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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베트남전쟁사(92)-파리펑화협정체결

1968년 5월 10일 미국과 북베트남 간에 최초로 시작된 협상은 1969년 1월 25일부터 민족해방전선(NLF)도 참가하는 미국, 남베트남, 북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4자 회담으로 범위가 확대되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자 미국은 북베트남에게 비밀협상을 제의하여 1969년 8월부터 키신저와 쑤안 투이(Xuan Thuy), 1970년부터는 키신저와 레둑토(Le Duc Tho) 간에 비밀협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동안 미국은 쟁점이 되어왔던 연합군과 북베트남군의 상호철수는 1970년 9월에 현상동결 휴전으로 양보하였고 1971년 4월에 평화협상이 체결되면 6개월 이내에 연합군을 철수시키고 티우(Thieu)는 총선거 1개월 전에 하야한다고 양보하였다가 1972년 5월에 4개월 내에 연합군을 무조건 철수시키겠다고 한발 더 물러섰으나 북베트남은 티우 정부를 해체하고 임시혁명정부(PRG)와 연립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끝까지 고집하였다.

닉슨의 강력한 북폭과 기뢰봉쇄에 혼쭐이 난 북베트남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1972년 8월에 들어서부터 평화협정 체결 전에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를 양보하기 시작하여 9월 26일에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PRG), 중도파로 구성되는 민족화해 단결 협의회를 구성하여 총선거를 관장하도록 하는 안을 내놓아 협상은 타결되었다.

이제 대통령 선거 전에 평화협정이 체결될 수 있게 되었다. 키신저는 티우와 협의하기 위하여 사이공으로 향하였다.

티우는 협정초안을 면밀히 검토한 후 미 대표단과 남베트남 고위수뇌 간의 연석회의에서 협정초안에 대하여 토의를 갖도록 하였다. 미 대표단은 키신저, 벙커(Bunker) 대사, 주베트남 미군 사령관 웨이얀드(Frederick Weyand) 대장(에이브럼스 대장은 1972년 6월에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 설리반(William Sullivan) 미 국무부 차관보였으며 남베트남측은 티우 대통령, 트란 반 후옹(Tran Van Huong) 부통령, 트란 티엔 키엠(Tran Thien Khiem) 수상, 트란 반 람(Tran Van Lam) 외상, 호앙 둑 나(Hoang Duc Nha) 대통령 보좌관, 카오 반 비엔(Cao Van Vien) 참모총장 등이었다.

트란 반 후옹

 

트란 티엔 키엠

 

트란 반 람

 

호앙 둑 나(오른쪽)

 

카오 반 비엔

 

남베트남측은 26개 조항에 대하여 수정사항을 제기하였으나 중점은 2가지 문제였다.

첫째는 미군과 연합군의 철수만 명시되어 있을 뿐 북베트남군의 철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키신저는 110만 명의 병력을 가진 남베트남군이 당시 남베트남 지역 내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145,000명의 북베트남군을 겁내느냐고 회유하였다.

다음은 민족화해 단결 협의회의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협정문 안에 이 기구를 행정기구(Administrative Structure)라고 표현한 것은 연립정부와 다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키신저는 이 기구는 총선을 관장하기 위한 협의체이지, 어떤 행정적 기구나 연립정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전원일치제로 운영되는 것이기 때문에 티우는 얼마든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설득하였다.

티우는 협정을 수락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10월 22일 키신저는 최후로 티우를 설득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티우의 설득을 들어야 했다.

“미국이 남베트남 같은 나라를 잃었다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세계 지도상에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합니다. 미국이 전쟁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단독으로라도 우리의 힘이 다할 때까지 싸우다 죽겠습니다. 미국은 중, 소와의 화해 무드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방책을 선정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생사에 관한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항복이나 다름없는 협정을 수락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키신저는 10월 23일 떠나갔고 10월 24일 티우는 TV 연설에서 비밀협정 내용을 공개하면서 남베트남에 북베트남군을 그대로 두고 휴전할 수는 없으며 어떤 형태의 연립정부도 거부하고 DMZ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협정을 수락할 수 없다고 발표하였다. 미국은 북베트남과 약속한 대로 10월 23일부터는 북위 20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북폭을 중단하였다.

키신저는 그의 각본대로 협정을 조인할 수 없게 되었다. 북베트남측은 미국과 합의한 협정원문 및 협정조인 일정계획을 공개하고, 티우와 미국을 비난하면서 10월 30일에 협정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남베트남을 제외하고 협정을 조인할 수 없는 노릇이었고 미 대통령 선거 전에 협정타결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도 닉슨은 무난히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닉슨은 남베트남측이 제시한 이의를 신중하게 검토하여 북베트남과 협정문안을 손질하도록 지시하였으나 골격은 이제 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국은 항공기, 전차, 야포 등의 주요장비와 물자를 대량으로 남베트남에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남베트남 지원의지를 내외에 과시하고 남베트남이 협정을 수락하도록 요구하는 지원이었다. 11월 9일 키신저의 보좌관 헤이그(Alexander M. Haig) 장군이 사이공에 도착하여 닉슨의 친서를 티우에게 전달하고, 만일 남베트남이 끝까지 서명을 거부한다면 미국 단독으로 북베트남과 서명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하였다.

알렉산더 헤이그

 

11월 20일 키신저와 레둑토는 파리에서 다시 만나 협정문안 토의를 계속하였으나 이번에는 토의 태도가 경화되기 시작하였다. 토는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장비와 물자 반입을 비난하면서 다시 연립정부 수립을 들고 나왔다. 회담은 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 키신저는 북위 20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북폭을 중지한 미국의 의도를 설명하고 협상을 재개하자고 하였다. 12월 4일 다시 만났으나 진전은 없었다. 12월 13일 키신저는 파리를 떠나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12월 15일 닉슨은 72시간 내에 북베트남이 회담 재개에 응하지 않으면 북폭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합참에게는 최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지금까지 수행한 어떤 북폭보다도 강력하게 실시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하였다. 북베트남측으로부터는 아무런 통보가 없었다.

12월 18일부터 라인배커(Linebacker)Ⅱ로 명명된 대대적인 북폭이 시작되었다. B-52도 최대로 동원되었다. 북베트남도 1일 200여 발의 지대공미사일을 포함하여 전 대공화기가 치열한 사격을 계속하였다. 첫날 121대의 B-52가 출격하여 3대가 격추되었고, 다음 날도 3대, 3일째는 6대가 격추되었다. 미 공군은 지금까지의 고정된 편대비행을 지양하고, 고도, 비행로 등을 불규칙적으로 바꾸고 F-4팬텀기 편대가 공격항로에 채프(Chaff, 레이다 탐지 방해용 금속조각)를 먼저 살포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이후의 공격부터는 B-52의 손실을 획기적으로 감소시켰다. 가용한 전술 항공기, 제7함대의 함재기도 총동원되었다.

북베트남의 비행장, 철도창, 방송국, 항만시설, 화력발전소, 지대공미사일 기지 등이 차례로 파괴되어 갔다.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36시간 동안 폭격을 중단했다가 12월 26일 다시 최대의 폭격을 가하였다. 마침내 26일 오후에 북베트남으로부터 회담을 갖자고 연락이 왔다. 1973년 1월 8일에 파리에서 다시 회담을 갖기로 하고 12월 29일 자정에 북위 20도선 이북의 북폭을 중단하였다.

베트남 전쟁 중 가장 강렬한 북폭이었던 11일 동안 전술 항공기는 1,000여 쇼티, B-52는 270쇼티의 폭격이 있었다. 중지기간을 제외하면 1일 평균 200대의 항공기가 7일간 하노이, 하이퐁 일대를 강타하는 닉슨 스타일의 강력한 응징폭격이었다. 미군의 피해는 B-52 15대, 전술 항공기 11대가 격추되고, B-52 피해 9대, 인명손실은 항공기 승무원 전사 4명, 포로 33명, 실종 29명이었으며 26명은 구조되었다. 북베트남은 1,300~1,600명의 무고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미군은 그 정도의 민간인 피해 밖에 나지 않은 것은 정확한 폭격이 이루어졌다고 판단하고 1968년도 구정 공세시 북베트남군의 후에 대학살의 예를 들어 이를 일축하여 버렸다.

1973년 1월 8일 키신저와 레둑토는 파리에서 다시 회담을 갖고 협정초안을 항목별로 심의해 나갔다. 완전 타결을 확신한 닉슨은 1월 15일부터 남베트남에서 미군의 모든 군사활동을 중지하도록 명령하고 헤이그 장군을 사이공으로 보내어 티우를 설득하도록 하였다. 이어 애그뉴(Spiro Agnew) 부통령도 사이공을 방문하도록 하였다. 헤이그는 한국과 태국도 방문하여 양국 정상에게 협정 내용을 설명하였다.

스피로 애그뉴

 

티우는 끝까지 버티었으나 미국의 원조와 북베트남이 재도발을 할 때에는 미군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를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1월 21일 티우도 동의하였고 1월 23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은 가조인되었다. 1월 27일에 UN 사무총장도 참석한 가운데 미국이 그렇게 추구하였던 파리 평화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고 1월 28일 08:00(베트남 시간) 부로 협정은 발효되었다.

파리협정으로 미국은 '명예로운 철수'에 성공한다.

 

협정 서명 대표는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스 로저스(Williams Rogers), 남베트남 외상 트란 반 람, 북베트남 외상 구엔 두이 트린(Nguyen Duy Trinh),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외상 구엔 티 빈(Nguyen Thi Binh)이었다. 뒤에서 서명을 지켜보고 있었던 키신저나 레둑토, 그리고 북베트남측 인사들은 서로 악수하며 카메라맨에 둘러싸여 인터뷰하는 등 경축 일색이었으나 남베트남 대표단만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구엔 티 빈

 

이제 미국이 개입하였던 제2차 베트남 전쟁은 끝난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미국의 표현대로 ‘명예로운 평화’를 성취한 것이다.

미군의 포로는 2월 12일부터 송환되기 시작하여 566명이 송환되었다. 한국군 37,000여 명은 2월 3일부터 철수를 개시하여 2월 23일까지 철수를 완료하였다.

3월 14일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부가 철수할 때 8년 6개월 동안 연 32만 명의 장병이 참전하여 베트남 전쟁의 일익을 담당했던 한국군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티우 대통령이 탄손누트(Tan Son Nhut) 공항에 나와 환송하였다. 미군도 3월 29일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