 들어있던 용안만한 명주들의 보광에 눈이 머는 듯한 황홀감에 사로잡혔다.
오른쪽 옥갑에는 알이 굵은 명주 열 다섯 개가 들어 있고, 왼쪽 옥갑에는 작은 명주 서른 개가 들어있었다.
"이 중 하나를 갖게."
노인의 느닷없는 말에 낙헌지는 검미를 치켜 올렸다.
"이것은 주겠단 말이오?"
"옥갑 두 개 중 하나를 갖고 남은 하나는 나의 딸에게 전해 주게. 그것이 옥갑 하나를 주는 대가이네. 두 개의 옥갑은 나의 전 재산의 반에 해당되네. 어느 것을 골라도 같은 값이지."
"무슨 말씀이오?"
"허허……, 하나를 갖는 대신 다른 하나를 나의 딸 강남미연에게 전해 달라는 말이지."
"강남미인? 그럼 노인장이 백독마부가 찾는 운리신룡(雲裏神龍)이시오?"
"그렇다네."
노인은 얼굴 표면을 쓰다듬었다. 가루약이 떨어져 내리며 노인의 살색이 희게 변화했다. 낙헌지가 미리 알아냈듯 백발노인의 얼굴은 역용환에 의해 바뀌어진 얼굴이었다.
본래의 모습은 신선의 풍모로 아주 헌앙했다.
"이제 얼굴을 가릴 필요는 없겠네. 자네의 무공이라면 노부의 딸을 무사히 구해낼 수 있을 것이네. 그 아이만 무사하다면 다른 소원은 없네. 노부가 검노인과 비무하는 사이 노부의 딸을 구해 안전한 곳으로 보내 주게나."
낙헌지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꼭 비무를 해야 합니까?"
"피할 수 없는 싸움이네. 아홉 아우가 이미 죽었네. 노부 혼자 살아있는 셈이지. 죄값을 치르는 것이니 억울하지는 않네."
"어떤 사연입니까?"
"백독마부주에게 죄를 지었으니 목숨으로 갚을 수밖에. 아……, 그녀에게 죄를 지어 그녀를 협녀(俠女)에서 희대의 독녀(毒女)로 화신케 했으니 백번 죽어도 억울한 것은 없다네."
운리신룡은 탁자 위에 있는 술병을 들고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당대의 영웅답지 않게 표정이 아주 처량했다.
'무슨 말일까?'
낙헌지는 잠자코 그가 다시 말하기를 기다렸다.
"후우……!"
운리신룡은 술 한 병을 다 비우고는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지옥궁과 함께 세상을 어지럽히는 백독마부는 강남십검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다네."
"대체 어떤 죄를 지었다는 것이오?"
"십여 년 전 금갑신구(金匣神龜)를 얻게 되자 죽었다고 소문난 천약선자(千藥仙子)의 일을 아는가? 그녀가 바로 지금의 백독마주일세. 그리고 그때 그녀를 암습해 거의 죽게 하고 금갑신구 내단을 훔쳐 열 조각으로 나눠 한 조각씩 먹는 천약선자 휘하의 십검(十劍)이 바로 강남십검일세."
낙헌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천약선자는 우리들을 믿었네. 그래서 호법을 부탁했었다네. 하지만 우리들은 보물에 눈이 멀어 그녀를 암습해 쓰러뜨렸다네. 우리는 금갑신구 내단을 훔쳐 나누어 먹고는 전보다 두 배 강한 고수가 될 수 있었다네."
과거의 치부를 털어놓는 운리신룡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게만 보였다.
"한데 우리 손에 쓰러졌던 천약선자는 당시 금강불괴지신이었는지 죽지 않고 살아나 오늘의 백독마부주가 된 것이네."
들을수록 놀라운 일이었다.
"검노인은 천약선자가 고용한 청부살인자라네. 그는 인형설삼(人形雪蔘) 한 뿌리를 받는 대신 십검의 수급을 주기로 약속했었다네. 허허……, 인과응보(因果應報)이지."
운리신룡은 쓸쓸히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허리가 유난히 구부정해 보였다.
"비밀을 지켜 주게나. 그리고 노부의 딸에게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말아 주게. 늙은이의 마지막 부탁일세. 적어도 그 아이한테만은 부끄러운 아비가 되고 싶지 않네."
"잠깐!"
낙헌지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운리신룡은 씁쓸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살 생각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렸네. 십오 년 전 지은 죄로 이제껏 괴로워하며 살아 왔다네. 죄값을 치르러 가는 것이니 도울 생각 말게. 굳이 돕고 싶거든 옥갑 하나를 받고 노부가 검노인과 싸우는 틈을 이용해 딸을 구해주게나. 검노인의 백 초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니 딸을 구할 기회는 있는 셈이지."
운리신룡은 그렇게 말한 후 창문을 통해 훌쩍 날아 사라졌다.
낙헌지는 운리신룡이 훌쩍 떠나가자 잠시 생각을 굴리고는 소매를 휘저었다. 능공섭물진기가 일어나 탁자에 박힌 두 개의 옥갑이 빠졌다.
낙헌지는 왼손으로 옥갑을 움켜쥐는 동시에 운리신룡이 사라진 방향을 따라 비천추운신법을 시전했다.
검은 옷자락이 흔들리는 가운데 그의 몸이 삼십여 장 밖을 달리게 되었다.
낙헌지에게 비천추운신법을 전수해 준 사람은 대무신국의 삼밀사 중 하나인 비천신매였다. 비천추운신법은 대무신국의 절예 중 상급에 속하는 상승경공이었다.
낙헌지는 별빛이 흐르듯 빨리 달려 곧 운리신룡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운린신룡의 신법도 지극히 뛰어났지만 낙헌지에게 비한다면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하하……, 혼자 떠나시면 어찌하란 말씀이오?"
낙헌지가 웃으며 운리신룡의 어깨 바로 옆으로 달라붙자 운리신룡은 감탄에 젖었다.
"오……, 과연 절세고수였군. 소협이 검노인의 일 검을 피하는 것으로 대충 짐작했네만 정말 뛰어난 무공이군. 부디 나의 부탁을 잊지 말아 주게."
그는 자신의 목숨보다 딸의 안위에 대해 더 걱정을 하고 있었다.
"백독마부는 노부를 위해 아주 지독한 함정을 팠네, 만에 하나 노부가 그들 손에 죽지 않는다면 노부 대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네, 그러니 검노인과 노부 사이의 비무에 끼여들지 말아 주게나."
낙헌지는 그의 기개에 존경심이 일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시오?"
"허허……,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노부는 하늘을 우러러 살 수 없는 죄인이네."
운리신룡은 씁쓸히 말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던 두 사람은 취영루를 떠나 차 한잔 식을 시간 정도 달려 강남제일장 근처로 다가서게 되었다.
"노부가 최대한 검노인과 맞서 보겠네. 노부의 딸을 구해주게. 딸을 무사히 구해준다면 죽는 순간까지 자네를 고맙게 생각하겠네."
운리신룡은 강남제일장의 정문에서 백여 장 떨어진 곳에 이르자 낙헌지에게 다시 당부하고는 훌쩍 날아올랐다.
"차아앗!"
기합소리가 근처를 뒤흔들었다.
운리신룡은 일갈을 터뜨리고는 전 잠룡승천(潛龍昇天) 신법으로 날아올랐다가 비연천림(飛燕穿林) 신법을 이용해 강남제일장 정문앞에 내려섰다.
"어느 놈들이 노부의 집을 점령했느냐? 노부 운리신룡이 집을 비운 사이 이런 망나니짓을 한 자들은 노부의 신검 아래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운리신룡의 출현에 강남제일장 근처에서 함성과 함께 사람의 모습이 속속 나타났다.
"운리신룡이 나타났다!"
"천라지망을 쳐서 포위하라!"
"한번 들어선 이상 다시는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수십 명의 홍의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와 운리신룡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원형진 하나를 구축했다.
허공에서부터 백의인영 하나가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흰빛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백의노인은 다름아닌 태상호법 검노인이었다.
그는 어디엔가 숨어 있다가 운리신룡의 외침소리를 듣고 나타난 것이다.
"잘 왔다!"
백의노인의 눈에서 살광이 일어났다.
"으음……!"
죽기를 각오하고 모습을 드러낸 운리신룡이었으나 백의인이 정면으로 막아서자 공포를 느끼는지 몸을 움찔했다.
"그대가 바로…… 검노인이라는 자로군."
운리신룡은 수 시진 전 도계진에 도착해 강남제일장 근처의 정세에 대해 이미 소상히 알았지만 마치 방금 도착한 사람같이 행동했다.
이유는 물론 낙헌지에게 행동의 자유를 주기 위함이었다.
낙헌지는 운리신룡이 검노인에게 가로막히고 그들의 모습이 사람 그림자로 인해 보이지 않게 되자 손바닥에 땀을 쥐었다.
'운리신룡을 그냥 죽게 해서는 안 되는데……!'
그는 백독마부의 악도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운리신룡을 구할까 하다가 일단 그의 딸을 구해내기로 작정했다.
'지금은 죽을 작정을 했는지 모르나 사랑하는 딸을 보게 된다면 마음이 돌아설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선 강남미연이라는 여인을 구하자.'
낙헌지는 담장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주위를 둘러본 후 위로 슬쩍 날아올랐다.
잠영비(潛影飛)라는 절묘한 마도신법(魔道身法)이 시전되며 낙헌지의 모습은 소리 없이 강남제일장 안으로 움직여 들어갔다.
낙헌지는 땅 위를 스치듯 날며 지극히 넓은 강남제일장의 뜰을 가로질렀다. 검은 구름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몇 개의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차― 앗!"
"죽어라!"
장원 밖에서 검노인과 운리신룡의 호통소리가 강철음과 함께 들리기 시작했다.
'벌써 비무가 시작되었군.'
낙헌지는 죽음을 각오한 운리신룡의 처사가 몹시 안타깝기만 했다. 생면부지인 자신을 믿고 딸을 맡겼으니 반드시 그의 딸을 구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문득 바람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낙헌지는 거목의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누각 안에서 훌훌 날아오르는 홍의여인 하나가 있었다. 아주 아름답게 생긴 여인인데 입가에 흘리고 있는 웃음이 지극히 사악하기만 했다.
"호호……, 운리신룡이 딸 때문에 함정 안으로 걸어 들어왔군. 호호호……, 운리신룡의 수급을 얻는 것은 시간 문제다."
홍의여인은 득의해 중얼거리며 강남제일장의 정문 쪽으로 바삐 달려갔다.
낙헌지는 그녀가 스쳐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모습을 드러내며 다소 놀라운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서서(西施)라는 전설적인 미녀(美女)도 저 여인만은 못했을 것이다.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러나 아름다운은 겉보다 내적인 것이 중요한 법이야. 저 여인은 독가시를 지닌 장미일 뿐이다."
낙헌지는 홍의여인의 뒷모습을 힐긋 바라보다가 누각을 향해 몸을 날리기를 계속했다.
"누구냐!"
"서라!"
아무도 없는 듯하던 누각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두 명의 황의중년인이 있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숨어 있었군."
낙헌지가 그들의 머리 위쪽에 이르러 감탄해 하며 잠깐 신형을 안정시켰다.
"적이다!"
"죽여라……!"
황의인들은 낙헌지의 초절한 경신법에 공포를 느끼고 뒤로 물러나며 양 소매를 어지럽게 흔들어댔다.
피피피핑―!
소매가 바람을 일으키는 동시에 매캐한 연기가 세 사람의 몸을 휘감았다.
"으음, 화혈사(化血砂)를 쓰다니!"
낙헌지는 검붉은 독무를 보는 순간 눈에서 냉광을 일으켰다. 화혈사는 먼지 한 알만으로도 황소 한 마리를 죽일 수 있다는 아주 무서운 맹독(猛毒)이었다.
"나를 죽이려 하다니 그냥 있지는 않겠다!"
낙헌지는 화혈사가 날아들자 손바닥을 활짝 펴 두 노인을 겨냥했다.
콰아아아―!
장심에서 한 줄기 붉은 기류를 피어오르며 화혈사는 날아들던 기세를 되돌려 황의인들 쪽으로 되돌아갔다. 황의인들이 내던졌을 때보다 열 배는 빨랐다.
"으헉―?"
"강기로 화혈사를 되돌렸다!"
황의인들은 낙헌지가 독에 중독되어 죽었다 싶다가 독안개가 되돌아오자 아연실색해 눈을 질끈 감았다.
검붉은 기류가 그들의 몸을 휩쓰는 가운데 화혈사에 적중된 그들의 옷과 피부가 스르르 녹아 버리고 뼈와 살이 찰나지간 피고름으로 화해 툭툭 떨어져 내렸다.
"크으으으……!"
"아― 악!"
황의인들은 순식간에 맹독에 중독돼 핏물로 화했다.
"밀로만 듣던 화혈사의 위력이지만 정말 끔찍하군. 이렇게 무시무시한 독물이 백독마부 안에 아직 많이 있다면 무서운 일이다."
낙헌지는 두 사람의 시체가 흐물흐물 녹아버리는 것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일이냐?"
누각 안에서 또 다른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들린 비명 소리냐? 어서 보고해라!"
중년인의 외침이 야음을 때릴 때 낙헌지는 누각 이층의 창문가로 접근했다.
낙헌지는 창문가로 다가서며 막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사악한 용모의 중년인을 볼 수 있었다.
"왜… 왜 대답이 없느냐?"
순간 그의 얼굴을 향해 뻗어 나가는 흰 손 하나가 있었다.
"이것이 대답이다!"
차가운 손이 중년인의 목덜미를 움켜잡는 동시에 체격이 당당한 청년이 그를 밀치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케에엑!"
중년인은 청년의 손에 목을 졸리게 되자 고통스러운지 오만상을 찡그리며 이마 위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돋웠다. 그는 상의를 벗은 상태였다. 그리고 하의 바지 끈도 느슨해 있었다.
'이 놈도 백독마부 사람인가?'
낙헌지는 중년인의 용모가 몹시 고약하다 여기며 어둠 속에 누워있는 희끄무레한 사람 그림자를 보게 되었다. 그는 너무도 생소한 광경에 그만 굳어지고 말았다.
'아……!'
제5장 검노인(劍老人)의 정체
1
불이 켜지지 않은 방 안에는 전라(全裸)의 여인 하나가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침상 아래로는 옷가지가 떨어져 있었다.
두 개의 육봉(肉峰)이 낙헌지의 눈을 자극하자 그는 절로 신음성을 토해냈다.
"으음……!"
낙헌지로서는 처음 보는 황홀한 여체였다.
희디흰 피부를 가진 여인은 마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살찌지도 않은 적당한 모습이었다.
눈을 꼭 감고 있는 얼굴 모습은 산 속 깊이 피어나 있는 수선화 같이 청초했고, 가늘고 긴 목은 학과 같이 우아했다.
부푼 앞가슴은 여인으로서 아주 대단했다. 두 개의 젖무덤은 어떤 사나이라도 손바닥으로 다 쥐지 못할 정도로 커다랗고 탄력이 있어 보였다.
젊음을 상징하는 가는 허리, 백옥같이 고운 아랫배, 엷은 방초지대로 덮인 음부, 그리고 몸무게로 인해 모양이 조금 일그러져 있는 탄탄한 둔부와 쭉 뻗은 다리의 선이 너무도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낙헌지는 절로 치솟는 욕정에 깊이 숨을 들이켰다.
여인은 죽은 듯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러나 귀를 크게 열고 자세히 들어본다면 아주 가는 숨소리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왜 벌거벗고 있을까?'
낙헌지는 중년인의 목을 움켜쥐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돌연 괘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군."
여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낙헌지였지만 방안의 나녀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모를 리 없었다.
"네놈이 필경 저 여인을 겁탈하려 했던 게로구나!"
낙헌지의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내공에 의한 핏빛 안광이 일어나자 중년인의 얼굴이 땀에 흠뻑 젖었다.
"소… 소부주님의 명에 따른 것이다. 감히 나의 일을 방해한다면, 백… 백독마부의 적이 되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너도 백독마부냐?"
"그… 그렇다. 나는 백독마부의 총관(總官) 탐화옥봉(探花玉蜂)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나는 소부주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을 뿐이다."
"소부주가 네놈에게 뭘 시켰느냐?"
낙헌지가 손아귀에 힘을 가하자 탐화옥봉은 숨통이 조여 캑캑거렸다.
"소… 소부주는 강남미연(江南美燕)을 시비로 두고 싶어하신다. 크윽……, 하지만 강남미연이 말을 듣지 않아 나를 강남미연의 지아비로 만들어…… 장차 꼼짝 못하게……."
"강남미연? 그렇다면 저기 누워 있는 여인이 강남미연이란 말이냐?"
"그… 그렇다."
"으음, 정말 괘씸한 짓들이군."
낙헌지는 분노를 발하며 손에 내가강기를 주입했다.
"크으윽!"
탐화옥봉의 목뼈가 부러지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다시 되돌아 오지 못했다. 당당한 백독마부의 총관 치고는 너무도 한심한 죽음이었다.
낙헌지는 탐화옥봉의 목뼈를 꺾어버린 후 강남미연 곁으로 다가가 탄식했다.
"운리봉 노인이 걱정했던 것이 바로 이런 일이었군. 아……, 이 여인에게 죄가 있다면 무림고수의 딸로 태어난 죄일 것이다."
낙헌지는 강남미연의 손목을 잡아 보았다. 아주 따스하고 부드러운 촉감에 그의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그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맥을 진단했다. 의독(醫毒)에 능한 그는 이내 강남미연의 가슴 가운데 유근혈(乳根穴) 부위가 막혔음을 파악했다.
"낭자를 구해드린 후 낭자의 부친 또한 구해 드리겠소. 그 다음 백도마부를 없애 두 모녀가 시름을 잊고 살도록 하겠오."
낙헌지는 손가락을 빳빳이 세워 강남미연의 포동포동한 왼쪽 젖가슴 가운데를 찔렀다. 손끝으로 매끈한 탄력이 전해 왔다.
"아!"
강남미연의 감겼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강남미연은 자신의 얼굴 가까이 냄새 고약한 사나이의 얼굴이 보이자 사색이 되어 악을 썼다.
"이 나쁜 놈!"
강남미연의 손바닥이 낙헌지의 뺨을 향해 흔들렸다.
낙헌지는 얼른 손을 뻗어 그녀의 곱디고운 손목을 나꿔채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낭자의 친구요. 낭자의 가친이 보내서 온 사람이오."
"아… 아버님이? 아버님이 결국 오셨단 말씀입니까?"
"밖에 계시오."
강남미연은 자신의 안위보다 부친을 더 걱정했다.
"아아, 오시면 아니 되시는데……. 백독마부는 아버님이 당해 낼 수 없는 가공할 적인데 어째서 오셨단 말씁입니까?"
"낭자 때문이 아니겠소? 자, 어서 옷을 입고 나와 함께 존장(尊長)께 갑시다."
강남미연은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젖가슴과 사타구니를 가리고는 그를 재촉였다.
"소녀는 괜찮으니 어서 아버님께 싸우지 말고 급히 피하시라 전해 주십시오. 소녀는 죽어도 좋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낙헌지의 가슴을 떠밀었다.
"어서요!"
낙헌지는 운리신룡 부녀의 지극한 애정과 우려에 감복하고 말았다.
"알겠소, 꼭 구해 드리리다."
그는 창문을 통해 몸을 날리고는 그대로 강남제일장의 대문을 향해 바람같이 치달려 갔다.
낙헌지는 싸우는 소리가 없자 불안하기만 했다.
'설마 벌써 끝났단 말인가?'
그는 대문을 지나쳤다. 갑자기 두 어깨가 무거워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낙헌지는 그만 굳어지고 말았다.
대문 밖에는 목이 없는 시체 한 구가 피투성이가 되어 길게 누워 있고 피비린내가 감돌았다.
'한발 늦었다. 검노인은 너무도 강한 자다. 미리 내가 나섰어야 했는데…….'
목이 없는 시체는 방금 전 딸을 부탁하며 자신과 헤어졌던 운리신룡이었던 것이다. 지난날의 과오를 참회하며 죽기를 각오한 늙은 영웅은 그렇게 죽은 것이다.
낙헌지는 가련한 강남미연을 생각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끝났군."
운리신룡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수중의 검을 집어던지며 깊은 한숨을 토했다.
"휴우……!"
온갖 착잡한 감정이 교차된 한숨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운리신룡의 몸과 목을 분리케 한 장본인이었다.
백독마부의 이름을 천하대파(天下大派)의 지위로 올려놓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백독마부의 태상호법 검노인이었다.
그는 운리신룡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뇌까렸다.
"십검(十劍) 모두를 죽였으니…… 부주와의 거래도 끝이 났군."
검노인은 중얼거리다가 시선을 돌렸다.
운리신룡의 수급을 커다란 가죽 주머니에 담아 등에 멘 홍의여인은 검노인과 눈빛을 교차하며 미소를 지었다.
"호호……, 태상호법은 진정 검신(劍神)이십니다."
"소부주, 과찬이시오."
"호호호……, 태상호법의 무공이 출중하지 않았다면 사부님의 원한은 백 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독마부가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된 것도 사부님의 독공과 태상호법의 검법이 천하제일이기 때문이지요."
검노인은 담담한 눈빛으로 응대했다.
"부주의 독공은 확실히 절세적이오. 또한 부하들의 충성심이 강하니 백독마부는 이후 더욱 커질 것이오."
"호호……, 태상호법께서는 어찌해 본부를 다른 문파처럼 말씀하십니까?"
"노부는 운리신룡의 목을 자른 순간 백독마부 제자의 명단에 빠져야 하는 입장이 되었소. 소부주는 노부와 부주 사이의 언약을 알지 못하오?"
"호호, 압니다. 하오나 어찌 태상호법 같은 고수를 놓칠 수 있겠습니까? 태상호법은 이후에도 계속 본부를 위해 충성을 하셔야 합니다."
홍의여인의 잔혹스러운 표정에 검노인의 눈에서 화광이 넘쳐 흘렀다.
"무… 무슨 말인가?"
홍의여인은 달빛마저 변색케 할 요사한 미소를 지었다.
"호호호……, 나는 사부님의 뜻을 그대로 전했을 뿐입니다. 사부께서는 태상호법은 죽어도 백독마부 사람이라고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 부주가 왜? 왜 그런 말을?"
"운기행공해 보신다면 그 해답을 알 것입니다. 관원혈(關元穴) 근처가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뭐… 뭐라고?"
검노인은 직감적으로 자신의 극독에 당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복면이 부르르 떨렸다.
홍의여인은 기고만장하여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여태는 인형설삼 한 뿌리를 받는 대가로 백독마부를 위해 일했으나. 호호호……, 이제부터는 극독에 죽는 꼴을 면하기 위해 일해야 알 것이다. 검노인, 그대는 독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간교한 계집! 감히 고약한 수작을 부리다니!"
검노인은 분기탱천하여 전신 가득히 살기를 뿜어냈다.
홍의여인은 그의 기도에 놀라 뒤로 미끄러지며 전음으로 말했다.
"검노인, 나를 해치려 한다면 즉시 네 정체가 천하에 폭로될 것이다,"
"으음……!"
검노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노… 노부가 누군지 안단 말이냐?"
"호호……, 모를 리 있느냐?"
"으음, 부주가 날 속이다니!"
"호호……, 너는 계속 백독마부를 위해 일해야 한다. 사부님은 너의 무공과 독공을 이용해 천하를 얻을 계획을 하고 계시다."
홍의여인은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파공성과 함께 두 사람 가운데로 떨어져 내리는 준수한 용모의 흑삼청년 하나가 있었다.
"운리신룡을 죽인 자는 내 손에 죽는다!"
분연히 외치는 청년의 등에는 여인 하나가 업혀 있었다. 여인은 점혈당해 정신을 잃은 듯 고개를 청년의 등에 대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흑의청년은 낙헌지였다. 그리고 그가 업고 있는 여인은 목을 잃은 채 죽어 있는 운리신룡의 딸 강남미연이었다.
그는 운리신룡이 죽은 후라 일단 강남미연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점혈해 등에 업고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나온 길이었다.
"운리신룡은 나의 친구셨다. 그를 죽인 자는 곧 나의 적이다. 백독마부주 천약선자가 원한에 의해 십검을 죽였듯이 이후 나도 운리신룡의 복수를 하기 위해 너의 더러운 무리들을 강호에서 소탕하리라!"
낙헌지의 목소리에는 막강한 진기가 깃들여 있었다.
취마의 절기인 취마음(醉魔吟)으로 중인은 진기가 흐트러지고 혈맥이 진탕되는 고통에 휩싸였다. 취마음을 듣고서도 몸을 휘청이지 않는 사람은 단 하나 검노인뿐이었다.
검노인은 백독마부주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에 격분하다가 낙헌지의 출현에 입술을 질끈 물었다.
'진정 뛰어나다. 저런 고수가 있었다는 것은 지금에야 처음 안 일이다. 아……, 저 아이는 노부가 갖고 있지 못한 불타는 의협심을 갖고 있다. 세상을 속이고 사는 사람들에 비할 수 없이 훌륭한 아이다.'
검노인은 낙헌지의 눈에서 일어나는 정기(精氣)에 혀를 내둘렀다. 그 심후한 공력은 자신의 일신 내공을 능가하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덤벼라!"
낙헌지는 운리신룡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에 목이 잘려 죽은 운리신룡의 참혹한 최후를 그냥 보고 넘어갈 수 없었다. 그의 호통이 강남제일장의 기왓장이 와르르 치솟아 올랐다.
"호호……!"
홍의여인은 웃음을 터뜨리며 낙헌지를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섰다.
"운리신룡의 친구라면 따라 죽어야 한다!"
홍의여인의 손가락 열 개가 퉁겨지며 분홍빛 가루가 흩날렸다.
달콤한 향기가 피어오르자 낙헌지는 냉소를 쳤다.
"요사한 계집, 미혼분(迷魂粉) 따위로 나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으냐?"
낙헌지가 눈을 부릅뜨고 우수를 들어올렸다.
콰류류류―!
장심에서 혈류가 피어오르며 근처가 용광로 같이 화끈 달아올랐다가 다시 평화로웠다. 낙헌지는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반면 홍의여인의 손톱 밑에서 퉁겨냈던 미혼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녀의 옷과 머리카락은 그을려 흉칙하게 변하였다.
"허억, 이… 이럴 수가!"
홍의여인은 낙헌지가 찰나지간 미혼분을 알아내고 삼매진화(三昧眞火)로 미혼분을 태워 버렸다는 사실에 아래턱을 덜덜 떨었다.
"미… 미혼분을 이리 쉽게 없애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그녀는 낙헌지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
낙헌지의 뇌리에 새겨져 있는 독공에 대한 지식은 백독마부 안에 있는 모든 독인보다도 해박했다.
그가 칠십 년 전 정의무성에게 제압 당해 자취를 감추었던 만독마의 전인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를 상대로 독공을 쓰는 우매한 공격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낙헌지의 눈에서 매서운 빛이 흘렀다.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무리들! 지옥궁을 없애기 위해 강호로 나온 사람으로 지옥궁을 치기 이전 너의 백독마부의 조무라기들부터 처단하리라!"
백독마부의 수하들은 낙헌지가 아직 어린 청년이기에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어림없다!"
"이 놈아, 백독마부를 하룻강아지로 알고 있느냐?"
"쓰러져라!"
수하들은 허공으로 솟구치며 낙헌지를 향해 각가지 독암기를 쳐냈다.
피피피핑―!
비황석(飛黃石)과 자오정(子午釘)이 하늘 가득히 소나기처럼 퍼부어졌다.
"죽음이 무서운 지 모르는 모양이군. 내가 너희들에게 진정 고통스런 죽음의 맛을 보여주겠다."
낙헌지는 분연히 외치며 일장을 내질렀다.
꽈르르르― 릉―!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권풍(券風)이 일어났다. 낙헌지를 향해 날아들던 암기들이 광풍에 휘말려 수하들 쪽으로 되돌아갔다.
"으흑?"
"피해라!"
무사들은 암기가 되돌아오는 것을 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 낙헌지의 권공이 그들의 몸을 쇠사슬로 엮은 듯 칭칭 묶어 버렸기 때문이다.
콰아앙―!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하늘 가득 피비(血雨)가 내렸다. 백독마부의 정예고수들이 낙헌지의 단 일 권 아래 핏물로 화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낙헌지는 오마의 공동전인답게 상대를 살려 두지 않았다.
상대를 살려둘 작정을 아예 하지 않는 싸움이 바로 낙헌지가 오마에게 배운 싸움의 요령이었다.
어디선가 놀라움에 찬 음성이 터져 나왔다.
"광… 광풍만리권법(狂風萬里券法)!"
낙헌지 곁으로 다가서는 인물은 백독마부의 태상호법인 검노인이었다. 그는 낙헌지의 수법을 알아보고 기절초풍 놀라 다가서며 급히 전음으로 물었다.
"적지만리객(赤地萬里客)과 어떤 사이냐?"
"아니,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낙헌지는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삼밀사의 하나인 적지만리객의 무공을 알아보는 인물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시간을 끌 때가 아니네. 어서 노부를 따라 오게나!"
검노인이 놀랍도록 다정하게 말하며 다짜고짜 낙헌지의 소매를 잡아끌고 훌쩍 날아올라 갔다.
두 사람의 모습은 탄지지간 자취를 감추었다.
모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낙헌지가 선보인 일 권으로 동료 십수 명이 절단나지 않았던가?
홍의여인의 표정이 제일 가관이었다. 그녀는 두려움과 분노로 복잡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되었다.
'진정 강한 무공이다. 강호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가 많다더니 사실이었군. 독공 한 가지로 천하에 이름을 날리기 힘든 세상이다. 백독마부가 커지기 위해서는 진정한 고수들과 힘을 합쳐야 한다. 검노인이 금제에서 벗어나 자유스러운 몸이 되어 버린다면 백독마부는 그 날로 끝나고 만다.'
그녀의 얼굴이 땀으로 번들거렸다.
"검노인을 떠나보낼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눈빛이 아주 맹랑했다.
그런 눈빛을 낼 사람이라면 아마 마음먹은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서슴지 않고 해낼 수 있을 것이다.
2
두 사람의 비월은 흡사 유성을 방불케 했다.
낙헌지는 검노인에게 소매를 끌린 채 십 리를 달려 계진을 벗어날 수 있었다. 검노인은 낙헌지가 암습할 수 있다는 것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노인이다. 하지만 반드시 운리신룡의 혈채(血債)를 받아내야만 한다.'
낙헌지가 이런 마음을 먹고 있을 때 검노인이 돌연 몸을 세웠다.
"여기라면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군."
"흥, 무슨 이야기를 한단 말이오? 나는 할 말이 없소. 당신의 수급을 베어 운리신룡 영전에 바칠 작정이오."
"노부는 죽고 사는 것을 십 년 전에 포기한 사람이네. 지금 있는 것은 허수아비 같은 육체뿐이지."
"무슨 말이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일세. 자네가 노부의 수급을 굳이 원한다면 지금 자결할 수도 있네."
낙헌지는 검미를 치켜 올리며 잠시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되었다.
"자결을 하겠다고?"
"물론 지금은 아닐세. 내가 헌신했기 때문에 커질 수 있었던 백독마부를 없애고 천하의 사마를 모두를 없앤 후 죽음을 택하고 싶네."
낙헌지는 그를 믿어야 할지 고민되었다.
"백독마부를 없앤다고? 당신은 백독마부의 사람이 아니오?"
"아……, 노부는 천약선자에게 인형설삼 한 뿌리를 받았기에 이제껏 백독마부를 위해 싸워 왔었네. 원래부터 백독마부 사람은 아니네. 인형설삼을 얻은 이유는 딸아이의 목숨이 당시 경각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지."
검노인은 초조히 서둘러 말하며 품안에서 기름종이로 싼 네모난 물건을 꺼냈다. 세 치 정도였는데 완전히 밀봉되어 있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 지 확인할 수 없었다.
"이것을 내 딸에게 전해 주지 않겠나?"
갑작스러운 부탁에 낙헌지는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운리신룡이 내게 청탁을 하다니 이제는 이 노인까지 부탁한단 말인가?'
검노인은 처연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것을 전해 주는 대가로 나의 목을 주겠네. 십 년 전 나를 하수인으로 부린 천약선자를 죽이고도 살아남게 된다면 자네를 찾아 나의 목을 떼어 주겠네.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으니 이것을 딸에게 전해 주게."
노인의 애원의 눈빛이 낙헌지를 감동시켰다.
"좋소. 믿을 만한 사람 같으니 한 번 믿어 보겠소. 이 물건을 반드시 노인의 딸에게 전해 주겠소. 대신 말 한 것은 지켜야 하오."
"허허……, 물론이네."
노인은 기름종이로 싼 물건을 낙헌지의 손아귀에 쥐어주고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 물건을 전하게 되면 어느 정도 안심이다. 옥란(玉蘭)이는 총명하니 나보다 일을 잘 처리할 것이다.'
검노인은 낙헌지를 응시하고는 의미 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나의 딸은 자네와 동문이라 할 수 있는 흑의검왕(黑衣劍王)과 같은 곳에 살고 있네."
"동문……?"
낙헌지가 내심 흠짓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의검왕이라면 일백정검수의 우두머리로 지금 검보(劍堡) 안에 머물러 있다. 그는 칠마령의 마지막 한 조각을 지키고 있는 마지막 희망인데…….'
검노인은 허리띠 삼아 차고 있던 붉은 가죽띠를 끌러 낙헌지에게 건넸다.
"이것은 백룡검의 검집이네."
낙헌지가 비로소 상대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너무도 놀라 몸을 휘청였다.
"그… 그럼 노선배가 바로……?"
"허허……, 노부의 정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검노인이 회한 어린 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낙헌지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마른침을 삼켰다.
"정녕…… 백의검제(白衣劍帝) 이보주(李堡主)시오?"
아……, 실로 경악할 일이었다.
백독마부의 태상호법으로 활약하며 강남십검을 처단한 당대의 살수가 바로 당대제일인 백의검제였단 말인가?
검노인은 씁쓸한 눈빛이 되어 나직이 말했다.
"노부는 강호에 큰 죄를 진 사람이네. 하지만 자네가 노부의 딸 옥란(玉蘭)을 보게 된다면 노부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될 것이야. 왜 노부가 모든 것을 버리고 딸의 생명을 구하려 했는지 말일세. 부탁이니 그 아이에게 내가 지금 어떤 신분으로 있다는 것을 말하지 말게나."
"그래도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노 선배님은 무림맹주(武林盟主)의 신분이 아닙니까?"
"아……!"
검노인은 침통한 탄식을 발하고는 한순간 그림자로 화해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낙헌지는 흥분과 격동으로 한동안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검노인은 분명 의문리에 실종되었다고 전해지던 무림맹의 맹주 백의검제 이궁이었다. 남천관 밖에서 지옥제일검을 어검술로 죽였다고 강호에 이름난 백의검제가 틀림없었다.
그가 십 년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은 이유는 백독마부를 세워 십검에게 암습당한 원한을 풀려 했던 천약선자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저 사람이 이 검으로 날 사람이었다니……!"
낙헌지는 땅에 뒹굴고 있는 검집을 주워 백룡보검의 검봉(劍峰)에 끼웠다. 영락없이 한 몸으로 맞아들었다.
백의검제가 곧 검노인이라는 것이 완전히 밝혀진 셈이었다.
'무림맹의 맹주로 사사로운 정에 끌려 사마외도와 함께 행동하다니……. 아, 혈육의 정이 무엇이기에 정사오기 중 최고의 고수를 십년 간이나 하인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낙헌지는 혀를 끌끌 차다가 신음소리를 듣게 되었다.
"으음……!"
강남미연이 정신을 차리며 맑은 눈동자를 드러냈다.
"아, 대협(大俠)!"
강남미연은 자신이 거지보다 추레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미남청년의 등에 업혀 있다는데 얼굴을 화끈 붉혔다.
"소저, 이제 정신이 드시오?"
낙헌지는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대하자 검노인으로 인해 흔돈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여… 여기는?"
"안심하시오. 이제 위험은 없소."
낙헌지는 애써 밝게 말했으나 사실 괴로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아……, 불쌍한 여인. 운리신룡이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하여간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다.'
낙헌지는 갈 길이 급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중대한 임무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 검보(劍堡)로 가서 칠마령의 마지막 한 조각을 지켜라! 그 조각이 칠마전 제자들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것을 할 사람은 너 하나뿐이다!
무저갱 안에서 삼밀사가 신신당부한 말이었다.
낙헌지는 검보의 보주 백의검제가 검보를 비운 지금 검보가 지옥궁 세력 아래 풍전등화임을 절박히 느끼다가 손에 힘을 주었다.
"아… 아파요."
강남미연은 낙헌지가 억센 힘에 손이 저린 지 두 뺨에 홍조를 떠올렸다.
낙헌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백 리 밖까지 낭자를 모셔다 드리겠소. 그곳에 가서 모든 이야기를 해 드리리다. 그때까지 나를 종으로 생각하고 나의 등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대협."
강남미연의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소리가 낙헌지의 등판을 통해 전해졌다.
그런 느낌은 낙헌지가 한 여인을 소유하게 되었음을 전하는 신호성이기도 했다. 물론 낙헌지는 지금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하……, 갑니다!"
낭랑한 웃음이 도계진 외곽 지대의 밤하늘을 깨뜨리는 가운데 흑선 하나가 그어졌다. 낙헌지의 모습은 이내 어두운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3
소호(巢湖).
용천산(龍泉山)의 남쪽에 광활히 형성되어 있는 소호에 새벽의 청신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잔잔하던 수면이 물안개로 뒤덮이며 가벼운 바람이 불어 소호의 수면에 주름을 만든다. 바람을 타고 나무 잎사귀가 날려 호수 물 위로 팔랑팔랑 떨어져 내리고 풀잎사귀가 눈발처럼 날아오른다.
가을의 새벽은 허연 서리로 인해 더욱 춥다. 차가운 공기가 입을 벌릴 경우 하얀 입김을 뿜게 한다.
이때 소호를 바라보며 바삐 걷는 흑삼청년 하나가 있었다.
등에 장검을 멘 청년인 데 옷매무새나 용모가 천하 어디에 내놓아도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불릴 만큼 뛰어났고, 여인들의 심금을 울릴 만하게 빼어났다.
"강남미연이 우는 모습을 보고 떠나게 되어 유감이다."
청년의 눈에는 은은한 홍광이 어려 있었다. 어떠한 기공을 익히고 있기 때문에 그런 눈빛이 나타나는 것이다.
"강남미연……, 그녀와 같은 절색여인이 자신을 찾지 않으면 나의 이름을 기억한 채 늙어 죽어버릴 것이라고 말할 줄이야."
강남미연은 부친 운리신룡의 죽음에 통탄하면서도 낙헌지에게 전적으로 매달렸다. 자신이 청백지신을 보인 여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내가 남천관에서 천한 하인이었다는 것을 말해도 믿지 않으니……"
청년은 다름아니라 오마의 공동전인이 되어 강호로 나온 낙헌지였다. 그는 강남미연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 준 후 모산(茅山)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검은 옷은 강남미연이 상점에 가서 친히 골라준 옷으로 옷섶마다 그녀의 정성이 가득 했다.
검은 옷 빛깔이 그의 유난히 흰 얼굴과 아주 좋은 조화를 이루었다.
"석진영(石眞英)! 그 놈이 모산 검보 안으로 잠입해 있는지 모르겠군. 자칫 지체하다가 놈이 성공하는 것을 소문으로 듣게 될 수도 있으니 서둘러 가야 한다."
낙헌지는 모산까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라도 혼신의 공력을 다해 달린다면 해가 지기 이전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서둘러야겠군."
낙헌지는 마음을 다지다 갑자기 몸을 세웠다. 호수 가를 따라 나는 듯 달리고 있는 일단의 무림인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낙헌지 앞쪽으로 제비가 물을 스치듯 날렵하게 지나쳐 가는 사람들의 수는 열이 넘었고 하나같이 영기발랄해 보였다.
"자칫하다가는 늦겠소."
"오백리 안의 영웅호걸들이 다 모이는 자리이니 늦게 당도해서는 안 되오."
"하하, 과거에 비한다면 흥이 나는 잔치가 아니겠소? 지옥제일검이 맹주에게 죽은 후 지옥궁의 활약이 사라졌고, 오늘의 연회를 시작으로 지옥궁 소탕이 시작될 것이라니 저절로 힘이 나외다."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는 청년들의 옷자락에는 금빛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 正義武林盟(정의무림맹) 〉
낙헌지는 그들이 지옥궁과 지옥제일검 입에 담자 그냥 있을 수 없어 재빨리 뒤쫓아갔다.
"여보시오!"
낙헌지가 한달음에 일행과 어깨를 나란히 하자 그 중 한 사람이 낙헌지를 돌아보며 호의적으로 물었다.
"소형제도 상청관(上淸觀)에 가시는 길이오?"
"상청관이오?"
"하하……, 무맹 총단에서 나온 외삼당주(外三堂主)님이 소호 근처 무림인들과 벌이는 연회에 가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외다."
그는 낙헌지의 정의스러운 모습에 조금도 의심의 눈빛을 보이지 않았다.
낙헌지의 헌칠한 용모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도 남았기에 그를 보고 악인의 관상이라 말할 사람은 단 하나도 없으리라. 게다가 말할 때마다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리는 모습이 순진하게만 보였다.
"처음 들었습니다만 귀가 솔깃해지는군요."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다 모였네. 아마 백 년 내 이렇게 큰 연회는 없었을 것이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유는 지옥궁이 멸망 직전이기 때문일 것이네."
"아, 그렇습니까?"
"하하……, 솔직히 말해 지옥제일검이 죽기 이전이었다면 모두 지옥궁을 두려워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을 것이네."
"정말 지옥제일검이 죽었습니까?"
낙헌지가 천연스럽게 묻자 청년 고수가 넌지시 핀잔을 주었다.
"무맹주께서 지옥제일검을 죽였다는 놀라운 소문을 아직 모른단 말인가? 지옥제일검이 죽는 동시에 무림에 평화가 시작되었다네. 하하하……, 이제 무림맹이 천하를 안정시킬 것이야."
모두 웃는 얼굴들이었다.
낙헌지도 그들을 따라 스스럼없이 웃었지만 내심은 아주 첨예하게 달아올랐다.
'지옥제일검이 죽었다고 소문이 났군. 석진영 그 놈의 수작이 멋들어지게 들어맞은 것이다. 중원고수들이 방심한 사이 지옥궁은 제 속셈을 다 찾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이상 그렇게 되지는 못한다.'
낙헌지의 눈빛에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전날의 원한이 아니라 의협심의 발로였다.
도관은 소호 근처에 웅장하게 세워져 있었다.
부근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고 수천 개의 깃발이 근처 나무숲을 현란히 장식하고 있었다.
상청관은 원래 무당파(武當派)의 분원(分院)이었고 무림맹이 세워진 이후 무림맹의 분타(分舵)가 된 장소였다. 지리적으로 무림맹의 총단 모산과 가까워 무림맹의 제일분타가 될 수 있었다.
그랬기에 강소(江蘇), 안휘(安徽), 절강(浙江)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상청관에 상주하다시피 했었다.
지금은 본래보다 백 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잔치 분위기가 한껏 고주되었다.
낙헌지는 청년무사들하고 함께 가다가 슬쩍 몸을 빼내 방문(榜文)이 붙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아무도 그를 주의해 보지 않았다.
낙헌지의 용모는 헌출했지만 명성은 전혀 없었기에 눈여겨볼 사람은 없었다.
방문은 아주 거대했다. 그것은 지옥궁과 십 년 간 싸움을 계속해 온 무림맹의 무수한 방문 중 가장 통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 천하무림동도(天下武林同道)에게 알린다. 〉
누가 썼는지 모르나 지극히 잘 쓴 글씨였다.
〈 천후사(天吼寺)와 남천관(南天關)이 지옥궁에 의해 희생되었지만 본맹도 지옥궁에 지대한 타격을 안겨 주었다.
십 년 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던 맹주께서 남천관에 출현하셔, 지옥궁 최강 고수였던 지옥제일검(地獄第一劍)을 고혼(孤魂)으로 만들어 버린 일이 그것이다.
지옥제일검의 죽음은 지옥궁의 멸망을 알리는 신호성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지옥궁이란 이름은 사실 지옥제일검이란 한 사람에 의해 유명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죽은 이상 지옥궁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에 비유될 수 있다.
이제 지옥궁이 멸망당할 때다. 중지를 모아 지옥궁을 치자!
― 무림맹(武林盟) 총순찰(總巡察) .〉
그 아래 서명이 있었는데 그것이 낙헌지를 경악케 했다.
〈 남천옥룡(南天玉龍) 석진영(石鎭英) 〉
남천옥룡 석진영이고 방문을 지은 장본인이었다.
"석가 놈이 총순찰이라고?"
낙헌지는 눈알이 충혈돼 화끈거렸다. 분노를 이기지 못함에 따라 단전에 모여 있던 혈발마공이 저절로 운기돼 눈알을 새빨갛게 물들여 버리는 것이었다.
'결국 놈이 모산 검보 안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했구나. 그렇다면 모산 검보는 지극히 위험하다. 모두들 지옥제일검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낙헌지는 애가 타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지옥제일검이 버젓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 몇이나 될 것인가. 모두들 희희낙락해 하고 있으니 장차 무림 백도의 앞날이 어찌될 것인가 애가 타기만 했다.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낙헌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아무에게나 소리를 버럭 지르려 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지옥궁 무리는 무림맹 내부에 있다. 내가 진실을 말한다 해도 나의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낙헌지는 예전의 미련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그는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점점 깨어나며 지극한 총명스러움을 되찾고 있는 중이었다.
'말로써 알린다고 사람들이 믿을 일이 아니다.'
낙헌지는 중인을 향해 남천관에서의 모든 내막을 밝힌다 한들 스스로 묘를 파는 어리석은 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남천관에서 장작들 패고 살아가던 어리석은 하인이 바로 자신이 었다. 과거 그를 알았던 사람은 이미 지옥제일검의 악랄한 수단 아래 시체가 되어 죽은 지 오래였다.
낙헌지는 생각에 깊이 잠겼다.
'이것은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임무다!'
제6장 지옥제일검(地獄第一劍)의 재출현
1
"온다!"
"외삼당주(外三當主)와 부총순찰(副總巡察)이 호법(護法) 다섯 분과 함께 오신다."
인파가 소용돌이를 치며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상청관을 향해 나는 듯 달려드는 일곱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다섯 노인과 두 명의 젊은이였다.
두 명 모두 뛰어나 보이는데 하나는 애꾸였고, 다른 하나는 외팔이였다. 그들의 표정은 오만무도한 듯하면서도 공손해 보였다.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용모였다.
낙헌지는 그들이 다가서는 것을 바라보다가 피가 마르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독목수라(獨目修羅)……?'
애꾸눈의 청년은 그가 죽는다 해도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저 놈마저 외삼당주가 되었단 말인가? 결국…… 무림맹이 몇 달 사이 지옥궁에게 완전히 먹힌 셈이다.'
낙헌지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지옥궁의 사정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흑면검제(黑面劍帝)가 궁주라 하는 것은 사실 이름뿐이며, 진정한 주인은 석진영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옥이검, 지옥삼검이 있다는 것과 지옥백검이 흑응을 타고 자유롭게 하늘을 난다는 것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독목수라가 무림맹에서 높은 지위라니……!'
낙헌지는 약간의 낙담과 함께 지극한 원한을 느꼈다.
자신을 양아들로 키워 주었고 지극한 정을 주었던 낙검엽 노인이 독목수라의 손 아래 머리통이 으스러져 죽을 때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지그시 이를 물었다.
'놈부터 죽여야 한다!'
독목수라와 외팔이 청년, 그리고 다섯 명의 노인이 상청관 내에 마련되어 있는 단상으로 올랐다.
낙헌지는 사람들이 수군수군거리는 데에서 일곱 사람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외팔이 청년은 천후협(天吼俠)이라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방천운(方天雲)으로 정사오기의 하나였다가 천후사와 함께 세상에서 사라진 천후사의 방장(方丈) 천후존자의 제자였다.
천후사가 지옥제일검이 이끄는 지옥궁 고수들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할 때 천행으로 구사일생한 행운아이기도 했다. 그는 무림맹의 부총순찰로 지금 지옥궁 타도에 선봉이 되어 있었다.
같이 온 다섯 노인은 검보오노(劍堡五老)였다.
백의검제가 의형으로 섬기고 있던 과거의 동해오노(東海五老)가 그들의 내력이며 하나같이 절세적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지금 그들의 지위는 무림맹의 특급 호법이었다.
낙헌지는 일곱 사람을 유심히 살피다가 그 중 천후엽의 눈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제법 유순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천후엽의 눈빛은 마공을 익힌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사악한 눈빛이었다. 다른 사람은 간과하지 못하는 일이겠으나 오마의 공동전인 낙헌지는 천후엽이 마공의 소유자임을 목을 걸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렇다. 저 놈도 지옥궁 소속이다.'
낙헌지는 시선을 돌려 오노를 살펴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신비스럽기만 했다. 일말의 사악한 기운도 깃들여 있지 않았다.
'분명 신공(神功)을 수련한 눈빛이다. 저들은 진정한 무림맹의 고수들이다.'
낙헌지는 지옥궁 소속이 독목수라와 천후엽 둘뿐이라 짐작했다. 그가 어떻게 둘을 죽일까 궁리하고 있을 때 독목수라가 손을 쳐들었다.
순간 장내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모두 숙연한 표정으로 독목수라의 말을 기다렸다.
독목수라는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한동안 울음에 젖어 애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소생은 이 자리를 빌어……"
울음 섞인 목소리가 시작되었다.
"지옥궁의 만행에 돌아가신 선사(先師) 남천신군의 영전에 제자로서 아직 복수를 하지 못한 것을 속죄 드리고 싶습니다."
"아……!"
모두 그의 말에 공감하는 눈치였다.
독목수라와 석진영이 정사오기 중 도가일인자 남천신군의 제자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여기 없었다. 그들은 사부를 끔찍이 섬겼고, 사부 남천신군이 죽은 후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독목수라의 우는 듯한 말이 계속되었다.
"지옥궁이 제명되지 않는 한 남천관과 천후사 고인들의 혼백은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방황할 것입니다. 지옥제일검이 죽은 것만으로는 복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열변을 토하자 모두 흥분된 표정이 되었다. 그의 논조와 억양은 아주 뛰어나 군웅들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지옥제일검을 죽였듯이 모두 죽여야 합니다. 지옥궁 무리들을 하나도 살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소굴로 쳐들어가 지옥제일검을 따르는………"
이 순간 그의 웅변은 느닷없이 들려온 괴소에 중단되고 말았다.
"흐흐흐……, 내가 죽었다고?"
언제 나타났는지 상청관 처마 위에 서서 군웅을 굽어보고 있는 흑의복면인 하나가 있었다. 무림인으로 적당한 체구에 싸늘한 눈빛을 한 흑의인의 복면에는 다섯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 地獄第一劍(지옥제일검) 〉
군웅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으헉, 지옥제일검……?"
"이럴 수가! 죽은 지옥제일검이 되살아났단 말인가?"
"우우……, 이것이 대체 꿈이냐 생시냐?"
흑의복면인은 군웅들의 경호성에 더욱 기고만장하였다.
"카하하……, 지옥제일검은 죽지 않았다. 나는 다시 태어난 지옥제일검이다. 이제부터 무림을 지옥으로 만들어 주겠다, 카하하!"
복면을 한 지옥제일검의 앙천광소는 군웅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의 소성에 실린 진기는 군웅 중 그 누구도 항거할 수 없는 아주 막강한 것이었다.
가장 놀라워하는 사람은 단연 독목수라였다.
한통속인 천후엽의 놀라움은 오히려 덜했다. 그는 지옥제일검의 죽음이 꾸며질 때 남천관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목수라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와들와들 떨었다.
"사제, 대체 어인 일인가?"
천후엽이 독목수라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독목수라는 안색이 새하얗게 변색되었다. 느닷없이 출현한 지옥제일검을 보는 그는 여전히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이것은 도저히……!"
남천관의 어리숙한 하인 낙헌지는 가짜 지옥제일검으로 광분하다 분명 백의검제의 어검술에 죽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사형인 지옥제일검이 이런 미친 짓을 할 리는 만무했다.
"흐흐흐……, 내가 만들 지옥은 이전의 지옥제일검이 만든 지옥과는 다른 지옥이다. 우선 나를 지옥제일검으로 만들어준 자들을 모조리 쳐죽일 지옥을 만들 생각이다. 이 자리에도 나의 지옥명부(地獄名符)에 들어 있는 자들이 있다. 훗훗……, 그들의 목을 베어 나의 말이 진실임을 천하에 알리리라!"
지옥제일검은 광소를 터뜨리고는 손을 휘저었다. 그의 손바닥이 새빨갛게 물들며 붉은 기류를 일으켰다.
콰르르릉―!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처마 아래 단단히 굳은 땅바닥에서 흙모래가 뽀얗게 피어올랐다. 둔탁한 폭음과 함께 한 자 가량 깊이의 글씨가 새겨졌다.
― 獨目修羅(독목수라) 地獄行(지옥행).
― 天候俠(천후협) 地獄行(지옥행).
도합 열세 글자가 군웅들 앞에 선명히 나타났다.
"하하하, 지옥 명단에 속한 자들은 바로 이들이다."
지옥제일검이 오 장 거리를 격하고도 지면에 한 자 깊이를 새겨넣자 군웅들은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우우……, 진짜 지옥제일검이다!"
"지옥제일검이 아니고 이런 내공을 구사할 사람은 없다!"
군웅들로 거의 메워졌던 상청관의 넓은 도장이 삽시간에 공허하게 되었다.
지옥궁을 치기 위해 저마다 의기를 가슴에 품고 달려온 그들은 저 먼저 살겠다고 뒤로 물러나는 모습은 실로 가관이었다.
"멈춰라!"
사자후신공(獅子吼神功)에 의한 호통이 군웅들을 침묵시켰다.
오로 중 검보일노(劍堡一老)가 시뻘개진 얼굴을 하고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눈길은 지옥제일검에게 고정되었다.
"네가 정녕 지옥제일검이란 말이냐?"
그의 외침은 십 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아들을 수 있을 거대무비한 사자후였다.
"하하……, 그렇다."
지옥제일검은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보일노는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며 다시 물었다.
"네가 정녕 맹주의 어검술 아래 절명(絶命)했다고 소문난 지옥제일검이란 말이냐?"
"훗훗……, 대체 어떻게 해야 믿겠느냐?"
그러자 천후존자의 제자로 들어갔었던 지옥제삼검(地獄第三劍) 천후엽이 버럭 소리치며 지옥제일검을 손가락질했다.
"지옥제일검은 가짜다! 모두 쳐라……!"
지옥제일검의 눈에서 신비로운 혈광이 폭사되었다.
"크훗……, 믿지 못하겠다면 증거를 보여 주겠다."
낙헌지는 빙글 몸을 회전시켰다.
맑은 음향과 함께 한 줄기 백색검망(白色劍芒)이 일어나 새벽하늘을 물들였다.
번― 쩍―!
붉은 가죽 검집에서 치솟은 백룡보검(白龍寶劍)은 군웅들의 눈을 시리게 하는 동시에 지옥제일검의 손을 떠났다.
"봐라―!"
지옥제일검의 막강한 공력에 의해 집어 던져진 백룡보검은 그를 손가락질하던 천후엽의 가슴을 향해 그대로 폭사되었다. 검 주위로 붉은 기류가 회오리쳤다.
"허억, 백보비검(百步飛劍)을 알고 있단 말인가?"
천후엽은 너무도 놀라 피신하려 했지만 너무 급박한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다.'
그의 입술이 질끈 깨물어지며 군웅 중 독목수라만이 알고 있는 칠마전의 마공이 시전되었다.
꽈르르― 릉―!
흑마강(黑魔 )이라는 절대마공이었다.
검기과 마강이 충돌하며 사방으로 뇌전이 비산되었다. 단상이 박살나고 정성껏 차려 놓은 음식이 바닥에 너저분하게 흩어졌다.
동시에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군웅들의 귀를 따갑게 했다.
"크애액―!"
천후엽은 백룡보검에 가슴을 관통 당한 채 눈을 까뒤집고 숨을 거두었다.
"허억, 이… 이럴 수가?"
독목수라는 부르르 진저리를 치고는 그 곁으로 다가갔다.
'사형은 금강지체이거늘 비검술로 죽였단 말인가? 저 자가 진짜 지옥제일검이란 말인가?'
독목수라는 공포에 휩싸여 지옥제일검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아무도 듣지 못하게 이어전성술로 물었다.
"대사형(大師兄)이시오?"
"……."
지옥제일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품안에 넣었다가 동패 하나를 천천히 꺼내 가볍게 집어던졌다.
무거워 보이는 동패는 그의 손을 떠나고도 지면으로 추락하지 않았다. 동패는 구름에 떠받들린 듯 흐르며 독목수라 앞으로 날아갔다.
〈 地獄令(지옥령) 〉
독목수라는 동패 위에 새겨진 글자를 보기 전에 그것이 무엇인 지 이미 알고 있었다.
"분명…… 지옥령! 이럴 수가……?"
그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설마 그 더러운 하인 놈이 살아 나타난 것은 아닐 것이다. 아, 사형이 대체 무슨 괴이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칠마전의 전인들은 서로 흉허물을 터놓고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아래 사람은 윗사람의 명에 절대 복종해야 했고, 의문이 있어도 절대로 질문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명분만 사형제간이지 주종과도 다름없었다.
독목수라는 지옥제일검이 혹시 진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옥제일검의 손을 떠난 지옥령이 독목수라 발 아래로 떨어져 깊숙이 박혔다.
"이제부터 새로운 법이 생길 것이다. 그것은 나 지옥제일검이 만든 법으로 지옥령을 본 자는 누구든 죽는다!"
지옥제일검의 목소리는 한겨울 빙굴 안에서 흘러나오는 얼음바람보다 더한 한기를 지녔다.
그는 허공을 밟으며 독목수라 곁으로 다가섰다. 유유히 서너 걸음을 걷기도 전에 그는 삼십 장을 가로질렀다.
당금천하에 누가 지옥제일검과 같이 유려한 능공허도(凌空虛渡)를 시전할 수 있단 말인가?
군웅은 싸워야 한다는 마음조차 갖지 못했다. 신기에 가까운 무술이 나타날 때마다 감탄하고 공포스러워할 뿐이었다. 감히 힘을 합해 무림의 적 지옥제일검을 쳐야 한다는 생각은 잊은 지 오래였다.
지옥제일검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유연하게 능공허도를 시전하는 것이 신속한 능공허도보다 훨씬 차워 높은 무예임을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지옥제일검이 부서진 단상 가까이 다가설 때였다.
"오행대진(五行大陣)―!"
줄곧 지켜보고 있던 검보오노가 입을 모아 외친 후 매화 꽃잎 모양으로 활짝 벌어졌다. 순간적으로 다섯 노인의 내공력이 한데 힘을 합해져 무서운 암경(暗勁)을 형성했다.
꽈르르― 릉―!
독목수라를 향해 다가서던 지옥제일검의 흑의가 어지럽게 흩날리는 가운데 흙바람이 일어나 그의 모습을 감추었다.
독목수라는 오노가 오행진으로 지옥제일검을 제지하자 겨우 안도하며 뒤로 물러났다.
'분명 가짜다. 저 놈은 대사형이 아니다.'
독목수라는 숨이 턱에 닿을 듯한 상태였다.
가짜 지옥제일검이 나타났다는 것을 모산에 있는 진짜 지옥제일검에게 알려야 한다는 마음이 그를 조급하게 했다. 오노라면 그가 도망갈 시간의 여유를 주리라 여기며 몸을 빼칠 궁리를 했다.
"독목수라,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지독한 음공이었다. 고막이 파열되고 기경팔맥(奇經八脈)이 뒤엉켜 버렸다.
"크아악―!"
독목수라는 벼락 맞은 사람같이 갑자기 허리를 꺾었다. 그의 오공에서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크윽……, 취… 취마음(醉魔吟)이 아니면 이… 이럴 수 없다."
지옥제일검은 마성으로 선제 공격을 펼치고는 가볍게 소매를 흔들었다.
"비키시오!"
콰아앙―!
오행진을 펼치고 있던 검보오노가 폭음과 함께 뒤로 나뒹굴었다.
"어이크―!"
"우웩―!"
검보오노는 떼구르르 구르며 일제히 선혈을 토해냈다. 그들의 가슴에는 얕은 장인(掌印)이 하나씩 찍혀 있었다.
검보오노와 같은 절정고수를 단 일 초로 물리칠 수 있는 변화막측한 장법은 칠십 년 전부터 실전된 백절마장법(百絶魔掌法)뿐이었다. 취마음과 백절마장법을 구사해 장내를 압도한 지옥제일검은 다름아닌 낙헌지였다.
"네가 들어갈 곳은 지옥뿐이다."
낙헌지는 취마음 아래 거의 죽게 된 독목수라를 응시하며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독목수라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그가 낙헌지임을 깨닫게 되었다.
"크윽, 너… 너란 말이냐?"
"나를 아직 잊지 않았군."
"으으, 설마했는데……, 네가 살아나다니, 하지만 우리들을 막지 못한다. 대… 대세는 굳어졌다."
낙헌지는 그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과연 그럴까?"
"우… 우리는 뜻을 이룬다!"
독목수라가 악에 받쳐 외치자 낙헌지의 주먹이 그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그런 개소리는 지옥에나 가서 하거라. 너는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낙노인의 원혼이 죽이는 것으로 알고 사라져라!"
수박통 터지는 소리와 함께 뇌수가 뿌려졌다.
칠마전에서 무공을 닦고 사 년 전 중원으로 나왔던 독목수라의 최후는 낙검엽 노인의 최후와 똑같았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머리가 으스러져 길게 누웠다.
낙헌지는 독목수라를 죽인 후 낙노인의 영혼이 편안한 이승 세례로 들어가기를 잠시 기원했다. 복수를 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가 우뚝 서 있는 데도 어느 누가 하나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군웅의 눈에는 공포뿐이었다. 무림맹이 지옥궁을 능가한다는 자부심은 산산이 조각났다. 강호의 암담한 앞날에 긴 탄식을 지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정도에서 정체를 밝히겠지만 낙헌지는 고집스럽게도 자신를 노출시키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천애고아처럼 길러진 탓이었다.
그는 심중의 비밀을 남에게 밝히는 성질이 아니었다. 그리고 군웅들이 자신을 진짜 지옥궁 사람으로 알고 있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낙헌지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지옥령을 섭물진기로 집어들고 천후협의 시체에서 백룡검을 회수했다.
그리고는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훌쩍 모습을 감췄다.
그가 떠난 후에도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의 출현은 공포스러웠던 것이다.
2
낙헌지는 남칠성(南七省) 북육성(北六省)이 벌컥 뒤집힐 만한 일을 한 직후 곧바로 모산(茅山)을 향했다.
모산은 구곡산(句曲山)이라고도 불린다.
산이 그리 높지는 않았으나 절경(絶景)의 빼어남은 강소성(江蘇省)에서도 손꼽힌다. 강남의 깊숙한 곳인지라 문물의 아름답기가 대단했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함이 시인묵객들의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날은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낙헌지는 허기진 상태였으나 검은 하늘을 찌르는 울창한 산림 사이를 걷는 중이었다.
그는 복면을 벗어 품안에 넣고 백룡보검은 천으로 둘둘 싸 메고 있어 지옥제일검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땅거미가 질 때쯤 그는 모산에 바짝 다가갈 수 있었다.
모산 아래에는 거대한 시진(市鎭)이 형성되어 있었다. 강호의 다른 마을과는 달리 수많은 무림고수들의 상주지였다. 이유는 모산에 무림맹의 총단이 있어서였다.
모산 검보(劍堡)로 가려면 누구도 그 시진을 거쳐야만 했다.
낙헌지는 마을로 걸어 들어가며 사람들이 삼삼오오 서서 지옥제일검이 어떠어떠하다 떠드는 것을 듣게 되었다.
'소문은 정말 빠르군.'
낙헌지는 자신이 소호의 상청관에서 한 일이 벌써 전역에 파다하게 퍼졌다는 데 혀를 내둘렀다.
그는 무림맹이 개방( )의 소식통을 빌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무림맹의 맹주는 개방의 방주를 하인같이 부릴 수 있는 실로 위대한 지위였다.
개방주는 무림맹을 위해 개방의 모든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 중 가장 지대한 공로는 비합전서(飛 傳書)를 무림맹이 사용하도록 준 것이다. 개방에는 수만 마리의 잘 훈련된 전서구가 있는데 그 중 반 이상이 현재 무림맹을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낙헌지의 신법이 비둘기보다 빠르지 못한 이상 상청관의 소문을 앞설 수는 없었다.
그가 모산으로 오기 전에 무림맹 총단에 파다한 소문이 퍼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 지옥제일검은 사실 죽은 것이 아니었다. 이제껏 모두 잘못 알고 있었다.
― 지옥제일검은 그 동안 암중모색(暗中模索)했을 것이다. 그는 이제 모산검보를 칠 것이다.
― 지옥제일검의 마공은 이전보다 오히려 강하다. 그는 천후협과 독목수라를 일 초에 죽였고, 검보오노를 단 일장으로 혼절시켰다. 이상한 것은 그가 전과 달리 무차별 살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지옥제일검에 대한 말뿐이었다.
길목마다 검을 들고 사방을 감시하는 젊은 무사들이 눈에 띄었다. 무림맹의 옷을 걸친 구대문파(九大門派) 출신으로, 그들은 무림맹 소속이 되어 모산을 한 바퀴 빙 둘러 호위하고 있었다.
낙헌지를 가장 놀라게 한 사실은 검보가 당분간 봉문되다시피 삼엄한 경비에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 무맹영부(武盟令符) 없이는 검보에서 오십 리 안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되었다.
― 지옥제일검이 노리는 어떤 물건이 검보 안에 있다. 지옥제일검이 천후사와 남천관을 친 이유도 사실 검조 안에 있는 그런 물건과 같은 물건을 얻기 위함이었다.
― 검보의 소보주 중 지혜가 총명한 병선자(病仙子)가 지옥제일검의 재출도 소식에 접하자, 급히 검보를 천라지망 안에 가두어 그 물건을 잃지 않게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는 법이었다.
지옥제일검이 세 조각난 칠마령을 노리고 천후사와 남천관을 피로 씻었다는 것은 세간 사람이 거의 다 아는 일이 되어 버렸다.
"흐음……, 때가 안 좋군."
낙헌지는 모산을 향해 직접 올라가려다 쉬기로 마음을 돌렸다.
'야음을 틈타 검보 안으로 들러가는 것이 좋겠군. 백절마(百絶魔) 사숙의 잠형미종신(潛形迷踪身)을 펼치면 천라지망이 쳐졌다고 해도 들키지 않고 들어가 석진영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낙헌지는 무공에 자신을 갖고 있었다.
서장에 머물러 있는 칠마라면 모를까 석진영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오만한 마음이라기보다 냉철한 판단에 의한 생각이었다.
사실 낙헌지는 현재 중원 천하에서 두 번째 강한 고수이다.
최강의 고수는 무저갱 안에 들어앉아 있는 혈발마이고 그 다음이 낙헌지였다. 하지만 세상천지를 다 따진다면 그 서열은 고정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
서장에 가공할 칠마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얼마나 가공할 사마지공을 연성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칠마가 나타나면 나로서도 속수무책이다. 칠마령이 한데 모아지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낙헌지는 서장의 칠마가 칠마령을 얻지 못하면 중원을 밟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정의무성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이룩된 일임을 적지만리객을 통해 들은 바 있었다.
'정의무성은 신화적인 존재시다. 그러나 그 분도 칠마를 두려워하셨다. 게다가 말년에 가서는 칠마와 싸워 그들을 죽이지 못하고 단지 패배시키기만 했다고 하지 않던가?'
낙헌지는 오대마왕의 경우에 비추어 칠마의 무공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대마왕은 무저갱에 갇혀 칠십 년을 살아왔지만 금제된 상태라 무공에 있어 그리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칠마는 칠십 년 간을 마공 수련에 절차탁마(切磋琢磨)한 자들이었다. 과거라면 오대마왕에 비해 아래였지만 지금 오대마왕과 칠대사마가 겨룬다면 칠마가 훨씬 앞설 것이다.
― 만에 하나 칠마령이 합쳐져 칠마가 중원으로 들어오게 되면 구태여 싸우려 하지 말고 일단 무저갱으로 되돌아와 무공을 새로 익혀라. 칠마는 너보다 월등하다. 싸우기보다 숨어 복수하는 쪽을 택해라!
꾀가 많은 백절마가 준 충고의 말이 그러한 것이었다.
'칠마가 나온다면 나는 천하를 위해 힘을 쓸 수 없다. 내가 천하를 위해 일을 하자면……, 칠마가 중원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일 뿐이다.'
낙헌지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주 구수한 음식 냄새를 맡게 되었다.
〈 武盟樓(무맹루) 〉
불야성이란 말을 실감나게 할 오층 누각이 우뚝 서 있었다. 천하 어디에 가도 볼 수 없는 거대함은 외형부터가 압도적이었다.
무맹루는 무맹의 고수들이 한데 모여 술을 마실 목적으로 십 년 전에 세운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주루이다.
일 층에서 오 층까지 자리가 꽉 찬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는 주루는 적어도 오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만 명이 들어가도 자리가 남는다고 했다.
무맹루는 무맹의 권위라 할 수 있었다.
무맹루를 세운 사람은 무맹루가 세워질 당시 나의 열 살이 채 안 되었던 무맹의 소맹주 청의병선자 이옥란이었다.
― 거대한 누각을 세워 천하협사들을 모으십시오. 그러면 무림맹이 훨씬 더 커질 것입니다.
청의병선자가 총명함은 무맹루가 세워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무맹루는 기관학(機關學)의 정화가 깃들여 있어 어느쪽에서 봐도 오각(五角)의 형태였다.
"대단하군. 오행(五行)의 조화가 하나도 어긋나지 않은 채 들어 있다. 이런 누각을 지은 사람이라면 아마 만 권 이상의 책을 본 사람이리라."
낙헌지는 누각의 빼어남에 혀를 내두르며 주루 안으로 들어섰다.
주루 안은 연무장같이 컸고, 탁자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아래층이 가장 번잡했지만 그래도 반밖에 차지 않았다.
술 몇 잔을 즐기다 보면 소림(少林), 무당(武當), 화산(華山), 아미(蛾眉)의 절정고수들을 모두 불 수 있고, 사해(四海)에 이름난 기인이사들을 직접 대하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는 풍문은 모두 사실이었다.
이름난 고수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개중에는 정대문파의 장로며 무맹의 향주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낙헌지는 창가에 앉아 주위를 바라보다가 점소이가 다가오자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가장 좋은 음식이 뭔가?"
권법으로 단련된 몸을 한 점소이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있기는 있습니다만 알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하하……, 이유가 뭐지?"
"너무 비싸서외다."
낙헌지는 한껏 호기심 어린 표정이 되었다.
"흐음, 얼마나 비싸기에?"
"황금 이백 냥이라면 어떻소?"
"호오, 정말 값비싸군. 무슨 음식이기에 그 정도인가?"
점소이는 한껏 자랑스러운 신색으로 말해 주었다.
"헤헤……, 천협함포고복(千俠含哺鼓腹)이라는 음식이외다. 그것을 시킬 경우 이 안의 어떤 명주(名酒)이건 마음껏 마실 수 있소."
"하하……, 그래서 비싼 것이군."
낙헌지가 웃자 점소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제껏 단 한 번 주문되었을 뿐이지요."
"그래? 대체 어떤 호걸이 그런 배포를 부렸는가?"
"얼마 전 지옥제일검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남천관 소관주이시고 현재 무림맹 총순찰이신 석대협(石大俠)이 약란소저(諾蘭少姐)와 함께 그것을 주문했었소."
석진영이 그 일을 했다는 사실에 낙헌지는 몹시 분노를 느꼈다.
'석진영……, 지옥제일검을 나에게 물려준 그 놈이라고?'
점소이는 낙헌지가 굳은 표정을 살피면서 점점 감탄에 젖고 말았다.
'흐음……, 정말 빼어난 미장부다. 석대협과 신분 차이를 느끼나 보군. 하지만 용모만은 더 빼어나다는 것은 내가 장담한다.'
점소이는 무맹루를 찾는 숱한 청년 고수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래도 낙헌지와 같이 준미한 용모를 가진 청년은 아직 대한 적이 없었다.
그가 낙헌지에게 호감을 느끼면 한참 말을 주고받는 이유도 사실은 그 때문이었다.
"그 분은 아주 호탕하시오. 헤헤……, 강호가 평화로워지면 그 분이 금의검선자(金衣劍仙子)와 혼례를 하게 되고, 아마 이 주루가 처음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외다."
낙헌지는 분기가 탱천하여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자가 검선자와 혼례를……?"
"두 분 사이는 아주 정답소이다. 함께 다니는 것을 본 사람이 여럿이지요. 바로 오늘 낮에도 두 분이 검보의 영역을 넘어 채운봉(彩雲峰) 근처로 유람을 갔다더군요."
낙헌지는 절색의 금의검선자를 떠올리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당세의 협녀가 석진영과 같은 간악한 자와 어울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유람을 다닐 만한 상황이 아닐 텐데?"
"물론 지옥제일검이 살아 있다는 말이 있기 직전이지요. 아마 지금쯤 소식을 접하셔 이미 보로 돌아오셨을 거외다."
"으음……, 그렇겠지."
점소이는 비로소 자신의 직무를 생각하고는 허리를 굽신거렸다.
"헤헤……, 그건 그렇고 어떠한 음식을 드시겠소이까?"
"만협함포고복(萬俠含哺鼓腹)을 주문하겠다."
낙헌지의 태연한 주문에 점소이는 경악하고 말았다.
"만… 만협함포고복이라고요?"
"하하, 그렇다. 그것의 열 배가 되는 만협함포고복이다."
점소이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예에……?"
"황금 이백 량으로 천협함포고복을 시킬 수 있다고 했지 않으냐? 만협함포고복이면 황금 이천 냥이겠군."
낙헌지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말하며 품안에서 둥근 구슬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살구만한 붉은 구슬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낸다는 야명주였다.
"오오……!"
점소이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낙헌지는 천천히 차를 즐기며 호기롭게 말했다.
"이것은 황금 만 냥의 값어치가 있다. 이 중 이천 냥으로 내가 주문한 음식값을 치르고, 나머지는 검보로 보내라. 낙가성(落家姓)의 과객이 무림맹에 기부하겠다 고하라."
"어… 어이쿠, 고인이신 줄 몰랐소이다."
점소이가 허리를 크게 숙이려 할 때 낙헌지는 무형지기를 발출해 그를 제지시켰다.
"절할 것까지 없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너와 비슷한 처지였다."
"예에?"
"하하……, 나는 남의 하인이었다."
점소이는 상대가 자신을 놀리는가 싶었다.
"하… 하인이셨다구요?"
"하하……, 대장부란 뜻을 가질 경우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너도 그런 마음을 하고 살면 언제고 나와 같이 될 수 있을 게다."
"아……, 대단하십니다."
점소이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돈을 쓰면 귀신을 부려 맷돌을 돌리게 할 수 있다는 속담도 있듯이 점소이는 낙헌지를 신인(神人)같이 보게 되었다.
낙헌지는 만협함포고복의 식사를 자신이 주문했음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당부한 후 나직이 물었다.
"채운봉은 어디냐?"
"그곳은 모산에서 가장 험한 봉우리입니다. 하지만 기기묘묘한 절경이 아주 아름답고 신비로운 동굴이 유난히 많습니다."
"어떻게 가면 되겠느냐?"
"주루의 정문에서 바로 앞으로 보이는 험악한 산봉우리가 채운봉입니다."
점소이는 채운봉에게 대한 것을 아주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낙헌지는 석진영이라는 놈이 그곳에서 검보에 돌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영감을 느꼈다.
"됐다. 이제 가도 된다. 일단 죽엽청(竹葉靑) 반 근과 국수 한 그릇을 갖다다오."
낙헌지는 점소이의 친절에 대가로 금자 하나를 꺼내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가 쓰는 돈은 운리신룡이 평생 모은 재산 중 극히 미미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점소이에게 있어서는 환장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은공께 감사드립니다."
점소이는 연신 감사를 연발하면서 급히 되돌아갔다.
낙헌지는 석진영의 차갑고 매서운 얼굴을 눈앞에 떠올렸다.
'나를 이용해 악랄한 계책을 꾀한 악적(惡賊)! 이제 네 차례다.'
낙헌지는 모진 면모를 갖고 있었다. 악인에 대해서는 조금치의 자비스러움도 갖고 있지 않았다.
'석진영은 확실히 뛰어난 놈이다. 독목수라나 천후협과는 비교되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마외도가 아무리 날고 뛰어도 의협을 위해 싸우는 나를 당하지 못하리라!'
낙헌지는 의지를 불태우다가 음식을 갖고 오는 점소이를 보고는 표정을 풀었다.
"헤헤……, 기다리셨지요?"
점소이는 음식을 탁자 위에 놓으며 나직이 일러주었다.
"조금 전 들었는데……, 헤헤헤. 검선자와 석대협이 아직 검보로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의아하게 여기고 있다 하더이다."
"누가 그러더냐?"
"검보 안의 하녀 하나가 사실 소인의 안사람입니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 놈도 하나 두고 있습죠."
낙헌지는 음식을 들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런가? 축하하네."
두둑한 대가를 받은 점소이는 갈 생각을 않고 계속 지껄였다.
"고맙습니다요. 여편네의 말에 따르면 병선자가 매우 걱정해 입맛을 잃으셨다 합니다. 그래서 여기로 와 병선자가 가장 좋아하시는 상어지느러미 요리를 배달해 가려 한다고……."
"자네의 아낙이 병선자 이옥란 선자의 계집종이란 말인가?"
"헤헤……, 그렇습니다요."
낙헌지는 한껏 밝은 표정을 지었다.
"흠, 잘 된 일이군. 그러잖아도 소식 전할 것이 있었네."
"그 분을 아십니까?"
"모르네."
점소이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헤헤……, 병선자께서는 천하제일미인(天下第一美人)이시지요. 몸이 약하신 것이 흠이시나 어느 하나 남에 뒤지지 않는 진짜 좋은 분이십니다. 너무나 뛰어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할 정도입죠."
"하하……, 그녀가 아름답건 추하건 상관이 없네. 자네가 그녀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나를 대신해 한 마디만 전해주면 되네."
"헤헤……, 그 정도쯤이야 별 일이 아니지요. 요리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내에게 말하면 아마 소식이 요리와 함께 전해질 것입니다."
"좋아!"
낙헌지는 흡족한 표정을 짓고는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검제에게 부탁을 받은 사람이 조만간 병선자를 찾으러 하니 미리 알고 계시라 전해 주게."
"검… 검제라니요?"
점소이는 입을 쩍 벌렸다.
낙헌지는 대답 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그는 커다란 국수 그릇 하나를 마파람에게 게눈 감추듯 비우고, 죽엽청 반 근을 물 한 모금 마시듯 가볍게 비우고 일어났다.
"고… 공자, 검제시라면……?"
"꼭 전하게."
낙헌지는 씩 웃으며 주루 밖으로 걸어 나갔다. 술값과 음식값을 치르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주문한 만협함포고복의 식사 값에 이미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만협함포고복의 요리가 완성되려면 족히 백 일은 걸릴 것이고 그때까지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제7장 독계(毒計) 심계(心計)
"훌륭하군."
낙헌지는 어둠을 꿰뚫어보는 안력을 갖고 있는 지라 채운봉의 골짜기가 아름답고 장엄하게 이어지는 것을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
그는 마을을 벗어나서는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낙헌지의 보법은 이미 축지성촌지경(縮地成寸之境)에 이르렀기에 몇 걸음을 걸었는가 싶자 이미 십 리를 달릴 수 있었다.
갈수록 산이 험해졌다. 그렇지만 산세가 아무리 험해도 낙헌지의 발걸음이 나아가는 속도에 지장을 줄 수는 없었다.
낙헌지는 검은 연기가 흐르듯 달려 채운봉 깊숙이 들어설 수 있었다.
간간이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곤 했다. 아마도 석진영과 검선자를 찾아다니는 사람들로 보였다.
"흠……, 이 근처에는 없겠군."
낙헌지는 천이통(天耳通)을 시전하며 골짜기 깊숙이 들어갔다. 그는 원래 무서움이 없는 사람이다. 핏물을 뚝뚝 흘리며 산발한 귀신이 다가선다 해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위인이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낙헌지는 동굴이 아주 많은 골짜기에 이르러 이상한 조짐을 느끼게 되었다.
불현듯 모공이 시리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불길한 예감이 그의 피를 끓게 했다.
"으윽……, 이것은 마의 기운이다!"
낙헌지의 눈에서 혈광이 폭사되었다.
그는 상승마공을 익힌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는 마공지기(魔功之氣)를 무수한 동굴 한 곳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아주 희미한 자색 기운이 동굴 밖으로 흘러나왔다.
오대마왕의 극마지공을 터득한 낙헌지가 아니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기운이었다. 자색 기운은 악마의 숨결같이 사악하게만 느껴졌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
그는 지극히 절묘한 신법을 시전해 동굴 앞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동굴 안의 상황은 보이지 않았다. 자색 안개가 안력을 철저하게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저 안에서 사악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무저갱으로 돌아가 더 수련을 하겠다."
낙헌지는 자신 있게 말하며 들어가려다가 문득 걸음을 세웠다.
'기문진(奇門陣)이다.'
그의 표정이 가볍게 긴장되었다.
동굴의 입구는 일장 정도였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 넓이가 넓어지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자색 안개가 시력을 방해해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낙헌지는 동굴 입구에서부터 이 장 정도가 돌로 뒤덮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얼핏 보아서는 어지럽게 늘어선 돌덩이들에 불과했지만 사실은 지극히 놀라운 기문진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살쇄백진……? 백절마 사숙께서 말한 바 있는 마도의 기문진학이다."
낙헌지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흘러나왔다
'분명 칠마전 출신이 있다는 증거다.'
낙헌지는 천살쇄백진이 칠마전의 전주인 심마가 창안한 기문진학임을 백절마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군. 석진영, 그 놈이 이 안에 있기 쉽겠군."
그는 백절경(百絶經)을 뇌리에 떠올렸다. 백절경은 백 가지 마도절기로 이루어진 경문이로 그 안에는 마도 기문진에 관한 모든 파훼법이 담겨져 있었다.
낙헌지는 이내 천살쇄백진의 파훼법을 찾을 수 있었다.
"흠, 파훼법을 알아내기는 했으나 조심해야만 한다. 자칫 사문(死門)과 두문(杜門)으로 들어서면 천살쇄백진의 사악한 힘 아래 혼백이 으스러져 죽을 수도 있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다음 혈발마공(血髮魔功)을 운용했다.
콰류류류―!
낙헌지의 몸에서 우레 소리가 일어나며 머리카락이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두 눈에서는 불꽃이 피어오르고 몸 주위로 적무(赤舞)가 형성되었다.
보기에는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낙헌지는 혈발마에게서 혈발마공의 힘을 고스란히 전수 받았는지라 적어도 일백 년 수위의 혈발마공을 연성한 정도의 마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몸을 휘감고 있는 적무는 아주 막강한 호신강기였다.
혈발마공이 구결에 따라 무형에서 유형화된 것으로 동굴에 차 있는 자색 안개보다 훨씬 더했다.
낙헌지는 혈발괴인으로 변신된 자신의 모습에 고소를 지으며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파파팟―!
호신강기가 진탕되며 그는 외부에서 전해지는 강한 암경(暗勁)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과연 천살쇄백진이군. 혈발마공으로 심맥을 보호하지 않고 들어섰다면 마기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그는 심한 압박감을 느꼈으나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파훼법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며 진세 깊숙이 들어섰다. 천살쇄백진은 작은 규모로 펼쳐졌기에 그는 이내 진세를 벗어날 수 있었다.
강하게 전해지는 암경도 느껴지지 않았고 자색 기류도 보이지 않았다.
동굴은 아주 광활한 공간을 갖고 있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십 장에 달했고, 마치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구조였다.
낙헌지는 동굴 가운데로 들어섰다.
'……?'
그는 호흡을 멈추며 걸음을 멈추었다.
동굴벽을 등진 채 정좌하고 앉은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탄탄한 등판을 가진 백삼청년 하나가 정수리에서부터 몽롱한 자색 안개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으… 음……!"
어디선가 여인의 신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낙헌지는 신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다 그만 굳어지고 말았다.
'아니, 저 여인은……?'
그는 차마 대할 수 없는 광경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아아……!"
백삼청년 앞으로 반듯이 누워 있는 전라미인(全裸美人)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입술을 살짝 벌리며 묘한 신음성을 토하는 중이었다.
강남미연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절세미녀였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반듯이 누워 두 손을 깍지 끼운 채 배꼽 위에 놓고 있었다. 희디흰 다리는 손가락 하나 들어 갈 틈도 없이 꽉 밀착된 채 길게 뻗어 있었다.
미녀의 몸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백옥으로 깎아 만든 미인상(美人像)이 누워 있는 듯한 환상을 줄 정도로 아름다웠고 신비로웠다.
이때쯤 두 손을 합장하고 정좌에 있는 백삼청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자색 안개가 전라미인의 몸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흐으윽……!"
여인은 뭐가 그리 괴로운지 신음 소리를 연발했다.
여인은 나이 이십을 넘기지 않은 나이로 보였고, 오똑한 콧날과 새빨갛고 탐스러운 입술을 갖고 있었다. 목의 빛은 아주 희고 고운 반면 얼굴색은 자줏빛이어서 보기가 흉칙스러웠다.
"아악……!"
여인은 마치 능욕 당하듯이 고통스런 신음을 토해내며 가쁜 숨까지 헐떡였다. 그럴 때마다 탄력 있는 육봉이 심하게 요동쳤다.
일순,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통스런 신음성을 멈추었다.
그것은 마력에 대항하던 강한 의지력이 말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후훗……, 거의 완벽하게 되었군. 이제 내가 심령(心靈)의 주인임을 말하면 저 계집은 내 소유가 된다."
백삼청년은 합장한 손을 풀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돌연 그의 등뒤에서 차갑고 살기 짙은 냉소성이 일었다.
"흥, 심마대법(心魔大法)을 펼치려면 반나절 내내 고생해야 하는데 다된 밥에 재를 뿌리게 되어 유감이다."
백삼청년은 철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누… 누구냐?"
그는 벌떡 일어서며 홱 몸을 돌렸다.
절세고수답게 그 와중에도 그는 독랄한 살수를 잔뜩 손끝에 운기하였다.
어둠 속에서 폭사되어 오는 흑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흑의에 복면을 한 괴인은 시뻘건 눈빛을 하고 청년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난데없는 불청객을 살피던 백삼청년은 입을 딱 벌렸다.
"허억? 지… 지옥제일검(地獄第一劍)의 복면을 하고 있는 놈이 있단 말인가?"
백삼청년의 얼굴빛이 고운 밀가루보다 더 희게 물들었다.
흑의복면인은 백삼청년과 마주서며 팔짱을 끼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훗훗……,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흑의인의 복면 위에는 지옥제일검이라는 다섯 글자가 분명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에는 지옥령(地獄令)이라 불리고 있는 동패 하나가 들려 있었다.
"석진영! 지옥령의 이름 아래 죽는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그렇다. 백삼청년은 남천관의 수제자이며 현재 무맹의 총순찰로 있는 석진영이었다.
지옥제일검의 복면을 쓴 자가 차갑게 말하자 석진영은 입가를 실룩거리다가 자색 안광을 폭사했다.
"설마…… 그 하인 놈의 귀신이란 말인가?"
과연 칠마전의 소전주답게 그의 관찰력은 예리했고 판단 또한 빨랐다.
지옥제일검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귀신……? 하하핫……!"
"흥, 귀신이라도 두렵지 않다. 대체 어떤 귀신이기에 진짜 지옥제일검의 면전에서 지옥제일검 행세를 하는지 알아보겠다!"
말이 끝나는 찰나 석진영의 두 손바닥이 지옥제일검 쪽으로 활짝 펼쳐졌다.
꽈르르르― 릉―!
동굴 안이 뒤흔들리며 시꺼먼 기류가 일어났다. 먹물같이 짙은 기류는 금석조차 녹여버릴 수 있는 힘을 지닌 음마장력(淫魔掌力)이란 마공이었다.
뇌성벽력과 함께 음마장력이 흑의인을 박살낼 듯이 몰아쳐 왔다.
"흥, 음마지수(淫魔之手) 정도로 귀신을 업수이 여긴단 말이냐?"
흑의인은 노도처럼 몰아치는 묵색마강을 향해 정면으로 혈강을 발출했다.
꽈꽝!
지축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동굴 천장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동굴은 금세라도 붕괴될 듯이 진동되었다.
"크으윽! 음… 음마장법을 막다니……?"
석진영은 바닥에 두 발을 박은 채 창백한 안색이 되었다.
지옥제일검으로 화신해 있는 복면인은 상반신을 약간 휘청였다가 신형을 안정시키고 다시 팔짱을 끼었다.
"과연 대단하구나! 과연 천하의 어느 누가 너의 일자을 받아내겠느냐?"
"으으……, 음마지장을 능가하는 마공이 천하에 존재한단 말인가?"
석진영이 몹시 초조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눈빛은 몹시 지쳐 보였다.
'심마대법으로 인해 진기가 고갈된 상태라 이 놈을 이기기는 힘들다. 정면 승부를 피해야 한다.'
복면인은 아주 냉혹한 어조로 외쳤다.
"석진영, 어떻게 죽고 싶은지 말해 봐라. 목이 부러져 죽고 싶으냐, 아니면 심장이 으스러져 죽고 싶으냐? 소원대로 해주겠다."
"하하하……!"
석진영이 돌연 광소를 터뜨렸다.
"웃어? 왜 웃는단 말이냐?"
흑의인이 화를 참지 못하게 외치자 석진영이 돌연 웃음을 멈추고 눈을 부릅뜨며 흑의인을 직시했다.
"나를 봐라!"
그의 눈알에서 신비로운 광채가 흘러나왔다.
흑의인은 그의 잔혹스럽고 황홀한 안광을 대하고도 끄떡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빛을 즐기며 마주 쏘아보았다.
"심마지안(心魔之眼)도 소용없다!"
흑의인의 눈에서 새빨간 안광이 폭사되자 석진영은 뒷머리에 철퇴를 맞은 듯한 표정이 되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허억, 혈발마공(血髮魔功)……? 너, 너는 혈발마(血髮魔)와 어떤 사이냐?"
석진영은 심마대법을 펼치는 도중에 복면인과 일장 격돌을 벌이느라 내공이 흩어져 심마탈백마안(心魔奪魄魔眼)을 오래 계속할 수 없었다.
그가 심마탈백마안술을 회수하고 뒤로 물러섰다.
흑의복면인이 그의 안목에 감탄해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에서 복면을 벗겨냈다.
"석진영, 날 기억하겠느냐? 네 손아래 지옥제일검이 되었던 사람이다."
복면이 벗겨지며 천하미장부의 모습이 드러나며 동굴의 어둠을 밝혔다.
"네… 네놈이라 생각은 했었다만…… 너무도 놀랍다."
석진영의 얼굴이 시꺼멓게 변하여 땀으로 뒤덮였다.
'낙헌지! 이 놈은 분명 기연을 얻었다. 하필 이 귀중한 순간에 나를 찾아왔단 말인가?'
그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낙헌지……, 네가 정녕 살아 있었단 말이냐?"
"그렇다. 그리고 나는 지옥제일검이다."
낙헌지는 입가에 오만한 웃음을 흘렸다. 석진영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지… 지옥제일검이라고?"
"하하……, 네가 나를 지옥제일검으로 만들어 주지 않았더냐? 너는 아직까지 지옥제일검이 상청관에 나타나 천후협과 독목수라를 쳐죽였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나 보구나."
"천… 천후협과 독목수라를 죽였다고?"
석진영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그렇다, 지옥제일검이 그들을 죽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남천옥룡이란 사악한 놈이 지옥제일검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낙헌지가 작심을 한 듯 오른손을 치켜 올렸다. 투명한 핏빛 광채를 발하는 손이 너무도 눈부셨다.
석진영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석벽에 등을 대고는 손을 내저었다.
"낙헌지, 네… 네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궁금하다. 네가 어떻게 이토록 초강고수가 되었단 말이냐? 설… 설마 정의무성에게 잡혀 무저갱에 갇힌 혈발마를 만났단 말이냐?"
"죽을 놈이 무엇을 더 알려 하느냐?"
낙헌지는 석진영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석진영이 칠마전의 소전주답지 않게 잔뜩 죽을상을 하며 애원했다.
"제발…… 난 아직 죽기에 이르다."
낙헌지가 그의 참담한 표정에 일순 경계심을 풀었다. 진짜 지옥제일검으로 천하를 공포에 떨게 하던 그가 겨우 이 정도인가 싶었다.
순간, 석진영의 표정이 지극히 사악해지며 그의 장심이 낙헌지의 복부를 강타했다
콰앙―!
낙헌지는 오장육부가 파열되는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느끼며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쓰러지지는 않았다.
"네… 네놈이 암습을……?"
"무… 무서운 놈! 쓰러지지 않는단 말이냐? 네놈의 무공이 분명 나를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니."
석진영이 잔뜩 인상을 일그러뜨리다가 한 발을 나녀의 배 위에 올렸다. 절색의 나녀는 혼몽 속에서도 터질 듯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고통스런 신음성을 토해냈다.
"아아악!"
낙헌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석진영, 정말 지독한 놈이구나!"
"흐흐……, 내가 지독하다는 것을 이제 알았느냐? 이 계집이 배가 터져 죽는 꼴을 보기 싫다면 뒤로 물러나라. 어서!"
석진영이 낙헌지보다 한 가지 뛰어난 점은 풍부한 강호 경험과 독랄한 심계였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인물이었다.
낙헌지는 한순간의 방심으로 그만 철천지원수를 죽이지 못하고 그만 석진영이 계략을 피울 여유를 주고만 셈이었다.
"으음……!"
낙헌지는 분했으나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석진영이 낙헌지가 물러서자 겨우 안도하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네 놈 앞이라면 나의 모든 것을 숨길 필요가 없겠군."
석진영은 천천히 말하는 와중에 흐트러진 진기를 가다듬었다.
"네놈이 한 시진만 더 늦게 나타났다면, 흐흐……, 검보(劍堡)는 이미 내 수중(手中)에 들어 왔을 것이다."
"심마대법이 성공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냐?"
"잘 아는군. 칠마전의 소전주(小殿主)로 중원으로 흘러나온 칠마령을 회수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다."
낙헌지는 그의 의도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흥, 그래서 심마대법으로 금의검선자를 금제시킨 후 흑의검왕(黑衣劍王)과 삼십삼 정검수가 보호하고 있는 칠마령의 마지막 한 조각이 있는 곳으로 접근하려 했겠군?"
"흐흐……, 너무도 잘 알고 있구나!"
석진영은 내심 크게 놀라면서도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심마대법(心魔大法)!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칠마전주인 심마의 탈백마안과 함께 가장 악독한 탈혼최면술로 불리는 미심술(迷心術)의 최고 단계이다.
낙헌지는 오대마왕에게서 칠마의 모든 수법에 대해 배웠기에 석진영의 어떤 수작도 파악할 수 있었다.
"석진영, 네 놈이 그 사이 무림맹의 총순찰이 되어 검보 안으로 들어간 목적은 물론 검보에 보관돼 있는 칠마령의 마지막 조각이겠지. 하지만 흑의검왕과 삼십삼 정검수의 관문을 뚫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석진영의 발에 제압되어 있는 절색나녀 쪽을 힐끗 보았다.
"결국은 금의검선자를 심마대법의 노예로 만들어 칠마령을 탈추하려 하다니……. 네 간악함은 세상에 다시없을 것이다."
낙헌지는 모든 상황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놀랍게도 절색나녀는 검보의 이선자 중 하나인 금의검선자 이약란이었다. 고강한 무예와 드센 기질의 소유자인 그녀였지만 석진영의 흉계에 당해 이렇듯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석진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흐흐……, 기연(奇緣)을 얻어 살아나더니 과거보다 백 배는 똑똑해졌군. 과거에 너 같은 적이 있었다면 나는 여태 칠마령의 한 조각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석진영은 금의선자를 밟은 채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치밀한 인물이었다.
낙헌지는 검미를 치켜올리며 외쳤다.
"석진영, 어서 검선자를 풀어 주어라!"
"흐흐……, 부탁하는 놈 치고 너무 건방지다 생각지 않느냐?"
"이 비열한 놈! 너도 남자란 말이냐?"
낙헌지는 사납게 다그치면서도 내심은 명경지수 같은 맑은 심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짐짓 화를 내는 이유는 석진영을 방심시키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는 계속 석진영을 공박했다.
"석진영, 남천신군께서 너 같은 사악한 짐승을 쳐죽이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금의검선자의 목숨으로 나를 위협한다고 나의 살수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흐흐……, 오마의 전인이라면 나의 정당히 싸울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나도 싸움을 피하는 졸장부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와 싸울 수 없는 입장이다."
석진영이 꼬랑지를 내지자 낙헌지는 더욱 강한 격장지계를 구사했다.
"싸우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나를 결코 나를 피하지 못한다."
"하하……, 금의검선자가 너의 목숨을 한 번 구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찮은 하인에서 오마의 전인이 되어 완전히 변신했지만 은혜까지 잊었겠느냐? 이 계집을 그대로 밟아버릴까?"
낙헌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금의검선자의 목숨으로 나를 위협하다니……!"
석진영은 칠대사마의 전인답게 간교하고 흉심이 깊었다. 그는 여유 있는 표정까지 지었다.
"크훗훗……, 금의검선자는 심마대법에 거의 걸린 상태다. 중원에서 금의검선자를 구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오마의 전인이라면 그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물론 알고 있다. 심마대법은 시전한 사람만이 풀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 나만이 이 계집을 본래대로 할 수 있다."
낙헌지는 명령조로 말했다.
"그럼 본래대로 해라!"
"흐흐……, 대가 없이 할 수는 없다."
"도망갈 기회를 달라는 것이냐?"
"두말 할 것도 없지."
석진영은 수치를 모르는 듯 아주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약란의 나신을 가리켰다.
"나는 금의검선자를 이용해 칠마령을 얻으려 했었다. 금의검선자를 풀어주게 된다면 나의 정체를 천하에 폭로시키게 되는 것이고 이후 무림맹의 공적(公敵)이 되고 만다. 이제껏 이룩한 모든 터전이 산산이 박살나 버리는 것이지. 그 정도라면 너는 복수를 이룬 셈이 되는 것이다."
낙헌지의 태도는 아주 강경했다.
"그 정도로 안 된다. 나는 너를 죽여야만 분노를 해소할 수 있다."
"흐흐……, 그것은 추후에 해결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너의 판단에 따라 이 계집이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
낙헌지는 주먹을 움켜쥐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좋다, 기회를 주지."
그러면서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심마대법을 해소하는 방법이 어떤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나의 눈을 속이려 하지 마라!"
"하하……, 사실 나도 천하의 미인을 피떡으로 만들어 죽이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다."
석진영은 내심 안도하며 이약란의 배에서 발을 떼었다. 그는 어지럽게 십지를 휘저었다.
"으음……!"
이약란은 전신이 비수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혼절하고 말았다. 전신 혈관이 툭툭 불거지며 그녀의 얼굴빛이 점점 희게 변했다.
석진영은 금의검선자의 백팔대혈을 격공점혈법으로 점혈한 후 품 속에 목갑 하나를 꺼냈다.
"이것을 복용시키면 심마대법이 무산될 것이다. 회혼단(廻魂丹)이라는 것이다."
"던져라!"
"훗훗……, 난 바보로 아느냐?"
"난 너 같은 위선자는 아니다. 약속은 지키겠다."
석진영은 간특한 눈빛을 발하며 턱짓을 했다.
"우선 옆으로 열 걸음 물러나라. 그러면 회혼단을 여기 내려놓고 떠나가겠다."
"좋다."
낙헌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을 두고 떠나지는 않는다. 더러운 하인놈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을 망가뜨릴 수는 없다.'
석진영은 나름대로 계책을 꾸미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낙헌지 역시 궁리한 바가 있기에 석진영이 요구하는 대로 열 걸음 옆으로 물러나 몸을 세웠다.
석진영은 비로소 동굴 입구를 정면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훗훗……, 혈발마공을 익혔으니 칠마전의 마공을 겁내지 않겠지. 그러니 내가 떠난다 해도 장차 보복을 두려워하지는 않으리라 본다."
"이를 말이냐?"
"그럼 나중에 결판을 내자."
석진영은 목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낙헌지는 그의 하는 양을 지켜보며 전신 가득히 진기를 운기시켰다.
'악독한 놈! 네놈은 비밀을 알고 있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 그냥 갈 놈이 아니야.'
석진영은 동굴 입구를 향해 그대로 신형을 폭사시켰다.
그가 입구로 사라지자 낙헌지는 석진영을 쫓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이약란의 누워 있는 방향으로 이형환위신법을 시전했다.
"소저!"
낙헌지는 바닥에 놓여 있는 목갑을 주워 들며 이약란에게로 바싹 다가섰다. 여인의 나신에서 물씬 체향이 느껴졌다.
순간, 동굴을 벗어날 듯 달려가던 석진영이 허공에서 몸을 꺾으며 낙헌지를 향해 철탄(鐵彈) 다섯 개를 날려 보냈다.
"뒈져라!"
철탄이 허공을 가르는 속도는 가히 섬전과 같았다.
"흥, 기다렸다."
낙헌지는 이약란을 보호하기 위해 몸으로 막고는 철탄이 날아드는 방향에 대고 쌍장을 휘둘렀다.
꽈꽈― 꽝―!
철탄 다섯 개가 낙헌지의 손바닥에서 일어나는 혈발마공에 부딪히며 화염을 일으켜 동굴 안을 용광로 같이 달궜다.
우르르― 릉―!
동굴이 무너질 듯한 가운데 석진영은 옆구리에 도끼를 맞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어디서 날아드는지 모를 일장이 그의 옆구리를 후려친 것이었다.
"크으으……!"
석진영은 누군가 암습을 가한다 싶어 휘청이며 급히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다른 누구의 기척도 찾아낼 수 없었다.
"누… 누가 나를……?"
낙헌지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그의 퇴로를 다시 봉쇄했다.
"어리석은 놈! 혈발마공은 알고 회선마강(廻旋魔 )은 모르는구나? 나는 네 놈이 이런 꾀를 부릴 줄 알았다."
"회… 회선마강? 그것까지 익혔단 말이냐?"
"하하……, 너는 나를 너무 몰랐다. 도망갈 기회를 주었는 데도 도망치지 않았다니……. 결국 네 스스로 무덤을 판 셈이다."
"으으……, 네놈이 무공이라고는 전혀 모르다가 이렇듯 초절해졌으니……. 오마가 그리 위대한 존재라는 말이냐?"
석진영은 그제서야 진실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벌레를 씹은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공포에 겨워 부들부들 떠는 모습에 낙헌지는 새삼 다시 평가해야 했다.
"결국 너는 네 총명함을 너무 믿어 이 지경이 된 것이다. 금의검선자를 원래대로 해준 채 잡혀 죽게 되었으니 말이다."
"으으……, 네가 나를 능가할 줄은 몰랐다. 네놈이 나의 심계를 파악하고 있는 줄 알았다면 신탄(神彈)을 쓰지 않고 그냥 떠났을 것이다."
석진영은 괴로워하다가 손을 머리께로 가져갔다.
낙헌지는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상대는 간악한 칠마전의 소전주였다. 최후의 순간까지 방심해서는 안될 상황이었다.
석진영은 눈을 감고 씁쓸히 중얼거렸다.
"그때 남천관에서 너를 죽이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그리고 네놈이 마룡단과 탈백마안에 접하고도 살아나는 끈질긴 놈임을 몰랐다는 것이 원망스럽다."
"……."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기 일보 직전에 좌절되는 것이 한스럽다. 서장에서 나의 성공을 기다리고 계시는 사부님께 불충하게 되었으니……, 이대로 자결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구나."
석진영의 좌절에 찬 말은 낙헌지를 속이기 위한 계책이 아닌 듯 싶었다.
낙헌지는 팔짱을 꼈다.
"자결한다면 굳이 내 손으로 죽이지 않겠다."
"지옥검대(地獄劍隊)와 지옥궁(地獄宮) 고수들은 모두 나의 명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내가 죽는다면 그들은 일단 후퇴할 것이다."
석진영은 비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칠마전의 계획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내가 죽는다면 조만간 서장에서 나를 대신할 사람 하나가 나올 것이다. 칠마전의 고수 중 나보다 현명하고 사리분별이 밝은 사람이 또 있다. 그가 온다면 내가 어리석어 망친 일을 완벽히 해 낼 것이다."
낙헌지는 죽음에 임해서까지 마(魔)를 두둔하는 그의 태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죽어도 칠마전에 충성을 하는 것이냐?"
"칠마전은 위대하다. 가장 위대하다! 나는 칠마전을 위해 싸우다가 죽는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석진영은 할 말을 마치고는 눈을 꾹 감으며 손을 천령개로 가져갔다. 식은땀으로 범벅이된 그의 얼굴이 아주 처량해 보였다.
낙헌지는 그의 머리통이 산산이 박살나는 모습을 머리에 그리며 여차할 경우 손을 쓸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석진영은 막상 자결하기가 두려운 듯 잠깐 주저했다.
"흥, 두렵다면 내가 손을 써 주랴?"
낙헌지의 비웃음에 석진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으으……, 칠마전에 약자가 없다는 것을 나의 죽음으로 보여주겠다!"
석진영은 자신의 천령개를 향해 주먹을 가져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우―!"
아주 가까이서 긴 장소성이 들려왔다.
실로 막강한 진기가 실린 장소성이 동굴을 뒤흔드는가 싶더니 자색기류로 덮인 동굴 입구를 통해 날아드는 흑영 하나가 있었다.
번개를 방불케 하는 신법의 주인공은 나이 오순 정도의 흑의중년인이었다.
동굴을 보호하고 있던 기문진은 석진영이 던진 신탄의 폭발에 의해 파괴되어 내공이 강한 사람은 막을 수 없는 상태였다.
흑의인이 바람같이 날아들자 석진영의 눈에서 생기가 감돌았다.
'오오…… 하늘이 돕는구나.'
석진영은 너무 기뻐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어엇?"
흑의인이 동굴 안으로 떨어져 내리며 괴이한 광경에 어이없어 할 때였다.
석진영은 자신의 머리를 박살내려 하던 손으로 낙헌지를 향해 뇌공장(雷公掌)을 쳐냈다.
"지옥제일검― 쓰러져라!"
꽈르르르― 릉―!
뇌성과 함께 막강한 강기가 뿜어졌다.
"어림없다!"
낙헌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석진영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기에 그가 뇌공장을 일으키는 찰나 취마보(醉魔步)를 밟아 가볍게 피할 수 있었다.
"흥, 비굴한 놈!"
그는 냉소를 치며 하며 석진영을 향해 일장을 내지르려 했다.
순간, 흑의중년인의 사자후가 터져나왔다.
"네가 지옥제일검이라는 놈이구나!"
맑은 음향과 함께 장검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번― 쩍―!
첨예한 검기가 그대로 낙헌지를 향해 뻗어나갔다.
"어리석은 사람!"
낙헌지가 한 손으로 석진영의 가슴을 후려치고는 다른 한 손으로는 흑의인의 검을 상대했다.
"크으― 윽―!"
가슴에 일 장이 적중된 석진영은 비명을 지르고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파악―!
흑의인의 장검은 낙헌지의 왼손 안에서 딱 멈추어졌다.
낙헌지는 한 순간에 두 가지 일을 절묘하게 구사했다. 하지만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펼쳐내느라 양손 모두에 혼신 공력을 깃들일 수는 없었다.
"으음……!"
흑의인의 검을 막아내기는 했으나 손이 베어지는 것은 면치 못했고, 석진영을 치기는 했으나 그를 박살내지는 못했다.
석진영은 오장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싸우기를 아예 포기했다.
"검왕(劍王), 그가 지옥제일검이오. 반드시 죽여야 하오!"
석진영은 흑의중년인을 향해 악을 쓰면서 몸을 일으켜 동굴 밖으로 훌쩍 날아갔다.
낙헌지는 분노에 찬 음성으로 외쳤다.
"너는 죽은 후에야 나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느닷없이 앞을 가로막는 흑의인에 의해 석진영의 추격을 포기해야 했다.
"지옥제일검! 남천옥룡을 죽이려면 일단 나를 죽여야 한다. 너를 찾고 있었다!"
흑의중년인은 안광을 발하며 좌장으로 낙헌지의 가슴을 강타했다.
퍼펑―!
폭음과 함께 낙헌지는 비틀비틀 두 걸음 물러나 몸을 세웠다.
"으음, 대무신장(大武神掌)이군."
낙헌지가 쓰러지지 않자 흑의인은 망연히 놀란 표정이 되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과연 대단하군, 소문 이상이다."
"비키시오! 싸울 시간이 없소."
낙헌지는 석진영을 죽여야 하는 일념에 흑의인을 무시하려 했지만, 흑의인은 검을 곧추 세우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최소한 동귀어진이 있을 뿐이다!"
비장한 각오가 서린 태도에 낙헌지는 검미를 치켜올리며 외쳤다.
"어서 비키시오!"
"하핫…… 칠마전의 소전주답게 무공이 대단하군. 하지만 대무신국의 무공 또한 호락호락 하지 않다."
흑의인은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검강(劍 )을 발출했다. 다섯 자 길이의 검강이 발산되며 눈부신 빛을 발했다.
낙헌지는 비로소 그의 존재를 인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당신이 흑의검왕(黑衣劍王)이란 사람이군."
"그렇다, 지옥제일검! 나는 대무신국의 흑의검왕이다. 폭음 소리를 듣고 따라와 네놈을 보게 된 것이다. 기왕 만난 이상 한 번 싸워야 벌여야겠다."
흑의검왕의 옷이 풍선같이 부풀었다.
참으로 기묘한 만남이었다. 흑의검왕이라면 칠마령의 세 조각을 지키기 위해 대무신국에서 파견된 일백정검수의 우두머리격이 아닌가?
그가 오히려 칠마전의 무리를 돕게 된 것이다.
낙헌지는 한순간에 그를 제압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를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문득 묘책이 떠올랐다.
"흑의검왕, 나를 막을 수 없소."
"어리석은 소리! 최소한 너와 함께 죽을 자신이 있다."
"칠마령이 숨겨져 있는 곳에서 오십 장 이상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정검수 수장으로서의 본분인데 그것을 잊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오?"
낙헌지는 엄한 표정으로 손을 쳐들었다. 동굴이 보광(寶光)에 물들었다. 그의 손에 옥패 하나가 쥐어진 것이다.
"허억, 정검령(正劍令)……?"
흑의검왕의 얼굴이 희게 변해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정검령주(正劍令主)을 보고도 무릎을 꿇지 않는단 말이냐?"
낙헌지의 외침에 흑의검왕은 참담한 표정이 되었다.
지옥제일검이라면 천하의 악적이다. 하지만 그에게 정검령이 있다면 항거할 수 없다. 그것은 지엄한 사문(師門)의 영부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검을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흑의검왕은 듣거라!"
낙헌지가 동굴 어귀로 미끄러지며 흑의검왕을 향해 명했다.
"삼밀사에게서 정검령주의 지위를 물려받은 사람으로 명하겠다. 곧 금의검선자에게 회혼단을 먹여 제정신을 찾게 한 후 검보로 돌아가 지옥궁의 습격에 대비하고 검보를 떠나지 마라!"
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동굴 밖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흑의검왕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누워 있는 이약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로서는 누가 진짜 정의(正義)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제8장 지옥궁(地獄宮)의 대혈전(大血戰)
1
날개가 없는 낙헌지였으나 날개를 달고 있는 야조(夜鳥)가 부러워할 정도로 높이 날 수 있었다.
낙헌지는 그대로 이십 장을 날아올라 몸을 한 바퀴 회전시켰다. 근처 수 리 안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수백 장 밖으로 바위가 난립해 있는 골짜기 안으로 사라져 가는 흰 그림자가 보였다.
"비마(飛魔)의 신법! 석가 놈이 틀림없군. 놓치지 않는다."
낙헌지는 허공에 뜬 상태에서 백영이 사라져 간 방향을 따라 비천추운신법(飛天追雲身法)을 시전했다. 그는 무게가 없는 사람같이 둥실 떠 별빛이 흐르듯 밤하늘을 길게 갈랐다.
도망쳐 가는 백의인에 비해 훨씬 빠른 신법이 시전되며 백의인과 낙헌지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차 한 잔 식을 시간이 지났을까?
낙헌지는 피를 흘리며 도망치는 석진영의 모습을 십 장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으으……!"
석진영은 낙헌지의 장력에 크게 다쳐 본래의 무공을 제대로 사용하기 힘든 상태였다.
낙헌지는 그가 모산을 벗어나자 단번에 쳐 죽이기보다 숨어 추격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놈이 검보로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분명 지옥궁(地獄宮)으로 갈 것이다.'
낙헌지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여겼다.
석진영을 이 자리에서 죽여 원한을 푸는 일은 작은 일이었다. 차라리 잠시 그를 살려 칠마전의 중원 분타라 할 수 있는 지옥궁이나 흑의검대가 숨어 있는 곳을 찾는 것이 더 중요했다.
'따라 가 보자.'
낙헌지는 대(大)를 위해 소(小)를 버리기로 하고 그림자처럼 석진영 뒤를 따라 갔다.
'석가 놈이 부상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달려가는 것을 보면 그리 먼 거리는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의 판단을 확신했다. 그의 총명함은 칼날처럼 예리했다.
'지옥궁이나 다른 소굴이 먼 곳에 있다면 놈은 이쯤에서 쉬어 내상을 치료했을 것이다. 치료하지 않고 그냥 달리는 것을 보면 부상이 더 악화되지 않을 가까운 곳에 있음이 틀림없다.'
석진영은 파공성을 일으키며 바람같이 달렸다.
심한 부상으로 신법이 이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신법이었다. 그러한 그를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그를 뒤쫓아 갈 수 있는 신법의 소유자는 당금천하에서 낙헌지 하나뿐일 것이다.
"으으……, 놈에게 지다니!"
석진영은 분해 눈물을 흘렸다.
'강호에 나온 이래 첫 패배다. 천한 하인 놈에게 패배하다니.'
석진영은 본래 오만하고 유아독존 격인 자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남천관의 하인 낙헌지에게 패배했다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일거에 박살내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으음……, 마공에 당한 상처라 지극히 고통스럽군."
석진영은 옆구리를 움켜쥐고 있는데 다섯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흑의검왕이 놈을 백 초 정도 막아주겠지. 놈은 흑의검왕을 죽인 후 나를 뒤쫓을 것이다.'
석진영은 자신의 판단을 너무 과신했다.
'놈이 있는 한 칠마령의 나머지 한쪽을 얻기는 불가능하다. 놈을 검보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게 해야 한다. 놈이 나를 뒤쫓기에 혈안(血眼)이 되었을 때 검보로 되돌아가 건곤일척의 승부를 내자.'
석진영은 낙헌지가 바로 뒤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비틀거리면서도 악착같이 빠르게 달려갔다.
천하무림으로 본다면 악적이었지만 인내력이 강하고 야망을 위해서라면 고통을 쾌히 견디어 내는 끈질긴 자임에 틀림 없었다.
석진영은 일부러 혈흔(血痕)을 남기고 달렸다. 자신을 뒤쫓아올 낙헌지를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흐흐……, 놈을 지옥궁의 사관(死關)에 빠뜨리자. 사관이 놈을 죽게 할 지 모르겠으나 놈을 사흘 정도 잡아둘 수는 있다. 그 사이 전고수를 끌고 검보를 멸망시키는 거다."
2
석진영은 모산에서 사십 리 정도 떨어진 야산 기슭에 이르게 되었다.
사람이 살지 못할 황량한 곳을 보이는 이름 없는 산은 호랑이가 잠든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숲이 없는 민둥산으로 황량하기가 한 폭의 지옥도 같았다.
석진영은 거침없이 야산 기슭으로 들어섰다.
"소전주!"
마른땅 아래에서 샘물이 스며 나오듯 불쑥불쑥 솟아 나오는 흑의인 다섯이 있었다.
"으음……!"
석진영은 그들을 보자 긴장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았다.
"나… 나를 어서 궁주에게 안내해다오. 그리고 지금 곧 이곳의 모든 기관을 발동해라!"
"어… 어인 일이십니까?"
다섯 무사 중 둘이 석진영의 양팔을 부축하며 급히 물었다.
"지… 지옥제일검에게 당했다. 나를 가장하고 있는 가짜 지옥제일검이 나를 암습했다."
"예에……?"
모두 경악했다. 수하 중 한 명이 물었다.
"그렇다면 상청관에서 제이검과 제삼검을 살해한 그 놈이 나타났단 말입니까?"
"낙헌지란 놈이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하겠다. 놈이 나를 뒤쫓아 여기까지 오기 쉬우니 만반의 준비를 해라."
석진영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무사 둘과 함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은 무사 셋은 석진영의 뒷모습을 보고 어이없어 했다.
"그것 참……, 소전주님은 전주의 마공을 오성 이상 전수 받아 중원천하에서는 무적이 아닌가?"
"오늘 밤 사경을 기해 검보를 치기로 한 일이 무산되기 쉽겠군."
"허어, 고향 서장(西藏)으로 돌아가기가 참 힘들군."
그들이 한 마디씩 하다 등을 돌렸을 때 언제부터인지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흑의복면인의 눈빛이 그들 셋의 심장에 냉기를 안겨 주었다.
복면에 영패를 든 지옥제일검!
진짜 지옥제일검인 석진영이 떠났는데 또다른 지옥제일검이 그를 셋의 뒤쪽에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어엇……?"
"지… 지옥제일검!"
무사 셋이 기겁하며 삼재진을 형성하려 했다.
"고향으로 가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주겠다."
석진영의 뒤를 따라와 지옥검의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타난 낙헌지의 손가락 세 개가 무음지(無音指) 수법을 시전해 냈다. 발출할 때 소리를 내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는 수법이었다.
"큭!"
"으윽!"
무음지에 적중된 지옥궁 무사 셋이 심장에 동전만한 구멍이 뚫린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다. 지옥궁의 수문위사들로 제법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들이었지만 상대를 너무 잘못 만난 것이다.
'악인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낙헌지는 셋을 간단히 처치한 후 석진영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다시 유령같이 움직여 가기 시작했다.
이십여 장을 전진하자 석진영이 무사 둘의 부축을 받으며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이 가고 있는 곳은 좌우 벽이 도끼로 찍어내린 듯한 협곡으로 근처에는 삼엄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가히 용담호혈(龍潭虎穴)이라 할 만한 곳이었다.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낙헌지는 최소한 사십여 명이 숨어 도사리고 있음을 청력으로 간파할 수 있었다.
'공연히 타초경사(打草驚蛇)를 일으킬 필요는 없지.'
낙헌지는 살기를 느끼는 순간 잠영미종술(潛影迷踪術)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장 뛰어난 야행신법이라 보통 안력으로는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는 교묘한 신법이었다.
게다가 옷자락 스치는 소리도 내지 않고 지면과 몸을 밀착시켜 움직이기 때문에 초고수의 안력이 없다면 발견하기 힘든 절세적인 신법이었다.
달빛이 없는 심야에다 석진영의 돌연한 회궁(廻宮)이 무사들의 주위를 한창 끌고 있는지라 그 누구도 낙헌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석진영은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재촉했다.
"어서 들어가자."
낙헌지는 협곡의 지형을 이용해 들키지 않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갈 수 있었다.
끼기기긱―!
우르르릉―!
석진영의 무리와 낙헌지가 들어간 후 협곡은 기관학에 의해 엄밀히 보호되기 시작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넘나들 수 없을 정도로 협곡은 철통같이 방비되었다.
그러나 사신(死神)은 이미 안으로 들어갔으니 무의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협곡은 일리에 걸쳐 이어졌고 그 끝은 분지(盆地)였다.
근처의 황량함으로 보아 세외선경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실로 오묘한 인공(人功)에 의해 무릉도원 같은 골짜기 하나가 만들어져 있었다.
분지는 아주 거대했고 그 가운데 석전(石殿) 하나가 우뚝 솟아나 있었다.
석전에는 웅후한 필체의 편액이 하나 걸려 있었다.
〈 地獄宮(지옥궁) 〉
아……, 그렇다.
지난 십여 년간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던 지옥궁이 바로 협곡 안의 석전이었던 것이다.
"소전주님이시다―!"
"소전주님이 다쳐 돌아오셨다!"
석전 근처가 마도고수들의 고함소리로 약간 시끄러워지는 가운데 석전 안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흑의노인 하나가 있었다.
낯빛이 숯덩이 같은 검은 노인으로 키는 오척 단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은 태양의 광휘보다도 활활 타올라 그의 내공이 이미 오기조원(五氣朝元)임을 말해 주었다.
"소전주, 이게 어인 일이시오?"
흑의노인은 석진영이 피를 흘리며 다가서자 크게 놀라며 한 달음에 석진영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궁주, 부끄럽소."
그렇다면 이 오척 단구의 노인이 지옥궁의 궁주란 말인가?
흑면제군(黑面帝君)!
놀랍게도 정사오기(正邪五奇) 중 하나인 그가 바로 지옥궁주였던 것이다.
흑면제군의 출신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사실 그는 칠마가 중원을 떠나기 전 수십 년 후를 위해 중원에 남겨둔 칠마전의 충복(忠僕)이었다. 그는 지옥궁을 세워 석진영의 충실한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
"이럴 수가! 대체 어떤 자가……?"
흑면제군은 소주인의 부상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놀랍게도 남천관 안의 하인이었던 낙헌지란 놈이 무시무시한 고수가 되어 나타났소."
"낙… 낙헌지……? 설마 탈백마안 아래 죽었다던 그 놈이……?"
"그렇소. 나를 대신해 백의검제의 어검술을 맞았던 그 놈이 죽지 않고 되살아났소. 게다가 그 놈이 지옥제일검으로 행세하고 있소."
"그… 그럼 놈이 바로 상청관에서 지옥사자들을 죽인 가짜 지옥제일검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놈은 아마 여기를 향해 올 것이오.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오."
석진영은 핏기 없는 얼굴로 대답하며 좌정했다.
"놈이 온다면 지옥문(地獄門)을 찾아오는 꼴이 될 것이지요. 소전주님은 이제 안심하십시오."
흑면제군은 석진영의 부상이 가슴 아픈 듯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는 석진영에게 단약 세 개를 먹여 주며 조금 진정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소전주님께 급히 알릴 일이 하나 있었는데 소주님을 지금 뵙게 되는군요."
"무슨 좋은 일이 있었소?"
"헤헤……, 지옥궁에 들기를 간청한 강호인 하나가 있었습니다."
"아, 그렇소?"
흑면제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아주 대단한 여고수가 수천의 정예고수들을 끌고 지옥궁에 투신할 뜻을 비췄습니다. 지옥궁이 칠마전의 분타라는 것을 알고 아마도 장차 칠마전이 천하를 지배할 때 군림천하(君臨天下)의 대열에 동참하기 위함인 듯합니다. 그녀의 사자 두 명이 지금 이 안에 와 있습니다."
석진영 역시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호오, 정말 대단한 무리들이군. 어떻게 이곳을 알아냈단 말인가?"
"하여간 귀신 같은 재간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소전주님께서 전주를 대신해 그들을 받아 주신다면 검보의 정검수들을 쳐부수는데 음모 같은 획책할 필요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들과 지옥궁이 힘을 합한다면 검보를 일거에 휩쓸 수 있습니다."
흑면제군의 자신만만해 하는 소리가 고통스러워하던 석진영에게 편안한 기분을 만들어 주었다.
"검보 안에는 흑의검왕이라는 절세고수가 있고, 병선자라는 여제갈이 버티고 있어 천후사나 남천관과는 달리 난공불락이오. 그래서 금의검선자를 잡아 이용하려 했는데, 낙헌지란 놈 때문에 뜻이 와해되었소."
석진영은 부상이 한순간 씻긴 듯 대소를 터뜨렸다.
"힘이 부족하다 여기고 있었는데 외부에서 도움이 있다니 하늘이 우리를 돕는 게 아니겠소? 하하하……!"
"헤헤…… 물론입지요."
"몸이 낫는 대로 검보를 칠 작정이오. 궁주를 만나니 잠깐 잃었던 용기가 되살아나는구려."
석진영은 흑면제군과 손을 맞잡으며 새로이 야심을 불태웠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사신(死神)의 침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흥, 좋아하긴 이르다!"
언제부터인가 지옥궁 석전 위에 서 있던 흑의복면인의 냉소가 그들의 고막에 지극한 통증을 안겨 주었다.
지옥제일검의 모습을 한 낙헌지였다.
"저… 저 놈이 어떻게?"
석진영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는 누구보다 낙헌지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 왔느냐?"
흑면제군이 벼락같이 외치며 그대로 칠 장을 날아 올랐다가 낙헌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흑면제군은 떠오르는 가운데 흑무(黑霧)로 몸을 휘감았다.
콰류류류―!
흑면제군이 흑룡 같은 모습을 하고 날아들자 낙헌지의 두 눈에서 차가운 광망이 일어났다.
'이 놈을 즉사시켜 지옥궁의 사기를 철저히 부셔 버리는 것이 싸움을 빨리 끝내는 방법일 것이다.'
낙헌지는 흑면제군이 다가서기를 기다리며 혈발마공을 혼신공력으로 끌어 올렸다. 머리카락이 핏빛으로 물들어 빳빳이 일어나자 검은 복면이 두 치 정도 위로 쳐 들려졌다.
"허억―?"
흑면제군은 낙헌지의 눈에서 뿜어지는 무시무시한 혈광에 그만 기가 죽었다. 그러나 피한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애송이가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는가? 소전주를 다치게 했다고는 하나 강호에서 근 백년을 보낸 노부의 상대는 되지 못하리라!'
흑면제군은 흔들렸던 마음을 가다듬으며 입술을 오므렸다.
"우우―"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마후(魔吼)가 석전을 뒤흔들렸다. 상대를 제압하려는 선제공세였다.
"흑살마공―!"
흑면제군은 내공을 한껏 발휘하며 막강한 강기를 뿜어냈다.
그의 몸이 검은 기류에 덮인 채 십 장 안을 뒤흔들었다. 워낙 험악한 마기의 분출에 주변의 무사들은 급히 십수 장 밖으로 피신했다.
낙헌지의 두 손바닥이 적색으로 물들어 흑면제군 쪽으로 내밀려졌다.
"지옥행이다!"
취마음(醉魔吟)에 의한 호통이 떨어지자 흑면제군의 일신진기가 흐트러졌다. 동시에 적색으로 물든 장심에서 붉은 기류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꽈르르르― 릉―!
칠십 년 간 강호에서 잊혀졌던 혈발마공의 무시무시한 힘이 낙헌지의 손에 의해 재현된 것이다.
꽈―꽈꽝―!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흑면제군이 일으켜 냈던 검은 기류가 봄바람에 눈 녹듯 사라지며 흑면제군의 몸이 허공에 뜬 채 산산이 박살났다.
"케에에― 엑―!"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피비(血雨)가 뿌려졌다.
흑면제군의 몸은 추악한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채 피조각이 되어 석전 앞 지면을 벌겋게 물들이는 것으로 생을 마쳐야 했다.
"허억, 궁주께서?"
"맙소사! 일… 일 초로 궁주를 죽이다니……?"
"마신(魔神)이다!"
석진영과 많은 지옥궁 고수들이 눈을 의심했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세 배는 강하다. 혈발마가 살아 있다 해도 지금 이 놈만은 못할 것이다.'
석진영은 아랫도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훗훗……, 지옥궁이 겨우 이 정도냐?"
흑면제군을 지옥으로 날려보낸 낙헌지가 차가운 웃음소리를 내며 훌쩍 날아 올랐다가 석진영 앞으로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그는 흑면제군을 즉사시키고도 내공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는지 기러기 털같이 아주 날렵히 떨어져 내려 석진영에게 또 한번 죽음의 공포를 안겨 주었다.
남천관에서의 수모를 철저히 갚아 주는 셈이었다.
"석진영, 내가 맹세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겠지?"
낙헌지의 혈발마공에 의한 핏빛 안광이 석진영의 얼굴에 죽음의 그늘을 만들었다.
"네… 네 놈이 귀신이냐 사람이냐? 흑의검왕을 어떻게 그리 쉽게 따돌리고 나를 쫓아 여기까지 왔단 말이냐?"
석진영은 너무도 두려워 도망칠 궁리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십여 지옥검대(地獄劍隊) 고수들에 의해 에워싸여져 있었으나 그것으로 안전하다 여기지는 못했다. 지옥검대 정도는 낙헌지에게 허수아비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낙헌지의 무공은 오마에게 전수받은 마공이었다.
그 심오한 경지는 지옥궁의 마두들이 이룬 경지를 훨씬 초월했기에, 지옥궁의 마공 정도는 오히려 정파의 신공보다 상대해 내기가 쉬웠다.
흑면제군이 일초에 죽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마공이 아닌 다른 신공 절예를 구사했다면 아마 백초 정도는 무난히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마공으로 최강의 마공인 혈발마공에 저항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석진영, 여기까지 와서 부하들 길동무를 하게 되었으니 죽어도 외롭지는 않겠다."
낙헌지가 조롱 섞어 비아냥 대자 석진영은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피하지는 않겠다. 사부님의 뜻을 이행치 못하는 죄인이니 네놈과 싸워 죽는다 하여 분할 것은 없다."
"하하……, 역시 칠마전 소전주답군. 도망치려 하지 않다니 너의 담대함을 높이 사주겠다."
"칭찬은 필요 없다, 이 간악한 하인 놈아!"
낙헌지는 당당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하하, 하인이면 어떠냐? 너의 지위보다 나은 지위가 아니겠느냐? 천하 대의를 따른 하인이 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으으……!"
석진영은 세치 혓바닥을 이용한 설전(舌戰)으로도 낙헌지에게 패하게 되자 미칠 것만 같았다.
"네 놈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싶구나!"
그가 이토록 좌절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었지만 내상 때문에 그의 일초지적에도 미치지 못할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웠다.
바로 그때였다.
"호호호……,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시려 하십니까?"
어디선가 여인의 요염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석진영과 낙헌지가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로 바람같이 날아 들어오는 일녀일남이 있었다. 요염하게 생긴 홍의여인과 눈빛이 잿빛인 백의복면인이었다.
두 사람은 연기가 흐르듯 날아 두 사람 사이로 끼여들며 먼저 석진영을 향해 예를 올렸다.
"소전주는 안심하십시오."
"아……, 당신들은……"
석진영은 느닷없는 초고수들의 출현에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홍의여인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소녀 독낭자(毒娘子)는 가사(家師) 백독마부주(百毒魔府主)의 명에 따라 지옥궁에 왔습니다. 칠마전의 소전주께서 저희 백독마부를 칠마전에 받아주신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죽음을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놀랍게도 홍의여인은 낙헌지도 아는 여인이었다.
백독마부의 소부주인 독낭자가 바로 그녀였다. 그녀와 함께 나타난 백의복면인 또한 낙헌지가 잊지 못할 사람이었다.
'검노인(劍老人)이 아닌가? 한데…… 전과 다르군.'
낙헌지의 백의복면인의 흐리멍텅한 눈빛에서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독마 사숙이 잃었다는 독경(毒經) 안에 있는 망신단(忘神丹)에 중독되었단 말인가?'
낙헌지는 검노인이 시체같이 되어 있자 착잡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검노인은 강시( 屍)나 진배없었다.
망신단이라는 지극히 사악한 마단(魔丹)에 심령을 금제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공을 갖고 있는 한 망신단의 노예가 되어야 했다.
그는 낙헌지와 헤어진 직후 백독마부주를 징계하려 백독마부로 갔다가 뜻을 이루기는커녕 전보다 더 비참한 신세가 되어 낙헌지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무공과 독공은 서로 극성이 되는 절기였다.
검노인의 무공은 백독마부 전체의 힘보다 강했으나 독공에는 백지였기에 이렇듯 비참한 모습이 되고 만 것이다.
석진영은 뜻밖의 원군에 반색이 되어 독낭자의 손목을 움켜 쥐었다.
"백독마부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오. 흑응곡(黑鷹谷), 해왕방(海王 ) 등의 문파가 오래 전 칠마전과 한몸이 되었듯 이제 백독마부로 칠마전과 한몸이 된 것이니 중원의 일대 경사요."
"감사합니다, 소전주님!"
"하하, 저 놈을 일 각 정도만 막아주실 수 있다면 백독마부는 칠마전의 은인이 되어, 훗날 칠마전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독낭자는 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소전주, 어찌 일 각 정도를 바라십니까?"
"어쨌든 고맙소."
석진영은 독낭자에게 다정히 말한 후 낙헌지를 쏘아보았다. 그의 눈은 굶주린 늑대의 눈빛이나 다름이 없었다.
"낙가 애송아! 칠마전의 힘은 위대하다. 백독마부가 칠마전에 드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네놈도 뜻을 바꿔 나의 수하가 되지 않겠느냐? 내 너를 칠마전에서 지극히 높은 지위로 올려 주겠다."
"하하……, 심마가 갖고 있는 지위를 내게 주기 전에는 그 더러운 무리 속으로 들어가지 않겠다."
심마가 갖고 있는 지위란 곧 전주의 지위였다.
"흐흐……, 죽기를 자초하는군. 네 놈은 백독마부의 독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임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석진영은 독낭자에게 태산 같은 신뢰를 두고 외쳤다. 그러나 사실 크게 믿지는 않는 상태였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자신들의 사부가 아니고서는 낙헌지를 견제할 사람은 없었다.
그는 독낭자와 신비한 백의노인이 자신의 수하들과 힘을 합해 낙헌지를 막아 자신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흑응(黑鷹)이 있는 곳까지만 가면 살 수 있다.'
석진영이 눈알을 요사하게 굴릴 때 독낭자가 한껏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호호……, 소전주님께 첫 번째 선물로 저 더러운 가짜 지옥제일검의 수급을 바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더욱 좋지."
독낭자는 몸을 홱 돌리며 검노인을 향해 명을 내렸다.
"저 놈을 죽여요!"
독낭자가 손끝으로 낙헌지를 가리키자 검노인이 우뚝 서 있다가 눈에서 회광을 발하며 낙헌지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깊은 족인이 새겨졌다.
검노인은 다름아닌 백의검제 이궁으로 정사오기 중 가장 강한 무공을 지닌 사람으로 석진영보다도 한 수 위의 고수였다.
그가 낙헌지를 향해 위풍당당하게 걸어가자 석진영은 어둠 속에서 등불을 발견한 듯한 표정이 되었다.
"오……, 백독마부에 저런 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석진영은 그제서야 독낭자가 낙헌지의 수급을 베어 주겠다는 것이 과장의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음, 잘하면 또다시 도망가는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되겠군.'
검노인이 깊은 족인을 남기며 다가서자 낙헌지는 일단 뒤로 물러났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두려워 물러나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것은 아니었다.
그는 백의검제와 싸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백의검제, 나요!"
낙헌지의 전음에는 취마성이 깃들여 있었다.
"으음……!"
망신단에 혼백이 제압되어 있던 백의검제는 낙헌지의 취마음에 약간 정신을 차린 듯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세웠다.
낙헌지는 그의 눈빛에서 희미하게 살아나는 정광을 보고는 반색을 했다.
"나외다!"
"피… 피해라!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으으……, 어… 어지러워!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겠다."
백의검제는 잠깐 제정신이 드는 듯하다가는 다시 망신단에 심령을 제압당한 모습이 되었다.
"지독하군. 망신단을 십 배나 강하게 썼군."
낙헌지는 좌절하고 말았다. 음공의 힘만으로 백의검제를 본래대로 만들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백의검제가 허리에 차고 있던 금검을 길게 뽑아내 가슴을 가리는 자세를 취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검은 금룡신검(金龍神劍)으로 백독마부주가 친히 하사한 명검이었다.
그가 검을 쥔 자세는 단홍칠절검식(斷紅七絶劍式)의 기수식으로 바로 무림맹 최고절학이었다.
금검에서 일 장 검강이 일어나자 모두 경악했다.
"와―!"
"오오, 무맹주 백의검제만이 일 장 길이의 검강을 일으킬 수 있다고 들었는데……?"
"백독마부가 숨어 활동하면서도 단 한 차례 패하지 않아 기이하게 여겼더니 저런 고수가 있었기 때문이었군."
"가히 소전주만한 고수다."
낙헌지는 결심한 듯한 눈빛을 하고 백룡검(白龍劍)을 움켜쥐었다.
'어쩔 수 없군. 대를 위해 소를 버릴 수밖에. 어차피 운리신룡 영전에 검노인의 수급을 받치기로 맹세했지 않은가? 게다가 검노인도 이미 목을 내게 맡겼다고 약속한 바 있으니 내가 살계를 펼친다 해도 나를 원망할 사람은 없으리라.'
낙헌지는 검노인을 죽이리라 결심했다.
우선은 석진영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함이고, 검노인의 불행한 영혼을 죽음이라는 평화 속으로 보내 주기 위한 비장한 각오였다.
그의 모진 면이 진기를 발휘하는 셈이었다. 작금의 상황으로서는 절대 우유부단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백룡검이 길게 끌려나오자 독낭자가 흠칫 놀랬다
"아……, 바로 그 놈이군."
독낭자는 그제서야 지옥제일검으로 변복한 인물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도계진에서 백독마부 고수들을 여럿 죽인 더러운 옷차림의 미청년임을 떠올렸다.
'으음, 그렇다면 검노인이 이기기 힘들겠군.'
독낭자는 바싹 긴장하며 미소를 싹 지웠다.
"우―!"
"치― 앗―!"
낙헌지와 백의검제의 몸이 동시에 오 장이나 떠올라 허공에 격돌하기 시작하며 검광(劍光)이 분지를 밝혔다.
번― 쩍―!
꽈르르― 릉―!
백룡(白龍)과 금룡(金龍)이 드잡이질을 벌리는 듯 노한 검파(劍派)가 허공에서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실로 무림사에 드문 초고수들의 격돌이었다.
검강을 뻗어내는 검과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검기가 우박처럼 쏟아지며 지상을 강타했다.
퍼퍼펑―!
지옥궁의 웅장한 석전이 삽시간에 파괴되었다.
석진영과 독낭자, 그리고 지옥궁 무리들은 너무도 엄청난 격돌에 입을 딱 벌린 채 멀찌감치 물러서 있었다.
그 바람에 그들은 면전까지 들이닥친 또다른 위험을 간과하고 말았다.
콰― 콰쾅―!
갑자기 사방에서 폭음과 함께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잇달았다.
"무… 무림맹(武林盟)의 습격이다―!"
"아― 악―!"
"병… 병선자(病仙子)가 무림맹의 정예고수들을 이끌고 왔다. 기문진이 파괴되었다―!"
"피하라, 으아악―!"
협곡이 순간적으로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석진영이 낙헌지를 유인하기 위해 흘린 핏방울이 전혀 뜻밖의 강적을 협곡 안으로 불러들이게 된 것이다.
협곡의 사위(四位)가 푸른 옷차림의 용감무쌍한 고수들에게 포위된 채 협곡 내 지옥궁 무사들은 빗발치는 듯한 폭전(暴箭) 아래 하나씩 쓰러져 갔다.
피피피핑―!
밤하늘을 물들이는 불꽃송이에 협곡의 밤은 이제 밤이라 불리지 못할 정도로 휘황찬란하게 물들였다.
"아아악―!"
"크애액……, 불을 꺼다오!"
무림맹의 고수들이 폭약을 매단 화살을 천여 발 발사해 골짜기 안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지옥궁 무리들은 사지가 찢기고 불에 그을린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천하를 향해 펼치려던 지옥도가 오히려 궁내에서 전개된 것이다.
한편, 낙헌지와 백의검제 사이의 비검(比劍)은 극한지경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허공에 뜬 채 검봉(劍鋒)에서 검기를 일으켜 맞댄 채 움직임을 중지하고 있었다.
검초로서 겨루는 것이 아니고 혼신공력으로 겨루기 시작한 것이다.
내공 대결이란 둘 중 한사람이 쓰러져야만 끝을 내는 아주 무서운 격돌이라 상승내공을 가진 사람도 두려워하는 시합이었다.
"으음……!"
백의검제의 옷자락이 심하게 펄럭였다. 노도처럼 밀어닥치는 낙헌지의 공력을 받아내기에는 너무도 힘겨웠던 것이다.
반면 낙헌지는 한 손으로 검기를 일으켜 검노인과 공력을 겨루는 가운데 주위를 살피는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마음을 두 개로 쪼갤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을 가졌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무림맹의 기세가 대단하군.'
낙헌지는 불길이 십수 장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지옥궁을 비롯한 많은 가옥이 화마에 휩싸이는데 혀를 내둘렀다. 지옥궁은 무리들이 개미떼처럼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쳐라―!"
"지옥궁 무리들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된다."
무맹 특유의 경장을 걸친 고수 이백여 명이 양쪽 절벽 위에서 훌훌 뛰어내렸다. 그들은 협곡의 정면에서 물밀 듯 쳐들어오는 일단의 무맹고수들과 호응해 거대한 분지를 철통같이 에워쌌다.
지옥궁 안에 있는 무리들은 양쪽에서 적을 만나는 셈이었다.
가장 애가 타게 된 사람은 진짜 지옥제일검 석진영이었다.
보통 때였다면 혼자의 힘으로도 막아내겠지만 지금은 극심한 내상을 입은 채 자신의 몸조차 보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낙헌지가 근처에 있었다.
'으음, 병선자가 기른 무림맹의 최정예 고수들이다.'
석진영은 자신의 수하들과 접전을 벌이기 시작한 무림맹 고수들의 얼굴을 살피며 사색이 되었다.
그는 무림맹의 총순찰이기도 했기에 무림맹의 속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맹에서는 구대문파의 최후의 격돌을 위해 정예고수 이백으로 결사대를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무림맹의 결사대들은 무공과 암기술, 그리고 궁술(弓術)과 포박술에 한결같은 조예를 갖고 있는 무림맹의 방패들이었다.
이들이 모조리 다 나타났으니 지옥궁이 괴멸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상복마대진(四象伏馬大陣)으로 모두 사로잡아라!"
불바다로 화한 골짜기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하는 청의몽면여인 하나가 있었다.
그녀는 금강신(金剛神)같이 건장한 백삼장사 팔 인에 의해 보호받으며 싸움판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분지 가운데로 다가섰다.
청의몽면여인은 몸매가 하도 가늘어 곧 쓰러지지 않을까 위태로워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몽면을 뚫고 나오는 눈빛만은 아주 신비로웠다.
"오를 지옥제일검을 놓치면 이런 기회는 다시 찾지 못한다."
연약해 보이는 청의몽면여인의 목소리에는 힘이 깃들여 있었다.
석진영이 흘린 핏방울을 따라온 이백 결사대는 청의몽면여인의 명아래 죽고 살기를 맹세한 바 있었다.
그녀는 이제껏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는 치밀한 여인으로 당금 무림의 보배적인 존재였다.
제9장 천하제일의 재녀(才女)
천하제일지(天下第一智) 병선자(病仙子)!
무림맹에 들어 있는 강호제협은 천하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병선자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그녀는 다섯 살 때 사서오경(四書五經),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줄줄 외운 신동(神童)이었다.
몸이 약해 무공을 익히지는 못했으나, 머릿속에는 구대문파의 비전수(秘傳手)가 구결로 허다했고, 잡학(雜學)에 능하기는 중원제일(中原第一)이라 불려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가 그렇듯 총명하지 않았다면 백의검제가 백독마부의 충복이 되는 굴욕을 참아 가면서도, 그녀의 목숨을 연장시킬 영약 인형설삼(人形雪蔘)을 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이 아이는 너무 약해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소. 그러나 장차 이 아이는 노부보다도 더한 업적을 이룰 것이오!
백의검제의 이러한 말은 결코 자식에 대한 아비의 맹목적인 애정 때문은 아니었다.
병선자는 어렸을 때부터 세속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히 훌륭한 면모를 발휘하곤 했다.
백의검제가 떠난 후부터는 무림맹주(武林盟主)의 책무를 고스란히 이어 받아 지난 십 년간 지옥궁과의 싸움에서 몇 차례 쾌승을 거둔 바도 있었다.
만에 하나, 병선자가 지금도 같이 뛰어난 여인이 아니었다면 서장 칠마전에서 지옥제일검 석진영이 파견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병선자는 석진영이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었다.
그가 천후사와 남천관을 쑥밭으로 만든 후 한동안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이유도 사실은 병선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렵사리 금의검선자 이약란을 심마대법의 노예로 삼으려 한 이유도, 병선자가 버티고 있는 검보를 힘으로 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지옥제일검을 꼭 잡아야 한다. 그 자가 잡혀야만 세상이 평화로워진다."
병선자와 목소리는 맑고 힘이 있었다. 연약하고 호리호리한 몸매에서 그렇게 당당한 말소리가 나온다는 것이 매우 놀랍기만 했다.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여덟 사람은 무림맹 팔나한(八羅漢)이라 불리는 금강불괴의 역사(力士)들이었다.
팔나한이 하는 일은 오로지 병선자를 보호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상피신공(象皮神功)이라는 외공을 수련했기에 도검에 격중된다 해도 피를 흘리지 않는다. 그리고 한 손바닥에서 오천 근의 장력을 발출해 내는 천부적인 장사들이었다.
또한 팔괘진(八卦陣)에 능통해 그 누구도 병선자를 암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팔나한은 병선자를 소맹주(小盟主)라 불렀고 병선자의 머리카락 한올조차 자신들의 목숨보다 귀히 여겼다.
지병으로 인해 성질이 괴팍해 여인답지 않게 된 병선자였으나 그들만은 친오라버니같이 끔찍이 여겼다.
병선자와 팔나한!
그들은 서로 아끼기에 병선자의 지혜와 팔나한의 무공이 상승작용을 해 지금 같은 신위(神威)를 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옥궁이 불타는 모습에 팔나한은 사뭇 득의만만하게 했다. 그러나 병선자는 조금도 안심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지옥제일검이 쓰러지기 전에는 포위망을 늦추지 마라!"
병선자가 불바다 속을 파고들며 지옥궁 마인들을 거꾸러뜨리는 무림맹의 결사대를 독려할 때였다.
"소… 소맹주!"
팔나한 쪽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서는 백삼청년 하나가 있었다. 팔과 허리 사이에 홍의여인을 안고 있는 약관 젊은이로 잔뜩 괴로움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판사판이다. 이 계집이 나의 정체를 안 후라면 암습해 사로잡아 인질로 쓸 것이다. 다행히도 나를 해하기 위해 여기 쳐들어 온 것이 아니라면 함께 검보로 돌아가는 거다.'
청년의 속마음은 얼굴 모습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위선자 석진영이 비틀거리며 다가서자 병선자와 깜짝 놀라 외쳤다.
"총 순찰이 여기 어인 일이십니까?"
총 순찰이라는 호칭이 석진영을 기쁘게 했다.
'혼자 총명한 체하나 사실은 천하에서 가장 어리석은 계집이다. 네년이 결사대를 모두 이끌고 온 이상 검보는 텅 비었다 할 수 있다.'
석진영은 내심 남모를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여인들에게 동정을 사고도 남음이 있는 애처로운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지… 지옥제일검에게 이렇게 다쳤소."
"지옥제일검 분명히 안에 있나요?"
"물론이오. 저기 있는 자요."
석진영이 손이 허공에서 검을 마주 대고 싸우고 있는 이인 중 한 사람을 가리켰다.
피어오르는 불꽃 외에는 으슥한 곳인지라 쉽게 알아보이지 못했던 두 사람의 모습이 석진영의 말 한마디로 인해 군웅들의 초점으로 화했다.
"지… 지옥제일검이군."
"우……, 바로 저 자다!"
군웅들과 팔나한이 격동하며 살기를 발하자 석진영은 일부로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헉헉……, 나… 나는 선사 남천신군의 복수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에… 무공이 모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놈을 찾았다가 이 지경이 되었소."
"살아 계시니 다행입니다."
병선자는 안타까운 눈빛을 하며 소매 속에서 옥갑 하나를 꺼내 석진영에게 건네 주었다.
석진영은 그 순간을 이용해 병선자를 사로잡을 수도 있었으나 손을 쓰지는 않았다.
'나의 목표는 칠마령이지 이 어리석은 계집의 목숨이 아니다.'
석진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고마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에 소림사 장문인이 기증한 대환단(大還丹) 한 알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복용하시고 원기를 찾으십시오."
"대… 대환단!"
병선자가 자신에게 말하자 석진영은 내심 솟구치는 기쁨을 감추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실로 엄청난 복연이 아닐 수 없었다.
소림의 대환단은 무림사에 대대로 전해지는 성약이었다. 무림인인 복용한다면 공력을 급증시키고 일반인이 복용한다면 평생을 무병장수할 수 있는 기사회생의 영약이었다.
"고… 고맙소."
"한데…… 그 여인은 누굽니까?"
병선자가 석진영이 안고 있는 홍의여인을 힐끗 바라봤다.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져 있는 홍의여인은 사실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라 혼절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독랑자(毒娘子)였다.
"여기 잡혀 있던 여인이오. 정파 소속이오."
석진영이 담담히 말하자,
"상태가 위중해 보이는군요."
병선자가 안타까워하며 다시 한 알의 대환단을 꺼내 석진영에게 건네 주었다.
"이 순간을 위해 지난 오 년간 침식을 거르며 보냈습니다. 이 골짜기는 결사대들이 지난 세월 동안 갈고 닦은 비장의 재간으로 인해 철통같이 에워싸여져 있습니다. 우리들을 다 죽이기 전에는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대… 대단하오."
"천후사와 남천관이 분명 검보와 차이가 있음을 천하에 알리는 것이지요."
석진영은 손을 모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 소저같이 현명하신 분이 무림맹의 소맹주로 있다는 것은 무림백도의 최대 행운이오."
"과찬이십니다."
두 사람의 말이 여기에 이를 때였다.
"차― 앗!"
지축을 흔드는 기합소리와 함께 백의검제와 검을 맞대고 내공을 겨루던 낙헌지의 왼손이 흔들리며 수백 개의 장영을 만들었다.
'더 이상 봐줄 수 없다!'
낙헌지는 이제껏 차마 검노인을 해할 수 없어 살수를 미루어 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석진영이 병선자에게 감언이설로 위장하자 격분하고 말았다.
그는 두 가지 종류가 다른 무공을 동시에 시전할 수 있는 남다른 재간을 갖고 있기에 검공과 내공을 겨루는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콰아앙―!
그의 장영이 백의검제의 몸을 휘감아 허공으로 높이 날려보냈다.
"크으윽―!"
백의검제의 가슴에 장인이 선명하게 새겨지는 것이 불빛에 언뜻 비쳐보였다.
"아……!"
낙헌지는 백의검제가 비명 소리를 내며 날아가자 이제껏 악독하던 마음과는 달리 가슴이 저렸다.
'부정(父情)이 강해 사마외도와 손을 잡은 불행한 사람인데…… 내가 너무 했군.'
낙헌지는 백의검제가 피분수를 뿜으며 날아가자 검을 든 채 신형을 폭사시켰다. 흑선이 그어지는 듯하더니 두 사람 사이가 아주 가까워졌다.
백의검제는 오공에서 피를 흘리며 불타는 지옥궁 안으로 빠져들기 직전이었다.
"오시오!"
낙헌지는 섭물공(攝物功)을 전개해 백의검제의 바싹 마른 몸뚱이를 끌어 당겼다.
그는 허공에서 또 한차례 방향을 틀며 운룡(雲龍)이 구름 안으로 들어가는 절묘한 몸놀림으로 백의검제를 낚아채며 화마에 뒤덮이지 않은 차가운 땅을 골라 가볍게 내려섰다.
"으으……!"
검노인은 아직 죽지 않고 신음소리를 흘려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낙헌지의 몸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낙헌지는 아직 혈발마공을 운용하고 있었기에 눈빛이며 복면 뒤쪽으로 시뻘건 머리카락을 드리운 모습이었다. 그것만도 끔찍한데 이제 몸에 피를 묻히게 되자 공포스러운 혈인으로만 여겨졌다.
낙헌지는 얼른 백의검제의 상세를 살폈다. 아주 위중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반탄력이 너무 강했다. 아……, 오장육부가 으스러졌으니 이제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와도 구할 수 없다.'
낙헌지는 백의검제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날 밤, 그는 정사오기 중 둘을 죽이게 되었다. 결국 그는 운리신룡의 어여쁜 딸 강남미연과 헤어지기 전에 한 맹세를 지키게 된 셈이었다.
내가 낭자 대신 복수해 주겠소!
그런 한편 중원제일검(中原第一劍)에게 최후를 안겨주게 비극을 연출하게 되었다.
그는 백의검제를 안아든 채 죄책감과 갈등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포위하라!"
"지옥제일검을 죽여라!"
사방에서 수십 인의 정예고수가 들이닥쳤다. 사기 충천(衝天)해 있는 무림맹의 결사대인 무맹이십팔숙(劍盟二十八宿)이 날아들어 낙헌지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을 만들었다.
진이 구축되는 동시에 삼엄한 살기가 일어났다.
육감이 지극히 발달한 낙헌지는 살기를 감지하며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귀찮게 됐군.'
낙헌지는 자신이 진짜 지옥제일검으로 오해받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씁쓰레한 표정이 되었다.
"흠……!"
그는 나직이 탄식하며 주위를 쓸어보았다.
"나는 지옥제일검이다. 그러나 남천신군을 죽인 사악한 지옥제일검은 아니다. 또한 지옥궁 사람도 아니다. 그리 알고 길을 비켜라!"
물론 무맹의 고수들이 순순히 길을 내줄 리 만무했다.
"미친 놈!"
"비열하게도 궁지에 몰리자 변명을 하는군."
"네 놈의 거짓말에 속을 사람은 없다."
무맹이십팔숙의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낙헌지를 불끈 화나게 했다.
지옥궁 근처의 싸움판이 완전히 중지되었다.
무림의 공포적 존재였던 지옥궁은 제명되었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일 뿐이었다.
형식상의 궁주 흑면제군의 시체가 발견되고, 수십 명의 지옥검대고수가 폭전과 협공 아래 즐비하게 늘어섰으나 지옥궁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석진영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으음, 이 놈이 어디로 도망쳤단 말인가?'
낙헌지는 백의검제를 구하는 잠깐 사이 석진영이 자취를 감춰 버리자 몹시 분개했다.
그의 눈빛이 더욱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이십팔숙은 점점 포위망을 좁히며 압박을 가해 왔다.
"지옥제일검! 여기서 뼈를 묻어야만 한다!"
차가운 말소리와 함께 이십팔숙의 진영 안으로 걸어드는 아홉 명의 남녀가 있었다. 키가 일 장에 달하는 금강역사 여덟 명이 수선화같이 호리호리한 청의몽면여인을 보호하며 진세 안으로 들어섰다.
청의병선자 이옥란이 그녀였다.
"너의 수하들 중 반이 시체로 남았고 반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게다가 무수한 기관이 잿더미로 화했다."
청의병선자의 자부심에 찬 어조가 낙헌지를 어이없게 했다.
'빌어먹을! 저 멍청한 여인이 석진영을 풀어준 모양이군. 하지만 석진영이 도망가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낙헌지는 눈에서 혈광을 일으켰다.
"삭가 놈은 어디로 갔느냐?"
"흥, 총순찰과 원한이 많군. 하지만 너는 총순찰을 다시 보지 못한 채 여기서 뼈를 묻어야만 한다."
청의병선자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는 듯 손을 쳐들었다.
팔나한과 이십팔숙이 그녀의 지시에 주위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가볍게 떨어지는 순간 팔나한과 이십팔숙은 죽음을 불사한 대공세가 시작될 것이다.
그 누구가 그들의 협공 아래 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다른 절세 고수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오마의 공동전인이 되어 강호로 나온 낙헌지에게는 이십팔숙과 팔나한이 적수로 여겨질 리 없는 일이었다.
"석진영이 너희들 때문에 살게 하지는 않는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겠다."
낙헌지는 무림맹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무림맹의 누가 죽는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였고,. 죽이는 장본인이 자신이라 해도 거침이 없을 정도였다.
'오늘 석가 놈을 놓친다면 다시 잡기 힘들다. 놈은 흑응을 부리고 있다. 비상하기 전에 잡아야 한다.'
낙헌지는 석진영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비록 자신에게 한 번 패했다고는 하나 정당한 대결은 아니었다. 또한 두렵기 짝이 없는 칠대사마의 공동전인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
"너희들이 길을 터주지 않는다면, 나는 잔도(殘刀)로 너희들 반을 죽이고 길을 내어 그 놈을 뒤쫓을 수밖에 없다."
낙헌지가 검을 움켜쥐며 살기를 발하자 군웅들은 등골이 오싹해지고 말았다.
낙헌지가 익힌 마공은 당금 천하에서 가장 강한 것이었다. 막강한 마의기운이 일어나자 신공을 수련한 무림맹의 결사대들은 내공이 흐트러지는 고통 속에 빠져들었다.
"으음……!"
"지독한 내공이다."
"검을 뽑기도 전 이런 압박을 가하다니!"
이십팔숙조차 폭출되는 마기에 몸을 휘청였다.
"풍운회사방(風雲回四方)을 쳐라!"
병선자가 전과 달리 몹시 초조한 표정이 손을 쳐들었다. 눈앞에 대한 지옥제일검이 자신의 상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풍(風)― 운(雲)― 회(回)― 사(四)― 방(方)!"
팔나한이 입을 모아 복창하자 이십팔숙은 흐뜨러지려 하던 진열을 가다듬으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풍운회사방은 무당에서 기원한 지극히 오묘한 기문진으로 이십팔숙의 몸에 의해 펼쳐지자 주변 이십 장 이내는 온통 푸른 그림자로 뒤덮였다.
낙헌지는 거센 암경을 느끼며 경각심을 높였다.
'실로 강한 진세다.'
그는 피부가 찢어지는 듯한 압박을 느끼며 검을 바싹 움켜쥐었다.
'그러나 나를 막지는 못한다. 너희들 중 그 누구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다.'
낙헌지는 독한 마음을 먹고 살수를 생각했다. 그가 잔도마에게서 전수받은 잔도구결(殘刀口訣)을 펼치기 직전이었다.
"싸… 싸워서는 안 된다!"
그의 고막을 때리는 나직한 말소리가 있었다.
"부… 부탁이다."
애원하는 목소리는 낙헌지 바로 곁에서 들려왔다. 다 죽어 가는 목소리는 기문진이 발동되는 폭음과 파공성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낙헌지는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아…!"
낙헌지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흠칫 놀랐다.
망신단에 신지가 제압돼 그와 싸우다 패해 다 죽게 된 백의검제가 언제부터인가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회색이 아니었다. 망신단에 걸리기 이전의 정기 어린 눈빛이었다.
"나… 나의 말을 들어 다오. 부탁이다."
백의검제는 피를 줄줄 흘리며 애절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는 낙헌지의 손에 쥐어진 백룡검을 보고 도계진의 거지 청년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네… 네게 두 가지 부탁이 있다. 죽… 죽어가는 사람의 부탁이니 들어 다오."
낙헌지가 그의 참담한 모습에 눈시울을 붉히며 물었다.
"내가 딸에게 주려 했던 물건을 네게 주겠으니 사양 말고 받아 달라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갖고 있느냐?"
"있소."
"됐다. 그럼 굳이 싸울 것은 없다."
"예에?"
"그것을 꺼내면 다 알 것이다."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진세가 발동되었다.
꽈르르르― 릉―!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십여 줄기 장력이 회오리치듯 다가섰으나 낙헌지의 보법을 밟는 순간 가볍게 무산되었다.
낙헌지는 취마보를 일으켜 공세를 피해면서 백이검제의 유언을 귀담아 들었다.
"두… 두 번째 부탁은……."
백의검제는 낙헌지와의 내공 대결에서 패한 후 오장이 으스러져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든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악착같이 말을 이었다.
"내… 내가 이렇게 죽은 것을 너만이 아는 비밀로 해달라는 것이다. 나… 나의 시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어다오."
"……!"
"나… 나의 본 모습이 백의검제(白衣劍帝)임을 너는 알 것이다. 그…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다오. 저… 저기 있는 나의 딸에게 수치를 주고 싶지 않다."
백의검제는 그 말을 끝으로 숨을 거뒀다.
정사오기의 으뜸이며 당세제일검으로 추앙되는 그의 최후는 실로 비참했다. 천하인의 무릎을 꿇고 피눈물을 흘리며 애도해야 할 일이건만 그는 그렇게 죽어야만 했다.
그러나 무림맹주라는 명예도 마다한 채 수치와 굴욕을 참아가며 딸의 목숨을 연명시키려 한 그의 부정(父情)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딸의 목숨을 자신과 바꾸려 한 그의 의도가 천하를 위한 일이었으니 그는 진정한 무림영웅이라 할 수 있었다.
'아……, 무림맹주가 이렇게 죽어야만 하다니……!'
낙헌지는 그가 세상을 뜨자 장탄식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보법이 조금 흐트러졌다. 지극히 오묘한 기문진이 그런 허점을 놓칠 리 없었다.
"쳐라―!"
다섯 자루 장검이 낙헌지의 등판에 검기를 뿌렸고, 십이 줄기 장력이 낙헌지의 하반신을 강타했다.
퍼퍼펑―!
흑의가 갈가리 찢겨지며 낙헌지의 몸이 이 장 높이 날아올랐다.
"으음……!"
낙헌지는 피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순간의 방심으로 약간의 내상을 입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공을 배우기 전부터 지옥제일검의 장력을 받았음에도 살아났던 강철보다 단단한 몸의 소유자였다.
"고약한 사람들이군!"
낙헌지는 언제 검에 맞았느냐 싶게 곧바로 신형을 안정시키며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가 땅을 밟는 찰나 세 자루 장검이 품자(品字)를 이르며 날아들었다.
"죽어라!"
무맹의 결사대들의 검초는 소림 절학 항마신검(降魔神劍)이었다.
낙헌지는 우수를 번쩍 들어올렸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군. 내가 이전의 지옥제일검과 다른 사람임을 말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단 말이냐?"
그는 분노를 폭발시키며 주먹을 힘껏 휘둘렀다.
꽈르르― 릉―!
광풍(狂風)을 방불케 하는 권공은 삼밀사가 전수한 세 가지 절학 중 하나인 광풍만리권(狂風萬里拳)이었다. 권공에 적중된 세 자루 장검이 엿가락같이 휘어져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으아아!"
"크으윽"
"과… 과연 막강(莫强)하군."
세 명의 무사는 심장을 졸이며 급급히 뒤로 물러섰다.
낙헌지가 백룡검을 허리띠 사이에 끼워 넣고는 우수를 빳빳이 세워 사위(四圍)를 향해 한 바퀴 쳐냈다.
흰 기류가 일어났다가 노도가 흐르듯 엄청난 기세로 사방을 휩쓸어 나갔다. 악귀를 제압하는 천신의 신력처럼 수만 근 암경이 이십팔숙을 휘청이게 했다.
"복… 복마금강신강(伏魔金剛神 )이다!"
"이… 이럴 수가?"
무림맹의 결사대이기 이전에 소림사(少林寺) 속가제자였던 사람 하나가 낙헌지의 수법을 알아보고 경악해 외쳤다.
지옥제일검이 소림장문인만이 구사할 수 있다는 복마금강신강마저 펼친단 말인가?
낙헌지는 충분히 실력을 보였다 싶자 두 손을 내려뜨리며 공력을 모아 외쳤다.
"모두 멈춰라―!"
수만 개의 종이 일제히 울리는 듯한 무시무시한 호통소리는 이십팔숙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크으윽―!"
"크헉!"
내공이 약한 사람은 호통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새파랗게 질린 채 푹푹 쓰러졌고, 내공이 강한 사람도 휘청이다가는 피를 뿜으며 주저앉았다.
무사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과연 취마음은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음공(音功)이었다. 취마음에 의한 호통이 싸움판을 단번에 중지시켰다.
"아악―!"
팔나한진에게 보호되고 있던 병선자는 취마음이 들리는 찰나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팔나한 중 셋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낙헌지의 진면목이 천하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무공이 과거의 지옥제일검보다 몇 배 강하다는 사실이 군웅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지옥제일검이기는 하나 지옥궁 사람이 아니다."
낙헌지가 백의검제의 시체를 안아들고는 힘차게 말했다. 전과는 달리 아주 광명정대한 목소리였다.
"나는 지옥궁을 멸망시키려는 사람이지 지옥궁과 한패는 아니다. 너희들이 알고있는 지옥제일검도 아니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지옥제일검은 내가 아니고……"
그는 잠시 호흡을 끊고는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바로 남천옥룡 석진영이다!"
모두 믿기 힘든 표정이었다.
"석진영이 지옥제일검……?"
"맙소사! 어떻게 총순찰이 지옥제일검일 수 있단 말인가?"
"과… 과연 저 자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낙헌지는 시간이 촉박해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줄 수 없었다. 진실이란 언제고 세상에 알려지리라.
세상 사람들의 평판을 두려워했다면 굳이 지옥제일검으로 화신해 나타날 낙헌지가 아니었다. 그는 구차하게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군웅들을 둘러보다가 백의검제가 죽으며 한 말을 떠올렸다. 그는 품 속에서 기름종이로 싼 물건을 꺼냈다.
"내 말을 믿게 할 신물이 하나 있다. 너희들이 맹주(盟主) 검제(劍帝)가 나의 친구라는 것을 밝힐 만한 물건이다."
낙헌지의 말이 또 다시 군웅을 경악시켰다.
"맹주의 친구란 말인가?"
"으음……, 대체 어떤 신물인가?"
군웅들은 공세를 완전히 접었다. 어차피 싸워도 이길 수 없는 절대적인 상대였다. 그가 적이 아닌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었다.
'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나 검제를 상징하는 물건일 것이다. 검제가 죽으며 한 말이니 틀림없겠지.'
낙헌지는 검제를 죽인 장본인으로 검제의 친구를 자칭한다는데 조금 괴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검제가 자신을 친구로 여기며 죽어갔다는 데서 일말의 위안감을 느끼며 기름종이를 천천히 풀렸다. 군웅의 눈이 그의 손끝에 집중되었다.
낙헌지는 기름종이를 벗겨 네모난 금패(金牌) 하나를 꺼내들었다.
세 치 폭에 두 치 너비를 가진 금패 위에는 작은 글씨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 정의맹주령(正義盟主令)―
무림맹(武林盟)의 전고수가 신패(信牌)의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하리라! 〉
낙헌지는 금패에 적힌 글귀를 읽으며 부르르 손을 떨었다.
'이… 이것이 바로 무림맹의 맹주령이었단 말인가?'
경악과 동요는 군웅들이 더욱 컸다.
그들은 느닷없이 등장한 맹주령 앞게 석상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이어 이십팔숙과 팔나한이 차례로 오체복지에 들어갔다.
"맹… 맹주령을 뵈오이다!"
"맹주를 뵙소!"
분해하면서도 격동에 찬 어조였다.
무림맹 사람들은 무림맹에 가입하면서 맹주령을 가진 사람의 명에 절대 복종하리라는 서약을 한 바 있었다. 그것은 죽음보다도 값진 무림인들의 맹세였고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아……, 검제께서는 나를 무림맹주(武林盟主)로 만들려 했구나!'
낙헌지는 딸을 구하기 위해 백독마부의 하인이 되어 십 년 세월을 보낸 후 자신에게 죽은 검노인의 시체가 무겁게만 느껴져 견딜 수 없었다.
한 동안의 침묵은 한 여인의 음성으로 깨졌다.
"그… 그 물건은 가부(家父)의 것인데…… 어이한 경로로 갖게 되셨습니까?"
취마음 아래 다 죽게 되었던 병선자가 땅에 엎드린 채 얼굴을 들고 물었다. 전과 달리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백의검제기 내게 줬소."
낙헌지는 차마 그것을 가질 수 없어 잠깐 손에 쥐고 있다가 병선자에게 가볍게 던져 주었다.
"얼마 전 하녀에게 무슨 말이고 들은 적이 없었소?"
"혹시 무맹루의 점원을 남편으로 삼고 있는 월방(月芳)이라는 하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월방인지는 모르나 무맹루의 점원 아내가 되는 여인이라면 맞소."
병선자는 한 나한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몸을 세워 앉았다.
"들… 들었습니다, 아버님의 부탁을 받고 조만간 소녀를 찾을 사람 하나가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 사람이 바로 나요."
"아……!"
낙헌지는 천천히 병선자 앞으로 다가섰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천후사와 남천관의 괴멸시킨 지옥제일검은 아니오. 칠마전을 명말시키기 위해 지옥에서 나온 지옥제일검이오. 낭자가 알고 있는 과거의 지옥제일검은 바로 조금 전 여기 있던 석진영이오."
"예에? 그… 그게 사실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복면과 지옥령은 그가 갖고 있던 것이었소."
병선자는 맑은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왜 상청관에서……?"
"천후협과 독목수라를 죽인 일을 말하는 것이오?"
"예."
"그들을 벗으로 알고 나를 원망한다면 사실을 오인하는 것이오. 석진영이 남천옥령이며 칠마전의 소전주였듯이……, 그들의 정체는 지옥제삼검이며 지옥제사검이었소. 그러기에 내가 그들을 죽여 버렸던 것이오."
"아아……!"
병선자는 너무 놀라고 분해 말을 듣는 찰나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낙헌지는 그녀가 혼절하자 더 이상 말할 이유가 없다 싶었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한 마디 말로 모든 사람을 이해시킬 수는 없다.'
그는 군웅 중 한 사람을 보며 차게 물었다.
"석가 놈은 어디로 갔소?"
"검… 검보로 돌아갔습니다."
"흥, 그렇겠지."
낙헌지는 냉소를 치고는 훌쩍 날아올랐다. 비천추운신법이 펼쳐지는 순간 그의 몸은 흑점이 되어 사라졌다.
"오……, 대단한 경공이다."
"가히 천하제일이다. 백의검제 맹주님보다 훨씬 강하다. 저 자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낙헌지는 곧 바로 검보로 향해 달려갔다.
'흑의검왕이 지키고 있는 이상 칠마령의 한쪽은 아직 무사할 것이다.'
낙헌지는 석진영이 내상을 입은 중이라 흑의검왕을 당해 내지 못할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석진영이 진짜 지옥제일검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으니 놈은 검보 안을 아직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 어떤 악독한 계략을 펼칠 줄 모른다.'
낙헌지는 검보로 가봐야 칠마령의 마지막 한 조각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여기며 경공을 최고조로 높였다.
제10장 몸을 바친 검선자(劍仙子)
석진영을 따라 모산을 떠났던 낙헌지는 석진영을 뒤쫓아 다시 모산 안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내공은 장강(長江)의 물같이 막힘이 없어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았다.
대략 밥 한끼 먹을 시간이 지났을까?
낙헌지는 모산 안으로 들어서며 손바닥에 땀을 쥐게 되었다.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 위에서 불이 치솟고 있었던 것이다.
꽝― 꽝―!
폭음이 들리며 산이 뒤흔들렸다.
끼르르륵―!
숲으로 뒤덮여 장원의 하늘을 오락가락 하며 검은 날개를 휘젓고 있는 검은 매 수십 마리가 보였다.
"흑응이군. 석진영이 검보를 정면으로 치려 하는구나."
낙헌지는 석진영이 최후의 발악을 한다 여기며 불타고 있는 검보를 향해 빗살같이 빠르게 날아갔다.
'일단 복면을 벗자.'
낙헌지는 지옥제일검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경우 검보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 쉽다 여기며 복면을 벗었다.
그는 백의검제의 시체를 안아 들고 더욱 빨리 날아올랐다.
그가 백의검제의 시신을 아직 버리지 않는 이유는 그를 검보 근처에 묻어 주기 위함이었다. 검제에 대한 자비이며 죄책감 때문이었다.
낙헌지는 검보 근처에 백의검제의 시신을 나무 잎으로 잘 덮은 후 다시 검보를 향해 갔다.
그는 칠마령이 검보 뒤 검왕전(劍王殿) 안에 숨겨져 있음을 삼밀사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검왕전은 흑의검왕과 대무신국의 일백정검수 중 아직 살아남아 있는 삼십삼 정검수들의 거처였다.
낙헌지는 검보의 웅장한 건물을 볼 수 있는 곳에 이르러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흐음, 이상하군."
흑응 수십 마리가 오르락내리락 하며 폭약을 던지고 암기를 던지는데 대부분은 검보의 정문 근처에 한정되어 있었다.
"아― 악―!"
"크으윽!"
수백여 명이 검보 정문 앞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근처는 화염(火焰)에 휩싸여 지옥궁 안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안쪽은 고요했고 싸움이 이는 흔적이 없었다.
"칠마령이 목적이 아니고 검보를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이란 말인가?"
낙헌지는 잠시 고민하다 엄청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세 사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퍼퍼펑―!
수백 명의 어지러운 혼전 중 이 대 일(二對一)의 대결이 그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지옥제일검, 쓰러져라!"
무맹의 옷을 걸친 일남일녀가 쌍검합벽(雙劍合劈)해 흑의복면인 하나를 포위 공격하는 중이었다. 수백 명의 싸움판 중 가장 치열했다.
세 사람이 싸우고 있는 근처가 텅 비어 있는 이유는 세 사람의 검기가 십 장을 전권(戰圈)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지옥제일검의 복면을 한 자가 쌍검(雙劍)을 흔들어 대며 일남일녀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천영마검(千影魔劍)이라는 칠마전 비전 검식을 구사하는 흑의복면인의 무공은 일남일녀를 능가했다.
"으흐……,누구도 나를 막지 못한다!"
그와 검을 맞대고 있는 두 사람 중 하나는 낙헌지에게 구사일생한 바 있는 금의검선자였다.
금의검선자는 심한 병을 앓다 일어난 사람같이 낯빛이 별로 좋지 않았고 내공도 전에 비해 오히려 뒤졌다. 그러나 눈에서 일어나는 독기는 오히려 전보다 더했다.
"네 놈이 석진영이라는 것을 안다. 어서 복면을 벗어라!"
그녀는 흑의검왕을 통해 이미 지옥제일검의 정체를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악에 바쳐 검을 휘둘러 댔으나 지옥제일검을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그녀와 함께 지옥제일검을 노리고 있는 사람은 검룡(劍龍)이 된 아주 출중한 젊은이였다.
그는 단홍칠절검식(斷紅七絶劍式)을 전수 받아 후기지수(後起之秀)의 으뜸으로 불리는데, 금의검선자와는 사형사매지간이었다.
"석가야, 마각을 드러내라!"
검룡은 금의검선자와 합공을 펼쳤지만 마공을 당하기 힘든지 공격보다 수비에 급급했다. 그러나 위세만은 검보 수비대장으로 조금의 부끄러움이 없었다.
차창― 창―!
세 자루 장검이 불똥을 퉁길 때 낙헌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놈이 진짜 석진영인지 모르겠군.'
낙헌지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다소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석진영이라면 이렇게 무모하게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뒤로 흑의검왕과 정검수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공격을 펼친단 말인가?'
어쨌거나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세 사람이 싸우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의 몸에서 강력한 호신강기가 뿜어져 주변의 경기는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그는 혼전장을 간단히 지나칠 수 있었다.
"됐소, 놈이 드디어 왔소."
어딘가에 숨어서 낙헌지를 지켜보던 사람의 눈에서 광채가 일어났다.
"호호……, 놈이 우리의 일을 도울 것이니 칠마전의 대업이 이제야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눈빛을 반짝이는 피투성이 백의청년과 홍의여인이 있었다. 두 남녀는 다름아닌 석진영과 독낭자였다.
"흑의검왕이 이리로 유인되어 나온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일이오. 이제 낭자가 미혼산(迷魂散)으로 정검수 중 열 놈만 제거해 준다면 칠마령은 분명히 나의 손에 들어올 것이오."
"죽음으로 소전주를 돕겠습니다. 대신 소녀가 살고 일이 성공할 경우……, 소녀를 아내로 삼아 주십시오."
"하하……, 일이 성공한다면 낭자는 장차 칠마전 이대전주(二代殿主)의 아내가 될 것이오."
석진영은 득의해 말하면서 독낭자와 함께 검보 안으로 잠입해 갔다. 그들이 모습을 감추는 것을 알아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낙헌지는 석진영이 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줄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일단 세 사람이 싸우는 근처에서 몸을 세웠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부터 알아봐야겠군."
낙헌지의 손이 천천히 쳐들려졌다.
그의 손은 홍옥수로 빛났다. 머리카락은 핏빛으로 물들어 날렸고, 눈빛은 혈광보다도 붉은 끔찍스런 모습이었다.
낙헌지는 혈발마공을 십 성까지 끌어올리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놈이 가짜이건 진짜이건 살 수 없다.'
그는 차갑고 공포스러운 눈빛을 흘려 흑의복면인의 얼굴을 살피다가 낭랑히 외쳤다.
"나를 봐라!"
낙헌지와 흑의복면인 사이의 거리는 오 장 정도였다. 가깝다고 할 수 없는 거리였으나 흑의복면인은 낙헌지의 외침에 고막이 찢어지는 고통에 젖었다.
"흐윽……!"
지옥제일검의 모습을 한 자가 갑자기 몸을 뒤틀자 금의검선자와 검룡이 모두 얼떨떨해 했다.
낙헌지의 외침은 이어전성에 의한 것이기에 지옥제일검의 모습을 한 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갑… 갑자기 웬 일이지?"
"어엇……?"
검보의 일남일녀가 흠칫 하는 순간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르르르― 릉―!
한 마리 혈룡 같은 모습으로 흑의복면인을 향해 날아드는 적류(赤流) 때문이었다.
혈발마공의 신기한 힘이 발휘되자 흑의복면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복면이 갈갈이 찢어져 나가는 동시에, 코와 입으로 피를 흘리는 십칠 세 소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크으……, 분하다!"
흑의소년은 피를 흘리며 휘청였다.
낙헌지는 오 장 거리를 단숨에 날아 흑의소년의 완맥을 거머쥐었다.
"가짜였군. 내 그럴 줄 알았다."
낙헌지가 나타나자 검룡과 금의검선자가 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손을 거뒀다. 검룡은 아주 긴장된 표정이었고 금의검선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얼떨떨하다는 표정이었다.
"왜 지옥제일검으로 행세했느냐?"
낙헌지가 흑의소년의 완맥에 힘을 가하자 흑의소년은 낙헌지를 노려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네… 네 놈이 낙헌지란 자냐?"
"하하……, 나는 너를 모르는데 너는 나를 알아보는구나?"
"나는 지옥제오검(地獄第五劍)이다. 지금 대사형(大師兄)의 명을 받고 왔다."
낙헌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옥제오검? 그렇다면 석진영의 사제냐?"
"그렇다. 나는 칠마전의 제자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네가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나를 굴복시킬 수는 없다."
지옥제오검의 표정은 기이하게 차분했다. 마치 일이 이렇게 되어 가리라는 것을 미리 각오한 모습이었다.
"대사형이 조금 전 나를 여기로 보내며 밀지(密紙) 한 장을 주셨다. 그리고 남천관에서 하인 노릇을 하고 있는 놈이 나타날 때 전하라 하셨다."
"석진영이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그렇다. 지금 나의 왼쪽 소매 속에 있다."
지옥제오검은 그렇게 말한 후 입을 악물었다.
그의 입안에서 호도 껍질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그의 오공(五孔)에서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크윽……!"
지옥제오검은 그대로 축 늘어졌다. 죽음을 불사하게 만드는 칠마전의 위력은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독단(毒丹)을 깨물었군."
낙헌지는 지옥제오검이 삽시간에 시체로 화하자 그의 왼쪽 소매를 살펴봤다. 지옥첩(地獄帖)이라 알려져 있는 지옥제일검 석진영의 배첩 한 장이 보였다.
〈 낙헌지라는 종놈에게 보낸다. 〉
아직 먹물이 다 마르지 않은 글씨가 눈에 띄었다.
'석진영이 무슨 수작으로 내게 이런 밀지를 보내는 것인가?'
낙헌지는 정의군자인 체하면서 천하에서 가장 악독한 석진영의 모습을 그리며 살광을 뿜어냈다.
"펴보면 어떤 수작인지 알겠지."
낙헌지는 중얼거리며 지옥첩을 열어봤다.
〈 낙헌지―
너는 이 글을 보는 순간 아주 무서운 독에 중독되었다. 무형(無形) 무색(無色)의 극독이 너의 살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
지옥첩 초두에 쓰인 말이 낙헌지를 긴장시켰다.
'비열한 놈! 종이에 극독을 발라 두었군.'
낙헌지는 급히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장심이 금세 자주색으로 물들었고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 너는 이 순간 무공을 사용하지 못한다.
네가 겪게 된 독은 독낭자(毒娘子)가 네게 보내는 선물이다. 마독(痲毒)이라는 독중지독이다. 나는 네놈이 독에 쓰러진 후 모습을 나타낼 작정이다.〉
석진영의 편지가 낙헌지에게 비웃음을 샀다.
"훗훗……, 석진영! 네놈이 별 해괴한 짓을 다 하는구나. 하지만 나는 네놈의 어떤 수작에도 당하지 않는다."
낙헌지는 당당히 외치며 손을 위로 쳐들었다.
"파독신강(破毒神 )!"
그가 독공을 운기하자 두 팔이 팔뚝 부분까지 백색으로 물들었다가 순간적으로 홍색으로 화했다.
파독신강은 만독마의 절기 중 하나였다. 마도의 독공을 파괴하는 수법으로 파독신강이 운기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파팟―!
낙헌지의 손 주위에 뜨거운 기운이 형성되더니 지옥첩에 발려진 마독이 검은 안개로 화해 사라져 갔다.
낙헌지는 손끝을 통해 독무를 뿜어 내고는 자세히 살펴보았다.
"흔적이 없군. 하하……, 과연 독사숙의 절기는 대단하다."
낙헌지는 마독을 말끔히 해소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짓다가 두 사람이 다가서는 것을 보게 되었다. 금의검선자와 검룡이었다.
금의검선자는 낙헌지가 과거 자신의 손 아래 구출된 바 있던 남천관의 하인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아……, 이 사람이 정말 남천관의 바보 하인 낙헌지란 말인가? 사별삼일(士別三日) 괄목상대(括目相對)이라더니……, 사람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가 없구나!'
금의검선자는 낙헌지의 헌칠한 모습에 황홀감 마저 느끼기까지 했다.
낙헌지는 두 사람이 다가서자 얼른 포권을 취했다.
"조금 전 지옥궁(地獄宮)이 제명당한 것을 보고 왔소."
두 사람이 함께 감격해 외쳤다.
"아……, 언니의 예상이 적중했군요."
"과연 병선자이십니다."
낙헌지가 다소 서먹서먹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지옥제일검으로 행세하며 천후존자와 남천신군을 죽인 석진영은 이 근처에 숨어 있소. 그러나 곧 잡힐 것이오."
금의검선자는 붉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악적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이겠어요."
그러다 그녀는 자신이 알몸의 상태에서 낙헌지에게 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양 볼을 진하게 물들였다.
검룡이 허리를 넙죽 굽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석진영이 지옥제일검이었다는 것은 무림맹의 수치외다. 그자가 무림맹의 총순찰이라는 지위까지 올랐다는 것이 부끄럽기만 하오. 대협의 신공으로 그 간악한 놈을 잡아 징계하시길 바라겠소."
아주 비분강개한 어조였다.
낙헌지는 그런 검룡의 의기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하하……, 석진영은 검보 안에 있는 한 가지 물건을 얻기 전에는 검보를 떠나지 않을 지독한 놈이오. 놈을 잡기는 시간문제이니 안심하시오."
"그렇겠지요. 놈은 십오 년 전 대무신국의 고수들이 본보에 맡긴 칠마령의 한쪽을 찾으려 하고 있습지요. 하지만 그곳에는 흑의검왕이란 절세고수가 도사리고 있어 놈이 발악을 한다 해도 뜻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럴 것이오."
낙헌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을 들어 검보 안을 살폈다.
무림맹의 총단이기도 한 검보는 아주 광활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 안 어딘가에 석가 놈이 숨어 있겠군.'
검룡 등석은 소매 속에 손을 넣더니 뭔가를 꺼내는 시늉을 했다.
"대협, 저는 대협께 이것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뭐요?"
낙헌지의 눈길이 그의 손바닥에 고정되었다가 잠깐 흐트러졌다. 빈 손바닥이기 때문이었다.
"어엇……?"
낙헌지는 불길한 육감에 흠칫 상체를 틀었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검룡의 왼손이 번개같이 쳐들려지며 푸른빛 십여 개를 쏘아냈다.
피피피핑―!
소털보다도 가는 독침 스물여덟 개가 낙헌지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으윽―!"
낙헌지는 너무도 창졸간의 암습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뒤로 미끄러졌다.
"죽엇!"
검룡은 오른손이 검을 끌어내며 낙헌지의 심장을 노렸다.
"허억, 칠마의 독검?"
낙헌지가 이를 갈며 그를 향해 우장을 힘껏 휘둘렀다.
퍼엉―!
혈강이 뿜어지며 검룡의 앞가슴을 후려쳤지만 낙헌지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야 했다.
"으으……!"
낙헌지의 가슴에는 독검 한 자루가 꽂혀 등까지 삐죽 튀어나왔다. 그는 검을 꽂힌 검을 부여안은 채 푹 꼬꾸라졌다.
"으흐흐……, 네놈은 내가 지옥제이검(地獄第二劍)이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오검인 막내사제의 희생이 있었기에 네놈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되었다."
검룡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사악한 웃음소리는 그가 상승 마공의 소유자임을 알려 주기에 충분했다.
"사… 사형이?"
금의검선자는 너무도 엄청난 변괴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까뒤집었다.
검룡은 상승마공을 익혀 마강지체를 연성했기에 낙헌지의 혈강을 맞고도 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금의검선자 곁으로 다가서며 마도 금나수를 시전해 냈다.
수법이 빠르기는 금의검선자가 알고 있던 검룡의 일신무공에 비해 세 배나 뛰어난 것이었다.
"앗……?"
금의검선자는 순식간에 검룡에게 제압되었다.
"ㅋㅋ……, 나는 검룡이기 이전에 지옥제이검이다. 어리석은 계집! 그간 나를 사형으로 알고 잘 대접해 주어 고맙다. ㅋㅋ……, 세상 사람들이 검보이선자(劍堡二仙子)가 어여쁘고 현명하다지만 모두 헛소문이다."
"이 간악한 놈!"
금의검선자가 검룡의 진면목에 치를 떨었지만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검룡은 금의검선자를 움켜쥔 채 혼전장을 향해 외쳤다.
"지옥제이검이 금의검선자를 제압했다. 검보의 수뇌와 협상을 벌이고 싶으니 수뇌는 어서 나타나라!"
싸움판은 삽시간에 정리되었다.
"와아―!"
"제이검께서 검선자를 제압했다!"
무림맹 고수들과 혼전을 벌이던 지옥검대고수들이 검룡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검룡을 중심으로 견고한 진세를 구축해 엄호했다.
지옥검대 고수들의 수는 칠십에 달했고 모두 살기등등해 보였다.
무리맹 고수들은 크게 좌절했다. 그토록 믿고 따랐던 검룡마저 지옥궁의 무리라는 사실에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맙소다! 검룡마저 지옥궁 소속이었단 말인가?"
"으으……, 소맹주가 이백 결사대와 함께 지옥궁 토벌에 나서 절정고수들이 없는데 이런 변이 생기다니……"
무림맹의 무사들의 수는 지옥검대 고수들의 수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싸움이 시작된 후에도 멀리서부터 모여든 사람이 많았기에 그 수효는 근 천에 달했다.
하지만 그들은 절정고수라 불릴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무림맹의 절정고수는 병선자를 따라 간 이백결사대 안에 모두 소속된 것이다. 물론 고강한 무공의 검보 수비대 고수들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지옥궁 소속이었다.
그들은 검룡이 지옥제이검으로서의 진면목을 발휘하는 검은 복면을 꺼내 얼굴을 가려 지옥검대에 합류한 것이다.
실로 철저한 암계가 아닐 수 없었다.
"카하하하……!"
검룡은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다는 듯 앙천대소를 연발했다.
"금의검선자가 내 손에 있는 이상 어느 누구도 나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이제 검보를 접수할 것이다."
이때, 검보 깊숙한 곳에서부터 흑선풍(黑旋風)과 같이 날아오르는 이십 명의 정예고수들이 있었다.
맨 앞에 선 사람은 흑의를 걸친 중년인으로 손에 사 척 장검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검보 검왕전(劍王殿)의 전주(殿主)인 흑의검왕이었다.
"지옥궁의 무리들!"
흑의검왕의 눈에서 노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대무신국(大武神國) 사람들이 아직 건재하고 있건만 어이해 이렇듯 오만방자할 수 있단 말이냐?"
흑의검왕은 검룡이 사자후로 외친 소리를 듣고 검왕전을 급히 떠나 여기 온 것이었다.
그의 출현에 검룡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성공이다. 이제 칠마령은 칠마전에 돌아왔다!'
검룡은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듯 아주 편안한 모습이 되었다.
흑의검왕이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검룡을 향해 날아들었다. 새파란 검기가 다섯 자 길게 뻗어 나왔다.
검룡은 전혀 개의치 않고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으하하……, 검왕은 지금 당장 검왕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나을게요?"
"뭐… 뭐라고?"
흑의검왕이 허공에서 몸을 주춤했다.
"하하……, 지옥제일검은 그대가 검왕전을 나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소. 그대가 나섰으니 지옥제일검이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오. 칠마령을 찾기 위해서 말이오."
"흥,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놈 하나로는 검왕전을 수호하는 나의 수하들을 제거하지 못한다. 지옥제일검은 이미 크게 부상당한 상태가 아니야?"
검왕이 자신 있게 외치자 검룡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ㅋㅋ……, 지옥제일검 곁에 백 명의 고수가 있다는 것도 아시오?"
"뭐… 뭐라고? 너희 지옥궁의 무리가 그렇게 많더냐?"
흑의검왕이 허공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하……!"
검룡이 그의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며 오만하게 웃어댔다.
"백독마부(百毒魔府)에서 온 독공의 고수 일 백이 지옥제일검과 함께 검왕전 안으로 들어갔소. 그대가 나의 유인책에 끌려 검왕전을 비우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말이오."
"백독마부까지?"
흑의검왕은 전신을 와들와들 떨었다. 지옥제일검 석진영 하나만을 예상한 것이 너무도 큰 실책이었다.
"하하……, 칠마령은 이제 칠마전의 것이다!"
검룡이 득의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앞으로 칠 일! 중원인들은 칠마(七魔)의 위대한 모습을 직접 보게 될 것이다!"
검룡의 외침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지면에서부터 신음소리가 일며 피로 전신을 물들이고 있는 사람 하나가 벌떡 일어나서 검룡을 향해 몸을 집어 내던졌다.
"네 놈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꽈르르르― 릉―!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일며 검룡의 머리통이 뇌수를 뿌리며 산산이 박살나 흩어졌다. 그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황천으로 직행한 것이다.
"아아……!"
완맥이 풀린 금의검선자가 털썩 주저앉았다.
검룡을 일 초에 박살내 피투성이 청년은 흑의검왕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지키고 있으랬더니……, 왜 나섰소?"
가슴에서 등으로 검을 꽂고 있는 낙헌지의 분노에 찬 음성이 흑의검왕을 경악케 했다.
"정… 정검령주(正劍令主)?"
흑의검왕은 대번에 그를 알아본 것이다.
"으음……!"
낙헌지는 기력을 잃고는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대협!"
금의검선자가 급히 그를 안아들었다.
순간, 지옥검대 고수들은 검룡이 급살하자 이성을 잃고 악마와 같이 외치며 금의검선자와 낙헌지를 향해 검을 마구 쳐냈다.
"죽여라―!"
"제이검님의 복수다!"
십수 자루 장검이 낙헌지와 금의선자의 몸뚱이를 요절내기 직전이었다.
흑의검왕은 수중의 장검에 극한의 진기를 운집하고는 지옥검대를 향해 힘껏 집어던졌다.
"어천파천(馭劍破天)―!"
번― 쩍―!
장검은 일 장 길이의 백룡으로 화해 번개같이 날아가다가 허공에서 돌연 방향을 틀었다. 장검이 살아 있는 생물같이 방향을 틀자지옥궁 무리들이 기절초풍 놀라 뒤로 물러나려 했다.
"아앗, 어검술이다―!"
"모두 피해라!"
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장검이 지나가는 곳마다 수급의 비가 떨어져 내렸다. 지옥궁 고수 스무 명이 거의 동시에 목 없는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다.
"와아!"
"악도들을 처단하라"
대무신국에서 십파의 절학을 전수 받고 멀리 중원으로 나온 정검수들이 검을 빼들며 지옥궁 고수들을 향해 학시진(鶴翅陣)을 이루며 공세를 펼쳤다.
"대무신검(大武神劍)!"
"정검무적(正劍無敵)!"
정검수들이 몸을 날릴 때마다 검화(劍花)가 빗발치듯 일어났고 그 순간마다 피보라가 일어났다.
지옥궁 무사들은 강호 어디에 내어 놓아도 절정고수 소리를 들을 만한 고수들이었으나 대무신국에서 온 정검수들에게는 비할 수 없었다.
"케에엑!"
"으악!"
칠십여 명의 지옥궁 고수들이 백 초가 지나기 전 거의 다 시체로 화했다. 그야말로 시산혈해(屍山血海)였다.
이 순간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득의에 찬 웃음소리가 있었다.
"카하하……!"
한 마리 흑응이 구름을 향해 날아오르는 가운데 석진영의 음성이 검보 고수들의 고막을 때렸다.
"카하하……, 나는 지금 칠마전으로 간다. 돌아올 때는 일곱 사부님을 따라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때 지금의 빛을 갚아 주겠다. 지금 나의 수하들을 베는 자리에 끼었던 자들은 그때 모두 참수될 줄 알아라!"
석진영은 손에 금패(金牌) 한 조각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독낭자가 그의 옆구리를 꽉 잡고 아주 행복해 하고 있었다.
아……, 칠마령의 마지막 한 조각마저 탈취당한 것이다.
이로써 대무신왕 정의무성이 천하를 위해 칠마를 금제시킨 안배가 깨지고 만 것이다.
끼르르― 룩―!
흑응군(黑鷹軍) 중 가장 힘센 신응(神鷹) 한 마리는 크게 울음을 터뜨리고는 구름 속으로 사라져 갔다.
석진영이 사라지자 흑의검왕을 위시한 정검수들의 얼굴이 검게 물들다 못해 자색(紫色)으로 타들어 갔다.
흑의검왕은 너무도 낙심하여 털썩 주저앉았다.
"이럴 수가! 상왕(上王)께서 우리들을 중원으로 보내 막으려 하시던 일이 모… 모조리 수포로 돌아갔구나!."
흑의검왕의 치렁치렁하던 머리카락이 극도의 상심으로 백발로 화해 버렸다.
"크으, 전주! 이제 어찌되는 겁니까?"
"철마전이 중원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니……, 대무신국으로 인해 이룩되었던 칠십 년 중원 평화가 드디어 종막을 내린단 말씀입니까?"
정검수들은 땅을 치고 울었다.
"모두 내 잘못이다……, 내가 정검령주의 말을 듣지 않고 검왕전에서 여기로 나왔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흑의검왕이 손을 들어 자신의 천령개로 가져 갔다.
스스로 머리통을 박살내 죽음을 택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비분강개하는 흑의검왕의 눈에서는 진한 혈루(血淚)가 뚝뚝 떨어졌다.
"칠마령을 지키고 살면서 언제나 큰 힘을 모아 대무신국의 원수 서장 칠마전을 치려 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이야!."
흑의검왕은 자신의 천령개를 힘껏 후려쳐 갔다.
"잠깐!"
다급히 외치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의 거한이 달려 왔다.
외침을 발한 사람은 거한의 등에 업혀 있는 한 명의 청의몽면 여인이었다.
청의병선자 이옥란은 팔나한 중 가장 날랜 비천나한의 등에 업혀 검보로 돌아온 것이다.
"검왕, 아직 한 가지 희망은 있습니다."
청의병선자는 흑의검왕 근처에 이르러 거한의 등에서 내려섰다.
"으음……!"
취마음에 내상을 입은 그녀는 서 있기조차 힘든지 갸날픈 교구를 심하게 휘청거렸다.
"아직 한 가지 저지할 길이 있습니다. 그……, 그 방법을 쓰지 않은 채 자결하신다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이… 이제 무슨 희망이 있겠소, 소맹주?"
흑의검왕이 한탄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선자 이옥란은 가슴을 누르며 가쁜 숨을 자제했다.
"칠마령의 마지막 한 조각이 칠마전 소전주의 손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나 아직 중원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놈은 새를 타고 날아갔소. 이곳이 강남의 후미진 곳이기는 하나 나흘 정도면 서장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오."
흑의검왕이 여전히 상심에 젖어 있었다.
병선자의 눈빛은 지혜로 반짝였다.
"그렇습니다. 사흘이라는 말미가 있습니다."
"사흘……?"
"사흘 안에 그들을 잡게 된다면 정의무성께서 칠마에 건 금제(禁制)를 풀리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흑의검왕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가능한 일이오. 그들을 어떻게 막겠소?"
"한 가지 방도가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어인 방도요?"
이옥란은 서쪽 하늘 쪽으로 향해 섰다.
"칠마전의 흑응보다 훨씬 빨리 나는 금시단정학(金翅丹頂鶴) 한 마리를 한 시진 안에 부를 수 있습니다."
"금시단정학? 그것은 전설로만 알려져 있는 영물이 아니오? 그것은 대무금붕(大武金鵬)과 함께 천하이신조(天下二神鳥)라 불리고 있는 거대한 학으로 알고 있소만?"
"그렇습니다. 개방 태상방주(太上 主)이신 천결신개(千結神 )께서 그 학의 주인이십니다. 그 분의 거처를 제가 알고 있습니다."
"아, 그럼 흑응을 따라 잡을 수 있겠구려?"
흑의검왕이 크게 기뻐했다. 얼굴 가득 화기가 감돌았다. 그러다가는 곧 낙담했다.
"아……,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오. 흑응을 따라잡는다 지옥제일검을 막을 사람이 누가 있겠소? 놈은 그때쯤 내상을 회복하였을 것이 아니오?"
흑의검왕이 회의에 찬 반론에 이옥란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대체 누구요?"
"가부 백의검제(白衣劍帝)의 뒤를 이어 제이대(第二代) 무림맹주(武林盟主)가 되신 분입니다."
이옥란은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고 있는 낙헌지 곁으로 다가갔다.
낙헌지는 미약한 숨결을 뿜고 있는데 그의 머리는 금의검선자의 무릎 위에 받쳐진 채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오공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바로 이 분이십니다."
청의병선자가 말하는 사람이 바로 낙헌지라는 사실에 군웅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 아니? 그가 무림맹주란 말이오?"
"이 사람은 석진영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석진영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실이오. 그는 정검령주이기도 하오. 하지만 이렇게 치명상을 입었는데 어떻게 살아날 수 있단 말이오?"
흑의검왕은 낙헌지의 초절한 무공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독검을 받은 낙헌지가 희생할 수 있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십이 시진이면 이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완전히 살리지는 못하겠으나 사흘간 막강한 내공을 발휘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옥란은 몸을 굽혀 앉으며 낙헌지를 진맥했다.
"다만 두 사람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희생이라면?"
흑의검왕은 바짝 긴장하며 물었다.
이옥란은 낙헌지의 맥을 놓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의 절세고수가 진원지기를 불어넣고 주어야 하고……, 처녀성을 잃지 않은 여인이 몸을 바쳐야 합니다. 그럴 경우 이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아……!"
모두 얼떨떨해 할 때 낙헌지의 머리를 무릎 위에 받쳐 안고 있던 금의검선자 이약란은 눈빛을 반짝였다.
"언니는 지금 음양회혼대법(陰陽回魂大法)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그렇다."
"아……, 칠마전이 중원으로 온다면 검보고 무림맹이고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희망을 걸 일이고 저와 안면이 있는 분에게 숨을 불어넣는 일이니……. 그 중 한 자리를 제가 맡겠어요, 언니!"
금의검선자는 딸기 입술을 꼭 깨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너무도 뛰어나 아직 배필을 찾지 못한 금의검선자의 얼굴에 떠오른 비장한 표정을 낙헌지가 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헌신적으로 나선 미녀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다른 한 자리는 당연히 나의 차지요. 정검령주를 구하는 일이라면 목이 열 개 없어지는 일이라도 마다 하지 않겠소."
흑의검왕이 크게 외치며 이약란 옆에 다가섰다.
청의병선자는 두 사람이 선뜻 나서자 감개무량한 어조로 말했다.
"낙 맹주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가 칠마전을 향해 가는 석진영을 막을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나……, 일말의 희망마저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지요."
청의병선자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아……, 모두 나의 잘못이다. 지옥궁 안에서 저 사람의 말을 믿었어야 했어. 석진영이 지옥제일검이라는 것을 알았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청의병선자는 장탄식을 흘리다가 먼저 검보 안으로 들어갔다.
금의검선자는 낙헌지를 안아들며 그 뒤를 따랐고, 삼십삼정검수 중 열여덟 명이 검을 쳐든 채 그 뒤를 쫓아갔다.
2
검보(劍堡)에서 가장 깊은 곳이다.
죽림으로 둘러싸여 있는 석루 주위를 새벽 안개가 신비하게 감싸고 있었다.
"으음……!"
석루 안에서 들려오는 사나이의 신음성이 있었다.
"아아……!"
여인의 한숨 소리가 바로 그 뒤를 따랐다.
장식이 거의 없는 석실 한 가운에 네모난 돌침상 하나가 있고 그 위에서는 실로 희귀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 하나가 역시 탄탄한 나신을 드러내 청년의 몸 위에 엎드려 있었다. 침상 발치에서는 흑의중년인 하나가 청년의 두 발바닥을 손에 쥐고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다.
어떤 사교(邪敎)의 예식인가? 아니면 색정광(色情狂)들의 파렴치한 행위인가?
그것이 아니었다.
중원 사활을 목전에 둔 비장한 활인대법(活人大法)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생(生)과 사(死)의 싸움!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이 어울리는 가운데 사선(死線)을 벗어나기 위한 한 영혼의 몸부림이 있다는 것이 바로 진실이었다.
여인의 몸은 땀에 젖어 있었다. 사나이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손가락 하나 들어 갈 틈도 없이 밀착되었고, 입술마저 꼭 포개져 있었다.
"으음……!"
여인은 비음을 내며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나이의 두 손이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등쪽으로 올라와 거친 애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여인의 탄력 있는 둔부에 사나이의 손톱 자국이 무수했고, 어떤 곳은 너무 세게 할퀴어 피를 내비치기도 했다.
사나이는 원양진기(元陽眞氣)의 발동을 느끼는 듯 몸을 힘차게 움직이려 했으나 아직은 그럴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내공지기를 일 성 가량 모은 상태였다. 내공지기가 오 성 가량만 모아진다면 그때부터 제 스스로 운공해 상세를 치유할 수 있으리라.
그 이전까지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하나는 그의 내상을 다스려 줄 절세 내가고수의 진원지기(眞元之氣)였다. 그의 두 발 용천혈에 진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는 사람이 그 장본인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의 흐트러진 원양진기를 불러일으켜 줄 순음지기(純陰之氣)를 지닌 여인의 육신이었다.
그의 몸 위에 반듯이 엎드려 있는 여인이 바로 순음지기의 장본인이고, 천하를 위해 일신을 희생하는 갸륵한 여인이었다.
"아악……!"
여인의 신음성은 이제 고통에 가까웠다. 사나이의 손길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나이의 거센 애무 아래서도 몸을 빼낼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고 오히려 몸을 사나이에게 점점 더 밀착시켰다.
"으음……!
사나이는 여인의 얼굴에 마구 입맞춤을 하며 몸을 일으킬 듯 일으킬 듯했으나 다시 드러눕고 말았다.
그의 용모는 아주 준수했다. 그와 몸을 합하고 있는 여인의 얼굴도 매우 아름다웠다. 바로 낙헌지와 이약란이었다.
낙헌지의 용천혈에 진원진기를 흘려넣고 있는 흑의노인은 대무신국 출신 고수 흑의검왕이었다.
그는 지금 세 사람 중 가장 큰 고통 속에 빠져 있었다.
흑의검왕은 낙헌지의 몸 안에 진원진기를 흘려 넣는 일이 생각대로 잘 되지 않자 크게 당황했다.
낙헌지의 몸 안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반탄지기(反彈之氣)가 흘러나와 그의 심맥이 으스러지는 듯 괴로웠다.
'으음, 이 젊은이의 내공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가히 천하제일의 공력이다.'
흑의검왕은 진퇴유곡의 상태였다.
고통을 피해 진기 주입을 중단한다면 낙헌지는 영영 깨어날 수 없는 몸이 된다. 그렇다 진기를 계속해서 밀어넣자니 반탄력이 너무 강해 몸이 박살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세 종류의 다른 신음소리는 수시진 동안 계속되었다.
낙헌지는 처음에 비해 훨씬 나아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직 나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자체적으로 내공을 운기하기 전까지는 사경에 접해 있는 것이다.
흑의검왕은 진기의 소진과 강한 반탄력에 힘겨워 본래보다 사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낙헌지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반탄력은 아주 무서웠다.
일전에 오마의 우두머리인 혈발마도 막지 못했던 반탄지기를 흑의검왕이 어찌 대항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심맥이 터져 죽었을 것이다.
흑의검왕이 혈발마보다 내공이 약하면서도 아직 버틸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대무신국의 내공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운기행공이 이미 하루를 넘겼는데…….'
흑의검왕은 낙헌지를 낫게 하지도 못한 채 탈진돼 가자 초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자신이 죽는 것은 그리 억울한 일이 아니었다.
석진영이 칠마령을 갖고 서장 칠마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억울하고 공포스럽기만 한 것이었다.
'임독양맥(任督兩脈) 사이에 지극히 강한 잠재력이 있다. 그것이 나의 진원지기를 방해하고 있다.'
흑의검왕은 진원지기를 계속 불어넣었으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이 효과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으윽……!"
흑의검왕은 급기야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운기행공을 한 시진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그가 운기행공을 중단하면 낙헌지는 죽을 것이고, 그도 상당한 타격을 받아 이후로 내공을 운기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여전히 낙헌지를 부둥켜안은 채 순음지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는 이약란을 보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녀도 거의 탈진 상태였고 온몸은 낙헌지의 손길에 엉망이 된 상태였다.
흑의검왕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최후의 방법을 써야 한다.'
〈제3권으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