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唐詞의 士大夫詞적 특징
김수희
김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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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 제기 2. ‘士大夫詞’의 개념 정의 3. 南唐詞의 주제와 내용상 특징 1) 사대부적 정취의 구가 : ‘閑情’ (1) 자연과 인간 사이의 거리 의식 (2) 春恨ㆍ別恨에서 ‘人生長恨’으로의 의미 확장 2) 사대부적 사상의 서술 : 忠君愛國 (1) 충성의 맹세와 寄託 (2) 망국의 한과 고국에의 그리움 4. 결론 |
1. 문제 제기
南唐詞는 花間詞와 더불어 唐五代 시기 文人詞를 대표한다. 화간사는 溫庭筠ㆍ韋莊을 대표로 하는 西蜀 출신의 작가들로서 南朝의 宮體詩를 이어받아 남녀 간의 사랑, 이별, 그리움을 아름답게 노래하여 ‘婉約’ 詞風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화간사에 대한 이런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북송 사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남당사였다. 북송사인들이 화간사보다 남당사를 선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北宋의 詞論家 李淸照의 견해를 한 번 살펴보자.
오대의 전쟁에 국토는 분할되고 문학 창작은 중도에 종식되었는데, 유독 강남의 이씨 군신들만은 文雅를 숭상했기 때문에 “작은 누대에서 한 곡을 다 불자 옥 생황이 싸늘하네”, “(바람이) 봄 연못물을 물결지게 하네” 라는 사가 나왔다. 말은 비록 매우 기이하였지만, 이른바 ‘망한 나라의 음악은 슬프고 감상적이다’ 라고 하겠다(五代干戈, 四海瓜分豆剖, 斯文道熄. 獨江南李氏君臣尙文雅, 故有“小樓吹徹玉笙寒”, “吹皺一池春水”之詞. 語雖奇甚, 所謂亡國之音哀以思者也)
이청조는 <浣溪沙>, <謁金門>같은 우수한 작품들이 나온 이유로 남당사인들이 文雅를 숭상한 점을 들고 있는데 여기서 ‘文雅’라는 말에 한 번 주의를 기울여보자.
근래의 吳雄和는 ‘尙文雅’로부터 남당 사인들의 교양과 예술적 소양이 높다는 역사적 사실을 지적하고, 남당사가 이런 예술적 분위기 속에서 창작되었기에 야(野)하고 거친 화간사에 비해 문(文)하고 세밀하다고 보았다. 이 견해는 人品과 詩品을 연관 지어 생각하는 동양적 사고방식의 일환으로서, 夏承燾가 화간사인과 남당사인의 신분의 차이를 지적하고 이를 그들의 문화 수준과 연관 지어 서술한 것보다 합리적인 견해라고 생각한다. 한편 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두 사람 모두 ‘尙文雅’를 남당사의 詞風과 연관 지은 후 화간사보다 높이 평가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文雅’한 사풍이 남당사의 어떤 면을 가리키는 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文雅’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려면 이청조의 사론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청조는 ‘尙文雅’의 상대적인 자리에 ‘鄭衛之聲’을 들었으며, 남당사가 문아해도 결국은 ‘亡國之音’이라고 하여 정치와 시를 연관 지어 생각하는 유가의 詩敎說을 드러내었다. 그녀가 비록 사의 ‘別是一家’설을 제기하여 사의 음악성을 강조하였지만, 그녀의 詞論은 여전히 송대 사대부의 전형적인 유가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文雅’의 의미는 유가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유가적인 관점에서 ‘文雅’를 풍격 용어로 분류한 이는 劉勰이다. 그는 ≪文心雕龍ㆍ體性≫에서 “고전적 우아함이란, 경서의 정신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유가들의 저작과 동일한 정신을 지향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로부터 ‘文雅’란 바로 사대부들의 사상ㆍ감정을 표현하여 체현된 풍격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대부계층의 보편적인 정감을 노래하는 것은 사실 詩의 내용과 주제이다. 시의 내용과 주제를 사에서 다룬다는 것은 사의 詩化, 雅化요, 士大夫化라고 할 수 있다. 북송의 사대부 문인들이 화간사보다 남당사를 선호한 까닭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또한 남당사의 이러한 변화는 詞史의 발전 방향과도 정확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남당사에 보이는 사대부사적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우선 ‘사대부사’의 의미를 고찰한 후 남당사의 주제와 내용에 보이는 사대부사적 특징을 사대부적 정취와 사상으로 양분하여 자세히 고찰해보고자 한다.
2. ‘士大夫詞’의 개념 정의
이청조가 남당사에 보이는 사대부적 특징을 ‘文雅’하다고 지적했다면, 王國維는 ‘士大夫詞’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좀 더 분명하게 남당사의 특징뿐만 아니라 詞史적 지위까지 규명해내었다. 왕국유가 ≪人間詞話≫에서 풍연사와 이욱에 대해 내린 평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풍연사의 사는 비록 오대의 풍격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으나, 그 규모가 특히 커서 북송의 기풍을 열었다. 중주ㆍ후주사와 더불어 모두 ≪화간≫의 범위를 뛰어넘었으므로 ≪화간집≫속에 한 글자도 수록되지 않은 것이 마땅하다.
사는 이욱에 이르러 시야가 비로소 커지고 감개가 드디어 깊어져서 마침내 악공의 사에서 사대부사로 변화하였다. 周濟가 그를 온정균ㆍ위장보다 낮게 평가한 것은 흑백을 전도시킨 것이라고 할 만하다. ‘본래 인생의 오랜 한은 길이 동쪽으로 흘러가는 강물인 것을’, ‘흐르는 물에 꽃 지며 봄이 가면 (다시 오기가) 하늘땅만큼 어려워라’ ≪금전집≫과 ≪완화집≫에 어찌 이 같은 기상이 있겠는가.
왕국유는 남당사의 큰 규모와 시야, 깊은 감개를 근거로 남당사가 북송의 기풍과 ‘사대부사’를 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사에서 규모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는 ‘화간의 범위 밖’이라는 말과 대비하여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葉嘉瑩의 견해를 살펴보면, 그녀는 화간사와의 비교를 통해 풍연사 사의 특징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그녀는 풍연사가 온정균처럼 여성 화자를 내세워 傷春惜別을 객관적으로 노래하면서도 자신의 情意를 썼으며, 자신의 情意를 쓰면서도 韋莊처럼 현실의 한 사건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그의 사가 聯想이 풍부하면서도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보았다. 사실 그녀가 주목한 것은 풍연사 사의 개인 서정과 보편화된 정감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또한, 사에서 커다란 시야와 깊은 감개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왕국유는 이욱의<烏夜啼>와 <浪淘沙令>을 예로 들었는데 이 작품들은 모두 이욱이 송나라에 귀의한 후에 지어진, 그의 후기사들이다. 그의 후기사가 ‘사대부사’라는 용어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후기사는 이욱 자신으로 보이는 시적화자를 내세워 망국의 설움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는데, 전기사와 비교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남성화자의 등장과 내용과 주제 방면의 참신함이다. 孫康宜는 ‘사대부사’라는 용어가 이욱 자신의 개인감정을 드러낸 것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데, 섭가영과 손강의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개인 서정’이라는 면에서 공통된다.
하지만 ‘개인 서정’은 남당사에서 처음 시도된 것이 아니다. 민간사는 이미 개인 서정의 도구로서 기능하였다. 민간사는 이별, 원망, 슬픔, 한가로움 등등 개인의 감정뿐만 아니라 은일, 의협, 용맹, 찬양, 도교, 불교, 학문과 효행 권장 등 당시의 사회현실까지 충실하게 반영해내고 있다. 민간사는 서정, 서사의 도구로서 문학의 사회에 대한 복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셈이다. 뒤이어 나온 중당 문인사도 개인의 감정을 노래하였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민간사가 민중의 감정을 노래한 반면, 중당 문인사는 士大夫의 감정을 노래했다는 점이다. 즉, 중당 문인사는 사대부의 자연, 여유, 자유를 지향하는 심정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당 문인사는 民歌나 絶句에 가까워 詞體를 완비했다고 볼 수 없다.
본격적인 문인사의 시작인 화간사는 민간사와 중당 문인사가 개인의 감정을 노래한 것과 달리, 詞를 應歌의 도구로 삼아 남녀 간의 애정을 아름답게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다. 사의 서정 화자도 1인칭 ‘나’가 아닌 3인칭 ‘그녀’가 대신하게 된다. 이런 ‘代言體’의 화간사 가운데 韋莊의 사는 溫庭筠이 이끄는 완약한 사풍과는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어서 끊임없이 ‘온정균과 위장 사의 비교’라는 논제를 제공해왔다. 확실히 그의 사는 다르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바로 남성 화자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의 <菩薩蠻> 5수를 살펴보면, ‘我’, ‘遊人’, ‘洛陽才子’ 등 1인칭 또는 남성 화자를 나타내는 말이 보이는데 이는 곧 위장 자신이다. 이는 화간사 이전의 개인 서정 전통을 회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의 사는 ‘직설적인’ 서정 방식을 채택하여 민간사적인 풍모를 지니고 있으므로 개인의 감정을 문인적인 창작기교를 운용하여 노래한 것은 아니었다. 그 내용 또한 개인 경험과 관련된 ‘鄕愁’나 ‘客愁’ 등으로 한정되어 있다.
종합해보면, 왕국유의 평어는 남당사의 ‘개인 서정’, ‘보편화된 정감과 깊어진 감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이 ‘사대부사’의 정의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개인 서정’이 돈황곡자사와 위장 사에 가려 빛이 바랬다면, ‘보편화된 정감과 깊어진 감개’는 남당사만의 사대부사적 특징으로 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보편화된 정감과 깊어진 감개’에 주안점을 두고 이런 점들이 남당사의 작품 속에서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지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3. 南唐詞의 주제와 내용상 특징
1) 사대부적 정취의 구가: ‘閑情’
온정균 사를 비롯한 화간사에는 ‘春恨’을 노래한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슬픔의 원인은 분명하다. 바로 님과의 이별, 님의 부재가 그 원인이다. 이런 작품들은 주로 ‘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봄 풍경 속의 슬픈 이별’이 그림처럼 펼쳐지며 슬픔은 아름답게 포장된다. 화간사에서 ‘봄’은 슬픔을 아름답게 포장하여 돋보이게 하는 그저 질 좋은 포장지에 불과할 뿐이다.
남당사에도 ‘春恨’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이 있다. 화간사와 달리 남당사는 슬픔의 원인이 분명하지 않고 애매하다. 슬픔의 직접 원인이 되는 님과의 이별, 님의 부재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은 채 슬픔 그 자체만을 노래하고 있다. 작품에서 ‘閑情’ㆍ‘閑愁’ㆍ‘新愁’ 등으로 표현되는 이 슬픔을 정확히 규명해내기 위해, 아래에서는 봄이 돌아오고 돌아감에 따라 (1) 인간과 자연간의 거리 의식, (2) 春恨ㆍ別恨에서 ‘人生長恨’으로의 의미 확장으로 나누어 남당사의 사대부적 면모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자연과 인간 사이의 거리 의식
봄을 배경으로 하는 문인사는 매우 많다. 그러나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계절의 ‘순환성’에 착안하여 그와 대비되는 인간의 유한성과 그로 인한 슬픔을 노래한 작품은 풍연사 사에 처음 보인다. 이욱 사에는 이른 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阮郞歸>(東風吹水日銜山), <虞美人>(風回小院庭蕪綠) 등 2수가 있는데 그 수량도 적고 자연의 순환성과 인간의 유한성 간의 대비도 뚜렷하지 않다. 따라서 봄의 순환성과 그와 대비되는 인간의 슬픔을 노래하는 구조는 풍연사 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서 ‘閑情’을 노래한 풍연사의 대표작 <鵲踏枝>(谁道闲情抛擲久)를 통해 자연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谁道闲情抛擲久. 누가 한정을 던져 버린 지 오래라고 말하는가.
每到春来, 해마다 봄은 오건만
惆怅还依舊. 서글픔 여전히 예전 같구나.
日日花前常病酒. 날마다 꽃 앞에서 늘 술병이 나지만
不辞镜裏朱颜瘦. 거울 속 젊은 얼굴 야위는 걸 사양하지 못하겠다.
河畔青蕪堤上柳. 강가의 푸른 초원과 제방의 버들에게
为问新愁, 묻노니 새로운 수심
何事年年有. 무슨 일로 해마다 생기는가?
独上小樓风满袖. 홀로 작은 누대에 서니 바람이 소매에 가득하고
平林新月人归後. 사람들 돌아간 후 넓은 숲에 초승달 떴구나.
논의에 앞서 우선 이 사의 화자에 대해 살펴보자. 이 사의 화자는 성별이 분명하지 않다. 여성일 수도 있고 남성일 수도 있다. 그냥 ‘나’일 수도 있다. 이렇게 여성성이 약화된 화자의 목소리는 이 작품의 서정 방식이 화간사의 代言體와는 다른 ‘개인 서정’의 방식으로 돌아섰음을 알려주며, 이는 남당사의 士大夫化를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한정의 정체와 그 원인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며, 한정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만을 노래하고 있다. 새봄이 오면 자연은 새로워지지만 한정은 새로워지지 않고 여전하다. 심지어 새로운 슬픔마저 생겨나서 그 크기는 확대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봄-자연-인간의 삼각 구도를 도출해낼 수 있는데, 자연이 봄에 순응한다면 인간은 봄과 대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대립적 구도에서 오는 단절감, 절망감에도 불구하고 봄을 맞는 화자의 태도는 분명하다. 즐기기[樂].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수척해지는 데도 불구하고 날마다 봄을 즐긴다는 4-5구는 순국자들의 충정과 희생정신이 느껴질 정도로 비장하다. 섭가영은 이 구절이 ‘沈鬱頓挫’한 수법과 창망한 정감을 운용하였는데 바로 이 점이 풍연사 사의 특징이라고 지적하였다.
봄을 대하는 비장한 각오로 끝맺은 상편에 뒤이어 하편에서는 봄이 오면 새로워지는 자연의 대표선수, 풀과 버들에게 묻는다. 해결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묻는 이 물음의 행위야말로 자연과 인간 사이의 좁혀질 수 없는 거리에 대한 인식이며 절망의 재확인인 셈이다. 대답 없는 물음의 끝에 오르는 누대(높은 곳) 또한 자연과 인간 사이의 단절감과 그로 인한 절망감을 인식하게 되는 공간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철저히 고립된다. ‘獨上’(‘獨依’)의 사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눈에 보이는 자연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적화자. 이 양자 대립 구도는 바람과 달빛에 의해 소통 가능하다. 바람, 달빛, 또는 안개. 이 사물들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경계에 속해서 자연물이면서도 인간에게 와 닿는다. 자연과 인간이라는 대립 구도를 벗어난 상황이라 해도 바람과 달빛, 또는 안개에 의해 이 대립 구도는 언제나 소환 가능한 상태가 된다. 풍연사 사에서 바람과 달빛, 또는 안개 등이 존재론적 비애를 환기하고 있는 예는 자주 보인다.
순환과 단절, 연속과 비연속, 영원과 순간 등의 언어로 대체될 수 있는 자연과 인간간의 관계는 그 닿을 수 없는 거리감으로 인해 비애를 수반하고, 이 비애로 인해 한정이 생겨난다. 즉, 이 ‘거리 의식’이야말로 한정이 생겨나는 원인이며, 이로부터 ‘閑情’이란 자연의 순환과 대비되는 인간의 유한성, 그로 인해 생겨나는 존재론적 비애를 가리키는 풍연사식 詞語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한정’을 노래한 풍연사 사는 기존 문인사에 비해 고차원적인 지위를 지니며, 이 점에서 풍연사 사는 화간사와 결별을 고하고 문아한 사대부의 세계로 성큼 들어서는 것이다.
(2) 春恨ㆍ別恨에서 ‘人生長恨’으로의 의미 확장
‘傷春惜別’이란 말처럼 봄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것은 이별과 깊은 관련이 있다. 화간사뿐만 아니라 남당사에도 상춘석별을 노래한 작품은 많은 수를 차지한다. 다만, 남당사에서는 상춘석별의 ‘春恨’과 ‘別恨’의 의미를 보다 확장시켜 인생의 비애까지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런 작품이 많지는 않지만 사 내용의 발전상 의미 있는 행보라고 하겠다.
다음은 春恨에서 別恨으로, 다시 人生長恨으로 한의 의미 확장이 두드러지게 표현된 李煜의 <烏夜啼>사이다.
林花谢了春红. 꽃나무가 붉은 봄꽃을 떠나보내는데
太匆匆. 너무나 급하구나.
常恨朝来寒重晚来风. 아침 되며 추워지고 저물며 바람 이는 것이 늘 한스러웠다.
胭脂淚, 연지 바른 이는 눈물짓고
流人醉, 떠도는 나그네는 취했는데
幾时重. 언제 다시 보려나.
自是人生长恨水长东. 본래 인생의 오랜 한은 길이 동쪽으로 흘러가는 강물인 것을.
이 사는 상편에서 春恨을 말하고 하편에서 別恨과 人生長恨을 말하는 구조로 이루어지는데, 자연 현상에서 인문 현상으로의 전이가 상하편의 分段과 잘 맞물려 있다. 꽃이 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이를 두고 시적 화자는 너무 ‘匆匆’하다고 느낀다. 이때부터 인간 감정의 색채가 덧입혀진다. 좀 더 보고 싶은 마음과 이를 방해하는 추위와 바람. 그런데 이 추위와 바람은 어느 한 시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기상 현상, 자연의 섭리를 대변한다. 따라서 시적 화자의 恨은 눈앞의 추위와 바람이 아닌, 확장된 의미의 자연의 섭리와 마주서게 된다. 이렇게 恨의 대상은 보편화되고 恨의 의미는 확장되는 것이다.
하편에서도 상편의 의미 구조가 되풀이되고 있다. 남녀의 이별은 별스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별을 재촉하는 뱃길이 항상 동쪽으로만 흘러간다는 설정은 이 뱃길이 甲과 乙의 눈앞에 놓인 특정한 뱃길이 아닌, 水理 현상으로서의 자연 섭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恨의 대상은 보편화되고 그 의미는 확장되는 것이다.
이 사는 상편의 의미 구조가 하편에서 되풀이되면서 상하편의 맥락이 끊기는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春紅’은 ‘胭脂’의 근거가 되고 비바람은 ‘淚’와 부합한다. ‘春紅着雨’는 ‘胭脂淚’이므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바 ‘聯想’인 것이다”라고 말한 유평백의 말처럼, 전체적으로 春恨에서 別恨으로, 別恨에서 人生長恨으로 이어지면서 그 의미가 확장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王國維가 이욱의 사를 평하면서 伶工의 사를 사대부의 사로 바꾸었다고 하였는데, 예로 든 작품이 바로 위의 작품이다. 아마도 이욱이 기존의 春恨, 別恨의 恨의 의미를 인생의 비애로까지 확장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2) 사대부적 사상의 도입: 忠君愛國
돈황곡자사가 충성의 맹세, 은일에의 추구 등 유가의 忠君愛國 사상을 다루고 있는 데 비해, 문인사는 晩唐ㆍ五代 시기를 거치면서 점차 艶情에 빠져들었고 이런 경향은 화간사에서 그 정점을 이루었다. 유가 사상은 더 이상 사의 주제가 되지 못하고 시의 전유물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개국 군주 李昪이 儒學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우고 뒤이은 中主 李璟과 後主 李煜에 의해 지속적으로 유가 문화를 숭상하고 지향해 온 남당에 이르러, ‘忠君愛國’을 노래한 작품들이 다시 창작되기 시작하였고, 유가적 도리를 노래하는 사의 전통은 다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재상인 풍연사는 충성의 맹세를, 군주인 이욱은 은일에의 추구, 망국의 한, 고국에의 그리움 등을 작품에 담아내었으므로, 다음에서 (1) 충성의 맹세와 寄託, (2) 망국의 한과 고국에의 그리움으로 나누어 忠君愛國을 노래한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충성의 맹세와 寄託
풍연사는 중주와 후주 두 임금을 섬긴 재상이었다. 비록 반대파와의 알력으로 몇 차례 재상을 그만두기는 하였으나 그의 충성심은 시종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충성심은 그의 인품 때문에 자주 의심 받았으며 그의 작품에는 比興이나 寄託이 있다는 평가가 있어 왔다. 다음은 중주 이경과 재상 풍연사 두 사람이 사를 통해 교유했음을 알려주는 유명한 일화인데 이를 두고 다른 견해들이 존재한다.
元宗(李璟)이 일찍이 馮延巳를 놀리며 “‘봄 연못물을 물결지게 하네(吹皺一池春水)’는 그대의 어떤 일을 가리키는가”라고 묻자, 풍연사는 “폐하의 ‘작은 누대에서 한 곡을 다 불고 나니 옥 생황이 차갑네(小樓吹徹玉笙寒)’만 못하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元宗이 기뻐하였다.
이 일화를 둘러싼 해석은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그들이 사를 통해 교유할 정도로 문아했다라고 한 李淸照의 말처럼 군신간의 아름다운 일화로 보는 견해이다. 明代 王世貞은 ≪藝苑巵言≫에서 ‘사단의 아름다운 일화(詞林佳話)’라고 칭찬하였으며, 근인 兪陛云은 ≪五代詞選釋≫에서 <謁金門> 詞句에 ‘관리로서의 기쁨(束帶彈冠之慶)’과 ‘충성을 다 바치려는 생각(效忠盡瘁之思)’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淸代 賀裳이 ≪皺水軒詞筌≫에서 ‘사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면 함축이 많다’라고 한 이래, 李佳는 ≪左庵詞話≫에서 ‘함축과 풍자(隱含譏諷)’가 느껴진다고 했으며 근인 劉永濟는 ≪唐五代兩宋詞簡析≫에서 ‘임금이 몸소 모든 일을 다스리고 재상은 자리만 갖추었다(人主躬親庶務, 宰相備位)’라는 史書의 말을 근거로 하여 풍연사 사에 풍자의 뜻이 있는데 중주가 이를 알아차리고 책문했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위의 논란을 일으키게 된 작품은 <谒金门>(風乍起)인데, 같은 사패의 작품으로 <谒金门>(聖明世), <谒金门>(楊柳陌)의 두 수가 더 있다. <谒金门>(風乍起)의 정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나머지 두 작품을 분석하고 감상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谒金门>(聖明世), <谒金门>(楊柳陌)의 분석과 감상을 통하여 <谒金门>(風乍起)의 해석의 여지를 마련하고자 한다.
먼저 <谒金门>(楊柳陌)을 살펴보도록 하자.
杨柳陌. 버드나무 길에
寶马嘶空無跡. 말울음 소리 나는데 휑하니 자취는 없구나.
新著荷衣人未识. 새로 입은 연잎 옷을 남들이 알지 못하는
年年江海客. 해마다 강해를 떠도는 나그네여라.
梦觉巫山春色. 꿈에서 무산의 봄기운을 느끼나니
醉眼花飞狼籍. 취한 눈에 꽃잎 어지러이 흩날리는 것이 보인다.
起舞不辞無氣力. 일어나 춤추는데 무기력한 것도 마다 않고
爱君吹玉笛. 그대를 사랑하여 옥피리를 부는구나.
이 사는 상하편의 묘사 대상이 다르다. 즉 상편에서는 떠나가는 나그네를, 하편에서는 여인의 夢境을 그리고 있다. 하편은 꿈이기에 취한 듯하고 무기력한 것으로 첫 글자 ‘夢’이 하편 전체의 시상을 이끌고 있다. 마지막 두 구에서 님을 위하여 춤을 추고 피리를 부는 여인의 행위에 대해 夏承燾는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라는 사대부 계층의 사상과 감정을 기탁했을 수도 있다고 보았는데, 그가 말한 사대부 계층의 사상과 감정이란 바로 유가적인 忠君愛國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이 사의 상편 제3구에서 연잎 옷을 입었다는 것은 ≪九歌ㆍ少司命≫에 나오는 표현으로, 자신의 미덕을 형상화한 것인데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 는 말을 덧붙인 것으로 보아, 이 나그네가 (유가적) 미덕을 지니고 있지만 (임금의) 인정을 받지 못한 존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谒金门>(聖明世)에서도 같은 표현이 있어서 주의를 요한다.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聖明世. 성명한 세상
独折一枝丹桂. 계수나무 붉은 가지를 홀로 꺾고서
学著荷衣还可喜. 연잎 옷 입는 걸 배웠으니 그래도 좋아할 만하구나.
春狂不啻□. 봄의 횡포는 □만이 아니다.
年少都来有幾. 젊은이들 모두 몇 명이나 왔는가.
自古闲愁無际. 예부터 閑愁는 끝이 없었다.
满盏劝君休惜醉. 술잔 채워 그대에게 취하는 걸 아쉬워 말라 권하누나.
願君千萬岁. 바라건대 그대는 천년만년 사시라.
이 사에는 屈原의 <離騷>식 비유가 있다. 시의 표면에서는 여성인 시적 화자-젊은 여인들-님의 삼각 구도가 있는데, 이를 <이소>식으로 풀이해보면 남성인 시적 화자-젊은이들-임금의 구조로 다시 읽을 수 있다. 계수나무 가지를 꺾어 장식하고 연잎 옷을 입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굴원이 <이소>에서 여러 가지 향초와 장신구로써 자신의 忠君愛國을 형상화한 점을 미루어 볼 때, 계수나무 가지와 연잎 옷은 시적화자의 충성심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獨’의 의미는 앞 작품의 ‘人未识’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데,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말에는 그들에 대한 비방이 느껴지지 않지만, ‘홀로’ ‘忠君’의 마음을 지닌다는 말에는 다분히 남에 대한 비방이 느껴진다. 나만 홀로 충성심을 지니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春狂’은 더욱 분명하게 비방의 의미를 드러낸다. 성명한 시대[임금]에 홀로 충성스러운 신하, 그 반대편에 ‘春狂’이 자리한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春狂’이 하편의 ‘年少’와 관련된다는 사실이다. 보통 청춘기를 인생의 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시적화자의 대립 구도에 있는 ‘春狂’은 젊은이들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시적화자가 홀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閑愁를 느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광기 어린 젊은이들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두 구에서는 다시 祝壽의 말로써 자신의 충성심을 기탁하고 있다.
이 작품은 역대 평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閑情’이 생기는 원인에 대해 정치적 해석의 가능성을 남겨주고 있으며, <이소>식의 비유법, 忠君愛國사상의 기탁 등 풍연사 사의 여러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자료라고 하겠다. 특히 기탁은 詞史상 주로 溫庭筠 사에서 논의되어 왔다.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온정균의 생애와 관련지어 작품 속에 그의 정치적 불우함이 기탁되어 있다는 견해인데, 온정균이 그의 정치적 불우함을 애매한 기법으로 기탁하였다면 풍연사는 忠君愛國의 유가 사상을 <이소>식의 비유를 통해 보다 분명하게 기탁하여 사의 내용 방면에 있어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사에서 본격적으로 유가적 사상과 감정을 노래하게 되는 시기는 마땅히 蘇軾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2) 망국의 한과 고국에의 그리움
남당사 가운데 망국의 한과 고국에의 그리움을 노래한 사인은 李煜이다. 그의 사 가운데 망국 이후에 쓰인, 이른바 후기사들은 이욱을 애국사인의 반열에 올려놓았지만 그의 후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욱의 愛國愛民 사상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나라를 잃고 힘들게 살아갈 신하와 백성들에 대한 군주로서의 염려와 근심은 찾아보기 힘든 대신에, 亡國에 대한 후회, 망국 이전 삶에 대한 미련과 고국강산에 대한 그리움 등 이욱 개인의 감정은 찾아볼 수 있다. 이른바 이욱 개인의 ‘뜻을 말하고 정감을 펴내는(言志述懷)’ 것으로서 사의 서정성을 회복시켰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망국의 한과 고국에의 그리움은 詩의 주제이지 사에서는 낯선 주제였다. 이로부터 이욱의 후기사가 사의 서정 방식과 내용 방면에 있어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아래 두 작품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망국 직후 남당을 떠나 송나라로 끌려가던 날을 회상하면서 지은 작품으로 알려진 <破陣子>를 보자.
四十年来家国, 40년 이어온 나라
三千里地山河. 3천 리 되는 강산.
凤閤龙楼连霄汉, 봉황 문과 용 누각들 은하수까지 이어지고
玉树瓊枝作烟萝. 아름다운 나뭇가지들 빽빽한 넝쿨이 되었다.
幾曾识干戈. 어찌 전쟁이 날 줄 알았으랴.
一旦归为臣虏, 하루아침에 포로가 되어 돌아가니
沈郞潘鬓銷磨, 고통스러워 沈約처럼 허리 살 빠지고 潘岳처럼 흰 머리 나누나.
最是仓皇辞庙日, 가장 황망한 일은 종묘사직 하직하는 날
教坊猶奏別離歌. 교방에선 여전히 이별가를 연주하는데
垂淚对宫娥. 눈물 흘리며 궁녀들을 대하는 것이었다.
이 사의 상편에서는 南唐의 역사와 영토를 數値化를 통해 개괄해내었는데, 두 구 안에 긴 세월과 광활한 영토를 간략하게 표현해내어 豪放한 기세가 느껴진다. 唐圭璋은 이 사의 상편이 기백이 沈雄하여 宋代의 豪放一派를 열었다고 평하고 있다. 뒤이어 건물과 정원을 통해 궁궐의 화려함을 뽐내다가 갑자기 기세를 꺾어 ‘전쟁이 날 줄 알았으랴’라고 反問한다. 하편에서 다시 ‘一日’이라는 숫자를 들어 身世의 변화가 급박했음을 보여주는데 상편의 반문과 조화를 이루면서 過片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
하편에서는 沈約과 潘岳의 고사를 써서 고통스러운 심정을 표현하였는데, 典故를 쓴 것은 이전의 사에서는 보기 힘든 경우로서 사의 詩化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세 구는 남당을 떠날 당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부분으로 이욱 특유의 眞情性이 돋보인다. 이런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蘇軾의 비난을 받게 되었지만, 사는 잃어버린 서정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서정 장르로서 당당히 宋代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이 사를 통해 이욱은 詩的인 주제와 호방한 기세, 급박한 전환 등 내용상 ‘豪放’함이라는 새로운 면모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진정어린 고백을 통해 사의 서정 방식의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다음에서 이욱이 宋 太宗의 사약을 받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虞美人>사를 살펴보도록 한다.
春花秋月何時了. 봄꽃과 가을 달은 언제 다하려나?
往事知多少. 지난 일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小樓昨夜又東風. 작은 누대에 어젯밤 또 봄바람 불었건만
故國不堪回首月明中. 달 밝을 때는 고국으로 감히 고개 돌리지 못하겠다.
雕闌玉砌依然在. 조각 난간과 옥섬돌은 여전하련만
只是朱顔改. 붉은 얼굴만은 바뀌었으리.
問君都有幾多愁. 그대에게 묻노니 얼마나 많은 근심이 있는가
恰是一江春水向東流. 마치 봄 강물이 동쪽으로 흐르는 것과 같구나.
이 사는 첫 구부터 의문구인데 둘째 구도 마찬가지이다. 두 구의 의미는 지난날에 대한 회한인데, 연속된 의문이 주는 인상만큼 그 의미 또한 침중하다. 또한 1ㆍ3구와 2ㆍ4구가 각각 자연과 人事로 대비되어 있다. 제1구의 春花와 秋月은 어느 한 해의 꽃과 달이 아니라 ‘봄가을마다’의 의미를 지닌다. 즉, 앞서 말한 자연의 순환성에 기초한 자연의 섭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에 비해 人事, 즉 지난일과 어젯밤의 일은 황제와 포로라는 신분의 격차가 큰 만큼 人生無常함을 드러내고 있다.
자연의 영속성과 인생의 무상함, 이 대비가 주는 존재론적 비애와, 고국에 대한 그리움마저 대놓고 드러낼 수 없는 처지에서 오는 슬픔은 서로 맞물리면서 그 깊이를 더하고 있다.
하편 1-2구는 이런 침중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때를 상상하면서 슬퍼하고 있다. 의문을 통한 감정의 분출, 현재와 미래의 슬픔에 대한 직접 서술 등 강한 자기 서정의 어조는 여기서 ‘問君’의 전환을 통해 한 걸음 늦춰지고 있는데, 거칠었던 호흡이 강물 비유를 거치면서 다시 안정을 되찾게 된다. 마지막 두 구는 전편의 침중한 분위기 속에서 잘 마무리된 감정과 참신한 비유를 통해 名句로 회자되고 있다. 이 사 또한 인생의 비애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새로운 내용과 자기 서정이라는 새로운 서정 방식으로 인해 士大夫詞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이욱 사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4. 결론
본고는 북송 사단이 화간사 대신 남당사를 높이 평가하고 계승한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이를 위해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이청조의 ‘문아’와 왕국유의 ‘사대부사’ 용어를 다시 살펴보았다. 중국학자들은 ‘문아’의 의미로부터 남당의 문화적 경향과 그들의 詞風을 연관 지어 해석하였는데, 본고에서는 이청조 사론의 유가적 성향을 제기하고 이로부터 ‘문아’의 의미가 유가적 의미, 즉 남당사의 사대부적 특징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았다. 왕국유의 ‘사대부사’ 용어에 대해서는 섭가영, 왕조붕, 손강의 등 최근 중국학자들의 견해로부터 왕국유가 남당사의 개인 서정과 주제와 내용상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였는데, 이중 개인 서정은 돈황곡자사와 중당 문인사, 위장 사에 이미 선보이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남당사의 주제와 내용상 특징에 주안점을 두어 논지를 전개하였다.
남당사의 주제와 내용상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본고에서는 사대부적 정취와 사상 방면으로 나누어 남당사의 몇몇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사대부적 정취, ‘閑情’은 풍연사 사에 많이 나타나는데 자연의 무한함과 인간의 유한함이라는 대비 속에서 생겨나는 인간의 존재론적 비애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부터 남당사의 悲哀가 남녀 간의 사랑타령에서 벗어나 좀 더 고차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기존의 春恨ㆍ別恨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인생의 비애를 노래하여 恨의 범주를 확장시키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사대부적 사상에서는 각각 풍연사 사에 보이는 충성의 맹세와 기탁, 이욱 사의 망국의 한과 고국에의 그리움으로 나누어 논지를 전개하였는데, 풍연사 사에 보이는 기탁과 이욱 사의 주제는 詩적인 것으로서 남당사의 詩化, 즉 士大夫化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것을 밝혔다.
이상에서 남당사의 사대부사적 특징을 고찰하였는데, 좀 더 많은 작품을 대상으로 고찰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앞으로의 과제는 본고에서 밝힌 사대부사적 특징을 보다 많은 자료를 통해 입증해내고, 본고에서 간략하게 다룬 기탁과 시적 예술 수법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논의를 진행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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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摘要】
本稿从‘北宋词人为什么比花间词更喜爱南唐词’的问题出发, 根据李请照的‘文雅’和王国维的‘士大夫詞’的述语试图解释这一问题。
首先说明‘文雅’ㆍ‘士大夫詞’的正確内涵。李请照是一位儒家的詞學理論家, 她说的文雅就是士大夫的思想感情所体现出来的風格, 与士大夫的特征有关。本文为阐明王國維‘士大夫詞’的正確意义收集了葉嘉瑩、孫康宜等諸家的意见。她们认为这两个述语都与个人抒情有关,然而敦煌曲子詞和韋莊詞都已经運用過这个手法,个人抒情不足为南唐词的特征。王国维说‘堂廡特大, 眼界始大, 感慨遂深’。这句话与南唐詞的內容和主題有關。南唐詞在內容和主题上抒情的对象更为普遍化、感情更为深化了。抒情对象的普遍化和感情的深化,这才是南唐詞的特征。本文着重南塘词的这一特征进行了議论。
從抒情的对象和感情的深化来看, 可以分出士大夫‘閑情’和士大夫思想的两个部分。‘閑情’以馮延巳詞为代表。他把自然的無限和人間的有限作對比,敍述了由此引起的存在論的悲哀。他打破了春恨ㆍ別恨的狭小范围, 謳歌了人生的悲哀。在南唐詞出現的士大夫思想是忠君愛國。馮延巳把他的忠誠寄託于詞, 而這种寄託是詩的手法并不是词的手法,这引起了詞的詩化ㆍ士大夫化。李煜也把他的亡國之恨和故國之情敍述于他的後期詞。這种内容和主题也是在词中较为罕见的。这也对詞的詩化ㆍ士大夫化助了一臂之力。
總上所述,不仅是個人抒情,抒情对象的普遍化和感情的深化,也是南唐詞的士大夫詞特徵。这就是北宋詞人比花间词更喜爱南唐詞的原因。
關鍵詞: 馮延巳, 李煜, 閑情, 寄託, 詩化, 士大夫化, 雅化, 士大夫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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