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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베트남전쟁사(114)

3월 10일 반메투오(Ban Me Thout)의 공격과 병행하여 남베트남군 제1군단 지역에서도 북베트남군은 전 지역에 걸쳐서 견제공격을 개시하였다. 북베트남군은 이 지역의 강력한 남베트남군의 전력을 고려하여 공세 전에 은밀히 제341사단을 이동시켰다.

공세 당시 남베트남군 제1군단 지역에 있었던 북베트남군은 베트콩 연대까지 포함하였을 때 남베트남군 제1군단보다 우세한 것 같이 보였으나 남베트남군의 지방군 대대와 민병대를 고려하면 병력은 남베트남군이 많았다.

3월 16일까지 견제공격만을 계속하도록 하였으나 19:00 경 남베트남군의 중부 고원 철수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와 남베트남군 제1군단의 재배치에 대한 개략적인 첩보를 입수한 북베트남 전쟁 지도부는 이를 확인한 후 전선사령관 둥(Dung)에게 남베트남군 제2군단의 철수를 통보하여 즉각 추격토록 하고 남베트남군 제1군단 지역에 있는 북베트남군도 3월 19일부터 총공세를 개시하도록 하였다.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의 패주를 자초하는 남베트남군의 중부 고원 철수와 군 재배치계획은 제1군단의 운명도 단축시키는 재앙까지 초래한 것이다.

북베트남군의 공격 계획은 현재 남베트남군이 다낭 지역으로 철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 호기를 포착, 남베트남군이 철수하기 전에 적의 저항거점은 우회하는 과감한 돌진전법으로 신속히 1번 도로를 차단하여 주요 도시지역을 고립시킨 후에 분리된 적을 각개격파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병행하여 전방에서는 전투력을 집중하여 남베트남군 제1사단을 섬멸하고 신속히 후에(Hue)를 해방하여 북베트남군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면서 남베트남에게 심리적 충격을 춘다는 것이다.

북베트남군 제341사단과 1개 독립연대, 전차연대는 보병, 전차 협동으로 티우와 트룽이 철수계획을 논의하였던 3월 19일 공격을 개시하여 남베트남군 진지로 쇄도해 들어갔다. 북베트남군은 이러한 대규모의 정규전에 생소하였으나 공격자의 심리적 우월감에다 중부 고원지대에서 북베트남군이 대승하였으므로 자기네들도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진격하였다.

남베트남군은 이와 반대로 패배의식, 방어자의 심리, 중부 고원지대에서의 제2군단 패배의 충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대규모로 공격해 오는 북베트남군에게 감히 대항할 생각을 못하였다.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방어진지에서 치열한 접전은 고사하고 원거리 사격도 별로 시도하여 보지도 않고 남베트남군은 무질서하게 쾅트리(Quang Tri) 성의 경계선인 미찬(My Chanh) 강 선으로 철수하였다. 쾅트리 성 전체가 포기된 것이다.

쾅트리 시에는 15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1972년도 북베트남군의 춘계공세 시에 피난을 하였던 경험이 있었다. 공수부대가 철수하고 해병사단도 이동하자 약 2만여 명은 후에로 이동하여 버렸다. 3월 19일 북베트남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대부분의 쾅트리 시민들은 후에로 향하였다. 북베트남군 전차가 야간에 헤드라이트까지 비추어 주기도 하였다.

25마일 이상이나 걸어서 후에에 온 피난민들이 몰고 온 것은 공포라는 전염병이었다. 후에도 이미 적의 포탄이 떨어진고 있었다. 쾅트리에서 온 피난민과 후에 시민들은 다시 다낭으로 향하였다. 수천 대의 차량과 인파는 1번 도로를 완전히 메웠다.

3월 20일 아침 남베트남군 제1군단장 트룽 중장은 미찬 강 방어선의 해병여단 지휘소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후에 지역 방어부대 지휘관들과 후에를 고수하기 위한 방어계획을 토의하였다.

3월 20일 13:30에 라디오 방송으로 그리고 20:00에는 TV로 티우는 중부 고원지대에서는 전투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철수하였으나 후에와 다낭 그리고 제3, 4군단 지역은 끝까지 사수할 것이며 후에와 여타 지역을 포기한다는 유언비어가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혼란을 조장하기 위한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발표하였다. 트룽도 후에에서 사수를 다짐하고 다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를 믿을 수 없었고 쾅트리를 북베트남군 대부대가 공격하였다는 소문을 들은 시민들은 계속 다낭으로 몰려갔다.

이날 오후 늦게 트룽은 티우로부터 후에, 다낭, 추라이 3개 지역을 모두 확보하기에는 전투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후에와 추라이는 군단장 재량대로 철수하여 다낭을 확보하도록 하고 1개 공수여단을 즉각 사이공으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접수하였다. 일주일 동안에 철수-사수-철수로 결심이 바뀌어졌다.

북베트남군은 3월 21일 후에와 다낭 간의 1번 도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후에와 다낭의 중간지점에서 도로상의 무수한 피난민과 차량에 대하여 무차별 포격을 가하면서 공격하였다. 남베트남군 제1사단 예하 1개 연대와 레인저 부대가 이를 저지하였으나 3월 22일 14:00 남베트남군은 패퇴하고 1번 도로는 차단되었다. 다낭으로 향하던 수많은 피난민과 차량은 후에로 되돌아가야 했다.

3월 23일 아침부터 북베트남군은 포위된 후에에 포격을 가하였다. 비행장도 포격으로 이미 무력화되었다. 이제 남은 철수로는 해상뿐이었다. 남베트남 해군은 중장비와 피난민을 다낭으로 후송하기 시작하였다. 해안으로 가는 도로로 전차, APC, 차량, 인파가 몰려들었다. 북베트남군은 이 도로에 포격만 하면 되었다. 군 기동장비, 민간차량, 군인과 민간인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로 먼저 가려고 아우성이었다. 상호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3월 24일 제1군단 지역 쾅트리 성의 성도도 북베트남군 711사단에 의해 점령되어 다낭과 추라이 간의 1번 도로도 차단되었다. 북베트남군은 특공부대를 침투시켜 교도소를 점령하여 죄수들을 먼저 석방시켜 혼란을 조성해놓고 손쉽게 성도를 점령한 것이다. 수많은 피난민이 다낭으로 몰려들었다. 북베트남군들은 이 피난민들의 이동만은 방해하지 않았다.

3월 25일까지 후에, 다낭, 추라이 3개 지역으로 나머지 남베트남군은 집결하였다. 그러나 적과 끝까지 결전을 할 만한 부대는 없었다. 부대건제, 지휘체제는 명목뿐이었고 남아있는 병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적과 싸워보겠다는 전의를 가진 병사들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살아서 사이공 지역으로 가게 되기를 바라는 오합지졸에 불과한 부대였다.

티우는 후에와 추라이에 있는 병력들을 다낭으로 철수시켜 해병사단을 예비로 해서 다낭 지역을 방어하도록 군단장에게 지시하였다. 전부터 계획했던 대로 다낭 지역은 4개 사단, 레인저단, 1개 기갑여단이 방어하는 요새가 되는 것이다. 티우는 이 요새가 상당기간, 최소한 1~2개월은 지탱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미 대사관 국방무관실도, 미 CIA 베트남 지부도 그렇고 다른 부서도 그런 가능성을 점쳤다. 그렇다면 남베트남은 북베트남과 협상을 할 수도 있고 해병사단을 사이공 지역으로 전환하여 사이공 방어능력을 보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지부대의 사정이 어떤지 모르는 사람들이 탁상에서 판단한 결과였고 희망사항이었다.

후에의 방어병력은 도망갈 병사들은 다 도망하고 민병대와 지방군 대대들은 아예 가족들을 보살피라고 합법적으로 해산시켰어도 25,000여 명이었다. 다낭으로부터 항공지원도 가능하고 175㎜ 평사포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북베트남군은 40,000여 명으로 결전을 시도한다면 해볼 만한 병력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의 전의도 문제였지만 갈팡질팡하는 전쟁지도는 붕괴를 더욱 가중시켰다.

3월 25일 야간에 트룽은 후에의 제1사단과 기타 부대들에게 해상철수를 명령하고 추라이 지역의 제2사단 및 기타 부대들은 추라이로부터 약 20마일 떨어진 레(Le) 섬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3월 26일 하룻 동안 후에는 광란의 도가니였다. 남베트남군의 철수를 간파한 북베트남군은 바짝 추격하여 포격을 계속하였다. 이날따라 높은 파도는 더욱 철수를 지연시켰다. 철수선이 도착하면 군인,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해병대와 낙오자들 간에 서로 먼저 승선하려고 총격전도 벌어졌다. 제1사단 제1연대가 철수를 엄호하였다. 군 함선에 탈 수 없었던 피난민들에게는 삼판(Sampan)이라는 작은 거룻배가 유일한 탈출수단이었다. 그나마 너무 많이 타서 높은 파도에 많은 배가 전복되어 버렸다. 파도가 넘실거릴 때마다 수많은 시체들이 나무토막처럼 물 위에 둥둥 뜬 채로 흔들거렸다.

1975년 3월 26일 해상으로 후에에서 철수하는 군인과 피난민

 

이렇게 다낭으로 철수한 병력들은 약 1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나마 건제를 유지한 부대는 해병부대 뿐이었다. 다른 병력들은 다낭에 상륙하자 어디론가 각자 흩어졌다. 아마 가족을 찾으러, 아니면 다낭 시내에 볼일이 있었는지 통제할 사람도 없었다. 도착한 병력이나 피난민 모두 다낭 방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혼란만 더욱 조장하고 공포만 전가시켜 공황을 가중시켰다. 추라이 지역의 부대는 레 섬으로 철수하여 차후 지시를 대기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후에보다는 훨씬 나았으나 병사들이 부대보다 자신의 살길, 자기가족, 친지들을 구하려고 날뛰어 오합지졸화되어 혼란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제2사단장 트란 반 누트(Tran Van Nhut) 준장은 해안에서 이렇게 자기 사단이 망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슬픔과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제2사단의 철수병력은 약 6,000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제2사단장 트란 반 누트 준장

 

북베트남군은 별 전투도 없이 후에를 점령하였다. 중부 고원지대 점령에 이어서 이 두 번째의 낭보에 북베트남군은 물론 북베트남 국민들도 환호작약하였다. 북베트남군도 너무나 믿기지 않은 신속한 승리에 놀랐다. 처음에는 적의 완강한 저항을 예상하고 공격준비에 시간을 많이 소모하였다. 특히 각 제대에 있는 정치장교와 합의된 작전을 수행하여야 했기 때문에 속도는 더디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들이 스스로 와해되고 스스로 철수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열매를 따기에도 바빴다. 둥(Dung)은 자기의 상황장교가 신속한 그들의 진격을 상황도에 표시하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불평 아닌 불평을 하였다고 회고하였으나 북베트남군의 우수한 공격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북베트남의 전쟁 지도부는 3월 25일 둥의 건의에 따라 다낭 공격을 지휘할 수 있도록 다낭 전선 사령부를 편성하여 사령관에 북베트남군 총참모부의 참모차장 중 한 사람인 레 트롱 탄(Le Trong Tan) 중장, 정치장교에 당 중앙위원인 추 후이 만(Chu Huy Man) 상장을 임명하여 헬기로 현지에 보냈다. 또한 둥은 북베트남에 있는 130㎜ 야포를 신속히 이동시켜 다낭에 장거리 포격을 하도록 조치하였다.

레 트롱 탄 중장

 

추 후이 만 상장

 

북베트남군의 다낭 전선사령부의 급조 편성은 다낭 공격동안 쾅트리와 쾅티엔 2개성 지역을 담당하였던 북베트남군의 쾅트리-쾅티엔-후에 군구부대(북베트남군은 총공세 전에 지휘기를 재편하였었고 이 군구지역의 제304, 325, 326사단을 제2군단으로 명명하였음. 이하 북베트남군 제2군단으로 기술)와 중부 고원지대(B-3전구)를 제외한 칸호아(Khan Hoa) 성까지의 중부 해안지대를 담당하였던 제5군구 부대를 통합 지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3월 27일부터 북베트남군이 다낭 일대의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하였다. 북베트남군은 3월 28일 오후에는 다낭과 호이안(Hoi An) 간의 도로를 차단하였다. 호이안은 다낭 남방 약 25㎞ 지점에 있는 쾅남(Quang Nam) 성 성도이며 남베트남군의 탄약 및 유류 보급소가 있는 곳이다. 야간이 되면서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 제1군단 사령부를 비롯한 군사시설에 정확하게 포격을 가하였다. 그들은 이미 포병 관측 요원과 행정관서를 접수할 요원들까지 피난민 대열에 끼어 다낭 시내로 침투시켰었다.

남베트남군 제1군단장 트룽 중장은 지휘체제를 확립하여 방어를 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였으나 허사였다. 3월 28일 아침에 예하 지휘관을 소집해서 부대를 재편하여 최후의 방어를 시도하려고 했으나 병력이 부족하였다. 트룽이 그 당시 장악할 수 있었던 병력은 해병사단, 제3사단 잔존병력 등 25,000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대는 해병사단 뿐이었다. 1개 사단으로 적 5개 사단 규모의 공격을 지탱할 수는 없었다.

당시 다낭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도망병, 낙오병 등이 10만 명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이 병력들을 통제하기 위해 남베트남군 장교들이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군인이 아니었다. 총만 휴대한 민간인이었다. 많은 인원이 이미 사복으로 갈아입었었다. 어떤 낙오병, 도망병들은 장교들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피신하는 남베트남군

 

당시 다낭 인구는 약 46만 명이었다. 이제 피난민, 군인 모두 약 200만 명이 시내에서 우글거렸다. 3월 18일 키엠(Khiem) 수상이 각료 몇 명을 대동하고 다낭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50만 명의 피난민이 운집하였었다. 피난민 문제는 정부 측에서 책임지고 군사작전에 지장이 없도록 조치할 것을 약속하고 돌아갔었다. 최초의 피난민은 각 지역별로 공공시설에 분산 수용하는 등 그런대로 잘 조치되었다. 그러나 피난민 숫자가 급증하면서 후에까지 포기되자 완전히 광란의 도시로 변하여 버렸다. 남베트남 정부는 피난민에 대하여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탈출구인 공항과 항구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거리는 차량과 인파로 뒤엉켜 군용차량이 움직일 수도 없었다. 부상병들의 후송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먹을 것이 없는 도망병, 낙오병이 약탈을 자행하였다. 불응하면 그대로 사살되었다. 자기네들끼리 총격전도 벌어졌다. 강간도 자행되었다. 절망과 자포자기에 빠진 그들은 못할 짓이 없었다. 트룽은 전차를 시가지로 보내어 질서를 잡아보려 하였지만 이미 제방이 무너져 버린 물줄기를 잡을 수는 없었다. 공무원들은 출근하지도 않았고 다낭과 사이공 간의 통신도 28일 밤부터는 불통되었다.

다낭 비행장은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병사들은 여자, 어린아이들을 밀치고 총을 들이대며 좌석을 요구하였다. 거절당하면 무조건 쏘아댔다. 어떤 비행기에는 여자는 2명, 어린이는 1명 뿐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할 수가 없었다. 시간만 지체되었다. 자동차가 서로 먼저 가려다가 뒤엉켜서 아무도 갈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천신만고 끝에 비행기가 이륙하려고 움직이면 타지 못한 군인이 쫓아오며 수류탄을 던지기도 하였다. 활주로 근처에는 북베트남군의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랜딩기어를 붙잡고 있었고 비행기 날개도 붙잡고 있었다. 모두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이륙중인 비행기의 랜딩기어에 매달린 피난민

 

다낭의 피난민과 중장비를 철수시키기 위해서 가용한 항공기, 선박이 총동원되었다. 미국의 민간 제트항공기도 동원되었으나 광란 때문에 계속할 수가 없었다. C-130 군용 수송기 4대가 동원되었으나 1회 수송밖에 할 수 없었다. 미국 의회에서 군용기를 운용하는 것은 파리 평화협정 위반이라고 논란이 일었으나, 미 대사관 국방무관 호머 스미스(Homer Smith) 육군소장도 견인선, 바지선, 화물선 등 가용한 대로 동원해 주었다. 필리핀의 LST 1척도 지원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한국, 대만 등도 철수지원 호소에 동의해 주었으나 너무도 빨리 와해되어 소용이 없었다.

 

호머 스미스 육군소장

 

해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베트남 해군의 탄약 운반선에도 천명 가까이 승선하여 빈틈이 없었다. 거룻배에는 사람이 너무 많이 타 뱃전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져 죽었다. 거룻배에는 지붕도 없고 식량도 없었다. 바닷가에 떠다니는 동안 강렬한 햇빛과 갈증 때문에 죽어갔다. 이렇게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은 사람이 수만 명이었다. 미 외항선에 탈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래도 행운아들이었다.

바지선을 이용해 다낭을 철수하는 모습

 

수송선에 가득찬 피난민과 남베트남군

 

트룽은 3월 28일 야간에 티우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철수를 건의하였다. 티우는 명확한 명령을 하달하지도 않았다. 중부 고원지대의 참상이 재연될까 두려운 것이었다. 이제 통신도 두절되었다. 트룽은 철수를 결심하고 예하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해상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3월 29일 여명부터 철수가 개시되었다. 썰물로 해군선박들이 선창으로 접안할 수가 없어 병사들은 수영으로 선박으로 가야했다.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이 이렇게 쉽게 철수할 줄은 몰랐다. 아직 본격적인 접전도 없었고 다낭에 포격만 가했을 뿐이었다. 5~6시간이 지나서야 철수를 간파하고 3곳의 승선지점에 포격으로 철수를 방해하였다.

전에 미군이 사용하였던 비행장에서 UH-1D 헬기 10대가 군인들과 가족을 대 당 20여 명씩 태우고 출발하였다. 재급유하기 위하여 이미 북베트남군에게 함락당한지도 모르고 추라이 비행장에 1대가 착륙하였다가 포로가 되었고 5대는 대공화기에 격추되었으며 나머지 4대는 행방이 묘연하였다.

트룽 중장은 수영을 못하여 부관의 도움으로 겨우 초계정에 구조되어 승선할 수 있었다. 남베트남군 내에서 그 막강을 자랑하던 제1군단이 이렇게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이제 남베트남군 전투서열에 제1군단이 없어지는 최후의 순간인 것이다. 동료들이 남베트남군 최고의 명지휘관이라는 트룽의 말로를 보고 차라리 해안에서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더라면 영원한 명장이 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끝까지 구출된 병력은 다낭에서 약 6,000명의 해병과 약 4,000명의 제3사단 및 기타 부대의 병력이었고, 추라이 지역에서 약 6,000여 명이었다. 다낭 시내에서 날뛰던 도망병, 낙오병들은 미국 영사관 등을 불사르고 약탈을 자행하면서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3월 29일 오후에 북베트남군을 가득 실은 트럭 2대가 베트콩 기를 달고 다낭에 제일 먼저 무혈입성하였다. 그중의 절반은 여성들이었다. 람브레타(삼륜차)에 확성기를 달고 다낭은 해방되었다고 외치고 다니며 남베트남군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라고 하였다. 각 보급소에는 10만여 명의 한 달 분 식량과 60일 분의 탄약이 산적되어 있었다. 장비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북베트남 여군

 

다낭에 입성하는 북베트남군 탱크

 

반 티엔 둥(Van Tien Dung)은 이와 같은 승리를 보고 마치 대쪽을 가르듯이 손쉬운 승리라고 표현하였다. 날카로운 칼날로 반메투오란 곳에 한번 쐐기를 박으니까 대쪽이 갈라지듯 남베트남의 2개 군단이 스스로 무너져 버린 것이다. 남베트남군 100만 명의 병력 중 반 이상이 소멸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