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후반부터 니키타 흐루시초프 수상에 의한 스탈린 비판 이후, 소련과 중국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스탈린 격하운동으로 중국은 중국공산당 창시때부터 스탈린을 맹주로 추종했는데 1956년의 헝가리 반소봉기 이후 소련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중국은 소련의 서방근린외교에 대해 마오쩌둥이 수정주의자라며 비난했다.
이에 소련은 중국을 교조주의자라 비판하며 중국의 팽창식 공산주의 노선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이러한 양국의 갈등으로 인해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두 나라는 군사 및 과학분야의 교류가 중단되고 소련에 유학중이던 중국유학생들이 대거 귀국했다. 이리하여 공산권의 맹주를 놓고 중국과 소련은 서로 대치했는데 이러한 중소간의 국경분쟁은 19세기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 등, 당시 러시아 제국이 청국으로부터 영토할양을 받아냈던 시대에 만들어진 조약으로 하천 상류의 국경확정에 관한 미비한 부분이 많은 것도 불안요소였는데, 이 때문에 중앙아시아에서 극동에 이르는 중소국경지대에 귀속이 불분명한 지역이 많았으며 중소간의 견해도 일치하지 않았다.
만주국 시절에도 칸차즈섬(乾岔子島)사건과 장고봉 사건 등 분쟁이 있었는데, 중국은 제국주의 시대에 부당한 영토약탈을 당했다는 피해의식이 있었고, 소련은 인구가 많은 중국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양국간의 정치노선과 영토문제로 인한 갈등은 1969년 3월 2일에 극동의 우수리 강에 있던 전바오섬(珍宝島, 러시아명 타만스키 섬)에서 양국 병사들의 충돌로 비화되었다.
당시 소련측 경비병과 중국인민해방군 병사들은 섬의 귀속문제를 둘러싸고 패싸움을 벌였는데 소련측에 밀린 인민해방군이 무술로 단련된 특수부대원을 배치하여 목봉으로 구타하자 소련군 병사가 발포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대해 쌍방모두 상대가 먼저 공격을 걸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7월 8일에는 중소 양군이 헤이룽장성(黒竜江省) 통장현(同江県)에 속한 헤이룽강(러시아명 아무르강)의 파차다오(八岔島, 러시아명 코르진스키 섬)에서 무력충돌하여 8월 13일에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타르바가타이(塔城)의 테레쿠치(鉄列克提)에서도 충돌했다.
극동 및 중앙아시아에서 잇다른 교전에 양군은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여 핵무기를 사용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69년 9월에 북베트남의 호치민 국가주석이 사망하면서 소련의 알렉세이 코시긴 수상은 하노이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베이징으로 넘어가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来)수상과 회담하여 정치적 해결의 길을 모색하여 군사적 긴장은 완화되었다. 국경문제는 거론되긴 했지만 최종적인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고 양국모두 국경에 병력배치를 계속했다.
당시 중국인민해방군은 민간인, 농민, 가축 등에 부대로 포위하면서 전진하는 전술을 채택했는데 중국측의 기록에는 소련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자군의 사망자가 적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화력에서 앞선 소련군이 중국군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힌 것으로 보고있다. 중국측은 파손된 신형 T-62 전차를 노획했는데 강선이 없는 활강포를 처음보고는 불량품으로 여겼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약 4,380km의 국경선 양쪽에는 658,000명의 소련군 부대와 814,000명의 중국인민해방군 부대가 서로 대치했는데, 당시 베이징 소재 소련대사관에 홍위병들이 습격하고 국경지대에서 가끔 소규모의 충돌이 있긴했지만 본격적인 군사충돌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냉전이 한창이던 이때, 중국은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때 일어난 이 군사충돌을 계기로 소련과 대립하던 미국과 물밑접촉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과 대립하던 미국도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떼기위해 중국과의 접촉을 노려, 1972년에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둥과 회담하면서 우호관계를 구축했다. 그 후 정식국교는 체결되지 않았지만 카터 정권하의 1979년 1월 1일에 양국은 국교를 수립했다. 이 때, 미국은 장제스(蒋介石)의 중화민국(대만)과 국교를 단절했다.
중소양국의 국경문제에 대한 협의와 회의는 1970년대부터 이어졌는데, 소련을 적대시한 중국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에서야 중소당국은 국경문제의 협상을 비밀리에 재개하여 1989년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방중하여 중소국교가 정상화된 뒤에야 드디어 전면적인 국경문제의 절충이 시작되었다.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인 1991년 5월 16일에 중소국경협정이 체결되어, 극동의 대부분의 국경이 확정되어 1992년에 비준되었다. 특히 이제껏 쌍방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분쟁의 원인이 된 전바오섬은 중국측으로 귀속이 합의되었다. 소련붕괴 후, 러시아는 협상을 이어받아 1994년에 중앙아시아 부분에 대한 중러국경협정을 체결하여 1995년 10월 17일에 비준했다.
중러국경의 서부 미확정부분 54km가 확정되면서 중앙아시아의 국경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각국과 중국과의 국경협정은 개별적으로 체결되었다. 나머지 미확정부분(총면적 375평방km)은 1991년의 중러동부국경협정에서 거론되었던 아르군강의 섬(볼리쇼이섬, 중국명 아바가이토 섬),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의 합류점에 있는 2개의 섬(타라바로프 섬, 우수리 섬)으로 합의에 곤란을 겪었다.
이들 3개의 섬에 관한 협의도 진행되어 푸틴 대통령과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만난 자리에서 2004년 10월 14일에 최종적인 중러국경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서 아무르, 우수리 합류점의 부분에 대해서는 분쟁지를 이등분하여 분할해 타라바로프 섬 전체와 우수리 섬의 서쪽 절반은 중국, 우수리 섬 동쪽의 하바로프스크 시에 접한 부분은 러시아로 귀속하게 되었다.
또, 내몽고자치구 측의 볼리쇼이 섬은 중러양국에 의해 이등분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상무위원회는 2005년 4월 27일, 러시아 연방의회 국가원(하원)은 2005년 5월 20일에 이를 비준해 6월 2일에 양국 외무상들이 서명했다. 2008년 7월 21일에 중러외무상이 동부국경확정에 관한 협정서에 서명하면서 중러국경은 완전히 확정되었다.
'전쟁군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토크멘터리전쟁사 2부 -제1차 세게대전(2) (0) | 2017.04.20 |
|---|---|
| 다큐멘타리전쟁사 1부-제1차세계대전 (0) | 2017.04.20 |
| 헥.쏘.고.찌(3) (0) | 2017.01.25 |
| 헥.쏘.고.찌(2) (0) | 2017.01.25 |
| 헥.쏘.고.찌(1) (0) | 2017.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