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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야기

법계명성화갑기념논문_운문승가대

法界明星 華甲紀念

 

佛敎學論文集

 

雲門僧伽大學出版部

 

法界堂 明星스님 近影

 

雲門寺 全景

 

                           法界明星 學長 年譜

 

1931.       11월 15일 경북 상주군 외서면에서 부친 全在英과 모친 鄭五終 사이에서 長女              로 출생

1948.       강릉여자고등학교졸업.

1949.       3월. 강릉군 강동국민학교 교사로 부임.

1952.       4월. 합천 해인사에서 善行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고, 東山 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수지.

1958.        2월. 전남 승주군 仙岩寺 講院에서 大敎科 졸업.

            4월. 仙岩寺 講院 祖室 性能 스님으로부터 傳講을 받고, 仙岩寺 講院에서 3年間              강의를 함.

1961∼70.   11월. 서울 청룡사 강원에서 10년간 강의를 함.

1966.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서예부 입선.

1967. 9월.   해인사 감로 계단에서 慈雲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0. 9월.   대한불교 曹溪宗 제3대 中央宗會議員에 피선.

     9월.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初能變識의 硏究』로 석사학위 취득.

1970∼87.   청도 雲門寺 僧伽學院 講主.

1974. 2월.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8월.  대한불교 조계종 제4대 中央宗會議員에 피선.

1975∼76.   동남아세아 불료국 및 유럽.미국 등을 순방함(6개월간).

1977.       불교정화 이후 청도 雲門寺 제8대,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주지.

1978. 8월.   대한불교 조계종 제5대 中央宗會議員에 피선.

1984. 8월.   대한불교 조계종 제8대 中央宗會議員에 피선.

1987∼현재.  1월. 雲門寺 승가학원이 승가대학으로 개편됨에 따라 學長으로 취임.

1988∼89.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민윤리과 외래 강사 역임.

1989∼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9대 中央宗會議員.

1990. 5월.   중국 불교성지를 순례함 (32일간).

1994.       미국 시카고 세계종교자대회 참석.

1995.       국제난민돕기 캄보디아 방문.

 

 

□ 著書 . 譯書 . 編書 □

                                著書  初能變識의 硏究

                                譯書  俱舍論大綱

                                唯識講要

                                編書  沙彌尼律儀

                                諸經序文

 

                   賀 序

 

  五岬寺 中의 하나인 대작갑사가 바로 오늘의 雲門寺이다. 雲門寺는 창건이후 圓光, 寶壤, 圓應, 雪松등 많은 고승대덕이 住錫하였던 영남의 大伽藍이기도하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法界明星 講伯은 二十餘 星霜동안 이곳 雲門도량에서 도마죽위와 같은 많은 학인을 거느리고 講杖을 指東指西하면서 苦口 寧히 교육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佛敎의 발전과 국민정신 순화에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는 사이 세월은 흘러 於焉 스님은 回甲을 맞게 되어 弟子들이 정성을 다해 華甲頌壽의 論文을 발간한다고 하니 기쁘기 한량 없다.

 古來로 雲門寺는 圓光을 따르던 花郞徒의 氣象이 서려있는 곳일 뿐 아니라, 無 自在한 化緣이 遍滿하여 초목까지도 無 歌를 불렀다는 元曉의 탄생지와 신라의 古都인 경주와도 멀지 않는 곳이다.

 스님은 여기에 錫杖을 멈춘 후, 誠과 熱을 다하여 퇴락한 伽藍을 중창하는 한편, 堂宇를 증축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二白餘 學人이 集居하는 第一의 講院을 만들었으니 참으로 그 法德을 頌賀하지 않을 수 없다.

  耘虛 스님은 門下에서 內典을 受學한 스님은 方世의 時空을 넘어 威音那邊更那邊을 향해 獨步乾坤으로 書畵까지 兼修精進하여 한국불교의 比丘尼系에서 무거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講白은 未來를 내다보는 투철한先覺의 智眼이 있어 일찍부터 학인교육과 함께 동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수료하는 동안 敎學中에서도 난해하다는 唯識學을 연구하여 남

다른 見解를 가지고 있다.得度以前에는 교편생활, 入山以後에는 四十년 동안 오로지 승가교육과수도에만 專念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悲願 行과 福慧雙修의 독보적 僧伽像을 갖추게 되었다. 弟子들이 講白의 연구 논문을 모아 華甲論文을 발간하여 頌壽와 報恩에 共하려 하니, 부처님의 가호와 弟子들의 정성으로 항상 法體淸安하여 후배와 중생들에게 法光을 비충 주시기 바라는 바이다.

 

   萬朶靑山元不動   淸溪流水暫不息

   虎踞山上日出東   鶴巢臺下月落潭

   日月相磨催老相    忽已過六十年

   人生命若水泡空   明星光明長不滅

 

   첩첩 청산이 원래 동함이 없으니,

   맑은 계곡물 흘러흘러 머물지 않네.

 

   호거산상 동편에 태양이 떠오르니,

   학소대 아래 못 속에 달이 잠기도다.

   해와 달이 서로 바뀌며 늙음을 재촉하니,

   어느덧 벌써 60년이 지났구나.

   인생의 명은 물거품과 같으나,

   명성의 밝은 빛은 영원히 꺼지지 않으리.

 

                                  佛紀 2535年(1991) 7월 15일

                                          前東國大學長 總長

                                      伽倻山내 李 智 冠  誌

 

 

                   賀 序

 

 雲門寺는 新羅 眞興王 21年 大鵲岬寺로 創建된후 圓光國師와 一然 스님 등 수많은 高僧大德께서 住錫하며 佛法을 顯揚하던 嶺南一帶 由緖 깊은 대찰이다. 또한 新羅때는 花郞徒들이 修鍊하며 經學을 硏究하던 花郞의 中心道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傳統을 면면히 계승한 雲門寺는 지난 1958년에 雲門僧伽學院이 開設된 이래 지금은 우리나라 最高의 比丘尼 敎育機關인 雲門僧伽大學으로서 그 脈을 화연히 이어가고 있다.

 法界堂 明星講白은 1970년 雲門寺 僧伽學院의 講主로  부임하여 比丘尼敎育에 專力하면서 아울러 1977년부터는 雲門寺 住持을 兼職하여 그 所任을 다하고 있다. 그리하여 梵鐘鑄造, 梵鐘樓, 說玄堂, 彩鏡堂, 淸風寮, 六和堂 등 30여대을 新築하고 萬歲樓, 觀音殿, 鵲鴨 捕修 雲門寺 道場을 一新시켜 第6代 重創主로 稱頌받고 있다.

 스님게서는 23세때 海印寺에서 出家하여 經典을 修學하면서 耘虛, 觀應, 明峰, 曼宇, 性能 等 큰스님께 師事하였고, 東國大學校 大學院 碩.博士課程에서 唯識學을 專攻하였다. 이렇게 경전을 공부하면서 날로 信心이 깊어지고, 특히 화엄사상에 魅了되면서도, '나'를 찾는 공부를 잊지 않고 있다.

 남산 仙岩寺, 서울 靑龍寺 講院에서 講師를 지내기도 한 明星講白은 수많은 제자들을 養成하였다. 雲門僧伽大學에서만도 27回, 總620餘名을 輩出했다하니 韓國 佛敎界의 師表로서 明星學長은 그 功을 稱頌받고 있다.스님은 門下生 中에서 실력이 갖추어지고 6年 이상 敎授經驗者에게 주는 傳講을 받은 스니은 해도 네 분이 있어 興輪, 一眞, 戒昊, 妙靜스님이바로 그들이다

 雲門僧伽大學은 明星 스님의 願力에 힘입어 훌륭한 敎育環境을 갖추었으며, 學訓으로 立志發願, 精進不退, 流通敎海를 내세워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流布하는 것을 佛弟子의 使命으로 삼고 있다. 또한 敎育課程의 內實과 多樣性을 追求하고자 心理學, 哲學, 歷史學, 佛敎美術 等 隣近 大學의 敎授들을 外來講師로 모셔 學人들의 知的 向上을 도모하고 있다. 아울러 人格完成을 위하여 智慧, 慈悲, 勇氣를 강조하여 學人 스님들의 體力과 情緖敎育에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茶道, 書藝, 卓球, 庭球, 꽃꽂이, 피아노 等의 特別活動을 위한 각종 器具와 空間을 마련하여 理想的인 敎育環境과 與件을 造成하였다.

 이처럼 法界堂 明星學長은 佛敎學 가운데서도 어렵디 어렵다는 唯識學을 專攻, 실로 核心

 

的인 문제에 도전하여 學問的 基盤을 다졌으며, 比丘尼敎育의 혁신을 위해 盡力하여 새 氣風을 이룩해 내었다. 그런는 동안 日月은 흘러 스님께서 華甲을 맞이하셨으니 그 壽筵을 기리어 門下의 제자들이스님께서 쓰신 論文을 모아 記念論文集을 刊行하니 기쁘기 한량없다. 부처님의 加護와 門徒들의 精誠으로 淸安하시어 衆生들의 永遠한 師表가 되시길 祈願한다.

 

                                       佛紀 2535年 6月 15日

                                             韓國科學技術院

                                          名譽敎授 李 炳 昊

 

目    次

 

法界 明星學長 近影

雲門寺 全景

賀書                  金日陀

賀書                  任昌淳

賀書                  金膺顯

賀詩                  卞延煥

賀畵                  金日堂

賀畵                  趙玉峰

賀畵                  尹日湖

                            法界 明星學長 年譜

賀序                  李智冠

賀序                  李炳昊

 

論     文

 

唯識學硏究

序論

Ⅰ. 唯識思想의 기원

Ⅱ. 世親의 唯識說

  1. 唯識三十頌의 成立

  2. 所依經論

  3. 諸家의 唯識硏究

本論

Ⅰ. 緖說

Ⅱ. 諸識轉變의 意義

Ⅲ. 三能變識의 略說

Ⅳ. 初能變識에 關하여

  1. 自相門

    (1)阿賴耶識의 意義    (2)阿賴耶의 三藏義

 

  2. 果相門

  3. 因相門

    (1)種子論      (2)熏習論

  4. 行相門

    (1)四分의 名義   (2)立分의 異說

  5. 所緣門

    (1)三類境說의 興起    (2)三類境義

  6. 相應門

    (1)心所의 總說     (2)心所相應義

  7. 五受門

  8. 三性門

  9. 因果譬喩門

 10. 伏斷位次門

 11. 第八識存在의 論證

    (1)五敎證    (2)十理證

Ⅴ. 第二能變識에 關하여

  1. 擧體出名門

    (1)末那識의 名義     (2)第六識과 第七識의 相違

  2. 所依門

    (1)四大論師의 異說    (2)三所依論

  3. 所緣門

  4. 體性行相門

  5. 心所相應門

    (1)本惑의 四  (2)別境心所의 慧    (3)八大隨惑

  6. 三性分別門

  7. 界繫分別門

  8. 伏斷位次門

    (1)斷滅位    (2)末那無有의 異說    (3)分位行相

  9. 第七識存在의 論證

    (1)三敎證      (2)六理證

Ⅵ. 第三能變識에 關하여

  1. 能變差別門

    (1)隨根得名    (2)隨境得名

  2. 自性行相門

  3. 三性分別門

    (1)三性不俱起說   (2)三性俱起說

  4. 相應受俱門

    (1)六位心所의 意義    (2)六位心所의 要義

  5.所依門

  6. 俱不俱轉門

  7. 起滅分位門

 

    (1)前五識과 第六識의 차이    (2)無心의 五位

    (3)第六識    (4)諸識의 俱轉과 一理

結論

 

唐 杜順의 法界觀

1. 머리말

2. 法界觀門

3. 眞空觀

4. 理事無碍觀

5. 周偏含容觀

6. 맺음말

 

華嚴十地說 硏究

1. 序言

2. 本經의 宗趣

3. 本經의 번역 및 조직

4. 十地

  (1)歡喜地  (2)離垢地   (3)發光地   (4)焰慧地

  (5)難勝地  (6)現前地   (7)遠行地   (8)不動地

  (9)善慧地  (10)法雲地

5. 結語

 

眞如緣起에 대한 考察

1. 序言

2. 眞如의 意義

3. 起信論의 眞如緣起說

  (1)緣起의 根源인 阿黎耶識   (2)染法緣起    (3)淨法緣起

4. 結語

 

唯識學을 中心으로 한 十地說

1. 序言

2. 修行의 相狀

3. 十地의 名義

4. 所修의 勝行

5. 所斷의 惑障

6. 所證의 眞如

7. 結語

 

信解品 五時敎에 대한 小考

1. 머리말

2. 信解品의 개요

 

3. 五時敎

  (1)華嚴時   (2)阿含時   (3)方等識

  (4)般若識   (5)法華涅槃時

4. 맺는말

 

天台四敎에 대한 考察

1. 머리말

2. 化法四敎

   (1)藏敎   (2)通敎   (3)別敎   (4)圓敎

3. 化義四敎

   (1)頓敎   (2)漸敎   (3)秘密敎   (4)不定敎

4. 맺는말

 

禪의 種類와 그 哲學的 意義

1. 序言

2. 禪의 意義

3. 禪의 起源

4. 禪의 種類

5. 禪觀의 내용

6. 達磨禪의 특색

7. 結語

 

華嚴五敎判 硏究

1. 序言

2. 五敎判

  (1)小乘敎   (2)大乘始敎   (3)終敎   (4)頓敎   (5)圓敎

3.結語

 

華嚴十宗判 硏究

1. 序言

2. 十宗判

  (1)我法俱有宗   (2)法有我無宗   (3)法無去來宗

  (4)現通假實宗   (5)俗妄眞實宗   (6)諸法但名宗

  (7)一切皆空宗   (8)眞德不空宗   (9)相想俱絶宗

  (10)圓明具德宗

3. 結語

 

六朝初期의 三大敎家

1. 結語

2. 鳩摩羅什

3. 慧遠

 

4. 寇謙之

5. 結語

 

阿賴耶緣起說에 關하여

1. 緖說

2. 諸識轉變의 意義

3. 阿賴耶識의 意義

4. 阿賴耶識의 三藏義

5. 結語

 

法界緣起에 대한 硏究

1. 序言

2. 四法界

3. 十玄緣起

4. 結語

 

中國佛敎史에 끼친 廬山의 位置

1. 緖言

2. 廬山의 開山祖 慧遠

3. 悸慄上에서 본 廬山의 位置

4. 念佛에서 본 廬山의 位置

5. 結語

 

攝大乘論에 대한 小考

1. 緖言

2. 攝大乘論의 전파

3. 攝大乘論의 綱要

4. 結語

 

東普時代의 佛敎

1. 緖言

2. 道安과  堅

3. 羅什과  堅

4. 僧朗과  堅

5. 結語

 

攝大乘論예 나타난 阿黎耶識

1. 머리말

2. 攝大乘論에서 본 阿黎耶識

  (1)種子의 六義   (2)所熏의 四義    (3)三種自性

 

3. 맺는말

 

看話禪과 默照禪

1. 머리말

2. 禪의 기원과 傳來

3. 看話와 默照의 역사적 배경

4. 看話禪과 大慧禪師

5. 默照禪과 宏智禪師

6. 맺는말

 

大方廣圓覺經에 대한 小考

1. 序言

2. 本經에 대한 眞僞

3. 本經과 類似한 經論

4. 內容의 槪要

5. 本經의 大意

6. 結語

 

曹溪宗의 成立

1. 序說

2. 曹溪宗名의 由來

3. 曹溪宗旨의 成立

4. 結語

 

僧伽敎育의 理念的 考察

1. 머리말

2. 現僧伽敎育의 문제점

  (1)僧侶들의 교육 실태   (2)比丘尼의 특수교육

  (3)一元化된 敎育과 敎授陳의 전문화

  (4)修學과 敎授法의 改善    (5)敎育의 義務化

4.맺는말

 

一然禪師와 雲門寺

1. 序言

2. 雲門寺의 創建과 來歷

3. 一然스님의 生涯과 性品

4. 一然스님의 著作과 三國遺事

5. 一然스님과 雲門寺

6. 結語

 

논문집을 발간하며

 

唯識學 硏究

- 世親唯識學說을 中心으로 -

 

 

序 論

 

 

Ⅰ. 唯識思想의 기원

 

釋尊一代의 敎法은 그 근본사상에서 보면 모두 다 轉迷開悟를 목적한것으로서, 우리들 범부의 迷執을 타파하고 解脫涅槃의 證果를 얻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 敎說의 내용을 살펴본다면 상대하는 근기의 차별에 따라 자연히 깊고 옅음의 차별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敎法을 所依로 하는 名宗에 있어서도 大小權實 등 여러 가지 차별이 있다.

먼저 敎育初門의 小乘敎인 俱舍宗1)과 같은 것은 聲聞 緣覺의 二乘을 상대로 하여 설한 것이므로, 우리들 범부의 迷執인 我見을 깨뜨리고 無我의 교리를 나타냈으나, 아직 色心二法의 實在를 설하여 우주만유의 實性을 연구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그 理想으로 하는 바도 또한 空寂을 涅槃境으로 하는 아라한으로서 다만 自利의 일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唯識宗에서는 我法二宗을 설함과 동시에 萬法生起의 本源을 우리들 主觀의 根本識 인 阿賴耶識아라고 보았다. 즉 有情과 無情 등 일체의 현상은 모두 우리들 각자의 阿賴耶識으로부터 變現된 영상에 불과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소위 賴耶緣起說인 바 이를 또한 萬法唯識 心外無別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대상의 근기는 문수, 미륵 등이 지상보살로서 그 뜻한 바도 또한 自利利他 二利圓滿의 佛果涅槃을 증득하는 데있다.

그러면 인도에서 唯識思想은 어느 때부터 누구에 의해서 비롯되었는가? 佛滅後 900년 경 無着, 世親 등에 의하여 唯識思想은 드디어 하나의 學派를 형성하게 되었다. 無着보살(Asanga, 310∼390년경)은 北印度간다라국(Gandhara)의 서울 富婁沙富羅(Furusapura)에 살던  尸迦(Kauska)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삼형제 중에서 맏이이며 둘째는 世親이며 셋째는 比隣持跋婆이다. 그는 처음에 化地部2)에 출가하여 수학한 후 다시 중인도 阿踰陀國 重閣講堂에서 수학하던 중 불교교리에 여러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럴 때마다 미륵보살을 친견하여 의혹이 풀리기를 항상 염원하였다. 그 결과 신통력을 얻어서 밤에는 도솔천궁에 올라가서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특히 唯識中道의 敎理에 대하여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그 심오한 唯識學의 妙理를 사바세계 중생에게 전하고자 하였으나 이것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미륵보살에게 사바세계 중생을 위하여 직접 敎授해주기를 청하였다. 無着의 간청에 감

 

동된 미륵보살은 4개월간 밤마다 重閣강당에 내려와 五大部論을 설법하였으니 이른바「瑜伽師地論」「分別瑜伽論」「大莊嚴論」「辨中邊論」「金剛般若」등이다. 이때 무착보살은 미륵보살의 음성과 모습을 동시에 보고 들을 수 있었으나 다른 대중들은 멀리 음성만을 듣고 서로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다. 이에 無着이 대중을 위해 再說한 것이 유명한 「瑜伽師地論」 백권이다. 論序에

「爾後數往兜率陀天諮問彌勒大乘經義爲餘人說聞多不信卽自發願請彌勒菩薩下說大乘令衆生     見皆得信受卽如其願於夜下時放大光明集有緣衆於踰闇國說十七之論隨所誦出隨解其義經四月     夜十七地論竟雖同一堂唯有無着得近彌勒菩薩餘人但得遙聞或有見異時無着師更爲餘說因此餘     人方始信受大乘法義」3)

라고 하였으며 또 後人이기는 하지만 唯識學派 護法의 제자인 最勝의 瑜伽師地論釋의 歸敬序에도

「稽首無勝大慈氏 普爲利益諸有情 廣採衆經直要義 略說五分瑜伽說」

이라고 한 것은 모두 미륵이 瑜伽師地論을 설하였고 또 무착은 그에게 師事하였다는 관계를 전하는 문헌들이다.

이리하여 무착은 밤에 들은 것을 낮에 다른 대중을 위하여 다시 강의하였다고 하니 이것이 이른바 재래의 唯識學 起源說이다.

이와 같이 唯識의 敎理는 미륵이 講說한 瑜伽師地論에 의거해서 무착이「顯揚聖敎論」 「阿毘達磨集論」및「攝大乘論」등에서 그 법문의 진수를 높이 드러냈고 다시 世親이「唯識」兩論4)「百法明門論」및「攝大乘論」등의 여러 곳에서 結構組織하고 특히「唯識三十論」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大成해서 그 법문의 형성하는데 이르렀다. 더욱이 후세의 唯識學說은 이들 無着·世親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世親 이후 護法에 이르러 性相決判의 基調에 의거해서 세워진 賴耶緣起說 즉 法相敎義라고 하는 唯識學說이 전개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법문의 始祖를 구한다면 실로 무착이라 하겠으나, 만약 미륵을 역사적인 인물로 본다면 다시 미륵을 본종의 창시자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組職大成한 이로는 世親을 들지 않을 수 없다.

 

Ⅱ. 世親의 唯識說

 

1. 唯識三十頌의 成立

 

世親은 梵語로 婆藪槃頭(Vasubandhu)라고 하며 舊譯에는 天親이라고 번역한다. 그는 佛滅後 900년(기원 5세기)경에 北印度 간다라국 富婁沙富羅成의 國師婆羅門  尸伽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니 그가 바로 위에서 말한 無着의 아우이다. 世親은 두뇌가 명석하여 조직적인 著作에 았어서도 그 당시 독보적인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보기 드문 文筆家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처음에 說一切有部에 출가해서 그 교리를 연구하다가 또 經量部의 교리도 탐구한 결과 有部의 교리에 대해서 회의를 일으켰다. 그래서 세친은 당시의 說一切有部의 본거지인 迦濕彌羅國(현 케시밀 지방)에 들어가 有部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재연구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원래 보수적인 가습미라국이서는 외국인의 출입을 엄금하는 國法이 있어 世親은 부득이 이름을 숨기고 入國, 4년간에 걸쳐 有部敎理의 總書라고 할만한「大毘婆沙論」5)의 심오한 뜻을 연구하였다. 有部敎理의 眞意를 해득한 世親은 자주 經部의 사상으로써 有部의 학설을 論破하여 有部의 敎理를 改善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당시의 가습미라국에서 有部의 우두머리인 悟入(Skandhila)尊者에게 힐문한 일이 있었던 바, 悟入尊者가 그의 비범함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정체를 알고자 入定해서 관찰해 본 결과 世親이 건타라국의 유명한 學僧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를 애호하는 마음에서 세친을 불러 말하기를 「이 대중 가운데는 未離欲者6)가 있어 만약 그대의 本色을 안다면 생명에 위험을 가할 우려가 있으니 속히 귀국하라」고 경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세친은 즉시 본국으로 돌아온 후 당시의 대중들을 위하여 600日間에 걸쳐 修得한바의「大毘婆沙論」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매일 강의한 요의를 총괄해서 一偈頌씩 지어 終講하였을 때 600頌이 되었으니 이것이 소위 「俱舍論頌」이다. 그는 이 600頌을 가습미라국에 보냈는데 그 國王과 스님들은 자기네 종파의 교리를 간단하게 闡明하여 준 것이라 하여 모두 기뻐하였다. 그러나 悟入尊者만은 자기네 종파의 교리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하면서 이 頌을 다시 世親에게 돌려보내서 이 頌에 대한 長行釋을 붙여달라고 청하였다. 세친은 그의 청대로 長行釋을 저작하여 보냈던 바 과연 悟入의 판단과 같이 세친은 經量部의 敎理觀에서 有部의 교리를 批判하였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즉 그때에 俱舍論頌에 長行釋을 붙인 것이 現行하는 「阿毘達磨俱舍論」이다. 대개 「俱舍論」은 세친의 소승불교시대의 대표적 걸작으로 說一切有部의 사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어떤 著書보다도 俱舍論에 의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世親은 有部의 敎義를 改善해서 크게 宣揚하면서 小乘十八部의 교리에 통달하여 大乘은 佛說이 아니라 하여 不信하고 비방하였다. 그때에 친형 無着은 그 아우를 교화하기 위하여 阿踰 國에 있는 세친에게 사람을 보내서 병이 위독함을 알렸다. 급보를 받은 즉시 兄이 있는 健陀羅國에 돌아와 보니 兄은 건재하였다. 아우가 그 병의 원인을 물으니 兄이 대답하되「나는 이제 마음속에 重病이 들었는데 너로 인해서 일어난 것이다. 너는 大乘을 不信하고 항상 비방하니 이 惡業으로 인하여 반드시 惡道에 떨어지리니 나는 이것을 걱정하여 병을 얻었노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세친은 놀랍고 두려워서 無着의 「攝大乘論」을 듣고 마침내 小乘을 버리고 大乘에 귀의하게 되었다. 大乘의 심오한 이치를 비로소 알게 된 세친은 지난 과오를 자책하면서 대승을 비방한 죄과를 용서받고자 그 근원인 혀를 절단하려고 하였다. 이것을 안 無着은 설사 혀를 끊는다 할지라도 그 죄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마땅히 비방하던 그 혀로써 이제는 대승을 널리 찬탄하라고 권하였다. 세친은 대승불교선양에 身命을 다하겠다고 서약하고 드디어 唯識敎學을 정리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大乘敎로 마음을 돌린 그는 諸大乘經에 의지해서 많은 大乘論을 저술하였다. 세상에서 그를 千部論師라고 칭찬하는 것은 小乘五百部, 大乘五百部의 論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중 法相敎義에 속하는 저명한 述作을 들면 다음과 같다.

 

 「辨中邊論」「攝大乘論釋」「十地經論」「唯識二十論」「唯識三十論」「百法明門論」「百  論釋」「發菩提心經論」「佛性論」「阿毘達磨俱舍論」「無量壽經優婆提舍」「金七十論」이러한 唯識關係의 著書 중 「二十唯識論」과 「三十唯識論」의 兩論이 가장 대표적인 저서다. 특히「唯識三十頌」은 만년의 저작으로 가장 조직적으로 정리된 뛰어난 저서로 唯識宗의 根本論典이며 당시 사상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 三十頌은 600자밖에 되지 않는 간단한 文章이지만 깊은 뜻을 지닌 有力한 저작이며 慈恩大師가 「萬象含於一字 千訓備於一言」이라고 한 것은 결코 과찬이 아니다. 아마 세친보살이 一代의 심혈을 기울여 저술하였음에 틀림없다. 세친보살 자신이 長行釋을 하지못하고 入寂하게 됨은 실로 千秋의 恨이 아닐 수 없으며 세친은 龍樹(Nagarjuna), 無着과 함께 印度佛敎歷史上의 三大人物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二十論」7)은 世親이 그 당시 성하였던 外道小乘의 心外實有의 執見을 파하고 唯識中道의 敎理를 宣揚하기 위해 지은 破邪를 주로 한 대외적인 論著인데 대해서, 「三十論」8)은 바로 萬有唯識의 이유를 밝혀 크게 自家의 敎線을 확장한 이른바 顯正을 주로 한 저술이다. 이와 같이 兩論은 각각 특징을 가지고 있으므로 慧沼는「唯識了義燈」卷一이 前者를 「 破邪山論」9)이라 하고 後者를 「高建法幢論」10)이라 하여 소극 적극양면을 세워 名論의 태도를 밝혔다.

요컨대 唯識敎學은 兩論에 의해서 破邪顯正의 意義를 유감없이 말휘하고 있다. 세친은 그의 친형 무착의 지도에 의해서 大乘佛敎를 연구한 결과 大乘에 관한 多數의 저서를 남겼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이채를 띄우고 심혈을 기울여 저작한 것이 無着의 唯識思想을 組織大成한 唯識三十頌이다.

 

2. 所依經論

 

어느 宗派를 막론하고 宗義를 論하는 데는 반드시 그 所依로 하는 經論이 있다. 이제 本宗의 敎義는 불교 가운데 어느 經論을 의지하는가? 慈恩大師는 成唯識論의 述記識本(二丁右)에 本論 所依 經論을 해석하여 六經十一論을 들었다.

大經이란

(一) 華嚴經. 여기에 三譯이 있으니 一은 東晋의 覺賢三藏의 譯 60卷, 二는 唐의 實叉難陀의 譯 八十卷, 三은 唐의 般若三藏의 譯 四十卷이다. 보통 이것을 六十華嚴, 八十華嚴, 四十華嚴이라 한다.

(二) 解深密經. 唐의 玄 三藏의 譯 五卷이 있다. 魏의 菩提流支譯의 「深密解脫經」五卷. 眞諦三藏譯의 「佛說解節經」一卷(前五品의 異譯)  求那拔陀羅譯의 「相續解脫經」一卷(後二品의 異譯)은 곧 本經의 異譯이다.

(三)如來出現功德藏嚴經. 아직 漢譯되지 않았다.

(四) 阿毘達磨經. 앞의 것과 같이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경이다.

 

(五) 入楞伽經. 十卷이 있다. 魏의 菩提流支 譯. 그밖에 異譯二本이 있는데 求那跋陀羅譯의 「楞伽阿跋多羅寶經」四卷과 實叉難陀譯의 「大乘入楞伽經」 七卷이다.

(六) 厚嚴經. 번역되지 않은 경이다. 地婆伽羅譯의 「大乘密嚴經」三卷과 同本이다.

다음에 十一論이란

(一) 瑜伽師地論 百卷, 彌勒說 玄 譯

(二) 顯揚聖敎論 二十卷, 無着造 玄 譯

(三) 大乘莊嚴經論 十三卷, 本頌 彌勒說 釋論 世親造 波羅頗密多羅譯

(四) 集量論 四卷, 陳那造 眞諦譯

(五) 攝大乘論 本論 三卷 無著造 釋論 各十卷 世親, 無性造 玄 譯

(六) 十地經論 十二卷, 世親造 菩提流支譯

(七) 分別瑜伽論, 彌勒說 번역없음.

(八) 觀所緣緣論 一卷, 陳那造 玄 譯

(九) 二十唯識論 一卷, 世親造 玄 譯 異譯에 菩提流支譯의 大乘楞伽唯識論 一卷 과 眞諦譯의 大乘唯識論 一卷 이 있다.

(十) 辨中邊論 三卷, 本頌 彌勒說 釋論 世親造 玄 譯 異譯에 眞諦譯의 中邊分別論 二卷이 있다.

(十一) 阿毘達磨集論 十卷, 本論 無著造 釋論 師子覺造 玄 譯 이상의 六經, 十一論은「成唯識論」을 註釋한 慈恩의 「唯識述記」卷 一本에

「今此論(成唯識論) 爰引六經 所謂華嚴 深密 如來出現功德藏嚴. 阿毘達磨. 楞伽. 厚嚴 十一部論, 瑜伽. 顯揚. 莊嚴. 集量. 攝論. 十地. 分別瑜伽. 觀所緣緣. 二十唯識. 辨中邊. 集論等爲證」이라고 한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밖에도 다시 唯識學說에 관계되는 論典이 있으니, 五部大論과 十支論 등을 들 수 있다. 五部大論이란 彌勒이 阿踰陀의 강당에서 廣說한 것이며 十支論이란 「瑜伽論」의 支分으로서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了義燈」卷一本에 열거되어 있다.

위에서 열거한 六經. 十二論中「解深密經」과「瑜伽師地論」을 唯識宗義의 正所依로 하여 「成唯識論」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 「成唯識論」이야말로 「三十」의 本頌을 해설한 유일한 論典으로 실로「唯識三十頌」의 연구에 필요불가결한 권위서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3. 諸家의 唯識硏究

 

 唯識三十頌은 너무나 간결해서 長行釋이 없이는 일반인이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매우 곤란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世親은 그 長行釋의 저작을 하지 못한 채 阿踰 國에서 入寂하고 말았다. 世親이 입적한 후 인도불교학계에서는 이 간단한 唯識三十頌의 硏究熱이 굉장하였던 모양으로 惟白의 「大藏經綱目指要錄」卷五에

「天親菩薩 將入滅時 作三十頌 後二十八家 解其義 又復十六家 皆不能盡其微意 護法菩薩 安慧等大師 解成一百卷」11)이라고 있는 바와 같이, 이에 대한 註釋書를 저작한 저명인 二十八家 및 十六家가 나왔으며 그 중에서도 이에 투철한 자에 이른바 十大論師12)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들 十大論師가 각각 註釋十卷씩을 저작하였는 바 통합하면 百餘卷이다. 이제 그 十大論師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親勝(Bandhusri)

世親과 동시대인으로 교묘하게 작자의 眞意를 파악하여 최초로 「唯識三十頌」에 대한 註釋書를 저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2)火變(Citrabhana)

世親과 동시대의 論師로 비록 속인이었지만 道義에 있어서는 오히려 승려보다도 뛰어났고 文辭에 능한 저명한 註釋家였다고 한다.

(3)德慧(Gunamati)

남인도 鉢代多의 사람으로서 安慧論師의 스승이며 三藏에 통달, 四諦를 연구하였다. 일찍이 摩 陀國에서 數論外道 摩沓婆를 설복하여 그 명성이 인도 천지에 널리 떨쳤고 그 저서로는 眞諦 譯의「隨相論」一卷이 현존하고 있다.

(4)安慧(Sthiramati)

護法과 동시대의 先德으로 德慧論師의 제자다. 남이도의 경계인 羅羅國(Lala)에서 출생, 출중한 학덕으로 唯識과 因明에 정통하였고, 또한 「俱舍」의 釋論을 지어 衆賢의 「順正理論」을 破하였다고 한다. 그의 저서로 현존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大乘阿毘達磨雜集論 十六卷    唐 玄 譯

大乘廣五蘊論 一卷            唐 地婆伽羅譯

大乘中觀釋論 九卷            宋 惟淨等譯

그는 唯識學에 대해서 護法과 견해의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心分說에 있어서도 護法의 四分說에 반하여 一分說을 세웠다. 그래서 護法正義派에서 그의 一派를 異解者로 취급하였다.

(5)難陀(Nanda)

安慧論師와 동시대인으로 勝軍論師의 스승이다. 그는 특히 唯識學說 가운데 心分說에 있어서는 二分說을 주장하였고 種子說에 관해서는 新熏說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6)淨月(Sudhacandra)

安慧論師와 동시대인으로서 心分說에 대해서는 難陀論師와 같이 二分說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7)護法(Dharmapala)

남인도의 경계인 達羅毘茶國 建至城의 사람으로 世親보다 약 백년 후에 출생하였다. 그는 겨우 32歲의 연소한 나이였으나 해박한 지식으로 당시 敎界의 第一人者였었던 모양이고, 특히 唯識學의 권위자로 摩 陀國 那爛陀寺에 주하면서 玄 三藏의 스승인 戒賢論師를 비롯한 수천의 學徒를 이끌었다. 그의 唯識사상은 唯識제파의 異說을 절충 종합해서 種子론에 있어서도 新舊合成說을 주장하고 心分說에 있어서도 四分說을 세우는 등 諸說을 集成하여 精微한 阿賴耶緣起論을 창도하였다. 그는 印度 唯識學의 完成者라 할 수 있으며 현전하는 唯識學說은 주로 이 護法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이와 같이 호법은 十大論師中에서도 가장 출중하였으며 중국의 法相宗에서는 唯識宗을 護

 

法正義라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智德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저서로 현전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成唯識寶生論   五卷      唐 義淨譯

觀所緣論釋     一卷      唐 義淨譯

成唯識論    十卷         唐 玄 譯

(8)勝友(Visesamitra)

梵語로 毘世沙蜜多羅라고 하며 護法論師의 문인이다.

(9)最勝子(Jinaputra)

護法論師의 문인으로 그의 저술로는 瑜伽師地論釋 一卷 唐 玄 譯이 현전하고 있다.

(10)智月(Tnanacandra)

이도 또한 護法論師의 문인이다.

이상 十大論師 외에도 唯識學匠으로서 無性 護月 陳那 戒賢 등의 쟁쟁한 諸論師가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無性은 그에 대한 전기가 미상하나 世親보다는 다소 후대인으로 짐작 되는 論師로, 無着의 저서인「攝大乘論」에 註釋書를 저작하니 이는 世親의 「攝大乘論釋論」十卷과 아울러 攝大乘論 연구에는 不可缺의 자료인 동시에 이 저술에 의해 無性의 唯識學에 대한 견해를 찾아볼 수 있다.

그 다음에 護月(Candrapala)은 護法과 동시대인으로 唯識學說中 특히 種子論에는 本有說을 주장하고, 五性各別說을 주장하였다.

다음에 陳那論師는 그 전기가 미상하나 唯識學과 因明學에 있어 특히 유명한 論師이다.  그의 저서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현전하고 있다.

集量論四十卷        陳 眞諦譯(不傳)

觀所緣緣論一卷      唐 玄 譯

因明正理門論本一卷  唐 玄 譯

因明正理門論一卷    唐 義淨譯

掌中論一卷          唐 義淨譯

無明思塵論一卷      唐 眞諦譯

그 중 集量論과 觀所緣緣論은 唯識所依 十一論中에 포함된다. 그의 唯識學說中 특히 유명한 것은 心分說에 있어 三分說을 주장한 점이다. 그리고 因明에 있어서는 舊因明에서 宗, 因, 喩, 合, 結의 五毁論法이었던 것을 宗, 因, 喩의 三毁論法으로 改新하였다.

그 다음에 戒賢( ilabhadra)은 저서의 전래와 學說의 특이함은 없으나 那爛陀寺 護法門下의 英才로 護法의 학설을 그대로 중국의 玄 三藏에 게 전수한 점에서 唯識學上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玄 三藏이 인도에 갔을 당시는 106歲의 高齡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戒賢論師의 事蹟은「大唐西域記」에 상세하게 나온다.

이상과 같이 唯識三十頌이 일차로 세상에 발표되자 당시 인도의 高僧名士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서 그것을 연구하고 註釋書를 저작하여 世親이 入滅한 후로부터 護法 戒賢論師에 이르기까지 약 百餘年間 실로 불교학계는 唯識佛敎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인도의 唯識學은 戒賢으로써 최후를 장식하고 그 다음은 玄 三藏의 인도 방문을 계기로 唯識學이 중국에 移植된 이래 한국과 일본등지에 전래하여 발달하게 되었다.

玄 三藏에 의하여 중국에 移植된 唯識學은 慈因大師에 의해서 더욱 체계화하여 크게 선양되어 中國 法相宗을 開宗하는데 이르렀다. 중국에 있어서 가장 권위있는 唯識에 관한 主

 

要著書를 들면 다음과 같다.

成唯識論述記 二十卷           唐 窺基撰

成唯識論掌中樞要 四卷         唐 窺基撰

成唯識論了義燈 十三卷         唐 慧沼撰

成唯識論演秘 十四卷           唐 智周撰

이들 四書中 前一은 成唯識論의 根本註疏로서 本論硏究에 가장 指南이 되는 저서이며 後三은 「唯識三箇疏」라 할 만큼 앞의「述記」와 함께 唯識學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  不可缺의 要書이다.

이상에서 「唯識三十頌」을 중심으로 한 인도와 중국의 唯識學傳承의 대략을 밝혔거니와 우리나라 스님으로는 신라의 圓測(613∼696)이 唐나라의 西明寺에서 唯識學의 선양에 힘썼다. 圓測은 신하의 왕족으로 성품이 총명하여 數千萬言이라도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을 정도로 명석하였다. 玄 이 窺基를 위하여 唯識을 강할 때에 圓測은 몸을 숨기고 몰래들었다. 玄 이 강의를 마칠 무렵에 스님은 벌써 西明寺에서 窺基보다도 먼저 唯識을 강하였고, 玄 이 窺基에게 瑜伽論을 강할 때에도 또한 그와 같이하여 西明寺의 大德이 되어「唯識論疏」를 지어 窺基의 「唯識述記」를 반박하였다. 慈恩(窺基)大師가 護法의 계통을 계승한데 반하여 圓測은 安慧論師의 계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므로 慈恩의 계통에서는 圓測을 異解者로 취급하였다.

圓測의 唯識思想은 그 제자 道證에 의해 계승되었고, 道證은 「唯識論要集」六卷을 지어 圓測의 唯識學을 선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圓測, 道證의 一派에 대해서 駁論을 제기한 자가 있었으니 慈恩大師의 제자인 淄州大雲寺의 慧沼大師다. 애석하게도 圓測은 본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佛授記寺에서 入寂하니 세수는 84세였다. 지금도 중국 興敎寺(大華嚴寺)에는 玄 의 塔 좌우에 首弟子인 圓測의 妙塔이 현전하고 있다.

저서에는

成唯識論疏 10卷           仁王經疏 3卷

成唯識論別章 3卷          金剛般若經疏

二十唯識論疏 2卷          般若心經讚

成唯識廣                 無量義經疏

瑜伽論疏                  俱舍論論釋頌

觀所緣緣論疏              解深密經疏 10卷

阿彌陀經疏 1卷            金剛般若論

등이 있는데, 唯識學에 관한 저술로서 현전한 것은 「解深密經疏」 10卷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신라시대 이후 고려, 조선시대 천여년 간에는 唯識學의 연구가 소외되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세에 와서 唯識學의 泰斗로서 金東華 박사, 直指寺의 祖室인 觀應스님, 東鶴寺의 講伯으로 계시던 湖鏡스님 등을 들 수 있다.

本論文이 敎史論文이 아니 敎義論文이므로 전래에 관한 것은 생략하고, 다음 본론으로 나아가 논술하고자 한다.

 

本 論

 

Ⅰ. 緖說

 

唯識學에서는 三界唯一心 心外無別法이라는 견지에서 一切萬有의 현상은 모두 우리들 각자의 阿賴耶識으로부터 變現된 영상에 불과하다고 설한다. 이러한 의미를 世親의 저술이 「唯識三十頌」의 벽두에「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彼依識所變」13)이라고 하였다. 우리들 범부는 무시이래로 迷情의 소견으로 망녕되이 마음밖에 實境이 있다고 집착해서 實我實見의 妄見을 품고 생사에 유전하는 과보를 받는다. 그러므로 二執을 버리고 二空에 돌아가면 法界의 眞性을 체달해서 涅槃, 菩提의 妙境界를 증득하는 것이다. 이 義路를 밝힌 것이 즉 唯識三十頌의 始終이다.

대개 불교의 諸經論은 모두 科節을 三分하니 소위 序分, 正宗分, 流通分이다. 初 序分은 經論이 일어나게 된 由緖를 밝힌 부분이요, 다음 正宗分은 밝힌 바 實義를 술한 것이요, 流通分은 宗義를 후세에 流布弘通함을 권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唯識三十頌에는 序分과 流通分이 없다. 왜냐하면 이 三十頌은 世親보살의 최후의 저작으로 미처 長行釋을 하지 못하고 入滅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護法 등의 諸經師가 이 頌을 해석할때에 門前에 「稽首唯識性 滿分淸淨者 我今釋彼說 利樂諸有情」의 一頌과 後에 「己依聖敎及正理 分別唯識性相義 所獲功德施群生 願共速證無上覺」의 一頌을 붙인 것이다. 이제 流行하는 三十頌本에는 이 二頌을 三十頌 前後에 列記해서 보통 三毁의 조직을 모방하였다. 그 初後의 序分과 流通分은 「成唯識論」에만 있고 本頌에는 없던 것이다.

三十箇의 本頌은 正宗分으로서 三種의 三科를 세웠으니 즉 一은 相.性.位의 三毁이요 二는 初. 中 .後의 三毁이요 三은 境·行·果의 三毁이다. 이상 三宗의 三科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略標(初一頌半)        初 分 ―

        ― 明唯識相(前二十四頌)                               ― 明唯識境(初二十五頌)

                                廣釋(次二十二頌半) ― 中 分 ―

三十頌ㅡ   明唯識性(第二十五頌)                               ― 明唯識行(次四頌)

        ― 明唯識位(後五頌)                           後 分 ―  

                                                              ― 明唯識果(後一頌)

 

그 중 가장 잘 사용하고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分科는 相·性·位의 三科이다. 즉 三十頌 中 前二十四頌은 唯識의 唯識의 相을 밝혔고, 그 다음 第二十五頌의 一頌은 唯識의 性을 밝혔으며, 後의 五頌은 唯識의 位를 밝혔다. 唯識三十頌의 강요를 보다 상세하게 표하는 分科를 들면 별면의 도표와 같다.

(이 分科는「成論」解釋의 권위인 「述記」에 밝힌 바에 의거한 것이다)

圓本에서 밝힌 相·性·位의 三分中 性과 位는 本論文中에서 취급하지 않겠으므로 이를 생략하고 唯識相만을 문제삼고자 한다. 唯識相을 밝히는데 三宗의 能變이 있으니 이른바 初能變, 二能變, 三能變이다. 初能變은 第八阿賴耶識을 가리키고 第二能變은 第七末那識을 가리키며, 第三能變은 眼識乃至意識의 六識을 가리킨다. 우선 三能變中 특히 初能變 즉 第八阿賴耶識의 相狀을 十毁으로 밝히고자 하는 바 三十頌中 二頌半을 취급하게 된다. 그 二頌半은

初阿賴耶識 異熟一切種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恒轉如暴流

阿羅漢位捨14)

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Ⅱ. 諸識轉變의 意義

 

阿賴緣起說에 의하면 有情과 無情 등 일체의 현상은 모두 우리들 각자의 阿賴耶識으로부터 變現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一切萬法을 능히 變現하는 識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이에 대하여 「三十頌」에

「此能變唯三 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15)

이라고 한 것이 즉 能變의 識體를 가리킨 것이다. 만약 이 能變의 識體를 類別한다면 異熟識과 思量識과 了別境識의 三種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그 실인즉 能變의 識體는 八種이 있다. 世親의 著인 「大乘百法明門論」에

「心法略有八種 一眼識 二耳識 三鼻識 四舌識 五身識 六意識 七末耶識 八阿賴耶識」

이라고 하였으니, 앞에서 말한「異熟」이 여기에서 말하는 阿賴耶識이요 또「思量」은 末耶識이며「了別境識」은 眼·耳등의 六識을 가리킨 것이다. 이들 八種識體를 初能變, 第二能變 및 第三能變의 三種으로 類攝해서 차례로 異熟識 思量識 및 了別境識이라 이름한다.

 了別境識에서 眼識은 靑·黃 등의 顯色과 長·短 등의 形色을 식별하고 耳識은 聲境, 鼻識은 香境, 舌識은 味境, 身識은 觸境 등을 각각 識別하는 것으로 이상의 五種識은 外境만을 그 대상으로 하여 감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意識은 밖으로는 見聞覺知한 모든 사실을 緣慮하고 안으로는 有形無形有事無事過現未三世에 걸쳐 일체의 사물을 緣慮한다. 그래서 이것을 일러서 頓緣十八界 廣緣之意識이라 한다. 이상의 六識은 그 所緣의 대상은 각각 다르나 그 인식의 작용은 대개 동일하다. 즉 각각 외부 혹은 내부의 대상이 있어 그 대상만을 了別 즉 인식하므로 이를 了別境識이라고 한다.

末那(Manas)는 意라고 번역되는데 명칭상으로는 前의 意識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전자와 구별하기 위해서 이것을 원어 그대로 末那라고 한다. 만약 그 실체의 차이점을 말한다면 전자는「意의 識」이요 후자는「意卽識」이다.「意의 識」이라 함은 「末那識에 의지하는 識」이라는 뜻이고 「意卽識」이라 함은 그 識 자체가 독립적임을 의미한 것으로 즉 第七識은 항상 思量하는 것이 그 특성이다. 무엇을 사량하느냐 하면 우리들 내부적인 心識을 향하여 항상 第八識만을 대상으로 해서 이것이야말로 我의 주체라고 思慮量度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阿賴耶(Alaya)라 한 것은 藏이라 번역하며 舊譯에서는 無沒이라고도 한다. 藏이라 함은 含藏의 뜻으로 우리들이 이 현실계에서 見聞覺知하고 또 思量分別하는 등 一切善惡의 種子를 이 阿黎耶識내에 모두 含藏해 있다는 것이다.

이 八識中에서 第八阿賴耶識과 七轉識은 서로 因이 되고 果가 되어 諸法變現의 활동을 계속한다.

즉 第八識은 七轉識이 熏習하는 모든 種子를 攝受包藏해서 하나도 상실하지 않고 유지상속시켜 이로써 一切諸法의 親因緣이 되게 한다. 그리고 七轉識은 諸法의 種子를 熏附하는 동시에 또 諸法實現의 增上緣이 되어 만약 變現하고 因緣이 성취하게 되면 그것을 變現케한

 

다.

第八識은 비록 아무리 諸法을 變現할 親因緣인 種子를 保存하고 있다할지라도 諸法을 變現할 增上緣인 七轉識의 熏習力을 받지 않는다면, 마치 地面에 種子(第八識中의 諸法의 親因緣인 種子)를 뿌렸다 할지라도 태양의 빛과 열, 습기, 공기등의 助力(增上緣)을 얻지 못하면 싹을 틔우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第八識이 근원이 되고 我의 주체가 되어 一切萬法을 變現한다. 그리고 第八識은 能變의 근본이므로 本識이라 하고, 前七識은 轉易 間斷 등이 있으므로 轉識이라 한다. 이상에서 말한 八識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眼識 ―

        耳識

        鼻識                前五識 ―

識 ―   舌識

        身識 ―                                 了別境識(第三能變) ―

        意識                第六識 ―                                  轉識

        末那識              第七識              思 量 識(第二能變) ―      

     ― 阿賴耶識            第八識              異 熟 識(第一能變)      本識

 

Ⅲ. 三能變識의 略說

 

識이 外境을 轉變하였다는 의미는 이상에서 말한 것과 같거니와, 그러면 그 識은 과연 어떠한 것이 있는가? 外境은 識의 所變現이요 識은 外境을 轉變하는 能轉變으로서 이 能轉變識에 八種이 있으니 즉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 末那識 및 阿賴耶識이다.

이 三能變의 순서는 八識의 순서와는 반대로 初能變은 第八阿賴耶識을 가리키고, 第二能變은 第七末那識을 가리키며, 第三能變은 眼識乃至意識의  六識을 가리킨다. 다만 識體를 부를 때는 有部의 순서와 같이 眼識 乃至 阿賴耶識으로 점차  로부터 細에 이르는 순서를 취하나, 能變을 부를 때는 第八識이 근본이기 때문에 第八識을 初能變으로 하고 다음에 第七識을 第二能變 前六識을 第三能變으로 따지게 된다.

이와 같이 能變의 識은 그 體에 나아가서 眼識 乃至 阿賴耶識의 八種이 있고 그 類에 나아가서 異熟, 思量 및 了別境의 三種이 있다. 「述記」卷一에 上偈本頌의 「此能變唯三」의 唯字를 해석함에

 「唯言顯其二義 一. 簡別義 遮虛妄執顯但有識無心外境 二. 決定義 離增咸數略唯決定有此      三故廣決定有八種識故……」16)

라고 한 것과 같이 이 의의가 확고하고 결정해서 차이가 없다.

初能變의 識相을 나타내는데 本頌에서는 十義로 하고, 本論에서는 八毁으로 구별하여 해석한다. 本論文에는 本頌에 의거하여 十義로서 상술하고자 한다.

第二能變은 本頌에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라고 한 것과 같이 第七末那識이 第二能變의 識이다. 末那는 梵語(Manas)의 音表로서 意라고 번역한다. 意에는 依止와 思量의 二義가 있는데, 第七識은 思量의 뜻을 취하고 依止의 뜻을 취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識을 思量能變의 識이라고 한다. 思量이란 思慮量度의 뜻으로 第七識이 항상 第八識의 見分을 我라고 思

 

慮量度함을 말한다.

그리고 이 識을 意識이라 이름할 수 있으나 第六識과 혼돈할 폐단을 피하기 위해 諸經論에 第七識을 다만 意라고 하고 第六識을 意識이라 구별한다. 그리고 思量은 心과 心形의 境을 緣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널리 諸識에 통해서 이름할 수 있으나 다만 第七識만을 思量이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思量에는 恒과 審의 二儀가 있는데, 이 識이 恒審思量의 義가 다른 識보다 수승하기 때문에 특히 이 識을 思量이라고 한 것이다. 恒이란 끊임없이 상속함을 나타내며 審이란 有分別을 나타낸다. 第八識 은 끊임없이 상속해서 恒의 義를 갖추었으나 任運無分別해서 審의 義를 缺했으며 第六識은 計度分別해서 審의 뜻을 갖추었으나 끊임이있어 상속하지 않으므로 恒의 뜻을 缺했고 前五識은 相續하지도 않고 計度도 하지 않으므로 恒, 審을 함께 缺하였다.

그러나 第七識만은 無始로부터 항상 상속, 간단없이 第八識의 見分을 緣해서 분명하게 我라고 計度하므로 恒, 審의 二儀를 갖추었다. 따라서 諸識에 통하는 思量의 이름을 第七識만이 가지고 있으니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具一         第八識 ―

             ―  恒  

                           具二         第七識

       

  意=思量 ―                                              八識

                           具一         第六識

             ―  審

                           具缺         前五識 ―

 

第三能變은 本頌에 「次第三能變  差別有六種」이라고 있는 바와 같이 六種의 차별이 있으니 즉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이다. 이 六識은 모두 다  는 모두 顯의 境을 구별하는 識으로서 합하여 了別境이라고 한다. 本論 卷二에

「三謂了境 卽前六識 了境相 故」17)라 하였고 「述記」第二末에

「以前六識 同了 境 異七八故 含爲一名」18)이라 한 것과 같이 了別이란 所對의 境을 詮辨하는 識의 작용으로 이도 또한 諸識에 통하여 이름 할 수 있다. 특히 前六識에 국한해서 이름하는 것은 前六識이  了別로  顯의 境을 了別하므로 따라서 行相도 또한  한 것이 餘識(七. 八二識)의 細了別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了別에 국한한 前六識에만 특히 이 了別의 이름을 붙이고 細了別인 七·八 二識에는 붙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細了別은 그 義가 隱微해서 현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말한 三能變中 우선 가장 중요하며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初能變識을 살펴보고자 한다.

 

Ⅳ. 初能變識에 關하여

 

앞에서 三能變의 名義를 약술하였으므로 최초의 初能變 즉 第八阿賴耶識의 相狀을 말하고자 한다. 初能變의 識相을 표시하는데 本頌에서는 十門으로서 하고 本論에서는 이것을 八段으로 나누어 해석하였으니 소위 八段十義라고 칭하는 것이 그것이다.「述記」二末에

「三師俱云 初二行頌半 解初能變中 本頌以十門解釋.  一, 自相謂初阿賴耶識  二, 果相謂異熟

 三, 因相謂一切種  四, 所緣謂執受處  五, 行相謂了 不可知者 卽於所緣行相之內差別之義 旣  

 

 無 別用故非別門 若別開者束五受門 相應中攝俱心所故 六, 相應謂常與觸作意受想思相應     七, 五受謂相應唯捨受一相應言 通二處也  八, 三性謂是無覆無記  九, 因果譬喩謂恒轉如暴流  十, 伏斷謂 次謂阿羅漢位捨」19)

이라고 있는 것이 初能變의 분과이다. 십의라고도 하고 八단이라고도 하나 이는 개합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一, 自  相  門     初阿賴耶識 ―

         二, 果  相  門           異熟                 一, 三  相  門  ―

         三, 因  相  門         一切種 ―

         四, 所  緣  門         執受處 ―

                                         ― 不可知    二, 所緣行相門

         五, 行  相  門             了 ―

十義     六, 相  應  門     常與觸作意受想思相應       三, 心所相應門

         七, 五  受  門     (相應)唯捨受               四, 五受相應門    ― 八段

         八, 三  性  門     是無覆無記                 五, 三性分別門

                            觸等亦如是                六, 心所例同門

         九, 因果譬喩門     恒轉如暴流                 七, 因果譬喩門

         十, 伏斷位次門     阿羅漢位捨                 八, 伏斷位次門  ―

 

  이 八段十義의 科目中 十義에 의해서 初能變의 相狀(三十頌中二頌半)을 해석해 나가려고 한다.

 

1. 自相門

 

  本論 卷 第二에

 「初能變識, 大小乘敎, 名阿賴耶」20)라고 한 것과 같이 第八阿賴耶識이 初能變의 識이다. 그런데 이 阿賴耶를 알려고 하면 반드시 三相에 대해서 서술할 필요가 있다. 즉 三相이란 이 識이 갖추고 있는 三面의 樣相이 있으니 自相 果相 및 因相으로서 本頌에

「初阿賴耶識, 異熟, 一切種」21)이라고 한 것이 순서대로 自相, 果相, 因相을 가르킨 것이다.

(1) 阿賴耶識의 의의

  初阿賴耶識은 이 識의 自相을 이름한 것으로 自相은 곧 阿賴耶의 自體를 나타낸 이름이다. 이 阿賴耶는 laya의 音寫로서 藏이라 번역한다. 舊譯으로는 阿梨耶라고 音表하고 無沒이라 번역한다. 阿를 短音으로 해서 a-laya로 보면 a는 無, Laya는 滅盡 또는 沒失의 뜻이므로 이것을 依處 또는 容器 등의 뜻이 있으므로 이것을 藏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와 같이 阿賴耶와 阿梨耶와는 新舊譯語의 차이가 있으나 阿賴耶는「唯識論」등의 法相宗系의 書에서 쓰이고 阿梨耶는 「起信論」등의 法性宗系의 書에서 쓰인다. 그리하여 이 兩語가 교리상 다른 해석이 있는 것처럼 되었다. 여하간 이제 新譯의 阿賴耶는 藏의 뜻으로 해석한다. 藏이란 藏攝, 包藏, 含藏, 攝持, 包攝 등의 의미다. 이 藏에 三義가 있으니 즉 能藏, 所藏 및 執藏이다.

 

 

(2)阿賴耶의 三藏義

  本論 卷二에

 「謂與雜染互爲緣故 有情執爲自內我故」22)

라고 하였고 「同學 」卷二之三에

 「受熏之邊是所藏義也 持種邊是能藏也 我愛緣執是執藏義也」

라고 한 것이 이 三藏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一. 能藏이란 持種의 뜻으로 능히 一切雜染法의 種子를 이 第八識中에 包藏해서 잃지 않는 것이 마치 창고에 여러 가지 물건을 수용하는 것과 같다. 雜染法이란 有漏의 諸法을 가리킨다.(雜의 字를 제하고 다만 染法이라 말할 때는 不善 및 有覆無記에 한하고 有漏善 및 無覆無記를 포함하지 않는다.)

  이때에 能藏의 第八識과 所藏의 種子를 相望해서 이름한 것으로 種子는 所藏이고 第八識은 能藏이다. 이 種子는 阿賴耶識중의 세력으로 一切雜染法의 因이 되므로 攝用歸體해서 阿賴耶識이 雜染法을 위해서 因이 된다고 할 수 있다.

  二. 所藏이란 受熏의 뜻으로 이 阿賴耶識이 一切雜染法(七轉識)의 所熏所依가 되는 것이 마치 창고가 여러 가지 물건의 의지처가 되는 것과 같다. 이때는 第八識의 現行과 七轉識이 相望해서 이름한 것으로 七轉識은 能熏으로서 能藏이고 第八識은 所熏으로서 所藏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는 雜染法이 因이 되고 阿賴耶識이 果가 된다.

  이 관계는 또 現行의 雜染法과 第八識中의 種子와의 因果에 연결이 된다. 種子를 因으로 하고 現行을 果로 하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지만, 이 種子는 반드시 現行에 의해서 熏起하게 되므로 이 義邊에 있어서는 現行이 因이 되고 種子가 果가 된다. 이 種子現行의 관계를 種子生現行, 現行熏種子, 三法展轉因果同時라고 한다. 이 現行熏種子의 관계에서 본다면 阿賴耶識은 所熏所依가 되고 雜染法은 能熏能依가 된다. 그리고 雜染法에 의해서 熏付된 種子는 곧 第八識의 세력이므로 雜染法은 因이 되고 第八識은 果가 된다. 이 관계에 있어서 雜染法을 能藏으로 하고 第八識을 所藏으로 한다.

  三. 執藏이란 所執의 뜻으로 이 阿賴耶識은 본래 無執의 뜻을 가지고 있으나 끊임없이 항상 상속하는 第七識이 第八識의 見分을 實我라고 그릇 執着하는 것이 마치 창고가 굳게 소유자에 의해 관리되는 것과 같다. 이때에 第七識과 第八識이 相望해서 세운 명목으로 第七識은 能執이 되고 第八識은 所執이 된다.

  이상 三藏의 해석은 모두 有漏雜染法의 관계에 의해서 시설된 것이다. 왜냐하면 第八識은 다만 有漏位에만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無漏位에도 통하는 것이지만, 阿賴耶의 이름은 菩薩의 행위인 第七地에 이르기까지만 있고 第八地 이상에는 阿賴耶識의 명칭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三藏 중 최후의 執藏의 뜻을 취해서 이 識을 藏 즉 阿賴耶識이라고 한다.

  이상에서 말한 三藏의 관계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能藏(特種)                      第八識

        ― 能藏 ―

                  ― (所藏                           種  子)

                  ― (能藏                           七轉識)

 三藏 ―   所藏 ―

                  ― 所藏(受熏)                      第八識  

                  ― (能執藏                         第七識)

        ― 執藏 ―

                  ― 所執藏(我愛執藏)                 第八識

 

  이와 같이 三藏의 뜻이 있으나 第八識의 自相은 執藏이다. 그런데 第八識은 修行하여 煩惱가 없어짐에 따라 그 識名이 我愛執藏現行位와 善惡業果位와 相續執持位의 三位로 달라지는 바 이것은 凡夫로부터 佛陀에 이르기까지의 修行하는 因位이다.

  一. 我愛執藏位는 菩薩의 七地以前23)까지 만약 二乘이면 有學의 聖者24) 및 一切異生으로 第七識의 我執이 現行하는 기간을 말한다(自相에 해당함). 이 位에서는 이 識을 阿賴耶라고 이름하나 즉 執藏의 뜻이다. 菩薩의 第八地 이상 또는 二乘의 無學들은 第七識의 我執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이름이 없다. 즉 我執이 現行하는 位에 한해서 第八識을 阿賴耶하고 한다.

  二. 善惡業果位는 菩薩의 最後心 즉 金剛心의 菩薩까지이며, 만약 二乘이면 無學果의 聖者까지와 一切異生의 善惡果의 果報로서의 第八識이 상속하는 기간을 말한다(果相에 해당함). 이 位에서는 第八識을 毘播迦(Vipaka)라고 이름한다. 毘播迦는 異熟이라 번역하니 異熟이란 業果를 이름한 것이다. 이미 佛果에 이르면 이 識이 순전히 善無漏法만 남게 되고 業으로 감득한 것은 없어지므로 異熟識의 명칭은 없어지게 된다.

  三. 相續執持位는 一切의 異生 및 佛菩薩의 지위에 이르기까지의 미래제가 다하도록 第八識中에 種子를 執受任持해서 失壞치 않고 상속하는 位를 말한다(因相에 해당함). 因位에 있어서는 漏無漏의 種子를 執持하고 果位에 있어서는 無漏의 種子만을 執持한다. 이 位에서는 이 識을 阿陀那( d na)라고 이름하며 執持라고 번역한다.

  대개 第八識에는 自相, 果相, 因相의 三面이 있는데, 차례와 같이 自相은 我愛執藏位에 해당하고, 果相은 善惡業果位에 해당하며, 因相은 相續執持位에 해당한다.

  이상을 종합하여 보면 凡夫로부터 第七地 이전과 二乘의 有學까지는 阿賴耶識과 異熟識과 阿陀那識 등 三名을 갖추고, 第八地로부터 二乘의 無學까지는 阿賴耶識을 제외한 異熟識과 阿陀那識의 二名만 소유하고, 第十地로부터 佛果位까지는 阿陀那識 一名만을 가지게 된다. 三位의 寬狹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我愛執藏位 (從無始菩薩七地                   阿賴耶(執藏) ―

                       以前及二乘有學)

 三位 ―   善惡業果位 (從無始菩薩金剛                   毘播迦(異熟)   ― 三名

                       心及二乘無學)

        ― 相續執持位 (從無始佛果盡                     阿陀那(執持) ―

                       未來際)

 

  그러면 어찌하여 이 세 가지 異名中에서 阿賴耶識이 第八識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는가를 살펴본다면, 「成唯識論」에

 「此識自相 分位雖多 藏識過重 是故偏說」25)

이라고 한 바와 같이, 阿賴耶識이 初位의 이름이 되는 동시에 我愛執藏의 과실이 가장 과중하므로 수도를 목적으로 한 종교의 세계에서 중생들에게 業果의 과중함을 인식시켜 我愛執藏의 無明業障을 끊고 究竟涅槃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2. 果相門

 

  異熟이란 毘播迦(Vipaka)를 번역한 것으로 第八識의 異相을 나타낸 이름이다. 이는 梵語 毘播迦를 번역해서 異熟이라고 하는 뜻에 대하여 「述記」卷 一本에 三釋을 들고 있다.

「謂異熟識卽第八識名有多義 一. 變異而熟要因變異之時果方熟故此義通餘種生果時皆變異故     二. 異時而熟 與因異時果方熟故今者大乘約造之時 非約種體許同世故 三. 異類而熟 與因異性    果酬因故……」26)

라고 한 바와 같이 異熟에 變異而熟과 異時而熟과 異類而熟의 三種이 있다.

  一. 變異而熟의 뜻은 반드시 因이 變異할 때에 果가 바야흐로 성숙함을 말한다. 즉 因이 그대로 果가 되는 것이 아니라 變異한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만 이 뜻은 반드시 異熟果(第八識)에만 한하는 것이 아니라 種子로부터 現行을 할 때는 다 異熟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때에 果와 因은 반드시 다소의 變異가 있기 때문이다.

  二. 異時而熟의 뜻은 因과 時를 달리 해서 果가 바야흐로 성숙함을 말한다. 예를 들면, 금세에 業을 지어서 내세에 果를 받는 것과 같은 것을 가르킨 것이다.

  三. 異類而熟의 뜻은 果가 因과 그 性類를 달리 해서 성숙함을 말한다. 性類란 善, 惡, 無記 三性으로 異熟은 善 또는 惡의 業을 因으로 해서 감득하여진 것으로 果는 반드시 無記라는 것, 즉 因是善惡果是無記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三義中 여기에서 말하는 異熟은 第三異類而熟의 뜻을 취한 것이다. 왜냐하면 本論 卷二에 異熟을 가리켜 「果異因故」라고 한 것을 보면 異類而熟의 뜻이 이 문장에 잘 계합하기 때문이다.

  이 異熟에 眞異熟과 異熟生의 二種이 있는데, 眞異熟이란 有情總報의 果體인 第八識을 가리키는 것이요, 異熟生이란 이 第八識으로부터 생긴 異熟果인 貴賤, 苦樂, 賢愚, 美醜 등 즉 別報를 가리킨다. 眞異熟을 감득하는 業을 引業이라 하고 異熟生을 감득하는 業을 滿業이라 한다.

  「樞要」卷上末에 의하면 「眞異熟具三義  一. 業果  二. 不斷  三. 遍三界」라고 하여 眞異熟의 내용을 설명하였다. 이중의 業果란 善惡業因에 의해서 招感된 異熟無記의 總報의 果體를 말한다. 만약 果體가 善할 때에는 항상 樂果만을 받아서 설사 惡을 지을지라도 苦果를 招感하지 않게 되며, 따라서 길이 유전침몰할 일이 없을 것이다. 만약 果體가 惡할 때에는 항상 苦果만을 받고 설사 善을 지을지라도 樂果를 감득하는 일이 없게 된다. 따라서 길이 還滅證悟할 수가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이 修行을 쌓아 革凡成聖하는 수행도 필요없게 되고 따라서 종교의 가치성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總報는 반드시 業果의 異熟無記가 아니면 안된다. 不斷이란 끊임없이 항상 상속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總報의 果體에 끊임이 있어 상속하지 않는다면 有情의 뜻을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總報는 반드시 不斷相續함을 요하게 된다.

  다음 遍三界란 欲界, 色界, 無色界에 두루해서 어디서나 業力에 따라 引生할 수 있음을 말한다. 만약 總報의 果體가 三界에 두루하지 않는다면 혹 어떤 界에는 果體가 없게 되어서 有情의 뜻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總報의 果體는 반드시 三界에 두루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상의 三義는 第八識을 제외하고는 다른 七轉識은 갖추고 있지 않는다. 즉 第七識은 不斷과 遍三界의 二義는 갖추었으나 業果의 뜻을 결하고, 第六識은 業果와 遍三界의 뜻은 갖추고 있으나 不斷義가 없으며, 前五識은 業果의 뜻은 있어도 不斷義와 遍三界의 二義가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第八識은 業果, 不斷, 遍三界의 三義를 갖추고 있으므로 이 識을 眞異熟總報의 果體로 하며, 또한 이를 이 識의 과상으로 한다.

 

3. 因相門

 

  다음에 一切種이란 第八識의 因相을 나타낸 이름이다. 因相이란 이 識이 諸法에 대한 原因이 되는 第八識을 가리킨 것이다. 本論 卷二에

 「此能執持諸法種子 令不失故名一切種」27)

이라고 한 것과 같이, 이 識이 諸法의 種子를 執持해서 잃지 않고 능히 諸法現行의 果를 生할 因, 즉 種子를 가지고 있으므로 因相이라 한다. 즉 앞에서 말한 阿陀那識이 이 因相에 해당한다. 갖추어 말하자면 阿陀那에는 執持, 執受 및 執取의 三義가 있는데, 本論 卷三에

 「以能執持諸法種子及能執受色根依處, 亦能執取, 結生相續故, 說此識名阿陀那」28)

라고 한 것과 같이, 여기에서는 執持를 주로 해서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원래 因相이란 諸法生起의 原因을 가리키므로 第八識 所持의 種子의 功能이라 하겠으나 그것을 攝用歸體해서 現行의 第八識을 一切種識이라 이름하고 이것을 이 識의 因相으로 한 것이다.

 

      (1) 種子論

 

    (ㄱ) 種子의 名義

  앞에서 말한 賴耶三相中 因相門은 法相敎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즉 法相敎義가 阿賴耶緣起說을 주장하는 근거도 바로 이 因相門에 있다. 이는 실로 有爲諸法의 染淨緣起의 근본으로서 저 有漏雜染의 流轉도 無漏淸淨의 還滅도 이에 의해서 생긴다. 阿賴緣起의 이론상 第八阿賴耶識이 가장 중요한 것인 동시에 阿賴耶識의 뜻 가운데 種子說이 또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種子의 뜻을 다시 고찰하여 보고자 한다.

  種子說은 賴耶緣起說의 기초가 되는 실로 중요한 문제의 하나이다. 賴耶緣起라 하면 아무 原因이 없이 阿賴耶識으로부터 一切諸法이 직접 緣起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원래 有因有果의 因果說을 주장하고 無因有果나 有因無果는 인정하지 않는다. 一切諸法이 緣起하는 데는 반드시 緣起할 因을 필요로 하는데, 만약 因이 없다면 그것은 無因有果說이 되므로 佛敎에서는 이러한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賴耶緣起說에서는 緣起하는 一切諸法의 原因을 일러서 種子라 하였다. 이 種子는 阿賴耶識中에 合藏되어 있다가 緣起할 因緣이 성숙되고 기회가 있으면 現象의 諸法으로 緣起한다는 것이다. 種子는 習氣라고도 하는데 우리들의 見聞覺知, 言語行動, 思量分別 등 모든 소행의 薰習氣分 즉 業力을 의미한다.

    (ㄴ) 種子의 六義

 「成唯識論」에 의하면 種子의 성질에 대하여 六義가 있다고 설하였다. 六義라는 것은 刹那滅, 果俱有, 恒隨轉, 性決定, 待衆緣, 引自果 등이니 이 六種의 조건을 구비해야만 비로소 種子의 자격을 갖출 수 있다. 이제 이에 의하여 種子의 의의를 고찰하고자 한다.

  1 刹那滅

  대개 一切有爲의 諸法은 有漏 無漏를 막론하고 모두 刹那에 生하여 刹那에 滅해서 변화함을 말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그 體가 常住不變하는 것이라면 萬有發生의 親因이 될 뜻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生滅變化하는 것은 그 位에 있어서 自體에 能生의 用이 있느면 능히 結果를 낼 수 있으나, 能生의 用이 없으면 結果를 生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뜻

 

은 만유의 原因은 生滅變化하는 有爲法에만 한하고 常住不變하는 無爲法에는 그 뜻이 없다고 하는 것이 唯識의 원칙으로서, 이른바 賴耶緣起說이 眞如緣起說과 相違한 근거를 이루는 것이다. 즉 眞如緣起說에 있어서는 萬有發生의 원인을 無爲의 眞如에 있다고 하는데 대하여, 賴耶緣起說에서는 이것을 有爲의 現象, 즉 生滅하는 阿賴耶識, 다시 말해서 그 곳에 攝藏된 種子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저 數論에서 설하는 自性(Prakriti)이나 神我(Purusa)의 常法이 능히 諸法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견해가 그러므로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2 果俱有

  이와 같이 種子는 刹那生滅의 뜻을 필요로 함은 물론 다시 種子(因)와 現行(果)은 同一 刹那에 화합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種子로부터 諸法을 現行할 때에 그 能生의 種子와 所生의 現行이 동시에 함께 있어 서로 여의지 않아야만 된다는 뜻이다. 唯識學의 因果說에서는 異時因果說과 同時因果說의 二種이 있는데. 前說은 正說로 보지 않고 後說로써 진정한 因果說이라 한다. 즉 異時因果說은 阿賴耶識내에 있는 種子가 現行하지 않을 때에는 識內에서 각각 自類의 種子가 前滅後生하여 상속하는 것인데 이 관계를 種子生種子라고 한다. 그리고 同時因果說은 識內의 種子가 그 생연이 바야흐로 성숙하여 外界로 現行할 때에 種子는 因이요 現行은 果가 되는데 이때에 因果關係는 반드시 同時라야 한다. 따라서 經量部나 上座部 등의 因果前後異時의 計度이나 外道의 他身인 大自在天으로서 萬有生滅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견해는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이 果俱有는 種子生現行의 同時因果쪽에 의지해서 세운 것이지 種子生種子의 異時因果쪽에 의지해서 세운 것은 아니다.

  3 恒隨轉

  다시 種子는 阿賴耶識內에서 善惡의 種子가 각각 前滅後生하면서 間斷 變易함이 없이 항상 一類相續하는 것이라야 한다는 의미이다. 만약 시시로 間斷轉易한다면 萬有發生의 親因이 될 수 없으므로 이 뜻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諸法中 항시 상속해서 間斷함이 없는 法은 다만 第八本識이 있을 뿐이고 七轉識29)이나 色法은 이 뜻이 없으므로 種子라 할 수 없다. 따라서 經部에서 六識이 능히 種子를 보존한다고 하는 견해도 이에 의해서 破斥되어야 한다. 이 뜻은 前種이 後種을 내다고 하는 異時因果說을 가리킨 것으로 一見 앞의 果俱有의 뜻과 相反되는 것 같으나 本論은 種子의 體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므로 이것도 種子中에 포함된다.

  4 性決定

  種子는 반드시 能熏의 因力인 善惡 등 性의 現行을 生할 功能이 결정된 것이 아니면 안된다. 이 뜻은 能熏의 現行이 만약 善性이면 所熏의 種子도 善性이며 그 種子로부터 生하는 現行도 또한 善性인 것과 같이, 前에 훈습한 때의 現行의 因力에 따라서 善惡 등을 일으키는 功能이 결정해서 잡란하지 않음을 말한다. 즉 善의 種子로부터 不善을 내거나 不善의 種子로부터 또한 善 등의 種子를 내는 모순성이 없으므로 性決定이 아니면 안된다고 규정한 것이다. 이는 薩婆多部 등의 異性의 因이 異性의 果를 生한다고 하는 잘못된 견해와 구별되어야 한다.

  5 待衆緣

  種子가 性이 결정해서 항상 상속하는 것이지만 衆緣이 화합하지 않으면 轉變變異해서 능히 現行의 諸果를 生할 수 없게 됨을 말한 것이다. 이는 外道學派들의 衆緣을 기다리지 않고 자연히 一因으로부터 結果를 낳는다고 하는 邪計를 부정하는 동시에 또 有部의 三世實有

 

法體恒有를 비롯한 大梵·時·方 등의 外道의 計執을 막는 것이다. 만약 有部에서 말한 바와 같이 緣體가 항상 존재한다면 果도 또한 항상 발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런데 種子는 여기에서 말하는 待衆緣 즉 衆緣을 기다린 연후에 비로소 現行함을 말하는 것이지 항시 果를 生한다는 말은 아니다.

   引自果

  다시 種子는 이상의 五義밖에 色心 등의 自果를 각각 따로따로 引生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가령 同性이라 하더라도 別法은 결코 引生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善의 色法으로부터 반드시 善의 色法을 인생하나 善의 心法을 引生하는 일은 결코 없다. 이는 外道가 大自在天의 一因이 능히 一切를 生한다는 집착을 파하고 또한 說一切有部가 色心이 서로 因果가 된다는 計執을 막아서 가린 것이다. 이 뜻은 앞의 性決定義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善因은 善果를 生하고 惡因은 惡果를 生한다고 하는 三性에 대하여 말하였고, 이는 色因이 色果를 이끌고 心因이 心果를 이끈다고 하는 種子의 體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六義를 구족해야만 비로소 一切有爲法을 轉變할 親因緣의 種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六義를 갖춘 種子는 第八識中 攝在한 生果의 功能이니 이것을 內種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穀麥등과 같은 것도 한 가지 種子라고 이름하나 이는 第八識 所藏의 種子로부터 現行하는 것이므로 外種이라 한다. 여기에 대해서 「述記」卷 三本에 의하면, 內種과 外種을 함께 識變이라 하나, 單變과 重變과의 차이가 있다. 內種은 第八의 相分이므로 單變이라 하고 外種은 다시 第八相分인 種子로부터 現行한 것이므로 重變이라고 한다.

  이 種子의 六義는 「攝大乘論」(卷上)의 說을 계승하여 本論에 이른 것이나 그 根本은 「瑜伽論」을 의거한 것이라고 본다. 즉「瑜伽論」(卷五)에는 因(種子)을 七種으로 分類하였으니 「無常法爲因, 與他性爲因, 與後自性爲因, 已生未滅爲因, 得餘緣爲因, 成變異爲因, 與功能相應爲因, 相稱相順爲因」이라고 하였다. 이 七相은 六義와 동일한 취지로 開合에 불과한 것이다. 兩者의 配對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一. 刹那滅            無常法爲因             一 ―

               二. 果俱有            與他性爲因

               三. 恒隨轉            與後自性爲因           二

                                     已生未滅爲因           三   ― 瑜伽七相

 唯識六義 ―   四. 性決定            得餘緣爲因             四

               五. 待衆緣            成變異爲因             五

                                     與功能相應爲因         六

            ― 六. 因自果            相稱相順爲因           七 ―

 

  (ㄷ) 種子의 內容

  一切種子의 相을 해석하는데「成唯識論」述記에 의하면

 「初出體等 以十門分別種子 後第二辨熏習相」30)

이라 한 것과 같이, 먼저 十門에 의해서 種子를 분별하고 다음에 熏習의 相을 고찰하고자 한다. 十門이란

1 出體門

 

2 一異分別門

3 假實分別門

4 二諦分別門

5 四分分別門

 三性分別門

 新熏本有分別門

 俱義多少門

 雙辨生引二因門

 內外種四緣分別門

등이니 순서에 따라서 種子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出體門

 「此中何法名爲種子 爲本識中 親生自果 功能差別」31)

이라고 한 것이 種子의 體를 가리킨 것으로, 種子란「本識 가운데 친히 自果를 生할 功能差別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이에 本識이란 第八阿賴耶識을 말하는 것인데, 種子가 含攝藏置되어 있는 처소요, 親生自果란 善의 種子는 善의 自果를 生하고 惡의 種子는 惡의 自果를 生하며 無記性의 種子는 無記性의 自果를 生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功能差別이란 三性 각자의 種子가 다 각각 그에 상당한 결과를 生하고 他果를 生하지 않는 세력을 말한 것이다.

  2 一異分別門

  種子와 阿賴耶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成唯識論」第二에

 「此與本識及所生果 不一不異 體用因果 理應爾故」32)

라고 한 바와 같이, 種子와 所依의 本識과 그 所生인 果인 現行과의 관계는 不一不異이다. 왜냐하면 本識은 體이고 種子는 用이기 때문이다. 種子와 本識과의 體와 用의 관계에 있는 것이므로 一體라 할 수도 없고 또 異體라 할 수도 없다. 또 種子는 因이 되고 所生의 現行은 果이므로 兩者는 因果關係에 있어서도 또한 不一不異라고 할 수 있다. 그 관계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本識 ― 體 ―                  種子 ― 因 ―

               ― 不一不異                    ― 不一不異

  種子 ― 用 ―                  現行 ― 果 ―

 

  成唯識論 「演秘」에 의하면 「瑜伽論」五十二에는 因果門만을 말하고「無性攝論」二에는 體用門만에 대해서 不一不異를 說하였으나 「成唯識論」에는 이와 같이 體用 因果의 兩門을 겸해서 자세히 술하고 있다.33)

  3 假實分別門

  이는 種子가 假有性인 것인가 實有性인 것인가에 대해서 분별한 門으로 이에는 異論이 있다. 護法正義에서는 種子는 實有라고 한데 대해서 空宗의 淸辨은 假有하고 주장하였다. 양쪽의 주장을 살펴보면, 淸辨은 現象界의 一切諸法을 生住異滅케 하는 四相과 諸法과의 관계는 不一不異한 것인데, 만약 이 四相이 假法이라면 諸法도 역시 假일 것이요, 種子와 諸法이 不

 

一不異인 이상 諸法이 假이므로 種子도 역시 假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唯識宗의 安慧論師 등은 四相과 種子를 例同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種子와 眞如는 不一不異한 관계에 있으므로 眞如가 實有한다면 種子도 역시 實有하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種子가 假法이라면 一切諸法을 生할 親因緣이 되지 못할 것이요 또 親因緣이 되지 못한다면 諸法은 과연 무엇에 의하여 전개되는 것인가?

  이와 같이 種子의 實有性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因果의 이론상 착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며, 眞勝義諦와 世俗諦와 涅槃도 없게 되어 결국 우리들이 修行해서 成佛을 구함도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種子는 實有라야 한다.

  4 二諦分別門

  이와 같이 種子假法說이 부정된다면 種子도 또한 眞如와 같이 勝義門에 있어서 과연 實有한 것인가에 대해서 種子의 二諦分別을 說하였다.

「述記」第二末에

 「謂此種子唯世俗諦 說爲實有不同眞如 眞如唯是勝義 種子不然非唯勝義 亦通世俗道理世俗故

  今顯異於勝義故 說唯依世俗非不通勝義也」34)

라고 해석한 것과 같이, 眞如는 勝義諦와 世俗諦에 통하는 實有法이지만 種子는 오직 道理世俗諦上에서만 實有하는 것이요 勝義諦上에는 假法이라고 한다.

  5 四分分別門

  本識에는 相分, 見分, 自證分, 證自證分의 作用35)이 있는데, 種子는 이 四分中 무엇을 所依하며 또 種子 自身은 四分中 어디에 攝하여졌는가? 「成唯識論」二에

  「種子雖依第八識諦 而是此識相分非餘 見分恒取此爲境故」36)

라고 하는데, 種子는 비록 第八識의 自體分에 의지한다 할지라도 이는 이 識의 相分이며 見分은 항상 이것을 취하여 경계를 삼는다고 하였다. 즉 自體分은 種子의 受熏處이므로 모든 有漏種子는 第八識 自體分을 依附處로 한다. 이에 대해서 唯識學者 중에 護法과 護月의 견해가 서로 다르나, 法相宗에서는 護法論師의 이론을 正說로 하고 있다.

  護月論師는 見分을 所依處로 하나 見分은 前境만 緣하고 自體分을 緣하지 않으며, 또 見分은 이 自體分의 義用이 다르며 또 見分은 熏習을 받지 않는다.

  이러한 세 가지 이유에 의해서 護法論師는 種子는 見分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種子는 第八識의 相分에 所攝이지 見分이나 自體分의 所攝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自證分의 差別功能은 見分의 境인 相分이기 때문이다. 만약 自證分의 所攝이라 한다면 見分은 自證分을 緣하게 되어 證自證分이 쓸모없게 된다.

  다음에 無漏種子는 어디에 攝하느냐가 문제이다. 그것은 有漏識과 無漏種子가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無漏種子가 비록 識所變은 아니라 할지라도 唯識性인 眞如性과 不卽不離한 관계이므로 唯識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다만 有漏種子는 성질이 같으므로 친자식과 같고 無漏種子는 성질이 다르므로 계모의 사이와 같음을 비유할 수 있을 뿐이다. 成唯識論「演秘」에

 「若至無漏 方相分收 淨見緣故……」37)

라 한 바와 같이 究竟位에 이르면 오직 無漏性이므로 四分의 작용도 모두 淨分의 작용만 있게 되고, 또 無漏種子는 無漏見分의 대상이 되는 無漏相分에 섭하게 되므로 種子識과의 관

 

계는 어긋남이 없다.

   三性分別門

  이는 漏, 無漏의 諸法種子가 善, 惡, 無性 三性中 어디에 속하느냐를 분별한 것이다.「成唯識論」二에

 「諸有漏種與異熟識體無別故無記性攝 因果俱有善等性故亦名善等 諸無漏種非異熟識性所攝故    因果俱是善性攝故唯名爲善」38)

이라고 있는데, 有漏種子는 第八識과 體性이 같으므로 無記性에 攝하며 三性에 통하고, 無漏 種子는 第八異熟의 性에 攝하지 않고 因果가 함께 善性攝이므로 오직 善이다.

  다시 말하면, 有漏種子에는 攝用歸體門과 性用別論門이 있는데, 前者는 本識은 體요, 種子는 用으로서, 有漏의 種子는 第八의 本識과 體가 다르지 아니하므로 그 性類도 함께 有漏이다. 그러므로 用을 거두어 體에 돌아가므로 無記性에 攝하여진다. 다음 性用別論門은 種子의 用과 本識을 別論한 것으로 能熏의 七轉識 및 種子所生의 一切現行이 善, 惡, 無記 三性에 통하므로, 所熏 및 能生의 種子도 또한 三性에 통한다.

  다음 無漏種子는 體性이 오직 善이며, 그 性類는 能對治의 法이나 本識의 體性은 오직 無記이고, 그 性類는 所對治의 法이므로 無漏種子는 第八異熟識의 性에 섭하지 않고 因果가 모두 善性에 攝하게 되므로 오직 善이다. 無漏種子는 異熟種이라 불릴 때가 있는데 能依와 所依에 의하여 명칭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眼識 등은 所依의 根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나, 所依根은 無記로서 能依의 識은 所依根이 眼根이면 眼識이라 함과 같다. 즉 異熟의 이름은 관대해서 所依識이 異熟인 경우에는 異熟種이라 하고, 無記인 경우에는 無記라 하나 性類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하여 善, 惡, 無記 等은 그 뜻이 국한되어 그렇지 않다.

   新熏本有分別門

  種子는 선천적으로 本有한 것인가, 아니면 후천적으로 생기는 것인가를 분별한 것이다. 論에 「種子異說, 本護, 新難, 合護法」이라 한 바와 같이, 護月은 本有說, 難陀는 新熏說, 護法은 新舊合生說을 각각 주장하였다. 차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本有說은 諸法種子는 本識中에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던 것으로 現行의 熏習 등에 의하여 新成된 것이 아니라 한다. 즉 모든 經論에 熏習에 의해서 增長한다고 말하였지 新成한다고는 해석하지 않았다. 또 有情 五性種別說도 本有種子의 具不具에 의해서 구별된 설로서 本有種子 이외에 新熏種子가 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種性의 구별은 영원히 不變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만약 新舊合生說과 같이 本有種子上에 다시 新熏種子가 있거나 또는 新熏說과 같이 新熏種子만이 있다면 同一種子의 多數를 인정하게 되어 多因一果의 불합리를 초래하여 因果雜亂의 과실을 초래하는 결과가 된다. 또 만약 本有種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見道한 初刹那에 無漏智의 現行함도 불가능하게 되어 無因有果의 과실을 범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新熏說은 難陀論師가 주장한 바인데, 本有說과는 정반대로 種子는 熏習에 의해서 신생한다는 것이다. 論에

 「有義種子皆熏故生 所熏能熏俱無始有 故諸種子無始成就種子旣是習氣異名 習氣必有熏習而    有 如麻香氣華熏故生」39)             

이라고 한 바와 같이, 能熏과 所熏이 無始의 존재이므로 種子도 역시 無始로부터 성취되고 있다는 것이지 種子 그 自體가 본래 갖추어져 있다고 하는 뜻은 아니다.

 

  다만 有漏種子는 無始로부터 성취되고 있으나 無漏는 凡位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能熏의 無漏도 또한 無始로부터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없다. 또 種子는 習氣의 다른 이름으로 모든 習氣는 現行의 熏習에 의해서 생하는 이름이다. 마치 麻의 향기가 華를 熏하였기 때문에 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新熏만 있다면 五種姓差別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難陀一派의 의견에 의하면 五種姓의 구별은 煩惱·所知의 有漏에 의해서 세운 것으로 즉 二障을 끝내 끊지 못하는 자를 不般涅槃種姓이라 하고, 所知障을 끊지 못하는 자 가운데 鈍根을 聲聞種姓이라 하며 利根者를 獨覺種姓이라 이름하고, 煩惱와 所知의 二障을 다 끊은 자 가운데 利鈍에 의해서 菩薩種姓과 不定種姓을 구별한다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五姓各別은 本有種子의 有無에 의한 것이 아니라 障의 有無에 따라 구분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無漏種子만은 聞熏習 에 의해 생기게 되는데, 즉 佛陀의 理智冥合한 교법을 듣고 無漏種子를 발생한다고 한다.

  셋째, 新舊合生說은 護法論師의 學說로서 앞의 二說을 조화시킨 것이다. 論에

 「有義種子各有二類 一者本有 謂無始來異熟識中 法爾而有生蘊處界功能差別…此卽名爲本性    住種 二者始起 謂無始來數數現行熏習而有…此卽名爲習所成種」40)

이라고 한 바와 같이, 本性住種(本有種子)과 習所成種(新熏種子)에 대한 차이를 밝혔다. 만약 本有만 있고 新熏이 없다면 七轉識과 阿賴耶識은 서로 因果關係가 될 수 없다. 곧 第八識은 本有의 種子를 執持하므로 七轉識의 因이 될 수 있으나 七轉識이 第八識의 種子를 熏習하지 않는다면 상호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本有說은 理와 敎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또 難陀論師와 같이 新熏만 있고 本有種子가 없다면, 有漏의 種子는 無漏의 現行을 生하게 할 수 없으므로 見道位에 들어갈 때에 증득하는데, 無漏는 親因緣이 없이 生하게 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有漏善心의 最上究竟의 世第一法은 有漏이고, 初地의 見道位에 들어갈 때에 증득하는 것은 無漏이다. 그러므로 有漏로서 無漏의 인연이 되는 결과가 된다. 만약 有漏인 世第一法을 인연으로 해서 無漏을 生한다면 無漏種子도 또한 有漏의 現行을 生하게 되어 佛陀는 다시 迷해서 범부가 되고 善의 種子도 또한 惡의 現行을 生하는 모순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因果의 도리는 완전히 잡란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一切種子는 반드시 熏習하기 때문에 生한다고 설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護法論師는 五姓의 種別을 第一說과 같이 本有無漏種子의 具不具에 연유한다고 하였다. 즉 本有無漏種子가 없으면 마침내 無漏의 現行을 生할 수 없으며 現行을 生할 수 없으므로 新熏種子가 있을 리 없다. 이와 같이 本有無漏種子의 具不具로 인하여 種性의 구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無漏種子가 전무한 자는 二障의 種子를 깊이 害할 수 없으므로 不般涅槃種姓이라 하고, 二乘은 所知障의 種子를 깊이 害하지 않으므로 그중 鈍根은 聲聞 種姓이라 하였다. 利根은 獨覺種姓이라 하며 또 無漏種만이 있는 자는 二障의 種을 길이 해하므로 如來種姓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無漏種子의 有無에 의하여 障을 끊을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된다.

  다시 말하면, 本有의 無漏種子가 없으면 無因이므로 聖道는 길이 不生하게 되며, 또 二障의 種子를 害하는 자도 없게 된다. 과연 害하는 자가 없다면 二障에 의해서 五種의 種姓을 說함도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本有說이나 新熏說이 모두 한편으로는 도리가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과실을

 

면치 못한다. 그래서 玄  이후의 法相宗에서는 本有, 新熏 兩說을 잘 조화시킨 護法論師의 第三說을 正義로 하고 있다.

   具義多少門

  이는 種子의 뜻을 밝힌 것으로 「瑜伽論」에는 七義를 갖추었다 하고, 「攝大乘論」이나 「成唯識論」에는 六義를 갖추었다고 한다. 兩說은 원래 開合廣略의 相違가 있을 뿐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ㄴ)項에서 이미 「成唯識論」에 의해서 種子의 六義를 밝혔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雙辨生引二因門

  內外種子의 生因과 引因에 대해서 말한 것으로 內外의 種이 近果와 正果를 生하는 것을 生因이라 하고, 遠果와 殘果를 生하는 것을 引因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二因에 대해서 近遠二果와 正殘二果의 二重의 相望이 있다. 이 生因二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瑜伽論」「攝大乘論」등에 있으나 여기서는 「無性攝論」과「世親攝論」에 의지해서 말하고자 한다.

  먼저「無性攝論釋」의 뜻에 의하면 內種을 十二因緣에 비유해서 설명하였는데, 內識의 種子로부터 현재의 識 등을 생하는 것을 近果라고 하니 이는 곧 生因이며, 또 名色 등을 引하는 것을 遠果라고 하니 이는 곧 引因이다. 다음에 外種을 보리(麥)의 種子에서 보리가 생기는데에 비유해 말하였다. 즉 보리와 벼의 種子로부터 싹이 생기는 것을 近果라고 하니 이는 곧 生因이요, 또 그로부터 줄기, 가지, 꽃봉오리, 꽃을 이끌어내는 것을 遠果라고 하니 이는 곧 引因이다.

  다음「世親攝論釋」의 뜻에 의하면 內의 種子로부터 正果(正報의 果)가 생기는 것, 즉 현재의 種子로부터 현재의 身을 내는 것을 生因이라 하고, 殘果를 引하는 것을 引因이라고 한다. 殘果란 죽은 뒤에 屍骸 등을 引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에 外種의 싹과 줄기 등이 나오는 것을 正果라고 하니 이는 곧 生因이요, 또 枯朽한 因하는 것을 殘果라고 하니 이것은 곧 引因이다.

  이와 같이 無性은 近遠二果를 이끄는 것을 生引二因이라 하였고, 世親은 正殘二果를 감득하는 것을 生引二因이라 한다.

  이상은「但是天親解略 無性釋廣亦不相違」41)라 한 바와 같이 兩論師의 견해에 별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內外種四緣分別門

  成唯識論「述記」에

 「次第十四緣 分別辨內外種因非因緣熏不熏別」42)

이라 한 바와 같이, 內外種의 因緣非因緣과 熏不熏을 辨別하는 것이다. 먼저 內種 즉 心內의 種子는 반드시 熏習을 말미암아 능히 果를 낳는다. 그 중 本有種子는 반드시 熏習에 의하여 증장해서 비로소 능히 果를 낳고 新熏種子는 內種이 반드시 熏習에 의해서 생겨야만 비로소 능히 果를 낳는다. 그러므로 內種은 因緣性이다.

  다음에 外種은 참깨(胡麻)에 꽃의 향기를 쪼이는 것과 같이 혹은 熏習하기도 하며 惑은 참깨는 쇠똥 등의 비료에 의해서 자랐지만 다시 참깨에 향기가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熏習하는 일이 없으나 外種은 오직 現行法이므로, 與力不障의 增上緣이 되어 所生의 果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外種도 因緣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外種은 반드시 內의 共相의 種子로부터 생하기 때문이다.

 

  種子에는 共相, 不共相의 二種의  種子가 있다. 不共相은 오직 자기에 국한하고 타에 통하지 않는 五根 등을 말하며, (각자가 수용하는 것) 共相은 다른 중생과 함께 수용하는 一切萬境(共同受用)을 말한다.

  이상으로 種子의 내용을 十段으로 分類하여 살펴 보았다. 다음에는 이와 같은 種子는 어떠한 과정으로 熏習되는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熏習論 

 

  (ㄱ) 熏習의 名義

  熏習이란 能熏習과 所熏習의 화합으로서 能熏法이 所熏處를 자극해서 그 중에 種子를 發生(新熏)하며 增長(本有)하는 것을 말한다.「述記」에

 「熏者發也 或由致也 習者生也, 近也, 數也 卽發致果於本識內 令種者生 近令生長故」43)

라고 하였으니 發에는 開發과 擊發의 二義가 있다. 만약 新熏種子이면 開發의 뜻으로서 이제까지 없었던 種子를 처음으로 開發하는 것을 熏이라 하며, 만약 本有種子이면 擊發의 뜻으로서 이는 本有種子를 擊發함을 熏이라 한다. 그리고 由는 所由의 뜻으로 能熏의 七轉識이 種子를 第八識에 熏付하며 種子는 또 現行을 生하는 근본이 됨을 말한다. 致는 能熏種子를 本識에 致熏한다는 뜻이다. 다음에 近과 數는 이 種子가 자주 熏習해서 즉시(近) 現果를 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능히 熏習을 하고 또 熏習을 받는 모든 識에는 반드시 다음의 四義를 갖추어야 한다.

  (ㄴ) 所熏處의 四義

  먼저 所熏의 四義란 堅住性, 無記性, 可熏性 및 能所和合性으로서 種子에 六種의 특성이 있는 것과 같이, 熏習에도 이 四義를 갖추어야 所熏處의 자격이 있다.

  1 堅住性

  種子의 熏習을 받을 識은 無始以來로 菩薩이 究竟位에 이르기까지 一類(堅義) 相續(住義)해서 부단하는 성질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다. 七轉識과 그 心所 등 法과 같이 간단하고 轉易해서는 諸法의 種子를 보존해서 잃지 않게 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第八識만은「恒轉如暴流」라고 있는 바와 같이 이 堅住性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經量部의 色心互熏說을 불가하다고 배척하였다.

  2 無記性

  所熏處가 될 識은 無記性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즉 無記는 善, 惡에 치우치지 않고 평등하므로 善 또는 惡法을 어기는 바가 없이 능히 善惡 등의 習氣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所熏處가 善과 惡의 性이라면 그 세력이 강성하므로 서로 타를 배척하게 될 것이다. 즉 善性은 染性의 熏을 받지 않으며, 染性은 善性의 熏을 받지 않는 것이, 마치 惡臭가 강한 물체가 좋은 향기가 받아들이지 않고 또 향기가 진한 화초나 향목 등은 惡臭를 받아 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無記性은 中容으로서 善染을 불문하고 어김이 없이 諸法의 種子를 공평무사하게 받아들이므로 所熏處가 無記性이라야 한다.

  3 可熏性

  所熏處는 가히 熏習을 받을 성질의 것이라야 한다는 의미로, 이에는 법의 自在性과 性의 非堅密의 二義가 있다. 法의 자재라 함은 心所를 가려내는 것이니, 心所는 心王에 繫屬되어

 

心王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主體가 되어 자재하게 熏習을 받을 수 없다. 그 다음 性의 非堅密이라 함은 無爲法을 가려내는 것이니, 無爲法은 그 性이 常住하며 또 堅密하기 때문에 熏習을 받을 여유가 없는 것이, 마치 단단한 돌이 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第八識은 無覆無記이므로 그 體가 성글어서 種子의 熏習을 받을 수 있고, 또 諸識中에서 주가 되어  자재하므로 所熏處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 非堅密이라 함은 第一堅住性과는 다른 것으로, 여기의 堅은 密의 뜻이고 앞의 堅은 住의 뜻이다. 주의할 점은 眞如受熏의 뜻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眞如가 熏習을 받는다면 眞如는 常住하는 것도 아니고 無爲도 아니라고 하는 論據로서 眞如受熏說을 배척하는 것이다.

  4 和合性

  所熏處가 될 識은 能熏과 同時同處해서 二者가 和合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能熏과 화합 상응하지 않는 他身과 他刹那의 法은 所熏處가 될 수 없다. 만약 他身의 熏習을 받는다 하면 자기가 지은 罪惡의 苦報를 타인이 받게 되는 결과가 되므로 因果法則을 어기게 된다. 또 과거와 미래는 無體이므로 화합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所熏處는 同時同處에서 화합하는 性이라야 한다. 이와 같은 四義를 갖춘 識은 第八識中에서 오직 第八識만이 있을 뿐이다.

  (ㄷ) 能熏處의 四義

  所熏處인 阿賴耶識에 堅住 등 四義를 갖추고 있는 것과 같이, 能熏識인 七轉識에도 반드시 四種의 특성을 갖추어야 한다. 能熏의 四義라는 것은 有生滅義 有勝用義 有增減義 和合性義 등이다.

  1 有生滅義

  種子를 能熏할 識은 無爲常住한 것이 아니라 有爲生滅한 것이 아니면 안된다. 有爲生滅이므로 능히 種子를 熏習할 수 있다. 흡사 種子가 生滅轉變하는데 의해서 生果의 공능이 있는 것과 같다. 無爲法은 常住性의 것으로 生滅하는 것이 아니므로 작용이 없으며 작용이 없으므로 種子를 생장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無爲法은 能熏의 法이 될 수 없다.

  2 有勝用義

  勝用에는 能緣의 勢用과 强盛의 勝用 등 二義가 있는데, 能緣의 勢用은 能緣 즉 인식의 작용이 있는 心法을 가르킨다. 非緣慮의 法, 즉 인식작용이 없는 色法 등을 구별하는 것이며, 强盛의 勝用은 善惡 등의 極烈强盛한 心王과 心所 등을 말하는 것으로 세력이 지극히 미약한 異熟無記와 구별하는 것이다. 즉 能緣識이 될 識은 能緣의 세력을 갖추는 동시에 또 能緣의 세력이 强盛하여야 한다. 色法과 같은 것은 能緣心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그 種子를 能緣할 수 없다. 그리고 能緣心이라 할지라도 第八識(異熟無記)과 그 상응의 心所 등은 能熏의 능력이 없고 오직 七轉識과 그 상응의 心所有法 등만이 能熏力이 있다.

  3有增減義

  種子를 能熏할 수 있는 法은 增할 수도 있고 減할 수도 있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 만약 圓滿無缺한 佛果와 같은 善法은 無增無減하는 것이므로 種子熏習의 작용이 없는 것이다. 種子는 熏習하면 法을 증장한다. 第七末那識도 初地에 들어가서 無漏가 되었을 때 有漏는 줄고 無漏는 늘어난다. 그러므로 種子의 熏習은 未究竟位의 사이에만 행해진다. 이에 대해서 因果二位의 無漏를 上, 中, 下 三品으로 구별해서 본다면 見道는 下品, 修道는 中品, 佛果는 上品이다. 이 三品에서 轉齋하고 轉變한다. 만약 轉齋의 쪽에서 말한다면, 下品이 증장해서 中品과 같이 되고 中品이 증장해서 上品과 같이 되므로 늘어가기만 하고 줄지는 않는다. 만약 轉變의 쪽에서 말하면 下品으로부터 中品에 나아갈 때는 下品은 스스로 줄고, 中品으로

 

부터 上品에 나아갈 때는 中品은 스스로 줄므로 증감이 있는 것이다. 究竟에 달하면 種子 熏習의 여지가 없다. 만약 佛果의 諸識으로서 能熏의 작용이 있다면 佛果의 善法은 마침내 究竟圓滿할 때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佛果는 원만해서 증감하는 일이 없으므로 種子熏習의 作用이 없다.

  4 和合性義

  能熏할 法은 所熏識과 同時同處에 있어서 不卽不離의 관계를 가지고 서로 화합하는 성질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앞의 所熏의 四義中에서 이미 설한 것과 같으므로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이와 같이 四義를 갖춘 것은 因位에 자신의 所熏處와 때를 같이 한 七轉識의 非業果와 그와 相應하는 心所有法 등이다. 因位의 第八識의 心王 心所와 業果의 前六識 및 果位의 諸識등은 이 四義를 구비하지 않으므로 能熏의 자격이 없다. 위에서 말한 요지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 善

       ― 第六識 ―   惡                                                        能  熏

                   ― 無記 ― 非業果

因位 ―                     ― 業果

          第七識  

       ― 第八識                                                                非能熏  

果位 ―― 諸  識

 

 요컨대 能熏의 자격이 있는 것은 七轉識뿐이고, 所熏의 자격이 있는 것은 第八異熟識이다.

  (ㄹ) 能熏의 相狀

  이미 能熏의 法과 所熏의 法을 말하였으므로 다음에는 그 能熏인 七轉識이 所熏處인 第八異熟識에 種子를 熏習하는 相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대개 現行熏種子의 作用은 물론 자기의 種子를 熏하고 別類의 種子는 熏하지 않는다.

  대개 種子의 종류에는 有漏種子와 無漏種子의 二種이 있는데, 有漏種子에는 또 善, 惡, 無記 등 三性의 종류가 있다. 有漏三性의 心과 心所에는 能緣과 所緣의 作用이 있어, 각기 자신의 種子를 熏習한다. 能緣의 種子를 熏하는 것을 見分熏이라 하고, 所緣의 種子를 熏하는 것을 相分熏이라 한다. 勝用이 있는 七轉識의 각자가 그 境을 緣할 때에 그 識의 自體分은 스스로 자신의 種子를 熏習하는 일이 없으므로 能緣의 見分에 힘을 주어 그 習氣를 남기게 되며, 또 所緣의 相分에 힘을 주어 그 所緣의 種子를 熏習케 한다. 이 能緣의 習氣란 곧 見分, 自證分, 證自證分의 種子로서 이 三分은 能緣體의 구분이므로 동일한 見分種子이다. 그리고 所緣의 種子란 相分과 本質과의 種子를 말한다. 즉 相分을 親所緣으로 하고 本質을 疎所緣으로 한다. 相分의 種子를 熏成함과 동시에 本質의 種子도 또한 이를 끼고서 熏成하는 것이다.

  三類境에 대해서 말하면, 性境 및 帶質境의 相分은 相分과 本質과의 種子를 熏하고, 獨影境의 相分은 體性이 없어서 오직 能緣見分에 불과하므로 따로 相分이 自己種子를 熏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見, 相 二分의 熏習이 있으므로 第八識과 같이 강성한 勝用이 없고 또 色法과 같이 能緣의 勢用이 없어서 능히 熏習의 능력이 없는 것도 勝用이 있는 七轉識이 이를 緣해서 相分熏으로서 熏習하므로 또한 新熏의 種子가 있게 된다. 이와 같이 諸法의 種子는 항상

 

七轉識의 現行에 의해서 熏成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제 種子熏習의 한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이에 不善性의 眼識이 現行할 때에 반드시 同緣의 不善의 意識이 現行하고 또 그와 동시에 兩識에 상응하는 遍行의 五와 中隨惑의 二와 大隨惑의 八과 根本의 無明 및 不善의 隨一 등 다수의 心所가 함께 일어난다. 이때에 이러한 心과 心所는 낱낱이 모두 見分熏과 相分熏의 작용을 한다. 見分熏으로서는 각자의 後三分의 種子를 훈습하고, 相分熏으로서는 각자의 相分인 色境의 種子와 相分의 本質인 第八識所變의 色추의 種子를 熏成한다.

  이와 같이 心과 心所의 各刹那의 現行은 각각 자신의 種子를 熏習한다. 많은 刹那를 경과하면 경과할수록 무한한 種子가 第八阿賴耶識 心田에 熏植되어 뒷날 無漏智의 대치가 있을 때까지 상속하여 다할 때가 없다. 한 刹那의 眼識이 現行할 때 이와 같은 種子熏習을 하는 것을 미루어 보아 他識의 現行에 있어서의 種子熏習도 능히 미루어 알 수 있다. 前六識의 一分인 異熟無記의 心과 心所의 現行과 第八識을 제외하고 항상 種子熏習의 作用을 하지 않는 때가 없다. 이제까지 논술한 요령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 證自證分 ―  ― 證自證種 ―

        ― 七轉識 ―   自 證 分        自 證 種   ― 後三分同種子 ― 見分熏 ―

                       見↓  分 ―  ― 見    種 ―                             ― 第八識自體中

                           

                    ― 相    分 ―  ― 相分種子 ―

 八識 ―                                                             相分熏 ―

        ― 第八識  ―  本    質 ―  ― 本質種子 ―

 

  (ㅁ) 種子生現行의 因果

  그러면 阿賴耶識에 훈습된 種子는 識內에서 어떤 상태로 보존되며, 또 그것이 현상으로 생기하는 과정은 어떤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識內의 수많은 種子는 아무 질서도 없이 혼돈상태로 존재하는 것인가? 또한 그것이 緣起하는 데는 우연한 기회에 우연히 轉變하는 것인가? 물론 그것은 아니다. 諸種의 種子가 識內에 보존될 때나 또는 현상으로 緣起하는 데는 반드시 일정한 因果律에 의해서 행하여진다. 「成唯識論」에

 「諸法於識藏 識於法亦爾 更互爲果性 亦常爲因性」44)

이라고 한 것과 같이, 一切諸法을 緣起할 親因緣인 種子와 阿賴耶識과는 서로 因이 되고 서로 果가 된다. 왜냐하면 阿賴耶識中에 보존되어 있는 種子가 一定不變하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돕는 衆緣과 화합할 때 現行을 生하게 된다. 이 관계를 種子生現行이라 하는데, 能生의 種子는 果이다. 마치 비유컨대 곡식이 種子만으로는 결코 싹틀 수 없고, 반드시 雨, 露, 日光 등의 外緣을 가해야만 비로소 싹트는 것과 같다. 불교의 敎義는 衆緣生을 인정하고 결코 一因生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種子로부터 現行된 諸法中 강성한 세력이 있는 것은 種子로부터 생기는 刹那에 因이 되어 阿賴耶識中을 향하여 種子를 熏習한다. 이것을 現行熏種子라 한다. 이때에 能熏의 現行은 因이요 所熏의 種子는 果이다. 이것도 또한 因果同時이므로 種子生現行의 因果가 있는 동시에 現行熏種子가 있는 것이다. 마치 심지가 불꽃을 내면 그 불꽃이 도리어 심지를 태우는 것과 같다.

  그러면 生緣이 미숙하여 아직 現行치 못하고 識中에 잠재하는 다수의 種子는 어떻게 存在하는 것인가? 種子는 원래 刹那生 刹那滅하는 성질의 것이므로, 刹那刹那에 동일한 類의 성

 

에서 前滅後生 前滅後生하면서 상속하는데, 이 관계를 種子生種子라고 한다. 이때에 前滅의 種子는 因이요, 後生의 種子는 果에 해당한다. 그리고 種子生種子의 인과관계를 唯識學에서는 異時因果라고 하여 진정한 因果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種子生現行 現行熏種子의 인과관계는 同時因果라 하여 이것을 三法展轉因果同時라고 하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因果다. 三法展轉因果同時란 現行을 生하는 種子와 生하여진 現行과 그 現行으로부터 熏習하여진 種子의 三法에 있어서, 種子生現行의 因果와 現行熏種子의 因果가 전전동시임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심지(因)가 불꽃(果)를 낸다면 불꽃(因)이 도리어 심지(果)를 태우는 것과 같다. 또한 갈대단이 서로 서로 의지하는 것과 같으니 즉 甲의 갈대단(因)이 능히 乙의 갈대단을 세우고(果), 또 乙의 갈대단(因)은 동시에 갑의 갈대단을 세우는(果)과 같다.

  이상에서 말한 種子生現行, 現行熏種子, 種子生種子의 관계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第八識

第五

刹那

第四

刹那

第三

刹那

第二

刹那

第一

刹那

現薰種

   

                       

     

 

 

 

 

  이와 같이 阿賴耶識中에 있는 수많은 種子는 질서정연하게 보존되어 種子는 現行을 生하고 現行은 種子를 熏하는 동일한 과정을 밟으면서 生滅相續하며 무시이래 전전상속하여 결코 단절하는 일이 없다. 이것이 곧 萬有緣起相續의 상태로서, 이른바 阿賴緣起라고 칭하는 까닭도 種子를 보존하는 阿賴耶識을 중심으로 해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4. 行相門

 

  이상에서 初能變異熟識의 相狀을 밝히는 十門中 三相(自相, 果相, 因相)을 살펴보았으므로 다음에는 心과 心所의 인식작용이 어떤 것인가를 밝히고자 한다. 이는 本頌에

 「不可知執受 處了……」45)

라고 한 것이 이 門에 해당된다. 行相이란 了別의 뜻으로 能緣의 心이 所緣境의 體相 위에 行步하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行相이란 識의 자체가 所對의 境을 緣하는 能緣의 작용을 말한다. 즉 行은 能緣의 작용이고 用은 所緣의 境相이다.

  그런데 이 心의 作用을 四分으로 구별하여 밝히는데, 옛날부터 「四分, 三類, 唯識半學」이라고 할 만큼 이 四分의 뜻은 萬法唯識의 도리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 四分義는 能所緣이 함께 一心의 작용이라는 취지를 가장 교묘하게 나타내었다. 四分義란 相分, 見分, 自證分 및 證自證分으로 차례로 第一分, 第二分, 第三分, 第四分이라고 한다. 이제 그 대요를 논하고자 하는데 먼저 四分의 名義를 설하고 그 다음에 立分의 異說을 논하려고 한다.

     

 

    (1) 四分의 名義

  (ㄱ) 相分

  相은 相狀으로서 所緣의 뜻이다. 能緣心의 앞에 나타나는 所緣의 경계 즉 所緣의 本質과 能緣의 識 사이에 일어나는 影像을 일러 相分이라 한다. 이 所緣에는 親所緣과 疎所緣의 二種이 있다. 親所緣은 우리들의 心과 心所가 어떠한 一種의 色境을 인식할 때에 外界의 色境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먼저 心內에 영상으로 變現하여 認識主는 이 心內의 영상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 때에 心內에 變現한 영상을 相分이라 하고 이것을 親所緣이라 한다. 그 다음에 疎所緣은 心內에 나타난 色境의 본질은 第八阿賴耶識으로부터 轉變한 外界의 色으로서 心內變現의 영상을 親所緣이라 하는데 대하여 疎所緣이라 한다. 親所緣을 影像相分이라 하고 疎所緣을 本質相分이라 한다.

  그리고 相分에는 有本質과 無本質의 二種이 있다. 有本質의 相分은 前五識의 所緣境인 色, 聲, 香, 味, 觸의 五境을 말한다. 즉 이러한 五境은 그 근원은 설사 第八阿賴耶識에 있다 할지라도 이것이 第八阿賴耶識으로부터 일단 心外에 變現된 이상 인식대상으로서의 실재성은 엄연하다.

  그 다음에 無本質의 相分은 第六識中 獨頭意識이 일어나는 夢中의 所現境과 또는 意識이 緣하는 과거와 미래의 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第八識은 本質이 없으니 그 이유는 第八識은 外界의 境을 緣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第七識은 第八識의 見分으로써 相分의 本質로 한다.

  (ㄴ) 見分

  見은 見照, 能緣의 뜻으로서 心性이 명료해서 所緣境에 대하여 能緣作用을 하는 것을 말한다. 즉 見分이란 相分에 대한 能緣의 作用이다. 예를 들면, 眼識이 色境을 了別하고 耳識이 聲境을 了別하며 내지 身識이 觸境을 了別하는 등과 같은 것을 見照라 한다.「松室私記」卷上에

 「照故名見 不謂見故名見……若見故名見者 耳識見分亦可名聞分 有此過故不名見故見 照故名    見」    

이라 한 바와 같이, 이에 見照라 함은 眼識이 色境을 인식하는 것만을 의미한 것 같으나 실은 다른 諸識全體의 인식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며 다만 본다는 것을 見이라 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諸識을 각각 따로 표현한다면 耳識의 인식에 대해서는 聞照, 鼻識의 認識에 대해서는 嗅照 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이는 인식의 主觀을 가리킨 것이다. 小乘諸部에서는 能緣의 心과 所緣의 境을 別體로 보고 心法의 작용은 다만 能緣에만 그치고 所緣의 境은 心外에 실존한 것이라고 하였다. 小乘에서는 人我의 空만을 立證하는데 그치고 法體의 고찰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다시 말하면, 小乘이 法體恒有說을 세워 이른바 我空法有의 취지를 설하였는데 비하여 大乘에서는 我空과 함께 法空까지도 주장하였다. 所緣의 境이란 心用의 相分으로서 다시 別法이 없다. 이른바 心外無境의 의의를 명백하게 나타냈으니 실로 唯識所談의 강요라고 하겠다.      

  (ㄷ) 自證分

  自는 自用 즉 見分을 말하며, 證은 證知의 뜻으로서 自體上의 見分의 작용을 證知하는 쪽에서 이름한 것이다. 다시 自證分이란 見分了別에 대하여 이것을 所緣으로 해서 거듭 能緣의 作用을 하는 것을 말한다. 見分, 相分 外에 自證分이 있어야 할 이유에 三個의 理證이 있다.

  첫째는 憶念作用으로서 저 見分도 물론 能緣心이기는 하나 이는 사물에 대한 記憶作用이 없다. 즉 見分은 오직 外境의 所緣境을 반연하여, 이것은 赤色이다 이것은 好色이다 이것은

 

好香이다 등이라고 인식할 뿐이요 이 인식한 사실을 心과 心所內에 기억하며 미래까지 추억회상하는 작용이 없다. 그런데 見分 以外에 自證分이 存在하므로 과거의 사실을 憶念作用 할 수 있다.

  둘째는 相, 見分의 所依體로서 만약 自證分의 存在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相, 見分作用의 所依體가 없게 되므로 所依體로서의 自證分을 세운다. 즉 相, 見 二分의 작용을 통일하고 그 의거할 所依處(自證分)가 없다면 相, 見二分의 인식작용이 성립하지 못한다. 마치 蝸角과 牛角이 그 統一體인 머리를 여의고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셋째는 量果로서의 自體分이니, 量果는 예를 들면 세간의 布帛을 자로써 잴 때에 三個의 사실이 구비되어야 한다. 즉 재야 할 布帛(相分)과 능히 재는 자(見分)와 재어진 결과(自證分)로서의 수량이 그것이다. 만약 이때에 布帛(相分)과 자(見分)만 있고 量果(自證分)가 없다면 布帛을 자로써 재는 일이 무의미하게 되는 것과 같이 相, 見 二分만이 있고 自證分이 없다면 도리에 맞지 않는다.

  (ㄹ) 證自證分

  證은 證知의 뜻이며 自證은 앞의 自證分을 가리킨 것으로서 自證分의 作用을 證知하는 쪽에서 이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證自證分이란 다시 앞의 自證分을 반연하는 작용을 말한다. 이 心分의 존재는 무엇에 의하여 알 수 있는가 하면, 여기에는 二種의 이유가 있다. 즉 一은 第三自證分을 중명하기 위하여, 二는 第三自證分의 量果로서 등의 二種의 이유에 의하여 第四分이 없어서는 안된다. 만약 第四分이 없다면 第三分은 무엇을 所依로 하여 존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第一의 이유이다. 저 第二의 見分이 第三自證分을 所依로 하여 존립하는 것과 같이 이 第三分도 所依가 없어서는 안된다. 저 자로써 布帛을 재는 예로 보더라도 見分이 相分을 헤아린 결과가 第三分인 것을 인정한다면, 이제 第三分도 第二의 見分을 所緣境으로 하여 반연하는 고로 그 量果로서의 第四分이 필요하다는 것이 第二의 이유이다. 즉 第四分은 또 第三分을 所緣境으로 하여 能緣作用을 한다.

 

    (2) 立分의 異說

  이와 같이 心과 心所의 작용에 대한 四分說을 최초로 제창한 이는 護法論師로서 護法論師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唯識의 十大論師中에서도 일찍부터 立分이 일정하지 않았다. 즉 安慧論師는 오직 自證의 一分만을 세웠고, 難陀論師는 相, 見二分說, 陳那論師는 相, 見, 自證의 三分說, 護法論師는 四分說을 각각 주장하였다. 그래서 고래로 이것을 「安, 難, 陳, 護 一, 二, 三, 四」라 하여 기억에 편리하도록 一句로써 전하고 있다. 이제 각각의 立分의 이유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ㄱ) 一分說

  安慧論師가 「華嚴境」의 三界唯一心의 文을 證文으로 해서 오직 一分說을 세운 것이다. 우리들의 心識의 體性은 원래가 依他起性으로서 이는 오직 自證의 一分뿐이다. 왜냐하면 이 依他起性의 自證分은 무시이래로 허망분별의 熏習에 의해 依他의 自體上에 所緣境을 나타내게 되니 이것이 곧 相分이다. 이 相分에 다시 能緣의 作用을 일으키니 이것이 곧 見分이다. 見分은 能遍計요 相分은 所遍計이므로 見, 相 二分은 허망분별의 熏習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無體法이라는 것이다.

  八識이 모두 이와 같은 所遍計와 能遍計, 즉 相分, 見分에 의해서 妄執을 일으키므로 이것을 일러서 總無라 하며, 또 妄執을 분별해서 我法二執이 됨을 別無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見道이상 내지 佛果에 이르면 一切迷妄을 여의고 識體가 眞如와 명합하므로 見, 相 二分이

 

存在하지 않는다. 만약 見, 相 二分을 인정한다면 一心의 自體 外에 別體의 實法이 있게 되어 萬法唯識의 理를 성립하기 어려우므로 오직 自證分만을 인정해야 한다.

  (ㄴ) 二分說

  이것은 難陀를 비롯한 親勝, 淨月, 德慧論師 등이 「攝大乘論」의 「唯二依他性」의 文을 의지해서 見, 相 二分說을 세운 것이다. 즉「心不孤起, 托境方生」으로 인식상의 能緣心은 반드시 그 대상인 所緣을 요하는 것이므로 그 能緣心을 見分이라 하고 所緣境을 相分이라 이름한다. 이 二分은 함께 依他法으로서 그 중 能緣心인 見分은 心體이므로 見分 이외에 自證分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依他의 法에는 假實의 구별이 있는데, 見分은 實이요 그로부터 變現한 相分은 假이다. 만약 相分을 實法이라 한다면 心外無境이라 하는 唯識의 도리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見, 相 二分은 동일한 種으로서 心實境虛라는 것이다. 따라서 妄情所産의 我法은 相分上에 假現한 妄境이므로 見分上에는 세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見道位에서도 眞如를 親證할 수 없고 眞如의 境地에 無分別의 相分이 顯現하므로 見, 相 二分이 存在한다고 주장하였다.

  (ㄷ) 三分說

  이는 陳那와 護月 등의 論師가 本論, 頌文 등의 뜻에 의해서 相分, 見分, 自證分의 三分을 세웠다. 本論 卷二에 인용한 「集量論」頌에

 「似境相所量 能取相自證 卽能量及果 此三體無別」46)

이라고 있는 것이 三分說의 이론이다. 즉 相分은 所量이요 見分은 能量이며 自證分은 量果와 같은 것으로 見, 相 二分은 自證分을 여의고 존재할 수 없다. 第三自證分의 證知하는 작용이 없으면 인식작용을 완료할 수 없으므로 依他의 見相二分 外에 自證分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이 三分은 모두 依他起性의 法이다.

  (ㄹ) 四分說

  최후에 護法論師는 陳那論師의 三分說에 다시 證自證分을 더해서 相分, 見分, 自證分 및 證自證分의 四分을 주장하였다. 다만 陳那論師의 三分說은 世親論主의 뜻에 의지하였고, 四分說은 오직 開合의 相違가 있을 뿐으로 陳那, 護法二師說은 正說이라 하고 安慧, 難陀二師說은 正說이 아니라고 한다.

  대개 安慧의 一分說은 體를 알고 用을 알지 못했으며, 難陀의 二分說은 用을 알고 體를 알지 못했으며, 陳那의 三分說은 비로소 體用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이 三分上에 證自證分을 더할 때에 一心中에 慮知가 두루해서 見分은 相分을, 自證分은 見分을, 證自證分은 自證分을, 그리고 自證分은 도리어 證自證分을 반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식작용을 자세히 구별하면 四分說이 된다. 이상에서 말한 四分 및 八識의 관계와 四重의 能所量果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相    分

                      ― 前五識                         現量 ―

                         第六識

 四分 ―   見    分 ―   第七識                         比量   ― 三量

                      ― 第八識

           自 證 分      第八識                         非量 ―

        ― 證自證分      第八識

 

                            (第一重)   (第二重)   (諸三重)    (第四重)

        ― 相    分          所量

                              ↑

           見    分          能量       所量

 四分 ―                      ↑         ↑

           自 證 分          量果       能量     所量·量果    能量

                                         ↑       ↑           ↓

        ― 證自證分                     量果     能量          所量·量果

 

  이와 같이 四分을 세우는데는 敎證과 理證이 있는데, 이제 四分存立의 증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本論에

 「若心心所無所緣相 應不能緣自所緣境 或應一一能緣一切 自境如餘餘如自故」47)

라 한 것은 相分의 理證이며 또

 「若心心所無能緣相 應不能緣如虛空等 或虛空等亦是能緣」48)

이라 한 것은 見分의 理證이다. 그리고 또 「厚嚴經」頌에

 「一切唯有覺 所覺義皆無 能覺所覺分 各自然而轉」49)

이라고 한 것은 見, 相 二分의 敎證이다. 頌中에 一切唯有覺은 能緣의 八識이요, 所覺은 心外의 實境이요, 能覺은 見分이요, 所覺은 相分이다.

 다음에 自證分 存立의 증거는 어떠한가? 本論 卷二에 三理證을 들고 있다.

 「相見所依自體名事卽自證分(其一) 此若無者應不自憶心心所法 如不會更境必不能憶故…(其    二)」50)

 「所量能量量果別故 相見必有所依體故(其三)」51)

라고 한 것은 所依와 憶念과 量果의 三證이다. 그리고 「集量論」頌에

 「似境相所量 能取相自證 卽能量及果 此三體無別」52)

이라고 한 것은 그 敎證이다.

  다음에 證自證分 存立의 증거는 本論 卷二에 二理證을 들고 있다.

 「此若無者誰證第三心分 旣同應皆證故(其一) 又自證分應無有果 諸能量者必有果故(其二)」53)

  그리고 또「厚巖境」頌에

 「衆生心二性 內外一切分 所取能取纏 見種種差別」54)

이라고 한 것은 敎證이다. 이 四分說은 護法을 이어 勝友, 最勝子, 智月등에 의하여 계승되어 法相敎義의 정통사상이 되었다.

  위에서 말한 阿賴耶識의 能所緣의 行相은 매우 미세해서 凡夫의 지혜로는 알기 어려우므로 前六識의 能所緣이 알기 쉬운데 비해서 不可知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所緣에는 種子와 有根身과 器界의 三이 있는데 種子와 有根身을 執受라고 하며, 器界를 處라고 이름하였다. 즉 有情의 身體와 外界의 萬有는 모두 第八阿賴耶識의 所緣인 相分으로서 識의 自體로부터 變現한 境에 불과한 것이다.

 

  다음에 能緣의 見分을 了라고 이름하는데 所緣이 미세해서 알기 어려움과 같이 能緣도 역시 不可知하므로 頌文에 「不可知執受處了」라고 하였다.

 

5. 所緣門

 

  (1) 三類境說의 興起

  앞에서 말한 行相門은 第八能變識의 行相 즉 能緣心의 作用을 四分說에 의해 究明한 것이요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所緣門은 相分인 所緣境을 三類境에 의해서 究明한 것이다.三類境은 앞의 四分論에 의해서 생기는 것으로 三類境은 四分의 附帶論이라 할 만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三類境의 뜻은 成唯識論에는 아직 언급되지 않고 중국에 와서 玄 에 의해서 비로소 창설되었다. 즉 玄 三藏이 인도에 가서 戒賢論師로부터 이 三類境義의 眞意를 전해받아

 「性境不隨心 獨影唯從見 帶質通情本 性種等隨應」55)

이라고 하는 一偈의 頌文을 지어서 慈恩大師에게 秘傳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三類境義가 일어난 유래다. 三類境의 이름은 頌에 의해서 세운 것으로 性境과 獨影境과 帶質境이다.

  이제 이 문제가 唯識學上에서 발생하게 된 원인을 먼저 간단히 소개하기로 하겠다. 저 四分說中 相分과 見分은 동일한 種子로부터 발생한 것인가? 아니면 각기 다른 種子로부터 발생한 것인가? 이 同種生 別種生의 문제가 原因이 되어 여기에 三類境論이 發생하게 된다.

  그런데 相見同別種論에 대해서는 인도論師들 사이에서도 가지가지 異說이있었던 것 같다. 「義燈」卷一에

 「問相見二分爲同種生爲別種起 答有三師不同 一師云見相同種生起…第二師云見相別種…第三師云見相二分隨其所應種或同異…」56)

라고 하였으니 이에 의하면 相見同別論에 대해서 相見同種生說, 相見別種生說, 相見혹同혹이說 등의 三說이 있었던 것 같다.

  第一의 相見同種說이란 相分과 見分이 同種으로부터 생긴다고 하는 주장으로, 여기에는 또한 三法同種生說과 兩法同種生說의 두 종류가 있다. 前者는 本質과 相分과 見分의 三法이 同一種으로부터 現行하는 것인데, 見分의 唯一의 現行에 의해서 熏習된 種子는 本質과 相分과 見分 자신을 生할 공능이 되어, 阿賴耶識中에 含藏되었다가 緣을 만나면 세 가지 양상으로 現行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 설은 護法正義에 의해서 第八相例의 과실과 諸法雜亂의 과실을 지적해서 評破하였다. 다음에 兩法同種生說은 見相二分은 동일한 種子로부터 現行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 護法家는 違敎의 허물과 界雜亂의 허물을 들어서 評破하였다.

  第二의 相見別種生說은 相分과 見分은 각기 다른 種子로부터 생긴다는 說인데, 이에 대해서도 護法家는 세 가지 과실을 지적해서 評破하였다.57) 세 가지 과실이란 假法種生과 聖敎相違와 假法能熏이니 여기서는 그에 대한 해석을 생략한다.

  第三或同或異說은 護法論師의 正義로서 相見의 兩分은 혹은 同種生이며 혹은 別種生으로 일정하지 않다고 하는 설이다. 이제 그 실례를 든다면, 第六意識이 스스로 변하여 반연하는 龜毛나 兎角 등과 같은 境은 相分과 見分이 동일한 種子로부터 생기는 것이요 第六意識이

 

第八識 所變이 五根을 반연하는 것과 같은 境은 相分과 見分이 別種으로부터 생긴다. 이때에 龜毛나 兎角과 같은 境은 그 境을 발생할 本質이 없는 假現의 境이요, 이에 비해서 五塵과 같은 境은 그 本質이 있는 實의 境이다.

  이와 같이 能緣主觀에 대한 所緣客觀은 實境도 있고 假境도 있는데, 假境이란 相分이 見分의 熏習力에 의해 熏附되는 見分熏으로서 相分 그 自體가 따로 種子를 熏習하는 것이 아닌데 반하여, 實境이란 見分과는 하등 관계가 없이 相分이 그 自力으로 그 種子를 熏附하는 것이니 이른바 相分熏이란 것이 그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三說中 相, 見의 種子는 或同或異說을 正義로 한다. 그 중 或異의 경우 別種生의 相分은 性境에 해당하고 或同의 경우 同種生의 相分은 獨影境에 해당하며, 俱有의 경우 同別兩種生의 相分은 帶質境에 해당한다. 그리고 앞의 四分說이 主觀論임에 대하여 여기에서 말하는 三類境義는 客觀論이다.

 

  (2) 三類境義

  그러면 三類境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들의 인식대상의 종류를 논한다면, 대상으로서 實在性(本質)이 있는 것과 實在性이 없는 것(幻覺)과 또 이 兩性質을 겸하고 있는 것(本質, 幻覺) 등의 세 종류가 있는데, 이 중에 第一이 性境이요 第二가 獨影境이며 第三이 帶質境이다. 이하에 三類境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ㄱ) 性境

  性境의 性은 體性으로서 不改의 뜻이며 境은 所緣의 境을 말한다. 이 性境은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즉 實種소생과 有實體用과 得境自相이다. 實種所生이란 第八阿賴耶識이 變現한 五根五境과 또 前五識所緣의 五境 및 五俱意識의 現量緣의 五境과 같은 것은 모두 實種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이에 반하여 龜毛, 兎角 같은 대상은 따로 種子가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如幻無實한 대상이다. 그리고 꿈 속에 감각하는 대상도 實種所生이 아니다. 왜냐하면 꿈 속에서 본 물은 적시는 일이 없고 또 꿈 속의 불도 태우는 능력이 없으며 또 꿈 속에 밥을 먹는다 할지라도 결코 배부른 실이 없으니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경계는 모두 實種所生이 아닌 까닭이다. 이에 반하여 第八識에서 變現하는 바 五境과 같은 것은 모두 實種所生이므로 實의 장애가 있다.

  二에 有實體用이란 實種으로부터 생긴 境은 實의 體와 用이 있다. 예를 들면 불은 물체를 태우고, 물은 적시며, 山은 높고 낮음의 구별이 있고, 바다는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는 등, 다 각각 실체가 있으며 실체가 있음에 따라 實의 작용도 있다.

  三에 得境自相이란 前五識이 所緣의 대상인 色, 聲 등 五境을 緣하는 現量識의 作用을 말한다. 우리들이 第八識中에서 그 인식의 대상자체를 자체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오직 眼, 耳 등 前五識뿐이다.

  이에 대하여 第六意識 가운데 五同緣의 意識은 대상의 自相을 얻을 수 있지만 五不同緣의 意識은 착각이 많으며 第七末那識은 온전히 착각의 識이며, 第八阿賴耶識은 원래 外境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므로 이에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

  요컨대 性境이란 境自體의 性을 보존하고 있어 우리들의 착각에 의하여 변동하는 대상이 아니라 主觀의 緣不緣에 관계없이 外界에 엄연히 존재하는 대상이다. 頌에 「性境不隨心…性種等隨應」이라 한 바와 같이, 性境은 能緣心에 따르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이유를 밝혔으니, 이에 性不隨心과 繫不隨心과 種不隨心의 三不隨가 있다.

  一에 性不隨心이란 性은 善惡無記의 三性으로서, 이 境은 이들 三性에 있어서 잘 自性을

 

지켜 결코 能緣의 마음에 따라서 同性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色, 聲 등 五塵의 성질은 無覆無記로서 이를 인식하는 能緣心이 설사 善性이나 또는 不善性이라 할지라도 五境은 能緣心에 따라서 善心이나 不善性으로 그 性을 고치지 아니하고 自性인 無覆無記性을 그대로 지킨다.

 二에 種不隨心이란 種은 種子의 뜻으로서 性境의 種子는 能緣見分의 種子와는 다르며, 결코 見分을 따라서 同種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五識所緣의 五塵境과 같은 것은 다 각각 本質이 있어서 見分의 種子와는 別種性의 境이다.

  다시 말하면 見分은 見分으로서의 種子가 있어 見分의 作用을 하고, 所緣境인 相分은 相分으로서의 種子가 別有하여 그로부터 전개되는 것이다.

  三에 繫不隨心이란 繫는 界繫의 뜻으로서 性境이 能緣과 界繫를 달리 한다는 것이니, 즉 性境의 界繫는 잘 자기를 지켜 결코 能緣의 見分에 따라서 同繫가 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몸이 色界에 있으면서 그 眼識이나 耳識으로서 欲界의 境을 반연할 때 能緣의 見分은 色界에 繫屬하나 所緣의 相分은 欲界에 繫屬되어 있는 것과 같다. 이는 우연한 일치에 불과한 것으로 결코 所緣이 能緣에 따라서 欲界에 繫屬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三不隨의 義를 갖추어야만 性境에 攝할 수 있으므로 頌文에 「性境不隨心」이라 하였다.

  (ㄴ) 獨影境

  獨影境이란 대상으로서의 本質이 없이 다만 能緣하는 主觀心에 의해서 如幻虛假한 영상만이 홀로 일어나 대상으로서 性境과는 전연 반대의 境이다. 이것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一에 獨影境은 能緣心과 동일한 種子로부터 생긴다. 즉 이 相分의 種子는 本質이 別有한 것이 아니고 오직 見分의 세력에 의해서 나타난 境이다. 예를 들면 第六意識이 空華 등과 같은 無體法을 반연할 때에 見分이 이 空華의 相分을 띠고 見分의 自種을 熏하였다가 다음에 이 見分의 種子로부터 見分의 種子가 現行할 때 저 空華의 相分을 띠고 現行하는 것이 마치 한 개의 콩씨가 능히 줄기와 잎을 同一體로부터 발생하는 것과 같다. 즉 能緣心인 見分의 種子가 所緣相分의 種子를 띠고 相分의 境을 現行하는 것이므로 境自體는 하등의 實種이 없다.

  二에 獨影境은 實의 體用이 없다. 이 境은 所生의 원인이 實存性이 없이 오직 見分이 變現한 것에 불과하므로 그 실체가 없고, 實體가 없으므로 따라서 實用도 없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夢中에 천하를 정복하였다 할지라도 꿈을 깨면 實體가 없는 것과 같다.

  三에 能緣心은 境의 그 자체를 얻을 수 없다. 境으로서의 獨影境이 이미 實의 體用이 없는 것이므로 그 자체도 있을 리 없다. 즉 如幻虛假한 대상을 반연하였기 때문에 별로 그 自相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獨影境은 性境이 三不隨임에 반하여 三隨心이니 頌에「獨影唯從見」이라 한 것이 곧 그 의미이다. 즉 性隨心과 種子隨心과 界繫隨心이다.

  一에 性隨心이란 獨影境은 따로 자체가 없어서 能緣의 見分에 따라 善, 惡, 無記의 三性이 된다. 이와 같이 三性은 見分에 따라 同一種이 되므로 性隨心이라 한다.

  二에 種隨心이라 此境의 種子는 別有한 것이 아니고 오직 見分이 自種을 훈습할 때에 이 相分의 種子도 이것을 동시에 띠고 熏하는 것이다. 즉 種子는 能緣의 見分과 동일한 種子이므로 이것을 種隨心이라고 한다.

  三에 繫隨心은 이 境이 自體가 없다. 즉 자체가 없기 때문에 또한 能緣하는 見分의 界繫

 

에 따라서 轉하므로 이것을 繫隨心이라 한다.

  요컨대 獨影境은 앞의 性境의 三義와 반대로 實種所生도 아니며 實體實用도 없어서 能緣의 分別力에 의해서 變現한 假境인 相分에 불과하다. 즉 幻覺의 대상일 뿐이다. 마치 거울 속에서 비친 불이 실제의 불이 아닌 것과 같다.

  이 獨影境의 實體는 無本質의 境과 有本質의 境이 있다. 無本質의 실례를 든다면 第六意識의 獨頭意識이 龜毛와 兎角과 같은 無實體의 法을 대상으로 하여 반연하는 것과 같다. 또 有本質의 실례를 본다면 凡夫가 經論所說의 無爲眞如의 법문을 듣고 이를 相分으로 하여 반연하는 것과 같다.

  (ㄷ) 帶質境

  帶質境이란 相分은 항상 本質을 띠고 있으나 能緣心이 境의 自相을 얻지 못하므로 인하여 비슷한 相分을 생하는 것을 말한다. 帶는 佩 또는 狹帶의 뜻이며 質은 本質을 말한다. 즉 色心등의 諸法을 所緣의 境으로 할 때 그 境의 實體를 가리킨다. 帶에는 狹帶와 帶似의 二義가 있은데, 狹帶란 親附의 뜻으로서 能所가 親附해서 서로 여의지 않음을 말한다. 비유컨대 몸에 칼을 차는 것과 같은 것이 帶의 뜻이다. 帶似란 비슷하다는 뜻으로 能緣의 本質과 비슷한 相(相은 相分)이니 즉 心과 質이 서로 여의지 아니함을 帶似라고 한다. 비유하면 滿面에 朱를 帶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 境이 本質을 가지고 있는 面은 獨影境의 無本質(獨影境에 有本質도 있으나 이제는 多分을 잡아서 말함)과 다르며 能緣心이 自相을 얻지 못하는 것은 性境이 自相을 얻는 것과도 다르다. 따라서 帶質境은 性境과 獨影境과의 중간에 위치하므로 種子, 三性, 界繫도 本質과 能緣과의 兩者에 따라서 판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頌에 「帶質通情本」이라 하였는데, 情은 見分이요 本은 本質로서 性, 種, 繫의 三種이 情과 本에 다 통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 通情本의 뜻에는 性通情本 種通情本 繫通情本의 三種이 있다.

  一. 性通情本은 이 境의 성질이 見分과 本質에 다 통함을 말한다. 즉 第七見分이 第八見分을 本質로 하여 相分을 緣할 때 만약 相分이 本質에 從屬하면 無覆無記가 되고 能緣見分에 種屬하면 有覆無記가 된다. 비유하면 거울 속에 부정한 물체가 비추었을 때 부정한 물건을 따르면 부정물이라 하고, 거울의 밝음을 따르면 청정이라 하는 것과 같다.

  二. 種通情本은 이 境의 種子가 見分과 本質에 다 통함을 말한다. 이는 「同學 」에 先代未決이라고 평할 만큼 異論이 많은 문제이다. 즉 此境의 種子는 別種所生이나 그 體가 미약하므로, 本質과 見分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種子를 熏習할 수가 없다. 또 후에 現行할 때에도 역시 本質과 見分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생할 수 없으므로 通情本이라 할 뿐이다.

  三. 繫通情本은 이 境의 界繫가 見分과 本質에 다 통함을 말한다. 第七見分이 第八見分을 반연할 때 이미 七, 八 二識은 반드시 界繫를 동일하게 한다면 이 兩者에 따라 判定하는 相分의 界繫도 반드시 동일함은 물론이다. 帶質境은 이와 같이 三通情本의 뜻이 있으므로 頌에「帶質通情本」이라고 한 것이다.

  대개 三類境은 모두 能緣의 이름을 달리하고 있으니 性境에는 心, 獨影境에는 見, 帶質境에는 情이라고 하였다. 性境에 心이라 한 것은 心境을 相望해서 널리 能緣함을 말하고, 獨影境에 見이라 한 것은 相分을 相望해서 말하고, 帶質境에 情이라 한 것은 情으로서 思量分別함을 말한다.

  이상으로써 玄 三藏이 지은 頌中 前三句는 해석하였으나 아직 末句의 「性種等隨應」의 一句는 해석하지 못하였다. 이 句에 대해서는 日本南北兩寺의 해석이 서로 어긋나는 데가 있다. 즉 南寺에서는 第四句는 第三句의 帶質境을 거듭 해석한데 불과하다고 보았다. 왜냐하

 

면 「獨影唯從見」의 唯字는 전후의 句에 통하므로 性境도 唯不隨의 法으로서 性, 種, 繫의 三이 모두 不隨의 뜻이 있다. 그러나 帶質境은 唯通情本이라는 뜻이 있어 性, 種, 繫의 三이 모두 情과 本에 다 통하는 法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性, 種, 繫를 따라 분별함은 帶質境뿐이므로 第四句는 帶質境만에 대해서 해석한 것으로 보아 「隨應」이라고 頌하였다고 한다. 이에 비하여 北寺에서는 「了義燈」一末에

 「性種等隨應者通釋前三句 謂前三句中隨其所應判性種等不可一例」58)

라고 한 文句에 의거해서 이는 前三句를 通釋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로써 三類境의 개요를 살펴보았다. 요컨대 三類境이란 四分說 中에 우리들의 心識所變인 相分의 성질을 자세히 서술한 것이다.

 

6. 相應門

 

    (1) 心所의 總說

  本識을 해석하는 十門中 위에서 이미 五門을 해석하였고 八段中에는 初 二段을 해석하였다. 이제는 八段中 第三段, 즉 十門中 第六門의 相應門을 고찰하고자 한다.

  心所는 心所有法이라고도 한다. 즉 항상 心王에 의지하여 일어나고 心王과 상응하여 能緣의 作用을 일으켜서 心王에 繫屬된 作用을 하는 것이 마치 내게 속한 물건을 내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心所有法은 결코 단독으로 생기지 않고 반드시 心王에 의해서 생기고 心王과 相應하므로 「俱舍論」에 心의 主體를 王에 비유하고 心所를 신하에 각각 비유하였다. 法相敎義에서 이 心所有法을 編行, 別境, 善, 煩惱, 隨煩惱, 不定 등 六位로 분류하여 해석하였는데, 그 중 遍行位가 이 相應門에 해당하므로 이를 상세히 서술하고자 한다.

  이 相應에 대해서 本論 卷三에

 「此觸等五與異熟識行相雖異 而時依同所緣事等故名相應」59)

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相應의 四義라는 것인데 時同과 依同과 所緣等과 事等이다.

  (一)時同은 心王, 心所가 同一刹那에 생기는 것을 말한다. 만약 二者가 전후하여 現起한다면 相應이라 할 수 없다.

  (二)依同은 心王과 心所는 所依의 根이 동일한 것을 말한다. 所依의 根은 俱有依인 六根과 等無間依인 意根으로서 相應이라면 반드시 이러한 根을 동일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三)은 所緣等이니 所緣은 相分으로서 心王과 心所는 相分이 비슷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시간과 所依가 같다 할지라도 心王과 心所의 所緣이 비슷하지 않으면 相應이라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眼識과 眼識相應의 心所法이 앞의 色境을 반연할 때에 色塵은 동일하나 그 能緣의 心과 心法은 다 각각 本質에 의탁해서 자기의 相分을 變現해서 見分이 이를 緣取하므로 사실에 있어서는 所緣이 각각 다르다. 이와 같이 각각 다르지만 心王과 心所의 所緣이 다 같은 色境이며 또 비슷하므로 같다고 하는 것이다.

  (四)는 事等이니 事는 自體分으로서 心王과 心所가 각각 하나라야 한다. 즉 心王이 一法이면 相應의 心所도 각각 一法에 한하고 결코 二法, 三法 등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受의 心所에는 苦, 樂, 捨 등 三受가 있는데 三受가 함께 일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이상의 四義를 구비하는 것이 心心所相應의 뜻이다.

  그러면 心과 心所는 相應하여 어떠한 作用을 하는가? 所緣의 경계에 대하여 인식작용을

 

하게 되는데 이 作用에는 性用과 業用의 두 가지가 있다. 性, 業의 구별은 自性에 친한 作用을 性用이라 하고 性用上에 성근(疎) 작용을 業用이라 한다. 비유하면 熟을 放射하는 것은 親用이라하고 물건을 태우는 것은 疎用이라 하는 것과 같이 작용이 스스로 二種으로 구별된다. 心王과 心所가 동시에 동일한 境을 반연한다 해서 그 行相에 差別이 없다면 心王과 心所의 別體를 인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論 卷五에

 「心於所緣唯取總相 心所於彼亦取別相 助成心事得心所名 如 師資作模塡彩」60)

라고 한 것과 같이, 心王은 境의 總相을 반연하고 心所는 이 境에 대해서 種種의 相狀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論에서 비유하기를 스승과 제자가 한폭의 그림을 그린다면 스승은 먼저 그림의 윤곽을 그리고(總相) 제자는 그 위에 적당한 색채를 칠하여(別相)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과 같다. 스승이 전체의 윤곽을 그리는 것은 心王이 境의 總相을 緣取함에 비유하고, 제자가 색채를 칠함은 心所가 別相을 緣取하는데 비유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味境에 있어서 心王은 이를 반연해서 쓰다(苦) 달다(甘)는 總相을 분별하고 心所는 이에 대해서 혹은 苦受를 일으켜 이를 싫어하고, 혹은 樂受를 일으켜서 이것을 좋아한다. 어떤 것은 쓰고 어떤 것은 달다고 分別하여 喜怒 등 종종 차별의 상을 일으키는 것을 別相을 반연한다고 한다. 別相을 반연한다는 것은 마치 색채를 칠함에 그림의 윤곽을 여의지 않는 것과 같이 總相을 여의고 別相을 緣取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心所는 總別相을 겸해서 所緣으로 하나 總別 二個의 相分을 함께 일으킬 수는 없는 것이다. 즉 總相에 心所 각자의 行相을 의거해서 別別의 義相을 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心王, 心所는 能緣의 行相이 동일하지 않으므로 「瑜伽論」등에 心과 心所를 「不同一行相」이라 하였다.

  이상에서 서술한 것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心王             總相(體相) ―

  能緣心 ―                                 ― 所緣境

           ― 心所             別相(義相) ―

 

    (2) 心所相應義

  心心數法의 數에 대해서는 小乘과 大乘 사이에 다소의 相違點이 있다. 法相敎義에서는 이 心所를 모두 六位로 분류하니 遍行位, 別境位, 善位, 煩惱位, 隨煩惱位, 不定位이다. 즉 論五에

 「雖諸心所名義無異 而有六位種種差別 謂遍行有五 別境亦五 善有十一煩惱有六, 隨煩惱有二    十 不定有四 如是六位合五十一」61) 

이라고 한 것이 이른바 六位 五十一心所說이다. 이 六位, 五十一心所說中 初遍行  五心所에 대해서 본다면 遍行이란 周遍行起의 뜻으로서 一切心王에 두루 일어나는 心所를 말하는 것이다. 本頌에

 「相與觸作意, 受, 相, 思相應」62)

이라 있는 것이 그것이다.

  常이란 第八識이 무시이래로 金剛無間道位에 이르기까지 항상 觸 등 遍行의 五心所와 상응해서 함께 일어남을 말한다. 이 遍行에 四一切의 뜻이 있으니 一切性과 一切地와 一切時

 

와 一切俱이다. 一, 一切性은 善, 惡, 無記三性中 어느 性에도 통하는 것을 말한다. 二, 一切地는 有情類가 사는 三界를 九地 혹은 三地로 분류한 것이다. 九地란 欲界散地를 一地로 色界를 初, 二, 三, 四禪의 四地로 無色界를 空無邊, 識無邊, 無所有, 非想非非想處 등 四地로 나누어 九地로 한 것이고, 三地는 尋伺의 起未起를 따라서 세운 有尋有伺地, 有尋無伺地, 無心無伺地 등 三이다. 三地나 九地가 모두 三界를 구분한 것으로 이들 三地(九地) 中에 두루 일어나는 것을 一切地라 한다. 三, 一切時는 有心時에는 반드시 두루 일어나는 것으로 무시이래 끊임없이 一切의 境을 緣取하는 것을 말한다. 四, 一切俱는 어떠한 때라도 이 遍行의 五心所가 결정적으로 함께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遍行의 心所에는 觸, 作意, 受, 相, 思의 五種이 있는데 그 의의는 다음과 같다.

  (ㄱ) 觸

  觸이란 本論 卷三에

 「觸謂三和分別變異 令心心所觸境爲性 受想思等所依爲業」63) 

이라고 한 바와 같이 根, 境, 識의 三이 화합함에 의해서 생김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眼 등의 所依根과 色 등의 所緣境과 眼 등의 能緣識 三者가 수순화합함에 의해서 생기고 또 三者로 하여금 화합케 하는 作用을 하는 心所이다. 이 心所의 작용에 性用과 業用이 있다. 예를 들면 불은 뜨거운 성질이 있으므로 물건을 태운다. 이 때에 뜨거운 성질은 불의 자체에 친한 작용이므로 性用에 비유하고, 태우는 성질은 자체에 대해서 약간 성근 작용이므로 業用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三和란 識으로 하여금 根에 의해서 境에 대해서 공능으로서, 이러한 공능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오로지 觸의 힘에 의하므로 觸을 三和라고 한다. 이러한 공능은 三和한 후에 비로소 일어난 것으로 三和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三和 이전에 이 공능이 없음에 대하여 三和 이후를 分別變異라고 한다. 즉 變異는 三和의 공능이며 分別은 觸의 공능이다.

  요컨대 이 觸은 根, 境, 識 三法이 화합함에 의해서 自種子로부터 생겨서 일체의 心과 心所로 하여금 根에 의해서 境에 觸對하는 것을 性用 즉 親用이라 한다. 이미 心所로 하여금 境에 觸하게 하였으므로 다음의 서술할 受, 想, 思 등의 모든 心所도 또한 觸의 心所를 所依로 해서 생기게 된다. 이것이 곧 觸心所의 業用 즉 疎用이다.

  (ㄴ) 作意

  作意는 心法을 경각하는 뜻으로서 論에

 「作意謂能警心爲性 於所緣境引心爲業」64)

이라고 하는데, 경각에는 種子警覺과 現行警覺의 二種이 있다. 種子警覺은 作意의 種子가 다른 心과 心所의 種子를 警覺해서 現行하는 것을 말하고, 現行警覺은 現行한 作意가 다른 現行의 心法을 警覺해서 所緣의 境에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作意의 種子는 心과 心所를 警覺해서 現行을 생하는 것을 그 性用으로 하고 또 心과 心所를 所緣의 境에 나아가게 하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 그런데 心所의 순서에 있어서 「唯識三十頌」은 觸, 作意, 受 등으로 되어 있고 「大乘百法明門論」에는 作意, 觸, 受 등의 순으로 되어 있는데, 선후에 대한 論難이 심하였다. 唯識에는 現行에 있어서 觸한 후에 作意하므로 觸을 앞에 두어야 한다 하고, 百法에는 種子의 位를 들어서 作意를 앞에 두었다고 한다. 먼저 觸한 후에 作意하므로 觸을 앞에 두는 것이 가하다고 생각된다.

 

  (ㄷ) 受

  受는 論文에

 「受謂領納 順違俱非 境相爲性 起愛爲業」65)

이라고 한 바와 같이 快, 不快의 감각적 작용을 말한 것이다. 즉 所緣의 境을 받아들일 때 順은 自情에 순하는 境을 받아들이고 違는 自情에 어기는 境을 받아들이며, 俱非는 順違 兩者 어느 것도 아닌 境을 각각 받아들이는데 이 作用을 性用이라 한다.

  다음 愛를 일으킨다 함은 아직 얻지 못한 順境에는 합하고자 하고, 이미 얻은 순경은 여의지 않으려 하며, 이미 얻은 違境은 여의고자 하며, 얻지 못한 違境은 합하지 않으려 하며, 俱非의 境에는 합하려고도 여의려고도 하지 아니하나, 또한 이루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곧 業用이다.

  그런데 이 受에는 三受, 五受의 구분이 있는데, 三受는 苦受, 樂受, 捨受이며 五受는 이에 憂受, 喜受를 더한 것이다. 苦受는 違境을 받아들여 身心을 핍박하는 것을 말하고, 樂受는 順境을 받아들여 身心을 즐겁게하는 것을 말하며, 捨受는 不違, 不順의 境을 받아들여 身心을 핍박하지도 않고 즐겁게 하지도 않는 것을 不苦不樂受 즉 捨受라고 한다.

  다음에 五受는 苦受를 苦受, 憂受로 나누고, 樂受를 樂受, 喜受로 나누어 捨受를 합한 것이다.

  受에는 또한 身受와 心受의 二種이 있는데, 前五識은 五根인 色身을 所依로 해서 苦, 樂인 快, 不快를 감각하므로 이를 身受 또는 無分別受라 하고, 第六識은 第七識인 心法을 所依로 해서 가지가지로 계탁분별해서 憂喜하므로 心受 또는 有分別受라 한다. 이에서 말하는 無分別受란 불에 접촉해서 뜨겁다고 감각하는 것과 같이 하등의 분별이 없이 느끼는 것(重受)을 말하고, 有分別이란 意識上에 分別을 일으켜 喜憂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輕受)을 말한다. 이것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前五識과 相應하는 것(色根을 所依로 함)을 身受라 하고, 意識과 상응하는 것(意根을 所依로 함)을 心受라고 한다.

 

(三受)               (五受)                                            (二受)

                      苦

  苦                              無分別(重)        前五識相應         身受

                      憂

                      樂

  樂

                      喜          有分別(輕)        第六識相應          心受

  捨                  捨

 

  (ㄹ) 想

  相은 成唯識論에

 「相謂於境取相爲性 施設種種名言爲業」66)

  이라고 한 바와 같이, 所緣한 境에 靑, 黃, 赤, 白, 方, 圓, 長, 短 등의 차별상을 취하는 것을 性用으로 하고, 그 所緣의 境上에 靑, 黃, 赤, 白 등의 名言을 施設하는 것을 業用이라 한

 

다.67) 다만 名言을 일으킬 用이 있으나 이는 尋·伺와 같이 직접 언어를 발할 因이 되지 않고 尋·伺의 因이 되어 간접으로 언어를 發할 因이 되기 때문에 想이라 한다.

  (ㅁ) 思  

  思는 成唯識論에

 「思謂令心造作爲性 於善品等役心爲業」68)

이라고 한 바와 같이, 心과 心所로 하여금 여러 가지로 造作하게 하는 것을 性用이라 하고, 善 惡品의 境에 心과 心所를 使役해서 善, 惡事를 일으키게 하는 것을 業用이라 한다. 이 思에 三이 있으니 審慮思와 決定思와 動發勝思이다. 審廬思는 善惡 등을 조작하려고 하는 思量의 位이며, 決定思는 바르게 조작하려고 하는 位이며, 動發勝思는 바르게 身語를 발동하는 位이다. 이 세 가지 중 初의 二는 加行位로서 아직 業道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第三의 初刹那에는 根本業道를 이룬다. 그러므로 이 思의 心所는 業道의 근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識은 무시이래로 항상 五種의 心所와 상응해서 결코 끊임이 없으므로 「常與觸, 作意, 受, 相, 思相應」이라 하였다. 五遍行의 心所는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第八識에 통하나 이제는 第八識의 相應法을 들어서 論하였음을 밝혀둔다.

 

7. 五受門

 

  이 五受相應門은 널리 本識을 해석하는데 十門이 있는 중 第七門이고 또 八段中에는 第四에 해당된다. 相應心所中 受의 行相에 憂, 喜, 苦, 樂, 捨의 五受가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 중 이 識은 어떤 受와 相應하는가를 분별한 것이 이 門으로서 論에

 「此識行相極不明了 不能分別違順境相 微細一類相續而轉 是故唯興捨受相應 又此相應受唯是    異熟 隨先引業轉不待現緣 任善惡業勢力轉故唯是捨受 苦樂二受是異熟 生非眞異熟 待現緣故    非此相應 又由此識常無轉變 有情恒執自內我 若與苦樂二受相應有轉變 寧執爲我故此但與捨    受相應」69)

이라 한 바와 같이, 第八阿賴耶識이 五受中 다만 捨受와 相應하고 餘受와 相應하지 않는 세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이 識의 行相은 극히 명료치 않아서 違順의 境相을 분별치 못하고 매우 미세해서 一類로 상속하기 때문에 오직 捨受와 相應한다.

  둘째 이유는 이 識은 眞異熟이므로 상응의 受도 또한 眞異熟이 아니면 안된다. 그러므로 第八識은 異熟인 捨受와는 상응하나 苦, 樂受와는 상응하지 않는다.

  셋째 이유는 이 識은 一類 相續해서 轉變함이 없으므로 第七識이 집착해서 自內我를 삼는다. 만약 苦樂의 二受와 相應하면 문득 轉變함이 있으리니 어찌 집착해서 我를 삼으리오. 따라서 상응의 受는 반드시 捨受만을 요한다.

  요컨대 捨受 이외의 것은 명료하게 違順의 境을 分別하며 끊임이 있는 受이므로 이 識과 상응하지 않는다. 이 門은 本頌의 「相應唯捨受」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므로 이 第八阿賴耶識과 상응하는 것은 오직 捨受뿐임을 밝힌 것이다.

 

 

8. 三性門

 

  이 三性門은 本識을 해석하는 十門中 第八門이며 八段中 第五段에 해당한다. 이 門은 本頌의 「是無覆無記」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第八阿賴耶識은 三性中 어디에 攝하는냐를 밝힌 것이다. 三性이란 善, 惡, 無記로서 二性, 三性 혹은 四性으로 분류하니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善            善              善

           惡           不善             染            染

   性 ―                有覆無記

        ― 無記                          無記          淨

                        無覆無記  

 

  먼저 三性의 名義를 「成唯識論」에 의거해서 해석하면 현세와 후세에 수순하고 이익하게 하는 것을 善이라 하고, 현세와 후세에 어기고 수순하는 것을 不善이라 하며, 善과 不善의 이익과 손해에 있어서 記別할 수 없음을 無記라고 하였다. 또 無記에 有覆, 無覆의 二種이 있다. 有覆無記란 覆은 覆障, 覆蔽의 뜻으로서 그 體가 染汚이므로 無漏聖道의 智를 障 하고, 또한 法性心(眞如心)을 가려서 부정하게 하므로 有覆라고 하며, 善, 惡 등과 같이 記別할 것이 없으므로 無記라 한다. 無覆無記는 苦樂 등의 感果의 用이 없을 뿐만 아니라 聖智와 心性을 蔽障함이 없으므로 無覆無記라고 한다. 이 無覆無記에 異熟無記와 威儀路心無記와 工巧處心無記와 變化心無記 등의 四種이 있는데 後三無記의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異熟無記에 대한 설명만 하고자 한다.

  異熟無記는 善惡의 業種子에 이끌려 생기는 五趣의 과보를 말한다. 異熟이라 이름한 이유는 引業인 業種子를 善 혹은 惡이나, 과보는 無記이므로 因是善惡果是無記라고 하였다. 즉 果에서 말하면 異性의 因에서 익은 果이며, 因에서 말하면 因과는 달리 익은 異性의 果이므로 異熟이라 한다. 이 과보는 하등 후세에 대한 세력이 없으며 또한 染汚도 없고 善惡도 없어서 순수한 無記法이므로 異熟無記라고 한다.

  이상에서 말한 三性中 第八識이 無覆無記에 섭하여지는 근거로서 「成唯識論」에는 세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此識唯是無覆無記異熟性故 異熟若是善染汚者流轉還滅應不得成 又此識是善染依故若善染者    互相違故應不與二俱作所依 又此識是所熏性故 若善染者如極香臭應不受熏」70)

이라 한 것이 이것이다.

  첫째 이 第八識은 異熟性이기 때문에 無覆無記라고 하는 이유는, 異熟性이란 總報의 果體로서 異熟의 果體가 善惡의 性이라 한다면 流轉도 還滅도 함께 이룰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善이라면 항상 善果를 이끌어 유전하지 않을 것이며, 不善이라면 항상 不善을 이끌어 還滅에 향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果體는 無記이므로 善, 惡이 이끄는 대로 차생의 果體를 轉해서 유전할 수도 還滅할 수도 있다.

  둘째 第八識은 善染의 所依이므로 無覆無記라고 하는 이유는, 이 識은 總報의 果體이므로 善染汚 諸心所의 所依가 된다. 第八識 自體가 善이라면 染汚法의 所依가 될 수 없고, 染汚이면 善法의 所依가 될 수 없기 때문에 第八識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無覆無記가 아니

 

면 안된다.

  셋째 이 第八識은 所熏處이므로 無覆無記라고 하는 이유는, 第八識은 三性의 種子에 두루 所熏이 된다. 일체법이 만약 種子 없이 現起한다면 無因性의 謬見에 떨어지게 되며, 種子가 있다면 반드시 所熏所依의 體가 없을 수 없다. 즉 이 所熏所依處의 根本이 바로 第八阿賴耶識이다. 第八識이 善 또는 染汚라면 마치 香臭의 물체에 香臭의 훈습을 받을 수 없는 것과 같이 能熏의 七識에 대해서 所熏處가 될 수 없게 된다.

  이상 세 가지 이유에 의해서 第八識은 無覆無記임을 알 수 있다.

  因果譬喩門 앞에 八段中 第六段에 心所例同門이 있는데, 이 門은 本識 心王의 뜻을 설한 것이 아니다. 本頌에서 「觸等亦如是」라 한 것과 같이 상응의 心所有法을 心王에 例同할 수 있으므로 十門中에서는 제외되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고 因果譬喩門에 나아가서 서술하고자 한다.

 

9. 因果譬喩門

 

  이 一段은 널리 本識을 밝히는 八段中 第七段이며 十門中에는 第九에 해당된다. 이는 頌의 「恒轉如暴流」에 의해 설치된 門으로 이 識이 因果生滅해서 斷常치 않는 뜻을 비유로써 해석한 것이다. 恒轉의 恒은 상속해서 간단함이 없음을 나타내고, 轉은 生滅轉變해서 항상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識은 堅住性으로서 무시이래 一類相續해서 항상 간단함이 없으며 三界, 五趣의 근본이 되어 능히 諸法의 種子를 執持해서 잃지 않는다. 이것이 不斷한 恒의 뜻이다. 그러면서도 第八識은 무시이래로 念念刹那에 생멸해서 전후에 轉變하므로 능히 諸法의 熏習을 받는다. 이것이 항상하지 않는 轉의 뜻이다.

  如暴流는 이 識의 非斷非常의 뜻을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 비유가 있으니, 法生滅喩와 波浪起喩와 內外物漂流喩이다. 法生滅喩는 第八阿賴耶識이 무시이래로 생멸상속해서 非常非斷하면서 능히 業煩惱를 가진 중생을 漂溺해서 나오지 못하게 함이, 마치 暴流水가 밤낮으로 끊임없이 흐르면서 오랫동안 물건을 표류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波浪起喩는 第八識이 일체의 種子를 가지고 三界에 생하며 또 衆緣을 만나 眼識 등을 일으키나 항상 상속해서 끊이지 않는 것이, 마치 暴流水를 바람이 펴서 파랑을 일으키나 흐르는 것이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內外物漂流喩는 暴流水가 물 속의 고기와 물 위의 수초를 따라 버리지 않는 것과 같이, 第八識은 안으로 일체의 種子를 任持하고 밖으로는 觸 등 法을 함께 現行하면서 상속부단한다.

  이와 같이 第八識은 무시이래로 刹那刹那에 因이 멸하면 果가 생하고 果가 생하면 因이 멸해서 한결같이 간단함이 없이 항상 轉變生滅하는 것이, 마치 暴流水가 밤낮으로 前後轉變하면서 상속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非斷非常에 대해서 有部들이 힐난하기를, 大乘에서 現在有體過未無體라고 설한다면 過未無體인 이상 非常의 뜻은 성립되나 非斷의 뜻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힐난한다면 도리어 이와 똑같은 모순이 有部에도 생기게 된다. 즉 有部의 三世實有, 法體恒有說이 非斷의 뜻은 성립할 수 있으나 非常의 뜻은 성립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제 大乘은 有部의 힐난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大乘의 現在有體, 過未無體의 說은 現在法上에 인과를 시설한 것으로 現在法을 여의고 未來法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前因이 멸한 位에 後果가 생하여 중간에 추호의 간격도 없이 인과가 상속

 

하는 것이, 마치 저울(秤)의 양쪽이 오르고 내림의 때를 같이 하는 것과 같다.

 「成唯識論」에

 「謂此識性無始時來 刹那刹那果生因滅 果生故非斷因滅故非常 非斷非常是緣起理 故說此識恒    轉如流」71)

라고 한 바와 같이, 過未無體라고는 하나 因이 滅하므로 常이 아니며, 果가 생하므로 斷이 아니다. 이 非斷非常이야말로 佛敎의 因果緣起의 正義라 할 수 있다.

 

10. 伏斷位次門

 

  이 段은 第八阿賴耶識 즉 初能變識의 相狀을 밝히는 十門中 최후의 第十門이며 八段中 第八段에 해당한다. 本頌의 「阿羅漢位捨」에 의해서 시설된 門으로서 我愛執藏現行位와 상응하는 阿賴耶識의 이름을 斷捨하는 位次를 밝힌 것이다. 斷捨란 識體에 대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명칭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대개 識體는 一切有情中 無餘涅槃에 들어간 聲聞, 獨覺을 제외하고는 영구히 斷捨할 수 없으므로 斷捨라 하면 반드시 명칭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원래 이 識을 阿賴耶라고 하는 이유가 第七識의 我見과 我愛 등에 執藏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我執이 제거된 位가 곧 阿賴耶識의 명칭을 斷捨하는 位이다. 頌에 「阿羅漢位捨」라고 한 것이 이 阿賴耶라고 하는 명칭을 阿羅漢位에 이르러서 비로소 버린다는 것이다.

  阿羅漢이란 梵語 Arhan의 음역으로 번역하면 應供, 不生, 殺賊인데, 그중 應供이 바른 번역이다. 應供은 세간의 妙供養을 받을 수 있는 聖位를 말하며, 殺賊은 煩惱의 賊을 말살한다는 뜻이고, 不生은 三界의 分段生死의 받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阿羅漢을 해석하는데 「成論」卷三에 三師說을 들고 있다. 不退의 菩薩에 四種이 있는데 信不退와 證不退와 行不退와 煩惱不退이다.

 第一師의 說은 四不退中 煩惱不退의 菩薩을 가리키는데 二乘의 無學果 즉 阿羅漢位의 聖者가 廻心해서 大乘에 轉向한 漸悟의 菩薩이다. 이 菩薩은 일찍이 阿羅漢位를 성취하였으므로 不退의 菩薩이라 하며 阿賴耶의 이름도 斷捨한다고 한다.

  第二師의 說은 護法論師의 뜻으로서 阿羅漢이란 三乘의 無學位뿐 아니라 頓悟의 八地 이상의 菩薩도 攝한다고 주장한다. 그 까닭은 「瑜伽論」에 三乘의 無學외에 다시 不退의 菩薩까지도 포함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 보살은 아직 煩惱障의 種子는 斷盡하지 않았으나 순전히 無漏만이 상속하므로 이 阿賴耶를 緣執할 第七識의 我見 등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八地 이상의 菩薩, 즉 行不退의 菩薩도 阿羅漢이라 이름하며 阿賴耶의 이름이 斷捨된다고 한다.

  第三師의 說은 難陀論師의 뜻으로서 三乘의 無學과 初地 이상의 菩薩을 不退의 菩薩이라 이름하며 阿羅漢位에 攝한다. 왜 初地 이상의 菩薩을 不退菩薩이라 하며 阿羅漢位에 攝하는가하면 그에 대해서는 五因을 들고 있다. 즉 一은 初地 이상의 菩薩은 이미 見道에 들어갈 때 煩惱, 所知의 二障을 끊어 二空所顯의 妙理를 證得하였고, 二는 第六, 第七의 二識은 初地에 들어가 妙觀, 平等의 두 가지 殊勝智를 分得하였고, 三은 初地에 이미 分別起의 煩惱, 所知의 二障을 끊어버리고, 四는 初地 이상은 通達自在해서 一行中 一切行을 일으키고, 五는 有情을 利樂하기 위해 모든 煩惱를 일으키나 染心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煩惱의

 

과실이 되지 않는다.

  이상 다섯 가지 이유로 初地 이상의 菩薩도 또한 不退의 菩薩이라고 하니, 이는 四不退中 證不退를 가리킨 것이다. 이 位에 이르면 俱生起의 번뇌를 斷盡하지는 못했으나 分別起의 我見 등을 일으키지 아니하므로 阿羅漢이라 이름했으며 阿賴耶의 이름을 끊어버린다고 주장하였다.

  이상 三說은 阿賴耶名의 捨位 즉 阿羅漢에 대한 異說로서 第一說은 不退의 菩薩을 二乘의 無學으로부터 廻心한 漸悟의 보살이라 하고, 第二說은 頓悟한 第八地 이상의 菩薩이라 하며, 第三說은 初地 이상의 菩薩을 不退菩薩이라 하였다. 그 중 前二說은 護法論師의 正義이고, 第三說은 難陀論師의 不正義이다. 왜냐하면 初地 이상 七地 이전은 分別起의 我見은 現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俱生起의 我見 등이 있어서 第八識을 執藏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分別起의 我見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서 阿賴耶의 이름을 버린다고 한다면, 二乘인 預流 등의 有學位까지도 阿賴耶의 이름을 버린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第三師의 說은 不正義가 된다. 그리고 地上菩薩이 第六識中에 일으키는 俱生起의 煩惱는 중생제도를 위해서이며, 染汚性이 없으므로 과실이 없으나 二乘初果의 聖者가 第七識中에 일으키는 俱生의 煩惱는 실로 과실을 생하므로 阿賴耶의 이름을 끊어버릴 수 없다.

  이에 반하여 前二說은 함께 第七識相應의 我執이 필경에 없는데 나아가서 말하였다. 그 중 第一說은 我執의 種子가 다한 位에 대해서 말하고 第二說은 現行이 일어나지 않는 位에 대해서 말하였으므로 前二說로서 正義로 한다. 俱生起煩惱障의 斷位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現行          地前加行位漸伏 初地頓伏

                ― 六 識 相 應 ―  

                                 ― 種子          金剛無間道頓斷

 俱生起煩惱障 ―

                                 ― 現行          初地以上漸伏  第八地永伏

                ― 第七識相應  ―

                                 ― 種子          金剛無間道斷

 

  요컨대 버린다는 것은 第八의 識體를 끊어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第七識에 의해서 집하여지는 我執이 끊어지므로 자연히 이 阿賴耶識의 이름도 끊어버리게 된다. 我執이 있는 동안에는 阿賴耶의 이름을 사용하나 三乘無學과 第八地 이상의 菩薩은 我執을 끊어버렸으므로 阿賴耶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異熟識 즉 毘播伽라고 하는 이름을 쓰게 되며, 佛果에 이르면 執持識 즉 阿陀那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11. 第八識存在의 論證

 

  지금까지 八段十門으로써 初能變 阿賴耶識의 相狀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第八識의 體는 大乘의 말한 바로서 小乘에서는 六識 이외에 다시 이러한 識體의 存在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成唯識論」에 五敎와 十理를 들어서 논증하고 있다. 다음에 그 개요를 약술하고자 하는 바 먼저 五敎證을 들면 다음과 같다.

 

    (1) 五敎證

 

  一. 大乘阿毘達磨經에

 「無始時來界, 一切法等依 由此有諸趣 及涅槃證得」72)

이라 있는데 이는 第八識의 體性이 미세해서 나타내기 어려우므로 그 작용으로써 그 體를 나타낸 것이다. 이 第八識은 無始로부터 一類相續해서 一切諸法의 因이 되고 緣이 된다. 이와 같이 이 識이 능히 一切諸法의 인연이 되어 有情의 有情과 還滅의 所依가 되므로 이 識이 없어서는 안된다.

  二. 大乘阿毘達磨經에

 「由攝藏諸法 一切種子識 故名阿賴耶 勝者我開示」73)

라 있는데 이 第八識은 雜染法을 攝藏하며 또 有情에게는 自內我라고 執着되므로 이 阿賴耶의 이름을 세운다는 것이다. 따라서 阿賴耶가 存在한다는 것을 凡愚에게만 주장한다면 도리어 人我執을 增長할 우려가 있으므로 佛陀께서 다만 勝者에게만 阿賴甚深의 妙義를 개시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第八識을 제외하고 다른 心識에는 이러한 뜻이 없으므로 이 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三. 解深密經에

 「阿陀那識甚深細 一切種子如暴流 我於凡愚不開演 恐彼分別執爲我」74)

라 한 바와 같이, 이 第八識은 一切의 種子를 執持해서 諸法을 現行하는 것이 매우 자세하므로 내가(佛陀) 凡愚에게 開演하지 않는다. 만약 開演하면 저들이 분별해서 實我라고 그릇 집착할 우려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第八識의 存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四. 入楞伽經에

 「如海遇風緣 起種種波浪 現前作用轉 無有間斷時 藏識海亦然 境等風所擊 恒起諸識浪 現前作用轉」75)

이라 한 바와 같이, 담연한 大海가 바람의 緣에 의해서 千浪萬波를 일으키는 것과 같이 藏 識에 있어서도 境 등의 緣에 대해서 七轉의 諸法을 現起한다. 이러한 作用을 하는 識을 第八識이 아니면 안된다.

  五. 이상은 大乘經에 의해서 第八識의 존재를 논증하였으나 小乘經中에도 密意로써 第八識의 존재를 설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은 證文이 있다.

  1 根本識

  이는 大衆部의 阿含經中에 설한 것으로 眼識 등의 所依가 됨을 말한다.

  2 身分識

  이는 上座部나 分別論者의 經中에 설한 것으로서 항상 상속하여 三界에 周遍해서 三有의 生因이 됨을 말한다.

  3 窮生死蘊

  이는 化地部의 經中에 설한 것으로서 생사의 際를 궁구해서 항상 간단함이 없이 隨轉함을 말한다.

  4 愛阿賴耶, 樂阿賴耶,  欣阿賴耶, 喜阿賴耶

  이는 有部의 「增一阿含經」중에 說한 것으로서 阿賴耶識은 我愛의 總別三世의 境이므로 이와 같이 四種으로 분류한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經說은 모두 다 第八識은 詮表한 것으로서 小乘敎徒로 하여금 當果에 있어

 

서 廻心向大시키기 위해서 불타가 密意로써 第八識을 제시한 것이라고 한다.

 

    (2) 十理證

  十理證에 대해서는 「成唯識論」三에서 問答 往復하면서 그 의의를 약술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1 持種證

 「謂契經說 雜染淸淨 諸法種子之所集起 故名爲心」76)

이라 한 바와 같이, 一切諸法이 수시로 생기는 데는 親因緣인 種子가 없어서는 안된다. 만약 親因緣이 없이 諸法이 생긴다면 인과의 도리를 무시하는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一類相續해서 堅住可熏의 性을 구비한 阿賴耶識에 有漏無漏의 一切種子가 藏置되었다가 그로부터 染淨의 諸法이 現行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第八識이 있다는 증거이다.

  2 異熟證

 「又契經說 有異熟心 善惡業感 若無此識 彼異熟心 不應有故」77)

라 한 바와 같이 業果, 不斷, 遍三界의 眞異熟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중생의 존재가 긍정된다. 중생의 존재가 긍정되는 이상 반드시 眞異熟識이 있음을 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 眞異熟心은 第八識이 아니면 안된다.

  3 趣生證

 「又契經說  有情流轉 五趣四生 若無此識 彼趣生體 不應有故」78)

라고 한 바와 같이, 대개 五趣, 四生에 유전하는 主體는 四義를 갖추어야 한다. 즉 첫째, 實有의 法이라야 하며 둘째, 항시 상속하는 法이라야 하며 셋째, 三界九地에 周遍해야 하며 넷째, 雜生의 法79)이 아니라야 된다. 이러한 四義를 갖춘 것은 第八識을 제외하고는 없으므로 第八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4 執受證

 「又契經說 有色根身 是有執受 若無此識 彼能執受 不應有故」80)

라 한 바와 같이, 色根은 반드시 能執受心을 소유하므로 有執受라 한다. 그리고 有執受는 반드시 다음의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즉 1 善業이 任運히 이끌어야 하며2 善染 등이 아니며 3 一類로 異熟無記이며 4 능히 두루 五根을 執持하며 5 相續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第八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有色根을 有執受라고 할 수 없는 논증이다.

  5 壽煖識證

 「又契經說 壽煖識三 更互依持 得相續住 若無此識 能持壽煖 令久住識 不應有故」81)

라고 한 바와 같이, 壽와 煖과 識의 三法이 서로 의지해서 상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諸轉識은 간단이 있어서 항상 用이 없으므로 壽煖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런데 壽煖을 항상 가지는 것은 항상 用이 있는 第八識을 제하고 구할 수 없으므로 第八識의 存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生死證

 「又契經說 諸有情類 受生命終 必住散心 非無心定 若無此識 生死時心 不應有故」82)

라고 한 바와 같이, 중생이 나고 죽는 때는 散位와 有心에 住하고, 定位와 無心에 住하는 것이 아니다. 生死의 갈림길에는 身心이  昧해서 極睡眠, 極悶絶한 때와 같이 명료한 轉識이 現行하지 않는다. 이 때에 無心한 非情이 아닌 이상 반드시 心이 없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生死한다는 사실이 阿賴耶識의 實在를 증명하는 것이다.

   諸名色互爲緣證

 「又契經說 識緣名色 名色緣識 如是二法 展轉相依 譬如束蘆 俱時而轉 若無此識 彼識自體     不應有故」83)

라고 하였는데 名色84)이라는 이름은 受想行識의 四蘊을 가리키고, 色은  羅藍 85)등의 色蘊을 가리킨다. 이 名色과 識이 서로 의지해서 주하는 것이 마치 갈대 단이 서로 의지해서 서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受生의 初念에는 前六識이 아직 생하지 않으므로 第七識으로써 名中의 識蘊으로 하며 第二念 이후에는 第六識도 생한다. 名과 色과 識이 서로 의지한다고 하는 그 識은 前七識 이외에 第八識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약 名色을 執持하는 阿賴耶識의 存在가 부정된다면 중생이 파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四識證

 「又契經說 一切有情 皆依識住 若無此識 彼識識體 不應有故」86)

라고 있는데 四食이란 食의 四種으로서 段食, 觸食, 意思食, 識食이다.

   段食은 식물을 分分段段으로 먹는다는 뜻으로, 欲界繫의 香, 味, 觸 등과 같은 變壞를 상으로 하는 것이다.

   觸食은 六識相應의 觸의 心所法으로서 境에 觸하는 것을 相으로 한다.

   意思食은 欲의 心所法과 함께 전하는 意識相應하는 有漏思의 心所로서 희망을 相으로 한다.

   識食은 第八阿賴耶로서 執持를 相으로 한다.

  이러한 四識은 능히 중생의 신명을 보전해서 하지 않게 하므로 食이라 한다. 그 중 食識이 가장 수승하다. 왜냐하면 眼 등의 轉識은 간단이 있고 轉易이 있으며 遍有가 아니므로 신명을 보전할 수 없으나 無間斷, 無轉易, 遍有, 恒起의 第八識이 있음으로써 신명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第八識이 존재해야 한다.

   滅定證

 「又契經說 住滅定者 身語心行 無不皆滅 而壽不滅 亦不難煖 根無變壞 識不難身」87)

이라고 하였다. 滅定이란 身因인 入, 出息과 語因이 尋, 伺와 心因인 受, 想을 滅한 定이다. 그런데 이 定에 들어가도 오히려 중생이라 하는 것은 壽, 煖, 識의 三이 서로 의지해서 상속하기 때문이다. 그 三中의 識은 곧 第八識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논증한 것이다.

 

   染淨證

 「 又契經說 心雜染故 有情雜染 心淸淨故 有情淸淨 若無此識 彼染淨心 不應有故」88)

라 했다. 染淨의 法은 心으로써 根本을 삼는다. 즉 心은 因해 생하고 心을 의지해서 주한다. 心은 染淨有爲現行의 훈습을 받아 有爲種子를 執持한다. 이러한 공능이 前六識에는 없으므로 別體의 第八識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논증이다.

  이상의 五敎十理의 論證은 요컨대 第八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중생의 體는 全無하게 된다는 취지를 밝힌 것이다. 대개 우리들이 인식하는 外界의 諸法은 五塵 즉 五境으로서 前五識의 所緣이다. 그런데 前五識의 所緣은 반드시 하나의 本質을 요하게 되는데 이러한 本質을 變爲하게 하는 주체가 바로 이 第八阿賴耶根本識이라는 것을 立證하고 있다.

 

Ⅴ.第二能變識에 關하여

 

  能變의 識體를 異熟識과 思量識과 了別境識의 三種으로 요약할 수 있으나 그 실인즉 能變의 體를 八種이 있으니 一. 眼識 二. 耳識 三. 鼻識 四. 舌識 五. 身識 六. 意識 七. 末那識 八, 阿賴耶識이다. 앞에서 말한 「異熟」이 이에서 阿賴耶識이요 또 「思量」이 末那識이며 「了別境識」은 眼, 耳 등의 六識을 가리킨 것이다. 이 八種識體를 밝히는데 三種의 能變이 있으니 소위 初能變, 三能變이다. 初能變은 異熟識인 體八阿賴耶識을 가리키고, 第二能變은 思量識인 第七末那識을 가리키며, 第三能變은 了別境識인 眼識 내지 意識의 六識을 가리킨다고 앞에서 언급하였다.

  前章에서 三能變中 初能變識인 異熟識에 관하여 서술해 마쳤으므로 다음에 第二能變인 思量識 즉 第七末那識의 相狀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第二能變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唯識三十頌中 다음과 같은 三頌만을 취급하여 第七末那識의 相狀을 밝히고 있다. 頌曰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四煩惱常俱 謂我癡我見

    我慢我愛 及餘觸等俱 有覆無記攝

   隨所生所繫 阿羅漢滅定 出世道無有」89)

  護法論師는 第七識을 밝히는데도 初能變과 같이 또한 八段十門으로서 해석하였으니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一. 擧體出名門‥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一. 標名門 ―

           二. 所  依  門‥依彼轉‥‥‥‥‥‥‥‥‥‥   二. 所依門

           三. 所  緣  門‥緣彼‥‥‥‥‥‥‥‥‥‥‥‥  三. 所緣門

                                    ― 性‥‥‥‥‥‥  四. 體性門

           四. 體性行相門‥思量位 ―

                                    ― 相‥‥‥‥‥‥  五. 行相門

 八段 ―                    ― 四煩惱常俱·謂我癡 ―                ― 十門

                                                    ― 六. 染俱門  

           五. 心所相應門 ―   我見· 我慢·我愛 ―

                            ― 及餘觸等俱‥‥‥‥‥‥‥ 七. 相應門  

           六. 三性分別門‥有覆無記攝‥‥‥‥‥‥‥‥‥ 八. 三性門

           七. 界繫分別門‥隨所生所繫‥‥‥‥‥‥‥‥‥ 九. 界繫門

        ― 八. 伏段位次門‥阿羅漢滅定出世道無有‥‥‥‥ 十. 隱顯門 ―  

 

  위에 도시한 八段의 차례에 따라서 第二能變識의 相狀을 해석하고 다음에 二敎, 六理로써 末那識의 존재를 밝히고자 한다.

 

1. 擧體出名門

 

    (1) 末那識의 名義

  第二能變 즉 思量識을 밝히는 八段十義가 있는 중에서 먼저 第一에 體를 들어서 末那의 이름을 낸 것이다. 즉 本頌에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90)

라고 한 것과 같이, 第七末那識이 第二能變의 識이다. 諸識에는 心(緣慮의 義), 意(了別의 義), 識(了別의 義)의 三名이 있으나, 뜻이 수승함에 따라서 第八識을 心이라 하고 第七識을 意라 하며 前六識을 識이라 한다. 末那란 梵語로 Manas의 음역으로 意라고 번역한다. 意에는 依支와 思量의 二義가 있는데 思量의 뜻을 취하고 依支의 뜻은 취하지 않는다. 思量의 뜻이 널리 諸識에 통하고 있는데도 하필 第七識만을 思量이라 이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第七識은 恒審思量하는 것이 前六識이나 第八識보다 수승하므로 특히 이 識을 思量能變의 識이라 한다. 思量에 恒과 審의 二義가 있는데 恒이란 끊임없이 상속하는 것을 말하고, 審이란 명백하게 계탁하는 것을 말한다.

  第八識은 부단히 상속해서 恒의 뜻은 갖추었으나 無分別에서 명백하지 않으므로 審의 뜻은 缺하며 第六識은 計度分別해서 審의 뜻은 갖추었으나 때로는 간단함이 있어 상속하지 않기 때문에 恒의 뜻을 缺하며, 前五識은 상속하지는 않고 계탁하지도 않으므로 恒審이 함께 缺하고 있다. 그러나 第七識은 無始로부터 항상 상속하며 간단함이 없이 第八識의 見分을 반연해서 명백하게 我라고 계탁하므로 恒審二義를 함께 갖추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諸識에통하는 思量의 이름을 특히 第七識에 준 것이다. 이상에서 설한 바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具一             第八識 ―

          ― 恒

                       具二             第七識

意=思量 ―                                       ― 八識

                       具一             第六識

          ― 心                                        

                       具缺             前五識 ―

 

    (2) 第六識과 第七識의 相違

  그런데 思量의 뜻인 意로서 이 識을 이름하면 第六識도 또한 意識이므로 혼동되어 구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諸經論에서 이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第七識을 다만 意라 하고, 第六識을 意識이라 한다. 즉 第七識은 識體가 곧 意니 意卽識으로서 持業釋에 의해서 이름을 세웠으며, 第六識은 第七識인 意를 所依로 해서 일어난 識이므로 意(第七)에 의한 識(第六) 즉 意之識이니 이는 依主釋에 의해서 이름을 세웠다. 그래서 本論 卷四에는 兩者得名의 相違를

 「此名何異第六意識 此持業釋如藏識名 識卽意故彼依主釋 如眼識等識異意故」91)

라고 하였다.

 

  혹 一說에는 第七識은 第六識의 近所依가 됨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識을 意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近所依란 相順 同計度 與力 등의 뜻이 있다. 相順이란 第七識이 無漏일 때는 第六識도 또한 無漏이며 第七識이 有漏일 때는 第六識도 또한 有漏임을 말한다. 同計度란 六, 七 二識이 모두 분별계탁함에 있어 동일함을 말한다. 그런데 前五識과 第八識은 계탁분별이 없다. 與力이란 增相緣의 뜻으로 第七識은 능히 第六識과 不共한 俱有依가 되어 第六識에게 힘을 주어 이른바 發識取境의 用을 일으킴을 말한다.

 

2. 所依門  

 

  (1) 四大論師의 異說

  여기에서 말하는 所依란 依止杖託의 뜻으로 諸識이 생기는 데는 所依를 필요로 한다. 初能變에는 所依門이 없고 第二能變에 所依門을 설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第八識은 諸識의 根本이므로 他를 위해서 所依가 될지언정 他에 의지하는 뜻이 없기 때문에 所依門이 없다. 그러나 七轉識은 枝末의 識으로서 他에 의지하는 뜻이 있으므로 第二, 第三能變에는 함께 所依門을 세워서 설하는 것이다. 이 末那識은 第八識을 所依로 하여 항상 我執을 일으킨다. 本頌에

 「依彼轉」92)

이라 하였는데, 彼란 바로 第八阿賴耶識을 가리킨 것으로, 第八識이 末那識의 所依가 됨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 所依의 阿賴耶識을 해석하는데 難他, 火辨, 眼慧 및 護法 등 四師의 異說이 있다.

  (ㄱ) 難陀

  難陀의 견해에 의하면 末那은 第八의 心王 및 心所를 반연한다고 한다. 즉 心王은 반연해서 我라고 집착하고 心所를 반연해서 我所라고 집착하니, 心王은 主體이며 心所는 助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雙緣하는 까닭을 「瑜伽師地論」卷 六十三에

 「 末那名意 於一切時 執我我所 及我慢等 思量爲性」93)

이라고 설하였다. 비록 心王, 心所의 雙緣을 하지만 그 相分인 種, 根, 器의 三境을 반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第七識은 항상 상속해서 간단이 없기 때문에 만약 五根, 器界의 色法을 반연한다고 하면 無色界에는 色法이 없으므로 그에 대한 집착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一類相續의 뜻에 계합하지 않는다. 또 種子는 緣慮의 用이 없어서 수승한 法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집착을 일으킬 이가 없다.

  (ㄴ) 火辨

  火辨의 견해에 의하면 末那는 第八의 見分 및 相分을 반연한다고 한다. 즉 見分은 반연해서 我라고 집착하고 相分을 반연해서 我所라고 집착한다. 이것은 見分은 能變의 공능이 있고 相分은 屬地의 用이94)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개 心王, 心所는 각각 그 體를 달리하고 我, 我執은 각각 그 行相이 같지 않다.

  火辨이 見, 相을 雙緣을 我, 我所라고 집착한다고 하면, 이 힐난이 다시 火辨自身에게 돌아갈 것이라 생각될지 모르나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相分은 識體의 用으로서 결국 攝

 

用歸體 즉 用을 거두어 體에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見分을 반연해서 我라고 집착하는 곳에 相分을 반연해서 我所라고 집착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我所의 執이 반연한다고는 하나 그 相分이 三境中 根, 器만을 반연하고 種子는 반연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種子는 수승한 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ㄷ) 眼慧

  眼慧의 견해에 의하면 末那는 第八의 現行 및 種子를 반연하다고 한다 즉 現行을 반연해서 我라고 집착하고, 種子를 반연해서 我所라고 집착한다. 이 種子는 곧 現行識의 공능이지 실로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瑜伽論」등에 藏識을 반연한다고 한 것은 種子와 現行이 모두 識이므로 이것을 雙緣해서 我와 我所執을 일으킨다고 한다. 생각컨대 火辨이 見, 相을 所緣으로 한다고 하였으나 여기에서 말한 相分은 色蘊(相分三境中 火辨이 말한 我所의 執은 다만 根, 器만을 반연해서 일어난 것이고 種子를 所緣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相分의 根, 器는 色蘊인 셈이다.)을 말한 것이지 識蘊이 아니다. 그러므로 兩者의 견해가 완연히 다르다.

  (ㄹ) 護法

  護法의 견해에 의하면 위의 三師의 설이 모두 이치에 계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먼저 眼慧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는 種子를 반연해서 我所라고 집착한다고는 한 이미 「瑜伽論」 등에 이 識은 藏識을 반연한다고 하는 이상 이 識蘊을 所緣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種子를 반연한다고 한다면 이 識이 識蘊을 所緣으로 한다고 못할 것이다. 또 그는 種子를 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였으나 이미「瑜伽論」卷五十二에는 實有라고 하지 않았는가. 만약 이것이 假法이라면 無法과 같아서 因緣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前三師의 所說을 보면 이 識이 我, 我所執과 상응한다 하였으나 모두가 필경에 「瑜伽論」등 文에 빠져서 그 眞義를 잃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 識이 一類相續하는 것이라면 이와 함께 한 薩迦耶見도 또한 항상 상속해서 조금도 간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따로 따로 我, 我所인 分別의 집착이 있으며 我, 我所의 二執이 전후해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이 識은 무시이래 한결같이 轉해서 勢用이 유사하고 하등의 전후와 우열이 없기 때문에 二執이 전후해서 일어난다고 할 수 없다. 護法은 이 識은 오직 第八識의 見分만을 반연하고 다른 것을 반연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第八識은 무시이래 항상 상속해서 항상 諸法의 所依가 되어 그 뜻이 我相과 가장 같으므로 第七識은 이를 반연해서 我執의 妄見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見分만을 반연하는 까닭은 見分이 境을 받는 작용의 相이 가장 현저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第八識의 見分만을 반연해서 我執을 일으키고 我所의 執이 없다면 무슨 이유로 「瑜伽論」등에 我所의 집착이 있다고 설하였는가.

  本論 卷四에 두 가지 해석을 들고 있다. 첫째는 이 語勢에 의해서 我所가 있다고 설하였으나 실제 我밖에 따로 我所의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둘째는 소위 我와 我所란 第七이 第八을 반연해서 이것을 我라고 집착한다. 그리하여 一見上에 我와 我所를 설하나 그 내용인즉 오직 하나의 我見이 있을 뿐이다.

  이상 四師의 異說中 호법의 뜻을 정의로 하여 이 識의 所緣은 오직 第八識의 見分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오직 未轉依 有漏位에만 해당한다. 만약 轉位에서 無漏에 들어가 平等性智와 상응할 때는 또한 眞如 및 나머지 一切法을 반연하다.

 

    (2) 三所依論

  모든 識이 생기는데는 所依와 所緣을 필요로 한다. 그 所依에 三種이 있으니 因緣依와 俱

 

有依와 開導依이다.

  (ㄱ) 因緣依

  먼저 因緣依란 또한 種子依라고 하는데 즉 有爲의 諸法은 각자의 親因緣인 種子에 의해서 반드시 생한다는 것을 말한다. 種子依와 因緣依의 二名은 그 의미에 있어서 寬狹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因緣依는 種子生現行, 現行熏種子, 種子生種子의 各種相望의 因緣에 통하고 種子依는 現行熏種子에만 통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三種의 因緣에 통하므로 因緣依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적합한 이름이다.

  (ㄴ) 俱有依  

  俱有依란 또한 增上緣依라고도 한다. 다만 俱有依라고 하면 現行法과 種子에 통하나, 增上緣依라 하면 現行法에만 통하므로 역시 二名은 寬狹의 相違가 있을 뿐이다. 諸識에 힘을 주어 境을 취하게 하는 俱有의 六根을 말하므로 增上緣依 라고 하는 편이 친밀한 이름이다. 그런데 六根은 現行法으로서 能依의 識과 俱時이니 무릇 心과 心所法은 모두 俱有依를 여의고 現行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眼識은 眼根에 의하고 耳, 鼻, 舌, 身識은 차례와 같이 耳, 鼻, 舌, 身根에 의하고 後三識은 意根(第七識도 第八識도 또한 意根이라 이름한다)에 의하는 것이다. 이 俱有依에 대해서 難陀, 安慧, 淨月, 護法의 異說이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ㄷ) 開導依

  開導依는 또한 等無間緣이라고도 한다. 즉 現行의 위치를 開避하고 後念의 心, 心所를 인도해서 장애없이 생기는 前滅의 心 즉 意根을 말한다. 모든 心과 心所는 이 開導依 없이 생기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이 開導依에도 또한 難陀, 安慧, 護法 등의 異說이 있으나 護法論師는 前二師의 설을 이치에 계합하지 않는다고 평하였다.

  護法論師는 다음의 三義를 갖추어야 開導依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一은 有緣의 뜻이니 能緣의 力用이 없으면 心과 心所를 引生하는 開導依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二는 爲主의 뜻이니 아무리 所緣을 가졌다할지라도 主이면서 자재의 力用이 없으면 開導依가 될 수 없다. 三은 等無間의 뜻이니 설사 前二義를 가졌다 할지라도 等無間緣이 없다면 開導依가 될 수 없다.

  이 三義를 갖추어 八識의 開導依가 되는 것은 각각 前念의 自識을 開導依로 한다. 다시 말하면 眼識은 前念의 眼識으로써 開導依로 하고 乃至 第八識은 前念의 八識으로써 開導依로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所依에 대해서는 諸識의 三所依를 약술하였거니와 그 중 因緣依는 주로 種子와 現行과의 관계를 논하고 다음 俱有依와 開導依는 第八識을 相互間에 밀접한 관계를 논한 것이다. 그러므로 所依論은 또한 第八識의 關係論이라 할 수 있다.

 

3. 所緣門

 

  第七末那識의 相狀 을 밝히는 八段十門中 그 所緣의 境을 해석하고자 한다. 本頌에

 「緣彼」95)

라고 하였으니 彼란 前段에 든 第七識의 所依 즉 第八阿賴耶識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所緣의 阿賴耶識을 해석하는데 難陀 등 四師의 異說이 있다. 一에 難陀論師는 第八의 心王을 반

 

연해서 我라 집착하고, 心所有法을 반연해서 我所라고 집착한다고 주장하였다. 二에 火辨論師는 第八의 見分을 能變의 뜻이 있으므로 이것을 반연해서 我라 집착하고, 相分은 屬他의 뜻이 있으므로 이것을 반연해서 我所라고 집착한다고 주장하였다. 三에 安慧論師는 第八의 現行을 반연해서 我라고 집착하고, 種子를 반연해서 我所라고 집착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상 三師의 異說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能緣)            (所緣)                 (所執)  

                                            心王                    我

難陀論師의 說            第七識

                                            心所                   我所

                                            見分                    我

火辨論師의 說            第七識          

                                            相分                   我所

                                            現行                    我

安慧論師의 說            第七識

                                            種子                   我所

 

  四에 護法論師는 第七識은 다만 藏識의 見分만을 반연해서 我相을 思量한다고 설하였다. 이는 저 第八阿賴耶識이 무시이래 一類相續해서 諸法의 所依가 되어 主宰의 義相이 있기 때문이다. 前三師가「瑜伽論」六十三에 「末那는 我, 我所와 항상 相應한다.」고 설한데 의거해서 第七識에 雙緣의 說을 세웠으나 護法論師는 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였다. 즉 護法論師에 의하면 무릇 第七識이 我相을 思量함은 항상 一類相續하므로 我와 我所의 二執이 함께 일어날 이치가 없으며 또 이미 무시이래 한결같이 轉易함이 없기 때문에 二執이 전후해서 일어날 이치가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第七末那識의 所緣境에 대해서 難陀, 火辨, 安慧, 護法 등의 異說이 있는 중 護法의 異說이 있는 중 護法의 견해를 正義로 하고 있다. 이 末那識이 藏識의 見分만을 所緣의 境으로 하는 것은 未轉依의 位에만 해당하고 轉依해 마치면 無我로서 眞如 및 一切法을 반연할 수 있다.

     

 4. 體性行相門  

 

  第七末那識의 相狀을 밝히는데 第四에 그 體性과 行相을 해석하는 門이다. 體性이란 自性 또는 識體라고도 하며 四分中 自證分에 해당한다. 다음에 行相이란 初能變의 第二所緣行相門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識자體가 所對의 境을 반연하는 能緣의 作用이다. 그러므로 四分중 見分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第七識의 體性과 行相과는 그 뜻이 가장 밀접하므로, 頌에

 「思量爲性相」96)

이라 하여 一段으로 합하였다. 思量이란 事理를 思慮하고 量度하는 것으로 第七識의 作用을 말한 것이다. 性이란 體性이니 思量하는 것이 第七識이 體性이다. 그러나 思量이란 원래 思慮, 量度하는 것으로 第七識은 我相을 恒審思量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思量은 그 실은 識體의 行相이지 識의 自體分은 思量이 아니다. 相이란 行相이니 곧 第七識이 我相을 思量함을 그 行相으로 하기 때문에 이제 思量을 相으로 한 것이다.

  요컨대 第七末那識은 第八識의 見分을 所對의 境으로 해서 我相을 思量함을 그의 體性 또슨 行相이라 한다. 識의 自體分은 실로 思量이 아니지만 了知하기 어려우므로 그의 行相을 들어서 그 體를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第七識의 思量은 未轉依의 位에서 뿐만 아니라 己

 

轉依의 位에 있어서도 또한 無我의 相을 살펴 思量하므로 末那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이 體性과 行相을 思量이라 하는 것은 또한 겸해서 이 識을 末那 즉 意라는 이름을 얻는 이유가 된다.

 

5. 心所相應門

 

   (1) 本惑의 四

  먼저 識相應의 心所는 遍行의 五와 本惑의 四와 遍染隨惑의 八과 慧를 합하면 十八數이다. 그 중 第七識과 상응하는 것은 本惑의 四로서 本頌에

 「四煩惱常俱 謂我癡我見  我慢我愛 及餘觸等俱」97)

라고 하였다. 煩惱란 「述記」一本에 「煩은 이 擾의 뜻이며 惱는 이 亂의 뜻으로서 중생을 요란케 하므로 번뇌라고 한다」고 하였고, 또 「成唯識論」四에

 「此四常起擾濁內心 令外轉識恒成雜染 有情由此生死輪廻 不能出離故名煩惱」98)

라고 하였으니 「內心을 擾濁하고 외의 轉識을 항상 雜染케 한다. 중생은 이를 말미암아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煩惱라고 한다」는 뜻이니 前半句는 煩字를 해석하고 後半句는 惱字를 해석한 것이다. 다만 第七識과 상응하는 根本煩惱는 我癡, 我見, 我慢, 我愛의 四種뿐이고 나머지 六煩惱와는 상응하지 않으므로 「四煩惱常俱」라 하였다.

  常이란 항시 상속한다는 뜻이고 俱란 상응한다는 뜻이다. 상응의 뜻은 初能變識의 第三, 心所相應門에서 이미 밝혔으므로 이에서는 생략하고 第七識과 상응하는 四煩惱에 대해서만 설명하고자 한다.

  (ㄱ) 我癡

  我癡란 곧 無明을 가리킨다. 無明이란 모든 事와 理에 대하여 진정한 견해가 없어서 見惑, 修惑 등 모든 煩惱를 일으킴을 말한다. 따라서 이 無明은 일체번뇌를 일으키는 근본으로 그 事理에 어둠을 性用으로 하고 一切雜染의 所依가 됨을 業用으로 한다.

  그런데 이 無明에는 相應無明과 不共無明의 二種이 있다. 相應無明이란 六識上에 貪 등의 本惑과 俱生하는 事에 迷하는 것을 말하며, 不共無明이란 理에 迷하는 것을 말한다. 不共無明에 恒行不共과 獨行不共의 二種이 있다. 恒行不共無明이란 第七識과 상응하는 것이니 즉 일체범부는 무시이래 항시 行하므로 恒行이라 하며, 또한 다른 我見, 我慢, 我愛의 本惑과 상응하여 일어나되 眞智를 장애하는 勝用이 이 識에만 있고 다른 識에는 없으므로 不共이라 한다. 다음 獨行不共無明이란 第六識과 상응하는 것으로서 貪 등의 本惑과 상응하지 않고 홀로 일어나서 心과 상응하는 無明이다. 여기에 다시 主獨行과 非主獨行의 二種이 있다. 즉 忿 등의 隨惑과 상응하지 않는 것을 主獨行이라 하고 忿등의 隨煩惱와 상응함을 非主獨行無明이라 한다.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相應無明                                                根本煩惱相應 ―

無明 ―                            ― 非主獨行 ― 隨煩惱相應 ―                    ― 第六識相應

                     ― 獨行不共 ―                            ― 根本煩惱不相應 ―

       ― 不共無明 ―              ― 主 獨 行 ― 隨煩惱不相應-

                     ― 恒行不共                                                      第七識相應

 

  이제 여기서 말한 我癡란 본래 第七識相應인 恒行不共의 無明이다. 이 無明은 無我의 理에 迷해서 我見과 상응하므로 我癡라고 한다. 無明은 일체번뇌의 근본이기 때문에 이제 四煩惱中에 최초에 든 것이다.

  (ㄴ) 我見

  我見이란 또한 身見이라고도 하니 이른바 薩迦耶見으로서 五蘊和合의 假者를 반연해서 망령되이 常一의 我身이라 집착하는 것이다. 이 我見에 分別起와 俱生起의 二種이 있고, 다시 俱生起중에 有間斷과 恒相續의 二種이 있다. 그 중에 分別起와 俱生起의 有間斷은 第六識相應이고 俱生起의 恒相續은 第七識相應이다.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分別起                                          第六識相應  

     我見 ―            ― 有間斷  

            ― 俱生起 ―

                        ― 恒相續                              第七識相應

 

  모든 事理를 능히 바르게 推度함을 正見이라 하고 顚倒하게 推度함을 不正見이라 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我見이란 不正見에 五種(身見, 邊見, 邪見, 見取見, 戒禁取見)이 있는 중의 一種인 身見에 해당한다. 즉 第七識과 상응하는 俱生起, 恒相續의 것으로 非我인 第八見分을 오인해서 我라고 妄執함을 말한다.

  (ㄷ) 我慢

  我慢이란 자기를 믿어 다른 이보다 높다고 하는 것을 性用으로 하며, 덕이 있는 사람을 대하거나 또한 勝法에 대해서도 겸허한 생각이 없으므로 끊임없이 생사에 윤회해서 諸苦를 받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 그런데 이 慢에 七種 혹은 九種의 類別이 있는데, 七種이란 慢, 過慢, 慢過慢, 我慢, 增上慢, 卑劣慢, 邪慢이다. 이 七慢中 第七識과 상응하는 慢은 곧 我慢이니 즉 所執의 我를 믿어서 我를 믿어서 마음이 도도하게 됨을 말한다.

  (ㄹ) 我愛

  我愛란 我貪 즉 貪愛의 뜻으로 깊이 所執에 我에 탐착하므로 我愛라고 한다. 「成唯識論」에

 「云何位貪, 於有有具 染着爲性 能障無貪 生苦爲業」99)

이라 하였으니 有란 三界의 苦果를 말하며, 有具란 有를 생하는 器具로서 三界果報의 因인 惑業과 器界 等과 말한다. 즉 果로서는 五道生死의 苦樂의 과보를 말하는데 위로는 色, 無色의 勝妙한 果報로부터 아래는 아귀, 지옥의 추악한 과보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유정 탐착의 영향을 받지 않은 적이 없으며, 因으로서는 가지가지의 業煩惱 등이 또한 탐착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 이 염착을 貪의 性用으로 하고, 이와 반대로 無貪의 善根을 장애해서 苦果를 생하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 이제 第七識에 상응하는 貪心所는 所執의 我에 깊이 애착하므로 我愛라고 한다.

 

  (2) 別境心所의 慧          

  다음 頌門에 「及餘觸等俱」라 하였으니 及이란 等의 뜻으로서 四煩惱(我癡, 我見, 我慢, 我愛)를 들어 餘觸 등을 함께 한다고 해석하였다. 俱란 상응한다는 뜻이다. 餘字의 해석에 대해서는 諸師의 쟁론이 있다고 「成唯識論」四 三十左에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法相敎義

 

正義에 의하면 因位의 第七識은 앞에서 말한 四惑 이외에 나머지 遍行心所의 五와 別境心所의 慧와 八大隨惑의 十四의 心所有法과도 상응함을 보였다. 遍行心所의 五란 法相敎義의 五位 五十一心所(遍行有五, 別境亦五, 善有十一, 煩惱有六, 隨煩惱有二十, 不定有四, 如是六位, 合五十一)說中 五遍行心所(觸, 作意, 受, 想, 思)로서 이는 初能變識의 三. 心所相應門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別境心所의 五는 欲, 勝慧, 念, 定, 慧 등이니 이 五別境中 慧만이 第七識과 상응한다.

  所觀의 境에 대해서 是非得失 등의 推求, 簡擇함을 性用으로 하고, 이에 대해서 결정한 勝慧를 내어 猶豫不定의 의혹을 끊음을 業用으로 한다. 慧에 惡慧와 善慧의 二種이 있는데 惡慧는 번뇌중의 惡見이며 正慧는 聞, 思, 修 三慧이다. 聞慧란 經을 보고 들음으로써 발동하는 지혜이며, 修慧란 修定의 결과로서 생하는 지혜이다.

 

   (3) 八大隨惑  

  八大隨惑이란 隨煩惱二十中 掉擧,  沈, 不信, 懈怠, 放逸, 失念, 散亂, 不正知이다. 이 八種의 不善心은 모든 染心 즉 有覆無記와 不善에 통하므로 大隨惑이라 한다.

  掉擧란 「成唯識論」 六에

 「云何掉擧 令心於境不寂靜爲性 能障行捨奢摩他爲業」100)

이라 하였으니 「어떤 것이 掉擧인가? 心으로 하여금 境에 寂靜하지 않게 함으로써 性을 삼고 능히 行捨와 奢摩他를 장애하는 것으로써 業을 삼는다」라고 해석한다. 善行捨란 善心所의 하나로서 精進과 三善根(無貪, 無瞋, 無癡)上에 心을 평등정직하고 無功用하게 하는 작용이다. 奢摩他( amatha)란 梵語인데 止 또는 寂靜 등이라 번역한다.

   沈이란  昧沈重의 뜻으로서 「成唯識論」 六에  

 「云何 沈 令心於境無堪任爲性 能障輕眼毘鉢舍那爲業」101)

이라 하였으니 「어떤 것이  沈인가? 心으로 하여금 境에 堪任하지 못함을 性으로 하고, 능히 輕眼과 毘鉢舍那를 장애함을 業으로 한다」고 해석한다. 輕眼이란 善心所의 하나로서 定中에 煩惱의 現行을 멀리 여의고 身心을 경쾌하고 安適하게 함을 말한다. 毘鉢舍那(Vipa n )란 梵語로서 관 또는 見이라고 번역하며 그 體는 慧로서 종종의 관찰을 말한다.

  不信이란 「成唯識論」 六에

 「云何不信 於實德能不忍樂欲心穢爲性 能障淨信惰依爲業 謂不信者多懈怠故」102)

라고 하였으니 「어떤 것이 不信인가? 實, 德, 能에 忍, 樂, 欲하지 못하고 心을 더럽히는 것을 性으로 하고, 능히 淨信을 장애하고 惰에 의지함을 業으로 한다. 이는 不信者는 懈怠가 많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한다. 信을 장애해서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게 함을 그 性用으로 하고, 惰 즉 懈怠의 所依가 됨을 業用으로 한다.

  懈怠란 「成唯識論」 六에

 「云何懈怠 於善惡品修斷事中懶惰爲性 能障精瞋增染位業 謂懈怠者滋長染故」103)

라고 하였으니 「어떤 것이 懈怠인가? 善惡品 修斷事에 懶惰함을 性으로 하고, 능히 정진을 장애하고 染을 더하는 것을 業으로 한다. 懈怠라는 것은 染을 滋長하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하면, 이는 善을 닦고 惡을 끊는데 있어서 게으름을 性用으로 하고, 精進을 장애해서 染을 증장하는 것을 그 業用으로 한다.

 

  放逸이란 「成唯識論」 六에

 「云何放逸 於染淨品不能防修縱蕩爲性 障不放逸增惡損善所依爲業 謂由懈怠及貪瞋癡 不能防    修染淨品法 總名放逸非別有體」104)

라고 하였으니 「어떤 것이 放逸인가? 染淨品에 防修하지 못하고 방탕함을 性으로 하고, 不放逸을 장애하여 惡을 증장하고 善을 손하는 所依가 됨을 業으로 한다. 懈怠 및 貪, 瞋, 癡를 말미암아 染淨品의 法을 防修하지 못함을 총히 放逸이라 이름하고 따로 體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해석한다. 즉 染을 막고 淨을 닦지 못하고 縱蕩放逸함을 性用으로 하고, 惡을 증장하고 善을 손하는 所依가 됨을 그 業用으로 한다.

  失念이란 「成唯識論」 六에

 「云何失念 於諸所緣不能明記爲性 能障正念散亂所依爲業 謂失念者心散亂故」105) 

라고 하였으니 「어떤 것이 失念인가? 諸所緣을 분명하게 기억하지 못함을 性으로 하고 正念을 장애해서 산란의 所依가 됨을 業으로 한다. 失念이란 것은 心이 산란하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한다. 이는 念과 癡의 分位에 假立된 것으로서 별로 體가 되는 것이 아니다.

  散亂이란 「成唯識論」 六에

 「云何散亂 於諸所緣令心流蕩爲性 能障正定惡慧所依爲業 謂散亂者發惡慧故」106)

라고 하였으니 「어떤 것이 散亂인가? 諸所緣에 마음으로 하여금 유탕하게 함을 性으로 하고, 능히 正念을 장애해서 惡慧의 所依가 됨을 業으로 한다. 散亂이란 것은 惡慧를 발하기 때문이다」하고 해석한다. 즉 이 心所는 모든 所緣에 心으로 하여금 유탕케 함을 性用으로 하고 능히 正定을 장애해서 不正見을 일으킴을 業用으로 한다.

  不正知란 「成唯識論」 六에

 「云何不正知 於所觀境謬解爲性 能障正知毁犯爲業 謂不正知者多所毁犯故 」107)

라고 하였으니 「어떤 것이 不正知인가? 所관의 境에 잘못 이해함을 性으로 하고, 능히 正知를 장애해서 毁犯하는 것을 業으로 한다. 不正知란 것은 毁犯하는 바가 많기 때문이다」하고 해석한다. 이 心所는 慧와 癡의 一分으로서 別로 體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第七識은 항상 我癡, 我見, 我慢, 我愛 등 四의 根本煩惱와 상응하므로 第八見分을 所緣의 境으로 해서 我相을 思量하며 또한 어느 識 어느 곳에서도 반드시 상응해서 생기는 五遍行心所와 상응함은 물론이다. 別境心所의 慧는 我見의 體이므로 이것도 상응의 心所에 해당한다. 다음에 掉擧,  沈, 不信, 懈怠, 放逸, 失念, 散亂, 不正知 등 八大隨惑은 모든 染心에 두루해서 상응하므로 未轉依位에 있는 第七識과 상응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十八心所는 第七識의 未轉依位에 있어서는 상응하나 已轉依位에 있어서는 二十一心所(五遍行, 別境의 五와 善의 十一)하고만 상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受의 心所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이 識은 자유로이 항상 所緣에 대하여 평등하게 전하므로 捨受하고만 상응한다.

 

6. 三性分別門

 

  第七識 및 그 相應의 心所는 善, 惡, 無記중 어디에 섭하는가를 분별하는 門이다. 三性에 대해서는 初能變識의 第五三性門에서 이미 서술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本頌에

 

 「有覆無記攝」108)

이라 하였으니 有覆無記란 그 性이 染汚해서 善惡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을 말한다.

  因位에 있어 第七識 및 상응의 心所는 善, 惡, 無記 三性中 無記性에 속하고 그 無記性에 有覆과 無記가 있는 중 有覆無記에 섭하여진다. 왜냐하면 第七識은 未轉依位에 있어서는 染汚법인 我癡, 我見, 我慢, 我愛의 四煩惱 등과 상응하고 我執을 일으켜 一切有漏染法의 根本이 되므로 聖道無漏智를 장애해서 自心을 隱蔽하여 청정하지 않게 하므로 有覆이다.

  그러나 이 相續의 一聚는 染汚法이기는 하나 그 行相이 任運微細하여 非可愛의 異熟果를 끌 만한 힘이 없으므로 또한 無記에 속한다. 다만 已轉依의 果位에서는 이치에 순해서 寂靜하기 때문에 善性인 것은 물론이다.

 

7. 界繫分別門

 

  第七識은 어느 界地에 속하는가를 분별한 門으로서 本頌에  

 「隨所生所繫」109)

라고 하였다. 즉 界繫란 界는 欲界, 色界, 無色의 三界를 말하는데 細分하면 九地가 된다. 즉 欲界散地의 五趣地(地獄, 餓鬼, 畜生, 人間, 天道)를 합해서 一地, 色界四禪을 四地, 無色界四禪을 四地로 하여 모두 九地가 되니 이것은 곧 有漏界의 분류이다. 다음에 繫란 繫縛, 繫屬의 뜻으로 그 界地의 번뇌에 繫縛되어 그 界地에 繫屬됨을 말한다. 初能變이나 第三能變에 界繫門을 분별하지 않는 것은 第三能變은 그 性이 三性에 통하므로 界繫가 일정하지 않으며 初能變은 三界五趣의 總報의 果體이므로 受生의 界地에 繫屬되며 또한 繫屬이란 말이 이것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특히 一門을 세울 필요가 없다.

  요컨대 第七識과 相應 心所의 現行(第八識所持의 種子는 三界에 통하기 때문임)은 趣體인 第八識이 生을 받는 곳에 따라 第八識과 同界繫가 된다.

  즉 第八識이 欲界地에 나면 第七識과 그 상응하는 心所도 또한 따라 欲界地에 속하며, 乃至 第八識이 有頂天에 수생하면 第七識도 상응의 心所도 또한 따라서 有頂天에 속한다. 왜냐하면 第七識은 항상 자타의 第八識을 반연해서 我執을 일으키므로 第八識에 繫屬되어 第八識所 生地의 번뇌에 繫縛되기 때문이다. 第七識이 已轉依에 있을 때는 無漏의 諸法이 비繫의 法이므로 所繫가 아님은 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有漏의 諸法은 界繫의 法이고 無漏의 諸法은 非繫의 法이다.

 

8. 伏斷位次門    

 

  (1) 斷滅位

  末那識의 相狀을 밝히는 八段十門중 마지막 第八段 伏斷位次門이다. 前段에 이미 第七地가 어느 界地에 繫屬됨을 밝혔거니와 어느 위에 이르러 단멸하는가를 本頌에  

 「阿羅漢滅定 出世道無有」110)

라 하여 阿羅漢과 滅定과 出世道의 三位에서 末那識이 斷滅한다고 하였다.

  (ㄱ) 阿羅漢

 

  阿羅漢이란 三乘의 無學果의 位를 나타낸 것으로서 그 語義에 대해서는 初能變識의 第八伏段位次門에서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이에서는 생략한다.

  앞의 初能變識에서는 阿羅漢位中에 第八地 이상의 不退의 菩薩도 섭하였으나 이제 末那識의 斷滅位에서는 不退의 菩薩을 제외한다. 왜냐하면 저 第八識은 我執이 相應하는데 의해서만 阿賴耶識의 이름을 얻기 때문에 이것을 永伏함을 第八地 이상의 보살에도 통한다. 第七 末那識을 染汚라 이름함은 我執의 煩惱뿐만 아니라 또한 法執의 所知에도 의거하므로 만약 第六識이 다만 我空의 無漏觀에 있을 때도 第七識은 오히려 法執을 일으켜 染汚를 永捨하지 않는다.111)

  그러므로 第八地 이상의 不退의 보살에는 아직 染汚의 末那가 있기 때문에 三乘의 無學果에 국한한다. 이 識과 相應하는 煩惱는 俱生起의 것이므로 見道位에서 끊을 바가 아니다. 見道位에서 끊을 바가 아니면 染汚이기 때문에 非所斷도 아니다.112)

  또한 이 識의 번뇌는 극히 미세해서 오직 無學만을 장애하여 그 힘이 非想非非想處의 下下品의 惑과113) 같으므로 有學의 最後心인 金剛無間道의 無漏智가 現前할 때 저 惑과 함께 이 種子를 일시에 몰록 끊는다. 斷盡한 位가 無學果이므로 阿羅漢은 이 識이 영원히 멸한 位이다.

  (ㄴ) 滅定

  다음에 滅定이란 滅盡定이라고도 하니 無色界의 第三天인 無所有處까지의 貪을 伏離한 無學, 有學의 聖者가 無心寂靜을 좋아하고  心을 멸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定인데, 前六識과 第七識有漏의 一分을 現行하지 못하게 하는 無心定이다. 이 定은 生空智 또는 法空智의 等流果로서 극히 寂靜한 無漏定이기 때문에 染汚한 末那의 現行이 잠시 伏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無色界의 第四有頂天(非想非非想處天)에 해당하는 定으로, 外道들은 色心이 斷滅할까 두려워서 이 定을 닦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ㄷ) 出世道  

  다음에 出世道란 有漏의 迷界를 世間이라고 하는데 대해서 無漏의 悟界를 世間出過의 의미로 出世間이라 한다. 또한 出世道란 出世間의 觀智 즉 根本, 後得의 無漏智가 現行하는 位를 말한다. 第七識의 煩惱는 미세하게 轉하기 때문에 有漏의 智로서는 도저히 伏滅할 수 없고 다만 三乘의 無漏智로서만 伏滅할 수 있다.

 

   (2) 末那無有의 異說

  다음에 無有 즉 있음이 없다는 것은 여기에 永斷과 暫斷의 二義가 있는데 染汚의 末那識 및 그와 相應하는 心所의 種子와 現行이 함께 단멸하는 것을 永斷이라 하고, 種子의 勢用만을 伏滅하고 現行을 멸하지 못함을 暫滅이라고 한다. 즉 앞에서 말한 阿羅漢位는 이 識을

 

永斷한 것이고, 滅定과 出世道의 二位는 暫斷이다. 그런데 本頌에서 말한 無有는 永斷과 暫斷이 함께 있지 않다는 뜻이다.

  (ㄱ) 安慧

  安慧論師의 설에 의하면 阿羅漢과 滅定과 出世道의 三位에는 末那의 識體가 없으므로 第七識은 오직 我執만이 있고 法執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 識은 다만 我執과 相應하고 法執과는 相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第七識에 相應하는 法執이 있다고 한다면 三位에 末那가 없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또 「無性攝論」卷一에는 「 末那가 諸識雜染의 所依가 되다고 설하고 淸淨의 所依가 된다고는 설하지 않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것을 또한 無漏에는 末那가 없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安慧의 體無說은 三位에 末那가 없다는 것은 末那의 체가 없다는 것이다.

  (ㄴ) 護法

  護法論師의 설에 의하면 三位에 末那가 없다는 것은 染汚의 末那 즉 末那에 染汚라고 하는 뜻이 없다는 것이지 第七의 識體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第七識은 다만 我執과 相應할 뿐만 아니라 法執과도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法체에 迷하는 法執이 없다면 法用에 迷하는 我執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安慧論師와 같이 第七의 識體가 없다고 한다면 敎와 理가 서로 어기게 된다.

  가령 「解脫經」에 出世의 末那가 있다고 하는 설에 의하면, 이것은 분명히 淨分의 第七이 있다는 증거이다(違敎). 또 阿羅漢位에 染汚의 末那가 없다고 설하는 것을 가리켜 第七識의 體가 없다고 한다면 阿羅漢位에 阿賴耶識을 버린다고 설하는 것도 第八識의 體가 없다고 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저 第八의 識體는 있고 第七의 識體만이 없다고 한다면 彼此의 相例가 반대되는 結果가 되는 셈이다(違理).

  그러나 이 護法의 正義를 따를 때 三位에 末那가 없다는 것은 이는 染汚의 末那가 없다고 하는 것이지 결코 末那의 識體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즉 無染汚의 第七識 즉 淨分無漏의 第七은 항상 現行함을 알 수 있다.

 

   (3) 分位行相

  이상에서 末那識을 伏斷하는 位를 분별해 마쳤으나 이는 未轉依有漏의 位를 밝힌 것이다. 그런데 이 識의 分位行相을 三位로 분류하여 밝히면 즉 補特伽羅我見相應位, 法我見相應位 및 平等性智相應位이다.

  (ㄱ) 補特伽羅我見相應位

  補特伽羅我見相應位란 阿賴耶識을 반연해서 生我의 執을 일으키는 位로서 일체의 범부와 二乘의 有學과 보살의 七地 이전(다만 二乘의 無學에서 廻心한 자는 제외한다. 저에게는 生執이 없기 때문이다)의 有漏心의 位이다. 補特伽羅(Pudgala)를 번역해서 數取趣라고 하니 자주자주 諸趣의 생을 취한다는 뜻으로 生이라고도 한다.

  (ㄴ) 法我見相應位

  法我見相應位란 第八異熟識을 반연해서 法我의 見을 일으키는 位인데, 일체의 범부와 일체의 二乘과 보살의 法空智 및 果가 現前하지 않는 位이다. 그런데 앞의 補特伽羅我見相應位는 반드시 이 法我見相應位를 포함하고 있으나 이 法我見相應位는 初位를 섭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人我의 位에는 반드시 法我가 있으니 人我는 法我에 의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ㄷ) 平等性智相應位

  平等性智相應位란 眞俗의 諸法을 반연해서 平等性智를 일으키는 位로서 보살의 法空智 및

 

그 果가 現前하는 位와 일체의 佛果이다. 第七識은 佛地에서는 無垢識과 일체의 有爲와 眞如를 반연하며 보살의 見道位에서는 異熟識과 眞如를 반연하기 때문에 平等性智를 일으킨다.  

  이상에서 말한 三位中 前二位는 有漏이고 第三位는 無漏이며 그 有漏中 第一位는 染汚이고 第二位는 不染汚이다. 이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染  汚                補特伽羅我見相應位 ―

           ― 有漏 ―

  第七識 ―          ― 不染汚                法 我 見 相 應 位   ― 三位

           ― 無漏                            平 等 性 智 相 應 位 ―

 

  이러한 三位는 차례대로 初能變의 我愛執藏現行位 등 三位에 해당한다. 第八識에 三位가 있다면 第七識에 三位가 있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七·八二識을 서로 바라볼 때에 第八은 所緣이고 第七은 能緣이기 때문이다. 이 때에 平等性智相應位를 고쳐서 思量位라고 한 것은 平等性智相應位라 하면 다만 無漏에 한하고 有漏에 통하지 않지만 相續執持位는 有漏, 無漏 因果 전부에 통하므로 그에 대응하는 思量位로서 배대하였다. 兩者의 관계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我愛執藏現行位 ― 補特伽羅我見相應位

所緣第八識三位 ―   善 惡 業 果 位 ― 法 我 見 相 應 位   ― 能緣第七識三位    

                 ― 相 續 執 持 位 ― 思       量       位 ―

 

9. 第七識存在의 論證

 

  이상의 八段으로써 第二能變 末那識의 相狀을 약술하였거니와 「成唯識論」五에는 다시 二敎六理를 들어서 前六識밖에 이 第七末那識의 別體가 있다는 것을 論證하고 있다.

   (1) 二敎證

  二敎證114)이란 (一) 「入楞伽經」九의 伽陀에

 「藏識說名心 思量性名意 能了諸境相 是說名爲識」115)

이라고 하였으니 이미 말한 바와 같이 心, 意, 識의 三名은 第八識에 통하는 이름이나 그 수승한 뜻에 따라서 別名을 붙인 것이다. 第八識을 心이라 이름하는 것은 第八識은 일체의 現行을 위해서 훈습하여진 諸法의 種子를 積集하고 또 種子識을 인해서 능히 일체법을 集起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第七識을 意라 이름하는 것은 第七識이 恒審思量해서 我等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다만 無漏의 第七識은 第八識 및 眞如를 반연한다. 다음에 나머지 六識을 識이라 이름하는 것은  해서 간단이 있는 六別境에 대해서  하게 요별해서 轉하기 때문이다. 그밖에 「佛地經」「莊嚴論」등의 諸大乘經論에도 따로 第七識의 존재를 설하였다. 그러므로 別體의 第七識이 존재함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二) 「解脫經」의 伽陀에

 「染汚意恒時 諸惑俱生滅 若解脫諸惑 非曾非當有」116)

 

하고 하였다. 이 境에 다시 이 頌의 뜻을 해석하되 「染汚의 뜻은 무시이래로 四煩惱와 함께 항상 생멸한다. 말하자면 我見, 我愛 및 我慢, 我癡이다. 對治道가 생하여 煩惱를 끊어 마쳤을 때 이 뜻은 저에 따라 문득 解脫을 얻는다. 그 때에 이 뜻과 상응하는 煩惱는 오직 현재에 없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도 없으니 과거와 미래는 自性이 없기 때문이다」117)고 하였다. 그러므로 解脫의 位에 이를 때까지 恒時 간단없이 四煩惱와 상응하는 別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第八識은 결코 번뇌와 상응하지 않고 第六識은 간단이 있어 항상 상속하지 않으므로 第七識을 제하고 따로 이 別識에 해당하는 것이 없다.

 

   (2) 六理證

  다음에 六理證이란

  (一)은 不共無明證이니 不共無明이란 恒行不共으로서 行相이 미세해서 알기 어렵다. 항시 행해서 眞如의 實境을 덮고 無漏의 慧眼을 장애하므로 범부는 無我의 이치를 迷하여 長夜의 어두움에 처해서 覺醒할 기약이 없다. 이 不共無明이 心所인 이상 그와 相應하는 心王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前六識은 간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善心과도 상응하므로 不共無明과 상응할 수 없으며, 또 第六識은 無覆無記해서 번뇌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도 또한 不共無明과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따로 恒行하는 第七識의 體가 있어야만 不共無明과 상응할 수 있다.

  (二)는 六二緣證이니 心識이 생기하는 데는 반드시 所依의 根과 所緣의 境이 갖추어야 된다. 그러므로 「成唯識論」에

 「又契經說 眼色爲緣生眼識 廣說乃至意法爲緣生於意識 若無此識彼意非有」118)

라고 하였으니, 色과 眼이 緣이 되어 眼識을 내고 내지 觸과 身이 緣이 되어 身識을 내는 것과 같이, 第六識이 生起하는데도 또한 반드시 所依인 意根과 所緣인 法境의 二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六二緣證이란 第六에도 반드시 二緣을 필요로 하는 점에서 이 識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즉 이 識이 없으면 第六의 所依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三)은 意名證이니 「成唯識論」에

 「又契經說 思量名意 若無此識 彼應非有」119)

라고 하였으니, 第六識을 意識이라 함은 所依인 意의 이름을 能依上에 세운 것이다. 그런데 第七識이 없으면 第六識의 所依가 되는 意根이 闕해서 意의 體가 없게 된다. 그래서 意의 體가 없으면 意識의 이름도 또한 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意의 이름이 있음은 오직 第七識이 있기 때문이다.

  (四)는 二定差別證이니 二定이란 無想定과 滅盡定이다. 無想定은 外道들이  動의 心을 여의고 無心에 들어가기 위하여 닦는 것으로서 聖者들은 몹시 이를 싫어하며 滅盡定은 聖者가 散亂심을 여의고 무심이 되려고 하는 정으로서 聖者들이 크게 기뻐하는 바이다. 이와 같이 동일한 무심정이면서 聖者가 싫어하기도 하며 좋아하기도 함은 染汚심을 멸하지 아니함(無想天)과 멸함(滅盡定)에 따라 차별이 있다. 그러나 二定은 모두 前六識을 멸하였으므로 만약 第七識이 없다면 무엇에 의하여 染心을 멸하지 않는 無想定과 멸한 滅盡定의 차별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成唯識論」五에

 

 「又契經說 無想滅定 染意若無 彼應無別」120)

이라고 하여 이러한 것을 차별할 수 있는 것은 필경 第七識이 存在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五)는 無想有染證이니 上의 無想定의 果인 無想天의 중생은 五百大劫 동안 六識心品을 멸하고 無心에 들어간다. 그래서 第七識의 體가 없다고 한다면 저 위에는 我執이 없고 我執이 없다면 染汚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聖者가 이것을 싫어하는 分別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어함이 있는 것은 반드시 저 位에 我執이 있고 染汚가 있기 때문이다.

 「成唯識論」五에

 「又契經說 無想有精一期生中心心所滅 若無此識彼應無染」121)

이라 하여 필경 第六識이 존재한다는 것을 論證하였다.

  (六)은 我不成證이니 범부는 三性心에 있어서 밖으로 설사 善 등의 業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안으로 항상 我라고 하는 집착을 여의지 않고 있다. 我執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布施 등의 善事를 하고도 오히려 內心에 分別相을 없애지 못한다. 그러한 分別相을 없애지 못하므로 결국 有漏가 된다.

 「成唯識論」五에

 「由有末那恒起我執 令善法等有漏義成 此意若無彼定非有 故知別有此第七識」122)

이라고 한 것과 같이, 第七識이 없다면 善 또는 無覆無記心을 일으킬 때는 반드시 無漏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오히려 有漏이고 無漏가 될 수 없는 것은 필경 第七識이 있어 항상 我執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第七識은 前六識 外에 따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상의 二敎와 六理로써 第七末那의 존재를 논증하였거니와 이는 다만 「攝大乘論」一에 의거하여 信解의 一分을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阿含經」등에는 六識만을 설하고 七, 八 二識을 언급하지 않음은 本敎學에서 본다면 小乘 根機를 대해서 설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所依의 六根과 所緣의 六境을 따라서 설하는데 그쳤으니 결코 이치를 설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요컨대 우리들이 三界生死의 迷界에 무한한 流轉을 되풀이하는 까닭도 이 末那識이 無始以來로 第八識과 함께 간단없이 實我實法의 妄念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斷惑證理해서 無漏位인 阿羅漢位나 滅定位나 出世道에 이르면 第七末那識이 現行할 수 없다는 것이 이 第二能變識의 요점이라 하겠다.

 

Ⅵ. 第三能變識에 關하여

 

  三種의 能變識中 前二能識은 이미 설하여 마쳤으므로 다음에 第三能變에 관하여 서술하고者 한다. 이 能變의 相狀을 밝히는데 모두 九頌으로써 나타내고, 해석하는데 七段, 九門으로써 하니 이를 도시하면 다음(아래 표 1)와 같다.

 

1.能變差別門

 

  前人能變의 識體가 각각 하나만 있는데 반하여 이 第三能變의 識體는 六種의 차별이 있

 

다. 즉 本頌에

 「次第三能變 差別有六種」123)

이라고 한 바와 같이 次第三能變이란 前二能變 다음에 第三能變을 밝힌다는 말이요 差別有六種이란 이 識體에 六種의 此別이 있음을 말한 것으로, 卽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의 六種이다.

  이와 같이 이 識은 所依의 根과 所緣의 境이 六種差別이 있으므로 能依, 能緣하는 識體도 또한 그에 따라서 六種의 差別이 있게 된다. 그 所依의 六種이란 眼, 耳, 鼻, 舌, 身, 意의 六根이며 所緣의 六種이란 色, 聲, 香, 味, 觸, 法의 六境이다. 곧 眼根에 의해서 色境을 반연하는 能緣의 眼識이 있으며, 내지 意根에 의해서 法境을 반연하는 能緣의 意識이 있다. 이를 도시하면 다음(표 2)과 같다.  

  그러므로 이러한 識의 得名도 당연히 根을 따라 얻는 이름과 境을 따라 얻는 이름이 있으니, 즉 隨根得名과 隨境得名이다.

 

     (1) 隨根得名

  隨根得名이란 所依인 眼, 耳, 鼻, 舌, 身, 意의 六根에 따라 能依의 識名을 세운 것이니 곧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이다. 이 隨根得名에 五義가 있으니 依, 發, 屬, 助, 如 등이다. ⓛ 依義는 識이 根을 의지한 것이니 識은 根中의 識이므로 根을 의지하여 識의 이름을 얻는다. 또 根이 있음으로써 識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根을 의지하여 識의 이름을 얻을 수 있다. ② 發義는 識이 根에서 引發함을 말한다. 따라서 根이 변하면 識도 또한 변한다. 예를 들면 近視眼者는 根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識도 또한 명료하게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③ 屬義는 識의 종자가 根의 종자를 따름을 말한다. 곧 識의 종자는 內在하여 항상 相속하는 根을 따라서 識을 낼 수 있다. ④ 助義는 根이 識에 합해서 받아들이는 바에 따라 識이 根으로 하여금 損益케 함을 말한다. 예를 들면 第六識이 無漏가 될 때에는 그의 根인 第七識은 有漏를 損하고 無漏가 되는 것과 같다. ⑤ 如義는 識果 根이 상사하여 뷸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이상과 같은 五義가 있으므로 所依의 根에 따라 이름을 세웠으니 이른바 眼識 내지 意識 등이다.

 

(표 1)

       - 一. 能變差別門                          次第三能變差別有六種   一. 體別門

                                                         - 性           二. 自性門

         二. 自性行相門                          了境爲 -

                                                         - 相           三. 行相門

         三, 三性分別門                          善不善俱非              四. 三性門

                                              - 此心所遍行別境  ―

                       - 列六位名                                       五. 相應門

                                              - 善煩惱隨煩惱不定 -

                         受俱分別               皆三受相應              六. 受俱門

                                   - 遍行       初遍行觸等

        四. 相應受俱門 -                      - 次別境謂欲勝解念

                                     別  境 -

                                              - 定慧所緣事不同

                                              - 善謂信 愧無貪等三根                  - 九門

                                      善

 七段 -                                       - 勤安不放逸行捨及不害

                       - 重明六位 -  煩惱 ――  煩惱謂貪瞋癡慢疑惡見   - 心所段

 

                                              - 隨煩惱謂忿恨覆惱嫉

                                                 諂與害 無 及無愧

                                     隨煩惱  -

                                                掉擧與昏沈不信 懈怠

                                              - 放逸及失念散亂不正知

                                   - 不定       不定謂悔眠尋伺二各二

         五. 所依門                             依止根本識               七. 所依門

                                             - 五識隨緣現或俱

         六. 俱不俱轉門                                                - 八. 俱轉門

                                             - 或不俱如濤波依水

                                             - 意識常現起除生無想天

       - 七. 起滅分位門                                                - 九. 起滅門

                                             - 及無心二定睡眠與悶絶

 

(표 2)

                        [六識]    [六根]    [六境]

       ― 眼識  ―  眼根  ― 色境    

          耳識  ―  耳根  ― 聲境

          鼻識  ―  鼻根  ― 香境

六種 ―

          舌識  ―  舌根  ― 味境

          身識  ―  身根  ― 觸境

       ― 意識  ―  意根  ― 法境  

 

      (2) 隨境得名

 다음 隨境得名이란 所緣인 色 , 聲, 香, 味, 觸, 法의 六境에 따라서 能緣의 識名을 세운 것이니 곧 色識, 聲識, 香識, 味識, 觸識, 法識이다. 隨境得名은 未自在位에 국한하고 있다. 만약 自在位의 諸根이 互用하는데 이른다면 五識自根에 의해서 널리 五境을 緣하게 된다. 예를 들면 眼識이 眼根에 의해서 다만 色境뿐만 아니라 나머지 四境(聲, 香, 味, 觸 도 반연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位에서는 隨境得名으로 한다면 一識을 色識 內지 身識 등이라고 이름해서 五種의 句別을 하기 어려우므로 이 隨境得名은 自在位에 통할 수가 없다. 그런데 隨根得名은 自在位 未自在位 어느 位에도 통하여 하등의 혼람할 우려가 없으므로 諸論에 흔히 一切位에 통하는 隨根得名에 의해서 眼識 內지 意識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2. 自性行相門

 

  自性行相門은 九門中 自性門과 行相門이다. 自性이란 體性 혹은 識體라고도 하니 四分中 自證分에 해당하고 行相이란 能緣의 작용으로서 見分에 해당한다. 이 體와 用은 不離의 관界이나 뜻에 있어서는 서로 於기므로 二門으로 分類한다. 그러나 第六識의 體性과 行相은 가장 親根하므로 一段으로 합하여 설명한다. 本頌에

 「了境爲性相」124)

이라 하였으니 前六識은 경계를 요별함으로써 性과 相을 三는다는 뜻이다. 了境이란  顯의 境界를 요별함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前六識은 六根에 의하여 色, 聲, 香, 味, 觸, 法의  相顯著한 각자의 境界를 요별함을 말한 것이다.

 性이란 體性이니  顯의 境을 요별함을 前六識의 體性으로 하나 그 了境은 識體의 작용으

 

로서 見分의 行相이므로 了境을 性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識體는 無形하여 가리키기 어려우므로 그 用을 들於서 體를 나타내어 境을 요별함을 性으로 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頌에서 말한「了境爲性相」은 「了境爲性 了境爲相」을 생략해서 말한 셈이다. 그 중 了境僞性은 그 體의 自性을 보인 것이고, 了境爲相은 그 識의 行相을 보인 것이다. 실제로는 了境은 識體의 작용으로서 見分行相에 속하므로 了境爲相(行相)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了境僞性(自性)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體性이 隱微하여 나타내기 어려우므로 그 行相을 들어서 그의 體性을 나타낸데 불과하므로 了境僞性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3. 三性分別門

 

  이 三性分別門은 前六識은 善, 惡, 無記 三性中 어디에 攝하는가를 分別하는 門이다. 三性에 대해서는 第一能變(異熟識)을 밝히는 三性門에서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前二能變에서는 心王과 心所를 밝힌 다음에 三性門을 分別하였으나, 이제 六識을 밝히는데는 心王과 心所를 밝히기 전에 먼저 三性을 밝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를 本疏에서 二種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① 初能變에서는 心, 心所法은 그 性이 꼭 같으므로 心所相應門 後에 三性門을 설하였고, 第三能變에서는 心王의 性에 따라 心所도 그 性이 결정되므로 心所相應門 前에 三性門을 설한다고 한다. ② 初二能變은 心王과 心所가 꼭 같으므로 心王, 心所를 說한 뒤에 三性門이 있다. 第三能變은 心王은 三性에 통하고 心所는 그렇지 아니해서 善位의 心所는 善에 한하고 번뇌는 染汚性에 국한되므로 心所相應 後에 三性門을 說한다고 하였다. 本頌에

 「善不善俱非」125)

라고 하였으니 善不善俱非란 善, 惡, 無記의 三性이니 俱非는 善도 不善도 아닌 곧 無記를 말한 것이다. 이제 이 前六識은 三性에 통하는 것을 나타낸다. 信, 慙, 愧, 無貪, 無瞋, 無痴, 勤, 輕安, 不放逸, 行捨, 不害 등 十一種의 善心所와 상응하는 위는 善이요, 無慙, 無愧, 瞋, 忿, 恨, 覆, 惱, 嫉,  , 害 등의 十種의 心所와 상응하는 位는 不善이요 善果도 상응하지 않고 不善果도 상응하지 않는 位는 無記의 六識이다.

 그런데 三性에 통하는 이 六識이 俱時에 함께 일어나는가? 그렇지 아니한가? 이에 대하여 「成唯識論」 五에 具起, 不具起의 兩說을 들고 있다.

 

    (1) 三性不俱起說

 이는 難陀 등의126) 설이라고 한다. 대개 五識은 어느 識을 막론하고 一識이 일어난 것이 一刹那로서 다음에는 바로 意識이 생하여 五識이 일시에 함께 생하는 일은 없다. 따라서 三性이 俱起함은 불가능하다. 六識은 다같이 外境慢을 緣하고 三性은 서로 어긴다. 뿐만 아니라 五識은 자유로이 일어나는 識이므로 善 혹은 染汚가 되려면 반드시 第六識의 引導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所引의 五識이 이미 一刹那 중에 三性을 俱起한다면, 그 能引의 意識도 또한 三性에 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同一한 識으로서 一刹那中에 三性이 俱起한다고 하는 것은 正理를 어긴다. 따라서 六識은 三性을 俱起하는 일이 절대로 없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瑜伽論」五十一에 「藏識은 일시에 轉識相應의 三性과 俱起한다」고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多念에 대해서 말한 것이지 일시에 대해서 말한 것은 아니다.

 

   (2)三性俱起說

 이것은 護法論師의 正義로서 六識의 三性은 일체시에 있어서 반드시 俱起하는 것은 아니나 혹은 俱起하는 때도 있다고 주장한다. 즉 三性이 俱起하는 것은 五識이 多刹那에 상속하여 俱起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무릇 心이 境界를 반연하여 多刹那에 상속할 때는 五位의 차제를 경과한다. 이를 五心이라 하니 곧 率爾, 尋求, 決定, 染淨, 等流이다.

① 率爾心이란 처음으로 경계를 반연하는 찰나의 마음 즉 별안간 경에 떨어지는 마음이다. 이 때에 심리작용은 하등의 분별없이 홀연히 能緣의 작용을 일으키는데 불과하다.

② 尋求心이란 率爾心이 一轉해서 경계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서 알려고하는 思尋推求하는 마음이다.

③ 決定心이란 尋求心이 一轉해서 경계를 審知하고 결정을 얻는 마음이다.

④ 染淨心이란 결정심이 一轉해서 境이 怨親, 違順 등의 差別에 따라 染汚, 淸淨 등의 마음을 일으키는 심리작용이다.

⑤ 等流心이란 이 染淨心이 相續等流함을 말한다. 곧 앞의 染淨意識으로 인하여 다음 同性善染이 前을 순하여 일어나는 位니 眼 등 識을 생기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이상에서 말한 五心은 漏, 無漏에 통하며 三界에 통하여 생긴다. 그리고 五心中 率爾心은 오직 일찰나에 한하고 나머지 四心은 多刹那에 통한다. 五識이 染이나 淨이 되는 것은 반드시 意識이 인도하는데 의지하므로 意識의 染淨心은 일찰나이나 五識의 染淨心은 多刹那이다.

  그런데 六識의 三性이 俱起하는 것은 意識이 五識中의 어떤 識을 인도하여 善으로 만들고 또 어떤 識을 인도하여 不善 또는 無記로 만드는 까닭이다.

  예를 들면, 眼識이 돈을 반연해서 率爾, 尋求, 決定 등 心을 지나서는 意識에 인도되어 不善의 盜心을 결정하고, 이를 절취하려는 不善心이 상속 等流할 때 다시 설법을 듣고 耳識이 이를 반연하여 또다시 率爾, 尋求, 決定 등 心을 지나 意識에 인도되어 善心이 결정되어 相續等流한다. 그 때에 다시 無記인 香 등을 鼻識이 이를 반연하면 그 率易心 등은 無記127)가 된다. 따라서 이 때에 六識의 三性이 함께 일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眼 등의 前五識은 善 또는 不善의 경에 대해서 率爾心을 일으키니 곧 이 位 는 眼 등의 五識에 있고 第二念 후의 尋求, 決定, 染淨 등은 第六識의 位이다. 五識은 善, 不善 등의 境에 대하여 率爾心을 일으키면 다음에 尋求心이 일어나고 決定心이 일어나고 染淨心이 일어나서 善, 不善 등을 일으킨다. 率爾心은 前五識의 境이요 第二尋求心位 이후는 第六識의 영역이다.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眼識 … 率 … 尋 … 決 … 染 … 等 … 等 … 等 … 等 … 等 … 不善 ―

              意識 … 率 … 尋 … 決 … 染 … 率 … 尋 … 決 … 淨

諸識俱起 ―   耳識 ………………………………… 率 … 尋 … 決 … 淨 … 等 …  善    ― 異性俱起  

                                                                      率

           ― 鼻識 ………………………………………………………………… 率 … 無記 ―

 

  이와 같이 前五識은 第六識으로 더불어 함께 일어나지만 반드시 同性이 되는 것은 아니

 

다. 意識은 처음에 善, 惡 五識을 인도하여 五識 中의 어느 하나와 同境을 반연하여 偏注하므로 저 五識과 同性이 되지만 等流 이후는 五識에 대하여 偏注하지 아니 할 때는 意識이 無記性이 됨으로 五識과는 性을 달리 한다.

  요컨대 前六識은 善, 惡, 無記에 통하나 그 三性이 생기함에 있어서는 俱起, 不俱起의 兩說이 있는 중 俱起說이 護法論師의 正義이다. 이상은 前六識의 未轉依位를 잡아서 말한 것이요, 已轉依位 즉 과위를 잡아서 말한다면 오직 善性뿐임을 말할 여지가 없다.

 

4. 相應受俱門

 

  前六識을 해석하는 七段九門中 위에서 이미 三段四門을 해설해 마쳤으므로 다음 第四相應受俱門을 밝히고자 한다. 本頌에

 「此心所 行 別境善煩惱 隨煩惱不定(六位의 名을 列함) 皆三受相應128)(受俱分別) 初遍行觸等 次別境謂欲 勝解念定慧 所緣事不同129) 善謂信慙愧 無貪等三根 勤安不放逸 行捨及不害130) 煩惱謂貪瞋 癡慢疑惡見131) 隨煩惱謂忿 恨覆惱嫉   諂與害  無慙及無愧 掉擧與 沈 不信 懈怠 放逸及失念 散亂不正知132) 不定謂悔眠 尋伺二各二133)(거듭 六位를 밝힘)라 하였으니, 初三句는 六位心所의134) 總名을 들고, 다음 一句는 受俱를 해석하고, 後의 五頌은 六位의 心所를 밝혔다. 相應의 뜻은 第一能變 卽 異熟識을 해석하는 第三「心所相應門」에서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相應受俱門이란 九門義에서는 相應과 受俱의 二門으로 分類하였으니 이른바 相應은 心所의 相應을 가리킴은 물론이고 그 心所中 受만은 그 種이 달라서 특별히 서술을 요하므로 受俱의 別門을 세웠다. 그러나 相應, 受俱는 모두 六識相應의 心所를 말한데 불과하므로 七段에서는 一門으로 합하여 말하게 된다.

 

   (1) 六位心所의 意義

 本頌에 「此心所遍行, 別境善煩惱, 隨煩惱不定」이라 한 것은 이 六識에 상응하는 六位心所의 總名을 든 것이다. 心所는 또 心數라고도 하고 자세히는 心所有法이라고도 한다. 卽 恒相 心王에 繫屬되於 心王에 의지하여 일어나고 心王과 상응해서 能緣의 심리작용을 하는 것을 말한다. 心所의 뜻을 간략히 三義로써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① 心所는 항상 心王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心王이 없으면 心所는 생길 수 없다.

② 心王은 心所에 의하여 生기지慢 四種平等(時, 依, 緣, 事 등의 四義는 異熟識을 해석하는 第三心所相應門에서 이미 언급하였으므로 이에서는 생략함)의 뜻이 없으면 心所라고 할 수 없다. 心王에 대하여 四種平等義가 있어야 비로소 心王과 相應할 수 있다.

③ 心王은 主가 되고 心所는 이 主에 예속된다. 이러한 三義를 갖추어야 비로소 心所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色, 不相應, 心王 및 無爲는 心所라고 이름할 수 없다.

  대개 心所에 대하여 大小二乘間에 그 立數의 異說이 있다. 즉 「對法論」卷一에는 五十

 

五를 세우고 「瑜伽論」卷一에는 五十三을 세우고 「顯揚論」 卷一과 「百法論」및「成論」卷五 등에는 五十一을 세우고 있다. 이와 같이 大小乘間에 異說이 있으나 一반적으로 大乘에는 五十一心所, 小乘에는 四十六心所를 통설로 하고 있다.

 또한 四一切義의 具缺에 따라서 五位의 此別을 세웠으니 四一切義란 一切性, 一切地, 一切時, 一切俱이다. 즉 遍行心所는 어떤 識이나 어느 곳을 막론하고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相應生起하므로 四一切位를 갖춘다. 別境心所는 一切性과 一切地에는 두루하나 一切時와 一切俱의 뜻은 없다. 다음에 善心所는 一切地에 두루한다. 一切地는 二解를 들 수 있는데 一은 三界九地를 가리키고, 二는 有尋 등의 三地이다. 善心所중 輕安같은 것은 欲界에 두루하지 않으므로 一切地를 有尋 등의 三地(有尋有伺地 無尋有伺地 및 無尋無伺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음 染心所는 四一切義가 없는 것이 많다. 마지막의 不定心所는 三性에 통하므로 一切性義만 있을 뿐이다. 이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遍行                               一切性

          別境                               一切地

五種 ―   善                                 一切時

          不定                               一切俱

               ― 煩惱  

       ― 染 ―

               ― 隨煩惱

 

  (ㄱ) 遍行位

  五十一心所를 모두 六位로 分類하니 遍行位, 別境位, 善位, 煩惱位, 隨煩惱位, 不定位이다. 이 중 遍行이란 周遍行起의 뜻으로서 一切의 心王에 두루 상응해서 함께 일어나는 心所이므로 그렇게 이름하였으니 이는 앞에서 말한 四一切義를 갖춘 心所이다. 여기에 觸, 作意, 受, 想, 思의 五種이 있으나 觸의 一法만을 들어 나머지 四法을 등취하였다. 그 낱낱의 설명 初能變識의 第三「心所相應門」에서 이미 해석해 마쳤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ㄴ) 別境位

 앞의 遍行과 같이 一切의 心心所에 두루 상응하지 않고 각기 따로따로 境에 대해서 일어나는 心所이므로 別境이라 이름한 것이다. 遍行이 四一切에 통하는데 비하여 이는 一切地와 一切性의 二義에만 통한다. 別境의 心所에 五種이 있으니 欲, 勝解, 念, 定, 慧이다.

 ① 欲이란 所樂의 境에 대해서 희망하는 심리작용이다. 本論 卷五에

 「於所樂境 希望爲性 勤依爲業」135)

이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말하는 所樂境은 기뻐하고자 하는 경계가 아니라 관찰하고자 하는 경계다. 業力이나 경계의 세역에 따라 특별한 희망없이 마음대로 경계를 반연할 때에는 이 欲心所가 일어나지 아니하고 作意하여 경계를 관찰하고자 할 때 희망을 발하는 것이 欲의 心所이니 이는 欲心所의 性用이다. 勤依란 勤은 정진의 心所로서 이 정진의 心所는 欲을 所依로 해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것은 곧 欲心所의 業用이다. 만약 널리 欲의 業用을 말한다면 欲은 三性에 통하므로 不善의 欲에는 不善의 心所를 일으킬 業用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善의 欲을 잡아서 善의 勤 즉 정진만을 들어 불법에 들어가는 차제를 보인 것이다.

 

 ② 勝解란 수승한 解了라는 뜻으로 善惡正邪의 경계에 대해서 명료한 了解를 하고 이를 인정하고 任持해서 어떠한 경우를 만날지라도 움직이지 않는 심리작용을 발한다. 論文에

 「云何勝解 於決定境印持爲性不可引轉爲業」136)

이라고 하였으니, 決定境이란 正邪를 막론하고 敎示나 혹은 道理나 修禪 등에 의하여 證知한 力量으로써 이러하다고 확고하게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決定境을 審決印持함을 性用으로 하고, 他의 반대나 추론 등에 의하여 쉽게 변하지 않음을 業用으로 한다.

 ③ 念이란 明記不忘의 뜻으로 일찍이 경험한 일에 대해서 기억해서 잊어버리지 않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定心을 일으키는데 所依가 된다. 論文에

 「云何爲念 於曾習境令心明記不忘爲性定依爲業」137)

이라고 하였으니 과거의 익혔던 경계상을 마음에 明記하여 잊지 않게함을 性用으로 하고, 定은 善念에서 생하므로 定의 所依가 됨을 業用으로 한다. 그러므로 친히 반연하지 않았던 경계거나 또는 일찍이 반연했던 일이 있다 할지라도 明記하지 않는 境界는 念이 생기지 않는다.

 ④ 定이란 所觀의 境에 대하여 心果 心所를 專注해서 흩어지지 않는 심리작용으로서 慧의 所依이다. 論文에

 「云何爲定 於所觀境令心專注不散爲性智依爲業」138)

이라고 하였으니, 所觀境에 깊이 마음을 기울여 산란하지 않게 함을 性用으로 하고 이에 의하여 決擇智를 생하게 함을 業用으로 한다. 이 결택지는 專注에 의해서 비로소 생기는 無漏智이다. 여기에 生得散定果 修得禪定의 二種이 있다. 生得散定이란 선천적으로 業에 의해 제멋대로 일어나는 專住不散의 心所로서 그 性이 거칠게 움직여 순정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修得禪定이란 勤行修習에 의하여 얻은 바로서 그 性이 純淨安樂하여 心身을 안정시킴을 말한다.

 ⑤ 慧란 是非邪正을 간택해서 취사하는 결단의 심리작용으로서 흔히 의심을 끊는 것이다. 論文에

 「云何爲慧 於所觀境簡擇爲性斷疑爲業」139)

이라고 하였으니, 所觀境에 대해서 得失邪正 등을 간택함을 그 性用으로 하고, 猶豫不定의 의혹을 끊음을 業用으로 한다. 여기에 또한 惡慧와 善慧의 二種이 있다. 惡慧中 그 작용이 猛利한 것을 惡見이라 하며, 煩惱位에 攝한다. 善慧는 또 正見, 正慧라 하는데 여기에 三種이 있다. 聞慧 卽 聲, 名, 句, 文의 교법을 듣고 일어나는 智慧와 思慧 즉 義理를 관찰함에 의해서 얻는 智慧와 修慧 즉 修定力에 의해서 얻는 지혜이다.

    (ㄷ) 善 位

 善心이 발할 때 두루 상응해서 일어나는 心所로서 惡心을 대치하는 것이다. 여기에 十一種이 있으니 信, 精進, 慙, 愧, 無貪, 無瞋, 無癡, 經安, 不放逸, 行捨, 不害 등이다. 善이란 금생과 후생에 者他를 순하고 이익케 하는 心所이니 따라서 이와 반대로 二世에 자타를 어기고 손해하는 것을 不善이라 한다.

  ① 信이란 잘 穢濁의 心心所를 대치하고 다른 心과 心所로 하여금 청정케 하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論文에

「云何爲信 於實德能深忍樂欲心淨爲性 對治不信樂善爲業」140)

 

이라고 하였으니, 實과 德과 能에 대하여 깊이 忍하고 樂하고 欲해서 心을 청정케 함을 性用으로 하고, 不信을 대치하고 善을 願樂하는 것을 業用으로한다. 信에 三種의 此別이 있다. 一은 實有를 믿는 것으로 즉 諸法의 실은 事와 理에 대해서 깊이 信忍함을 말한다. 二는 有德을 믿는 것으로 三寶의 眞淨한 德에 대해서 깊이 信樂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三은 有能을 믿는 것으로 일체의 世間, 出世間 善法에 대해서 깊이 믿음을 내어 원만히 완성함을 희망하는 것을 말한다.

  ② 漸이란 자기를 반성하고 교법을 존중함에 의해서 잘 聖賢과 善法을 존경해서 스스로의 과오를 부끄러워하고 모든 惡行을 하지 않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論文에

「云何爲漸 依自法力崇重賢善位性 對治無漸止識惡行位業」141)

이라고 하였다. 즉 자신을 존중하고 敎法을 존중하는 힘에 의해서 賢聖과 善法을 尊崇함을 性用으로 하고, 無 을 대치하고 惡行을 그치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

  3 愧란 타인의 헐뜯음을 생각하여 세상의 法規를 돌아보고 폭력과 친하지 아니하고 惡을 부끄러워하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論文에

「云何爲愧 依世間力輕拒暴惡爲性 對治無愧止息惡行爲業」142)

이라 하였으니 세인의 헐뜯음을 두려워하고 王法의 형벌을 싫어하는 등의 힘에 의하여 暴惡人을 업신여기고 惡法을 거부함을 性用으로 하고, 無愧를 대치하여 惡行을 그치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

  4 無貪이란 心身의 욕망을 여의고 일체경계에 대해서 탐착함이 없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論文에

 「云何無貪 於有有具無著爲性 對治貪著作善爲業」143) 

이라고 하였으니, 유와 유구에 애착이 없는 것을 性用으로 하고, 貪著을 대치하고 善을 지음을 業用으로 한다. 여기에서 말한 有는 三有의 果 즉 三界의 과보며 바로 有情의 五蘊을 말한다. 有具는 능히 三有를 생하는 因이니 곧 혹, 業 및 涅槃을 말한다. 열반을 반연하여 탐애를 일으키고 業을 발하여 三有의 果를 감득하므로 열반도 有具라 한다.

  5 無瞋이란 情, 非情 일체의 境에 대해서 설사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깊이 연민해서 성내지 않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論文에

「云何無瞋 於苦苦具無 爲性 對治瞋 作善爲業」144)

이라 하였으니 苦와 苦具에 성냄이 없음을 性用으로 하고, 瞋 를 대치하여 善을 짓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 苦에는 苦苦와 壞苦와 行苦의 세 가지가 있다. 苦苦란 寒熱饑渴 등의 苦緣에서 생하는 苦요, 壞苦란 樂境이 무너질 때에 생하는 苦요, 行苦란 一切有爲法이 무상하여 변천하는 苦이다. 欲界에는 三苦가 있고, 色界에는 壞苦와 行苦의 二苦가 있으며, 無色界에는 行苦만 있다. 苦具는 苦를 생할 수 있는 일체법이니 水, 火, 怨, 害 등과 같은 것이다. 涅槃(滅諦)을 구하여 뜻과 같이 증득하지 못했을 때 성을 내는 일이 있으므로 열반도 또한 苦具로 본다.

   無癡란 모든 事와 理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서 우매하지 않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論文에

「云何無癡 於諸理事明解爲性 對治愚癡作善爲業」145)

 

이라 하였다. 리와 일체사에 대하여 밝게 알아 미하지 않은 것을 성용으로 하고, 우치를 대치하여 선을 짓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 이상 無貪, 無瞋, 無癡를 삼선근이라 하니, 그 이유는 선근을 生起하는 성질이 수승한 까닭이며, 삼불선근을 대치해서 모든 정견을 生起하게 하기 때문이다.

   근은 곧 정진이니 선을 닦고 악을 끊는 일에 대해서 물러가지 않고 用맹정진하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論文에

 「근위정진 어선악품수段사중용悍위성 대치해태만성위업」146)

이라 하였으니 선품을 닦고 악품을 끊음에 있어 勇悍함을 성용으로 하고, 해태심을 대치하여 일체선품을 만족케 함을 業用으로 한다. 이 근은 노력의 뜻이므로 삼성(선, 악, 無記)에 통하나 여기서는 勇悍의 性인 정진으로서 선에 해당한다.

   경안이란 有漏번뇌의 穢濁을 여의고 신심의 경쾌와 편안함을 느껴 수행하는데 견디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이 心所는 다만 정심과 相應해서 일어나며 혼침 등의 정장을 잘 대치하는 것이다. 論文에

 「安謂輕安 遠離 重調暢身心堪任爲性 對治昏沈轉依爲業」147)

이라 하였다. 煩惱의 무거움을 여의고 身心을 편안케 하여 堪任하는 것을 性用으로 하고,  沈을 대치하여 편안하고 쾌적함을 業用으로 한다. 이 心所는 欲界의 散心位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上二界의 定位에서만 일어난다.

   不放逸은 惡을 막고 善을 닦는데 마음을 두호하여 放逸하지 않고 일체의 착한 일을 성취해서 만족하는 心理作用을 말한다. 論文에

 「不放逸者 精進三根於所斷修防修爲性 對治放逸成滿一切世出世間善事爲業」148)

이라 하였으니 精進과 無貪, 無瞋, 無癡의 三善根 心所의 힘으로 혹을 끊고 善을 닦으며 惡을 막고 善을 닦는 것을 性用으로 하고, 일체의 善事를 成滿함을 業用으로 한다.

   行捨란 심으로 하여금 들뜨게 하지 않고 沈鈍에 빠지지 않으며 평등하고 정직하게 무공용에 주하는 心理作用을 말한다. 論文에

 「云何行捨 精進三根令心平等正直無功用住爲性 對治掉擧靜住爲業」149)

이라고 하였으니 精進과 三善根상에서 마음을 평등, 정직하게 하고 功用이 없는데 주하는 것을 性用으로 하고, 掉擧를 대치하여 마음을 고요히 갖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 다만 사라고 하지 않고 행자를 더한 것은 수온중의 불고불락의 사가 아니라 行蘊中의  沈과 掉擧를 捨離한 것이므로 行捨라고 한다. 不放逸과 行捨는 모두 精進 및 三善根의 사법의 세력공능상에 세워진 것으로 별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것을 분위가립의 法이라 칭한다.

   不害란 모든 중생에 대해서 損惱를 끼치지 않는 심리작용이다. 論文에

 「云何不害 於諸有情不爲損惱無瞋爲性 能對治害悲愍爲業」150)

이라 하였다. 無瞋의 心所가 有情에 대해서 損惱하지 않음을 性用으로 하고, 능히 해를 대치해서 悲愍하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 不害는 無瞋의 作用으로 별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無瞋은 주로 중생의 생명을 끊지 않고 중생에게 락을 주는 방면에서 이름했으며,

 

不害는 손해를 가하지 않고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는 作用을 이름한 것이다. 그러므로 前者는 慈(與樂)에 해당하고 後者는 悲(拔苦)에 해당한다.            

  이상의 십일법중 輕安을 제외한 十法은 일체의 善心과 반드시 相應해 일어나지만 오직 輕安만은 정지의 善心과 相應해서 일어나고 산지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ㄹ) 煩惱位

  중생의 身心을 괴롭히는 迷倒한 心所로서 이것을 혹 또는 장이라고도 한다. 대개 萬法의 事理를 미혹함에 의하여 解脫을 장애하는 心理作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십종이 있으니 貪, 진, 癡, 만, 의, 身見, 변견, 邪見, 견취견, 계금취견이다. 이 십혹은 모든 煩惱의 根本으로서 나머지 일체의 煩惱는 모두 이 십혹에 따라 일어나므로 이것을 根本번뇌라 한다.

  1 貪이란 자기의 마음에 맞는 일체의 순정의 대상에 대해서 염착 貪구하는 心理作用으로서 고의 根本이다. 論文에

「云何위탐 어유유구염착위성 能藏無貪생고위업」151)

이라 하였으니 유와 유구에 대하여 染着함을 性用으로 하고, 능히 無貪을 장애하여 고과를 생하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 다음의 진, 癡와 함께 삼독 또는 三不善根이라 칭하니 善心을 害하는 煩惱이기 때문이다.

  2 진이란 마음에 맞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 일어나는 憎 의 心理作用으로서, 身心을 熟惱케 하는 모든 惡業의 근본이다. 論文에

 「云何위진 어고고구증에위성 능장無瞋불안악행소의위업」152)

이라 하였다. 고와 고구에 대하여 憎 하는 것을 性用으로 하고 無瞋을 장애하여 불안과 惡행의 所依가 됨을 業用으로 한다. 이 心所는 修道하는데 가장 큰 장애로서 모든 經論에 이를 심하게 境계하였다. 예를 들면 「遺敎經」에 「마땅히 알라. 瞋心은 猛火보다 심하니 항상 굳게 막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공덕을 겁탈하는 도적이 성냄보다 더함이 없다」라고 하여, 모든 심병 가운데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心所로 보았다. 瞋心은 欲界에만 上二界에는 없다.

  3 癡는 無明이라고도 한다. 諸法의 事理에 미혹해서 眞理의 진상을 깨닫지 못하고 일체의 惑障을 일으키는 根本이 되는 심리작용이다. 論文에

 「云何위치 어제리사闇위성 능장無癡일체소의위업」153)

이라 하였으니 모든 理사에 대하여 어두운 것은 性用으로 하고, 능히 無癡를 장애해서 일체雜染의 所依가 됨을 業用으로 한다. 여기에 二種이 있다. 일은 相應無明인 第六識이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해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는 不共無明이니 여기에 二種이 있다. 일은 恒行不共無明이니 第七識相應의 無明으로서 貪 등의 나머지 혹과 함께 하나 일체凡夫의 마음에 항상 간단없이 행해서 第六識상응의 無明과 다르므로 항행불공이라 한다. 이는 獨行不共無明이니 第六識相應으로서 貪 등의 本惑과 함께 일어나지 않고 獨行하는 자를 말한다. 여기에 또 二種이 있다. 일은 主獨行이니 忿 등의 小隨惑과 함께 일어나지 않고 홀로 주가 되어 일어나는 無明이다. 이는 非主獨行이니 忿 등의 主에 수반해서 일어나는 無明을 말한다. 이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相應無明                     (第六識相應)

 無明 ―                  

                            ― 恒行不共 (第七識相應)

        ― 不共無明                                    ― 主獨行

                            ― 獨行不共 (第六識相應) ―

                                                       ― 非主獨行        

 

 

  4 만이란 스스로 자기를 믿고 남을 멸시하는 心理作用을 말한다. 論文에

 「云何爲慢 恃己於他高擧爲性 能障不慢生苦爲業」154)

이라고 하였으나, 자기를 믿고 타에 대하여 뽐내는 것을 性用으로 하고, 능히 불만을 장애해서 고통이 생김을 業用으로 한다. 즉 자기를 타인과 비교해서 타를 멸시하고 스스로 뽐내어 승덕의 法이나 덕망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겸양하는 마음이 없음을 만이라 한다. 여기에 七種이 있으니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於劣計己勝                      下品

一. 慢

               ― 於等計己等

                                                  中品

               ― 於等計己勝

二. 過  慢  

               ― 於勝計己等

三. 慢過慢        於勝計己勝                      上品

四. 卑  慢        他多勝謂己少劣

               ― 於自最勝五蘊依身 ―

五. 我慢                                          我蘊

               ― 計我我所自恃高擧 ―

六. 增上慢        於自少分勝德計己得全分德        

                                               ― 勝德

七. 邪  慢        於己全無勝德計己有勝德

 

  5 의란 미오인과의 도리에 대해서 미적 미적 결정짓지 못하는 心理作用을 말한다. 정혜를 가리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論文에

 「云何위의 어제체리猶豫위성 능장불의선품위업」155)

이라고 하였으니, 제체리에 대하여 의심(猶豫)하는 것을 性用으로 하고 능히 의심치 않는 善品을 장애하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 諦는 因果의 사요, 理는 고, 無我 등의 理이다. 이러한 諦理를 의심하여 결정하지 못하는 心所를 말한다. 小乘은 다만 理만을 의심하지만 大乘은 다시 사를 의심한다. 이 心所는 不善과 有覆과 三界에 통하고 現量과 非量이 아니고 오직 非量이오 第六識에만 상응한다.    

   身見이란 梵語로 삿트카아야(Satk ya, 薩迦耶見)라고 하는데 번역하여, 身見 또는 我見이라 한다. 論文에

「살가야견 위어오취온집아아소일체견취소의위업」156)

이라고 하였으니 五蘊화합의 身心상에 일어나는 아, 我所의 집견이니 일체견취의 所依를 業으로 한다. 이 我見과 我所견을 합쳐서 身見이라 한다. 즉 나의 몸은 五蘊이 가화합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실로 나의 몸이 있다고 계탁하는 것이 我見이다. 또 나의 신변의 모든 물건이 일정한 소유주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실로 나의 소유물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我所견이라 한다. 그리고 所緣하는 境上에서는 身見이라 하고 能緣하는 迷情上에서는 我見이라 한다.    

   邊見이란 이미 집착한 내 몸에 대해서 常住불변하다고 주장하는 상견과 사후의 斷滅을 집착하는 段견의 사상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양극段에 치우쳐 中道를 잃은 견해이므

 

로 변집견이라 하며 줄여서 邊見이라 한다. 論文에

「변집견 위즉어피수집段상 장처중해출이위업」157)

이라고 하니 즉 피는 아신이라 집착하는 推度를 가리킨 것이다. 즉 내 몸이라 집착하는 五蘊에 대해서 혹은 斷滅해서 다음이 없다고 집착하고, 혹은 常住해서 滅하지 않는다고 집착함에 따라서 처중의 도체와 출이의 滅체를 장애하게 됨을 業用으로 한다.

   邪見이란 因果를 부인하고 正道를 어기는 일체의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論文에

「사견 위謗인과작용실사급비사견제여사집」158)     

이라고 하였으니 인과와 작용과 실사를 비방하는 것과 四見이 아닌 모든 나머지 邪執을 말한다. 인을 비방함은 善惡의 행위에 結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요, 과를 비방함은 현재의 모든 결과는 善惡업에서 나온 結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요, 作用을 비방함은 諸法인연생멸의 作用을 인정하지 않고 우주의 만상은 자연적 存在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실사를 비방함은 세간에는 진실한 阿羅漢과 불과 菩薩들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컨대 邪見은 因果를 부정하는 것이니 結果를 초래하는 原因도 없고 原因에서 생기하는 結果도 없다고 생각하므로 惡을 짓는 것을 싫어하지도 아니하고 善을 짓는 것을 좋아하지도 아니하는 그릇된 견해다.

   見取見이란 위에서 말한 삼견 및 그 所依인 五蘊법에 대해서 진이다 실이다 최승이다라고 생각하여 자타의 투쟁을 일으키는 心理作用을 말한다. 論文에

「견취 위어제견급소의온집위최승 能得淸淨一切鬪爭所依爲業」159)

이라고 하였다. 諸見과 所依의 온을 집착하여 최승이라 여기며 능히 청정함을 얻으며 일체투쟁의 所依가 됨을 業으로 한다고 해석한다. 자기의 소견에 집착하여 타인의 소견을 배척하므로 모든 쟁론이 일어나게 된다.

   戒禁取見은 戒禁이란 바로 戒律을 말한 것이다. 모든 邪見에 수순하는 不正의 戒禁 및 이것을 가지는 五蘊의 身心에 대해서 最勝淸淨하다고 하는 見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論文에

 「계금취 위어수순제견계금급소의온집위최승 능득청정무이근고소의위업」160)

이라고 하니 모든 견에 수순한 戒禁과 所依온에 집착하여 최승이라 하여 능히 청정을 얻는다고 여기고 無利勤苦의 所依를 業으로 한다고 해석한다. 진정한 佛敎의 여러 가지 戒律은 正見에 순해서 출리의 요도가 될 수 있지만 邪僞의 戒禁인 外道의 裸形, 塗仄, 拔髮, 投火, 投水 등은 正見에 위배되므로 출리의 도라고 할 수 없다.

  이상에서 말한 十種번뇌 중 처음 貪, 진, 癡의 삼은 모든 惡의 根本이므로 이것을 삼독 또는 三縛이라 하며, 또 無貪 등의 삼서는에 대하여 삼불선그이라고도 한다. 身見 이하의 오견은 모두 慧의 心所의 그릇된 作用에 입각하여 따로 열거한 것으로서 이것을 합하면 하나의 惡견에 총섭된다.

  (ㅁ) 隨煩惱位

  줄여서 隨惑이라고도 한다. 根本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枝末的인 心所를 말한다. 여기에 이십종이 있으니 本頌에

 「隨煩惱謂忿 恨覆惱嫉   諂與害  無 及無愧 掉擧與 沈 不信 懈怠 放逸及失念 散亂  

 

  不正知」161)

라 하였고, 論文에

 「唯是煩惱分位差別等流性故名隨煩惱」162)           

라 하였다. 이 이십종번뇌를 대, 중, 小의 三種으로 分類하니 일체염심에 두루 相應해서 일어나는 것은 그 作用이 광대하므로 大隨惑이라 하고, 不善心에만 두루 相應해서 일어나는 것은 作用이 狹小하므로 中隨惑이라 하며, 염심에도 두루하지 않고 不善心에도 두루하지 않고 각자 따로따로 행기해서 편위 국한됨을 小隨惑이라 한다. 삼류와 가실의 差別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小隨惑 ― 忿, 恨, 覆, 惱, 嫉,  ,  , 諂, 害,   ―

                                                            ― 假立

                      ― 放逸, 失念, 不正知

 隨煩惱 ―   大隨惑 ―  

                      ― 掉擧,  沈, 不信, 懈怠, 散亂

                                                            ― 實體

          ― 中隨惑 ― 無 , 無愧

 

  이 이십종의 隨煩惱는 分別과 구생과의 이혹에 따라서 일어나므로 俱生起와 分別起에 통한다.

  1 忿은 뜻에 맞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 분심을 내어 거칠고 사나운 言語동작을 일으키려고 하는 때의 心理作用을 말한다. 論文에

 「云何爲忿 依對現前不饒益境憤發爲性 能障不忿執杖爲業」163)

이라고 하였으니 現前의 不饒益境에 대해서 분심을 발함을 性用으로 하고, 그에 의해서 不忿을 장애하는 身語에 포악한 언동을 일으키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

  2 恨은 먼저 분노한 일에 대해서 한을 품으며 뉘우쳐서 괴로워하는 心理作用을 말한다. 論文에

 「云何爲恨 由忿爲先懷惡不捨結怨爲性 能障不恨熱惱爲業」164)

이라고 하였으니 忿心을 버리지 않고 원수를 맺는 것을 性用으로 하고, 不恨을 장애하고 熱惱함을 業用으로 한다. 忿과 恨은 진의 一分으로 따로 그 實體가 없다.

  3 覆는 스스로의 명문이양을 잃을까 걱정이 되어 죄과를 은폐하는 心理作用을 말한다. 반드시 뒤에 슬퍼하고 뉘우치는 일이 있게 된다. 論文에

 「云何爲覆 어자작죄공실리예은장위성 能障不覆悔惱爲業」165)

이라 하였다. 자기의 죄악이 폭로되었을 때 명예나 재물을 잃을까 두려워서 隱覆함을 性用으로 하고 능히 不覆를 장애하여 회뇌함을 業用으로 한다. 이는 貪과 癡의 一分이다.

  4 惱란 먼저 분을 내고 한한 일에 대해서 이것을  상하여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며, 현재의 경계에 마음이 맞지 않을 때 갖가지로 고민하여 포악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퍼붓는 것과 같은 心理作用을 말한다. 論文에

 「云何爲惱 忿恨爲先追觸暴熱 戾爲性 能障不腦  爲業」166)

이라 하였다. 즉 분한경을  억하고 현재 역경에 다달아 暴熱하고 戾함을 性用으로 하고, 능히 불뇌를 장애하여 타인을 쏘아부침(  )을 業用으로 한다. 이는 진의 一分이다.

 

  5 嫉은 다른 사람의 영예에 대해서 憂戚한 생각을 품고 시기 질투하는 心理作用을 말한다. 論文에

 「云何爲嫉 殉自名利불내타영妬忌위성 능장불질우척위업」167)

이라고 하였으니, 자기의 명예와 이익에 눈이 어두워 타인의 영달을 투기함을 性用으로 하고, 능히 불질을 장애하여 憂戚을 품어서 편안하지 않음을 業用으로 한다. 이도 또한 진의 一分이다.

    은 재물과 法에 대해서 지나치게 인색하여 보시를 하지 않는 心理作用을 말한다. 論文에

 「云何爲  耽著財法不能惠捨   爲性 능장不 鄙畜爲業」168)

이라 하였으니, 즉 재법에 탐착하여 타인에게 능히 베풀지 아니 하고  藏하고 인색함을 性用으로 하고, 능히 不 을 장애하여 鄙 하고 畜積함을 業用으로 한다. 이는 貪愛의 一分이다.

    은 이익과 명예를 얻기 위하여 자신에게 덕이 있는 것처럼 가장해서 보이는 心理作用이다. 論文에

 「云何爲  爲獲利譽矯現有德詭詐爲性 能障不 邪命爲業」169)

이라 하니, 명예와 이익을 얻기 위하여 덕이 있는 것처럼 꾸며서 타인을 속이는 것을 性用으로 하고, 능히 불광을 장애하여 바르지 못한 생활을 하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 이는 貪과 癡의 一分이다.

   諂은 타인을 농락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본심을 숨기고 일부러 다른 이에게 아첨해서 속이려고 하는 心理作用이다. 論文에

「云何爲諂 爲網他故矯說異儀險曲爲性 能障不諂敎誨爲業」170)

이라 하였으니,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가지가지 수段을 써서 險曲함을 性用으로 한다. 또한 貪과 癡의 一分이다.  

   害는 다른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생각 없이 망령되이 핍박하고 괴롭히는 心理作用을 말한다. 論文에

 「云何爲害 於諸有情心無悲愍損惱爲性 能障不害逼惱爲業」171)

이라고 하였으니, 즉 다른 중생에 대해서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 없고 損惱함을 性用으로 하고, 능히 不害를 장애하여 타를 逼惱함을 業用으로 한다. 이는 瞋의 一分이다.

    는 스스로의 학덕과 재산 등에 대해서 깊이 染着하고 거만을 피우는 心理作用이다. 論文에

 「云何爲  御字성사심생염저취傲위성 能障不 染依爲業」172)

이라 하니, 자기의 성사에 깊이 染着하여 이에 도취하고 방탕하는 것을 性用으로 하고, 능히 不 를 장애하여 染汚의 所依가 됨을 業用으로 한다. 이는 탐애의 一分이다.  

  이상 십종은 小隨惑으로서 오직 第六識과 相應하고 前五識과는 相應하지 않는다.

  無 은 스스로 반성하는 일도 없고 法에 부끄러워하는 생각도 없이 현자와 善法을 업신여겨 모든 惡한 일을 하는 심리작용이다. 論文에

 

 「云何無  不願自法輕拒賢善爲性 能障  生長惡行爲業」173)

이라 하니, 자기와 法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어진이와 善法을 輕拒하는 것을 性用으로 하고, 능히참을 장애하여 惡행을 생장하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

   無愧는 세간을 꺼리지 않고 사나움과 사귀고 惡법을 친해서 모든 惡한 일을 하는 心理作用이다. 論文에

「云何無愧 불원세간숭중폭악위성 능장애괴생장악행위업」174)

이라 하였다. 즉 세간의 制裁를 돌아보지 않고 폭악을 숭중함을 性用으로 하고, 능히 괴를 장애하여 惡행을 생장하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

  이상의 二種은 中隨惑으로서 다만 不善심에만 두루하여 일어나는 心所이다.

  다음  掉擧   沈  不信  懈怠  放逸  失念  散亂  不正知의 八種은 大隨惑으로, 그 낱낱에 대한 설명은 思量식(제칠 末那識)을 밝히는 第五心所相應門에서 이미 서술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상 이십종의 隨煩惱중 처음의 십종은 行相이 서로 어겨서 각기 따로 일어나고 함께 일어나지 않으므로 이것을 小隨惑이라 하며, 다음에 無 과 無愧의 二種은 반드시 일체의 不善심과 함께 相應해서 일어나므로 中隨惑이라 하며, 뒤의 八種은 반드시 일체의 染汚심에 두루해서 相應하므로 이것을 大隨惑 혹은 편염성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그 중 小隨惑의 십과 大隨惑중 放逸, 失念, 不正知의 삼은 本惑을 여의고 별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假法이며, 中隨惑의 이와 오는 本惑밖에 따로 自體가 있으므로 實法이라 한다. 이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忿, 恨, 惱, 害, 嫉 ― 瞋의 一分을 體로 함

                         ―  ,  ,             貪의 一分을 體로 함

             ― 小隨惑 ―                                                 ― 假法

                         ― 覆                  貪, 瞋의 一分을 體로 함

                         ― 諂                  貪, 癡의 一分을 體로 함

                         ― 無  ―

 二十隨惑 ―    中隨惑 ―

                         ― 無愧 ―                      ― 別體가 있다   ― 實法  

                         ― 不信, 懈怠,  沈, 掉擧, 散亂 ―

            ―  小隨惑 ―― 放逸            貪, 瞋, 癡와 懈怠를 體로 함

                         ― 失念            念과 癡를 體로 함              ― 假法

                         ― 不正知          慧와 癡를 體로 함

    (ㅂ) 不定位

 不定位는 善, 惡, 無記 三性에 통하는 일정하지 않는 心所를 말한다. 즉 이 心所는 그 성이 善이나 染汚 어느 것에나 결정되지 않고, 三性의 모든 심과 心所와 相應하여 三性이 되므로 부정이라 한다. 이는 遍行, 別境, 善, 煩惱, 隨煩惱의 오종에 攝속되지 않는다. 여기에 四種이 있으니 悔, 眠, 尋, 伺이다.

  1 悔란 惡작이라고도 하니 일찍이 지은 또는 짓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 뉘우치는 心理作用을 말한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禪定을 장애하는 作用이다. 論文에

 회위악작 惡소작업 회위성 장지위업175)

이라고 하니, 먼저 지은 業을 追思하여 혐오하고 또 짓지 아니한 業을 追思하여 후회함을 性用으로 하고, 지 즉 정을 장애함을 業用으로 한다.

 

  2 眠이란 수면이라고도 한다. 분명히 경계를 緣取하지 못하여 마음을 어둡게하며 몸을 자재하지 못하게 하는 心所이다. 第六意識과 相應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熟眠하는 위가 아니다. 論文에

 면위수면 여울자재미略위성 장관위업176)

이라고 하였으니, 신체를 자재하게 하지 못하고 심용을 昧略하게 함을 性用으로 하고, 관을 장애함을 業用으로 한다.

  3 尋은 언설의 경에 대해서 거칠게 그 의리를 심구하여 고찰하는 心理作用을 말한다. 論文에

 심위심구 령심총遽어의언경 저위성 차이구이안불안주신심분위소의위업177)

이라고 하였다. 즉 심은 이른 심구로서 心이 총거(迫急)하여 의언경에 대하여  전하는 것을 性用으로 하고, 이 이는 안불안에 주하는 身心분위의 所依가 됨을 業用으로 한다.

  4 伺는 언설의 경에 대해서 그 의리를 다시 깊고 세밀하게 伺察하는 心理作用을 말한다. 論文에

 伺위伺察 영심총거어의언경세전위성 차이구이安불安주신심분위소의위업178)

이라고 하였다. 즉 伺는 이른 伺察로서 心이  遽(迫急)하여 意言境에 대하여 細轉하는 것을 性用으로 하고, 이 二는 함께 安과 不安에 주하는 身心分位의 所依가 됨을 業用으로 한다.

  이 尋伺의 二는 伺와 慧의 一分으로 別體가 없다. 다만 兩者는  와 細 혹은 淺과 深의 차이가 있을 뿐 行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즉 尋은 尋求로서 거친 경계를 分別하고, 伺는 伺察로서 미세한 경계를 分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尋伺의 정도에 따라서 身心의 安, 不安이 있게 된다. 곧 尋伺가 느릴 때는 身心이 편안하고 급할 때는 不安하게 된다. 이와 같이 身心의 安, 不安의 分位를 냄으로 그의 所依가 된다고 하였다.

 

      (2) 六位心所의 要義

  이상에서 六位 오십일종의 心所를 해석하였다. 다시 간 려 말한다면, 일은 사일체를 갖 어 어느 곳에나 편기하는 心所를 遍行이라 하고, 이는 별별의 경에 나아가 일어나는 心所를 別境이라 하고, 삼은 이세순익하는 心所를 煩惱 또는 根本煩惱라고 하며, 오는 煩惱등류의 혹을 隨煩惱라고 하고, 六은 善과 染汚에 일정하지 않고 또 遍行과 같이 모든 心所에 두루하지 않으며, 別境과 같이 일체지와도 두루하지 않고, 전오경에 섭하여지지도 않는 心所를 부정이라 한다.

  다만 이러한 오십일의 心所는 전육시과 相應하는 心所를 모두 들었을 뿐이고, 識體별론에 나아가서 말한다면 第六識은 널리 내외 삼세의 諸法을 반연하고 三性 삼량 어디에나 통하므로 일체의 心所와 相應하고, 前五識은 遍行의 오와 別境의 오와 善의 십일과 本惑의 삼과 中隨惑의 이와 大隨惑의 八 등 각삼십사종의 心所와 相應하고, 타의 心所는 前五識과 그 行相을 달리 하므로 相應하지 않는다.

  이상에서 밝힌 佛敎의 심리적인 해석이 얼마나 특수한 해석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개 六位 그 自體의 分類에 대해서나 혹은 心所 개개의 입명에 대해서 보더라도 어디까지나 斷惑증리의 修道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 결코 段순한 심리적 해석에 그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佛敎의 구경목적은 반드시 실천수행해야만 비로소 그 의의가 완성된다는 이치를 알

 

아야 할 것이다. 오십일心所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遍行 五 ―― 遍行  

         ― 前五識 (三十四)             別境 五 ―― 別境

                                     ― 善 十一 ―― 善

                                     貪  瞋  癡 ―

                                                  ― 煩惱     ― 心所有法

前六識 ―                            慢 疑 惡見 ―                (五十一)

                                     ― 大隨惑入

         ― 第六識(五十一)           ― 中隨惑二  ― 隨煩惱

                                     ― 小隨惑十

                                     ― 不定, 四  ― 不定

 

          5. 所依門

 

  이 심과 心所가 생기하는 데는 반드시 因緣依 增上緣依(俱有依) 等無間緣依(開導依) 등 三種의 心所를 요하게 되는데, 이 三種의 所依는 第二能變식을 해석하는 第二「所依門」에서 이미 밝혔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頌曰

「 依止根本識 」179)       

이라 하였으니, 根本식이란 염정식의 所依인 第八阿賴耶識(阿賴耶識의 명은 국한하므로 들지 않았다)을 지칭한 것이다. 前六識이 생기하는 데는 반드시 第八識을 所依로 하기 때문에 依止根本識이라 하였다. 이 所依에 二種이 있으니, 種子뢰야와 現行뢰야이다. 種子뢰야란 第八識 所持의 種子로서 六識은 이 第八識 所持의 각자의 種子로부터 생하므로 이때의 根本식은 친의 즉 因緣의가 된다. 現行뢰야는 第八현행으로서 능히 五根을 집수하므로 그 五根을 所依로 하여 五識이 생길 수 있고, 또 第八현행은 능히 第七의 所依가 되어 第七을 생기하게 하므로 그 第七을 所依로 해서 第六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필경 前六識은 모두 第팔현행을 所依로 하는 셈이다. 이 때에 根本식은 增上緣依中 共依가 된다.

  요컨대 前六識은 모두 根本인 第八아타나식중 각자의 種子를 因緣의로 하고 現行의 第八識을 增上緣依中의 共依로 해서 현기할 수 있다.

 

6. 俱不俱轉文

  구불구전이란 前六識이 現行할 때 六識이 동시에 함께 일어나는가 아니면 함께 일어나지 않는가를 논하는 一段이다. 이 일문은 前五識에 대해서만 설명하게 된다. 왜냐하면 第六識은 前五識의 전부나 혹은 몇 개가 생기할 때에 함께 일어나므로 第六識을 특별히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第六識은 다음 第七段에 가서 그 기멸상을 밝히고자 한다. 頌문에

 「오식수연현 혹구혹불구 如濤파의수」180)

라 하였으니, 五識이란 안, 이, 비, 설, 신 五根에 의하여 생기하는 前五識이니, 이 五識은 종류가 비슷하므로 이를 꾸려서 前五識이라 한다. 相似에 오의가 있으니 일은 前五識은 다같이 色근을 의지하니 즉 五識은 모두 色法인 五根을 所依로 한다. 이는 前五識은 함께 色境을 반연하니 곧 五識소연의 경은 色, 성, 미, 觸, 法으로서 모두 色法뿐이다. 삼은 前五識은 다 현재법만을 반연한다. 즉 五識은 모두 과거 미래의 法은 반연하지 못하고 오직 현재의

 

法만을 반연할 수 있다. 사는 前五識은 다 現量으로소 所緣을 了知한다. 즉 五識은 모두 非量 등의 作用이 없고 오직 現量만으로 所緣을 了知하는 것이다. 오는 前五識은 다같이 간단함이 있으니 즉 五識은 모두 중연을 기다려서 비로소 생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간단함이 있다. 이와 같이 前五識은 다섯 가지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이를 前五識으로 該攝하는 것이다.

  수연현이란 諸識이 생기하는 데는 因緣의, 增上緣依, 等無間緣依의 三種의 所依가 필요하나 그 所依를 갖춘 것만으로 생기하는 것이 아니고 다시 종종연을 필요로 한다. 그 생연은 識에 따라 差別이 있으니 일. 眼識은 구연을 갖 어야 비로소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구연중 하나라도 결하면 생길 수 없다. 그 구연이란 공간과 광명과 불공의의 근과 소경의 경과 作意와 分別의의 第六識과 염정의의 第七識과 根本의의 第八識과 能生의 種子이다. 즉 眼識이 생기해서 물체인 色을 보는 데는 물체와의 사이에 약간의 거리를 요하고, 빛을 요하며, 완전한 안근을 요함은 물론, 심과 心所의 現行을 인도하는 作意를 요하고, 第八識(근본의), 第七識(염정의), 第六識(분별의)과 親因緣인 種子를 필요로 한다. 이. 耳識은 빛을 재하고 나머지 八연을 요하며, 삼, 鼻識 사. 설식 오. 身識의 삼식은 빛과 공간을 제외한 칠연을 요한다.

  후삼식의 생연을 말하면 第六識은 오연에 의한다. 즉 불공의의 근인 第七識과 所緣의 경과 作意와 根本의인 第八識과 能生의 種子이다. 칠말나식과 八아뢰야식은 함께 사연에 의해서 생긴다. 즉 俱有依(末那識에서 말하는 阿賴耶識, 阿賴耶識에서 말하는 末那識)와 所緣의 경과 작의와 能生의 種子이다. 이제 諸識의 생연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諸  識

生                 緣

眼識(九)

作意

第六

第七

第八

種子

耳識(八)  

作意

第六

第七

第八

種子

鼻識(七)

作意

第六

第七

第八

種子

舌識(七)

作意

第六

第七

第八

種子

身識(七)

作意

第六

第七

第八

種子

意識(五)

作意  

第七

第八

種子  

末那(四)

作意

第八

種子

賴耶(四)

作意

第七

種子

  다음 혹구혹불구란 어느 때에는 구하고 어느 때에는 구하지 않는다는 않는다는 뜻으로, 諸識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연이 和合해야 비로소 생길 수 있다. 즉 前五識은 所緣의 경이 항상 現前하는 거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의 생연도 또한 항상 구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現行하는 때보다 現行하지 않는 때가 많다. 가령 眼識 같은 것은 아무리 色境이 있다 하더라도 어두운 가운데에는 반연할 수 없고 혹 광명이 있다 하더라도 거리가 없으면 반연할 수 없다. 또한 眼識에 고장이 나면 반연할 수 없는 등 구연이 구족하지 못하므로 現行하지 못할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前五識은 생연이 구족함에 따라서 五識이 동시에 생길 때도 있고, 혹은 점차 생연이 구족함에 따라서 사식, 삼식, 耳識이 구전할 때도 있으며, 혹은 일식만이 생기어 구전하지 않는 때도 있다.

 「如濤波依水」라 하였으니 藏識은 물에 비유하고, 五識은 파도에 비유하며, 그 緣은 바람에 비유하였다.

  요컨대 前五識은 그 行相이 다연을 구족하지 않으면 생기지 못한다. 즉 眼識은 공간 등

 

구연을 갖 어야 하고, 耳識은 빛을 제외한 八연을 갖 어야 하고, 비, 설, 신의 삼식은 빛과 공간을 제외한 칠연을 갖 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緣을 구족함을 따라서 현기하는 것이다. 혹은 耳識 내지 五識을 구기하기도 하고 혹은 구기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마치 파도가 물에 의해 혹은 일랑 혹은 이랑 혹을 다랑이 일어나서 다소가 일정하지 않은 것과 같이 생연의 구, 불구에 따라서 五識의 다소가 現起한다.

 

7. 起滅分位門

 

  (1) 前五識과 第六識의 차이

  起滅分位란 生起와 斷滅과의 分位로서 前五識의 起滅分位는 앞의 구불구전문에서 밝혔으므로, 여기서는 第六意識의 起滅分位에 대해서만 설하고자 한다. 頌文에

 「의식상현기 세생無想天 급無心이정 睡眠與悶絶」181)

이라 하였으니, 第六意識은 항상 現起하되 無想天에 날 때와 無心의 二定과 睡眠할 때와 悶絶할 때를 제하고는 언제든지 現起한다. 意識상현기란 전段의 五識수연현에 대한 말이다.

  成論卷七에 전오와 第六을 비교해서 그 차이를 서술하였다. 1 前五識은 尋思와 相應하지 않는 까닭에 思慮하지 못한다. 2 前五識은 타에 引生되는 識이며 또한  사를 반연하는 識으므로 스스로 생하지 못한다. 3 前五識은 오직 外境만 반연하고 안으로 종과 근과 理 등을 반연하지 못한다. 즉 外境만을 전하는 識이므로 前五識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중연을 의지하는 識이므로 생기는 때는 적고 생기지 않는 때는 많다.

  그러나 第六意識은 이에 반해서 1 第六意識은 尋伺와 相應하므로 思慮할 수 있다. 2 第六意識은 타인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생한다. 3 第六意識은 外境의 追思도 반연하고 내계의 세사(心法, 理性 등)도 반연하는 識이므로 緣을 의지함이 적다. 따라서 緣을 갖 기 쉬우므로 段절할 때는 적고 現起할 때는 많다. 그러므로 前五識의 수연현에 대해서 「의식상현기」라 하였다.

 

  (2) 無心의 五位

  五位無心에서는 意識이 생기하지 못하니 그 五位는 無想天과 無心二定과 수면과 悶絶이다.

  1 無想天 無心이니 無想天이란 色界 第四선천중 第三廣果天182)으로서 이 하늘에 태어난 중생은 오백대겁 동안 無心위에 주한다고 한다. 外道들은 이것을 진열반으로 오인하고 無想定을 닦아 오백대겁의 無心과보를 받으려고 한다.

  2 無心의 二定이니 곧 無想定과 滅盡定이다. 無想定無心은 外道들이 無想天에 태어나고자 해서 수습하는 無想定위이다. 이는 前六識의 심과 心所를 지식하는 위이다.

  3 滅盡定 無心은 有學, 無學의 聖者가 涅槃적정을 좋아해서 들어간 無心정위이다. 이 정은 第七識의 染汚부분까지 지식하는 無漏定이다. 加行位에 치우쳐 수와 상을 싫어하므로 또한 滅수상정이라고도 한다.

  4 수면無心은 깊은 수면의 위를 말한 것이지 수면의 心所는 아니다. 왜냐하면 옅은 수면일 때는 꿈을 꾸기도 하며 전혀 無心한 것이 아니라 유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깊은 수면에 빠져서 六識이 現行하지 않는 위이다.

 

  5 悶絶無心이란 질병이나 타박상 등으로 일시에 기절하고 실심하는 위로서 前六識의 활동이 온전히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183) 

  이상 五位에서는 第六意識이 일어나지 아니하므로 이를 五位無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五位無心을 제하고는 항상 간단없이 意識이 現起하므로 頌에 「상현기」라 하였다.

  요컨대 第六識은 前五識과는 달리 스스로 능히 思慮하며 내외문을 전행하되 많은 緣을 의지하지 아니하고도 緣별할 수 있고, 五位無心의 위를 제하고는 항상 意識이 現起하지 않는 때가 없다. 그밖에 意識은 五位뿐만 아니라 사망시와 출생시에도 無心이 되어 결국 칠위에서 意識이 없다.

  (3) 第六識

  第六識은 第七말나를 所依로 하여 두루 삼세십팔계의 諸法을 반연하므로 광연의 識이라 한다. 이 識이 生起할 경우 二種으로 구별하는데 오구의식과 불구의식이다.

  前五識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오구의식이라 하고, 前五識과 동시에 일어나지 않고 意識이 段독으로 일어나는 것을 불구의식이라 한다. 오구의식은 또한 명료하게 경을 了知하므로 명료의식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오구의식에 다시 오동연의식과 불동연의식의 구별이 있다. 前五識과 동시에 일어나서 前五識과 동일한 경을 반연하는 것을 오동연의식이라 한고, 前五識과 동일한 경을 반연하나 그 경상에 갖가지  측이나 相狀을 더해서 分別하는 것을 불동연의식이란 한다. 예를 들면 眼識이 매화를 반연하는 경우 眼識은 그 매화를 직관하는데 불과하고 하등의 分別이 없지만, 第六意識은 동시에 일어나서 매화를 반연하고 그 백색 청념한 자태를 분명하게 識별하므로 이 意識을 오동연의식이라 한다. 그런데 眼識이 매화를 반연하는 경우 第六識이 동시에 일어나나 매화를 반연하지 않고 매화에 대한 識물학상의 사고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부동연의식이라 한다.

  다음에 불구의식에 다시 오후의식과 독두의식이 있다. 前五識의 어떤 識과 함께 일어나지 경을 반연한 수 오히려 相續해서 現行하는 意識을 오후의식이라 이름하고, 또 전혀 前五識과 함께 일어나지 않고 홀로 스스로 일어나서 경을 반연하는 것을 독두의식이라 이름한다. 예를 들면 眼識이 책을 읽은 후 어떠한 의미인가를 사고하는 것과 같은 것은 오후의식이다. 前五識이 아무 것도 반연하지 않고 意識이 갖가지 思慮분별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독두의식이다.

  독두의식에 정중의식과 독산의식과 몽중의식의 세 가지가 있다. 色界, 無色界 등 일체의 禪定심과 동시에 일어나서 경을 分別하는 것을 정중의식이라 하며, 다만 段독으로 일어나 과거를  억하고 미래를 예상하며 혹은 비교하고 헤아려 갖가지 分別을 하는 것을 독산의식이라 한다. 보통 사색할 때의 意識이 이 독산의식에 해당한다. 그리고 수면 중에 일어나는 것을 몽중의식이라 한다. 이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五同緣意識

             ― 五俱意識 ―― 明了意識 ―

                                         ― 不同緣意識

  第六意識 ―              ― 五後意識

             ― 不俱意識 ―              ― 定中意識

 

                           ― 獨頭意識 ―   獨散意識

                                         ― 夢中意識

 

 

  이 第六識은 善, 惡, 無記의 三性에 통해서 六位 오십일의 心所와 모두 相應한다. 이것을 前五識에 비하면 그 일어나는 緣을 빌리는 일이 적기 때문에 항상 緣을 갖 어 일어나기 숩지만, 수면, 민절, 無想定, 滅盡定 및 無想天에 들어갈 때의 五位에서는 斷滅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五位無心이라 한다.

  (4) 諸識의 구전과 일이

  이상에서 삼能變의 本頌을 해석해 마쳤거니와 다음에 三種의 能變은 어떠한가. 먼저 八식의 구전을 밝히고 다음에 諸識의 일이를 해설하고자 한다. 八식의 구전을 밝힌다면, 칠, 八 耳識은 항상 生起고 함께 作用하며 칠, 八, 六의 삼식은 五位無心을 제하고는 함께 일어난다. 여기에 前五識이 약간 함께 일어날 때는 사식 내지 八식이 함께 일어난다.

  이 諸識의 俱起說은 護法論師의 설이요 難陀論師와 같은 이는 이 설을 허락하지 않았다. 더욱이 구역가인 제사나 小乘학자들은 識體별종설을 세우지 아니하므로 八식구기설도 세우지 아니한다.

  다음에 能變제식의 일이를 살펴보면 「成唯識論」에서

 「팔식자성불가언정일 行相소의연상응이고 우일멸시여불멸 고능소훈등상각이고」184)

이라고 하였다. 즉 八식의 自性은 결정코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行相(見分)과 所依(근)와 緣(所緣)과 相應(다소별)이 각기 다르며 또 일식이 滅할 때에 여식이 滅하지 아니 하며 또 能熏, 所熏의 行相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成唯識論」에서

 「역비정이 경설팔식여수波등무差別고 정이웅비인과성고 여환사등무정성고」185)

이라고 하였으니, 또한 八식의 自性은 결코 이라고 할 수도 없다. 경에 八식은 물(第八識) 파도(第七識) 등과 같이 差別이 없다고 설한 까닭이다. 반드시 이라고 하면 因果의 성이 아니기 때문이요 幻事 등과 같이 정해진 성이 없기 때문이다. 第八識은 물과 같고 전칠식은 파도와 같아서 물과 파도가 상즉한 관계로 보면 이라고 할 수도 없고 일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과 같이, 能變하는 諸識도 역시 다르다고도 할 수 없고 하나라고도 할 수 없다.

  요컨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能變의 제체에 三種이 있는데 第一能變은 阿賴耶識이요 第二能變은 第七末那識이요 第三能變은 眼識 내지 意識을 가리킨다. 轉依 이能變은 識體가 하나임에 반하여 이 識體는 六종의 差別이 있다. 眼識은 靑黃 등의 顯色과 장段의 형색을 식별하고 耳識은 聲境, 비경은 향경, 설경은 미경, 身識은 觸경 등을 각기 識별하는 것으로 이상의 오종식은 현재의 外境만을 대상으로 하여 감각한다. 이에 대하여 第六意識은 밖으로는 견문각지한 모든 사실을 헤아릴 뿐만 아니라 안으로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일체사물을 헤아린다. 그래서 이것을 논연십팔계, 광연지의식이라 한다.

  이상의 六識은 그 所緣의 대상은 다르나 각기 外부 혹은 내부의 대상을 따로 認識하므로 이를 요별의식이라고 한다.

 

 

  결론

 

 

  이상에서 唯識삼십송중 第一송부터 제십육송에 이르기까지 三能變의 識相을 해설해 마쳤다. 다시 간 려서 말하면 能變의 識體를 異熟識과 思量식과 요별경식의 三種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실인즉 能變의 識에 八種이 있으니 안, 이, 비, 설, 신, 의의 前六識과 칠말나식과 八아뢰야식이다. 앞에서 말한 第八阿賴耶識이 初能變識 즉 異熟식에 해당하고 第七末那識이 第二能變 즉 思量식에 해당하며 前六識은 第三 能變 즉 요별경식에 해당한다. 唯識삼십본송을 唯識상과 唯識성과 唯識위 삼段으로 分類하여 설명하는데 필자는 다만 唯識상에 해당하는 初能變 第二能變 第三能變만을 다루어 서술하였다.      

  상래의 십사송반을 통하여 「차能變유삼 위異熟사량 급요별경식」등 삼구를 널리 해석하면서 우주간의 삼라만상은 모두 일체중생 각자의 주체인 阿賴耶識으로부터 轉變한다는 의의를 고찰하였다. 다른 종교에서는 전지전능한 유일절대신이 이 우주만유를 창조한 것이라 하며 또 인도의 바라문교에서는 유일한 범(Brahman)으로부터 우주만물이 전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佛敎는 본래부터 우주창조신 조물주인 신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일체만유가 어떻게 나타나고 전개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관찰하는 것을 佛敎에서는 緣기론이라 한다. 일체만유는 서로 인이 되고 서로 緣이 되어 질서정연한 因果율에 따라 나타난다는 이것이 곧 緣기설이다. 그런데 이 緣기설에 관해서 여러 가지 緣기설이 있는 바 業감연기설, 아뢰연기설, 眞如연기설, 法계연기설, 六대연기설, 불계연기설 등이 있다.

  즉 일체만유가 생기는 원인을 일체중생이 지은 바 業력에 있다고 보는 것은 業감연기라 하고 그 생기는 원인을 일체중생 심식의 주체인 阿賴耶識으로부터 變現한 것이라고 설하는 것을 아뢰연기라고 한다.

  그 다음에 일체제법의 실재적인 본체 즉 眞如의 存在를 인정하여 그 體로부터 생긴다고 설하는 眞如연기설이 있고 또 이와 같이 現象계의 本體를 인정하는 이상 現象이 곧 本體요 本體가 곧 現象이 일체현상은 現象 그대로가 곧 本體의 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모든 現象은 서로 인이 되고 緣이 되어 無盡한 緣기를 하는 것을 法계연기(혹은 無盡緣起)하고 한다. 또 法계의 구체적인 實體를 지, 수, 화, 풍, 공, 識의 六대라 인정하고 이 法계의 삼라만상 그대로가 대일여래의 전신체라고 설하여 이 우주만유는 대일여래의 實體로부터 緣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六대연기설이 있으며 이 법계의 根本을 추궁하면 그것은 원래 일활불의 세계로서 일체의 現象은 모두 일불세계로부터 緣기한 것이라고 설하는 불계연기설 등이 있다.

  위에서 말한 제연기설중 이른바 아뢰연기설이란 것은 우리들의 정신의 주체인 안 이 등 六識 이외에 阿賴耶識의 存在가 있어 모든 善, 惡, 業 등의 種子를 보존하였다가 그것이 現行할 因緣을 만났을 때 그로부터 일체의 現象을 緣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主觀계인 중생의 身心과 객관계인 이 우주는 우리들이 주체인 阿賴耶識중에 들어 있는 種子로부터 轉變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체중생은 각기 자기의 阿賴耶삭으로부터 정보로서의 자신을 招感하는 동시에 자기가 거주할 의보로서의 세계를 轉變하여 이를 수용한다. 즉 主觀과 객관의 일체만유가 一法도 阿賴耶識의 轉變한 바 아닌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萬法유식, 心外무경의 유심론으로서 이 阿賴耶識이야말로 실로 우리들 생명의 주체이며 生死윤회의 本體이다.

  우리들이 三界生死의 迷界에 무한한 流轉을 되풀이하는 까닭도 萬法유식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因緣所生의 假法에 미해서 無始이래로 煩惱를 일으켜 모든 業을 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이 主觀의 迷執과 煩惱를 끊고 비유비공의 中道진여의 妙理를 깨달으면

 

불과묘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唯識학의 교의는 아의 주체인 阿賴耶識으로부터 일체중색 각자의 自體와 外境인 기세간을 變現한다고 하는 現象적 유심론이다. 미오염정의 차별이 있는 이유를 보여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迷界염오의 근원인 無明번뇌를 끊어버리고 無漏청정한 究竟열반의 불과를 證得함을 근본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參考文獻

 

佛敎大系 成唯識論第一 ―

佛敎大系 成唯識論第二                      護法等菩薩造

佛敎大系 成唯識論第三                      三藏法師玄  奉詔譯

佛敎大系 成唯識論第四 ―

成唯識論全(第四∼第十)                      護法等菩薩造

                                           三藏法師玄  奉詔譯

唯識學槪論                                 玉置韜晃 著

唯識學解說                                 深浦正文 著

唯識學硏究 上卷敎史論                      深浦正文 著

唯識學硏究 下卷敎義論                      深浦正文 著

大藏經講座 唯識論講義 上                   花田凌雲 著

大藏經講座 唯識論講義 下                   花田凌雲 著

大日本佛敎全書, 唯識論同學 第一∼第二

俱舍學槪論                                 深浦正文 著

唯識綱要                                   加藤智遵 著

佛敎要義卷中                               龍谷大學出版部

佛敎唯心論                                 村上專精 著

世親唯識說の根本的硏究                     稻津紀三 著

華嚴學槪論                                 金芿石 著

佛敎辭典                                   운허용하 지음

佛敎大辭典                                 織田得能 著

佛敎學槪論                                 金東華 著

唯識學槪論                                 金東華 著

佛敎學報二輯∼六輯 佛敎唯心思想의 發達     金東華 著

東國思想 第四輯 阿賴耶識의 三相            吳亨根 著

阿賴耶識硏究                               吳亨根 著

俱舍論大綱                                 梶川乾堂 著        

大乘佛敎思想論                             木村泰賢 著

                   中觀部 全

身受大藏經第三十卷           坤六拾        高楠順次郞

                   瑜伽部 上

二大唯心論                                 齊藤唯信 著

 

世親唯識說の根本義                         福井威  著

 

 

 

 

 

 

 

 

 

 

 

 

 

 

 

 

 

 

 

 

 

 

 

 

 

 

 

 

 

 

 

 

 

 

 

 

 

 

 

 

 

 

唐  杜順의  法界觀

 

目    次

      1. 머 리 말       4. 理事無碍觀

      2. 法界觀門       5. 周 含容觀

      3. 眞 空 觀       6. 맺 는 말

                           

1. 머리말

 

 法界觀은 「大方廣佛華嚴經」에 그 근거를 둔 독특한 불교의 우주관 즉 세계관이다. 이는 陳과 隋나라 사이에 출현한 杜順을 비롯하여, 至相寺의 智儼, 唐代 賢首 등에 의하여 조직되고 淸凉山 澄觀과 圭峰宗蜜 등에 의하여 그 심오한 이치가 한층 더 천명된 사상이다. 一心法界 또는 一眞法界라고도 하는데, 法界란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우주만유를 말한 것이다.

   華嚴經 卷十一 夜摩天宮菩薩說偈品(唐譯 夜摩宮中偈贊品에)

 「心如工 師  種種五陰 一切世間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      三無差別 諸佛悉 了知 一切從心轉 若能如是解 是人見眞佛」

이라 한 것과 또 同經二十六, 十地品에

 「三界虛妄 但是一心作 十二緣分是皆依心」이라 한 것 등은 「華嚴經」중 唯心의 證文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경문이다.

 여기에서 말한 一心이란 무엇인가. 이 一은 상대적인 一이 아니라 절대의 一이고 이 一心은 如理虛融 平等不二의 一心이요  總該萬有의 一心이며 性海具德의 一心이다. 이 性海具德의 一心이야말로 一卽一切 一大緣起의 體이며 一切卽一의 性起의 體로서 主伴이 圓融하고 一多가 相卽하여 一眞法界의 體가 되어 萬有를 總該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번 눈을 차별계에 던지면 一物이 저 일체만물과 관계를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또한 저 일체만물이 이 一物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즉 一은 萬物同體의 관계로서 相卽의 뜻이 성립되고 이는 萬物相依의 관계로서  相入의 뜻이 성립된다. 法界란 絶對圓明의 一心體上에 緣起現前하는 萬有로서, 끝없이 여러 현상이 각자의 法 곧 領域을 지켜 서로 뒤섞임이 없이 질서 정연하게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가 구슬의 광명이 서로 비추는 것과 같이 무한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동일한 法界를 원만히 이루고 있으므로 無盡緣起하고 한다.

                           

2. 法界觀門

 

 杜順의 「法界觀門」이란 저서는 華嚴哲學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그 영향이 매우 크다. 화엄경이 번역된 이후 연구하는 이가 많았음에도 일반 불교사에서 거의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는 杜順이 華嚴學의 初祖로서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 「法界觀門」이란 저서가 있기 때문이다. 杜順은 논리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고 자기 체험의

 

세계를 체계적으로 오묘한 조직에 의해서 나타내었다. 그가 입적한 후 세인들로부터 文殊보살의 화신이라고 할 만큼 추앙을 받았다.

 杜順의 다음에 至相寺 智儼이 있었으니 그의 저서 「十玄門」은 화엄학의 중심사상을 이루고 있다. 智儼은 이「十玄門」가운데 杜順和尙의 학설을 계승하였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화엄학의 「十玄門」을 지은 근원은 어디까지나 杜順의 「法界觀門」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이 점에 있어서 杜順의 「法界觀門」은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杜順은 世界觀을 眞空觀과 理事無碍觀과 周 含容觀의 세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하였다.  마지막 周 含容觀의 내용이 곧 法界觀에 해당하며, 여기에 杜順의 華嚴學의 始祖로서의 특색이 있다. 그러나 華嚴家의 世界觀에는 이 세가지 외에 또하나의 觀門을 세웠으니 그것은 事法界觀이다.

 事法界란 우리들 눈앞에 전개되어 우주 삼라만상으로서 이것을 더하면 淸凉이 말한 四法界가 된다. 淸凉은 이것을 事法界, 理法界, 理事無碍法界, 事事無碍法界라고 하였다. 그런데 杜順은 이 四法界中 事法界는 설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설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杜順은 세가지를 다시 각각 十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이를 합하면 三十觀門을 이루게 된다. 杜順은 어째서 周偏含容의 世界觀을 세워 자기의 견해를 펴게 되었는가, 하는 과정을 살펴보기 위하여 필자는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3. 眞空觀

 

 眞空觀은「般若」의 世界觀으로써 철두철미하게 부정하여 이 세계를 空하다고 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空이라고 부정하는가. 그것은 我執 法執의 대립적인 세계관을 근저에서부터 깨뜨리려고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般若의 세계관은 어떠한 것인가. 객관의 세계 즉 우리들 눈앞에 전개된 우주의 삼라만상은 우리들의 主觀을 여의고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그림자에 불과하며, 동시에 主觀도 客觀을 여의고는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주관과 객관은 서로 의지해서 특별히 주관을 여읜 객관적인 「法」이나 객관을 여읜 추상적인「我」가 존재할 수 없다. 객관에 대한 대립적인 주관은 我執이라고 하는 개인적인 주관 즉 妄分別이다. 妄分別 앞에 나타난 세계는 妄境界이며 그것은 결국 幻일 수밖에 없다. 幻이란, 유명무실의 뜻이고 다만 主觀의 그림자에 불과하므로 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아온 세계를 주관의 그림자로 보고 三界를 夢幻이라고 보는 것이 般若의 空觀이다. 그러므로「般若心經」에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설하여 色空一致를 역설하였다. 般若經에서 말하는 空의 세계는 우리들 수행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며 동시에 논리적인 면에서도 한번은 이것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杜順은 이 眞空觀을 열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으니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色不卽空  以卽空故

                         色不卽空  以卽空故            

    一. 曾色歸空觀 ―

                        色不卽空  以卽空故

                     ― 色不是空

 

                     ― 空不卽色  以空卽色故

                        空不卽色  以空卽色故

    二. 明空卽色觀 ―                  

                      空不卽色  以空卽色故

                     ― 空卽是色  

 

 

   三. 空色無碍觀

 

   四.  泯絶無寄觀

 

 第一段의 曾色歸空에서 色을 어떻게 空에 돌아가게 하는가에 대해서 다시 네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色 은 즉 空이 아니니 곧 空인 연고니라」하여 세가지로 구분한 후에 色卽是空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色은 實色 즉 實體的으로 보는 色과 幻色 즉 觀念的으로 보는 色의 두가지 의미로 규정하고 또 空에도 아무것도 없는 斷空과 空과 有가 하나가 되는 眞空의 두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第一은 實色은 斷空이 아니라는 뜻이니 實體가 있는 物 과 아무것도 없는 空과는 모순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般若의 卽空은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第二는 實色과 眞空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第三은 幻色과 斷空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러한 세가지 단계를 거친 후 第四에 이르러 비로소 幻色과 眞空이 일치할 수 있다. 즉 實體的인 色을 파하고 아무것도 없는 斷空을 버리고 空과 有를 합한 眞空과 觀念的인 幻色을 일치시켜야만 비로소 般若의 「色卽是空」의 뜻이 드러난다. 이것을 뒤집어서 空卽是色이라하고 한 것이 第二段의 明空卽色觀이다. 第一段에서 「色不卽空以卽空故」라고 세 번 되풀이하고 第二段에서도 또한 「色不卽色 以空卽色故」하고 세 번 되풀이했으나 그 내용에는 차이가 있음을 이민 설명하였다. 第三段에 이르러 空과 色이 無碍融通한 관계를 나타내고 다음 상식적으로 도저히 일치할 수 없는 空과 色에 대해서 空을 眞空으로 이해하고 色을 幻色으로 이해하여, 하나의 절대적인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第四段의 泯絶無寄觀이다.

 

4. 理事無碍觀

 

 理와 事은 엄연한 구별이 있으면서도  사이에 不二의 관계를 볼 수 있으니 이것이 곧 理卽事이며, 事卽理의 뜻이며, 無碍란 不二而二 二而不二의 이치를 말한 것이다.  杜順은 이 理事無碍를 十門으로 구분해서 밝혔다.

 

    ― 一.  現 於事門

    ― 二.  事 於現門      

    ― 三.  依現成事門

    ― 四.  事能顯理門  

    ― 五.  以理奪事門

    ― 六.  四能卽理門

    ― 七.  眞理卽事門

    ― 八.  事法卽理門

    ― 九.  眞理非事門

    ― 十.  事法非理門   

 

 이러한 十門의 원리는 후의 華嚴宗義의 相卽相入이라고 하는데 歸着한다. 相入은 用을 뜻하고 相卽은 體를 뜻한다. 즉 體와 用上에서 理와 事사이에 명백한 구별이 있으면서도 그 사이에는 妙味가 있다.  

 

  杜順은 먼저 眞空觀을 세우고 다음에 理事無碍觀을 전개하고 있다. 眞理로부터 變現한 잡다한 세계가 표면상으로는 現와 事가 모순된 듯 하나 實제적으로는 무애융통한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진공관에서 實體관을 타파해야만 비로소 理와 事의 融通無碍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미 理와 事가 無碍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서 事와 事도 無碍의 妙味를 보려는 요구가 우리들 마음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 요구에 응해서 일어난 것이 第三의 周偏含容觀이다.

 

5. 周 含容觀

 第一의 眞空觀에서는 事를 없애고 不變不動의 작용이 없는 理만의 세계를 밝혔고, 第二의 理事無碍觀에서는 理를 動的인 것으로 보고 그 緣起를 事라고 보았다. 이에 의하면 事事가 모두 理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一色一香이 모두 中道 아닌 것이 없다고 본다. 다음 第三 周 含容觀은 곧 杜順의 독특한 세계관으로서 法界觀이란 명칭도 바로 여기에 적용된 것이다. 이는 理를 온전히 표현한 事와 事사이와 物과 物사이의 理를 버리고 理를 매개로 하지 않고 周偏含容의 관계를 밝혔다. 杜順은 이것을 다시 十門으로 구분하고 있다.  杜順의 특색이 여기에 있으므로 먼저 그 명칭을 열거하고 차례로 설명하고자 한다.

 

            ―  一.  理如事門

            ―  二.  事如理門

                三.  事含事理門

            ―  四.  通局無碍門

            ―  五.  廣狹自在門

            ―  六.   容無碍門

            ―  七.  攝入無碍門

            ―  八.  交涉無碍門

            ―  九.  上在無碍門

                十.  溥總無碍門

 

  初, 理如事門 事如理門의 一對는 理는 動하는 것으로 動해서 事가 되는 이상은 事밖에   理가 없으므로 事를 보는 것에 의해서 理를 볼 수있다. 하나하나의 事를 봄으로써 理의 전체를 볼 수 있으므로 理와 事는 相卽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一對는 理事無碍法界觀을 가리킨다. 하나하나의 事에 事와 理를 합하고 있으므로 낱낱의 事가운데 전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第三의 事含事理門이다. 그리하여 萬法의 하나하나에 모두 위대한 가치를 가지게 되어 事와 事 사이에 어느 것이나 融卽關係를 가지게 된다. 融卽은 바꾸어 말하면 周偏含容의 의미로서 네 개의 형식에 포함된다.  

       

     ―  一中의 一

     ―  一中의 一切

     ―  一切中의 一

     ―  一切中의 一切

 

 그 중 前二는 含容이고 後二는 周偏이다.  周偏과 含容은 同時相互의 것으로 一中에 一切

 

가 들어가는 이상은 동시에 一切中에 一이 들어갈 수 있는 결과가 된다. 이 세상의 만물을 깊이 관찰하면 이러한 관계를 모든 사물에서 볼 수 있으니 이 관계를 설명한 것이 다음의 七門이다.

 먼저 通局無碍門 廣狹自在門의 一對 중 通局無碍란, 자기의 위치를 여의지 않고 모든 것에 미칠 수 있음을 말한다. 예를 들면, 시골에 있는 어머니가 서울에 있는 아들과 미국에 가 있는 아들과 대구에 가 있는 아들을 생각하는데, 이 때에 어머니는 자신의 위치를 조금도 떠나지 않고 어머니의 마음이 세 아들 모두에게 두루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一 이 一切에 두루하는 관계다. 이 通局無碍의 用은 인간뿐 아니라 이 세상의 一切萬法이 모두 이러한 관계 위에 있다. 어머니가 세아들을 생각했다 해서 어머니의 신체가 감해지지도 않고 또한 위치가 옮겨진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마음 전체는 세 곳에 있는 아들에게 두루하고 있으니 이것이 無碍의 묘한 도리이다.

 廣狹自在란 것은 혹 어떤 물건이 自分을 파하지 않고 좁은 그대로 그 중에 모든 것을 含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前과는 반대로 一中에 多가 들어가는 것으로서 前例에 의거해서  말한다면 어머니가 자기의 심중에 서울에 있는 아들과 미국에 있는 아들과 대구에 있는 아들을 품고있는 것과 같다. 아들의 일부분이나 얼굴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골에 있으면서도 세 아들의 전체를 자기의 심중에 품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신체는 결코 커진 것이 아니라 여기에 廣狹自在라는 뜻이 성립된다. 이것은 실로 진리를 지닌 재미있는 세계관이다. 第四通局無碍門은 周偏에 해당하고 第五廣狹自在門은 含容에 해당한다. 이 二는 同時相互的인 것으로서 이 二가 성립한 이상 다음  容無碍門 攝入無碍門의 一對가 성립되는 것이다.

  容無碍門은 前例의 어머니가 아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으면 그 어머니가 또한 아들 가운데 항상 들어가 있고 어머니의 가슴 속에 아들의 그림자가 들어가 있음과 동시에 그 어머니의 마음도 항상 아들 가운데 들어가 있는 것을 말한다. 다음 攝入無碍란 한층 복잡해져서 하나 가운데 들어가고 또 다시 다른데 攝入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여기에 어머니가 있고 아들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불행히도 그 아들의 시험성적이 나빴다고 하면 어머니가 걱정을 하고 학교에 갔을 때는 어머니 가운데 그 아들 전체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선생을 만나서 자주 의논하게 된다. 그 때에는 어머니 혼자만이 아니라 아들을 품고있는 얼굴이 선생의 속에도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선생이 자기의 아들을 걱정하면 선생도 자기의 심중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攝入無碍로서 이 관계도 또한 온 세상의 事象 속에 두루 갖추어져 있으나 이러한 깊은 의미가 있음을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 二가 성립하는 이상 다시 복잡해져서 다음에 交涉無碍門과 相在無碍門이라는 것이 있게 된다.  여기에 각각 四가 있으니 합하면 八의 형식이 베풀어진다.

       

              交涉의 四句

           

               1. 一 이 一切를 含 하고 一 이 一切 에  함

               2. 一切가 一을 含하고 一切가 一에 入함

               3. 一이 一을 含하고 一이 一에 入함

               4. 一切가 一切를 含하고 一切가 一切에  함

 

 交涉無碍中 1의 관계는 앞에서 말한 어머니와 세아들의 관계와 같다. 2의 관계는 양친이

 

한 아들을 생각함에 그 한 아들 가운데 양친이 들어가는 것과 같다. 3의 관계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관계와 같아서 자나깨나 甲中에 乙을 乙中에 甲이 잠시도 여의치 않고 들어가 있다. 4의 관계는 예를 들면 서울대학 학생 전부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서울대학 학생 전부를 품고 있는 것과 같다. 세상 사람들이 오직 한 사람의 학생을 보고 서울대학의 학생은  모두 이런가 하고 비평을 내리는 것은 一中에 一切를 含해서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한 학생이 전체학생을 표현하고 있는 관계에 불과하다. 相在無碍門에도 또한 네가지가 있다.  

     

           相在의 四句

 

            1. 一이 一을 攝하고 一에 入함

            2. 一이 一切를 攝하고 一에 入함

            3. 一이 一을 攝하고 一切에 入함

            4. 一이 一切를 攝하고 一切에 入함

 1의 관계는 前例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서 선생에게 호소하는 것과 같다. 2의 관계는  예를 들면 한 학교의 교장이 학교의 용무로 문교부장관을 만났을 때에 그 교장은 한 개인이 아니라 그 교장에게 학생 전부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문교부 장관이 이 교장을 대하는 것은 교장 가운데 학생 전체를 품고 있는 것이다. 3의 관계는 교장이 한 사람의 모범학생의 예를 들어서 전 학생에게 훈시하는 것과 같다. 4의 관계는 예를 들면 어떤 운동선수가 여러사람이 보는 운동장 복판에 섰을 때에 이 선수 가운데는 그가 속하는 학교의 학생 전체가 들어있다. 즉 一이 一切를 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저기에 모대학읫 선수가 있다고 보는 것은 학생 전체를 대신하는 것으로서 그 선수가 전 관객에게 두루 하는 것이다. 한 개인의 선수가 아니고 그 선수 속에 多數의 학생을 포함한 것이 관객 전체 중에 들어감으로 一이 一切를 攝하고 一切에 들어간다고 한는 것이 성립된다.  

 이렇게 해서 최후에 專總碍門으로 결론짓고 있으니 이 門에는 八種의 형식으로 구분해서 말하고 있다.

 

            1. 一이 一을 攝하고 一에 入함 ━━━━━━━ 相在門의 1과 同一함

            2. 一이 一切를 攝하고 一에 入함 ━━━━━━ 相在門의 2와 同一함

            3. 一이 一을 攝하고 一切에 入함 ━━━━━━ 相在門의 3과 同一함

            4. 一이 一切를 攝하고 一切에 入함 ━━━━━ 相在門의 4와 同一함

            5. 一切가 一을 攝하고 一에 入함 ━━━━━━ 交涉門의 2와 同一함

            6. 一切가 一切를 攝하고 一에 入함

            7. 一切가 一을  攝하고 一切에 入함

            8. 一切가 一切를 攝하고 一切에 入함 ━━━━━交涉門의 4와同一함

 

 8中의 前6은 이미 설명하였고 그 중에 특별한 것은 실로 6과 7의 두가지 예이다. 두 가지가 이 門을 대표하고 있으므로 이 둘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6의 一切가 一切를 攝하고 一에 들어간다는 것은, 예를 들면 먼저 여기에 三人의 외교관은 미국 대통령을 예방한다고 가정한다면, 이 三人의 외교관은 삼인이 각각 한국인 전체를 대표하고 있으므로 一切를 攝해서 一人의 대통령  중에 들어가는 셈이 된다. 다음 7의 一切가 一을 攝해서 一切에 들어감은, 일본교포 여러 사람이 한국대표  운동선수 한 사람에 대해서 한국 국민 전체를 향하여 무엇인가 보고할 일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여러 사람의 교포가 한 운동대표자를 마음속

 

에 지니고 있으므로 이것이 곧 一切의 한국 국민 중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  

 杜順은 이와 같이 차례로 事事相互의 관계를 밝혔으니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事如事                         通局         容       交涉

                   事含理事                                              溥融

    ― 事如理                         廣狹        攝入       相在    

 

6. 맺는말

 

 이상에서 말한 전반을 간추려서 말한다면, 이른바 華嚴經의 法界는 一心上에 일어난 波瀾에 불과하다. 앞에서 언급한 「三界虛妄 但是一心作」이라 한 것이 華嚴經의 中樞이며 核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一心을 여의고 萬有差別은 존재할 수 없다.  때문에 一心의 이해 없이는 法界의 이해가 불가능하다.  이 一心이란 두 글자가 인도의 唯心 및 唯識哲學을 야기하고, 나아가서는 중국의 華嚴, 天台와 같은 哲學을 전개한 열쇠가 되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杜順은 眞空觀, 理事無碍觀, 周 含容觀이 三觀을 통하여 一心法界義를 밝히면서 溥融無碍門으로 견론지었으니, 이 溥融無碍門이야말로 바로 杜順의 法界觀이며 十玄門의 同時具足相應門에 해당한다. 이 十玄門은 法界緣起의 중심인 事事無碍法界의 내용을 확대하여 설명한 것으로 華嚴學의 구경, 최극의 이론이다.  初祖 杜順이 이 사상을 설한 것을 二祖 智儼이 선양하고 三祖 賢首가 大成하기에 이르렀다.

                               

                              參 考 文 獻

 

                     支那佛敎의 硏究     常盤大定 著

                     佛敎學槪論          金東華博士 著

                     華嚴學 槪論         金芿石敎授 著

              支那의 佛敎         境野黃洋 著

         

   

 

 

 

 

 

 

 

 

 

 

 

 

 

 

 

 

 

 

 

 

 

 

                華嚴十地說 硏究

 

       

                          目 次

  1. 序 言                      (3) 發光地        (4) 焰慧地

  2. 本經의 宗趣                (5) 難勝地        (6) 現前地

  3. 本經의 번역 및 조직        (7) 遠行地        (8) 不動地

  4. 十 地                      (9) 善慧地       (10) 法雲地

     (1) 歡喜地         (2)理垢地      5. 結   言

 

 

                               1. 序 言

 

華嚴經은 불타의 자각한 내용을 설한 경전으로서 佛舍議解脫經 혹은 雜華經이라고도 한다. 성도한 후 第二七日에 보리수 아래 적멸도량을 비롯하여 七處九會(혹은 칠처팔회 혹은 십처십회)에 걸처 설법하였으며 그 내용은 이른바 海人三昧 一時炳現의 眞相을 개시한 것이다. 불타의 설법은 어느 경을 막론하고 일단 삼매에 들어가 정신을 통일하고 구상을 완성한 후에 설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法華經은 無量三昧, 般若經은 等持三昧, 열반경은 부동삼매에 드는 등 각각 삼매에 들었다가 정(삼매)으로부터 나와 법문을 설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불타는 설법하기에 앞서 반드시 입정하여 청중과 능히 설할 교법을 관

 

찰하는 것을 상례로 하고 있는데 華嚴經은 七處九會 三十九品으로 각회마다 別定의186) 三昧가 있으나 화엄경을 통섭하는 삼매는 海人三昧이다.

 이 경은 해인삼매에 들어가 비로자나법신을 나타내어 연화장세계에 머물면서 문수 보현 등의 대근기를 상대로 설한 根本法輪이다. 淸凉은 화엄경을 찬탄하되,

 「大方廣佛華嚴經者 斯乃諸佛之密藏 如來之性海 視之者莫識其指歸 邑之者者罕測其涯際 有學無學志絶窺 二乘三乘寧希聽受 最勝種智莊嚴之跡旣隆 普賢文殊願行之因斯滿 一句內包法界之無邊 一

毫之中置刹土而非隘」187)

이라 하여 화엄경이 가지고 있는 원만한 뜻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화엄경이 다른 경보다 특이한 점은 다른 경이 佛이 설하는 경 즉 佛說인데 반하여, 이 경만은 佛을 설하는 경 즉 說佛인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설했느냐가 문제인데, 그것은 곧 보살들이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경 客僧의 說主는 모두 보살로 되어 있다.  곧 第一. 菩提場曾의 說主는 보현보살이고 第二. 普光明殿曾는 문수보살, 第三.  利天曾는 법혜보살, 第四. 夜摩天宮曾는 공덕림보살, 第五. 兜率天宮會는 금강당보살, 第六. 自在天宮會는 금강장보살, 第七. 重會普光明殿會는 보현보살, 第八.三重普光明殿會도 보현보살이 說主로 되어 있다. 그리고 第九. 逝多林會는 會主가 불타로 되어 있으나 내용인즉 선재동자가 법을 물음에 五十三선지식이 차례로 답변한 형식으로 되어 있으므로 특별한 說主가 없는 셈이다.

                               

                        2. 本經의 宗趣

 

  화엄은 事事無碍 相卽相入의 圓融無盡을 설하는 내용으로 勤靜이 함께 원만한 盧舍那를 主로하고 勤的인 보현의 行願과 靜的인 문수의 智光을 伴으로 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본경은 자각한 내용을 설한 것이라 말한 것과 같이, 참으로 한없는 광명과 끝없는 환희를 간직한 생명의 약동을묘사한 것이라하겠다. 이와 같이 전개되는 화엄의 世界觀을 온전히 汎神的이며 신비적이어서 전우주는 法身인 비로자나의 顯現이며 一草一木中에도 전우주의 반영 아님이 없고 一瞬一秒中에도 영원을 포함해 있지 않음이 없다.  다시 말하면 이 세계는 시간과 공간에 걸쳐 모든 것이 서로서로 관련되어 털끝만큼도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는, 실로 장엄하기 비할데 없는 무한무진의 연기관계를 가지고 있다.

화엄경의 宗趣를 밝히는데 있어 光統은 仁果緣起理實로써 종취를 삼고 ,賢首는 여기에 法界를 더해서 因果緣起理實法界라 하고, 淸凉은 다시 不思議를 더하여 因果緣起理實法界不思議라 하였다.

  요컨데 대방광불화엄경은 統萬法 明一心 즉 萬法을 통괄하여 一心을 밝힌 것으로서 無盡法界의 연기관계를 개현한 것이 本經의 宗趣이다.

 

                         3. 本經의 번역 및 조직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 전 東晋安帝時에 廬山의 慧遠은그의 제자 法淨, 法領 등을 멀리 서역에 파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천신만고의 위험을 무릎쓰고 경전을 구하도록 하였다. 法領은 千 國의 남자구각국에  으르러 화엄경 三萬六千偈를 구해가지고 귀국하였다.  다아시 覺賢은 중국의 智儼스님을 서역 유학중에 알게 되어 그의 청으로 중국 장안에 이르렀다.  覺賢은 慧遠을 의지하여 建業道場에서 法領이 가지고 온 華嚴梵本을 역출한 것이 화엄경의 全部를 번역한 최초이다.  때는 法領이 가져 온진 10여년이 지난 東晋義熙 14년(418) 3월이다.  모두 六十卷으르 되었기 때문에 「六十華嚴」이라 하고 혹은 晋經, 晋本, 舊經이라고도 하나다.  그후 260년을 지나서 地婆訶(Divakara 日照)가 가져온 梵本에 의하여 賢首가 친히 교정해서 그 결여된 부분을 보완해 놓은 것이 현재까진 전해지고 있는 晋本六十卷 華嚴經이다.

  晋經이 번역된 지 270여년을 경과하여 堂中宗  證聖元年(657)에 사신을 우전궁에 파견하여 구한 梵本 四萬五千偈 三十九品을 그 나라의 三藏 實又難陀(Siksananda 喜覺)로 하여금 법역케 하고 하고 賢首가 筆受한 것이 唐本八十卷 華嚴經이다.  이것을「八十華嚴」또는 唐經, 新經이라고도 한다.  現行本은 日照三藏이 가져온 梵本에 의하여 현수가 補脫한 것인데 이 경본은 卷數, 品數가 다 晋本보다 많고 비교적 완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唐譯華嚴으로부터 102년후 당나라 德宗貞元 12년(796)에 烏茶國에서 바쳐온 것을 계빈국의 般若三藏에게 칙령으로 번역하게 한 것이 四十卷華嚴經으로서 淸凉의 詳定에 의한 것이다.  통칭 「四十華嚴」이라 하고 唐 德宗의 貞元年間이므로 貞元本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唐末에 있어서 역경의 최후를 장식한 것으로 六十華嚴, 八十華嚴의 入法界品에 해당하며 이전에 이루어진 것보다 훨씬 상세하게 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화엄경에는 여러 가지 異譯이 있으나 보통 화엄경이라 하면 六十卷華嚴, 八十卷華嚴, 四十卷華嚴으로서 이것을 三部華嚴이라 한다.  그런데 六十卷華嚴에는 智儼의 搜玄記5卷 賢首의 探玄記20卷이 있고, 八十卷華嚴에는 澄觀의 大疏 80卷이 있으며, 四十卷華嚴에는 澄觀(淸凉)의 華嚴經疏10卷, 圭峰宗密의 四十華嚴經疏  등 六卷이 있어, 이 三部華嚴經을 연구하는 데에 지침이 되고 있다.

  本經의 조직은 六十卷本은 人三天四188) 七處八曾三十四品으로 智儼의 搜玄記와 賢首의 探玄記는 이에 의하고, 八十卷本은 人三天四의 七處九曾三十九品의로 慧苑의 刊定記와 淸凉의 大疏演義 가 이에 의하면 通玄長者의 華嚴合論도 역시 이 八十華嚴에 의하나 十處十曾四十品을 세우고 있다.

                      4. 十   地

 

  華嚴經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앞에서 말한 人三天四中 天宮四會이다. 이 天宮四會에서 설한 내용은 十住, 十行, 十廻向,十地의 四品인데 前三(십주, 十行, 十廻向)은 三賢 後一(十地)을 十聖이라 한다. 澄觀은 前三會(제3도리천궁회, 제4야마천궁회, 제5도솔천궁회)에서 解(十住) 行(十行) 願(十廻向)을 밝혀 賢位의 因行을 마치고 次會(제6타화자재천궁회)에서 智를 얻어 眞如에 계합하므로 聖位의 果를 밝히게 된다. 前三賢은 敎理를 설한 것이고 이 十地는 證道를 설한 것으로서 敎는 證의 因이 되고 證은 곧 前三心의 敎를 증득하는 것이다.

 

  이상 四品의 行法에서 그 기본이 되는 것은 十地이다. 이 十地品의 說主는 金剛杖보살인데 보살대지혜광삼매에 들어가 설한 것으로 十地의 이름은 ⓛ歡喜地 ②離垢地 ③發光地 ④焰慧地 ⑤難勝地 ⑥現前地 ⑦遠行地 ⑧不動地 ⑨善慧地 ⑩法雲地이다.

  이 十地는 佛智를 생성하고 능히 주지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온갖중생을 짊어지고 교화 이익케 하는 것이 마치 大地가  만물을 싣고 이를 윤택, 이익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地라 이름한다. 이제 차례대로 十地에 대한 명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歡喜地

 처음으로 참다운 中道地를 얻어 佛性의 이치를 보고 見惑189)을 끊으며 능히 自利利他하여 진실한 희열이 가득찬 地位이다. 龍樹는 「善法味를 얻어 마음이 환희하므로 歡喜地라 한다.」 고 하였고 天親은 「처음으로 無漏地를 얻어 진리를 체현하는 聖位를 얻어 환희에 충만하므로 幻戱地라 한다.」고 하였다.190) 

  이 환희지에 안주한 보살은 自利利他行을 실천하기 위해서 열 가지 서원을 세워 대승보살의 이상을 宣示하였다. 즉 十大願이란, ①供養願 ②受持願 ③轉法輪願 ④知衆生行願 ⑤衆生敎化願 ⑥承事願 ⑦淨國土願 ⑧不離之願 ⑨利益行願 ⑩成菩提願 등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 원을 비롯해서 무량한 대원을 세워 그 실천을 위하여 정진해 가는 것이 初地보살의 임무이다. 正覺은 오직 자기 개인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를 정화해 나가는 데 의의가 있다.

     

       (2) 離垢地

  또한 無垢地라고 한다. 受惑191)을 끊고 犯戒의 더러움을 제하여 몸을 깨끗하게 하는 地位를 말한다. 용수는「十善道를 행하여 諸垢(煩惱)를 여의므로 離垢地라 이름한다.」고 하였으니 불교의 도덕윤리를 호지하는 사실에 의해 살생 등 十惡業垢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天親은 發起淨과 自體淨으로 나누어 그 戒의 내용을 밝혔다.192) 처음에 發起淨이란, 第二地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로서 正直心 등 十心이 있음을 보였다. 다음에 自體淨이란, 이른바 三聚淨戒이다. 첫째는 攝律儀戒이니 殺生 등 十惡業을 행하지 않음을 말한다. 둘째는 攝善法戒이니 不殺生 등 十善惡道193)를 닦는 것이다. 셋째는 攝衆生戒이니 일체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身口意 三業을 조련하는 十善惡道는 이륜생활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도덕적 수행이다.    

     

       (3) 發光地

  또한 明地, 有光地, 明慧地, 光明地 등이라고도 한다. 修惑을 끊고 智慧의 광명이 나타나는 地位이다. 「용수는 중생을 위하여 法을 잘 설해서 밝게 비추기 때문에 明地라고 한다.」194)고 하였다.이 地에 이르러 수승한 定을 얻음으로써 聞思修의 三慧를 발해서 밝게 중생

 

을 비추어 이익하게 하므로 發光地라 이름한 것이다. 이 地의 보살은 淨心 등 十種深心을 수련하여 세계의 실상을 無常, 苦, 無我, 不淨이라 관찰하고 그 實性이 마치 幻化와 같다는 것을 인식하고 일체 有爲法을 여의고 佛智慧에 나아간다.

  이와 같이 제삼의 發光地는 第二地로부터 보살행을 수련하는 동안에 그 행이 보살 자신의 몸에 배이게 되어 자기속에서 지혜의 광명을 발휘하는 경지를 말한다.

       (4) 焰慧地

  또한 焰地, 增曜地, ?燃地 등이라고도 한다.  修惑을 끊고 지혜가 더욱 치성하는 지위이다.  용수는 「布施, 持戒, 多聞이 더욱 증장해서 위덕이 치성하므로 焰地라고 한다.」195)고 하였다.  즉 菩提의 慧焰이 점점 치성해서 번뇌를 태우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이 地에서 觀察衆生界 등 十法明門 으로서 중생계를 관찰하여 心不退轉 등 十種智를 얻는다 하였다.  이 地 의 行法은ㄴ 阿含의 助道品으로서 정리된 三十七助道品 등196)의 要頂을 특색으로 하기는 하나 經에는 三十七助道品의 명칭이 나타나 있지 않다.  보살이 이 地에서 더욱 더 자기의 인격을 연마하기 위하여 信, 勤, 念, 慧의 五力과 八正道197)를 닦는다.  이리하여 第四地에서 자기인격의 연마에 철저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5) 難勝地

  勝慧地, 極難勝地라고도 한다. 修惑은 끊고 眞智와 俗智를 조화하는 지위이다.  용수는 「공덕력이  치성해서 일체 모든 魔가 무너뜨리지 못하므로 難勝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天親의 견해에 의하면 「出世間乎等智를 얻은 후 俗諦差別智를 가지고 중생을 제도한는 일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능히 이것을 하므로 難勝이라 한다.」198)고 하였다.  第四地에서 인격을 철저히 연마한 보살은 다시 다음 경지에 나아가기 위하여 過去佛法乎等 등 十乎等心을 행하여 苦集滅道 등 四聖諦의 이치를 관한다.  이리하여 四諦에 대한 인식이 깊어질수록 현실세계란 헛되고 덧없는 것이며 어리석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이러한 고해중생을 내가 아니면 제도할 수 없다는 결의해서 福慧를 수습하고 그 수습한 福慧의 자격으로서 이들 중생을 畢竟淨에 안주케 하며, 내지 일체법중에 無碍智力을 얻게 해주는 것이 바로 難勝地의 경지이다.

 

     (6) 現前地

  또한 法現地라고도 한다.  修惑을 끊고 最勝地를 내어 無爲眞如의 모양이 나타나는 地位이다.  용수는「魔障을 항복하고 이미 모든 보살의 道法이 모두 現前하므로 現前地라고 한다.」고 하였으며, 天親의 견해에  의하면 「이 地에서는 萬法緣起의 流轉相을 관찰하면서 無分別平等一智를 얻어서 眞如의 無染無淨을 깨달아 無相觀을 현전케 하기 때문이다.」199)

 

라고 하였다.  第五難勝地의 보살이 無性이기 때문에 一切法平等 등 十平等心을 수련해야 第六地에 들어갈 수 있다.  이 六地에 이른 보살은 스스로의 지혜와 광명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경지에 눈을 뜨게 된다.

  「三界虛妄 但是一心作 十二緣起分是皆依心」200)즉 三界에 속하는 것은 모두 마음으로 이루어졌다.  여래에 의해 설해진 十二因緣도 모두 마음에 의한 것이라고 관찰하기에 이르렀다.  이 六地에서 세간의 실상을 보게 될 때 마지막에 無 地가 나타나게 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現前地라 이름하는 까닭이다.

 

    (7) 遠行地

  또한 深遠地, 身遠地, 遠達地, 深入地 등이라고도 한다.  修惑을 끊고 대비심을 일으켜 二乘의 깨달음을 초월하여 광대무변한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지위이다.  용수도 「三界를 버리고 멀리 法王位에 가까워지므로 遠行地라고 한다.」고 하였고 天親은 「노력해서 無相觀을 닦는 최후위에 속하며 세간의 二乘을 머리 여의고 제八의 淸淨地에 인접함을 遠行地라.」201)고 하였다.  第六地를 마친 보살이 七地에 들어가고자 할 때에 方便智慧를 쫓아 1空, 無相, 無願을 잘 닦아 자비심으로써 중생에 처하고 2제불의 평등법을 따라서 제불께 공양한다는 등의 十妙行을 일으킨다.  보살이 이 十妙行을 닦음에 따라 方便慧가 생기므로 七地에 들어갈수 있다.  이 地의 보살은 특히 念念中에 十波羅密行202)을 구족히 닦는다.

다른 모든 地에서도 닦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이 七地에서 설하는 이유는 이 遠行地가 十波羅密  등 助道法이 가장 수승함은 물론 보살은 이 七地中에서 일체행을 구족하여 지혜신통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8) 不動地

  또한 等觀地라고도 한다.  修惑을 끊고 이미 眞如를 얻었으므로 다시 동요하지 않는 지위이다.  즉 「天魔, 梵, 沙門, 婆羅門도 능히 그 願을 동요하지 못하므로 不動地라 한다.」고 용수는 보고 있다.  賢首는 不動의 見에 三義가 있다고 하였다.  첫째 이 地에 이르면 無功用의 수행이 상속하여 有功用의 행이 동하지 못하는 바라고 하였으니 이는 천친의 해석이다.  둘째 無相正思性의 자재한 바는 모든 번뇌가 동할 수 없으므로 不動이라 하며, 셋째 無分別智가 마음대로 상속하는 相과 用은 어떠한 번뇌도 움직이게 할 수 없으므로 不動이라 한다.203) 初地에서 서원한 대원은 여기에서 결실을 맺어 이른바 無生法忍을 얻어 無功用의 자체인 本性에 눈뜨게 되어 第八地에 들어가게 된다.  보살은 이 地에서 十種의 자재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러한 것은 모두 十波羅密의 과보이다.  즉 方便波羅密에 의하여 국토가 성취되고 願波羅密에 의하여 자재를 얻고 方波羅密은 無極이며 智波羅密은 不動이며 不退轉과 상응한다.

 

     (9) 善慧地

  또한 慧光地, 善相地 등이라고도 한다.  修惑을 끊고 부처님의 十力을 얻어 근기에 따라 교화의 가부를 알고 善巧로 설법하는 지위이다.  용수는 「그 慧가 더욱 밝게 調柔增上하기

 

때문에 善慧라 한다.」고 하였다. 天親은 最勝善妙한 無 解智를 얻어 잘 利他行을 하므로 善慧라 한다고 하였으니, 즉 法無 慧를 얻어 일체의 名句를 알아 法을 설하고, 義無 解를 얻어 일체의 義理에 통하고, 詞無 解를 얻어 일체의 言訶를 분별하고, 辨無 解를 얻어 十方의 方言에 따라 자재하게 교화설법함을 말한다.204)이 地의 특색은 四無 地로서 중생의 근기를 따라 설법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해탈케 하는 것이다.

 

   (10) 法雲地

  또한 灌頂地라고도 한다.  修惑을 끊고 무한한 공덕을 구족해서 사람에게 이익되는 일을 행하여 大慈雲이 되는 지위이다.  용수는 「十方無量世界에 능히 일시에 法雨를 내림이 마치 劫이 다하도록 널리 비를 퍼붓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현수는 여기에 三義가 있다고 하였으니 첫째는 구름이 무량한 덕을 지니는 것과 같이 一切法을 반연하는 大法智에 여러 가지 德이 있음을 말하며, 둘째는 大雲이 허공을 덮는 것과 같이 一切法智는 잘 煩惱와 所知의 二障을 덮기 때문에 法雲이라 한다. 셋째는 大雲이 허공에 두루한 것과 같이 법신이 충만함을 비유해 말하였다.  

천친이 大法身을 얻어 자재를 구족하므로 灌頂位에 해당된다고205)한 것은 인도에서 帝王이 즉위할 때 四大海水를 新王의 머리에 붓는 의식을 말한 것인데, 여기서는 보살이 第十地에 오르려 할 때 무수한 부처님들이 지혜의 물을 그 이마에 부어주는 것과 같으므로 이를 비유해서 이름한 것이다.  이 地에 이르면 보살의 이상은 완전히 실현되고 그 활동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게 되는 것이다.

 

                              5. 結 語

  이상으로써 菩薩十地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하였거니와 이 十地의 行에 대하여 경문은 다음과 같이  十波羅密行의 수행을 말하고 있다.

 

   一. 歡喜地 修願 ... 行菩薩以來佛道所修善根與一切衆生 是檀波羅蜜

   二. 離垢地 戒行 ... 能滅一切煩惱熱 是尸羅波羅蜜

   三. 明 地  善行 ... 慈悲爲首於一切衆生無所傷 是 提波羅蜜

   四. 焰地 道品行 ... 求善根無厭足 是毗梨耶波羅蜜

   五. 難勝地 諦行 ... 修道心佛散常行一切智 是善波羅蜜

   六. 現前地 緣生行 ... 忍諸法不生門 是般若波羅蜜

   七 . 遠行地  菩提分行 ... 能起無量智門 是方便波羅蜜

   八. 不動地 淨土行 ... 求轉勝智慧 是願波羅蜜

   九. 善慧地 說法行 ... 諸魔外道不能沮壞 是方波羅蜜

   十. 法雲地 受位行 ... 於一切法相如實說 是智波羅蜜 206)

 

  곧 第一歡喜地로부터 第十法雲地에 이르는 十地의 名地에서 十波羅蜜을 닦지 않는 것은 아니나 歡喜地에서는 특히 布施波羅蜜을 수승하게 닦고, 내지 法雲地에서는 특히 智波羅蜜을 수승하게 닦기 때문에 이와 같이 배대한 것이다.  또 보살은 十地에서 十眞如를 관하게

 

되는 바 즉 初歡喜地에서는 遍行眞如, 第二離垢地에서는 最勝眞如, 第三發光地에서는 勝流眞如, 第四焰慧智에서는 無攝受眞如, 第五難勝地에서는 類無別眞如, 第六現前地에서는 無染淨眞如, 第七遠行地에서는 法無別眞如, 第八不動地에서는 不增減眞如, 第九善慧地에서는 智自在所依眞如, 第十法雲地에서는 業自在等所依眞如를 증득한다고 하였다.  이 十眞如의 증득은 經文에는 직접 표현되어 있지는 않으나 경문에 의해서 그 순서가 내포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十地論釋에 의하여 이상에서 말한 十地道를 고찰하면 그 기본사상은 初地로부터 三地에 이르는 道에서는  법을 발견하고 四地로부터 七地에 이르는 道에서는 人을 훈련하고, 八地로부터 十地에 이르는 道에서는 人法一如인 無爲自然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말한 華嚴十地를 요약해서 말하면 初地에서는 十大願, 二地에서는 大業道, 三地에서는 無常 등, 四地에서는 三十七助道品, 五地에서는 四聖諦, 六地에서는 十二支207)  七地에서는 十波羅蜜, 八地에서는 不退轉, 九地에서는 四無 智208) 十地에서는 最高法雲地를 특색으로 하여 질서있게 얕은 데서부터  깊은 곳으로 조직되어 대승보살의 수행도에 적합한 十地를 확립하였다.

요컨대 이 十地는 대승보살이 自利利他로 佛智를 개현하려고 할 때의 실천과정과 그 내용을 十段으로 명시한 것으로써 이 十地行은 보살의 발심으로부터 성도하기까지의 進展을 표현한 것이다.  인도의 용수, 천친을 비롯한 여러 論師들의 見解, 또는 十地經이 別行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보살도의 기본사상은 十地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參  考  文  獻

                        佛敎唯心論           村上專精  著

                        華嚴學槪論             金芿石  著

                        大方廣佛華嚴經       實叉難陀  譯

                        佛敎學報第二輯       東國大學校 佛敎文化硏究所

 

 

 

 

 

 

 

 

 

 

 

 

 

 

 

眞如緣起에 대한 考察

 

             目  次

  1. 序 言                      (2) 九法緣起

  2. 眞如의 意義                (3) 淨法緣起

  3. 起信論의 眞如緣起說       4. 結  語

     (1) 緣起의 根源인 阿梨耶識

 

                      1. 序 言

 

  이 우주간의 일체만유는 어떻게 現象하여 전개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관찰하는 법을 불교에서는 緣起論이라 한다. 기독교에서는 全知全能한 唯一 絶對神이 우주만유와 인류를 창조한 것이라 하며, 또 인도의 바라문교에서는 唯一의 梵(Brahman)으로부터 이 우주만물이 전개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佛敎에는 본래부터 우주 창조신인 조물주의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주와 일체만유는 어떻게 전개된 것인가? 「佛本行經」209) 卷49에「諸法從因生 諸法從因滅」이라든가 또 「入楞伽經」210) 卷2에 「一切諸法從因緣生」이라든가 또 「中觀論」211) 四諦品에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등이라고 있는 바와 같이 一切萬有는 서로 因이 되고 서로 緣이 되어 질서정연한 因果律에 의해서 現象한다는 것이니 이것이 소위 緣起의 現法이다.  그런데 이 緣起法에 관해서 여러 가지 緣起說이 있는데, 業感緣起設, 賴耶緣起說, 眞如緣起說, 法界緣起說, 六大緣起說, 佛界緣起說 등이 그것이다.

  즉 일체만유의 生起의 원인을 일체중생이 造作하는 業力에 있다고 보는 것을 業感緣起라 하고, 그 생기의 원인을 일체중생의 心識의 주체인 阿賴耶識으로부터 變現한 바라고 설하는 것을 賴耶緣起라고 한다. 그 다음에 一切諸法의 實在的인 본체 즉 眞如의 존재를 인정하여 그 主體로부터 생기한다고 설하는 眞如緣起說이 있고 또 이와 같이 現象界의 本體를 인정하는 이상 現象이 곧 本體요, 本體가 곧 現象이므로 一切現象은 現象 그대로가 곧 本體의 活現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모든 現象은 서로 因이 되고 緣이 되어 無盡한 緣起를 이루는 것을 法界緣起라고 한다. 또 法界의 구체적인 實體를 地, 水, 火, 風 空, 識의 六大라 인정하고 이 法界의 삼라만상 그대로가 大日如來의 全身體라 설하여 이 우주만유는 大日如來의 實體로 緣起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六大緣起設이 있으며, 또 이 法界의 근본을 추궁하면 그

 

것은 一活佛의 세계로서 일체의 현상은 모두 一佛世界로부터 연기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하는 佛界緣起說 등이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緣起說中 「眞如緣起說」을 「起信論」에 의거해서 약술하고자 한다.

 

2. 眞如의 意義

 

  먼저 原始經典212)에 眞如라고 설한 근거를 찾아본다면 「難阿含經」213) 卷21에 「以一乘道 淨衆生 離憂悲 得眞如法」이라고 하여 眞如의 내용은 명확히 표현되어 있지 않으나 그 명사만은 나타나 있다. 그후 部派問에도 이 眞如設은 중요시 되었던 모양으로 化地部214)에서 澤滅眞如 非擇滅眞如,  虛空眞如, 不動眞如, 善法眞如, 不善法眞如, 無記法眞如, 道支眞如, 緣起眞如 등의 九種을 설하였으니 眞如緣起說에서 본다면 주목되는 사실이다.  또 「大般若經」215) 卷 567에 의한다면

 「世尊何謂諸法眞如 天王當知 眞如深妙 但可智知 非言能說 何以故 諸法眞如 過諸文字 離     語言境 一切語業不能行故 離諸戱論  絶諸分別 無此無彼 離相無相 遠離尋伺」

이라고 하여, 眞如는 언어문자의 모든 희론을 여의고 망상분별의 모든 心緣의 相을 끊었으며 相과 無相을 여의고 彼此가 없는 것이므로, 如來의 眞如와 衆生의 眞如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여 眞如의 당체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또 「成唯識論」216) 卷 9에 「此諸法勝義亦卽是眞如 眞謂眞實顯非虛妄 如謂如常表無變易」이라고 한 것을 본다면, 眞如는 현상계의 일체제법의 실체로서 진실하여 항상하고 허망한 것이 아니요 변화하고 바뀌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였다. 이와 같이 現象界諸法의 實體가 될 뿐이요. 變易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眞如로부터 現象界諸法이 緣起될 수 있는 것인가. 「大般若經」卷 569에 「諸法雖生 眞如不動 眞如雖生諸法而眞如不生 是名法身」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眞如로부터 現象界의 一切諸法이 現象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아직 구체적인 眞如緣起說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一眞如로부터 一切諸法이 전개된다고 설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眞如緣起說의 발단을 이루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眞如緣起說이라 하면 누구나 다「起信論」217)을 상기할 만큼 이 論은 진여연기에 관한 이론을 구체적으로 전개하였다.  즉 「起信論」에서는 眞如를 衆生心의 實體(本體)라고 정하고 있다. 「起信論」에 의하면「法이란 이른바 중생심으로서 이 마음이 곧 一切世間法과 出世

 

間法을 섭하느니라」218)고 하였다.  즉 法이란 곧 중생의 마음이며 이 중생심의 실체가 眞如라는 것이다. 이 중생심에는 實體的인 眞如門의 뜻과 現象的인 生滅門의 뜻이 있는데, 그 實體는 不生不滅 不增不減하고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 절대무한한 것이다. 그러나 現象은 生滅하고 增減하며 피차가 다름이 있는 상대 유한한 것이다. 이 眞如와 生滅의 二義는 一心의 두 가지 뜻이므로 眞如를 떠나서 生滅이 없으며, 生滅을 떠나서 따로 眞如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眞如와 生滅의 관계는 不一不異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물과 파도의 관계와 같아서 물은 靜的인 것이나 파도는 動的인 것이므로 하나라고 할 수도 없고(不一) 그렇다고 해서 물을 여의고 파도의 體가 없으므로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不異). 즉 實體를 여의고서 現象이 존재할 수 없고 또 現象을 여의고서 實體가 따로 없다.

  이상과 같이 眞如는 오직 중생심의 실체일 뿐만 아니라 一切諸法의 실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論에 心眞如者는 一法界의 大總相이요 法門의 體라고 하였다.  만약 眞如가 이와 같이 不生不滅하고 眞如平等하여 하등의 차별이 없고 변화도 없다면 우리들이 현실헤서 감각하는 이 현상계는  어째서 千差萬別하고 생멸변화하는 현상만을 보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一切諸法 唯依妄念而有差別 若離心念則 無一切境界之相」219)

말하자면 心眞如의 心性은 不生不滅한 것이지만 妄念을 통해서 一切萬有를 보게 되므로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색안경을 쓰고 外界의 사물을 보면 그 사물의 본색은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妄心이라는 색안경으로 萬物을 보기 때문에 萬有의 眞相을 眞相 그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眞如로부터 現象界의 諸法이 어떻게 緣起되는 것인가.

 

3. 起信論의 眞如緣起說

 

      (1) 緣起의 根源인 阿黎耶識

 「起信論」에 의하면 眞如에는 不變과 隨緣의 두가지 뜻이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緣起는 이 二義 가운데 隨緣의 뜻에 의햐여 善惡諸緣을 따라서 千差萬別의 染淨諸法을 연기한다.  그러나 얼핏 생각하면 不變과 隨緣은 서로 모순된다. 왜냐하면 그 본체가 常住不變하여 不生不滅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善惡의 諸緣에 따라서 생멸변화하는 제법을 연기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즉 不變이라함은 唯識家220)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凝然常住 不作諸法 이라 볼 것이 아니라 隨緣하여 諸法을 緣起하면서 항상 性德인 不變義를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밝은 거울이 사물을 비추는 것과 같다.  즉 거울의 바탕이 본래 청정하여 그 本性을 바꾸지 않으므로 능히 사물을 비추는 것이니 사물을 비춤에 의하여 드디어 鏡體의 淸淨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眞如가 隨緣하여 諸法을 연기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그 體가 不變하므로 능히 隨緣하여 諸法을 연기하고 諸法을 연기함에 의해서 도리어 眞如의 不變性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不變과 隨緣의 두 가지 뜻은 서로 眞如의 性德을 나타낼지언정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起信論」에

 

 「依一心法有二種門 云何爲二 一者心眞如門 二者心生滅門 是二種門 皆各總攝一切法221)…     心生滅者依如來藏故 有生滅心 所謂不生不滅與生滅和合 非一非異名爲阿?耶識」222)

이라고 하였으니 不變絶對의 心眞如가 起動하여 隨緣現象한 것이 곧 心生滅門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如來藏이란, 如來를 간직한 心이라는 뜻으로서 本自具足한 自性淸淨心인 佛性 즉 一心의 本體인 眞如를 가리킨 것이다. 不生滅이 生滅과 화합해서 非一非異라 함은 本體와 現象 즉 心眞如와 心生滅의 뜻이 서로 다른 것을 非一이라 하고 또 不生滅의 心眞如 自體가 起動해서 生別差別의 諸法을 나타냈기 때문에 心眞如  밖에 生滅의 諸法이 따로 없고 또 生滅  밖에 不生滅의 心眞如가 따로 없는 것을 非異라 하였다.  眞如와 生滅과의 관계는 앞에서 언급한 물과 파도의 관계와 같다. 대해의 물이 바람에 의하여 출렁거려 파도가 되었을 때 水相과 風相이 서로 여의지 않고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非異의 뜻이다. 즉 파도를 여의고 물이 있을 수 없고 물을 떠나 파도가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물과 파도를 동일하다고 볼수도 없는 것이 바로 非一의 뜻이다. 이상의 물과 파도의 비유와 같이 妄인 生滅과 眞인 不生滅이 화합해서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한 것을 阿黎耶識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起信論」에서는 現象界諸法의 緣起의 근원을 眞妄和合識인 阿黎耶識으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起信論」에서 眞如緣起說이라고는 하나 이 阿黎耶識을 緣起의 단서로 한 것은 不變의 眞如가 직접 生滅의 諸法을 연기하기 곤란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이 阿黎耶識이 어떠한 과정이 밟아서 現象界의 諸法을 연기하는가에 대해서 「起信論」에

  「此識有二種義 能攝一切法 生一切法223)

    云何爲二 一者覺義 二者不覺義」224)

이라고 설하고 있다. 이 阿黎耶識이 능히 萬法을 含攝하고 능히 萬法을 발생케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能攝能生의 두 가지 힘이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뢰야식에 覺과 不覺의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이라고 표명하였다. 覺은 覺照 , 覺察, 覺明 등의 뜻으로 즉 眞如의 體를 깨달는 智慧를 말하고, 不覺이라 함은 覺과는 반대로 생멸의 이치를 미혹하고 眞如의 體를 깨닫지 못하는 無明을 말하는 것이다. 阿黎耶識 가운데 不生滅의 眞如體는 覺義에 해당하고, 生滅의 妄染性은 不覺義에 해당한다. 阿黎耶識으로부터 諸法이 연기한다는 것은 곳 이 不覺義가 발전하여 千變萬化한 染法의 迷界가 전개된다는 것이요. 반면에 不覺을 타파하고 眞如本來의 覺體를 깨달으면 淸淨無垢한 淨法의 悟界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前者를 生滅流轉門이라 하고 後者를 眞如還滅門이라 한다. 이와 같이 迷悟染淨의 諸法은 一法도 이 阿黎耶識中에 갖추어 있지 않음이 없으므로 染法緣起와 淨法緣起가 함께 이 아뢰야식을 근원으로 하여 다 각각 연기한다. 論에 「能攝一切法」이란 것은 아뢰야식중의 覺義는 淨法을 섭하고 不覺義는 染法을 섭한다는 뜻이며 「生一切法」이란 뜻은 阿黎耶識이 一切諸法을 능히 생기시킨다는 것이니 이로써 眞如緣起說에서 阿?耶識의 중요성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起信論」에 靜과 動, 즉 不生滅과 生滅로서 迷悟, 染淨, 覺不覺을 분류하였으니 도시 하면 다음과 같다.

     

 

 

                ― 動 ― 生  滅 ― 迷 ― 染 ― 是曰不覺義

         一心 ―

                ― 靜 ― 不生滅 ― 悟 ― 淨 ― 是曰覺義

 

      (2) 染法緣起

  앞에서 말한 阿黎耶識중에 覺과 不覺의 二義가 있는데, 不覺義로부터 現象界의 諸法이 연기하게 되는 것을 染法緣起라 한다. 그런데 이 不覺에는 根本不覺과 枝末不覺의 구별이 있다. 前者는 迷眞의 無明으로서 眞如 자체를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後者는 執妄의 無明으로서 眞如를 眞如로 보지 못하는 根本不覺에 의하여서 阿黎耶識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 迷界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 이른바 三細六 로서 곧 枝末不覺이다.  三細는 無明業相과 能見相과 境界相으로서 細라 칭한 까닭은 그 동하는 行相이 매우 미세하여 感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六 라 함은 智相, 相續, 執取, 計名字, 造業, 受報(業繫苦)로서 이 六種은  顯 雜해서 그 行相을 알기 쉬우므로 이것을  라 한다. 우리들 중생이 생사에 유전하는 최초의 起點은 眞如의 이치를 여실히 보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있으니 이것을 根本無明이라 한다. 이 根本無明이 眞如를 동요해서 三細六 의 九相을 생기게 한다. 九相은 우리들 범부의 迷한 순서 즉 流轉門의 자체를 설명한 것이다.

  첫째 無明業相이란, 不生不滅의 心眞如가 不覺無明에 의하여 동요를 시작한 初動의 相을 말한 것으로서, 아직 能所主客이 갈라지기 전인 迷界의 원시상태이다. 즉 이 眞心의 起動은 不覺無明에 의한 것이므로 論에 「以依不覺故 心動說名爲業」225)이라고 하였다. 둘째 能見相이란, 轉相이라고도 하는데 眞如心이 起動해서 業相이 나타나면 이것이 一轉하면서 能緣의 主觀的인 見照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셋째 境界相이란 現相이라고도 하는데 이미 心이 起動하면서 見照의 작용이 일어나면 여기에는 반드시 그의 대상인 境界相이 나타나는 것이니 이것을 現相이라한다.

  이상 三細의 관계를 비유해서 말하면 業相은 鏡面과 같고 轉相은 鏡面이 물체를 照映하는 능력이 있는 것과 같으며 現象은 鏡面에 照映하는 능력에 의하여 外界의 사물을 映現하는 것과 같다. 요컨대 이 業相, 轉相, 現相의 三相은 眞如心이 無明에 동요되어 생한 것으로 主觀의 작용을 세분한 것이다.

  다음에 六 中 첫째 智相은 三細中의 境界相을 主觀的 心內에 影現된 虛影임을 알지 못하고 이것을 心內에 실재하는 것이라 집착하여, 이에 대해서 染淨善惡 是非邪正 好惡愛憎 등의 분별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전의 境界相은 心內에 나타난 法으로서 依他起性226)이라면 이 智相은 心內의 虛影을 인정해서 心外에 실재한 것이라고 분별하는 遍計所執性227)이다.  둘째 相續相이란 앞의 智相에서 일어난 善惡是非 등의 妄分別이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는 것으로서 이는  顯한 分別起의 法執이다. 셋째 執取相이란 앞의 妄分別의 相續에 의해서 苦樂의 경계를 집착하여 드디어 我執을 일으키는 것으로서 이는 미세한 俱生起228)의 我執이다.  넷째 計名字相이란, 앞의 執取相이 점점 깊어짐에 따라 다시 여러 가지 名字言句를

 

세워 愛憎의 생각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는  顯한 分別起의 我執이다. 다섯째 造業相이란, 앞에 計名字相에 의하여 苦樂怨親등에 대해서 貪, 瞋, 癡 등의 번뇌를 일으키며 身口를 통하여 善惡의 業을 짓는 것을 말한다. 여섯째 受報(業繫苦)란 앞의 造業相에서 이미 지은 業因으로 받는 과보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業力에 속박되어 생사에 윤회해서 자유롭지 못한 신체를 감득하는 상태를 受報라 한다.

  이상에서 말한 三細六 는 根本無明이 眞如를 眞如로 알지 못함에 의해서 迷界에 유전한는 染法緣起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3) 淨法緣起

  앞에서 말한 染法緣起는 眞如로부터 染法의 현상계에 유전하는데 반해서 淨法緣起는 우선 眞如에서 연기된 染法인 현상계로부터 生死를 싫어하고 涅槃을 좋아하는 수행력으로써 染法의 세계를 벗어나서 眞如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眞如界로 돌아가는데는 어떠한 과정을 밟아야 하는 것인가. 「起信論」에서는 앞에서 말한 染法緣起와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한 곳은 없다. 다만 阿黎耶識中에 一義인 覺義를 통하여 淨法緣起의 내용을 엿볼 수 있으므로 覺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生滅心의 本體인 眞如가 일체의 妄念을 여읜 것이 覺의 뜻으로서 이 覺에는 本覺과 始覺의 二義가 있다. 本覺이란 우리들 범부도 본래는 不變絶對의 心眞如를 스스로 구족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본래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는 迷하고 있으므로 이 本覺을 발휘하지만 始覺이란 단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또 始覺이라는 것도 이것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不覺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를 起信論에

  「本覺義者 對始覺義說... 始覺義者  依本覺故而有不覺 依不覺故說有始覺」229)

이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생사고해에 윤회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선천적으로 본래 구족한 本覺의 如來藏心이 한 조각이 無明 즉 根本不覺에 가리어서 이 不覺이 점점 자라나서 끊임없이 생사에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을 超脫하려면 不覺을 퇴치하여야 하고, 이 不覺을 퇴치하려면 이 始覺의 작용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覺이라 하지 않고 本覺 또는 始覺이라 하는가. 우리들 범부의 妄心도 그 본성은 청정무구한 大智慧光明인 本覺의 德을 갖추고 있지만 번뇌망상으로 더럽혀져서 그 性德이 가리워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 性德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실천수행을 요하게 되는 바 발심수행해서 본래 구족한 眞如性을 깨닫는 것을 始覺이라 한다. 그런데 이 始覺은 무엇을 인하여 생하는가 하면 本覺을 말미암아 생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만약 이 本覺이 없다면 어떤 善緣을 만날지라도 반성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 本覺의 德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것이 因이 되어 밖으로 善緣을 만났을 때 改過遷善하여 드디어 始覺의 道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不覺이 퇴치되는 때 비로소 始覺과 本覺이 일치된다.  始覺과 本覺이 일치될 뿐만 아니라 覺이라는 명칭까지도 없어지고 淨法의 眞如界만이 드러나게 되니 이것이 곧 淨法緣起의 究竟이다.

  그 覺의 내용을 말하자면 始覺에 四種이 있으니 즉 凡未覺, 相似覺, 隨分覺, 究竟覺이다.  이상 四種의 始覺中에 앞의 三覺은 아직 妄心의 本源을 깨닫지 못하므로 非究竟覺이라  하고, 第四의 覺은 心源을 깨달았기 때문에 究竟覺이라 한다. 다음 本覺에 隨染本覺과 性淨本覺의 二種이 있는데, 전자는 本覺의 작용을 밝힌 것이고 후자는 本覺의 體德을 밝힌 것이다.

  우리가 비록 선천적으로 本覺인 如來藏心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지속적이고 용맹스런

 

수행력이 없으면 無明을 끊고 涅槃의 彼岸인 淨法의 세계에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나무 가운데 불의 성품이 있으나 사람의 손이 들지 않고서는 發火할 수 없는 것과 같다.

 

4. 結 語

 

  이상에서 眞如와 無明의 화합체인 阿黎耶識을 중심으로 해서 染法의 迷界인 현상계가 三細六 의 과정을 밟아서 연기한다는 것과 또 淨法의 悟界인 本體界가 始覺의 과정을 통하여서 연기 된다는 것을 말하였다. 다시 말하면 染法緣起는 本體界로부터 現象界에 유전하는 것을 말한다면 淨法緣起는 現象界로부터 本體界에 還滅하는 것을 말한다. 「起信論」의 論旨로서 본다면 眞如心은 無明의 동요에 의해서 연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起信論」의 연기설은 無明緣起說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無明없이는 眞如가 연기할 수 없다.  비유컨대 湛然寂靜한 바닷물을 폭풍이 몰아쳐서 풍랑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無明은 眞如海上에 풍랑과 같은 것이다. 만약 폭풍이 그치면 풍랑도 따라서 멈추는 것과 같이 眞如本心上에 根本과 枝末의 모든 번뇌만 소멸된다면 一心은 담연적정한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參  考  文  獻

 

                大乘起信論講話           村上專精  著

                大乘起信論               海東元曉  疏

                成唯識論                

                高麗大藏經 大盤若經 卷 569

 

 

 

 

 

 

 

 

 

 

 

 

 

 

 

 

 

 

 

 

 

唯識學을 中心으로 한 十地說

 

                       

              目      次    

  1. 序 言             5. 所斷의 惑障

  2. 修行의 相狀       6. 所證의 眞如

  3. 十地의 名義       7. 結  語

  4. 所修의 勝行      

 

 

1.  序 言

 

唯識宗에서 실천수행의 목적은 萬法唯識의 이치를 관하여 中道의 妙理를 체달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이 修道의 階位에 資糧位ㆍ加行位ㆍ通達位ㆍ修習位ㆍ究竟位의 五位가 있다.

第一資糧位란, 五十二位中 十住ㆍ十行ㆍ十廻向의 三十心으로서 이를 三賢位라 칭한다.  이 位에서 깊이 唯識의 이치를 信解해서 처음으로 佛果菩提를 구하는 마음을 발하여 가자가지 수승한 복덕과 지혜의 資糧을 修集한다. 第二加行位란, 十廻向의 滿心이 第十法界無量廻向位에서 煖ㆍ.頂ㆍ忍ㆍ世第一의 四善根을 닦는 位로서 후에 通達位 즉 見道에 들어가서 唯識의 실성인 眞如를 증득하기 위해서 앞에서 쌓은 福智의 資糧 위에 다시 方便의 加行을 닦는 位이다. 第三에 通達位란 十地의 初位 즉 歡喜地의 位로서 이 位에서 처음으로 眞理를 비추어 보고 無漏智를 증득해서 唯識의 實性인 眞如의 이치를 체득함으로 이를 見道라고 한다. 第四修習位란, 앞의 見道 이후 佛果를 증득하는 데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見道所見의 이치를 수습하는 位이다. 第五究竟位란 구경의 無漏果로서 또한 無學道라고도 한다. 보살 三大阿僧祗劫의 難行을 원만히 성취하고 無間道230)에서 二障의 種子를 모두 끊고 解脫道231)에서 大菩提大涅槃을 증득하는 位이다.

이상의 五位中 修習位에 나아가서 唯識學을 中心으로 十地에 관해서 약술해 보고자 한다.

 

2. 修行의 相狀

 

見道에서 이미 無分別智를 발해서 分別起의 二障을 끊고 我法二空의 智에 의해서 唯識의 이치를 증득하기는 하였으나 다시 所證의 이치를 원만히 하기 위해 부지런히 無分別智를 수습하여 俱生起의 二障을 모두 끊고 菩提ㆍ 涅槃의 妙果를 증득하는 位를 修習位 또는 修道位라고 한다. 이 位는 十地中 初地인 歡喜地의 入心位를 제한 住心(初地)이후 第十地에 이르는 사이에 各地마다 각각 하나의 波羅蜜多를 本行으로 하고 다른 諸行을 닦아 一障二愚를 끊고 眞如를 증득한다. 그러므로 所修ㆍ所斷ㆍ所證이 모두 十種을 이루니 즉 十波羅蜜ㆍ十重障ㆍ十眞如이다. 이 관계는 도시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十地中 第七地에 이르기까지는 有漏無漏의 二行을 겸하여 닦는 位로서 一行中 諸行을 닦                    [所經]     [所修]     [所斷]                    [所證]

         ―  一. 歡喜地 ― 布施 ―  異生性障                 遍行眞如

             二. 離垢地 ― 持戒 ―  邪 行 障                 最勝眞如

             三. 發光地 ― 忍辱 ―  闇 鈍 障                 勝流眞如

             四. 焰慧地 ― 精進 ―  微細煩惱現行障           無攝受眞如  

修習位相 ―    五. 難勝地 ― 禪定 ―  於下乘般涅槃障           類無別眞如

             六. 現前地 ― 般若 ―   相現行障               無染淨眞如

             七. 遠行地 ― 方便 ―  細相現行障               法無別眞如

             八. 不動地 ―  願  ―  無相中作加行障           不增減眞如

             九. 善彗地 ―  力  ―  利他中不欲行障           智自在所依眞如

         ―  十. 法雲地 ―  智  ―  於諸法中未得自在障       業自在等所依眞如

 

아 衆生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고의로 번뇌를 일으킨다. 가령 어떤 사람이 千人을 살해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多人을 구제하기 위해서 一人을 살해하게 될 때에 살해하기 위하여 고의로 진심을 일으킴으로 지옥에 떨어져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는 것과 같다. 八地이상은 分段生死232)를 여의고 變易生死233)를 받으므로 潤生의 번뇌를 일으킬 일이 없다. 分段身이란 번뇌와 有漏業의 힘이 의해서 招感하는 三界五趣의 總別二報의 異熟인 依身으로서, 壽命의 長短을 따라 分分段段으로 생사를 받으므로 그와 같이 말한다.

變易身이란 所知障의 助緣을 가자해서 無漏의 大願과 大悲의 業에 의해서 감득하는 수승한 異熟의 依身으로서, 보살이 菩提를 구하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猛利한 悲願을 일으켜 앞의 分段身을 여의고 얻는 바 妙用不可思議의 몸을 받음을 말한다.

 

3. 十地의 名義

 

華嚴經에서 설하는 목적은 결국 轉迷開悟에 있으며 그것은 수행에 의해서 실현된다. 이 수행의 과정을 설한 것이 十信ㆍ十住ㆍ十行ㆍ十廻向ㆍ十地 등이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十地다. 十地란 보살이 수행하는 階位인 五十二位中 第四十一로부터 第五十位까지를 말한다. 이 十地位는 佛智를 이루고 능히 주지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온갖 중생을 짊어지고 교화하고 이익을 주는 것이 마치 대지가 만물을 싣고 이를 생장시키는 것과 같으므로 地에 비유해서 말한다. 이제 그 十地의 名義를 간단히 설명하고 다음에 그 내용을 술하고자 한다.

第一歡喜地는 보살이 이 位에서 無始以來의 異生性을 버리고 처음으로 無漏인 聖性을 얻어 人法二空의 진리를 증득하고 自利利他의 진실한 희열에 가득찬 位이다. 第二離垢地는 청정한 戒를 가지고 미세한 毁犯을 일으키는 번뇌의 때를 멀리 여읜 位이다. 第三發光地는 勝定과 大法의 總持를 성취해서 가없는 妙慧의 광명을 발하는 위이다. 妙慧의 光明이란 聞ㆍ思ㆍ修의 三慧를 뜻한다. 第四焰慧智는 가장 수승한 菩提分法에 안주해서 번뇌의 섶을 태워

 

지혜의 불꽃이 점점 치성한 位이다. 第五難勝地는 眞俗二智의 行相이 서로 어기지 않고 상응하는 일이 극히 難勝함으로 이름한 것이다. 第六現前地는 十二因緣을 관해서 染淨의 차별을 여읜 無分別最勝의 智를 引發現前하는 位이다. 第七遠行地는 無相觀을 닦아서 멀리 世間과 二乘의 有相行을 여읜 位이다. 第八不動地는 無分別地가 자유로이 상속해서 有相과 功用과 번뇌가 동하게 할 수 없는 위이다. 第九善慧地는 미묘한 四無 를 성취해서 능히 十方에 두루법문을 설하는 位이다. 이른바 四無 解란 法無 解 義無 解 訶無 解 辨無 解로서 四無 辨 또는 四無 智라고도 한다. 口業에 나아가서 辨이라 하고 意業에 나아가서 智라고 한다. 一, 法無 解란 일체법의 名字에 통달함을 말하며 二, 義無 解란 일체법의 義에 통달함을 말하며 三, 訶無 解란 일체의 언어에 통달함을 말하며 四, 辨無 解란 또한 樂設無 辨이라고도 하니 중생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 자재하게 법을 설함을 말한다. 第十法雲地란 널리 일체법을 반연하는 大法智가 능히 여러가지 德을 갖추어 佛果의 大智를 장애하는 무변의 惑障을 덮고 무량한 공덕을 내는 것이 마치 大雲이 허공을 덮어 비를 내리는 것과 같으므로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이 十地의 地마다 入ㆍ住ㆍ出의 三位가 있으니 그 가운데 바로 惑을 끊는 位를 無間道라 하고 理를 증득하는 位를 解脫道라고 한다. 十地마다 모두 이 二道가 있다. 이 第十地의 滿心에 바로 佛果의 障을 끊는 位를 金剛喩定(金剛無間道)이라 하고 이 定의 解脫道가 바로 佛果이다.

4. 所修의 勝行

 

十地에서 닦는 勝行이 광대무변해서 四攝事 四無量 등의 무량행을 섭하나 간략히 말하면 十波羅蜜에 지나지 않는다. 波羅蜜多란 梵語 Paramita의 音譯으로서 到彼岸 또는 度라고 번역하다. 生死의 北岸을 건너서 涅槃의 彼岸에 이른다는 뜻이다. 보살은 이 位의 地마다 一波羅蜜을 本行으로 하여 다른 諸行을 닦아 十地에 十波羅蜜行을 행한다.

初地(歡喜地)에서는 布施波羅蜜을 本行으로 하니 이에 三種이 있다. 즉 財寶를 베푸는 財施와 온갖 두려움을 없게 하는 無畏施와 眞理의 法을 베푸는 法施이다. 第二地에서는 戒波羅蜜을 本行으로 하니 이에도 三種이 있다. 즉 능히 三業을 지켜 不善을 제지하는 七衆234)의 別解脫戒235)를 攝律儀戒라 하며, 一切의 佛法을 任持해서 善法을 修證함을 攝善法戒라 하며, 大悲를 일으켜서 중생을 이익케함을 攝衆生戒라 한다. 第三地에서는 忍波羅蜜을 本行으로 하니 이에도 三種이 있다. 가령 害敵을 만나더라도 중생을 불쌍히 여겨 버리지 아니함을 耐怨害忍이라 하며, 寒熟 등의 괴로움을 만나더라도 勝心으로 다시 퇴전치 아니함을 安受苦忍이라고 하고, 甚深法을 요달해서 無生眞如의 理를 증득함을 諦察法忍 또는 無生法忍이라고 한다. 第四地에서는 精進波羅蜜을 本行으로 한다. 이에 三種이 있으니 大誓心을 일으킴을 初甲精進이라 하고, 善法을 섭수해서 加行精進함을 攝善精進이라 하고, 부지런히 중생을 饒益하게하는 일을 즐겨함을 利樂精進이라 한다. 第五地에서는 靜廬(禪定)波羅蜜을 本行으로 한다. 이에 三種이 있으니 禪定을 닦아 일체의 망상을 여의고 身心寂滅의 法藥을 얻어서 安住不動함을 安住靜慮라 하며, 六神通을 引發함을 引發靜慮라 하며, 모든 사업을 化作해

 

서 중생을 이락케함을 辨事靜慮라 한다. 第六地에서는 智慧波羅蜜을 本行으로 한다.  이에 三種이 있으니 我空, 法空, 俱空 등 三種의 無分別慧이다. 第七地에서는 方便善巧波羅蜜을 本行으로 한다. 이에 二種이 있으니 모든 善根으로써 중생에게 廻向하여 함께 菩提를 구함을 廻向方便善巧라 하고, 大悲心으로써 중생제도함을 拔濟方便善巧라 한다. 第八地에서는 願波羅蜜을 本行으로 한다. 이에 二種이 있으니 위로 菩提를 구하는 求菩提願과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는 利樂他願이다. 第九地에서는 力波羅蜜을 本行으로 한다. 이에 또한 二種이 있으니 思擇力과 修習力이다. 第十地에서는 智波羅蜜을 本行으로 한다. 이에 二種이 있으니 스스로 六바라밀에 의해서 일어나는 知德의 法藥을 수용함을 受用法樂智라 하며, 그 妙智에 의해서 다른 중생을 이락케 함을 成就有情智라 한다. 그리하여 見道 이전에 닦는 것을 다만 波羅蜜多이라 하며, 第八地이상에서 닦는 것을 大波羅蜜多라 한다.

 

5. 所斷의 惑障

 

이 十地의 階位에 따라 차례로 十波羅蜜을 닦음과 동시에 끊어야 할 惑障도 또한 十種이 있다.

初地의 所斷惑은 異生性障이니 異生性이란, 범부의 性으로서 煩惱ㆍ所知 二障의 分別起의 種子를 끊지 않는 한 異生性을 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二障 分別의 種子는 無漏聖性을 장애하는 번뇌이기 때문이다. 第二地의 所斷惑은 邪行障이다. 이는 所知障中 俱生起의 一分과 毁犯한 三業이니 즉 중생으로 하여금 邪行을 하게 하는 惑이다. 第三地의 所斷惑은 闇鈍障이다. 이는 所知障中 俱生起의 一分으로서 이 地의 勝定과 大法의 總持와 所發의 三慧를 장애해서 愚闇遲鈍케 하는 것이다. 第四地의 所斷惑은 微細煩惱現行障이다. 이는 所知障中 俱生起의 一分으로서 第六識과 함께 하는 身見 등이다. 이는 가장 下品에 해당하며 無始로부터 몸을 따라 행하므로 微細라 한다. 第五地의 所斷惑은 下乘般涅槃障이다. 이는 所知障中 俱生起의 一分으로서 生死를 싫어하고 涅槃을 좋아하는 차별의 相이 마치 二乘의 苦를 싫어하고 滅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障이므로 보살은 이 地에서 이를 끊는다.

第六地의 所斷惑은  相現行障이다. 이는 所知障中 俱生起의 一分으로서 四諦中 苦集의 染과 滅道의  相이 있다고 집착하여 現行하는 位이다. 第七地의 所斷惑은 細相現行障이다.  前六地는 染淨無二에 주해서  相의 染淨分別은 끊었으나 아직 細相의 流轉還滅의 相을 집착함으로 無相이라 할 수 없으나 이 第七地는 細相現行障을 끊었기 때문에 無相道에 들어갈 수 있다. 第八地의 所斷惑은 無相中作加行障이다. 이는 所知障中 俱生起의 一分으로서 無相觀이 마음대로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惑이다. 前五地는 有相觀이 많고 無常觀이 적은데 반하여 第六地는 有相觀이 적고 無相觀이 많으며, 第七地는 순전히 無相觀만 있으나 아직 無相中 加行이 있어서 他의 교화를 위하여 마음대로 相과 土를 나타낼수 없다. 이러한 加行은 八地의 無功用道를 장애함으로 이 地에서 이를 끊는다. 第九地의 所斷惑은 利他中不欲行障이다.  所知障中 俱生起의 一分으로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에 태만하고 自利만을 닦으려고 하는 惑이다.  第十地의 所斷惑은 於諸法中未得自在障이다.  所知障中 俱生起의 一分으로서 이 地의 大法雲地와 陀羅尼門 三摩地門 및 所起의 事業을 장애하는 惑으로서 보살이 이 地에 들어가서 이를 끊는다.

이 十重障에 각각 二愚를 갖추고 이에 佛果를 장애하는 二愚를 더하면 十障二十二愚가 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6. 所證의 眞如

眞如는 본래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理體로서 서로 다른 명칭을 붙일 필요가 없으나 十地의 階位가 차별함에 따라 客地에서 증득한 眞如理上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위에서 말한 十種의 斷惑에 의해서 十種眞如가 성립된다.  

一은 遍行眞如니 이는 初地에서 증득한 我法二空의 眞理로서 일체의 제법은 모두 我法을 여의고 二空의 理가 아님이 없으므로 이를 遍行眞如라 한 것이다. 二는 最勝眞如니 第二地 所證의 眞如로서 犯戒를 여의므로 해서 증득한 것이다. 이 眞如는 지극히 청정한 戒를 갖추어 무변한 공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最勝이라 한 것이다. 三은 勝流眞如니 第三地에서는 수승한 三慧와 眞如로부터 유출한 大乘의 교법은 前地의 교법에 비해서 극히 수승함으로 그 根本의 眞如를 勝流眞如라 한 것이다. 四는 無攝受眞如니 第四地에서는 實有의 法執을 끊고 法에 繫屬되는 바가 없기 때문에 無攝受라 하였다. 五는 類無別眞如니 第五地에 이르러서는 생사와 열반이 평등해서 차별이 없고 迷悟一如의 理를 관함으로 類無別이라 한다. 六은 無染淨眞如니 第六地에서 雜染의 연기를 관하여 染淨의 차별을 여의었음으로 그 所證의 眞如를 無染淨이라 한다. 七은 法無別眞如니 第七地 所證의 眞如로서 眞如를 經論上에 가지가지 교법으로서 시설하나 그 體는 실로 生滅의 相을 여의고 일미 평등해서 차별이 없으므로 法無別이라 한다. 八은 不增減眞如니 第八地 所證으 眞如로서 染法을 끊어도 감하는 일이 없고 淨法을 닦아도 더하는 일이 없어서 一切增減의 집착을 여의므로 不增減이라 한다. 이 眞如를 증득하면 相과 土를 나타내는데 함께 자재하게 된다. 九는 智自在所依眞如니 第九地에서는 四無 智의 자재를 얻기 때문이다. 十은 業自在等所依眞如니 이는 第十地 滿位에서 증득한 眞如로서 이 眞如를 증득하면 일체의 神通ㆍ摠持ㆍ禪定에 있어서 三業으로 짓는 바가 자재함으로 業自在等所依라 한다.

 

7. 結語

 

이상에서 菩薩十地 사상의 전개에 대하여 닦아야 할 열 가지 수행의 上狀과 十地의 낱낱 名義와 닦아야 할 열가지 勝行과 끊어야 할 열 가지 惑障과 그리고 증득해야 할 열 가지 眞如 등을 五段으로 구분하여 그 개요를 약술하였다. 이 十地는 華嚴經 七處九曾中 第六曾 他化自在天宮에서 金剛藏보살이 부처님의 가피를 받고 大智慧光明三昧에 들어가서 보살의 수행과정을 十地의 法으로 나누어 설한 데서 근거한 것이다.

대개 大乘의 十地를 本業十地ㆍ般若十地ㆍ華嚴十地를 대표로 열거할수 있는데 그중 華嚴十地가 다른 十地보다 조직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또한 내용이 충실함을 엿볼 수 있다.  華嚴의 十地阿毘達磨의 賢聖位를 모방하여 조직된 大品般若와는 별도로 부처님을 찬양하는 독자적인 十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보살은 十地中에서 용맹스럽게 十種의 勝行 즉 十波羅蜜의 수행을 통하여 열 가지 重障을 끊고 열 가지 眞如를 증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보살은 이상의 十地의 과정을 밝아서 第十法雲地의 滿心인 金剛喩定에 의해 佛果를 장애하는 미세한 惑障을 모두 끊어버리고 果滿의 究竟位에 이르는 것이다.

 

                                    考     文    獻

 

                大藏經講座        唯識論講義下      花田凌雲  著

 

                大藏經講座        華嚴經講義        河望法雲  著

                唯識學硏究        下卷敎義論        深浦正文  著

                唯識網要                            加藤智導  著

                佛敎學報          第二輯

                佛敎學報          第七輯

                大正新修大藏經        第十六卷      經集部 三

 

 

 

 

 

 

 

 

 

 

 

 

 

 

 

 

 

 

 

 

 

 

 

 

 

 

 

 

 

 

 

 

 

 

 

 

 

信解品 五時敎에 대한 小考

 

           

目     次

  1. 머리말                     (3) 方等時

  2. 信解品의 개요              (4) 般若時

  3. 五時敎                     (5) 法華涅槃時

    (1) 華嚴時                4. 맺는말

    (2) 阿含時

             

1. 머리말

 

부처님이 성도한 후 阿含經을 12년 方等經을 8년 般若經을 21년 설한 뒤 마지막으로 8년 동안 法華經을 설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一代詩敎이다. 그런데 信解品은 法華經 二十八品 第四品으로 비유 가운데 第二領解段이다. 중근기의 사람들은 처음에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속으로 믿기는 하였으나 아직 그 깊은 뜻을 깨치지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들을 위하여 三車一車의 비유들 들어 曾三歸一의 지취를 설하였다. 이에 慧命須菩提와 摩訶迦 延과 摩訶迦葉과 摩訶目建連 등 四大第子들이 長者 窮子의 비유를 들어 과거의 華嚴時부터 法華時에 이르는 五時의 敎를 설하여 스스로 이해한 바를 부처님 앞에서 고백한 것이 이 信解品의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信解品은 華嚴法曾이래 같이 그 법회에 참석하였던 마하가섭 등 四大第子가 法華曾上에 와서 법화경의 설법을 듣고 과거 四十餘年의 설법이 어떠한 의도로써 설하였는가를 이해하고 一代敎說의 차제의 뜻을 가장 상세히 설한 것이 信解品으로서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2. 信解品의 개요

 

나이 어릴 때에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된 한 아들이 있었다.  이미 五十年이란 세월이 흘러 그 아버지는 아들을 찾다가 찾지 못하여 할 수 없이 어떤 城에 머물러 살게 되었는데, 굉장한 거부장자로서 재물이 한량없이 많았으며 시종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코끼리, 말, 수레, 소, 양도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 한편 그 아들은 여러 나라를 유랑하면서 거지모양을 하고 품팔이를 하며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아버지가 살고 있는 城에 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아들과 이별한지 어언 五十年. 재산이 아무리 많은들 죽은 후 누구에게 이 재산을 물려줄 것인가 하면서 자나깨나 아들을 생각하지 않는 때가 없었다.

그런데 잠시도 염두에서 떠나지 않았던 그 아들이 이제 자기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窮子는 멀리서 長者가 사자좌에 걸터 앉았는데 모든 바라문ㆍ왕족ㆍ거사들이 공경히 둘러싸고 진주ㆍ영락 등 그 값이 천만이나 되는 값비싼 장신구로 그 몸을 장식하고 관리와 시종들이 좌우에 모시고 서있는 것을 보고 여기서는 내가 품팔이 할 곳이 못된다.  공연히 들어갔다가 봉변당할 것이라 생각하여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 버렸다. 아버지인 장자

 

는 분명히 자기가 다년간 찾아다니던 아들임을 알고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 뒤를 쫓아서 데려 오라고 하였다.  궁자는 영문도 모르고 왜 아무죄도 없는 사람을 잡으러 왔을까 하고 「나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요」하고 울면서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져버렸다.  장자는 이것을 보고 물을 뿌려 소생시켜 일단 놓아주도록 하였다. 궁자는 그로부터 빈촌을 전전하면서 적당한 일거리가 있지 않나 하고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장자는 고의로 형색이 초췌하고 위덕이 없는 가난한 모습을 한 두 사람을 보내어 궁자에게 말하기를 「너에게 적당한 일자리가 생겼는데 같이 가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달래었다. 궁자는 그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것은 변소 치는 일이다.」라고 하자 궁자는 두 남자를 따라서 장자의 집으로 가서 변소 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장자는 창틈으로 궁자의 모양이 어떠한가를 살펴 보았더니 안색이 파리하고 먼지투성이가 되어서 차마 쳐다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장자는 몸소 더러운 옷을 입고 그 궁자에게 접근하여 위로하여 말하되「생각하면 나는 나이가 많아서 너와 같은 사람을 보면 실로 아들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하며 점차로 가까이 하였다. 이와 같이 二十年 동안을 궁자는 변소 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장자와 궁자는 마음이 통하여 서로 믿고 의심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으나 아직도 궁자는 천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長者는 병이 걸려 재산의 관리로부터 수입지출의 일체 모든 감독을 궁자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나 궁자는 타인의 재산을 임시로 맡은 것이라 생각하고 추호도 자기의 소유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임종이 가까웠음을 안 장자는 친척과 국왕 등 사람들을 모아놓고 비로소 자기와 궁자와의 관계를 실토하였다. 「이제 여기에 있는 사람은 실로 나의 아들이며 五十年 전에 나를 버리고 가출한 자라 내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여러분들 앞에서 나의 아들에게 상속합니다.」라고 공포하였다.

이것이 信解品에서 말한 비유의 내용이다. 이것에 의해서 불제자들이 부처님의 출세를 만나 華嚴經에 이르러 자기가 佛子로서 佛果(菩提)를 얻을 수 있다는 自覺을 얻는데 심적과정을 기술한 것이 바로 信解品의 개요이다.

위에서 말한 신해품중 長者는 如來를 비유했고 窮子는 본래 佛性을 여의지 않는 중생이 佛을 떠나서 迷界에 유전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五十年을 유랑한 것은 다섯 가지의 미한 세계 즉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의 五道에 윤회함을 비유한 것이다.

 

3. 五時敎

 

天台大師는 부처님이 五十여년간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설한 무량한 법문을 五時 八敎의 범주로써 분류하였다. 즉 부처님의 一代說法은 대개 法華經을 설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 보고 法華經을 가장 높은 것이라 하여 이 경을 중심으로 하여 불교 전체를 조직적으로 체계를 세웠다.

八敎는 곧 교화하는 형식에 따라 불교를 분류한 化儀四敎(頓敎·漸敎·秘密敎·不定敎)와 敎理의 내용에 따라 分類한 化法四敎(頓敎ㆍ通敎ㆍ別敎ㆍ圓敎)를 말한다. 여기서는 八敎의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五時敎는 부처님이 성도한 후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설한 五十年間의 교리를 시간적으로 판단한 것으로 즉 華嚴時ㆍ阿含時ㆍ方等時ㆍ般若時ㆍ法華涅槃時이다.

 

    (1) 華嚴時

 

성도직후 최초 三七日간 보리수하에서 대보살중 및 숙세에 別ㆍ圓二敎를 수행한 근기가 성숙한 사람들을 위하여 스스로 증득한 법문을 설한 시기이다.  華嚴時란 이 때에 大方廣佛華嚴經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화엄경은 불타께서 깨달은 내용을 여실히 開陳한 것으로 그 법회에 있어던 聲聞ㆍ緣覺의 二乘들은 귀머거리와 같고 벙어리와 같아서 그 가름침의 이익을 받을 수가 없었다.

법화경 신해품에 窮子가 장자의 문저에 온 것을 보고 장자가 사람을 보내어 급히 데리고 오라고 할 때에 궁자가 경악하고 원수라 칭한 것은 모든 성문들이 화엄경 설함을 듣고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여 귀머거리와 벙어리와 같았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니 이것을 窮子驚愕華嚴時라고 한다.

이 화엄의 설법을 化儀上으로는 擬宜時라고 할 수 있는데 擬宜이라고 하는 것은 근기의 마땅함과 좋아함(宜樂)을 헤아린다는 뜻으로 화엄경을 통하여 근기에 응하여 그 適否를 시험함을 말한다.

이 화엄의 설법은 化儀四敎中 頓敎에 해당하며 秘密ㆍ不定의 二敎를 겸하고 化法四敎中 圓敎를 주로 하고 別敎를 겸하였으므로 圓兼一別이라고 하며 또는 다만 兼이라고도 한다.

 

      (2)阿含經

불타가 화엄의 설법을 마친 후 大乘의 법문을 알아듣지 못하는 小乘을 위하여 十二年 동안 녹야원에서 阿含經을 설한 시기이다. 불타는 적멸도량에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녹야원에 가서 舍郡珍御의 옷을 벗고 丈六弊垢의 옷으로 갈아입고 먼저  陣如 등 五人을 위하여 四諦 十二因緣의 法과 六度 등의 敎法을 설하였다.

법화경 신해품에 방편으로 비밀히 두 사람(聲聞ㆍ緣覺을 비유)의 형색이 초췌하고 위덕이 없는 자를 보내어 궁자에게 변소치는 일을 하자고 유인한 것은 화업경을 설한 후 三藏敎를 설한 鹿苑時를 비유한 것이니 이것을 除糞取價鹿苑時라고 한다.

이 阿含時는 華嚴時에 대승법을 들을 수 없는 미숙한 근기들을 대승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방편교를 설한 교리이기 때문에 이 아함을 誘引의 敎라고 한다.

이 阿含經은 후의 方等, 般若와 함께 化儀四敎中 漸敎에 해당하며 그 중 初ㆍ中ㆍ後로 구분했을 때, 아함시는 그 初期가 되며 化法四敎中 다만 藏敎마을 설하고 나머지를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앞의 兼에 대해서 이것을 但이라고 한다.

       

    (3) 方等時

阿含經을 설한 후 八年동안 「維摩經」「金剛明鏡」「楞伽經」「勝 經」「無量壽經」등 方等部의 여러 경을 설한 시기이다.

법화경 신해품에 궁자가 장자의 집에서 二十年間 거름치는 천한 일을 한 후 서로의 마음이 통하여 출입의 어려움이 없게 된 것은 三藏敎를 설한 후 方等經을 설한 비유한 것이니 이것을 出入無難方等時라 한다.

부처님은 小乘에 만족한 근기들을 大乘에 유도하기 위하여 小乘敎를 破斥하고 大乘敎를 찬탄하니 이것을 彈訶라고 한다. 이 彈訶를 입은 二乘들은 깊이 자기가 믿었던 소승교의 淺劣함을 부끄러워하고 대승교의 高妙함을 사모하여 소위 恥小慕大의 생각을 내게 되었다.  즉 三藏半字敎를 배척하고 通ㆍ別ㆍ圓의 大乘滿字敎를 주장하였다.

이 方等時는 化儀四敎中 漸敎에 해당하며 그 中期에 속하고 秘密ㆍ不定 등도 겸하고 있다. 化法四敎中 藏ㆍ通ㆍ別ㆍ圓의 四敎를 아울러 상대하여 설하고 또 四敎와 對此해서 大乘

 

으로써 小乘을 彈하고 圓敎로써 偏敎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對라고 한다.

 

    (4) 般若時

方等時 다음에 二十一年 동안 諸部의 반야경을 설한 시기이다. 법화경 신행품에 그후 장자가 병이 들어 머지않아 죽을 줄 알고 궁자를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소유한 金ㆍ銀ㆍ珍寶가 창고에 가득차 있는 것을 너에게 양도하노니 그 가운데 있는 재물을 마음대로 취하라고 한 것은 方等經을 설한 후에 般若經을 설한 때를 비유하나 것이니 이것을 領知寶物般若時라고 한다.

먼저 방등시에 있어서 二乘은 부처님의 꾸지람을 듣고 소승을 부끄러워하고 대승을 사모하는 마음을 내었으나, 대승과 소승은 그 법이 다르다고 생각하므로 이러한 어리석은 집착을 없애기 위하여 大ㆍ小乘의 구별은 사람의 근기를 말미암아 있는 것이지 법에 있어서는 없는 것이다.

一切皆空의 이치를 설하여 어리석은 집착을 淘汰시키므로 이 般若時를 淘汰시키므로 이 般若時를  淘汰의 敎라고 한다.

般若時는 化儀四敎中 漸敎이며 그중 後期에 속하고 秘密ㆍ不定의 敎를 겸하고 있다.  化法四敎中 別ㆍ圓의 二敎를 주로 하고 通敎를 挾帶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帶라고 한다.

 

    (5) 法華涅槃時

前後二期로 구분하는데 前期를 涅槃時라 하고 후기를 涅槃時라 한다. 최후의 八年間 법화경을 설하고 입멸직전에 열반경을 설한 시기이다. 법화경 신해품에 장자가 임종하려고 할 때에 친척을 모아놓고 선언하되 「이는 나의 아들이요. 나는 실로 그의 아버지다. 이제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은 단 내 아들의 소유이니 家業을 내 아들에게 상속하노라.」고 하였다.  이때 궁자가 아버지의 이 말을 듣고 환회하여 未曾有를 얻었다 한 것은, 곧 반야경을 설한 후에 법화경을 설한 때를 비유한 것이니 이것을 傳付家業法華時라고 한다. 앞의 가르침을 가져 법문을 다 알면 法華를 설할 때는 佛의 知見에 開示悟入해서 수기를 받고 성불함을 비유 한 것이다.

이 法華는 華嚴의 擬宣, 阿含이 誘引, 方等의 彈訶, 般若의 陶淘를 지나 온전히 근기들이 성숙하여 법화경에 이르러서 중생의 근기들이 一佛乘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八敎의 敎를 세울 필요가 없다. 그리하여 法華를 超八의 敎라고 한다.

법화이전의 敎는 頓漸이 각각 그 部를 달리하고 있었으나 이것을 開曾하면 다 한 가지 법화의 非頓非漸에 귀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頓漸의 차별이 있는 것은 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중생의 근기에 차별이 있어서 융회하지 못하기 때문에 實法인 一佛乘을 二乘ㆍ三乘으로 분별하여 설한 것이지 실로 一佛乖밖에 二乘이나 三乘의 별다른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법화경 방편품에서는「十方佛土中 唯有一佛乖 無二亦無三」이라고 하였다. 만약 중생의 근기가 차별이 없다면 부처님의 교법도 이러한 淺深高下의 차별이 없는 唯一한 妙法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開權入室 ㆍ發權入實 또는 曾三歸一이라고 하여 그 뜻을 밝힌 것이다.

涅槃經은 법화와 함께 중생으로 하여금 佛知見에 開示悟入케 하는 교화방법이 같기 때문에 합해서 一時로 한 것이다. 즉 법화는 흡사 가을의 대수확과 같고 열반은 수확 후 이삭을 줍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것을  拾敎라고 한다. 말세의 중생들이 부처님의 열반함을 보고 斷見을 일으키고 因果를 부인하며 佛性을 부정하는 것을 경계하여 곧 四敎를 다시 설하고

 

특히 戒律을 설해서  善惡因果의 現法을 보임과 동시에 佛性常住를 설하여 그 佛知見에 開示悟入하기를 권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을 扶律談常의 敎라고 한다.

 

                                  4. 맺는말

 

이상에서 말한 五時는 부처님이 시간적으로 중생의 근기를 성숙시켜서 마침내 法華圓實의 敎를 듣는데 이르는 차제를 보인 것이다. 만약 일체중생의 근기가 성숙해서 그 증득한 바를 領解할 수 있었다면 五時八敎의 필요성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藥의 調劑는 병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지 병이 나으면 처방도 무용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須菩提 등 四大弟子가 法華經 信解品에서 窮子(중생)의 비유를 들어서 五時는 증득한 바의 법문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 즉 중생으로 하여금 佛知見에 開示悟入하기 위한 방편임을 여실히 비유하여 밝힌 것이 바로 信解品의 要旨이다.

 

                                  參  考  文  獻

 

                         佛料唯心論           村上專精  著

                         支郡佛敎の 硏究      上盤大定  著

                         佛敎要義   卷下

                 佛敎學報 第五輯

                 大藏經講座 天台四敎儀講義 稻葉圓成 著

 

 

               

 

 

 

 

 

 

 

 

 

 

 

 

 

 

 

 

 

 

 

天台四敎에 대한 考察

 

              目    次

  1. 머리말                 3. 化儀四敎

  2. 化法四敎                 (1) 頓敎   (2) 漸敎

    (1) 藏敎   (2) 通敎       (3) 秘密敎  (4) 不定敎

    (3) 別敎   (4) 圓敎      4. 맺는말

 

1. 머리말

 

天台大師는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적으로 불교를 통일하고 적극적으로 諸法實相論을 주장하여 불교철학의 심오한 체계를 세워 法華文句ㆍ法華玄義ㆍ摩訶止觀 등 三大部를 지어서 敎觀二門을 개설하였다. 즉 法華玄義와 法華文句는 주고 敎相을 설하여 불교의 眞髓가 어느 곳에 있는가를 밝혔고 摩訶止觀은 주로 觀心門을 설해서 우리들이 어떻게 하여 불교의 진수에 달할 수 있는가 하는 수행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면 敎相門이란 어떠한 것인가. 불교전체를 조직적으로 체계를 세우기 위하여 法華經에 기준을 두어서 석존 일대 五十年間 종종근기에 대응해서 설한 무량한 법문을 五時八敎의 범주로서 분류해석하여 법화의 교리를 설하여 보인 것이다.

五時敎는 五十年間의 석존의 설교를 시간적으로 五期로 분류하여 판단한 것이니 즉 華嚴時, 阿含時, 方等時, 般若時, 法華時이다. 八敎 석존의 일대시교를 분류한 것으로서 頓敎, 漸敎, 秘密敎, 不定敎의 四敎와 藏敎, 通敎, 別敎, 圓敎의 四敎를 합한 것이다. 그중 前四敎는 化儀四敎로서 化導의 방법 즉 교화의 수단으로서 五時와 함께 형식에 따라 외부로부터 분류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세간의 의사가 병에 따라 가지가지 藥을 처방하는 것과 같다.  後四敎는 化法四敎로서 경전의 내용에 따라 교리의 深淺을 내부로부터 정리한 것으로서 그것은 마치 藥의 맛을 분별하는 것과 같다.

五時敎는 信解品 五時敎에 대한 小考에서 이미 서술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化儀四敎와 化法四敎인 八敎에 대해서 해설하고자 하는 바 먼저 교리의 내용에 따라 분류한 化法四敎뿌터 설명하고자 한다.

 

                       2. 化法四敎

 

    (1) 藏 敎

藏이란, 經, 律, 論의 三藏을 뜻하는데 小乖의 특징이 三藏에 있으므로 여기서는 小乖의 가르침을 말한 것이다.  이 藏敎는 三乖을 위하여 설한 阿含部經典을 기준으로 하여「婆沙論」「俱舍論」등에서 밝힌 敎義이다. 즉 三藏敎를 받는 근기에 聲門, 緣覺, 菩薩 등 三乘의 구별이 있으니 각각 근기에 따라서 그 받는 敎法이나 修行의 단계에 차별이 있다.  다시 말하면 聲門에게는 四諦敎, 緣覺에게는 十二因緣敎, 菩薩에게는 六波羅蜜의 교법을 주어서 제

 

각기 능력에 따라 수행하게 하는 것이 藏敎의 특색이다. 이에서는 但空236)만의 이치를 밝히고 析空觀237)을 통해 小乖의 궁극의 이상인 無餘涅槃238)에 들게 하는 가르침이다.

 

      (2) 通 敎

通이란 共通의 뜻으로서 聲門ㆍ緣覺ㆍ菩薩이 함께 받는 敎로서 그 받는 사람이 영리하고 둔함에 따라서 깊고 묘하게 또는 얕고 하열하게 아는 교이다. 즉 근기가 하열한 사람이 이것을 얕게 알면 앞의 藏敎와 같은 결과가 되고 근기가 수승한 사람이 깊고 묘하게 알면 뒤의 別敎, 圓敎에 통함으로 通敎라 한다. 이 通敎는 일정한 경전이 없고 모든 大乖敎中 三乖同品의 뜻을 설한 것은 다 通敎에 해당한다. 體空觀239)을 통해 부처님의 果位를 증득케 하는 가르침이며 但空의 이치뿐만 아니라, 不但空240)의 이치를 밝힘으로서 다음 別敎와 圓敎로 나아가게 하는 가르침이다.

 

    (3) 別 敎

別이란, 不共과 歷別의 뜻으로서 聲門 緣覺의 敎와 다르고 또 圓敎와도 같지 아니하므로 別敎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聲門과 緣覺은 무시하고 菩薩만을 위한 가르침으로서 앞뒤의 三敎와 다르다는 뜻이다. 別敎에서 설한 바 내용은 공의 이치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 中道의 이치를 밝히고 있으나 아직 현상과 본체가 분리되어 있으므로 점차적으로 부단히 수행하여 단계적으로 깨달아가게 하는 가르침이다. 이 敎에는 특히 이것만을 설한 별개의 경전이 없고 모든 大乖經中에 但中不融의 법문을 설한 것이 이 別敎에 속한다.

 

    (4) 圓 敎 

圓이란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서로 융합되어 원만하고 완전하다는 뜻으로서 別敎가 三界 밖의 事敎임에 대하여 이것은 三界 밖의 現敎이다.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이 현상적인 면으로나 본체적인 면으로 결코 구별되지 않는 現事不二의 이치를 밝힌 것이다. 別敎에서는 有와 空의 대립은 진리가 아니라 하여 따로 中道를 세웠으나 이는 참된 中道가 아니다.

진정한 실제는 만유를 여읜 것이 아니라 만유 그대로가 空이며 假이며 中이어서 現象과 實在, 迷와 煩惱와 菩薩 등의 사이에 서로 갖추고 서로 원융한 不但中을 말하는 가장 정돈된 現象이 곧 實在임을 말하는 不二의 교리이다. 이 圓敎의 도리를 설한 것은 실로 法華經으로서 기타 華嚴經, 涅槃經 등 大乘敎中에서도 또한 이 妙理를 설한 곳이 있다.

이상의 四敎를 大小二乘 權實二敎에 배대하면 다음과 같다.

                           

                      ― 小乘 ― 藏敎(柝空) ―

               佛敎 ―        ― 通交(體空) ―― 權敎

                      ― 大乘 ― 別敎(但空) ―

                              ― 圓敎(不但中) ― 實敎

 

 

3. 化儀四敎

 

    (1) 頓 悟

頓이란 것은 일정한 차례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부처님이 성도한 직후에 깨달은 내용을 그대로 대보살중 및 대승의 근기가 익은 범부들을 위해서 설한 법문으로서 華嚴經이 이에 해당한다. 그 敎體는 化法四敎中 別ㆍ圓二敎에 해당한다.

   

    (2) 漸 敎

깨달음의 내용을 차례를 밟아서 설한 교로서 곧 얕은 가르침으로부터 깊은 가르침으로 또는 작은 데서부터 점차 큰 것으로 순서를 따라 중생을 교화하는 방법이다. 阿含經ㆍ方等經ㆍ般若經의 차례를 거쳐 法華ㆍ涅槃에 이르는 敎說을 말한다. 그 敎體는 化法四敎의 藏ㆍ通ㆍ別ㆍ圓의 四敎전반에 해당한다.    

 

    (3) 秘密敎

秘密不定의 뜻으로 한자리에 모인 중생의 근기가 여러 가지 차별이 있으므로 부처님께서 동일한 가르침을 펴지만 중생들은 그 근기에 따라 가르침의 내용을 서로 다르게 듣고 자신에게 알맞는 이해를 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께서 상대자의 소양과 지식이 한결같지 아니한 이들에게 다같이 그 요구에 맞도록 하기 위하여, 듣는 이가 제각기 따로따로 이해할 수 있도록(不定) 말씀하신 교묘한 교법이다. 이 교는 듣는 이들이 제각기 다른 이가 들은 교법이나 그 뜻을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을 특색으로 한다. 이를 人法俱不知라고 한다. 그 敎體는 化法四敎의 藏ㆍ通ㆍ圓에 해당한다.

 

    (4) 不定敎

不定敎는 또한 顯密不定敎라고도 하는 바 秘密敎와 마찬가지로 듣는 이들이 그 지식의 정도에 따라서 같은 설법을 가지가지로 알아듣고 있다는 교이다. 부처님이 지식과 소양이 한결같지 아니한 상대자에 대하여 골고루 그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 듣는 이가 제각기 따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하신 교묘한 가르침이다. 그 법석에 참석한 사람들은 서로 알면서도 제각기 다르게 이해하는 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을 人知法不知라고 한다. 그 敎體는 化法四敎인 藏ㆍ通ㆍ別ㆍ圓의 四敎에 해당한다.

 

4. 맺는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化法四敎는 天台四敎는 天台宗에서 부처님의 일대교설을 교화하는 방법 곧 교리의 내용에 의하여 분류한 것이라면 化儀四敎는 부처님으 일대시교를 설법한 형식에 의하여 四種으로 분류한 것이다.

天台는 법화이전의 一代敎說을 대개 법화경을 설하기 위한 준비라 보고, 이 설법중에는 법화경을 가장 수승한 것이라 하여 이 경을 중심으로 해서 불교 전체를 조직적으로 체계를 세운 것이 이른바 五時八敎이다. 법화 이전의 교는 頓과 漸이 각각 그 部를 달리하고 있었으나 이것을 開會하면 단한가지 法華의 非頓非漸에 歸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頓漸의 차별이 있는 것은 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중생의 근기에 차별이 있어 융합하지 않

 

았기 때문에 實法인 一佛乘을 二乘 三乘 등으로 분별하여 설한 것이지, 사실은 一佛乘밖에 二乘이나 三乘의 別法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법화경 方便品에서는

「十方佛土中 唯有一佛乘 無二亦無三」

이라고 하였다. 만약 중생의 근기가 융화하여 차별이 없다면 부처님의 교법도 이러한 深淺과 高下의 차별이 없는 唯一한 妙法뿐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일체중생의 근기가 수승해서 그 증득한 바를 받아 들일 수 있어다면 五時八敎의 필요성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약의 調劑는 병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지 병이 나으면 처방도 필요없는 것과 같다. 위에서 말한 化法은 흡사 藥의 종류와 같고 化儀는 處方과 같고 五時는 투약의 시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불타인 의사가 중생인 환자에게 투약하는데 어떠한 藥種(化法)을 어떠한 調劑(化儀)로서 어떠하시기(五時)에 복용하는가의 관계를 분류한 敎判이 바로 五時八敎이다.

         

 

                                參  考  文  獻

                   佛料唯心論                 村上專精  著

                   支郡佛敎の 硏究            上盤大定  著

                   佛敎要義   卷下

                   佛敎學報 第五輯

                   大藏經講座 天台四敎儀講義    稻葉圓成 著

 

                          

 

 

 

 

 

 

 

 

 

 

 

 

 

 

 

禪의 種類와 그 哲學的 意義

 

                     

                    目  次

  1. 序 言               5. 禪觀의 내용

  2. 禪의 意義           6. 達磨禪의 특색

  3. 禪의 起原           7. 結 語

  4. 禪의 種類

 

                                     1. 序 言

 

수행의 요점이 戒 定 慧를 均等히 닦는데 있으나, 그 중 가장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禪定이라 하겠다. 戒 定 慧는 일면으로 보면 솥의 세 다리와 같아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나 다른 일면으로 보면 서로 단계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戒는 요컨대 定을 닦기 위한 준비과정이라면 定은 慧를 얻기 위한 준비과정이라 하겠다. 戒에 의해서 三惡道(지옥, 아귀, 축생)를 초월하고 定에 의해서 欲界를 여의며 慧에 의해서 三界를 초월할 수 있다. 그 중 定은 중간에 위치해서 三界를 초월할 수 있는 慧도 결국 定에 의해서 생기는 것으로 볼 때에 수행의 중심은 定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禪定의 수행은 大小乘을 통하여 어떠한 敎派에도 근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禪定을 여의고는 불교가 성립할 수 없다. 불교는 어떤 특수한 神을 내세우지 않고 어디까지나 마음을 중심으로 해서 해탈 이상으로 하는 것이 다른 종교와 특이한 점이다. 有神的 宗敎의 眞髓가 기도에 있다고 한다면, 불교의 진수는 禪을 통하나 깨달음에 있다고 할 것이다.

 

2. 禪의 意義

 

禪이란 梵語 Dhy na를 음역한 것으로 禪郡의 약칭이다.  또한 靜慮, 思惟修, 定이라 번역한다. 眞理를 올바로 思惟하며 조용히 생각하여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산란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이 禪定修行의 목적은 산란심을 제지하는 소극적인 목적에 그치지 않고 心力을 한 곳에 專注함에 의해서 어떤 대상을 철저하게 관찰하는 적극적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禪이란 무엇인가, 心의 名이다. 心이란 무엇인가, 禪의 體이다」라고 宋代의 어떤 禪客이 정의한 것과 같은 禪은 心의 별명이며 心은 禪의 본질이다.

불교에서는 禪이라고 하는 명칭 대신에 奢摩他( amatha 止) 毘婆舍郡(Vipa yana 觀)라고도 한다. 止 는 停止의 뜻으로 靜的으로 마음을 거두어 妄念을 쉬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며, 觀은 觀達의 뜻으로 動的으로 智慧를 내어 觀照하여 眞如에 계합한다는 뜻이다.  불교는 항상 止觀均等을 주장하여 마음이 너무 靜에 치우치서  무기력한 반수면 상태에 떨어져도 옳지 아니하며 思惟에 치우쳐서 산란한데 떨어져도 불가한 것이다.  그러므로 止觀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와야만 解脫의 理想境에 도달할 수 있다.

 

3. 禪의 起源

 

원래 禪定은 불타 이전의 인도의 禪定派인 外道들이 瑜伽(Yoga)의 관찰법으로서 眞理의 발견 및 체험의 道로서 발전한 것이었으나 불타가 수행할 때에 이를 품수하여 마군이를 항복하고 도를 이룬 것과 涅槃에 이르러 四禪定에 들었다고 전하여 있고,「阿含經」중에는 四禪定에 관한 것이 특수하게 해석되어 있으며 大乘經典에도 대승적 삼매의 해탈이 수없이 설해져 있다.

「大梵天王間佛決疑經」에는 이른바 拈華微笑로서 禪宗의 기원으로 하고 있다. 즉 한 때에 부처님이 靈鷲山에서 설법하고 계실 때 梵王이 바친 金波羅華의 꽃가지를 들어보임에 수많은 대중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는데 迦葉尊者만이 빙그레 웃었다. 이에 부처님은 正法眼藏 涅槃妙心을 迦葉에게 전한다고 하고 이에 僧家梨를 주어 信을 표하였다. 이것이 바로 佛心印의 以心傳心 直指單傳의 禪法의 起原이다. 이리하여 인도에서는 摩訶迦葉으로부터 二心八祖 菩薩達磨에 이르기까지 傳法相承하여 그 信表로서 衣鉢을 전수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4. 禪의 種類

 

인도 六派哲學의 하나인 瑜伽派에서는 禪的修行의 八位中 第七位를 修行階級의 一位로 하고 小乘佛敎에서는 특히 四禪을 세워 가지가지의 禪的 修行方法中에 특별한 一行法으로 삼고 大乘에서는 六波羅蜜中 第五禪郡波羅蜜이 禪的 修行에 해당한다.

唐代의 宗密禪師는 「禪源諸詮集都序卷上之一」에 이를 五種으로 분류하였다.  第一은 外道禪이니 「帶異計欣上厭下而修者」라고 하였다. 즉 我이외에 神을 인정하여 이 세계를 싫어하고 神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목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이다. 신비주의를 주장하는 기독교도들이 神을 전념하고 그의 은총을 받으려고 하는 觀法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第二는 凡未禪이니 불교신자이기는 하나 다만 因果의 도리를 신할 뿐 아직 진실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의 수행방법이다.

宗密은 이를 「正信因果 亦以欣厭以修者」라고 하였다. 第三은 小乘禪이니 「悟我空偏眞之理而修者」하고 하였다. 즉 無我의 이치를 믿어서 我見의 이치를 믿어서 我見을 滅함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이다. 第四는 大乘禪이니 「悟我法二空所顯眞理而修者」라고 하였다.  즉 自我뿐만 아니라 外界도 一切空이라고 達觀하고 一切空의 妙諦를 궁구함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이다.  第五는 如來最上乘禪이니 자기가 본래 佛임을 깨달아 그를 실현하기 위해서 닦는 禪觀이다. 宗密은 이를「若頓悟自心本來淸淨, 元無煩惱 無漏智性本自具足 此心卽畢竟無異  依此而修者 是最上乘禪」이라 하였다. 一名 祖師禪이라고도 하는 법문으로서 이를 一行三昧 혹은 眞如三昧 혹은 如來淸淨禪이라고도 하니 達磨門下에 전하는 禪이 바로 이것이다.

이와 같이 禪에 가지가지 종류가 있는 이상 이에 의해서 체달하는 경지에도 또한 갖가지 구별이 있으며 자연히 그 수행자의 인격에도 여러 가지 다른 색채를 띠게 될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즉 身心의 分離를 목적으로 生存意志의 부정을 기약해서 닦는 자는 자연히 厭世的이고 활동이 없게 될 것이고, 극락에 왕생함을 목적으로 닦는 자는 감정적 신앙적 색채를 띠고 他力的이 될 것이고, 또 자기가 곧 實在함을 信하는 자는 自力的이며 活動的이어서 樂天的인 성격이 될 것이다.

 

5. 禪觀의 내용

 

 

自我란 무엇인가, 고래의 철학자, 종교자의 목적이 실로 이 自我를 해결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서양에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부르짖음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自我의 문제는 항상 철학상의 중심이 되고, 인도에서는 부처님이 출생하기 전 二, 三百년 전에 벌써 우파니샤드가 이 문제를 사유관찰하기 시작하였으며, 부처님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입산수도하였던 것이다.

겨우 六尺의 공간을 차지하고 七十年의 시간을 보존하는데 불과한 것이 我라고 한다면 실로 인간의 自我(몸집) 코끼리보다도 오히려 저열한 셈이 된다. 만약 인간의 정신생활의 범위가 없었더라면 우리들은 여러 가지로 동물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최후의 가정으로서 우리들의 본성인 이른바 절대적 생명 즉 절대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의 생명 즉 自我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무한한 까닭은 그 本性이 원래 무한절대한 大我와 관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眞如니 法身이니 佛心이니 내지 神明이라 하는 것도 시로 이 절대아를 가리킨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이 絶對我를 어떠한 방법으로 실현하고 체험할 수 있는가. 한편으로는 감각적 방면을 제어하는 동시에 다른 일면으로는 理想의 표적을 전념으로 고수하는 방법이다. 이를  바로 의식해서 絶對我를 內心에 구체화하는 방법으로 나타난 것이 곧 禪이다.

禪의 깨달음이란 결국 정신 통일에 의해서 眞我에 계합한 경지에 이름을 말한 것이다.  불타는 보리수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한 결과 드디어 佛果를 성취하였다.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는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뜨거운 것을 스스로 알 뿐이지 마셔 보지 않는 사람은 모르는 것과 같다. 그 스스로 증득한 바의 경지는 이른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고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것으로서 언어로써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法性界에서 말한 「證智所知非餘境」즉 증득한 지혜라야 알 바이지 나머지 경계가 아니기 깨문이다.

 

6. 達磨禪의 특색

 

達磨는 인도에서는 第二十八祖에 해당하고 중국 禪宗에서는 初祖에 해당한다.  達磨는 梁나라  武帝때에 南京에 왔다가 北魏에 옮겨 崇山 小林寺에서 九年동안 面壁한 후 慧可를 만나 法을 전하니 達磨西來를 中國禪宗의 기원으로 함은 禪宗 일반의 定設이 되었다. 慧可는 이를 僧璨에게 僧璨은 道信은 道信은 弘忍에게 弘忍은 慧能에게 전하였다. 이때에 南禪慧能 北禪神秀의 二途로 갈라지고 慧能 이후에 다시 五家(臨濟宗, 僞仰宗, 曹洞宗, 雲門宗, 法眼宗) 七宗(前五宗에 臨濟에서 分派한 楊岐·黃龍을 加한 것임)이 分派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唐 말기 이후의 중국 불교는 거의 禪宗化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컨대 禪宗은 달마에 의해서 전래되었으나 第六祖 慧能에 의해서 一變하였다고 또한 慧能에 의해서 더욱더 발전을 하게 되었다.

禪은 絶對我를 체험하는 要道이기는 하나 앞에서 말한 禪의 종류에 따라 그 활용이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는다. 宗鏡錄에 의해서 達磨의 禪的 思想을 살펴 보기로 한다. 그중 血脈論은 부처님이 法은 부촉한데서 비롯해서 역대조사의 법을 부촉한 것이 心임을 역설하였다.  즉

 「三界興起 同歸一心 前佛後佛得心 不立文字」라 하였고, 또

 「西天二十七祖 只是遞傳心印 吾今來此土 唯傳一心」이라 하였고, 다시

 「佛是自心… 性卽是心心卽是佛 佛卽是道道卽是禪 禪一字非凡聖所測 直見本性名之爲禪」

이라 하였으니, 達磨禪의 所謂 直指人心見性成佛이라 한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면 如來禪 또는 祖師禪이라 칭하는 達磨禪의 특색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自內證으로서의 心卽是佛을 開悟하는 것이 목적이기는 하나 이 깨친 경지를 직접 생활에 活用하는 데에 그 특색이 있다고 할 수 있다.

 

7. 結 語

 

이상에서 말한 禪宗은 그 敎理의 배경에 般若의 空, 즉 순수하게 활동하는 空을 띠고 있으니 이른바 절대아를 우리 일상생활에 표현할 것을 역설하였다.  禪宗에서 自內證에만 집착함을 경계하여 金鎖銀換의 병이라 하며 또는 向上의 死漢이라 꾸짖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하면 內向的 방법으로 자기의 本性을 실험하는 것을 주관적으로 大我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는 하나 다만 이에만 집착하면 객관적으로 확대하는 방면을 소홀히 하게 되어 결국 自我의 활동이 불완전하게 된다. 그래서 타골이 인도의 폐단은 너무 주관적인 방면에만 치우치고 객관적인 活用面을 도외시한다고 지탄하였다.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려고 한 분이 바로 부처님이다. 그러나 그 제자중에는 아직도 은둔적이고 독선적인 것에만 치우치는 경향이 없지 않다. 禪宗은 실로 이에 대하여 바로 부처님의 인격을 통해서 현실적인 방면으로 활약함을 주장하고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達磨禪으로서 모든 禪 가운데서 가장 큰 특색을 띠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고래로 「敎外別傳 不立文字」혹은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말로써 禪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일체의 문자나 언어상의 설명으로 서는 철저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언어나 문자에 구애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眞理를 바로 깨치려고 하는 것이 禪의 근본 목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부처님이 보리수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하시고 달마가 소림굴에서 面壁九年한 것이 神의 福音도 神의 계시도 아닌 다만 합리적인 진리 탐구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達磨가 인도에서 중국에 왔든 오지 않았든간에 만고불변의 진리가 禪이어야 하며, 부처님이 세상에 태어났든 태어나지 않았든간에 엄연히 존재하는 眞理가 佛法이어야 한다.

 

                              參  考  文  獻

 

                      大乘佛敎思想論      木村泰賢  著

                      小乘佛敎思想論      木村泰賢  著  

                      現代佛敎講座第二卷  上源專祿 등 編修

                      支那佛敎の 硏究     常盤大定  著

                      佛敎要義 上卷

                      佛敎要義 下卷

                      佛敎唯心論          村上專精   著

 

 

 

 

 

 

 

華嚴五敎判 硏究

 

目次

1. 序言             (3) 終敎

2. 五敎判           (4) 頓悟

 (1) 小乘敎         (5) 圓敎

(2) 大乘始敎      3. 結語

 

1. 序言

 

  華嚴宗은 「大方廣佛華嚴經」을 근거로 세운 宗門으로 멀리는 인도의 馬鳴보살과 龍樹살에서 비롯하였으며, 唐나라에서는 杜順和尙을 始祖로 하고 賢首大師에 의해서 華嚴學을 成하기에 이르렀다. 賢首는 「五敎章」卷上에 法에 나아가서 敎를 다섯 가지 종류로 나누고理에 나아가서 宗을 열 가지 종류로 분류하였다. 부처님이 설한 一代時敎에는 勝劣과 深淺의차별이 있다. 그 所詮의 法이 勝劣과 深淺이 있음에 따라 能詮의 敎相을 분별해서 체계적으로 순서를 정한 것을 五敎라고 한다. 또 그 敎中에 있는 所詮의 理는 수많은 근기들이 각각 실천하는데 있어 주장하는 바가 다르며 宗要로 하는 바가 다른 데 따라서 一代佛敎를 분류한 것을 十宗이라 한다. 이 五敎十宗中 우선 五敎判에 대한 것을 간략히 말하고자 한다.

  五敎란 法相宗의 三時敎나 天台宗의 五時敎와 같이 年月의 차제를 세운 것이 아나라 天台의 化法四敎와 같이 所詮의 法義가 깊고 옅음에 따라서 분류한 것이다 즉 五敎十宗의 敎判은 賢首大師가 지은 「華嚴五敎章 」에 의한 학설로 「聖敎萬差 要唯有五 一. 小乘敎 二. 大乘始敎 三. 終敎 四. 頓敎 五. 圓敎」라고 하여 석존일대의 불교를 五敎로 판단하여 구별하였다.

 

2. 五敎判

      (1) 小乘敎

  小乘敎란 부처님이 성도하신 후 第二七日에 일체중생을 위해서 華嚴經을 설함에 마치 해가 뜸에 먼저 高山을 비추는 것과 같이 文殊 普賢 등의 대근기만이 이것을 이해하고 法益을 얻었다. 그러나 그 法이 너무 심오하녀 근기가 하열한 聲聞, 緣覺 二乘은 會座에 있었으나, 그 이치를 증득하지 못한 것이 마치 귀머거리와 같고 벙어리와 같았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방편으로서 그 심오한 敎의 정도를 낮추어 옅은 근기들이 이해하기 쉬운 법을 설해서 이러한 하근기들을 교화하였다. 따라서 그 설한 바 법이 극히 저열해서 다만 我空의 이치만을 설하고 法空의 이치를 설하지 않았으므로 이를 愚法小乘 즉 법에 어리석은 小乘이라 하였다. 小乘二十部중에도 大衆部와 같이 法空을 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분히 我空만을 설하고 三世實有 法體恒有를 주장하므로 모든 소승교는 이 가운데 포함된다. 이 敎에서 설한 法相은 五位七十五法으로서 일체를 섭하고 見惑241)과 思惑242)의 二惑을 끊고 三界內 의 分

 

段生死를 여의는 것을 구경목적으로 한다. 「四阿含」등의 經과 諸部의 律과 「六足論」「發智論」「婆沙論」「俱舍論」등의 설한 내용이 이 敎中에 속한다.

 

      (2) 大乘始敎

  大乘始敎란, 小乘敎에서 점차로 大乘敎에 들어가는 최초의 門으로서 다음의 終敎에 대해서 大乘의 初門이 되므로 이것을 始敎라고 한다. 그런데 이 始敎에는 相始敎243)와 空始敎244)의 二種이 있다. 相始敎란, 「解深密經」「瑜伽論」「唯識論」등에 설한 법문으로 五位百法을 세워 諸法의 性相을 결택하였으나 철저하게 眞如의 理性을 설하지는 못하였다. 즉 眞如는 諸法의 所依가 될 뿐이지 凝然不變해서 결코 諸法이 되지 않는다 하며, 또한 一切衆生 悉皆成佛을 설하지 않고 五性各別을 세워 一類의 중생은 영구히 생사를 出離할 기회가 없다고 주장한다. 法相宗에서 설한 법문이 이에 해당한다. 空始敎란 「般若經」「中論」「百論」등의 經論에서 설한 법문으로서 여기에서는 有所得의 見을 파하고 一切皆空의 뜻을 설하여 諸法의 實相은 言語와 思慮를 초월한 것임을 보였으나 아직 大乘究竟의 이치를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空始敎라 한다. 三論宗의 설한 바가 여기에 해당한다. 즉 法相宗과 같이 差別의 相을 세운 始敎를 相始敎라 하며 三論宗과 같이 相을 파하는 것을 空始敎라 한다. 이러한 것은 大乘보살의 敎이기는 하나 五性各別을 주장하고 成佛 不成佛의 차별을 세워 아직 悉皆成佛의 妙理를 나타내지는 않았기 때문에 초보의 大乘敎란 의미에서 始敎라고 하며 아직 大乘의 實義를 설하지 않았으므로 權敎라고 한다.

 

      (3) 終敎

  終敎란 앞의 始敎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大乘不空의 뜻을 밝히고 일체중생이 다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 大乘終極의 敎이므로 이 이름을 세운 것이다. 앞의 것이 權敎임에 대해서 이는 實敎이다. 앞의 始敎에서는 眞如를 철저하게 설하지 않았는데 반하여 終敎에서는 眞如의 이치를 보다 철저하게 말하였다. 즉 眞如에는 不變과 隨緣 두 가지 뜻이 있다. 緣을 따라 萬法을 전개하는 것을 隨緣眞如라 하며, 眞如는 萬法의 實體로서 결코 그 自性을 잃지 않고 절대평등의 性德을 갖춘 것을 不變眞如라고 한다. 이와 같이 眞如에는 不變과 함께 隨緣의 德이 있다. 그러므로 萬法과 眞如는 圓融無碍해서결코 분리됨이 없다고 설하는 것이 眞如緣起의 취지이다. 理事不二 性相融通을 말하고 五性各別을 배척해서 일체중생이 모두 성불한다는 뜻을 말하고 주로 法性을 설해서 眞如緣起說을 세워 眞妄和合의 阿黎耶識을 말하였다. 그러나 아직 수행의 行位에 차제계급을 세워 優劣과 深淺을 보이므로 頓敎에 비교하면 아직 漸敎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즉 始終二敎는 마치 菴摩羅果가 단박에 익지 않고 서서히 익는 것과 같으므로 漸敎라 한다. 「楞伽經」「勝 經」「起信論」「空性論」등에 설한 바 내용이 이에 해당한다.

 

 

      (4) 頓敎

  頓敎란 단박 속히 깨닫는 敎門으로 거울 속에 영상이 일시에 문득 나타나는 것과 같이 行解와 理性을 일시에 나타내는 교이기 때문에 수행의 階位를 베풀지 않으며 차별의 法相을 설하지 않는다. 일체의 분별은 결국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망상이 있는 동안은 여전히 범부이고 망상을 그치면 곧 佛이니 따라서 「一念不生卽佛」이라고 말한다. 언어로서 일체사물에 차별을 세워 수행의 階位를 보는 것과 같은 것은 모두 妄念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서, 만약 妄念을 버리면 일체법의 차별도 없어져서 몰록 成佛한다고 하므로 앞의 始終二敎의 漸敎에대해서 頓敎라고 한다.

「寶積經論」에 「이러한 언설을 여윈 것을 頓敎修多羅라고 이름한다.」한 것을 근거로 頓敎의 이름을 세운 것이다. 「維摩經」의 無言의 默理라든가 「起信論」의 離言眞如와 達磨의 以心傳心의 법문과 같이 文字言句에 의하지 않으며 수행의 순서차제를 정하지 않고 단박에 불성을 깨달아 成佛한다고 설하는 것을 頓敎라고 한다.

 

      (5) 圓敎

  圓敎란 華嚴經, 法華經이 설한 바 圓融無碍 完全圓滿한 最上勝의 敎이다. 이것을 三乘敎에 대해서 一乘敎라 하고 菩薩乘에 대해서는 佛乘이라 한다. 賢首大師는 이 一乘敎를 別敎一乘과 同敎一乘의 二種으로 분류하였다. 즉 華嚴宗은 특히 圓融不思議한 법문으로 三乘敎인 法相과 三論 등과는 전혀 다르다는 이유로 이것을 別敎一乘이라 하며, 法華經을 근거로 한 天台宗은 三乘을 열어서 一乘에 들어간다는 이유에서 이것을 同敎一乘이라 하였다. 圓敎에서 주로 하는 것은 別敎一乘으로서 이 敎는 저 三乘에서 설한 바 淺近한 교를 완전히 초월한 부처님의 근본교리이므로 別敎一乘이라 한다. 그래서 別敎一乘을 同敎一乘보다 수승한 것이라 하여 華嚴을 天台의 上位에 두어 華嚴宗을 불교중 최상이며 최극의 교라 하였다. 이것을 비유하면 화엄은 수미산과 같고 나머지 교는 群山과 같다. 그리고 圓敎란 이름의 근거는 「華嚴經入法界品」에 선재동자가 제39의 선지식인 願勇光明守護衆生夜天에게 법을 받은 후 夜天의 법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夜天이 답변하기를 隨應化覺悟衆生長養善根이라는 法門인데, 그 유래는 과거세에 法輪音聲虛空燈如來가 당시 국왕의 태자인 善伏 등을 위해서 연설한 圓滿因緣修多羅의 법문을 한 데서 圓敎란 이름을 세우게 된 것이다.

 

       3. 結論

  이상의 五敎를 大小乘으로서 분별하면 初一은 小乘敎이며 後四는 大乘敎이다. 大乘敎中 前三은 三乘敎이며 後一은 一乘敎이다. 中間三敎 가운데 前의 二 즉 大乘始敎 終敎는 漸敎이며 후의 一은 頓敎이다. 漸敎中 前者는 權敎이며, 後者는 實敎이다. 그리고 華嚴을 根本法輪이라 하고, 鹿野苑 이후 法  이전을 枝末法輪이라 하며, 法 를 攝末歸本法輪이라 하여, 一代佛敎를 三法輪으로 섭한 것은 華嚴이 그중 가장 수승하여 일체의 교법을 유출하는 본원임을 보인 것이다.

  賢首는 五敎十宗의 敎判을 세워 화엄경에서 설한바 敎義가 불타의 근본정신임을 역설하고 일대불교를 그 입장에서 정리하였다. 이 五敎는 杜順의「五敎止觀」에 實際灌法의 순서로 一. 法有我無門 二. 生卽無生門 三. 事理圓融門 四. 諦觀雙絶門 五. 華嚴三昧門 등의 五門을 계승해서 敎의 가치를 판단한 것으로 사실은 杜順에 앞서 慧光이 漸, 頓, 圓 의 三敎로서 一代佛敎를 분류하고 華嚴을 그 중 圓敎라 한 데서 비롯하여 賢首의 五敎判도 그 기원을 이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五敎判은 法 즉 能詮의 敎를 五種으로 분류한 것이라고 한다면, 十宗判은 理 즉 所詮의 宗趣를 十種으로 분류한 것이라 하겠다.

 

                              參 考 文 獻

 

                  佛敎の 理解と 展開    伊藤康安 著

                  佛敎各宗綱要          山崎精華 著

                  佛敎學槪論            金東華 著

                  華嚴五敎章講義        湯次了榮 著

                  佛敎要義 卷下         深浦正文 著

                  華嚴學槪論            金芿石 著

 

 

 

 

 

 

 

 

 

 

 

 

 

 

 

 

 

 

 

 

 

 

 

 

 

 

 

 

 

 

 

 

華嚴十宗判 硏究

 

目次

1. 序 言

2. 十宗判

 (1) 我法俱有宗   (2) 法有我無宗

 (3) 法無去來宗   (4) 現通假實宗

 (5) 俗妄眞實宗   (6) 諸法但名宗

 (7) 一切皆空宗   (8) 眞德不空宗

 (9) 相想俱絶宗  (10) 圓明具德宗

3. 結 語

 

 

  1. 序言

 

  華嚴宗은 「華嚴經」을 所依로 해서 세운 종파인데 인도의 馬鳴과 龍樹에서 비롯하였으며, 唐나라에서는 杜順을 始祖로 智儼을 거쳐 賢首大師에 의해서 華嚴學을 大成하였다. 불타께서 성도한 후 第二七日에 菩提樹下 寂滅道場을 비롯하여 七處 九會(혹은 七處八會 혹은 十處十會)에 걸쳐 설법하였으며, 그 내용은 이른바 海印三昧 一時炳現의 眞相을 개시하였다.

  賢首는 華嚴에 설한 敎義가 불타의 근본정신임을 역설하고 一代佛敎를 五敎와 十宗으로 판정하였다. 五敎判이 法에 나아가서 能詮의 敎를 五種으로 분류한 것이라면, 十宗判 은 理에 나아가서 所詮의 宗趣十種으로 분류한 것이다. 불타께서 설한 일대시교에는 勝劣, 深淺의 차별이 있다. 그 所詮의 法이 勝劣, 深淺이 있음에 따라 能詮의 敎相을 분별해서 체계적으로 차제를 세운 것을 五敎라고 한다. 敎中에 있는 所詮의 理는 많은 근기들이 각각 실천하는데 주장하는 바가 다르며 宗要로 하는 바가 다름에 따라 일대시교를 분류한 것을 十宗이라 한다. 賢首가 「五敎章」卷上에「就法分敎 以理開宗」이라 한 것이 바로 이 五敎十宗이다. 五敎十宗中 五敎判에 대한 것은 앞의 論文에서 이미 서술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十宗判에 대한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2. 十宗判

 

      (1) 我法俱有宗

  我와 法이 함께 있다고 설하는 宗으로서 人天의 世間法과 出世間法의 두 가지가 있다. 第一에 人天乘은 五戒十善을 설하는 세간법으로서 五戒를 가지므로 人果를 얻고 十善을 닦아 天果를 얻어 三惡道의 고통을 면한다. 이 人天乘은 극히 둔한 근기를 위하여 小乘敎에서 因果의 일반을 설한 것으로 「提謂經」과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된다. 第二에 出世間法을 설하는 것은 小乘中 犢子部, 法上部, 賢胄部, 正量部, 密林山部 등이 이것이다. 여기서는 三聚의 法을 세우는 바 (1) 有爲聚는 有爲의 諸法 즉 色心의 諸法이요. (2) 無爲聚는 擇滅 , 非擇滅,

 

虛空의 三無爲요. (3) 非二聚는 我가 곧 이것이다. 聚란 積聚의 뜻으로서 前二는 法我이며 後一은 人我이다. 또 五法藏을 세우니 (1) 過去 (2) 現在 (3) 未來 (4) 無爲 (5) 不可說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三은 有爲聚를 연 것이요, 不可說은  前의 非二聚 즉 我로서 有爲라고도 할 수 없고 無爲라고도 할 수 없으므로 不可說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五法藏이나 三聚는 다만 서로 見解가 다를 뿐이요. 我法俱有를 세운 것은 동일하다. 같은 小乘이라 할지라도 人我를 세움으로써 天台는 이것을 불법에 붙은 外道라고 꺼리었으나 犢子部 등이 세우는 我는 實我의 뜻이 아니라 法我의 뜻이다. 왜냐하면 犢子部 등은 阿羅漢果에 이른다고 말하므로 그 我는 卽蘊의 我 혹은 離蘊의 我와 달라서 非卽非離蘊의 我로서 法體가 상속하는 편을 지칭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我法俱有라는 명칭은 부적당한 것 같으나 다만 저들이 말하는 바를 따라 我法俱有라고 한다.

 

      (2) 法有我無宗

  法은 三世에 뻗쳐서 實有하지만 我는 無라고 설하는 것으로 說一切有部를 비롯한 雪山部, 多聞部 및 化地部의 末計가 이에 해당한다. 일체의 제법을 七十五法으로 분류하고 이것을 二種, 四種, 五種에 攝해서 설한다. 먼저 二種의 所攝이란 名과 色의 二種을 섭한 것으로서 이것은 五蘊을 잡아서 말한다면 受, 想, 行, 識의 四를 名이라 하고, 처음의 色法을 그대로 色이라 한다. 名은 七十五法을 잡아서 말한다면 心王 心所 등은  無形의 것으로 단지 名으로써만 표하므로 名이라 한 것이다. 이것은 五蘊을 잡아서 분류한 것이므로 無爲는 攝하지 않는다. 다음에 四의 所攝이란, 三世와 無爲이다. 즉 有爲門 無爲門에 나아가서 有爲門을 열어서 三世를 세운 것이다. 五位中 色法, 心法, 心所法, 不相應法의 七十二法은 有爲에 해당하고 後의 三은 즉 無爲法에 해당한다. 또 五의 所攝이란 一. 心法에 六識이 있으나 모두 心王의 一로 한다. 二. 心所有法에 四十六이 있고 三. 色法에 五根, 五境, 無表色의 十一이 있고 四. 不相應法에 十四가 있고 五. 無爲法에 擇滅, 非擇滅, 虛空의 三無爲가 있다. 이와 같은 일체법이 모두 實有하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른바 三世實有 法體恒有라는 것이다.

 

      (3) 法無去來宗

  현재의 諸法만이 有로서 과거는 法이 已滅의 位이고 미래의 法이 未起의 位이므로 다같이 法體가 없다고 설하는 것으로 大衆部, 鷄胤部, 制多山部, 西山住部, 北山住部, 法藏部, 飮光部 등이 이에 속한다. 즉 현재와 無爲法만이 實體가 있다고 하고 과거 미래는 體用이 함께 없다고 하는 것이다. 十宗의 차제가 점점 깊어져서 앞의 薩婆多部 등에서는 과거는 이미 작용이 소멸했고 미래는 작용이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法體는 三世에 뻗쳐서 항상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하여 이 宗에서는 다시 한걸음 나아가 과거 미래는 體用이 함께 없다고 하니 자연 一分法空의 의미를 포함한 것이다.

 

      (4)現通假實宗

  앞의 法無去來宗이 現在法은 모두 實有라고 설한데 대해서 다시 한걸음 나아가 현제법 중에도 假와 實이 있다고 설하는 것으로 說假部등이 이에 속한다. 說假部란 世出世의 價와 實을 설하므로 說假部라 한다. 過去法 未來法의 體가 없을 뿐만 아니라 現在法中에도 五蘊의 法은 실체가 있으나 十二處 十八界의 法은 假라고 한다. 이것은 五蘊은 法自性의 차별이 있으나 十二處 十八界는 五蘊을 바라보고 베푼 것으로 상대하여 假位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경우에 따라 諸法의 假實

 

이 일정하지 않다. 가령 色法도 五蘊에 있을 때는 實이나 十二處 十八界에 나아갈 때는 假가 된다. 저 「成實論」 등의 經部의 別派도 또 이 類에 해당한다.

 

      (5) 俗妄眞實宗

俗諦는 허망하고 眞諦는 진실이라고 설하는 것으로 說出世部 등이 이에 해당한다.  說出世部의 명목은 俗諦의 세간법은 假法이므로 說이라고 하며 眞諦의 出世間法은 진실하므로 出世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有漏의 世間法은 顚倒에서 일어나는 허망한 法이므로 다 假이며 無漏의 出世間法은 허망한 法이 아니므로 진실하다. 즉 苦集二諦인 세간의  因果는 假요, 滅道의 二諦인 出世間의 因果는 眞實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6) 諸法但名宗

  世出世  有漏無漏의 一切諸法은 다만 이름뿐이요, 實有가 아니라고 설한 것으로 一說部가 이에 해당한다.  一說部란 일체법이 다만 假名이라 설하므로 一說이라 한다. 즉 일체의 제법은 오직 假名만이 있고 도무지 無體이므로 空한 것이다.  空이라고는 하나 이는 析空이므로 大乘始敎의 體空과는 온전히 같지 않다.  그런데 始敎에도 直心의 菩薩과 廻心의 二乘이 있는 바 直心의 보살은 바로 體空을 증득하나 廻心의 二乘에 통하는 뜻이므로 「華嚴五敎章」에 「此通初敎之始」라고 하였다.

 

      (7) 一切皆空宗

  大乘始敎中의 空始敎에 해당하고 일체법은 다 眞空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眞空이란 我法二空이 모두 體空이라 관하므로 眞空이라 한다.  즉 妄情假托에 의해서 분별하는 바의 空이 아니라 當體가 그대로 空이다. 「般若經」 「中論」「百論」「十二門論」 등에 설한 내용이 이것이다.  이제 이 賢首의 十宗判中  前八宗은 慈恩의 것을 참고하였다.  慈恩은 자기의 宗을 最極位로하여 應理圓實宗을 第八位에 두었으나, 賢首는 空有의 二始敎中 空始敎만을 들고 相始敎를 생략하고 應理圓實宗을 眞德不空宗으로 고쳐 終敎의 위치에 둔 것은 性相圓融의 이치에 의한 것이다.

 

      (8) 眞德不空宗

  이는 賢首五敎中 終敎에 해당하며「楞伽」「維摩」 등의 여러 경전에 眞如는 恒沙의 德을 갖추고 일체제법은 모두 眞如로부터 緣起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眞如隨緣不空의 뜻을 말한 것이다.  「五敎章」에「如來藏實德故」라 한 것은 眞德의 뜻을 설명한 것으로, 如來藏이란 眞如가 無明에 덮인 것을 말하며, 이 眞如에는 무량한 공덕이 갖추어져 있어 제법이 이로부터 나타난다.  「五敎章」에「有自體故具性德故」라 한 二句는 不空의 뜻을 말한 것으로 體에는 淸淨不空의 自體를 소유하고 相에는 恒沙에 性功德을 갖추고 있으므로 不空이라 하는 것이다.

 

      (9) 相想俱絶宗

  相은 所緣의 境이고 想은 能緣의 心이다. 이 相과 想이 함께 끊어진 宗인데, 다시 말하면 無念無想의 언어도가 끊어진 경계가 되어 일체의 사상과 설명이 끊어진 곳에 나타난 이치로서, 이는 五敎中의 頓敎에 해당하며 「維摩經」의 不二의 法門과 같은 것이다.

 

 

      (10) 圓明具德宗

  事事無 法界의 法은 一多相卽한 無盡緣起의 法이므로 낱낱의 事法은 모두 원만하게 일체공덕을 구족하고 있으므로 圓明具德이라 한다. 이는 別敎一乘으로서 主伴이 具足하고 無盡自在함을 나타내는 법문이다.

 

3. 結語

 

  이상에서 말한 十宗中 (7), (8), (9), (10)의 後四宗은 前六宗이 小乘임에 대하여 大乘이다. 그러나 賢首는 小乘敎, 大乘始敎, 終敎, 頓敎, 圓敎의 五敎에 의해서 차제를 세우고 淸凉은 第七, 三性空有宗 第八, 眞空絶相宗 第九, 空有無 宗 第十, 圓融具德宗으로 차제를 세우고 있다. 賢首는 교리의 깊고 옅음과 融會를 취지로 하고, 淸凉은 四法界의 순서와 판결을 要旨로 하였다.

  五敎十宗을 대조하여 본다면 十宗中 前六宗은 五敎中의 小乘敎에 해당하며, 小乘에 二十部가 分派되어 있는 것을 이와 같이 六宗에 統攝해서 배열한 것이다. 또 後의 四宗은 차례로 大乘始敎, 終敎, 頓敎, 圓敎에 배대할 수 있다. 이리하여 얕은 곳에서부터 깊은 곳으로, 낮은 데서부터 높은 데로 나아가 一代佛敎의 諸說을 배열해서 최후의 圓敎 즉 圓明具德宗으로써 그 眞髓에 달하므로 華嚴大經의 중중무진한 심오한 뜻을 顯現하였으니 실로 本宗判敎의 취지가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參考文獻

 

                     大藏經講座 華嚴五敎章講義  湯次了榮 著

                     佛敎各宗綱要 上卷          山峙精華 著

                     華嚴學槪論                 金芿石 著

                     佛敎要義 卷下              深浦正文 著

                     華嚴の 硏究                鈴木大拙 著

 

 

 

 

 

 

 

 

 

 

 

 

 

 

 

 

六朝初期의 三大敎家

                           

                           

 

目  次

1.緖言       4.寇謙之

2.鳩摩羅什   5.結語

3.慧遠

 

 

1. 緖言

 

中國의 文明史中에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또는 민족적으로 東晋시대만큼 혼란한 시기는 없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이 시대만큼 의미깊은 중요한 시대도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종래의  中國文明은 이 시대를 계기로 일대변화를 가지고 온 점으로 보아 문명의 전환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中國 민족사상의 二大系統으로 儒敎와 老莊을 들지 않을 수 없다. 儒敎의 도덕은 漢末이후에 너무나 형식적이고 구속적이어서 시대의 지도원리가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틈을 타서 魏晋시대에 이르러 老莊의 虛無思想이 대두하여 일시적인 반동이 없지 않았으나 역시 시대를 지도하는 指針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리하여 儒敎의 입장이나 老莊의 입장으로 보아서 일대전환을 하지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思想이 고갈한 漢末에 이르러 안으로는 道敎가 일어나고 밖으로는 佛敎가 들어오게 되어 東晋末에 이르러서는 道敎는 이미 開敎시기를 지났고, 佛敎는 初轉시기를 지나 發展一路에 있었다. 문명전환의 직접적인 원인은 실로 新思想, 新宗敎로서 新時代의 갈앙의 표적이 되는 것은 佛敎였었다. 五胡十六國의 亂은 中國 역사상 가장 큰 난세시대를 초래하는가 하면 中國民族에 있어서 크나큰 동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印度文明과 中國文明과의 접촉으로 오는 문제와 胡民族과 漢民族과의 접촉으로 오는 갈등과의 교차점에서 적당히 新文明을 섭취하여 中國文明에 일대진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六朝 이후의 新文化는 이 懊惱 후에 태어난 新生兒와 같은 존재였었다. 이 懊惱는 南北朝를 통하여 계속되고 隋唐에 이르러 새로운 조직을 하여 終局을 고하게 되었다. 隋唐시대는 인도문명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성립한 것으로 대개 中國 3000年 역사상 큰 光彩를 띠게 되었다. 胡漢 兩民族의 대표자로서 鳩摩羅什과 慧遠을 들 수 있고, 또한 印度文明과 中國文明의 대표자로서 慧遠과 寇謙之를 들 수 있다. 鳩摩羅什과 慧遠과 寇謙之는 실로 文明轉換期에 있어서 三大敎家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그중 寇謙之는 舊文明과 新信仰을 대표하는 인물로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여 文明의 전환을 촉진하는데 빠질 수 없는 임무를 수행했었다.    

                           

2.  鳩摩羅什

 

胡民族史中에서 문명전환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前, 後의 二泰시대이다. 前泰의 符堅

 

은 맹렬하게 新文明인 佛敎를 받아들여 이를 널리 선포하였다. 자기의 넓은 판도에 유포했을 뿐만 아니라 멀리 한국에까지 傳道僧을 보내어 佛敎를 弘布하였다. 그리고 유명한 학자를 자기 나라에 초빙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증거로는 十萬이나 되는 大軍을 내어 남방의 襄陽을 쳐서 戰勝의 결과로 道安을 얻어 돌아온 사실이라든가, 또한 道安의 進言에 의해 다시 멀리 七萬의 군사를 내어 呂光을 장군으로 大沙漠 西北의 龜玆國을 친 후에 羅什을 戰功으로 데리고 온 것과 같은 예는 동양역사상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이와 같이 한 沙門이나, 한 사람의 學者를 얻기 위해 군사를 동원한 것은 어느 한면으로 보면 매우 난폭한 처사이나 다른 일면으로 볼 때는 治國安民의 공덕을 얻었었다. 羅什은 만나기 어려운 학자였으며 그야말로 출중한 학자였다. 이러한 학자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 새로운 문명을 동경하는 秀才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 수가 3000명에 이르렀다 하니, 그의 인격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3000門徒중 四天王이라고 할 수 있는 四哲이 있었으니 이른바 道生, 僧肇, 道融, 僧叡 등이다. 四人중 남방에서 온 道生과 북방의 僧肇는 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僧肇는 老莊의 사상에 만족하지 않고 「維摩經」을 보고 佛敎에 귀의한 사람으로 이 시대의 학자들은 대개 이러한 經路를 취하고 있다.

羅什은 長安에 살고 있으면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廬山의 慧遠과 道交가 깊었다. 慧遠은 물론 羅什을 존경하였고 羅什도 또한 慧遠에 대해서 특별한 敬意를 표하였다. 이 두 사람의 제자인 曇邕이란 사람이 있어 끊임없이 兩者의 사이를 왕복하면서 그들의 교제를 원할하게 하였으며, 羅什이 새로 번역한 책이 있으면 바로 먼저 이것을 慧遠에게 보내어 자문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당시 新宗敎, 新思想, 즉 新文明의 중심지는 北의 長安과 南의 廬山의 두곳이었다. 다시 말하면 長安은 학문의 중심지이고 廬山은 宗敎의 중심지였으니, 長安에는 羅什이 있었고, 廬山에는 慧遠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동시대의 인물로서 그들이 입적한 연대도 삼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3. 慧遠

 

慧遠은 당초에 儒敎學者였으나 이 儒敎가 인생의 복잡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儒敎를 버리고 老莊의 道敎로 들어왔다. 또한 老莊에서도 결국 安心入道를 얻지 못하여 드디어 老莊을 버리고 佛敎에 귀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慧遠에게는 儒敎도 있었고 道敎도 있었고 그 위에 또한 佛敎도 있었다. 羅什도 慧遠에게는 경탄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오만한 桓玄도 王者의 위엄으로써도 그의 앞에서는 굴하지 않을 수 없었다. 才氣가 넘친 謝靈雲도 그 앞에서는 경건하게 머리를 숙였으며 당대의 文章인 陶淵明도 그에 대해서는 예를 다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慧遠의 人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慧遠은 특히 羅什이 번역한 「十誦律」을 엄중히 실행하였으며 廬山에 覺賢을 맞이하여 그가 번역한 「禪經」을 修得하였다. 그러므로 진실한 戒와 定은 廬山에서 일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慧遠에 의해서 唱導된 白蓮社의 念佛은 실로 中國佛敎史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 크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慧遠은 廬山에 은거하기 三十餘年 동안 한번도 下山 하지 않고 緇素 123人과 함께 아미타불을 모시고 白蓮社를 結하고 念佛을 수행하여 西方往生을 발원하였다.

慧遠 이전의 佛敎는 老莊의 虛無思想에 조화하려고 하는 遊戱的이며 隱遁的이었던 것이 慧遠에 의해서 비로소 體驗的이며 創造的인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전에는 死佛敎, 風流佛敎

 

였던 것이 이에 이르러 비로서 活佛敎, 實際佛敎로 전환되었다. 이 活佛敎야말로 새로운 시대에 지도원리로써 이 원리에 의해서 文明의 일대전환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慧遠의 일생은 마침내 중국사상의 변천을 표현하였으니 後漢의 儒敎主義에서 魏晉의 老莊主義가 되고 그런 후에 南北朝의 佛敎主義가 된 것은 그대로가 慧遠一身의 生活經路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三敎에 통달한 慧遠의 강설은 다른 사람이 생각도 미치지 못하는 새로운 思想임에 틀림 없었던 것이다. 白蓮社中의 儒敎學者인 雷次宗의 敎學은 바로 慧遠의 思想을 계승한 것이다.

 

4.  寇謙之

 

寇謙之는 崇山에서의 수도를 통하여 상당한 靈感的 體驗을 얻은 사람으로 道敎敎會의 조직자로서 유명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 조직의 主義方法은 佛敎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寇謙之에 의해서 國敎가 성립되었다하니 國敎라고는 하나 敎會만을 말한 것이지 아직 깊은 敎理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國敎가 성립된 이상 비록 佛敎에서 배운 바가 있었다 하더라도 佛敎敎團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남방에 陸修靜이라고 하는 道敎學者에 의해서 사상적으로 佛敎와 道敎 사이에 논쟁이 있었으나 북방의 寇謙之와는 사상적인 다툼이 아니라 종교적, 민족적인 대립으로 드디어 武斷的인 廢佛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즉 司徒 崔浩라고 하는 사람이 寇謙之를 信해서 魏의 太武帝로 하여금 佛敎탄합을 단행케 한 것이다. 太武帝가 卽位하자 道敎에 심취하여 道士 寇謙之의 말을 듣고 불상과 경전을 태워버리고 沙門의 還俗을 명하여 일체의 불교행사를 금하는 등 排佛政策을 실시하였으니 中國佛敎史上 최대의 法難이라 하겠다. 이른바 三武一宗의 法難이라 하는 전후 四回에 걸친 廢佛사건이 행하여졌다. 第一回는 앞에서 언급한 北魏 武帝時(446)에 불경과 불상 등을 불사르고 스님들을 생매장하여 죽인 것, 第二回는 北周 武帝時(574)에 道敎, 佛敎를 폐지하고 사원 4만여개를 王公에게 주고 승려와 도사 4만여명 군민에 충당시켰고, 第三回는 唐나라 武宗時(843)에 사원 4만여개를 헐어비리고 승려 26만명을 환속시켰으며, 第四回는 後周 世宗時(955)에 僧尼를 사사로 득도시키는 것을 금하며 부모를 모실 이가 없는 사람의 출가를 허락치 않고 나라에서 준 간판이 없는 사찰을 폐하고 佛像, 鍾 을 녹여서 돈을 만드는 등 廢佛을 행하였다. 이러한 廢佛이 자못 극심하여 뜻있는 불교도로 하여금 憤死케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宗敎의 생명이 있는 한 武力이나 政治의 압박을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도리어 倍加의 세력으로써 復活케 하는 것이니 北魏의 廢佛이 그러하였다. 즉 武帝가 죽고, 다음 文成帝가 卽位하자 다시 佛法復活의 詔勅을 내려 加一層의 세력으로써 중흥시켰다. 이러한 자취는 大同雲岡의 石佛寺와 洛陽龍門의 石窟과 甘肅省의 燉煌石室 , 千佛洞石窟 등을 통하여 역력히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맹렬하게 일어난 國敎徒의 排佛운동도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佛敎는 그 후 더욱더 실력을 발휘하여 隋, 唐시대에는 黃金時代를 이루었다. 또한 隋, 唐은 중국문명의 전성기라 할 수 있으니 이는 그 배후에 佛敎의 思想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 結語

 

中國三千年 역사에 있어 실로 漢民族의 위협이 있었던 시대는 東晋末의 위기라고 하지 않

 

을 수 없다. 사상과 신앙과 민족상에 있어 극심한 위기에 처해 있었으므로 漢民族 興亡의 문제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혼란기에 佛敎는 실로  曙光으로서 군림하여 새로운 文明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 道安은 識見이 탁월하여 時流에서 빼어난 학자였다. 魏晋시대에 성행했던 老莊者流의 淸談에 만족하지 않고 老莊을 여의고 佛敎에 귀의한 道安은 다음 시대의 佛敎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그리하여 전환하는 새로운 문명에 대해서 道安이 代父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면, 道安의 방침에 따라 자기의 체험을 통해서 새롭게 자기대로의 佛敎를 선양한 慧遠은 새로운 文明에 대해서 生母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慧遠에게 새로운 材料를 공급해서 더욱 더 進步를 도운 羅什은 새로운 文明에 대해서 乳母와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대전환을 한 新文明은 실로 道安, 慧遠, 羅什 등에 의해서 산출되었던 것이다.

 

 

                              參考文獻

 

                支那佛敎の 硏究        常盤大定 著  

                續支那佛敎の 硏究      常盤大定 著

                佛敎要義 卷上          深浦正文 著

                印度支那佛敎小史       境野黃洋 著          

 

 

 

 

 

 

 

 

 

 

 

 

 

 

 

 

 

 

 

 

 

 

 

 

 

阿賴耶緣起說에 關하여

 

目 次 

1. 緖 言                  4. 阿賴耶識의 三藏義

2. 諸識轉變의 意義        5. 結 語

3. 阿賴耶識의 意義

 

1. 緖言

 

 唯識 法相宗에서는 萬法生起의 本源을 우리들 주관의 根本識인 阿賴耶識이라고 보았다. 즉 有情과 無情 등 일체의 현상은 모두 우리들 각자의 阿賴耶識으로부터 變現된 영상에 불과하다고 설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賴緣起說인데 이를 일러서 萬法唯識 心外無別法이라고 한다.

 이 唯識思想은 어느때부터 누구에 의하여 흥기하였는가. 불멸후 900년경에 無着, 世親 등에 의하여 이 唯識思想은 드디어 한 學派를 구성하게 되었다. 無着은 처음에 化地部에 출가해서 수학한 후 중인도 아유사국 중각강당에서 수학하고 있었는데 불교교리에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그럴 때마다 無着은 彌勒보살을 친견해서 의혹을 풀어 주기를 항상 염원하였다. 그 결과 無着의 간청에 감동된 미륵보살은 四개월간 밤마다 중각강당에 하강하여 五大部論을 강설하였으니 이른바 「瑜伽師地論」「分別瑜伽論」「大莊嚴論」「辨中邊論」「金鋼般若論」등이다. 이때 無着보살은 미륵보살의 음성과 모습을 동시에 보고 들을 수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멀리서 음성만을 듣고 피차 異見을 갖게 되었다. 이에 무착이 대중을 위해서 다시 강설한 것이 유명한 「瑜伽師地論」 百卷이다. 이리하여 무착은 밤마다 미륵보살에게 들은 것을 낮 동안 다른 대중을 위해서 復講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재래의 唯識學起源說이다.

 이와 같이 唯識의 교리는 彌勒보살이 강설한 「瑜伽師地論」에 의거해서 無着이 「顯揚聖敎論」「阿毘達磨集論」 및 「攝大乘論」등에서 그 법문의 眞髓를 드날렸고, 다시 世親이 「唯識」 兩論 「百法明門論」 및 「攝大乘論」 등의 여러 곳에서 조직화하고 특히 世親의 「唯識三十頌」에 있어서 가장 체계적이고 大成해서  그 법문의 全貌를 형성하는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제  그 法門의 始祖를 구한다면 실로 無着이라 하겠으나, 만약 彌勒보살을 史的 人物이라 본다면 실질적으로 彌勒을 本宗의 始唱者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組織大成한 자로서는 世親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 범부는 무시이래로 迷情의 소견으로 망녕되이 心外에 實境이 있다고 집착해서 實我, 實法의 妄見을 품고 생사에 유전하는 과보를 받는다. 그러므로 이 二執을 버리고 二空에 들어가면 法界의 眞性을 체달해서 涅槃 菩提의 妙境界를 증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밝힌 것이 곧 唯識三十頌의 始終인 바 소위 賴耶緣起說인 것이다.

 

2. 諸識轉變의 意義

 

 賴耶緣起說에 의한다면 三界唯一心 心外無別法이라는 견지에 입각해서 一切萬有의 현상은

 

모두 우리들 각자의 阿賴耶識으로부터 變現한 바라한다. 그렇다면 一切萬法을 능히 變現하는 識은 어떠한 것인가. 이에 대하여 本頌에 「此能變唯三, 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 이라고 한 것이 能變의 識體를 가리킨 것이다. 만약 이 能變의 識體를 類別한다면 異熟識과 思量識과 了別境識의 三稱으로 요약된다. 그 실인즉 能變의 識體는 八種이 있다. 世親의 저서인 「大乘百法明門論」에

「心法略有八種 一, 眼識 二, 耳識 三, 鼻識 四, 舌識 五, 身識 六, 意識 七, 末那識 八, 阿賴    耶識」

이라고 하였으니, 앞에서 말하는 「異熟」이 여기에서 말하는 阿賴耶識이요, 또 「思量」은 末那識이며, 「了別境識」은 眼, 耳 등의 六識을 가리킨다. 이들 八種識體를 初能變 第二能變 第三能變의 三種으로 類攝해서 차례로 初能變은 第八阿賴耶識을 가리키고, 第二能變은 第七末那識을 가리키며, 第三能變은 眼識 乃至 意識을 가리킨다.

 眼識은 靑黃 등의 顯色과 長短 등의 形色을 식별하고, 耳識은 聲境을, 鼻識은 香境을, 舌識은 味境을, 身識은 觸境 등을 각각 식별하는 것으로, 이상의 五種識은 外境만을 대상으로 하여 감각한다. 이에 대해서 意識은 밖으로는 見聞覺知한 모든 사실을 緣慮하고 안으로는 有形無形, 有事無事, 過現未三世에 연관된 일체의 사물을 緣慮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일러 頓緣十八界 廣緣之意識이라 한다. 이사의 六識은 그 所緣의 대상이 각각 다르나 그 인식의 작용은 대략 동일하다. 각각 외부 혹은 내부의 대상에 있어서 그 대상만을 了別 즉 認識하므로 이를 了別境識이라고 한다.

 末那(Manas)는 意라고 번역하는데 그 이름으로 보아서는 전의 意識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앞의 第八意識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것은 原語 그대로 末那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 實體의 相異點을 말한다면 前者는 「意의 識」으로 依主釋이요 後者는 「意卽識」으로 持業釋이다. 「意의 識」이라 함은 末那識에 의지하는 識이라는 뜻이고, 「意卽識」이라 함은 그 識自體가 독립적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즉 第七識은 항상 思量하는 것이 그 특성인 바 무엇을 사량하느냐 하면 우리들 내부적인 心識을 향하여 항상 第八識의 見分을 대상으로 해서 이것이야말로 我의 주체라고 思慮量度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阿賴耶( laya)라 하는 것은 藏이라 번역하며 舊譯에서는 無沒이라고도 한다. 藏 이란 含藏의 뜻으로 우리들이 현실계에서 見聞覺知하고 또 思量分別하는 등 一切善惡의 種子를 이 阿賴耶識內 에 모두 含藏해 있다는 것이다. 이 八識中에서 第八阿賴耶識과 七轉識은 서로 因이 되고 果가 되어서 諸法變現의 활동을 계속한다. 즉 第八識은 七轉識이 熏習하는 모든 種子를 攝受包藏해서 하나도 유실하지 않고 유지상속시켜서 이로써 一切諸法의 親因緣이 되게 한다. 그리고 七轉識은 諸法의 種子를 熏附하는 동시에 또 諸法現實의 增上綠이 되어 만약 諸法이 變現하고 인연이 성취하게 되면 그것을 變現케 한다.

 第八識은 비록 아무리 諸法을 變現할 親因緣인 種子를 보존하고 있다 할지라도 諸法을 變現할 增上綠인 七轉識의 熏習力을 받지 않는다면 마치 땅에 종자를 뿌렸다 할지라도 태양의 빛과 열과 습기, 공기 등의 助力을 얻지 못하면 싹을 트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第八識이 근원이 되고 我의 主體가 되어 일체만법을 변현한다. 그리고 第八識은 能變의 근본이므로 本體이라 하고 前七識은 轉易 間斷 등이 있으므로 轉識이라 한다. 이상에서 말한 八識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眼識 ―

           耳識

           鼻識                   前五識 ―

  識 ―    舌識                            ― 了別境識 (第三能變) ―        

           身識 ―                                                             轉識

           意識                   第六識 ―

           末那識                 第七識      思 量 識 (第二能變) ―

       ―  阿賴耶識               第八識      異 熟 識 (第一能變)              本識

 3. 阿賴耶識의 意義  

 

 그런데 이 阿賴耶識을 알려고 하면 반드시 三相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三相이란 이 識이 갖추고 있는 세 가지 樣相으로서 自相, 果相, 및 因相이다. 自相이란 雜染法의 熏習에 의해서 雜染法을 생할 種子를 가진 것을 말하며, 因相이란 雜染法을 생할 因이 되는 것을 말하고, 果相이란 雜染法의 熏習에 의해서 상속해서 생하는 것을 말한다. 初阿賴耶識이란 이 識의 自相을 이름한 것으로 自相은 곧 阿賴耶識의 自體를 나타낸 이름이다.

 阿賴耶는 梵語 laya의 音表로서 藏이라 번역한다. 舊譯家에서는 阿梨耶라고 音表하고 無沒이라 번역한다. 阿를 知音으로 해서 Alaya로 보면 a는 無 laya는 滅盡 또는 沒失의 의미이므로 이것을 無沒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또 阿를 長音으로 해서 laya로 보면 依處 또는 容器 등의 의미가 있으므로 이것을 藏이라 번역해도 된다.

 이와 같이 阿賴耶와 阿梨耶는 新舊譯의 相違가 있으나 阿賴耶는 「唯識論」 등의 法相宗系의 책에서 쓰이고, 阿梨耶는 「起信論」 등의 法性宗系의 책에서 쓰이게 되었기 때문에 이 兩語가 교리상 다른 해석이 있는 것처럼 된 것이다. 여하간 이제 新譯家의 阿賴耶는 藏이란 뜻으로 번역된다. 藏이란 藏攝, 包藏, 含藏, 包攝 등의 의미로서 이 藏에 三義가 있으니 즉 能藏, 所藏 및 執藏이다.

 

4. 阿賴耶識의 三藏義

 

  本論卷二에

「與雜染互爲緣故(能藏, 所藏) 有情執爲自內我故(執藏)」

 라고 하였고 「同學 」卷二之三에

「受薰之邊 是所藏義也 持種邊是能藏也 我愛緣執 是執藏義也」

 라고 한 것이 즉 三藏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一. 能藏이란, 持種의 뜻으로서 능히 一切雜染法의 種子를 이 第八識中에 包藏해서 잃지 않는 것이 마치 庫藏에 여러 가지 物器를 수용하는 것과 같다. 雜染法이란, 有漏의 諸法을 가리킨다. 이 때에 能藏의 第八識과 所藏의 種子를 相望해서 이름한 것으로 種子는 所藏이고 第八識은 能藏이다. 이 種子는 阿賴耶識中의 세력으로서 一切 雜染法의 因이 되므로 阿賴耶識이 雜染法을 위해서 因이 된다고 할 수 있다.

 二. 所藏이란, 受熏의 뜻으로서 이 阿賴耶識이 一切 雜染法의 所熏所依가 되는 것이 마치 庫藏이 여러 가지 物器의 所依가 되는 것과 같다. 이 때는 第八識의 現行과 七轉識이 相望해서  이름한 것으로 七轉識은 能熏으로서 能藏이 되고 第八識은 所熏으로서 所藏이  된다. 이 의미에 있어서는 雜染法이 因이 되고 阿賴耶識이 果가 된다.

 

 이 관계는 또 現行의 雜染法과 第八識中의 種子와의 因果에 연결이 된다. 種子를 因으로 하고 現行을 果로 하는 것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지만 이 種子는 반드시 現行에 의해서 熏起하게 되므로 이 義邊에서는 現行이 因이 되고 種子가 果가 된다. 이 種子와 現行의 관계를 種子生現行, 現行熏種子, 種子生種子 三法展轉因果同時라고 칭한다. 이 現行熏種子의 관계에서 본다면 阿賴耶識은 所熏所依가 되고 雜染法은 能熏能依가 된다. 여기에서는 雜染法을 能藏이라 하고 第八識을 所藏으로 하는 것이다.

 三. 執藏이란, 我愛所執의 뜻으로서 이 阿賴耶識은 본래 집착의 뜻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간단함이 없이 항상 상속해서 有情의 주체가 되어 常一主宰의 實我와 같이 보임으로 第七識이 第八識의 見分을 實我라고 그릇 愛執하는 것이 마치 庫藏이 굳게 소유자에 의해서 執受되는 것과   같다. 이 때에 第七識과 第八識이 相望해서 세운 명목으로서 第七識은 能執이 되고 第八識은 所執이 된다.

 이상 三藏의 해석은 모두 有漏雜染法의 관계에 의해서 시설된 것이다. 왜냐하면 第八識은  다만 有漏位에만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無漏位에도 통하는 것이지만 阿賴耶라고 하는 명칭은 보살의 행위인 第七地에 이르기까지만 있고 第八地이상에서는 阿賴耶識의 명칭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三藏中 최후의 執藏의 뜻을 취해서 이 識을 藏 즉 阿賴耶識이라고 이름한다. 이상에서 말한 三藏의 관계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能藏(持種)                     第八識

       ―  能藏 ―

                  ―  (所藏                          種子)

                  ―  (能藏                          七轉識)

三藏 ―    所藏 ―

                  ―  所藏(受熏)                     第八識

                  ―  (能執藏                        第七識)

       ―  執藏 ―

                  ―  所執藏(我愛執藏)               第八識

 

 

 이와 같이 三藏의 뜻이 있으나 第八識의 自相은 執藏이다. 그런데 第八識은 위에서 말한 自相, 果相, 因相의 三相이 있음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第八識은 수행하여 번뇌가 없어짐에 따라 我愛執藏現行位와 善惡業果位와 相續執持位의 三位로 달라지는데, 이것은 범부로부터 불타에 이르기까지 수행하는 因位이다.

 一. 我愛執藏位는 보살의 七地이전까지 만약 二乘이면 有學의 聖者 및 一切異生으로서 第七識의 我執이 現行하는 기간을 말한다. 이 位에서는 이 識을 阿賴耶라고 이름하니 즉 執藏의 뜻이다. 보살의 第八地 이상 또는 二乘의 無學들은 第七識의 我執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이 이름이 없다. 즉 이 我執이 現行하는 位에 한해서 第八識을 阿賴耶라고 이름한다.

 二. 善惡業果位는 보살의 最後心 즉 金剛心의 보살까지이며 만약 二乘이면 無學果의 聖者까지와 일체중생의 善惡의 果報로서 第八識이 상속하는 기간을 말한다. 이 位에서는 第八識을 毘播迦(Vipaka)라고 이름한다. 毘播迦는 異熟이라 번역하니, 異熟이란 業果의 이름이다. 이미 佛果에 이르면 이 識이 순전히 善惡漏가 되어 業으로 감득한 無記가 아니므로 異熟識의 명칭은 없어지게 된다.

 三. 相續執持位는 일체의 異生 및 佛菩薩의 地位에 이르기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第八識中의 種子를 執受, 任持해서 失壞치 않고 상속하는 位를 말한다. 因位에 있어서는 漏, 無漏의 種子를 執持하고 果位에 있어서는 無漏의 種子를 執持한다. 이 位에서는 이 識을 阿陀那(Adana)라고 이름하여 執持라고 번역한다.

 

 대개 第八識에는 自相, 果相, 因相의 三種이 있는데 차례와 같이 自相은 我愛執藏現行位에 해당하고, 果相은 善惡業果位에 해당하며, 因相은 相續執持位에 해당한다.

 이상을 종합하여 보면 범부로부터 第七地 이전과 二乘의 有學까지는 阿賴耶識과 異熟識과 阿陀耶識등 三名을 갖추고 第八地부터 二乘의 無學까지는 阿賴耶識을 제외한 異熟識과 阿陀那識의 二名을 소유하고, 第十地로부터 佛果位까지는 阿陀那識 一名만을 가지게 된다. 三位의 寬狹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 我愛執藏位(從無始菩薩七地以

                      前及二乘二學)                 阿賴耶(執藏) ―

三位 ―   善惡業果位(從無始菩薩金剛心                              ― 三名

                      及二乘無學)                   毘播迦(異熟)      

       ― 相續執持位(從無始佛果盡未來際)            阿陀那(執持) ―

5. 結語

 

 그러면 어찌하여 이 세 가지 異名中에서도 阿賴耶識이 第八識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는가를 살펴본다. 「成唯識論」에  

 「比識自相 分位雖多 藏初過重 是故偏說」

이라고 한 바와 같이 阿賴耶識이 初位의 이름이 되는 동시에 我愛執藏의 과실이 가장 과중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賴耶緣起說이라는 것은 우리들 정신의 주체인 眼, 耳 등 六識 이외에 阿賴耶識의 존재가 있어 모든 善, 惡業 등의 種子를 보존하였다가 그것이 現行할 인연을 만났을 때 그로부터 일체의  현상을 緣起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관계인 중생의 身心과 객관계인 이 우주는 우리들의 주체인 阿賴耶識 즉 이 識中에 含藏되어 있는 種子로부터 轉變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체중생은 각각 자기의 阿賴耶識으로부터 正報로서의 자신을 招感하는 동시에 자기가 거주할 依報로서의 세계를 轉變하여 이를 수용한다. 즉 주관과 객관의 일체만유의 一法도 阿賴耶識의 變現한 바 아닌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萬法唯識 心外無境의 唯心論으로써, 이 阿賴耶識이야말로 실로 우리들 생명의 주체이며 생사윤회의 본체이다.

 우리들이 三界生死의 迷界에 무한한 유전을 되풀이하는 이유도 萬法唯識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因緣所生의 假法에 迷해서 無始以來로 번뇌를 일으켜 여러 가지 業을 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이 主觀의 迷執과 번뇌를 단멸해서 非有非空의 中道眞如의 妙理를 깨달으면 佛果妙覺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요컨대 唯識宗의 敎義는 我의 주체인 阿賴耶識으로부터 일체중생 각자의 자체와 外境인 器世間을 變現한다고 하는 現象的 唯心論으로서 迷悟染淨의 차별이 있는 이유를 보여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迷界染汚의 근원인 無明煩惱를 끊어버리고 無漏淸淨의 경지인 구경열반의 佛果를 증득함을 근본목적으로 한다.

 

                         參  考  文  獻

 

       唯識學硏究   下卷  敎義論        深浦正文  著

       佛敎學槪論                       金東華  著

 

       佛敎唯心論                       村上專精 著

       唯識學槪論                       玉置韜晃 著

       世親唯識說の 根本義              福井威  著

       佛敎に於ける二大唯心論           齊藤唯信 著

       唯識論                           廣瀨文豪 著

       世親唯識說の 根本的 硏究         稻津紀三 著

       大藏經講座 唯識論講義 上         花田凌雲 著

 

 

 

 

 

 

 

 

 

 

 

 

 

 

 

 

 

 

 

 

 

 

 

 

 

 

 

 

 

 

 

 

 

 

 

 

法界緣起에 대한 硏究

 

   

目  次

1. 序 言    3. 十玄緣起

  2. 四法界   4. 結 語

 

1. 序 言

 

法界緣起說은 「大方廣佛華嚴經」에 그 근거를 두는 사상으로 陳과 隋나라 사이에 출현한 杜順을 비롯하여 至相寺의 智儼, 唐代의 賢首 등에 의해 조직되고,淸凉山의 澄觀과 圭峰宗密 등에 의하여 그 심오한 뜻이 한층 더 천명된 사상이다. 이른바 法界란 우주만유의 총칭으로 만유제법은 모두 法에 의해 현상된 것이므로 이것을 法이라 하며, 그 法에 의해 나타난 만유제법은 또 각기 그 本性을 지켜서 잡란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界라 한다.

요컨대 法界라 함은 理에 나아가서 말하면 즉 一心眞如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우주만유의 본체이다. 또 事에 나아가서 말하면 우주와 삼라만상으로서 찬연한 日月星辰과 호연한 산하대지가 하나도 法界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이 法界緣起의 이치를 네 가지 범주로 자세히 설명한 것이 四法界요, 이 四法界中 事事無 를 설명한 것이 十玄門이다. 四法界란 事法界, 理法界, 理事無 法界, 事事無 法界이다.

 

2. 四 法 界

 

一. 事法界란, 우리들 눈앞에 전개되는 事事物物곧 높이 솟은 산, 끊임없이 흐르는 물, 분주하게 왕래하는 사람들, 질주하는 차량 등 이러한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고 관계하면서 山은 이 山이요, 물은 이 물이며, 축생은 축생, 사람은 사람으로 각기 특수한 자성을 지켜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우주간에 존재하는 천차만별의 현상계를 事法界라고 한다. 물과 파도의 비유로 말하면 차별된 파도의 모양이다.

二, 理法界란 事法界上으로 보면 事事物物 차별 그대로가 절대의 존재이나 理法界上으로 보면 차별의 만법은 모두 한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며, 眞如의 한 이치로부터 연기한 것으로서 평등한 一心에 돌아가며, 眞如의 一理에 돌아가 마음밖에 法이 없으며, 眞如밖에 만법이 없다. 어떠한 파도도 그 바탕은 물로서 평등한 濕性은 파도 전체에 두루한 것과 같다.

三, 理事無 法界란 事는 형상있는 만법차별의 相對界이며 理는 형상없는 일미평등의 絶對界이다. 이 상대와 절대, 차별과 평등의 兩者 즉 理와 事가 서로 원융무애한 것이 理事無 法界이다. 이 理事無 의 관계는 마치 물(理)을 떠나서 파도(事)가 있을 수 없고, 또 파도를 여의고 따로 물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즉 물이 곧 파도며 파도가 곧 물인 것과 같음을 말한다. 차별의 事와 평등의 理는 서로 융통무애하다고 보는 것이다.

四, 事事無 法界란 眞如인 一理平等한 一心에서 연기한 일체만법의 낱낱 존재가 서로 관련해서 원융무애한 것이 마치 파도와 파도가 서로 융통해서 相卽相入한 것과 같다. 우리들 눈앞의 경계와 각자의 身心은 모두 眞如인 一理平等의 一心에서 연기한다고 보는 것을 竪의

 

緣起라고하는데 반하여, 이 法界緣起는 橫의 緣起라고 할 수 있다. 이 法界緣起는 竪의 緣起도 겸하여 종횡무진의 연기 관계를 나타내고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十重無盡緣起이다.

이와 같이 四種法界를 분별하는 까닭은 眞如法性에는 不變과 隨緣의 두 가지 뜻이 있는데, 隨緣해서 만법이 되는 방면에 대해서 事法界를 세우고, 不變하는 萬法인 體에 나아가서 理法界를 세우고, 不變과 隨緣의 交涉關係에 대해서는 理事無 法界를 세우고, 隨緣의 法이 相互交涉하는 관계에 대해서는 事事無 法界를 세운다. 이것을 비유로 말하면 事法界는 금으로 만든 그릇의 모양이 가지가지로 차별이 있는 것과 같고, 理法界는 모양은 만가지 차별이 있으나 바탕(體)은 모두 金인 것과 같고, 理事無 法界는 金卽器, 器卽金인 것과 같으며, 事事無 法界는 器와 器가 동일해서 서로 融卽한 것과 같다.

 

3.十玄緣起

 

이상에서 말한 四法界中 事事無 法界를 다시 상세하게 설한 것이 十玄門이다. 十玄의 근거는 華嚴宗의 第二祖인 智儼이 세운 것을 第三祖인 賢首가 「五敎章」에서 계승하였으니 前者를 古十玄이라 하고, 後者를 新十玄이라 한다. 여기서는 「五敎章」에 의하여 古十玄의 개요를 소개하고자 한다.

一. 同時具足相應門이란, 우주의 만유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相卽相入해서 과거, 현재, 미래 三世의 현상은 반드시 동시에 구족해서 전후시종의 차별이 없이 필경 一體의 관계를 가지고 緣起하는 것을 말한다. 일체만유는 본질적으로 동시에 동일한 本性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기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 호랑이에게도, 대나무에도,  나비에게도, 모란에도 두루 갖추고 있으면서 호랑이는 호랑이, 대나무는 대나무, 나비는 나비, 모란은 모란으로서의 각기 다른 형체를 가지고 동시에 같은 땅에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서로 존재하면서도 이것은 저것과 저것은 이것과 조화를 이루어 서고 범하는 일이 없이 질서정연하게 연기한다. 그런데 이 一門은 十玄門中의 總門이요, 나머지 九門은 別門이다.

二. 一多相容不同門이란, 일체만유는 그 작용을 하는데 自他가 相入해서 無 함을 나타낸 門이다. 예를 들면 자기가 천지만물과 하나가 되었을 때 天地間에 두루해서 天地밖에 자기가 없고, 자기밖에 천지가 없는 一多相容의 상태이다. 一이 多에 들어가고 多가 一에 들어가며, 개체가 전체에 들어가고 전체가 개체에 들어가나 이 때에 一과 多, 개체와 전체는 혼란하지 않고, 개체는 개체로서 존재하고, 전체는 전체로서 그 本位를 잃지 않고 서로 각기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각기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각기 다른 존재인 一多無 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三. 諸法相卽自在門이란, 개체가 전체에 卽하면 개체는 없어지고 전체가 되며, 전체가 개체에 卽하면 전체는 없어지고 개체로 돌아간다. 一卽一切 一切卽一의 이치를 보인 것으로 一法과 一切法, 개체와 전체가 서로 卽한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한다. 먼저는 諸法의 用에 대해서 相入을 밝혔고,  이제는 諸法의 體에 대해서 相卽을 밝혔다.  

四. 因陀羅網境界門이란 因陀羅網은 제석천의 궁전에 장식된 그물인데, 이 그물의 눈마다 珠玉이 있어, 그물눈이 무량하면 주옥도 또한 무량하다. 그 무량한 주옥이 서로서로 반사되어 중중무진한 것처럼 천지우주의 만물이 相卽相入하는 것도 또한 중중무진함을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前의 三門은 一重의 相卽相入을 밝혔으나 이 門에서는 十重無盡의 관계를 설하였다.

 

五. 微細相容安立門이란, 한 톨의 쌀 속에 백두산이 들어가고, 한 겨자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가는 것과 같이, 아무리 미세한 것 가운데 일체의 諸法을 포함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좁지 않고 편안히 용납해서 일시에 나타나는 것이 거울 속에 영상이 비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一多大小가 융통하면서 잘 現狀을 지키는 것을 微細相容安立門이라 한다. 「一微塵中에 三千大千世界를 藏한다」라고 하며, 「一塵을 들면 세계가 일어난다」고 하며, 「一口吸盡西江水」라고 한 것 등이 모두 이 취지를 나타낸 말이다.

六. 秘密隱顯俱成門이란, 一과 多, 개체와 전체, 一法과 一切法이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상태가 동시에 완전히 행하여진다. 개체가 나타나면 전체는 숨고, 전체가 나타나면 개체는 숨으며, 一法이 나타나면 一切法이 숨고, 一切法이 나타나면 一法은 숨는다. 이와 같이 隱顯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이 자못 深妙하기 때문에 秘密隱顯俱成門이라 한다. 가령 한 사람의 女人을 여섯 사람에 대하면 그 이름이 각기 입장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 부모에 대해서 딸을 顯이라 한다면 남편에 대해서는 언니라 칭하며, 조카에 대해서는 숙모라 칭하는 등은 隱이 된다. 그러나 그 隱과 顯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七.  諸藏純雜具德門이란 諸는 諸法의 뜻이며 藏은 攝藏의 뜻으로서, 諸法이 能藏이 되기도 하고, 또 所藏이 되기도 하니 能藏이 되는 一法을 純이라 하고,  所藏이 되는 諸法을 雜이라 한다.  즉 현상계의 삼라만상은 一卽一切 一切卽一인 것으로 主伴이 具足하고 重重無盡하므로 그중에 一을 들어 能藏으로 하면 그 나머지 諸法은 所藏이 되어 혹은 純하고 혹은 雜하기도 하나, 서로 혼잡됨이 없이 一念에 동시에 구족되는 것을 말한다.

八. 十世隔法異成門이란 諸法은 공간적으로 相卽相入할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원융무애한 것을 보인 것이 이 門이다. 十世란 과거, 현재, 미래의 三世에 각기 三世를 갖추고 있으므로 三三은 九, 九世가 되며 이 九世에 다시 九世를 포용하는 一世를 더하면 十世가 된다. 이 十世의 法이 각기 다르므로 隔法이라 하며 이 각기 다른 법이 동시에 이루어져서 일시에 나타나므로 異成이라고 한다.

九. 唯心廻轉善成門이란 萬有의 諸法은 유일한 如來自性淸淨心인 眞如에서 연을 따라 생긴 것이므로 諸法이 천차만별하나 피차가 원융무애한 것이다. 오직 一心이 회전해서 일체의 善, 일체의 惡인 일체제법을 이루므로 廻轉善成이라 한다. 本經 卷十一에  「心如工 師  種種五陰」 이라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十. 託事顯法生解門이란 因陀羅網法界門에 十重無盡緣起의 이치는 추상적이므로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목전의 사물에 의지하여 사물 그대로가 낱낱이 法界의 진리임을 표현한 것이 託事顯法生解門이다. 따라서 山과 시냇물, 그리고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에 이르기까지 모두 華嚴의 事事無 , 相卽相入의 현묘한 이치를 나타내지 않는 것이 없다. 예를 들면 「華儼經」卷三에 十種의 寶王雲을 설한 것이 있는데, 그 寶는 貴함을 나타내고, 王은 自在를 나타내며, 雲은 潤益資澤을 각기 표현한 것은 事相이 곧 法界임을 나타낸 것이다.

 

四. 結  語

 

천지간의 일체만상은 시간적으로 보아도 실로 무한한 것이요, 또 공간적으로 보아도 실로 무량무변한 것이다. 이와 같이 무한무변한 萬法이 우리들 미혹한 범부의 안목으로 본다면 차별의 현상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깨달은  자의 안목으로 본다면  一切諸法은 시간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고금의 차별이 없이 일맥관통하는 동시에 공간적으로도 상관관계를 가지

 

고 처소를 가리지 않고 一體인 一心에서 천차만별의 一大緣起를 하고 있는 것이 바로 法界緣起이다.

이 法界緣起의 이치를 자세히 설명한 것이 이른바 四法界 十玄門이다. 요컨대 이 法界緣起의 핵심은 실로 四法界中 事事無 說이요, 이 事事無 를 보다 구체적으로 해설한 것이 이른바 十玄緣起說이다.  비록 한줌의 흙, 한방울의 물이라 할지라도 이 十玄緣起의 이치를 구족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와 같이 法界緣起는 자재무궁하다. 그러나 현실의 상황을 살펴볼 때 이 세상이 부자유스럽고  상대방과 의견이 엇갈림으로써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들 無明의 一心에서 貪, 瞋, 癡 三毒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緣起의 묘한 이치를 自己一心의 사실로서 觀照하고 체달하며, 증득하여 청정무구한 해탈경지에 도달하는 데 있다.

                         

參考文獻

 

佛敎の 理論と 展開             伊藤康安 著

華嚴五敎章講義                 湯次了榮 著

佛敎要義 卷下                  龍谷大學 發行

佛敎學槪論                     金東華 著

佛敎各宗綱要 上卷              山崎精華 著

 

 

 

 

 

 

 

 

 

 

 

 

 

 

 

 

 

 

 

 

 

 

 

中國佛敎史에 끼친 廬山의 位置          

 

         

目  次

1. 緖 言                         4. 念佛에서 본 廬山의 位置  

2. 廬山의 開山祖 慧遠            5. 結 語

3. 戒律上에서 본 廬山의 位置

 

 

1. 緖 言

 

慧遠은 佛圖澄·道安과 함께 兩晋시대의 三大人物中 한 사람으로서 그 성품은 佛圖澄이나 道安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石虎  堅과 같은 君王의 스승이 되어 국가의 비호를 받으면서 중국의 불교를 널리 유포한데 반하여, 慧遠은 심산유곡인 廬山에 은거하면서 念佛門을 唱導하여 脫俗居士들의 歸仰하는 바가 되었다.

慧遠은 雁門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老莊學을 수학하다가 21세시에 아우 慧持와 함께 道安을 따라 출가하여 師事하기 二十餘年이나 하였으며, 解行이 출중하였다. 道安이 亂을 피하여 襄陽에 이르자 慧遠도 또한 따라 갔으나 마침 道安이  堅과 함께 長安에 가게 되자 그는 발길을 돌려 남방의 羅浮山에 있는 同學 慧永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도중에  陽을 지나 廬山의 수려한 산천을 바라보고 慧永이 이 山中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入山하여 息心靜廬의 장소로 정하였다. 때는 孝武帝太元 9年(384) 慧遠의 나이 51세였다. 이리하여 그는 한번 廬山에 들어가자 無相皆空의 理談보다도 주로 念佛修行의 실천에 노력하였으므로 당시 淸談에 굶주린 은둔의 거사들이 사방에서 운집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이리하여 太元15年에는 뜻을 같이한 僧俗 123명과 함께 阿彌陀佛像을 모시고 白蓮社를 結하여 念佛로 수행하여 西方往生을 발원하였다. 이른바 白蓮社란 謝靈運이 寺堂 앞에 못을 파고 白蓮을 심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 것이다. 그리하여 이 白蓮社의 念佛을 廬山流라 칭하며, 드디어 中國 淨土宗의 요람을 이루어 往生淨土의 수행을 중점으로 하였다. 慧遠은 이 廬山에 은거하기 三十餘年 동안 한번도 下山하는 일이 없었다. 저 유명한 「虎溪三笑」245)는 慧遠의 수행이 얼마나 철著한가를 말해주고 있다. 또한「虎溪三笑」는 儒, 佛, 道 三敎 調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三笑 가운데 한 사람인 陸修靜은 당시 처음으로 독립한 道敎敎會에 대한 교리의 대학자로 道敎史上 탁월한 인물이었으며, 또 三笑 가운데 한 사람인 陶淵明은 「歸去來辭」를 부르면서 廬南의 面陽山에 은거하여 전원생활을 하였다.

이와 같이 廬山은 東晋의 慧遠 이후 불교의 一大中心地로서 중국불교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三敎를 통하여 중국문화사상에 끼친 그 영향이 매우 크다.  

 

2. 廬山의 開山祖 慧遠

 

 

廬山의 불교는 東晋의 慧遠에서 비롯하여 南北祖 隋唐을 거쳐 趙宋시대에 이르러 융성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중 慧遠을 중심으로 한 東晋시대와 居訥을 중심으로 한 趙宋시대는 바로 廬山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慧遠을 중심으로 한 廬山은 당시 道兄 慧永과 아우인 慧持와 또한 博學인 慧觀과 같은 불교역사상 高僧들을 위시하여 그 밖에도 道流. 道祖. 慧要같은 분들이 주석하였다. 이들중 중심인물인 慧遠은 다방면의 학자로서 처음에는 儒敎와 老莊學에 통달하였으나 당시 사상계의 풍조가 虛無主義, 隱遁主義에 빠져있음에 불만을 품고 자기를 확립시켜 세간을 인도하려고 하는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江南의 范宣子가 황당무계한 世論에 대해서 보다 견실한 思潮를 세우기 위하여 私學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가 배우려고 출발하였으나 兵亂으로 인하여 길이 막히게 되어 大行山에서 佛經을 강하고 있는 道安의 門下에서 수학하게 된 것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동기이다.

慧遠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언제나 현실을 여의지 않았다. 그의 불교적 입장은 法身의 체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法身이라고 하는 불교구경의 이상을 흔히 자기와는 거리가 먼 초월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반하여 慧遠은 이것을 직접 자기자신이 실현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하면 현실과는 물체와 그림자와 같이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고 보았다. 당시 世論의 虛無的이고 隱遁的인 것에 빠져 있었던 불교가 慧遠의 체험에 의해서 現實的이고 活動的인 것으로 혁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慧遠은 당시 불교를 일대전환한 인격자라고 할 수 있다.

慧遠의 人品은 널리 일체를 포용하는 한편 매우 강직하였으며 또한 활동적이었다. 그는 한번 廬山에 들어간 후 전혀 下山하지 않았으나 그의 활약은 매우 컸었다.  구자국의 鳩摩羅什이 長安에 이르자 그에게 번역을 청하여 「法華經」「智度論」등의 번역이 완료됨에 그 序文을 지어서 널리 유통하였으며, 다음 曇摩流支가 가지고 온 梵本 「十誦律」을 羅什에게 번역하게 하였다. 이 「十誦律」은 중국의 戒律硏究에 기반이 되고 있다. 또한 法領이 인도에서 가지고 온 「華嚴」의 梵本을 覺賢三藏이 번역하였는데 이는 화엄경 연구의 기반이 되고 있으며, 覺賢이 번역한 「達磨多羅禪經」은 禪宗의 所依經典으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원래 沙門은 세간을 초월한 자로서 王者를 敬拜하지 않았으나 중국고유의 사상에 著촉된다 해서 부당하다고 하는 반대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安帝元興二年(403)에 다시 이 문제가 대두되어 당시의 爲政者 桓玄이 沙門도 王者를 敬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慧遠은 단호하게 이를 반대하여  「沙門不敬王者論 」 五篇을 지어서 그 취지를 명확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慧遠은 몸은 비록 廬山에 은거하고 있었으나 불교에 관계된 內外 중대한 사건에는 반드시 참여해서 빛나는 업적을 쌓아 엄연히 南方불교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는 安帝義熙 十二年(416) 83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그의 저서가 적지 않으나 費長房의 歷代 三寶記 第七에는 모두 14부 35권을 들고 있다.

 

3. 戒律上에서 본 廬山의 위치

 

慧遠시대의 불교의 중심지는 北方은 長安이요, 南方은 廬山이었다. 어느쪽이나 불교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長安은 전란으로 인해 찬란했던 문화도 하루 아침에 멸망하였기 때문에 南北朝시대에 불교에 끼친 영향은 廬山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南北朝시대에 있어서 南方의 불교는 齊나라 文宣王과 梁나라 武帝의 보호와 장려에 의해서 南北朝 불교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文宣王과 武帝는 단순한 보호자만이 아니라, 스스로 이를 연구하여 만약 출가를 했었다면 한 宗派의 祖師의 위치를 차지하였을 것이다. 文宣王줎 子良은 채식주의로 엄중한 규율 생활을 하였다. 그의 일세의 聖業이라 할만한 것은  「淨住子」라고 하는 저술이다. 그리고 그는 戒律에 의해서 佛種을 이으려는 원력을 세우고 英才를 모아 스스로 강의할 정도로 戒律에 관심이 돈독하였다. 이 「淨住子」는 江南에 보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멀리 關河에까지 유포되어 마침내 一宗을 이루어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文宣王은 慧遠을 「業行圓通 曠劫希有」라고 칭찬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慧遠의 제자 法獻에게 書를 보내어 그 墓를 조성하고 그의 德을 새기라고 할 정도로 그를 敬慕하였다. 그런데 이 文宣王의 섕활은 순전히 慧遠의 감화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그 뒤에 梁武帝도 또한 文宣王의 뒤를 계승하여 菜食, 捨身, 持戒, 講經생활을 하였다. 武帝의 博學은 古今의 王者中 으뜸이라 할 정도였으며 즉위 三年에 서원을 세운 뒤부터 80여세의 노령에 이를 때까지 마침내 어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불교계 전체에 보급시키기 위하여 수많은 法師를 華林殿에 모아 스스로 「涅槃經」중의 斷肉義를 펴서 佛子들에게 고기를 먹지 말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武帝로 하여금 이와 같이 戒律에 충실케 한 것은 참으로 廬山慧遠이 끼친 영향은 참으로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4. 念佛에서 본 廬山의 위치

 

중국불교사상 念佛이 크나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慧遠을 중심으로 한 白蓮社라고 하는 念佛結社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 白蓮社에 123人이나 되는 名士 高僧들이 운집하였다. 慧遠은 엄격하게 戒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禪定을 닦았으므로 慧遠이야말로 진실한 戒定의 체험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戒와 禪의 惺惺한 힘이 깃들인 念佛者인 慧遠의 앞에는 오만한 桓玄246)도 才氣 발랄한 謝靈運247)도 두려워하며 心腹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人格者가 중심이 되어 모여든 123인 중에는 후에 南京의 國學을 감득한 雷次宗248)과 그밖에 宗炳249)과 劉遺民과 周道祖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 중국불교 역사상 白蓮社와 같이 화려한 정신적인 단체도 일찍이 없었다. 趙宋시대에 周濂溪250)(혹 歐陽修)를 중심으로 한 廬山의 靑松社는 실로 慧遠의 뜻을 계승한 곳으로 동지 123인으로 성립되었다. 이 단체의 중심사상이 念佛인가 아닌가는 분명하지 않으나, 省常을 중심으로 抗州 西湖에서 일어난 淨行社도 같은 123인으로 성립되었는데 이것은 순수한 念佛의 단체였다고 한다.

 

白蓮社에서 비롯된 念佛은 慧遠 이후에 8人을 헤아릴 수 있으니 즉 諸二祖에 唐代 長安의 善導, 第三祖에 唐代 南嶽의 承遠, 第四祖에 唐代 五台山의 法祖, 第五祖에 唐代 新建의 少康, 第六祖에 唐代 永明의 延壽, 第七祖에 宋代 昭慶의 省常, 第八祖에 明代 雲棲 宏, 第九祖에 淸祖 梵天의 思齊이다. 白蓮社의 念佛은 이들 九祖에만 그치지 않고 그후 더욱 성행해서 普陀山의 印光法師가 第十祖이 위치를 취하였다.

 

5. 結  語

 

불교역사상에서 볼 때 廬山의 황금시대는 晋代와 宋代라 할 수 있으니, 晋代는 東林寺의 慧遠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고 宋代는 圓通寺의 居訥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慧遠시대의 廬山은 羅什을 중심으로 한 新敎學 發祥의 근본 도량인 長安과 상대하였다.

慧遠중심의 白蓮社에 운집한 名士中  陽三隱으로 유명한 劉遺民, 周續之, 陶淵明과 宗炳과 雷次宗과 같은 居士는 一代의 학자들로서 心靈의 鍛鍊開發을 하였다. 三人中 劉遺民은 博學多識으로서 念佛結社의 願文을 기초해서 同志를 모았으며 入山 후 10여년간 精進不退의 일생을 보냈다.

慧遠의 인격을 중심으로 모여든 뛰어난 人材들은 불교역사상 이상적인 종교단체로서 尊仰의 대상이 되어, 후세에 여러 차례 白蓮社 復興運動이 일어난 것도 당연한 일이다.

慧遠 이전의 불교는 老莊의 허무사상에 조화하려고 하는 유희적이고 은둔적이던 것이 慧遠에 이르러 비로소 체험적이고 창조적인 불교로 전환되었다. 다시 말하면 死佛敎 風流佛敎였던 것이 이에 이르러 비로소 活佛敎 實際佛敎로 바뀌었다. 慧遠은 특히 羅什이 번역한 「十誦律」을 엄중히 실행하였으며 또한 覺賢三藏이 번역한 「禪經」을 직접 몸소 실천하였으니 慧遠의 일생을 통한 생활경로야말로 중국사상사의 변천을 여실히 표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廬山은 慧遠 이후 宋, 齊, 梁, 陳, 隋를 지나 唐에 이를 때까지 자못 名僧들의 근거지로서 중국불교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參考文獻

 

                支那佛敎の 硏究                常盤大定 著

                續支那佛敎の 硏究              常盤大定 著

                印度支那佛敎小史               境野黃洋 著

                佛敎要義 卷上                  龍谷大學 發行

                中國佛學人名辭典               明復 編

 

 

 

 

 

 

 

 

 

 

攝大乘論에 대한 小考    

                 

目   次

1. 緖 言               3. 攝大乘論의 綱要

2. 攝大乘論의 전파     4. 結 語

 

1. 緖  言

 

「攝大乘論」은 원래 「大乘阿毘達磨經」中의 攝大乘品을 해석한 것으로 매우 조직적인 저서로 無着의 학설을 잘 나타내고 있다. 「十地經論」의 번역에서부터 50여년을 지나 陳의 文帝 天嘉 4년(563)에 無着의 「攝大乘論」 및 世親의 「攝大乘論」의 「釋論」이 眞諦에 의해 번역되었다. 攝論宗은 곧 이 「攝大乘論」을 所依로 일어난 것으로 이는 바로 無着 世親의 唯識思想東流의 第二段이다. 眞諦의 번역이 실로 64部 278卷에 이르렀으나 그 가운데 특히 전파하고자 희망한 것은 無着의 「攝大乘論」으로 그는 慧愷, 法泰 등의 제자들과 함께 攝論의 弘布에 노력하였다.

이와 같이 眞諦는 攝論宗人으로서 전심으로 그 보급을 도모하였으나 그의 생존시에는 널리 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입적한 후에 왕성한 유행을 보게 되었다. 생존시에 전파하지 못한 것은 적당한 시기와 장소를 얻지 못한데 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 시기를 얻지 못한 것은 眞諦는 梁, 陳 二朝의 혁명시대를 당하여 南京의 시가는 전란이 끊일 사이가 없어 도저히 동일한 곳에 안주해서 번역에 종사할 수가 없었다. 중국의 四大譯家中 羅什三藏이 秦王 姚興의 외호를 받았고 玄 三藏은 唐帝 太宗, 高宗의 보호를 받았으며 또 不空三藏은 代宗의 존경을 받은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다음에 장소를 얻지 못한 것은 본래 중국은 南北의 人情과 地理 風俗이 다름에 따라 그 사상도 현격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北方은 摯着堅實한 색채를 띠고 있는데 반하여 南方은 虛無恬談의 기풍이 돈독하였다. 불교에 있어서도 成實論, 三論과 같은 龍樹系의 사상은 南方에 적응하고 毘曇論, 唯識論과 같은 無着系의 사상은 북방에 적합하였다. 成實論, 三論과 같은 것은 처음에 북방 長安에서 번역되었으나 후에 南方지역에서 크게 환영을 받은 것과 같이 眞諦의 攝大乘論도 처음에는 南方에서 번역되었으나 남방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배척을 받는 비운을 만났던 것이다.

 

2. 攝大乘論의 전파

 

그런데 이 攝論宗은 眞諦가 입적한 후 北方 長安, 洛陽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즉 陳 太建元年에 眞諦가 입적하자 同 6년에 北周 武帝의 法難이 일어나 북방으로부터 남방에 피난하는 高僧들이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眞諦삼장이 번역한 「攝大乘論」을 애독하고 歸省할 때에 가지고 와서 北地에 널리 전파한 사람은 曇遷, 靖嵩의 두 사람이다. 曇遷은 처음에 徐州 慕聖寺에서 「攝大乘論」을 널리 유포하였고, 隋 開皇 10년 文帝의 命을 받들어 洛陽에서 강설하였으며, 靖嵩은 曇遷의 뒤를 이어 徐州에 와서 25년간 같은 곳에 머물면서 「攝大乘論」을 강설하였다. 이 때에 眞諦의 제자인 道尼 역시 文帝의 명에 의해 洛陽에서 「攝大

 

乘論」을 강하였으니 攝論의 北傳은 실로 위와 같은 三學匠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당시의 俊才인 道岳, 慧林이 함께 道尼에게 나아가서 眞諦가 전한 바 「攝大乘論」 및 「俱舍論」을 수학하였다. 때에 玄 이 또한 道岳에 나아가 「俱舍論」을 듣고 慧林에게서 攝大乘論을 배웠으니 이것이 후일에 玄 이 인도행의 큰 뜻을 품고 드디어 法相과 俱舍의 兩宗을 唐朝에 전파한 濫觴이다. 그밖에도 쟁쟁한 제자들이 많았으나 그중 특히 우수한 사람으로서 慧愷, 僧宗, 法泰, 法准, 僧忍, 曹毘 등을 들 수 있다. 慧愷는 번역사업에 공헌한 바가 크며 특히 「攝論」의 전파에 노력하여 문하생중 제일이라 할만큼 훌륭했으나 애석하게도 스승에 앞서 별세하였기 때문에 攝論 전파의 임무는 자연히 僧宗 등에게 위탁하게 되었다.

 

3. 攝大乘論의 綱要

 

「十地經論」이 無着의 명을 받아 世親이 「華嚴經」의 十地品을 주석한 것임에 대하여 이 「攝大乘論」은 無着이 스스로 「阿毘達磨經」의 攝大乘品을 해석한 것이다. 本論에 대해서는 眞諦譯 이외에 扇多譯과 玄 譯을 들 수 있고, 釋論에는 世親과 無性의 二種이 있으니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一. 本論

       1. 攝大乘論 二卷                後魏佛陀扇多 譯

       2. 攝大乘論 三卷                陳  眞諦  譯

       3. 攝大乘論 本 三卷             唐 玄  譯

  二. 釋論

       1. 世親論

            ㄱ. 攝大乘論釋 15卷 陳 眞諦 譯

            ㄴ. 攝大乘論釋論 10卷 隋多共行矩等 譯

            ㄷ. 攝大乘論釋 10卷  唐 玄  譯

       2. 無性 釋

            ㄱ.攝大乘論釋 10卷 唐 玄  譯

이 攝大乘論은 「十地經論」과 같이 隨文釋이 아닌 達意論이니 이른바 宗經論에 속한다. 그 내용을 보면 제목과 같이 大乘敎中의 수승한 要義를 섭수한다는 뜻으로 범부로부터 불타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次第를 十段으로 분류하여 설명하였다. 그 十段은 모두 大乘이 다른 교보다 뛰어나게 수승한 취지임을 서술하였으니 열 가지 勝相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一. 應知依止勝相品(阿賴耶識)

                                                         ― 境

        二. 應知勝相品(三性三無性)                          

        三. 應知入勝相品(地前有相方便行)

        四. 入因果勝相品(地上無相眞修行)

        五. 入因果修差別勝相品(十地戒級)                  

                                                         ― 行

        六. 依戒學勝相品(戒學)

        七. 依心學勝相品(定學)

        八. 依慧學勝相品(慧學)

        九. 學果寂滅勝相品(涅槃)

                                                          ― 果

        十. 智差別勝相品(菩提)                            

 

 

그중 第一, 第二의 二段은 大乘所說의 認識論으로서 第一應知依止勝相이란 應知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 즉 依他, 分別, 眞實의 三性을 가리키며, 依止는 그 所依止住할 阿賴耶識을 가리키며, 勝相은 應知依止의 勝相을 가리킨다. 따라서 萬有의 근원인 阿賴耶識을 해설한 것으로 곧 인식의 주관적 가치를 논한 것이다. 다음에 第二應知勝相이란 應知는 위에서 말한 依他, 分別, 眞實의 三性으로서 실로 諸法의 自性을 三種으로 하여 그 三性을 나타냈으니 즉 인식의 객관적 가치를 논한 것이다. 다음에 第三부터 第八까지의 六段은 唯識實踐의 修道論으로서 그중 第三의 應知入勝相이란 入은 能入의 因, 所入의 果 즉 三性에 들어가서 唯識에 住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唯識中道의 法門에 깨달아 들어가는 수행의 방법을 설한 것이다. 第四의 入因果勝相이란 入의 因果, 곧 六波羅蜜의 수행을 설한 것이다. 第五에 入因果修差別勝相이란 위에서 말한 入因의 果, 곧 六波羅蜜에 대해서 각지마다 수행의 차별을 보인 것으로 최후 수행의 階位인 十地에 대해서 설한 것이다. 다음에 第六, 第七, 第八의 三은 위에서 말한 入因果修差別中에서 菩薩의 戒定慧가 二乘과 차별됨을 보인 것으로 第六의 依戒學勝相은 보살의 戒學을, 第七의 依心學勝相은 菩薩의 定學을, 第八의 依慧學勝相은 보살의 慧學을 서술한 것이다. 다음 第九, 第十의 二段은 佛果顯現의 이상론으로서 第九의 學果寂滅勝相이란 寂滅 즉 解脫涅槃의 수승함을 설한 涅槃論이며 第十의 智差別勝相이란 三身知相 즉 解脫知見의 수승함을 설한 佛陀論이다.

요컨대 이상 十種이 勝相은 낱낱이 小乘보다 훨씬 수승하다고 설하여 보였으나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第一과 第二의 二段이다. 이 第一, 第二는 결국 阿賴耶識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攝大乘論은 또한 瑜伽十支의 하나로서 瑜伽論中의 八識緣起의 취지가 이 攝大乘論에 이르러 더욱 그 精緻 를 다하였다. 本論에서는 어디까지나 唯識無境의 뜻을 강조하여 이 阿賴耶識이야말로 大乘佛敎의 진면목임을 여실히 표현하였다.

                             

                               4.  結  語

 

앞의 地論宗이나 후의 法相宗에서는 다만 八識만을 세우는데 반하여 本宗에서는 第九識 阿摩羅(無垢, 白淨, 청정이라 번역)를 세우는 것이 실로 本宗 독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앞의 地論宗에서는 第八阿賴耶識을 純淨無垢識이라고 한데 대하여 本宗에서는 眞妄和合識이라고 하였다. 阿賴耶識이 眞妄和合인 것을 金과土를 함께 포함하고 있는 땅에 비유하였으니 前七의 妄識을 땅 속에 있는 土(흙)에 비유하고 阿摩羅識 즉 眞如는 땅 속에 묻힌 金에  비유하였다. 阿賴耶의 땅 속에 土(흙)인 迷妄이 나타나고 있는 동안은 金인 眞如가 은폐되고 있으나 만약 土인 迷妄을 智火로  련하면 곧 金인 眞如는 드러나개 되어 여기에 無垢純淨한 阿摩羅識이 發露하게 된다. 그런데 이 發露는 果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因位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因位에서는 다만 迷妄의 阿梨耶가 표면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迷妄을 第하고 純淨을 증득하는 것이 바로 本宗의 목적이다.

이와 같이 阿梨耶는 眞妄和合識으로서 有爲의 삼라만상이 이 識에 함장된 種子로부터 緣起한다고 설하는 점은 후의 玄 이 전하는 法相宗의 唯識說과 흡사하다. 그런데 攝論家와 唯識家 사이에 서로 다른 점이 있으니 첫째는 九識建立(攝論)과 八識建立(唯識)의 차이, 둘째는 凝然眞如(攝論)와 隨緣眞如(唯識)의 차이, 셋째는 攝論家는 第八識을 無明隨眠의 識인 것에 대하여 唯識家에서는 다만 無記識이라 한 것이 차이점이다. 그리고 地論과 攝論 양가에서는 眞如緣起說을 주장한데 반하여 唯識家에서는 賴耶緣起說을 주장하였다.

慧愷의 序에 「唯識微言 因玆得顯 三性妙趣 由此而彰」이라 한 것과 같이 攝論宗의 綱要

 

는 실로 阿賴耶識을 세워 唯識三性의 뜻을 밝힌 것이다.

 

                                    參 考 文 獻

                 

                       大藏經講座 唯識論講義          花田凌雲 著

                       印度哲學硏究 第一              宇井伯壽 著

                       佛敎に

                            二大唯心論                 藤唯信  著

                       於ける

                       唯識學硏究 上卷 敎史論         深浦正文   著

                       佛敎唯心論                     忖上專精  著  

                     

 

 

 

 

 

 

 

 

 

 

 

 

 

 

 

 

 

 

 

 

 

 

 

 

 

 

 

 

 

 

 

看話禪과 默照禪

 

         

目   次

1. 머리말                         4. 看話禪과 大慧禪師

2. 禪의 기원과 傳來               5. 默照禪과 宏智禪師

3. 看話와 默照의 역사적 배경      6. 맺는 말

 

 

1. 머리말

 

  修行의 요점이  戒, 定, 慧를 고루 닦는 데 있으나 그 중 가장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禪定이다. 이 戒, 定, 慧는 옛날 솥의 세 다리와 같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한편 서로 단계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戒가 定을 닦기 위한 준비과정이라면 定은 慧를 얻기 위한 준비과정이라 하겠다. 戒에 의해서 惡道를 벗어나고, 定에 의해서 欲界를 여의고, 慧에 의해서 三界를 초월할 수 있다. 그중 定은 중간에 위치해서 三界를 초월할 수 있는 慧도 결국 定에 의해서 생기는 것으로 볼 때에 수행의 중점은 定이다

  禪이란 범어 Dhyana를 음역한 것으로 禪那를 약칭한 것이다. 靜慮, 思惟修, 혹은 定이라 번역한다. 진리를 올바로 사유하며 조용히 생각하여 마음을 한곳에 모아 산란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 중생들의 마음은 마치 바닷물이 바람에 의해 끊임없이 파도를 일으키듯이 無明風에 의해 끊임없는 번뇌망상을 일으키고 있다. 禪定을 수행하는 목적이 바로 이 번뇌망상을 제지하고 본래 청정한 마음에 계합하는 데 있다. 우리들은 禪定을 통하여 산란심을 제지하는 소극적 목적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마음을 한곳에 집중함으로써 어떤 대상을 철저하게 관찰하는 적극적 목적이 있다. 「禪이란 무엇인가. 마음을 이름한 것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禪의 바탕이다.」라고  宋나라 때에 어떤 禪師가 정의한 것과 같이 禪은 마음의 별명이며 마음은 禪의 본질이다.

  불교에서는 禪이라고 하는 대신에 奢摩他(Samatha 止), 혹은 毘婆舍那(Vipasyana 觀)라고도 한다. 止는 정지의 뜻으로 靜的으로 마음을 거두어 妄念을 쉬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이며, 觀은 관찰의 뜻으로 動的으로 지혜를 내어 관조하여 眞如에 계합한다는 뜻이다. 수행의 요점은 항상 止觀均等을 주장하여 마음이 너무 고요한 데 치우쳐서 무기력한 수면상태에 떨어져도 불가하며, 사유에 치우쳐서 산란한 데 떨어져도 불가하다.  그래서 大慧禪師는 書狀에서 昏沈(수면에 빠지는 것)과 悼擧(산란심을 계속 일으키는 것)가 禪定을 수행하는 데 두 가지 큰 병폐라고 지탄하였다. 그러므로 止와 觀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서로 의지하고 도와야만 비로소 해탈의 이상경에 도달할 수 있다.

 

2.  禪의 기원과 傳來

 

  원래 禪定은 불타 이전 인도의 禪定派인 외도들의 瑜伽(Yoga)의 관찰법으로 진리의 발견 및 체험의 도로서 발전한 것이다. 불타는 求道시대에 이를 이어받아 降魔成道와 열반에 다달아 四禪定에 들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아함경 중에는 四禪定에 관한 특수한 해석이 있으

 

며, 대승경전에도 대승적 삼매의 해탈이 성하게 논의되고 있다.

  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는 이른바 拈華微笑로서 禪定의 기원을 삼고 있다. 어느 때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설법을 하고 계실 때 梵王이 바친 금바라화의 꽃가지를 들어 보이자 수많은 대중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는데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때 부처님은「正法眼藏 涅槃妙心을 가섭에게 전하노라」하고 승가리(가사)를 주어 信을 표하였다. 이것이 바로 佛의 心印을 以心傳心한 禪法의 시초이다. 이리하여 인도에서는 摩訶迦葉으로부터 二十八祖 菩提達磨에 이르기까지 法을 전하여 그 信表로서 衣鉢(가사와 발우)을 전수하였다.

  菩提達磨가 梁나라 武帝 때에 중국에 와서 慧可에게 法을 전함으로부터 第五祖 弘忍에 이르러, 이 門下에 慧能을 第六祖로 하는 南宗과 神秀를 第六祖로 하는 北宗으로 갈라지게 된다. 北宗은 오래지 않아 후손이 끊어지고 慧能의 계통만이 번성하여 드디어 五家七宗으로 나누어지기에 이른다.  

  우리 나라에 禪法이 들어온 것은 新羅 善德女王 五年(784)에 唐나라 西堂智藏에게서 법을 받아온 道義를 初祖로 하는 迦智山門을 비롯하여 實相山門등 九山禪門이 성립되어 한 동안 번성하다가 高麗 때에는 차차 쇠퇴하여졌다. 그후 高麗 明宗 때 佛日普照國師가 나서 曹溪山에 修禪社를 세우고 定慧結社를 설립하여 曹溪禪風을 크게 드날렸으며, 오늘날의 승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曹溪宗도 바로 曹溪禪風을 계승한 것이다.

  이상에서 禪의 기원과 전래를 약술하였거니와, 다음에는 看話禪과 默照禪의 성립과정에 대하여 살피고자 한다.

 

3.  看話와 墨詔의 역사적 배경                                        

 

  看話禪과 默照禪이 성립된 것은 達磨祖師가 중국에 건너온(梁武帝 AD 527) 훨씬 후의 일이다. 즉 達磨후 200년경에 禪의 大宗匠인 六祖慧能大師가 禪法을 드날리던 시절에도 公案이니 話頭니 看話니 默照라는 것은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語句도 사용된 일이 없었다. 六祖 후 약 300년간 唐의 중엽부터 南宋에 이르기까지의 시대(서기 8세기초부터 10세기초)는 六祖 이하에서 배출되는 大宗匠들의 各 宗風이 드날리는 이른바 五家七宗을 형성하는 시대로 禪家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도 看話禪, 默照禪이라는 양식의 禪法은 없었고 다만 公案이라는 語句가 8세기 말경에 黃蘗希運, 德山宣鑑, 陳尊宿 등이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중국불교의 근간을 이루었던 禪宗도 唐末 宋初에 이르러 쇠퇴일로를 걷기 시작하여 英宗(AD 1064)때부터 碧眼宗師(눈밝은 宗師)는 자취를 감추고 碧眼宗師(눈을 멀게 하는 宗師)나 머리를 깎은 외도들이 활기를 띠었다. 天童宏智가 제창한 默照禪을 그의 제자들이 진의를 모르고 잘못 지도하는 것에 분개하여 大慧는 默照禪을 타파하는 도구로서 看話禪을 내세워 당시 쇠퇴일로에 있는 達磨傳統의 圓頓宗旨를 중흥시켰다.

   

4. 看話禪과 大慧禪師

 

  看話禪은 중국 宋代 臨濟下에 大慧宗 禪師가 고취한 宗風이다.  看은 見의 뜻이요, 話는 公案을 뜻한다. 公案이란 마음을 밝게 깨닫는 기연으로 祖師들의 말과 행동이 모범이 되어

 

비범한 권위를 가지고 학인이 깨치고 깨치지 못하는 것을 판정하는 것이므로 세속에 비유하여 公案이라 말한 것이다.  禪門에서 수행하는데 이 公案을 참구하여 깨닫는 禪風을 看話禪이라 한다. 大慧普覺禪師書에

『다만 망상 전도하는 마음과 사량분별하는 마음과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과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시에 눌러 내리고 눌러 내리는 곳에 나아가 話頭를 看하라. 어떤 스님이 趙州스님에게 묻기를 「개도 佛性이 있습니까?」趙州가 답하되「無니라」이 一字의 無字話頭는 허다한 惡知惡覺을 꺾어버리는 가장이다』

라고 한 것이 看話禪의 한 예이다.  

  그밖에 嚴陽존자가 趙州에게 묻기를「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는 때가 어떻습니까」趙州가 답하되「놓아 버리라」존자「한 물건도 이미 가지고 오지 않았거늘 무엇을 버리랍니까」조주「놓아버리지 못하겠다면 짊어지고 가라」고 한 放下着話頭라든가, 또 어떤 스님이 雲門에게 묻기를「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을 때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雲門스님이 답하기를「허물이 수미산과 같느니라」한 須彌山話頭라든가 또 어떤 스님이 趙州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趙州가 답하되「뜰 앞에 잣나무니라」한 庭前栢樹子話頭 등 실로 1700이나 되는 公案이 있다. 이와 같이 公案 즉 話頭는 논리나 사량을 가지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제시하여 이를 참구함에 의해서 확철대오하는 경지에 이르게 하는 방편이다.

  看話禪의 취지는 일반이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 중생들의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이 온전히 同體로서 그 사이에 高下의 차별이 없고 평등함을 확신하여 근기의 利鈍을 헤아리거나 靜鬧(고요하고 시끄러움)와 관계없이 公案을 참구하여 철저하게 그 문제를 해결하되 고요함이 그대로 시끄러움이요, 시끄러움이 그대로 고요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싹트고 유행이 되었던 看話禪은 大慧禪師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고취 선양하게 되었다. 大慧는 주로 無字話頭로 학자를 접하였으며 때로는 一歸何處話頭로 제접하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간화선은 임제하의 공식적인 선으로 제접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선종은 크게 번성하여 드디어 五家七宗이 일어나고, 각기 자기의 家風을 고취함에 있어 順說的으로 혹은 逆說的으로 그리고 동작으로써 근기에 응하여 지도하되 더욱더 진전되어 喝(禪僧들 사이에 쓰는 위엄있게 꾸짖는 소리), 柱打(법을 물으러 온 학인을 주장자로 때림), 심지어는 멱살을 잡거나 밟아서 거꾸러뜨리는 禪風까지 생기어 그 本地風光을 드러내었다.

  大慧禪師는 위에서 말한 五家七宗中 臨濟宗의 十世法孫이요, 圓悟의 제자로 그의 禪機는 벽력과 같은 늠름한 臨濟家風을 유감없이 떨치었다. 그는 대활동가로서 僧俗을 지도함에 서신을 통하여 그 당시 많은 士大夫에게 禪法을 전수하였으니 그에게 전수 받은 傳法 弟子가 무려 83(혹은 94)인이나 된다. 이와 같이 禪師의 자질과 품격은 臨濟家의 대표가 될 뿐만 아니라 불교계의 巨星으로 일반사상계나 정치계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주목할 것은 그의 法師인 圓悟禪師가 지은 碧巖錄을 불살라버린 점이다. 碧巖錄의 편찬에는 아마 자신의 힘도 기울였을 것이요, 선문의 최상인 귀감서에 대한 애착이 컸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관찰하고 크게 영단하는 바가 있어 이것을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마치 德山 스님이 龍潭화상에게 가서 법을 듣고 활연히 깨달은 후 「이제부터는 천하 노화상들의 혀끝에는 절대로 속지 않겠습니다」하고 짊어지고 갔던 金剛經疏 를 불에 태워버렸던 것과 같다. 大慧의 焚書는 어디까지나 껍질을 벗고 골수를 얻기 위함이오, 假를 버리고 眞을 얻기 위한 것이다. 禪의 귀감인 碧巖錄의 文字語句에 집착하는 당시 사람들의 병폐를 막고 문자어구가 지니고 있는 참다운 뜻을 보존하고자 하는 일대영단이었다.

 

  이와 같이 大慧는 추상같은 결행으로 看話禪을 진작하는 한편 당시 성행하고 있던 默照禪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宋代에 배출한 禪家中 大慧처럼 그 禪風이 당시 士大夫 계층의 생활의식속에 밀착할 뿐 아니라 일반 사상계나 후세에까지 큰 영향을 끼친 사람도 없다.  이상에서 看話禪의 대략을 말하였거니와 다음에는 默照禪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5. 默照禪과 宏智禪師

 

   默照禪을 寂照禪이라고도 한다. 默은 寂默의 뜻이며 照는 照了의 뜻으로 定慧圓明의 뜻이다. 중국 宋朝 때에 曹洞宗과 臨濟宗 二宗이 서로 다투는 때에 曹洞下의 天童宏智禪師가 나와서 默照二字를 들고일어남에, 大慧는 이를 默照邪禪이라고 가혹하게 비평한 데서 쓰인 말이다. 默照禪이라는 명칭이 墨照禪師 자신들이 붙인 이름이 아니라, 大慧가 일체의 思量을 끊고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서 묵묵히 말을 잊고 土木瓦石과 같이 쉬어가고 쉬어가게 하는 默照禪의 그릇됨을 공격하고 비난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看話禪이 公案을 참구하여 깨닫는 경지에 들어가는 先慧後定의 적극적인 禪風이라면, 默照禪은 고요한 곳에서 慧光을 얻으려는 先定後慧의 소극적인 선풍이라 할 수 있다.

  宏智禪師廣錄에 「진실한 공부는 다만 고요히 앉아 묵묵히 참구해야만 깊이 나아갈 수 있다. 밖으로 인연의 유전을 입지 않고 그 마음을 비우면 만물을 용납하고 그 비춤이 묘하면 만사가 법다운 것이다. 안으로 반연을 생각지 않으면 확연히 홀로 있어 어둡지 아니하고 소소영영한 절대의 경지를 얻게 된다..... 묵묵히 말을 잊으면 밝음이 현전하고, 비출 때 확연히 체가 신령스럽다. 신령스럽게 뚜렷이 비추면 비추는 가운데 도리어 묘가 있다.......  묘는 묵묵한 곳에 있고, 功은 비추는 가운데 잊는다. 묘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성성하게 어두움을 파하는 것은 묵조의 道이며 근본이다. 默은 오직 지극한 말이요, 照는 널리 응할 뿐이다」라고 하여 宏智禪師는 妙는 오직 묵묵한 곳에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리하여 默照家들은 자기들만이 전통적인 禪이라 하였다. 즉「묵묵히 말이 없이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의 헐떡거림을 없애어 마음을 장벽과 같이 해야만 도에 들어간다」고 한 達磨禪에 부합시켰다.  그때에 臨濟下의 大慧宗 가 이 주장을 비판하여 默照邪禪이라 비난하고 스스로는 看話禪을 주장하는 한편 辨邪正說을 지어 그 폐단을 구하였다.

 默照禪의 대표적인 巨匠은 正覺宏智禪師이다.  禪師(1087∼1157)는 曹洞의 十世法孫이요, 후세에 널리 알려진  丹霞天然의 제자로서, 당시 禪宗에서 大慧와 쌍벽을 겨룬 大宗匠이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 이 看話와 默照의 말은 도리어 臨濟와 曹洞의 특징을 보이는 말이 되었다.  즉 默照禪은 曹洞에 속하고 看話禪은 臨濟에 속한다.  大慧의 會上이 항상 천명을 세듯이 宏智의 會上도 항상 천수를  헤아렸으며, 大慧의 動的인 禪風에 반하여 宏智는 실로 온건 화평한 靜的인 禪風을 고취시켰다.

  天童宏智禪師는 大慧보다 二年 후에 출생하여 六年을 앞서 입적하였는데, 大慧는 宏智의 생전요청에 따라 친히 法床에 올라 영가법문을 하되 「法幢이 꺾어지고 法河가 마르고 法眼이 잠겼다」는 추도사의 法門을 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그들의 道友관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6. 맺음말

 

 

  禪定의 수행은 大小乘을 통하여 어떠한 교파에나 근저를 이루고 있어서 禪定을 여의고 결코 불교가 성립될 수 없다.  불교는 어떠한 절대자 즉 神을 내세우지 않고 어디까지나 마음을 중심한 해탈을 이상으로 하는 것이 다른 종교와 특이한 점이다. 有神論的 宗敎의 진수가 他에 의존하는 기도에 있다고 한다면, 불교의 진수는 스스로의 마음 즉 自我를 깨닫는 禪定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自我란 과연 무엇인가.  고대의 철학자나 종교가의 구경목적이 실로 이 自我를 해결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부르짖음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自我의 문제는 항상 哲學上의 중심이 되고, 인도에서는 석존 출생 이전 2·3백년 전에 벌써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이 문제를 사유관찰하기 시작하였으며, 석존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入山修道하였던 것이다.

겨우 6척의 공간을 차지하고 70년의 시간을 보전하는데 불과한 것이 我라고 한다면, 덩치로 보아 실로 인간의 自我는 코끼리보다도 훨씬 저열한 셈이 된다.  만약 인간이 정신적인 공간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여러 가지로 동물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의 생명, 즉 自我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무한한 까닭은 그 본성이 원래 무한절대한 大我와 관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眞如니, 法身이니, 佛心이니, 내지 神明이라 하는 것도 결국 이 絶對我를 가리킨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絶對我를 어떠한 방법으로 실현하고 체험할 수 있는가. 일면으로는 감각적인 쪽을 제어하는 동시에 다른 일면으로는 이상의 표적을 전념으로 참구하여 체험하는 방법이 있으니, 위에서 언급한 看話禪이나 默照禪의 예를 들 수 있다. 小乘佛敎에서는 특히 四禪을 세워 禪的 修行을 강조하였고 大乘에서는 六波羅蜜中 第五 禪定波羅蜜이 禪的 修行에 해당한다. 그리고 唐代의 宗密禪師는 「禪源諸詮集都序」에 이를 五種으로 분류하였으니 이른바 外道禪, 凡夫禪, 小乘禪, 大乘禪, 如來最上禪이다.

  이와 같이 禪의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이상 이에 의해서 체득하는 경지에도 또한 갖가지 구별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그 설명을 생략하기로 한다. 禪의 깨달음이란 결국 정신통일에 의해서 眞我에 명합한 경지를 말한 것이다. 경전에 의하면 불타는 보리수 아래에 단정히 앉아 사유한 결과 드디어 佛果를 성취하였다. 그 깨친 내용의 여하는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알뿐이지 마셔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과 같이, 오직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과 부처님들만이 알 수 있는 경계요, 우리들 범부의 사량이나 언어를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다.  禪은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도 충분히 실행할 수 있는 것으로 근기의 利鈍과 직업의 차이에 구애되지 않고 누구나 禪을 통하여 인생의 의의와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 참다운 가치를 드날릴 수 있는 것이다.

                                 

 

 

 

參 考 文 獻

                                 

 

                       書    狀                大慧普覺禪師  書

                       都    序                圭峰宗密 著

                       禪    要                高峰原妙 著

                       四集私記                釋智冠   編

                       般若心經解說            尹柱逸   著

 

 

大方廣圓覺經에 대한 考察

 

目   次

1. 序言                     4. 內容의 槪要

2. 本經에 대한 眞僞         5. 本經의 大意

3. 本經과 類似한 經論       6. 結語

 

1. 序 言

 

이 經의 정확한 이름은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이다. 圓覺修多羅了義經 혹은 圓覺經이라고 약칭한다. 禪宗에서는 이 경을 首楞嚴經, 楞伽經, 金剛般若波羅蜜多經과 함게 중요하게 여겨왔다.

開元釋敎錄251)에 의하면 「沙門佛陀多羅는 번역하면 覺救라 하며 북인도 계빈국 사람이다. 東都 白馬寺에서 圓覺了義經 一部를 번역하며 이 경이 근간에 번역되었으나 어느 연대인지 알 수 없다. 또한 年代란 弘道를 사명으로 하는데 있어서 詐妄을 分別하기 위한 것이나, 이는 眞詮이지 謬經이 아니거니 어찌 年月을 알 필요가 있으리요」하였다. 그러나 宗密의 略疏 에는 高宗 大帝時라고 한 一說을 인용하여 이 說이 誤謬인 듯하다고 평하고, 또 略疏에는 北都 藏海寺의 道詮法師疏를 인용하여  濕彌羅 三藏법사인 佛陀多羅가 長壽二年(AD 693)252) 龍集癸巳에 梵本을 가지고 東都에 이르러 白馬寺에서 번역하여 4月 8日에 번역을 마치니 兩卷 28紙였으며 度語, 筆授, 證義, 潤文 등 諸德들은 別錄에 갖추어 밝혔다고 하였으나, 아직도 어느 本에 의거하였는지 그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薦福寺의 堅志法師疏에도 譯主와 年月이 道詮의 설과 동일한 것으로 되어 있다.

宗密은 크게 이 經을 연구하여 大疏三卷, 大 十三卷, 略疏兩卷, 小 六卷, 道場修證儀十八권을 지어 經旨를 선전하는데 노력하였다. 이토록 圓覺經 연구에 몰두하게 된 것은 우연한 因緣이 아니다. 出家한 후 衆僧을 따라 任灌이라고 하는 집에서 齋를 지낼 때 이 圓覺經을 독송하게 되었는데 이 경을 독송하기 두서너 장에 이르러 문득 몸과 마음이 환희함을 금치 못하여 감회를 헤아릴 길이 없어 돌아와 스승인 道圓에게 그 깨달은 바를 고백하였다. 道圓이 말하되 「이는 諸佛이 너에게 法을 주었으니 너는 크게 圓頓의 敎를 弘布할지니라」하고 격려하였다. 이에 宗密은 華嚴, 唯識, 起信 등의 經論을 함께 연구하여 여러 草疏를 찾음과 동시에 諸方의 講伯을 찾아 연구에 盡力하였다. 당시 宗密이 본 疏中에 가장 드러난 疏는 다음과 같다.

上都報國寺 惟慤法師疏一卷

 

先天寺 悟實法師疏兩卷

薦福寺 堅志法師疏四卷

北都藏海寺 道詮法師疏三卷

이러한 疏는 모두 散逸되었으나 그중 惟慤의 說은 略疏中에 三回정도 인용되고 있다. 宗密은 이들 疏를 반복하여 연구한 결과 서로 得失이 있기는 하나 아직 經의 宗旨가 갖추어지지 못함을 간파하고 다시 數種의 疏를 짓게 된 것이다.

宗密은 또한 終南山 豊德寺에서 雜經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別本의 圓覺經을 발견하였다. 너무나 오래된 경전이라 좀이 먹었을 뿐만 아니라, 낡아 헤져서 經末의 두세장 만을 겨우 알아 볼 수 있었다. 그 跋語에 貞觀253) 二十年歲次丁未(貞觀二十年은 646年, 丁未는 647) 七月乙酉朔十五日己亥에 潭州 寶雲道場寺에서 번역을 마쳤으니 飜語 沙門은 羅 , 曇 이요 執筆 弟子는 姜遁恪, 證義大德들은 智 , 法 , 慧全, 寶證, 道義라 하였으나, 그 虛實은 알 수 없다. 혹은 貞觀 二十年에 이미 번역되었으나 다만 王에게 秦聞하지 못하였으므로 남방에 머물러 있어서 北藏에는 入藏되지 못하다가 비로소 長壽 二年(693)에 流布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254)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이는 후인의 詐謬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2. 本經에 대한 眞僞

이 經의 번역한 때가 二十年未滿中에 불분명하게 되어 高宗朝라고 하는 이와 則天時代라고 하는 二說이 생기게 됨을 볼 수 있다. 佛祖統記에는 前說을 좇아 永徽六年(655)255)이라고 하고 있으나 宗密은 그것을 誤謬하고 하여 道詮, 堅志의 長壽 二年(693)說을 긍정하고 있다. 道詮의 具如別錄이라 한 것을 宗密은 무슨 圖錄인가를 알지 못한다 하였고, 그 아래에 證義로써 京兆의 皇甫氏 范氏 沙門 復禮, 懷素라고 하는 一說을 인용하여 「乍可不知 不得安生異說이리요」라고 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번역한 年代가 未詳이라 하여 중국의 어떤 大法師는 이 經을 違境이라고 논란한 일까지 있었다.

唐代의 譯經은 그 緣起가 모두 명백하였는데 유독 이 圓覺經과 楞嚴經만이 經旨가 거의 동일하면서도 그 번역과 전래에 대해서는 석연치않은 점이 많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經의 번역연대가 高宗朝인가 則天朝인가가 확실치 않을 뿐만 아니라 貞觀年代에 대해서도 학자들간에 논란이 있어 이로 인하여 眞僞의 문제를 惹起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이리하여 이 兩說이 많이 流布된 반면 학자를 현혹케 하는 문제가 附隨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智昇의 開元釋敎錄에는 이 經이 절대로 轉迷開悟를 위한 조리가 정연하고 禪旨가 분명한 經이므로 옛날부터 그토록 논란이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3.本經과 類似한 經論

本經의 내용을 살펴보건대 의아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다. 첫째 大方廣圓覺수달了義經이란 제목부터가 이상하다. 修多羅가 契經의 梵稱일진댄 了義經이란 經자는 되풀이되는 셈이다. 뒤의 經字는 필요없는 것인데도 이 제목 가운데는 두 개의 經字를 포함하고 있어 一經의 제목으로써 체재가 정연하지 못하다.

그리고 圓覺經은 楞嚴經과 서로 비슷한 부분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威德自在章과 辨音章에서 보인 奢摩他, 三摩鉢提, 禪那에 대한 三觀의 설은 大佛頂首楞嚴經(第一卷九張下一行)

 

에 妙奢摩他, 三摩, 禪那라 하였고, 同經五十種辯魔章(第九卷十一張下一行∼第十卷二十張下四行)에는 광범위하게 五蘊을 들어 禪那의 現經과 아울러 三摩鉢提와 奢摩他를 설명한 것과 같으며, 또 文殊章에서 밝힌 空中華와 第二月의 비유도 楞嚴經에 나오고 있다. 즉 楞嚴經(第二卷十六張上五行)에 「佛言하사대 此見의 妙明과 與諸空塵도 亦復如是하야 本是妙明하니 無常菩提의 淨圓眞心이어늘 忘爲色空과 及與聞見함이 如第二月하니 誰爲是月이며 又誰非月이리요」라 하였고, 第四卷(九張下 十行)에 「亦如 人이 見空中華인달하니  病이 若除하면 華於空滅하나니 忽有遇人이 於彼空華의 所滅空地에 待華更生하면 汝觀是人하라. 爲遇아 爲慧아 富樓那言하되 空元無華어늘 妄見生滅하니 見華滅空함이 正是顚到어늘 勅令經출하니 斯實狂癡어니 云何更名如是狂人호되 爲遇爲慧이닛고」라고 空華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圓覺이란 語句도 楞嚴經(第六卷十五張下一行)에 「身興所觸同이라 各非圓覺經이니 涯量不冥會어니 云何獲圓通이리요」同經(第十卷十八張上十一行)에 「是名第十圓覺 心으로 成湛明果니라」하였다. 이 밖에도 圓覺經과 楞嚴經문이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은 것으로 미루어 이 經을 楞嚴經에 의한 바가 많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宗密은 圓覺經略疏卷上之一에 이 經의 義旨가 大乘起信論의 내용과 유사한 점이 지적하였다. 즉 淸淨慧章에「此名凡夫의 隨順覺性과 此名菩薩未入地者의 隨順覺性과 此名菩薩已入地者의 隨順覺性과 此名如來의 隨順覺性이라」설한 것은 起信論의 不覺(凡夫이니 十信)과 相似覺(未入地者이니 三賢)과 隨分覺(已入地者이니 十地)과 究竟覺(如來이니 無上覺)에서取說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雙溪寺 板理繹本 起信論 第一卷 六十二張上末行∼六十八張下六行)

그러므로 楞嚴經은 옛날부터 僞經이란 說이 있으며 이에 따라 經의 譯出年代가 분명치 않으며 譯主인 佛陀多羅의 行蹟도 명백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疑僞의 經論에 의거하여 그이 義旨를 서설한 부분을 볼수 있으므로 이 圓覺經도 결정코 梵本의 譯出이 아니고 中國 唐初期에 僞撰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4. 內容의 槪要

 

이 經도 通例에 따라 序分, 正宗分, 流通分의 三分으로 分類하여 서술하였다. 처음 序分에서는 부처님이 神通大光明藏에 들어가 三昧禪定에 든 大衆十萬보살과 함께 如來平等法會에 머무름을 설하였다. 이 會座에는 十二菩薩의 이름이 열거되었으니 文殊, 普賢, 普眼, 金剛藏, 彌勒, 淸淨慧, 威德自在, 辨音, 淨諸業障, 普覺, 圓覺, 賢善首보살 등이다. 부처님께서 이상의 十二보살을 위하여 大圓覺의 妙理를 설하신 것이 本經의 내용이다. 正宗分에 十一人, 流通分에 一人이 發問者로서 등장되고 있다. 正宗分에 十一問答으로 되어 있는 것을 宗密은 다음과 같이 分科하였다.

第一令信解眞正成本起因                                                   文殊

            微釋用心                                                     普賢

                                              開示觀門同佛               普眼

                               通明觀行       微釋迷悟始終               金剛藏

第二令                         (上根修證)     深究輪廻之根                彌勒

依解修行                                      略分修證之分               淸淨慧

隨根證入

 

 

                                                            示三觀行相   威德自在

            廣明行相                          三觀修行      

                                                            明單複修習   辨音

                               別名觀行

                               (中根修證)                    除我入覺     淨諸業障

                                              兩重除障            

                                                            依師離病     普覺

                                道場加行                                 圓覺

                                (下根修證)                            

 

 

 

 

 

 

 

第一問答에 먼저 生滅變化가 없는 圓覺妙心을 제시하고 第二問答以下는 그 妙心에 깨달아 들어가는 수행방법을 설하고 있다.  

第一文殊菩薩章에는 如來因地의 法行과 大乘에 청정한 마음을 발하여 煩惱의 병을 없애는 방법을 물었다.

부처님께서 이에 대하여 답변하시기를 「無上法王에 大陀羅尼門이 있으니 이름이 圓覺이라, 이로부터 일체청정한 眞如와 菩提와 涅槃과 波羅密을 流出하여 보살을 敎授한다. 一切如來가 因地에서256) 圓覺淸淨한 覺相에 의하여 無明을 길이 끊어야만 비로소 佛道를 이루게 된다. 결국 生滅變化함을 봄은 無明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無明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이 無明은 사실 實體가 있는 것이 아니다. 비유컨대 꿈을 꿀 때에는 夢經의 實體가 없지 않았지만 꿈을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 일체가 空華인 줄 알면 輪轉함이 없고 따라서 身心이 生死를 받을 것이 없다. 이는 짓는 연고로 없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없기 때문이다. 如來藏中에는 起滅이 없고 知見이 없는 까닭이다. 法界性은 究竟에 圓滿하여 시방에 두루하나니, 이것이 곧 因地法行이요, 覺이 시방에 두루하면 이것이 곧 佛道를 이룬 것이다. 보살의 發心은 이 가운데세서 해야 하고 이에 의하면 수행하면 邪見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하고 이 뜻을 거듭 펴고자 하여 偈頌으로 결론지었다.

第二普賢菩薩章에는 「身心이 함께 幻滅이라면 누가 수행을 하며 만약 수행하는 자가 없다면 어떻게 妄想心으로 해탈할 수 있습니까?」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善男子야, 일체중생의 갖가지 幻化가 모두 如來의 圓覺妙心에서 생겨난 것이 마치 空華가 허공에서 생기는 것과 같다. 幻化는 비록 멸하지만 空性은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모든 幻은 멸하여 없어지지만 圓覺의 妙心은 동하지 않는다. 幻에 의하여 覺을 설명함도 또한 幻이다. 만일 각이 있다 말하여도 幻이며 각이 없다 할지라도 또한 幻이다.

그렇다면 먼저 幻經을 멀리 여의고 離幻의 마음도 또한 멀리 여의며 離幻의 離도 멀리 여의고 離의 離도 또한 멀리 여의어 드디어 여읠 것이 없는 經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든 幻을 滅盡하는 것이다. 모든 幻은 비록 다 멸했으나 결코 斷滅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즉 圓

 

覺의 眞心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幻인 줄 알면 곧 여읨이라, 方便을 가자하지 않으며, 幻을 여의면 곧 覺이라, 또한 漸次를 요하지 않는 것이다」하고 偈頌으로 長行의 뜻을 묶어 결론지었다.

第三普眼菩薩章에는「正方便과 政思惟가 없으면 이 三昧를 듣고 마음에 迷悶을 내어서 圓覺에 悟入하지 못하리니 수행의 漸次를 설하여 주소서」

이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답변하시되 「먼저 禁戒를 굳게 지키고 靜室에 고요히 앉아 四大로 화합된 몸도 필경에 體가 없으며, 六根과 六塵 사이에서 생긴 마음은 마침내 가히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관찰하지니라(我空). 幻身이 멸할 때 幻心도 멸하고 따라서 幻塵도 또한 멸한다(法空). 心이 청정하면 六根이 청정하고 六根이 청정하면 六塵이 청정하다. 따라서 十力257) 四無所畏258) 四無 智259) 十八不共法260)  三十七助道品261)이 청정하며, 내지 八萬四千陀羅尼門이 일체가 청정하나니라(眞空絶相觀). 覺性이  滿不動함으로 六根과 六鎭과 四大 등도 또한 法界에  滿하여 壞함도 雜함도 없느니라(理事無碍法界). 覺性이  滿하여 일체가 覺이므로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어서 生死를 싫어할 것도 없고 涅槃을 좋아할 것도 없으며, 持戒한 이를 존중히 여길 것도 없고, 破戒한 이를 미워할 것도 없으면, 오래 修習한 이를 존중히 여길 것도 없고, 初學이라 해서 멸시할 것도 없다. 이러한 經旨에 이르면 衆生이 본래 成佛이며, 生死涅槃이 어제 꿈과 같음을 알게 된다. 지난 밤 꿈과 같으므로 所證의 경계에 得失取捨가 없으며, 그 능히 증둑한 마음에 作止任滅이 없다. 이 증득한 가운데는 能所가 없으므로 필경 證도 없고, 證평할자도 없어 一切法性 平等不壞하느니라(頓同佛經)」하고 張行의 뜻을 묶어 偈頌으로 읊었다.

第四金剛藏菩薩章에는 金剛藏보살이 세가지 의심을 물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중생이 본래 成佛했을진댄 무슨 까닭으로 다시 一切無名이 있으며, 만약 모든 無名을 중생이 가졌을진댄 무슨 인연으로 如來가 다시 本來成佛이라 하며, 十方異生이 본래 佛道를 이루고, 後에 無名을 일으킬진댄 一切如來는 어느 때에 다시 일체번뇌를 내나이까」위의 물음을 보통 剛藏三惑이라 한다.

부처님은 金剛藏으로부터 이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善男子야, 一切世界의 始終生滅과 前後有無와 聚散起止가 念念相續하여 循幻往復하는 種種取捨가 모두 윤회인 것이다. 만약 輪廻心으로써 圓覺을 가리면 圓覺의 性도 유전하는 것과 같은 것이 마치 구름이 움직임에 달이 가는 것 같이 보이며, 배가 지나감에 언덕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보이는 것 같다고 비유하였다. 또한 눈병으로 인하여 虛空華를 보았지만 그 꽃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金鑛 속의 金이 녹음으로써 비로소 생긴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圓覺성이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본래 菩提와 涅槃도 없으며, 또 成佛과 不成佛도 없으며, 妄輪廻와 非輪廻도 없거늘 범부들이 사유심으로써 圓覺경계를 헤아리는 것은 마치 반딧불로 須彌山을 태우려 하는 것과 같다」고 하시고 위의 長行의 뜻을 偈頌으로 읊었다.

윤회의 마음으로 위와 같은 세 가지 의혹을 가지게 되니 윤회의 見이 있는 한 如來의 大寂滅海에 들어갈 수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第五彌勒菩薩章에는 「윤회의 근본은 무엇이며 윤회의 상은 몇 가지나 되며 또 修證에는 몇 가지 차별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부처님은 이 질문에 대하여 「善男子야, 一切衆生이 無始際로부터 種種恩愛와 食欲이 있으므로 윤회가 있게 된다. 胎, 卵, 濕, 化의 四生이 모두 음욕으로 인하여 性命을 정하나니 윤회의 근본은 애욕이다. 일체중생이 탐욕으로 말미암아 無明을 발휘하여 五性(聲聞性, 緣覺性, 菩薩性, 如來性, 外道性)의 차별을 나타내며 二種障을 일으킨다. 그 하나는 理障이니 正知見을 장애하고 다른 하나는 事障이니 生死를 상속시킨다. 어떤 것이 五性인고. 善男子야, 二障을 단멸하지 못함을 未成佛이라 하고, 길이 탐욕을 버리고 事障을 제했다 할지라도 理障을 끊지 못하면 聲聞, 緣覺에 깨달아 들어갈 뿐이오, 菩薩經계에 주하지 못하며…, 二障을 이미 항복하고 보살의 경계에 吳入하여 길이 二障을 끊으면 如來의 圓覺에 들어가며, 善知識을 만나 修習하는데 頓漸이 있으니 만약 如來를 만나면 근기의 大小가 없이 모두 佛果를 이루며, 善知識을 만난다 할지라도 邪見者를 만나면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나니 이를 外道種性이라 한다.…

善男子야, 말세의 중생들은 大圓覺에 增上心을 일으켜 청정한 大願을 발하되, 내 이제 善知識을 만나 外道와 二乘을 만나지 않고 모든 장애를 끊고 解脫法殿에 올라 大圓覺을 증득하여지이다 하라」하시고, 長行의 뜻을 묶어 偈頌을 읊었다.

第六淸淨慧菩薩章에는 衆生과 菩薩과 如來의 所證差別을 물었다.

「勞慮을 길이 끊고 法界淨을 얻었으나 그 淨解가 스스로 障碍가 되어 圓覺에 자재치 못함을 범부의 隨順覺性이라 하고, 비록 解 는 끊었으나 오히려 見覺에 주해서 見 에 걸려 자재치 못함을 未入地菩薩의 隨順覺性이라 하고, 照와 照者가 한 가지 적멸함을 已入地菩薩의 隨順覺性이라 하며, 一切障碍가 究竟覺임을 알아서 得念失念, 成法破法, 智慧遇癡, 菩薩外道, 無明眞如, 三學三毒, 衆生國土, 地獄天宮, 有性無性, 煩惱解脫을 평등으로 관하여 法界海慧로 諸相을 照了하기를 허공과 같이 함을 如來의 隨順覺性이라」하시고, 이상 長行의 뜻을 간추려 偈頌으로 읊었다.

第七威德自在菩薩章에는 수행인과 方便漸次에 몇 가지 종류가 있는가를 물었다.

부처님은 이 물음에 대하여 「方便隨順에는 그 수가 무량하나 이를 요약하여 奢摩他262) 三摩鉢提263) 禪那264)의 세가지로 나눈다. 諸念을 澄寂함으로써 靜慧가 발생하여 안으로 寂靜經安을 발해 시방세계의 如來心이 나타남이 거울 가운데 나타난 像과 같음을 奢摩他라 이름한다.(泯相澄神觀) 淨覺心으로 心性과 根塵이 모두 幻化로 인하여 諸幻을 일으킴을 知覺하고 增進함을 三摩鉢提라 이름한다.(紀幻鎖塵觀) 淨覺心으로 幻化와 靜相을 취하지 아니하며  와 無 經을 초월하여 번뇌와 열반이 서로 걸리지 아니하여 안으로 寂靜輕安을 발하여 자

 

타의 身心으로 능히 미치지 못하는 寂滅境界에 안주함으로 禪那라 이름한다.(絶對靈心觀)

가령 어떤 사람이 중생을 교화하여 百千萬億 阿羅漢과  支佛果를 성취케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이 圓覺法門을 듣고 一刹那頃에 隨順修習함만 같지 못하느니라」말하고 長行의 뜻을 偈頌으로 읊었다.

第八辨音菩薩章에는 辨音보살이 「圓覺門에 몇 가지 수습하는 길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一切如來의 圓覺이 청정해서 본래 修習과 修習할 자가 없건마는 일체중생의 말세중생이 깨닫지 못해 幻力으로 修習하는데 二十五種의 淸淨定輪이 있음을 보였다. 즉 奢摩他(靜)와 三摩鉢提(幻)와 禪那(寂)인 三行을 單으로 一行만 닦는 單修三觀과(3人) 三行을 複修하는 複修三觀(21人)과 三行을 圓修하는 圓修三觀(1人)이 있으니 도합하면 二十五種이다.

이 輪을 의지하고자 하는 자는 梵行을 지니면서 고요히 사유하고 求哀懺悔하여 三七日을 지나 二十五輪에 각각 標記를 하고 손을 따라 結을 취하고 結의 開示에 따라 문득 頓漸을 알거니와 一念이라도 의심하면 성취하지 못하리라 하시고 長行의 뜻을 偈頌으로 읊었다.

第九淨諸業障菩薩章에는 「本性이 청정할진댄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이 覺心에 들어가지 못하게 함은 무슨 染汚 때문인가. 현전대중과 말세중생에게 將來眼을 베풀어 주옵소서」라고 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善男子야, 일체중생이 無始로부터 망상으로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에 집착하여  중생의 탈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四相을 我의 實體라 誤認함으로써 憎愛의 二境을 내고, 虛妄의 體에 거듭 虛妄이라 집착하여 二妄이 서로 의지해서 妄業을 내고, 妄業이 있으므로 망녕되이 유전함을 보고 유전을 싫어하는 자는 망녕되이 열반을 본다. 그러므로 淸淨覺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지, 覺이 모든 들어오는 자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一切覺을 비추어 보면 모두 塵垢이다. 覺과 所覺이 함께 塵을 여의지 않으며, 我를 두고 我를 깨닫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다」라고 하였다. 我人 등 四顚倒의 相을 了知하여 貪, 瞋, 愛, 慢 등의 모든 번뇌를 제멸함으로써 淸淨覺海에 깨달아 들어감을 설하시고 長行의 뜻을 偈頌으로 간추려 읊었다.

第十普覺菩薩章에는 「修行하고자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을 구하며, 어떤 法을 닦아야 하며, 어떤 行을 행하며, 어떤 병을 제거하여야 하며, 어떻게 발심하여야 群盲들로 하여금 邪見에 떨어지지 않게 하오리까」하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正知見으로서 二乘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비록 塵勞를 나타내나 마음이 항상 淸淨한 善知識을 구하여 身命을 아끼지 않고 공양해야 하며, 作止任滅의 四病을 여의어야 淸淨한 妙法을 증득할 수 있다. 어떤 것이 四病인가.

첫째는 作病이니 갖가지 行을 지어서 圓覺을 구하고자 하면 圓覺의 性은 지어서 얻는 것이 아니므로 病이다. 둘째는 任病이니 생사를 끊고 열반을 구하지 아니하고 一切諸法의 性을 일임하여 圓覺을 구하고자 하면 圓覺의 性은 任有가 아니므로 病이다. 셋째는 止病이니 길이 모든 망념을 쉬고 一切性을 얻어 寂然平等한 것으로써 圓覺을 구하고자 하면 圓覺의 性은 止合이 아니므로 病이다. 넷째는 滅病이니 아주 일체의 번뇌를 끊으면 身心이 필경에 공하여 있는 바가 없거니 하물며 根塵의 허망한 경계가 있으랴, 일체가 길이 고요한 것으로써 圓覺을 구하고자 하면 圓覺의 性은 寂相이 아니므로 病이다. 이러한 관찰을 하는 자는 正觀이요 달리 관찰하는 자는 邪觀이라」하시고 이상 長行의 뜻을 偈頌으로 읊었다.

第十一圓覺菩薩章에는 圓覺보살이 묻되 「말세 중생이 어떻게 安居하여 이 圓覺경계를 닦으며, 이 圓覺 가운데 三種淨觀은 무엇으로써 首를 삼으리까」하였다.

「善男子야, 大圓覺을 믿어 수행하고자 하는 자는, 道場을 건립하고 기한을 정하되, 長期

 

는 百二十日, 中期는 百日, 下期는 八十日로 하라. 처음 三七日 동안은 시방의 諸佛名字에 머리를 조아려 간절히 참회할지니라.

만약 夏首를 지나 三月을 안거하면 淸淨한 보살과 止佳하고 마음에 聲聞을 여의고 大圓覺으로써 가람을 삼아 身心이 平等性智에 안거하여 시방의 如來와 대보살과 안거할지니라. 三期日을 지나면 마음대로 가고자 하는 데로 가도 무방하나니라.

만약 奢摩他를 닦고자 할진댄 먼저 至靜을 취하여 思念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지니, 靜이 極하면 문득 깨달으리라. 三摩鉢提를 닦고자 할진댄 시방여래 및 보살들이 種種門에 의하여 점차로 수행한 勤苦三昧를 기억하여 大願을 발할지니라. 禪那를 닦고자 할진댄 먼저 數息觀을 취하여 心中의 生住異滅의 分齊頭數를 了知하고, 이와 같이 三種方便에 의해 修行하면 마침내는 百劫世界의 빗방울까지 알게 됨이 마치 손바닥안의 물건을 보는 것과 같이 되리다.    

이것을 三觀의 初首方便이라 하니, 만약 三觀을 두루 닦아 부지런히 정진하면, 如來가 出世함과 같다」하시고 長行의 文을 간추려 偈頌으로 읊었다.

第十二現善首菩薩章에는 現善首보살이 「이 圓覺經의 末世流通을 위하여 이 經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며 어떻게 받들어 가지며, 중생들이 修習하면 어떠한 공덕을 얻으며, 經을 지송하는 사람을 어떻게 호위하며, 이 經을 流布하면 어느 경지에 이르게 되옵니까」하고 물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다. 「이 經은 백천만억항하사제불이 설한 것으므로 三世如來가 수호하는 바이며, 시방보살이 귀의할 대상이며, 十二部經265)의 眼目이니, 이 經의 이름은 다음의 다섯 가지로 칭한다.

1 大方廣圓覺多羅尼經 2 修多羅了義經 3 秘密王三昧經 4 如來決定境界經 5 如來藏自性差別經

이 經은 오직 如來의 경계를 나타냈으므로 오직 如來만이 능히 經의 내용을 다 설할 수 있다. 만약 보살이나 말세중생이 이에 의하여 수행하면 佛地에 이르게 된다.

「이 經을 듣고 身心으로 의혹하지 않는 이는 一佛, 二佛의 처소에서 福慧를 심었을 뿐 아니라 恒河沙佛所에서 善根을 심었으므로 이 經敎를 듣게 된다」는 말을 듣고 會中의 火首,  碎, 尼藍婆金剛 등 八萬金剛神將과 大梵王, 二十八天王과 아울러 須彌山王, 護國天王 등과 吉槃茶 등 十萬鬼王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우리들도 經을 수지하는 사람을 朝夕으로 侍衛하여 그로 하여금 퇴굴치 않게 하겠사오며, 經을 수지하는 사람이 거주하는 一由旬內에 만약 귀신이 그 주위를 침범하면 우리가 마땅히 그들을 쳐부수어서 微塵과 같이 하겠나이다」하고 經을 수지하는 자를 호위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부처님께서 이 經을 설하여 마치자, 모든 菩薩과 天, 龍, 鬼神, 八部眷屬과 諸天王, 梵王

 

등 일체대중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모두 환희하여 信受奉行하였다는 내용을 실은 경전이다.

 

5. 本經의 大意

 

이 經의 특수성은 다른 經에 발기인이 흔히 한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本經에는 十二菩薩이 차례로 등장하여 문답식으로 법문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설법한 방법을 살펴볼 때에 청중의 이해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주입식인 교육을 한 것이 아니라, 일일이 제자들에게 이해의 여부를 확인하면서 문답식인 法문을 한 것은 어느 다른 宗敎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민주적인 교육이라 하겠다.    

圓覺經 全般의 大意는 斷無明의 顯佛性이지만 각각 菩薩의 大意를 소개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涵虛스님은 十二章을 배대한 즉 文殊一章은 信解門을 의지해서 大를 밝혔고, 普賢으로부터 淨諸業章 등 八章은 自利門을 의지해서 方을 밝혔고, 普覺一章은 利他門을 의지해서 廣을 밝혔고, 圓覺一章은 證化究竟門을 의지해서 圓을 밝힌다고 하였다.

이 圓覺經은 大乘圓頓의 교리를 개시하고 주로 觀行을 역설하여 頓悟成佛의 경지를 주장하므로 賢首五敎266)에 배대하면 頓敎에 해당하고 부분적으로 華嚴經과 같으므로 分同華嚴經이라고 한다. 本經의 주장은 覺性이 法界에 두루해 있으므로 만약 일체를 버리고 不生不滅의 如來藏, 다시 말하면 大圓覺心의 妙用을 발휘한다면 生死와 涅槃이 오히려 지난 밤 꿈만 같아서 頓悟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文    殊 ― 達天眞 ―

普    賢 ― 明緣起   ― 頓  ―

普    眼 ― 問觀行 ―

金 剛 藏 ― 辨三惑 ―

彌    勒 ― 斷輪廻   ―  

淸 淨 慧 ― 分證位 ―         ― 斷無明顯佛性

威德自在 ― 起三觀 ―

辨    音 ― 修單複

淨諸業障 ― 除四相

                     ―下  ―

普    覺 ― 離四病

圓    覺 ― 三期懺

現 善 首 ― 請流通 ―

 

6. 結語

 

圓覺妙心을 깨달아 들어가는 데는 上, 中, 下의 세 근기가 있다. 즉 普賢下의 五章(普賢, 普眼, 金剛藏, 彌勒, 淸淨慧)은 上根機의 修證을 설하고, 威德自在 이하의 四章(威德自在, 辨音, 淨諸業障, 普覺)은 中根機의 修證을 설하였다. 上根은 信解로써 바로 깨달아 들어가지만, 中根은 解에 의해서 行을 통해서 들어가고, 下根은 方便에 의하여 證入하므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결국에는 成佛할 수 있음을 설하였다. 또한 大圓覺을 깨닫는 데는 頓悟와 漸修의 二門이 있다. 즉 文殊의 一章은 頓悟法門이요, 第二普賢 이하의 三觀(奢摩他, 三摩鉢提, 禪那)과 二十五輪은 漸修의 法門이다. 또한 禪觀을 수행해야 함을 강조한 일종의 坐禪儀라고도 하겠다. 특히 禪門에서는 옛날부터 所依經典으로서 이 圓覺經과 維摩經과 楞伽經을 합해서 禪三經이라고도 한다.

이 經은 頓敎大乘이므로, 頓機衆生들이 깨달아 들어가나, 또한 일체 중생들도 모두 포용된다. 비유컨댄 마치 大海가 小流를 사양하지 아니하고 내지 모기나 깔닥이(蚊 ) 그리고 阿修羅까지도 그 물을 마시는 자는 모두 배가 부르는 것과 같이, 누구나 이를 의지하여 修行하면 成佛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가사 어떤 사람이 三千大千世界에 가득찬 七寶로 보시한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이 圓覺經의 이름과 한 구절을 듣는 것만 같지 못하며, 또 어떤 사람이 백천항하사중생을 교화하여 阿羅漢果를 얻게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이 圓覺經의 半偈頌의 뜻을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해 주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여, 이 經의 수승함을 극구 찬양하였다.

이 經에 대하여 註疏를 한 자가 비록 많으나 唐나라 圭峰宗密禪師가 가장 많이 서술하였으니, 大方廣圓覺經大  三卷, 大方廣圓覺經略疏 二卷, 大方廣圓覺經大  三十卷, 大方廣圓覺經道場修證儀十八卷, 大方廣圓覺經禮懺略本四卷 등이 있다. 우리나라 스님으로서는 李朝 시대 涵虛得通(1376∼1433)스님이 鳳岩寺에서 圓覺經註解 上, 中, 下 三卷을 지어 그 때 곧 板 刻한 듯하나 아직 그 책은 보지 못하였고, 그 후 1883년에 새긴 板이 유행하고 있다.

 

                              參考文獻

                  楞嚴經                         戒環解

                  圓覺經                         涵虛解

                  佛典の 解說                    常盤大定 著

                  韓國佛敎所依經典硏究           李智冠 著  

   

 

 

 

 

 

 

 

 

 

 

 

 

 

 

 

 

 

 

曹溪宗의 成立

 

 

目    次

 

   1. 序 說              3. 曹溪宗旨의 成立

   2. 曹溪宗의 由來      4. 結 語

 

1. 序 說

 

신라가 三國을 통일한 후 제 30대 文武王 시대로부터 제 41대 憲德王 시대까지 약 150년 간에 걸쳐 敎宗은 涅槃經, 戒律宗, 法性宗, 法相宗, 華嚴宗 등 五宗으로 분리되어 교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불교를 크게 선양하였다. 그런데 당시 신라의 敎宗은 大小乘의 구별이 있었으나 經論으로써 所依를 삼은 까닭에 敎니, 禪이니 하여 이른바 禪과 敎의 분쟁은 없었다.

達磨의 禪法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道敎國師로부터 비롯하였으니 憲德王 5년에 道義國師가 唐나라에 가서 馬祖의 法嗣인 西堂智藏에게 참학하여 不立文字 見性成佛의 禪旨를 수학하고 귀국한 후부터다. 즉 신라 헌덕왕 이후에 이르러서 迦智山 道敎, 實相山 洪陟, 桐裡山 惠哲, 聖住山 無染,   山 梵日, 師子山 道允, 曦陽山 眞鑑, 鳳林山 玄昱,  彌山 利嚴 등 九山禪門의 禪師들이 차례로 開山하고 敎外別傳의 禪法을 드날림으로써 禪과 敎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新羅末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禪法은 高麗에 들어오면서 더욱 宗風을 떨쳐 九山門의 禪派를 성립시켰다. 新羅末에 형성되기 시작했던 九山門은 高麗에 와서 眞澈利嚴大師가 須彌山派를 성립함에 의해서 비로소 완성되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신라에서는 전 불교를 통틀어 五敎九山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五敎와 九山이 대립하여 있던 불교 교단은 다시 高麗 제 15대 肅宗王 2년에 이르러 大覺國師의 天台宗이 禪宗의 영역 내에 들어옴으로부터 五敎兩宗으로 되었다. 즉 九山禪門은 동일하게 慧能大師의 法孫에 속하는 불교 교단이므로 이것을 총괄해서 曹溪宗이라 하고 天台宗과 합하여 禪門兩宗이라 하였다.

 

2. 曹溪宗名의 由來

 

達磨大師가 小林窟에서 9년간 面壁觀心을 행하고 坐禪行을 전파한 이래 그 法을 전승하는 자에 대하여 禪師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그리하여 禪家니, 禪家風이니, 혹은 禪家의 宗風이니 하는 명칭을 거쳐 드디어 禪宗이라는 명칭이 성립하였다. 그런데 이 禪宗이라는 명칭은 達磨의 좌선법을 계승하는 僧團에 대한 칭호요, 臨濟宗, 曹洞宗 등 五家가 한 종파의 단체명으로 확정되지 않은 채 達磨禪法이 한국에 전래하여 九山이 開山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불교의 종파를 말하자면 敎學的인 면으로는 五宗을 세우고, 禪學적인 면으로는 九山이라고

 

할 뿐, 아직 曹溪宗이라고 하는 宗名은 없었다. 다만 九山을 총칭할 때에는 禪宗, 禪寂宗, 혹은 九山門, 達磨九山이라고 하여 그 명칭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러한 명칭이 曹溪宗으로 바뀌게 되었는가. 이에 대하여 李能和 先生의 著書인 『佛敎通史』가운데 「普照後始設曹溪宗」이라는 제목하에

「熙宗卽位 命改號爲曹溪山修禪社 曹溪設宗 始見此」

라는 구절이 있다. 즉, 일반적으로 普照國師가 松廣山 吉祥寺를 曹溪山 修禪社라고 改名한데 의하여 曹溪山名이 처음으로 생겼으며, 이 山名에 따라서 曹溪宗名이 성립되어 普照國師 이후부터 曹溪宗이 전하여겼다고 한다. 그러므로 禪寂宗이 曹溪宗으로 改名된 것은 고려 제15대 肅宗 6년으로부터 제17대 仁宗 10년까지 31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생각건대 大覺國師의 天台宗 開山의 영향을 받아 曹溪宗이 성립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불교의 宗派에는 大覺國師 이전에는 五敎九山이 있었고, 大覺國師 이후에는 五敎兩宗이 있었다. 兩宗 명칭은 高麗 제22대 康宗 2년에 세운 華藏寺 靜覺國師 碑銘中에

「凡於兩宗之敎 求可以承當之任者 無出師……」

라고 한 것보다 이전의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大覺國師의 天台宗 창립 이후에 비로소 兩宗의 명칭이 세상에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朴浩撰의 大覺國師 墓銘 가운데 있는 六宗(戒律宗, 法相宗, 涅槃宗, 法性宗, 圓融宗, 禪寂宗)中의 「禪寂宗」은 九山을 총칭한 것이다. 그러므로 五敎九山을 五敎一禪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大覺國師 이전에 五敎一宗이 있고 國師가 다시 天台宗을 증설함에 이르러 다시 五敎兩宗이 되었고 동시에 禪寂宗을 개칭하여 曹溪宗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天台宗은 北齋의 慧文이 창립한 宗으로서 天台智者에 이르러서 大成하였으므로 天台宗이라고 한 것과 같이, 九山에서도 禪道는 達磨大師가 창립한 것으로 大祖曹溪 寶林寺 慧能에 이르러 大成하였으므로 九山을 합하여 曹溪宗이라고 하는 宗名을 확립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당시는 曹溪宗과 天台宗을 합하여 禪宗兩宗이라고 하고 戒律宗, 法性宗, 圓融宗, 法相宗, 涅槃宗을 敎家五敎라고하여 五敎兩宗이라고 하면 한국 불교 禪敎兩宗을 총칭하는 명사가 되었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曹溪宗名 大覺國師가 肅宗 3년에 天台宗을 세운 때로부터 그 유래를 둔다고 확정하게 된다.

 

3. 曹溪宗旨의 成立

 

고려 大覺國師 당시에 이르러서는 禪敎融和思想이 일반 禪敎 승려들 사이에 유행하여 大覺國師는 華嚴經으로써 曹溪의 禪學을 융섭하고자 하였는데, 이에 반하여 천태종을 개설하여 天台宗과 華嚴宗이 서로 提携하여 禪宗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그 후 普照國師는 이에 반하여 曹溪宗으로서 華嚴敎理를 섭하고자 하여 한국특유의 宗旨인 頓悟漸修를 제창하여 圓頓成佛論을 저술하였다. 圓頓成佛論中에

「非謂華嚴敎門 說理未盡 但學者滯在言敎 義理分齊 未能忘義了心 速證菩提 所以達磨西來    欲令知月不在指 法是我心故 不立文字 以心傳心耳」

라는 구절이 있다. 즉 華嚴敎理의 寶證者요 寶行者다. 그리하여 華嚴敎를 설한 불타의 본 뜻은 중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하는데 있었으나, 중생이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 文字經典에만 집착하여 자기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므로 달마대사가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宗旨를 주장한 것이다. 普照國師는 不立文字 直指人心의 禪旨를 기반으로 해서 인간 개개인이 구족하고 있는 자기의 自性을 頓悟한 뒤에 十信位로부터 三賢十地의 階位次第에

 

의하여 보현의 광대한 원행을 漸修하여 자기 자신에 본래 구족한 無量相好의 功德佛身을 증득한다고 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곧 頓悟漸修라고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禪家에서는 한결 같이 天眞自然을 주로 하고 修行의 방면을 소홀히 여기고, 한편 敎學者들은 한결 같이 漸修成功을 주로 하고 見成悟道를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普照國師는 兩極을 절충조화하는 뜻으로서 禪家 曹溪宗의 本旨인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宗旨에 의하여 自性을 頓悟하고, 敎家 華嚴經의 敎理인 地位次第에 따라 수행하는 普賢行의 本旨에 의하여 漸修하여 成佛하는 頓悟漸修를 제창한 것이다. 이와 같이 頓悟漸修의 曹溪宗의 宗旨가 普照國師에 의하여 완성됨에 이르러 九山禪門은 모두 이 宗旨를 계승하여 내면적으로 통일되었다.

 

4. 結 語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禪門九山이 肅宗 시대에 大覺國師가 天台宗을 수립함에 이르러서 曹溪宗名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후 78년을 지나서 普照國師가 출세하여 定慧雙修라고 하는 한국 특유의 宗旨를 제창하였다. 보조국사는 六祖壇經에 의하여 眞如의 體用 즉 定慧를 깨닫고 다음에 一切經을 열람하다가 李通玄 長者의 華嚴論을 숙독한 후 華嚴經의 頓旨와 禪旨가 서로 어긋나지 않음을 알고, 다시 圭峰의 都序, 大慧의 語錄에 의하여 定慧의 어느 한 쪽도 폐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第一惺寂等持門, 第二圓頓信解門, 第三徑截門의 三門을 수립하여 모든 근기를 제접하였다.

요컨데 定慧雙修로서 三門을 一貴하는 頓悟漸修라고 하는 宗旨를 제창하였다. 禪門九山의 禪僧들은 이 宗旨에 공감하고 이것으로서 曹溪宗旨를 삼는 동시에 普照의 門風을 우러르고 師의 문하에 운집하여 曹溪宗風을 선양하였다. 高麗末에 이르러 太古普愚和尙이 중국 臨濟宗風을 전래하여 普照국사의 第三經截門을 선양하고 또한 曹溪宗下에 九山을 통합하여 완전히 一宗으로 만들었다.

 

 

參 考 文 獻

 

 

                  韓國佛敎思想史            張元圭 講述

                  佛敎通史                  李能和 著

                  韓國佛敎史                禹貞相 ·金煐泰 共著

                  韓國曹溪宗의 成立史硏究   佛敎史學會編

 

 

 

 

 

 

 

 

 

 

 

僧伽敎育의 理念的 考察

 

 

目  次

1. 머리말                          (2) 比丘尼의 특수교육  

2. 現僧伽敎育의 문제점             (3) 一元化된 敎育과 敎授陣의 전문화

  (1) 僧侶들의 교육실태            (4) 修學과 敎授法의 改善

  (2) 在來의 敎科目                (5) 敎育의 義務化

3. 僧伽敎育의 改善方案           4. 맺음말

  (1) 敎材의 改善

 

1. 머리말

 

僧伽敎育의 일선에서 학인들과 직접 經學을 연구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평소 경험을 통해서 느끼고 생각하던 바를 기탄없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승려 자질 향상의 근본이 되는 승가교육의 중요성은 실로 막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十年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나무를 심고, 백년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교육한다는 속담이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는 가장 절실하게 느껴진다.

1955년 佛敎淨化를 한 지도 어언간 3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 지금 그동안 僧團이 많은 시련을 격는 동안에도 불교정화 이후 布敎, 譯經, 徒弟養成을 三大指標로 하여 현재 이 세가지 佛事가 과감히 진행중이기는 하나 그 중 가장 시급한 문제가 도제양성에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보다 나은 역경과 포교를 하기 위해서는 교욱을 받은 손색이 없는 인재라야 역경과 포교에 만전을 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불교의 三大事業의 관계를 자세히 고찰해 본다면, 교육 즉, 도제양성은 포교와 역경을 가능케 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가지는 예전 솥의 세다리와 같이 불가분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도제양성을 떠나서 역경과 포교를 생각할 수 없고, 역경과 포교를 떠나서 도제양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제양성이 제대로 되지 않고는 三大課業의 원만한 성과를 거두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앞으로 불교가 부흥하느냐 아니면 쇠퇴하느냐의 갈림길은 실로 도제양성이 향상되느냐 아니면 저하되느냐에 따라서 좌우된다.

 

2. 現僧伽敎育의 문제점

 

(1) 僧侶들의 교육실태

현 시점에서 우리 종단의 승려들의 교육실태는 어떠한가. 불교정화 이후 종래의 노인 불교, 여성 불교와 기복 불교로부터 벗어나 대학생 불교 연합회를 비롯한 거사림, 달마회, 불교 청년회, 불교 어린이회, 승만 부인회, 법우회, 관음 선행회, 젊은 부루나의 모임, 연꽃 모

 

임, 보문회, 정각회 및 불자 교수회 등 수많은 불교모임이 조직되어 현재 포교의 원활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현시대에 적응하는 승려들의 교육이 부족하므로 현대인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용어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 가능한 현대교육이 절실이 요청된다.

승려교육에서 가장 문제 되는 점은 절름발이식 교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동진 출가한 스님은 어릴 때부터 사원에서 잔뼈가 굵어 자라는 동안 승려 내면의 수행에 있어서는 별 손색이 없으나, 현시대 사조에 적응할 수 있는 면이 결핍되어 있고, 이와 반대로 세속의 교육을 받고 늦게 출가한 사람은 사회에 대한 경험은 어느 정도 있으나 승려로서 갖추어야 할 內典을 수학하지 않으므로 해서 전반적인 승려 자질향상에 크나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이러한 승려들에게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교육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재래식 강원교육만을 받은 학인들의 力量으로써 능히 20세기의 지성인들을 상대로 포교하기란 실로 깊은 샘물에 비하여 길어 올리는 두레박줄이 너무 짧음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禪과 敎를 兼學하는 시대에 각 사찰에 설치된 교육기관은 전통적인 禪院과 講院을 비롯하여 이밖에 念佛院(堂), 律院 등 각 전문도량이 있었다. 이러한 교육기관이 다 갖추어진 大寺刹을 叢林, 즉, 綜合修道院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禪院에는 禪主(禪德), 講院에는 講主(講師), 律院에는 律主(律師)가 있어 각기 교화에 이바지하였다.

禪院은 원칙적으로 講院 修了者가 比丘, 比丘尼戒를 받고 들어가 평생 수행을 하게 됨으로써 근대 사찰 교육은 講院制로써 특징짓게 되었다. 지금도 대부분의 강원 졸업자들이 禪院에 입방하는 것이 통례이며, 禪院은 평생 수도기관으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실정이다.

 

(2) 在來의 敎科目

지금까지 제방 강원에서 수학하고 있는 敎科目은 어느때부터 비롯한 것인가. 이 學制는 朝鮮初 碧松智嚴(1464∼1534) 때 먼저 四集科가 생기고, 제13대 明宗(1545∼1567) 때를 전후하여 芙蓉靈觀(1485∼1571) 때 四敎科와 大敎科가 조직되었다고 한다. 高麗 중엽 때 普照國師가 頓悟漸修의 학설을 주장한 후부터 節要와 都序, 初發心自警文 등의 과목을 학습하게 되었으며, 그 후 碧松을 거쳐 西山淸虛의 四世法孫이 되는 月潭雪霽(1632∼1704)에 이르러 四集科, 四敎科, 大敎科 등 履歷의 學科가 제정되어 금일에까지 우리 講院의 필수학과로 된 것이다.

沙彌科에서 初發心自警文, 緇門을 수확하여 律身의 法을 익히고, 禪學과 敎學의 준비과정으로 書狀, 禪要, 節要, 都序의 四集科를 修了한 후에 楞嚴, 法華, 金剛, 圓覺의 四敎를 연구하고, 다시 大敎科인 華嚴과 格外의 拈頌을 수학하는 것이 순서였었다. 그러나 후에는 다시 四敎中法華의 文義가 平易하다 하여 起信論으로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근 500년 전에 제정된 敎科目이 반세기 동안 별 다른 개정없이 오늘에까지 전수되어 왔으나, 현 시점에서는 敎科目의 改善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3. 僧家敎育의 改善方案

 

(1) 敎材의 改善

근래에 와서는 각 승가대학마다 나름대로 敎材가 다소 改善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內典에만 치중하고 外典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현시대 사조에 적응하는 지도자가 되

 

기 위해서는 保守的인 재래식 교육방법을 탈피하고 학문의 폭을 넓혀 현 사회와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敎科目을 재편성하여 內外典을 겸학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방침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시대의 변천과 문화의 발전에 따라 문교 당국에서도 수차 교과서의 재편성이 있었고, 불교 종립학교에서도 교재가 부실하다 하여 새로 편찬한 일이 있거니아 우리 승가대학에서 수학하는 敎材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검토해 볼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하서 몇 차례 강원 교재 편찬을 위한 모임이 있기는 하였으나 탁상공론에 그칠 뿐 뚜렷한 成果를 거두지 못한 상태이다.

늦은 감이 있으나 지금이라도 다시 한번 유능하고 학덕이 있는 講師스님과 敎授들이 자리를 같이 하여 敎科目 재편성의 기회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필자가 改編하고자 하는 敎科를 예를 들자면 緇門 같은 것은 너무나 분량이 많아서 沙彌尼科를 수료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생각 같아서는 緇門中 新入僧들에게 불교사상을 전달하고 信心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만을 발췌해서 학습하도록 하고, 四集中에 禪要와 書狀은 중요한 부분만 선택하고, 대신 우리나라 西山 스님이 지은 禪家龜鑑이나 普照法語(修心訣)을 삽입하는 한편 外典(東洋哲學, 印度哲學, 西洋哲學, 心理學, 比較宗敎, 佛敎美術)을 겸학하는 것이 보다 폭넓은 교육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經, 律, 論 三藏 가운데 律藏이 교재에서 결여되어 있는데 比丘, 比丘尼戒本은 차치하고(沙彌, 沙彌尼律儀, 比丘, 比丘尼戒는 受戒時에 戒壇에서 修學하므로 이에 省略함) 梵網經만이라도 필수과목으로 정하여 수학하도록 해야만 문란하여진 僧團의 기강이 바로 잡혀지리라 확신한다. 그밖에 原始經典인 阿含經과 小乘佛敎의 기초학인 俱舍論과 大乘佛敎의 기초학인 唯識論을 필수과목으로 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敎學에만 치중하지 말고 史學인 印度佛敎史, 中國佛敎史, 韓國佛敎史, 佛敎文化史, 禪學思想史, 敎理發達史 등을 교재에 포함함과 동시에 일반 교양과목으로는 書藝, 園藝, 佛敎音樂, 梵唄, 儀式 및 불교를 연구하기 위한 한도 내에 외국어(영어, 일어, 중국어, 범어) 등을 선택과목으로 하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덧붙여서 말하고 싶은 것은 敎科目을 전부 중국스님 것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스님인 西山大師의 禪家龜鑑, 元曉大師의 起信論海東疏, 涵虛大師의 圓覺經疏, 普照語錄 등을 택한 것은 오랫 동안 뿌리 박힌 事大思想을 지양하고 自主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改善하고자 하는 교과목의 내용과 년한을 명시하면 다음과 같다.

 

 

       區分

 科別

 수업년한

           科                 目

 비    고

沙彌科

(초등과)

1년

初發心自警文, 沙彌律儀(沙彌尼律儀), 緇門(중요한 것만 발췌), 佛敎學槪論

 수시시험

四集科

(중등과)

1년

書狀, 普照法語, 禪要(중요한 것만 발췌), 禪家龜鑑, 都序, 節要, 阿含經, 俱舍論, 印度佛敎史

 수시시험

四敎科

(고등과)

1년

능嚴經, 起信論(海東疏), 般若經, 圓覺經(함虛疏), 唯識論, 中國佛敎史

 논문작성

大敎科

(대학과)

1년

華嚴經, 梵網經, 華嚴經槪論, 佛敎文化史, 韓國佛敎史

 논문작성

硏究科

(대학원)

무기한

維摩經, 法華經, 涅槃經 등, 傳燈錄, 禪門拈頌, 禪宗思想史

 

    其他

위에 열거되지 않은 敎科目인 哲學(印度哲學, 東洋哲學, 西洋哲學), 佛敎美術, 比較宗敎, 梵唄, 儀式 등은 강사를 초빙하여 특강을 받도록하고 茶道, 園藝, 山中요리, 꽃꽂이 등도 역시 一年에 몇차례 특강기간을 만들어 수강토록함

茶道,

山中요리,

꽃꽂이 등은比丘尼에

속함

 

(2) 比丘尼의 특수교육

한국불교 신도의 대다수가 여성불자이며 비구니수가 또한 막중함에도 불구하고 고래로 비구니는 뒷전에 물러나 있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고, 비구니들 스스로가 그럴 뿐만 아니라, 종단에서도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간주되었던 시절은 이제 지났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여성지도자로서의 비구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유포하는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여성적 특색인 섬세하고 자비스러우며 정직하고 착한 기질을 충분히 발휘하여 불타의 자비사상을 현실생활에 올바르게 전달할 의무와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니 僧家敎育을 하는 데는 茶道, 정진 요리, 꽃꽂이, 상담, 유아교육 등 여성특유의 교양과 생활 속에서 포교할 수 있는 특수교육이 베풀어져야 할 것이다. 욕심 같아서는 졸업한 후에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佛心을 심어주며 봉사할 수 있는 자질을 기르기 위하여 유아교육과를 설치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유치원, 어린이 포교, 고아원, 양로원 또는 환자들의 교화를 담당할 수 있도록 비구니들의 교양을 높이며 나아가서는 여성들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이 꼭 이루어진다면 비구니의 이상적인 교육상이 되리라 생각된다.

특히 우리 비구니들은 여성불교의 선구자로서 앞장 서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비구니들은 여성들의 내면적인 생활 상황까지 파고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在世時에 대애도비구니의 전통을 이어 받아 나아가서는 末世 了然 比丘尼나 신라시대의 禪和子 比丘尼, 최근의 金光(金龍) 비구니나 華山(守玉) 비구니와 같이 우리 스스로의 덕행을 쌓아 한창 발전하고 있는 불법의 동량이 됨은 물론 인류사회의 빛나는 횃불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一元化된 敎育과 敎授陣의 전문화

현재 여러 곳에 분포된 승가대학이 沙彌(尼)科로부터 大敎科에 이르기까지 각기 기량에 따라 통일성 없는 교육을 하고 있기는 하나, 보다 組織的이고 體系的인 一元化된 교육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최근에 교수회의를 통하여 승가대학의 교육년한을 4년으로 정해서 시행하고 있거니와 敎材의 내용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좀 더 현시대사조에 부합되는 敎科

 

目으로 改編되어야 할 것이다. 시대에 부합되지 않는 구태의연한 교재를 가지고 현대를 외면한 내실없는 교육으로 일관한다면 그로 인하여 현실과의 단절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一元化된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승가교육이 종단흥폐의 원동력임에도 불구하고 승가교육을 할 수 있는 교수진이 매우 빈약함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敎授의 자격은 적어도 大敎科와 大學을 졸업하고 5년 이상의 강의경험이 있는 信念과 願力이 확고한 자에 한해서 傳講토록 하고 형식 위주의 전강은 지양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종래의 一人專擔의 강의로부터 專門分擔의 강의로 바꾸어져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승가대학에서 한 사람이 전반적인 敎科目의 강의를 전담하는 교육형태는 최근에 와서 지양되었거니와 앞으로는 각 승가대학에 보다 많은 교수진이 각기 전문분야를 맡아서 강의할 수 있도록 연구에 철저를 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硏究科를 설치하여 敎科目外에 法華經, 維摩經, 勝 經, 涅槃經, 傳燈拈頌 등을 비롯하여 律藏과 四書三經 등 內外典을 수시로 선택하여 연구하도록 하는 한편 寺中에서는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불편이 없도록 최대의 편의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4) 修學과 敎授法의 改善

수학하는 학인의 태도에 있어서는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그저 막연하게 정해진 힉과를 走馬看山格으로 책장만 넘기는 졸업 위주의 경향이 있는데, 학과마다 가끔 시험이나 論文을 써서 그 실력을 향상시키는 한편 수학한 학과중에서 원각경이면 원각경, 기신론이면 기신론, 어느 한과목을 선택해서 전문분야로 철저하게 연구하는 것이 학구적 태도이며, 나아가서는 敎學의 발전을 가져오리라 믿는다.

교수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구태의연한 서당식 교육, 漢文原書 講讀에만 치중하는 교수방법으로부터 현대인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방법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무조건 암기를 하거나 교수 중심의 注入式 방법을 탈피하여 교수가 가르치기에 앞서 자발적인 실력을 학인의 머리에서 창출해 낼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교육, 다시 말하면 학인 중심의 창의적인 교육방법이 바람직한 민주주의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으로 수강하기에 앞서 자유로운 討論이나 論講 및 判釋 등의 학습방법은 실로 民主主義 교육의 한 본보기라 하겠다. 실제로 寺院敎育 즉 불교는 어디까지나 스스로 수행하여 스스로 깨닫는 自覺敎이므로 철저한 自力主義(學人中心)에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5) 敎育의 義務化

僧家敎育은 철저히 의무교육화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僧家大學을 운영해 나가는 주지 스님과 삼직 스님은 당연히 大敎科를 졸업한 자라야 학인들을 돌보는데 적극성을 띠고 후원할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禪院의 入榜이나 具足戒를 수지하고자 하는 자도 반드시  정상적인 승가교육을 이수한 자만이 그 대상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승가대학을 운영하는 측에서는 도량수호나 사찰보수도 중요하지만 人材를 길러내는 도제양성에 온갖 정성을 기울여 주었으면 하는 것이 현 종단의 공통된  바램이다. 또 한 가지는 은사스님들이 상좌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희박한 데 더욱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필자가 지난 1958년 이래로 全南 仙巖寺를 비롯하여 근 30여년간 여러 강원에서 학인들과 경학을 연구하여 수없이 졸업식을 지켜보았지만, 대부분의 은사스님이 졸업식에 참석하는 예가 드물었다. 최근에 와서는 많은 은사스님들이 상좌가 수학하고 있는 사찰에 대중공양차 방문

 

하는 예를 볼 수 있어서 다소 교육에 관심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종단에서는 도제양성을 구두선처럼 강조하고 있으나 과연 승가대학에 얼마만큼의 혜택을 주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바라건대 도제양성을 하고 있는 빈곤한 승가대학에 한해서는 협조는 고사하고라도 분담금 납부의 면제라도 해주는 특혜를 베풀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절실한 요청이다.

이와 같이 교육기관에 대한 배려가 부실함으로써 비구 비구니를 막론하고 불타의 교법을 유포하는 숭고한 사명을 회피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특히 비구니 승가대학은 경제적인 결핍으로 인하여 비구니승가대학과 같이 학인들에게 학비조달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방학기간(동기방학 40일, 춘기방학 30일, 하기방학 30일간)을 통하여 은사스님이나 혹은 관련있는 사찰에 가서 다소의 보시를 받음으로 해서 학비와 기타 잡비에충당하고 있다. 종단에서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 승가교육에 보다 관심을 기울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무엇보다도 요청되는 것은 승가대학을 졸업한 스님들의 처우문제이다. 졸업후의 후속조치가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수년간의 수학생활이 별 보람 없이 끝나는 수가 있다. 대부분의 졸업생들이 禪院에 들어가거나 일반대학에 진학하거나 간혹 포교일선에 나가는 예가 있기는 하나 전폭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음이 유감스러운 일이다.

 

4. 맺는말

 

종교는 그 시대의 흐름과 요청에 따라 발전하여야 한다. 지금은 인공위성이 우리의 머리 위를 돌고 있는 시대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이 시대에 태어났던들 중생을 교화하는 방법이 2500년전 인도에서 설하였던 것과는 판이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불교의 근본원리가 달라진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불교승단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방법도 재래식 방법을 벗어나 현 시대 사조에 순응하는 교육제도를 확립하고 改善된 敎材를 가지고 새로운 교수법으로 많은 도제를 배양하는 것만이 한국불교가 중흥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外的인 사찰정보화보다는 內的인 정신정화가 우선적으로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사회질서가 잡히지 않고 문란함은 종교계가 문란하기 때문이요, 종교계가 문란함은 참다운 성직자가 적은 때문이요, 참다운 성직자가 적은 원인은 그러한 성직자를 길러내는 교육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현시대에 부응하는 교육제도를 확립하여 승려들의 자질을 향상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된다. 현재 千佛, 萬佛 혹은 大佛 등을 여러 곳에서 조성하고 있는데 부처님의 참뜻은 살아 있는 생불,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유포할 수 있는 유능한 제자를 양성하는데 있을 것이다.

부처님 당시 기원정사나 죽림정사처럼 수행이란 숙식을 함께 하며 공동생활을 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손으로 직접 일하고 수행하는 卽事而眞 즉 생활에 즉한 수행방법이 和合정신과 아울러 몸과 마음을 건전하게 단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승가대학도 그 옛날 인도에 있는 나란타 대학과 같이 숙식을 함께 하는 山中寺刹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지금 전국적으로 대소 사암에서는 어린이 포교로부터 중고등학생회, 대학연합회 나아가서는 불자교수회에 이르기까지 포교활동이 불꽃같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때 우리나라 불교발

 

전에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아서 다행스럽고 기쁘게 생각한다. 앉아서 벽관만 하는 수행에서부터「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한다」는 百丈 스님의 사상을 신조로 하여 활동하면서 수행하고, 생산하면서 수행하는 참다운 구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一然禪師와 雲門寺

 

目    次

1. 序言                           4. 一然스님의 著作과 三國遺事

2. 雲門寺의 創建과 來歷           5. 一然스님과 雲門寺

3. 一然스님의 生涯와 性品         6. 結語

 

1. 序 言

 

一然스님(1206∼1289)은 고려조 武臣亂이후 大蒙抗爭期를 거쳐 元支配時期에 사셨던 분이다. 「三國遺事」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스님은 忠烈王 3년(A.D. 1277)왕명에 의하여 雲門寺에 住持로 부임하여 4년여 동안 머물렀다.267) 이 동안 스님은 「三國遺事」를 탈고하였으며268) 九山禪門의 하나인 迦智山門의 門風을 드날려 고려 후기 불교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269) 

雲門寺와 一然스님의 관계는 스님께서 운문사 주지로 계셨을 뿐 아니라 스님의 示寂時 스님의 門人인 眞靜大禪師 法珍(淸 )이 운문사 주지로 있으면서 스님의 行狀을 撰하여 行蹟碑를 운문사 東麓에 세웠던 것270)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오늘날 雲門寺가 比丘尼專門講院으로 명실공히 승가대학으로서 내실을 다져가고 있는 것도 一然스님의 敎學과 禪風의 음덕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本槁에서는 운문사의 創建과 來歷 및 스님의 生涯와 性品, 著書 등을 살펴보고, 스님과 운문사의 인연 등을 밝혀보고자 한다. 스님에 관계된 자료는「三國遺事」와 麟角寺에 있는 碑文밖에 남아있지 않아 구체적인 생애 둥을 살펴보기가 어려우나 「高麗史」「高僧傳」등의 가능한 자료를 활용하여 대강이나마 밝히고자 한다.

 

2. 雲門寺의 創建과 來歷

 

雲門寺는 경상북도 청도읍에서 동쪽으로 약 백 리 지점에 위치하고 운문면 소재지인 大川에서 남쪽 계곡을 따라 삼십 리 가량 되는 거리의 운문면 신원동 虎踞山(一名 雲門山)에 자리하고 있다. 중첩한 산줄기가 행인을 부르고 虎踞의 靈山이 길손을 반겨주는 곳에 一大伽藍이 있으니 바로 청도의 대표적인 名刹인 운문사이다.

신라 통일의 중추 역할을 한 花郞道가 창립될 무렵인 신라 진흥왕 18년(A.D. 557)에 한 神僧이 이곳에 들어와 금수동(지금의 북대암 옆에 그 유허가 있음)에 小庵을 짓고 삼 년 동안 수도한 결과 혜안이 열렸다. 그리하여 진흥왕 21년(A.D. 560)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7년

 

에 걸쳐 중앙에는 大鵲岬寺(현재의 운문사), 동쪽 九千步 지점에 嘉瑟岬寺(지금은 廢寺됨), 남쪽 七里되는 지점에 天門岬寺(지금은 廢寺됨), 서쪽 十里되는 곳에 大悲岬寺(현재의 대비사), 북쪽 八里되는 곳에 所寶岬寺(지금은 廢寺됨) 등의 五岬寺를 창건하였다.271) 이때에 王이 勝地에 절이 창건되었다는 말을 듣고 願刹로 삼았다고 한다.

운문사는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 重創과 補修를 거듭하면서 오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제1차 重創은 圓光國師가 하였다. 국사는 중국에서 돌아온 眞平王 22년(A.D. 600)에 경주 皇龍寺에 있다가 곧 운문사에 와서 重創을 하고 3년간 머물렀다. 이에 嘉瑟岬寺로 옮겨 있으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占察寶272)를 설치하여 占察法會를 열었다. 또 花郞인 貴山과  項에게 世俗五戒를 전수하여 화랑정신의 근본으로 삼도록 했으며 隋나라의 王 世儀가 왔을 때 皇龍寺에서 百座道場273)을 열었는데 국사께서 맨 上座에 앉았다고 한다. 진평왕 30년(A.D. 608)에 고구려가 신라의 변방을 자주 침범받자 이를 방어하고자 圓光國師가 隋나라로부터 30만의 援軍을 지원받게 한 「乞師表」도 이 곳 大鵲岬寺(雲門寺)에서 쓴 것으로 추측된다.

제2차 重創은 寶壤國師가 하였다. 국사는 西藏, 唐 등을 두루 다니면서 학문을 닦고 禪敎를 대성하여 귀국하였다. 국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오던 중 西海 중간에 이르자 용왕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염송하게 하고 금빛가사를 주면서 龍子인 璃目에게 국사를 모시고 가게 하였다. 이에 용왕이 국사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지금 삼국이 요란하여 아직 불법에 귀의하는 군주가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인 鵲岬에 들어가 절을 짓고 있으면 수 년이 못되어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 삼국을 평정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274) 

그리하여 국사가 高麗 太祖 13년(A.D. 930)에 중국에서 돌아와 五岬寺를 중창하였다.275) 고려 태조 20년(A.D. 937)에 태조는 삼국을 재통일한 후 보량국사가 五岬寺를 중창하였다는 말을 듣고 '雲門禪寺' 賜額과 田地 五百結276)을 내렸다고 한다.277) 

제3차 重創은 圓應국사가 고려 仁宗 7년(A.D. 1129)에 운문사 주지가 되어 허물어진 절을 다시 중창하고 法度을 세워 전국 제2의 禪刹이 되었다. 이에 仁宗은 田地 2백結과 國奴婢 5백명을 운문사에 내려 萬世香火토록 하였고, 국사의 공적을 추모하는 비를 세우게 하였다.278) 또 三寶院 35간을 절 북쪽 3리 지점에 설치했으며 鹽城庫 13간을 절 서북쪽 3리 밖에 세웠다. 大川院 2백 結은 三寶院에 속하게 하여 鹽城庫와 같이 香火 때의 여러 가지 물

 

건을 갖추게 했으며 신수, 신원 3백 결은 香火 때 정제미로 비축케하고, 노비 5백 명은 貢布를 걷어들여 국사의 香火를 받드는 이들의 衣財로 삼게 하였다.

고려 忠烈王 3년(A.D. 1277)에 一然禪師가 주지로 주석하였다. 大師의 行蹟碑 가 절 동쪽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一然대사에 관해서는 뒤에 서술하기로 한다.

제4차 重創은 임진왜란 뒤 肅宗 16년(A.D.1690)에 雪松演初大師가 왜란 때 허물어진 절을 중창하여 옛모습을 되찾게 한 것이며, 제5차 重修는 純宗 1년(A.D.1907) 雲岳大師가 하였으며 이어 肯坡大師가 제6차 補修를 하였다. 1913년 古田禪師가 제7차 보수를 하였고 다음 金先禪師가 제8차 修創을 하였다.

雲門寺에는 많은 암자와 異蹟들이 남아 있다.

邪離庵은 운문사 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며 寶壤국사가 처음 창건했는데, 강화 보문사, 남해 보리암, 낙산 홍련암과 함께 한국의 四大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靑神庵은 운문사 입구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선조 말에 崔玄化 和尙이 初創하였다. 內院庵은 운문사 동쪽 골짜기에 위치하는데 圓應국사가 초창하였고, 北台庵은 神僧이 小庵으로 초창한 뒤, 圓光, 寶壤, 圓應 국사가 중창하였다. 四窟로는 동쪽에 邪離窟, 서쪽에 火防窟, 남쪽에 鴛鴦窟, 북쪽에 墨防窟 있으며, 四碑로는 圓應國師神道碑, 奴婢田畓碑, 一然禪師行蹟碑, 雲門禪師賜額碑가 있었는데 이중 圓應國師神道碑만 현존하고 있다.

異蹟으로는 虎踞台, 若耶溪, 璃目沼 등이 있다. 虎踞台는 절 서쪽 산기슭에 있는데 바위의 모습이 범이 앉아 있는 현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지리학설상 운문산의 요지가 되고, 虎踞山의 山名 유래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若耶溪는 五百殿 뒤에 있는데 날이 가물때도 물이 줄지 않는다고 하여, 보물 208호로 지정된 靑銅壺(一名 甘露樽)가 이곳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279) 璃目沼는 절 서남쪽에 있는 沼인데 寶壤국사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서해 용궁에서 데려온 용왕의 아들 璃目이 살던 곳이라 한다.

이 밖에도 운문사는 많은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어 찬란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것만해도 금당 앞 石燈(보물 193호), 靑銅壺(보물 208호), 圓應國師碑(보물 316호), 石造如來坐像(보물 317호), 四天王石柱(보물 318호), 大雄殿 앞 東西塔(보물 678호), 大雄寶殿(보물 835호) 등이 있으며, 천연기념물 180호로 지정된 처진 소나무(盤松)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내원암으로 가는 길목에 10여기의 浮屠가 있으며 梵鐘樓의 梵鐘, 祖影堂에 봉안되어 있는 이는 圓光國師를 비롯한 11명의 고승 대덕의 초상화 등 많은 유물이 전하고 있다.

현존 건물 가운데 毘盧殿, 鵲鴨, 萬歲樓, 金堂, 五百殿, 冥府殿, 觀音殿 등은 圓應國師가 初創하였으나 消失되어 대부분 朝鮮朝 중엽과 日帝 때에 重創한 것이다. 應眞殿과 七星閣, 會星堂은 비구니 泰具스님이 창건하였고, 1977년 筆者가 주지로 부임한 이래 梵鐘 주조를 비롯하여 大雄寶殿, 梵鐘樓, 說玄堂, 彩鏡堂, 淸風寮 등 30여동을 新築 혹은 補修하였다.

佛敎敎團 淨化 직전에는 대처승이 잠시 살았는데 교단 정화 이후 1955년 비구니들이 들어와 比丘尼 金光 스님이 초대 주지로 취임한 이후 2, 3대 兪守仁 스님, 4대 妙典 스님, 5대 泰具 스님, 6대 慧雲 스님, 7대 慧眼 스님을 거쳐 현재까지는 필자가 住持와 僧伽大學 學長職을 겸하고 있다.

운문사의 특수성은 많은 農土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學人들이 옛날의 淸規와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한다는 百丈스님의 生活信條를 본받아 생산하면서 수행하는 卽事而眞을 실천하고 있다. 삼국통일의 중추 역할을 한 화랑도의 수련장이던 이곳 호거산에 운문사가 있고, 운문사에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였고, 1988년부터는 승가대학으로 바뀌어 시대에 부응하는 교과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하여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맞도록 내실을 기하고 있다. 현재 250여명의 비구니들이 이곳에서 經學을 수학하고 戒律을 受持 奉行하면서 운문사를 거쳐간 수많은 고승, 대덕들의 경지에 이르고자 정진하고 있다.

 

3. 一然 스님의 生涯와 性品

一然스님은 고려 21대 熙宗 2년(A.D. 1206)에 태어나서 25대 忠烈王 15년(A.D. 1289)에 入寂하였으니 세수가 84세요, 법랍이 71세였다. 一然스님이 생존했던 고려사회는 崔氏執政期에서 對蒙抗爭期를 거쳐 蒙古支配初期의 국내외적으로 多事多難했던 시기로서 온 국민과 함께 시련을 겪어야 했었다.

一然스님의 生涯는 현재 경북 군위군 麟角寺에 전하고 있는 「高麗國華山 曹溪宗 麟角寺 迦智山下 普覺國師碑銘幷序」와 이 碑의 陰記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280) 

이 碑는 스님께서 示寂하니 忠烈王의 명으로 默軒公 閔漬가 짓고 글씨는 門人 竹虛가 王羲之의 遺墨에서 集字케 하여 元貞 元年(A.D. 1295) 8월에 門人이며 운문사 주지였던 大禪師 法珍이 세웠다. 현전하는 비는 글자가 거의 磨滅되어 알아볼 수 없으나 몇 개의 古拓本과 寫本이 있어 그 全貌를 알 수 있다.281) 본고에서는 한국문화연구원 소장 古拓本과 규장각에 소장된「麟角寺碑」書帖에 있는 碑陰記를 통하여282) 스님의 生涯와 性品을 살펴보기로 한다.

스님은 慶州 章山君(현 慶山) 사람으로 俗性은 金氏요 諱는 見明, 字는  然, 號는 睦庵이다. 一然은 후에 바꾼 이름이다. 스님은 나면서부터 총명, 영리하고 모양이 단정, 엄숙하여 소의 걸음에 범의 눈초리(牛行虎視)였다. 고종 元年(A.D. 1214) 9세에 海陽(現 光州) 無量寺에서 출가하여 14세에 雪岳山 陳田寺 長老 大雄에게 나아가 삭발하고 具足戒를 받았다. 고종 14년(A.D. 1227) 22세에 僧科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하여 九山四選283)의 으뜸이 되었다. 그후 包山(현 玄風 비슬산)의 寶幢庵, 妙門庵, 無住庵 등에서 수도에 정진한 결과 고종 24년  (A.D. 1237) 32세에 이르러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나라에서 三重大師284)라는 法위가 수여되었으며 고종 33년(A.D. 1246) 41세에 禪師가 되었다. 고종 36년(A.D. 1249) 44세에 鄭晏의 초청에 의하여 南海 定林寺에 주석하였고, 고종 46년(A.D.1259) 54세에 大禪師가 되었다. 元宗 2년(A.D.1261) 56세에 왕명으로 上京하여 禪月社에 주석하며 멀리 牧牛和尙(普照國師)의 법맥을 이었다.285) 원종 5년(A.D.1264) 59세에 吾魚寺에 안거하였고, 원종 9

 

년(A.D.1268) 63세에 왕명을 받들어 雲海寺에서 禪敎에 이름이 높은 高僧 백명을 모아 大藏落成會를 베풀 때 스님을 會首로 삼았다. 특히 고종 19년(A.D. 1232) 몽고의 침입으로 인하여 初雕大藏經이 燒失되자 고종 23년(A.D. 1236)부터 16년간에 걸쳐 대장경을 再彫板할 때에 스님은 그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또 仁弘寺의 주지를 맡아 11년만에 퇴락한 절을 중창하여 仁興寺로 改稱하였고 또 包山 동쪽에 湧泉寺를 중수하여 佛日社를 이룩하였다.

스님은 忠烈王 3년(A.D. 1277) 73세에 왕명으로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敎義를 크게 선양하였고, 충렬왕 8년(A.D.1282) 77세에 왕의 초청을 받아 廣明寺에 주석하였다. 충렬왕 9년(A.D.1283) 78세에 왕이 스님을 國尊에 冊封하고 圓經 照라는 號를 내리고 宮內로 맞아들여 몸소 百僚를 거느리고  衣禮286)를 행하였다. 스님이 老母의 봉양을 위하여 옛절에 돌아가기를 간청하자 왕이 그 뜻을 허락하고 近侍佐郞  黃守命에게 명하여 스님을 호위하여 어버이를 모시게 하였다. 충렬왕 10년(A.D.1284)에 老母가 96세로 돌아가시니 이때에 국사는 79세였다. 이 해에 나라에서 인각사를 스님의 下安의 절로 삼아 近侍 金龍劍에게 명하여 인각사를 중수케하고 전답 100여 頃을 하사하였다. 스님은 여생을 인각사에서 한가롭게 보내면서 九山禪門287) 곧 達磨의 禪法을 전하여 禪風을 일으켜 두 번이나 九山禪門의 都會를 열었다. 또 三國遺事를 지어 三國史記와 함께 우리나라 현존 最古史書中의 雙璧이 되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撰述한 곳은 흔히 麟角寺라고 말하고 있으나「增補三國遺事」(崔南善編)에 의거하건데 "三國遺事는 一然의 70세 이후로 京師에 被召하야 國尊에 冊封되기까지 雲門寺에서 遺閒한 業績이요 그 중에서도 俗事의 部인 王歷과 紀異兩編은 아직 王命이 있을 그 前期의 撰成일까 하노라.……이것이 三國遺事의 筆이 麟角寺에 오기 전, 따라서 國尊이 되기 전에 끊었음을 말하는 明證일 것이며, 또한 顧慮될 것 아닐까 하노라"한 것에서 보아 삼국유사를 撰述한 곳이 雲門寺인 듯하다.

스님께서 충렬왕 15년(A.D.1289) 7월 8일에 示寂하니 亨年 이 84세요 법랍이 71세였다. 왕이 매우 슬퍼하며 사신을 보내서 弔喪하고 諡號를 普覺 이라 하고 塔號를 靜照라 하여 인각사 동쪽 5리쯤 떨어진 缶缶村 뒷산에 塔을 세웠다.288) 

一然스님은 9세에 海陽 無量寺에서 就學했으나 승려로서 정식으로 剃度하고 具足戒를 받은 것은 14세에 설악산 陳田寺의 大雄 長老에게서였다. 그런데 陳田寺는 迦智山門의 開山祖인 道義가 隱居한 곳이며 廉居(844) 體澄(804-880) 등이 師資 相承하였던 迦智山門의 주요 사찰이었다.289) 迦智山門은 신라말기의 이른바 九山門中의 하나로 道義가 唐에 유학하여 馬祖道一의 제자인 西堂智藏에게서 心印을 받고 신라 憲德王 13년(A.D.821)에 귀국함으로써 받아들여진 禪法에 기초한 宗派이다. 다시 말하면 迦智山門은 道義, 廉居를 거쳐 普照禪師 體澄에 이르러 體澄이 신라 憲安王 3년(A.D. 859)에 왕의 청으로 진전사를 떠나 전남 장흥 迦智山에 있는 寶林寺에 주석하면서 형성한 禪宗의 宗派이다.290) 

一然스님이 陳田寺를 통해서 가지산문에 입산한 이후의 생애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291) 첫째, 包山의 여러 사찰에서 주석하던 시기(1227∼1248) 둘째, 鄭晏의 초청에 의해 南海 定林寺와 지리산 吉祥庵에 거주하던 시기(1249∼1260) 셋째, 元宗의 명에 의해 禪月寺에 주석한 이후 경상도 지역의 吾魚寺, 仁弘社, 雲海寺, 湧泉寺에 주석하던 시기(1261∼1276) 넷째, 충렬왕의 명에 의해 운문사에 주석하다가 國尊에 책봉되고 입적한 末年의 시기(1227∼1289)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시기는 스님이 주로 영남 세력의 중심지인 경주와 인접한 지역 즉, 현풍 비슬산에서 약 22년간 지내면서 뚜렷한 행적을 남기지 않은 것은 이 시기가 崔氏政權의 2세인 崔瑀가 정권을 담당하였던 對蒙抗爭期였으므로 소극적으로 잠적하여 지낸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고종 23년(A.D. 1236)에 몽고병이 침입했을 때 스님께서 避地하고자 文殊五字呪를 외워 영험을 본 기록은 이를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292)

둘째 시기는 鄭晏의 초청으로 南海 定林寺에서 주석하던 시기인데 스님이 修禪社와 교류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고 최씨 정권과 가지산문이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스님을 초청한 鄭晏은 崔怡의 장인인 鄭叔膽의 아들이었으며, 정안은 修禪社 2세인 慧諶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다.293)

셋째 시기는 스님이 大禪師가 되고, 元宗 임금에 의해 강화도 禪月社에 주석하면서 「멀리 牧牛和尙 知訥의 法을 계승했다.」고 하며 修禪社의 계승자임을 자처한 시기이다. 이처럼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은 이후 스님은 가지산문의 본래 근거지인 영남 지역의 여러 사찰에 주석하면서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쓴 것으로 보인다.

넷째 시기는 스님이 운문사에 주석한 이래 국존이 되고 입적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對蒙抗爭期를 거쳐 元支配時期로 스님이 소속된 가지산문이 무신란 이후 원 지배시기 이전에 조류를 이루던 修禪社, 白蓮社를 대신하여 고려 불교계의 주요세력으로 등장한 시기이며, 그 주도적 역할을 스님이 담당하였다. 스님이 주석한 운문사의 第 3 중창주로 일컫는 學一 圓應國師가 가지산문의 중심인물이며 그로 인해 가지산문의 중심지가 영남으로 옮겨진 것을 볼 때 스님의 운문사와의 인연은 매우 각별한 것이라 생각된다.

스님의 性品은 高邁하여 대중 속에 처하여도 홀로 있음과 같고 높은데 거하여도 낮음과 같이 하여 배움에 있어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넘어서 일일이 스승에게 배워 깨닫기 보다는 스스로 통효할 정도로 명석하였다.

스님은 84세로 입적하기까지 禪道의 정진은 물론 藏經을 두루 열람하였으며, 諸家의 章疏를 궁구하며 밖으로는 儒家經典 같은 外典도 넓게 섭렵하였으며 百家에 貫通하여 무릇 50여년 동안 佛門에서 지도적 능력을 보였다.

스님이 가는 곳마다 서로 다투어 敬慕하되 門下에서 參學치 못함을 부끄러워할 정도이며, 스님의 한마디 말씀을 들으면 감화를 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에게 수학한 인물중 가장 두드러진 이로는 瑩源寺 寶鑑國師 混丘가 있다. 그는 원래 無爲寺의 天鏡 禪師에게 得度하였지만 나중에 一然스님의 門下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일찍이 元나라 蒙山德異禪師가 보내온 無極說의 冥意를 터득하였으므로 자신의 號를 無極이라고까지 하였다. 현존한 「三國遺事」가운데는 많은 부분이 混丘에 의해서 보충되고 있으며 또 讚의 여러 곳도 無極 자신에 의하여 기록되고 있다. 混丘의 뒤를 이어 迦智山門을 계승한 이로는 太古 普愚와 懶翁 慧勤 등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스님은 남달리 효성이 지극하여 睦州의 陳尊宿의 風을 사모하여 스스로 睦庵이라 號할 정도였다. 老齡에 이르러서도 총명이 조금도 흐리지 아니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 게으르지 않았으니 至德과 眞慈로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평범한 가문의 태생으로 정력적인 노력형의 인물이었으며 王이 국사로 책봉하여 할 때 극구 사양한 사실로 미루어 겸허하고 초탈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4. 一然스님의 著作과 三國遺事

 

一然스님은 禪師이면서 敎學에도 많은 연구를 보이셨던 분임을 스님의 생애와 성품을 통해서 알수 있다. 「一然碑銘」에 스님의 著作이라고 알려진 것이 8種 100여권에 이른다.

스님이 직접 지은 것은「語錄」2卷과 「偈頌雜著」3卷이 있고 編修한 것은「曹洞五位」2卷  「祖圖」2卷 「大藏須知錄」3卷 「諸乘法數」7卷 「朝廷事苑」30卷 「禪門拈頌」294) 30卷 등이 있다.295) 이들 저작들 가운데 현전하고 있는 것은 「曹洞五位」 2卷 뿐이다.296) 「曹洞五位」는 스님이 南海로 옮겨 修禪社와 관계를 맺게된 이후 1256년부터 「重編曹洞五」의 補充에 착수하여 1260년에 간행한 것이다.

그런데 스님의 저작으로 널리 알려진 「三國遺事」는 碑文에 제시되고 있지 않다. 그 까닭을 비문을 쓴 閔漬가 「三國遺事」를 「한갖 심심풀이의 글장난으로 보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고 본 견해도 있으나 비문에서 밝히고 있는 스님의 100여권의 저작중 그 書名을 밝히지 않는 20여 권 중에 「삼국유사」가 포함되어 있다고 봄이 옳을 것 같다. 또한 현전하고 있는「삼국유사」卷 5의 첫머리에 「國尊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鏡 照大禪師一然撰」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스님의 저작임이 분명하다.

「三國遺事」는 5卷으로 되어 있고 9篇의 事類로 나뉘어져 있다. 제1권에는 「王歷第一」과 「紀異第一」이 들어있고 제2권에는 篇目이 따로 없이 「紀異第一」과 같은 성격의 事類가 계속 수록되어 있다. 제3권에는 「興法第三」과 「塔像第四」가 들어 있고 제4권에는「義解第五」가 있으며 제5권에는 「神呪第六」「感應第七」「避隱第八」「孝善第九」등이 실려 있다. 이러한 내용 구성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第1의 王歷篇은 신라, 고구려, 백제, 駕洛 그리고 後高句麗(泰封) 後百濟 등 다시 말해서 신라의 初頭에서부터 後三國의 고려 태조의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王代와 年表를 圖表式으로 정연하게 보이고 있으며, 그 윗쪽과 末尾부분에 중국의 역대 왕조와 年號을 표하여 시대적인 준거가 되게 하고 있다.

第2의 紀異篇에서는 卷1에 「古朝鮮」「魏滿朝鮮」등 단군조선의 上古代로부터 「太宗春秋公」「長春郞 罷郞」등 신라통일 이전인 태종 武烈王代에 이르기까지의 要事를 모은 36項目과 卷2에 「文虎王 法敏」에서 「駕洛國記」등 통일 이후 國亡까지의 신라를 중심으로 하여 백제와 후백제 및 가락 등에 대한 것을 수록한 23項目이 있다. 결국 紀異 全篇에는 모두 59項目이 있는 셈이다.

第3의 興法篇에는 「順道肇麗」를 비롯하여 삼국의 佛法傳來 및 興法의 事實을 주로 한 6項目이 들어 있다.

 

第4의 塔像篇에는「東京興輪寺, 金堂十聖」을 비롯하여 「五台山文殊寺石塔記」에 이르기까지 주로 신라의 塔像을 중심으로 한 31항목을 수록하였다.

第5의 義解篇에는 「圓光西學」을 비롯하여 신라의 高僧들에 대한 傳記가 중심이 된 14項目이 모아져 있다.

第6의 神呪篇에는「密本 邪」등 신라의 密敎的 神異僧들에 관한 3項目이 수록되어 있으며,

第7의 感應篇에는「仙桃山 聖母 隨喜佛事」등 신라의 靈異感應에 관한 10項目을 수록하였다.

第8의 避隱篇에는「朗智乘雲普賢樹」를 비롯하여 주로 超脫高逸의 행적을 10項目으로 모아 놓았으며,

끝으로 第9의 孝善篇에서는「眞定師 孝善雙美」등 孝行 美談 5項目을 수록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9篇으로 이루어져 있는 삼국유사는 年表인 王歷을 제외하면 도합 138項目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三國遺事」는 시대범주가 단군조선에서부터 고려의 후삼국통일에 이르기까지로 되어 있으나 실제 그 撰述의 중심은 삼국 중에서도 신라로 되어 있다. 특히 삼국유사의 전체적 구성에서 주목되는 것은, 9篇目 중 처음의 王歷篇이 年表이므로 그 실제 내용은 8篇目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紀異篇을 제외한 7篇 모두가 불교적인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신라를 중심으로 한 초기의 韓國佛敎文化史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유사」에 나타난 一然 스님의 관심은 불교미술, 불교민속, 불교의 사회적 문제, 불교적 신앙과 생활 등 불교 전반에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특히 스님의 관심은 불교의 차원 높은 사상이나 교리, 고승대덕에 대한 것보다는 서민적이며 대중적 측면 그리고 불교의 사회적·생활적 측면에 더 많이 치중하고 있다.

「三國史記」가 王朝 국가중심의 서술이라면 「三國遺事」는 서민과 서민 생활중심의 서술이라 하겠다.

一然스님은 삼국유사에서 불교사, 고승전, 불교설화, 탑상, 사찰의 연기, 불교미술, 불교민속, 기타 불교의 사회적·가정적인 문제에까지 깊은 관심을 보여줌으로써 禪僧외에 불교학자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단군신화를 정점으로 하여 고대사의 자주적 파악과 강렬한 민족의식 및 주체성에 입각하여 민족사를 확립하고 체계화하고 있는 점에서 국사학자적 역할도 하고 있으며, 당시까지 口傳되던 각종 구비전승, 신앙전승 등 재래의 전통문화적 유산을 폭넓게 정리하고 있는 점에서 민족학적 자각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다.

결국 一然스님은 禪師이면서 불교학자요, 국사학자이며 민속학자로서 일찍이 六堂 崔南善이 헤루도투스를 서방역사의 아버지라 한 것과 같이 一然선사는 우리 민족사의 아버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5. 一然스님과 雲門寺

 

一然스님과 운문사와의 직접적인 인연은 忠烈王 3년(A.D. 1277)에 왕명에 의해 스님이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부터이다. 이어 충열왕 8년(A.D. 1288) 왕이 다시 스님을 초청하여 開京의 廣明寺에 주석케 할 때까지 4년여간 운문사에 계셨다. 이동안 스님은 南海 定林寺에 계실 때부터 30여년 동안 관심을 갖고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해 오던 「삼국유사」를 완성하였다.297)

 

스님과 운문사와의 관계는 위의 기록 외에는 구체적인 자료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왕이 직접 명하여 스님을 운문사에 주석케 한 점은 소홀히 넘길 부분이 아니다. 운문사는 고려 王建 太祖가 「雲門禪寺」로 賜額한 사찰로 고려 왕실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禪刹이었다. 그러나 武臣政權下에서는 그들의 비호를 받은 修禪社와 白蓮社가 불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동안 다소의 침체기가 있었으나 元나라 支配期에는 修禪社를 계승한 一然 스님이 迦智山門을 중심세력으로 하여 불교계를 이끌었다. 운문사에서 왕명으로 上京한 스님은 國尊에 冊封되고298) 圓徑忠照라는 法號를 받았다. 스님을 국사로 책봉하기 전 忠烈王은 群臣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先王이 다 釋門에 德이 큰 자를 얻어서 王師를 삼았고 德이 또 큰 자를 國師로 삼았으니 否德한 내가 홀로 王師 國師가 없음이 옳지 않도다. 이제 雲門和尙은 도가 높고 德이 성하여 사람들이 우러르는 바이니 어찌 마땅히 과인만이 홀로 慈澤을 입지 않으리오……」299)라고 하면서 스님을 雲門和尙이라고 일컬으며 운문사와의 깊은 인연을 나타내고 있다.

또 스님께서 입적하신 후 스님의 행장을 撰하여 운문사 동쪽에 行蹟碑를 세운 이가 바로 스님의 門人인 雲門寺 住持 大禪師 法珍(淸 )이며 이로 인하여 忠烈王이 閔漬에게 碑銘을 짓게 하니 오늘날 麟角寺에 전하는 「普覺國尊碑銘」이다. 이로 볼 때 스님의 생존 당시 스님과 운문사는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운문사는 제3차 重創主인 學一 圓應國師에 의해서 禪宗 九山門 中의 하나인 迦智山門이 호남에서 영남 지역으로 중심이 넘어오면서 그 중심 사찰이 되었다. 원응 국사(A.D. 1052∼1144)는 仁宗 원년(A.D. 1123)에 王師로 책봉되어 가지산문이 당시 불교계의 중심이 되도록 한 분이다.300) 현재 국사의 비가 운문사에 남아 있어 당시의 정황을 뚜렷하게 말해주고 있다. 仁宗 7년(A.D. 1129) 국사가 은퇴하여 雲門寺에 주석해 있자 많은 승려 학자들이 운집하여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러한 사실이 迦智山門의 중심지가 경상도로 변동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一然스님은 14세 때에 가지산문의 주요사찰인 설악산 陳田寺에서 大雄 長老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후에 스님은 가지산문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자연히 가지산문의 중심사찰인 운문사에 주석하게 되었고 「雲門和尙」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의 문인인 眞靜 大禪師 法珍(淸 )이 운문사 주지로 있으면서 麟角寺에서 입적한 스님의 행적비를 운문사에 세운 것이다.

또한 스님이 撰한 「삼국유사」여러 곳에서 운문사와 관련된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스님의 운문사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인연을 엿볼 수가 있다. 오늘날 운문사가 비구니 전문 승가대학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禪敎에 대한 해박한 소양을 겸비한 스님과의 인연이 무관치 않다고 여긴다.

 

 

 

6. 結 語 

 

一然스님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禪師이면서도 敎學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으신 분이었다. 고려 후기에 武臣執權期의 對蒙抗爭期와 이후의 元支配期의 혼란한 社會의 정신적 지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신 분이다.

스님은 雲門寺 第3차 重創主인 圓應國師의 뒤를 이어 迦智山門의 中興祖로 일컬어지는 분이다. 또한 스님은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雲門和尙이라고도 불렸으며, 운문사에서 「삼국유사」를 편찬하여 불교학자요 국사학자요 민속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이신 분이다.

그런데 스님께서 입적하신 麟角寺가 퇴락하여 옛모습을 찾을 길 없고 스님의 神道碑마저 수차례의 兵火로 파손되었다. 더욱이 古今을 통하여 과거 응시자들이 비석의 글자를 깎아내어 갈아마시면 스님의 神力으로 반드시 급제한다는 迷信 때문에 훼손되어 거의 내용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국사의 업적은 우리나라 역사상 영원히 잊을 수 없거늘 언제까지 그대로 방치해 둘 것이가. 국민의 한 사람, 아니 불자의 한 사람으로 파손된 碑石을 볼 때마다 통탄을 금치 못한다. 또한 스님의 浮屠인 靜 照塔이 명당 자리를 탐낸 일부 허황된 자들에 의하여 훼손된채로 방치되었던 것을 근년에야 인각사 경내로 옮겨 놓은 것은 불행중 다행스러운 일이다.

필자는 一然스님께서 주석하셨던 운문사에 몸담아 살면서 禪敎一致에 입각하여 수많은 저서와 업적을 남기신 스님을 敬慕하여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평소의 수행에 좌표로 삼고 있다. 이제 一然스님과 운문사와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시일내에 인각사의 복원과 碑石의 원상복구를 바라마지 않는다.

 

 

 

 

 

 

 

參 考 文 獻

 

 

三國遺事와 僧  一然과의 關係考察 李楠永, 第一回全國佛敎學術發表大會

三國遺事의 體裁와 그 性格        金煐泰, 東國大學校論文集 第十三輯

一然의 悲願                      閔泳珪, 第七回國際佛敎學術會議

三國遺事와 佛敎儀禮              洪潤植, 佛敎學報 第十六輯

一然의 重 曹洞五位              權奇悰, 高麗後期의 禪思想硏究中

一然(韓國佛敎撰述文獻總錄中)     東國大學校 佛敎文化硏究所

三國遺事解題                     崔南善 , 新證 三國遺事 三中堂 1946

普覺 國尊 一然에 대한 硏究       蔡尙植, 韓國史 硏究 26. 1979

麟角寺誌                         蔣濟明,  纂委員會.

麗代의 雲門寺와 密陽, 淸道 地方   金潤坤,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3

一然論                           印權煥, 韓國文學作家論, 螢雪出版社 1977

 

 

             

 

 

 

논문집을 발간하며

 

 

시방삼세에 항상 두루하시는 불보살님께 삼가 예경하옵니다.

경오년 삼동결제를 맞으면서 새삼스럽게 세월의 덧없음을 절감하였습니다. 예지와 열정으로 강원교육에 여념이 없으신 스님께서 화갑을 맞으셨으니, 늘상 젊음을 간직하실 줄로 안 저희들에게 또 다른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그동안 스님문하에서 수학한 저희들은 이제 제방에서 참선하고 포교하며 학문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늘 간절히 일러주신 “매사에 임하여 진실하라(卽事而眞)”는 교훈을 명심하며 진실한 구도자의 길을 가고자 정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스승님의 크신 은혜에 어떻게 보답하고 감사드려야 할지 막연하여, 문하생들이 미숙하지만 각 분야에서 공부하고 있는 그동안의 작은 결실인 논문들을 모아 스님의 가르침을 기리고 화갑을 축하드리는 논문집을 모아 스님의 가르침을 기리고 화갑을 축하드리는 논문집을 마련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편집할 즈음에 이르러 스승님의 학문과 덕망에 비추어 오히려 누가 될까 걱정되어 문하생의 기념논문집은 머지 않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습니다. 그대신 스님께서 그동안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오직 신심과 후학지도의 원력, 철두철미하신 생활로 일관해 오신 수행자취의 한 부분이기도 한 스님의 연구논문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 문하의 기르침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 일을 스님께 상의드렸을 때, 저희들의 어리석음을 포용하시고, 그것은 아주 옛날에 쓴 것이어서 손볼 곳이 많다고 겸손해 하시며 일일이 고쳐 주셨습니다. 빛 바랜 원고지의 그 연구논문들이 쏟아져 나온 스님의 책장을 보면서 문득 30여년 전 스님의 젊으신 모습과 알찬 수행의 일면을 뵙는 듯하여 저희들은 여러 가지 감회가 깊었습니다. 스님께서 이 논문들을 작성하실 때는 전남 선암사에서 性能 스님으로부터 傳講 받으신 후 청룡사 강원에서 학인들에게 경전을 강설하시며 동국대학교 박사과정에 수학하시던 바쁘고 어려웠던 시절의 자취들입니다. 그러기에 지금의 저희들에게는 더욱 소중한 가르침이 되며 빛이고 보배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스님의 본뜻이 아닌 줄 알면서도 지금까지 책장 속에 묵은 채로 쌓여 있던 스님의 논문들을 뽑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정성을 담아 올리게 됨을 송구스러우면서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실 무렵 지도교수인 김동화 박사님이 동국대학에 강의를 줄 테니 학교에 있으라고 권유하였으나, 스님은 비구니 교육의 비중을 생각하여 산중강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판단하시고 대학 강단을 사양하셨던 일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화입니다. 이러한 승가교육에 대한 스님의 원력이 오늘의 운문사를 있게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희들의 조그마한 뜻과 정성을 가상히 여기시고 격려해 주시며 동참하여 축하해 주신 智冠 스님, 日陀 스님, 玉峰 스님, 日堂 스님, 靑溟 任昌淳 선생님, 香山 卞廷煥 박사님, 如初 金膺顯 거사님, 山由 尹日湖 화백님, 李炳昊 박사님, 자상하게 원고를 검토해 주신 法頂 스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출판을 맡아주신 불광출판부에 여러 불자님께 진심으로 고마운 인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스님의 뜻에 보답하고자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스님의 화갑을 축하 드리오며 내내 청안하시옵고 스승님의 새로운 생애가 사

 

바에 더욱 빛나는 삶이 되시기를 저희 제자들은 두손 모아 발원하옵니다

                                                          경오년 동짓달 보름

                                                          문하생 일동 삼가 씀

 

法界明星 

           佛敎學 論文集

華甲紀念    

 

                 

2535年  8月 30日 初板 1刷 發行

2535年 12月 31日 初版 2刷 發行

2535年  3月 15日 初版 1刷 發行

 

著  者  全 明 星

發行人  雲門僧伽大學版部

發行人  全 明 星

 

값 15,000원

 

慶北 淸道郡 雲門面 新院里 1789

電 話 : (0542) 72 - 8800

FAX  : (0542) 71 - 0359

 


1) 俱舍宗은 世親이 지은「俱舍論」을 根本經典으로 하고 세운 宗. 小乘敎에 딸린 說. 一切有部宗의 一派. 佛滅後      900년 경 世親이 나서「毘婆沙論」을 연구하여 의심을 품고 經部를 배우면서 그 長點을 취하여「毘婆沙論」을     비평, 그 뒤 德惠, 世友, 安惠 등이 註釋書를 지어 한때 印度에 성행. 俱舍宗의 大意는 說一切有部의 三世實有,     法體恒有의 宗旨를 말함에 있으나 안으로는 經部의 現在有體過去無體에 同意를 나타낸다.

2) 化地部  Mahisasaka  磨醯奢婆迦, 彌喜捨婆柯라 음역. 正地, 敎地, 大不可棄라 번역. 小乘 20部의 1. 佛滅後 300     년 경에 上座部中 說一切有部에서 갈라나온 일파. 이 派의 初祖를 不可棄라 한다. 敎理는 大衆部와 거의 같으며     現在有體過未無體說을 세우고 見道에서 空無我의 行相으로써 四諦를 一時에 現觀함을 말하며 또 中有를 부정      하고 五識에 雜染의 힘이 있다고 하여 九無爲를 세워서 預流果退 羅漢果不退를 말한다.

3) 成唯識論卷第一 1

4) 兩論 「二十唯識論」(世親著)과 「三十唯識論」(世親著)

5) 大毘婆沙論은 「阿毘達磨大毘婆沙論」(Abbidharma - mahavibbasa - sasta)의 약칭으로서 200권이며 五百大阿     羅漢들의 編著이다. 659年에 玄 이 번역함. 佛滅後 400年初에 가니색가왕이 五百羅漢을 모아 佛經을 결집할      때 「發智論」을 해석케 한 책이며 說一切有部의 根本聖典이다. 따로 北梁의 불타발마와 도태가 번역한 「阿      毘達磨毘婆沙論」60卷은 이 책의 舊譯으로 「舊婆沙」라 한다.

6) 未離欲者는 아직 欲(煩惱)을 여의지 못한 사람, 즉 煩惱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瞋 의 情에 얽매여 忿怒하     는 무리를 말한다. 聲聞四果의 聖者中一來果까지는 欲界修惑을 아직 斷盡하지 못했기 때문에 瞋 의 情에 얽      매여 忿怒하기 쉽다. 그러무로 豫流一來를 未離欲者라 칭한다. 不還果에 이르면 欲界修惑을 모두 斷盡했으므로     가령 上界의 修惑이 있다하더라도 瞋 가 있으므로 未離欲者라 하지 않는다.

7) 二十論은 五字一句 四句一頌으로 頌數가 모두 二十一이다. 다만 최후의 一頌은 結嘆의 辭로서 별로 敎義를 述하     지 않았기 때문에 필경 二十으로 헤아린다.

8) 三十論은 五字一句, 四句一頌으로 頌數가 三十이므로 三十論이라 한다.

9)  破邪山論은 邪山을  破하는 論이라는 뜻으로 外道小乘의 心外實存의 執見을 邪山에 비유하고 오로지  破를     主眼으로 함이 「二十論」이므로 이렇게 말한다.

10) 高建法幢論은 높이 법당을 세움을 論한다는 뜻으로 唯識中道의 旗幟을 法幢에 비유하여 擁立함을 主眼으로 함     이 三十論으므로 이렇게 말한다.

11) 大藏綱目指要錄 5卷 25

12) 十大論師에 대해서는 明昱의「成唯識論俗詮」卷一과 智旭의 「成唯識論觀心法要」卷一 등에는 最勝子를 除하      고 陳那를 大十論師에 넣었으나 이것은 본래부터 誤謬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에 대해서 湛慧의 「述記集      成編」卷三에는 最勝子의 梵音 辰那弗多羅의 辰那를 陳那와 混同해서「成論」中 陳那의 所說이 나오는데 이와      같이 錯誤해서 陳那로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대개 明昱 등은 「述記」의 指南에 依하지 않고 「成論」을 의지      했기 때문에 이러한 誤謬를 犯했으리라 생각된다.

13) 成唯識論卷第一(論第一 初左) 112

14)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十二右) 2

15) 成唯識論卷第一(論本第一 初左)117

16) 成唯識論卷第一 (述記)第一本 四十七左 119

17)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十一右) 569  

18) 成唯識論卷第二(述記) 第二末 七十二右 569

19) 成唯識論卷第二(述記) 第二末 八十二左 2

20)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十二左) 3

21)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十二右) 2

22)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十二左) 6

23) 菩薩의 七地以前은 菩薩의 位에 資糧位 加行位 修習位 究竟位의 五位가 있는데 이 第四階의 修習位에 十地가      있으니 이 十地中의 第七地 以前을 말한다.

24) 有學의 聖者는 二乘의 位에 凡聖이 있는 중 聖者에 有學無學이 있는데 그 중 有學을 말한다.

25)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十二左) 8

26) 成唯識論 卷第二 「述記」第一本 四十六左 117∼118

27)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十三右) 11

28)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十九左) 300

29) 無性有情의 第七識은 無始以來 有漏로써 相續間斷이 없으므로 恒隨轉의 義가 있어 種子라고 할 수 있으나 이      는 上述과 같은 顯現果俱有의 義를 缺하고 있기 때문에 種子라고 할 수 없다.

30) 成唯識論卷第二 「述記」 第二末 九十二右 16

31) 成唯識論卷第二 (論第二 十三左) 16

32) 成唯識論卷第二 (論第二 十三左) 17

33) 成唯識論卷第二「演秘」第二末 三十九左 17

34) 成唯識論卷第二 「述記」第二末 九十五右 19

35) 이 四分의 作用은 他의 識 및 心所에도 통하나 여기서는 本識에 대해서 말한다.

36) 成唯識論卷第二 (論第二 十四右) 20

37) 成唯識論卷第二 (演秘) 第二末 四十一左 23

38) 成唯識論卷第二 (論第二 十四右) 21∼22

39) 成唯識論卷第二 (論第二 十五左) 30∼31

40) 成唯識論卷第二 (論第二 十六左∼十七右) 35∼37

41) 成唯識論卷第二「述記」第三本, 十三左

42) 成唯識論卷第二「述記」第三本, 十三左 78

43) 成唯識論卷第二「述記」第三本 十六左 81

44)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十七右) 37

45)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十二右) 2

46)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二十七左) 121  

47)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二十六左) 112∼113

48)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二十六左) 113∼114

49)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二十六左) 115

50)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二十七右) 117

51)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二十七左) 120

52)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二十七左) 121

53)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二十八右) 121∼122

54) 成唯識論卷第二(論第二 二十八左) 126

55) 成唯識論卷第一「義燈」第一末 二十二右 144

56) 成唯識論卷第一「義燈」第一末 二十二右 142∼144

57) 大藏經講座 唯識論講義 上 花田凌雲著 216∼217 參照

58) 成唯識論卷第一「義燈」第一末 二十二右 147

59) 成唯識論卷三(論第三 三左) 199

60)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二十右) 180

61)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二十左 ∼ 論第五 二十一右) 185

62)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初右) 173

63)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初右) 174

64)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二右) 187

65)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二右) 191

66) 成唯識論卷第第三(論第二 三右) 196

67) 名言을 시설함은 第六相應의 想뿐으로 餘識相應에는 名言을 시설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도 勝能에 대해서 말      하는 것이다.

68)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三左) 197

69) 成唯識論卷第二(論第三 三左∼論第三 四右) 200∼203  

70)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五右) 208∼209

71)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八左) 229

72)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十六左) 282

73)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十八左) 295

74)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十九左) 299

75)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二十右) 305

76)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二十四右) 328

77)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二十七左) 353

78)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二十九右) 360

79) 雜生이란 一趣에 生에서 他趣의 法을 기함을 말한다. 예를 들면 欲界의 有情으로서 色界의 法을 起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眼識, 耳識 등은 스스로 欲界에 있으면서 色界의 것을 起할 수 있으므로 趣生의 體라고 할 수 없      는 것이다.

80)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二十右) 370

81)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三十一右) 376∼377

82)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三十二右) 382

83) 成唯識論卷第三(論第三 三十四右) 396

84) 名色에 대해서 受想行識의 四蘊을 名이라고 함은 이러한 心, 心所는 形體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名      으로써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反해서 色蘊은 形體로써 알 수 있는 物質이므로 色이라고       한다.

85)  羅藍이란 梵語 Kalala의 음표로서 보통 「가라람」이라고 읽으나 南都에서는 「곤라람」이라고 읽음을 正則      으로 하고 있다. 譯해서 凝滑, 雜穢 등이라고 한다. 胎內五位의 一로서 男女交合해서 兩精이 처음으로 凝結한      것이다. 受生의 최초로부터 七日間을 가리킨다.

86) 成唯識論卷第四(論第四 初右) 403

87) 成唯識論卷第四(論第四 四右) 421

88) 成唯識論卷第四(論第四 九左) 449

89) 成唯識論卷第四(論第四 十二右) 470

90) 成唯識論卷第四(論第四 十二右) 470

91) 成唯識論卷第四(論第四 二十左) 472

92) 成唯識論卷第四(論第四 二十右) 470

93) 新修大藏經 卷三十卷 瑜伽部 上坤六拾 651(中)

94) 相分이 屬地의 用이란 相分은 我境 즉 第八見分을 위하여 반연해지므로 그에 屬하는 所緣의 用이 있다는 뜻이      다.(唯識學硏究 下卷 敎義論 P286 深浦正文著)

95) 成唯識論卷第四(論第四 十二右) 470  

96) 成唯識論卷第四(論第四 十二右) 470

97) 成唯識論卷第四(論第四 十二右) 470

98) 成唯識論卷第四(論第四 十二右) 470

99)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十二左) 317

100)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七右) 423

101)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八右) 426

102)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九右) 429

103)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九左) 430

104)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九左) 431

105)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三十右) 431

106)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三十左) 432∼433

107)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三十一左) 435

108) 成唯識論卷第四(論第四 十二右) 470

109) 成唯識論卷第四(論第四 十二右) 470

110) 成唯識論卷第四(論第四 十二右) 470

111) 生空無漏觀은 法執에 反對되는 것이 아니므로 이 觀으로써 결코 法執을 除할 수 없다. 이것을 除하려면 반드      시 法空無漏觀으로써 하지 않으면 안된다.(唯識學硏究 下卷 敎義論 註(四) p 295 深浦正文 著)

112) 見所斷等이란 三斷에 見所斷, 修所斷 및 非所斷의 三種이 있다. 그 중 見所斷이란 見道所斷으로서 見道에 있      어서 斷하는 法을 말한다. 分別起의 惑이 그것이다. 修所斷이란 修道所斷으로서 修道에 있어서 斷하는 法을 말      한다. 俱生起의 惑이 그것이다. 非所斷이란 見道와 修道에서 斷하여지지 않는 法을 말한다. 一切의 無漏法이       그것이다.(唯識學硏究 下卷 敎義論 (五) p.295 深浦正文저)  

113) 第六相應의 九生의 혹은 九地의 一一에 九品이 있다. 즉 一地를 우선 上中下의 三品으로 大別하고 다시 각각      上中下 三品으로 세분한다. 따라서 合하면 九品이 된다. 이 九品이 九地에  하고 있으므로 모두 八十一品이       되는 셈이다. 즉 가장  한 欲界五趣地의 上上品에서 비롯하여 가장 細한 無色界有頂地의 下下品에 이르기까      지다. 그런데 第七相應의 俱生의 惑은 어떠한가에 대해서 「述記」卷五本에 二釋이 있으나 正義는 九地의 一      一에 一品씩 있다. 따라서 九地를 合하면 九品이 된다. 이것을 第六相應의 有頂地의 下下品의 惑과 함께 一時      頓斷한다고 한다.  

114) 二經이란 本文에 述한 것과 같이 「入楞伽經」과 「解脫經」이다. 그 中 前者는 大乘經으로 不共許의 것이지            만 後者는 小乘經으로서 共許의 것이라고 한다. 다만 後者의 意義에 대해서는 種種의 異說이 이다. 「同學 」卷五       之二에 그에 대한 상세한 分別을 하고 있다. 參照할지니라.( 唯識學硏究 下卷 敎義論 註(一) p.300 深浦正文 著)

115)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八左) 100

116)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八左) 101

117)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九右) 102∼103

118)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十二右) 121

119)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十二右) 121

120)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十二左) 124

121)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十三右) 126

122)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十五左) 141

123)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十六右) 143

124)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十六右) 143

125)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十六右) 143

126) 唯識學解說 深浦正文 著 註(二) p.270

127) 唯識論解說 深浦正文 著 註(三) p.270

128)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十九左) 178

129)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二十六左) 221

130)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初右) 257

131)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十二左) 316

132)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三右) 411

133) 成唯識論卷第七(論第七 初右) 455

134) 唯識綱要 加藤智遵著 全明星譯 24頁 6행

135)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二十八右) 228

136)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二十九右) 232

137)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二十九左) 235

138)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三十右) 237

139) 成唯識論卷第五(論第五 三十一右) 241

140)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初右) 259∼260

141)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左) 267

142)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左) 268

143)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四右) 275

144)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四右) 275

145)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四右) 276

146)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五右) 280

147)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六右) 284

148)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六右) 284

149)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七右) 288

150)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七左) 290

151)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十二左) 317

152)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十三右) 320

153)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十三右) 320

154)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十三右) 322

155)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十三左) 325

156)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十四右) 329

157)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十四右) 333

158) 成唯識論卷第六(論第五 十四左) 345

159)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十五右) 352

160)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十五右) 352

161)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三右) 411

162)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三右) 411

163)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三左) 413∼414

164)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三左) 414∼415

165)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四右) 415

166)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四左) 416

167)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四左) 417

168)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四左) 417

169)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五右) 418

170)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五左) 418

171)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五左) 419

172)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六右) 420

173)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六右) 421  

174)  成唯識論卷第六(論第六 二十六右) 421

175) 成唯識論卷第七(論第七 初右) 456∼457

176) 成唯識論卷第七(論第七 初左) 458

177) 成唯識論卷第七(論第七 二左) 465∼466

178) 成唯識論卷第七(論第七 二右) 465∼466

179) 成唯識論卷第七(論第七 九右)514

180) 成唯識論卷第七(論第七 九右) 514

181) 成唯識論卷第七(論第七 九右) 514

182) 第四禪天에 八天이 있는 중 廣果天은 그 第三天에 위치하고 있다.

183) 바로 나고 죽는 位에도 또한 第六識이 없다. 다만 이는 最極悶絶의 위이므로 悶絶중에 攝하고 五位以外에 따로 헤아리지 않는다.

184) 成唯識論卷第七(論第七 十八右) 576∼577

185) 成唯識論卷第七(論第七 十八右) 577

186)別定... 第一菩提場會는 如來淨藏三昧. 第二普光明殿會는 十信會로서 아직 보살위에 오르지   못하므로 三昧에 들지 못하고 第三 利天宮會는 菩薩無量方便三昧, 第四野摩天宮會는 善伏   三昧, 第五兜率天宮會는 明智三昧, 第六自在天宮會第는 大智慧光明三昧八, 第七重會普光明   殿會三는 佛自住刹那際三昧, 第八三重普光明殿會는 華嚴三昧, 第九逝多園林會는 如來獅子舊   迅三昧에서 설하였다.

 

187)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 卷第八. 七十八下 8行

188)人三天四... 人三은 上註에서 밝힌 第一菩提場會와 第二, 第七, 第八會의 普光明殿會와 第九逝多園林會이다. 天四는 第三 利天宮會와 第四夜摩天宮會외 第五兜率天宮會와 第六自在天宮會이다.

189)見惑... 見煩惱, 見障이라고도 함. 見道位에서 四諦의 이치를 볼 때에 끊는 번뇌로서, 貪, 瞋, 癡, 慢, 疑, 身見, 邊見, 邪見, 見取見, 戒禁取見, 등 十種이다. 三界에서 각기 四諦를 관찰하여 끊는 번뇌는 각 제마다 각기 다르므로 모두 八十八使의 見惑이 된다.

190)國譯一切經釋經論部 六. 8頁中. 11行

191)修惑... 思惑이라고도 함. 낱낱 事物의 眞相을 알지 못하므로 일어나는 번뇌. 情意에 관한 것이므로 이를 끊기는 쉽지 않고 오랜시간에 걸쳐 이를 알고 끊는다.

192)國譯一切經釋經論部六 8頁下 22行

193)十善惡道... 十善道 또는 十善戒라고도 한다. 不殺生, 不偸盜, 不邪淫, 不忘語, 不兩舌, 不惡口,  不綺語, 不貪欲, 不瞋 , 不邪見 등이니 十善의 행위는 좋은 곳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이다.

194)國譯一切經釋經論部 六. 9頁上 15行

195)國譯一切經釋經論部 六.9頁上 23行

196)三十七助道品…涅槃의 이상경에 나아가기 위하여 닦는 道行의 종류이니 四念處, 四正勤, 四如意足, 五根, 五力, 七覺分, 八正道分이다.

197)八正道…불교의 실천수행하는 중요한 종목을 八種으로 나눈 것으로서 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이다.

 

198)國譯一切經釋經論部 六. 9頁中 8行

199)國譯一切經釋經論部 六. 9頁中 18行

 

200)頻伽藏經華嚴部天八, 二十二丁左 12行

201)國譯一切經釋經論部 六. 9頁下. 4行

202)十波羅蜜行…波羅蜜은 度, 到彼岸이라 번역. 布施波羅蜜. 持戒波羅蜜. 忍辱波羅蜜. 精進波 羅蜜. 禪定波羅蜜. 智慧波羅蜜. 方便波羅蜜. 願波羅蜜. 力波羅蜜. 智波羅蜜

203)國譯一切經釋經論部 六 9頁下 15行

204)國譯一切經釋經論部 六. 10頁下 8行

205)國譯一切經釋經論部 六. 10頁下 22行

206)縮藏八. 二十四下左 11行

207)十二支…十二因緣 또는 十二緣起라고도 한다. 三界에 대한 迷의 因果를 十二로 분류한 것. 無明, 行, 識, 名色, 六入, 觸, 受, 愛, 取, 有, 生, 老死.

208)四無 智…四無 辨. 四無 解라고도 함. 마음의 방면으로는 智, 解라 하고 입의 방면으로는 辨이라 함. …1法無 智 2義無 智 3辭無 智 4樂說無 智이다

209) 佛本行經 … 60卷 수나라 사나굴다 번역. 석존의 탄생으로부터 출가성도등 일대의 사실을 말하고 불제자의 귀의     에 관한 인연까지 기록

210) 入楞伽經 … 十卷楞伽라고도 하며 略해서 楞伽經이라고도 함. 楞伽經의 현존한 3本중에서 513년 菩提流支가 번     역한 것. 五法, 三性, 八識, 二無我 등의 뜻을 설하고 一異有無 등의 집착을 여의고 如來藏佛性의 理에 修入하는     것을 밝힌 것. 望月佛敎大辭典 5권 p4127  

211) 中觀論 … 4卷. 용수보살 지음. 구마라습 번역. 줄여서 中論이라 한다. 27卷 446偈로 되었고 十二門論, 百論과 함     께 三論宗의 所依論. 그 내용은 가장 철저한 中道를 주장하여 空과 假를 파하고 다시 中道에 집착하는 見解도     파하여 八不中道 곧 無所得의 中道를 말한다.

212) 原始經典 … 불교의 초기의 교리가 아직 발전 또는 정리되지 못하고 대승사상이 발전되기 이전의 불교경전

213) 雜阿含經 … 50卷 頌의 구나발타라 번역. 四阿含(長阿含, 中阿含, 雜阿含, 增一阿含)의 一. 다른 阿含에 들지 아     니한 것을 주워 모은 것. 내용은 가장 원시불교의 형태를 지녔고 설법한 내용도 극히 간단한 苦, 空, 無常, 無我     또는 八正道의 원형대로 표시되었으며 부처님과 불제자들이 면목이 뚜렷이 나타난다.

214) 化地部 … 小乘, 二十部의 하나. 불멸후 300년에 一切有部에서 따로 나온 것. 宗輪論 述記에 「이 部의 主는 본     래 國王으로 王이 거느리는 界地內의 地上의 사람을 化度하였으므로 化地라 함. 나라를 버리고 출가하여 佛法     을 弘宣하고 根本을 따라 이름을 化地部라 하였음」韓國佛敎大辭典七卷 p311

215) 大般若經 … 唐나라 현장 번역. 大般若波羅蜜多의 약칭으로 大品般若經이라고도 함. 600卷 4처 16회 39품으로      나누고 80餘科의 명수를 들어 모든 法은 죄다 空하다는 사실을 밝히다.

216) 成唯識論 … 10卷 唐나라 玄 번역. 法相宗의 중요典籍. 世親의 唯識사상의 대표적인 「唯識三十頌」을 문하에     大十論師가 해석한 10개의 학설을 護法을 전통으로 하고 다른 이들의 말을 비판하여 종합해서 659년에 번역한     것. 八識을 자세히 말하여 인식의 과정을 명백히 하고 또 실천적 수행의 五階位를 말한다.  

217) 起信論 … 大乘起信論의 약칭. 인도의 馬鳴菩薩이 짓고 眞諦三藏이 번역함. 내용은 1 因緣分 2 立義分 3 解     釋分 4 修行信心分 5 勤修利益分의 五分으로 나누었음. 그중에 立義分, 解釋分은 敎理論으로 一心, 二門, 三大     를 말하고 修行信心分의 一分은 實踐論으로 四信五行을 말하였다. 注釋書로는 淨影 慧遠의 義疏四卷, 海東 元曉     의 疏二卷, 賢首 法藏의 義記가 있다. 이것을 起信論의 三大疏라 함. 韓國佛敎大辭典 一卷 p687

218) 大乘起信論 海東元曉疏 卷一 18下 6行

219) 大乘起信論 海東元曉疏 卷二 2上 9行

220) 唯識家 … 우주의 삼라만상은 모두 阿黎耶識으로부터 緣起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法相宗을 硏究하는 학자들

221) 大乘起信論 海東元曉疏 卷一 21下 6行

222) 大乘起信論 海東元曉疏 卷二 8上 4行

223) 大乘起信論 海東元曉疏 卷二 12下 3行

224) 大乘起信論 海東元曉疏 卷二 14下 9行

225) 大乘起信論 海東元曉疏 卷삼 7下 2行

226) 依他起性 … 唯識三性 (遍計所執性, 依他起性, 圓成實性)의 하나. 자기의 原因만으로는 나기 어렵고 반드시 다른 연을 기다려서 나는 物, 心의 모든 現象. 唯識論에 의하면 百法中에 94法은 여기에 딸림.

227) 遍計所執性 … 三性의 일. 遍計는 여기저기 억축한다는 뜻 - 所執은 遍計에 의하여 잘못 보이는 대상. 곧 主觀     이 색안경을 쓰고서 대상을 올바로 보지 못하고 언제든지 잘못 分別하는 것을 遍計所執性이라한다. 비유하면      길에 놓여진 노끈을 뱀인 줄 잘못 볼 적에 노끈 所遍計. 뱀이라고 分別하는 마음은 能遍計, 그때 눈앞에 떠오르     는 뱀의 그림자는 遍計所執性이다.  

228) 俱生起 … 邪師, 邪敎, 邪思惟 등의 바깥 연에 의지하지 않고 나면서부터 갖추어 있는 선천적인 번뇌.

229) 大乘起信論 海東元曉疏 卷二 15上 5行

230) 無間道 … 四道의 하나. 다시 노력 정진한 공이 현저하여 眞智를 발하고 한창 煩惱를 끊는 자리. 煩惱때문에 간격되지 않으므로     無間이라 한다.

231) 解脫道 … 四道의 하나. 無間道 후에 생기는 일념의 正智가 한창 眞理를 證悟하는 자리. 煩惱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 지혜이므     로 解脫道라고 한다.

232) 分段生死 … 變易生死의 對. 六道로 輪廻하는 凡夫들의 生死. 分段은 分限과 形段이라는 뜻. 凡夫는 각기 業因을 따라서 신체에     크고 작고 가늘고 굵은 형단이 있고 목숨이 길고 짧은 분한이 있어 分分段段으로 生死하므로 分段生死라 한다.

233) 變易生死 … 分端生死의 對. 三界에 生死하는 몸을 여읜 뒤로 성불하기까지의 聖者가 받는 三界 밖의 生死. 變易은 그전의 형상     을 변하여 딴 모양을 받는 것이니 이 聖者들은 無漏의 悲願力으로 말미암아 分段生死하는  劣한 몸을 변하여 細妙無限한 몸을     받으며 無漏의 定願力의 도움으로 妙用이 헤아릴 수 없으므로 변역생사 또는 不思議生死라 한다.

234) 七衆 … 佛弟子를 七種으로 나눈 것. 比丘·比丘尼·式叉摩那尼·沙彌·沙彌尼·優婆塞·優婆夷. 前 五重은 출가중., 뒤 二重은     재가중

235) 別解脫戒 … 別解脫律儀라고도 한다. 三種戒의 하나. 受戒하는 작법에 의지하여 五戒·十戒·具足戒 등을 받아지니어 몸이나 입     으로 짓는 惡업을 따로따로 解脫하는 戒法

236) 但空 … 不但空의 반대. 만유의 모든 법이 空하다는 한편만 알고 不空의 이치는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237) 析空觀 … 구족히는 析色入空觀 또는 析法觀이라고도 함. 天台宗에서 말하는 四敎의 처음인 藏敎의 觀法으로서     물심 모든 현상이 찰나에 생멸하는 것을 보고 이를 분석하여 공이라 관하는 것

238) 無餘涅槃 … 四종 涅槃의 하나. 생사의 괴로움을 여읜 眞如. 번뇌장을 끊고 얻는 것. 異熟의 苦果인 현재의 신체     까지 멸해 없어진 곳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이같이 이름한다.

239) 體空觀 … 삼라만상의 존재가 그대로 空하다고 보는 관법. 이것은 天台宗에서 通敎의 실천방법으로 세운 것.

240) 不但空 … 畢境空, 無所得空이라고도 한다. 有를 인정하지 않는 空을 但空이라 함에 대하여 그 空도 역시 공하     다는 절대 부정의 空을 不但空이라 함

241) 見惑 … 見煩惱, 見障이라고도 한다. 見道位에서 四諦의 이치를 볼 때에 끊는 煩惱, 곧 眞理가 밝혀지지 않는 迷     로서 그 自體에 身見, 邊見, 邪見, 見取見, 戒禁取見·貪, 瞋, 癡, 慢, 疑 등 十種이 있다.  

 

242) 思惑 … 修惑이라고도 한다. 낱낱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므로 일어나는 煩惱, 情意에 관한 것이어서 이를 끊     기는 쉽지 않고 오랜 시간에 걸쳐 이를 알고 끊는 것.

243) 相始敎 … 五敎의 하나인 大乘始敎의 하나「해심밀경」「유식론」에 말한 것으로 일체중생은 본래 선천적으로     저마다 품수한 성품이 있어 변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定道說을 주장하여 一切衆生 悉有佛性 곧 어떤 중생이나      부처님이 될 성품이 있다는 말에 반대하여 현상차별의 有를 고집하여 그 성품과 모양을 말하는 것이다.

244) 空始敎 … 五敎中 大乘始敎의 하나. 「반야경」「중관론」등에 말한 것. 온갖 것은 因緣으로 생긴 것이므로 實     體의 自性도 없다고 말하고 아직 그 이상의 깊고 묘한 이치를 말하지 아니하며 眞如 無相의 무만을 역설한 교     이다.

1) 虎溪三笑 … 여산의 혜원이 하루는 그 옛친구인 도연명과 육수정의 방문을 받고, 두 사람이 돌아갈 때에 이들을     전송하여 서로 이야기하면서 가다가, 모르는 사이에 일찍부터 이 다리를 건너 산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리라고     서원하였던 虎溪의 다리를 지나쳐버리고는 이 일을 두 벗에게 말하고 세 사람이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      이것을 세상에서 虎溪三笑라 한다.

246) 桓玄 … 晋나라의 宰官으로 자는 경원, 온겁자 혹은 沖侄이라고 한다. 王恭功을 쳐서 江州刺史가 되다. 뒤에 병     사를 이끌고 建康에 들어가 安帝를 廢位하고 스스로 王位에 오르다. 성품이 驕奢 하여 마침내 劉裕에게 殺害당     했다.

247) 謝靈運 … 南朝宋나라의 詩人. 晋나라 名將 謝玄의 손자로서 康樂公의 爵位를 이었으므로 謝康樂이라 불렀다.      文帝때 侍中이 되었으나 참언에 걸려 사형에 당하였다. 佛敎에도 조예가 깊어 「大槃涅槃經」36卷의 번역을 완     성시켰다. 文帝元嘉 10年(433)에 죽다. 나이 49세

248) 雷次宗 … 劉宋의 南昌人으로서 자는 仲論. 어려서 廬山에 들어가 慧遠大師에게 師事하여 淨業을 닦았으며 끝내     次宗은 벼슬을 하지 않고 餘生을 은거 생활로 마쳤다.

249) 宗炳 … 劉宋 때의 南陽人으로 字는 少文이다. 書畵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거문고에도 능숙한 풍류객이었다.     또한 불법에 통달하여 경전을 강설하였고, 廬山慧遠法師를 의지하여 수학. 白蓮社에 참예한 여러 高賢中의 한      사람이었다. 宋元嘉乙丑年에 죽다. 나이 69세

250) 周濂溪 … 周敦 (1017∼1073) 北宋의 대유학자, 字는 茂叔. 號는 濂溪. 諡號는 元公. 程顥(程明道) 程濂(程利川)     형제의 스승이며, 頌學의 鼻祖가 됨. 著書는 通書, 太極圖說 등

251) 開元釋敎錄∼20卷 730 唐 開元 18年 智昇편찬. 줄여서 開元錄 67(後漢 明帝 永平 10년)에서 730(唐 玄宗 開元      18년)에 이르는 664년 동안 176명의 三藏이 번역한 大·小乘의 經, 律, 論, 聖賢集 傳 그리고 失譯 缺本 등 도합     2278부 7046권의 목록을 기록한 것. 이를 줄여서 낸 것으로 智昇의 開元釋敎錄 4卷이 있다. 축쇄장경연기에는     「沙門智昇이 지은 開元釋敎錄 20卷. 經, 律, 論과 여러 스님네의 지은 책 등 5048권을 적고 千字文 글자로 차례     를 정하니 이것이 대장경 수효를 정한 처음이라」하다.

252) 長壽 二年∼사실은 則天武后가 21年間 執權을 하였을 때의 年號(年號 14번이나 바뀜)唐 中宗 嗣聖 10년에 해당     한다.

253) 貞觀∼唐太宗의 年號이다.

254) 貞觀二十年은 646年이고 長壽 二年은 693이므로 47年間의 간격이 있다.

255) 永徽∼唐高宗의 年號이다.

256) 因地∼부처님의 지위를 果地, 혹은 果相이라 함에 대하여 성불하려고 수행하는 지위를 因地라고 한다.

257) 十力∼부처님께만 있는 열 가지 心力이니 1 處非處智力 2 業異熟智力 3 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4 根上下智     力 5 種種界智力  種種勝解智力  遍趣行智力  宿住隨念智力  死生智力  漏盡智力, 이는 俱舍論, 順     正理論 등에 의함  

258) 四無所畏∼설법할 적에 두려운 생각이 없는 네 가지 無所畏. 1 正等覺無畏 2 漏盡無畏 3 說障法無畏 4 說出     道無畏. 보살의 四無所畏는 能持無畏, 知根無畏 決疑無畏, 答報無畏이다.

259) 四無 智∼마음의 방면으로는 智라 하고 입의 방면으로는 辨이라 함. 法無 智는 온갖 교법에 통달한 것. 義無      智는 온갖 교법의 要義를 아는 것. 辭無 智는 여러 가지 말을 알아 통달하지 못함이 없는 것. 樂說無 智는     온갖 교법을 알아 機類가 듣기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데 자재한 것.

260) 十八不共法∼十八不共佛法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만 있는 공덕으로서 二乘이나 菩薩들에게는 공동하지 않는       열 여덟 가지 身無失, 口無失, 無異想, 無不定心, 無不知已捨, 欲無減, 精進無減, 念無減, 慧無減, 解脫無減, 解脫      知見無減, 一切身業隨智慧行, 一切口業隨智慧行, 一切意業隨智慧行, 智慧知見過去世無 無障, 智慧知見未來世無       無障, 智慧知見現在世無 無障이다.

261) 三十七助道品∼涅槃의 이상경에 나아가기 위하여 닦는 道行의 종류로서 四念處, 四正勤, 四意足, 五根, 五力, 七      覺分, 八正道分이다.

262) 奢摩地∼止, 止息, 寂靜, 能滅이라 번역.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妄念을 쉬고 마음을 한 곳에 머무는 것.

263) 三摩鉢提∼等持라 번역. 定을 等持라 함은 등은 定力에 의하여  沈, 掉擧의 번뇌를 여의고 마음이 평등함을       말함. 定力이 이른 상태에 이르게 함으로 至라 함.

264) 禪那∼六바라밀의 하나. 禪이라 약칭. 靜慮, 思惟修, 定이라 번역. 진정한 이치를 思惟하고 생각을 안정케하여       산란치 않게 하는 작용.

265) 十二部經∼또는 十二分經, 十二分敎라고도 함. 부처님의 一代敎說을 그 經文의 성질과 형식으로 구분하여 十二      로 나눈 것. 1 修多羅, 契經, 法本이라 번역. 散文體의 경전 2 祇夜, 重頌 應頌이라 번역, 散文體 經文의 뒤에      그 내용을 韻文으로써 노래한 것 3 授記, 경중에 말한 뜻을 문답 해석하고 또는 제자의 다음 세상 날 곳을       예언한 것 4 伽陀, 諷頌 孤起頌이라 번역. 四言 五言 또는 七言의 韻文 5 優陀那, 無間自說이라 번역. 남이       묻지 않는데 부처님이 스스로 말씀한 경  尼陀那, 緣起, 因緣이라 번역. 경중에서 부처님을 만나 法을 들은      인연등을 말한 것  阿波陀那 비유라 번역. 경전중에서 비유로써 은밀한 교리를 명백하게 한 곳.  伊帝曰多      伽, 本事라 번역. 부처님 자신의 지난 세상에 행하던 보살행을 말한 것.   陀伽, 本生이라 번역. 부처님         자신의 지난 세상에 행하던 보살행을 말한 것.  毘佛略, 方廣, 方等이라 번역. 方正, 광대한 진리를 말한 것       阿浮陀達摩, 未曾有法, 希有法이라 번역. 부처님이 여럭 가지 신통력, 부사의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 것. 경      전의 흥기한 인연에 부사의한 일을 말함과 같은 것.  優婆提舍, 論議라 번역. 교법의 의를 논의 문답한 경문      을 말함.

266) 賢首五敎∼唐나라 賢首法藏의 敎判 1 小乘敎 ― 阿含經  2 大乘始敎 ― 解深密經  3 終敎 ― 楞伽經 , 勝       經  4 頓敎 ― 維摩經  5 圓敎 ― 華嚴經

267) 「上卽祚四年丁丑 詔住 雲門寺 大闡玄風」「高麗國義興華山 曹溪宗 麟角寺迦智山下 普覺     國尊碑銘幷序」(이하 인용시 然碑      銘이라 약칭함) 麟角寺誌七張下.

268) 「一然作品集」解題, 형설출판사 1977. 黃浿江.  

269) 普覺國尊一然에 대한 硏究, 韓國史硏究 26. 蔡尙植. 1979. pp.42∼58.

270) 「門人雲門寺住持大禪師法珍 狀師之行. 聞于上. 上令撰辭臣學識 荒淺 不足以光揚至德故過延數年 請旣不已 命亦難  謹爲之序而      銘,之曰」 麟角寺誌九張下 蔣濟明編.  

271) 「雲門寺事蹟」〈朝鮮寺刹史料〉上 「五刹者∼今寺之東九千步許有嘉瑟岬寺. 南七里許有天門岬寺 西十里許有大悲岬寺 北八里許有      所寶岬寺. 中有大鵲岬寺 今雲門是也」그런데 五岬寺의 명칭이 「三國遺事」〈寶壞梨木〉條의 기록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여기      서는 「雲門寺事蹟」에 따른다. 「삼국유사」에는 大悲岬寺 嘉瑟岬寺 대신에 小鵲岬寺, 嘉西岬寺로 되어 있다.  

272) 占察寶∼法會의 하나로서 「占察經」에 의한 법회이다. 신라 圓光法師가 占察寶를 만들고 이 법회를 처음으로 열었다. 「三國遺      事」卷4 圓光西學條에 언급.  

273) 百座道場∼(百高座)법회 이름. 사자좌를 백을 만들고 큰스님네를 모셔다 설법하는 큰 법회로, 신라 진평왕 35년(A.D. 613) 7월에      수나라 사신 王世儀가 왔을 때 黃龍寺에 百高座를 차리고 원광 법사 등을 맞아들여 경법을 말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다.

274) 「三國遺事」卷4 寶壞梨木條

275) 寶壞 국사가 장차 廢寺를 復興시키려고 北嶺에 올라가 바라보니 뜰에 五層黃塔이 있었다. 내려와서 찾아보니 아무것도 없었         다.…海龍이 鵲岬이라 한 말을 생각하고 그 곳을 찾아가 땅을 팠더니 과연 遺塼이 무수히 있어 이것을 모아 쌓아올려 塔을 이      루니 남은 벽돌이 없었다. 이것으로서 前代의 절터임을 알 수 있었다. 重創을 마치고 이름을 鵲岬寺라 하였다. 前者의 大鵲岬과      後者의 鵲岬寺는 모두 고려 태조 20년(A.D. 937)에 雲門禪寺로 賜額 하기 전에 同寺의 異稱이다.

276) 結∼1 租稅를 계산하기 位한 논밭 면적의 단위. 약 일만把 (把는 줌).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 光武 9년에는 5周尺平方으로       정하였음. 10줌 한 뭇, 10뭇을 한 짐, 10짐을 한 총, 10총을 한 목이라 하였음(10把를 1束, 10束을 1負, 100負를 1結이라 하였음.

277) 「三國遺事」卷4 寶壞梨木條 「未幾太祖統一三國聞師至此創院而居, 乃合五岬田束五百結 納寺以淸泰四年丁酉賜額曰雲門禪師」

278) 이 碑는 보물 316호로 지정되어 雲門寺에서 보존하고 있는데 높이 5척 폭 3척으로 尹彦 가 짓고 僧坦然이 글씨를 썼다. 日帝      下에 파손이 되어 조각이 났으나 보수하여 보존하고 있다.

279) 靑銅壺 일명 甘露樽은 壬申年에 印湛禪師가 꿈을 꾸어 얻었다고 전해진다. 印湛스님이 하루는 若耶溪가에서 잠을 자는데 한 승      려가 한 곳을 가르키며 말하기를 '이곳에 보물이 있으니 네가 가지라'고 하였다. 스님이 꿈을 깬 후 그곳을 찾아보니 과연 그러      한 물건이 있었는데 樽안에는 西河集이 한 秩이 있어 같이 절에 보관하였다. 뒤에 그의 후손되는 이가 願하므로 가져가게 했다      고 한다.

280) 이 碑는 1965년 9월 보물 428호로 지정되었지만 두동강이 난 채 사척 정도의 잔비로 麟角寺 경내에 남아 있다.

281) 「元貞元年乙未八月日 門人 沙門竹虛奉勅執晋右軍王羲之書 門人內願堂兼住持通奧眞靜大禪師法珍 立石」麟角寺誌 十張上 蔣濟明

282) 碑陰記에「寶鏡寺住持通奧眞靜大禪師山立述」이라 明記된 것을 볼 때 通奧 眞靜大禪師는 一然스님이 입적한 1289년 경에는 내      원당과 보경사 주지 및 麟角寺 주지를 겸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정대선사는 一然의 法맥을 곗승한 寶鑑國師 混丘(1251∼        1322)로 이름은 淸 (法珍)이라고 했다가 山立이라고 바꾸었다. 普覺國尊 一然에 대한 硏究. 韓國史硏究 26. 蔡尙植, pp.38∼40

283) 九山四選은 '一然碑銘'에 나오는 술어로 九山門選의 一種인 듯하다. 敎宗에서는 宗禪이라고 하고 九山에서는 門選이라 한다. 九      山이므로 九山九選이라 해야 하거늘 九山四選이라 한 것은 九山門選의 대표인 듯하다.

284) 三重大師는 고려시대 僧科를 거친 스님들이 法階中의 하나로 大師, 重大師, 三重大師의 順이다. 三重大師의 특징은 禪宗法階나      敎宗法階가 共通이며 이 法階를 거쳐야만 敎宗은 首座가 되고 禪宗은 禪師가 된다.

285) 知訥門下의 正脈을 이은 慧諶과 一然은 동시인물이다. 〈三國遺事와 僧一然과의 關係考察, 李楠永〉어떤 연유인지 확실하지 않      으나 鄭晏의 私弟인 定林寺에 초청을 받은 이후에는 修禪社 계통의 慧諶(曹溪宗의 第二祖)의 저술인 「禪門拈頌」에 깊이 영향      을 받게 되고 또 修禪社 三世인 夢如와도 交分을 맺게 되어 명실상부한 修禪社 계통의 계승자로 자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閔淸      의 표현대로「遙嗣木牛和尙」이라 했으며, 修禪社와 연결된 禪月寺(禪源寺로 추정됨)에 주석하면서 이를 계기로 修禪社의 계승      자로 자처한 것 같다.〈普覺國尊 一然에 대한 硏究, 蔡尙植〉참조.  

286)  衣禮∼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림. 옛날의 敬禮

287) 九山禪門∼迦智山門 長興 寶林寺, 實相山門 南原 實相寺, 桐裏山門 谷城 泰安寺, 鳳林山門 昌原 鳳林寺, 聖住山門 保寧 聖住寺,      獅子山門 綾州 雙鳳寺, 曦陽山門 聞慶 鳳巖寺, 須彌山門 海州 須照寺,   山門 江陵  山寺

288) 靜照塔은 三層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上層은 佛像, 中層은 蓮花, 下層은 八角으로 各面에 동물의 像을 새겨 놓았다. 처음 이 탑      을 對案에 있는 스님의 母陵과 마주 보이는 곳에 세웠는데, 몇몇 몰지각한 이들이 자기의 조상묘를 쓰고자 탑을 허물어 방치하      였던 것을 1978년 麟角寺 경내에 옮겨놓았다. 麟角寺誌 十六張, 章濟明 撰.

289) 〈襄陽 陳田寺址 遺蹟調査〉歷史敎育 11∼12 1969 鄭永鎬

290) 〈新羅下代禪宗九山派의 成立〉한국사연구 7호 1972. pp.93∼95 崔柄憲

291) 〈普覺國尊 一然에 대한 硏究〉pp.51∼57

292) 「丙申秋有兵亂 師欲避地 因念文殊五字呪 以期感應忽於壁間文殊現身曰無住居」一然碑銘 p.4

293) 「高麗史」卷100 列傳 鄭世裕傳附晏傳

294) 禪門拈頌∼慧諶이 49세때에 禪門拈頌 30권을 編述하였는데 이 책은 禪林의 公案 1125종과 第祖師의 拈頌 등 要語를 수록한 佛      書로서 松廣寺에서 이룩한 것이다.

295) 〈一然碑銘〉p.19

296) 曹洞五位는 洞山良介(807∼869)가 제창한 偏正五位로서 즉 正中偏, 偏中正, 正中來, 偏中至, 兼中到이다. 曹洞宗의 핵심적 지술      로 曹洞禪脈을 이은 須彌山派에 의하여 중점적으로 연구된 것이다. 高麗後期의 禪思想硏究 p.152 權奇悰著

297) 스님께서 「삼국유사」를 탈고 완성하신 곳은 雲門寺와 麟角寺 두곳에서 논란이 있다. 崔南善, 權相老, 黃浿江 등의 학자는         「삼국유사」의 탈고 완성한 곳을 雲門寺라고 주장하고 있다.

298) 國尊이라고 한 것은 中國에서 國師라고 부르는 것과 구별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改國師爲國尊者, 爲避大朝國師之號也」一然      碑銘 p.10

299) 「上謂群臣曰 我先王 皆得釋門德大者爲王師, 德又大者 爲國師在否德獨無可乎. 今雲門和尙道尊德盛人所共仰 豈宜寡人獨蒙慈澤當      與一國共之」一然碑銘 p.9

300) 圓應國師는 保安사람으로 字가 逢渠, 西原, 名이 學一이었다. 13세에 具足戒를 받아 香水惠會에게서 禪旨를 깨닫고 經, 律, 論       三藏을 연구하여 특히 大般若經에 능통하였다. 예종 때에 三重大師, 禪師, 大禪師가 되었고 인종 때에 王師가 되었다. 雲門寺에      서 입적하시니 세수 93세요 법랍이 82세였다. 諡號가 圓應으로 國師로 추증되었다. 雲門寺 圓應國師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