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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풍경예술

삼강행실도에 그려진 충·효·열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54XX50700004

삼강행실도에 그려진 충·효·열

                                                

그림과 시로써 타고난 착한 마음을 감발시키라

조선이 건국되고 30년 남짓 지난 1428년(세종 10), 서서히 유교 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져나가던 조선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린 일이 발생했다.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라는 자가 그 아버지를 살해하는 패륜 사건이 조정에 보고된 것이다. 이 일은 효를 근간으로 하는 유교사회를 지향하던 조선으로서는 간단히 지나칠 수 없는 심각한 윤리 파탄이었다. 이에 세종을 비롯한 관료들은 유교 질서와 가치관을 시급히 정착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부심했고, 결국 『효행록』과 같이 널리 효행을 알릴 수 있는 책을 제작해 백성이 항상 읽고 외우게 하자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 결과 세종의 명을 받은 직제학(直提學) 설순(偰循) 등이 1434년(세종 16) 펴낸 책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다.

『삼강행실도』, 143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삼강행실도』는 삼강(三綱)의 절행이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을 그림과 함께 수록한 책이다. 삼강은 유교 윤리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인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이르는 말로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한다. 이는 곧 충(忠)·효(孝)·열(烈)을 가리킴이니 『삼강행실도』는 말하자면 뛰어난 충신, 효자, 열녀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것이다.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사적에서 효자, 충신, 열녀 각 110명을 가려 그 행실을 그림과 글로 엮어 3권3책으로 간행한 이 책은 삼강의 실천 사례를 통해 백성에게 유교 윤리를 보급해 유교사회를 구현할 목적으로 탄생된 조선 최초의 본격적 대민(對民) 교화서였다.

이 책은 삼강의 각 사례에 대해 전면에 그림, 후면에 한문 설명과 시(詩)·찬(讚)을 실은 전도후설(前圖後說) 체재로 편찬되었다. 책 제목임에도 ‘삼강행실도’라는 특이한 이름을 붙인 것은 그림을 앞세운 이러한 체재 때문이다. 그림이 들어간 첫 번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문맹의 백성을 위한 방편이었다.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도형을 그려 붙여 거리의 아이와 시골 아낙네까지도 쉽게 알 수 있게 했다는 「삼강행실 반포 교지」의 언급이 이를 잘 드러낸다.

『삼강행실도』 「충신도」의 첫 장 “용봉간사(龍逢諫死)” 앞면, 143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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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 「충신도」의 첫 장 뒷면

전도후설(前圖後說)의 체재에 따라 앞면에 그림, 뒷면에 한문 설명과 시(詩)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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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책에서 그림의 역할은 단지 문자를 모르는 이들에게 시각적인 설명을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권채가 쓴 『삼강행실도』 서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 글을 만들어 민간에 널리 보급해서 어질거나 어리석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어린아이거나 부녀이거나 모두 즐겁게 보고 익히 듣게 하시니, 그 그림을 펴보아 형용(形容)을 생각하며 그 시를 읊어서 성정(性情)을 체득하면, 모두 흠선(欽羨)하고 감탄하며 권장되고 격려되지 않음이 없어서, 그 다 같이 타고난 착한 마음이 감발되어 직분의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다할 것입니다.
『삼강행실도』에 실린 서문, 143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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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내용을 형상화한 그림을 통해 구체적인 상황을 떠올리고 체험하게 함으로써 독자들이 감동과 감화를 받아 교화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열녀 이야기 중에 원(元)나라의 ‘동씨(童氏)’라는 여인이 집에 침입해 자신을 욕보이려는 군사들에 저항하다가 왼팔, 오른팔이 차례로 잘린 끝에 결국 낯가죽이 벗겨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그림에는 효부 동씨가 평소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장면, 시어머니를 보호하며 저항하다가 팔이 잘리는 장면, 그리고 군사들이 동씨의 낯가죽을 벗기는 장면이 화면 아래에서부터 차례로 형상화되어 있다. 단지 이야기로 읽거나 듣는 것보다 가장 극적인 장면을 생생히 눈으로 접하게 한다면 훨씬 더 강한 전달력을 지니면서 기억에도 깊이 각인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책에서 그림은 내용 이해를 넘어 독자의 감성에 호소함으로써 교화의 효과를 배가시키는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삼강행실도』에 실린 열녀 ‘동씨’ 이야기, 16세기 후반 언해본 중간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동씨가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장면, 군사에게 저항하다가 팔이 잘리는 장면, 낯가죽이 벗겨지는 장면이 차례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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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삼강행실도』 그림은 일반 감상용과 달리 교육 목적으로 제작되었기에 독특한 면모를 보인다. 이야기를 형상화해서 내용을 이해시켜야 하므로 하나의 이야기를 몇 개의 장면으로 나눠 시간 순서에 따라 배치하는 방식을 취했다. 시간을 달리하는 연속적인 장면들이 한 화면에 그려진다고 하여 이를 ‘다원적 구성 방식’이라고도 하는데, 장면들은 이야기의 핵심적인 대목들을 담고 있으며 적게는 하나에서 많게는 아홉 개 정도로 구성되고 건물이나 산수, 구름 등으로 구획된다.

이러한 구성 방식으로 인해 『삼강행실도』의 그림은 동일 장소나 인물이 반복적으로 표현되는 특징을 띤다. 또한 극단적인 상황을 대비시키거나 정려(旌閭)와 하사품을 부각시키는 등 교화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장면 구성도 특징이다. 이처럼 화면 구성은 독특하지만 가옥·묘제(墓制)·복식 등의 세부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며 중국과 한국적 요소가 잘 변별되어 있어 당시 생활상도 엿볼 수 있다.

불사이군의 충절로 나라 기강을 다지다

그렇다면 『삼강행실도』에 나타난 충·효·열은 어떤 것일까? 우선 이 책에 수록된 충은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충신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나 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목숨까지 기꺼이 내던지는 충신의 모습 그대로다. 다만 당시는 아직 조선이라는 새 왕조의 기반이 확고히 다져지지 않은 때였으므로 무엇보다 왕실에 충성을 다할 관료가 절실히 필요했던바, 영토를 넓히거나 제도를 정비하는 등의 국가에 대한 기여보다는 왕이나 왕실에 대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이 이 책에서 좀 더 중시되고 있다.

실정을 일삼는 왕에게 간하다가 죽은 간신(諫臣)의 이야기는 여러 편 실려 있지만 그런 왕을 갈아치운 공신의 이야기는 없다. 살이 벗겨지고 톱질을 당하고 처자식이 눈앞에서 죽어가도 절의를 꺾지 않은 충신들, 나아가 불사이군을 위해 스스로 처자식을 데리고 의연히 죽음을 맞은 충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종과 책의 편찬자들은 새 왕실에 대한 충성을 종용하고 이를 기반으로 관료질서를 다지고자 기대한 듯하다.

『삼강행실도』에 실린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충렬도, 143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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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의 이야기가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데 비해 『삼강행실도』 속 효자와 열녀 이야기는 신기하고 놀라운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전통시대에 효자와 열녀가 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일을 해야 했을까?

부모를 위해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자식까지 버리다

『삼강행실도』는 존속 살해사건을 계기로 편찬된 만큼 효를 제일 강조했고 이 때문에 3권 중 「효자도」를 제1권에 배치했다. 『삼강행실도』에 수록된 효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한결같이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강도 높은 효의 모습을 보여준다. 『삼강행실도』의 효는 흔히 말하는 ‘지극함’과 ‘극진함’을 넘어 이른바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경지로까지 나아간다. 자신을 구박하는 계모에 대해서도 극진히 효를 행하는 효자들의 이야기는 친부모가 아니어도, 나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자식은 이를 빌미삼아 불효해서는 안 된다는 무조건적인 효심의 단적인 예다. 여기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일을 거리낌 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맹목적인 효가 더해진다.

그러한 것은 몇 가지 전형적인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효를 행하고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것이다. 계절에 맞지 않는 식물이나 과일을 구하고 한겨울 얼어버린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이 그런 예다. 자신을 핍박하는 계모를 봉양하고자 꽁꽁 언 강에서 옷을 벗고 물고기를 잡으려 하니 얼음이 저절로 갈라지며 잉어 두 마리가 튀어올랐다는 진(晉)나라 왕상(王祥)의 이야기나, 한겨울에 병든 노모를 위해 죽순을 구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해 대숲에서 슬피 우니 눈 덮인 땅 위로 죽순 두어 줄기가 솟아났다는 오(吳)나라 맹종(孟宗)의 이야기 등은 특히 널리 알려져, 이들은 조선 후기에 효자의 전형으로 자리잡기도 한다.

『삼강행실도』에 실린 효자 ‘맹종’의 이야기, 16세기 후반 언해본 중간본,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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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효를 행하고자 자기 몸을 희생하는 것이다. 부모를 위해 고통스러운 일을 감수하거나 자기 신체를 훼손하는 행위, 나아가 몸을 팔거나 형벌을 대신 받고 급기야 목숨까지 버리는 행위를 보여준다. 어린 나이에도 자신을 무는 모기가 부모에게 갈까 염려해 늘 쫓지 않고 그냥 두었다는 진(晉)나라 오맹(吳猛)이나, 병든 아버지를 위해 벼슬을 버리고 그 똥까지 맛보면서[상분(嘗糞)] 극진히 간병한 제(齊)나라 검루(黔婁)의 행위는 비교적 가벼운 자기희생에 속한다. 『삼강행실도』의 효자들은 부모를 위해서라면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는 무시무시한 자해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유석진(兪石珍)은 고산현(高山縣)의 아전이다. 아버지 유천을(兪天乙)이 악한 병을 얻어 매일 한 번씩 발작하고, 발작하면 기절하여 사람들이 차마 볼 수 없었다. 유석진이 게을리하지 않고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하늘을 부르며 울었다. 널리 의약(醫藥)을 구하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 사람의 뼈를 피에 타서 마시면 나을 수 있다” 하므로, 유석진이 곧 왼손의 무명지(無名指)를 잘라서 그 말대로 하여 바쳤더니, 그 병이 곧 나았다.
- “석진단지(石珍斷指)”, 조선
산원(散員) 동정(同正) 위초(尉貂)는 그 아버지 위영성(尉永成)이 악한 병을 앓았는데, 의원이 이르기를 “아들의 고기를 쓰면 고칠 수 있다” 하니, 위초가 곧 자기 다리의 살을 베어 만두속에 넣어 먹였다. 임금이 이 사실을 듣고 재상(宰相) 문준(文俊) 등에게 명하여 그 포상을 의논케 하니, 문준 등이 아뢰기를 “당(唐)나라 안풍현(安豐縣)의 백성 이흥(李興)은 그 아비가 악한 병에 걸렸을 때 이흥이 스스로 다리의 살을 베어 다른 것으로 속여서 먹였는데, 자사(刺史)가 이 일을 아뢰어 그 마을 어귀의 문에 정표(旌表)했습니다. 이제 위초는 본디 거란의 추한 종족이고 글도 모르는데, 능히 그 몸을 아끼지 않고 효성을 다했으니, 옛 법대로 마을 어귀의 문에 정표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그리하라고 분부했다.
- “위초할고(尉貂割股)”, 고려

위의 이야기들은 “석진단지” “위초할고”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손가락을 끊고 허벅다리 살을 베어 먹여 부모의 병을 고치려 한 효자들에 관한 내용이다. 단지와 할고는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여 부모를 회생시키는 효행의 전형적인 유형으로 대부분이 우리나라의 이야기들이며, 특히 단지는 조선의 사례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이를 모방하여 실천하는 효자들이 실제로 등장하기도 한다.

실상 그리 효험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끔찍한 신체 훼손을 주저 없이 행하는 효자들의 모습은 맹목적인 효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의외로 그 교화의 효과는 적지 않았던 듯하다. 나아가 극한 상황에서 부모 대신 자기 몸이나 목숨을 온전히 희생하는 예도 있는데, 죄를 지은 아비 대신 자신이 속죄하고자 관비를 자처한 한(漢)나라 제영(緹縈), 도적의 칼을 대신 맞고 아비를 구한 진(晉)나라 반종(潘綜), 물에 빠진 어미를 구하려다 익사한 당(唐)나라 계전(季詮) 등의 이야기는 신체 훼손보다 사실상 더 큰 희생이지만 오히려 보편적인 효의 모습이라 하겠다.

『삼강행실도』에 실린 효자 ‘석진’의 이야기, 18세기 초반 언해본 중간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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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부모를 위해 자기 자식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몸을 훼손하거나 희생하는 일에도 극심한 고통이 따르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희생, 그중에서도 자식을 희생시키는 일은 이를 능가한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진 고문에도 기밀을 발설하지 않던 주인공이 자식이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면 굴복하고 마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삼강행실도』의 효자들은 부모를 위해서라면 자식을 죽이거나 팔아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까지 내놓는 가히 최고의 희생이 아닐 수 없다.

곽거는 가난하게 살면서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세 살 먹은 아들이 있어 어머니가 항상 음식을 남겨서 주므로, 곽거가 아내에게 이르기를 “가난하여 먹을 것을 공급하지 못하는데 아이가 어머님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함께 가서 묻어야 되겠소” 하니, 아내가 그대로 따랐다. 땅 석 자를 파자 황금이 가득한 가마 하나가 나타나고 그 위에 글이 있는데 “하늘이 효자 곽거에게 주는 것이니 관가에서도 빼앗을 수 없고 다른 사람도 가져가지 못한다” 하였다.
- “곽거매자(郭巨埋子)”, 한(漢)
유명달(劉明達)은 천성이 큰 효자였는데, 아내와 함께 어머니를 받들었다. 큰 흉년을 만나 어머니를 수레에 싣고 하양(河陽)으로 가던 중 어머니의 먹을 것을 아들이 침범하므로 드디어 그 아들을 팔았고, 아내는 젖을 하나 베어 그 아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합심하여 효도를 다하였다.
- “명달매자(明達賣子)”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부모의 봉양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어린 자식을 산 채로 묻어 살해하려 한 곽거의 사례로, 실상 잔혹하고 비정하기 그지없지만 더없이 지극한 효도의 전범으로 여겨졌다. 명달 역시 같은 이유로 아들을 내다 팔았는데, 아들에게 젖을 하나 베어주었다는 웃지 못할 대목에서 아들을 위한 배려보다는 오히려 결연함과 비정함이 묻어난다. 이처럼 효를 행하고자 죄 없는 자식을 죽이거나 버리는 행위는 맹목적인 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삼강행실도』에 실린 효자 ‘곽거’의 이야기, 16세기 후반 언해본 중간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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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코를 베고 남편 대신 솥에 삶겨 죽음을 택하다

『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열(烈)은 어떤 모습일까? ‘열녀’의 사전적 의미는 ‘절개가 굳은 여자’다. 즉 한 남자에 대한 지조와 정조를 굳게 지키는 여자를 뜻하는데, 당시 체제에서 사회적·신체적 약자였던 여성이 어떤 상황에서도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죽음까지 불사해야 함을 의미했다. 이 책에 수록된 열녀 110명 중 목숨을 보전한 이들은 30명이 채 안 되고 대부분 죽음으로 열을 행한 것이 이를 잘 드러낸다. 그나마 목숨을 부지한 이들도 대개 끔찍한 폭력을 겪었다는 점에서 열녀가 되는 길은 효자가 되는 길을 넘어설 정도로 험난했다.

열녀의 가장 전형적인 행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열녀’ 하면 흔히 은장도로 자결하거나 목을 매는 등의 장면이 떠오르지만 이 책 속 열녀들의 실제 사례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정절을 잃을 위기에서 스스로 목을 매거나 찌르고, 물이나 불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는 열녀들이 수두룩함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러나 오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저항하다가 창자가 찢기거나 낯가죽이 벗겨지고 팔다리가 잘리는 등 참혹한 죽음을 맞는 사례는 가히 충격적이다. 끔찍한 폭력 앞에서도 이들은 굴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당당히 꾸짖다가 죽어간다. 한편 목숨을 보전한 열녀들도 이에 못지않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조상(曹爽)의 종제(從弟) 문숙(文叔)의 아내는 하후문녕(夏侯文寧)의 딸이며 이름은 영녀(令女)다. 조문숙이 일찍 죽으니 복(服)을 마치고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의 나이가 젊고 자식도 없으므로 집에서 반드시 자기를 시집보낼 것이라고 여기고 머리를 잘라 징신(徵信)으로 삼았다. 뒤에 집에서 과연 시집보내려 하니, 영녀가 다시 칼로 두 귀를 자르고 행동거지를 항상 조상에게 의지했다. 조상이 주벌(誅罰)당하자 조씨(曹氏)가 다 죽었는데, 하후문녕이 영녀가 젊은 나이로 의를 지키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조씨가 남은 사람이 없어 그 의지가 저상(沮喪)되었으리라 여겨 넌지시 사람을 시켜 꾀어보았다. 영녀가 울며 말하기를 “나도 생각해보았는데 허락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집에서 이를 믿고 방비를 조금 게을리했더니, 영녀가 가만히 침실에 들어가 칼로 코를 자르고는 이불을 쓰고 누워 있었다. 어머니가 불러도 대답이 없으므로 이불을 들추고 보니 피가 흘러 자리에 가득했다. 온 집안이 놀라 어쩔 줄 몰라했고, 보고서는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영녀절이(令女截耳)”, 위(魏)

일찍 남편을 여읜 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부친의 개가 권유를, 머리카락을 자르고 귀와 코를 스스로 베면서까지 거부한 위나라 영녀의 이야기다. 귀와 코를 벤다는 것은 고통도 고통이지만, 자신의 미적인 면을 온전히 포기하는, 여성으로서 좀처럼 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앞서 단지와 할고의 행위가 치병을 위한 약을 구할 목적이었다면, 열녀들의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의도적으로 훼손하고자 하는 그야말로 자해 행위였다.

『삼강행실도』 에 실린 열녀 ‘영녀’의 이야기, 18세기 초반 언해본 중간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글항아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런 끔찍한 자해 행위는 대개 개가 거부의 의지를 단호히 드러내는 전형적인 수단이었다. 자신의 미색에 반해 재혼을 강요하는 왕의 뜻을 거절하고자 자기 코를 베어버린 양(梁)나라 고행(高行) 등 같은 방식으로 개가를 거부하는 사례는 수도 없으며, 이마저 여의치 않을 때는 자결을 택하면서까지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는 결혼 풍습과 관련한 당시의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다. 고려의 영향이 남아 이혼이나 재혼이 허락되던 당시의 결혼 풍습은 유교적 가치관으로 사회질서를 수립하려는 조선에 있어서 시급히 고쳐져야 할 폐습이었다.

세종과 『삼강행실도』의 편찬자들은 이 책이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를 기대했던 듯하다. 이처럼 정절을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열녀들의 사례는 충에서의 ‘불사이군’에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실제로 「충신도」에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바꾸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라고 한 충신들의 말이 종종 인용된다.각주1)

열녀들의 또 다른 유형은 무조건 남편을 따라 죽거나 심지어 남편 대신 죽는 것이었다. 「열녀도」의 첫째 사례가 바로 남편을 따라 죽은 고대 중국의 유명한 두 열녀 아황과 여영의 이야기다.

우순(虞舜)의 두 비(妃)는 요 임금의 두 딸인데, 맏이는 아황(娥皇)이고 다음은 여영(女英)이다. 순 임금의 아버지는 우둔하고 어머니는 수다스러우며 아우 상(象)은 오만했으나, 효성껏 받들어 섬겼으므로, 사악[四嶽, 요 임금 때 사방(四方)의 제후를 통솔하던 장관]이 요 임금에게 천거하니, 요 임금이 두 딸을 아내로 주어 그 내정(內政)을 관찰했다. 두 딸은 농사지으며 순 임금을 받들어 섬기되, 천자(天子)의 딸이라 하여 교만하거나 게으르지 않고 오히려 겸허한 자세로 공손하고 검소하며 오직 부도(婦道)를 다하기만을 생각했다. 순 임금이 천자가 되자 아황은 후(后)가 되고 여영은 비(妃)가 되었는데, 세상에서 두 비의 총명하고 정숙하고 인자함을 일컬었다. 순 임금이 순수(巡狩)하다가 창오(蒼梧)에서 죽었는데, 두 비가 강상[江湘, 양자강(揚子江)과 상강(湘江)] 사이에서 죽으니, 세속에서 상군(湘君)이라 이른다.
- “황영사상(皇英死湘)”, 우(虞)

순 임금에게 함께 시집간 요 임금의 두 딸 아황과 여영이 높은 신분임에도 겸손하고도 검소하게 부도(婦道)를 다하다가 남편이 객지에서 죽자 바로 그곳으로 달려가 고혼제(孤魂祭)를 지내고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는, 말 그대로 ‘여필종부(女必從夫)’를 행동으로 보인 유명한 고사다. 이처럼 남편이 죽으면 그를 뒤따라 죽는 열녀가 적지 않았다. 정절을 잃을 상황이 아닌데도, 어린 자식이나 연로한 부모가 있는데도 무작정 따라 죽는 것이다. 물론 남편을 따라 죽지 않고 자식을 훌륭히 키워낸 사례도 있지만 이는 대개 남편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열녀들은 위기에 처한 남편을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도 한다. 중국 한(漢)나라의 절녀(節女)는 남편의 원수가 남편에게 복수하려는 것을 미리 알고 남편을 가장해 대신 죽음을 당했는데, 자신이 잘라온 머리가 그 아내의 것임을 안 원수는 아내의 의리에 감동하여 원한을 푼다. 참혹한 죽음이 예상되는데도 기꺼이 남편 대신 죽기를 자청한 눈물겨운 열은 원수의 마음을 돌리고 결국 남편의 목숨을 살렸다. 다음 사례는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이중의(李仲義)의 아내 유씨(劉氏)는 이름이 취가(翠哥)이며 방산(房山) 사람이다. 지정(至正) 20년(1360)에 고을에 큰 흉년이 들었다. 평장(平章) 유합자불화(劉哈刺不花)의 군사가 먹을 것이 떨어지자 이중의를 붙잡아 삶으려 하는데, 이중의의 아우 마아(馬兒)가 달려가 유씨에게 알리니, 유씨가 급히 구하러 가서 울면서 땅에 엎드려 군사에게 고하기를, “잡힌 사람은 지아비입니다. 불쌍히 여겨 그 목숨을 살려주고, 우리 집 땅속에 묻어둔 장 한 독과 쌀 한 말 닷 되가 있으니, 파내어 지아비 대신 가져가십시오” 했으나, 군사가 듣지 않았다. 유씨가 말하기를 “지아비는 여위고 작아서 먹을 것이 없습니다. 살지고 검은 아낙은 맛이 좋다 하는데, 내가 살지고 검으니, 스스로 삶아져서 지아비를 대신하여 죽겠습니다” 하니, 군사들이 드디어 그 지아비를 놓아주고 유씨를 삶았다.
- “취가취팽(翠哥就烹)”, 원(元)

굶주린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삶길 위기에 처한 남편을 대신해 그 자신이 삶겨 죽은 취가의 이야기는 감동에 앞서 충격이다. 살지고 검은 아낙이 맛이 좋으니 그런 자기를 삶으라는 말은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이처럼 남편을 따라 죽거나 대신해서 죽는 열녀들의 사례는 한 남자에 대한 정절을 굳게 지키는 차원을 넘어서서 죽음으로 남편을 따르고 절대적으로 섬길 것을 종용한다. 열녀라는 이름 아래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남성 우위 체제에 흔들림이 없도록 어떤 폭력과 희생도 어김없이 감수할 것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삼강행실도』 에 실린 열녀 ‘취가’ 이야기, 18세기 초반 언해본 중간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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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번역을 붙이고 그림을 단순화하다

『삼강행실도』는 간행 이후 조선시대 내내 국가에 의해 여러 형태로 끊임없이 확산되었다. 애초 세종의 기대대로 이 책이 백성에게 유교적 가치관을 심어주어 조선사회가 유교질서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그 유통과 보급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개찬(改撰)과 보완 작업이 꾸준히 이뤄졌다.

『삼강행실도』의 본격적인 보급은 성종대의 언해본 『삼강행실도』의 간행으로 이뤄졌다. 세종대에 간행된 원간본은 유통과 보급에 있어 매우 불리한 체제였다. 일단 효자, 충신, 열녀 각 110명을 수록한 3권 3책의 방대한 분량이 문제였다. 이로 인한 제작·출판의 어려움과 비용도 장애였지만, 비슷한 사례가 중복돼 인물과 그 행적에 대한 학습에 혼란을 가져와서 교육적 효과도 반감되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해 그림을 덧붙여 내용을 알 수 있게 했다지만 한문 사적을 읽지 않고 그림만으로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 때문에 한글 창제 직후부터 한글 번역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왔던 터였다. 이에 1490년(성종 21) 분량을 줄이고 한글로 옮긴 언해본 『삼강행실도』가 간행됨으로써 『삼강행실도』 보급은 전기를 맞았고, 성종은 당시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이를 통한 교화 정책을 명문화할 정도로 이 언해본은 명실상부한 백성의 윤리 교과서로 부상했다.

『삼강행실도』 언해본의 체제, 16세기 후반 중간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본문 위에 한글 번역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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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해본 『삼강행실도』는 기존의 인원을 효자, 충신, 열녀 각 35명으로 줄여 1책으로 만들고 본문 위에 한글 번역을 붙여서 간행했다. 사례를 다시 선정하는 데는 내용의 중복이나 적합성 등이 고려되었을 텐데 선정 결과를 보면 일정한 경향이 있었다. 우선 효자는 신체 훼손이나 자식 살해와 같은 극단적인 사례가 크게 줄었다. 「석진단지」 「곽거매자」만 남고 나머지 사례는 모두 제외된 것이다.

효라는 이름으로 행해졌지만 단지, 할고, 자식 살해와 유기 등의 행위는 당시 정서에 비춰봐도 지나치게 가혹하고 극단적인 행위였던 듯하다. 특히 단지, 할고 등의 신체 훼손은 효에 대한 이론서인 『효경』의 첫 장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불감훼상 효지시야(不敢毁傷 孝之始也)”라는 구절에 배치되는 행위여서 이론과 실제 사례가 충돌하는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결국 덜 잔인한 석진의 사례와, 최고의 희생을 감수한 지극한 효의 상징으로서 곽거의 사례만 남긴 듯하다(곽거는 결과적으로 살해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수 있다).

충신은 원간본에 다수 수록되었던 간신(諫臣)의 사례, 즉 임금에게 간언하다 죽거나 해를 입은 사례들이 크게 줄고, 열녀는 왕후나 제후의 부인과 같은 특수 계층 여성들이 대부분 제외된 것이 눈에 띈다. 불사이군의 충신과, 좀 더 보편적인 열녀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열녀의 경우 효자와 달리 자해에 의한 신체 훼손 사례들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개가 거부를 위해 코나 귀를 벤 고행이나 영녀의 이야기가 그대로 수록되었으며, 남편 대신 삶겨 죽은 취가 등 끔찍한 죽임을 당한 열녀들의 이야기도 변함없었다. 여성들에게 강요된 폭력과 희생, 불평등은 여전했다.

언해본은 이렇듯 당시 조선의 현실에 좀 더 적합한 사례들을 추려 한글 번역까지 붙여 제작과 보급에 유리한 형태로 간행함으로써 교화서로서 활용도를 높였다. 그리하여 간행 이후 19세기까지 이 책은 수차례의 중간(重刊)과 개역(改譯) 작업을 거치면서 꾸준히 활용되었다. 특히 16세기 후반에 간행된 선조대 중간본은 원래 국한문 혼용이었던 언해문이 순한글로 바뀌고, 18세기 초반의 영조대 중간본은 언해문의 번역이 한문 원문을 좀 더 충실히 반영해 이전보다 내용이 더 풍부해지는데, 이러한 번역의 변화는 한글 보급이 점차 확대되면서 『삼강행실도』를 통한 교화에서 한글 번역의 비중이 한층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효자도」 “맹종읍죽(孟宗泣竹)”의 선조대 중간본(16세기 후반, 왼쪽)과 영조대 중간본(18세기 초반, 오른쪽)

영조대 중간본 난상의 언해가 내용이 훨씬 더 자세해졌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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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해본 『삼강행실도』가 교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이 책의 체제를 답습한 유사한 문헌들의 간행도 이어졌다. 우선 그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속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가 중종대에 간행되었다. 중종은 성종대 이후 『삼강행실도』의 간행과 활용에 가장 큰 열의를 보인 왕이었는데,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그는 이 책 속의 충과 효의 사례들을 통해 자신의 반정을 정당화하고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던 듯하다. 이에 1511년(중종 6) 역대 최대 규모인 2940질의 언해본 『삼강행실도』 간행을 단행해 널리 배포했다.

1514년(중종 9)에는 『삼강행실도』에 빠진 효자, 충신, 열녀 69명의 사적을 수록한 『속삼강행실도』가 간행되는데, 대다수가 중국의 사례로 이뤄진 전작에 비해 조선의 실천 사례를 대폭 늘려 교화의 효과를 한층 높이고자 한 중종의 의도가 담겼다. 1518년(중종 13)에는 ‘붕우유신(朋友有信)’과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이륜(二倫)의 행실이 뛰어난 사람 48명의 행적을 수록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도 간행되었다. 이 책은 김안국(金安國)이 자신이 관찰사로 있던 경상도에서 처음 펴내 개인적으로 사용하던 것을 중종이 찬집청(撰集廳)에서 다시 인쇄하게 해 널리 배포한 책으로, 수록된 사례가 모두 중국인이고 『삼강행실도』의 체재를 따랐지만 언해문이 순한글로 된 것이 특징이었다.

『속삼강행실도』, 151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삼강행실도』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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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륜행실도』, 1518,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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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륜행실도』에 실린 ‘복식(卜式)’의 이야기,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형제간의 우애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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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년(광해군 9)에는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를 받은 효자, 충신, 열녀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역대 삼강의 사례를 수록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가 간행되었다. 이 책은 이전의 책들과 체재를 달리해 제작되었는데, 본문 위에 있던 언해문이 본문 속으로 들어왔으며 1590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인해 시와 찬이 생략되고 그림도 눈에 띄게 단순화되었다. 이 책은 교화서로 활용할 목적보다는 전쟁 후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보상의 성격이 컸다. 그러다보니 지나치게 방대한 인물을 엄격한 기준과 조사 없이 실어 인물 선정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광해군의 폐위라는 정치적 연유로 인해 이후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다. “사람들이 무리지어 조소했고 어떤 사람은 벽을 바르고 장독을 덮는 데 쓰기도 했다”는 『광해군일기』의 기록이 이를 잘 말해준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617,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난상의 언해가 본문으로 들어오고 시와 찬이 생략되었으며, 그림은 장면 수가 줄어 단순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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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797년(정조 21)에는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해서 수정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가 간행되었다. 두 책을 묶었지만 효자의 사례에서 자식을 살해하려 한 곽거의 이야기와, 자식이 아비를 버리는 내용이 담긴 원각의 이야기[“원각경부(元覺警父)”]가 삭제되었다.

정조가 교화용으로 간행하게 한 불경 『부모은중경언해(父母恩重經諺解)』에서도 주인공이 눈알을 빼고 피부를 도려내는 등의 고행을 하는 부분을 삭제했음을 볼 때 정조는 신체 훼손이나 자식 살해, 부모 유기(고려장 풍속)와 같은 행위는 효를 위해서라지만 극단적이고 유교적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 내용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림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하나의 사례를 여러 장면으로 표현했던 이전의 다원적 구성 방식과 달리 가장 핵심적인 장면 하나만 그려 사실성과 예술성을 높였는데, 특히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라 하여 판화로서도 높이 평가받는다.

이처럼 『삼강행실도』는 원간본의 간행 이후 여러 형태로 국가가 앞장서서 널리 퍼뜨림으로써 조선 전반을 통틀어 가장 많이 출판되고 읽힌 책 중 하나가 되었다.

『오륜행실도』의 체제, 1797,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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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행실도』의 체제, 1797,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매 이야기의 첫 면에 그림이 실리고 이어서 한문 설명, 시, 언해가 차례로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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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행실도』에 실린 효자 ‘왕상’의 이야기, 1797,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가장 핵심적인 장면 하나만 그려 사실성과 예술성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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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허와 실을 드러내다

삼강의 확산과 유교사회의 정착을 위한 중요 수단으로 조선조 내내 적극 활용된 『삼강행실도』가 실제로 백성 교화에 끼친 영향은 어떠했을까? 그 유통과 보급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당시 출판문화와 서적 보급의 수준상 일반 백성이 이 책을 직접 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료에서 『삼강행실도』의 영향이 깃든 효와 열의 실제 사례들이 보이고, 문학이나 미술, 특히 판소리 소설이나 민화 등의 민중예술 작품들 속에 『삼강행실도』가 수용되는 양상을 보면 이 책이 여러 경로를 통해 사회에 확산되어 조선인들의 삶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삼강행실도』 보급에 남다른 열의를 보여 대규모 반사를 하기도 했던 중종은 전국적으로 효자와 열녀를 선정해 포상함으로써 그 실천을 직접 독려하기도 했는데, 1528년(중종 23)에 표창한 효자와 절부의 행적들을 보면 『삼강행실도』의 영향이 보인다. 이 가운데는 『삼강행실도』를 보고 손가락을 잘라 아비 병을 치유했다는 유학(儒學) 유인석과, 늘 『삼강행실도』를 외워 부모와 남편을 섬김에 있어 그 도리를 다했다는 진사 신명화의 아내 이씨(신사임당의 모친) 등 『삼강행실도』에 의한 교화의 사례들이 나타난다. 이밖에 단지, 할고를 한 효자들, 부모가 죽자 극진한 여묘살이를 한 효자들, 개가를 거부한 열녀들의 행적도 『삼강행실도』의 내용과 매우 흡사한바, 『삼강행실도』를 모범으로 삼아 효와 열을 행하고자 한 이들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로 가면 『삼강행실도』 속의 효자나 열녀가 문학작품 속에 인용되거나 미술작품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한다. 다음은 완판 『심청전』의 일부다.

심청이 엿자오한자, “왕상은 고빙한자고 어름 궁기셔 이어 엇고, 곽거라 한자난 사한자은 부모 반찬한자여 노으면 제 자식이 상머리에 먹는다고 산 한자 무드려 할 졔 금항을 어더다가 부모 봉양한자한자스니, 사친지요가 옛 사한자만 못한자나 지셩이면 감쳔이라 한자오니 공양미는 자연이 엇한자오리다.”

조선 후기 민중예술의 하나인 판소리 소설 속에 『삼강행실도』의 효자 왕상과 곽거의 행적이 인용된 것은 『삼강행실도』가 민중 속에 파급되고 수용된 직접적인 흔적이다. 『춘향전』을 비롯한 다른 소설에서도 『삼강행실도』 속 효자나 열녀들이 흔히 등장한다. 이러한 양상은 미술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 다른 민중예술인 민화에는 『삼강행실도』를 그대로 본뜨거나 이를 활용한 작품이 많이 나온다. 예컨대 조선 후기에 널리 유행한 문자도(文字圖)각주2) 가운데 효 문자도에는 잉어로 상징되는 왕상의 고사, 죽순으로 상징되는 맹종의 고사 등 『삼강행실도』의 사례들이 주로 활용되었다. 이들은 『삼강행실도』로 보급된 삼강이 관습화되고 대중적인 유교 윤리로 확립되었음을 보여준다.

「문자도」, 종이에 채색, 각 74.2×42.2cm , 18세기 후반, 삼성미술관 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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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삼강행실도』의 윤리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그 비합리성과 폭력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정약용은 「열부론」에서 아내가 천수를 누리고 편안하게 죽은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은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것일 뿐 의에 합당하지도 않고 천하에서 제일 흉한 일인데도 마을에 정표하고 부역도 면제해줌으로써 가장 흉한 일을 사모하도록 백성에게 권면하고 있다며 비판했고, 부모가 아무리 위독한 병에 걸렸다 해도 자식의 몸을 해쳐가면서까지 그 고기를 먹고 싶어할 리가 있겠는가 반문하면서 인육을 먹는 것은 어리석은 백성의 우견일 뿐이라고 했다.

남편 따라 죽어 열녀 되기, 신체 훼손하여 효자 되기 등 『삼강행실도』가 권면하는 삼강의 도리가 정도를 벗어나 잔혹하고 비합리적임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병자호란의 와중에서 남편, 아버지, 아들들의 손에 끌려 억지로 열녀가 되어 죽은 여성 원귀들의 하소연과 원망을 통해 ‘열녀’의 허상을 꼬집은 『강도몽유록』과 같은 소설도 나왔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적인 태도가 공식적인 문제 제기나 반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삼강행실도』의 삼강의 윤리는 공공의 권위를 띠고 조선사회에 강하게 파급되어 애초의 간행 의도대로 유교 가치관의 확립과 유교적 사회질서 구축에 크게 기여했다.

일본의 풍속화에 수용된 『삼강행실도』 ‘곽거’의 그림, 일본 고베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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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풍속화에 수용된 『삼강행실도』 ‘동영’의 그림, 일본 고베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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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는 조선의 유교화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정치·사상사적 의미 외에도 『삼강행실도』는 국어의 변화를 보여주는 국어사 자료로, 조선 회화 및 판화의 양상을 알려주는 회화사 자료로, 이밖에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생활·문화사 자료로 커다란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문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