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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단재 신채호(申采浩)의 실수인가, 고의적 날조인가?-연개소문의 사망 연도 의혹

                 출처:   http://cafe.daum.net/kphpi21/6vEw/309

 

《조선상고사》 檢證 /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 의혹

 

단재 申采浩(신채호, 1880~1936)는 소위 민족史觀을 확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지은 《조선상고사》는, 일제 치하 당시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킨 史書(사서)로 평가 받는다.

이 책의 주요 특징은 ▲고구려 중심주의 ▲신라 卑下(비하)다. 신채호는, 이 책의 총론에서 역사를 ‘我(아)와 非我(비아)의 투쟁’으로 규정했다. 我는 한반도 내의 민족을 의미하고, 非我는 한반도 이외의 민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구려가 과거 중국과 대립하며 정권을 유지했다는 이유를 들어 고구려에 많은 비중을 두고 우호적으로 서술했다.

신라를 보는 신채호의 관점은 고구려와 다르다.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羅唐동맹)을 맺는 등 뛰어난 외교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까지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써(對唐決戰) 삼국통일을 이뤘다. 신채호는, 이런 역사적 개가를 소위 ‘外勢(외세)를 끌어들여 삼국통일을 이뤘다’는 좁은 시각으로 바라보며 신라를 부정적으로 서술했다. 《조선상고사》 12章의 제목이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라는 것만 보아도 신라를 보는 그의 시각이 어떤지 알 수 있다.

《조선상고사》는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이 많다. 인용이 부정확한 부분이 있고, 사안에 따라선 왜곡한 곳도 있다. 한 원로 언론인은 《조선상고사》의 이런 오류를 바로잡은 책을 2014년 출간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바로잡기》(서문당 刊, 이하 바로잡기)가 그것이다.

이 책의 精解者(정해자)인 정소문(前 세계일보 논설위원) 씨는 《바로잡기》에서 “틀린 것은 틀렸다 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하여 바로잡아 주는 것이 단재를 위하고 단재의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鄭 씨는, 《조선상고사》에 담긴 내용 중 사실을 왜곡, 변조한 부분에 대하여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註解(주해)를 달아 정정했다.

조선상고사》에 실린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 실수인가? 날조인가?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는 연개소문을, 혁명가의 氣魄(기백)만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혁명가의 才略(재략)을 갖추었다 할 만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연개소문에 대한 혹평에 대해선 몹시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痛恨)는 말도 남겼다.

특히 《조선상고사》의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 10년 오차'란 글에서 666년 사망을 부정했다. 正史인 《삼국사기》와 《자치통감》 등은 연개소문이 666년(보장왕 25년)에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신채호는 연개소문이 657년에 죽었다고 《조선상고사》에서 주장했다. 그 근거로 삼은 게 천남생(연개소문의 장남) 묘지에 설치된 묘비 내용이었다. 《조선상고사》의 관련 내용 일부이다.

<…그 묘지에는 연개소문이 어느 해에 죽었다는 말은 없으나 남생이 “24세에 막리지 겸 3군 대장군으로 임용되었고 32세에 대막리지로 승진하여 군과 국사를 총괄하는 阿衡(아형·宰相)과 元道에 임명되었다(二十四 任寞離支 兼授三軍大將軍 三十二 加大寞離支 總錄軍國 阿衡元道)” 하였고, “儀鳳(의봉) 4년 정월 19일에 병이 들어 安東府(안동부)의 官舍(관사)에서 죽으니 나이 46이었다(以儀鳳四年正月十九日 遭疾 遷於安東府之官舍 春秋卌有六)”고 하였다…>

먼저 鄭少文 씨는 《조선상고사》의 위의 내용과 천남생 묘지의 비문에 기록된 내용을 비교했을 때,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고 했다. 《조선상고사》가 인용한 천남생의 묘비 기록이 잘못 옮겨진 것이다. 이를 鄭 씨가 천남생 묘비의 탁본을 구해 고쳤다(하단의 표 참조).

 


《조선상고사》의 표기

천남생 묘비의 실제 탁본

1

二十四

卄八

2

元道

元首

3

十九日

卄九日

4

大莫離支

太莫離支


천남생의 나이를 28세 → 24세로 쓴 신채호

주목할 것은 천남생의 나이(1번)다. 천남생 묘비에는 28세(卄八)에 막리지와 3군 대장군이 되었다고 써 있는데, 신채호는 그때의 나이를 24세(二十四)라고 《조선상고사》에 썼다. 실제 묘비를 보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천남생이 28세에 막리지와 3군 대장군이 되었다고 정확하게 적혀 있다(하단의 탁본 사진 참조).

 

천남생의 나이를 28세 → 24세로 낮춰 《조선상고사》에 기록한 신채호는, 더 나아가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657년이라고 단정한다. 관련 내용이다.

<당고종의 儀鳳(의봉·年號) 4년은 기원 679년이고, 그때 남생의 나이는 46세였다. 그러니까 남생의 나이가 24(28)세 때는 기원 657(661)년이고 남생은 24(28)세 때인 657년 막리지 겸 3군 대장군이 되어 병권을 잡았으니, 기원 657(661)년에 연개소문이 죽어 그 직위를 남생이 물려받은 것이 확실하다.>
(괄호 안의 숫자는 천남생 묘비의 탁본을 바탕으로 정소문 씨가 바로 잡은 것)

연개소문의 죽음으로 長男인 천남생이 막리지와 3군 대장군 직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죽음과 과도하게 연결

이는 사실과 차이가 있다. 천남생의 묘비에는, 연개소문의 죽음으로 인해 천남생이 막리지와 3군 대장군에 올랐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그 당시 풍습을 보면, 亡者에 대한 묘비를 쓸 때 선조들의 기록도 함께 쓴다. 천남생 묘비에도 그의 할아버지 淵太祚(연태조)와 연개소문에 대해 간략히 적혀 있지만, 연개소문의 죽음과 관련된 언급은 없다. 《삼국사기》 등 正史에서도 이런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 올라온 《삼국사기》에서 막리지란 직책을 찾아보았다. 이 자료에서 막리지란 직책은 중국의 兵部尙書(병부상서)와 中書領(중서령)의 관직과 같았다(연개소문傳 49권)고 나와 있다. 지금의 국방부 장관 정도에 해당하며 軍權(군권)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막리지라는 직책은 한 사람만이 오를 수 있는 '1인 직위'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第十)를 찾아보면, 연개소문 집권 시기인 647년(보장왕 6년), 보장왕의 둘째 왕자 高任武(고임무)가 막리지란 직책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 연개소문은 막리지란 직책을 겸임하고 있었음). 중국의 正史 《新唐書(신당서)》의 '고구려 관직'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고구려 말기에 大莫離支(대막리지)란 직책도 있어 막리지가 당시의 최고 벼슬이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이 자료들을 토대로 결론을 내리면, 천남생이 올랐던 막리지란 직책이 國政 최고 관직은 아니고 軍權을 담당하는 직책 중 하나였다고 보여진다. 천남생이 막리지에 올랐다는 건 軍을 장악했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할 뿐이다. 천남생이 막리지와 3군 대장군이 되었다는 기록은 연개소문의 죽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셈이다. 신채호가 천남생이 특정한 직책에 올랐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父親 연개소문의 죽음과 과도하게 연결시켰다는 의심이 든다.


“기록까지 고쳐 증거 조작”

鄭少文 씨는 천남생 묘비에 새겨진 刻字(각자)가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鄭 씨는, “자신(注: 신채호)의 소신을 증명하기 위해 돌에 새겨져 있는, 金石不刊(금석불간·돌에 새겨져 고칠 수 없는)의 기록까지 고쳐 증거를 조작하고 있다”고 신채호를 비판했다.

<똑같이 분명한 글자들을 다른 글자들을 제대로 읽었으면서 어찌 ‘卄八’의 ‘八’자만 ‘四’자로 읽었겠는가. 이것은 독자나 후대 학자들이 아무도 그 묘지를 못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무어라 하든 그것이 바로 법이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는 착각에 빠져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까지 한 것이 아닌가 싶어 참으로 민망하기 그지없다.>


正史에 나온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는 664~666년

鄭 씨는 천남생 묘비(탁본)를 바탕으로 관련 부분을 아래와 같이 바로 잡았다.

<…28살에 막리지 겸 3군 대장군이 되었으며 32살에 태막리지로 군권과 국권을 총괄하여 阿衡(재상)과 元首(軍통수권자)가 되었다…(…卄八任莫離支兼授三軍大將軍·二加太莫離支摠錄軍國阿衡元首…)>

실제 묘비의 기록을 토대로 《조선상고사》에 나온 천남생의 나이에 4년을 더하면, 천남생의 연도에 따른 나이는 661년에 28세, 665년에 32세가 된다. 천남생이 32세에 막리지보다 더 높은 직책인 태막리지와 軍權, 國權을 총괄했다는 기록에 비추어보아 대략 이즈음 연개소문이 사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삼국사기》와 《新唐書(신당서)》, 《舊唐書(구당서)》는 연개소문이 사망한 해를 666년으로, 《日本書紀(일본서기)》는 664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韓中日에 각각 전해 내려오는 正史에 기록된 연개소문 사망 연도는 664~666년 사이로 유추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하면, 적어도 신채호의 연개소문 ‘657년 사망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신채호는 연개소문의 죽음과 관련, 이런 假定(가정)도 했다.

<만일 연개소문이 보장왕 25년 기원 666년에 죽었다면… 무엇 때문에 唐태종과 李靖(이정·당나라의 개국공신이자 將帥)이 연개소문을 두려워하며 꺼리(畏憚)고, 蘇東坡(소동파·宋나라의 문장가, 일명 蘇軾)와 王安石(왕안석)이 연개소문을 영웅시 하였겠는가?>

鄭少文 씨에 따르면, 唐태종과 李靖이 연개소문을 꺼렸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고 강조했다. 소동파와 왕안석이 연개소문을 영웅시 했다는 기록 역시 두 사람의 관계 서적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다만, 소동파가 지은 詩文 중 연개소문이란 이름이 연상되는 蓋蘇詩(개소시)나 蘇文(소문)이란 게 있는데, 이는 연개소문과 관련이 없는 글이라고 주장했다.


왜 그랬나

그렇다면 신채호는 왜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657년이라고 한 것일까?

신채호는, 백제가 羅唐연합군의 공격을 당할 때 천남생이 백제로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鄭少文 씨는 이 記述(기술)에 대해, '단재가 연개소문이 살아 있었다면 백제가 망하는 것을 보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자신이 떠받드는 연개소문에게 허물이 돌아가지 않게 하려고 기록을 조작한 것'이라고 자신의 책에서 주장했다. 연개소문은 백제가 망한 660년에도, 백제부흥운동이 한창이던 663년 무렵에도 생존해 있었으나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倭는 3만의 대군을 보냈다). 신채호는 연개소문에게 불리한 이 사실을 덮기 위해 사망 연도를 조작했다는 게 鄭 씨의 견해이다.

 
단재 신채호(申采浩)의 실수인가, 고의적 날조인가?

 

《조선상고사》 檢證 /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 의혹

 

단재 申采浩(신채호, 1880~1936)는 소위 민족史觀을 확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지은 《조선상고사》는, 일제 치하 당시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킨 史書(사서)로 평가 받는다.

이 책의 주요 특징은 ▲고구려 중심주의 ▲신라 卑下(비하)다. 신채호는, 이 책의 총론에서 역사를 ‘我(아)와 非我(비아)의 투쟁’으로 규정했다. 我는 한반도 내의 민족을 의미하고, 非我는 한반도 이외의 민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구려가 과거 중국과 대립하며 정권을 유지했다는 이유를 들어 고구려에 많은 비중을 두고 우호적으로 서술했다.

신라를 보는 신채호의 관점은 고구려와 다르다.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羅唐동맹)을 맺는 등 뛰어난 외교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까지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써(對唐決戰) 삼국통일을 이뤘다. 신채호는, 이런 역사적 개가를 소위 ‘外勢(외세)를 끌어들여 삼국통일을 이뤘다’는 좁은 시각으로 바라보며 신라를 부정적으로 서술했다. 《조선상고사》 12章의 제목이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라는 것만 보아도 신라를 보는 그의 시각이 어떤지 알 수 있다.

《조선상고사》는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이 많다. 인용이 부정확한 부분이 있고, 사안에 따라선 왜곡한 곳도 있다. 한 원로 언론인은 《조선상고사》의 이런 오류를 바로잡은 책을 2014년 출간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바로잡기》(서문당 刊, 이하 바로잡기)가 그것이다.

이 책의 精解者(정해자)인 정소문(前 세계일보 논설위원) 씨는 《바로잡기》에서 “틀린 것은 틀렸다 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하여 바로잡아 주는 것이 단재를 위하고 단재의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鄭 씨는, 《조선상고사》에 담긴 내용 중 사실을 왜곡, 변조한 부분에 대하여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註解(주해)를 달아 정정했다.

조선상고사》에 실린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 실수인가? 날조인가?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는 연개소문을, 혁명가의 氣魄(기백)만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혁명가의 才略(재략)을 갖추었다 할 만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연개소문에 대한 혹평에 대해선 몹시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痛恨)는 말도 남겼다.

특히 《조선상고사》의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 10년 오차'란 글에서 666년 사망을 부정했다. 正史인 《삼국사기》와 《자치통감》 등은 연개소문이 666년(보장왕 25년)에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신채호는 연개소문이 657년에 죽었다고 《조선상고사》에서 주장했다. 그 근거로 삼은 게 천남생(연개소문의 장남) 묘지에 설치된 묘비 내용이었다. 《조선상고사》의 관련 내용 일부이다.

<…그 묘지에는 연개소문이 어느 해에 죽었다는 말은 없으나 남생이 “24세에 막리지 겸 3군 대장군으로 임용되었고 32세에 대막리지로 승진하여 군과 국사를 총괄하는 阿衡(아형·宰相)과 元道에 임명되었다(二十四 任寞離支 兼授三軍大將軍 三十二 加大寞離支 總錄軍國 阿衡元道)” 하였고, “儀鳳(의봉) 4년 정월 19일에 병이 들어 安東府(안동부)의 官舍(관사)에서 죽으니 나이 46이었다(以儀鳳四年正月十九日 遭疾 遷於安東府之官舍 春秋卌有六)”고 하였다…>

먼저 鄭少文 씨는 《조선상고사》의 위의 내용과 천남생 묘지의 비문에 기록된 내용을 비교했을 때,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고 했다. 《조선상고사》가 인용한 천남생의 묘비 기록이 잘못 옮겨진 것이다. 이를 鄭 씨가 천남생 묘비의 탁본을 구해 고쳤다(하단의 표 참조).

 


《조선상고사》의 표기

천남생 묘비의 실제 탁본

1

二十四

卄八

2

元道

元首

3

十九日

卄九日

4

大莫離支

太莫離支


천남생의 나이를 28세 → 24세로 쓴 신채호

주목할 것은 천남생의 나이(1번)다. 천남생 묘비에는 28세(卄八)에 막리지와 3군 대장군이 되었다고 써 있는데, 신채호는 그때의 나이를 24세(二十四)라고 《조선상고사》에 썼다. 실제 묘비를 보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천남생이 28세에 막리지와 3군 대장군이 되었다고 정확하게 적혀 있다(하단의 탁본 사진 참조).

 

천남생의 나이를 28세 → 24세로 낮춰 《조선상고사》에 기록한 신채호는, 더 나아가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657년이라고 단정한다. 관련 내용이다.

<당고종의 儀鳳(의봉·年號) 4년은 기원 679년이고, 그때 남생의 나이는 46세였다. 그러니까 남생의 나이가 24(28)세 때는 기원 657(661)년이고 남생은 24(28)세 때인 657년 막리지 겸 3군 대장군이 되어 병권을 잡았으니, 기원 657(661)년에 연개소문이 죽어 그 직위를 남생이 물려받은 것이 확실하다.>
(괄호 안의 숫자는 천남생 묘비의 탁본을 바탕으로 정소문 씨가 바로 잡은 것)

연개소문의 죽음으로 長男인 천남생이 막리지와 3군 대장군 직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죽음과 과도하게 연결

이는 사실과 차이가 있다. 천남생의 묘비에는, 연개소문의 죽음으로 인해 천남생이 막리지와 3군 대장군에 올랐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그 당시 풍습을 보면, 亡者에 대한 묘비를 쓸 때 선조들의 기록도 함께 쓴다. 천남생 묘비에도 그의 할아버지 淵太祚(연태조)와 연개소문에 대해 간략히 적혀 있지만, 연개소문의 죽음과 관련된 언급은 없다. 《삼국사기》 등 正史에서도 이런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 올라온 《삼국사기》에서 막리지란 직책을 찾아보았다. 이 자료에서 막리지란 직책은 중국의 兵部尙書(병부상서)와 中書領(중서령)의 관직과 같았다(연개소문傳 49권)고 나와 있다. 지금의 국방부 장관 정도에 해당하며 軍權(군권)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막리지라는 직책은 한 사람만이 오를 수 있는 '1인 직위'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第十)를 찾아보면, 연개소문 집권 시기인 647년(보장왕 6년), 보장왕의 둘째 왕자 高任武(고임무)가 막리지란 직책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 연개소문은 막리지란 직책을 겸임하고 있었음). 중국의 正史 《新唐書(신당서)》의 '고구려 관직'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고구려 말기에 大莫離支(대막리지)란 직책도 있어 막리지가 당시의 최고 벼슬이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이 자료들을 토대로 결론을 내리면, 천남생이 올랐던 막리지란 직책이 國政 최고 관직은 아니고 軍權을 담당하는 직책 중 하나였다고 보여진다. 천남생이 막리지에 올랐다는 건 軍을 장악했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할 뿐이다. 천남생이 막리지와 3군 대장군이 되었다는 기록은 연개소문의 죽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셈이다. 신채호가 천남생이 특정한 직책에 올랐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父親 연개소문의 죽음과 과도하게 연결시켰다는 의심이 든다.


“기록까지 고쳐 증거 조작”

鄭少文 씨는 천남생 묘비에 새겨진 刻字(각자)가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鄭 씨는, “자신(注: 신채호)의 소신을 증명하기 위해 돌에 새겨져 있는, 金石不刊(금석불간·돌에 새겨져 고칠 수 없는)의 기록까지 고쳐 증거를 조작하고 있다”고 신채호를 비판했다.

<똑같이 분명한 글자들을 다른 글자들을 제대로 읽었으면서 어찌 ‘卄八’의 ‘八’자만 ‘四’자로 읽었겠는가. 이것은 독자나 후대 학자들이 아무도 그 묘지를 못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무어라 하든 그것이 바로 법이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는 착각에 빠져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까지 한 것이 아닌가 싶어 참으로 민망하기 그지없다.>


正史에 나온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는 664~666년

鄭 씨는 천남생 묘비(탁본)를 바탕으로 관련 부분을 아래와 같이 바로 잡았다.

<…28살에 막리지 겸 3군 대장군이 되었으며 32살에 태막리지로 군권과 국권을 총괄하여 阿衡(재상)과 元首(軍통수권자)가 되었다…(…卄八任莫離支兼授三軍大將軍·二加太莫離支摠錄軍國阿衡元首…)>

실제 묘비의 기록을 토대로 《조선상고사》에 나온 천남생의 나이에 4년을 더하면, 천남생의 연도에 따른 나이는 661년에 28세, 665년에 32세가 된다. 천남생이 32세에 막리지보다 더 높은 직책인 태막리지와 軍權, 國權을 총괄했다는 기록에 비추어보아 대략 이즈음 연개소문이 사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삼국사기》와 《新唐書(신당서)》, 《舊唐書(구당서)》는 연개소문이 사망한 해를 666년으로, 《日本書紀(일본서기)》는 664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韓中日에 각각 전해 내려오는 正史에 기록된 연개소문 사망 연도는 664~666년 사이로 유추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하면, 적어도 신채호의 연개소문 ‘657년 사망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신채호는 연개소문의 죽음과 관련, 이런 假定(가정)도 했다.

<만일 연개소문이 보장왕 25년 기원 666년에 죽었다면… 무엇 때문에 唐태종과 李靖(이정·당나라의 개국공신이자 將帥)이 연개소문을 두려워하며 꺼리(畏憚)고, 蘇東坡(소동파·宋나라의 문장가, 일명 蘇軾)와 王安石(왕안석)이 연개소문을 영웅시 하였겠는가?>

鄭少文 씨에 따르면, 唐태종과 李靖이 연개소문을 꺼렸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고 강조했다. 소동파와 왕안석이 연개소문을 영웅시 했다는 기록 역시 두 사람의 관계 서적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다만, 소동파가 지은 詩文 중 연개소문이란 이름이 연상되는 蓋蘇詩(개소시)나 蘇文(소문)이란 게 있는데, 이는 연개소문과 관련이 없는 글이라고 주장했다.


왜 그랬나

그렇다면 신채호는 왜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657년이라고 한 것일까?

신채호는, 백제가 羅唐연합군의 공격을 당할 때 천남생이 백제로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鄭少文 씨는 이 記述(기술)에 대해, '단재가 연개소문이 살아 있었다면 백제가 망하는 것을 보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자신이 떠받드는 연개소문에게 허물이 돌아가지 않게 하려고 기록을 조작한 것'이라고 자신의 책에서 주장했다. 연개소문은 백제가 망한 660년에도, 백제부흥운동이 한창이던 663년 무렵에도 생존해 있었으나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倭는 3만의 대군을 보냈다). 신채호는 연개소문에게 불리한 이 사실을 덮기 위해 사망 연도를 조작했다는 게 鄭 씨의 견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